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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인들 한국문학에 높은 관심

    ◎불 국립도서센터 주관 「한국문학 포럼」 열려/최인훈씨 등 초청작가 13명 앞자리에/현지 출판인·문인들 “한국문학 본격소개 계기” 28일 하오(한국시간 29일 상오)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올리비에 메시엥 홀에서 열린 「한국문학포럼」행사는 현지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속에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장에는 전날 밤 이곳에 도착한 시인 고은 신경림 황동규씨,소설가 최인훈 김원일 박완서 오정희 윤흥길 이균영 이문열 조세희 최윤 한말숙씨 등 초청작가 13명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을 비롯,자문위원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윤식 김치수 이선영 윤지관씨,한국문학의 번역소개에 앞장서온 파트릭 모뤼스 성대 교수등의 모습도 보였다. 프랑스측에서는 한국문학출판에 앞장선 악트쉬드 출판사 우베르 니센 사장과 베르트랑피 편집장을 비롯해 문학전문지 마가린 리테레르 기자 시몬느 아루스,시인 알랭 제오프르라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행사를 주관한 프랑스 국립도서센터의 장 세바스티앙 듀피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들간의 진정한 대화와 만남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된 문학포럼은 작품번역을 유도하고 독자층의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아시아 대륙의 오랜 지혜로 성숙해 있고 고통과 해방의 역사를 극렬하게 체험한 한국문학의 대표적 문인들이 참석해준데 대해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답사에 나선 장선섭 주불대사는 『한국문학포럼은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한국인과 프랑스인간의 이해를 높일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한국문학 소개를 맡은 모뤼스 교수는 한국문학이 특성을 「비극성,짧은 형식,역사지향』으로 요약했다. 초청대상 인터뷰,자작소설·시낭독 등으로 꾸민 비디오가 불어자막과 함께 1시간여 상영됐는데 이 비디오에서 황동규시인은 『작곡가가 되려고 화성학을 공부했다가 자신이 음치라는 사실을 알고 음악을 포기하는 대신 가장 인접한 장르인 시를 선택했다』고 밝혔다.소설가 한말숙씨는 남편인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씨 못지 않은 솜씨의 가야금 연주를 들려주어 인기를 모았다. 지난 70년대 한국에서 생활했으며 한국문학의 열렬한팬이라고 밝힌 한 프랑스인 신부는 『한국문학 특유의 색채를 섬세하게 드러내기엔 미흡했지만 이번 행사가 프랑스에 한국문학이 적극 소개되는 디딤돌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프랑스 문화성 산하 국립도서센터에서 외국문학의 실상을 국내에 소개하고 활발한 출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펼치는 「외국문학포럼(레 벨레트랑제)」의 일환.지난 87년 브라질을 첫 대상으로 막을 열었으며 우리나라는 25번째 초청국가다. 우리문인들은 포럼기간 동안 파리시내 퐁피두 센터,국립도서센터,작가의 집,프랑스 펜클럽 등과 보르도,몽펠리에,엑상 프로방스,라로셀,에브레,페리줴,랭 등 지방도시 및 벨기에 브뤼셀을 돌며 토론회·시낭송회·작가와의 만남 등 총 25개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한국문학의 독창성」「한국문학에서의 여성의 위치」「문학과 참여」「서울문화 19 95」등의 주제로 열릴 토론회에서는 아니 에르노,이자벨 라캉 등 우리 귀에 익은 프랑스 현대작가들도 참여,양국간 문화적 이해를 위한 열띤 토론을 펼칠 예정이다. 본행사개막에 맞춰 삼성문화재단 후원으로 퐁피두센터와 주불문화원에서 한국어린이 그림책 및 원화전시회가,파리 기메박물관에서 한국문학작품 원작영화 11편이 총 22회에 걸쳐 상영돼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세계에 가장 큰 영향끼친 사람/레닌­아인슈타인­쇤베르크순

    ◎김정환씨,「20세기를 만든 사람들」 눈길/각분야 120여명 삶 소개한 인물평전 20세기를 이끌어 온 정신은 무엇인가.21세기를 코앞에 두고 인물 중심으로 지난 한세기를 평가한 책이 나왔다.시인이자 소설가,평론가인 김정환씨가 최근 낸 「20세기를 만든 사람들」(푸른숲 출간)이 그것. 이 책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각 분야 인물 1백20여명의 삶을 소개함으로써 현대사 흐름을 되짚어 보았다. 인물평전 모음이라는 단순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남달리 눈에 띄는 까닭은 독특한 역사관을 담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등장인물들의 영향력에 따라 1위부터 74위까지 순위를 매겼다.객관성이 있느냐는 둘째치고 이같은 방법은 지은이의 지향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첫손가락에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을 꼽은데 이어 2위에 특수상 대성이론을 개발한 아인슈타인,3위에 12음계를 창시한 작곡가 쇤베르크를 선정했다.나머지 10위까지는 간디(비폭력운동 제창)­프랭클린 루즈벨트(미국 대통령)­스탈린(소련 지도자)­히틀러(나치 지도자)­처칠(영국수상)­카프카(「변신」의 작가)­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의 순이다. 이 가운데 현대음악의 막을 연 쇤베르크는 『그가 도입한 음악세계의 혁명이 다른 온갖 정치·사회적 혁명보다 더욱 근본적이기 때문』에 뽑혔다.히틀러에 대해서는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세계사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놓은」영향력을 높이 샀다.자본주의 세계는 히틀러를 통해 스스로 추한 모습을 깨달았고,덕분에 「겉모습이 추한」자본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평가이다. 지은이는 또 문화·예술계 인물들을 20세기 주역으로 대거 등장시켰다.제임스 조이스(작가),조르주 브라크(화가),바슬라프 니진스키(무용가),잉그마르 베르히만(영화감독),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들이 20위 안에 들었다.대중의 우상인 마릴린 먼로,비틀스,엘비스 프레슬리,스티븐 스필버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지은이는 21세기를 바라보며 『정치·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정치·이데올로기 또는 유토피아 전망은 뼈아픈 실패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 그는 예술이 21세기를 이끌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 성악가 김자경(인물탐구:86)

    ◎오페라와 결혼한 “영원한 프리마 돈나”/“독특한 릴릭 소프라노” 50년 미 카네기홀 진출/68년 자비로 「오페라단」 창단… 정기공연 49차례/지난 10월 국내 첫 야외오페라 무대… 최근 국악에 입문 「앵두나무 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파랑새가 방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김자경을 낳았다」는 그 어머니는 「새소리가 어찌나 맑고 투명하던지 나의 딸 자경은 노래하는 사람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딸은 지금도 독창회 무대에 서서 「불굴의 오뚝이」「작은 거인」 「분투의 또순」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할바와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의지의 원로다.얼핏듣기엔 드세고 거센 여장부의 이미지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해맑은 미소와 화사한 「이팔청춘」의 마음씨에서 우리의 「영원한 프리마 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지난해만해도 희수기념 독창회를 비롯,올해도 불우이웃들을 돕는 호스피스 건립기금을 위한 독창회를 열었고 연말에도 자선음악회 스케줄이 잡혀있다.벌써 19번째다.지난 75년당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수운전을 하고 돋보기 없이 글씨를 읽고 쓸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신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는 맹인들의 개안수술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안수술 사람은 50여명이 넘는다.「두손을 모으고 마치 기도하듯,신을 찬미하듯 혼신을 다하는 그의 노래는 진심으로 그들이 눈뜨게 되기를 비는 순수함과 열정이 담겨있다」는 게 작곡가 김동진씨의 말이다. ○맹인 50명에 개안수술 만년의 그의 독창회중 가장 감명깊은 것은 4년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결혼 50주년 기념」독창회라고 할 수 있다.수많은 자선음악회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노래한 이 무대는 그의 부군이자 서양화 일세대였던 심형구화백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리움」「못잊어」「그대있음에」「청산에 살리라」등 「부군에 대한 사모」의 정이 절절히 넘쳐 청중에게 찡한 감동을 안겨주었다.「나의 일생을 맡긴지 21년,2남1녀와 함께 나의 수많은 연주를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이 그는 예고도 없이 떠나가버렸고 29년이란세월을 혼자서 살면서 그 파란만장한 사연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날 음악회 팸플릿에 쓴 글이다.그러나 『68년 성은 「오」씨이고 이름은 「페라」인 오페라와 결혼했고 이제는 김자경이가 오페라인지 오페라가 김자경인지 분별할 수 없이 일체가 되었다』고 일가를 이룬 예술가다운 의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김자경은 경기도 개성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김영환씨와 백열소여사의 외동딸로 태어났다.3살되던해 서울에서 감리교 신학교에 다니게 된 부친을 따라 이사,이화유치원과 이화보통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원산에서 루씨여학교를 나왔다.그는 노래 뿐만 아니라 운동에서 미술 수학 물리 화학등 못하는게 없었고 언제나 전교수석,어릴 때부터 오페라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아들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도쿄여의전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그러나 도쿄로 떠나기 전날밤 그는 어머니를 붙들고 「어머니가 동생하나만 더 낳았어도 나는 성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한탄한 것이 부모의 마음을 움직여 부친은 당장 「성악을할것」을 권해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성악공부는 이화여전을 졸업하던해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신인음악회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고 도미유학길에 오르기전까지 이화여고에 임시음악교사로 취직한 것이 심형구씨를 만난 계기가 된다.도쿄미술학교출신의 「멋쟁이화가」 심형구와 「만인의 애인」이자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 김자경의 러브로맨스는 숱한 화제를 장안에 뿌리면서 41년 12월 드디어 결혼,「가정과 예술을 병행시키는 멋진 가정을 이루자」는 다짐과 함께 부군의 주선으로 김자경은 31세 되던해 오랜 숙원이던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의욕적인 출발과는 달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서 세기적인 소프라노 릴리폰즈의 노래를 듣고는 자신의 음악적 자질과 소양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는 한동안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단한번도 의심해 본적 없던 자신의 기량이 거대한 오페라가수 앞에서 무색해진 순간이었다.「메트로폴리탄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를 자책하며 밤새도록 흐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몽사몽간에 「너는 왜 세계적인 성악가만을 고집하는가.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계무대에 세우라」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때마침 미국에 다니러 왔던 김활란박사도 「나는 릴리폰즈보다 네 목소리가 백배 더좋다」고 격려해주었다. ○31세때 줄리어드 입학 『그래,나두 해내고야 말겠다』 그는 굳게 결심하고 그 길로 지도교수를 찾아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 서겠으며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교수는 놀라서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하려면 먼저 학교측이 주최하는 오디션에서 통과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그는 7명의 심사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벨리니의 「노르마」중 「카스타티바」를 열정적으로 불렀고 「독특한 음질의 아름다운 릴릭 소프라노」로 인정되어 195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가수들과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카르멘」에 출연,남부 60개 도시에서 80회연주를 비롯,한번 투어에 나서면 3개월이상 걸리는 전미순회공연에도 빠지지 않게되었다.그러나 좋은 일에는 흔히 마장이 생긴다고 한 것처럼 그가 「종달새처럼 푸른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며 노래부르고 있을 때」 그해 62년 여름,방학을 맞아 속초로 스케치여행을 떠났던 부군의 익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전신마비 증세를 일으키는 등 긴 슬픔에서 헤어나기까지 실로 오랜시간이 걸렸다.그러다가 65년 봄,호화여객선 빅토리아호를 타고 세계일주 여행길에 오르면서 48세의 나이로 「퀸 오브 빅토리아」에 선발되자 당선 사례로 아르디티의 「일바치오」와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동안 그의 내부 깊숙이 움츠려있던 프리마 돈나의 기백과 보석 같은 기량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불굴의 투지” 여장부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계획했던 대로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그리고 그해 5월 창단기념공연으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준비하면서 티켓을 들고 각기업체와 동창 후배들을 찾아다녔다.그러나 그들의 호의와 적극적인 협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더이상 버틸 수 없이 창단 3년만에 문을 닫는 위기를 맞는다. 그는 자살을 생각했으나 「죽을 결심으로 뛰어들면 안될 일이없다」고 다시한번 자신을 일깨웠다.그때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진 고초와 수난과 시련」을 거치면서 후원회와 고정관객 확보로 그의 오페단은 서서히 기반을 잡아나갔다.오페라단창단 만27년에 정기공연 49회,4년전부터 이사장직에 머물면서 지난 10월에는 1만2천명을 수용하는 잠실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레하르의 3막 오페라 「메리 위도우(즐거운 과부)」로 국내 처음 야외오페라를 해냈고 내년도 제50회 「카르멘」 캐스팅을 위해 최근에는 뉴욕에 다녀왔다. 호는 심설,「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이루어진다(정신일도 김석가투)」는 그의 신조는 여전히 손수 차를 몰고 지난봄에는 한양대대학원 국악과에 입학,새로 우리「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줄기찬 한 흐름속에서 그는 불굴의 의지로 우뚝선채 음악성취 뿐 아니라 그늘지고 병든 이들에게 「이세상의 빛」을 실천하는 「천사」이며 그들을 위한 그의 목소리는 시들줄 모르는 「영원한프리마 돈나」로서 우리시대에 찬연한 빛을 발한다. ◇연보 ▲1917년 경기도 개성 출생 ▲40년 이화여전 졸업 ▲41년 제1회 독창회 ▲48∼50년 미 줄리어드음악학교 성악전공,「라 트라비아타」주역,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51∼58년 미남부 60개 도시순회공연,귀국독창회 ▲58∼83년 이대성악과 교수 ▲60년 오페라 「오델로」주역 ▲62년 국립오페라단 부단장 ▲65년 유럽지역 성악교육시찰 ▲68년 김자경오페라단창단,단장.베르디 「춘희」이후 49회 공연 ▲75년 제1회 「김자경 가곡의 밤」,국제음악인대회(IMC) 참가 ▲79년 김자경 오페라 관현악단창단 ▲81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82년 한·미수교1백주년 기념독창회(워싱턴 케네디센터) ▲86년 김자경 오페라단 소극장 청소년부 창설기념 「노처녀와 도둑」 공연 ▲87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88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91년 결혼 50주년기념 독창회 ▲93년 홍난파선생 추모독창회 ▲94년 희수 독창회 ▲95년 호스피스 건립기금마련 독창회(19회),한양대대학원 재학중,김자경 오페라단 이사장 대한민국 예술원상·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74년)·중앙일보문화대상(76년)·국민훈장 석류장(83년)·세종문상(87년)·프랑스 문화예술훈장(92년)·문화공로패(93년)
  • 불 바스티유 오페라단/“옛 명성 되찾자” 새 도약 시작

    ◎지휘자 정명훈씨 축출에 노사갈등 겹쳐 “내홍 1년”/위그 갈 새 사장 취임뒤 신작 「나부코」 히트… 경영 호전 정명훈씨가 프랑스 파리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마지막 지휘봉을 놓은지도 1년이 지났다.그가 떠난 바스티유 오페라는 한때 폐관의 위기를 맞는듯 했으나 지금은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바스티유 오페라는 정명훈씨가 떠난뒤 숱한 내홍을 겪었다.장 폴 클루젤 전임사장과 위그 갈 신임사장간의 불협화음이 지난5,6월 더욱 심해져 바스티유 오페라의 위기도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오페라는 준비했던 오페라가 공연 직전에 전면 취소되는 바람에 9백만프랑(한화 약 13억5천만원)의 손해를 입어 경영도 더욱 악화됐었다.때문에 오페라의 대중화를 위해 프랑스 혁명 2백주년을 기념해 창립한 바스티유 극장이 문을 닫게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바스티유 오페라의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큰 요인은 노조와의 협상.노조는 3.2%의 임금인상에다 상여금의 일부가 급여에 포함되도록해 사실상 상당한 임금인상 효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런 위기도 지난 8월 위그 갈 사장이 정식 취임함으로써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위그 갈 사장은 클루젤 전임사장측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바스티유 오페라의 폐관 가능성을 일축해 노조를 안심시켰다. 경영개선을 위해 전문경영인 출신의 필립 아지드씨를 재정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정부로부터 공공보조금으로 5억6천만프랑(한화 8백40억원)을 끌어오기도 했다.위그 갈 사장의 자구노력은 외부적인 변수도 작용해 경영여건은 더욱 좋아졌다.노조가 정부의 내년 공무원 임금동결방침에 자극받아 노사협상에 순순히 응해준 것이다.바스티유 오페라가 지난9월9일부터 한달간 공연한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1813∼1901)의 「나부코」도 히트를 쳤다. 위그 갈사장의 취임 작품인 「나부코」가 계획될때만 해도 사실 주변 사람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무대장식비에만 4백만프랑(한화 6억원)이 들어갔고 「나부코」가 잘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때문이다.「팔스타프」같은 희가극을 공연하거나 「춘희」「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등의 유명작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부코」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서 이탈리아의 질곡을 나타내고 있는데다 베르디가 부인과 두아들을 잃은 직후의 진한 슬픔이 강하게 배어있다.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깨고 「나부코」는 예상밖의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그 갈 사장 시대를 맞은 바스티유 오페라는 「나부코」의 대성공과 함께 창립6년만에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그는 정명훈씨가 바스티유 오페라를 떠나게한 정본인이지만 경영에는 귀재인 것같다.
  • 음악 평론가 이강숙씨(이세기의 인물탐구:85)

    ◎음악미학의 본질 꿰뚫는 이론가/찬사 일변도의 평을 거부,혹평으로 더 유명/“악기의 노예 만들지 말라” 어린이교육 경고/최근엔 그림동화집 「음악천사의 사랑」 발간해 눈길 이강숙(음악 평론가) 「타협을 모르는 직선적인 성격」「한국음악 발전을 위한 해박한 이론과 지식」「탁월한 지도력과 아이디얼리티」는 음악평론가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 교장을 표현하는 수사들이다.그는 일관성없는 찬사일변도의 평을 거부하여 호평·혹평을 선명히 가리는데 앞장서 왔고 서양음악만이 음악으로 간주되는 인식변환을 위해 지난 90년 음악의 모국어를 탐색한 「한국음악학」을 출간했을 때는 「1백년 안에 나올 수 없는 역저」로 음악계는 온통 이를 찬사해마지 않았다. 「인간은 왜 음악을 하며 그것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또 어떤 사람들은 대중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고전음악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속에서 현란하게 변화해 가는 음악의 존재와 「자연의 심장은 모든 부분이 바로 음악」이라는 칼라일의말에 접근하면서 이 책은 「음악을 왜 하는가」란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다. 「상투적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투철하게 바라보는 그의 천부적 직관」은 음악과 관련된 작은 단서하나에도 결코 무심하지 않아 음악에서 「생명력」이 없거나 악보속에 숨겨진 기쁨과 슬픔을 발견하지 못하는 연주는 가차없이 혹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80년대초 전국의 교향악단이 참가하는 「교향악 축제」를 보고 「서울 지방간의 수준차를 절감하는 기회가 아니라 각기 다른 지방의 음악문화를 즐길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을 촉구한 일과 당시 부산시향의 연주를 향해 「아무리 지방악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휘봉을 흔드는 법이 어쩌면 그렇게 천편일률적일까」를 통박하고 「여운이 없는 소리,벽에 와서 부딪치기만 할 뿐 에코가 없는 소리는 죽은 음악에 불과할 뿐 연주자는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로 노래불러야 한다」고 강변하여 음악계를 크게 긴장시키기도 했다. ○“악기로 노래불러야” 강조 81년부터 3년간 KBS교향악단 총감독으로 있을 때는 단원의 고질적인 타성을 개선한다는 차원에서 전대미문의 오디션단행으로 후유증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교향악단의 자질향상과 처우문제,유능한 지휘자 확보,관주도형 운영방식 탈피,연주횟수 증가 및 한국 창작곡연주 활성이라는 굵직한 업적을 이룩하여 「음악외적인 지도력과 괄목할 만한 수완」을 일사불란하게 발휘해 보였었다. 아동음악 교육에 대해서도 「유학만이 음악의 길인가」라는 평문을 통해 「어린이를 악기의 노예로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스키너상자(상자)」를 인용한 「상자속의 생쥐」론에서는 「인간의 잠재의식속에 내재된 천재성과 의식적인 훈련의 모순성」을 상자속의 지렛대와 생쥐의 움직임에 비유하여 「실기 위주」의 음악은 「과열레슨,입시부정의 부작용을 초래할수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또한 그가 개인의 힘으로 발간한 「낭만음악」을 음악교육 이론지로 정착시킨 점과 유진 올만디,존 케이지,바렌보임,푸르트벵글러등 세계 정상의 음악가들과의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원로 박용구씨에 의하면 「그만의 독자적 표현법이자 한국 음악평의 격조를 한단계 끌어올린 새로운 평론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자적인 표현… 격조 높여 그는 대체로 혹평을 꺼리지 않지만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에 관한한 「세계 어느곳에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연주자」로 극찬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90년 「송년 통일전통음악회」에 대해서도 그것이 우리의 전통음악이라는 이유만으로 「겉으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안에서 흐르는 눈물이 홍수를 이룬다」고 무조건적인 편애를 감추지 않기도 한다. 그를 만나지 않고 그의 이름만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작곡가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음악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온 이론가답게 그의 이미지는 얼핏 지나치게 반듯하고 원칙적이며 빈틈없어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훤칠한 키에 미남,경북 청도(청도)에서 태어나 경북중시절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타고난 미성에다 라흐마니노프와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뛰어나 숙명여고 교사시절에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쇼팽」으로 불리기도 했다.박력있고 대범한 도시기질에다 어떤 논쟁에서도 양보하지 않는 특유의 고집때문에 「고집 그자체」도 그의 별명의 하나다. ○직선적 평… 신선한 충격 음대 진학을 앞두고 어머니와 형들(2남2녀중 막내)의 반대에 부딪쳐 홀로 집을 나와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했으나 「위대한 작곡가의 대부분은 피아니스트겸 작곡가」임을 상기하여 대학 2학년 되던 해 피아노과로 전과했고 64년 임원식 지휘로 국향과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전악장을 국내 초연,피아니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가 했더니 다음해 「사상계」가 모집한 신인작가 소설모집에 응모하여 다시한번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이청준의 「퇴원」에 밀려 소설이 탈락되자 「문학을 포기하지 못한 마음」이 「음악에 관한 글」을 쓰게 되어 한 일간지에 본격적으로 음악평을 게재하기에 이른다. 그의 특이한 지적 예리성은 음악미학의 본질을 원초적으로 연구분석하고 이를 정곡으로 꿰뚫어 문체의 일총(일총)과 현목(현목)의 영롱함을성취하면서 직선적이고도 정치된 이론으로 음악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전망을 그때마다 제시하여 경각심과 함께 통쾌한 충격을 던지곤 했다. 센서티브하고 나이브한 일면에 엄격한 자존심이 도사린 그를 향해 국악작곡가 황병기(이대 교수)는 「심성이 깨끗한 예술가」로 표현하고 서울대 동료교수였던 강석희(작곡가)는 「음악을 하고(행) 아는(지)일과 그것과 상관되는 글을 쓰는일,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의 집행을 위한 탁월한 리더십은 조직을 움직이는 행정의 능력에도 뛰어나다」고 조언한다.가족은 숙명여고 교사시절에 만난 시인 문희자(문희자)씨와의 사이에 2남1녀,위로 남매는 미국에 있고(장녀 윤수씨는 미 오하이오 주립대교수,장남 석재씨는 예일대교수)부부는 막내 아들(인재·서울대 자연대 재학중)과 서초동에 살고 있다. 그는 최근 엉뚱하게도 이색적인 그림동화집 「음악천사의 사랑」을 내 또한번 주위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음악천사의 슬픈 사랑의 희생을 통해 이땅에 최초의 음악가 탄생을 그린 이 동화는 이제까지의 딱딱한 그의 이론서들과는 달리 간결한 소넷의 시적 이미지와 함께 읽는 이의 가슴에 한줄기 청랑한 선율이 흘러 들게 한다.낭만과 학구적인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만 그는 모든 예술가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형이상학적 초월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는 아니며 「황홀하게 축제화된 미적 감동의 형상화 작업에 침몰하는 단순한 이론가」에 그치진 않아 보인다.단지 그가 이 땅에 탄생시킨 음악천사의 희생처럼 「왜 사느냐」의 의미를 문학적 음악이론으로 실천시키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행정가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과시하는,이시대 예술계에선 보기드문 「투철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연 보 ▲36년 경북 청도출생 ▲53년 전국성악콩쿠르 특상 ▲54년 서울대음대콩쿠르 2위입상 ▲61년 서울대음대 피아노과졸업(김원복교수 사사) ▲64년 국향과 「쇼팽 피아노협주곡 제2번」한국초연 ▲66∼68년 서울대음대 강사 ▲65∼68년 계명대음대 피아노과 조교수 ▲68∼70년 미휴스턴대음대 석사과정(음악문헌학전공) ▲70∼75년 미미시간대음대 음악교육학 박사 ▲75∼77년 미버지니아 커먼웰스대 조교수(음악교육및 이론) ▲77∼92년 서울대 음대교수 ▲81∼83년 KBS교향악단 총감독,영국 EBU합창경연대회 심사위원 ▲85년 서울대 교무담당 학장보 ▲86년 음악학연구회 창립,회장 ▲88년 88 서울올림픽 걔폐회식 상임위원,낭만음악사창립 계간 「낭만음악」 겨울호 창간 ▲92∼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 서울문화예술평론상 「음악의 방법」(82년)「열린음악의 세계」(80년)「음악의 이해」「음악적 모국어를 위하여」(85년)「음악과 지식」「종족음악과 문화」(87년)「음악선생님을 위하여」「한국음악학」(90년)「김순남 그 삶과 예술」(92년) 동화집 「음악천사의 사랑」(95년)
  • 우수음악인 CD 음반시리즈 출반/“한국음악 현주소 기록” 평가

    ◎KBS­FM 기획… 연주·작곡가별로 분류 우리 전통음악과 클래식음악을 기량이 우수한 한국연주가들의 연주로 수록한 CD음반 시리즈가 나왔다. 「21세기를 위한 KBS FM 한국 음악인 시리즈」가 그 음반.우리 음악인들의 연주로 이뤄진 음반이 드물어 외국음반 위주로 방송해온 KBS 제1FM이 방송음악의 한국화와 국내 음악인들의 활동영역 확대를 위해 지난 92년부터 자체 기획해온 음반제작작업에 의해 탄생했다. 14종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는 지난해 녹음한 것으로 피아노독주와 실내악곡으로 엮은 「한국의 연주가」7종,KBS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한 정악과 창작곡,희귀소장자료가 수록된 「한국전통음악」5종,19 60년대 창작음악을 연주한 「한국의 작곡가」1종,KBS FM이 위촉하여 새로 만든 「FM 신작가곡」1종으로 구성됐다. 지난 93년에 첫 시리즈 18종,94년에 22종을 내고 이번에 14종까지 모두 54종으로 된 「한국 음악인」시리즈는 드물게 우리 시대 음악의 현주소를 기록한 음반으로 평가된다. 레퍼토리는 「한국의 전통음악」시리즈에 「여민락」「경풍년」「보허자」「웃도드리」등과 김희조·이성천작품이 실렸고 희귀자료집에는 판소리 「심청가」중 범피중류,송서 전적벽부등이 소개됐다.「한국의 연주가」시리즈에는 현재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이고 있는 신예연주가 30여명의 솜씨가 담겨 있고 「한국의 작곡가」에는 김순남·이상근·김달성·정회갑씨의 실내악곡이 망라됐다. 이밖에 「FM 신작가곡」은 KBS가 우리 음악계의 최영섭·이건용·임원식씨등 15명의 작곡가에게 제작을 의뢰하고 김관동·박수길·김성길·김신자·김영미씨등 중견 성악인들이 열창한 신작가곡들로 꾸며졌다.
  • 「오랜 관행」 따라 한 걸태질이라고?(박갑천 칼럼)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주검 누여놓고 장례절차 문제로 입씨름질하는 일도 있었다.집안따라 지방따라 예법·법도가 다른데서 오는 티격태격.그때 딴성바지의 「소리」를 잠재워버리는 말이 있다.『조용히들 하시오.이렇게 하는건 우리 과갈이오』 과갈이란 오이와 칡.둘 다 덩굴이 얽히고 설키면서 뻗는 식물이다.그래서 일가친척을 이르면서 쓴다.따라서 이때의 과갈은 우리집안에서 해내려오는 관행이라는 뜻이다.우리 관행이 이러하니 남들은 감놔라 배놔라 하지말라는 괘괘뗌.그 말 뒤로는 조용해진다. 그 관행은 무의식적인 언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작곡가 바흐의 반응같은 경우이다.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다.장례에 쓸 검은천을 사려고 하인이 돈을 달라고 한다.그러자 바흐는 그런일이라면 내 아내한테 말할 일이지 왜 나한테 묻느냐고 퉁명부린다.돈은 모른채 작곡만 해온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관행도 있다.정확하기로 이름난 칸트는 술마시는데서도 그랬다.정량을 넘는 법이 없었다.그가 죽음을 앞두고 몹시 목말라하니까 간병인이 포도주에 물을 타서 먹였다.하도 맛있게 마시자 한잔 더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칸트선생 대답은 『안돼.과하면 취해』.좋은 관행을 저승으로까지 가져가려 했음이던가. 물론 나쁜 관행도 있다.6·25때 어떤 해병부대에서 임관돼오는 장교에게 양주를 맥주컵에 가득 따라주면서 단숨에 마시라고 윽박질렀다는 관행같은 것.머뭇거리면 『야 임마,너는 입향순속도 몰라?』하면서 철컥 권총에 탄환을 쟀다니 덴겁할 일이다.누군가 심장마비로 죽고서야 없어졌다던가. 그렇게 잘못된 관행을 깨부순 사람도 있다.「동국여지승람」(순천조)에 나오는 바 고려때의 순천부사 최석같은 사람.그 고을에서는 부사가 갈리면 말 여덟마리를 내놓으면서 골라 갖게 하는것이 관행이었다.최부사는 억지로 주는 말을 돌려보내면서 자기말이 낳은 새끼까지 그 고을에서 났다하여 함께 보낸다.고을사람들은 그 뜻을 기려 팔마비를 세운다. 츱츱한 행적의 전직대통령이 자기허물을 「해명」하면서 이렇게 궁땄다.『잘못되기는 했지만 그건 우리 정치의 오랜 관행이었고…』.그 「오랜 관행」따라 걸태질했다는 논리였다.그의 재임중 어떤 공직자가 오랜 관행 따라 갈퀴질해서 챙기고 상납하고 하다가 파직당했을 수 있다.그 공직자의 죄책감에 면역을 심은 것이 「오랜 관행」.한데 대통령이 그에 앞장선 사회를 우리는 살아왔었구나.
  • 「오페라의 유령」 홍콩 공연 대성황

    ◎영 웨버 작곡 뮤지컬… 6월부터 4개월째 무대에/마술쇼 능가하는 화려한 무대 인상적/그랜드 시어터서 공연… 1년전 예약 끝나 금세기 최고의 뮤지컬로 꼽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 작곡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 홍콩에서도 폭발적 호응을 얻고 있다. 홍콩 구룡반도 시내에 위치한 「문화중심대극원」(컬처럴 센터 그랜드 시어터).지난 6월부터 4개월째 「오페라…」가 공연되고 있는 이 극장은 2천석 가까운 객석이 1년전 예약을 끝낸 관객들로 채워질 정도로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있다.「캐츠」「레미제라블」「미스 사이공」과 함께 세계 뮤지컬 「빅 포」로 일컬어지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예매가 잘되고 있다는 「오페라의 유령」.그 보편적인 감동의 뿌리는 어디에 맞닿아 있는 것일까. 이는 무엇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치밀한 성격분석에 의한 적확한 캐스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공연장인 「그랜드 시어터」는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과 비슷한 구조와 규모를 가졌지만 무대예술의 장으로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우선 무대가 매우 깊고 좁아 배우들의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며 음향효과를 조절해야 하는 등 공연상의 어려움이 적지않다. 하지만 86년 영국 로열 시어터 초연때부터 연출을 맡았던 해롤드 프린스 감독은 이 「옹색한」듯한 공간을 폭넓게 활용,마술쇼를 능가하는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어냈다.특히 3층 높이의 천장에서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무대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파리 지하의 칠흙같은 하수도에서 조그만 보트 하나가 미끄러져 나오는 등 고난도 무대기술을 이용한 장면은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단순한 볼거리 외에 드라마틱한 성향을 강조하는 영국 뮤지컬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프랑스 추리작가 가스통 르루의 원작을 토대로 한 만큼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미스터리,애정,공포 등이 주조를 이룬다.화상으로 흉칙한 얼굴을 한채 파리 오페라극장 지하에 칩거하게된 발명가겸 천재작곡가 팬텀이 무명의 한 오페라여가수 크리스틴을 사랑,스타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극중 팬텀역을 맡은 피터 캐리는 손끝의 떨림까지 놓치지 않는 온몸연기로 「연극이 배우의 예술」임을 극명하게 보여줘 홍콩공연의 장내외 주인공이 됐다.흰 라텍스 가면을 쓴채 저주하듯 토해내는 팬텀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는 피터 캐리의 흐느끼는 테너음색과 어우러져 때로는 애절하게,때로는 격정적으로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내 목소리의 탄력은 수년에 걸쳐 이뤄졌다.「아픈 목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너의 목소리는 강화될 것」이라고 언젠가 영리한 올빼미 한마리가 말했다』 「레미제라블」의 장 발장,「에비타」의 체 게바라,「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 역 등으로 갈채를 받았던 그는 지속적으로 고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이같은 몇마디 우화적인 말로 압축했다. 한편 「오페라의 유령」은 올초 예술의 전당측의 대관보류로 국내공연이 무산됐지만 내년중 다시 수입이 추진될 것으로 알려졌다.국내 뮤지컬 산업을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세계적 수준의 예술공연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묘안을 짜내는데 홍콩공연이 하나의 참고가 될 수는 없을까.
  • 가을밤 화제의 국악공연 잇따라

    ◎김영동씨 14∼15일·묵계월씨 16일 혼신의 무대/김영동­자작곡 「조각배」·「초원」등 11곡을 공연/묵계월­경기민요 1인자… 소리삶 65년 결산 이번주 후반 서울 중심가의 두 공연장에서 국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공연이 펼쳐진다.14·15일 하오7시30분 중구 정동의 정동극장 무대에 오를 「김영동의 음악세계­나의 소리기행」과 16일 하오7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묵계월 1995­끝없는 소리의 길」. 우리의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반평생을 바쳤거나」(김영동) 「소리를 다듬어내는데 한평생을 바친」(묵계월) 두 공연의 주인공들은 인생을 우리가락에 바칠 수 밖에 없었던 그 「소리」의 매력을 아낌없이 펴보일 계획이다. 정동극장에서 펼쳐질 김영동씨(44)의 소리무대는 국악작곡가로 위치를 확실히 다지고 있는 그의 음악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다.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대금을 전공한후 국립국악원 연주원으로 재직하면서 작곡을 공부한 그는 지난 79년 제1회 작곡발표회를 가지면서 국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84년 독일 괴팅겐대와 베를린 자유대에서 비교음악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음악조류에 접한 그의 독자적인 작업은 귀국후 명상음악 「선」의 출반으로 나타났다. 불교의 오묘한 사상과 국악을 접목시킨 김영동류 음악은 창작국악으로는 드물게 선풍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들중 일반대중에게 잘 알려진 「조각배」「어디로 갈꺼나」「초원」「아마존」등 11개의 대표곡이 이번 공연의 연주곡. 소금과 대금,가야금 양금등 전통국악기뿐만 아니라 만돌린과 기타,전자기타와 신디사이저 드럼등 현대악기들이 한데 어울리며 김씨가 직접 출연하여 노래와 소금연주도 한다. 16일 「끝없는 소리의 길」이란 이름아래 은퇴무대를 갖는 묵계월 여사(75)는 지난 75년 경기잡가로 중요무형문화재 57호가 된 경기민요의 1인자. 『아직 기력이 있을때 지난 65년간 한눈 팔지않고 불러온 경기민요를 제대로 부르고 싶어 결산공연을 갖는다』는 그는 『공연을 앞둔 심정이 마치 18세때 부민관 무대에 처음 설 때와 같다』고 했다. 지난 2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열한살때 본명 이경옥을 버리고 예명 묵계월이란 예명으로 소리세계에 입문. 또래의 소리꾼 이은주 안비취씨와 함께 국악계의 대들보로 자리를 굳혀온 여사는 구슬픈듯 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대는 며느리소리 「삼설기」의 창에 단연 독보적이다. 영원한 소리꾼의 은퇴무대는 그의 「삼설기」를 비롯한 경기민요 열창과 이은주·이춘희씨의 찬조출연,이수자들의 합동공연으로 꾸며진다. 『공연이 끝나도 기력있는한 후학을 키우겠다』는 것이 여사의 꿈이다.
  • 광복50돌 기념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을 보고/이상만

    “한국인 역량 확인한 뿌듯한 무대”/서양음악 일색… 국악 공연 없어 아쉬움 지난 8월15일 잠실의 올림픽경기장에서 5만여명의 거대한 청중이 운집하고 전국의 텔레비전에 방영된 축전음악회를 필두로 해서 서울 예술의 전당과 부산·대구·광주·대전에서 8개의 프로그램으로 모두 16회의 공연이 펼쳐져 광복50년만에 가장 큰 음악잔치를 치렀다.음악회 그 자체는 연주자들이 정성을 다해서 무대에 섰고 연일 음악회장은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더구나 그 많은 한국 연주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다는 사실과 호응도로 볼때 이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축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연주자들의 연주능력과 짧은 서양음악의 역사속에서 한국이 이렇게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한국 음악인의 예술적 역량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게 해주었다. 더구나 이 음악회는 강압적 청중 동원없이 시장구조에 맡겨진데다 기업의 협찬에 힘입어 정부예산을 크게 축내지 않는 흥행적 성공도 거뒀다.특히 서로 만나기 힘든 해외 연주가들이 27일의 피아노 4중주의 밤(김영욱 최은식 정명화 한동일)에서 보여준 「브람스 피아노 4중주」연주는 구성인원의 조화,연주의 밀도등에서 한국인들도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또 28일 마지막 공연의 이돈웅 작곡 「색소폰과 창과 관현악을 위한 한소리」는 이 축제에서 유일하게 연주된 한국작곡가의 새로운 창작음악이었다.이 작품의 예술적 척도보다도 이러한 작품이 그나마 프로그램에 포함돼 원경수가 한국작품을 성실하게 지휘했다는 좋은 인상을 남기었다. 어쨌든 이번 음악회는 한마디로 해서 「한국 서양음악의 축제」,그것도 연주자들을 위한 축제였다.한국 음악인이 그렇게 열심히 서양음악을 좇아 공부하고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정트리오와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를 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이번 음악제의 성공도 그 가족의 역할에 크게 힘입었다고 생각이 들어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무덤을 파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축제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무덤이 될 수 있다.한편으로 생각하면 광복50주년의 역사적 잔치로는 그 호화로움 속에서도 매우 처절한 우리의 현실에 통한을 금할 수 없는 단면이 있었다. 광복50주년의 축제라면 그 속에 우리 삶의 이상과 정부의 역량과 모든 것들이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구성으로 이뤄져야 한다.이 축제속에 적어도 한국음악인이 누구고 한국음악이 나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었어야 한다.짧은 50년의 역사라도 음악제를 통해서 느낄 수 있어야 했다.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한 배려,광복50년에 기여한 음악인들에 대한 기회제공이 됐어야 했다. 그러나 한 흥행사,한 가족들의 역량을 크게 믿고 그에 의지한 정부의 입장이 애처롭게 보였다.번갯불에 콩 구어먹듯 한탕 치른 축제였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었다.행사 1주일전에도 확정되지 않은 프로그램,그것도 빈번한 내용변경,오자와 내용빈곤의 프로그램 책자.챙기고 다뤄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 「민족의태동,혼의소리」로 개막/민족음악협,1∼2일 광복50돌 공연

    ◎국악·민중가요·서양고전음악·동요 망라 민족의 소리로 광복 50년을 반추하고 미래를 그려보는 공연「민족의 삶,뜻,소리」가 9월1·2일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다. 국악,민중가요,서양 고전음악등 각 장르의 벽을 넘는 민족의 소리꾼들과 춤꾼들이 꾸미는 이 무대는 민족음악협의회(의장 강준일)가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마련했다. 모두 3부로 이어지는 이 공연은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민중가수 안치환이 엮는 「민족의 태동,혼의 소리」로 막이 오른다. 1부는 춤패 춤세상이 독립군과 정신대의 혼을 기리는 춤과 작곡가 강준일씨의 무속음악을 형상화한 무당춤을 선보인다. 또 록그룹 천지인,노래마을이 「지리산」,「광야」등의 노래로 민족의 태동과 시련의 역사를 그린다. 2부는 광복50년의 역사가 국악,민중가요,서양 고전음악등 장르를 초월한 종합공연 형식으로 진행된다. 민족음악연구회가 김순남 작곡의 「해방의 노래」를 금관5중주로 연주하고,한돌,「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70년대의 통기타문화를 상징하는 연곡을 부른다. 이어 판소리명창 안숙선씨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담은 「남부리 북누리」를 창으로,정태춘·박은옥부부가 서정어린 민중가요 「북한강」등을 영상과 결합한 노래로 선사한다.또 노찾사는 환경파괴의 아픔을 그린 「고운동 달빛」을 재즈피아니스트 임동창씨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다. 3부는 어린이 노래모임 굴렁쇠,노래패 꽃다지등이 미래를 상징하는 노래로 힘차게 펼쳐간다. 공연시간은 9월1일 하오7시30분,2일 하오4시,7시.문의 766­2983.
  • 한국에선…/범람하는 왜색가요(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0)

    ◎안방까지 침투한 「일본노래」 바람/대학가 음반·뮤직비디오 복제품 “불티”/「신토불이」 모르는 10대에 유행병처럼 번져/위성방송 타고 확산… 표절가요도 한계수위 서울 동숭동 대학로 바탕골소극장 앞마당.현란한 옷차림의 젊은이 10여명이 무언가를 빙 둘러싸고 있다.가까이 가보니 일명 「길보드 차트」 또는 「손수레 기획」이라고 불리는 불법복제 음악테이프를 판매하는 노점상.몇백개의 테이프가 좌판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가운데 쓰요시 나가부치,야스이 이노우에,구와다 밴드 등 기성세대에겐 낯선 이름들이 눈길을 끈다.모두 일본가수나 그룹의 이름.국내 수입이 금지되고 있는 일본가요를 테이프 한개당 2천5백원씩의 헐값에 드러내놓고 팔고 있는 것이다.이 「길보드 차트」「손수레 기획」의 주요고객은 이곳에 놀러나온 학생이다. ○주요 고객은 학생 서울 세운상가의 종로4가쪽 육교상가에도 슬레이트로 상자처럼 지은 레코드가게 여러 개가 있다.외양은 허름하지만 복제레코드 5천원,CD원판 3만원,복각판 1만5천원을 비롯,5만∼10만원에 이르는 레이저디스크까지 일본가요음반 수백종을 갖추고 손님을 끌고 있다.주인은 『일본서 나온 유행가요는 거의 다 갖추고 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다. 일본가요의 국내 침투는 이처럼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상설단속반을 자체운영,지속적인 단속을 펴고 있기 때문에 불법복제돼 팔리는 소위 「빽판」은 발붙일 데가 없을 것』이라고 문체부 영상음반과 관계자는 말하지만 『지난 2∼3년간 이곳의 노점상은 두배 가까이 늘었다』는 게 대학로에서 카페를 열고 있는 김기환(29)씨의 얘기다. 일본가요의 국내 침투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은 이밖에도 곳곳에서 확인된다.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휴학생 김대현(22)군은 『예전엔 일본음반을 사려면 세운상가까지 나가야 했지만 요즘엔 집앞 레코드가게 중에도 음반을 구해주는 곳이 생겼다』면서 『웬만한 나이트클럽이나 앞구정동,홍대앞의 록카페 등에서 일본가요 몇곡쯤 트는 것은 기본』이라고 전했다. 명목상 수입금지되고 있는 일본 대중가요가 이미 우리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뼈아픈 일제 36년간 일본의 엔카에 무력하게 노출됐던 우리 대중가요는 해방후에도 늘 왜색시비에 휘말려왔지만 지금의 상황은 과거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트로트의 뿌리가 엔카라는 주장 아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문주란의 「동숙의 노래」 등 1백50여곡이 왜색으로 몰려 무더기 금지된 것이 지난 65년.이때만 해도 금지조치 하나로 무자르듯 왜색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믿을 만큼 일본가요는 단지 정서의 문제였다. 하지만 일본 가요음반의 수요가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음지에서 꾸준히 커져가고 있는 현재,문제는 산업적 차원으로 확대된다.서울음반 홍보과장 박영민씨는 『불법 일본음반이 우리 가요팬의 입맛을 길들일대로 길들이고 난 뒤 개방이 될 경우 일본 음반회사들은 그 수요층을 손 하나 까딱 않고 흡수할 수 있게 된다.자본력에서 취약한 우리 음반산업이 첫판부터 치명타를 맞고 비틀거릴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라고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음반산업 치명타 최근 7∼8년 사이 일본가요가 이처럼급속히 국내에 파고 든 배경은 매체의 발달,해외여행자유화 등이라는 것이 현대방송 음악프로 구성작가 최재민씨의 말.그는 『80년대말 위성방송을 타고 흘러든 일본가요를 접한 강남 일부층이 해외여행자유화와 함께 일본에서 직접 음반을 들여오면서 불법복제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면서 『개방과 자유화가 진행될수록 단속보다 국민의 성숙한 의식만이 일본색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가요가 난무하자 나타난 또 다른 부작용이 국내 작곡가들의 일본노래 표절이다.MBC 라디오국의 조정선 PD는 『우리 가요의 일본노래 베끼기는 이제 한계수위에 이르렀다는 게 일선 PD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전했다.PC통신 가요동호회방에 가입자들이 올려놓은 사례는 우리의 가요표절이 얼마나 중증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모가수의 3집앨범에 실린 모곡은 일본 모그룹의 곡 처음 16소절을 리듬진행부터 코러스,바이브레이션까지 그대로 베꼈다」 「언제 엠티가 다 들은 곡이 있는데 일본 그룹 몇번째 앨범 몇번째 트랙에 있는 곡과 똑같더라」며 전문가에 가까운 지식으로 표절을 성토하던 가입자 사이에선 「이젠 표절도 실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돌고 있다. 지난 93년 공윤 가요심의위원회(이하 가심위)는 각각 일본 구와다 밴드,사카이 노리코의 곡을 베낀 이상은의 「사랑할 거야」,신성우의 「내일을 향해」 등을 포함,18곡의 가요를 무더기 표절판정했다.바로 그 가심위가 지금은 휴면상태다.가심위의 홍창기 부장은 『표절은 법적으로 표절당한 당사자만이 고소할 수 있는 신고제인데다 6명의 심의위원이 하루 몇백곡씩의 신곡을 일일이 연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며 『지난해부터 표절심의는 일체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남의 것 베끼기를 통해 손쉽게 인기를 끌어보려는 작곡가들이 이를 걸러낼 인력이나 제도의 미비를 틈타 아무 의식 없이 표절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가수들 베끼기 앞장 개방을 눈앞에 두고 이처럼 갈수록 득세하는 일본가요가 우려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가요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계층이 비판능력 없는 청소년이라는 데 있다.일제를 체험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의 골이 엷은 청소년에게 일본가요는 「그냥 노래」일 뿐이다.가요평론가 강헌씨는 『미국이나 유럽 것과 달리 일본가요는 자극적인 멜로디로 철저히 틴에이저를 겨냥하고 있다.청소년이 솜에 물젖듯이 받아들이게끔 돼 있다』면서 『민족적 주체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돈벌이에 급급한 어른의 의식이 먼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다시 한번 일본의 문화식민지로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음악평론가 박용구(이세기의 인물탐구:80)

    ◎「열린 시각」으로 「평론 외길」 50년/음악·무용 비롯,모든 문화분야 탁발한 이론 전개/「음악 교육론」… 일제가 말살한 우리 정서 부활 노력/저서 「교양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감상 지침서로 유명 「미를 위해서는 깨뜨릴수 없는 규칙이란 없다」.이는 베토벤의 말이다.또 입사 박용구의 좌우명이기도 하다.「미를 창조하기 위해 무엇을 파괴해도 아깝지 않을만큼」그의 의식과 사상은 줄기차게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었고 언제나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음악계는 말한다.「그것은 예술가 특유의 삶에 대한 위기의식과 긴장 탓」이며 「긴장이 자유를 향한 끈질긴 집념이라면 그에게 있어 자유란 예술자체이자 삶자체」일 것이다. 「박용구는 해방공간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50여년동안 계속해서 활발한 평론활동을 벌여온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이는 작곡가 이건용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92년 「낭만음악」(여름호)특집 「작가연구」에서 밝힌 말이다. 같은 글에서 이교수는 「50년에 이르는 평론활동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며 「잡지나 신문들이 일정한 평론가에게 그 긴기간동안 계속적으로 원고청탁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라고 짚고 있다.또 「음악과 무용정도의 범위가 아니라 그는 예술문화를 제한없이 드나들며」『논리전개도 상당히 분방하고 자유로운 필치,때로는 대담한 직관과 상상력에 따라 논조와 사안별로 관심의 소재가 변하는 「논리에 입각한 비평가라기 보다 감각에 의한 비평가」』라고 결론짓는다. ○예술계의 팔방미인 실제로 그가 우리 문화예술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은 넓고 깊고 다양하다.그래서 예술에 관한 한 그를 「팔방미인」이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음악펜클럽 예술평론가협의회 유니세프문화예술인클럽을 비롯하여 최근의 국제적인 세계무용연맹(WDA)도 그가 주관하는 단체이고 그가 쓴 「춘향가」「줄리아」「님의 침묵」등 수많은 작품들은 교향시·오페라로 작곡되어 호평받은바 있다. 과연 그의 평문은 어느 지면에서나 탁발한 이론을 유창하게 전개하면서 도저한 주관을 꿋꿋하게 지키는 것이 특징이다.해방직후 발표한 「아동음악 교육론」은 「일제의 문화정책 말살로 불식된 우리 고유의 민족적 음악감수성을 아동음악 교육으로부터 키워야 한다」는 제언이었고 전5권으로 펴낸 「교양의 음악」의 경우는 클래식음악팬의 음악감상을 위한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음악지망생과 음악관계 전문가들에게 「풍부한 정보」와 「해박한 지식」을 섭취시킨 교과서이기도 했다. 「예술가란 어느 시대에서나 환경의 도전자요,권위의 파괴자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역설해온 그는 60년대말 12음기법의 창시자인 쉔베르크 도형악보의 존 케이지·베베른·베르크와 슈톡하우젠에 이르는 실험적인 현대음악을 우호적으로 수용하는가 하면 당시 새로운 사조에 편승한 윤이상·백병동·강석희·황병기 등의 전위작업을 「선구자적 도전 정신」으로 평가하여 작가들의 시대정신을 크게 북돋워주었다.「공간」지에 발표한 일련의 「작가론」에서 특히 백병동을 향해 「음악으로 말할줄 아는 소중한 사람」 또는 「그 노여움이 화염이 되어 역사의 밤을 밝히도록 기대한다」고 감싼 것도그런 맥락에서다. ○한약방집 네째 아들 그의 녹슬지 않는 사회정의감은 87년 6월항쟁과 88올림픽이 끝난후 「예총」에 대한 역할회의론이 일어났을때도 「예총도 뉘우쳐야 한다」는 글에서 심장한 어조를 멈추지 않는다.그는 「예총이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정권의 시녀노릇만 하고 있다」고 감연히 지적했고 「예총은 절대로 순수하지 않고 결코 지성인의 모임도 아니며 그 체질은 다만 편견과 독선에 차있다.예총이 이념공동체라면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인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체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안일에 빠져있던 문화예술계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가 어릴때 소망한 것은 「독립투사」가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독립투사의 조건은 「강인한 인내력과 행동력」이었으나 그는 「불행하게도 이 두가지 강점을 하나도 지니지 못하여」 그때부터 자유롭게 예술을 논하는 사람이 되었고 「무엇이 되고자 하기보다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일본체류 기간동안은 주로 「단사들과 더불어 담예논도에 심취」하는 세월을 만들어 나갔다. 도쿄시절의 입사에 대해 건축가 김수근의 회상은 이런 흔적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그는 예술순례를 주도하는가 하면 예술과 문화전반에 걸쳐 밤을 새워가며 격론을 벌이던 모임에서 항상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누구보다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한치도 후회함이 없는 그의 사회정의감과 예술분야에 임하는 지성인의 자세는 당시 유학생들의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항로는 남보다 파고가 거세고 파란이 심한 편이었다. 경북 풍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박은식씨의 7남매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 졸업후 조부의 고향이던 평양으로 가서 평양고보에 진학,5학년이 되던해 독서회를 조직한 일로 왜경에 검거되었고 농촌운동에 관심이 컸으나 부친이 부농인 것과 상반되어 이 마저 포기한채 일본에 밀항했다.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이 역시 체질에 맞지않아 일본의 「음악평론」사에 입사한 것이 음악·무용가가된 계기가 된다.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첫 평론집 「음악과현실」을 출간,초판이 보름만에 팔려나가는 이변을 보였으나 월북 음악가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재판부터 판금조치를 당했고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다시 50년대를 일본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정처없이 떠돌던 자신의 「끝없는 파란」과 「방랑」을 「방랑시인 김삿갓」에 비유하여 스스로 삿갓 입자를 쓴 「입사」란 호를 지어 가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창작희곡 집필 몰두 창작희곡집 「흙비」 후기는 그의 솟구치는 앙양과 침정을 요연하게 드러내는 고백성사와도 같다.「나는 성깔부터가 적을 사랑하라는 박애주의자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다.사랑해야만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여기의 작품들은 사랑에서 보다는 미움으로 해서 쓰여졌는지도 모른다.그만큼 내 생애는 미움에 찬 세월이었다.마음의 눈은 항상 핏발이 서 있었다」고 처연한 심정을 글귀마다 담고 있다. 그는 82세의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모든 사고방식은 활짝 열려있고 목소리는 낭랑하며 행동은 반듯하다.그가 살고있는 세검정 세이장은 20여년전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트롬본처럼 말려올라간 예술주택으로 요즘은 지난해 가을 문예중앙에 발표한 「바리데기」후속으로 우리 「무가」의 원천사를 집대성한 방대한 창작희곡 집필에 들어가 있다.그만이 남길수 있는 단테의 「신곡」 못지않은 명작에의 도전이라는 각오다.가족은 남매는 모두 출가하고 부인 정덕미 여사와 둘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한다.그의 주장대로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고자하는 염원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예술미의 창조는 요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원한대로 언제나 「멋대로」 흘러왔으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우리 모두가 별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지금도 굳게 믿고 있는것 같다. 「예술자체이자 삶자체인 자유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한」그는 「가장 선한 장엄미 건축을 위해」 그의 멋과 자유를 파괴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그런 순간을 위해 예술관조의 형안도 끝내 그 빛을 잃지 않을것이다. □박용구 연보 ▲1914년 경북 풍기출생 ▲33년 평양고보졸업,도일,일본대 예술과 입학 ▲37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일본 「음악평론」사 입사 ▲49년 첫 평론집「음악과 현실」(민교사)출간,도일 ▲50∼60년 일본 도쿄 고마키(소목)발레단 문예부장 ▲52년 일본 「배우좌」연출공부 ▲62년 서울음악평론동인회대표간사 ▲66∼68년 예그린악단단장 ▲70∼76년 공간사주간·운영위원 ▲76년∼현재 음악펜클럽 회장 ▲81년∼현재 예술평론가협의회회장 ▲83년∼현재 채동선기념사업회장 ▲86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장 ▲88∼94년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93년∼현재 세계무용연맹 발족(WDA),한국본부 회장,은관문화훈장 ▲94년 창작희곡 「바리데기」(문예중앙 가을호)발표 ▲95년 세계무용연맹 창립총회및 아시아 태평양센터주최 국제무용페스티벌(KIDE)개최 「음악의 별들」(어문각 48년) 「음악입문」(박문출판사) 「음악과 현실」(일지사 49년) 「교양의 음악」전5권(창조사 69년) 「음악의 주변」(창조사 70년) 「음악의 광장」(일지사 75년) 「불멸의 음악가들」(일지사) 「음악의 세계」(계몽사) 「음악이 만나는 자리」(일지사 77년) 「음악의 문」(청한문화사 81년) 창작집 「흙비」(해보라 기획 85년) 「오늘의 초상」(일지사 89년) 「명곡과 명인들」(세광음악출판사)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지식산업사 95년)출간외 논문 무용극본「님의 침묵」 「바리공주」 오페라극본「춘향가」 「줄리아」등 다수
  • 광복 50돌기념 대형음악회 열린다/오늘부터 25일까지 잇달아 개최

    ◎KBS 그랜드 콘서트/서울시립 합창단/월드 오케스트라/그랜드 콘서트­창작음악·실내악·유망주 연주회/서울시립 합창단­최영섭곡 「오 사랑하는 조국」 초연/월드 오케스트라­50여국 청소년 음악인들로 구성 광복50주년을 기념하는 3건의 굵직한 음악공연이 7월 무대에 오른다. KBS­1FM이 마련하는 「광복50주년 기념 그랜드콘서트」와 서울시립합창단의 「광복50주년 기념음악회」,예음문화재단의 「광복50주년 기념 JM 월드오케스트라 내한공연」.오는 8월 문화체육부가 주최할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에 앞서 올해 광복50주년을 기리는 음악계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들이다. 「광복50주년 기념 그랜드콘서트」는 12,13,19일 하오8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옆 KBS홀에서 열린다.19 45년 해방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개방된 서양음악의 발전과정을 분야별·세대별로 정리한다는 기획이다.12일 1부는 「한국의 창작음악무대」로 양악사초기 서양 창작음악의 선구자로부터 오늘날 작곡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창작음악 발전사를 조명한다.이날 소개될 곡목은 안익태의 교향시 「논개」(19 61년작),정회갑의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19 60년작),백병동의 3개 오보에와 관현악을 위한 「진혼」(19 76년작),이건용의 2개 플루트와 현악합주를 위한 「결」(19 78년작),황성호의 제주민요에 의한 관현악노리「파랑도」(19 92년작)등. 13일 2부는 「중견연주가의 실내악무대」로 피아노의 이경숙·김대진,바이올린의 김영준,클라리넷의 김현곤,비올라의 오순화,첼로의 이종영·박상민씨 등이 꾸민다. 19일 3부는 음악계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유망주들의 「한국음악계 미래 주역들의 협연무대」.피아노의 김주영(25),바이올린의 양고운(23),첼로의 김두민(16),테너의 이정원(25),소프라노의 황지원(22)등이 나선다. 오는 14일 하오7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펼쳐질 서울시립합창단의 「광복50주년 기념음악회」는 중진작곡가 최영섭씨의 교성곡「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을 발표하는 자리로 마련한다. 이 무대를 위하여 최씨가 올해 마무리지은 곡으로 전24장에 서곡을포함하여 연주시간만 1시간40분에 이르는 대작이다.『내 조국의 수려함과 조국에 대한 감사와 애국의 마음과 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을 일깨워주며 자랑스런 한국인의 긍지를 갖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 작곡의도.서울시립 교향악단과 서울시립 합창단·대학연합 합창단·서울필오페라 합창단등 연합 합창단과 성악인 박미혜·김학남·임웅균·김진원·김성길등 2백65명이 민족의 열망을 합창음악으로 승화시킨 이 곡을 열창한다. 예음문화재단이 광복50주년을 기념하여 초청한 JM월드오케스트라(지휘 볼데마르 넬슨)는 24·25일 하오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한다. 종전50주년을 맞아 전쟁의 아픔을 겪은 아시아지역을 순회연주하고 있기도 한 이 오케스트라는 세계50여개국에서 선발된 1백여명의 청소년 음악인들로 구성됐으며 이번 무대에는 한국의 이민영(피아노),강민정(바이올린)양이 협연한다.창설25주년을 맞는 이 단체는 레너드 번스타인,주빈 메타등 세계정상의 지휘자들과 베를린필하모닉 단원들이 지도를 아끼지 않은 세계적인 청년 오케스트라이다.
  • 고도 키로프(시베리아 대탐방:19)

    ◎“제정러시아의 유형지 ”… 아픈 역사 간직/옛이름은 비아트카… 숙청된 「키로프」 이름따/강건너 딩코보는 전통 진흙 인형으로 유명/카스트로마주의 치즈·버터는 러시아 최고의 명품 야로슬라블주가 끝나고 카스트로마주가 시작되고 있다.카스트로마주는 유원건설이 러시아 군인아파트를 짓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지난해 10월부터 모스크바의 유원건설 사무소 직원들은 조만간 준공식을 할 예정인데 그때는 모스크바에 상주하는 우리 특파원들을 초대해 볼가강에서 뱃놀이도 하자고 했었다.그러나 러시아측에서 준공검사를 잘 안해주고 애를 먹인다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그러다가 해를 넘겼고 연초 서울에서 유원건설 부도소식이 들려왔다.잘 마무리가 돼 유원건설 직원들이 객지에서 고생한 보람이 결실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차에서 첫밤 맞아 카스트로마는 카잔 타타르의 공격을 막기 위해 1536년 러시아군 요새로 시작된 도시다.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 샤르아입스키가 시베리아 유형길에 잠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그러나 카스트로마주에서 가장 손꼽히는 것은 역시 치즈·버터다.카스트로마 중북부 일대를 일컫는 볼로그다지방의 버터와 카스트로마 치즈는 단연코 러시아의 최고 명품이다.거기다 나무에 형형색색의 원색으로 채색해 만드는 독특한 인형·조각의 주산지인 추흘라마시도 이곳에 있다. 기차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몸이 고단한 탓인지 기차바퀴가 레일 위를 구르는 규칙적인 소리가 도움이 됐는지 쉽게 잠들 수 있었다.이튿날 아침 5시,현지시간은 6시에 키로프주의 수도 키로프역에 도착했다.주의 수도는 그 주의 이름을 쓰는게 원칙이다.예외로 레닌그라드주의 주도는 레닌그라드였는데 91년 주도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꾸면서 주 이름은 그대로 두어 약간 혼란을 주기도 한다.스베르들로프주 주도도 스베르들로프였는데 주도 이름만 에카테린부르크로 바뀌었다. ○모스크바서 1.600㎞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우랄산맥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페테르부르크­비아트카선 기차 한대가 맞은편 선로에 정차해 있다.이 노선은 1906년에 건설됐으며 우랄의 에카테린부르크를 출발해 키로프,부이,볼로그다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연결된다. 비아트카는 키로프의 옛이름이다.20년대 중반부터 레닌그라드 제1서기로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던 흘리노프 키로프는 당시 당서열 3위의 인물이었다.키로프발레단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고 러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대학,도시가 수없이 많다.그러나 스탈린이 그에 대해 경쟁의식을 갖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끝났다.35년 그가 피살됐을 때 그게 스탈린의 짓이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키로프의 죽음은 당시 스탈린의 정적숙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도시 이름은 그가 피살된 직후 그의 이름을 따서 고쳐지은 것이다.공산당 멸망 이후 다시 이름을 고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주민들이 반대해 그대로 두었다.키로프는 또다른 역사의 아픈 기록도 남겨준다.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시베리아유형의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점이다.혁명가 게르첸,소설가 살티코프 시체드린이 이곳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이런 역사의 기록과는 달리 이 도시를 흐르는 비아트카강 건너편 마을인 슬로보다 딩코보는 어린이 장난감 인형인 딩코보인형으로 유명한 곳이다.진흙으로 빚은 전통의상 차림의 인형인데 입으로 불면 예쁜 소리를 낸다. 키로프역을 지나 조금 더 달리면 프리 우랄,즉 우랄 앞마당으로 불리는 우드무르스키공화국으로 들어선다.이곳에서부터 사실상 우랄이 시작되는 것이다.지리적으로는 페름주부터 우랄이 시작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곳부터 우랄로 간주한다.경제적으로 우랄쪽에 밀접히 관련됐기 때문이다.물론 산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오직 평야·숲만 보면서 하루를 달려왔다.체료무하꽃은 이제 막 연두색 잎을 달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참이다.이곳에서는 봄이 갓 시작되고 있다. 이른 아침 차창 밖은 온통 짙은 안개천지다.날씨가 차고 습기가 많아 생기는 현상이다.안개 속으로 키로프시민들의 다차지역이 촘촘히 보인다.초원이 좋아 우유산지로 이름높은 곳이다.철로변의 거리표는 모스크바로부터 1천62㎞를 가리키고 있다.모스크바시간 상오 7시25분.열차는 키로프주의 마지막 역인 팔룡키를 지나 우드무르스키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드무르스키공화국의 첫역은 「야르」라는 이름의 작은 역이다.「작은 계곡」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쳅차강과 레크마강 하구가 만나는 작은 계곡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은 것이다.예를 들어 동시베리아에 있는 크라스노야르스크는「아름다운 작은 계곡」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우드무르스키공화국에서 두번째 만나는 도시인 러시아 최대 버섯산지 글라조프도 「눈(글라즈)」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재미있는 이름의 도시다.도시가 언덕 위에 건설돼 사방을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은 이름이다.20세기초 고리키·체호프와 함께 활동했던 우크라이나 작가 코롤렌코가 유형생활을 했던 마을이다. ○전형적 시베리아 도시 더 재미있는 곳은 이 공화국의 수도 이조프스크다.시베리아 도시들의 전형적인 탄생 여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8세기 에카테리나2세 여제때 이곳에 작은 메탈공장이 건설됐고 이 공장을 애워싸고 자보드(공장)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 시작됐다.「이조프스키 자보드」가 탄생한 것이다.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들은 철도·도로가 놓이고 지리적 이점의 여하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몰락하기도 한다. 인구 4만5천명에 불과하던 이조프스키마을은 2차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지역에서 많은 군수공장들이 피란해옴으로써 결정적인 융성의 계기를 맞았다.전시 군수산업책임자인 우스티노프 원수가 이곳에 상주하며 이 피란공장들의 운영을 총괄했다.그래서 한때 이조프스크는 그의 이름을 따 우스티노프시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조프스크시는 민족공화국인 이곳 우드무르족들의 문화·민족중심지이면서 동시에 산업도시인 복합도시가 됐다.이조프스크에서 동쪽으로 조금 나아가면 차이코프스키의 고향 보트킨스키가 있다.시바강을 끼고 있는 이 작은 고향마을 맞은편 큰 호수의 반대편 기슭에는 이 작곡가의 이름으르 딴 차이코프스키마을도 있다.60년대 카마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도시를 만들어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서울예술단 「꽃전차」 무대에/탭댄스 추는 신세대 노인들 등장

    중견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만든 뮤지컬 「꽃전차」(연출 이종훈)가 24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29일까지 공연된다.서울예술단(이사장 김상식)이 광복 50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 뮤지컬은 극작가 오태석·이강백씨가 극본을 썼고 작곡가 최창권·최종혁씨가 음악을 맡았다. 1945년 광복당시 서울시내를 달렸던 「꽃전차」를 재현키 위해 기금마련 카니발을 준비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조선족,라이 따이한등 우리의 핏줄은 물론 외국인근로자들까지도 감싸안는,광복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시각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컴퓨터와 필름합성에 의한 최첨단영상기법을 도입하고 탭댄스를 추는 신세대노인을 등장시키는등 다양한 볼거리위주로 꾸몄다.박철호 이정화 유희성 송용태등 서울예술단원 60여명이 출연한다.서울예술단은 이번 서울공연부터 관람료를 종전 가격의 절반수준으로 낮춘 가격파괴를 시도,최저 5천원으로도 볼 수 있도록 했다.(문의 523­0984).
  •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세기의 인물탐구:74)

    ◎독주회·협연 한해 15회꼴… 쉬지않는 연주자/9세때 이대실내악단 연주에 매료 입문/“남다른 정열·힘있는 음악” 평… 고정땐 많아/소중한 악기 「과다니니」 제자에게 흔쾌히 빌려주기도 사랑을 하게 되거나 혹은 참혹한 현실에 부딪칠때 사람은 울부짖거나 통곡하거나 희열과 유열에 몸부림치게 된다.니체는 이런 종류의 광기를 「디오니소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가 만약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몰입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가.『디오니소스적 광기에 도취하여 자기라는 이성과 관습과 틀과 형식을 박차고 훨훨 창공을 날아오르는 이가 바로 김남윤』이다.이는 지휘자 김만복씨의 말이다.그는 과연 고뇌와 좌절의 여러 파란을 지나 참으로 조용히 예술의 정점을 응시하려는 예술가다.더 더욱 최근들어 영감에 가득찬 흐르는 듯한 연주는 「모든 음악에는 컬러가 있고 분위기가 있다」는 시게티의 방식을 실천시킨다.특히 그가 들려주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은 절후의 명작다운 심오한 감정과 고고한 기품,바흐의 풍부한 환상을 유연한 선율로 이끌어낸다.경쾌한 쿠랑트(주)와 장중한 폴리포니(복음락),저음테마와 고음이 교차되는 5악장 샤콘은 마치 「꽃잎이 피어나는 넋의 개화」로 평받고 있다.그는 과연 음악을 캐내기 위해 까마득한 터널을 달려가는 고독한 자의 비애와 고뇌를 절창으로 성취해 낸 것이다. ○악보에 생명력 불어넣어 「그의 레퍼토리는 모든 작곡가를 두루 꿰고 있지만 악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음악을 살아 숨쉬게 하는 매력이 특징이다.특히 그의 모차르트는 이따금 너무나 격정적이며 비브라토의 처절성이 모차르트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해도 그의 백열하는 열정 때문에 청중은 온통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유신씨는 평한바 있다. 김남윤의 연주회에 가보면 당장 느낄수 있는 것이 그에겐 고정팬이 확보돼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알만한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온다든가 학교 인맥등으로 동원된 관객과는 전혀 그 유가 다르다.그의 미국 매니저인 테어 디스페커는 일반관객이 김남윤의 연주회 입장권을 구매하는 것을 여간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예를 들어지난 85년 일본 도쿄의 사보회관과 무사시노 문화시민회관 독주회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도쿄 인터내셔널 뮤직코퍼레이션은 다음해 앙코르연주를 요청해왔고 이미 정해진 스케줄로 인해 2년후로 계약을 미룬 일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78년 미국서 귀국후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독주회를 여는가하면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협연등 연평균 15회 이상의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연주가로 유명하다.그래서 국내의 비중있는 평론가인 유신 이상만 서우석 한상우들로부터 「그해의 음악인」으로거듭 선정되는등 음악과 관련된 모든 상을 혼자서 휩쓸다시피 했다. 그는 부친 김희룡씨와 음악을 좋아하는 정경선 여사 사이의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행지점장이던 부친의 임지를 따라 전주 대전등지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처음은 피아노를 치다가 9살되던해 이대 실내악단의 순회연주를 보고 섬세한 선율에 이끌려 바이올린으로 악기를 바꿨다.바이올린을 시작한지 3년만에 이화·경향음악 콩쿠르 특상,이화여중 3학년때 동아음악콩쿠르 1등에 입상하면서 스승과 부모의 기대를 받으며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순탄한 음악의 길을 걸어왔다. 줄리아드 음악원시절에는 김영욱 정경화를 길러낸 저명한 이반 갈라미언교수를 사사,또하나의 스승인 펠릭스 갈리미어교수는 「남윤의 남다른 정열과 힘있는 음악」을 유독 편애하여 그가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자 줄리아드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발탁했었다.이후 정상의 연주가,서울대 교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학이면 미국의 지도교수들에게 자신의 음악의 진취를 확인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한시도 쉬지않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연주회에 가고 친구들을 만난다.실제로 연습이나 강의가 없을땐 그의 손에는 라디게나 랭보나 이문열이 들려있다.원만한 대인관계로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장인 이경숙과의 그림자같은 우정은 음악계에서 널리 부러움을 사고 있다.일상생활에서는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즐기고 아끼는 제자가 연주를 앞두고 악기 때문에 걱정하면 자신의 소중한 과다니니를 선뜻빌려주기도 한다. ○요즘도 새벽녘에 연습 요즘도 연주 교섭이 들어오면 아무리 스케줄이 빡빡해도 일단 「하겠다」고 승낙해 버린다.이를테면 자선음악회는 자선음악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으며 지방연주는 지방인들을 위해서 당연히 외면할 수 없다는 식이다.유학시절에는 1시간의 독주회를 위해 1년동안 꼬박 하루 10시간의 연습을 지켰고 요즘은 새벽 1시이후 2∼3시간씩 바이올린을 잡는다. 그로선 빗발치는 박수갈채와 타인들의 시선속에서 어텐션을 받는 입장이다.사람들은 곧잘 그를 향해 「액티브하다」느니 또는 「슈퍼 우먼」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음악성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곡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깝다.간혹 엉뚱한 오해와 매도의 그물에 걸려 깊은 상처를 받는 경우에도 그는 상대방의 언어의 자유와 판단에 맡길뿐 「시간의 해결」을 믿고 동요하지 않는다.강한 정신력과 책임감,음악에 대한 사랑과 집념이 강인한 음악인으로 자신을 완성시켰고 그래서 정상에 우뚝 선 자의 자랑스러움이나 오만이 한낱 부질없음을 터득한바 오래다. 겉으로는 밝고 명랑하고 소녀처럼 들뜬 모습이지만 그와 오래 사귄 사람은 그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실낱같은 섬세함을 알고 있다.실제로 이런 면은 연주에서도 자주 노출되어 악보의 한소절에도 한치 소홀함이 없다.각 소절이 갖는 의미와 정감을 세밀하게 따져본 다음 자신이 느낀 것을 청중이 그대로 느낄수 있도록 농현(농현)의 현란을 멈출줄 모른다.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시절엔 어머니가 시켜서 음악을 공부했고 음악을 하다보니 걷잡을 수 없이 음악에 빠져들었으며 이제는 「운명」처럼 음악없인 한시도 살수 없을 것이다.음악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 자신이 음악자체라해도 과언일 수 없다』고 말할수 있게 되었다. ○“세속의 희열 초월” 극찬 그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어릴때부터 끝없이 그의 음악을 뒷바라지해왔고 지금도 변함없이 딸의 연주회장에 모습을 나타내는 80노모와 외아들(윤주영·17·미국유학중)과 함께 음악 못지않게 사랑과 정성으로 가족을 지키며 단란하게 살고 있다.여전히 의욕적인 연주활동을 늦추지 않아 올 상반기에 벌써 「이야기와 영상음악」청소년소녀 교향악단등 3차례의 연주,오는 6월4일 예술의 전당 독주회를 비롯,8차례의 연주 스케줄을 잡아놓고 있다. 언젠가 뉴욕타임스가 평했듯이 「그의 음악은 일체의 세속의 희열을 초월하여 자신의 생애를 보석타래로 엮어내듯」 악절마다에서 향기로운 화현마저 흘러나온다.더이상 정열에 넘치거나 솟구치는 법없이 캄캄한 어둠을 뚫고 흐르는 지하수처럼 방울방울 맺힌 영롱한 리듬은 듣는 이의 가슴속에 진한 각성을 던진다. 그가 친애해 마지않는 모차르트는 더 더욱 눈부시고 베토벤 프랑크는 장엄미가 두드러지면서 「시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언어」이듯이 그의 음악은 「음악자체로서 존재하는 언어」로서 날이 갈수록 성숙한 차원을 성립하고 있다.이제 그는 멀고 긴 아득한 터널을 지나 햇빛 찬란한 푸른 벌판에 나선듯 예술가로서의 최상의 절정기를 지금 맞고 있는 그 순간이다. □연보 ▲1949년 전주 출생 ▲59년 이화·경향콩쿠르 특상,백운창 김용윤 양해엽 사사 ▲64년 동아음악콩쿠르 1등 ▲67년 서울예고 졸업,미 줄리아드 음악원 입학 ▲69년 워싱컨 메리워더 포스트 컴피티션 입상 ▲70년 워싱턴 내쇼널심포니 오케스트라협연 데뷔 ▲71년 줄리아드 차이코프스키 콘체르토 컴피티션 우승,줄리아드 오케스트라 협연 ▲72년 LA 영뮤지션스 파운데이션 컴피티션 캐리어그란트상 ▲73년 허드슨밸리 영아티스트·스위스 티보바가 국제음악콩쿠르 1등 ▲77년 줄리아드음악원 졸업 ▲78년 귀국,제1회 독주회(서울시민회관)이후 해마다 독주회,경희대 음대조교수 ▲80년대 싱가포르 심포너 오케스트라,자그레브방송 교향악단 협연 ▲82년 서울대 음대교수 ▲83년 서울쳄버 오케스트라 창단 ▲85년 일본 독주회 ▲미국 시카고및 뉴욕 독주회,테어디스페커 매니지먼트사 소속계약,전주및 지방 6개도시 순회연주 ▲87년 미국 독주회(카네기홀) ▲90년 제1회 대만 국제콩쿠르및 싱가포르 롤렉스콩쿠르 심사위원 ▲92년 미국 보드윈 서머페스티벌 객원교수,도쿄 국제콩쿠르 심사위원,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라카르도 사이)협연 ▲9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협연 ▲94년 상하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협연(서울·중국) 등 5백여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한국음악페클럽상 난파음악상 올해의 음악가상 월간음악상 채동선 음악상 한국음악평론가상 예음상
  • 「일 트로바토레」·「안중근」·「무당」/오페라 3편 5월무대 장식

    ◎일 트로바토레/김동규씨 등 유명 성악가 출연/안중근/안의사 일생 그린 한·중 합작극/무당/이 출신 작곡가 메노티의 작품 싱그러운 5월 이채로운 오페라 3편이 음악팬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한국오페라단의 그랜드오페라「일 트로바토레」와 MBC 창작오페라「안중근」,국립오페라단의 「무당」이 그 작품들.앞의 두 작품은 남다른 의욕의 대작으로,국립오페라단의 「무당」은 이색적인 「소극장오페라 운동」으로 눈길을 끈다. 창단7년이란 길지않은 기간동안 화려한 대작들을 내놓아 오페라계의 눈길을 받아온 한국오페라단이 오는 27일부터 6월3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일 트로바토레」는 베르디가 전성기에 작곡한 것.그의 작품중 가장 원숙한 경지에 이른 오페라로 평가된다. 이번 무대는 특히 2인1역의 더블캐스트가 주종을 이루는 국내여건에서 한 주역에 국내외 정상급 성악인 각 한명씩으로 구성,매 공연에서 이들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는 욕심을 내세우고 있다.주인공 루나백작역에 바리톤 김동규씨(라 스칼라 주역가수),만리코역에 테너 브루노 세바스치안(〃),레오노라역에 소프라노 카타리나 구드리아프첸코(볼쇼이 오페라극장의 프리마돈나),아주체나역에 메조소프라노 정영자씨가 출연한다.특히 루나백작역의 김씨는 지난91년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제31회 베르디콩쿠르에서 1등을 한 이래 라 스칼라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하며 현지에서 베르디아노(베르디의 아리아를 가장 잘 부르는 성악가)로 불리고 있다. MBC가 광복50주년 기념으로 17일부터 21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창작오페라「안중근」은 안의사의 일생을 담은 한중합작오페라이다.고려오페라단(단장 김수길)이 6억원의 경비로 제작한 이 작품은 지난92년 중국 하얼빈에서 제작 공연된 중국작품을 극본가(하얼빈시 문화국장인 중국인 왕홍빈)와 작곡가(호남성의 가극원인 한국인 유진구)가 우리 정서에 맞게 개작하여 국내무대에 올리게 된 것으로 고려오페라단 김단장이 지난해 중국 하얼빈 여름음악제에서 접한뒤 국내에 들여왔다.안중근의사의 일생이 그랬듯 아름답고 슬프고 뜨거운 애국심을 전하는 아리아들이 무대를 애절히 장식한다.국립극장 오페라연출가 장수동씨 연출에 테너 박성원 박치원 류재광씨가 안중근역으로 트리플캐스팅됐다. 한편 「관객을 위한 오페라」란 이름아래 20∼25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무당」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 성공을 거둔 현대작곡가 메노티의 1947년작이다.
  • 소극장 산울림 개관 10돌… 기념무대 풍성

    ◎「딸에게」·「위기의 여자」 등 화제작 공연/「결혼하기엔 늦고…」 등 해외명작들도 소극장 산울림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화제작 앙코르공연,현대 해외명작 시리즈,창작극 시리즈 등 다채로운 기념무대를 마련한다. 화제작 앙코르공연 시리즈 첫 무대는 윤석화의 1인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지난달 16일 소극장 산울림에서 막을 올린 「딸에게…」(아놀드 웨스커 원작,정덕애 번역,임영웅 연출)는 지난 92년 3월 소극장 산울림에서 세계 초연돼 그해 겨울까지 장기공연됐던 화제작이다. 35세의 여가수인 엄마가 사춘기의 신체변화를 호소하는 딸에게 자신의 인생경험담을 들려주며 한 여자로서 알아야 할 일들을 깨우쳐 주는 줄거리를 담고있다.춤과 노래,연기력의 삼박자를 갖춘 윤석화의 끼가 한껏 발휘되는데다 잔잔한 메세지를 담고 있어 중년층 주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특히 이번 앵콜 공연에서는 윤석화가 직접 지은 노랫말에 작곡가 겸 가수인 조동진과 신예 작곡가 박인영이 곡을 붙인 5곡이 새로 선보인다.공연은 9일까지 계속된다.이어 박정자 주연으로 91년 6월부터 8개월간 장기공연됐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드니즈 살렘 원작,오증자 번역,임영웅 연출)가 중견 여배우 김용림의 무대로 5월 중 선보이고 86년 4월 공연된 시몬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가 뒤를 잇는다.남편의 부정을 알게된 한 여성이 갈등 끝에 남편으로부터 독립,자아를 찾는다는 줄거리의 「위기의 여자」는 장안에 여성연극 붐을 일으켰고 산울림의 존립 기틀을 마련해 준 작품이다. 마지막은 극단 산울림의 대표적 레퍼토리로 꼽히는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장식된다.공연 날짜 및 출연배우는 아직 미정. 현대 해외명작 시리즈로는 이미 공연을 마친 「러브 차일드」(조안나 머레이 스미스 원작)와 「거미 여인의 키스」(마누엘 피그 원작)에 이어 러시아작가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의 「결혼하기엔 늦고 죽기엔 이르고」를 국내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다.한 여가수의 타락한 삶이 무대 위에 진솔하게 펼쳐지는 이 작품에는 중후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전무송과 김금지가 공연한다. 한편 현재 활동 중인 역량있는 작가의 작품 중 3편을 선정,올 하반기 중 국내 창작극 발전을 위한 한국 신작 창작극시리즈도 마련할 계획이다. 지난 85년 3월 3일 개관한 소극장 산울림(대표 임영웅)은 10년간 재공연작을 제외하고 26편의 화제작을 선보이며 4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는 등 활발한 소극장 운동을 전개해 왔다.
  • 뮤지컬 「레미제라블」(브로드웨이 “새바람”:11)

    ◎8년째 공연… “무거운 주제” 첫 성공/“오락요소 있어야 흥행” 통념 깬 기념비적 작품/회전무대 이용 긴박감 넘치는 연출/87년 첫공연… 토니상 8개부문 휩쓸어/신예 연출·작곡가 참여 20국서 막올려 최근 브로드웨이 공연 8주년을 맞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화려한 무대,현란한 춤,활기찬 음악등 3요소의 혼연일체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기존 방정식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즉 레미제라블은 뮤지컬은 당연히 오락적 요소가 있어야 흥행에 성공한다는 정설을 무너뜨리고 당당히 「캐츠」에 이어 브로드웨이 최장수 뮤지컬 반열에 오름으로써 새로운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개막된 해인 19 87년 뮤지컬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하는 토니상 41회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에서부터 연출상·각본상·남녀주연상·미술상등 모두 8개부문을 휩쓸 정도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그 열기가 지금까지 조금도 식지않고 계속되고 있다. 「캐츠」「오페라의 유령」「미스 사이공」등과 함께 브로드웨이 4대 뮤지컬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이 공연되고 있는 브로드웨이 45번가의 임페리얼극장은 연일 만원을 이루고 있다.더욱이 이 극은 보통 2시간반인 다른 뮤지컬보다 한시간이 더 길어 관람객들은 자정이 다 되어 극장문을 나서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1862년에 간행된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대작소설 「레미제라블」을 제한된 공연시간과 극장무대라는 좁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은 이 극은 장중하고 긴 스토리를 서정적인 뮤지컬로 만드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긴 내용을 간결하고도 기능적인 무대전환을 통해서 긴박감 있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공연시간 1시간 더길어 특히 이 작품은 뮤지컬 제작의 제3세대라 할 수 있는 80년대 이후 대표적인 신예 연출가·작곡가·무대장치가 등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으며 세계 20여개국에서 공연되는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까지 얻고 있다. 당초 프랑스 극작가 알랭 부릴이 「레미제라블」을 뮤지컬로 제작할 의도를 처음 밝혔을 때 이 작품이 이미 원작소설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19 09년 미국에서 무성영화로 처음 만들어진 이래 전세계에서 70회 이상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뮤지컬을 통한 새로운 감동의 전달은 어느 작품보다도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면서 예수의 생애라는 널리 알려져 있는 장엄한 스토리가 팝송과 록음악을 통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전달되는 것을 깨달은 부릴은 레미제라블을 뮤지컬로 만들기로 하고 작곡가 클로드 미▦ 쇤베르그와 함께 각색에 들어갔다. 부릴은 또 당시 영국인 캐머론 매킨토시에 의해 리바이벌돼 런던에서 공연되고 있던 영국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를 뮤지컬화한 작품인 「올리버」를 관람하고 「레미제라블」과 비슷한 시대의 비슷한 주제의 무거운 작품이 매끈하게 소화될 수 있다는데 고무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은 19 80년 파리의 스포츠궁전 무대에 올려졌다.이미 쇤베르그에 의해 만들어진 「레미제라블」 음반들이 많은 인기를 모은 후였다.그러나 프랑스 바깥으로는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레미제라블」이 세계적인 뮤지컬로 알려지게 되는 전기를 가져온 것은 매킨토시와의 운명적 만남 때문이었다.당시 이미 「캐츠」를 제작,롱런가도에 올려놓고 있던 매킨토시는 쇤베르그의 「레미제라블」곡들을 듣고는 바로 부릴과 쇤베르그에게 영어판 「레미제라블」을 만들 것을 제의했던 것. ○한편의 거대한 서사시 그들의 동의로 일은 급진전돼 영어판 대본이 만들어졌고 런던에서의 공연을 위한 캐스팅,무대장치등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후에 「오페라의 유령」과 「미스 사이공」을 제작,브로드웨이 빅4를 모두 자신의 손을 거쳐 나오게 한 뮤지컬의 귀재 매킨토시는 자신은 총감독을 맡고 「캐츠」에서 호흡을 맞췄던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의 예술감독 트레버 넌과 존 내피어에게 각각 연출과 무대장치를 맡겼다.내피어는 빅4의 무대장치를 모두 만들었다. 이같은 호화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런던의 브로드웨이인 웨스트엔드 무대에 바로 올려지지 못하고 1985년 10월 변두리인 바비칸 센터에서 개막됐다.그후 이 극은 점차 호평을 받게됨에 따라 웨스트엔드의 팰리스 극장으로 옮겨 공연되었으며 87년 3월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빵 한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가고 석방된 후에도 평생을 쫓겨다녀야 하는 장 발장(돈 쿡)과 그를 쫓는 자베르 경감(머윈 포드)의 얘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중간에 코제트(탐라 헤이든)와 마리우스(크래그 루바노)의 사랑,시민혁명등 수많은 얘기들이 삽입되는 이 뮤지컬은 장 발장이 감옥에서 가석방되어 노년이 되어 죽기까지의 전체 스토리를 연대기적으로 표현한 한편의 거대한 서사시다. 막이 오르면 18 15년 한 프랑스 시골마을이 무대로 나온다.19년의 형살이 끝에 가석방된 장 발장은 성당 신부(케빈 맥기어)의 선한 가르침으로 새로운 인생의 다짐을 하게 된다. 거주제한등을 피해 이름을 마들렌으로 바꾼 장 발장은 8년후 한 공장의 주인으로 시장의 지위에까지 오른다.그곳에서 여공인 미혼모 팡틴을 알게 되고 그녀가 죽게 됐을 때 그녀의 딸코제트를 길러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적에 그는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여관집에 맡겨두었던 코제트를 데리고 파리로 향한다.18 32년 파리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의 시민혁명이 일어난다.바리케이드를 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나 결국 시민군의 패배로 끝난다. ○음반으로도 크게 히트 장 발장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코제트의 애인 마리우스를 구출,코제트와 결혼시킨다.마리우스는 장 발장의 신분을 알고는 그를 멀리하지만 후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임을 알고는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로 온다.장 발장은 코제트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둔다. 장 발장이 있던 감옥,코제트가 있던 퀴퀴한 여관집,팡틴이 있던 창녀촌,혁명을 모의하던 작은 카페,장 발장이 마리우스를 구출해 도망가던 파리의 하수구,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둔 치열한 전투등 극중 무대의 대부분이 어둡고 침울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그동안 뮤지컬이 금기시했던 비극적 상황들의 훌륭한 조화를 통해 휴머니즘의 뜨거운 감동을전해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특히 이 뮤지컬은 회전무대의 역동성을 충분히 활용,지루함없는 극의 연속이 이뤄지게 했으며 좌우 양측의 구조물을 연결시켜 이뤄낸 시민군이 쌓아올린 웅장한 바리케이드와 조명으로 처리해낸 파리의 하수구는 내피어 무대장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뮤지컬은 음반으로도 히트해 RCA사에서 만든 오리지널과 같은 음반사에서 출반된 오케스트라판,즉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의 연주로 반주를 보강한 것 모두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쇤베르그 음악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큰 흡인력으로 CD 2장(오케스트라판은 3장)의 전곡을 듣는 동안 무아의 서정성에 푹 잠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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