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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도비명을 더듬어 확인하던 나는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다음과 같은 문장에서였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도다(有來有歸不亡不違在後在前).” 과연 그러한가. 조광조의 영령을 찾아가는 신도에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있는가.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어차피 권력의 다툼은 힘을 가진 구세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신세력의 신구갈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구세력은 자신을 보수라 하고 신세력은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다.그러나 어차피 진보를 표방하는 신세력도 언젠가는 스스로 청산해야 할 낡은 구세력으로 전락해가는 것이니,조광조가 살았던 16세기보다도 더 심각한 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옵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조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조광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듯 조광조는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죽어서도 단애(斷崖)의 운명이었다.따라서 조광조의 무덤은 끊겨서 더 이상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차안(此岸)의 언덕인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1520년 봄,조광조의 시신을 심곡리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소달구지로써 용인으로 관을 옮겨와서 장례를 마치고 나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동쪽 서쪽으로는 세 번 두르고,남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한 번씩 둘러섰고,남북쪽에 둘레 밖으로 두 줄기의 무지개가 띠를 둘러놓은 듯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떴던 무덤주위로는 홍예(虹)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에 닿을 것같이 띠를 두르고 서 있었고,깎아내린 산기슭에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수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분명히 심곡리의 언덕이라고 표기된 기록과는 달리 조광조의 무덤은 급격한 경사를 이룬 비탈길 위에 마치 낭떠러지 위에 세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무덤들이 보였다.이곳 어딘가에 조광조의 선친이었던 조원강의 무덤도 있을 것이고,조광조의 차남이었던 용(容)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조광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장남 정(定)은 일찍 죽었고,둘째아들 용은 판관으로 있어 훗날 이퇴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비명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것이 행장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조광조의 선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조광조의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는 비교적 오래 살아 조광조가 죽은 지 38년 후에 이곳에 묻혀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조광조와 합장되었다.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 묘비도 사라져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폐한 무덤들만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올랐다.짧은 거리였지만 급경사였으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무덤 바로 앞에는 묘표(墓表)가 서있었다.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월일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푯돌은 당대문장가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솜씨였다.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으며,지함은 평생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인으로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 서울대 출신 45년 양복匠人 이순신씨

    가업(家業).사전적 의미는 대대로 물려받은 직업이란 뜻이다.세업(世業)이라고도 한다.선대의 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후대 입장에선 도박일 수 있다.후대의 적성과 가업의 계승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할아버지,아버지의 거대한 그늘에 눌려 평생 자리를 찾지 못하고 ‘짝퉁’으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청출어람(靑出於藍).’그렇게 호락호락한 사자성어가 아니다. 장인을 천하게 취급하는 분위기도 가업을 쉬 포기하게 하는 요소가 돼왔다.이런 탓에 유럽이나 일본처럼 수백년 전통의 장인 명가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했다.더군다나 장인이 추구하는 옛것이 성장의 가파름과 무관할 때 장인 명가의 생존율은 급격히 떨어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를 물려 고집스럽게 양복을 지어온 명문대 출신 재단사가 있다.서울 소공동 해창양복점 사장 이순신(68)씨.대학생이 귀했던 1950년대 명문 서울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그가 40여년 동안 한 길만 걸어온 사연은 무엇일까. ●75년의 궤적을 쌓은 해창양복점 “저쪽 길 건너 해창양복점이오.” 양복점이 운집한 소공동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을 물으면 재단사들은 입을 모아 해창을 가리킨다.경쟁자들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월의 누적이 해창을 믿게 만든다. 지난해 12월 해창은 롯데호텔 본점 지하아케이드인 롯데 일번가에서 소공동 양복점거리로 되돌아왔다.롯데백화점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자 다시 옛 둥지를 찾은 셈이다.1929년 부산에서 문을 처음 연 해창양복점은 우리나라 수제 양복의 산실이다.해창은 30년대는 서울 을지로4가에서,해방 전후에는 소공동,79년에는 롯데일번가로 자리를 바꿨지만 해창 특유의 브리티시 스타일 양복에는 변함이 없다. 해창의 창업자인 이씨의 아버지 이용수씨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제시대 당시 면서기로 근무를 하다 작은아버지가 있는 일본 고베로 향한다. 항구도시인 고베의 한 양복점에서 이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군복과 예복 등을 지으며 양복기술을 습득한다.그리고 23세에 귀국해 자신의 가게를 시작한다. ●은행 취직 대신 가업을 잇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했지만 이씨는 주저없이 아버지의 양복점을 첫 직장으로 택했다.살림집과 붙어 있던 양복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재단사로 진로를 정했다.주위의 시선을 고려하면 쉽지 않았을텐데,이씨는 “은행에 다니는 것보다 옷을 만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서”라며 선택이유를 평범하게 밝혔다.의외로 아버지도 아들을 이해하고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이씨는 이미 고교 2학년때 수를 놓아 교복의 명찰을 만드는 방식을 처음 고안해낼 정도로 감각을 타고 났다. 당시 상과대학 학장이던 은사는 “상대생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면서 그의 장래를 걱정했지만 1년 뒤 제자를 다시 만났을 때는 잘 선택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동창들 가운데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친구들은 많아요.하지만 그들만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죠.나도 내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가지고 성공한 셈입니다.” 적성을 찾은 이씨는 지난 1959년부터 고객의 몸치수를 재고 직접 재단을 했다.1970년에는 노동부 주관의 양복재단 1급 기능사 자격증도 거머쥐었다.옷을 짓는 일뿐만 아니라 국내외 양복관련 단체에서도 맹활약했다.70∼80년대에는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지난해까지 4년 동안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 전세계 20여개국 양복제작자들의 단체인 세계주문복업자연맹에서 회장으로 활동했다. ●꼼꼼한 이병철,소탈한 정주영 해창의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해창을 거쳐간 단골 명사들도 적지 않다.웬만큼 멋을 찾는 사람들은 옷의 맛을 찾아 해창의 문턱을 넘는다. “제일모직에서 복지를 새로 만들면 인근 양복점에서 고 이병철씨의 옷을 시범으로 만들었습니다.지금은 고급 복지로 평가받지만 초창기에는 물에 적시면 사용한 실의 수축정도가 달라서 복지가 울었어요.” 옷이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 단골인 이병철씨와 정주영씨의 취향도 제각각이었다.이병철씨는 권위적인 느낌의 옷을 좋아하며 옷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으며 정주영씨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양복을 즐겨 입었다.해창의 단골손님으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씨,화신백화점의 박흥식씨,한국일보의 장기영씨 등이 있다. “젊은 시절 음식점 국일관에서 일했던 이기붕씨는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척 세심한 사람이었어요.옷을 가지고 가면 옷상자까지 되돌려주고 상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옷값은 즉시 지불했죠.” 풍채가 좋았던 한국일보 창업자인 장기영씨는 검정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다.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시절 숯다리미는 불의 강도 조절이 어려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옷에 흠을 냈던 일화도 있었다. ●“사람의 개성과 옷이 조화를 이뤄야” 40여년 동안 쌓은 이씨의 옷 철학은 비싼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란다.옷은 입는 사람의 개성과 품위,지위와 함께 조화를 이뤄야 제값을 한다고 말한다. “옷은 사람에게 제2의 피부로 감정표현이 가능합니다.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품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 인상이 좋게 보이고 호감도 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점차 사양길에 접어든 맞춤 양복에 대한 아쉬움은 떨칠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해창은 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 1제품 생산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도 양복 한벌을 짓는데 1주일여가 소요된다.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제대로 된 옷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산을 많이 하면 품질을 조정하기 힘들죠.수량이 많아지면 사람의 개성이나 취향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어요.” 옷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은 역시 후학 양성으로 귀결된다.이씨의 아들도 불투명한 맞춤복의 미래 탓에 기성복 수출 쪽에서 일하고 있다. “협회 차원에서 대학에 양복재단 관련 학과를 세우려고 하는데 이를 하겠다는 학교재단이 거의 없어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10년이나 소요되는 재단사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관련 학과라도 만들어야 맞춤양복의 명맥을 잇지 않을까요.” ■프로필 ▲1936년 1월 8일 서울 출생 ▲1955년 2월 서울고등학교 졸업 ▲1959년 2월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59년∼현재 해창양복점 경영 ▲1966년∼현재 세계주문복업자연맹 한국대표 ▲1976∼1986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 ▲1984년 9월 제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양복심사장 ▲1984년∼현재 서울대 총동창회 이사 ▲1991∼1999년 세계주문복업자연맹 부회장 ▲1997∼2003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1999∼2003년 세계주문복업자연맹 회장 ▲2003∼현재 세계주문복업자연맹 명예회장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 [횡단보도 이전 반대 수요시장 상인들] 노춘호 상인연합회 총무

    “왜 서울시가 횡단보도를 도둑질하려고 합니까.반드시 지킬 겁니다.” ‘수유시장 상인연합회’ 총무 노춘호(41)씨는 “요즘 횡단보도 이전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노씨는 오는 7월 버스중앙차로제가 실시돼 시장 앞에 있는 횡단보도가 없어지면 16년 동안 운영해온 속옷가게의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노씨는 서울시가 상인과 시장을 자주 찾는 주민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횡단보도 이전을 추진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그는 “횡단보도는 우리 생존권과 직결된다.”면서 “300여명의 상인이 모두 떠나야 할 판에 25년이나 된 횡단보도를 갑자기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노씨가 수유시장에 정착한 것은 지난 88년.결혼을 한 뒤 작은아버지가 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다.몇 년 동안은 장사가 잘 됐지만 지난 94년 큰 위기를 맞았다.노씨는 “건물 주인이 갑자기 건물을 팔면서 나가라고 해 이사비용도 못 받고 쫓겨났다.”면서 “기왕 하던 일이라 돈을 빌려서 다시 가게를 구해 장사를 계속했다.”고 말했다.겨우 이자를 갚으면서 빠듯하게 생계를 유지하던 중 IMF한파가 들이닥쳤다.그는 “매출이 갑자기 감소하는 바람에 돈을 빌려서 적자를 메우고 매월 수백만원씩 이자를 내는 악순환 끝에 이제 겨우 빚을 다 갚았는데 이번에는 횡단보도 이전이라니….”라며 허탈해했다. 그는 횡단보도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그는 “초등학교 6학년 큰딸,4학년 작은딸,1학년 막내아들을 이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키워왔다.”면서 “이곳을 떠나면 어디 가서 자리를 잡고 단골들을 다시 끌어들여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씨는 “일단 서울시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만일 횡단보도를 이전한다고 결정하면 텐트라도 치고 결사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
  •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히…”/경희의료원 장례식장 장학회 ‘작은사랑 좋은 이웃’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2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의 경희의료원 장례식장 지하 빈소.지병을 앓다 끝내 숨을 거둔 아버지의 빈소에서 박모(18·D고 3학년)양이 말없이 눈물만 삼키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여읜 박양은 고교를 갓 졸업한 두 언니와 당장 먹고 사는 일도 어려운 처지였다.장례식 비용이나 앞으로 낼 학비를 생각하면 눈앞이 막막했다.중장비 기사인 작은아버지도 형편이 좋지 않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박양의 딱한 처지를 알아본 곳은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의 협력업체가 만든 ‘작은사랑 좋은이웃’이라는 장학회.이들은 박양의 사연을 전해 듣고 장학금으로 50만원을 건넸고 지난달까지 100만원을 더 내놓았다(사진). 장학회는 지난 2001년 3월 장례식장의 이일연(61) 운영실장이 제안해 결성됐다.조금씩 보태 이웃을 돕자는 이 실장의 제안에 꽃·사진·영구차 등 장례식장에 물품을 납품하는 업체 10군데가 흔쾌히 승낙했다.형편에 따라 한 달에 3만∼5만원씩 기본 회비를 내는데 선뜻 50만원을 내는 경우도 있다.모은 돈은 분기마다 중·고교생에게 장학금으로 30만∼50만원씩 전달한다.지금까지 7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이 중 3명은 이미 학교를 졸업했다.최근에는 고아원인 ‘성모자애복지원’에도 성금을 보내고 있다. 장학회는 단순히 돈을 내는데 그치지 않는다.한번은 팔순 노모가 숨졌는데 실직자인 두 아들이 “빈소 사용료가 없어 집에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이 실장은 “지하 단칸방에서 시신을 모신다니 안타까웠다.”면서 “대학 총장과 병원장 등을 찾아 다니며 75만원을 걷은 뒤 장례비용으로 쓰도록 했다.”고 말했다. 연고도 없이 거리에서 숨진 60대 노인의 장례식 때도 장학회가 나섰다.수첩을 뒤져 호적에도 오르지 않은 ‘버려진 딸’에게 연락을 했다.뒤늦게 달려온 딸은 “가난해서 장례비용을 30만원밖에 못 가져왔다.”며 통곡해 장학회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이때 딸이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빼고 25만원으로 장례를 치르게 도운 것도 장학회였다. 장학회의 임준(53) 회장은 “남에게 자랑할 정도로 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쑥스럽다.”면서 “이웃에게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박지연기자 anne02@
  • [나의 건강보감]시 쓰는 수녀 이해인

    ●민들레의 영토 “세상에 사랑보다 더 좋은 보약이 어딨겠어요? 사랑이라는 게 퍼내도 퍼내도 더 쓰일 곳이 있고,또 그것에 목마른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처럼 종신서원을 거쳐 몸과 마음을 하느님의 도구로 바친 사람도 새삼 건강하게 제 몸을 가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하느님의 종으로서 할 일이 많잖아요?” 비 갠 그의 ‘민들레의 영토’엔 마알간 풀냄새가 가득했다.장마속 먹구름을 비집고 모처럼 햇살이 드러난 부산 광안리의 베네딕도 수녀회.그곳에서 클라우디아 수녀로 불리는,사람들이 ‘시쓰는 수녀 이해인’으로 기억하는 그를 만났다. 수녀회의 ‘해인글방’,유치원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서재의 탁자 위에는 반듯하게 귀를 맞춰 자른 수수떡과 정원의 장미잎을 말려 띄운 녹차가 편안하게 길손을 맞았다.그는 무척 바지런했다.차를 끓이고,오래된 사진첩을 펼치고,전화를 당겨 받는 일을 모두 손수했다.모르는 이들은 “수녀님은 맨날 곱게 차려입고 시만 쓰나봐.”라고 여기기 쉽지만 공동체생활을 하는 수녀에게 노동은 어길 수 없는 계율.베네딕도 수녀회의 태두인 베네딕도 성인의 ‘기도하고 일하라.’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킨다.이해인 수녀도 설거지는 물론 채마밭을 일구는 거친 흙일까지 하며 묵묵히 구도(求道)의 길을 간다.지난 76년 종신서원식을 거쳤으니 올해로 27년,소녀 같은 그도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해 올해 벌써 쉰 여덟,문학 친구인 소설가 최인호씨와 동갑내기다. ●내 몸이 결코 나의 몸이 아니니 그는 “따로 챙기지는 않지만 아직 건강을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규칙과 금욕의 수도원 생활에서 얻어지는 은총 같은 보상일지도 모른다.지금도 밤 11시면 잠자리에 들어 오전 5시15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한다.“수도생활도 건강이 중요해요.그래서 수녀가 되려는 이들의 정신과 몸의 건강을 따지는 거죠.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건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수녀나 수사들 가운데는 일부러 고통과 맞서거나,몸이 아파도 치료를 기피해 병을 키우는 안타까운 경우가 더러 있다.참고 견디는 금욕생활을 미덕으로 여기는 까닭이다.지고지선한 구도자의 이상을 세속의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겠으나 ‘나는 하느님의 종이므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는 가치는 중요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라고 했다.수녀가 된 이래 딱 세번 병원 신세를 졌는데,그것도 화상 같은 돌발성 부상이나 의사장티푸스가 고작이었다.“올해 아흔 한살 나신 어머니와 80대의 고모,작은아버지도 아직 정정하세요.그러나 내림이라는 것도 가만히 앉아서 받는 게 아니라 후대가 가꾸고 일궈서 가능한 것이라고 봐요.수녀인 저는 절제나 규칙이 몸에 배어 건강의 내림을 잘 가꾸는 셈이지요.” 사람의 몸을 우주에 견주는 그는 “사람이 자연과 다를 게 없다.”면서 소설가 김형경의 이런 글귀를 소개했다.‘자연의 이치에 맞춰 살라.계절도,밤낮도 없이 몸을 함부로 움직여 병을 얻은 사람이 많다.여름 게으름뱅이,겨울 부지런쟁이도 병을 얻는다.사람이 나무처럼,물처럼 순응하면서 살면 무슨 병고를 겪겠는가.’ ●먼저 영혼의 건강을 살펴라그러나 몸건강의 내력보다 그를 더욱 그답게 하는 것은 민들레처럼 영혼의 소리를 퍼뜨리는 그의 시심(詩心)이다.박두진씨는 생전에 “그에게 있어 시는 찬양이며 영혼의 법열 혹은 그 아픔의 고백이며 그 모두를 바로 신에게,그리스도에게,영원한 구원의 주에게,하느님에게 바치는 눈물이요 무릎꿇음”이라고 했다.이런 시를 쓰는 그의 영혼은 얼마나 맑고 또 푸를 것인가.“왜요.저도 가끔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고 미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긴 해요.그러나 이내 그런 마음을 털어내지요.주변의 허물이나 죄를 보듬지 못하면서 어떻게 내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어요?” 그도 원래는 꽁하고 새침한 성격이었다.‘활달하고 밝다.’는 주변의 평가는 수도생활 이후에 얻어진 것.그의 옛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를 만나면 열에 예닐곱은 “너 개그맨 다 됐다.”고 농을 건넨다.“그땐 그렇게 대답해요.도를 닦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 “한걸음 비켜서 세상을 보면 겉은 번지르르한데 주리고 고달픈 사람들이 참 많아요.옛날보다 물질은 풍요로운데영혼은 자꾸 메말라드는 것이죠.옛 선인들은 마음공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요즘 사람들 그런 거 관심없잖아요? 말초적인 것만 찾고,향락적이고,즉흥적이고… 심지어는 수도자인 제 컴퓨터에도 음란 스팸메일이 쏟아져 들어오는 세상인데….” 세상 일에 걱정이 많은 그는 지금을 ‘정신적 황폐기’라고 진단했다.“그런 속에서도 더러는 선하고 순결한 삶을 갈망하지만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그게 현대인의 이중성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사람들이 아주 잠시,잠깐씩이라도 기도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방탕과 탐닉의 귀결은 결국 ‘미운 자신’일 거예요.이미 누구에게도 나는 중요한 존재가 아닌 세상,그런 세상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고독하겠어요? 그게 세상의 탓이기도 하지만,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봐요.지금이라도 자신의 것을 덜어 이웃과 나누는 ‘사랑의 삶’을 권합니다.사랑도 감상이나 낭만이 아니라 의지거든요.사랑,정말 건강한 정신이에요.”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의 세태 속에서 희망을 본다고 했다.“겉으론 황량한데도 마더 데레사나 틱낫한 스님 등 구도자들의 책을 많이들 찾잖아요.그게 사람들이 선한 일,옳은 길을 생각한다는 증거라고 봐요.제가 시를 쓰는 것도 그런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고요.” ●나의 시는 곧 기도이니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실려 청소년들까지 애송하는 그의 시편들이지만 그 시를 보는 생각은 뜻밖에 간결했다.“이를테면 시는 제 기도입니다.모든 앓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치유와 위로,희망이기를 바라면서 적는 내 시가 정말 그들에게 ‘나의 노래’로 다가갔으면 해요.” 지난 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펴낸 이후 지금까지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순결의 상징으로 각인돼 왔다.스스로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구도자의 아주 작은 목소리”라는 그는 “사람들이 제 글에서 신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기를 바랄 뿐”이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기도의 건강론 최근에 그가 조카이자 프리랜서 번역가인 이진씨와 공동번역한 아일랜드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의 잠언집 ‘영혼의 정원’이 화제가 됐다.그는 마더 데레사의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소개하며 기도의 건강론을 말했다.“특정 종교에 관계없이 행하는 기도의 명상효과,긴장 완화와 심리적 안정성이 의학적으로 입증되고 있으며,본태적으로 인간의 몸이 기도를 좋아한다고들 해요.단,기도에는 꼭 사랑을 담아 주셔야 해요.” 수도원 분위기는 규율 속에서도 의외로 즐겁고 명랑하다.얼마 전 성베네딕도축일에는 200여명의 수녀들이 함께 춤추고 노래도 불렀다.오랜 구도의 삶에서 오는 타성과 나태를 채찍질하는 나름의 처방이기도 하다. 그는 요즘 명상음악을 들으며 체조를 하거나 발마사지를 하곤 한다.딱히 몸이 이상한 건 없지만 곧 병원을 찾아 검진도 한번 받아볼 요량이다. 수녀가 된 뒤 섭생도 많이 바뀌었다.어려서는 음식을 두고 깨작거리기 일쑤였으나 필리핀 유학시절 음식 때문에 적잖은 고생을 한 뒤 편식 버릇을 고쳤다.“그 후론 김치 한가지에도 황홀해 할 만큼 뭐든 잘 먹어요.마치 사람 골라 사귀는 것 같은 편식버릇을 고치고 나니 덩달아 성격도 둥글어지더라고요.” 식성은 토속적이다.고추장을 무척 즐긴다.상추쌈과 두부부침,김,멸치볶음,냄비우동 등 우리식이면 뭐든 잘 먹는다.한때는 커피도 무척 좋아했으나 “커피 마시면 좋은 시가 안 나올 것”이라는 법정스님의 충고를 들은 뒤부터 녹차를 주로 마신다. 그의 책상 위에는 주황과 초록,파랑의 색연필 세 자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가 기도로,시로,묵상으로 더디더디 무채색의 세상 한편을 색칠해 가는,닳아빠진 몽당색연필. 부산 글 심재억기자 jeshim@ 부산 사진 왕상관기자 skwang@
  • 아직도 출전하냐고요? 항상 목표는 우승이죠 / ‘최고참 현역’ 여자프로골프협회 한명현 부회장

    그는 씩씩하다.한 때는 군인이 멋있어 보여 여군이 될 생각도 했다.한명현(49·동아회원권)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부회장. 그는 최고참 현역이다.지난 78년 국내 1세대 여자프로골퍼가 된 그는 지금도 대회 때마다 선수로 모습을 드러낸다.올해도 지금까지 치러진 5개 대회에 모두 출전했다.같은 해 프로가 된 4명 가운데 구옥희(47)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강춘자(47) KLPGA 부회장은 일찌감치 은퇴했고,안종현은 지난 1981년 고인이 돼 유일한 현역이다. ●국내서 활동하는 유일한 여자 1세대골퍼 어쨌든 새까만 후배들과의 경쟁도 마다 않는 용기는 씩씩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그 씩씩함은 골퍼가 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골프에 입문할 때를 되돌아보는 그의 표정에도 씩씩함이 묻어난다. 그가 처음 ‘골프’라는 용어를 접한 건 여고시절이었다.당시 학교 부근에 건설된 안양CC에서 간혹 경기 보조원이 모자란다면서 아르바이트 할 학생들을 구해 가곤 했다.먼저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친구는 그에게 ‘골프 얘기’를 해줬다. 처음 듣는 골프경기 방식에 흥미를 느낀 그는 직접 보고 싶었다.어느날 자신도 친구를 따라 안양CC로 향했다.물론 경기 보조를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같이 간 학생들이 많았던 탓에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아 헛물만 켠채 되돌아 왔다. 기회는 한동안 다시 오지 않았고 호기심도 사그라들 무렵,마침 군인이던 작은아버지를 따라 골프연습장에 갈 기회가 생겼다.연습장에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장비가 아니라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한 여자였다. “아,여자들도 골프를 하는구나.”이 때 머리 속에 각인된 모습은 그후 그의 인생의 목표가 됐다. “여고를 졸업하지 마자 무조건 안양CC로 갔죠.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이곳에서 일만 하게 해 달라고.골프를 하려면 골프가 어떤 건지 가까이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죠.”그래서 맡은 일이 캐디마스터 보조일을 하는 촉탁사원이었다. 그는 행복했다.가까이서 지켜본 대로 연습도 했다.클럽이 아니라 빗자루나 대막대가 연습기구였다. ●74년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 골프 입문 그렇게 1년 가까이 보내고 있던 74년말 어느 날,안양CC의 소유주인 고 이병철 삼성회장과 직접 만날 기회를 잡은 그는 “골프선수가 되고 싶어 여기 입사를 했는데,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돼 말씀드린다.”며 자신을 골프선수로 키워달라고 호소했다. 어떻게 됐을까.“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어요.근데 이 회장님은 ‘자네같은 사람 10명만 모아 오면 골프선수가 되게 해주겠네.’라며 뜻밖에도 제 제안을 받아주신 거예요.” 그는 물론 10명을 모았다.그리고 곧 골프장들 사이에서는 안양CC에서 여자골퍼를 키운다는 소문이 퍼졌고,모두 이를 따라 했다. “아마 한국 여자골프의 탄생에 제가 기여한 게 많을 거예요.” 고 이 회장의 지원으로 본격적으로 골프연습을 하게 됐지만 그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그의 생각은 ‘여자프로골퍼’가 되고 싶다는데까지 이르렀다.그래서 찾아간 곳이 남자프로골프협회(KPGA)였다. “당시는 남자만 프로가 있고 여자는 아예 프로라는 말이 없을 때죠.무조건 찾아가서 여자들도 프로테스트를 받게 해달라고 졸랐죠.여러 골프장에서 훈련하고 있는 여자선수들이 모두 달려갔어요.” 이번에도 역시 그는 뜻을 이룬다.당시 KPGA의 박명출 회장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78년 5월,드디어 여자들도 프로테스트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게 그를 포함한 여자프로골퍼 1세대 4명이다.그들의 뒤를 이어 같은 해 8월 또 다른 4명의 여자선수가 프로에 입문하는 등 계속 회원들도 늘어났다.하지만 대회가 없었다.프로선수라면 대회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할 것 아닌가. 그 방안 역시 이들의 프로입문에 도움을 준 박명출 회장이 내 놓았다.남자 대회 상금의 일정부분을 떼 여자선수들의 상금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그야말로 궁여지책이었다. “남자 프로들한테 미움도 많이 받았어요.남자들도 1년에 3∼4차례 밖에 대회를 치르지 못할 땐데 오죽했겠어요.” 물론 여자프로들도 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그는 83년 일본여자프로골프로 눈을 돌렸다.구옥희보다 먼저 라이선스를 땄다.이후 5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약하다 89년 KLPGA가 창설되면서 국내에 눌러앉았다. ●“프로생활 25년, 아직도 스윙교정 합니다”어렵게 창설된 KLPGA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는 계속 대회에 출전한다.부회장으로서 대회 유치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지만 후배들을 자극하는 촉매제로 그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미여자프로골프(LPGA)에서 한국을 빛내는 박세리(CJ) 김미현(KTF) 등도 그를 보며 배우고 자랐다. 그는 지금 스윙을 교정 중이다.최근 3년간 손목 부상과 자동차 사고의 여파로 자세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효과도 나타나고 있다.올시즌 출전한 5개 대회 가운데 초기 4개 대회에선 모두 컷오프됐지만 지난달 말 치러진 파라다이스오픈에선 당당히 48위를 차지했다. 동아회원권과 스폰서 계약도 했다.잘나가는 신예 골퍼들도 어지간해선 스폰서가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치를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아직도 대회에 출전하느냐.”고 묻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는 그의 목표는 여전히 우승이다. 곽영완기자 kwyoung@
  • 5차 이산상봉단 이태석씨/ 이젠 큰소리로 맘껏 불러 볼겁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큰소리로 한번 불러 볼랍니다.” 추석 전에 있을 예정인 제5차 이산가족 금강산 순차 상봉자로 확정된 이태석(52·경북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씨는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기탁(77·평남 숙천군 숙천읍)씨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제3차 이산가족 생사확인 절차에서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최종 상봉자 명단에는 번번이 탈락해 이번 상봉이 더욱 기다려진다고 한다. 아버지 이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곧바로 입대한 것이 가족과는 마지막이었다.대구에서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뒤 소식이 끊겼고 전쟁이 끝날 무렵 전사한 것으로 가족에게 통보됐다. 50년 동안 아버지 제사를 지내왔던 이씨는 “처음 아버지가 북에 생존,가정까지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혼자 고생한 어머니 생각에 원망스럽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이제 그런 마음은 모두 없어지고 하루빨리 만나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한번 불러보는 것이 소원이었지요.학창시절 아버지는 리더십 있고 공부도 잘했다고들었다.”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15세 때 결혼해 4년만에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유복자인 이씨를 혼자 키운 어머니 조금래(73)씨도 “북한에서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데 …”라고 말하면서도 “이번에는 정말 만날 수 있느냐.”고 되물어 남편과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줬다. 조씨는 “52년 동안 혼자 살면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한없이 쌓여 있지만 만나서 이야기하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조씨는 “생존 사실을 안 뒤부터 이산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이 아팠다.”면서 “남편에게 ‘고생했다.’는 한마디는 듣고 싶다.”고 밝혔다. 이씨 가족은 이씨와 어머니 조씨,작은아버지와 고모 등 5명이 상봉단에 포함된다. 성주 한찬규기자 cghan@kdaily.co
  • [2002 길섶에서] 삶은 달걀

    어릴 적 제상(祭床)에 올라온 삶은 달걀은 언제고 나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다음에 장남인 형님,그리고 남는 것이 있어도 막무가내인 동생에게 양보할 수밖에.톱날 모양으로 가운데를 잘라 놓은삶은 달걀,흰자위 테두리 속의 샛노란 노른자위가 어찌나맛있어 보였던지…. 그 때 억울했던 기억이 작용한 탓일까.성인이 돼서도 도시락을 열면 맨 먼저 삶은 달걀에 젖가락이 가고,그것도 모자라 옆 사람 것까지 집어다 먹는 버릇이 생겼는데,나의 이점잖지 못한 버릇은 이정록 시인의 ‘달맞이 꽃’이 고쳐주었다. “마루에 걸터 앉아 알 껍질을 벗긴다.노른자가 한 가운데있질 않다. 삶기 전까지 끊임 없이 꿈틀거린 까닭이다.물이끓어 오르자 껍질 가까이로 몸을 밀어 붙인 보이지 않는 발가락과 날갯죽지 그 힘줄과 핏빛 눈망울과 ….” 내가 침을 꼴깍 삼키는 삶은 달걀에서 보이지 않는 발가락과 날갯죽지의 발버둥을 보는 시인의 눈이 부럽다. 김재성 논설위원
  •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목재가구 조석진씨

    명장이 만든 목재가구에는 혼이 담겨 있다.대를 이어 써도 화려한 나뭇결이 살아 움직이면서 탄탄함을 잃지 않는 전통 목재가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시대가 변해 전통가구를 찾는 사람이 적어졌지만 아직도우리의 짜맞춤 가구를 만들기 위해 외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국가 명장 10호,전북 무형문화재 19호인 조석진(趙錫珍·49·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씨.조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3살때 고인이 된 작은아버지 밑에서 대패질을 배우기 시작했다.그후 36년간을 줄곧 나무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왔다.손에는 굳은살이 박히고 끼니를 거르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옹고집은 그를 국제무대에서도알아주는 가구쟁이로 만들었다. 전북과 전국단위 기능경기대회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스페인 국제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쥠으로써자신의 솜씨는 물론 한국 전통가구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조씨는 가구를 만들기 위해 고사목을 찾는다.자연상태에서 죽어 진이 빠진 나무를 음지에서 2∼3년 더 건조시킨 후재단을 한다.때문에 그가 만든 전통가구는 뒤틀림이나 쪼개짐이 거의 없다. 대패질·먹금·가공·조립·상감·맞춤작업을 함에 있어서는 아무리 작은 작품이라도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한다.못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짜맞춤 공법이다. 괴목과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경대,삼층장,머릿장,반닫이,좌경대,찻상 등은 보는 이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낸다.특히흑단상감 좌경대와 그가 재현한 전주 문갑장은 예술의 경지를 넘어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느끼게 해준다.이같은 노력으로 조씨는 국제 공인을 받아 동탑산업훈장,국무총리표창,자랑스런 신한국인 등 수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전국 기능경기대회 심사장,국제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려움은 있다.기술을 전수받으려는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이다.더구나 경기침체로 값비싼 전통가구 수요가 줄어 수입도 넉넉지 못한 편이다. “저는 지금까지 개인전을 열어보지 못했습니다.주위에서여러 차례 작품전을 권유받았지만 제가 만든 가구에 단 한번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재가구 부문전국 최고의 솜씨를 가졌으면서도 겸손을잃지 않는 조씨는 “전통기술을 전수받는 젊은이들에게도병역특례 혜택을 주어 맥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아쉽다”고 말했다.연락처 (063)211-2027. 글=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형님들의 가르침

    소지주이셨던 아버님은 평생 협동조합운동을 하셨다.집안살림보다는 지역주민들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결하였다.1950년대 농지개혁 때는 법이 정한 3정보를 제외하고는 소작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5·16이 일어났을 쯤 시의원을 지낸 우리집 형편은 극도로 궁핍하였다.우리 7남매 외에 일찍 타계한 작은아버지 슬하의 4남매까지 맡아 그럭저럭 나머지 논밭마저 다 없어졌다. 막내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우리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4형제중 아버님의 인품과 덕을 그대로 이어받은 큰형은 대학부속병원에서 전기기사를 하면서 어렵게공과대학을 다녔다. 영특하고 부지런한 둘째 형은 가정교사 등 고학생활로 서울대를 나와 대학조교로 학문의 길을 이어 갔다.셋째 형은 배고픔을 참기 어려워 7년 장기 해군하사관에 지원하여박봉 중에도 마산의 한 야간대학을 마쳤다.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한 막내는 2년 가까이 그냥 집에서놀 수밖에 없었다.큰형은 보다 못해 집에서 놀던 나를 야간 중학교에 편입시키고 낮에는 대학병원 사환살이를 하게 했다.늦게나마 중학생이 되었다는 기쁨 하나로 새벽에 출근해서 오후까지 8개의 병원 방을 청소하고 심부름하는 일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틈이 나면 배우지 못한 과목 공부를 하다가 가끔 꾀부린다는 핀잔도 받았다.그 덕분인지고등학교 장학생시험에서 1등을 해 학비면제를 받게 되어큰형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무조건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하였다.서울 가서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인기학과를 가야만 가정교사 자리라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대학에 들어가서야 평생 읽고 싶은 책,경험하고싶었던 일 등 실컷 인생의 폭과 깊이를 쌓을 수 있었다.졸업하던 해에 행정고시에 합격,공직자의 길로 나서 오늘에이르렀다. 큰형은 지난 3월 단칸방에서 통신사업을 시작한 지 40년만에 3층짜리 사옥을 지으셨다.셋째 형은 사장이 되어 있다.둘째 형은 국민의 정부 농림부장관으로 농정개혁의 기본 틀을 완성한 다음 최장수 장관이란 기록을세우고 다시 교수직에 복귀,NGO 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다. 공직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형들이 나에게 한권의 책을주었다.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이다.첫장 ‘부임(赴任)조’에 “임관이 되거든 재정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로 시작하여 맨 끝장 ‘해관(解官)조’의 “벼슬이란바뀌는 법이다.바뀌더라도 놀라지 말고,잃더라도 안타까워하지 않아야 백성들이 존경할 것이다”라고 끝나는 ‘목민심서’는 평소 내 형들이 실천해 보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김성호 조달청장
  • 삼성서울병원 운보 빈소 표정

    88세를 일기로 타계한 한국 화단의 거목(巨木)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일원동 삼성병원 영안실에는 설연휴 마지막 날인 25일에도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 화백이 타계한 지난 23일 이후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박석원(朴石元)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김흥수(金興洙) 화백 등 300여명의 각계 인사와 장애인 단체 관계자들이 빈소를 다녀갔다. ●정·관계 인사와 기업인들도 화환을 보내 애도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대표,이건희(李健熙)삼성 회장 등이보낸 화환이 영안실을 에워쌌다. 같은 병원에 입원해 몇차례 운보의병실을 찾았던 손기정(孫基禎)옹도 화환과 함께 손자를 대신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빈소를 지키고 있는 막내딸 아나윙(본명 瑛·45) 수녀는 “부친께서는 별다른 유언없이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면서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세계를 이룬 삶에 대한 열정이 아버지께서 세상에 남긴 유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운보의 제자인 세종대 회화과 심경자(沈敬子·57·여) 교수는 “강렬한 색채와 힘이 넘치는 독보적인 화풍을 세운 선생은 이 시대 진정한 화단의 거목이었다”며 슬퍼했다. ●지난해 11월 이산가족 상봉 때 극적으로 재회했던 북한의 동생 기만씨(72)로부터 아직 연락은 없었으나,아들인 완(完·53)씨는 “작은아버지도 소식을 전해 들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빈소에는 빨간색 납작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운보의 대형 영정이 눈길을 끌었다.유족들은 늘 빨간색을 좋아하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고인의 평소 모습을 영정으로썼다고 말했다. 빈소가 차려진 15호 영안실은 지난달 24일 타계한 미당 서정주(徐廷柱) 선생의 빈소로 썼던 곳이다. ●분향소가 차려진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 집’에도 청주시장과 마을 주민 등 50여명이 다녀갔다.운보의 집은 84년 어머니의 고향에 지은 3만5,000여평 규모의 대저택으로 전통 한옥인 안채와운보공방,운보갤러리,운향미술관이 있다. 운보를 뒷바라지해온 박태근(朴太根·50·여)씨는 “설 연휴가 겹친데다 선생님의 시신이 서울에 모셔져 조문객이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운보 추모회인 운보문화재단은 현재 추진중인 미술관 증축 사업이끝나는 5월쯤 운보갤러리를 ‘운보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개관하고 운보의 작품 100여점과 아내인 우향 박내현(朴崍賢)의 작품 등 300여점을 전시할 계획이다. 청주 김동진 안동환기자 kdj@
  •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동화/ 다락방 친구- 공지희

    우리집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장미연립 오 층,맨 꼭대기집이다. 밖에서 보면 오 층 건물 지붕 위에 더 높이 뾰족한 빨간 지붕이 솟아 올라 있다.그 뾰족한 부분은 다락방이다. 엄마는 다락방을 창고로 생각한다.안 쓰는 물건을 잔뜩 갖다 놓고 청소는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먼지가 풀풀 날린다.하지만 나는 이 곳을우리집에서 제일 좋아한다. 다락방엔 나만의 비밀공간이 있다.책장과 커다란 상자가 쌓여 있는뒤쪽에 있다.나는 거기다가 하나하나 귀중한 물건을 모아 두었다. 미니카,딱지 모은 것,구슬통,미니게임기.그리고 비밀일기장까지 숨겨 두었다. 만화책은 꼭 다락방에서 본다.그래야 더 재밌다.일기도 물론 여기서쓰면 더 잘 써진다. 처음에는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가끔 다락방엘 올라 왔었다. 한 번 올라오고 두 번 올라오고,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인지 화가 나지도 않고 속상하지도 않은데 다락방엘 올라 오고 싶어졌다. 나는 다락방이 자꾸만 좋아졌다. 다락방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생각을 차분하게 모아주기도 하고,또 새로운 용기를 주기도 했다.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 하늘이 그렇게 예쁜지 나는 이 다락방에서알게 되었다.또 지붕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이 다락방에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이 다락방을 뺏길지도 모를 일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아버지가 갑자기 내 다락방에 올라 왔다. 아버지가 다락방에 올라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 때 미니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게임기를 보면서,“나도 한 번 해 보자.” 했다. 아버지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게임을 했다. 다음날,아버지는 또 다락방에 올라왔다. 아버지는 내가 읽고 있던 만화책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하면서 아버지 눈치만 살폈다.내가 만화책을 보는것을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그런데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내 옆에 앉으면서 “재밌니?”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그러자,아버지는 다른 만화책을 한 권 꺼내바닥에 엎드려서 보기 시작했다.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아버지는 ‘큭큭!’ 웃기까지 했다. 나는 놀라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재밌어요?”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날,아버지와 나는 한참 동안 만화책을 함께 보았다. 나는 아버지 옆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했다. ‘언제나 바빠서 집에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가 요즘은 왜 이렇게 일찍 들어올까? 늘 피곤해 하던 아빠가 지금은 안 피곤할까? 집에 오면 거의 아무말도 없고 신문이나 텔레비젼만 보는 아버지가 이제는 신문이나 텔레비젼이 재미 없어진 걸까?’궁금했지만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왠지 가까이 느껴지지가 않고 남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다.언제나 친구처럼 놀아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날 밤,엄마와 아버지가 하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 회사에 큰 일이 생긴거다.가끔 들었던 ‘부도’ 라는 것이 아버지의 회사에도 일어났단다.엄마는 눈물을 흘렸고,아버지는 긴 한숨을 쉬었다. 다음날,비가 왔다. 나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생각했다. ‘오늘도 아버지가 다락방에 올라 올까?’집에 와 보니 아버지는 벌써 다락방에올라 와 있었다. 정말 이러다가 아버지가 다락방을 혼자 쓰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났다. 아버지는 다락방 창문 앞에 앉아서 비 오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너머로 들판이 보였다.막 추수를 끝낸 논이 쓸슬해 보였다.아버지는 더 멀리에 얕으막한 소나무 언덕을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붕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같이 들렸다. “두둑 두두둑!” 오늘 같은 날은 다락방에 있기가 더 좋은 날이다. 아버지도 그걸 알았나 보다. “야! 희동이 다락방 최고다.”아버지는 감탄스런 목소리로 엄지손가락을 내보였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다락방을 내 놓아야 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희동아! 여기가 좋으니?”“네”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 했다. “나는 다락방이 싫었어.”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버지도 너 만할 때 다락방에서 살았거든.”“정말이요?”“그래.아버지 살던 산동네 집은 아주 좁았단다.어머니 아버지,그리고 할머니,그리고 사 남매가 함께 살았지.”“일곱 식구였네요?”“그래.집은 좁은데 식구는 많았지.방이 모자라서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랑 다락 방을 함께 썼어.”나는 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아서 아버지와 함께 비 오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낮고 부드러워졌다. “서서 허리도 펴지 못할만큼 천장이 낮았어.동생이랑 둘이 누우면꽉 찰 만큼 좁고… 다락방이 참 싫었어.”나는 머리속으로 아버지의 다락방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다락방에 누워서 잠을 잘 때면 빨리 커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지.그러면 천장이 높은 내 방 하나를 갖는 거야.커다란 창문 앞에반지르르 칠을 한 멋진 책상을 놓고 싶었어.그러면 저절로 공부가 잘 될 것 같았지.”아버지의 옆 얼굴을 보는데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다락방이 그리워.”아버지는 고개를 돌려가면서 다락방을 샅샅이 훑어보았다.마치 그립다던 그 다락방에 다시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럼 다락방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아버지는 다행히 나에게서 다락방을 뺏으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다락방에 올라와있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나는 다락방을 혼자 차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아버지와 다락방에 같이 있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다락방에 올라온 뒤로 재밌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화책을 아버지랑 같이 보니까 혼자 보는 것 보다 더 재밌다. 게임도 역시 둘이 번갈아 하니까 더 재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건 혼자라서 할 수 없었던 놀이를 하는거다. 딱지치기나,구슬치기는 아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했다.아버지가 딱지를 접는 솜씨도 정말 예술이었다. 과자도 같이 먹고,라면을 끓여와서 같이 먹기도 했다. 그리고 또 좋은 게 있다.아버지가 놀이를 하면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이다. 이 옛날이야기는 옛날에 옛날에… 하는 전래동화가 아니다.아버지가들려주는 아버지 어릴적 이야기다. “아버지 어릴 적에는 말야….” 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 재밌다. 작은아버지랑 고모들이랑,친구들이랑 놀던 이야기들이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얼굴에 웃음이 활짝 핀다. 아버지 웃는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나는 아버지 이야기도 재밌지만 아버지가 웃는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좋았다. 이제는 아버지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 다락방에 올라온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다락방에 올라올 때 마다 점점 어린아이 같아 졌다. ‘혹시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 아닐까? 아니 아예나이를 뚝,떼어 버리고 올라 오는 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어떨 때는 형 같이 느껴졌다.그러다가 어떨 때는 꼭 친구같았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일기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도 나를 따라서 공책을 펴고 엎드렸다. “나도 이제부터 일기 좀 써야지.”이 다락방에서는 내가 아버지를 따라하고,아버지가 나를 따라하는 일이 많았지만,아버지가 일기를 쓰는 것까지 나를 따라 한다는 게 어쩐지 어색해 보였다. 아버지는 공책의 하얀 종이를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십오 년 만에 일기를 쓸라니까 뭘 써야할 지 모르겠네?”“십오 년만이라고요? 정말?”내가 이 세상에 태어 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다 더 긴 시간이다. 그 긴 시간동안 아버지가 일기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니.그만큼 바빴던 걸까? 아니면 여유가 없었던 걸까?“희동아! 너는 뭘 쓰는데? 좀 보여줘라.”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졸랐다. 우리는 일기를 다 쓰고 바꿔 보았다. 나는 일기를 이렇게 썼다. 제목: 다락방 친구요즘 새 친구가 생겨서 너무 신난다. 다락방에서 같이 노는 친구다. 나이도 많고 늙었지만,마음은 나와 똑 같은 열 한 살 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었다. 요즘은 너무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놀았으면 정말 좋겠다. 나는 다락방 친구가 너무 좋다. 아버지는 일기를 편지처럼 썼다. 내 아들 희동아. 우리 희동이 많이도 컸구나.참 자랑스럽고 기쁘다. 아버지가 너무 힘들었는데 희동이가 함께 있어줘서 참 든든하단다. 희동이하고 다락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재밌고 좋다. 내가 이 곳에서 너와 함께 있는 동안 뭘 찾았는지 가르쳐 줄까?내가 어릴 적 살았던 다락방에서 품었던 꿈을 찾았단다. 이제 아버지는 힘이 막 솟아나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희동이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 뒤로 우리는 늘 다락방에서 붙어 있었다.엄마가 직장에서 돌아와서 우리를 막 불러 내야만 마지 못해 내려왔다. 난 이제 아버지가 조금도 무섭지 않다.친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요즘 섭섭하게도 아버지가 다락방에 올라오는 일이 뜸해졌다. 다시 일을 하게 되어 바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잠깐이라도 다락방에 올라간다. 나는 아버지랑 예전처럼 놀지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락방에는 아버지랑 같이 놀았던 기억이 가득하니까. 공지희
  • 2차 남북이산상봉/ 병상 金기창화백·北동생 ‘20분 대면’

    “형님,저 기만이에요.제가 왔어요.일어나서 저 좀 보세요.제 목소리 들리세요…” 산소호흡기를 단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88) 화백은 힘겹게 눈을 떴다.청력을 잃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 동생의 얼굴이었다. 1일 오후 3시30분 서울 삼성의료원 19층.북의 화가 동생 기만(基萬·71)씨의 오열에 남의 형 김 화백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맞았다.49년만이었다. 병실에 들어선 기만씨는 “못난 동생을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되뇌었다.김화백이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북에서 개선장군이 되어 왔습니다’라고 수첩에 써 보여줬다. 병상에 누운 김화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을 바라봤다.몸이불편해 거동도 힘들고 말하기도 어려웠지만 서로 꽉 움겨잡은 손으로마음과 마음은 전해지고 있었다. 반세기 동안 쌓인 그리움과 한은 눈물이 되어 그치지 않고 흘렀다. 지난 4년간 패혈증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김화백은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난달 17일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삼성의료원 중환자실에입원했다.중환자실에서는 면회가 어려워 1일 오전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기만씨는 김화백의 셋째 동생.서울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으로 있다가 51년 월북했다.김화백은 85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까지 동생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다.당시 북에 다녀온 사람이 소식을 전해준 뒤 동생들이 북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혔다.기만씨는 북의 누이기옥씨(72)가 오빠에게 전해달라며 쓴 편지를 김화백의 손에 쥐어줬다.‘어렸을 때 영양실조로 눈이 멀었던 적이 있는데 큰오빠(김화백)가 업고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녀 눈이 나았다.그래서 지금 의사가됐다’는 내용이었다. 김화백의 아들 완씨(51)는 족보와 사진 등을 작은아버지에게 보이며형제상봉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김화백은 71년작 ‘승무’와 자신의작품 5,000점 모두가 담긴 전작도록(全作圖錄)을,기만씨는 ‘태양을따르는 마음’이라는 수묵화 4점을 선물로 주고받았다.남과 북을 달리하며 유명 화가가 된 형제의 상봉은 허무할 만큼 짧은 20분만에 끝났다. 이송하기자 songha@
  • 11.30 남북이산상봉 화제의 인물/ 雲甫 김기창 화백

    지난 4년간 병마와 힘겹게 싸워온 운보 김기창(金基昶·88)화백이북한의 동생 기만씨(71)가 2차 서울 방문단에 포함됐지만 지난 5일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확인돼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김 화백은 지병인 패혈증과 고혈압에 최근 다리까지 붓는 등 병세가 악화돼 현재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 완씨(51)는 “아버지께서 다리가 안좋으셔서 입원했다”면서“작은아버님이 남쪽에 오시더라도 개별상봉 때 직접 병원을 찾지 않으면 만나시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난번에도 노모를 만나러 병실을 찾은 아들이 있었던 만큼이번에도 그런 방식으로라도 만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완씨는 “국내에 작은아버지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 상봉 때 그림교환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3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기학·기태·기옥·기만 등 동생을 두었으며 기만씨는 북한의 공훈화가로 조선화(한국화)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영우기자
  • 金대통령 노벨평화상 받던날… 고향 하의도 표정

    “하늘이 돕지 않으면 커다란 영광을 두번씩이나 주시겠습니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소식이 전해진 13일 오후 6시 김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마을 일대는 일순간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농번기를 맞아 추수를 마치고 그대로 김대통령의 생가(후광리 1구 121번지)에 모여든 주민들은 “대통령 만세,하의도 만세”를 외치며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섬마을에 어둠이 내리고 후광리와 인근 대리·웅곡리·어운리 등지의 농악팀이 속속 생가로 모여들면서 잔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주민들은 곧바로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돌리며 김대통령의 평화상수상을 축하하느라 밤이 지새는 줄 몰랐다. 전날 해상에 내려진 태풍주의보로 끊겼던 뱃길이 이날부터 이어지면서 목포에서 준비한 경축 플래카드가 마을 어귀와 생가 주변 등에 내걸려 축제분위기를 북돋웠다. 후광리 이장 김종기(金琮琪·60)씨는 “노벨 평화상 발표시기가 임박해 오면서 97년 대선 결과 발표 때처럼 밤잠을 설쳤다”며 “대통령 탄생에 이은 이번 두번째 경사는 고향의 영광이자 21세기를 맞아이 나라의 장래를 밝게 해줄 뜻깊은 ‘사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못했다. 김대통령의 친조카 홍선(弘宣·38·대리1구)씨는 “이번 평화상 수상으로 작은아버지가 그동안 우리나라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고초를 겪었던 일을 보상받고 통일의 초석을 놓은 훌륭한 지도자로 공인받게 돼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생가 주변에 모인 주민들은 김대통령의 어린시절과 민주화투쟁 과정등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을 지샜다. 이 마을 부녀회원 20여명과 이장단 등은 앞서 뱃길이 열리며 섬으로대거 몰려든 국내외 언론 취재진 등 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부녀회원들은 떡과 음식물을 만드는 등 바쁜 농사철임에도 14일 예정된 전체마을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후광리 2구 부녀회장 박명심씨(42)는 “아무리 농사일이 밀렸어도이렇게 좋은 경사를 축하하자는 회원들의 결정으로 모든 일을 팽개쳤다”며 좋아했다. 김대통령이 초등학교 시절 한학을 배웠던 ‘德鳳講堂’(대리1구) 관리인이자 이마을 좌장격인 김춘배(金春培·한학자·88)씨는 “이번평화상 수상은 온 국민과 우리나라의 큰 영예”라면서 “그러나 산적한 정치·경제적 문제와 통일준비 등으로 어려움이 예상되는 만큼 마을 축제가 조용한 가운데 치러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축제마당이 펼쳐진 김대통령의 생가는 장남인 민주당 김홍일 의원과종친들이 밭으로 사용되던 생가터 799평을 사들여 99년 9월 건물을지었다.건물은 목조초가 6칸(18평),화장실(3평),창고(5평) 등 모두 3동으로 종친들이 지난 4월 신안군에 기부채납했다. 신안군은 이곳을 최근 향토유적 제23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하의도 최치봉기자 cbchoi@
  • 남북 화해시대/ 金新朝목사의 벅찬 감회

    “이제야 통일의 새 아침을 맞게 됐습니다.” 지난 32년 동안 남모를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충남 예산 성락교회 김신조(金新朝·58)목사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그는 지난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에 부인 최정화(崔正化·55)씨를 얼싸안고 목놓아 울었다. “박정희 목아지 따러 왔쉐다.” 삭풍이 살을 에이던 지난 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단 소속으로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했던 ‘냉전시대의 전사(戰士)’.그는 이제 고향인 함북 청진에서 복음을 전하는 ‘통일시대의 목자’를꿈꾸고 있다. 68년 당시 김씨의 투항으로 청진에서 직업동맹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독실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형당했다.인민군 소좌였던 매형을 비롯,6남매 가족과 공군 장성을 지낸 작은아버지 등 친척도 모두 숙청당해소식이 끊겼다. 70년 4월 삼부토건에 취직한 뒤 반공강연 등으로 살았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이 엄습할 때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비 자식’이라고 놀림받을 때면 술에 빠져들었다.그러다가 81년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97년 1월에는 서울영등포구 신길동 성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나는 전쟁의 불씨를 지고 남쪽에 왔던 사람”이라면서 “김정일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전쟁의 불씨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또 김위원장이 서울에 온다면 북한의 변화도 훨씬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오랜만에 고향 말투를 들으니 반가웠다는 김씨는 “북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내색을 하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몹시 강하다”면서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을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와서 과거를 따지는 것은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라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친구들이 금강산 관광을 같이 가자고 했지만 행여 북측을 자극할까봐 사양했다는 김씨는 “이제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고향에 가서 나 때문에 고통받은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부모님 묘소라도 찾아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영우기자 ywchun@
  • 性추행사건 잇따라

    최근 한 시민운동가의 성추행 파문으로 사회전반에 도덕재무장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전국에서 성추행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전주지검 정읍지청은 31일 부하 여직원을 성추행한 정읍 모우체국장 박모씨(54·정읍시 정우면)를 강제추행치상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 2일 오후 7시쯤 사무실에서 잔무를 처리하던 여직원 조모씨(33)를 등 뒤에서 껴안으며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한 혐의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31일 5·18구속자회 조직국장 조모씨(39·광주 서구 농성동)를 강제추행 혐의로 조사중이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이날 오전 2시쯤 대인동 B유흥주점에서 혼자 20만원상당의 술을 마신 뒤 “술값을 받으려면 따라오라”고 해 인근 D모텔 객실로쫓아온 주점 종업원 김모씨(40·여)의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영광경찰서는 31일 영광 모고등학교 3학년 손모양(17)을 성추행한 손양의 친할아버지(81·영광군 백수읍)와 작은아버지(39·영광군 홍농읍)에 대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신청했다. 전국종합 kcn
  • 경찰관과 상습도박 30대, 빚갚으려 숙부장모 살해

    경찰과 어울려 도박을 일삼던 30대가 도박빚을 갚기위해 친척까지 살해한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충남경찰청은 24일 성기동(成耆東·37·전 레카차기사·대전시 대덕구 덕암동)씨를 살인 및 상습도박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최모(35)경사 등 충남경찰청 고속도로순찰대 제2지구대 소속 경찰 3명,권모씨(34)등 한국도로공사 대전지사 직원 2명 등 모두 6명을 상습도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성씨는 1,500만원 가량의 빚을 지자 지난달 22일 새벽 3시20분쯤 작은아버지가 주지로 있는 대전시 동구 대성동 극락정사에 침입,작은아버지의 장모박모씨(72)를 전깃줄로 묶고 돈을 뺏았으려 했으나 박씨가 질식해 숨지자 달아났다 지난 19일 붙잡혔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역경을 딛고…]고대에 10억기증 崔丙順할머니 육필수기(4)

    순탄할 듯 보였던 인생을 풍비박산낸 것은 이념과 전쟁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작은아버지가 경기고녀에 입학한 딸을 나에게맡겼다.나는 이 때 하숙집을 남자하숙으로 바꾸었는데 기생들의 생활이 조카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이것이 화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얼마쯤 뒤 숙부가 사업자금을 부탁해왔다.집을 70만원에 팔아 20만원으로전세를 얻고 남은 돈을 드렸다.마침 남자들 하숙이 불편한 점이 많아 장사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48년 겨울 어느날이었다.갑자기 순사들이 들이닥치더니 ‘빨갱이 주모자를숨겨주었다’면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순사들은 “빨갱이를 먹여살리더니 집을 팔아 정치자금을 댔다”며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다.황당했다.게다가 있지도 않은 정치자금 150만원과 권총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그런 일이 없다고 버티자 순사들은 악질을 만났다며 회유를 하기도 했다.40여일간 취조를 하더니 트럭을 태워 춘천으로 보냈다.차에는 나 말고도 수십명의 ‘빨갱이’들이 타고 있었다.몹시도 추웠던 그해겨울,잠도 못자고 가는동안 내내 차멀미를 했다.춘천에 도착해 철창에 기대어 졸았더니 간수는 그엄동설한에 나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사찰계 주임이라는 사람에게 불려나가 취조를 당했다.십수일간 취조를 당한 뒤 무죄석방이 됐다.내가 빨갱이를 하숙으로 받았는 데다 그 남자의 부인이 ‘최진순’이었는데 이름이 비슷해 내가 부인의 동생쯤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너무도 억울해 유치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집에 돌아와보니 다 도둑맞고 집은 아수라장이었다.서럽고 분한 마음에 조카딸만 나무랐다.장사라도 해보려고 숙부에게 돈을 되받아 가게를 얻으러 다니다 알고 지내던 순사를 만났다.예전에 인사동 집 근처에 파출소가 있어 평소 순사들을 잘 대해 주었고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다.그 순사가 목이 좋은가게가 있다길래 60만원에 계약을 했는데 알고보니 사기였다.실제 점포 주인이 나타나 명도 소송을 낸 것이다. 쌀 한말이 몇푼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엄청나게 큰 돈을 날릴 판이어서나도 이의신청을 내고 법적 절차를 밟았다. 돈도 날리고 가게도 낼 수 없던 터라 마포로,자하문 밖으로 돌아다니며 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있던 중 6·25가 터졌다.서울이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고모두들 숨죽여 살고 있는데 몇개월 지나니 국군이 되돌아왔다.경찰은 공산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며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내가 또 끌려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순사가 와서는 다짜고짜 동대문서에 가두었다.몇주 뒤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는데 감방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지하실에 끌려갔는데 “누구 순사를 아느냐”고 물었다.나에게 사기를 친 순사이길래 “안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사형을 언도했다.그 순사를 밀고했다는 게 이유였다.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산군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서 대전으로,부산으로 이감됐다.이송되는 나흘 동안 물 한방울 먹지도 못하고 화물차에 실려갔다.열차에는 죄수만 탔다.사람을 포개고 포개 한 열차에 다 태웠다.굶어 죽고,깔려 죽고 정차역마다 죽은 시체만 한무더기였다.특히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끼니로 주는 한 움큼의 생쌀도 못얻어먹었지만 나는 목숨이 질긴지 살아남았다.‘죽어서는 안된다’는 의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4차례 걸쳐 一家탈북 朴相雲씨, 사촌들 상봉

    “사촌형제들까지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3일 인천시 남동구 간석1동 朴相喆씨 집에서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들이모여 단절된 50년을 잇기 위해 기억을 되살렸다. 일가족이 네차례에 걸쳐 모두 북한을 탈출,화제를 모았던 朴相雲씨(61) 일가가 사촌들을 찾아 상봉하는 자리.相雲씨의 사촌인 相基(74) 相喆(66) 相實(62) 相福(60) 相勳(58) 金女씨(55·여)는 연신 相雲씨의 손을 잡으며 안쓰러워했다. 맏형인 相基씨는 “작은아버지의 외아들인 相雲이를 이렇게 만나보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相雲씨는 “어릴적에 객주업을 하던 큰집 사랑채에서 살았기 때문에 형님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형님들을 따라 냇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산에서 밤을 따던 때가 엊그제같다”고 회상했다. 相基씨가 “우리는 죽산朴씨 문헌공파 32대손”이라고 하자 相雲씨의 아들秀現씨(33)는 “지금까지 밀양朴씨인 줄만 알았다”고 해 웃음이 터져나왔다. 相雲씨는 자신의 아들들과 相勳씨 아들인 聖吉씨(31)를 가리키며 “한집안마당에서 팔촌까지 난다더니 저 애들이 벌써 육촌간이 되는군요”라며 세월의 무상함을 아쉬워했다. 이들은 38선 이북인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관대리에 함께 살았으며 해방 후 相基씨 형제들은 모두 월남했으나 相雲씨만 북한에 남았었다. 相雲씨는 지난 49년 함북으로 이주,경성·길주군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하다지난 93년 처음으로 북한을 탈출한 차남 秀現씨의 도움으로 지난해 11월 부인 韓貞玉씨(59),막내아들 世現씨(24)와 함께 귀순했다. 장남 起現씨(35)와 셋째 泰現씨(29)도 秀現씨와 정부의 노력으로 지난해 9월과 올해 1월 각각 탈북에 성공했다. “마침 5일이 청명이니 사촌형들과 함께 할머니·할아버지 산소를 찾아뵐까한다”며 활짝 웃는 相雲씨의 얼굴에는 50년만의 여유가 듬뿍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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