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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세치 혀가 백만군사보다 강하다(리이위 엮음,장연 옮김,김영사 펴냄) 칼에는 두 개의 날이 있지만,사람의 입에는 백 개의 날이 있다고 한다.말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이 책에는 명나라 황제를 목매어 자살하게 한 우금성,진시황을 꾸짖어 헛됨을 깨닫게 만든 모초,촌철살인의 유머로 경쟁자를 물리친 처칠 등 동서양 현인들의 성공을 위한 ‘말의 책략’이 담겼다.예컨대 지상매괴(指桑罵槐)는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라고 꾸짖는다는 말이다.즉 다른 사람이나 남의 일을 거론하면서 상대를 비판하라는 얘기다.1만 8900원. ●이소크라테스(김봉철 지음,신서원 펴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유명한 연설문 작가이자 수사학 교사,정치평론가였던 이소크라테스의 삶을 조명.98세라는 긴 생애를 살다간 한 지식인의 삶과 사고의 행적을 통해 고전기 그리스 사회의 변질과 쇠퇴양상을 살핀다.그가 산 기원전 4세기 아테네는 ‘그리스의 학교’라고 불릴 만큼 문화적으로 풍요한 시대였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모스테네스도 이 시대 사람들이다.이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전통을 이어받아 현실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추구했다.2만원. ●김현준의 재즈노트(김현준 지음,시공사 펴냄) 우리의 시선과 안목으로 바라본 재즈론.재즈비평가인 저자는 ‘재즈는 악보가 없는 즉흥음악이다’라는 말은 재즈의 본질을 왜곡하는 발상이라고 비판한다.재즈는 추상적인 악보를 통해 연주자들의 해석과 접근에 보다 많이 의존하지만,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세세한 편곡에 이르기까지 악보를 구체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재즈의 역사를 톤과의 갈등으로 보는 저자는 ‘재즈에서의 톤’은 기술적인 요소가 아니라 연주자의 정신을 표출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임을 일깨워 준다.1만 4000원. ●진화적 풍경(복거일 지음,자유기업원 펴냄) 사회적 현상들을 진화의 개념으로 설명한 에세이.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저자는 자유주의 체제가 성공한 근본적인 요인은 그것이 진화에 가장 호의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건축생태계(arcology)의 사회적 함의’‘천사들이 밟기 두려워 하는 곳’‘유전자 혁명과 인류의 진화’‘천도론과 갑오경장’ 등 60여편의 글이 실렸다.1만 8000원. ●제로니모 자서전(제로니모 지음,최준석 옮김,우물이 있는 집 펴냄) 제로니모는 그 호전성과 용맹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아파치족 전사다.생전에 총알도 그를 꿰뚫을 수 없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으며 실제로 10여군데의 총상을 입고도 살아 남았다.미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디언이었고 서부 개척민들에게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공포 그 자체였다.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군사용 헬기에 아파치라는 이름을 붙였고,지금도 공수부대의 낙하병들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제로니모”라고 소리친다.이 책에는 제로니모가 직접 구술한 자신의 생애가 담겼다.1만원.˝
  • 80년 광주는 우리에게 무얼 남겼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24주기인 18일 지상파 방송사들이 과거 불행한 역사를 되짚는 특집물들을 잇달아 내보낸다. MBC는 오후 11시15분 ‘PD수첩’을 통해 ‘끝나지 않은 5월’을 방송한다.아직도 의혹으로 남아있는 행방불명자 문제와 암매장 의혹,당시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피해자들을 집중 조명한다.제작진은 당시 암매장이 이뤄졌던 ‘주남마을’에서 시신 7구를 수습한 시청직원 최모씨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한다.MBC는 5·18과 관련된 특선 드라마 ‘낮에도 별은 뜬다(오후 2시)’도 방영한다. EBS는 오후 10시 20분 ‘똘레랑스-차이 혹은 다름’의 제1부 ‘끝나지 않는 5월의 노래’를 방영한다.제작진은 광주를 기억하고 당시 아픔을 되새기는 연극·영화·음악 등 문화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겨진 5월 광주의 의미와 진실을 조명한다.또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추적해봄으로써 과연 5·18 정신이란 어떤 것이며,그것을 계승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짚어본다. 한겨레신문 홍세화 기획위원의 진행으로 소설가 송기숙,시인 김준태,화가 홍성담,민중가요 작곡가 박종화,영화 평론가 이효인씨 등이 출연한다.25일 방영되는 2부 ‘광주,금기에서 성역으로’편에서는 24년이 지난 ‘오늘의 5·18’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본다. KBS 1TV는 오후 2시 ‘한국 사회를 말한다-70인의 실종자,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편을 지난 15일에 이어 재방송한다.한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통해 저수지에서 놀던 어린이를 조준사격해 사살하는 등 무고한 시민을 즉결처분했던 당시의 충격적인 상황들을 고스란히 공개한다. 한편 SBS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5·18 관련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서울 탱고-현인의 ‘비내리는 고모령’

    대중가요 제목에서 대구와 인연있는 곡을 찾기란 쉽지 않다.이것도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도시분위기 탓일까.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대구는 대중가요를 통해 정감있는 도시의 모습을 알리려고 2001년 ‘내 마음의 동성로’(정풍송 작사,이길언 작곡,설운도 노래)를 만들었다.그러나 이 노래는 히트는커녕 그런 노래가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별로 없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요라는 게 어디 히트시키고 싶다고 맘대로 되는 건가.다행히 중년에게 익숙한 대구를 무대로 한 노래가 한 곡 있다.가수 현인이 턱을 부르르 떨며 혀짧은 목소리로 구성지게 불렀던 ‘비내리는 고모령’이다.고모령이 대구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드물어 아쉽긴 하지만. “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 올때엔/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해이던가/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작곡가 박시춘이 곡을 쓰고 유호가 노랫말을 붙인 이 노래는 당시 큰 인기를 누렸다.배경은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파크호텔 남쪽길에서 팔현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 고모령.파크호텔과 만촌자전거경기장 사이 길을 지나면 동쪽으로 나지막이 보이는 고개가 바로 고모령이다. 고모령에는 두 남매를 둔 가난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전해온다.전생에 공덕이 모자라 가난하게 살고 있던 세 식구는 덕을 쌓으려고 산을 하나씩 쌓기로 했고,나중에 쌓은 산을 비교해 보니 오빠가 가장 낮았다.어머니와 딸은 치맛자락으로 흙을 날랐으나 오빠는 저고리 앞섶으로 날랐기 때문이란다.이를 본 오빠는 동생이 쌓은 산을 뭉개 버렸고,남매 사이에 서로 싸우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는 두 남매를 두고 떠나 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그 고개가 ‘고모령’(顧:돌아볼 고,母:어미 모)이다.동네 이름도 고모동이라 불린다. 전설 속에서는 어머니가 집을 떠나지만 노랫말에는 자식이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나는 것으로 바뀌었다.아마도 전설 속 어머니는 배고픈 자식들을 위해 어디론가 돈을 벌기 위해 떠났으리라. 파크호텔과 경부선 철길 사이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고모령을 넘으면 노랫말 속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고모동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으로 고향과 어머니와 이별할 때 이용했던 고모역이 나온다.지금은 하루에 부산과 마산행 통일호·무궁화호가 두 번 정차하고,승객도 하루 10명 안팎의 초라한 간이역이다. 고모역 역무원 전기원(31)씨는 “고모역으로 발령받으면 ‘비내리는 고모령’의 가사를 외우고 노랫가락을 익히는 게 역무원들의 전통”이라면서 “종종 노인들이 삼삼오오 고모령을 답사한 후 고모역을 찾아와 역사에 머물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고 말했다. 이 노래는 김규택 대구 수성구청장과 수성구의회 의원들의 18번곡이기도 하다.김 구청장은 “고모령을 알리기 위해 노래부를 기회가 있으면 즐겨 부른다.”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랫말을 음미하며 부르면 고향과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고모령 일대는 요즘 천지개벽을 했다.고모령을 깎아 만든 경부선에는 증기기관차 대신 꿈의 열차라는 고속철(KTX)이 달린다.파크호텔 옆에는 대구의 부자들만 드나든다는 특급 인터불고 호텔이 들어섰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는 80여가구 고모동 사람들은 그린벨트가 풀린다며 땅값이 치솟아 부자마을의 꿈에 부풀어 있다.고모령이 좋아 5년 전에 고모동으로 이사왔다는 한강우(42·회사원)씨는 “고모령을 따라 도로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고,고속철이 달린다며 경부선 철로변에는 고압선 전주가 빼곡히 들어서 (노랫말처럼)부엉새 슬피우는 고모령의 옛 정취는 사라져 버렸다.”면서 “그러나 마을입구 동네 경로당의 노래반주기에서는 여전히 ‘비내리는 고모령’이 쉴새없이 흘러 나온다.”고 말했다. 1991년 만촌동 파크호텔 초입에 들어선 노래비 한편에는 고모령을 취재하다 열차사고로 숨진 한국일보 사진부 김문호 기자의 불망비가 자리잡아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노랫말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 5월 ‘오페라의 유혹’ ‘카르멘’ 이어 ‘루치아·토스카’ 막올려

    5월,오페라의 화려한 유혹은 계속된다. 오는 15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막올리는 초대형 야외 오페라 ‘카르멘’을 시작으로 한국오페라단의 ‘루치아’, 제누스오페라단의 ‘토스카’ 등이 6월 초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초대형 야외오페라 ‘카르멘’ 공연기획사 베넥스AnC가 야외 무대로는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카르멘’은 이탈리아 명연출가 잔 카를로 델 모나코가 총연출을 맡고,차세대 테터 호세 쿠라가 ‘돈 호세’역을,메조 소프라노 엘레나 자렘바가 ‘카르멘’으로 출연하는 등 정상급 출연진과 스태프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올 상반기 국내 최대 화제작답게 108m 길이의 무대와 무대 크기에 맞먹는 초대형 스크린,750여명의 출연진 등 화려한 규모를 자랑한다. 세계 3대 야외 오페라중 하나로 프랑스 극작가 메리메의 원작소설을 작곡가 비제가 오페라로 각색했다.스페인 세비야 지방을 배경으로 ‘하바네라’‘투우사의 노래’ 등 친숙하고 관능미 넘치는 선율과 스페인 정통 플라멩코 팀의 정열적인 춤 등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정서를 물씬 풍긴다.19일까지 총 4회 공연.1588-7890. ●도니체티의 비극 ‘루치아’ 26일부터 26∼3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루치아’는 한국오페라단(단장 박기현)이 지난 93년 이후 10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작품.원수지간인 두 집안의 선남선녀 루치아와 에드가르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영국의 대문호 월터 스콧의 소설 ‘람메르무어의 신부’가 원작이다.3막에서 주인공 루치아가 약혼자 아르투로를 찔러 죽인 뒤 피 묻은 옷 차림으로 20분간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는 화려한 기교로 유명하다. 루치아역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재래’라 불리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루치아 알리베르티가 캐스팅됐고,루치아의 오빠 엔리코 역에는 현재 유럽에서 맹활약중인 바리톤 고성현이 발탁돼 4년 만에 국내 무대에 선다.연출은 이탈리아 로마 오페라극장 상임연출가인 마우리치오 디 마티아.(02)587-1950. ●푸치니의 걸작 ‘토스카’ 예술의 전당서 ‘라보엠’‘나비부인’과 함께 푸치니의 수작으로 꼽히는 ‘토스카’가 제누스오페라단(단장 이승현)에 의해 6월5∼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나폴레옹군의 침략으로 불안에 떨던 로마를 배경으로 미모의 가수 토스카와 그의 애인인 화가 카바라도시,토스카를 차지하려는 경시총감 스카르피아 사이의 치정과 죽음을 다룬 비극의 스토리다.카바라도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부르는 ‘별은 빛나건만’이나 토스카가 자신을 유혹하는 스카르피아 앞에서 부르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등 주옥 같은 아리아로 더욱 사랑받고 있다. 토스카역에는 소프라노 캐슬린 맥 칼라와 바르바라 코스타,카바라도시역에는 테너 미구엘 산체스 모레노와 강무림 등 국내외 성악가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지난해 제누스오페라단의 창단공연 ‘아이다’에 참여했던 자코모 로프리에노가 지휘하고,장수동이 연출한다.(02)574-8060.˝
  • [1일 TV 하이라이트]

    ●열정(오전 9시) 강지는 회사에서 인희와 마주치자 우식에게 또 앨범 작업을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친다.준태는 영임이 병원으로 보낸 택배를 받고 망설인다.인희는 바쁜 자신을 대신해 원재를 돌봐준 영임이 앞으로도 원재를 매일 봐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인희는 고마워한다. ●씨네24(낮 12시25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혹은 극장으로부터 외면당한 영화들을 살펴본다.이런 영화들이 설 자리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놓치고 있는 영화와 함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본다.거장들의 작품으로 주목받은 ‘하류 인생’의 촬영 현장을 찾아간다. ●애니토피아(오후 9시10분) 컴퓨터로 이미지를 창조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본다.‘Ani-Where’ 코너에서는 ‘더 박서’를 만든 투바 엔터테인먼트의 애니메이션 제작현장을 찾아간다.‘애니를 만나다’시간에는 신태식 감독의 ‘더 박서’가 방영된다. ●뮤직n조이(오후 6시) 오페라의 유령,캣츠,에비타,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세계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탄생시킨 뮤지컬계의 미다스 손.금세기 최고의 뮤지컬 작곡가이자 뮤지컬계의 대부,앤드루 로이드 웨버.그의 환상적인 뮤지컬 음악들을 웅장하고 생생한 라이브무대에서 만난다. ●열린TV 시청자 세상(낮 12시10분) 요즘 아이들의 소비는 미디어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아이들의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는 어떤 것이 있으며,합리적인 소비를 위해서 그런 미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아본다.또 모든 세트를 직접 설계하고 총 관리하는 세트 디자이너 임순원 팀장을 만나본다. ●애정의 조건(오후 7시50분) 심한 빈혈증세로 병원을 찾은 은파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진단을 받지만 애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할 입장인지라 불안한 심경을 미선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는다.또 정한에게는 명수가 보낸 꽃바구니를 친구가 보냈다며 둘러댄 금파는 더 이상 정한과 진주 관계에 절절 매지 않는다. ●KBS스페셜(오후 8시) 사고 발생 이후 지금까지 용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밀착 취재한다.현장 영상과 목격자들의 증언,피해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그 원인과 경과,피해 상황 등을 알아본다.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북한과 국제 사회와의 관계에 변화 가능성이 있는지 전문가들의 진단을 들어본다. ˝
  • 서울탱고-떠나가는 배

    “저 푸른 물결 외치는/거센 바다로 오 떠나가는 배/내 영원히 잊지 못할/임 실은 저 배야 야속해라/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가곡 ‘떠나가는 배’는 제주출신 시인 양중해의 글에 6·25 당시 제주에 피란왔던 풍운의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인 노래다.이 노래는 섬이 안고 있는 숙명을,전쟁의 아픔과 상처를,인간이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별리의 정서를 담은 곡으로 ‘한국적 리얼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노래가 지어질 당시인 50년대만 해도 제주와 육지를 잇는 교통수단은 뱃길뿐이었다.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황영호·유명호·남신호·이리호·제천호·평택호·광성호 등 목선 기선들이 부산이나 목포에서 제주를 오고 갔다.그래서 당시의 제주부두는 오는 이들을 맞는 환희와 해후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떠나는 이를 보내는 작별과 통한의 나눔터였다. 1957년 2월 서울~제주간 대한항공공사 소속 KNA기가 운항을 개시하고,이어 1962년 12월 제주~서울간에 DC13기종의 30석짜리 KAL기가 취항했어도 제주부두는 여전히 육지와의 연결고리였다.10시간 가까이 배멀미와의 싸움은 6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 출항을 알리는 남일해의 ‘잘있거라 항구야’는 어찌해서 손수건을 적시게 만드는지,닻을 올리는 순간부터 울리는 굵은 뱃고동 소리는 왜 그리도 가고 보내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대는지…,선창에 남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객선 화통의 검은 연기가 수평선 너머 사라질 즈음에야 붉은 눈으로 돌아서곤 했다. ‘떠나가는 배’ 역시 제주부두가 고향이다.어느 노래든 배경과 사연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 노래 역시 기구한 사연을 안고 태어났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77·전국문화원연합 제주도지회장) 시인은 “시든 소설이든 사람 사는 방식을 유언처럼 남기는 문학작품”이라며 “1953년 시인 박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처로 제주를 택했고,둘의 사랑은 끝내 이별로 마감하게 됐으며,제주부두에서 여자가 탄 배가 수평선 너머 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목월의 심사를 담은 것이 바로 ‘떠나가는 배’”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놨다.(서울신문 4월21일자 9면 보도) 양 시인의 말을 듣고 목월의 제주거주 당시를 추적한 끝에 목월이 1년동안 묵었다던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집 아들 이창주(64)씨를 만날 수 있었다.그때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는 이씨는 “여자는 대학생으로 성은 한씨이며 무척 예뻤고 말수가 적고 다소곳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둘의 동거는 6∼7개월 계속됐으며,그녀는 목월이 제주대학으로 출근할 때나 귀가할 때 언제나 웃는 낯으로 보내고 맞았다.그러던 어느날 목사인 여자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딸을 데리러 내려왔다.가지 않겠노라는 딸을 이틀 낮밤에 걸쳐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나갔다.배에 오른 여자는 어깨만 들썩거릴 뿐,한 번도 뒤 돌아보지 않았고,셋은 배가 수평선 너머 사라질 때까지 마냥 서 있다가 돌아왔단다. “아마도 여자 분은 연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겠지요.그때 저는 굉장히 울었어요.여관에 있는 동안 무척 정이 들었거든요.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선생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는 집으로 돌아온 즉시 ‘부두의 이별’을 시로 옮겨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했고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한다. 이제 제주항 여객선 가운데 목선은 없다.위풍 당당한 코지아일랜드·오하마나·레인보우·컨티넨탈·페가서스·온바다훼리·뉴씨월드 등 3000∼9000t급 페리와 초고속선들이 부산·목포·여수·인천·완도·녹동 등을 오가며 연간 100만명이 넘는 손님들을 실어나르고 있다.암스테르담·퍼시픽비너스·클리퍼오디세이·크라운·닛폰마루 등 외국의 초대형 크루즈유람선들도 수시로 찾아온다.대합실 하나 없이 초라하던 여객선 부두에는 면세점 등 갖출 것 다 갖춘 대형 터미널이 들어앉았고,양곡·유류·비료·시멘트·목재·철재·잡화 등 연간 600만t에 이르는 연안화물이 입·출하되고 있다. 목월이 여자를 떠나 보내던 자리는 전체 일곱개 부두 가운데 여객부두인 제2부두가 됐다.그러나 제주항은 부두길이가 2582m로 길어졌음에도 선석이 포화를 이뤄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제주지방해양수산청은 지난 2001년 시작한 1374억원 규모의 제주외항 1단계 공사에 이어 1203억원 규모의 2단계공사를 추진,8만t급 크루즈선 부두와 2만t급 부두안벽 축조공사를 벌일 계획이지만 예산문제가 따라주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신영옥·시크릿가든 새달 합동콘서트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프리마돈나 신영옥과 클래시컬 뉴에이지 듀오 ‘시크릿 가든’이 한무대에서 환상적인 하모니를 연출한다. 새달 8일(오후 7시30분)과 9일(오후 5시) 이틀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합동 콘서트를 열어 동양적 정서와 유럽 특유의 감성이 어우러진 신비한 선율을 선사한다.11일(오후 7시30분) 울산 현대예술관에서도 공연할 예정. 신영옥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지난 90년 3000명이 출전한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우승하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혔다.최근엔 크로스오버 앨범 ‘My Songs’를 발표하는 등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시크릿 가든은 노르웨이 출신 키보드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롤프 러블랜드와 아일랜드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피오뉼라 셰리가 주축이 된 뉴에이지 그룹.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 히트곡 ‘Songs from a Secret Garden’이 삽입되면서 국내팬들에게 알려진 뒤 MBC ‘애인’‘신데렐라’ 등 드라마와 영화 ‘선물’,각종 CF의 배경음악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이번 공연에서는 시크릿 가든의 연주로 신영옥이 노래하는 ‘Nocturne’‘You Raise me Up’‘Adagio’,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불러 히트했던 ‘Heartstrings’를 비롯해 시크릿 가든의 피아노 반주곡 등 20여곡을 감상할 수 있다.(02)599-5743. 때마침 신영옥이 참여한 시크릿가든의 베스트 앨범이 발매돼 분위기 조성에도 한몫하고 있다.신영옥은 시크릿가든이 자신들의 최고 히트곡 ‘Adagio’에 영어 가사를 붙여 헌정한 ‘Swan’을 포함해 ‘Hymn To Hope’‘Song from a Secret Garden’ 등 세 곡의 보컬을 맡았다.릴레함메르에서 열린 콘서트 실황 중 발췌한 라이브 트랙 10곡을 포함해 2장의 CD에 총 30곡이 담겼다.유니버설 뮤직. 이영표기자 tomcat@˝
  • 극단 학전 아동극 ‘우리는 친구다’

    ‘지하철1호선’‘의형제’‘모스키토’등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의 명가인 극단 학전(대표 김민기)이 6년만에 신작을 선보인다.새달 5일부터 학전블루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아동극 ‘우리는 친구다’.독일 그립스극단의 ‘Linie 1’을 번안한 ‘지하철1호선’과 마찬가지로 이 극단의 아동극 ‘Max und Milli(막스와 밀리)’를 김민기 대표가 한국적 상황과 정서에 맞게 새롭게 각색했다. ‘모스키토’로 청소년극의 대안을 제시한 바 있는 학전은 오래전부터 아동극 제작에 깊은 관심을 쏟아왔다.80년대 노래극 ‘개똥이’나 ‘아빠 얼굴 이쁘네요’ ‘엄마 우리 엄마’ 등의 음반 작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틈날 때마다 아동극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김민기 대표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아동극을 파고들었다.1주일의 절반을 강원도 원주의 ‘박경리 토지문화관’에 머물면서 안데르센 동화집을 비롯한 온갖 아동서들을 섭렵, 작품 구상에 몰두해온 것.이와 더불어 아동극 전문극단인 그립스 극단으로부터 유럽 아동극 10여편을 추천받아 번안하는 작업을 병행해왔다.‘우리는 친구다’는 이런 준비 끝에 내놓은 어린이극 시리즈 ‘학전 어린이무대’의 첫 작품. ‘지하철1호선’의 명콤비인 극작가 폴커 루드비히와 작곡가 비르거 하이만이 만든 것으로,1978년 초연 이래 30년 넘게 꾸준히 공연되고 있는 그립스 극단의 대표작이다.현실을 가감없이 무대에 반영하는 그립스 극단의 연극 철학은 아동극에도 그대로 투영된다.부모의 이혼으로 겁쟁이가 된 ‘민호’와 TV에 중독된 ‘슬기’남매,아버지에게 매맞으면서 학원을 12개나 다녀야 하는 ‘뭉치’는 일방적인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어른만큼이나 진지한 고민을 갖고 있는 하나의 인격체로 그려진다. 김민기 대표는 “어른 시각으로 포장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존 아동극이 늘 못마땅했다.”면서 “동시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정서를 담아내는 ‘리얼리즘 아동극’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그는 “그림을 그리든,글을 쓰든 나이 50이 넘으면서 가슴 한켠에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의”라며 아동극을 향한 애정을 표현했다.“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 같은 심정”이라는 그는 내년부터 학전블루소극장을 어린이·청소년극 전용관으로 개조하면서 장애아와 비장애아의 우정을 그린 차기작과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 ‘로빈손과 크루소’등 10여편의 레퍼토리를 지속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공연은 6월13일까지.(02)763-8233. 이순녀기자˝
  •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부두에 새아씨 아롱젖은 옷자락. 고깃배가 한가로이 오가고 갈매기 떼 나는 포구 풍경이 떠오른다.그러나 이 노래가 만들어졌던 1930년대엔 이런 풍경을 즐길 만한 여유는 없었으리.나라 잃은 설움과 징용으로 기약없이 떠나는 이들의 눈물로 얼룩진 목포항이었기에. 지금은 풍경도 많이 변했다.나주 영산포까지 이어지던 뱃길도 끊긴 지 오래다.‘국민가수’ 이난영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목포의 눈물’ 현장은 여느 항구도시나 다름없다.섬주민들이 뭍으로 나들고 대형 무역선이 파도를 가른다. 이 노래는 요즘도 막걸리집,노래방,유흥주점 할 것 없이 ‘한(恨)’과 ‘설움’을 달래는 국민가요로 애창되고 있다. ●관광도시로 발돋움하는 목포 국토 서남권 맨 아래에 자리한 항구도시 목포.서울과는 멀고,교통문제 등으로 한때 소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리고 호남선 복선화와 고속철 운행이 시작됐다. 외지 관광객들은 철도를 이용하거나 차를 직접 몰고 내려와 세발낙지,흑산홍어 등을 즐긴다.‘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서 있는 유달산과 노적봉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다도해의 절경을 감상한다.서울에서 출발해도 하루면 넉넉하다.홍도·거문도를 잇는 관광선도 매일 출항한다. ●엘레지의 명곡 탄생 일제 말기인 1934년 한 신문사 주관으로 전국 6대 도시 ‘애향가’ 공모행사가 열렸다.해남 출신의 윤재희는 당시 전주고와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목포에 살고 있었다.그는 집안에서 노랫말 응모를 탐탁지 않게 여기자 ‘문일석’이란 필명으로 응모,전국에서 1등을 차지했다.가사 내용은 다분히 나라 잃은 설움을 표현한 글로서,특히 2절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란 부분이 일제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로부터 300년 전은 정유재란때 유달산 건너편 섬 고하도에 이순신 장군이 진을 치고 명량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가사에 일본이 이순신 장군의 위력에 눌려 꼼짝도 못했던 것을 담은 이유로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이 노랫말은 작곡가 손목인 선생을 만나 애달픈 곡이 붙여졌다.제목도 애향가인 ‘목포의 노래’에서 ‘목포의 눈물’로 바뀌었다. 이 노래를 히트시킨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유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으로 어머니가 제주도로 가정부살이를 떠났다.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면화공장에 다니다가 어머니를 찾아 제주도로 건너간다.제주에 살 때는 극장을 경영하던 주인집의 아이를 돌봐줬다.그녀가 흥얼거리던 노래는 자연스레 집주인의 귀에 들렸고,집주인은 그녀를 극장의 ‘막간가수’로 무대에 세웠다.열여섯살이던 1932년 ‘삼천리 가극단’의 특별단원으로 채용되고,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는 당시 가극단원으로 재일 조선인 위문공연을 갔다가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었다.이 사장은 작곡가 손목인에게 그녀를 소개했고,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와 ‘목포의 눈물’이 만나게 된다. ●서해안시대 이끄는 목포 목포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에 밀려 ‘낙후’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지금은 교통수단 발달과 함께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유달산 밑자락까지 이어진 갯벌은 매립돼 국제여객선 터미널이 들어섰다.서해안고속도로가 북항∼선창∼동명동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와 연결됐다.선창 주변에 어지러이 자리했던 생선 좌판들도 깔끔하게 정리됐다.통통배가 쾌속선으로 바뀐 것만 다를 뿐 남해안 다도해를 오가는 선박들이 항구에 빼곡하다.유달산∼선창∼갓바위공원으로 이어지는 해안 관광벨트는 꼭 둘러봐야 할 코스다. 각종 산업시설과 홍등가가 들어섰던 삼학도도 옛 모습 복원을 위한 공원화 사업이 한창이다.노랫말 ‘삼학도∼파도 깊이∼’에 나오는 삼학도는 원래 3개 섬으로 이뤄졌었다.그러나 정유·제분공장이 들어서면서 한 개의 섬으로 합쳐졌다.목포시는 섬 사이에 운하를 파고 공장을 철거 중이다.건너편에는 대불산단이 들어서고,신외항 등 물류단지가 조성되고 있다.유달산만 그대로다. 목포문화원 홍성민(31) 대리는 “목포는 당시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호남평야의 곡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심 항구였다.”며 “‘목포의 눈물’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한’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목포 최치봉기자 cbchoi@˝
  • 정상의 트럼펫주자 안톤젠 내한

    세계 정상급 트럼펫 주자인 올레 에드바르트 안톤젠이 서울시향의 ‘브라스 비르투오조 시리즈’의 첫 연주자로 초청돼 국내 무대에 선다.97년 내한공연,2000년 아셈 평화음악회에 이어 세번째 방한이다.21일 오후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02)399-1741. 노르웨이 출신의 안톤젠은 오슬로 필하모닉 수석을 떠나 솔로이스트로 활동하면서 마리스 얀손스,미하일 루디 등 세계 유수의 음악인들과 10여장의 음반을 낸 명연주자.‘Read my lips’ 등 크로스오버 음반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연주곡은 고전 트럼펫 협주곡의 걸작인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플랫 장조’와 졸리베의 ‘트럼펫,피아노와 현을 위한 콘체르티노’. 하이든의 협주곡에선 지난해 세계적인 작곡가 크지쉬토프 펜테레츠키로부터 헌정받은 카덴차(곡이 끝나기 직전 독주자가 펼치는 화려한 기교)를 연주할 예정이다. 졸리베의 곡에는 피아니스트 김영호 연세대 교수가 협연한다.지휘는 폴란드 출신의 타데우슈 스트루가와. 이순녀기자˝
  • 서울 탱고-대전부르스

    ‘대전발 0시50분’ 지금 이 열차는 없다. ‘목포행 완행열차’도 사라진 지 오래다.다만 목포행은 대전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전선을 통해 서대전역을 거쳐 가는 새마을과 무궁화호 열차가 요즘도 하루에 몇대 운행되고 있다. 하지만 새마을과 무궁화호는 서민의 교통수단으로 대표되던 당시 완행열차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서민들의 애환이나 정취가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 50년대 말 인기 블루스 가수 안정애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대전부르스’를 낳은 대전역은 현재 그 애절함을 뒤로한 채 고급스러운 고속철도가 오가는 최첨단 역사로 탈바꿈했다. ●반나절 생활권의 중심역 대전역 2004년 4월.‘꿈의 교통수단’으로 불리는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역사는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지상 3층의 역사가 4층 규모로 신·증축됐다.예전에는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서있는 동쪽으로만 열차를 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역사가 브리지 모양으로 지어져 반대편(서쪽)에서도 탑승할 수 있다.또 역사와 철로 밑을 관통하는 동서 연결도로가 한창 공사중이어서 대전역에서 이전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임승빈 대전역 역무팀장은 “역이 좋아지고 깨끗해지다 보니 노숙자만 더 늘어났다.”고 푸념했다. ●이별의 명곡 탄생 1959년 어느날 밤 0시40분쯤.산책나온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 플랫폼 가스등 아래에 머문다.청춘 남녀가 두 손을 꼭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아쉬워한다.마침 남자를 떠나보낼 목포행 0시50분 증기기관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 시를 쓴다. 이렇게 탄생한 노래가 ‘대전부르스’.사내는 당시 신세기레코드사 사업부 직원 최치수로 지방출장을 와 대전역 인근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최씨로부터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는 3시간여의 작업끝에 블루스 리듬의 ‘대전부르스’를 만들어냈다.가수는 블루스를 잘 부르는 안정애로 정해 녹음에 착수했다.출반 3일 만에 서울과 지방 음반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고 이 음반을 찍어낸 레코드사는 창사 이래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한다. ‘대전부르스’를 만든 이들이 대부분 세상을 떴지만 노래만은 지금도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면 애절하게 뽑는 국민의 ‘18번’이 됐다.1980년에는 조용필이 리바이벌하면서 다시 히트를 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 있거라/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영원히 변치말자/맹세했건만/눈물로 헤어지는/쓰라린 심정. 임 팀장은 “요즘은 군대갈 때 애인이나 가족들만 울 뿐 눈물로 헤어지는 사람들은 없다.”고 역 분위기를 전했다. ‘대전발 0시50분’도 노래가 나온 이듬해 2월 ‘대전발 03시05분’ 열차로 변경되면서 노래에 흔적만 남긴 채 수명을 다했다고 한다. ●이별보다 만남의 창이 된 대전역 대전은 국토의 중심에 있고 유성 등 관광지가 발달돼 ‘만남의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각종 회의나 세미나 등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30여년간 역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낙원다방’ 여주인은 “10∼20년 전만 해도 친구나 애인이 헤어지면서 나누던 정담이 많았으나 요즘은 모임이나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며 “인심이 팍팍해져서인지 그런 낭만이 없다.”고 말했다. 역 주변 상권도 유성과 둔산으로 도시중심이 이전하면서 많이 위축돼 있다.열차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굳이 하루를 묵으면서 일을 보거나,뜸하게 오는 열차를 놓칠세라 웬만하면 역 근처 여관에서 잠자던 옛날과 달라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아무튼 역사가 호화로운 것과는 달리 여관과 다방의 허름한 모습은 예전 그대로고 그 수도 많이 줄었다.먹고살기 위해 보따리를 이고지고 열차에 오르내리던 아주머니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역과 열차하면 이별이 먼저 떠오르고 노래도 ‘대전부르스’나,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가 불러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리스 가곡 ‘기차는 8시에 떠나네’처럼 애절해야 제맛이 난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남성듀오 ‘얼바노’ 떴다

    진짜 실력있는 뮤지션들은 죄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근 1,2집을 동시에 낸 펑크·솔·R&B 신인 남성 듀오 얼바노(Urbano)도 여기에 해당된다. 얼바노는 초등학교 동창생인 전영진,김중우 두 사람이 2000년 의기투합해 만든 프로젝트 듀오.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에 감히(?) ‘뉴 스쿨 펑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음악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두 사람의 음악적 공분모인 펑크,솔,R&B가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 “과거 ‘올드 스쿨 펑크’를 빗대어 디지털 음원을 이용해 세련되게 도회적으로 연주한다는 의미에서 ‘뉴 스쿨 펑크’라고 붙인거죠.” 얼바노는 일반인들에겐 생소하지만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선 유명인사.작·편곡,연주,노래,믹싱,프로듀싱까지 앨범 작업 전체를 거뜬히 소화해내는 이 ‘슈퍼 듀오’는 짱짱한 실력을 바탕으로 박효신,JK 김동욱 등 유명 가수들의 작곡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집에 수록된 ‘너뿐이라고’와 ‘Ego’는 김동욱의 2집 앨범에도 실려 있다. 1집과 2집이 동시에 나온 데는 사연이 있다.2002년 사비를 털어 조금 찍어내 지인들에게만 돌렸던 1집은 입소문이 퍼지면서 금방 동이 났다.이후 팬들의 재발매 요청이 끊이질 않았고 2집과 함께 1집도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음악적 색깔을 찾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1집에 비해 2집은 좀더 부드러워졌어요.” 1집 ‘네탓이지’와 ‘상처’,2집 ‘너라는 존재에게’와 ‘Something’이 바로 얼바노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곡이란다.2년 동안 얼바노의 음악을 애타게 기다리던 팬들은 한층 원숙해진 노래와 연주에 감탄할 듯.음반 판매량도 지금은 주춤한 상태지만 초반에는 10위권을 유지했다. 네이버에서 근무하는 전영진과 미국 시카고대 휴학생인 김중우는 얼바노 멤버로 활동하면서 몰입하는 음반 작업 말고는 관심도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잡혀 있지 않다.다만 김중우는 최근 12인조 애시드 재즈 밴드 ‘컴온그라운드’를 결성,팬들과의 만남을 준비중이다. 대중매체 전파를 전혀 타지 않고 단 2장의 앨범으로 음악팬들을 사로잡은 저력이 다른 대중가수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박상숙기자 alex@˝
  • 우리 꽃 따라 30년 김태정 한국야생화연구소장

    설악산 한계령 고갯마루,오전 11시.따뜻한 아침 햇살에 데워진 용담꽃이 천천히 봉오리를 연다.그러자,붓끝처럼 뾰족이 말린 자주색 꽃봉오리 안에서 커다란 호박벌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용담꽃이 매일 오후 2시쯤 꽃잎을 닫고 다음날 오전 11시쯤 봉오리를 여는 생태를 이용한 ‘얌체투숙객’이다. 그러나 용담꽃에 이보다 더 고마운 손님은 없단다.김태정(金泰正·62) 한국야생화연구소장은 “용담꽃은 수술과 암술이 길쭉한 몸통 안쪽 깊이 있어서 ‘밤손님’인 호박벌이 꽃가루를 다른 꽃으로 전해주지 않으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면서 “나 역시 그 호박벌처럼 우리 들꽃과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로 살고 싶다.”며 웃었다. ●목숨살린 이름모를 열매 찾으려 시작 그는 ‘국졸’이면서 ‘박사’다.‘걸어다니는 식물도감’ 김태정 소장은 학계에서도 “현장답사 경험만 놓고 보면 어떤 학자도 따르지 못한다.”고 한수 접어주는 인물.1971년부터 우리 들꽃을 카메라에 담고자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으니 벌써 30년이 넘는다.남녘끝 한라산에서 태백산 설악산 거문도 독도 백령도까지 휴전선 남쪽 땅은 밟아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단다.정부나 언론사가 민통선이나 휴전선,백두산 등지를 현장답사할 때면 으레 그에게 참가 요청 또는 문의가 들어온다. ‘한국의 자원식물’(전5권) 등 그동안 쓴 관련 서적이 60여권이고,찍은 사진도 100만컷을 넘는다.그 필름을 연결한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3번은 왕복할 양이다.이 사진자료들은 학계에서 식물도감 등을 만들 때 고스란히 사용되는 귀중한 자료다.지난 84년에는 LA국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관련책 60여권·찍은 사진 100만컷 김 소장과 우리 들꽃과의 인연은 18세 때인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6세 때부터 앓던 간염이 악화해 당시 김 소장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서울 큰 병원에서도 고개를 내저을 때,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것은 미심쩍은 민간처방이다.한동네 할아버지가 전해준 이름모를 열매를 복용하자 병은 일주일 만에 나았다.완치의 기쁨도 기쁨이었지만,그 힘든 병을 조그만 열매 하나가 간단히 고쳤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김 소장은 이후 롯데 ‘고구마깡’ CM송 등 CM송 작곡가로 활동하면서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결국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우리 들꽃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열매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그러나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제 자리에 꿋꿋하게 핀 소담스러운 들꽃들을 보다가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웃음)” ●야생화 찍느라 왼쪽눈 머는 것도 몰라 작고한 송주택 전 전북대 농대 식물분류학 교수를 스승으로 모신 김 소장은 밤에는 개인강의를 듣고,낮에는 산속을 누비고 다녔다.“스스로 좋아서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적어도 3대의 카메라에 필름 100여통,침구·취사도구 등 30㎏에 이르는 장비를 짊어지고 길도 없는 들과 산을 며칠씩 헤매고 다녔다.“한창때는 일주일에 네댓새를 현장에서 살았습니다.3월부터 10월까지는 주로 산에,나머지 겨울철 4개월 동안은 남녘 섬에 가지요.” 암벽에 핀 꽃을 찍으려다 추락해 다리를 다쳐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외롭고 힘든 일이다.“그래도 이산 가면 더 좋은 꽃이 있고 저산 가면 더더욱 좋은 꽃이 반기는데 어쩝니까.집에 하도 안 들어가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 얼굴도 생경해졌지요.그래도 별 수 없어요.속된 말로 마누라 도망가는 것 무서우면 이짓 못합니다.(웃음)” 김 소장이 우리 산들을 돌아다니며 찍은 필름 가운데 지금 남은 것만 100만여컷.하루에 평균 1000컷은 찍었단다.“나중에는 종로세무서에서 ‘무슨 필름을 이렇게 많이 쓰느냐.탈세수법 아니냐.’며 조사나온 적도 있지요.” 필름값뿐만 아니라 20대도 넘게 부서뜨린 촬영용 카메라,여행경비 등으로 빚도 많이 졌다.“지금껏 쓴 돈을 합하면 집 두세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겁니다.80년대 후반에 인세 등으로 생활이 조금 피기 전까지는 빚쟁이 피해 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지요.” 그러나 현장에 나가 꽃만 보면 모든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산에 가면 잡념이 사라집니다.그럴 틈이 없어요.대부분의 꽃 촬영은 아침 한때 승부입니다.그 시간에는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합니다.다른 사람들도 ‘저이와 같이 현장 나가면 점심은 당연히 굶고 빨치산처럼 산만 타야 한다.’고 꺼리더군요.” 김 소장은 촬영에 너무 열중하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87년 민통선 북방지역 종합학술조사단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직사광선 속에서 모자도 안 쓰고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다가 땀이 너무 많이 눈에 흘러들었나 봅니다.현재 왼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그래도 카메라는 오른쪽 눈으로 찍으니 별 상관없잖아요?” ●미친듯 산속 누비고 다녀 ‘빨치산’ 호칭 그에게는 요즘 한 가지 고민이 있다.제 일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할 텐데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한 것.의욕적으로 덤비던 사람도 김 소장과 함께 3일만 현장 생활을 겪고 나면 도망가기 일쑤란다.“들꽃도 생명인지라 시시각각 변해요.내 뒤에도 누군가는 그것을 찍어서 남겨야 하는데….”우리 식물이,번식력도 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외국산에 밀려 점차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모두들 조금만 더 우리꽃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굳이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제발 꺾거나 밟지는 마세요.꽃이 꽃으로 피는 이유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렇게 하지 못할 텐데….어떻게든 자손을 이으려고 그렇게 고생하는,우리와 같은 생명체입니다.” 김 소장은 오는 18일부터 7월 중순까지 전국 초·중·고 교사들이 주로 참여하는 300명 규모의 ‘우리들꽃사랑 가족교실’을 준비중이다. “애정을 가지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지요.이름부터 알고 어떤 꽃인지를 알고….그것을 조금이라도 돕는 것이 제 일입니다.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한 이 중매쟁이 노릇을 계속할 겁니다.” 글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 약력 1942년 충남 부여 출생 55년 부여 양화초등학교 졸업 71년 한국야생화연구소 설립 84년 LA국제대학 명예박사 85년 제10회 서울시발전상 은상(서울시) 87년 민통선 북방지역 자연생태 학술조사단 참가 88년 서해 외연열도 자연실태 학술조사단 참가 89년 영광 안마군도 자연생태 학술조사단 참가 90년 스포츠서울 백두산 야생화 학술탐사단 단장 90∼91년 서울신문·스포츠서울 국토종단 야생화 대탐사단장 91년 제9회 과학기술도서상 저술부문 수상(과기처장관·출판문화협),제19회 세계환경의날 환경보존 유공포상(국무총리상-환경처) 97년 제37회 한국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한국일보),MBC 대학생 백두산 자연생태 탐사단장 2000년 환경보전 표창(환경부장관),환경부 환경홍보사절 위촉 01년 KBS 북한지역 백두고원 탐사단 ˝
  • [7일 TV 하이라이트]

    ●수요예술무대(밤 12시45분) 첫 무대의 주인공은 가레스 게이츠.선천성 말더듬 장애를 딛고 ‘Any one of us’란 노래로 전세계 음악팬들을 열광시켰던 영국의 가수 가레스 게이츠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어본다.또 팝 밴드 멤버에서 실력있는 작곡가로, 이제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하람의 무대를 오랜만에 만나본다. ●사이언스+(오전 8시30분) 고속철도(KTX)를 직접 타고 과학 강연을 듣고,과학자의 생활도 체험하는 KTX 사이언스 투어가 마련됐다.백인욱(산업대 정보사회학) 교수의 ‘네트워크 사회의 과학 기술과 사회 문화’ 강연과 박천홍(‘매혹의 질주,근대의 횡단’ 저자)씨의 ‘철도기술의 발달과 여행 문화’의 특강을 들어본다. ●EBS 문화센터(오전 11시) 인도의 전통 천연염료 헤나를 이용해 모발염색·보디페인팅·스카프 만들기에 도전한다.헤나 모발염색은 새치머리에 색을 내줄 뿐만 아니라 머릿결을 건강하고 탄력있게 만들어준다.헤나로 하는 보디페인팅은 본래 화상 응급처치용으로 쓰였지만 인도의 종교의식이나 축제에도 사용된다. ●인생극장 오 마이 갓(오후 10시50분) 첫번째 이야기.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러 외국에 갔다 돌아온 아버지는 그동안 고생한 가족들을 보자 속이 상한다.두번째 이야기.가난한 집에서 외팔이 어머니를 원망하며 살던 윤선은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집을 나간다.10년 후,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부음소식에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해결! 돈이 보인다(오후 7시5분) 생고깃집을 개업한 지 1년째,밀린 가게세와 재료 살 돈마저 떨어져 폐업 직전인 김순남 사장.업종 변경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련한 비장의 카드는 자신의 고향음식인 오삼불고기.대박집을 찾아 강원도 횡계 일대를 동분서주하던 MC는 마침내 오삼불고기 대박집을 발견한다. ●꽃보다 아름다워(오후 9시50분) 집을 찾지 못해 파출소에 있는 엄마를 보고 고모부는 엄마가 치매라도 걸린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인철을 만나기 위해 미수는 인철의 별장을 찾아간다.인철은 미수에게 죽은 재식과 함께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준다.미수는 여전히 인철을 사랑하지만 함께 외국으로 떠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오후 7시30분) 현욱은 종규와 남선 부부의 등쌀에 괴롭다.폭설 피해 신고 때 자신들의 피해를 100고랑이 아니라 100평으로 신고해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현욱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규로부터 100평이라 들었기에 억울하기만 하다.그들 부부는 마침내 현욱의 집에 텐트를 치고 들어와 버린다. ˝
  • [책꽂이]

    ●시장인가? 정부인가?(김승욱·조용래 등 지음,부키 펴냄) 시장기능 중시자들은 경제란 근본적으로 자기치유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누진소득세나 실업보험 같은 자동안정화장치를 통해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반면 정부개입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재정정책이나 통화·금융정책을 통한 경기의 미세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경제학은 흔히 ‘선택의 학문’으로 불린다.이 책에서는 경제학의 두가지 큰 흐름인 시장주의자의 ‘보수적’ 시각과 정부개입주의자의 ‘진보적’ 시각을 두루 살핀다.1만 2000원.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에드워드 애비 지음,신소희 옮김,문예출판사 펴냄) ‘서부의 소로’라 불리는 저자가 미국 서부 황야를 탐험하며 느낀 자연에 대한 단상을 풀어낸 수필집.불타는 새벽녘,찬란한 강,빛나는 사암 계곡 등을 생생히 묘사하는 한편 인간의 오만과 환경파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식도출혈로 죽은 저자는 자신의 소망대로 침낭에 담긴 채 픽업트럭으로 옮겨져 애리조나 남부의 사막 한 가운데 묻혔다.에드워드 애비는 미 서부의 광활한 자연을 상징하는 전설 속의 인물이자 신화다.9800원. ●예수의 생애(마크 털리 지음,윤희기 옮김,문학동네 펴냄)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둘러싼 ‘음모이론’ 못지않게 역사학자와 성경학자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게 예수 부활의 사실 여부다.제자들 앞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유령이었다는 주장,예수는 완전히 사망한 것이 아니라 중상을 입은 채 다시 되돌아온 것뿐이라는 주장 등.부활은 예수의 신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영국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프라 안젤리코·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 등 아름다운 성화와 함께 십자가 수난의 의미와 부활의 신비를 밝힌다.2만원. ●영화 속 클래식 이야기(최영옥 지음,우물이 있는 집 펴냄) “훌륭한 영화음악이란 영화보다 늦게 기억되는 음악이다.” 작곡가 한스 짐머의 말이다.이렇듯 영화는 그 음악으로 인해 한층 큰 감동을 줄 수 있다.이 책은 영화에 삽입된 45편의 클래식 음악을 소개한다.영화 ‘플래툰’에 나오는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쇼생크 탈출’에 등장하는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양들의 침묵’에 쓰인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 등이 그것이다.8800원. ●파울로 솔레리와 미래도시(파울로 솔레리 지음,이윤하·우영선 옮김,르네상스 펴냄) 도시계획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아르콜로지(arcology)’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미국 애리조나 사막 한복판에 도시를 건설중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파울로 솔레리다.이 책은 이탈리아 태생의 건축가이자 철학자인 솔레리가 제시하는 미래도시의 모습을 소개한다.1만 5000원.˝
  • 무대 복귀하는 ‘원조 국민가수’ 최희준 씨

    가수 최희준(68)씨가 26·27일 서울 정동극장에서 ‘최희준의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를 연다는 얘기를 듣고 문득 ‘인간 최희준’의 모습이 궁금해졌다.반세기에 가깝게 팬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온 것은 그가 노래로 그때 그 시절에 우리의 정서를 어루만지고 보듬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사무실에서 최희준을 만났다.그는 3월말 문예진흥원 상임감사직 임기를 마친다.대뜸 이제는 원로 가수라고 불러 드려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에이,원로는 무슨 원로예요.그냥 가수 최희준이지요.” 국회의원도 지냈고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TV에서 본 대로 권위 의식이 없다.서민적 외모에 성격도 소탈하다.하지만 원로라는 말에는 아직 거부감이 있는 듯하다. 가요계에 복귀하는 심정을 묻자 “노래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니까요.앞으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노래를 할 생각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서울 경복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59년 미8군에서 냇킹콜 등의 팝송을 부르기 시작해 1960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가요계에 데뷔했다.진고개 신사,맨발의 청춘,길잃은 철새,빛과 그림자,하숙생,팔도강산….대표적인 히트곡들이다.하지만 가수로서 회한이나 후회 같은 것은 없었을까.민주당 조순형 대표,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서울대 법대 동기생들이다. ●노래에 진정성 불어넣을 때 희열 느껴 “가수라는 직업은 참으로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노래하는 순간 특히 노래가 잘 됐다고 느꼈을 때 가슴에 희열이 입니다.정성을 다해 노래를 불러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이 들 때는 정말 행복합니다.순간순간 내 자신이 놓여있는 자리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래를 부르며 한평생 산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잊지 못할 공연을 얘기해 달라고 하자 95년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데뷔 35주년 기념 공연이라고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공연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는데,마치 산 정상을 정복한 느낌이었습니다.” 미8군 무대 시절 미군들은 ‘벨벳 보이스’라고 얘기했고,요즘도 부드럽고 감미롭다는 평을 듣지만 목소리에 의존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아마 그런 진정성과 가슴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전달돼 ‘한국 스탠더드 팝의 대부’,‘원조 국민가수’라는 평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한다.자신의 말이 남의 사생활이나 인격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학사가수’들의 근황을 들려 달라고 하자,위키리(이한필)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박형준은 시애틀에 산다고 전한다.그러나 무엇을 하며 사는지에 대해선 “자주 만나지 못해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가족에 대해선 더 말을 아꼈다.89년 7월, 10년 가까이 유방암과 싸우던 부인과 사별하고 91년 2월 현재의 부인(52)과 재혼했다.사별한 전 부인과는 2남1녀를 두었다.자녀의 근황이나 현재의 부인 이야기는 아픈 상처를 들춰내는 것이라며 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숙생’은 해방 이후 가장 사랑받은 노래 중 하나다.그래서 본인도 ‘하숙생’을 제일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다른 노래들도 다 좋아하는데,‘하숙생’은 정말 고마운 노래지요.”하고 답했다.언뜻 자신에게 곡을 준 작곡가들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변함없는 인기의 또 다른 열쇠는 성실함인 듯했다.“저는 우등상보다는 개근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그동안 제가 재주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 봤습니다.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데다 손석우 이봉조 길옥윤 김호길 최창권 선생 등 한국 가요사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지요.” ●15대 국회의원 4년간 단 한 번 결석 1996년 경기도 안양시 동안 갑(甲)에서 국민회의 공천으로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유명 연예인이었던 만큼 그 전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알고 있었지만 정치에 입문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였다고 한다. “제 스스로 새정치국민회의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어요.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투표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정치하라고 누가 권하지도 않았습니다.그러다보니 공천을 받았고 선거에도 이겨 국회의원이 됐지요.” 16대 총선에서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아쉬움이 많았지만 요즘 정치권을 보면 오히려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수나 소설가 등 전문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본다.국회의원들이 보통 논리로 무장돼 있는데 비해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정서적이어서 부딪침도 있지만 보완적이기 때문이다. ‘성실한 인간’ 최희준의 면모는 국회의원 시절에 잘 드러난다.“15대 국회 4년 동안 출석률 1위 의원이 누구인지 아세요.바로 접니다.4년 동안 지역구 행사 때문에 딱 한차례 결석했습니다.”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기 전부터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살고 있다.멀어서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출마할 때 주민들에게 ‘이곳에서 살다가 죽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말한다.그래서 다시 “앞으로 공직에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사를 해도 되지 않느냐.”고 하니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한다.정치인으로는 ‘천연기념물’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며 요즘의 탄핵 정국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너무 꼬였다.”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얘기에서 그 답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지금까지 1000번 이상 주례를 섰는데,보통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며 4분 안팎 얘기를 한다고 한다.요지는 ‘오래 산 부부의 표정을 보면 편안하고 보기에도 좋다.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참고 배려해야 한다.성장 과정이 다른 만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그래야 자식들도 잘 커나간다.’는 것이다. ●“가수로서 받은 박수 국민께 되돌릴 터” 하루에 한 시간씩 집 안의 운동기구에서 걷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하지만 요즘에는 나이 먹은 것을 느낀다.몇년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이 아름다운 계절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자문해 보기도 한다.90년부터 부인과 함께 인덕원 성당에 나가고 있다.지난해 9월에는 성당 사목회 총회장을 맡았다. “노래하는 인생으로 깨끗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어떤 분야건 자기를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분명한 것은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또 그럴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또 형편이 되는 한,가수로서 박수를 받으며 잘 살아올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국민께 되돌리는 일을 하겠습니다.” 이제 자유인이니까 정동극장 공연이 끝나면 해외 및 전국 순회공연에 나설 계획이다.이번 공연에는 임희숙과 최백호가 게스트로 출연한다.02-751-1534. 황진선기자 jshwang@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허공’ 정풍송씨 김추기경에 곡 헌정

    조용필의 히트곡 ‘허공’ 등을 작곡한 작곡가 정풍송(62)씨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헌정하는 곡 ‘추기경님’을 발표했다.‘김수환 추기경님께’라는 제목의 헌정음반에 실린 이 곡은 ‘독재자들 총칼 앞에 몸을 던져 막으시던 그 모습을/정의의 등대로 서 계시는 추기경님’ 등을 가사 내용으로 담고 있다.
  • 원로작곡가 황문평씨 타계

    영화 주제가 ‘빨간 마후라’로 유명한 원로 작곡가 겸 평론가 황문평(黃文平)씨가 13일 오전 11시50분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5세.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본명이 해창인 고인은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를 졸업한뒤 가요작가로 입문,1948년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언덕’의 주제가를 비롯해 영화 ‘원술랑’삽입곡 ‘이 몸 님일래’와,‘꽃중의 꽃’‘호반의 벤치’등 영화·드라마음악 800여곡을 작곡한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대중문화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독특한 해설로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고인은 평소 우리 대중문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으며 특히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신중한 입장과 태도를 견지했었다. 1948년 한국무대예술원 음악위원장을 시작으로 군가 제정위원,HLKZ-TV국 편성과장·음악과장을 거쳐 KBS TV 개국위원,방송윤리위원,공연윤리위원회 위원을 지내는 등 방송관련 일에 주로 몸담았다.이후 한국연예협회 이사장을 시작으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및 고문,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문화사전 편찬위원,참전예술인협회 명예회장을 지내는 등 영화 예술계 원로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영화와 음악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화관문화훈장을 비롯해 춘사 나운규 영화예술상,대종상,청룡상,KBS가요대상 특별공로상,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자신의 대표적인 음악을 수록한 ‘황문평 작곡집’을 비롯해 가요 야화를 담은 ‘노래따라 세월따라’ 등이 있고 수필집 ‘어린꿈의 신화’‘돈도 명예도 사랑도’를 남겼다.유족은 장녀 인아(60),장남 인규(58),차남 원규(56)씨 등 2남 1녀.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면 발인은 17일 오전 8시.(02)3410-6902. 박상숙기자 a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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