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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라덴 돌아온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이 9·11 테러 6주년을 앞두고 다시 한번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다. 테러리스트 감시 단체인 인텔센터는 6일(미국시간) 앞으로 72시간 안에 알 카에다의 미디어 제작사가 빈 라덴의 비디오 메시지를 인터넷에 올릴 것이라고 밝혔다.알 카에다는 이미 아랍어로 제작된 선전용 웹사이트를 통해 앞으로 방영될 비디오에서 퍼온 빈 라덴의 사진까지 게재했다.웹사이트에 나온 빈 라덴의 턱수염은 최근까지 흰 수염이 간간이 섞여 있었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검은 색이었다. 미국의 테러 전문가들은 알 카에다가 빈 라덴이 젊고 건강하게 보이도록 염색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빈 라덴의 비디오가 마지막으로 공개된 것은 2004년이며, 육성이 공개된 것은 약 1년 전이다. 빈 라덴의 비디오 방영에 맞춰 미국에 대한 알 카에다의 공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폭스뉴스는 미 연방 대테러 수사관들이 최근 이슬람의 한 웹사이트에 9·11 6주년에 ‘특별 선물’이 전달될 것이라는 경고 게시물이 올라온 것과 관련,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경고 게시물은 이슬람 급진 세력들이 자주 방문하는 웹사이트에 지난 2일 올라왔으며 “맨해튼을 침공한 바로 그날 특별한 선물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dawn@seoul.co.kr
  • 영화 ‘디워’ 엔딩장면 MBC 무단촬영 논란

    MBC가 영화 ‘디워’(D-War)의 엔딩 장면을 캠코더로 촬영한 영상을 방영해 ‘무단촬영’ 논란을 빚고 있다. MBC ‘생방송 오늘 아침’은 7일 오전 “영화 ‘디워’의 흥행은 심형래의 힘?” 방송에서 개봉 6일 만에 관객 300만명을 돌파한 ‘디워’의 흥행요인을 살펴보는 내용을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심형래 감독이 심경을 밝히는 자막이 담긴 ‘디워’의 마지막 장면을 용산CGV 극장에서 캠코더로 촬영한 뒤 영상을 그대로 방영한 것. 방송이 나가자 네티즌 사이에서는 “도둑 촬영이 아니냐.” “해외에서는 아직 개봉도 안 했는데….”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논란이 일자 ‘생방송 오늘 아침’은 7일 오후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해명글을 띄우고 “극장에서 촬영되어 인용을 한 장면은 ‘용의 승천(3초)’과 ‘엔딩 크레딧(5초)’의 두 컷이다.CGV의 영화 장면 촬영 허락 여부와 관련해서는 보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 중에 있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엔딩을 제외한 나머지 인용 장면은 프로그램을 담당한 외주제작사가 영구아트 측에 공문을 보내 얻은 ‘30분짜리 홍보 필름’에 담긴 장면이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용산CGV 측은 “사전에 촬영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무단 촬영하는 것을 허가해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디워’ 배급사인 쇼박스와 제작사 영구아트 측도 “영화를 제작사나 배급사의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해 방영하는 것은 불법행위”라며 대응방침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군항도시 진해 술렁

    해군 작전사령부의 부산 이전으로 군항도시인 경남 진해가 향후 도시발전 방안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진해시는 최근 해작사 이전을 계기로 해양물류 중심도시로 도약한다는 구상안을 밝혔다. 하지만 지역경제 위축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30일 진해시에 따르면 진해시는 해작사 이전에 따른 도시발전 방안으로 해군 교육사령부 개발 및 해양물류, 관광전문대학 유치 추진 계획을 제시했다. 해작사가 빠져나간 자리에 교육사를 옮기고, 그 자리를 950억원의 사업비로 개발한다는 것. 교육사 부지 31만㎡와 인접한 주거지역을 편입,33만여㎡를 택지로 개해 장병들의 관사와 아파트·콘도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군인공제회와 함께 국유재산법에 의한 기부양여사업으로 추진된다. 이와 함께 충무동 부사관교육대(구 해군대학)에 2010년까지 200억원을 투입,‘진해대학(가칭)’을 유치, 해양물류·관광 전문대학으로 키울 계획이다. 이 대학에는 해군학부와 항만물류·조선·관광무역학부 등 모두 4개 학부 13개과가 개설되며, 정원은 1560명이다. 부사관교육대는 10만여㎡의 부지에 연 면적 1만 5900여㎡의 건물이 들어서 있어 리모델링하면 대학 캠퍼스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이재복 진해시장은 “해작사 이전은 대양해군을 지향하는 국가의 국방정책이므로 되돌릴 수 없다.”면서 “시는 이를 해양물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기 위해 다각적인 방안을 찾고 있으며, 일부는 이미 실행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군부대가 밀집된 서부지역 주민들의 우려감은 더 크다. 중앙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58)씨는 “장병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부대가 이전한다니 살길이 막막하다.”며 “시가 교육사를 개발한다고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해군작전사령부는 지난 18일 부대 배치계획에 따라 오는 12월까지 부산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진해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비운의 보라매 父子

    비운의 보라매 父子

    지난 20일 서해상에서 KF-16 전투기를 몰고 야간임무를 수행하다 숨진 박인철(27·공사 52기) 중위의 아버지가 23년 전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다 숨진 고 박명렬(공사 26기) 소령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代 이어 순직… 현충원 함께 안장 22일 공군에 따르면 박 중위가 다섯 살이던 지난 1984년 아버지 박 소령은 F-4E를 몰고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다 추락사고로 숨졌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군사관학교를 마친 박 중위는 지난 2월 공군 고등비행 과정을 마치고 정식 전투조종사가 됐다. 사고 당시 박 중위는 충남 서산에 있는 제20전투비행단 소속으로 교관 조종사인 이규진(38) 소령을 뒷좌석에 태우고 KF-16으로 기종 전환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공군은 박 중위를 1계급 특진해 아버지가 묻힌 서울 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유족들은 부자(父子)를 합장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전례가 없어 보훈 당국이 고민 중이라고 공군 관계자는 전했다. ●공군, 비행기록장치 발굴 총력 올해 들어서만 두번째로 발생한 KF-16 전투기 추락사고로 공군엔 비상이 걸렸다. 지난 2월 사고처럼 정비불량이 원인으로 드러날 경우 공군의 위신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공군은 사고 하루만인 21일 서해상에서 기체 일부와 조종사 좌석 시트 등 사고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22일 밝혔다. 공군은 정확한 추락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사고기의 비행기록장치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사고지점이 해안에서 90㎞나 떨어진 원해상으로 수심이 80∼100m나 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군이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은 정비 부실 등이 원인이 된 ‘인재’로 판명나는 경우다. 공군 관계자는 “미국 제작사가 부품교체를 지시했던 2월 사고기 엔진과는 생산 시기가 달라 정비대상은 아니었다.”면서도 사고기의 정비 이력 등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문화키워드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문화키워드

    ■ 신문 연재소설로 본 시대상 신문 연재소설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과 열망과 한숨이 배어 있다. 이것은 대중과 호흡을 함께해 나가는 신문이 그들의 이목을 끌고 그들을 지면에 이끌어 들이고자 만들어 내는 현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 연재소설을 써나가는 주체란 단순히 작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신문과 독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당대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 그 자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저 멀리 ‘대한매일신보’가 숨쉬던 구한말에서 애달픈 식민지 시대, 해방공간, 한국전쟁, 긴 독재체제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목록의 신문 연재소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 했고 무엇에 아파했으며 무엇을 원했는지 보여준다. 신문 연재소설은 우리에게 당대의 문화적 코드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준다. 신문 연재소설을 통해 당대의 문화키워드를 살펴본다. 구한말의 문화적 키워드는 단연 나라 지키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애국계몽을 표방한 신문 ‘대한매일신보’에는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1905.11.17∼12.3),‘거부오해’(1906.2.20∼3.7) 같은 작품들이 연재되었다. 이 과도기적 ‘소설’들에는 어떻게 기울어가는 나라를 개혁할 것인가, 외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910년대의 지식인들은 국권을 침탈당한 비극적 분위기 속에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을 여전히 유학과 교육과 계몽에서 찾았다. 문단으로 보면 이때는 이광수와 최남선의 시대였다. 이광수의 ‘무정’(‘매일신보’,1917.1.1∼6.14)은 경성학교 영어교사인 이형식과 기생 영채의 사랑의 엇갈림을 그리면서 그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새로운 학문을 위한 유학에서 찾았다. 여기서 이광수는 과학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제창했다. 1920년대는 3·1운동의 좌절이 가져다 준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 고독한 자아의 구원을 열망하는 흐름과 절망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적 희망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나뉘었다. 어머니를 잃고 오빠와 함께 살아가는 혜숙의 가련한 운명을 그린 나도향의 ‘환희’(‘동아일보’,1922.11.21∼1923.3.21)는 전자의 흐름을,3·1운동의 좌절을 배경으로 순영과 봉구의 사랑과 죽음, 기약을 그린 이광수의 ‘재생’은 후자의 흐름을 대변한다. 1930년대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식민지 근대의 성숙 과정에서 배태된 대중문화, 그리고 여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때였다. 한 예로 염상섭의 ‘삼대’(‘조선일보’,1931.1.1∼9.17)는 타락한 윗세대와 사회주의 운동이 풍미한 복잡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삶의 균형을 고민하는 새로운 세대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1940년 8월1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신문 연재소설의 현장은 다시 ‘매일신보’로 넘겨졌다. 이태준, 채만식, 박태원, 이효석 같은 대작가들은 가혹한 천황제 파시즘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체제의 강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과 문제의식을 그들의 소설들에 각인시켰다. 예를 들어 이효석의 ‘창공’(‘매일신보’,1940.1.25∼7.28)은 천일마라는 주인공이 만주 하얼빈에서 만난 러시아 여성 나아자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의 문화를 공유해 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천황제 파시즘의 대동아주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 잠시 침체한 양상을 보였던 신문 연재소설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 것은 1950년대였다. 대중의 폭발적인 반향을 얻으면서 논쟁에까지 휩쓸려 이른바 낙양의 지가를 올린 정비석의 ‘자유부인’(‘서울신문’,1954.1.1∼8.9)은 대학의 국문학 교수 장태연과 그 부인 오선영의 뒤얽힌 생활상을 통해 당대의 문화 풍속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사회는 군사독재 체제, 산업화, 타락과 부패라는 복합적인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손창섭의 장편소설들, 예컨대 ‘이성연구’(‘서울신문’,1965.12.1∼1966.12.30)나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동아일보’,1966.2.8∼10.31) 같은 작품들은 대도시화한 서울을 배경으로 간척사업, 공공사업 등과 같은 당대적 사건들을 다루면서 물신주의가 팽배한 1960년대 사회의 기묘한 위선, 타락, 무질서, 음모를 그려나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민중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군사독재와 산업화 속에서 짓눌린 민중에 대한 관심은 수많은 문제작들을 낳았던바 신문 연재소설에서 이것은 대하소설이라는 문제적인 양식과 접맥된다.‘서울신문’에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약 4년에 가깝게 연재된 김주영의 ‘객주’는 보부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역사적 상황과 생생한 민중생활 양상을 풍부하게 재현한 문제작이다.‘한국일보’에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씩이나 연재된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도 단 몇 줄의 역사기록밖에 없는 인물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민중의 애환과 바람을 그린 작품이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변의 시대에 신문 연재소설의 주된 테마를 이룬 것은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었다.1983년부터 잡지에 연재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태백산맥’에 이어 1998년부터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은 파란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에 연속성을 부여하려 한 작가적 신념의 소산이다. 여러 곳에 나뉘어 연재되면서 1994년에 완간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거작이다. 200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사회적 원리로 정착해 나가는 대신에 자본주의의 물질적 독점력이 새로운 문제로 부각된다. 고도로 국가화·독점화한 자본주의가 과거의 정치적 독재를 대신하여 새로운 권력적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바로 2000년대다. 경제적 갈등, 반목과 생존 경쟁, 물신주의가 이처럼 일상을 확고히 지배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낳은 정신적 타락 및 비속화·비소화한 시민들의 삶은 새롭고 숭고한 정신적 가치를 찾아 헤맨다. ‘서울신문’에 2004년 1월5일부터 최근까지 장기간 연재됐던 최인호의 ‘유림’은 그러한 숭고에 대한 열망이 투영된 소설이라고 하겠다.‘상도’에서 ‘유림’에 이르는 최인호의 집필과정은 시대의 추이를 예민하게 감지할 줄 아는 능력의 존재를 시사한다. 이렇듯 신문 연재소설은 한국사회 및 대중의 관심사와 그 문화적 추이를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촉진한 시대의 바로미터와 같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방민호(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연재소설 소개 ▶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 1905년 11월17일부터 12월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개화기 신소설로 신문에 실린 최초의 소설 형태의 글이다. 개화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복술가 소경과 망건장수 앉은뱅이의 대화가 전개되는 문답체로 자주적 국권 의식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 무정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다. 한국 현대 문학의 출발점이 된 작품으로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과 신교육 사상, 자유연애 찬양, 남녀 평등 사상 등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대중계몽 역할을 꾀해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근현대문학 사상 가장 많이 읽혀지고 연구되어온 이광수의 대표작이다. ▶ 자유부인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한국 신문 연재 소설 사상 최고의 화제를 낳았다. 성윤리에 대한 논란을 비롯, 갖가지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정비석의 화제작. 대학교수 부인 오선영의 ‘일탈’를 통해 6·25전쟁 직후 만연한 퇴폐적인 사회 풍조와 전쟁 미망인들의 취업상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 객주 1979년 6월6일부터 1983년 2월29일까지 서울신문에 1465회 연재돼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연 작가 김주영의 역작.3부작으로 구성됐으며 조선 후기 보부상과 노비, 관료, 농민들의 갈등과 유착을 다루며 당시 사회의 변동상을 그려냈다.19세기 말의 풍속을 구체적으로 재현했으며 평민층의 입말을 잘 살려내 사실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 유림 1977년 서울신문에 소설 ‘파란 꽃’을 첫 연재한 최인호가 2004년 1월5일부터 2006년 12월30일까지 연재한 장편소설. 유교가 흘러온 2500년의 역사를 조망한 작품으로 왕도국가를 세우려다 실패한 조광조와 이상국가를 꿈꿨던 공자, 성리학을 발전시킨 퇴계 이황 등 유학자들의 삶을 엮었다.‘유림’은 유교와 유학자들을 소설로 형상화해 독자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프론티어 5인이 말하는 미래 문화키워드 서울신문은 창간 103주년을 맞아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미래 사회의 문화를 이끌 화두가 무엇인지 들어봤다. 문학·영화·방송·음악·미술 방면의 전문가 5명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면서도 명징한 키워드로 향후 문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예술가 사회’‘글로벌’‘탈경계’‘다양화’‘탈장르’ 등으로 요약되는 이 문화 핵심어들은 저마다 고유한 속성을 지니면서도 의미있는 공통분모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진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 “장르파괴 가속화” 최완규 ‘주몽’ 드라마 작가 “앞으로는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드라마 연출자가 영화 감독을 맡거나 영화제작사가 드라마를 제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이렇다할 성공 사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제작인력의 양분화가 점차 미미해지고 두 장르간 벽을 허무는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국민 드라마 ‘주몽’의 최완규(43) 작가는 미래 방송계의 키워드를 이처럼 ‘탈경계’란 말로 압축해 표현했다.‘종합병원’‘허준’‘올인’ 등 사극과 현대물을 오가며 인상깊은 작품들을 남겨온 그는 현재 그 자신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 미드(미국 드라마) 열풍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국 사람들도 새삼스럽게 미드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할리우드의 우수한 영화 제작인력과 기획력이 드라마로 대거 투입된 결과로 볼 수 있어요. 우리도 이같은 탈경계 현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드라마 제작환경은 아직까지 그리 여의치 않다. 최 작가는 “현재 방송사·외주제작사들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십중팔구는 제작비를 맞추지 못해 적자를 떠안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동안 드라마는 한류 열풍을 등에 업고 규모를 급속도로 키워 왔지만, 그 수혜가 몇몇 연기자와 작가들에게 집중되는 등 문제점도 함께 키워 왔다.”고 덧붙였다. 최 작가는 “‘CSI’나 ‘프리즌 브레이크’는 작가 한명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작품”이라며 “무엇보다 사전제작을 염두에 둔 시리즈물이 일반화돼야 하며, 밀도 높은 작품을 위한 집단창작시스템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권고도 잊지 않았다. 시청률이나 해외 마케팅에 신경쓰기 앞서 ‘질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시청자들이 먼저 알아 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프로·아마 벽 무너져” 김영하 소설가 “미래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세상입니다.‘예술가 사회’라 하면 어떨까요?” 소설가 김영하(39)는 20세기 후반, 자본가가 된 우리 모두는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예술가가 될 거라 장담했다. “요즘 삼청동에 가보면 사진기자들이 쓸 만한 장비를 들고 수백명이 순례를 하고 있어요. 모든 예술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거죠.” 그는 프로가 좋은 작품을 만들고 아마추어가 ‘후진’ 작품을 만들 것이라는 경계는 무너질 것으로 내다봤다.“문학이야말로 아마추어가 하는 겁니다. 뭐든 쓸 수 있죠. 랭보와 카뮈도 아마추어였어요. 문학사는 아마추어가 쓴 엄청난 작품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는 ‘개인’도 미래의 문화 키워드로 꼽았다. 사람들간에 공통적인 경험이 줄어들고 다른 처지에서 세상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대,60년대 문학과 같은 트렌드는 사라지고 작가 개인의 문체 특성이 한층 심화될 것으로 전망한다.“문학도 이제 개인의 내면과 경험을 제출하는 방식입니다. 김영하 다르고, 박민규 다르죠. 공통분모를 찾는 건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서구 비평가들이 하듯 한 작가에 천착하게 되고 작가는 우주의 별처럼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장편소설 대망론을 믿으면서도 최근 출판사와 일부 언론에서 일고 있는 ‘장사 논리’는 경계했다.“문학을 해외시장에 수출하기 위해, 일본 문학에 대응하기 위해 장편소설을 내라는 건 박정희 시대의 논리죠. 요즘 일부 언론에서 만든 문학상이나 출판사들은 새로운 네이밍을 통해 작가들에게 대중소설이라는 수요를 창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독자들이 원하는 거죠. 잘 된 장편은 독자를 일주일간 기쁘게 해줍니다.” 김영하는 ‘예술가 사회’에선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내다봤다.“미래에 나쁜 일만 생길 거라 보는 문화적 비관주의는 언제나 실패해왔습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영어제작으로 월드마켓 공략” 이승재 LJ필름 대표 “향후 한국영화 산업을 지배할 키워드는 ‘글로벌’이다.” 이승재(43) LJ필름 대표는 “지난 15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온 한국영화 산업은 현재 한계점에 다다랐다.”면서 “이제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인력, 유통 등 성장을 담보하는 제반 여건이 다 갖춰진 한국영화 내수시장은 더이상 ‘파이’를 늘릴 수 없는 상태라는 것. 그는 비용 대비 수익률이 마이너스 30∼40%에 달하는 현 시점에서 대안은 해외시장 개척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를 잘 만들어 수출하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우리의 문화를 영어로 제작해 알리는 방식이 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럽이나 아프리카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제작해 알렸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는 ‘괴물’을 예로 들면서 아무리 훌륭한 콘텐츠라도 자국 언어로 제작되면 ‘월드 마켓’에서 뛰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망을 대변하듯 올들어 충무로에서는 해외 합작이 심심찮게 추진되고 있다. 나우필름이 미국 영화사 VOX3과 손잡고 만든 첫번째 합작영화 ‘두번째 사랑’이 얼마 전 한국 관객과 만났고, LJ필름 또한 ‘프린세스 줄리아’를 한·미합작으로 제작한다. 영화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손이었던 이구와 그의 미국인 부인 줄리아 멀록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와호장룡’ 등을 제작한 미국 유니버셜 포커스와 손잡은 이 영화는 현재 시나리오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이 대표는 “미국에서 2억달러를 벌어들인 그리스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처럼 한국적인 소재이면서도 다같이 공감할 수 있는 ‘크로스컬처 아이템’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대가보다 다수 결집 창작 증가” 김현철 작곡가 겸 가수 가수 김현철(39)은 미래 대중음악의 키워드로 ‘다양화’를 제시했다. 그것은 또한 21세기와 이전의 대중음악을 구분짓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2000년 가까이 전해져 내려온 음악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쯤 전입니다. 대중에게 대량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음반이란 형태의 ‘디바이스(도구)’가 등장한 덕분이죠. 현재도 CD를 거쳐 MP3 등으로 더욱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고요. 이런 다양한 형태의 도구들이 급격한 음악시장의 변화를 가져왔고,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튈지는 아무도 쉽게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21세기 대중음악의 트렌드는 소수의 대가가 아니라 다양한 뮤지션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특징. 방송과 몇몇 가요제가 가수 등용문의 전부였던 예전과 달리 UCC 등을 통해 누구라도 쉽게 가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대중이 음악을 접하는 도구 또한 공중파 방송 일변도에서 모바일, 케이블 음악방송, 인터넷 음악전문 사이트 등으로 다양하게 재편되고 있다. “음악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도구의 확대는 음악가들에게 더욱 다양한 음악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장르의 융합단계는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제 모바일에 적합한 음원은 물론, 데커레이션 음악(장난감에 사용되는 음악)까지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다양성이 양질의 음악 생산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공연문화가 활성화되면서 ‘공연 브랜드’가 많이 등장하게 될 겁니다. 또한 음악가와 다양한 ‘디바이스’를 연결해주는 기획·프로모션 부문에 현재보다 한층 진보된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게 될 겁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표현도구 다양화” 정연두 최연소 ‘올해의 작가’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는 밝고 발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동안 작품의 질에 비해 저평가돼 왔죠.” 회화, 조각 등으로 경계를 나누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한 현대미술.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독특한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작가 정연두(38) 역시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다.‘탈장르’로 규정되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그는 멀티 플레이어적인 작업으로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95년부터 매년 뽑는 ‘올해의 작가’에 30대로는 처음 선정된 정연두는 현대미술의 변화와 흐름을 잘 보여주고 대처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무형에 의해 지배되는 유형’처럼 현대 미술에서 장르의 경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우습다.”며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확실한 세계가 있다면 어떤 표현매체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 역시 대학에서는 조소를 전공했지만 요즘 주로 사용하는 표현방식은 사진과 비디오다. 정연두는 앞으로 그처럼 작품활동만 하는 한국의 전업작가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전업작가 한 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한 작가를 공부하고, 응원하는 팬이자 컬렉터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은 대한민국 인구의 겨우 1%가 컬렉터지만, 그 수가 늘어나면 전업작가 시스템도 더욱 탄탄해질 것으로 보인다. 작가들은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작업태도를 견지할 수 있고, 컬렉터층도 극소수의 부유층이 아닌 개미군단으로 넓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내몸은 내가 지킨다?” 톱스타 신체보험 집중분석

    “내몸은 내가 지킨다?” 톱스타 신체보험 집중분석

    ”데이비드 베컴 다리 65억원, 보아 성대 20억원, 제니퍼 로페즈 엉덩이 1조원” 스타들의 출연료가 아니다. 스타들의 몸값, 즉 상해 보험금이다. 몸이 재산인 스타들에게 보험은 필수다. 축구하는 베컴과 노래하는 보아에게 다리와 성대는 생명 이상의 것. 그도 그럴 것이 다리를 다친 베컴과 성대를 상한 보아는 더이상 베컴과 보아가 아니다. 스타가 보험에 가입하는 방식은 크게 2가지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스타가 직접 가입하는 ‘생계형’ 보험이 있는가 하면, 광고주를 보호하기 위해 회사가 대신 나서는 ‘대비용’ 보험도 있다. 이처럼 유명인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재정적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가입하는 보험을 ‘키퍼슨(Key Person) 보험’이라고 한다. 스포츠서울닷컴에서 스타들이 가입한 보험의 종류와 보상금을 살펴봤다. ◆ 생계형 보험 “내 몸은 내가 지킨다” 신체 부분보험의 문을 연 스타는 톱모델 레이첼 헌터다. 1990년대 헌터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다리를 지키기 위해 ‘다리보험’에 가입했다. 헌터의 롱다리는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로 평가 받았다. 한화로 따지면 약 9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부분보험은 몸으로 먹고 사는 운동스타에게는 필수다. ‘축구스타’ 베컴은 700만 달러의 ‘다리·발’ 보험에 가입했다. 베컴은 최악의 경우를 맞아 축구를 못하게 되더라도 보상금은 챙길 수 있다. 그림같은 프리킥을 못보는 팬들에게는 아쉽겠지만 베컴은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이 외에도 영국 ‘록밴드’ 롤링스톤즈의 기타리스트 론 우드는 왼손 중지 손가락을 보험에 가입했다. 중지를 다치면 기타연주에 치명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영국의 유명 음식 평론가 에곤은 자신의 혀를 보호하기 위한 400만 달러에 달하는 혀보험에 가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대비형 보험 “광고주를 보호한다”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에게 가장 필요한 신체보험는 무엇일까. 십중팔구 ‘성대보험’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캐리의 경우 ‘다리보험’에 가입했다. 그것도 보험금이 무려 10억 달러(한화 9,500억원)가 넘는 다리보험이다. 목으로 먹고 사는 캐리. 그가 다리보험에 든 까닭은 광고 때문이다. 지난해 캐리는 ‘질레트’사의 다리 면도기 모델로 활동했다. 이에 질레트사는 월드투어를 앞둔 캐리가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10억 달러짜리 ‘다리보험’에 가입했다. 만약 캐리의 다리에 문제가 생긴다해도 캐리와 질레트사는 보험금 덕분에 손실을 만회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슈퍼모델’ 하이디 클롬 역시 제모기 회사와 광고를 맺는 동시에 200만 달러(한화 20억원) 짜리 다리보험을 들었다. TV 드라마 ‘어글리 베티’의 주인공 아메리카 페라라도 치약광고에 출연하면서 100만 달러 짜리 ‘치아보험’에 가입했다. 만약 클룸과 페라라가 다리와 치아에 상해를 당하면 광고주 역시 보험금을 받는다. ◆ 국내에도 이미 스타보험 ‘유행’ 부분보험은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다. 탤런트 이혜영이 대표적인 예. 그는 자신의 늘씬한 다리를 지키기 위해 지난 2000년 12억원 짜리 ‘다리보험’에 가입했다. 가수 보아와 바다는 20억원의 성대 보험에 들었다. 메이저리거 김병현도 지난 2002년 투수의 생명인 팔을 보호하기 위해 10억원 짜리 ‘팔보험’에 가입한 사례가 있다. 영화나 콘서트 등을 앞두고 스타를 보호하기 위해 제작사 등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이제는 흔하다. 영화 ‘태풍’에 출연했던 장동건과 이정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15억원 짜리 보험에 가입했었다. 영화 ‘각설탕’의 주인공인 임수정도 촬영을 앞두고 여배우 가운데 최고 금액인 10억원 상당의 보험에 가입했다. 올해 초 개봉했던 영화 ‘조폭마누라3’ 주인공 수치(서기)를 위해 제작사는 최대 8억원을 보상받을 수 있는 상해보험에 가입했다. 가수 비는 현재 진행중인 월드투어 기간동안 각각의 콘서트 별로 상해 보험에 가입돼 있다. ◆ ‘왜 이런 보험이 생겨나는가?’ 연예인은 퇴직금이 없는 직업이다. 타 직업에 비해 활동기간이 짧기 때문에 활동하는 동안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항상 쫓기는 스케줄 탓에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부분보험에 가입한다. 광고주나 제작사가 대신 가입하는 경우도 비슷한 맥락이다. 예를 들어 광고주 입장에서 엄청난 금액의 모델료를 지불한 자사 모델이 혹시라도 상해를 입으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톱스타 부분보험의 또다른 이유는 홍보효과다. 연예인의 경우 자신의 몸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리면서 이슈를 일으키고, 광고주의 경우 자사 모델이 그만큼 귀중하다는 것을 알리면서 브랜드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다. 기사제휴/스포츠서울닷컴 송은주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이색거리 탐방] (15)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이색거리 탐방] (15)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처음에는 그냥 신사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보통 길이었다. 길가에 은행나무를 심고, 이 나무가 자라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이후 가로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남구 신사동∼압구정동까지 680여m의 가로수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일부러 랜드마크 건물을 세운 것도 아니다. 그저 은행나무를 심어 놓았을 뿐인데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피어났다. 어느새 여기에 270곳의 기업 및 점포가 들어섰다. 음식점이 89곳, 의류가게가 76곳, 의류디자인 37곳, 건축사사무소 22곳, 학원 9곳, 병원 4곳, 영화사와 화랑이 각 2곳, 기타 29곳이다. 이면도로에 자리잡고 있는 주택과 건물들도 개조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앞으로 점포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화려함보단 문화가 있는 거리 길가에 군데군데 들어선 2층짜리 주택들, 사무용 건물도 모두 5층 안팎이다. 건물이 가로수를 위압하지도, 가로수가 건물을 가리지도 않는 조화다. 주말인 13일 가로수길에는 사람과 차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로데오거리나 명동과 같은 화려함은 없었다.2차선의 좁은 도로, 고풍스럽고 아담한 건물들…. 화랑과 공연장, 옷가게, 음식점 등 영락없는 ‘강북의 삼청동길’이다. 다르다면 삼청동은 한옥풍인데 가로수길은 유럽풍이라는 점. 또 가로수길은 오가는 사람들이 젊은 연인들과 여성들이 특히 많다. 곳곳에서 패션모델들의 작품 촬영광경도 볼 수 있다. ●가로수길은 지금 변신중 가로수길은 유난히 이름이 많다.1990년대 말 일부 영화 제작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제2의 충무로’라고 불리다가 ‘패션거리’‘인테리어거리’로도 불렸다.270여개 점포 가운데 매년 수십개가 간판을 새로 단다. 지금도 인테리어 작업 중인 곳이 10여개나 됐다. 가로수길은 1982년 인사동에 있던 ‘예화랑’이 옮겨온 후 몇몇 화랑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름이 났다. 화랑이 시들해진 이후 외국으로 패션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디자이너 거리’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요즘은 고풍스러운 앤티크가구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곳곳에 먹을 거리, 즐길 거리 신사동쪽 초입에는 ‘스쿨 푸드’라는 김밥집이 있다. 본래 이름은 ‘장아찌 김밥 앤 냉면’이지만 간판은 ‘스쿨 푸드’로 했다는 게 주인의 설명이다. 가격은 치즈롤이 1만원, 스페셜김밥이 6000원.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다. 중국음식을 찾는다면 전면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쿠아이’가 있다. 초롱길 옆에 있다. 가격은 삼선짬뽕이 5000원, 신선짬뽕이 6000원. ‘쿠아이’ 길 건너에는 정통 클래식 공연장 ‘빼아뜨루 삐우’가 있다.‘리골레토’ 등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을 공연 중이다. 가격은 VIP석이 5만원(식사+공연은 7만원),S석은 3만원(식사+공연은 5만원)이다. ‘빼아뜨루 삐우’ 바로 옆에는 와인바 ‘와인다인’이 있다. 낮에는 무료로 맛볼 수 있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와인다인’에서 미래희망산부인과까지는 옷가게들이 많다. 옷가게가 끝나는 곳엔 이름난 레스토랑 ‘에이 스토리(A STORY)’가 있다. 조금 더 가면 살사바 ‘가치’가 있다. 이 곳에 들러 살사리듬에 몸을 맡겨 보는 것도 가로수길에서 느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거리에서 만난 유학생 성현정(29·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씨는 “마치 강남속의 강북처럼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것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옥에 티] 턱없이 부족한 주차시설 가로수길에는 주차장이 없다. 유료 주차장이 2∼3곳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거리주차가 많았고, 교통체증도 삼청동 못지않았다. 주차장을 확충하든지 아니면 아예 차없는 거리로 만드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쓰레기가 많다는 점도 아쉬웠다. 또 하나는 아직은 가로수길을 대표하는 컨셉트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공연 등 문화가 있다는 점에서는 강남의 명소지만 영화면 영화, 디자인이면 디자인…하는 거리의 컨셉트가 분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 그리운 얼굴,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얼굴, 그리운 사람들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던 ‘얼굴’” 글·사진 고은별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 빛 하늘 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날으던 지난 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던 얼굴 우리들의 마음속엔 언제까지나 잊히지 않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할머니, 아버지, 선생님, 누나, 언니, 오빠, 동생, 어릴 적 친구…. 아아, 어머니. 첫눈처럼 아련하게 떠오르는 하얀 얼굴. 피아노를 치면서 <얼굴> 노래를 불러봅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애절하게 다가오는 노랫말과 아름다운 멜로디. 이렇게 가슴 아리게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얼굴>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작곡가 신귀복 선생님과 작사가 심봉석 선생님을 만나 <얼굴> 노래가 어떻게 이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어보았습니다. 고은별 _ 시가 좋고 멜로디가 아름답습니다. 신귀복 _ 작사자가 애인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면서 쓴 시입니다. 1967년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동도 중공업고등학교 교무실에서 같은 학교 생물 교사였던 심봉석 선생이 시를 쓰고 제가 작곡했습니다. 곡을 만들고 피아노로 연주하니까 선생님들이 참 좋아하셨어요. 그 당시 제가 KBS 라디오의 ‘노래 고개 세 고개’에서 노래 심사위원으로 있었는데 오용한 프로듀서에게 악보를 주었습니다. 성악가들이 노래를 불러서 녹음을 했는데 방송에 나가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고 3000 통에 가까운 편지를 받았습니다. 고은별 _ 그렇게 많은 편지를 받으셨나요? 신귀복 _ 네, 답장도 일일이 다 써서 보냈습니다. 감정이 없는 노래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요. 노래는 불러서 좋고 들어서 좋은 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노래라는 것이 만들어서 부르라고 있는 것인데 클래식 음악을 하는 많은 음악가들이 한없이 수준을 높게 만들어서 저 산꼭대기에서 대중들에게 올라 오라 하는데 올라갈 수가 없잖아요. 나는 내가 내려가서 데리고 올라간다, 같이 올라가자 하는 마음으로 곡을 써 왔습니다. 고은별 _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신귀복 _ 제가 어려서 안성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 있는 풍금을 그냥 쳐보고 싶었어요. 손으로 눌러보니까 소리가 나지 않더라고요. 앉아서 발판을 누르면서 쳐보니까 그때 소리가 났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눌러보다가 <아리랑>을 치게 되었고 <도라지>를 치게 되고….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혼자 그렇게 풍금을 치면서 조금씩 화음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고 누가 노래를 부르면 그 자리에서 반주를 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은별 _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신 경험이 많으시죠? 신귀복 _ 밴드 부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서지요. 혼자 독학을 해서 열아홉 살에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저는 교육이라는 것이 나이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지요. “ 배우는 것 자체가 교육이 아니라 행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고 정의한 존 러스킨의 말에 동감합니다. 음악 교육의 목적은 음악의 체험을 통해 아름다운 정서와 인격을 갖추고 교양을 높이는 데 있다고 가르치지만 무엇보다 음악은 쉽고 재미있는 것입니다. 고은별 _ 젊은 나이에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셨어요. 신귀복 _ 자격증을 받고 나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공군군악대에 들어갔을 때 제가 존경하는 홍난파 선생님의 생가를 방문했는데 그때 나도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고은별 _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신귀복 _ 아내와 세 딸이 있는데 첫째는 피아노를 하고 둘째는 그림을 그리고 막내는 클라리넷을 전공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성당 성가대에서 부르는 합창곡도 작곡을 했는데 <풍악을 울려라>라는 곡입니다. 고은별 _ 노래를 듣고 있으면 시가 자연스럽게 노래가 된 것 같아요. 심봉석 _ 노랫말과 음악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노래라는 것이 부르면서 들으면서 생각을 하고 넘어가는 것인데 어려운 말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고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지요. 시작하는 단어들이 노래를 이끌고 가는 계기를 줄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은별 _ <얼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요? 심봉석 _ 교육위원회에서 감사가 나와서 그것에 대비해 교무회의를 하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을 정말 오래 하셨습니다. 하신 말씀 또 하시고 해서 굉장히 지루했어요. 그래서 신귀복 선생님께 제가 “노래를 하나 만들어 보시지요” 라고 말했고, “그럼 자네는 시를 쓰게” 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대로 악상이 떠오른 것을 쓰시고 저는 저대로 생각나는 것을 몇 가지를 정리하다가 쓰게 되었어요. 첫 소절은 거의 서로 상관없이 쓰게 된 것 같아요. 뒷부분은 나중에 고쳤지만요. 교무회의가 끝나자마자 신귀복 선생님과 함께 음악실에 가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곡은 그때 거의 완성이 되었는데 가사를 완성시키는 데 보름 정도 걸렸어요. ‘가화(嘉禾)’라고 하는 클래식 음악다방에서 2절의 마지막 소절을 완성했습니다. 고은별 _ 처음에 이 노래가 만들어졌을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줄 예감하셨나요? 심봉석 _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당시 저는 무명이었고 두 사람이 우연히 합작을 해서 노래를 하나 만든 것이지요. 라디오에서 방송해 준 것만도 너무 고마운 일이었는데 방송이 나가자마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고 악보를 보내달라는 부탁의 편지가 많이 왔습니다. 고은별 _ <얼굴>의 주인공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부인이신가요? 심봉석 _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고은별 _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심봉석 _ 김말순입니다. 저하고 대학 동기동창이에요. 덕수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있다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과만 다른데 서클에서 만났어요. 경상도가 고향이죠. 사귀다가 사소한 일로 틀어져서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낼 때 다른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상하게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얼굴>을 작사할 당시는 그녀와 헤어져 있었던 시기였고 노랫말을 지을 때 그런 기분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그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제 첫사랑인 셈이고 만난 지 9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어요. <얼굴>은 가곡이지만 대중가수들도 많이 불렀습니다. ‘윤연선’이라고 하는 가수가 이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지요. 대학 다닐 때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는데 남자 쪽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했대요.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고 윤연선 씨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 혼자 지냈다고 합니다. 남자친구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 다시 만나 결혼을 했는데 첫사랑 남자의 딸이 아버지와 윤연선 씨의 애틋한 사연을 알게 되어 중매를 서서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얼굴>이라는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잃어버렸던 첫사랑을 찾아준 것일까요? 작곡가와 작사가 두 분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노래에 얽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며 헤어지면서 서로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며 상대를 헐뜯는 사람들이 있어 몹시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비록 떠나간 사람이지만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빌어주며 사랑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았던 어느 여가수가 오랜 세월을 기다려 잃었던 사랑을 되찾은 이야기는 제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는 마음. 우리 모두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히 노래를 불러봅니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도는 얼굴이 있습니다. 아아, 어머니…. ‘박선봉’ 이름 석 자 남기고 돌아가신 그리운 나의 어머니. ※ 작곡가 신귀복 선생님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신 최현순(전 숲속음악원 원장, 피아노 개인교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 <삶과꿈> 2007.03 구독문의:02-319-3791
  • ‘개미’ 한·불 합작 영화로 만든다

    ‘개미’ 한·불 합작 영화로 만든다

    |파리 이종수특파원|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가 한·불 합작 영화로 제작된다. 베르베르는 13일(현지 시간)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감독은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의 김문생이 맡고 두 나라 제작사가 공동 투자하는 프로젝트다.”고 밝혔다. 이어 합작 추진 배경에 대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를 참 좋아한다.”며 “한국 영화는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힘이 있고 내 소설에 대해 가장 먼저, 남다른 열정을 보여 줘 친숙하게 느껴 합작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8일 프랑스 130여개 스크린에서 개봉되는 ‘우리 친구, 지구인’<서울신문 4월4일자>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는 베르베르를 파리 15구 테아트르 31번지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데뷔 영화 개봉을 앞두고 프랑스 25개 도시를 돌면서 시사회·토론회 등 ‘마라톤 일정’을 소화하느라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데뷔작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계면쩍게 웃으면서 “자기 작품 특히 데뷔작에 대해서는 좋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 바 있는 ‘우리 친구, 지구인’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영화로 풀어 보려는 시도다. 에톨로지(동물행태학) 방식을 빌려 출생과 사망, 먹거리 문화, 섹스, 늙어가는 모습 등 인간의 모든 행동 양식을 담았다. 그래서 자궁 속에서 태아가 나오는 장면이나 닭 도살 장면 등 기존에 터부시하는 장면도 많이 넣었고 형식 면에서 다큐기법을 도입하는 실험도 가미했다.” 이어 ‘입봉(감독데뷔)’을 앞둔 소감을 물었더니 데뷔작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다소 예민한 반응이다. 특히 프랑스 영화계의 선입관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친구’는 관객이 외계인의 입장에서 지구인의 생활 양식을 새로 발견하도록 하는 영화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영화계는 흥행이 안될 것이라고 시큰둥한 반응이다. 그들의 잣대는 상업·산업 논리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다.” 그러나 그는 시사회·토론회에서 관객들의 호응에 고무된 표정이다.“어제(12일) 니스 행사에서는 400여명이 시사회장을 꽉 메웠는데 이어진 토론회에도 거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영화관 주인이 ‘스타 배우 한 명도 출연하지 않는 영화에 이렇게 반응이 좋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미국의 반응도 그에겐 힘이 된 모양이다. 오는 9월 열리는 로스앤젤레스 공상과학 페스티벌에 ‘우리 친구,’가 초청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감독 데뷔작의 특징을 ‘새 발견’이라는 말로 압축한 그는 현재 논의 중인 한국 개봉에 대해 큰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개인적으론 한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한국 독자들은 내 소설에도 가장 먼저 반응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한국 젊은이들의 열기가 내 영화와는 친화력이 있을 것 같다.(웃음)”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더니 “한국은 미래를 보는 국가고 한국인들은 성취하기를 좋아한다. 그 역동적 모습이 좋다.”며 “만약 이번 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 반응이 좋다면 내 소설 13편 모두 한국과 합작해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viele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70년간 가사 5000곡 쓴 한국가요계 거목 반야월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70년간 가사 5000곡 쓴 한국가요계 거목 반야월씨

    단장(斷腸)의 고통이란 이런 것일까.1950년 9월초였다.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는 할 수 없이 어린 딸과 피란길에 나섰다. 서울 미아리고개를 막 넘었을 때였다. 허기를 견디지 못한 어린 딸이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 숨을 헐떡이다 그만 명줄을 놓고 말았다. 오열을 토해내던 아내는 정신을 차려 딸의 시신에 간신히 흙을 덮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남편과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몇달 뒤였다.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어느 겨울날, 남편은 아내와 함께 딸이 묻힌 미아리고개 근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딸의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얕게 묻어서 이리 저리 발끝에 차이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여겼다. 남편은 비통한 마음에 아내의 손을 붙잡고 한참동안 흐느꼈다. 저절로 한 편의 시를 썼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작사가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눈물고개/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맨발로 절며절며∼.” ‘단장의 미아리 고개’, 말 그대로 장(腸)이 끊어지는 아픔의 노래다. 이 시는 1956년 이해연의 목소리로 처음 불려진 후 지금까지도 애송되는 국민 가요가 됐다. 이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반야월(90) 선생.191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는 91세인 셈. 부인인 윤경분(86) 여사도 살아 있어 가끔 당시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반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가요사(史)의 백과사전이요, 산 증인이다. 올해로 70년 가요인생을 맞는다. 그동안 무려 5000곡에 가까운 노래를 만들어냈으니 기네스북 등재가 부럽지 않다. 특히 노래비만 해도 ‘울고넘는 박달재’‘단장의 미아리고개’‘만리포사랑’‘소양강처녀’‘삼천포아가씨’ 등 10여개에 달해 생존 가요인으로는 가장 많은 노래비를 가지고 있다. ●청계천 주제로 10곡 선보인다 그는 요즘도 여전히 현역이다. 보통 사람의 나이로 보면 눈과 귀가 멀어 뒷방에 나앉을 법도 하건만 매일 오선지 위에 시를 써내려간다. 최근에도 ‘청계천 트위스트’,‘청계천 엘레지’,‘꿈꾸는 청계천’ 등 청계천을 소재로 한 가사를 10곡이나 만들어 놓았고, 이 가운데 여러 곡이 녹음 중이어서 늦어도 상반기 중 팬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무엇이 그토록 반 선생의 창작열을 달구고 있을까.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에 위치한 한국가요작가협회 사무실에서 반 선생(협회 원로원 의장)과 어렵게 마주 앉았다. 파란 체크무늬 넥타이에 정장을 한 모습이 90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더니 “이젠 잘 안들려. 성질은 급하고 할말은 많은데 말야.”라며 웃는다. 이어 “다리도 좀 쑤시지만 전철타고 다녀.(다리)부러지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있지.”라고 특유의 괄괄한 성격을 드러냈다. 병원에서 가끔 건강을 체크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아픈데는 없다고 했다. 채식 위주의 소식(小食)도 건강비결 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이 나이에 매일 일기 쓰고 4개의 일간신문을 다 보고 살아. 사회면은 물론 사설까지 몽땅. 그러다 보니 잠은 새벽 1시쯤에나 자게 돼. 모든 것이 정신 통일이야. 그리고 말야, 아직까지 작품을 쓰고 있잖아. 그러니 치매 걸릴 틈이 어딨어? 음식? 거 많이 먹으면 못써. 그저 맛있는 음식을 찾아 식도락하고, 즐거움 속에 그냥 소리내어 크게 웃는 거야. 하늘이 놀랄 정도로 말야. 자, 따라해 봐.‘우하하하’, 이게 최고지, 암.” 그는 가끔 택시를 타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자신을 알아보는 운전사에게 자신의 나이를 물으면 70대라고 한단다.“기자양반, 다니다보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 많아. 그러니 내가 세수 안하고 꺼벙하게 다닐 수 있겠어.‘꼰대’소린 듣기 싫거든.”이라며 깔끔한 옷차림을 자랑하는 그다. 최근 작품으로 화제를 옮겼다. 주저없이 서랍 속에서 악보를 꺼내더니 막 작업을 끝낸 ‘꿈꾸는 청계천’을 먼저 낭송한다.‘아, 청계천아 꿈꾸는 청계천아/육백년 긴 세월에 부귀영화 속절없고/임금님께 바친 절개 치마폭에 한을 담고/낙화되어 사라져간 궁녀들의 눈물이여.’ 고저장단, 정확한 발음과 감정이입이 사뭇 감동적이다. 듣는 자세가 진지해서일까. 그는 “자 들어봐, 이번에는 ‘청계천 블루스’야.”라며 다시 낭송을 했다.“네온등 꽃물결에 황혼빛 청계천/새단장 곱게 꾸민 분수가 꿈을 쏟네/그이와 만나자고 약속한 광교다리/퇴근길 늦은시간 가슴만 조마조마/아 서울의 연인이여 청계천 블루스/울어라 색소폰아 밤새워 같이 울자∼.” “어때, 괜찮아? ‘청계천 시리즈’로 10곡을 만들고 있어.(옆에 앉아 있는 작곡가 김병환씨를 가리키며)작곡이 훌륭해. 청계천을 가끔 걷다 보면 이 생각, 저 생각 많아. 그래서 쓰기 시작했어. 이봐, 청계천의 다리가 몇갠줄 알아? 광교, 수표교, 배오개….22개나 돼. 다들 600년의 역사와 한이 담겨 있거든.” ●“‘꼰대´ 소린 듣기 싫다고” 옛날에는 을지로 3가 일대를 ‘스카라 계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남산에서 내려온 물이 스카라 극장 앞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갔다는 것.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일대가 생활무대여서 제2의 고향으로 여길 정도다. 그가 왜 ‘청계천 시리즈’ 노래를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눈 감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어디 (죽는 것도)맘대로 돼야 말이지. 먼저 간 동료나 선배들이 꿈속에서 천천히 오라고 자꾸 그래.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면서 후배들을 이끌고 뒷바라지하라는 팔자지 뭐겠어.”라며 또한번 크게 웃는다. 요즘의 가요계 세태와 관련해서는 “국적 불명의 노래가 많은 데다 기승전결이 없어 영 맛이 없어. 또 듣는 노래가 아닌 보는 노래로 변질돼가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고….”라며 원로다운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제시대 때)노래도 글도 다 빼앗긴 시절에 눈물로 우리 노래를 지켜왔어. 온돌, 김치, 된장만이 전통이 아니라 노래도 전통이 있는거야. 살려야 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매년 한번씩 ‘가요사랑 뿌리찾기 운동’을 펼칠 예정이라면서 살아 있는 동안 전통가요 살리기에 앞장서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본명은 박창오(朴昌吾).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1939년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사가 주관했던 전국가요음악 콩쿠르에서 1등으로 뽑혀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예명은 ‘진방남’.1940년 ‘불효자는 웁니다’로 일약 스타가 된다.1942년에는 작사가 ‘반야월(半夜月)’로 또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이왕이면 곧 일그러질 보름달보다 앞으로 점점 커질 반달이 희망적이라는 뜻에서 ‘半夜月’로 했다. 이밖에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등의 예명으로 암울했던 시절을 노래했다. ●“가요 뿌리찾기 운동 할 거야” 그는 애주가로 소문나 있다. 지금은 부인의 건강 때문에 일찍 귀가하지만 그 전만 하더라도 항상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렸다. 술시(時)가 되면 초걸이(1차)를 시작으로 소걸이(2차), 중걸이(3차)까지는 기본이다. 이 때마다 ‘자, 사랑합시다.’라며 권주사를 드높인다. 가끔 중중걸이(4차)까지 해도 귀가 때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얼마전에는 70여년의 음악인생을 정리한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930쪽짜리 회고록을 펴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흥미진진한 가요사의 이면까지 담아 사료적으로도 중요한 저술이다. 슬하에 2남4녀를 두었으며 대부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 주요 노래 꽃마차, 고향만리 사랑만리, 불효자는 웁니다, 세세년년, 잘 있거라 항구야 등. # 주요 작사 두메산골, 만리포사랑, 무너진 사랑탑, 벽오동 심은 뜻은, 비 내리는 삼랑진, 산장의 여인, 삼천포 아가씨, 유정천리, 울고넘는 박달재, 잘했군 잘했어 등. # 주요 저서 반야월 히트가요 선집, 반야월 명작가요 전집, 반야월 가요야화, 불효자는 웁니다 등.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만능 엔터테이너 조영남(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만능 엔터테이너 조영남(1)

    가수인 동시에 MC 그리고 화가,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가수 조영남(62). 스스로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의외로 히트곡이 많은 가수다. 가수로서 수명 또한 길다.1966년, 서울대 음대 1학년 때 첫 음반 취입을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도 여전히 마이크 앞에 서고 있을 만큼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심지어 군 복무 3년 동안에도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는 특혜까지 누렸다. ‘보리밭’ ‘마지막 편지’ ‘이일병과 이쁜이’ ‘불 꺼진 창’을 비롯해 ‘동해의 태양’ ‘옛 생각’ 등이 모두 이때 취입한 노래들이다.1973년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하던 8년간의 체류기간 동안에도 틈틈이 귀국해 음반 취입은 물론 귀국공연을 수시로 가졌기 때문에 긴 외유에도 불구하고 가수로서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제비’ ‘사랑이란’ 등을 이때 발표했다. 방송 진행자로도 여전히 바쁜 그는 가수로서 트로트와 록은 물론 팝과 옛 노래, 민요나 가스펠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이를테면 ‘크로스 오버 맨’인 셈. 또한 ‘애드리브의 귀재’이기도 하다. 원작곡자 입장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새삼 궁금할 정도로 무대마다 노래를 제각각 다르게 구사한다. 심지어 민요를 재즈로, 또 트로트를 타령조로, 심지어 동요를 솔로 변화시킨다. 때로는 같은 노래를 저렇게 부를 수도 있구나 싶어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드는데 특히 ‘최진사댁 셋째 딸’ ‘물레방아 인생’ ‘내 고향 충청도’ 등은 번안곡임에도 우리 노래보다 더 우리 노래 같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 정도다. 사회 통념을 초월한 듯 보이는 그의 돌발 언행과 돌출 행동으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었던 탓에 인터넷에서는 팬클럽과 동시에 안티클럽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조영남씨는 1968년, 번안곡 ‘딜라일라’로 처음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본인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2년 전인 1966년, 그의 목소리를 담은 첫 음반이 발표됐다. 서울대 음대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고철(高哲)’이라는 예명을 쓰며 작사가로도 활동을 시작했지만 당시 자신의 노래가 음반으로까지 발매된 것은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라 했다. “학비 때문에 미8군 무대에 섰지요. 전공인 성악과 팝 사이에서, 순수 음악과 8군 쇼의 틈바구니에서 고민이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이 무렵 무대에 함께 섰던 여가수 박일양씨 소개로 작곡가 박선길씨를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번안곡 몇개를 개사해 건네주었고 또 테스트 삼아 마이크 앞에서 몇곡 불렀던 것 같아요.” 여기에 등장하는 박선길-박일양 부부는 1990년대 ‘오늘 같은 밤이면’의 주인공인 가수 박정운씨의 부모들이다. 성악과 학생이었지만 ‘오페라나 가곡은 재미없어’ 팝을 더 좋아했다는 그는 성악을 기초로 한 가창력으로 1968년, 번안곡 ‘딜라일라’를 비롯해 ‘내 생애 단 한번만’ ‘고향의 푸른 잔디’ ‘물레방아 인생’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인기가수로 급부상한다. 아울러 Bus Stop,Our Town(서울대), 돈키호테(실험극장)의 무대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내 생애 단 한번만’ ‘푸른 사과’ 등에 출연함과 동시에 TV 드라마 ‘너무하셨어’에서도 열연, 탤런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69년 서울 시민회관에서 가졌던 리사이틀 무대에서 그는 자유분방함과 다재다능한 실력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에는 무대에서 안경을 착용하는 걸 금기시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조영남은 큼지막한 검은 뿔테 안경을 보란 듯이 쓰고 나와 넥타이마저 풀어헤친 채 무대에서 이탈리아 칸초네 ‘카사 비안카(Casa Bianca)’를 ‘하얀 집’이란 제목으로 즉흥적 가사로 바꿔 부르는데 가히 노랫말이 압권이다. ‘시커먼 하얀 집/어쨌든 하얀 집/누가 뭐래도 하얀 집/좌우지간 하얀 집/불이 나면 빨간 집/꺼지면 까만 집/빌려주면 전셋집/팔면은 남의 집/(중략)/닉슨이 사는 The White House.’ 처음엔 지나치게 장난스러운 가사로 시작되지만 끝까지 듣고 나면 그가 지칭하는 ‘하얀 집’은 다름 아닌 당시 ‘미 닉슨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이었다는 익살로 마무리한다. 일종의 풍자송이었던 셈이다.(계속)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개미’ 베르베르 영화감독 데뷔

    |파리 이종수특파원|‘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44)가 오는 18일 프랑스에서 감독으로 데뷔한다. 평소 영화 감독을 희망했던 베르베르의 ‘첫’ 작품은 ‘우리 친구, 지구인’(NOS AMIS LES TERRIENS). 프랑스 전역의 130여개 스크린에 걸릴 예정이다. 베르베르는 1999년 단편 영화 ‘나전 여왕’의 시나리오와 공동 감독을 맡은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장편영화 감독 데뷔는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 포스터에도 ‘베르베르의 첫 감독 작품’이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상영 시간이 1시간25분인 ‘우리 친구, 지구인’은 국내에도 번역·소개된 희곡 형식의 소설 ‘인간’을 토대로 베르베르가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감독을 맡은 영화다. 프랑스의 유명 영화 제작사 ‘필름 13’의 클로드 를루시 대표가 그의 시나리오를 보고 매료돼 제작·연출·배급을 자원했다. 그는 “베르베르의 돋보이는 독창성에 모든 이들이 공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영화 개봉에 앞서 13일 파리 12구 돔스닐가 89번지 ‘에이티나인 갤러리’에서는 베르베르와 주요 배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영화의 주요 장면을 담은 사진 판매전도 열린다. 전시회를 주관하는 안은희 대표는 “개봉에 앞서 사진을 전시·판매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이례적인 일”이라며 “제작사가 이번 영화에 가진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사회장에서 미리 본 영화는 베르베르 특유의 유머와 상상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그들이 우리를 지켜 본다.’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베르베르는 외계인의 시각으로 지구인의 삶과 행동 양식을 미세하게 앵글에 담았다. 영화의 주요 얼개는 외계인에게 납치돼 유리 감옥에 갇힌 주인공 남녀와 그들의 실종 뒤 가족들이 벌이는 다양한 이야기다. 두 상황을 오가며 외계인 화자가 면도, 이닦기, 먹거리, 성 생활 등 지구인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큐 형식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그저 철저하게 관찰되고 조종될 따름이다. 특히 납치된 두 주인공의 부인과 남편의 관계가 동병상련에서 연정으로 발전해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을 X레이 기법으로 처리한 ‘해골 섹스’ 장면은 베르베르의 해학이 잘 묻어난다. 인류학적 고찰을 연상케 하는 이 영화를 통해 베르베르는 인류에 대한 따끔한 경고의 메시지도 던진다. 특히 닭 도살 과정을 상세하게 담은 장면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영화사측은 “베르베르는 첫 감독 작품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며 “현재 빽빽한 일정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화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고 전했다. vielee@seoul.co.kr
  • KF16 정비정보 허위입력

    공군의 전투기 정비·관리체계가 총체적인 부실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달 KF-16 추락사고의 원인이 된 엔진 정비불량 사례가 공군의 직무감찰 결과 동일 기종의 다른 엔진에서도 추가로 확인된 것이다. 공군은 22일 국방부 기자실에서 가진 특별직무감찰 결과 브리핑에서 “당초 정비기록상 부실 부품이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된 KF-16 엔진 터빈 34개 가운데 5개를 임의로 뽑아 검사해본 결과 1개에서 사고기 엔진 터빈과 동일한 부실부품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공군은 “미 제작사가 통보한 점검대상 터빈 60개 가운데 이미 정밀조사를 마친 10개를 제외한 50개를 완전분해해 정밀조사키로 했다.”면서 “정비부실 사례가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18일 사의를 표명한 김성일 공군참모총장도 전날 ‘사과문’을 통해 “직무감찰 결과 군수지원분야의 체계상 부실함을 확인했고 다수의 관련자들이 징계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받았다.”고 밝혀 유사한 부실사례가 공군 전체에 광범위하게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엔진 터빈은 교체대상 부품인 ‘Z’코드 블레이드(날개) 지지대가 부착돼 있었음에도 정비사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항공기 정비정보체계에 허위로 입력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군은 정비사들이 해당 엔진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거나 부품을 발견하고도 제작사측 교체지시를 묵살한 채 정비기록을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비기록 조작 사례는 지난달 13일 서해상에 추락한 KF-16 전투기 사고를 계기로 처음 밝혀졌다. 엔진 제작사인 미국의 P&W사는 1993∼1994년 제작한 엔진의 터빈 블레이드 지지대 가운데 ‘Z’코드가 적힌 일부의 열처리가 잘못돼 강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해당 부품을 2004년까지 교체토록 2000년에 우리 공군에 통보한 바 있다. 현재 공군은 130여대의 KF-16을 주력 전투기로 운용중이며, 엔진 터빈은 172개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50개가 정밀점검에 들어가 비행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전력공백이 불가피해졌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광주찬가’ 예산낭비 논란

    광주시가 기존 ‘시민의 노래’를 대신할 새로운 형태의 광주의 찬가와 ‘교향곡’을 만들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20일 광주시에 따르면 오는 10월 전국체전을 앞두고 국내 최고의 작곡가, 작사가, 가수 등이 참여하는 교향곡과 시민의 노래 ‘광주의 찬가(가칭)’를 제작하기로 했다. 교향곡은 빛고을 광주의 이상과 꿈을 웅장한 교향곡 형태로 표현, 전국체전 개·폐회식 배경 및 주제음악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광주의 찬가는 기존 ‘시민의 노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로 현대적 감각과 누구나 손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 형태로 제작할 방침이다. 새로운 노래가 소양강 처녀(춘천), 목포의 눈물(목포), 서울의 찬가(서울), 부산갈매기(부산) 등 인기 대중가요가 되도록 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시민의 노래’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도 이를 아는 시민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향곡과 노래 제작에 수천만원을 사용하겠다는 방침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최근 울산시가 전국체전 때 제작했던 ‘불매야’는 행사 전후로 반짝 불렸으나 지금은 대다수 시민들이 노래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시민 이모 (40·광주시 서구 치평동)씨는 “관 주도로 만들어진 노래가 대중가요처럼 불려질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산장의 여인’권혜경의 삶과 사랑(2)

    가수 권혜경(본명 권오명·權五明).1931년 삼척에서 출생해 의정부로 이사해 지냈던 유년시절,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당시 조흥은행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녀는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가수모집에 응시, 전속가수 3기생으로 발탁된다.‘사랑이 메아리칠 때’의 가수 안다성씨가 그녀의 방송국 입사 동기다. KBS 전속가수가 된 지 얼마 후 발표하는 ‘산장의 여인’에 이어 그는 당대 최고 작곡가들인 손목인, 이재호, 손석우, 박춘석씨 등과 손잡고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 그리고 1959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 등을 취입한다. 예명 ‘권혜경’은 본인 스스로 지었다. 특히 ‘벼슬 경(卿)’자를 이름에 선택했을 만큼 엘리트 의식 또한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때까지 가요의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창법과는 다른 클래식한 창법으로 등장했다. 권혜경씨는 ‘산장의 여인’을 시작으로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선 지 2년 뒤 1959년, 그녀 나이 스물여덟에 심장판막증 판명을 받으면서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 강행한 음반 취입과 공연 등으로 ‘허리가 18인치까지 줄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투병 속에 연예 활동을 하던 전성기의 권혜경은 또다시 후두암까지 선고받는 등 무려 네 가지나 되는 불치의 병마에 시달린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곡 ‘물새 우는 해변’은 작곡가 박춘석씨가 투병 중인 그녀를 배려해 호흡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원곡의 멜로디 일부를 개작까지 해 건네준 곡이다. 당시 치료차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불해야 했던 치료비가 자그마치 2억 5000만원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착의 대가로 그녀는 당시 매스컴의 보도대로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듯했지만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등 몇 년간의 가수 활동 내내 사투를 반복했다. 노래 ‘산장의 여인’의 끝부분, 한 구절처럼 그녀는 홀로 ‘재생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본래는 수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절에서 목숨을 건진 후 불자가 된다.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청담(淸潭) 스님으로부터 하루 5000배씩 절을 하라는 명을 받고 또 다른 힘든 고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대명화(大明華)’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한때 ‘산장의 여인’을 만들어 부르게 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에게 ‘하필이면 슬픈 노래를 내게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게 했느냐.’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스스로 남은 인생 모두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위로하며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근 50여년 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사형수, 무기수,10대 범죄자 등 재소자들을 격려해오고 있어 수인들 사이에서 지금도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다. 교도소 위문공연, 강연만도 400여차례. 이러한 공로로 권혜경은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 표창을 비롯해 현재까지 표창만도 500여회 수상했다. 한때 그녀의 빨간 통굽 하이힐은 이제 고무신으로, 그리고 무스와 스프레이로 치장했던 화려한 헤어스타일은 어느덧 백발로 변했지만 아직도 가발을 네 개나 갖고 있는 ‘멋쟁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밤은 깊어갔고 이윽고 그녀의 노래가 ‘동심초’로부터 시작되었다.‘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이 노래를 들으며 여전히 혼자인 그녀의 삶과 사랑이 오버랩되었다.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산장의 여인’권혜경의 삶과 사랑(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산장의 여인’권혜경의 삶과 사랑(1)

    가수 권혜경.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산장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흔히들 ‘노래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가수가 권혜경씨가 아닌가 싶다. 그 노랫말대로 운명이 바뀌어 지금껏 살아온, 그러나 대중 앞에서는 늘 웃는 모습만을 보여 주던 가수 권혜경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전 ‘산장의 여인’의 작사가 반야월 선생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어느덧 91세. 그럼에도 하루가 멀다 않고 술자리를 갖는다. 나 역시 얼추 이틀에 한 번꼴은 그 자리에 합류한다. 어느새 5∼6년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노랫말을 쓴 작사가, 동시에 그가 지은 노랫말의 노래비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세워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울고 넘는 박달재’,‘단장의 미아리 고개’,‘만리포 사랑’으로부터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소양강 처녀’,‘삼천포아가씨’까지 무려 아홉 개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만큼 그는 가요계의 산 증인이자 역사다. 그만큼 일화 또한 많다. 술자리에서 반 선생이 불쑥 ‘산장의 여인’의 노래비 또한 세워져야 하는 것 아닐까, 주장하다가 화제는 자연스럽게 권혜경씨의 근황으로 옮겨져 갔다. 문득 그녀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친 김에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사는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바깥출입을 거의 안하고 산 지 오래이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또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일흔다섯의 나이 탓이라고도 했다. 마음에 걸렸지만 무작정 주소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집은 산마을의 거의 끝자락에 있었다.‘백발, 빨간 옷, 눈 주위의 짙은 검정 색조 화장, 때문에 더욱 작아 보이는 얼굴. 주름살 가득한 웃음.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에다가 맨발에 신겨진 검정 고무신….’ 이것이 내가 2년 전에 만난 권혜경씨의 첫 모습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예쁜 집’이다. 열 평 남짓한 정원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정원 한가운데에 움푹 파여진 웅덩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스스로 혼자 팠다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팠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했고, 나중에 본인이 누울 곳이라고도 했다. 이 정도 크기면 혼자의 몸을 충분히 눕힐 수 있다고 했고, 언젠가 누군가 찾아와줄 사람들과 되도록이면 가깝게 있고 싶어 일부러 지면에서 얕게 팠다고도 했다. 그녀의 바람은 이 묘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碑)를 세우고 싶은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산장의 여인’의 바로 그 ‘산장’에 와 있는 셈이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세상에 버림 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권혜경 노래.1957년 발표) 그녀 나이 스물여섯에 발표한 데뷔곡이자 대표곡. 이 노래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작사가 반야월이 마산 결핵요양소를 찾았다가 그 곳에서 보게 된 한 환자복의 여인을 모티브로 해서 즉석에서 노랫말을 지었다. 그리고 이 가사에 작곡가 이재호 선생이 곡을 붙였다. 얼마 전 사석에서 반야월 선생은 당시 의학으로는 쉽게 치료할 수 없었던 불치병, 즉 결핵을 노래로 치유하고 싶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거실은 널찍했고 벽에 걸린 각종 그림과 사진들, 표창장을 비롯해 상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공간은 마치 개인 기념관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벽면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사진들과 현재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섰다가 냉장고 앞에 붙어 있는 글귀에 시선이 멈췄다. ‘나 죽으면 연락해 주세요. 죽은 후 연락처-손성미 02)907-xxxx,019-xxx-0xxx.’ 자필 메모였다. 이 메모 속 ‘손성미’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서울 사는 ‘언니의 딸’이라고 했다. 죽음을 거둬 달라고 부탁할 이가 ‘언니의 딸’이라니. 이렇듯 권혜경씨는 이 ‘산장’에서 줄곧 홀로 지내고 있었다.1994년 5월부터다.(계속)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부고] ‘케 세라 세라’ 작곡·작사가 레이 에번스 타계

    195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 가수 도리스 데이의 히트곡인 ‘케 세라, 세라(Que Sera,Sera)’를 공동 작곡·작사한 대중음악가 레이 에번스가 92세로 작고했다. BBC,AP통신 등은 지난 17일(현지시간) 에번스가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의료센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스페인어인 ‘케 세라, 세라’의 뜻은 ‘될 대로 돼라, 혹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에번스는 음악 단짝인 제이 리빙스턴과 공동으로 작사·작곡 등 음악 활동을 했다.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의 주제가인 ‘케 세라, 세라’로 아카데미상 영화음악 부문을 수상했었다. 그는 리빙스턴과 함께 모두 7차례에 걸쳐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됐고 1948년,1950년,1956년 등 3차례 이 상을 받았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박성서의 가요X파일](2)‘산너머 남촌에는’의 박재란

    [박성서의 가요X파일](2)‘산너머 남촌에는’의 박재란

    ‘삼천만의 연인’이었던 ‘꾀꼬리가수’ 박재란씨는 빼어난 외모만큼이나 당시 옴니버스 음반들의 커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데뷔 때부터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음반 재킷을 장식했던 가수가 바로 박재란씨로 필자가 확인한 것만도 무려 100여종. 아울러 스크린에도 진출,1959년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손석우씨가 주제가를 맡은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에서는 미남, 미성의 가수 손시향씨와 함께 특별 출연해 주제가와 함께 연기를 선보였고 이어 1961년, 영화 ‘천생연분(박성호 감독)’에서는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했다. 또한 1962년 발표된 히트곡 ‘님’은 가사 중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타이틀로 이듬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아울러 이 노래 ‘님’은 2001년, 작사가 차경철씨 출생지인 울산의 대운산 입구에 노래비까지 건립됐다. 방송과 영화, 취입과 공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전국을 누비던 ‘박재란 쇼’는 언제나 몰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약으로 버티면서도 하루에 무려 30곡이나 되는 노래 연습과 취입을 해야 했어요. 젊었을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의 환호가 가장 큰 힘이었지요.” 무대에서 생긴 병은 다음 무대에서 치유되었을 정도로 그에게서 노래는 어려움을 이겨낸 치료제이자 면역력을 키워준 힘이었다.‘대중들 앞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그에게도 비로소 ‘자신만의 인생’이 펼쳐진다.1959년, 영화주제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연습하기 위해 작곡가 김광수씨 집에 갔다가 운명처럼 남편 박운양씨를 만난 것. 동갑내기이자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던 박운양씨는 작곡가 겸 연주인 김광수씨가 출연하는 ‘무학성 카바레’의 단골로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1989년 ‘한번만 더’로 사랑받았던 가수 박성신씨다. 아울러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께 쇼 단체를 만들어 전국 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세상일을 모르고 살았던 이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평 남짓하던 서울 후암동 2층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전락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이혼을 택한 뒤 1973년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LA에 도착한 그는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재기에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며 방송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따금씩 귀국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는 투서사건이 발생, 국내 활동이 일체 중단되자 그 역시도 점차 대중들로부터 잊혀져 갔다. 더구나 1979년, 아파트 화재로 모든 걸 잃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의 생활은 재기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그 집념이 병이 되어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악성 위궤양으로 발전,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유년시절 숱한 잔병치레를 통해 강한 면역력을 키운 동시에 어려웠던 시대를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던 가수 박재란. 이제 그는 스스로 ‘긍정적으로 대할수록 긍정적으로 되는’,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듯 여겨졌다.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던 그, 스스로의 ‘피그말리온 효과’는 지금에 와서 새삼 그를 지탱해주는 에너지이다. 현재는 선교활동을 통해 ‘노래하는 전도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1년만에 22집 앨범 혜은이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1년만에 22집 앨범 혜은이

    인생의 열정은 과연 섭씨 몇도일까. 사랑이 섞인다면 그 뜨거움은 간단치 않다. 굳게 닫힌, 아무리 차가운 가슴도 봄햇살에 눈녹듯 스르르 녹이겠지. 더욱이, 가슴 터질 듯한 열망의 사랑이라면 목숨까지 걸고도 남겠지. 열정이 없는 인생이야말로 생명력을 잃은 얼음조각과 다를 바 있을까. 열정을 찬란한 태양에 비교한다면 그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터. 문득 떠오른다.‘아야, 희망과 열정을 품으면 인생은 마술인 것이여.’ 지금부터 꼭 20년 전이다. 국민 작곡·작사가로 유명한 김희갑·양인자 부부는 자신들의 불같은 러브스토리를 담은 노래 ‘열정’을 만들었다.‘안개속에서 나는 울었어/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무려 3000여곡을 만든 이들 부부는 지금도 가장 ‘열정’을 좋아한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혜은이(51) 또한 ‘열정’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됐다.1980년대 가요계를 평정한 원동력도 ‘열정´ 그대로였다. 그러던 1990년대초, 그야말로 ‘잘나가던’ 시절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방송계와 가요무대를 훌쩍 떠나버렸다. 이후 나름대로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견디며 2002년 경기도 미사리 조정경기장 인근에서 ‘열정’이라는 카페를 차렸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전국의 팬들이 찾아왔다. 이심전심, 팬들의 열정이 한 군데 모아지고 정기적인 모임까지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5월부터 전국 순회 ‘열정 투어´ 2004년 봄, 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직접 작곡·작사가까지 섭외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선물했다. 이는 ‘영원한 혜은이’를 향한 ‘열정의 발라드’였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혜은이는 ‘이제는 울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용기를 얻어 일어섰다. 신곡 3곡과 1979년도에 발표된 ‘제3한강교’를 리메이크해 ‘강해야 돼’라는 타이틀곡의 음반을 최근 제작하고 방송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 이는 1996년 ‘이 어둠에 서서 하늘을 보면’ 이후 11년만에 22번째 독집 앨범 출시와 함께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아울러 내친김에 오는 5월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는 ‘혜은이 열정투어’에 나선다. 그동안 기다려온 팬들과 뜨거운 체온으로 현장에서 만날 예정이다. 한 여인으로, 어머니로 한동안 음지에서 살아왔던 왕년의 톱가수 혜은이. 금쪽같은 40대를 보내고 나이 쉰하나에 제2인생의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혜은이를 만났다. 때마침 저녁 방송 스케줄 때문에 케이크와 커피로 미리 요기를 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전성기 때보다 약간 살이 쪄 보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동안(童顔)이었다. 게다가 짧은 머리에다 청바지 차림이어서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게 보였다. 비결을 물었더니 “자주 웃어 주름살이 생길 법도 한데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그런가 봐요.”라며 호호 웃는다. 22번째 앨범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왔다. 혜은이는 2002년 3월 아침방송에 잠깐 출연했다가 ‘열정’이라는 카페를 차렸다는 얘기를 하게 된다. 이를 전해들은 팬들이 카페로 찾아오면서 팬카페가 생겨났다. 혜은이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매년 2∼3차례씩 갖는 정기모임으로 발전했다. 그러던 2006년 봄 어느날, 팬들이 혜은이에게 찾아와 소중한 선물을 하나 선사했다.‘강해야 돼’‘여전히’‘난 네가 좋아’ 등 신곡 3곡이었다. 작곡은 평소 혜은이가 좋아하는 추가열·홍진영씨가 맡았다. 우울증 등으로 방황을 거듭하던 혜은이에겐 너무나 뜻밖의 선물이었다.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열성팬 50여명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작곡비를 충당했다는 사실.30대 중반에서 50대까지 동참하는 열성팬들은 개인사업 등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라고 귀띔한다. “금액도 밝히지 않고….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에요. 너무 고맙기도 하고 눈물이 막 나올려고 했지요. 나태하게 지낸 제 자신한테 부끄러웠고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용기를 얻었고 막중한 책임도 느낍니다.” ●‘제3한강교´ 원래 가사 되살려 리메이크 음반제작에 들어가면서 혜은이는 ‘제3한강교’를 리메이크했다. 원래 ‘제3 한강교’ 발표 당시 가사 중 일부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부분적으로 개사됐다.‘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로 쓰여진 부분이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로 수정됐다. 또 ‘젊음은 갈 곳을 모른 채’라는 부분이 젊음을 우울하게 했다는 심의당국의 요구에 따라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으로 바뀌었다. 혜은이는 “지난 27년간 금지된 가사에 마음이 너무 걸렸다.”면서 “이제 잃어버린 가사를 되찾아 다시 부르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신곡 ‘여전히’는 애절한 발라드 풍으로 혜은이 특유의 고운 음색이 담겨 있다. 또 경쾌한 리듬의 ‘강해야 돼’와 탱고 리듬의 ‘난 네가 좋아’에서는 요즘 가요계에서 접하기 힘든 맑고 청아한 호소력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10여년 동안 혜은이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1990년 탤런트 김동현(현재 드라마 ‘대조영’에서 거란의 ‘가한’으로 출연 중)과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을 낳게 된다. 불행하게도 남편이 영화제작자로 나섰다가 부도를 맞게 됐고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동료 가수가 맡겨둔 곗돈을 홀라당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이 키우랴 남편 부도 막아내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신곡을 내야 하는데’ 하면서도 다시 가수활동을 한다는 것이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그러던 2002년 2월 3년 계약으로 미사리에 카페를 마련했다. 하지만 열정이 되살아나지 않아서인지 하루하루 그럭저럭 꾸려나가는 꼴이었다.2003년 1월에는 집 가까운 곳에서 모시던 친어머니가 76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한동안 의욕상실에 빠졌다. 그해 8월15일에는 자궁에 물혹이 생겼다는 진단으로 적출수술까지 받게 됐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다 수술로 이어지면서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겨나더군요. 가게도 안 나가고 계속 우울한 감정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어요. 남편에게 괜히 짜증내고, 제 몸을 어떻게 추스를 수가 없더군요. 식구들도 안타까워했지요. 결국 남편과 아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회복될 무렵, 진심어린 팬들과 만나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 다행히 남편의 부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그는 “미사리 카페를 운영하는 동안 솔직히 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건 행운이었다.”고 의미 부여를 했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가요계도 그렇지 않겠느냐고 하자 “세상 흐름이나 가요계나 너무 인스턴트화되는 추세다.(가수들의)인기도 일회성이 많고 롱런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강해야 돼…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혜은이는 제주 출신. 어릴 적 쇼단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전의 호수돈여고를 졸업할 무렵인 1972년 집안형편이 어려워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1975년 작곡가 길옥윤씨를 만나 ‘당신은 모르실거야’라는 타이틀곡으로 공식 데뷔했다. 이후 ‘제3한강교’‘진짜 진짜 좋아해’‘감수광’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1970∼80년대의 빅스타로 풍미했다. 현재 동료 가수들 중에는 이은하, 남궁옥분, 현숙 등과 친하게 지낸다.“노래방에 가면 ‘입영열차 안에서’ 등 젊은 가수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며 웃는다. 현재 남편과 아들, 세식구가 서울 방배동에 살면서 독실한 신앙생활(감리교 권사)과 어렵게 되찾은 웃음으로 새로운 열정의 온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신학기 고1년생이 되는 아들이 앨범이 나오자 “엄마, 노래 좋은데.”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모습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요즘 침체 분위기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타이틀곡을 ‘강해야 돼’로 했단다.‘강해야 돼 울지마/세상이 우리를 또 속일지라도/안돼 안돼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의 가사처럼. ■ 그가 걸어온 길 ▲1956년 제주시 출생(본명 김승주) ▲72년 대전 호수돈여고 3학년때 노래인생 시작. ▲75년 작곡가 길옥윤씨의 ‘당신은 모르실거야’ 음반으로 공식데뷔. ▲77년 MBC 주최 서울가요제 가수왕(당신만을 사랑해),KBS 10대 가수상,MBC예술대상. ▲78년 태평양가요제 2위 ▲79년 MBC 10대 가요제 최고인기가수상. ▲이후 ‘파란나라’‘열정’‘제3한강교’‘진짜 진짜 좋아해’‘감수광’‘울지 않아요’‘영원히 당신만을’‘새벽비’‘잊게 해주오’‘질투’ 등 히트곡만 수십곡 발표. ▲2007년 1월 22번째 독집 앨범 ‘강해야 돼’에 신곡 3곡 발표. km@seoul.co.kr
  • [12·14 서비스산업 대책] 눈길 끄는 정책 7가지

    이번 ‘서비스산업 종합대책’에는 눈길을 끄는 정책들이 대거 포함됐다. 모두 서비스 산업 경쟁력을 높이면서도 일반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개선 방안들이다.먼저 문화접대비 도입이 눈에 띈다. 오는 2008년부터는 기업이 접대를 목적으로 전체 접대비 한도액의 5%를 초과해 연극·오페라·전시회·운동경기 등 공연관람권으로 지출하면 ‘문화접대비’로 인정받아 추가 손비 혜택을 볼 수 있다. 전체 접대비의 10%까지 가능하다. 정부는 지난해 손비로 인정된 접대비가 5조원에 이르렀던 점을 감안, 이 제도 도입으로 매년 5000억원의 손비가 추가로 인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법적 근거없이 관광호텔 식음료에 부과되는 ‘10% 봉사료’도 폐지되는 쪽으로 추진된다. 봉사료라기보다는 사실상 직원에게 지급되는 일종의 급여로서, 가격 상승만 초래한다는 업계의 지적을 수용했다. 정부는 업계에서 자발적으로 폐지하도록 제도적 인센티브를 준다는 방침이다.차이나타운 활성화 방안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차이나타운이 없다.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인천 중구를 차이나타운으로 지정하고 ‘지역특화발전지구’로 육성한다는 복안이다.‘여름휴가 분산제’도 실시된다.7∼8월에 휴가가 몰리면서 교통혼잡과 숙박난, 바가지 요금은 물론 관광 업체도 기회비용 문제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다. 공무원·정부투자기관 종사자부터 우선 실시된다.식품유통기한 표시 규제도 바뀐다. 유통기한 품목 가운데 품질 변화가 느리고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아 먹어도 인체에 전혀 문제가 없는 품목은 기존 유통기한 표시 이외에 ‘품질유지기한’을 함께 표시한다. 내년부터 시범 실시된다.아울러 골프장내 숙박시설 설치 구역과 숙박시설 규모에 대한 제한을 완화한다. 골프장내에서 체류하도록 유도해 수익 증대를 꾀한다는 취지다. 골프장 거리 단위도 야드가 아닌 미터로 통일된다.또 최근 스크린쿼터 문제가 불거지면서 극장과 제작투자사간에 의견 대립을 빚고 있는 극장부율, 즉 ‘입장수익 배분비율’도 개선된다. 한국영화와 외화가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유도된다. 현재 한국 영화의 경우 극장 대 제작사가 6대4, 외화는 5대5로 수익을 배분한다. 이밖에 오토캠핑장을 2010년까지 32곳으로 확대하고,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궁 등의 야간개장 시간도 연장한다. 국내외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도로교통표지판 제도도 개선된다.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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