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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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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이러고도 대한민국 외교관인가

    한국 외교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내부 고발로 드러났다.외교통상부 내부토론 광장 ‘나눔터’에 올려진 외교관들의 공금유용,공관 ‘밥장사’ 등의 비행은 충격적이다.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은 높은 윤리의식과 품위,그리고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봉사정신이 필요하다.그런 외교관들의 추한 비리가 반복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토론방 글에 따르면 외교관들이 사적 모임의 식사를 공금처리하고 있다고 한다.관저 만찬 때 사람 수를 부풀려 추가 경비를 챙기는 이른바 ‘밥장사’를 하는 공관장도 있다고 한다.딸을 공관직원으로 위장해 데려가는 대사도 있었다고 한다.이와는 별도로 한 전직 홍콩주재 영사는 부적격자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고 2억 7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17일 구속됐다.외교관이 ‘비자 장사’도 한 것이다. 외교관의 부조리는 감사원 감사 등에서 여러번 지적됐다.그런데도 근절되지 않고 있어 구조적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물론 대다수 외교관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해외공관도 사실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고발 글이 두 달전에 올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공개된 후에야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외교부의 폐쇄성은 여전하며 개혁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외교부는 이번에도 적당히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를 엄히 문책하고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감사원도 감사를 강화하여 비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그나마 자체 비리를 고발하는 외교관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외교부의 내부 고발이 공무원 사회 전체의 공직부패를 줄이는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 [시론] 서희장군을 다시 생각한다

    요즈음 화제의 영화 가운데 황산벌이 있다.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어 유행어까지 낳았지만,김유신과 소정방의 기세 싸움도 볼 만하다.강압적인 소정방과 이에 저항하는 김유신의 모습에서 1300년 뒤 오늘의 우리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다.주변국을 아랑곳하지 않는 중국인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고구려사 빼앗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를 중국사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그런데도 이른바 ‘동북공정’이 새삼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하나는 종전에는 학자 개인이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논의되었지만 이제는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5년간 지원하는 1500백만위안의 연구비 가운데 3분의2를 중국 재정부에서 출연하고,재정부 부장(장관)까지도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둘째는 국경을 넘어 우리 영토까지 넘보고 있다는 사실이다.중국은 소수민족의 분리운동을 차단하기 위해서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과거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규정해왔다.그런데 이제는 고조선과 한사군,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반도 북부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하면서,신라에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만 한국사에 속한다고 강변하고 있다.신라계 정권인 고려와 조선이 각기 고구려와 고조선을 도용해서 국호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이전에는 조선족 단속에 골몰하며 만주 역사는 중국사라는 논리를 내세웠는데,이제는 공격적으로 한반도 북부까지 넘보겠다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구려사 빼앗기는 역사학에서 벗어나 정치와 외교의 문제로까지 비화된 느낌이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마땅한 손발이 없다.고구려 유적을 중국과 북한이 절반씩 가지고 있으니 이 금역의 역사를 다루는 연구자가 많을 리가 없다.더구나 중국 간행물을 종합적으로 수집하는 기관조차 없다.우리 사회는 맑은 날에 궂은 비에 대비하는 지혜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발등의 불부터 끄지 않을 수가 없다.첫째는 북한을 도와서 고구려 벽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키는 일이 다급하다.중국은 북한측이 등록해버리면 설득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중국내 고구려 유적을 전쟁하듯이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북한을 배제하려 획책하고 있다.내년 전반기에 판가름날 이 싸움에서 지면 우리는 후손에게 두고두고 고구려를 잃어버린 죄인이 될 것이다. 둘째는 연구기관의 설립이다.그것도 자료 수집을 중심으로 하는 기관이 시급하다.이번 중국의 정책도 신문기자가 먼저 알아서 학자들에게 알려줬다.중국의 학술동향을 싣고 있는 광명일보마저 국내 어디서 구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지금 중국의 교과서를 분석한다거나 고구려사가 한국사인 근거를 찾는다고 분주하지만,즉흥적인 대응보다는 연구자를 키울 수 있는 장기적인 안목과 연구 기반 조성이 절실하다. 이 마당에 저 유명한 서희 장군의 담판이 떠오른다.993년 거란 소손녕이 쳐들어와서 “고려는 신라 땅에서 건국한 나라이니 우리 영토인 고구려 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그는 “그렇지 않다.우리나라는 고구려 후계자이다.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했다.경계로 말하자면 오히려 요동지방이 우리 땅이니 누가 침범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여 소손녕의 군사를 돌리고 거꾸로 압록강 유역을 개척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10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우리 눈 앞에 다시 재현되고 있다.항복론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자진해서 담판에 나섰던 서희 장군은 지금 양평 부근에 잠들어 있다.그러한 지혜를 가진 후예가 지금 절실하다. 송 기 호 서울대교수 국사학
  • [마당] 프리다 칼로와 하오루루

    멕시코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인 프리다 칼로의 사랑과 예술을 그린 영화 ‘프리다’를 봤다.프리다는 7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고,18살 때 교통사고로 등뼈,골반,한쪽 발이 으깨졌다.47세라는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세 차례의 다리수술과 일곱 차례의 척추수술,그리고 두 차례 이상의 유산과 임신중절수술이 더 남아 있었다.그 사이에 자궁과 오른쪽 발과 다리가 잘려 나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가를 꿈꿨고,혁명과 반전과 반핵을 꿈꿨고,열정적인 사랑을 꿈꿨고,아이를 꿈꿨다.그리고 그녀는 세기의 사랑을 완성했고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프리다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도 드물다.고통과 절망의 순간과 맞닥뜨릴 때마다 그녀는 자화상을 그리며,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고통과 절망을 응시하면서 자신을 세웠던 것 같다.인상적인 자화상은 ‘부서진 기둥’이라는 작품이다.‘부서진 기둥’을 그리는 작업과정은 영화 중간쯤에도 나오는데,그림 속에서 프리다의 온몸에는 크고 작은 대못이 쳐져 있고 굴레처럼 척추교정지지대가 감겨 있다.갈라진 몸 안에는 척추 대신 부서진 기둥이 세워져 있다.아니 부서진 기둥을 간신히 세워놓고 있다.머리를 풀어헤친 채 울고 있는 눈은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부서진 기둥’이 상징하듯,프리다의 몸은 절단되고 부서지고 결합되기를 반복했다.그녀의 몸처럼,그녀의 삶 또한 부서진 조각들을 짜맞추는 조각 맞추기와 같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또 다르게 몸으로 조각 맞추기를 하고 있는 하오루루를 생각했다.하오루루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성형미인 프로젝트에 돌입해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중국 신세대 여성 이름이다.그녀는 베이징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유학을 한 지성인이다.본래의 얼굴도 그다지 밉상은 아니다.그런데 수술비 30만위안(3억원)을 들여서 코 높이기,턱뼈 깎기,목주름 제거하기,유방 확대하기,허리와 다리의 지방 흡입하기 등의 대형 수술을 통해 거듭 태어나는 중이라고 한다.수술 전 과정이 CNN을 통해 보도된다니,그녀가 꿈꾸었던 스크린 데뷔는 확실히 보장된 셈이다.절단되고 흡입되고 봉합되어 조각조각 짜맞춰질 그녀의 삶의 모습은 또 어떠할지. 아닌게 아니라 우리 사회도 최근 ‘얼짱’ 신드롬에 시달리고 있다.인터넷 얼짱 스타 박한별,골프계 얼짱 안시현,농구계 얼짱 신혜인,레이싱걸 얼짱 오윤아는 나처럼 낡은 사람도 다 안다.‘좋은 머리’보다는 ‘좋은 몸(얼굴)’을 물려주는 것이 아이들의 미래를 가장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말을 들은 지도 꽤 된다.명실상부한 얼짱 스타 이효리 신드롬은 심지어 정치계에도 번져 차기 대선주자후보로 언급되는 법조계·정계의 여성 지도자들이 엉뚱한 모습으로 조명되고 있다. 사실 영화 ‘프리다’는 복잡한 암시들로 가득했고 나는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그 지난함에 대해 생각했다.프리다든 하오루루든,몸이든 마음이든,자의든 타의든,스크린이든 국회든,이 땅에서 여성들이 자기 스스로를 세운다는 것은,이렇듯 절단되고 부서지고 다시 결합된 ‘부서진 기둥’을 척추처럼 껴안고서야만 가능한 것인가.남성들이 욕망할 뿐 아니라 여자 스스로조차 열망하는 ‘환상적’인 얼짱 미인보다는,이 땅의 질곡을 향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혼(魂)의 미인이 진정 아름답지 않겠는가.그러기에 공산주의자요 장애자요 약물 중독자였으며 양성애적인 데다가 여자,그것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던 프리다의 꿈을 향한 투혼(鬪魂)의 광기야말로 다시 한번 재발견해야 할 여성의 아름다움은 아닐까. 정 끝 별 시인 열린사이버대 교수
  • 고독·동성애·가족해체 그 속에 꿈틀대는 새 삶/ 김숙 소설집 ‘그 여자의 가위’

    무엇이 40대 중반의 작가에게 우리 사회를 이토록 음울하게 그리게 했을까? 김숙의 소설집 ‘그 여자의 가위’(여성신문사 펴냄’)를 읽다 보면 마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대변되는 홍상수의 우울한 영화를 보는 듯하다.그 깊고 넓은 고독의 늪에 침잠하다 보면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것 같다. 표제작은 아버지의 외도와 사고,가출 등 어두운 과거를 지닌 미용사 주인공이 미용실이란 공간에서 살핀 사회의 모습을 다룬다.누나를 사랑한 죄의식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남자,인터넷을 통해 섹스·동성애 등 어른의 세계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열두살 소녀 나리 등을 통해 “너무나 풀기 어려운 그들만의 기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사회적 고독’을 이야기한다.작가는 그 주인공 나리의 20살 모습을 다른 작품 ‘스무살의 MOTEL’에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으로 등장시킨다.방황하는 친구들과 주인공이 세파에 몸을 실어가는 과정을 통해 가족 해체라는 사회의 다른 생채기를 그린다. 결국 작가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퍼즐식으로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절대 고독,가족해체,성문제,동성애,비루한 일상 등의 조각난 퍼즐을 침울하게 맞추다 보면 어느새 현실이라는 완성품이 나온다. 작가는 이런 현실에 대해 자신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다만 냉정하고 담담하게 현실을 그린다.그러면서 주인공들에게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고 새 삶을 꿈꾸게 한다.그런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성큼 다가온다.“고단하지만 아름다운 인생들을 하나씩 글로 옮기기로 마음먹는다.”는 작가의 말이 활자 속 인물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살아 움직인다. 이종수기자
  • [씨줄날줄] 식물국회

    식물국회.잊을 만하면 보란 듯이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정치 조어다.노무현 대통령의 특검법 거부권 행사에 한나라당이 등원거부로 맞서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비슷한 취지의 조어로 ‘뇌사국회’ ‘빈사(瀕死)국회’가 있긴 하나,사용빈도 면에서 식물국회를 따르진 못한다.정치를 마치 스포츠 게임의 승부로 바라보는 우리사회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사회의 막힌 곳을 뚫는 일에 진력하는 선진정치에서는 한낱 쓸데없는 말일 테니,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정치조어로 당적을 이리저리 옮기는 정치인을 지칭하는 철새정치인이 있다.철새 의원들의 ‘화려한 군무’는 지난해 대선때가 가히 압권이었다.장관,집권당 사무총장을 지낸 중진의원들까지 철새 대열에 합류했으니 전성기를 구가한 셈이다.그러자 환경보호론자들이 ‘철새를 비하하지 말라.’며 발끈했다.그래서 생겨난 말이 ‘진드기 정치인’이다. 차윤정·전승훈 부부가 10여년에 걸쳐 펴낸 ‘신갈나무 투쟁기’에는 이런 글귀가 실려있다.“신갈나무는 식물인간,식물국회 등등의 말에 무척 가슴이 아프다.식물처럼 처절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모두가 식물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발상이다.아니,지독한 동물 중심적 발상에서 오는 편견이다.” 마지막 장에 실린 부부 저자의 평범한 식물관이었는데,가슴에 와닿는 감동을 주었다. 지구상 무게의 4분의3을 식물이 차지하고 있다.식물이 곤충·동물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한 탓이라는 식물학자들의 설명이다.하긴 논어·장자·노자·채근담 등 동양의 고전들은 한결같이 계절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나무·꽃·잡초와 같은 식물에 빗대 도의 심오함을 설파하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살아 숨쉬는 지혜의 보고(寶庫)로서 식물이다. 그런 점에서 내년 예산안의 정상처리가 불가능해지고,또 국가 균형발전 3대 법안과 한·칠레 FTA 비준안 처리가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식물국회로 표현하는 것은 이제 재고할 필요가 있겠다.혹 이 땅의 식물들이 자기들을 파행국회에 비유한데 분노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차라리 약육강식이 지배원리인 ‘동물국회’로 명명하는 것이 더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철학자 스피노자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심으려 한 것이 ‘한그루 사과나무’,식물이 아니었던가. 양승현 논설위원
  • [나의 건강보감] 이종철 삼성서울병원장

    “건강에 대한 자각이 두드러진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심각한 문제입니다.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관리하는 일엔 대부분이 서툴러요.그래서 저는 누구나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달리기든,그림그리기나 명상이든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하루 가운데 1시간만 할애한다면 스트레스의 압박을 털어내 지금보다 훨씬 건강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나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가져야 이종철(56) 삼성서울병원장은 의료인이나 CEO로서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이 결실이라면,그는 자신의 삶에 무엇을 투자했을까? 그의 말을 듣노라면 의사라는 천직에 대한 자부심과 애환이 함께 묻어난다.“제 약점이기도 한데,성격이 좀 예민한 편이라 매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이걸 어떻게 다루나 이런저런 궁리 끝에 찾아낸 저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바로 반신욕(半身浴)입니다.” 그는 스트레스에 심신이 억눌린다 싶은 날은 어김없이 반신욕을 한다.퇴근후 귀가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은 뒤 하반신을 담그고 앉아침잠의 시간을 갖는 것.“한번 시작하면 누구나 매료될 법한 건강법입니다.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30∼40분쯤 마음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온 몸에 온기가 돌고 굳었던 몸이 풀리면서 이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그가 반신욕을 시작한 것은 한양대병원에서 일하던 80년대 초.“예나 지금이나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업보같은 것입니다.게다가 그때만 해도 의사들끼리 보이지 않는 경쟁심같은 게 있어 스트레스는 더했죠.그런 와중에 심각한 불면증이 왔어요.너무 답답해 선배 한분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너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으라.’고 해요.그때부터 자기 전에 반신욕을 시작했는데,제겐 정말 잘 어울리는 스트레스 해소법이란 생각이 들어요.” 반신욕과 함께 그의 건강을 지키는 또 다른 한 축은 산책.지금도 낮시간에 짬을 내 병원 정원을 지향없이 30여분씩 걷는다.일부러 점심시간에 밖에 있는 음식점을 골라 걸어가기도 한다.그게 전부가 아니다.퇴근해서는 아내를 데리고 집 근처 서울교대 바깥길을 30∼40분씩 빠르게 걷는 게 빠뜨릴 수 없는 일과가 됐다.“의사로 일하다 보면 열에 여덟,아홉은 가정에서의 역할을 다하기가 어려워요.일에 지치지,시간 없지….그래서 아내와의 산책을 시작했는데,운동 효과는 물론이고 부부간의 대화에도 이만한 게 없다 싶어요.가끔 밖에서 식사를 한 경우에도 전화로 아내를 불러 산책을 한 뒤 귀가하곤 합니다.” ●따뜻한 물 30~40분… 마음이 평온해져 말이 산책이지 그 배경을 더듬어 보면 열정 속에 긴장과 우울을 감추고 사는 의사라는 직업인의 자화상이 선연히 드러난다.“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대학병원 의사들,바빴어요.진료다,연구다,학회 일에 학생지도까지 하루 24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요.제가 한양대병원에서 일할 때인데,아무리 궁리해도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었어요.그래서 하루 두번씩 회진때마다 20층을 걸어서 오르내렸죠.그게 처음 시작한 운동입니다.”그는 그때의 계단타기를 ‘내 건강의 버팀목’이라고 돌이켰다.딱히 건강을 염두에 뒀다기보다 생각없이 재미를 붙였는데하다보니 무척 좋더라는 것이다.오죽했으면 3개월마다 구두를 바꿨을까. 계단타기는 그가 94년 삼성서울병원 창설멤버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형태를 바꿔 계속됐다. “제 건강지침 가운데 하나가 ‘걸을 수 있으면 걷자.’는 겁니다.지구력이나 심폐기능을 강화해주기 때문입니다.스포츠의학자들은 50대 후반이 되면 근육의 매스(부피)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들 합니다.활동의 근본인 힘은 결국 근육을 통해 나타나거든요.아직 그걸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운동의 필요성은 항상 느끼며 살죠.”그러면서 최근에 실내 자전거도 탄다고 소개했다. ●병원 정원서 30분·퇴근후 아내와 30분 산책도 그런 그에게 혹시 취미같은 걸 가졌느냐고 묻자 식도락을 얘기했다.“식도락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그냥 나에게 잘 어울리는 맛을 찾는 거지요.이를테면,우리가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 맛은 대부분 짠 맛과 단 맛으로 이뤄지는데 이게 건강엔 안좋거든요.짜거나 달지 않으면서 제 맛을 내는 음식을 ‘좋은 음식’으로 보고 그 맛을 찾는 일종의 ‘건강한맛의 탐색’이 제 식도락의 방향입니다.”그렇다고 자칫 특급호텔에나 있을법 한 값비싼 요리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주말이면 가끔 골프장엘 가는데,진한 국물이 일품인 안양 골프장 인근 양곰탕집이나 신선한 야채가 좋은 병원 근처 한정식집,또 짜지 않게 된장국을 끓이고,게장을 담가내는 곳 등이 그가 발굴한 맛집들이다. 그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술을 거의 못한다.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술의 자리를 고스란히 비워두기엔 공백이 큰 게 사실.그래서 술의 공백을 메워보려고 94년 무렵 시작한 골프가 보기플레이어 수준이다.요즘에는 골프보다 그린을 걸으며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재미로 가끔 골프장을 찾는다.그렇다고 그가 약골은 아니다.어려서부터 운동을 즐겨 대학 시절에는 단거리와 축구선수로 뛰기도 했으며 지금도 마라톤대회에 나가면 5㎞ 코스 정도는 거뜬히 주파한다. 그는 가능한 세상의 밝은 곳에 눈길을 준다.돌아가신 어머니가 그에게 건넨 가장 값진 가르침이다.그렇게 밝은 곳을 주시하면서 안온한 평화와 건강한 심상을 지켜 간다.그런 건강성 때문일까.사람들에게 권하는 건강 제언도 유별나지 않다.“가능한 적은 양을,천천히,그리고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하다.또 스트레스는 가슴에 쌓지 말고 그날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일 속에서 찾는 도락(道樂)의 건강론’이 아름다운 것은,‘건강’이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에 파묻혀 허덕여야 하는 우리에게 명징한 답이 되고,길이 되는 까닭이다. 글 심재억기자 jeshim@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반신욕 건강법 그가 반신욕을 시작한 계기는 스트레스였다.젊은 의사였던 시절,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로 심신이 물먹은 옷가지처럼 지쳐 내렸던 것.그 스트레스는 불면증으로 이어졌고,그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너무 고통스러워 안정제를 복용하기도 했어요.주로 아침에 복용한 뒤 일과를 시작하곤 했는데,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약물에 의존하는 게 좋을 건 없지요.그랬는데,반신욕을 시작하면서 불면증을 말끔히 털어 냈습니다.잠을 잘 자니 마음이 평온해지고,덩달아 생활도 활기차고…날 것 같았지요.” 목욕법도 까다롭지 않다.잠자리에 들기 전에 따뜻하다고 느낄 정도의 물을 욕조에 받아 하반신을 담그고 명상을 하는 것.“보통은 일주일에 2∼3회,시간은 30∼40분 정도 하는데,그 정도면 온 몸이 적당하게 데워져 상쾌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대신 물이 너무 뜨거우면 교감신경을 자극해 되레 숙면을 방해하기 때문에 피하는 편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양태는 다르다.그는 불면증을 겪지만 더러는 두통이나 근육통,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그래서 일률적인 건강법보다 자신의 체질이나 환경에 맞는 스트레스해소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들어 걱정되는 건강상의 문제는 크게 봐 암과 노화일텐데,어느 경우든 유전적 요인은 아직 극복하기 어렵습니다.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게 중요합니다.무슨 말이냐 하면,정신적 스트레스도 암이나 노화를 촉진하는 주요 인자이기 때문에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죠.”그러면서 그는 “모두에게 다 좋은 최고의 건강법은 없다.그렇기 때문에 운동이든,스트레스 해소든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권위있는 수면과학자 미하시 미호는 “38∼40도 정도의 물에 명치가 잠기도록 몸을 담근 뒤 20∼30분 정도 목욕을 하는 반신욕은 전신욕에 비해 폐와 심장의 부담이 적으며,정서적 안정과 함께 근육을 이완시켜 숙면에 매우 좋다.”며 “단,목욕후 텔레비전 시청 등 다른 일을 하지 말고 바로 잠자리에 드는 게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심재억기자
  • 녹슬지 않은 사회비판/신학철씨 12년만의 개인전

    80년대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가인 신학철(60)이 91년 학고재 전시 이후 12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21일부터 12월21일까지 서울 동숭동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에서 열리는 ‘우리가 만든 거대한 상(像)’전에는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서민들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민중적’ 성격의 작품 120여점이 선보인다. 60년대 ‘자화상’에서부터 70년대 ‘서울 방법전’에 낸 콜라주 작업,80년대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 연작에 이어 90년대 계층문제를 다룬 작품에서 최근 이라크전을 소재로 한 사회비판적인 작품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압권은 16점의 화폭으로 구성된 20여m 길이의 대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2002년).시골에서 상경한 선남선녀들이 경험한 사회적인 사건과 문화 충격,그리고 거대도시로 성장해가는 서울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서민사적’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른바 ‘모내기 사건’과 관련된 자료와 동료작가들의 찬조 작품 등으로 구성된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 관심을 끈다.신학철은 농촌풍경을 그린 ‘모내기’(1987년)라는 작품으로 1989년부터 10년에 걸쳐 이적성 여부를 둘러싼 법적 싸움을 벌여왔다.미술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를 부각시킨 이 사건은 1999년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났고 현재 유엔인권위원회에 계류중이다. 한편 전시장에서는 ‘모내기 사건’을 풍자한 안종관의 희곡 ‘남자는 위,여자는 아래-탁월한 안보적 상상력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을 다룬 희곡들을 콜라주 형식으로 재구성한 연극도 공연된다.시간은 21일 오후 5시30분,22·23일 오후 2시·6시.(02)760-4605. 김종면기자 jmkim@
  • 홀딱 벗은 여섯남자 의기소침 탈출 행각/변우민·임하룡 출연 뮤지컬 ‘풀 몬티’

    칼날같은 명퇴바람이 ‘사오정’‘오륙도’를 지나 ‘삼팔선’까지 무너뜨렸다는 요즘,한국 사회 중년남성들의 자화상은 그 어느때보다 초라하기만 하다.한창 일할 나이에 일터에서 밀려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이 시대의 남성들.이들에게 동병상련의 아픔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는 유쾌한 뮤지컬 한편이 온다. 새달 6일부터 내년 1월18일까지 서울 양재동 한전아츠풀에서 공연하는 라이선스 뮤지컬 ‘풀 몬티’(Full Monty,연출 한진섭)는 실직한 철강노동자 여섯 남자가 온몸(?)으로 자신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코믹하면서 따듯하게 담아낸 작품이다.세계적으로 히트한 동명의 영국 영화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각색했다. 속어로 ‘몽땅 벗는다.’는 뜻의 제목처럼 출연진들이 동시에 옷을 홀딱 벗어던지는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한 ‘풀 몬티’의 연습장을 찾아 누드 연기도 불사하는 용감한(?) 여섯 남자들을 만났다. “자,음악을 잘 들어봐.그리고 몸이 따라하게 놔두란 말이야.오른발부터 파이브,식스,세븐,에잇”.단 한번의 스트립쇼로 돈을 벌기로 의기투합한 여섯 남자가 남몰래 공장 창고에 모여 스텝 연습을 하는 장면.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던 도나 서머의 ‘핫 스터프(Hot stuff)’에 맞춰 춤을 추는 대목이다.멤버중 유일한 화이트칼라 노동자이자 경제학 박사인 해롤드(박일규)가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 춤 선생으로 나섰다. 하지만 아들 하나 딸린 이혼남 제리(변우민),실직후 아내에게 쥐어사는 데이브(이무현),자살을 시도했던 나약한 말콤(김장섭),철없는 청년 잇슨(박준혁)등 춤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자들의 몸동작은 영 어설프기만 하다.그나마 한때 댄서였던 퇴직 흑인 노동자 호스(임하룡)가 제법 스탭을 잘 따라해 해롤드의 칭찬을 받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틈을 타 배우들에게 몇가지 궁금증을 물었다.우선 출연진들의 면면이 여느 뮤지컬과는 사뭇 다르다.20∼30대 배우들이 주역을 휩쓸고 있는 대다수의 뮤지컬과 달리 ‘풀 몬티’의 배우들은 전부 30대에서 50대.호스역의 임하룡이 51세로 최고령자이다. 본업도 제각각이다.탤런트 변우민,개그맨 임하룡을비롯해 화려한 춤솜씨를 자랑하는 해롤드역의 박일규는 서울예대 교수로 재직중인 전문 안무가이다.과연 무엇이 이들을 ‘벗는 공연’에 서슴없이 나서게 했을까. 임하룡은 “벗는다는 의미가 단순히 몸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왜 나같은 사람을 뽑았겠느냐.”면서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남자들이 자아를 찾는 최후의 수단으로 모든 것을 내보이는 의미심장한 행위”라고 설명했다.그는 요즘 뱃살빼기와 흑인 역할을 위한 선탠을 하느라 고생중이다. 박일규 교수도 “벗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지 말고,이들이 왜 그런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메시지가 명확한 만큼 일단 벗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다는 게 배우들의 공통된 의견.하지만 노출 수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에 대해선 생각이 조금씩 다르다.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에선 배우들이 중요 부위를 가린 모자를 던질때 강렬한 조명을 객석에 쏘는 ‘트릭’으로 수위를 조절했다. 이번 공연에서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공식적으로 ‘노 코멘트’이다. 뮤지컬에 처음 도전하는 변우민의 각오는 남다르다.한때 음반도 냈고,모 방송국 안무단에서도 활동했던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제 2의 연기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이 작품을 위해 다른 활동을 모두 접고,연습장 오가는 시간도 아까워 일산 집에서 역삼동 연습장 부근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배우들에게 만약 극중 주인공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임하룡)“일본에선 생계를 위해 남자 스트리퍼가 흔하다는 얘길 들었다.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다.”(박일규).(02)2272-3001. 이순녀기자 coral@ ■영화 ‘풀 몬티'에 대해 피터 카타니오 감독의 1997년작으로 로버트 칼라일,마크 애디 등이 열연했다.영국 남부 요크셔지방의 철강소가 문을 닫은 뒤 이혼남 가즈(로버트 칼라일)가 아들의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스트립쇼를 제안하고,실직 등으로 생활이 어려운 다섯 남자가 이에 합류하는 과정을 그렸다.기발한 아이디어와 유머,가슴 찡한 감동이 교차하는 영화 ‘풀 몬티’는 1998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음악상 등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뮤지컬로는 2001년 10월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고,토니상 ‘베스트 뮤지컬’등 10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됐다.
  • 유쾌한 죽음/연극 ‘울할아버지‘ ‘웃어라 무덤아’

    삶의 소중한 가치들은 정작 살아있을 땐 손안의 물처럼 빠져나가기 쉽다.죽음이란 통과의례를 통해 생의 의미를 잔잔히 되짚게 하는 두 편의 연극이 문예진흥원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 무대에 나란히 오른다.자칫 엄숙주의에 빠지기 쉬운 소재를 유쾌하면서도,감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 20일부터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극단 성시어터라인의 ‘울할아버지 꽃상여’(김성제 작·연출)는 열살 소녀 ‘연’의 시선으로 바라본 죽음이다.엄마와 함께 시골 할아버지댁에 온 연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이웃 상가에 간다.난생 처음 보는 상가 풍경은 잔칫집처럼 떠들썩하고,연의 눈에만 보이는 저승사자들의 모습도 동네 친구처럼 우스꽝스럽고 천진난만하다.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태도가 여유롭고,애틋한 반면 살아있는 사람들끼리는 끊임없이 상처를 준다.엄마는 연이를 상가에 데려간 일로 할아버지와 다투고,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사라진 것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묻는다.마침내 저승사자들이 할아버지를 데려갈 시간이 다가오자 할아버지는아픈 할머니를 부탁하며 엄마에게 화해를 청한다. 삶과 죽음,사랑과 미움이라는 철학적 주제가 아이의 눈높이에서 따뜻하고 유쾌하게 그려진 점이 돋보인다.이제는 거의 사라진 전통 꽃상여와 상여소리를 공들여 재현한 무대도 볼 만하다.30일까지.(02)875-8225. 지난 14일 소극장에서 막올린 극단 청우의 ‘웃어라 무덤아(사진)’는 ‘인류 최초의 키스’로 환상적인 콤비를 보여준 고연옥 작가와 김광보 연출가가 2년만에 내놓은 야심작이다. 달동네 이웃주민들과 한가족처럼 지내던 할머니가 어느날 처참하게 살해된다.할머니가 생전에 허리춤 전대에 간직하고 보는 사람마다 ‘저승 노잣돈’이라며 꺼내보였던 100만원도 함께 사라졌다.할머니가 아들처럼 밥상을 차려줬던 전과자,친딸처럼 여기던 구멍가게 주인,손주처럼 챙기던 가출소녀 등 이웃주민들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한때는 가족같던 이들이 서로에게 의심의 칼날을 겨누는 과정은 무거움과 진지함 대신 웃음의 코드로 포장돼 전달된다.누가 범인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극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물질적 탐욕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현대인의 자화상에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할머니역의 문경희를 비롯해 강승민,오재균 등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압권이다.30일까지.(02)765-7890. 이순녀기자
  • [씨줄날줄] 캥거루족

    1997년 말 들이닥친 외환위기 이후 가장 익숙해진 단어는 ‘실업’인 것 같다.한때 한집 건너 한사람이 실업자일 정도로 우리 사회는 일순간 ‘완전 고용’에서 ‘대량 실업’으로 탈바꿈했다.일자리가 넘쳐나던 시절 ‘산업예비군’임을 자부하며 ‘산업일꾼’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치기는 어느덧 아득한 추억이 됐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영화 ‘라이터를 켜라’에서 300원짜리 라이터에 목숨을 거는 봉구는 영화 속의 주인공일 뿐,이 시대를 살아가는 백수의 자화상이 아니다.요즘 백수에게는 봉구처럼 맞부딪쳐 대적할 상대도 없다.끝없는 좌절뿐이다.그러니 봉구처럼 ‘대박’의 기회도 찾아오지 않는다. 청춘의 초침이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한 채 30대를 향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남의 애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캥거루족’이라는 별칭까지 나붙었다.바늘구멍보다 좁은 취업 문턱을 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휴학과 대학원 진학이라는 전략적 후퇴 또는 우회를 하고 있음에도 부모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쯤으로 취급한다.수능 입시생 자살은 동정을 받지만 취업 재수생의 죽음은 사회 낙오자의 당연한 퇴출 정도로 치부된다.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이 어떤 식의 잣대를 들이대든 자립해야 할 나이에 부모에게 손을 들이밀어야 하는 캥거루족의 운명은 슬플 수밖에 없다.지난 7월 한 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20대의 48%가 캥거루족이라고 했다.LG경제연구원 조사에서는 지난 2000년 말 현재 20∼34세 467만명이 캥거루족의 비속어인 ‘기생독신자’라고 했다.하긴 프랑스 청년실업자의 80%가 부모에게 빌붙어 살고,일본 젊은층 1000만명이 비슷한 부류라고 하니 기생독신자 문제는 우리만의 고민은 아닌 것 같다. 통계청이 최근 내놓은 고용동향에 따르면 10월의 청년실업률이 7.3%로 치솟았다고 한다.캥거루족들이 취업 문을 두드리면서 경제활동인구로 편입됨에 따라 실업률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현상이다.대학을 졸업하고도 제 밥벌이를 못해 한없이 위축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기를 살려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하루속히 국가와 기업,대학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득정 논설위원
  • 집회...진압...””난 빵점 아빠””

    노조에 대한 손배·가압류와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민주노총 산하 100여개 사업장의 근로자 9만여명이 6일 4시간 동안 시한부 총파업에 돌입하는 등 동투(冬鬪)가 시작됐다.같은 30대이지만,전혀 다른 삶을 사는 노동자와 시위진압 경관을 통해 이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한진重노동자 정진관씨 “노동자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아닙니까.” 민주노총 산하 금속연맹 한진중공업지회의 정진관(사진·37)씨는 6일 아침 서울 동대문구 민주노총 서울지부 사무실의 임시 숙소를 나와 서울역 광장 민주노총 농성장으로 향했다. 정씨는 지난달 17일 김주익 지회장이 부산 영도구 청학동 고공 크레인에서 자결한 뒤 조합원 200여명과 함께 크레인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여오다 서울 도심에서 열리는 노동계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40여명의 조합원과 함께 상경했다.그는 집회현장을 지키느라 어깨,팔,다리 등 관절이 쑤신다고 호소했다.감기까지 걸려 약을 달고 산다고 했다.100일을 넘어선 파업기간 동안 2주에 한번 집에들어가 잠든 아들의 얼굴만 바라보고 다시 찬이슬을 맞으며 농성장에 합류하곤 했다.상복 차림으로 마스크를 쓴 채 침묵시위 대열에 가세한 정씨는 휴일 서울 시청앞 등 도심 집회가 끝나면 다시 부산 천막 농성장에 합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정씨는 “지난해 흑자를 239억원이나 내고도 2년 연속 임금 동결을 고수하고 나이 많은 조합원을 강제사직시키는 처사를 두고 볼 수 없었다.”면서 “노조 간부들에게 몰아치는 손배·가압류 액수만 7억원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빡빡한 집회 일정에 어느새 집보다 천막이 더 익숙해졌다는 정씨는 총파업 집회가 열리는 대학로로 다시 잰걸음을 옮겼다. 구혜영기자 koohy@ ■서울청기동대 백성언 경감 “땀에 전 속옷을 며칠씩 그냥 입고 시위 내내 용변을 참아야 하는 일은 견딜 만합니다.그러나 가족에게 ‘빵점짜리 아빠’로 비쳐지는 것은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6일 오전 밤샘 근무를 마치자마자 노동계 시위가 예정된 대학로로 향하는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 1중대장 백성언(사진·33·경찰대11기) 경감이 던진말 한마디에는 밤낮없이 시위 진압에 매달리는 경찰관의 고충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백 경감은 지난 3월 전남경찰청에서 서울경찰청으로 발령받은 이후 남들이 다 쉬는 ‘빨간 날’조차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서울 도심의 대규모 집회가 대부분 주말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노동계 동투(冬鬪)를 앞두고 잇단 시위로 이번 주에만 밤샘 근무가 벌써 3일째다.얼마 전부터는 월요일 출근할 때 미리 3∼4일치 속옷을 챙겨서 나오고 있다.백 경감은 “유치원 다니는 큰아들이 밤늦게 전화로 ‘다른 아빠처럼 집에 들어오면 안되냐.’고 울먹일 때는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과격 시위 진압이 주 임무이지만 시위대의 분노와 요구를 몸으로 막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백 경감은 경찰이 일방적으로 시위대와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며칠전 시위진압 현장에서 생긴 왼쪽 발목의 시퍼런 멍자국을 어루만지던 백 경감은 “오늘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며 전투화 끈을 졸라맸다. 이영표기자tomcat@
  • 인간의 육신에 새겨진 현대인의 숨겨진 욕망/오늘부터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英현대미술전

    영국은 현대미술 강국이다.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라 불리는 영국 청년작가들의 활동은 지난 10여년간 영국은 물론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어 왔다.그 중심에는 단연 대미언 허스트(38)가 자리잡고 있다.1988년 대미언 허스트가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동료학생들과 함께 런던 선창가 창고에서 연 ‘프리즈(Freeze)’전은 영국 현대미술의 세대교체를 이루는 기폭제가 됐다.이 ‘프리즈 세대’의 젊은 영국 미술가들이 추구해온 작품세계는 국제무대에서 지금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영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온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기획전이 마련돼 관심을 모은다.28일부터 내년 1월31일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영국의 현대미술-새로운 예술사’전에는 대미언 허스트를 비롯해 샘 테일러-우드,마크 퀸,개빈 터크,게리 흄,길버트 앤 조지,존 아이작스,트레이시 에민,앤서니 곰리 등 10명의 작품 30여점이 선보인다.모두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미언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절단된 동물의 신체를 넣는 등 도발적인 작품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되는 ‘Jesus’는 플라스틱으로 인체의 뼈대를 만들고 전구와 전기장치들을 이용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작품이다.신성모독의 기미까지 풍기는 이 작품은 바니타스(Vani tas)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냈다.바니타스는 ‘공허함’ 혹은 ‘무상함’을 뜻하는 라틴어.죽은 자의 두개골이나 모래시계,켜져 있는 촛불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바니타스의 상징이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여성작가 샘 테일러-우드(36)는 비디오와 포토 파노라마 작업을 벌인다.‘혼잣말 Ⅷ’은 눈을 가린 남성의 이미지 아래 나체의 군상이 밀폐된 공간 속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촬영한 것.눈을 가린 것은 무의식의 세계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의미한다.‘브론토사우루스(Brontosaurus)’는 나체의 남자가 음악에 맞춰 느릿느릿 춤을 추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 작품.작가는 때로 자신의 나체 자화상까지 작품도입부에 등장시켜 현대인의 감춰진 내면,그 은근한 욕망의 응달을 보여준다. 마크 퀸(39)은 자신의 피를 직접 뽑아 작품을 만드는 엽기적인 성향의 작가다.이번에 나오는 ‘Self’ 또한 자신의 피를 직접 뽑아 모은 것을 굳혀 인간의 머리 형상으로 만든 작품이다.인간의 몸 안에 들어 있는 피의 양과 거의 같은 4ℓ 분량의 피를 재료로 삼았다.이것이 무엇을 위한 예술인가,아니 이것도 예술인가.작가는 “나의 작품은 육체와 영혼의 문제,육신에 새겨진 자아존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Self’는 원래 1991년에 처음 만들어졌다.이번은 세번째 작품.냉동장비에 의해서만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극도로 민감하다.지난 96년 제작된 두번째 ‘Self’는 영국의 거물 컬렉터 사치가 관리를 잘못해 녹아버리기도 했다.이같은 작품의 취약성은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신체의 변덕스러움을 암시한다.이번 작품은 실리콘을 씌워 냉동장치가 꺼지더라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 현대미술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는 지난 9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영국현대미술전이 열린 이래 처음이다.영국 젊은 미술가들의 이번 작품은 앞으로 현대미술이 더욱 실험적이고 격정적인 오브제와 비디오 중심으로 나아갈 것임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표로 보인다.(041)551-5100. 김종면기자 jmkim@
  • ‘천상병 詩賞’에 이길원씨

    이길원(사진) 시인이 제5회 천상병 시상 수상자로 24일 선정했다.수상작은 ‘하회탈 자화상’.진정한 자유인으로 활동하며 대표작 ‘귀천’을 남긴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이 상의 시상식은 새달 7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문학의 집·서울’에서 열린다.
  • 책꽂이

    ●사흘에 그린 자화상(승지행 지음,배꼽마당 펴냄) 여든셋의 나이에 왕성하게 작품을 내고 있는 작가의 장편.사흘동안 일어난 일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나는 누구인가’란 문제를 파고든다.전통 소설기법을 깨는 형식의 새로움도 신선.9800원. ●숨어사는 즐거움(강제윤 지음,녹두 펴냄) 88년 등단한 시인이 보길도 생활을 담아 펴낸 두번째 글모음.흑염소 이야기 등 생활과 일 속에 느낀 단상과 여행 경험을 60여편의 산문과 시로 묶었다.9000원. ●사랑하는 이여 바람 부는 밤에 나는 더 사랑한다(이동녘 지음,행복한책읽기 펴냄) 89년 등단한 시인의 네번째 시집.천막교회 목회자,노동자 등의 체험은 이웃들의 고난한 삶을 종교·노동·가난으로 버무려 생생하게 노래한다.6000원. ●인도로 간 또또(강석경 지음,열림원 펴냄) 작가가 인도 체험을 바탕으로 쓴 어른용 동화.말썽꾸러기 또또가 자기속의 다른 인물 나나를 발견,성장하는 과정을 다룸.9년 만에 재출간.박문선 화백이 그림을 보탬.8500원.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정일근 지음,문학사상사 펴냄) 84년 등단한 뒤 병마와 싸우면서 꾸준히 창작활동을 해온 시인의 7번째 시집.“시와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시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고백이 60편의 시에 녹아 있다.5000원. ●남사당의 노래(정창근 지음,모시는사람들 펴냄) 남북한과 유럽에서 작품을 발표한 이색 경력의 작가가 내놓은 신작.남사당패 주인공을 통해 조선 말기 백성들의 고통상을 그리며 새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1만원. ●코리안 메모리즈(최종림 지음,누보 펴냄) 시인 겸 극작가인 지은이의 장편 소설.8·15 해방을 연합군의 승리로 인한 수동적 광복이 아니라 임시정부와 대한광복군의 투쟁끝에 얻은 독립으로 조명.8000원. ●악의 꽃(샤를 보들레르 지음,윤영애 옮김,문학과지성사 펴냄) ‘현대시의 시조’라 불리는 시인의 대표시집.기존 번역서의 미흡한 점을 보충 수정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곁들였다.1만 5000원. ●입술 없는 꽃(메블라나 잘라루딘 루미 지음,이성열 옮김,문학수첩 펴냄) 페르시아 신비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작품집.13세기 신비적관념과 사상을 망라한 작품 100여편을 골랐다.우정과 사랑이 중심 주제.5500원. ●이제야 너희를 만났다(신달자 지음,문학수첩 펴냄) 70년 등단한 중견시인이 30여년 동안 발표한 10권의 시집에서 고른 시선집.일상에 가려 그리지 못한 삶의 얼굴을 가시화하는 시세계를 만날 수 있다.6500원.
  • 시·그림 어우러진 ‘응축된 수필’/三佛 김원용 10주기 문인화展 25일부터 서울 가나아트센터

    삼불(三佛) 김원용(1922∼1993)은 흙에서 나 평생을 흙 속에 담긴 역사를 연구하다 흙으로 돌아간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태두다.그는 자신의 유해를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에 뿌리도록 해 마지막까지 고고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올해는 삼불의 10주기.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삼불 김원용 문인화’전이 25일부터 11월16일까지 열린다.문인화는 전문 직업화가가 아닌 시인이나 학자 등 사대부 문인들이 여기로 그린 그림을 총칭하는 말.그림의 기법이나 세부적인 묘사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내면이나 화가의 의중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이번 전시에는 인물·산수인물·산수·동물·화조·어해(魚蟹)·화훼·묵죽·묵란 등 다양한 주제의 문인화 60여점이 선보인다. 삼불은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화폭에 담았다.무엇을 그리든 그 속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다.그것은 그림의 여백에 남긴 문구를 통해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자유로운 필치로 씌어진 글들은 그림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밝혀준다.시와 그림이 어우러져 서화동체(書畵同體)를 이루는 삼불의 그림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응축된 수필’이요, ‘형상화된 수필’이다. 전시작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전해준다.조그만 서안(書案)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옆모습을 그린 ‘초탈속진(超脫俗塵)’은 자화상의 성격이 강하다.여백에 쓰인 글에는 세상의 티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이 잘 드러나 있다.‘먼 객지에서’란 제목의 작품에는 네 그루의 소나무 옆에 자리잡은 작은 초가집에 선비 한 사람이 그려져 있다.자신의 모습을 그린 듯하다.여백에는 “서가에 쌓인 천권의 고서,집밖에 소나무를 스치는 맑은 소리,책상 위에 놓인 향로,한 항아리의 술이면 그밖에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 올곧은 선비의 학구적인 생활과 청정하고 검박한 삶을 엿보게 한다. 문인화가로서 삼불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난초를 즐겨 다뤘다.‘대나무 안되는 것은’이라는 작품에는 “대나무 안되는 것은 나 사람 못되어서인가”라고 씌어져 있다.그림의 격조를 그것을 그린 사람의 인품과 연관짓는 문인화가의 자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게를 그린 ‘해빈일해(海浜一蟹)’는 손녀의 돌을 맞은 감회를 담아낸 그림.“인생은 바닷가의 한마리 게와 같구나.망망대해를 대하면 오직 두려운 생각뿐이네.”라는 글귀에는 다가올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우려하는 혈육의 정이 담겼다. 개구리는 삼불의 그림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삼불은 왠지 개구리를 자주 그렸다.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유수즉영(有水則泳)’이란 작품에 씌어진 글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물이 있으면 헤엄치고 흙이 있으면 걸으니 그 행세함이 발을 씻는 선비와도 같다.”는 내용.삼불은 개구리에게서 선비의 도를 본 게 아닐까. 삼불은 생전에 ‘나의 인생,나의 학문’등 세 권의 수필집을 냈고 두 차례 문인화 개인전을 열 정도로 다재다능한 선비였다.전통적인 지필묵연(紙筆墨硯)의 문방사우를 쓰는 삼불의 그림에서는 누구든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져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발하는 진정한 문인화의 멋을 느낄 수 있다.(02)720-1020. 김종면기자 jmkim@
  • 어! 살인현장 봤는데 기억 안나네/24일 개봉 알 파치노의 ‘목격자’

    알 파치노가 관록의 연기를 보여준다.24일 개봉하는 ‘목격자’(People I know)는 미국의 전설적 홍보 로비스트가 뉴욕 한복판에서 이틀(실제는 24시간)동안 겪는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텔레비전 시리즈 ‘섹스&시티’ 연출가로 명성이 자자한 대니얼 앨그란트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주연인 알 파치노를 비롯,킴 베이싱어,라이언 오닐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진작부터 화제를 모았다. 마천루로 둘러싸인 세계 최고의 도시에서 정·재계와 연예계,종교계 유력인사의 홍보 로비스트 세계를 다뤄 소재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다.앨그란트 감독은 이 화려한 공간에 살인,마약,섹스 등의 도시적 코드를 덧칠했다.당연히 영화의 분위기는 현대성을 맘껏 뽐낸다. 영화의 축은 둘이다.유명 로비스트 일라이(알 파치노)가 우연히 목격한 살인사건과 그의 화려한 로비스트 생활 뒤의 숨겨진 고독함이다. 일라이는 주요 고객인 캐리(라이언 오닐)로부터 정부(情婦)인 톱 모델 질리(테아 레오니)를 감옥에서 보석으로 빼내 LA로 보내달라는 은밀한부탁을 받는다.질리를 빼내고 그녀의 짐을 챙기느라 호텔까지 동행한 일라이는 그녀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나온 질리를 따라간 마약 파티장에서 마리화나를 흡입한데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신경안정제 등을 한꺼번에 복용해 그녀가 살해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영화도 누가 질리를 죽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대신 그녀의 정사 장면을 담은 ‘게임기’에 관련된 인사들을 등장시키면서 위선과 추악함을 간접적으로 들춰낸다. 데뷔작이라서 너무 신중한 탓이었는지,아니면 24시간 안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해서인지 앨그란트 감독은 극적인 연출을 보여주지 못한다.시간별로 주요 화면을 분할한 시도도 긴박감을 주지 못한다.그래서 스릴러로 내세웠지만 장르 성격이 다소 모호하다. 다만 우수어린 표정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알 파치노만이 외롭게 영화를 떠받친다.화려함에 가린 고독한 인간의 내면을 미세하게 재현하면서 한동안 시큰둥한 반응을 얻은 그의 명연기가 되살아난 느낌을 준다.특히 건망증과 잇단 질병,신경과민에시달리느라 숱한 약에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그의 일상은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자신의 모습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일라이의 죽은 동생의 부인이자 그에게 시골에서 같이 살자고 권하는 그레이 역의 킴 베이싱어와 라이언 오닐은 역을 잘 소화했지만 알 파치노의 빛에 가린다. 이종수기자 vielee@
  • 고령화사회 한국의 자화상

    아침 7시,70세 강할머니는 어김없이 택시를 몰고 거리로 나선다.남들이 부러워하는 건강에,일하는 보람까지 하루하루가 즐겁다.오후 3시,공할아버지(76)는 오늘도 종묘 공원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골판지 종이상자를 뜯어내,필묵으로 논어 맹자를 써내려간다.구경꾼들도 반백의 노인들이다. 저녁 7시,김할아버지(67)부부의 판잣집에도 하루해가 저문다.등에 생긴 커다란 혹때문에 평생 똑바로 누워서 자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와 앞을 못 보는 할머니는 중학생 손자까지 돌보는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인구의 7.1%인 337만명을 넘어 고령화사회에 접어들었다.2019년에는 14.3%인 753만명으로 늘어나 본격적인 고령화사회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EBS는 2일 ‘노인의 날’을 맞아 특집다큐멘터리 ‘인생칠십고래 빈(人生七十古來 頻)’(오후 10시50분)을 방송한다.70세까지 살기 드물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수명이 늘어나는 요즘,이에 걸맞은 선진복지 시스템을 알아본다. 먼저 생산적인 노후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취업에 도전하는 노인들을 만난다.현재 65세 이상의 취업희망자는 40만명이 넘지만 실제 일자리를 얻는 예는 드물다.노인 취업의 성공 모델로 꼽히는 사업체를 찾아 구제나 자선의 차원이 아닌 인력 확보로서의 노인 고용을 취재한다. 이어 장수국가 일본을 찾아간다.연구소와 병원,그리고 양로원의 삼위일체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도쿄 노인종합연구소를 살펴본다. 노인 인구가 늘어날수록 시설수용보다는 재가복지에 중점을 둬야 한다.하지만 자녀가 있음에도 따로 사는 노인의 비율은 현재의 31%에서 10년후에는 7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재가 노인복지 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스페인의 사례를 통해 우리의 앞날을 모색해 본다. 이순녀기자 coral@
  • [21세기 한국을 읽는다]방민호 교수가 만난 문학지성 (10)박경리-물질문명 시대, 생명의 가치 회복

    진영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없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었다.“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무참히 죽어버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영의 깎은 듯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잡나무 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내리고 있었다.“그렇지,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잡나무를 휘여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소설 ‘불신시대’중에서 혹시라도 선생을 그냥 찾아뵙는 것이 결례가 될 것 같아 근방에서 슈퍼마켓을 찾는데 퍽이나 외진 곳이라 그런지 갖추어 놓은 게 없다.선생은 당뇨가 있다고 했던가.단 것을 드시지 못한다니 무과당 음료수 박스를 사들고 결전의 준비라도 마친 양 용감하게 토지 문화관으로 들어섰다. 선생의 집 문턱이 높은 것은 어제 오늘 소문이 아닌데 미리 약속을 얻은 탓인지 선생은 무척 친절하게 일행을 받아주신다.감읍할 지경이다. ●생태계 문제가 오늘의 중심화두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소설을 쓰시다 무리하신 것은 아닌지요.” “내가 ‘현대문학’ 잡지를 참 곤란하게 하고 있어요.‘나비야,청산 가자’ 연재를 시작해서 석 달,3회까지 연재했거든요.한 회 한 회 원고 분량이 많아서 3회까지 하니까 무척 힘들었어요.재작년에 넘어져서 다친 허리가,연재 시작하면서 더 안 좋았어요.절실하게 써보려 했는데.이걸 쓰면서 혈압이 200까지 올라갔어요.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결국 쉬고 있어요.독자들에게 제일 죄송해요.” “…….” 나는 선생의 무릎 위에 앉은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선생의 다음 말씀을 기다린다. “몸이 그러니까 의욕이 없어지고,그러면서 내 존재가 뭔가,굉장히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새삼스럽게 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들고.” 선생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연히 새로운 문학지 ‘숨소리’를 편집하고 계신 연세대학교의 최유찬 교수를 만나뵙게 되었다.두 분에게 번갈아 시선을 옮기는 나로 인해 설명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셨는지선생은 ‘숨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문학이라는 것도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생태계 없는 문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최유찬 선생에게 부탁 드려서 ‘숨소리’라는 책을 내는 까닭도 그런 데 있어요.지금 이 토지 문화관도 다른 분들은 다 문학관으로 오해하고 있어요.내가 문학을 하니까 문학관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나는 처음부터 그건 반대고 문화관으로 하자고 했어요. 생태계,환경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생태계 문제가 오늘의 중심이 되어야 해요.거기에서 문학도 있고 모든 게 있을 수 있는 거죠.작년 초엔가,‘자연과 시인’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했을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시인 선생들이 환경 문제에 대해서 선도가를 불러 달라,그런 의식을 가져 주셨으면 한다고 내가 당부를 드렸어요.예술가들이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요? 무슨 정치적인 문제 같은 것은 사람들 임의에 따라서 참여도 하고 안 할 수도 있지만 환경문제라는 건 예외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모든 사람들과 관련이 되니까.하다못해벌레 한 마리나 풀 한 포기도 다 관련이 있잖아요.지구의 생명을 받은 것은 다 의무가 있는 거지요.” “예전에 손수 농사를 지으시는 걸 보았습니다.여기로 옮기고 나서도 계속하고 계신지요.” “물론이에요.여기는 농사가 더 많아요.밑에 밭뙈기가 상당히 있고 산 안에도 밭이 있어요.여기로 와서는 농사가 더 절실한 게,작가들 와서 묵는 창작실에 부식을 대야 하니까요.전부 다 댈 수는 없지만 대체로 야채는 내가 농사지어 대고 있어요.금년에는 부토를 했는데 흙이 잘 안 맞아서 농사가 좀 시원찮게 됐어요.여기 와서도 농약과 화학 비료는 절대 안 쓰고 작으면 작은 대로 땅 힘을 기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기왕이면 작가들도 공기 좋고 풍경 좋은 데서 먹거리도 무공해로 먹는 게 좋지 않겠어요. 감자와 옥수수를 많이 하는데 올해는 옥수수와 배추를 실패하고.그래서 토마토,고추,상추 이런 것 좀 더 대고 했어요.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줄 수 있을 것 같아요.또 자연적으로 나는 것들이 있거든요.두릅이라든지.산에 도라지도 많이 심어놨어요.더덕,취나물,이름도 모르는 다른 나물들도 많아요.봄에는 냉이나 두릅 등 계속 농사지은 걸 먹죠.” 선생의 말씀에는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리듬과 흥취가 있었다. 이 글을 쓰려니 며칠 전 멕시코의 칸쿤에서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심장에 칼을 꽂고 자결하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우리들은 모두 땅의 자식들인데 내가 무관심하던 사이에 농민들의 삶은 나날이 수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인터뷰를 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선생의 말씀과 정신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배고플 때 다이아몬드나 화폐를 먹을 순 없어 “선생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는 것은 자연과 접촉을 유지하기 위한 작가적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한데요.” “그게 우리 삶의 본질 아니겠어요? 땅에서 가꿔서 우리가 존재한다는.농부를 찬양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생산성이 아니고 전부 소비성이거든요.땅을 가꾼다는 것은 규모가 손바닥만 하더라도 거기에는 생산이 있어요.그건 뭐냐면,생산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땅의 본질적인 속성 때문이에요.지난번에 내가 여기 중·고등학교 캠프에 갔었어요.사실은 내가 어디 나가서 얘기를 잘 못해요.어지러워서.그래도 애들이니까 한마디 필요하겠다 싶어서 나가서 이야기를 했어요.첫마디는 예절에 대한 것이었어요.예절이라는 것은 휴머니즘이다,상대방을 배려하는 거다,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정제된 데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다.그리고 또 하나가 이것이에요.옛날 농부들이 말하기로 내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하고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좋다고 했는데,그것은 땅도 내 자식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땅을 사랑하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기본이고 본질적인 거예요.지금 지구 온난화 현상도 있고 지구가 사막화되는 현상도 나타나는데,앞으로 곡식이 참 귀하게 되면 배고플 때 다이아몬드나 화폐를 먹고 배를 불리겠어요? 한줌의 쌀이 있어야만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거죠.그런데도 없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옛날 말로 사람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한다고,많은 분들이 그저 설마 설마하면서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겠지,내 당대에는 괜찮을 거야,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계신데,하지만 우리 자손들이 있잖아요. 프랑스에서는 이례적인 폭염으로 사람들이 죽고 스위스에서는 만년설이 몇년도에 가면 다 녹는다고 그래요.이거 다 녹으면 노아의 홍수 일어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 남의 일 같이 생각들 하신단 말이에요.들으면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단 말이에요.일반 대중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도자들부터 인식을 해야 되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끌고 나가야 할 지도자들이 일반 대중들보다 더 못해요.대중들은 절실히 인식하는데 지도자들은 표밭만 생각하니까.사람이 먹고 사는,곡식 나는 밭 생각은 안 하고 표밭만 생각하거든요.그렇게 생존하고 관계 없는 일이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해야 할 일은 뒷전에 밀리고 어떤 때는 그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닌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거든요.” 나는 연방 머리를 끄덕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시장을 가봅시다.둘러보면 직접 생존하는 데 필요한 물건보다도 없어도 되는 게 더 많아요.없어도 되는 게 더 많다는 것은 말도 못할 낭비예요.낭비하면 쓰레기가 나와요.낭비와 쓰레기 이중적인 문제지요.쓰레기는 뭡니까.숨통을 막는 거예요.새만금이나 시화호,이런 문제는 그렇게 야만적일 수 없는 일이에요.나 혼자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해요.몇 사람의 이득,화폐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학살하는 겁니까.그렇게 많은 생명을 학살하고 그것을 영구히 없애버리면 다시 재생을 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대한민국이 얼마나 야만국인가를 입증하는 것이죠.지금 있는 농지도 농사 안 짓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서 새만금,그걸 죽여서 농지를 만든다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내가 살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또 사람만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에요.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이 다 살아야 해요.”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세상 일을 소상히 알고 계신데요.어떻게 이렇게 먼 곳 원주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듣고 보시는지요?” “서울이 시골보다 더 좁아요.직장이라든지 아파트라든지 하는 공간은 넓어도 좁아요.나는 공간이 없으니까 산 보고 하늘 보고,그러니 알죠.” “옛날에는 물질이 없어서 고통을 겪었다면 요즘에는 오히려 물질이 더 많아져서 고통인 것 같습니다.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생명이란 가두지 않고 풀어주는 것 “그렇죠.모든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의 순환이거든요.순환이라는 것은,먹이사슬도 하나의 순환이지만 우리 한 개인으로 보아도 일을 하고 또 그렇게 해서 먹고 하면 이게 순환이거든요.그럼 일은 뭐냐? 이렇게 물을 수 있는데,증권 주식 한다고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 보고 있는 것,그것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죽어 있는 일이지 살아있는 일이 아니에요.살아 있는 생명을 다스리는 일,그것이 일이에요.예술가도 생명이 주예요,사실은.문장 하나,상황 하나,인물 성격 하나,이게 살아 있어야 하거든요.정치라는 것도 살아있는 게 보장되는 방향으로 나가야지 죽음의 방향으로 가면 안 되죠.이 시대엔 전쟁과 핵무기가 있어요.이건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에요. 대한민국만 보더라도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게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어요.모두 다 잘 살려고 한다는데 과연 그게 잘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농약 주고 화학비료 주고 해서 질적으로 망가진 음식을 먹는 게 잘 사는 건지……모든 걸 가둬 놓는 것…… 생명이라는 건 가두는 게 아니라 풀어주는 거예요.이런 제도 속에서 사람들이 생존한다는 게 정상일 수가 없죠. 농촌에도 얼마나 이상한 병들이 많은지 몰라요.농약 때문에 그러는지.지금 이런 상황의 먹거리가 절대 좋은 게 아니거든요.그런데도 잘 산다는 게 이게 전부 양(量)으로 말하는 거죠.사람이 원래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거든요.행복의 축이라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에요.그런데 지금 질은 점점 나빠지고 마치 옛날의 그 질을 옆으로 펴다 보니까 얇아져서 그게 양이 된 거예요.어떤 면에서 보면 더 생겨나는 건 없어요.있는 것에서 얇아지면양이 늘어나는 거고 양이 좁아지면 질이 좋아지는 걸 보여주는 거고.” 나는 사투리 억양이 강한 선생의 말씀을 교정하는 지금의 내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선생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은 앞으로 나갔다 뒤로 가고 중복되거나 건너 뛰면서도 살아 있는 생생한 감동이 있었다. “선생님 옛날의 초기 작품을 읽어보았습니다.창작집 ‘불신시대’,장편소설 ‘시장과 전장’…… 그런 작품들을 읽다 보면 선생님 작품의 여주인공이 아주 결백한 성격을 갖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그것은 마치 선생님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기는 싫어요.결백하다기보다는 자유롭고 싶은 거죠.얽매이기 싫고.” 이하의 내 물음과 선생의 말씀은 생략이다.안타깝게도.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그렇게 많이 서운해하지 않으셔도 된다.내가 여쭈어 본 것은 더 내밀한 선생의 과거며 인생살이 같은 것이었으니까.선생의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니니까.그러나 나는 선생의 사상만큼이나 선생의 인생을사랑하는 것 같다.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다 듣고 기록하고 싶은 것은 나의 감상벽인지? 탐구벽인지? 문학평론가·국민대교수 방교수가 본 작각 박경림 ●가혹한 운명 딛고 선 문학사 거봉 박경리는 1920년대가 낳은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작가이자 광복 후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높게 빛나는 설봉(雪峰)이다. 1927년 통영에서 출생,진주고녀를 졸업하고 잠시 후 결혼,황해도 연안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며 1950년에 ‘계산’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박경리를 오늘의 박경리로 만든 하나는 선생의 작중 인물만큼이나 결벽하고 의지적인 선생의 성품이며 다른 하나는 가혹한 운명이다.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남편을 잃고 이후 아들을 잃고 다시 생명의 위기를 넘기면서 여성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문학의 길을 걸어왔다.가혹한 고통은 선생 문학의 산실이다. 창작집 ‘불신시대’(1963)와 장편소설 ‘표류도’(1959),‘김약국의 딸들’(1962)‘시장과 전장’(1964),‘성녀와 마녀’(1967),‘파시’(1967) 등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초기 소설은피폐하고 불순한 현실을 배경으로 결벽성 있고 의지가 강한 여성 주인공의 삶을 그려나가면서 운명과 맞서는 삶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1969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95년에 이르기까지 5부작으로 완성을 본 대하소설 ‘토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선생의 대표작이자 한국소설의 한계를 시험하는 의지의 극점이다.세대를 누적하면서 생을 이어가고 새로운 생을 모색하는 ‘토지’의 인물들은 삶의 만화경이자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다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한다. 생명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같은 질문에 대해 인간은 속수무책의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피안의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박경리의 근본적인 사상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근원인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구경적 세계관이다.그것은 종교가 아니되 감히 종교와 ‘맞먹는’ 힘을 갖는다. ●시집에 담긴 또렷한 이미지 박경리 선생 댁은 몇 년 전에 찾아 뵈었을 때는 허허벌판 가운데 있었는데 이번에는 토지문화관 바로 옆에 있어 한결 찾기가 쉬웠다.그때 허허벌판 가운데 약간 둔덕진 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아갔을 때 나는 그것이 평생 외로운 삶을 살아온 선생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었다. 보통 사람들은 선생을 소설가로 생각하고 또 인정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시인으로서의 선생의 이미지가 또렷하다.나는 선생의 시의 애독자여서 몇 권 안 되는 선생의 시집을 새책방,헌책방에서 다 사보았고,그 간결한 어휘,담담한 어조,비약의 미(美),삶의 태도를 절절한 심정으로 내 것으로 만들었다.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박경리가 아니라 인간 박경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생의 시집을 읽어야 하리라. 몇 년 만에 뵙는 선생은 무척 힘들어 하셨지만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다.예전보다 따뜻해 보이는 실내가 나로 하여금 안도감을 갖게 한다.나는 선생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의지적이고 결벽성이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타는 한 여인을 사랑하는가 보다.
  • 황토색에 담은 아름다운 산하/故이종무화백 회고전 30일부터 서울갤러리

    글도 그렇듯이 그림도 인격을 반영한다.이른바 화격(畵格)이다.당림(棠林) 고(故)이종무 화백의 그림에는 인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당림의 삶은 꼿꼿한 선비의 풍모 그대로다.대학교수 자리를 미련없이 떠났다든가 종신직인 예술원 회원에서 스스로 물러난 일 등은 그 강직한 성품의 한 단면이다.그런 올곧은 삶의 태도는 그림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당림의 그림에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없다.물상 하나하나의 형태는 물론,물상과 물상의 경계도 철책을 두른 듯 뚜렷하다.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화한 화풍 탓인지 그의 그림은 힘이 있고 정갈하다. 70년의 세월에 걸쳐 일궈놓은 당림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이종무 화백 회고전’이 30일부터 10월12일까지 서울 태평로 서울갤러리 1,2전시실에서 열린다. 미수전을 눈 앞에 두고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 대표작 88점을 골랐다.전시작은 ‘전쟁이 지나간 도시’(1950년)부터 ‘향원정’‘자화상’‘백두산 천지’‘여수돌섬’,근작 ‘충무항’(2000년)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망라했다.특히 ‘전쟁이 지나간 도시’는 1950년대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거친 붓놀림이 오히려 전쟁의 처참함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당림은 기본적으로 구상작가이지만 1960년 무렵부터 거의 10년 동안 추상작업에 몰두한 세월이 있다.그것은 물론 1950년대 말부터 국내 작가들 사이에 유행한 앵포르멜(비정형회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늪지대’(1960년),‘풍경’(1965년) 같은 반추상화들이 당시에 그린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러나 당림은 자신의 추상세계가 무르익어갈 즈음 돌연 구상화로 복귀한다.그리고 마침내 시시콜콜한 표현을 절제하고 전체적인 이미지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얻었다. 당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황토색의 작가’라는 점이다.1970년대 말 이래 당림은 황토색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그에게 황토색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한국의 향토미를 상징하는 색이 다름아닌 황토색임을 감안하면,그가 일찍이 국내 서양화 1세대인 춘곡 고희동을사사한 서양화가이지만 얼마나 한국적 서정에 투철한 작가인가를 알 수 있다.이번 전시에서는 작가 특유의 황갈색으로 되살아나는 아름다운 산하를 만나게 된다.(02)2000-9736. 김종면기자 jmkim@
  • [씨줄날줄] 文人과 26만9천원

    한 문학평론가가 창작활동의 경제적 대가를 돈으로 환산해 보았다고 한다.지난 한해 동안 팔린 시집이나 소설,수필집이나 평론집의 권 수와 단가를 곱해 말하자면 ‘창작활동 총생산’을 산출했다.그리고 총생산에서 창작 활동의 직접적 대가인 인세(印稅)를 계산해 국내 3대 문인 단체 회원 수로 나눠 보았다고 한다.문인들의 한달 평균 인세 수입은 26만 9000원이었다.줄 담배 피워가며 써 내려간 한줄 한줄의 경제적 보상인 셈이다. 문인들이 26만 9000원의 인세를 받고 있을 때 대한건설업협회는 건설임금동향을 발표했다.미장이 등 건설 현장 근로자 일당은 평균 8만 8600원이었다고 한다.한달 인세를 일당으로 치면 8900원 남짓이니 10배쯤 된다.인세를 문인들 개인 차를 무시한 채 평균적으로 계산하는 게 무리다.또 인세와 건설 현장 일당을 한 저울에 올려 놓는 것은 말도 안 된다.그럼에도 ‘창작’과 ‘건설’을 같은 저울에 달아 보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요즘 고약한 태풍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피해액이 1조 3000억원을 넘어 2조원에 육박한다고 한다.소설 한편보다 거의 10배나 비싼 값을 들여 만들어 놓은 건설이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외경심마저 풍겼던 거대한 컨테이너 크레인의 붕괴 현장을 보면서 창작으로 일궈낸 ‘세상의 혼’(魂)은 어떤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한 순간의 광풍에 사라질 것들에 100원씩을 쓰면서 재난에 대적할 ‘혼’엔 10원을 쓰는 자화상이 안쓰럽다. 확실히 세상엔 혼이 없어 보인다.혼이 깃든 건설이라면 바람 앞에 백지장처럼 갈기갈기 찢기지 않았을 것이다.초속 50m 강풍에 견디도록 만들어진 컨테이너 크레인이 순간적인 52m의 바람에 폭삭해야 하겠는가.나라 살림을 도맡은 고관이 태풍으로 전국이 요동치는 동안 부부동반으로 제주도를 찾아 휴가를 즐겨야 하겠는가.한쪽에선 자연 재해라고 목청을 높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던 인재(人災)라고 입을 모은다.지금 우리는 쇠약한 혼을 보양(補陽)해야 한다.제발 이번만은 건설 복구만 하지 말고 혼도 함께 복구했으면 좋겠다. 정인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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