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6개의 무반주 첼로모음곡’(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5)
◎음악으로 돌아가는 경이/돌아감은 곧 나아감/명징하게 열린 비탄
1.춤은 태초부터 태초로서 있었으며 음악도 태초부터,태초로서 있었다. 그리고 나아 간다. 지금,악기(樂器)는 바로크 이전(以前)과 이후 그 사이에 있다. 스트라디바리 첼로. 음(音)은 과거보다 여린,섬세한 몸으로 진보(進步)의 창(窓)을 낸다. 그리고 선율이 도돌이표를 그리며 끝없이 유영(遊泳)한다.
첼로 음은 둔중하다가 느닷없이 중력의 흐느낌으로 치솟는다. 선율의 유영은 날씬하고 매끄럽다. 그리고 선율의 음악,음악의 말(言)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돌아가라,돌아가라,음악으로…아직 음악은 서두부다. 바흐 생애 전체로 보자면 종교적 경건함의 그 웅혼한 높이와 깊이를 악기와 인간 목소리의 음악으로 세우는 대장정을 아직 시작도 안한 셈이다. 그런데,도대체 어디까지 ‘음악으로 돌아’ 갈 참인가.
그러나 이 끝없는 돌아감 없이 바흐 음악의 위대한 경지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 돌아감은 나아감의 바탕으로 되고 그렇게 바흐 종교 음악의,두 겹 흔들림의 강한 성(城)이 이룩된다.
그 흔들림의 틀 속에서 종교음악의 가장 명징하게 열린,(광란이 아니라)비탄과 감동의 이성(理性)이 건축된다.
◎땀방울의 아름다움/아! 국제주의 프랑스
2.어쨌거나,지금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을 때. 음악이 음악 속으로 길을 내고 음악이 춤으로 되어가는,혹은 거꾸로의 시각(視覺)청각(聽覺)과정이 겹쳤다 분리되고 다시 겹쳐진다. 그 사이 분명 하나의 선율이 둘로 나뉘고 겹쳐지고 다시 여러 개 선율로 무한 공간으로 펼쳐진다. 아,단선(單線)인데. 푸가도 아닌데…그렇게 음악은 귓 속으로 또 제 몸 속으로 파고 든다.
이 곡을 발견하고 첼로 음악의 주요 레퍼토리로 확립시킴으로써 첼로라는 악기의 격(格)을 동시에 높였던 것은 파블로 카살스다. 그의 연주는 진지하며 묵중하고 정통적이다.
땀방울이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변해가는,음악에서만 가능한 ‘연습곡의 경지’를 그는 이 작품에 부여한다.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그 결과보다 아름다운,예술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서도 창조의 끔찍함에 경악하지 않는 그런 경지. 광활하고 심오한 종교음악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끝없이 음악의 원초(原初)로 돌아가는 ‘근면한 음악가’ 바흐의 체취를 우리는 카살스 연주에서 직접 맛볼 수 있다.
당시 바흐가 실험하던 악기는 바로크 첼로,즉 지금보다 고음현(高音鉉)하나가 더 붙은 비올론첼로 피콜로다. 애너 빌스마의 ‘원전 악기’ 연주는 그렇게 바흐의 실험 정신을 매우 참신하게 구현한다.
그러나 바흐를 따라,‘음악으로 돌아감’으로써 더 나아가려면 우리는 모리스 장드롱의 연주를 들어야 한다. 국제주의와 예술적 모성(母性)의 합(合)인 프랑스 정신이 스트라디바리 첼로 음을 구사하면서 위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고 현재에 와닿는다. 동시에,춤에서 기악(器樂)이 독립하던 그 기악(器樂)의 원초로 돌아간다.
즉 바흐의,흔들림의 미래인 것이다.
◎聖俗 거대한 변증법/첼로 최고의 연습곡
3.그렇게 기악은 앞으로 바흐 음악의,성스러운 광휘의 배경을 이루며 찬란한 광휘의 배경을 거대한 배경을 이루며 인성(人聲)에 내재한 비참의 아비규환을 성(聖)과 속(俗)의 거대한 변증법으로전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독립,푸가 기법 자체가 주제인 ‘음악의 음악’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필경은 기악만의 교향곡에 달하리라.
음악이 음악 속으로 길을 내고 음악으로 돌아가는데도… 아,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그 ‘과정의 예술’은 얼마나,종교보다 더 지상적(地上的)인 동시에 더 내세적(來世的)인가.
바흐가 살던 당시 첼로는 그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악기였다. 한마디로,바탕에 깔리는 반주 역할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왜 바흐는 이런 첼로 음악을,‘더군다나’ 무반주의,즉 첼로 만의 음악을 작곡했을까?
음악사가(史家)들은 흔히 그렇게 자문(自問)한다. 그리고 악기연주 발전사의 맥락에서 자답(自答)한다. 기량이 뛰어난 연주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커다란 홀 연주를 위해서는 음량이 충분한 악기가 필요했다… 운운. 그러나 우리는 예술창조의 맥락에서 설명을 덧붙혀야 한다.
그것은 ‘더군다나’를 ‘그러므로’로 바꾸는,사고의 전환과 직결된다. 반주 역할을 맡던 첼로를 음악세계의 유력한 등장인물로 바꾸려면,반주 역할자체를 의미화(意味化)해야 하는 것.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런 예술정신으로써 이 방면 최고 걸작으로 남게 된다. 이후 코다이,브리튼 등 극소수의 작곡가만이 ‘무반주 첼로곡’이라는 형식에 손을 댔다.그리고 바흐의 벽에 부딪쳤다.
◎투명한 슬픔의 육체/더 강건한 음악理性
4.다른 한편 이 예술정신의 세례를 받고 이후 숱한,완벽에 달한 독주 악기 연습곡들이 탄생할 것이다. 바흐 자신의 ‘평균율’,베토벤,브람스,쇼팽,쇼스타코비치에 이르는 연습곡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피아노 독주곡들이다. 그렇다. 바흐 ‘6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음악의 음악’으로써,그리고 첼로 연습곡으로써 완벽에 달했다.
돌아감의 통로로써 완벽하게 열렸던 것이다. 바흐로 돌아가라… 난해(難解)의 수렁에 빠져 음악의 귀(대중의 그리고 작곡가 자신의)를 상실당한 숱한 현대 음악가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어디로,무엇으로,돌아갈 것인가? 음악은 서주,알망드에서 쿠랑트로,그리고 미뉴에트,지그로 이어지는데. 그러는 사이 어느새 육체가 춤으로 춤이 선율로 전화하고 첼로 음마저 제 옷을 벗고 그렇게 다시 투명한 슬픔의 육체를 드러내는데. 그 드러냄이 이리 하냥 흘러가는데,그 경로가 6번이나 반복되고 심화확산되는데,어디로?
바흐의 ‘음악으로 돌아가는,그 경이’ 속으로. 근면과 예술 정신 속으로. 바흐보다 더 깊이. 바흐보다 더 난해한 세상을 포괄하는,혼란으로 더 흔들리면서 그것을 더 투명한 명징성으로 음악 세계화하는,그렇게 2,000년 낡은 문명의 나이를 아름다움의 나이로 바꾸어내는,더 강건한 흔들림의 음악 이성 속으로.
◎푸가,수트란
첼로는 4개 현이 각각 5도 간격의 도,솔,레,라로 조율되어 있다. 음역은 3옥타브 이상. 17세기에는 통주저음(通奏抵音,음악 내내 지속되는 저음) 연주악기 역할이 고작이었지만 낭만주의 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악기 중 하나로 부상했다.
푸가는 여러 개의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음악 형식. 원래 ‘비상(飛翔)’을 뜻하는 이탈리아 말이다. 둔주곡(遁走曲)이라고도 번역한다.
모음곡은 원래 여러 악장의,대개 춤곡 형태의 기악. 17,18세기에는 가장 중요한 기악 형식 중 하나였다. 바로크 시대 전형적인 모음곡은 알망드(4/4혹은 2/4박자의 독일 민속 무곡),쿠랑트(4/3박자의 프랑스 민속 무곡),사라반드(느린 3박자의 고전 무곡),지그(빠른 3/8 혹은 6/8박자의 무곡) 등 춤곡으로 구성되고 종종 미뉴에트(우아한 3박자 무곡),가보트 (4/4박자 춤곡)등이 삽입되었다. 소나타,교향곡 형식이 발전하면서 모음곡은 말 그대로 곡모음을 뜻하게 된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는 이탈리아 태생의 현악기 제작 거장(巨匠). 바흐 나이 35세인 1720년까지 황금기를 구가했다.
모리스 장드롱(1920∼1990)은 프랑스 태생의 첼리스트. 니스와 파리음악원에서 배우고 프라도에서 파블로 카살스를 사사했다. 70년대 이래 파리음악원 교수를 지냈고 지휘자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