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나래 그 끝없는 전위 오페라
뮌헨에서 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진은숙 씨가 작곡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세계초연을 독일 현장에서 보고,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감격을 가눌 길이 없었다. 커튼 콜 때 무대를 향해서 “브라보 진은숙! 진은숙!”을 큰 소리로 연창했다. 주위 독일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외침이었다. 진은숙 씨와 똑같은 한국여성임이 한없이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이날의 커튼 콜은 독일 관객들의 열광 속에서 네 차례나 이어졌다.
독일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국립극장은 유럽 오페라의 중심 무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1818년 세워진 이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뉴른베르크의 명가수> <니벨룽의 반지> 중 1부 <라인의 황금> 2부 <발퀴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평화의 날>과 <카프리치오소>가 초연된 것으로 유명한 명문극장이다.
이 바이에른 극장에서는 해마다 6월말에서 7월말까지 한달 동안 여름 오페라 페스티발이 열리고 있는데, 올해 페스티발의 개막작품으로 진은숙 씨의 첫 오페라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선정된 것이다. 보수성이 강한 바이에른 극장에서 전위적인 현대 오페라, 그것도 한국여성의 작품을 개막작품으로 선정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바이에른 극장의 200년 역사상 여성작곡가의 작품이 한번도 공연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진은숙씨의 작품이 워낙 뛰어나서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진은숙 씨는 2004년 작곡가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2005년 쇤베르크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이며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은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명중 한사람으로 진은숙 씨를 꼽았고, 이번 공연한 작품도 바이에른 극장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인 켄트 나가노가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극장에 있을 때 작곡 위촉한 것으로 그가 강력히 추진해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의 원작(1865년)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이다. 루이스 캐럴은 필명이고, 실제 작가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성직자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라고 한다. 소위 난센스 문학으로 불린 루이스 캐럴의 판타지 이야기는 실제 인물의 풍자적 암시가 곁들여졌다. 사람들이 실제 인생에서 맞닥드리게 되는 일들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텍스트로 변신해 인생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복합적인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해 주는 작품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복합성의 매력과 상상력 풍부한 스토리텔링 기법 때문에 수많은 영화 제작자들, 만화가들 , 작곡가들이 꼭 다루고 싶어하는 내용이었다. 진은숙 씨의 스승인 죄르지 리게티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사로잡혀 오페라로 남기려 열망했으나 사망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을 제자인 진은숙 씨가 작곡해서 스승에게 헌정한 것이다. 대본은 영화 <M 버터플라이>를 쓴 중국계 데이비드 헨리 황와 진은숙 씨가 함께 썼고, 지휘는 일본계인 켄트 나가노가 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격이 강한 뮌헨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세계 초연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소문이다. 그 이유는 독일인이 좋아하는 바그너류 하고는 거리가 먼 영국식 동화적 상상력에다가 대본마저 독일어가 아닌 영어이고, 특히 한국여성의 작곡, 중국계 헨리 황의 대본, 일본계 켄트 나가노의 지휘 등 동양계가 주축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공연결과는 상상외로 좋았다. 캐나다의 작곡가 크리스 하먼은 “2시간 30분 내내 음악적 구조를 탄탄히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진은숙은 성공했다”고 말했다. 뮌헨 게르트너플라츠 오페라 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 아드리안 뮐러도 “대단히 역동적이고 환상적”이라고 극찬했다. 진은숙 씨의 친언니이며 음악칼럼니스트인 진희숙 씨는 뮌헨의 초연을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여타의 현대오페라와 확실하게 구별된다. 현대 오페라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인 난해한 현학취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처럼 시종일관 상상력이 넘치며, 텍스트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배려한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기존 음악의 다양한 자원을 충분히 활용해 극적 리얼리티를 살리려는 노력과 작곡가 특유의 음악적 유머는 오페라를 보는 재미를 한층 배가해 주었다. 원작이 지니고 있는 기상천외한 상상의 세계를 그대로 음악으로 펼쳐 보인, 그래서 음악으로 듣는 동화의 전형을 보여준 오페라였다.”
동아일보의 객원 대기자인 최정호 교수는 뮌헨에 다녀와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연은 대성공이란 것이 언론의 중평이다. 나는 개막 3일전의 드레스 리허설(총연습) 날 극장 주위에 수많은 팬이 ‘표를 구함’이란 쪽지를 들고 담을 쌓고 있는 남녀노소의 인파에 놀랐다. 왕년에 카라얀 공연 때도 보지 못한 규모의 인파였다.”
“앨리의 무대장치와 조명도 맡은 아힘 프라이어의 연출엔 썩 만족할 수 없었다. 음악을 살려야 할 연출이 음악을 밀어 젖히고 지나치게 까발리며 나서고 있다는 인상이다. 나는 눈을 감고 앨리스의 음악만 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봤다.”
연출의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감이다. 실제로 앨리스의 음악만 들었다면 더 감동적이고 황홀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오케스트레시션 음악만을 듣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근래 유럽 오페라에서는 연출의 횡포라 할까, 연출가의 전횡, 독재가 문제되고는 한다. 작품에 상관없이 연출가의 의도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심지어 연출가가 장기자랑으로 오페라를 재창조하려는 흐름이 압도적이다.
“독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는 루이스 캐럴의 원작은 물론 진은숙의 음악적 의도와는 상당히 어긋나는 나름대로 의 연출을 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무대를 45도 각도로 세워놓고 거기에 몇 개의 구멍을 뚫은 다음 그곳에서 배우들이 서서 연기를 하도록 했고, 가수들은 앨리스와 여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대 아래쪽에서 그것도 때로는 가면을 쓴채 노래를 했다. 말하자면 노래는 가수가, 연기는 배우들이 따로 한 셈인데, 45도로 기울어진 무대와 가수들의 고정된 위치, 가면 등이 표현의 자유를 상당히 제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화가 출신인 연출가는 무대를 45도로 기울여 놓음으로서 무대를 그림 그리기 좋은 캠버스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무대의 그림은 마치 동화책을 펼쳐놓은 듯 환상적이었다. 연출가는 그렇게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자신의 캠버스에 가두어 놓은 것이다.”라고 나는 마치 체스판 위에서 체스 말들이 툭툭 튀어나와 경쟁적으로 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아쉬움 속에서도 즐거운 점이 있었다면 출연한 가수들의 놀라운 가창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앨리스역의 소프라노 샐리 매튜, 토끼역의 카운트 테너 엔듀류 왓츠의 실력이 놀라웠으며 여왕역으로 무대에 오른 왕년의 오페라 스타 소프라노 귀네스 존스는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노래실력을 보여 주었다.
연출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번 공연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관객들은 그림책을 한 페이지씩 넘기면 다른 그림이 나타나는 듯이 전개되는 무대 위의 장면들을 즐거워했으며 그런 면에서 아힘 프라이어는 명성에 걸맞는 저력을 갖고 있는 연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아동극처럼 유치해질 수 있는 무대를 나름대로 철학적 해석을 거쳐 무언가 있는 것 같은 무대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일말의 위안을 찾는다고나 할까”
연출의 문제에 대해서는 작곡가 진은숙 씨도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처럼 제 의도와 부합되는 장면도 있었지만 전해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제가 의도적으로 아주 다이내믹하게 작곡한 부분에서 무대 역시 많은 움직임이 있기를 바랐는데, 연출가는 무대도 바꾸지 않고 인물들도 움직임 없이 그냥 두었다. 제일 아쉬운 부분이었다.”
진은숙 씨는 이번 앨리스의 속편격인 <거울 뒤의 앨리스>를 2013년경 뮌헨 바이에른 극장에서 초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기회에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역사적인 진은숙 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 초연에 초청받은 독일주재 한국대사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님 접대 만찬 때문이라고 했으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운 세계 초연에 주재국 대사라면 만사 제치고 와서 기뻐하며 축하해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올림픽 경기 우승이나 미스 월드 1위 우승보다 높은 가치의 예술문화외교를 경시하는 답답함에 솔직히 섭섭함이 치밀어 오르며 화가 났다.
올해의 음악계 화제 톱은 단연 진은숙 씨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 초연임에 틀림없다.
글 신갑순 삶과꿈 발행인, 삶과꿈 챔버오케스트라 싱어즈 대표 사진제공 김용원, 바이에른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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