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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나지 않은 항쟁… 마르지 않는 눈물

    끝나지 않은 항쟁… 마르지 않는 눈물

    610명의 시민들이 ‘6·10항쟁’ 기념 무대를 장엄한 하모니로 채웠다. 1987년 6월 10일, 시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외쳤던 것처럼 이날도 시민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서 ‘끝나지 않은 항쟁’을 노래했다. 6월 민주항쟁 25주년을 맞은 10일 서울 도심에서는 각종 기념 행사가 열렸다. 특히 오후 7시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민대합창 공연이 눈길을 끌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전국에서 공개 모집을 통해 선발된 시민 610명이 한목소리로 열창하자 광장에 모인 민주화 운동 관계자와 정·관계 인사, 시민 등 수천명이 마치 그날의 그 현장에 선 듯 노래를 따라 불렀다. 6월 항쟁 당시 불렸던 ‘우리 승리하리라’, ‘철망 앞에서’ 등의 노래가 잇따라 울려 퍼졌다. 그날의 뜨거웠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되새기는 40~50대가 있는가 하면, 아직도 미완의 시민운동이라는 회한 때문에 눈시울을 붉힌 반백의 노인도 있었다.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을 지낸 정은숙 성신여대 음대 석좌교수가 공연단장을 맡았고, 작곡가 류형선씨가 지휘봉을 들었다. 이날 서울광장에 마련된 40개 희망 부스에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와 청년유니온,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등 다양한 계층을 대표하는 단체들이 참여해 공론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앞서 시민대합창을 기획한 6월항쟁25주년행사국민추진위원회는 행정안전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 주최로 이날 오전 10시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6월 항쟁 25주년 기념식을 가진 뒤 무대를 서울광장으로 옮겨 만민공동회, 범국민추모제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천주교회의 활동을 정리하기 위한 기념미사와 기록물 전시회, 학술대회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김정은 기자의 백스테이지] 장르 불문 팔도 사투리 선생님, 황영희

    [김정은 기자의 백스테이지] 장르 불문 팔도 사투리 선생님, 황영희

    연극, 드라마, 영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사투리 연기에 도전하는 배우들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으로 꼽는 이가 있다. 바로 전국 팔도 사투리의 달인, 연극배우 황영희(43)다. 그녀에게 사투리를 배운 ‘제자’들은 유명 배우부터 단역 배우까지 폭넓다. #신애라 ‘아이스께기’ 전라도 사투리 ‘전수’ 2008년 배우 고수가 공익근무를 마친 뒤 복귀 무대로 선택한 연극 ‘돌아온 엄사장’에서 보여준 맛깔나는 사투리는 황영희로부터 며칠동안 1대1 트레이닝을 통해 만들어졌다. 2006년 배우 신애라가 생애 첫 영화 ‘아이스께기’에서 보여준 정감있는 전라도 사투리 또한 황영희의 ‘가르침’이었다. 서울이 고향인 신애라는 지역별 사투리조차 구별하지 못했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사투리는 일품이어서 사투리 선생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낳았다. 전남 목포 출신인 황영희는 팔도 사투리를 현지인처럼 구사한다. 술을 마시면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을 뒤섞어 말하는 스스로가 신기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녀는 12일부터 서울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르는 재일동포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의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의 사투리 작업에 참가했다. 가수들이 음반작업을 할 때 녹음 전 작곡가들이 가이드송을 불러주듯, 대부분의 대사가 사투리인 이 연극의 전체 대사를 휴대전화에 녹음해줬다. 황영희는 “경상도 배우에게 전라도 말을 가르치니 굉장히 어렵더라. 역시 전라도와 경상도의 벽은 높구나 싶었다.”면서 “몇 년 전부터 극단이나 사투리 연기로 오디션을 받아야 하는 배우들이 찾아와 저에게서 사투리를 배워가곤 한다.”고 말했다. 배우 봉태규의 여자친구로도 유명한 배우 이은 등이 드라마 오디션을 앞두고 그녀에게 속성으로 사투리를 배웠다고 한다. 사투리를 지도하거나 표준어로 된 대본을 사투리로 바꿔준 작품도 수십 개에 이른다고. 얼마 전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던 연극 ‘목란언니’에선 북한 여성 조대자 역을 맡아 북한 사투리까지 멋들어지게 구사해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다양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황영희는 “사투리 연기를 위해 틈날 때마다 각 지역의 재래시장을 찾아 말투를 익히려고 한다. 이 방법은 사투리를 배우는 데 효율적”이라면서 “지역 사람들이 많이 나온 다큐멘터리도 분석하며 본다. 꼭 사투리가 아니더라도 특이한 말투를 지닌 사람들은 면밀하게 관찰해 특징을 뽑아낸다.”고 설명했다. #각 지역 재래시장 돌며 연구 ‘사투리의 달인’이란 소문이 나면서 곳곳에서 자문 역할을 했지만, 정작 서운할 때가 있단다. “배우들에게 사투리를 가르치라고 할 게 아니라 저를 캐스팅하면 다른 배우들에게도 공짜로 사투리를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캐스팅은 안 한다.”며 익살도 부린다.. “작은 재주이지만 저만의 장기를 살려 연극에 도움을 주는 자체로 행복하다.”는 그녀의 웃음이 정감 깊다. kimje@seoul.co.kr
  • 日 오이원전 재가동 새달 최종 결정 앞두고 여당·시민단체 반대운동 확산

    일본 정부가 다음 달 초순쯤 후쿠이현 오이원전의 재가동을 최종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가운데 집권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의 반대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시민단체의 반대 서명운동이 확대일로에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정부는 원전이 위치한 후쿠이현 등의 동의를 얻어 여름철 절전이 시작되는 7월 2일 이전에 가동할 예정이다. 원전 재가동이 이뤄지면 지난해 3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원전 가동이 재개되는 첫 사례가 된다. ●민주당 의원 100여명 반대 서명 하지만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등 민주당 소속 의원 100여명이 원전 가동 반대에 서명하는 등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원전 재가동 방침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여기에다 시민단체의 반대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시민단체 ‘사요나라 원전, 1000만명 행동’ 실천위원회가 탈원전 에너지 정책을 요구하며 전국에서 펼치고 있는 서명운동에 지난 5월 말까지 국내외에서 722만 명이 서명했다. 이 서명운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작곡가인 사카모토 류이치 등의 주도로 지난해 5월부터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새달 10만명 참가 원전 반대 집회 시민단체는 조만간 노다 총리에게 국민 서명 명단을 제출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간사이전력 산하 오이원전을 재가동하지 말 것을 호소할 예정이다. 시민단체는 다음 달 16일 도쿄에서 1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원전 반대 집회도 계획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의 여론도 원전 재가동에 회의적이다. 아사히신문이 지난달 20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이원전의 재가동을 54%가 반대하는 등 여전히 반대 여론이 우세해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작곡가 김형석, 실용음악 온라인강좌 ‘뮤직인’ 서비스

    작곡가 김형석, 실용음악 온라인강좌 ‘뮤직인’ 서비스

    ‘슈퍼스타 K’ ‘위대한 탄생’등 공중파 및 케이블 방송에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실용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있다. 현재 전국에 있는 실용음악학원만 약 2천여개를 넘을 정도. 작곡가 김형석과 플랜티넷이 설립한 케이노트온라인이 실용음악을 공부하는 학원생들을 위해 각종 온라인동영상강좌 및 모바일앱(App.) 등을 제공 하는 ‘뮤직인’ (www.musicin.co.kr)을 선보여 화제가 되고있다. 뮤직인은 실용음악 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작곡과 작사, 보컬, 음악통론 등 500여개의 실용음악관련 온라인 강좌 수강, 동영상 홈페이지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특히 학원 또는 강사가 알림글에 글을 업로드하면 실시간으로 학원생의 스마트폰에 알람이 작동, 확인이 가능하다. 이미 유명실용음악학원에서 뮤직인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뮤직인 홈페이지를 통해 손쉽게 이용신청이 가능하다. 케이노트온라인 측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 유명강사진들의 강의를 수강하기 힘든 학원생들이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양질의 음악강좌를 수강할 수 있다는 것이 뮤직인 서비스의 가장 큰 장점이다”고 강조했다. 사진= 작곡가 김형석(위) 뮤직인 홈페이지(아래) 인터넷 뉴스팀
  • 낯선사람, 고찬용 첫 번째 프로포즈

    낯선사람, 고찬용 첫 번째 프로포즈

    조규찬과 강현민(일기예보), 유희열, 이한철, 방시혁, 나원주, 정지찬의 공통점은. 가수와 작곡가, 프로듀서 등 걷는 길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이다. 노래는 물론 작사·작곡, 편곡, 연주를 할 수 있는 재주꾼을 뽑다 보니 강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조동익, 조동희, 장필순, 한동준, 윤영배, 오소영, 더 버드의 공통점은 뭘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던 포크 가수들로 음반기획사 ‘하나음악’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2003년 하나음악이 문을 닫으면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2010년 옛 친구들은 푸른곰팡이란 이름으로 다시 뭉쳤다. 그리고 둘의 교집합이 있다. 고찬용(41)이다. 그는 1990년 제2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을 받았다. 그래도 낯설다면 보컬그룹 ‘낯선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한국의 맨하튼 트랜스퍼’란 별칭으로 90년대 초 가요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낯선사람들은 인천대 음악동아리 포크라인 회원들이 만든 보컬그룹이다. 대중은 이소라를 더 기억할 테지만, 작사·작곡은 물론 음악 설계를 도맡은 건 리더 고찬용이다. 고찬용이 새 앨범 ‘룩 백’을 내놓았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화려한 코드 전개, 웬만한 연주자는 흉내 내기도 힘들 만큼 ‘변박’(불규칙한 박자)이 쏟아진다. 스캣(즉흥 보컬)도 자유자재다. ‘음악가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뮤지션’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정원영, 김동률, 이적 등 동료들은 앨범 발매와 동시에 트위터에 상찬을 쏟아냈다. 녹음에 꼬박 9개월이 걸렸으니 들인 품을 짐작할 만하다. 허성혁 푸른곰팡이 대표가 “다른 소속가수 앨범보다 마스터링은 스무 배쯤 시간이 더 걸렸다. 심지어 공장에 음원을 보내기 하루 전날까지 밤을 새워가며 수정 작업을 했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 1집 ‘애프터 텐 이어스 애브슨스’(2006) 이후 6년 만이니 욕심을 낼 법도 했다. 2003년 하나음악이 망하고서 시간과 돈에 쫓기면서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만든 1집은 외면받았다. 고찬용은 “하나음악 식구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외의 사람들과 아예 교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회사가 해체됐을 때 직장을 잃은 기분이었다. 쫓기는 마음이었고, 세션을 쓸 형편이 안 돼 미디(MIDI)로 모든 악기를 연주했다.”고 설명했다. 세션 연주자들과 녹음하고,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마친 건 1996년 낯선사람들 2집 이후 16년 만인 셈. ‘룩 백’에는 유독 격려와 위로의 노랫말이 눈에 띈다. 고찬용은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사는 게 쉽지 않았다. 나에 대한 위로를, 다른 분들도 이 노래들로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곡을 썼다.”고 말했다. 또한 “전에는 곡 쓰는 스타일 자체가 틀에 박혔다. (학전의 김민기 대표와) 창작뮤지컬 음악감독을 하면서 자유로운 발상을 배운 것 같다. 이번 앨범은 멜로디를 먼저 쓰고 나중에 화성이나 코드를 붙이는 식으로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96년부터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는 “심장발작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1주일을 검사하더니 정신과로 가보라더라. 이범룡(‘꿈의 대화’로 제4회 대학가요제 대상)씨가 그 방면의 전문이라서 찾아갔다. 처음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대인기피와 광장공포증이 함께 왔다. 쇼핑몰 같은데는 엄두도 못 냈다. 사는 게 무서웠다. 점점 술에 의존했고, 다시 음악을 할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컸다.”고 털어놓았다. 공황장애를 털어내는 데 1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푸른곰팡이 식구들과 음악이 고통을 이겨낼 힘을 줬다. “요즘 우리 사회에 정신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분들 정말 많지 않은가. 이런 분들에게도 내 노래가 힘이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대중과 스킨십도 늘릴 계획이다. 새달 1일 홍대 KT&G상상마당에서 콘서트를 갖는다. 그는 “데뷔를 20년 전에 했는데 솔로 무대는 처음이다. 엄청 떨린다.”고 말했다. 홀로 무대에 서는 경험을 쌓고서는 TV 출연도 해 볼 생각이다.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이소라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제안이 온다면 나갈 거냐고(이소라는 95년 ‘낯선사람들’을 탈퇴해 솔로로 나섰다). 그는 “내가 오래 아프다 보니 연락이 끊어졌을 뿐이지 사람들이 말하듯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다.”며 웃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시니어들 지혜 청춘들에 전수

    송파구는 1일 구청 대강당에서 ‘준데이’(June Day) 행사를 개최한다. 준데이는 ‘준다’는 뜻의 경상도 방언과 ‘6월’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중의적 뜻을 가진 행사로, 송파구가 새로운 효 문화를 정착시키고 세대 간 소통의 통로를 만들자는 취지로 지난해 10월 선포식을 갖고 해마다 개최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는 성공한 시니어가 꿈을 키우는 청소년을 만나 자신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자신의 작품을 전달하고, 축적된 경험과 분야별 노하우를 전수한다. 행사에는 시니어 및 대학생, 주니어 등 1~3세대 3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또 작곡가 김동찬씨가 작사·작곡한 ‘준데이 주제가’를 발표하며, 대학생이 만나고 싶은 인물로 뽑힌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의 토크 콘서트, 관내 어르신 기업 ‘청춘주먹밥’의 주먹밥 만들기 행사 등 흥미로운 이벤트도 열린다. 이춘복 노인청소년과장은 “준데이를 계기로 효문화사업단, 효문화 탐험대, 이색 효도 관광 대회, 시니어 달인 선발대회, 효문화 상품 개발 등 다양한 효 이벤트 사업을 이어 갈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송파구를 세계적인 효문화 메카로 도약시키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부고]

    ●이동필(금호석유화학 계장)동의(열린문수학 부원장)씨 모친상 장원일(원일농장 대표)이정우(전 서울신문 전산제작팀 부장)장광호(태광산업 주임)씨 장모상 30일 울산 굿모닝장례식장, 발인 6월 1일 오전 10시 (052)256-7592 ●김철(전 ㈜동부 사장)씨 별세 진홍(전 SK텔레콤 상무)진형(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재욱(미국 거주·작곡가)씨 부친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8시 (02)3410-6902 ●최명길(MBC 보도국 유럽지사장)윤길(디지털미디어넷 상무이사)선(사업)씨 부친상 30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6시 40분 (02)2258-5940 ●김득한(두산중공업 상무)씨 장모상 3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9시 (02)3010-2237 ●박현(NHN 네이버 스포츠실 과장)씨 별세 3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8시 (02)3010-2261 ●주홍수(신한카드 법인사업본부 상무)홍진(자영업)씨 모친상 30일 일산 동국대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7시 (031)961-9401 ●임정호(우리은행 차장)씨 부친상 2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7시 (02)3410-6914 ●한윤기(와이즈테크 대표이사)명기(명지대 교수)봉기(사업)씨 부친상 3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8시 (02)3010-2265 ●김상조(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원조(동부화재 상무)씨 부친상 29일 강남세브란스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6시 (02)2019-4006 ●정삼진(서산세무서장)씨 모친상 30일 고려대 구로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5시 (02)857-0444 ●박한(대학농구연맹 명예회장)씨 모친상 3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9시 30분 (02)3010-2231 ●장호중(춘천지검 강릉지청장)씨 부친상 30일 일산병원, 발인 6월 1일 오전 8시 30분 (031)900-6958
  • 공부하고 연주듣고…렉처 콘서트 봇물

    공연에 강연을 곁들이는 ‘렉처 콘서트’가 새달 초에 나란히 관객을 찾는다. 왕성한 연주활동을 하는 중견 대금 연주자 김정승이 6월 3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대금 창작곡을 위한 연주법 연구’를 주제로 렉처 콘서트를 연다. 1부 강연에서는 12음 주법, 다음(多音)주법, 트레몰로(트릴) 주법을 중심으로 새로운 운지와 연주법, 원리 등을 소개한다. 이어 2부에서는 ‘숨’(심청가 중), ‘김삿갓’, ‘연평도’, ‘생의 한 가운데’ 등 강의 주제에 따른 작품을 연주한다. 대금, 가야금, 거문고, 피리, 플루트 등 국내외 연주자들과 협연한다. 2만원. (02)786-1442. 하루 앞선 2일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는 독일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작곡가 진은숙이 렉처 콘서트를 한다. 올해 호암상 예술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로, 진은숙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다. 진은숙은 지난해 독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요 장면을 DVD로 보여주면서 직접 해설한다. 타악기 독주와 테이프를 위한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와 피아노 연습곡 4곡도 들려준다. 28일까지 클럽발코니 홈페이지(www.clubbalcony.com) 이벤트 코너나 전화(1577-5266)로 관람신청을 할 수 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베토벤·브람스의 ‘낭만’을 연주하다

    베토벤·브람스의 ‘낭만’을 연주하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1732~1809)부터 쇼스타코비치(1906~1919)까지. 200여년의 교향곡 역사에 굵은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 14명을 7년 동안 쫓아가는 고양문화재단의 야심 찬 기획 ‘아람누리 심포닉 시리즈’가 두 해째를 맞았다. 지난해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이어 올해에는 베토벤(1770~1827)과 브람스(1883~1897)를 세 차례에 걸쳐 공연한다. 25일 오후 8시 경기 고양시 마두동 고양아람누리 하이든홀에서 지휘자 최희준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올해의 첫 막을 연다. ‘애피타이저’로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이 준비됐다. 입맛을 돋구기 위한 전채라고는 하지만, 검증된 ‘스타 셰프’인 송영훈(첼로·왼쪽)과 백주영(바이올린·오른쪽)의 솜씨인 만큼 기대해도 무방할 듯하다. ‘메인 디시’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8번이 준비된다.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7번, 9번 ‘합창’ 등 관현악연주회의 단골손님 격인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과 달리 8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음악애호가는 그리 많지 않을 터. 지휘자들이 청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거나 압도적인 연주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레퍼토리를 선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옛 양식으로 되돌아간 듯한 8번 교향곡을 굳이 연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8번을 놓고 고전적인 음악 전통을 반추한 가벼운 곡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볼 수도 없고 비교될 만한 작품도 없는 가장 예술적인 작품이다.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바로 예술가의 마음속에 떨어져 내려온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2만~4만원. 1577-7766.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음악 인생 60주년’ 대중가요 작곡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희갑

    [김문이 만난 사람] ‘음악 인생 60주년’ 대중가요 작곡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희갑

    ‘사랑아 내 사랑아’ ‘진정 난 몰랐네’ 등으로 존재를 처음 알렸다. 추억의 노랫말을 잠시 음미해본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잃어버리고/타오르는 내 마음만/흐느껴 우네/예전에는 몰랐었네/진정 난 몰랐네’에 이어 세월이 지나 ‘그 겨울의 찻집’으로 옮겼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이른 아침의 그 찻집/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외로움을 마셔요/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이번에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변신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적 있는가/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어디 이뿐이랴. ‘사랑의 미로’와 ‘향수’ 등 수많은 히트곡마다 한국의 대표적 정서를 담아냈다. 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대중가요 3000여곡, 영화음악 300여편, 뮤지컬 3곡 등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획을 ‘쫘악’ 긋는다. 그래서 대중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불후의 명품 작곡가라고 한다. 김희갑(76)씨.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8군에서 기타 연주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음악 인생 60년을 맞는다. 또 1967년 ‘사랑아 내 사랑아’로 작곡 앨범을 처음 낸 지 45년이다. 그는 올해 새로운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것일까. 지난 21일 오전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김씨를 만났다. 확 트인 창가를 배경으로 부인 양인자씨가 커피 한 잔을 권한다. 양씨에게 ‘그 겨울의 찻집’의 가사는 아무리 들어도 감미롭다고 했더니 남편 김씨가 “요즘에는 그런 찻집이 없어요.”라고 대신 대답을 한다. 김씨는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미8군 부대에서 연주할 때 빡빡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습관이 돼 60년 동안 거의 벗어본 적이 없다. 김씨는 칠순인데도 얼굴 피부색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둘은 잉꼬부부로 소문나 있기도 하지만 작사·작곡계의 명콤비로 알려져 있다. 둘은 1985년에 만나 2년 뒤에 결혼했다. 마침 부부의 날이었다. 양씨는 “안 그래도 다음 달 결혼 25주년을 맞아 기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며 웃는다. 김씨는 “알 만한 사람 부부 여섯쌍이 함께 간다.”며 즐거운 듯 활짝 웃는다. 김씨 부부는 원래 경기도 분당에 살았다. 그래서 언제 이사 왔는지부터 먼저 물었다. “한 4년 됐나요. 원래는 여기보다 더 조용한 곳인 강원도 문막 정도로 가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 친구들이 멀리 이사 가면 아예 인연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더군요. 그 바람에 여기에 머물렀습니다(웃음). 사실 내년이면 다시 판교 쪽으로 이사를 갈 겁니다. 그곳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했거든요.” 양씨가 주방에서 떡과 차 한 잔을 꺼내오며 권한다. 김씨는 “고맙습니다.”라고 깍듯이 인사한다. 늘 반말이 아닌 존대어를 쓰는 모양이다. 김씨에게 올해가 작곡가로 데뷔한 지 45년째라고 했더니 “(가요사 등) 일부 기록에는 1967년으로 나와 있는데 레코드사에 알아봤더니 1965년이라고 하더군요. 그거나 이거나 그렇게 세월이 흘렀네요.” 기타 연주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적 환경은 어떠했을까. 평양에서 태어난 김씨는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한의사, 아버지는 의사였다. “아버지는 독자였고 저는 맏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한테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약을 자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아마 12살까지 매일 먹었지요(웃음).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음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가 6살 때 평양에서 40여리 떨어진 평남 강동에서 아버지가 병원장을 맡았습니다. 사택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대학 때 음악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을 불러 음악 연주를 자주 했습니다. 나중에는 악단을 조직해 시골 여러 곳에 다니면서 공연을 하곤 했지요. 8·15 광복 이후에는 의사라는 신분을 감추고 국가 지정 음악당, 그러니까 남한으로 치면 예술의전당 같은 곳을 맡아 운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코디언 같은 것을 잘 연주했습니다.” 김씨는 원래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 때 레프트윙 포지션으로 학급 대표로 출전했을 만큼 축구 실력이 남달랐다. 내친김에 학교 대표로 출전하고 싶었다. 그 무렵 음악 활동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했고 1·4후퇴 때 김씨 집안 식구들은 임진강을 거쳐 대구까지 월남하게 된다. 먹고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대구에 있던 미 25야전병원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의사면허는 인정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미군부대 장교 식당에서 접시닦이로, 아들 김씨는 친구와 함께 하우스보이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오후 2시 30분쯤이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같이 일을 하는 친구가 주머니에서 작은 하모니카를 꺼내 연주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아버지한테 음악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흔쾌히 허락을 하신 아버지한테 악보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 처음 만진 악기가 만돌린이었습니다. 중고품이었는데 선이 끊어지면 미군들이 사용하는 전화선을 연결해 사용하곤 했지요. 6개월 정도 하니 웬만한 연주가 가능해지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한테 김영순(김트리오 부친)씨가 놀러 왔는데 트럼펫과 기타 연주를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이후 김씨는 ‘바로 기타야, 기타!’라고 생각하며 기타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대로 가사를 적고 노래를 배웠다. 말 그대로 밥숟가락만 놓으면 새벽 4시까지 기타를 배웠다. 또한 작곡가 박시춘 선생과의 만남 등을 통해 장차 훌륭한 음악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한 지 2년 세월이 지나서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때마침 고등학교에 악단이 하나 생겼는데 김씨는 곧바로 악단장을 맡았다. 웬만한 편곡은 그의 손을 거칠 정도로 음악 실력을 인정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미 공군 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했다. 사실상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구에서 ‘음악 연주자 베스트 7’에 뽑혀 서울로 올라와 ‘록쇼’ 악단에 합류했다. “그때 오산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전국 곳곳을 다녔습니다. 그러던 1년 뒤에는 제가 직접 악단장을 맡게 됐지요. 악단 명칭도 록쇼에서 ‘A1쇼’로 바꿔 활동 무대를 넓히게 됩니다. 운 좋게도 미8군 클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연주자로 소문이 나기도 했지요. 이후 7년 동안 A1쇼 악단을 이끌었습니다.” 그가 미군부대와의 인연을 접은 것은 1962년이었다. 다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열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 해군 군악단 단장을 지냈고 작곡가로도 유명한 이교숙 선생을 찾아가 작곡과 편곡 등을 강도 높게 배웠다. 그렇게 2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무렵 작곡가 박춘석씨를 만나게 됐다. 박씨의 곡을 녹음할 때 기타 연주를 해주고 박씨에게 편곡을 더 배우게 됐다. 아울러 작곡가 김영광씨의 부탁으로 편곡을 해주면서 이 방면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섬세한 작곡 솜씨가 일품이라는 소문까지 자자했다. “하루는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이 찾아와 작곡 앨범을 내자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거의 매일같이 집요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특히 대중가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작곡의 명분론으로 설득하더군요. 그래서 ‘사랑아 내 사랑아’(태원), ‘불타는 연가’(남진), ‘진정 난 몰랐네’(김상희), ‘모래 위를 맨발로’(이시스터즈) 등 12곡을 4명이 3곡씩 나눠 부른 이른바 ‘김희갑 작곡 제1집’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후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하면서도 ‘김희갑 악단’을 계속 이끌어오다 드라마 주제가를 작곡하면서 크게 히트를 친다. 1983년 KBS 주말드라마 ‘청춘행진곡’에서 노주현과 정윤희의 ‘러브송’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최진희를 발탁, ‘그대는 나의 인생’을 작곡했던 것이다. 이 노래는 가수 최진희를 탄생시키고 우리나라 최초의 뮤직비디오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어 ‘사랑의 미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등이 담긴 제2집 작곡 앨범이 나오면서 악단을 해체하고 작곡과 연주 등 솔로로 활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지금까지 작곡한 노래만 무려 3000곡이 넘는다. 이 가운데 부인 양씨와 함께 작사·작곡을 한 것은 400여곡에 이른다. 예를 들어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서울 서울 서울’ 등 조용필의 히트곡을 포함해 ‘타타타’ ‘우리도 접시를 깨트리자’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대는 나의 인생’ ‘하얀 목련’ 등이 대표적인 부부 합작 국민 애창곡이다. 얼마 전에는 TV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젊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요즘 대중가요계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음악적으로 재능이 대단한 가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룹 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쉽습니다. 재즈, 댄스,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듣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앞으로는 ‘대중음악을 감상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씨는 요즘 모종의 작업을 하고 있다. 발성의 기본기를 확실히 갖춘 남자 3명, 여자 1명으로 이뤄진 중창단을 만들어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일이다. 40대 중후반 한 팀, 20~30대 젊은 성악가 한 팀 등 두 팀을 만들어 실내악 분위기의 대중음악을 올가을쯤 선보일 예정이다. 필생의 역작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꿈과 희망, 식지 않은 열정으로 그 일에 집중하고 있다. km@seoul.co.kr ●김희갑은 고교 졸업 후 ‘록쇼’ 멤버 활동… 대중가요 3000여곡 작곡 193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의사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대구에서 대성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악단장을 맡아 발군의 음악 실력을 발휘했다. 아울러 미8군 부대에서 프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 있는 ‘록쇼’ 악단 멤버로 활동했다. 이후 ‘A1쇼’ 악단장으로 7년 동안 활동했다. 1962년 미군부대 위주의 활동 무대를 접고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5년 뒤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김희갑 작곡 제1집’ 앨범을 냈다. 1983년 KBS 주말드라마 ‘청춘행진곡’ 주제가를 작곡해 크게 히트쳤다. 1985년 이후에는 김희갑 악단을 해체하고 솔로 활동에 전념했다. 지금까지 3000여곡을 작곡했으며 1987년에 양인자씨와 결혼한 뒤 함께 400여곡을 작사·작곡했으며 300여편의 영화음악과 뮤지컬 ‘명성황후’ 작곡 등으로도 유명하다. 취미는 골프와 분재.
  • 칸이 여덟 번 부른 남자 그래도 별 느낌없다는 남자… 그는, 홍상수다

    칸이 여덟 번 부른 남자 그래도 별 느낌없다는 남자… 그는, 홍상수다

    우연적 만남이 빚어내는 관계의 변주. 반복되는 듯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상황의 디테일. 명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보다는 툭툭 일상의 단편을 던진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홍상수 영화다.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된 ‘다른 나라에서´(31일 개봉) 역시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홍상수 식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보증을 잘못 선 어머니와 함께 모항이란 해변마을로 잠적한 영화과 학생(정유미)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는 안느(이사벨 위페르)란 이름을 가진 3명의 여인이 나오는 시나리오를 쓴다. 첫 번째 안느(사진 위)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인데 한국인 부부(권해효·문소리)와 함께 여행을 온다. 두 번째 안느(아래)는 남편이 해외출장을 간 틈을 타 연인관계인 영화감독(문성근)과 모항에서 접선한다. 세 번째 안느는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고서 지인인 민속학 교수(윤여정)와 모항에 온 이혼녀다. 각각 에피소드는 별개로 존재한다. 그런데 상황이 반복되면서, 인물과 소품들은 다른 에피소드 속 상황과 묘하게 얽혀 들어간다. 칸 출국을 이틀 앞둔 홍 감독을 지난 11일 만났다. →칸영화제 경쟁부문만 해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 이후 벌써 세번째인데. -고생한 배우들한테는 좋은 자리가 될 거란 생각은 든다. 하지만 칸 영화제 측에서 경쟁부문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다른 작품들과 경쟁하려고 만든 건 아니니까(특별한 소감이나 기대는 없다)…. 다만 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를 텐데 그 반응을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란 점은 좋다. #글쎄 왜 칸이 날 좋아하는지 안 궁금해 →13편의 연출작 중 8편이 칸에 초대받았다. 왜 칸은 홍상수를 선호할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알 길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장소(전북 부안군 모항)를 먼저 정했다. 영화를 찍을 만한 곳인지 여행 겸해서 2011년 초 1박 2일로 갔다. 아담하고 좋더라. 어떤 영화를 찍을지는 모르지만 그해 7월쯤 찍기로 했다. 그러다 그해 5월쯤 이사벨 위페르가 사진전을 위해 서울에 왔다. 인터뷰를 보니 한국 감독 중 나와 다른 누군가와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전에 파리에서 두번쯤 만나 안면은 있었다. 그래서 점심을 같이했다. ‘7월에 뭔가 찍을 건데, 뭔지는 모르는데 혹시 관심있느냐.’고 물었다. 더 묻지도 않고 하겠다더라. 그 친구를 주인공으로 정해놓고, 할 수 있는 얘기가 뭘까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 외국인과 만날 때 수줍음과 과잉 친절을 떠올렸다. →촬영 당일 아침에 쓴 ‘쪽대본’을 주는 걸로 유명한데. -‘하하하’(2009)까지는 그래도 트리트먼트(시놉시스를 발전시킨 형태. 그림 없는 콘티의 개념)가 있었다. 전체의 30~40% 정도의 디테일은 있었다. 그런데 ‘옥희의 영화’(2010)부터 미리 알고 시작하는 부분이 확 줄어들고 있다. #아침마다 쪽대본 쓰는 게 적성 맞아 →점점 즉흥 작업을 선호한다는 얘기인데. -주어진 시간이나 준비가 없으니까 다른 머리를 쓰게 되고 현장에 더 집중한다. 그러면 튀어나오는 게 달라진다. 이번에도 촬영 2~3주 전 이사벨에게 1인 3역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스쳐가는 생각들을 메모해 놓고, 하루 분량을 찍고, 촬영한 분량을 생각하며 잠든다. 아침에 집중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식이다. →당일 시나리오를 써서 완성한 영화가 처음 구상과 얼마나 비슷한가. -처음 구상이란 게 별 게 없었다. 외국인과 한국인이 만날 때 표피적이고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양상들이 있다. 직감적으로 이걸 하면 되겠다 싶은 거다. 내가 조각가라고 치자. 어딜 갔다가 큰 돌을 봤다. 그 안에서 언뜻 형상이 보여 스튜디오로 갖고 온다. 깎아 들어가다 보면 돌 안에도 숨겨진 색도 있고 엉뚱한 결도 드러난다. 그러면 얼굴을 조각하려던 부분에 다른 형상을 새길 수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날의 날씨, 촬영하는 동네 상황. 배우의 인품 같은 게 모두 결이 된다. 새로운 결이 튀어나올 때 판단하고 반응을 한 게 모여 영화가 된다. 뚜렷한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있는 영화는 10명이 보면 다 비슷비슷한 반응이다. 하지만 (내 영화처럼) 이렇게 만들어진 경우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거다. →충무로에선 보기 드문 방식인데. -특별할 건 없다. 작곡가, 화가, 소설가들이 다 이런 방식이다. 전체를 다 구상해 놓고 소설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다. 매번 일어나는 반응과 결정들이 반복되는 건데 기질에 맞는다면 좋은 방법이다. 나에게는 잘 맞는다. →당신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는 주로 교수나 시인, 영화감독들인데 십중팔구 위선적이고 찌질하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인간형, 타입이란 게 정해져 있다. 그걸 평생 반복하는 거다. 평생 소시민들만 다루는 감독들도 있지 않나. 내가 뜬금없이 장르영화 감독처럼 대통령이나 공군조종사를 캐릭터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나야 찌질한 캐릭터 평생 다룰 수밖에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갈수록 경쾌해진다. -첫 작품을 35살에 찍었고, 지금 52살이다. 사람이 겪는 게 있으니까 영화적 표현도 계속 옮겨가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고 내 변화에 대해 정리하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해봐야 소용도 없다. 말이란 게 구속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경계하는 편이다. →왜 좀 더 명료하고 익숙한 영화를 찍지 않나. -나에게 영화란 귀한 기회이고 발견의 장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단순하지가 않다. 복잡하다. 모순되고. 설명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해결 안 되는 일들도 많다. 그런 느낌들은 영화를 지금처럼 만들 때 더 근사치로 표현된다. 영화로 삶에 대한 해답을 내놓고자 하는 게 아니다. 삶의 복잡함을 비슷하게 구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런 영화를 스크린 앞에서 공유하는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주역 강수진·마레인 ‘카멜리아 레이디’를 말하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주역 강수진·마레인 ‘카멜리아 레이디’를 말하다

    1840년대 프랑스 파리. 가장 인기 있는 쿠르티잔(부유층의 공개 애인)인 마르그리트 고티에와 명문가 청년 아르망이 사랑에 빠졌다. 아르망의 아버지의 반대로 마르그리트는 아르망을 떠나야 했지만, 아르망은 그녀가 화려한 과거의 삶을 찾아간 것으로 오해한다. 아르망을 그리워하며 폐병을 앓던 마르그리트가 쓸쓸한 죽음을 맞은 뒤에야 아르망은 마르그리트의 일기를 보고 진실을 깨닫는다.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자전적 소설 ‘라 트라비아타’(춘희)의 줄거리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에게서 오페라로, 발레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에게서 ‘카멜리아 레이디’로 다시 태어났다. 화려한 안무와 쇼팽의 섬세한 음악이 조화된 명작 발레로 손꼽힌다. ●10년만에 내한… 강수진의 마지막 전막 공연 새달 15~17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이 작품을 전막으로 올린다. 10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인 데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마지막 전막 무대로 예상되면서 관심이 집중된다. 강수진과 마레인 라데마케르, 두 주역과 발레단 예술감독 리드 앤더슨에게 이 공연은 어떤 의미일까. 독일에서 공연 중인 이들과 이메일로 인터뷰하고 이를 재구성했다. 2008년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4년 만에 전막 무대에 오르는 강수진은 “설레고 매우 기쁘다. 특히 ‘카멜리아 레이디’는 정말 오랜만이라 더욱 특별하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99년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았다. “당시 나는 마르그리트의 감정에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다양한 경험과 공연을 하면서 많이 배웠고 감정 표현도 수월해졌다.”면서 가장 좋아하는 역할로 마르그리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상대역인 마레인에게도 이 작품은 소중하다. 2006년 아르망을 연기한 그 자리에서 주역 무용수로 승급되는 기쁨을 누렸다. 마레인은 “지금껏 나의 경력에서 가장 행복했던, 또 두려웠던 순간”이라고 떠올렸다. 작품 자체에 대해 이들은 확실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야기가 정말 좋고, 주인공의 감정과 감성이 춤으로 잘 표현된 작품이다. 특히 쇼팽의 아름다운 음악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앤더슨 감독은 “이 작품을 계속하는 이유는 인물들이 매력적이고, 발레단의 모든 요소를 활용할 수 있는 장면이 많기 때문”이라면서 “무용수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도전이 되는 멋진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마레인 “강수진과 춤추면 그 순간 특별해져” 이렇게 똘똘 뭉친 이들은 서로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까. “마레인은 따뜻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강수진은 “무용수로서 기량이 무척 훌륭하고, 음악에 대한 이해도 남다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랫동안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고 서로 눈빛만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면서 신뢰감을 드러냈다. 마레인은 “우리가 춤을 출 때 그녀는 선배가 아니다.”라며 다소 도발적인 말을 꺼냈다. “물론 나는 그녀를 무척 존경하지만, 무대에서는 상하계급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그는 “강수진과 춤출 때는 아무런 경계나 거리감 없이 감정을 전달하는 특별한 순간”이라고 덧붙였다. 14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앤더슨 감독도 “강수진은 타고난 무대 체질이면서 사랑스럽고, 관객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것이 매력적이다. 두 무용수는 감정적으로 잘 어울리고, 관객을 열광시킨다.”고 말했다. 올해 강수진은 발레리나로서는 다소 나이가 많은 편인 45살이라, ‘마지막’을 운운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는 당장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다. ‘카멜리아 레이디’ 초연 당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최고 무용수였던 마르시아 하이데나 브리지트 카일 등은 40대 중반에도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다. 요즘 존 크랑코의 ‘레이디 앤드 더 풀’이나 모리스 베자르의 ‘제테 파리지엔’을 공연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아직 (은퇴에 대해)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은퇴 후에도 예술과 함께하는 삶을 살 거라고 확신한다.”는 강수진은 “(은퇴 후에는)25년 넘게 최고의 안무가와 일하면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 전 세계적인 교류를 한국 발레계에 전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의 은퇴를 떠올릴 때가 아니다.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 감상하면 더욱 재미있게 보게 될 것”이라는 그의 관전 포인트를 따라 작품을 즐기는 게 먼저다. 1577-5266.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부고] 고고음악 창시자 척 브라운

    ‘고고’(go-go) 음악의 선구자인 척 브라운이 16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75세. 가수이자 기타리스트, 작곡가인 브라운은 1970년대 ‘고고’로 알려지게 된 펑키 사운드를 완성하면서 워싱턴 DC 일대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워싱턴 AP 연합뉴스
  • LG 음악영재 특별레슨

    LG그룹이 세계적인 실내악단 연주자들을 초청해 실내악 교육을 받을 기회를 마련하는 등 음악영재 육성에 나선다. LG는 지난 15일부터 1주일 동안 ‘LG 사랑의 음악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미국의 대표적 실내악단인 ‘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멤버들이 지도하는 특별레슨을 진행한다고 16일 밝혔다. LG 음악학교는 LG가 4년째 운영해 온 실내악 전문교육 프로그램. 음악영재를 선발해 1년간 국내 유수 교수진의 실내악 교육을 지원한다. 올해는 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공동 예술감독이자 ‘2012 뮤지컬 아메리카’의 올해 음악가상 수상자인 피아니스트 우 한을 비롯해 첼리스트 티머시 에디, 바이올리니스트 이안 스웬슨·조르자 플리자니스, 비올리스트 신연 황 등 5명의 세계적 연주자들이 음악영재들을 지도한다. 이들은 서울 중구 정동 예원학교에서 LG 음악학교 음악영재 30명에게 하루 4시간씩 실내악 레슨, 작곡가 분석, 공연 리허설 등을 가르칠 예정이다. LG그룹은 오는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LG 사랑의 음악학교 특별콘서트도 개최한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패션 인생 60년 기념전 여는 디자이너 노라노

    [김문이 만난사람] 패션 인생 60년 기념전 여는 디자이너 노라노

    세월의 옷 단추를 잠시 풀어보자. 1956년 11월 29일 오후 2시 서울 소공동 반도호텔 그랜드볼룸.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피아노 연주는 ‘마포종점’ ‘초우’ ‘비 내리는 호남선’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킨 젊은 작곡가 박춘석씨가 맡았다. 이어 원피스 코트 앙상블 등을 입은 모델들이 등장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1부가 끝나고 2부에서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나온 여인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또다시 흥분했다. 마지막으로 그해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한 조미령씨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등장했다. 관객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모델들이 나란히 무대에 섰다. 사회자가 “오늘의 주인공 디자이너 노라노!”라고 외쳤다. 그러자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답하며 많은 꽃다발을 주인공에게 안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열정 하나로 6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오롯이 패션 인생을 살아온 디자이너 노라노(84)씨. 그에게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국내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최초의 해외 유학 디자이너, 최초로 패션쇼를 연 디자이너 등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 노창성은 최초의 방송인이었고 어머니 이옥경 또한 최초의 아나운서였으니 말 그대로 ‘최초’라는 수식어를 연이어 만들어낸 특별한 집안이다. ●“50년대 옷 딸에게 물려줄 것”에 큰 감명 노씨는 요즘 또 하나의 ‘최초’를 준비하고 있다.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을 처음 연 후 올해로 6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오는 23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강남구 신사동 호림미술관 JNB갤러리에서 ‘Nora Noh의 LA VIE EN ROSE展’(노라노의 장미빛 인생전)이라는 전시회를 연다. 패션계에서는 60년 동안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한번도 빠짐없이 계절마다 패션쇼를 하고 60주년 행사를 갖는 디자이너는 세계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라고 의미 부여를 한다. 이번 행사는 지난 세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여배우들과 다양한 분야의 VIP 고객들로부터 증정받은 노씨의 작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또한 작품을 연도별로 전시해 195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의상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울러 노씨의 작품을 오마주한 현재의 내로라하는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및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 등도 다수 참여한다. 이번 전시는 유명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 등에 의해 기획됐다. 한국 패션의 뿌리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준비됐다. 특히 노씨가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과거의 여배우 등 국내외에서 자신의 옷을 소장한 사람들을 만나 시대별로 인기를 끌었던 의상을 다시 수집해 한곳에 모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84살이란 나이를 뛰어넘어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가는 노씨를 지난 14일 오후 서울 강남의 의상실에서 만났다. 검은 커튼 레이스 재킷 차림이 인상적일 만큼 젊어 보였다. 까만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원래 흑색이라는 것은 상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성에게는 자주 독립을 상징한다.”며 웃었다. 평생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살아온 자신감을 녹여낸 듯한 옷차림이라고나 할까.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직접 옷을 만들어 입는다. 노씨가 앉은 자리 뒤편에는 하얀 웨딩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궁금해하자 “1959년 미스 코리아 오현주씨가 미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베스트 드레서 상을 받을 때의 의상이다.”라면서 “이번 전시에 선보이려고 그대로 재현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전시 얘기부터 나왔다. “젊은 친구들이 (전시를) 하는 거고, 저는 단지 지난 60년 동안 만들었던 옷들을 다시 제공받아 전시장에 건네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요. (잠시 생각하더니) 사실은 나이 80이 넘게 되자 60년 세월에 대해 뭔가 현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편하고 참 오래 입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50년 전에 제가 만들었던 옷을 아직도 갖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분들에게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어떤 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이러한 노씨의 생각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그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50년 전 약혼식 때 옷을 입었던 사람과도 연락이 닿았고 1962년 당시 양단 코트를 가지고 있다는 재미교포에게서도 소식이 왔다. 1950년대에 만든 한복 느낌의 ‘아리랑 드레스’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해외 교포에게는 여러 번 사정해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빌려 오기도 했다. 특히 영화 ‘로마의 휴일’이 유명했을 무렵 배우 엄앵란씨가 즐겨 입었던 오드리 헵번의 원피스나 1960년대 TV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나옥주, 사미자, 윤소정, 정혜선 등 유명 스타들이 드라마를 통해 입었던 의상도 어렵지 않게 제공받았다. 또한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가 부임지에 갈 때 입었던 의상도 기증받았다. “해외에 계신 어떤 분은 아리랑 드레스를 지금도 매년 8·15 때 입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가 꼭 딸한테 물려주겠다는 얘기를 해주셔서 너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400벌 정도 모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특색 있는 것 위주로 60벌 정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영화배우, 음악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분들이 아직도 옷을 갖고 있어 참 고맙더군요. 저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엄앵란씨가 제 옷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알게 됐습니다(웃음).” ●“옷은 잘 절제된 멋 나와야”가 신념 이어 의상의 시대적 변천사와 관련해 잠시 언급한다. “1950년대는 아시다시피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었지요. 영화나 연주 의상, 쇼 의상, 창극 의상 등을 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유행에 따라갔습니다. 1960년대에는 TV드라마가 생겨나면서 의상 협찬을 통해 제 옷이 대중들에게 다가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성복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여성들의 활동이 많아지면서 투피스 형태의 여성용 정장이 생겨나 인기를 끌었지요.” 노씨는 이 무렵 미국 뉴욕의 고급 백화점 ‘삭스’에 진출해 ‘메이드 인 코리아’ 패션을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아울러 뉴욕에서의 패션쇼 등을 통해 현지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아마 2000년 봄이었지요. 미 브라운대학 초청으로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이 교수였는데 제가 1940년대에 미국에서 패션 공부를 했던 일, 1980년대 뉴욕 7번가에 진출해 한국산 실크를 널리 알리며 외화를 벌어들인 일 등 50년을 한결같이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옷이란 잘 절제된 멋이 나와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했더니 다들 많은 박수로 대접을 해주더군요. 특히 50년 외길을 걸어온 점에 아주 놀라워했습니다.” 이때 미국의 패션업계에서는 “노라노는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창조한 여인이며 그녀의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퍼졌다.”고 높이 평가했다. 노씨는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3월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유복한 집안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혼자 된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한 뒤 영어 공부를 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의 영어 교사 역할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는 1927년 초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개국한 공로자이며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어머니는 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게 됐다. 이처럼 일찍부터 ‘멋을 내는 가풍’의 외가 쪽이나 부모들을 보고 자란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패션 디자이너의 끼를 타고 났다. ●“놀고먹는다는 것은 죽음 기다리는 것” 경기여고 재학 시절에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문학 소녀였다. ‘이와나미 문고’라는 일본의 문고판 책은 거의 다 읽다시피 했을 정도다. 그러다 고 3때 일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했으나 얼마 안 가 이혼하게 되면서 원래의 끼를 살려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됐다. 광복 직후 외환은행 설립을 위해 한국에 온 미국인 스미스의 비서로 일하면서 가끔 각국의 대사들과 장관들이 참석하는 파티를 도울 때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본 것이 계기가 돼 스미스의 추천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이후 미국과 한국, 프랑스와 일본 등을 오가며 토종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렸다. 학창 시절 읽었던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가 집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찾듯 노씨 역시 ‘노라’라는 이름을 갖고 새 인생을 펼쳤던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60년 동안 쉼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첫째는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했고 둘째는 어떤 목적이나 욕심을 두지 않았으며 사람 만나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산다는 것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고 놀고먹는다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전은 하되 욕심을 버렸기에 오늘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에 의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설 것”이라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노라노 디자이너는 본명은 노명자다.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194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피난지인 부산에서 쇼 의상 등을 만들었고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을 열었다. 이후 패션의 중심지 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스쿨’에서 수학한 뒤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1966년에는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참가했다. 1974년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이후 매년 계절마다 국내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60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주요 수상으로 세계 패션그룹 ‘패션대상’(2000) 등이 있다.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대중음악] ●2012 김범수 콘서트 ‘겟올라잇쇼케스트라’ 25~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가수 김범수가 데뷔 이후 처음 세종문화회관에 입성해 펼치는 공연으로 40인조 오케스트라와 17인조 빅밴드와 함께 풍성한 무대를 꾸민다. 6만 6000~12만 1000원. (02) 515-0314. ●바비킴 소극장 콘서트 ‘Love Chapter2’ 6월 28일~7월 1일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힙합과 솔을 넘나드는 보컬리스트 바비킴이 여는 두 번째 소극장 콘서트. 7만 7000~8만 8000원. 1644-4575. [연극·뮤지컬] ●뮤지컬 ‘풍월주’ 7월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컬처스페이스 엔유. 고대 신라의 신분 높은 여자들을 접대하는 곳 ‘운루’에 각각의 사연을 품은 남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바람과 달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풍월주’로 불린다. 운루의 제일가는 남자 기생 ‘열’, 달 그림자처럼 항상 열의 뒤를 바라보는 ‘사담’, 천하를 호령하지만 사랑을 얻지 못한 여왕 ‘진성’의 얽힌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4만~5만원. 1577-3363. ●연극 ‘그을린 사랑’ 6월 5일~7월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한 여인의 삶과 열망, 저항 및 자신의 기원을 찾는 세 개의 운명들에 대한 이야기로,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예술영화 최다관객동원을 기록해 화제가 된 바 있다. 2만~5만원. 1644-2003. [국악·클래식] ●카르멘 모타의 알마 23~26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스페인 플라멩코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카르멘 모타의 최신작. 1막은 정통 플라멩코와 탱고, 재즈, 현대무용이 어우러지고 2막에서는 행복과 슬픔, 고독, 환희 등 감정들을 표현했다. 5만 5000~15만원. (02)2005-0114. ●정오의 음악회 15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국립극장이 오전에 선보이는 국악 콘서트. 재일교포 작곡가 양방언의 ‘프런티어’를 시작으로 동요 메들리, 남도민요, 살풀이 등이 이어지면서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이 풍성한 무대를 꾸민다. 가수 김현철의 특별무대도 준비했다. 1만원. (02)2280-4115~6. [미술·전시]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유영국 10주기전 18일부터 6월 17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 모더니즘 회화의 대부로 꼽히는 유영국(1916~2002) 작가의 작품 60여점을 6개의 작업시기별로 나눠서 조망한 전시다. 미술관급 전시라 상업갤러리로서는 이례적으로 입장료가 있다. 3000~5000원. (02)519-0800. ●엑스레이 작가 한기창 초대전 7월 5일까지 충남 아산시 외암리 당림미술관. 수묵이나 물감이 아니라 의학도구로 활용됐던 엑스레이를 이용한 독특한 작품을 선보인다. (041)543-6969.
  • 애국가 작곡한 안익태 선생 헝가리 영웅광장에 흉상 설립

    애국가 작곡한 안익태 선생 헝가리 영웅광장에 흉상 설립

    10일(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 영웅광장 내 시민공원에서 열린 안익태 선생 흉상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흉상 설립을 축하했다. 제막식에는 헝가리 국회의원들과 부다페스트 시 관계자, 김형주 서울시 정무부시장, 남관표 주헝가리 대사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은 1938~1941년 부다페스트 명문 ‘리스트 페렌츠 음악예술대학’에서 헝가리 민속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졸탄 코다이를 사사했다. 흉상은 서울시가 3년 전 선생을 기리고 한국과 헝가리의 우호 친선을 위해 건립을 추진한 것으로 서울시는 3만 달러의 제작 비용을 댔다. 부다페스트 연합뉴스
  • [주말 하이라이트]

    ●2012 대기획 SBS 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10분)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그곳에는 초로의 사내와 젊은 사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없이 앉아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다.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모 자식 간인데도 방 안의 두 사람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과연 이들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재발견(KBS1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2015년 완공을 앞둔 경기 포천의 한탄강 댐. 인근의 여러 마을들은 댐이 완공되면 수몰된다. 이 때문에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탄강 인근에 위치해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교동 마을 사람들은 좀 더 높은 다른 부지로 마을 전체를 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귀남에게 용서 쿠폰을 받은 양실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별 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은 말숙은 그 길로 세광을 찾아간다. 한편 윤희 부부는 재용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수지와 재용이 각각 귀남, 윤희가 자신들의 첫사랑이라고 하자 서로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찾아라! 맛있는 TV(MBC 토요일 오전 11시) 가수 겸 작곡가 윤종신이 출연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아내 전미라가 해주는 집밥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절친 이현우의 집요한 추궁과 생생한 증언에 결국 장모님이 집에서 해주신 밥이라고 정정했다. MC 이현우, 권오중이 ‘윤종신에게 푸드송 영감을 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주제로 요리 대결도 펼친다. ●국회의원 정치성 실종사건(KBS2 일요일 밤 11시 45분) 동일 아빠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은 정치성은 이인자와 함께 섬을 떠난다. 떠나는 배 위에서 옛 추억에 잠긴 정치성은 인자에게 학창 시절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던 중 인자와 함께 왔던 수행비서가 칼을 꺼내 정치성을 향해 다가간다. 격한 몸싸움 끝에 정치성과 이인자는 둘만 남게 되는데…….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SBS 일요일 오후 5시) 우여곡절 끝에 바누아트의 야수르 정상에 도착한 병만족에게 첫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화산에서의 야영이다. 취침은 물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야수르 화산. 과연 병만족은 첫날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OBS 초대석(OBS 일요일 오전 6시 55분) 4·11 총선 당선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주는 안양 동안 지역의 새누리당 심재철 당선자와 함께한다. 그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7전 8기의 오뚝이 인생 등 늘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4선의 정치인이다. 프로그램에서는 그가 앞으로 국가와 지역을 위해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어본다.
  • [보고 듣고 즐기세요] 국악·클래식

    ●풀림앙상블의 아침향기 12일 오후 5시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 한국 전통음악과 클래식계 연주자, 작곡가 등이 참여한 풀림 앙상블의 첫 콘서트. ‘비워둔 자리’, ‘어느 맑은 날’ 등 첫 앨범 ‘아침향기’ 수록곡과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 대금·가야금 독주 등을 연주한다. 2만~5만원. (02)704-6420. ●공명 데뷔 15주년 콘서트 ‘바다와 함께’ 12~13일 오후 2시 서울 남산 국립극장. 퓨전 국악그룹 공명이 ‘대륙의 끝’, ‘밤부 밤부’(Bamboo Bamboo), ‘꿈’을 주제로 명상음악부터 현악앙상블과 협연 등 다양한 음악 세계를 선사한다. 2만~6만원. 070-8699-0132.
  •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0)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0)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되는『목포(木浦)의 눈물』은 그 가사가 현상공개모집의 당선 작품이란 데서 또 최초를 기록한다. 이난영(李蘭影)을 얻은 OK「레코드」는 33년도에 충천하는 사세(社勢)를 과시할 겸 유행가 가사모집 광고를 냈다. 약 3천통의 응모 작품이 들어왔는데 그 중에서 뽑힌 게『목포(木浦)의 눈물』이고 작사자는 바로 목포(木浦) 출신인 문일석(文一石)이란 사람. 문(文)씨는 이 가사 하나로 가요사적 인물이 됐지만 작사 활동은 이 한편으로 끝났다.  이 가사가 마음에 들었던지 곡도 현상 모집했으나 마땅한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OK 전속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에게 맡겼다.  손목인(孫牧人)은 그때『갈매기 항구』란 곡을 만들어 고복수(高福壽)한테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목포(木浦)의 눈물』가사를 받고 보니 내용이 비슷했던지『갈매기 항구』의「멜러디」를 그냥『목포(木浦)-』에 붙여 버렸다. 결국 고복수(高福壽)는 이난영(李蘭影)한테 노래를 빼앗겼고 『갈매기-』는 날아가 버렸다.  어쨌든 이난영(李蘭影)은 이『목포(木浦)의 눈물』로 아무도 따를 수 없는「스타」가 되었다. 요즘 말로「슈퍼·스타」라 할까? 그때 돈으로 5백원씩의 월급을 받게 되었다. 일류 월급장이의 1년분 봉급에 해당했다. 당초 별로 넉넉지 못한 가정에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못받은 16살 소녀가 출가 3년만에 거둔 성공이었다. 엄청난 봉급에 OK 전속…월급장이 1년치 한달에  『회현동에 2층 양옥을 샀어요. 가 보면 없는 게 없이 꾸미고 살았어요. 특히「피아노」가 모든 연예인들의 부러움을 샀지요.』  이난영(李蘭影)보다 먼저「데뷔」한 신(申)「카나리아」의 회상이다. 그 때만 해도 가수가「피아노」를 갖는다는 건 하나의 꿈었다고.  신(申)「카나리아」가 이난영(李蘭影)을 처음 만난 것은 이(李)씨가 단성사에서 조선악기단의 막간 가수로 나왔을 때.『귀엽고 똑똑하게 생겼는데 화장할 줄을 몰랐어요. 내가 화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머리를 빗겨 줬더니, 두고두고 그때 얘길 하더군요. 착하고 눈물 많은 애였어요』  이난영(李蘭影)의 오빠 이봉용(李鳳龍)은 목포(木浦)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노래『목포(木浦)는 항구(港口)다』를 만들어 동생이 부르게 했다. 박남보(朴南甫) 작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①영산강(榮山江)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삼학도(三鶴島)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그리운 내고향 목포(木浦)는 항구다/똑딱선 운다.  ②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그리운 내 고향 목포(木浦)는 항구다/추억의 고향  이 노래 역시 크게「히트」했고『목포(木浦)의 눈물』과 함께 아직도 애창되는 노래다. 이난영(李蘭影) 남매의 고향 목포(木浦)가 그렇게 좋은 곳일까?  사실 그때만 해도 목포(木浦)는 개항장(開港場)이기는 했으나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한산하고 쓸쓸한 항구, 그것이 이난영(李蘭影)의 노래 때문에 일약 정서와 낭만이 깃들인 명승지로「글로즈 업」된 것이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실시된 뒤 이난영(李蘭影)은「오까광고(岡蘭子)」란 일본 이름으로 이『목포(木浦)의 눈물』을 일본말로 취입했다. 일본말 노래는 20년대에 이미 채규엽(蔡奎燁)이「하세가와(長谷川史郞)」란 이름으로 취입한 일이 있다.  일본 노래로 된『목포(木浦)의 눈물』은 그 뒤에 손목인(孫牧人)이 만든 몇개의 노래와 함께 상당히 많이 팔려 나갔다. 이미자(李美子)가 도일(渡日)했을 때도 이『목포(木浦)-』를 일어로 취입했고 최근엔 남상규(南相奎)에 의해서 다시 일본 노래『목포(木浦)의 눈물』이『리바이벌』됐다.  덕택에 일본서 인세를 받고 생활해 나가는 한국인 작곡가가 탄생했다. 손목인(孫牧人)이 바로 그 사람. 손(孫)씨는 6·25때 도일(渡日)한 뒤 동경(東京)에 정착, 그곳에서 가요학원을 경영하고 있다. 남편 김해송(金海松)의 납북 이후 아들 딸들을 보컬로 키워 가요계의 여왕 이난영(李蘭影)은『목포(木浦)-』다음으로『알아 달라우요』『해조곡(海鳥曲)』『진달래 수첩』『울어라 문풍지』『다방의 푸른 꿈』등 수많은「히트·송」을 계속해서 내놓았다. 가수로서의 그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사생활은 항상 외로움에 우는 여인이었다. 남편이 가진 수많은 여자와의 관계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나마 남편이 납북당한 뒤에는 더욱 그랬다. 서대문형무소에 남편 김해송(金海松)이 갇혀 있을 때 이난영(李蘭影)은 얼굴에 숯검정을 바르고 걸인으로 변장하여 형무소 주변을 맴돌았다 한다.  김해송(金海松)이 납북된 뒤 이난영(李蘭影)은 가수 남인수(南仁樹)에 위탁해서 외로움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난 것.  김(金)「시스터즈」와 김(金)「보이스」7남매를 지금의 일류「보컬·그룹」으로 키운 건 이난영(李蘭影)의 노래에 대한 애정 때문으로 해석된다. 생활이 어려워졌을 때도 그는「피아노」만은 팔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6·25때 드디어 모든 세간이 없어진 뒤 그녀는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아들 딸한테 노래를 가르쳤다.『가수는 노래를 계속하기 위해 작곡가와 결혼하는 게 옳다』는 주장을 후배한테 얘기했고 평소『자식들을 가수로 키우는 게 남겨진 의무』라고 그녀는 말해 왔다. 70년도에 김(金)「시스터즈」는 미국에서 금의환향하여 서울 시민회관에서 어머니 추모 공연을 열었다.  흘러간 가요계 여왕 이난영(李蘭影)의 노래는 그녀의 분신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조관희(趙觀熙)기자>  [선데이서울 73년 3월 11일 제6권 10호 통권 제23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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