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자취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연애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공예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안경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화장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756
  • 세종로 100년 터줏대감 은행나무 어디로

    서울 세종로의 상징으로 100년간 군림해온 은행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최근 광화문 광장 조성과 함께 자취를 감춘 중앙분리대 은행나무들의 행방에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수령 56~100년인 은행나무 29그루는 세종로 16개 차로를 10개로 줄여 확보한 자리에 광장을 만들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7일 서울시에 따르면 100살짜리 최고령 은행나무를 포함한 15그루는 문화관광부 인근 시민열린마당 앞 보도에, 나머지 14그루는 정부중앙청사 앞에 옮겨 심었다. 광장 조성 공사에 맞춰 2007년 4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21개월 간 조심스럽게 작업이 이뤄졌다. 가까운 곳에 보금자리를 튼 것은 세종로와 인접한 곳이 좋다는 전문가들의 판단 때문이다. 높이 12~13m, 둘레 0.5~1m의 울창한 은행나무들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1910년부터 심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일제가 조선시대 육조거리 중심축을 훼손하기 위해 심었다.”고 풀이한다. 이들 은행나무들은 1971년 서울시가 세종로 너비를 100m가량 넓히면서 길옆에서 중앙분리대로 옮겨심어졌다. 역사의 풍파를 이겨낸 나무인 만큼 옮겨심는 과정도 조심스러웠다. 수령이 100년 가까운 노거수(巨樹)의 경우 자리를 바꿔 식재한 뒤 30%가량 말라죽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임상빈 서울시 도시기반시설본부 주임은 “자문위원 11명이 참여한 전문가회의를 통해 의견을 청취했다.”며 “7억여원의 예산과 250여명 인력이 투입됐다.”고 밝혔다. 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기 위해선 10t 크레인 2대와 덤프트럭 1대가 필요했다. 나무 한 그루를 크레인을 이용해 들어 트럭으로 옮긴 뒤 이식장소의 두 번째 크레인에 넘겨주는 식이다. 1주일에 옮긴 나무의 평균 무게만 25t에 달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삼천궁녀·논개·진채선… 역사속 여인들 다시보기

    #1. “만약에 말이야, 정말로 여기서 3000명이 뛰어내렸다면, 이 절벽은 낙화암이라기보다는 피바위 같은 명칭으로 불렸을 거 같지 않아? 아비규환 속에 누군가는 의지와 상관없이 등이 떠밀려 떨어졌을 것이고, 누군가는 등이 부러졌을 것이고 누군가는 눈알이 튀어나오기도 했겠지. 그런데 왜 이 바위는 꽃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화의 이미지가 됐을까?” “그러게. 실제로 3000명의 여자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여기서 한 번 뛰어내려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낙화암이라는 말에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재밌겠지.” 충남 부여의 부소산성을 오르며 생각했던 그 이벤트는 물론 성사되지 못했다. #2. “왜 그 언니 귀신은 애먼 사람을 잡았을까. 자기를 죽인 사람 앞에 나타나면 될 걸 신임관리들 앞에 나타나 원한을 풀어달라 하니까 심장 약한 아저씨들 여럿 죽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이 영남루는 예사롭지 않은데. 빛바랜 단청, 좁고 어둑시근한 계단, 섬세한 난간…. 추리소설이나 귀신이야기 하나쯤 나오기에 충분한 공간이야. 오! 여기서 귀신카니발을 열면 어떨까. 아랑이 죽었다는 4월 보름에 우리나라의 귀신, 서양 마녀들, 베트남 귀신, 루마니아 귀신(드라큘라다.)이 이곳 밀양강변으로 모이는 거야. 생각만 해도 멋지잖아.” 시크릿 선샤인, 경남 밀양. 그곳에서 이런 카니발이 열린다면 가고 싶다는 사람 여럿 있다. #3. “논개는 왜 그렇게 죽었을까? 나 같으면 혼란의 와중에 기적(妓籍)을 불태우고 함경도나 평안도 어디쯤으로 가서 ‘전쟁통에 남편도 자식도 잃은 과부요.’하고 살았을 거 같은데. 조국이 논개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적장을 끌어안고 뛰어내렸을까?” 5월, 논개제가 열리는 촉석루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친구가 말했다. 남강 위에 부표로 관객석을 만들고 진주성을 배경으로 하는 논개투신재현극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논개가 왜 그렇게 죽었을까에 대한 이해를 하기에는 아쉽고 부족했다. 이런 농담 속에서 찾아낸 숨은 거짓말과 잘 해석되지 않는 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춰봤다.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호미 펴냄)은 그렇게 나왔다. 삼천궁녀와 소서노 등 백제에서 시작해 최초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 근대작가 박화성, ‘목포의 눈물’ 이난영, 정신대 할머니, 한국문학의 거목 박경리….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하나도 모르는, 오랫동안 의심없이 이어졌지만 섬세하게 따져보면 몹시 기이하고 우스운 얘기들이 치밀하게 직조되어 위험하게 자리잡는 과정들도 이야기했다. 책을 쓰면서 행복했던 건 책에 나오는 공간들이 더없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통영, 하동, 고창, 남원, 목포, 부여, 진주, 밀양…. 시간의 지층이 쌓여 만들어진 섬세하고 우아한 오래된 도시들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우선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지만, 아이들 손을 잡은 아빠 엄마가, 또는 친구들과 여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이곳에서 그 여자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는 것도 여름을 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김현아 로드스꼴라 대표교사
  • 은행·보험 ‘안갯속’ 증권사 ‘맑음’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가장 빠르게 반영한 금융권이 정작 채용에서는 침체를 이어갈 것으로 우려된다. 오는 9월부터 본격적인 하반기 채용시장이 열리지만 상당수 은행과 보험사 등은 채용 시기나 규모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증권사들이 숨통을 틔워줄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신한銀 아직 계획 못세워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을 각각 200명 이상 뽑았던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아직 하반기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수출입은행과 씨티은행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나마 우리은행이 지난해 145명에서 올해 200명 수준으로, 외환은행은 70명에서 100여명으로 늘릴 계획이어서 은행권 채용에 ‘단비’가 될 전망이다. 기업은행도 지난해보다 소폭 줄어든 200명 안팎을 채용할 계획이다. 작년 190명을 뽑은 산업은행은 다음달 중 채용 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다. 보험업계와 신용카드업계도 불투명하다. 지난해 하반기 100명 이상 뽑았던 삼성·대한·교보생명은 아직 선발 일정을 확정하지 못했다. 지난해 하반기에 160명을 충원한 삼성화재 정도만 예년 수준을 채용한다는 계획이다. 카드사의 경우 삼성카드와 신한카드는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현대카드(70명)와 롯데카드(30명), 비씨카드(20명) 등은 지난해 하반기 수준으로 채용한다는 방침이다. 증권업계 ‘빅3’인 삼성증권은 오는 9월 100여명을, 대우증권은 10월쯤 50~60명을 각각 뽑을 예정이다. 우리투자증권은 인턴 중에서 정규직을 선발하는 관례대로 현재 50명의 인턴을 채용했다. ●증권사들은 일제히 채용 계획 지난해 하반기 주가 폭락으로 채용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던 증권사들이 이번에는 신입사원을 뽑을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와 올 상반기에 신입사원을 뽑지 않은 현대증권은 11월쯤 50여명을 선발할 계획이다. 하나대투증권, 신영증권, 굿모닝신한증권, 대신증권, 한국투자증권도 채용 계획 수립에 나서고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취업 문이 좁은 만큼 회사별로 요구하는 인재상을 숙지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특히 고객을 주로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성 못지않게 대인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능력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세계적 의학서 ‘동의보감’의 가치 조명

    세계적 의학서 ‘동의보감’의 가치 조명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유력한 가운데, 의학서로서의 가치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KBS는 30일과 새달 6일 오후 10시에 특집 2부작 ‘동의보감’(연출 표만석)을 통해 현대의학에도 여전히 유효한 동의보감의 처방과 그 효능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본다. 30일 1부 ‘동의보감, 세계적 의학서적이다’편은 출간 당시 한·중·일·베트남 등지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동의보감의 발자취를 추적해 본다. 책은 중·일 지역에서는 30여차례나 출간될 정도로 꾸준히 주목을 받았고, 최근 베트남에서도 번역 출판을 기획하고 있다. 취재진은 중국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청나라시대 동의보감 필사본과 일본 에도막부 시대 동의보감 필사본의 모습도 직접 카메라에 담는다. 또 국가적 프로젝트였던 동의보감의 제작 과정을 밝히고, 400년이 지난 지금도 루게릭병 치료 등 현장에서 활용되는 동의보감 처방을 소개한다. 세계적인 의학자들의 인터뷰도 담는다. 영국 옥스퍼드대 생물학 교수 데니스 노블은 “동의보감은 시스템생물학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현대의학에서도 과학성이 입증된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동의보감에 따라 만든 경옥고와 공진단 등 환약을 비롯, 특선 건강요리도 재현해본다. 새달 6일 2부 ‘동의보감, 그 의학적 진실은’편은 동의보감에서 제시하는 암치료법의 효능을 의학적으로 따져본다. 또 한방치료의 표준화 및 현대화의 방안을 제시하고, 현대 한의학의 활약상도 정리한다. 제작진은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결정을 앞두고 세계적인 우리 의학문화유산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 효과를 입증해 온 국민이 동의보감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했으면 한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야생초 이야기⑦] 꿀풀

    [야생초 이야기⑦] 꿀풀

    이제 바야흐로 초여름이다. 아직은 태양이 그렇게까지 따갑지는 않지만 봄꽃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들꽃들이 봄처럼은 다투어 피지 않는다. 대신 짙은 녹음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꿀풀이 핀다. 나물로, 약재로 우리 생활에 널리 쓰이긴 했지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꿀풀이라니…? 꿀이 많은 꽃인가? 그렇다. 부리모양의 꽃(화관), 저 속에는 꿀이 고여 있다. 다른 풀에 섞여 잘 보이지 않다가도 6월을 넘어서면서부터 30cm 정도의 높이로 쑥쑥 솟아올라 풀숲에 무리지어 피어난다. 요즘은 시골 어디로 가나 농사짓는 곳에서는 제초제를 안 쓰는 곳이 없어 그 흔했던 이 꿀풀도 보기 어려운 야생초가 되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디서나 풀밭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식용나물에서부터 피부염, 해열제 등 단방약재로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보리이삭 같기도 한 꽃이삭에 보랏빛 꽃이 송골송골 모여서 핀다. 시골에서 자란 우리들은 길가에 피어 있는 이 꽃잎을 따서 꽃부리의 뒷부분을 입술에 물고 꿀을 빨아먹었다. 샐비어 꽃을 따서 꿀을 빨아본 사람이라면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달큼한 꿀물이 제법 혀끝에 묻어난다. 얼마나 꿀이 많으면 ‘꿀방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까. 그래서 작은 토종벌에서부터 큰 호박벌까지 꽃부리에 비집고 들어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주 이른 봄에 싹이 나기 시작하여 어린 싹을 나물로 해먹는데 ‘가지골나물’이 그것이다. 이른 봄의 푸른 싹은 거의가 나물로 해먹었지만 특히 이 가지골나물은 약효까지 지닌다 하여 그 쌉싸래하고 개운한 맛을 즐겼다. 이른 봄 꽃대가 나오기 전에 채취해서 뜨거운 물에 약 5분 정도 데쳐서 참기름과 간장 양념을 해서 무쳐 먹기도 하며 하룻밤 물에 담가두었다가 된장국을 끓여먹기도 한다. 새순을 잘 씻은 다음 물기를 제거한 뒤 전분을 묻혀서 기름에 튀겨내어 먹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이곳 지리산 근방에는 아예 이 꿀풀을 집단 재배하는 ‘꿀풀 마을’도 있다. 토종벌꿀 이른바 ‘꿀풀꿀’을 생산해내는 중요한 밀원으로, 그리고 한약재로써 긴요하게 쓰여 농가의 소득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은 그 활용범위가 매우 넓어져 근래에는 장식용 꽃의 부재료로 염료를 입혀서 활용하기도 하고 꽃을 따서 전병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꽃모양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20~30cm 가량의 꽃대 위에 이삭 모양의 꽃차례를 가진 꽃이삭에 보랏빛 꽃들이 옹기종기 핀다. 꽃을 싸고 있는 꽃턱잎(포)에 세 개씩의 입술모양 꽃이 핀다. 이 꽃턱잎 가장자리엔 잔털이 무수히 달려 있다. 7~8mm 정도 되는 꽃받침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역시 흰 잔털이 많이 나 있다. 꽃부리는 약 2cm 되는데 아랫입술꽃잎은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고 윗입술꽃잎은 곧게 서 있다. 수술이 4개인데 둘은 길고 둘은 짧다. 꽃이 지고 나면 본래의 줄기 곁으로 한 줄기가 뻗어 나와 곁에 새로운 포기가 형성된다. 그래서 대개 이 꿀풀은 무리져 있다. 볕이 잘 드는 길가나 산기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풀꽃이다. 온화하고 습윤한 기후를 좋아하지만 혹한에도 잘 견디는 야생초로 양지바르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 흔히 자생한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면 다 말라버리기 때문에 꽃은 물론이고 푸르게 남아 있는 꽃대를 볼 수 없다. 이렇게 한여름이면 말라버린다 하여 한약재의 이름으로는 ‘하고초(夏枯草)’라 한다. 보랏빛 꽃빛깔이 신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꽃 자체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관상용으로 가꿀 만큼 화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한약재로서 뛰어난 가치를 발휘한다고 한다. 꿀풀의 약성은 차갑고 맛은 맵고 쓴 편이어서 약재로 쓰여서는 간경에 작용하고 열을 내리고 독을 풀어주고 눈을 밝게 한다. 꽃이 지고 난 다음 7,8월에 꽃대를 잘라 차를 달여 마시기도 하는데 여러 가지 약리실험에서 혈압을 내려주고, 이뇨작용을 도우며, 해로운 균을 억제하는 작용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외용약으로 사용할 때에는 꿀풀 달인 물로 환부를 씻거나 생으로 짓찧어 환부에 붙이기도 한다. 쐐기벌레나 벌에 쏘여서 환부가 붓거나 아플 때에는 꿀풀을 생으로 으깨어 붙이거나 생즙을 소주와 함께 섞어서 바르기도 한다. 우리 몸의 여러 질병에 이 꿀풀의 약리효과가 안 미치는 곳이 없다할 만큼 다양하다고 하니 이 꿀풀이 우리 민간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야생초였던가 짐작할 만하다. 따로 재배하지 않아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우리 생활에 긴요하게 쓰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따로 외진 시골길을 찾거나 산 가까이 가야 겨우 볼 수 있지 않은가?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약재상에 가야 만날 수 있다. 꼭 먹을 수 있어서 귀한 식물이 아니리라. 꼭 귀한 약재여서 귀한 식물이 아니리라. 그 식물들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면 우리 인간이라고 온전하겠는가? 인간만큼 둔한 동물도 없을 것이다. 갖가지 이변이 나타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야만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 곁이 있었던 풀 한 포기의 소중함을 뒤늦게야 알게 되는 게 우리 인간 아닌가? 꿀방망이라 하여 한 줄기 꽃이삭을 꺾어 쥐고 꿀을 빨던 궁색한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지 싶다. 더러는 시골 학교 교장선생님이 붙잡고 훈화하시던 마이크를 떠올리고 꿀풀꽃대 한 줄기를 손에 들고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즐거워했다. 그 꿀풀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초여름의 들길이 그립다. 드물게 흰꿀풀꽃을 만나면 우쭐하며 신비로워하던 시절, 찔레 새순도 꺾어서 껍질 벗겨 먹으며 들로 산으로 온몸에 푸른 물이 들도록 뛰어다니던 건강한 어린 시절은 이제 꿈에서나 만나려나. 글 복효근 시인
  • 서울시 시프트 공급차질 빚나

    서울시 시프트 공급차질 빚나

    서울시의 장기전세주택(시프트) 공급 계획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 4월 재건축 ‘임대주택 의무비율’이 폐지되면서 민간 건설업체가 임대아파트 건축을 꺼리고 일부 자치구에서도 시프트 건축 확대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2018년까지 시프트 11만 2000가구를 공급하기로 했다. 시프트는 주변 지역 시세의 80% 이하 가격에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는 전세주택으로 강남지역에서도 물량이 나오고 85㎡ 이상의 평형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은평 “문화시설 들어올 자린데…” 23일 은평구에 따르면 서울시는 지난달 말 녹번동 국립보건원 부지 10만 2684㎡ 중 일부에 시프트를 짓는 것이 어떠냐는 공문을 은평구에 보냈다. 은평구는 즉각 반발했다. 지하철3호선 불광역과 맞닿은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지역이라 서북권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타워나 대규모 문화시설 등 개발계획이 이미 연구용역에 들어간 상태였다. 은평구 관계자는 “중장기 시프트 공급 계획이 차질을 빚자 갑자기 대규모 주택단지를 들고 나왔다.”면서 “그 자리는 대규모 주택단지가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원하며 서북권을 대표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며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 강서구도 지난 3월 갑자기 시가 마곡지구 전체 336만 3591㎡ 중 공동주택용지 66만 99㎡의 50%에 시프트와 영구임대주택을 짓는다고 계획을 변경하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시는 원래 마곡지구 공동주택용지의 25%에 시프트 등 임대주택을 짓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번 계획 변경에 따라 시프트를 1224가구에서 4339가구로, 임대주택은 2506가구에서 2893가구로 늘리기로 했다. 강서구는 서울시 전체 영구임대아파트의 46%인 4만 5998가구가 밀집해 사회복지예산 지출 등 각종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서울시의 시프트 공급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연말부터 시프트 공급 차질 예상 부동산업계에서는 임대주택 의무비율이 폐지됨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시프트 공급이 2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동안 ‘알짜 시프트’로 인기를 누렸던 강남·서초·송파 등지의 물량도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파장은 오는 11월 강남·서초·강동지역 재건축 시프트 물량 233가구의 분양에서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초 금호아파트, 강남 진달래3차 아파트 등에서 임대용을 짓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역세권에 용적률을 높여 주고 개발이익을 시프트로 환원하는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지만 아직 건설업계에서는 관망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 산하 SH공사도 시프트 공급 확대를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다. 이는 주변 아파트 전세가의 80% 이하인 전세보증금으로는 건축비를 충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곡지구에서 서울시는 시프트 공급을 늘리면서 SH공사의 일반 공급분을 3997가구에서 1399가구로 줄였다. 건축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시프트를 3000가구 이상 더 지을 경우 SH공사로는 약 5000억원의 추가부담을 떠안기 때문이다. SH공사 관계자는 “공익적인 측면을 더 생각해야 하는 공사의 입장에서 이 정도 부담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집 없는 시민들의 희망인 시프트 공급 계획에 차질이 우려되지만 역세권의 용적률을 높여 주는 등의 방법으로 극복할 것”이라면서 “자치구도 시프트가 기존 영구임대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임정 90주년-발자취 되밟다] (하) 답사 이후의 과제

    [임정 90주년-발자취 되밟다] (하) 답사 이후의 과제

    │충칭(중국) 박록삼특파원│2009년은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에서 의미있는 해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꼬박 100주년이 되며, 3·1만세운동으로 민족의 기개를 떨친 것과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90주년이 된다. 이뿐만 아니다 백범 김구가 총에 맞아 서거한 지 60주기가 되는 해이며 반민특위가 결성되며 좌절된 것 또한 꼬박 60년째를 맞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독립정신 답사단이 지난 11일부터 19일까지 임시정부 발자취를 더듬었던 행사의 의의가 더욱 각별한 이유다. 하지만 현장을 직접 둘러보며 느낄 수 있었던 감동의 무게와 심장의 울림만큼이나, 현실의 처참함과 안타까움 역시 컸다. 답사단은 가는 곳마다 자취 없어진, 혹은 실제와 동떨어진 엉뚱한 현장을 목도하기 일쑤였다. ●사라지는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 상하이(上海)는 임시정부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이었고, 만 13년 동안 무려 열 두 차례 이상 임정 청사를 옮겼다. 옮긴 곳마다 모두 지번의 기록이 있건만 실제로 남아 있는 곳은 맨마지막의 청사였던 푸칭리 4호뿐이다. 난징(南京)에서는 광복군의 또다른 모체가 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한인특별반)에 소속된 김원봉 계열의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함께 모여 살던 호가화원(胡家花園)은 빈민가로 바뀐 지 오래였다. 재개발이 한창 진행되며 쓰레기 냄새가 가득할 뿐이었다.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와 백범이 독대하며 요인 암살 등 테러에서 체계적 군대 양성의 필요성의 의견을 나눴던 난징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장제스 관저)는 방문 자체가 불허됐다. 또한 충칭(重慶)에서 1940년 9월17일 창설된 광복군 총사령부는 미원(味苑)식당으로 바뀌었다. 아주 작은 비석 하나 남겨져 있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묻혔던 화상산 한인묘지와 조선민족혁명당계열 인사 등이 거주하던 손가화원(孫家花園)은 몽땅 헐리고 대규모 아파트가 위로 치솟고 있다. 류저우(柳州) 유후공원에서도 광복군의 또다른 배경이었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결성됐지만 어떠한 표지도 없다. 그저 옛 사진을 더듬어 짐작할 뿐이었다. ●엉뚱한 곳에 표지가 있는 곳도 우리 정부의 엉성한 일처리로 엉뚱한 곳에 기념 표지가 있는 곳까지 있었다. 현장에 대한 직접적 기억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가 및 자녀들이 고령이 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치밀한 현장 조사를 통해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과제다. 치장 임강가 43호(옛 지명)는 청사이면서 이동녕 임정 주석 등이 머문 곳이지만 당시 자리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곳에 표지석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다. 또한 충칭의 화상산 한인묘지공원에서는 답사단 전체가 전혀 다른 묘지구역에서 김정륙 임정기념사업회 부회장의 모친 묘 등 한인들이 묻힌 흔적을 찾아 보기도 했으나 묘지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이 자리잡은 충칭 호가화원 역시 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임정 의정원 의원인 김의한의 아들이자 독립유공자인 김자동(81) 임정기념사업회장은 “이동녕 주석의 거처 등 임정청사는 강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면서 “보훈처 등에서 제대로 현장 조사도 하지 않고, 관련 서류도 들춰 보지 않은 채 엉터리로 일을 치른 것”이라고 안일한 행정에 대해 비판했다. 김 부회장 역시 “더 늦기 전에 좀더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조사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youngtan@seoul.co.kr
  • “어머니 묻혔던 곳 흙 떠와” 김정륙 임정기념사업회 부회장

    “어머니 묻혔던 곳 흙 떠와” 김정륙 임정기념사업회 부회장

    │충칭 박록삼특파원│이제 조금은 홀가분합니다. 어머니 계셨던 곳 흙이라도 조금 갖고 올 수 있게 됐으니까요. 고이 모셔둘 것입니다.” 김정륙(74) 임정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자신이 다섯 살 때 중국 충칭(重慶) 화상산 한인묘지에 묻은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 이번에 독립정신답사단의 일원이 된 것도 임정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의의와 함께 어머니 ‘강태정’의 묘소를 찾고자 했던 것. 하지만 지난 17일 찾은 공원묘지에 안치된 수 천, 수 만 기의 묘비 중 이를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답사단 학생들이 들러붙어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묘비 하나하나씩을 일일이 확인해 봤지만 찾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목울대 밑에서 뜨거운 설움이 밀려든 김 부회장은 하릴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이선자 부소장을 만나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과, 그나마 위안이 되는 희소식을 함께 들었다. 1986년 무연고묘로 공고한 뒤 일주일 만에 곧바로 밀어 버렸다는 것, 또 하나는 그럼에도 어머니 묘의 위치를 이 부소장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부소장과 함께 다시 공원묘지로 찾아가 그 위치쯤에서 숟가락 분량만큼 종이봉투에 흙을 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처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그는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았는데, 이렇게 어머니 흔적이나마 찾게 돼서 천만다행”이라면서 “어머니 사진 아래 유골함에 소중히 모셔둘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서 해방 이후 꾸려진 제헌국회 의원,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의 아들이다. 그의 선친은 6·25전쟁 도중 납북된 뒤 전화에 쓸려 숨을 거둬 현재 평양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탓에 그는 열 다섯살 어린 나이에 누나와 함께 천애 고아가 됐고, 독립운동가의 자녀로서, 연좌제의 피해자로서 험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김 부회장은 “화상산 한인묘지에는 독립운동을 하시던 서른 몇 분이 더 묻혀 있었는데 보훈처 등 한국정부에서는 그 정확한 위치 파악도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면서 “관련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때 시급하게 모셔와 가능한 만큼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youngtan@seoul.co.kr
  • [임정 90주년 발자취 되밟다] (상) ‘독립정신 답사단’ 동행기

    [임정 90주년 발자취 되밟다] (상) ‘독립정신 답사단’ 동행기

    꼬박 90년이 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4월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차렸다. 1945년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26년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의 시작이었다. 임시정부는 총 5000㎞를 이동하며 세계 피식민지 민중의 저항운동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활동을 펼쳤다. 좌·우 이념적 갈등을 아울러 가며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양성했고, 세계 양심세력들의 찬사를 받은 영웅적 투쟁을 펼치는 한편 외교적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현재 우리 헌법의 토대가 되는 법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마련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씩씩한 청년들 54명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후손, 학자 등 70여명으로 꾸려진 ‘독립정신 답사단’이 지난 11일부터 19일까지 중국 땅에서 선대의 발자취를 되밟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관, 서울신문 후원 사업이다. 그들을 따라, 그들의 곁에서 목도했던, 90년의 세월과 중국과 한국의 공간을 뛰어넘는 의미를 두 차례에 걸쳐 되새겨 본다. │충칭(중국) 박록삼특파원│#장면 1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네가 만일 뼈가 있고 피가 있다면 조선의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식장에 도시락 폭탄을 던진 스물다섯 살의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처연한 말이다. 그의 의거는 일본육군사령관, 일본 상하이거류민단장을 죽게 했고, 일본 열도를 경악시켰다. #장면 2 1945년 11월3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 계단 앞.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앞서 태극기를 들고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눈매에도 웃음기는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피흘려 싸웠건만 돌아온 것은 ‘또 다른 제국’의 그늘이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 군정은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의 환국만을 허락했다. 이역만리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피를 흘렸던 임시정부의 투쟁과 꿈, 좌절을 상징하는 두 장면이다. 나라 빼앗긴 백성들 앞에 놓인 길의 갈래는 많지 않았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처럼 굴종의 삶을 살든지, 일본에 빌붙어 개인만의 영달을 꾀하든지, 아니면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한 목숨을 바치든지 말이다. ●90년전 임정이 꿈꾼 나라를 찾아나서다 지난 11일 오전 8시 무렵 인천국제공항. 전국 각지의 대학생 54명이 모였다. ‘독립정신 답사단’이다. 이들은 이미 ‘장강일기’와 ‘백범일지’를 읽고 임시정부의 수난과 고통, 절절한 바람을 익혔다. 답사단에 주어진 과제는 간명하면서도 묵직하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박제화된 교과서에서 우리네 현실의 문제로 끄집어내야 한다. 중국 상하이~난징(南京)~자싱(嘉興)~항저우(杭州)~창사(長沙)~구이린(桂林)~류저우(柳州)~치장~충칭(重慶)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이동하며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잡아내야 한다.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비장함 따위는 청년들의 몫이 아니다. 재미난 여행을 앞둔 듯 끼리끼리 재잘거리기 바쁘다. 40도를 넘나드는 후덥지근한 7월의 상하이에 도착했고 곧바로 임시정부청사 옛터에 이어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루신공원(옛 훙커우 공원)을 찾았다. 이내 숙연해진다. 발대식부터 결연하다. 책으로 본 지식은 뇌에 남지만, 눈으로 본 감동은 심장에 남을 수밖에 없다. 모두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감동과 배움이 넘쳐나다 12일 뙤약볕 속에 난징 대학살기념관을 방문한다. 일제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남겨놓은 이곳에서 답사단은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았다. 관련 기록물들을 둘러본 뒤 다시 쳐다본 정문 맞은편 벽에 쓰여진 ‘300000’이라는 학살된 사람들의 숫자는 이제 더이상 역사 속의 지식, 정보가 아니었다. 후난성(湖南省) 창사 난무팅(楠木聽)에서 백범은 1938년 5월6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 대표들과 모여 3당 통합을 논의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운환이 쏜 총에 맞아 상아의원으로 긴급하게 후송된다. 답사단은 15일 창사 시내 낡은 골목길로 들어선 뒤 몇 차례 왼쪽, 오른쪽으로 꺾다가 어렵사리 난무팅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17일 치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치장에는 이동녕 임정 주석 등이 머물던 옛집터(상승가 107호)와 임정청사 구지(임강가 43호) 등이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의 “한국 정부에서 중국 시정부 등과 협조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는 설명에 함께 안타까워했다. 더이상 교과서 속의 역사가 아님을 심장이 먼저 느낀다. ●2009년, 새로운 나라를 꿈꾸다 답사단은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고, 꼼꼼히 메모를 한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신명식 이사, 곽태원 한국노동경제연구원장 등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조별로 정한 과제를 발표한다. 그리고 1942년 제정한 건국강령에서 ▲대규모 생산기관 국유화 ▲노동자 의료비 면제 정책 ▲친일세력 귀속재산 몰수 ▲최저임금제 ▲노동조합 경영참여권 등을 명문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또한 항일이라는 지상 과제를 앞두고 1938년 좌·우익 7당 통일회의를 여는 등 백범과 좌익의 약산 김원봉을 중심으로 좌우 갈등을 아우르고 통합하기 위해 기울였던 끈질긴 노력도 오늘의 상황과 맞물려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답사단 김태균(24·한양대 4학년)씨는 “현재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복지국가의 원형을 이미 임정에서 천명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라면서 “이번 답사를 통해 젊은 세대가 역사를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한 역사를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youngtan@seoul.co.kr 임정기념사업회 주관 서울신문 후원
  • [20일 TV 하이라이트]

    ●인간극장(KBS1 오전 7시50분) 3년 전까지 경찰을 꿈꾸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주일씨. 형들과 아버지가 야심차게 벌인 사업이 실패하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꿈을 접어두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고향 신의도로 돌아왔다. 강씨네 소금밭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젊은 염부 주일씨를 만나본다.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한국은퇴자 협회 주명룡 회장에게 협회의 역할과 주요업무 등 7년간의 발자취를 들어본다. 은퇴란 황금기에 시작하는 긴 여정이라 말하는 주명룡. 그가 생각하는 은퇴란 무엇인지, 은퇴 후 필요한 노후자금은 얼마인지를 비롯해 은퇴를 위한 필수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닥터스(MBC 오후 6시50분) 비스듬하게 꺾인 고개, 발작적으로 떨리는 두 팔은 영미씨에게서 스물두 살 싱그러운 젊음을 빼앗았다. 외출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힘든 상황, 하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그녀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근긴장이상증(Dystonia)을 앓고 있는 고영미씨의 사연과 함께한다. ●TV로펌 솔로몬(SBS 오후 8시50분) 재형은 여자 친구를 괴롭히는 취객의 일방적인 시비로 격투를 벌이게 되고, 술김에 한 일이니 좋게 끝내기로 하고 헤어졌지만 얼마 후 경찰서에서는 폭행혐의로 고소당했다며 연락이 온다. 싸움을 건 것도 상대방이고, 맞기도 재형이 더 맞았지만 오히려 치료비를 물어줘야 할 상황이 돼 버렸는데…. ●60분 부모(EBS 오전 10시) 지난 6월에 출연했던 중학교 1학년 윤선이. 매사에 의욕이 없이 우울하고, 공부만 하려면 멍해지는 통에 성적은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60분 부모’의 솔루션대로 ‘기말고사 성적 올리기 6주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눈에 띄게 성적이 올랐다. 성적을 올린 그 비법을 공개한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30분)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어 ‘그루밍 족’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다. 외모가 경쟁력인 사회 분위기 속에 남자도 자신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는데 미국에서 남성전용 미용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LA의 남성전용 미용실을 찾아가 본다.
  •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섬이 된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섬이 된다

    여행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을까. 각박한 일상을 떠나 느릿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유에 좀더 의미를 둘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잊고 있었던 것, 혹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떠나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섬을 찾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길은 어느새 설렌다. 많은 방향표들을 거치며 미지의 장소를 찾아가듯 다다른 곳은 나와 섬 사이의 간격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 내딛은 길들이 어느새 연육교를 건너 소백산 끝자락에 위치한 무섬마을의 시간 앞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연육교를 건너 처음 마주한 무섬마을의 첫 느낌은 마음속으로 나지막한 탄성을 지르게 했다. 100년 이상된 가옥들이 즐비한 이곳은 무성필름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혹은 오래된 소설 속에 묘사된 것 같은 풍경이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다. 마을에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고요에 놀라고 마을이 펼쳐놓은 시간들에 놀랐다. 그렇듯 나에게 허락된 여유는 과거로의 여행에 몸을 싣고 천천히 시간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원래 이름이라고 한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섬 전체 3면을 감싸고 있고 넓게 펼쳐진 모래 해변 위에 한옥들이 어우러진 채 떠 있는 형상이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666년 무렵부터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세대를 거쳐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살아오면서 이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한때는 1200여 명이 살았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20여 가구 40여 명만이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어귀에 위치한 정자를 비롯해 전통가옥, 그리고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 골목과 담장을 나눠가지며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영주판 ‘하회마을’이라고도 불리어지듯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해 천혜의 환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마을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으며 때 묻지 않은 시간 여기저기에는 바람, 새소리, 물소리가 소란스럽게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또한 무섬마을은 시인 조지훈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의 아름다운 정취를 바라보며 이별과 아픔을 읊조린 그의 시, <별리(別離)>가 쓰여진 곳이기도 한데, 이곳의 풍경을 배경으로 떠올리며 한 행 한 행 구절을 읊조리니 어느새 시인의 심성에 가 닿아 있는 듯하다.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넘어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자락에/ 말없이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듯 끊질듯 고운 미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을 바라보다/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님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빈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꺽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 조지훈, 「별리(別離)」 전문 자연의 소리 가득한 이곳의 분위기와 조우한다면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시 한 소절 멋들어지게 읊조리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곳은 《이어도》 《금당벽화》로 유명한 소설가 정한숙의 단편소설 <고가>의 배경이 되기도 한 마을이다. 솟구쳐 흐르는 물줄기모양 뻗어 내린 소백산 준령이 어쩌다 여기서 맥이 끊기며 마치 범이 꼬리를 사리듯 돌려 맺혔다. 그 맺어진 데서 다시 잔잔한 구릉이 좌우로 퍼진 한복판에 큰 마을이 있으니 세칭 이 골을 김씨 마을이라 한다./ 필재의 집은 이 마을의 종가(宗家)요. 그는 종손이다./ 필재의 집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나서면 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중략>…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그의 주옥같은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도입부를 읽고 있으면 강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바라보며 묘사해 나가는 작가의 행간 속에서 마을을 돌아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이곳은 희미한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속에 뚜렷이 각인시켜 놓는다. 시와 소설의 배경으로 쓰여질 만큼 마음의 여유와 영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이 마을의 지형은 풍수지리학으로는 매화꽃이 피는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 형국이라 하여 길지로 꼽힌다고 한다. 당대의 예술가들이 받았던 마을의 기를, 나도 같은 자리에서 한껏 받아 보고 싶은 소망이었는지 노트를 꺼내서 뭐라도 적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날이 어둑해지도록 좁은 골목과 낮은 지붕들이 길을 불러들인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박천립 가옥과 만죽재 고택 등을 거쳐 마을 한바퀴를 돌다보면, 담장 옆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와 처마, 그리고 누군가 세워둔 자전거의 휴식과 마주하기도 한다. 또한 흙길을 걷다보면 앞마당 빨랫줄에 널어진 옷가지들이 소박하고 정겨운 오후의 풍경이 되어 자연스럽게 스치기도 한다. 삼삼오오 모여서 밭일을 나가시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 아, 고요와 적막이 나의 시선을 이렇게 붙잡을 수 있었구나. 그러고 보면 그동안 너무 많은 소음에 무감각하게 살아온 것 같다. 이곳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문득 두려워지기도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걸어간 곳은 솟대가 내려다보는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길이 150 미터 길이의 외나무다리다.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다듬어 만든 외나무다리는 장마 때면 휩쓸려 떠내려가기 일쑤라고 한다. 하지만 직접 복원하기를 반복하며 해마다 ‘외나무다리’ 축제도 열고 있다. 아련한 시간여행을 하는 나와 저 건너 육지 사이의 마음의 통로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 정도 겨우 올라설 수 있는 좁은 외나무다리는 내성천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있는데, 반짝이는 물이랑을 내려다보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이것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풍경이다. 느릿느릿 건너가는 구름도, 모래해변 위 물새의 발자국도, 이 마을에서의 시간은 너무도 평화롭기만 하다. 하지만 이곳에도 어느덧 방문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았지만 이제는 좀더 많은 관광객들을 가까이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을 입구 왼편,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한옥전통마을 공사가 1년 후인 올 11월에 맞춰 완공되기 위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마땅한 민박이나 음식점 하나 없어서 불편해 했던 여행객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시간을 좀더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좋은 변화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모습이 훼손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들기도 한다. 전통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면서 오래도록 널리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또한 이곳을 찾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IC 주변에서 인삼순대와 막걸리 한 잔, 그리고 계절마다 각각 다른 정취를 펼쳐놓는 영주 소백산의 산행과 더덕즙을 곁들인다면 경북 영주에서의 여행은 훨씬 다양해질 것이다. 시설 좋고 편리한 곳에서 누리는 여행은 이곳에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조금 불편하고 무료할 수도 있는 시간이 온통 우리를 초대한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여행의 선물이다. 녹음이 더욱 짙어지는 계절, 일상의 무거움을 비워버리고 천천히 첫 발걸음을 떼어보는 것이 어떨지. 섬 안시아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섬이 된다. 탯줄이 연육교처럼 놓인 어머니 자궁은 내겐 육지였다. 허공을 달려온 빗방울조차도 너라는 육지 사이에는 간격이 필요하다. 오랜 잠수처럼 숨막히던 내 사랑도 그 때문이었으리. 그 간격이 때론 우리를 무모하게 만든다. 잠시 모래 위에 내려앉은 새들도 너와의 거리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섬과 육지 사이 일곱 색색의 탯줄이 놓인다. 네게로, 시간 속으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글 · 사진 안시아 시인
  • 인종·국경 이유로 곳곳서 분쟁… 통합 없인 발전 요원

    인종·국경 이유로 곳곳서 분쟁… 통합 없인 발전 요원

    신(新) 아시아 시대의 첫 번째 과제는 단연 ‘통합’이다. 아시아의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한다면 아시아의 잠재력은 ‘죽은 잠재력’에 불과할 뿐이다. 유럽국가들이 유럽연합(EU)이란 거대한 작품을 통해 초강대국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통합’의 시너지 효과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시아도 이같은 통합의 수순을 밟을 수 있을까. 과연 힘을 하나로 모을 합의의 결정체를 아시아가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시아는 지구촌 6개 대륙 가운데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팩트북에 따르면 세계 10대 인구 대국 가운데 아시아 국가는 중국(1위)과 인도(2위), 인도네시아(4위), 파키스탄(6위), 방글라데시(7위), 일본(10위) 등 6개국에 이른다. ●아시아의 ‘피의 역사’, 그리고 통합 인구가 많은 만큼 아시아의 인종과 언어, 종교 등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중국의 경우 통계에 집계된 민족만 56개에 이른다. 인도의 공식어는 힌두어이지만 지방 언어가 너무 많은 까닭에 영어가 공식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인도의 각 주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언어만 22개이며 인도 전역에 사용되는 언어는 1652개에 달한다. 인종 구성은 더욱 복잡하다. 인도-아리안족, 드라비다족, 몽골족 등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인도를 비롯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지역의 인종과 언어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다양성은 아시아의 문화발전에 큰 역할을 해냈다. 수많은 종교를 탄생시켰고 아시아를 예술의 중심지로, 더 나아가 문명의 발상지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피의 역사’도 시작됐다. 다양한 인종과 종교, 언어가 복잡하게 서로 얽히고설키며 갈등은 시작됐고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으로 비화됐다. 이런 갈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통합은 그렇게 요원해졌다. 영토분쟁과 이념분쟁, 분리주의 운동, 종교분쟁, 테러전쟁 등 다양한 분쟁들로 인해 국제통합은커녕 국내 통합조차 어려웠다.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는 종교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키스탄과 스리랑카로 분리됐다. 힌두교의 국가 인도에서 이슬람교도와 불교도가 독립, 각각 파키스탄과 스리랑카를 세운 것이다. 특히 냉전 시기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 보유 경쟁에 가담했다. 무차별 테러도 계속됐다. 2008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뭄바이 테러의 근본적인 원인도 파키스탄 계열의 이슬람 무장세력과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의 반목이 주요 원인이 됐다. 대외 관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가 내부에서도 인종과 언어, 종교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인도는 지역 반군들의 분리주의 내전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6만여명이 사망했다. 스리랑카 내부의 종교 갈등은 세기적 사건이었다. 다수파인 불교계 싱할라족과 이슬람계 타밀족간의 내전으로 50여년간 몸살을 앓았다. 타밀족은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를 조직, 자치를 요구하며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정부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이 과정에서 7만명이 희생됐고 16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CIA팩트북에 따르면 내전의 여파로 22%의 스리랑카 주민들이 공식적인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듯 아시아의 분리주의 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분쟁을 낳았다. 미얀마는 내전으로 2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도에서 쫓겨난 파키스탄 난민들이 자치를 요구하며 내전을 했던 방글라데시는 5000명이 희생됐다. 동북아시아는 서남아시아 등에 비해 비교적 치열한 분쟁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통합을 저해하는 많은 갈등들이 산재해 있다. 한국도 그 대열에 있다. 일본과의 독도 영토분쟁과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는 동북아의 통합을 저해하는 주요 심리적 변수로 떠올랐다. 최근 미사일과 핵문제 등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북한은 동북아 통합 문제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아시아는 이렇게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다양한 민족구성, 종교 문제의 첨예성 등으로 인해 갈등 요인이 항상 상존해 왔다. 이런 불확실한 안보 요인으로 통일된 의사결정을 이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시아 통합론’은 아직 초기단계에도 근접하지 못했다. ●‘아시아 통합론’ 가능할까. 물론 일각에서는 근대 서구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의 갈등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서구의 국가들이 아시아를 수탈하면서 내부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 서구에 대한 적개심을 서로에 대한 반목으로 유도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가령, 영국은 1905년 ‘벵골 분할령’을 선포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갈등을 이용, 민족적 결집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는 1911년 철폐됐지만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한국전쟁도 미국과 소련 냉전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오랜 식민경험으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은 제국주의와 냉전의 잔재들을 안고 살아갔다. 하지만 이제 통합 논의는 과거의 잔재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비록 서구의 제국주의가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해도 유럽 통합의 선례는 아시아에 큰 교훈이 된다. 유럽도 스페인의 바스크와 아일랜드의 북아일랜드공화군(IRA)의 분리주의 운동으로 수세기 몸살을 앓았지만 통합의 힘으로 지금은 극복 단계에 도달했다. 다민족 국가인 스위스는 국가 공식 언어가 독일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4가지일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가지만 상호 분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신(新) 아시아시대의 서곡은 이렇게 통합의 바탕 위에서 시작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국채보상·금모으기’ 온국민 한마음… 뜨거운 교육열 여전

    ‘국채보상·금모으기’ 온국민 한마음… 뜨거운 교육열 여전

    대한제국의 국운이 벼랑 끝에 놓였던 1904년 7월18일 ‘대한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창간한 서울신문은 당대 ‘항일언론’으로서 독보적인 활동을 했다. 이와 함께 강산이 10번 넘게 변하는 동안 끊임없이 바뀌어온 국민 생활상을 기록하는 역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창간초인 1900년대와 2009년 오늘의 생활상은 어떻게 다를까. 서울신문이 걸어온 발자취와 기록을 통해 105년 전과 오늘의 한국사회를 비교해 본다. ●푸른눈의 대(大)한국인, 구국언론을 만들다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영원히 살려 한국 민족을 구하라.” 대한매일신보 창립자인 영국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이었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면서도 신문과 우리 민족에 대한 애착을 이처럼 표현했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는 의협심 강한 벽안의 외국인과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민족진영이 힘을 모아 만든 결정체였다.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 취재차 당시 대한제국을 찾았던 배설이 양기탁·박은식 등과 힘을 합쳐 ‘한국인들에게 세상 물정을 알리자.’는 취지로 신문을 펴냈다. 창간호는 모두 6면(영문 4면, 국문 2면)으로 이뤄져 현재 서울신문 지면(32면)의 5분의1 수준이다. 설립자금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배설은 자신의 돈 1000엔으로 신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독자를 위한 바른 보도’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105년 전 대한매일신보와 오늘의 서울신문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시대적 과업인 ‘항일민족운동’의 횃불을 자임한 대한매일신보는 창간초기부터 일본이 한국의 개간권을 얻어내 영구지배할 목적으로 추진한 ‘대한제국 황무지 개간 계획’의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등 언론의 역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채보상·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본 경제수준 구한말 우리 사회의 경제수준은 1907년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을 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 성금으로 갚자는 ‘나라 빚 갚기운동’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대구지사를 운영하던 김광제와 서상돈의 발의로 시작됐다. 서상돈은 “나라가 진 빚 1300만원을 갚지 못한다면 일본에 토지라도 내놓아야 할 판이므로 불행한 일을 당하기 전에 우리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갚자.”고 제의하며 스스로 800원을 내놓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한 달 구독료가 30전이고 쌀 한 말(약8㎏) 값이 1원 80전, 궁내부 주사 한달 봉급이 15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큰 돈이다. 현재 서울신문 월 구독료는 1만 5000원이다. 쌀 한 말 값은 일반미 기준으로 1만 6000원 수준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중 속으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신문은 2월21일자에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 전문을 싣고 ‘이천만 동포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 충정이 있는 사람은 이에 적극 참여해 달라.’며 성금운동에 불을 댕겼다. 신문을 통해 모금 사실을 알게 된 국민들은 주머닛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를 보면 기생들로 조직된 ‘약방기생회’ 회원 39명이 현금과 패물 등 20여원을 기탁했고(2월28일자) 궁내부 기생 모임인 기녀 40명도 24원을 기탁했다.(3월8일자) 또 성환 학소동 최두경은 가계가 넉넉하지 못해 겨우 살면서도 집을 팔아 50원을 내기도 했다.(3월27일자) 그 후 100년이 지난 1998년, 우리 사회에서 ‘신(新) 국채보상운동’이 다시 벌어졌다. 1998년 외환위기 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을 벌인 것이다. 1998년 초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총외채는 1500억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이 4000억달러 정도였던 것에 비춰봤을 때 매우 큰 금액이었다.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들은 장롱 속 금붙이들을 은행을 통해 모으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자녀의 돌반지와 결혼반지까지 내놓았으며 적극 동참했다. 결과는 기적적이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범국민운동 시작 불과 한달여만에 금융기관에 모여든 금은 모두 16만여㎏이었고 금액으로는 20억달러에 달하는 양이었다. 서울신문은 전국적으로 번진 금모으기 운동 물결을 적극 보도하며 언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민족경제 죽였던 외국인 자본, 국가경제를 살리다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에 의존하지 않는 민족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편다. 새로운 이권을 외국인에게 넘겨주지 않고 신기술을 갖춘 기업의 설립을 지원하고 민족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정부 정책에 따라 기업활동도 활발해져 1895부터 1905년 사이 80개의 상회사가 생겼다. 종로 직조사, 한성 제직회사 등 섬유공장과 한성은행, 천일은행도 이때 설립됐다. 그러나 일본은 대한제국의 산업정책을 훼방하고 호시탐탐 조선의 이권을 빼앗으려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황무지 개간 사업이었다. 한국의 노는 땅을 모두 개간 정리해 경영권을 50년 동안 일본 대장성 관방장인 나가모리가 갖겠다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나가모리가 요구한 개간대상 지역의 대부분이 결코 황무지가 아니며, 그의 요구대로라면 전국토의 3분의2를 일본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당시 대한제국 외부협판(오늘날의 차관) 윤치호의 글을 1904년 7월22일자에 실었다. 또 논설을 통해 “황무지 개간 계획이 한국 국민들 사이에 커다란 불만과 무정부 상태를 불러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2009년 상반기 외국인은 46억 4400만달러를 한국에 투자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2.1% 증가한 수준이다. 105년 전과 정반대로 외국인 투자는 국가 산업 발전의 필수요건으로 자리잡았다. ●105년 전과 다름없는 교육의 중요성 교육을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백년지대계’로 여겼던 건 1900년대와 2000년대 모두 마찬가지였다. 개화기 갑오개혁(1894~1896년)을 거치며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초부터 국민들에게 ‘스스로 힘을 길러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호소하며 국민교육에 관한 기사를 비중있게 다뤘다. 1900년대 대중교육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집단은 1907년 4월 도산 안창호가 중심이 돼 설립한 비밀조직 신민회(新民會)였다. 조직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실력 양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적극적인 교육구국운동을 벌였다. 신민회는 대한매일신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신민회는 본부를 대한매일신보사에 두고 있었고 양기탁 등 신문 사원들이 조직의 중추를 이뤘다. 신민회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 대성학교 등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웠고 대한매일신보는 이때마다 찬사와 기대를 보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08년 당시 운영된 학교수는 5000개를 넘었다. 한국전쟁 직전 전국 초등학교에 1만 7560여개의 노천교실이 있었지만 이곳에서조차 학부모들에 의한 치맛바람이 있었다는 미국특사의 기록이 나올 만큼 극성스러웠던 한국사회의 교육열은 200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연간 사교육 시장의 규모가 20조원으로 추정될 만큼 뜨겁다. 서울신문은 매주 교육면에 실리는 ‘총장 초대석’을 연재하는 등 수시로 바뀌는 대입정책에 대한 맞춤정보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다. ●영화도입 100년사를 통해 본 한국문화 변화 구한말 서양문물이 속속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은 ‘영화’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게 됐다. 당대 한국민들에게는 ‘귀신의 조화 속’만 같았던 영화가 빠르게 하나의 문화로 제자리를 잡았다. 황성신문 등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1903년 영화관 입장료는 동화 10전 정도로 설렁탕 한 그릇값 정도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00여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의 영화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2004년 제5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들은 매년 수상의 쾌거를 거두고 있다. 올해 14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국제 규모의 영화축제를 개최하는 문화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2008년 개봉작 108편 중 단 15편만이 흑자를 기록하는 등 우울한 현실도 있다. 현재 영화 티켓 한 장 가격은 8000~9000원선이다. ●유형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진 패션 1904년은 한반도에 ‘패션’이 상륙한 해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벼슬아치를 비롯해 외교관들에게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라는 조치를 내렸다. 양복 조끼를 변형시킨 개화 조끼가 남성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전통 옷인 도포에는 주머니가 없었고 소매 아래 넓은 자락에 물건을 넣었지만 개화 조끼에는 주머니가 달려 실용성을 더했다. 서울에는 양복점이 속속 생겼다. 재단사는 서양에서 들여온 수입 모직물로 가을, 겨울 양복을 지어주었다. 최초의 맞춤양복점이었던 정동 새 예배당 앞의 원태양복점에서는 양복을 맞춰준다는 광고를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에 내기도 했다. 유럽에서 아닐린 염료가 수입되면서 옷 색깔도 화려해졌다. 여성들은 이 염료를 사용해 노랑저고리, 분홍치마를 만들어 입고 어린이들은 때때옷을, 양반들은 옥색으로 물들인 바지저고리를 입었다.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105년 전에도 관심 대상이었다. 신여성이었던 이화학당 여학생들은 머리 앞을 부풀려 모자의 챙처럼 만든 머리를 즐겨했다. 1907년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활란은 동경에서 유행하던 챙머리를 서울에 들여온 장본인이다. 긴 머리를 한 가닥으로 굵게 땋아 터번처럼 두르는 둘레머리도 유행했다. 2009년 사람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은 유형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복고의 바람이 불면서 10, 20대 사이에서 1980년대 유행하던 통이 좁은 바지와 형광색 티셔츠,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이톱슈즈가 유행하고 있다. 김남주의 물결 퍼머, 송혜교의 단발머리 등 미용실에는 스타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하려는 여성들로 북적인다. 김민희 오달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소름끼치는 공포, 입체로 느껴볼까

    소름끼치는 공포, 입체로 느껴볼까

    23일 개봉하는 ‘블러디 발렌타인’은 1981년산 슬래셔 호러물 ‘피의 발렌타인’(감독 조지 미할카)의 리메이크 영화다. 전체 3D로 만들어진 까닭에 눈앞으로 날아드는 살인마의 곡괭이, 뚝뚝 떨어져 나오는 살점 등 더욱 생생하게 소름 끼치는 공포를 만끽할 수 있다. 이야기는 광산주의 아들인 톰(젠슨 애클스)의 실수로 탄광이 무너지면서 시작된다. 이때 해리 워든을 포함해 6명의 광부가 터널에 갇히는데, 여기서 워든은 산소를 아끼기 위해 동료 5명을 살해한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발견된 그는 1년 뒤 깨어나지만, 다시 22명을 처참하게 죽인 뒤 자취를 감춘다. 이 현장을 목격한 톰은 충격에 홀연히 마을을 떠난다. 10년이 지나 돌아온 톰. 하지만 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옛 여자친구였던 사라(제이미 킹)마저 보안관인 친구 엑셀(커 스미스)의 아내가 됐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 마을에는 10년 전 악몽이 되풀이된다. 끔찍한 살인마가 또다시 사람을 무참히 해치고 다니는 것. 마을에는 해리 워든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떠돌지만, 엑셀과 톰은 서로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이 영화에서 긴장감을 일으키는 요소는 3가지다. 첫번째는 과연 해리 워든이 되돌아왔는가다. 광부 마스크에 곡괭이를 든 모습은 탄광마을에서는 흔하디흔한 모습. 익명성 아래 감춰진 범죄자란 설정이 오싹함을 안겨준다. 두번째는 엑셀과 톰 중 누가 진짜 용의자인가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불안정한 모습에 쉽게 어느 한쪽을 편들기 어렵다. 예측은 가능하되, 극이 전개되면서 뒤집히길 반복한다. 세번째는 사라의 감정이 엑셀과 톰 가운데 누구에게로 향하느냐다. 사라는 말없이 사라졌다 돌아온 톰에게 원망과 애틋함을 함께 품는다.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던 그녀의 마음은 엑셀의 불륜을 알게 된 뒤 흔들리고 만다. 연출을 맡은 패트릭 루지어 감독은 호러영화의 고전을 30년만에 재탄생시키면서 입체영화라는 장점을 기막히게 효과적으로 살렸다. TV시리즈 ‘슈퍼내추럴’로 잘 알려진 젠슨 애클스, ‘도슨의 청춘일기’, ‘CSI’로 국내 관객에도 익숙한 커 스미스의 등장이 더욱 시선을 잡아끈다. 청소년 관람불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지방시대] 하회마을을 기어코 봇물로 가두려는가?/임재해 안동대 한국학부 교수

    [지방시대] 하회마을을 기어코 봇물로 가두려는가?/임재해 안동대 한국학부 교수

    경주 보문단지를 처음 본 인상은 아직도 생생하다. 감은사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보문호수에 떠 있는 백조 모양의 유람선이 특히 이국적이었다. 1970년대 말에 약 600억원을 들여 국제적 휴양관광지로 조성한 것이 보문단지인데, 천년의 문화도시 경주를 끼고 있는 까닭에 관광단지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외국인들의 시선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한국미술사 전공의 미국인 존 카터 코벨 교수는 “보문단지의 놀잇배들이 ‘도널드 덕’이나 그런 식의 간지러운 이름을 달고 있는데, 한국의 관광 부서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이곳 인공호수에서 ‘도널드 덕’을 타러 수천달러를 써가며 방문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코벨 교수는 경주지역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데는 재정을 쓰지 않으면서, 도널드 덕의 아류를 만드는 데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외국인들이 경주를 찾는 까닭은 신라문화의 자취를 보려는 것이지 서구적 휴양시설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적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해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 국제적 명사들이 하회마을을 찾은 까닭도 하회마을의 문화적 고유성을 통해 한국문화의 진수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관광객이 하회마을을 찾는 것 또한 양반마을의 문화적 정기와 조선조 유교문화의 뿌리, 하회탈춤 등 민속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지금 학계에서 하회마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도 하회마을 문화의 역사적 독창성을 소중하게 인식하고 국제적 수준으로 보존하기 위한 까닭이다. 그런데 정부는 4대강 살리기 계획에 따라 하회마을 앞에 보를 막을 모양이다. 한마디로 반문화적인 행위이자 ‘정신 나간 짓’이다. 보가 하회마을의 태극형 물길을 바꾸어 자연경관을 해치는 까닭만은 아니다. 강을 막으면서 강을 살린다는 것도 억지일 뿐 아니라, 막대한 투자로 관광 레저 공간을 만들게 되면, 하회마을의 전통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수준 높은 문화적 경관을 한갓 유람선 선착장 수준으로 훼손하게 된다는 점이다. 적은 재정이라도 지원하여 ‘하회마을연구소’를 만들고 국보 징비록과 하회탈을 비롯한 하회마을 문화를 다각적으로 연구하여 세계적 문화마을로 가꾸는 노력을 하지는 못할망정 마을 앞의 물길을 공연히 보로 막아 유람선 따위나 띄울 생각을 한다면, 세계문화유산급 국보문화재를 제 손으로 망가뜨리는 데 국고를 낭비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독일의 엘베 계곡은 새로 다리를 놓은 탓에 세계 최초로 지정이 취소되는 수모를 당했다. 교량이 자연경관을 해치고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아예 하회마을은 문화유산 심의과정에 스스로 지정에 실패하도록 만든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보1호 숭례문이 불타고, 사적으로 지정할 서울시 청사를 중장비로 파괴한 2008년 서울의 문화상황을 진단하며, 나는 바미안 대불상을 파괴한 탈레반정권 못지않게 아주 위험한 문화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준비에 참여하면서 뒤늦게나마 하회마을이 국제적 문화마을로 자리매김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토목공사 수준의 반문화적 정부정책이 오히려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훼방꾼 노릇을 하며 그동안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금 21세기적 문화사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배를 띄우고 흥청거리는 20세기적 유원지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다. 임재해 안동대 한국학부 교수
  • [야생초 이야기⑦] 꿀풀

    [야생초 이야기⑦] 꿀풀

    이제 바야흐로 초여름이다. 아직은 태양이 그렇게까지 따갑지는 않지만 봄꽃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들꽃들이 봄처럼은 다투어 피지 않는다. 대신 짙은 녹음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꿀풀이 핀다. 나물로, 약재로 우리 생활에 널리 쓰이긴 했지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꿀풀이라니…? 꿀이 많은 꽃인가? 그렇다. 부리모양의 꽃(화관), 저 속에는 꿀이 고여 있다. 다른 풀에 섞여 잘 보이지 않다가도 6월을 넘어서면서부터 30cm 정도의 높이로 쑥쑥 솟아올라 풀숲에 무리지어 피어난다. 요즘은 시골 어디로 가나 농사짓는 곳에서는 제초제를 안 쓰는 곳이 없어 그 흔했던 이 꿀풀도 보기 어려운 야생초가 되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디서나 풀밭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식용나물에서부터 피부염, 해열제 등 단방약재로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보리이삭 같기도 한 꽃이삭에 보랏빛 꽃이 송골송골 모여서 핀다. 시골에서 자란 우리들은 길가에 피어 있는 이 꽃잎을 따서 꽃부리의 뒷부분을 입술에 물고 꿀을 빨아먹었다. 샐비어 꽃을 따서 꿀을 빨아본 사람이라면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달큼한 꿀물이 제법 혀끝에 묻어난다. 얼마나 꿀이 많으면 ‘꿀방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까. 그래서 작은 토종벌에서부터 큰 호박벌까지 꽃부리에 비집고 들어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주 이른 봄에 싹이 나기 시작하여 어린 싹을 나물로 해먹는데 ‘가지골나물’이 그것이다. 이른 봄의 푸른 싹은 거의가 나물로 해먹었지만 특히 이 가지골나물은 약효까지 지닌다 하여 그 쌉싸래하고 개운한 맛을 즐겼다. 이른 봄 꽃대가 나오기 전에 채취해서 뜨거운 물에 약 5분 정도 데쳐서 참기름과 간장 양념을 해서 무쳐 먹기도 하며 하룻밤 물에 담가두었다가 된장국을 끓여먹기도 한다. 새순을 잘 씻은 다음 물기를 제거한 뒤 전분을 묻혀서 기름에 튀겨내어 먹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이곳 지리산 근방에는 아예 이 꿀풀을 집단 재배하는 ‘꿀풀 마을’도 있다. 토종벌꿀 이른바 ‘꿀풀꿀’을 생산해내는 중요한 밀원으로, 그리고 한약재로써 긴요하게 쓰여 농가의 소득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은 그 활용범위가 매우 넓어져 근래에는 장식용 꽃의 부재료로 염료를 입혀서 활용하기도 하고 꽃을 따서 전병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꽃모양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20~30cm 가량의 꽃대 위에 이삭 모양의 꽃차례를 가진 꽃이삭에 보랏빛 꽃들이 옹기종기 핀다. 꽃을 싸고 있는 꽃턱잎(포)에 세 개씩의 입술모양 꽃이 핀다. 이 꽃턱잎 가장자리엔 잔털이 무수히 달려 있다. 7~8mm 정도 되는 꽃받침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역시 흰 잔털이 많이 나 있다. 꽃부리는 약 2cm 되는데 아랫입술꽃잎은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고 윗입술꽃잎은 곧게 서 있다. 수술이 4개인데 둘은 길고 둘은 짧다. 꽃이 지고 나면 본래의 줄기 곁으로 한 줄기가 뻗어 나와 곁에 새로운 포기가 형성된다. 그래서 대개 이 꿀풀은 무리져 있다. 볕이 잘 드는 길가나 산기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풀꽃이다. 온화하고 습윤한 기후를 좋아하지만 혹한에도 잘 견디는 야생초로 양지바르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 흔히 자생한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면 다 말라버리기 때문에 꽃은 물론이고 푸르게 남아 있는 꽃대를 볼 수 없다. 이렇게 한여름이면 말라버린다 하여 한약재의 이름으로는 ‘하고초(夏枯草)’라 한다. 보랏빛 꽃빛깔이 신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꽃 자체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관상용으로 가꿀 만큼 화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한약재로서 뛰어난 가치를 발휘한다고 한다. 꿀풀의 약성은 차갑고 맛은 맵고 쓴 편이어서 약재로 쓰여서는 간경에 작용하고 열을 내리고 독을 풀어주고 눈을 밝게 한다. 꽃이 지고 난 다음 7,8월에 꽃대를 잘라 차를 달여 마시기도 하는데 여러 가지 약리실험에서 혈압을 내려주고, 이뇨작용을 도우며, 해로운 균을 억제하는 작용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외용약으로 사용할 때에는 꿀풀 달인 물로 환부를 씻거나 생으로 짓찧어 환부에 붙이기도 한다. 쐐기벌레나 벌에 쏘여서 환부가 붓거나 아플 때에는 꿀풀을 생으로 으깨어 붙이거나 생즙을 소주와 함께 섞어서 바르기도 한다. 우리 몸의 여러 질병에 이 꿀풀의 약리효과가 안 미치는 곳이 없다할 만큼 다양하다고 하니 이 꿀풀이 우리 민간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야생초였던가 짐작할 만하다. 따로 재배하지 않아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우리 생활에 긴요하게 쓰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따로 외진 시골길을 찾거나 산 가까이 가야 겨우 볼 수 있지 않은가?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약재상에 가야 만날 수 있다. 꼭 먹을 수 있어서 귀한 식물이 아니리라. 꼭 귀한 약재여서 귀한 식물이 아니리라. 그 식물들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면 우리 인간이라고 온전하겠는가? 인간만큼 둔한 동물도 없을 것이다. 갖가지 이변이 나타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야만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 곁이 있었던 풀 한 포기의 소중함을 뒤늦게야 알게 되는 게 우리 인간 아닌가? 꿀방망이라 하여 한 줄기 꽃이삭을 꺾어 쥐고 꿀을 빨던 궁색한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지 싶다. 더러는 시골 학교 교장선생님이 붙잡고 훈화하시던 마이크를 떠올리고 꿀풀꽃대 한 줄기를 손에 들고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즐거워했다. 그 꿀풀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초여름의 들길이 그립다. 드물게 흰꿀풀꽃을 만나면 우쭐하며 신비로워하던 시절, 찔레 새순도 꺾어서 껍질 벗겨 먹으며 들로 산으로 온몸에 푸른 물이 들도록 뛰어다니던 건강한 어린 시절은 이제 꿈에서나 만나려나. 글 복효근 시인
  • 그의 이름은 아직도 ‘딸깍발이 판사’

    그의 이름은 아직도 ‘딸깍발이 판사’

    ‘딸깍발이 판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조무제(68) 전 대법관의 소탈한 행동이 또 한번 후배 법조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부산 민사조정센터서 어려운 사건 맡아 지난 4월부터 부산 민사조정센터의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 전 대법관은 일반 법관의 방 크기와 비슷한 6.6㎡ 남짓 되는 사무실에서 보조 직원 없이 혼자 근무한다. 조정업무가 있을 때만 출근해도 되지만 거의 매일 나오고 있다. 자가용조차 없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이 그의 유일한 발이다. 후배 법관들이 불편해할 것을 고려해 출·퇴근 때나 식사하러 갈 때에는 법원 정문 대신 옆문을 사용한다. 점심이라도 대접하려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절한다. 조정업무도 주로 분쟁의 골이 깊은 어려운 사건만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센터장에게 월 1100만원 한도 안에서 기본급과 수당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지난 2개월간 조 전 대법관이 받아간 총급여는 400만원이 채 안 된다. 기본급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지하철 출퇴근… 전별금도 모두 희사 조 전 대법관의 이런 행보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상했던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1993년 공직자 첫 재산공개 당시 6400만원을 신고해 고위법관 103명 중 꼴찌를 차지, ‘딸깍발이 판사’라는 별명을 얻은 그였다. 그는 일선 법관으로 재직할 때 당시 관행이었던 전별금을 받아 모두 법원 도서관 등에 아낌없이 희사했다. 대법관 시절에도 원룸에서 자취하며 비서관마저 두지 않을 만큼 고집스럽게 재물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부산 고법관계자는 “후배 법관들이 조 전 대법관의 이런 청빈한 모습을 보고 많이 배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비정규직 강남 실업급여 창구 르포

    비정규직 강남 실업급여 창구 르포

    9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대치4동 강남종합고용지원센터에는 폭우에도 40여명의 사람들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모였다. 실업급여 설명회장은 꽉 찼다. 센터 측은 실업 급여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비정규직법에 의한 실직자는 10% 수준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실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업급여만 원할 뿐, 본인을 노출하는 상담을 꺼리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업급여 상담 창구 직원들은 비정규직 실직이 늘면서 경기침체로 인해 대량해고 사태가 발생한 지난 2월만큼이나 사람이 몰린다고 입을 모았다. 5월부터 조금씩 실직자가 줄어 6월 초 한 창구당 하루 30명을 상담했지만 7, 8일에는 50~60명씩 몰렸다. 실직자들은 정치권과 정부에 대해 냉담했다. 한 실직자는 “내가 해고됐는데 정치권도 정부도 언론도 논리 싸움만 하고 있다. 다 필요 없고 신문도 TV도 끊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남센터 관할 업체에서는 비정규직법이 시작된 1일부터 7일까지 233명의 비정규직이 실직(계약해지)했다. 하지만 8일에는 175명이나 실직해 전국 40개 지원센터 중 비정규직 실직자가 가장 많다. ●“두 아들 학비 생각에 눈물…” 대기업 직영주유소 점장이었던 박모(51)씨는 지난달 말 이메일로 해고통지를 받은 순간을 잊지 못한다. 2년간 최선을 다했는데 고등학생인 두 아들의 대학 학비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회사는 새로운 자회사를 세우는 편법으로 그를 고용하겠다고 했지만 박씨는 나이 때문에 그마저도 좌절됐다. 박씨는 “이 나이에 재취업이 되겠냐.”면서 “대출을 받아 작은 분식점이라도 낼까 한다.”고 말했다. 대형 은행에 다니다가 지난 1일 실직한 조모(25)씨는 “동생과 자취를 하고 있는데 생활비가 없어 막막하다.”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기간 유예든 연장이든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조차 없다.”고 냉랭하게 말했다. ●늘어선 긴 줄에 짜증도 80분간의 실업급여 설명회가 끝나자 상담 창구가 바빠졌다. 줄을 선 실직자 중 한 명이 ‘빨리 상담하라.’면서 불평을 하기도 했다. 한 상담원은 “보통 실직자들이 해고된 지 2주는 지나야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상담원 김임숙(35·여)씨는 “실직자는 다 억울하지만 단지 비정규직법 때문에 해고당한 분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장기근무를 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할 기회를 잃었다는 40대나 양육을 위해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택했다가 해고당한 주부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좀비PC 시스템 파괴 가능성… 인터넷망 무너질수도 추신수 “선생님! 아드님은 제가 책임질테니…” 세계 누비는 국산 경찰차 “여성도 군대보내 남성 기본권 신장을” 삼성전자 효자사업 반도체서 TV로
  • 生·死 엇갈린 태화·영산강을 가다

    生·死 엇갈린 태화·영산강을 가다

    최대 국정 현안 가운데 하나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이명박 대통령의 한반도 운하 포기선언으로 급물살을 타게 됐다. 4대강 정비사업은 그동안의 임기응변식 치수정책이 아닌 수량과 수질, 환경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종합 처방이라고 정부는 설명한다. 여름에는 물난리로, 겨울엔 물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희소식이다. 서울신문은 오염이 심각해 ‘죽음의 문턱’에 선 나주 영산강과 ‘생명의 강’으로 부활한 울산 태화강을 다녀왔다. ■ 생태복원 모범 울산 태화강 수중보 철거… 수달·철새 돌아와 “냄새 나는 썩은 강물에 빠질라 조심해라.”(1990년 7월) → “더운데 멱감으면서 고기나 잡자.”(2009년 7월) 울산 도심을 흐르는 태화강은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기잡이와 물놀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죽음의 강’으로 전락했다. 2000년까지 생활하수를 비롯한 각종 오폐수가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떼죽음을 당하기가 다반사였고, 시민들은 강을 외면했다. 이런 태화강에 기적이 일어났다. 연어가 돌아오고, 철새가 몰려들었다. ●바닥 걷어내고, 오·폐수 차단 울산시는 2000년부터 태화강의 수질개선을 위해 가장 먼저 강으로 유입되는 생활 오·폐수와 축산폐수의 차단에 나섰다. 시는 용연하수처리장 등을 지속적으로 건설하고, 축산농가 등에 하수관을 설치했다. 주거지역에서 발생하는 오·폐수를 한 방울도 강으로 보내지 않았다. 또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국비 등 총 350억원을 들여 하류지역인 삼호교~명촌교 8.8㎞ 구간의 강바닥에 50㎝ 이상 쌓였던 오염퇴적물 67만㎥를 걷어냈다. 여기에다 곳곳에 있던 수중보를 철거해 강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시민단체와 기업체들도 태화강 살리기 운동에 가세했다. 태화강 곳곳에는 어느 기업, 어느 단체가 가꾸는 곳이라는 푯말이 설치돼 있다. 요즘도 주말이면 기업체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나와 지정된 구간을 순찰하고, 환경도 가꾼다. 이같은 노력으로 생화학적산소요구량(BOD)은 1996년 ‘생명체가 거의 살 수 없는’ 수준(11.3㎎/ℓ)에서 2004년 보통 수준(3.2㎎/ℓ)을 회복했다. 현재 1급수(Ib등급) 어류가 돌아왔다. BOD 기준으로 한강과 영산강, 낙동강 등 도심을 관통하는 전국의 강 가운데 최고의 수질을 자랑한다. ●한강·낙동강 비해 수질 월등 수질개선 성과로 태화강에는 2003년 연어 5마리가 처음 돌아왔다.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60~80마리씩 회귀하고 있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갈겨니·꼬치동자개·수수미꾸리·납자루 등 1~2급수 어류가 돌아왔고, 서식 어종만 버들치·붕어·동자개·피라미·숭어·누치 등 68종에 이른다. 또 천연기념물(제330호)이자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수달도 산다. 바다와 만나는 하류에는 산업화로 사라졌던 친환경 수생식물인 잘피(일명 진저리 또는 몰)가 복원됐고, 전국 최대의 바지락 씨조개 생산지로 바뀌었다. 모래톱에는 실지렁이 등 각종 먹이가 풍부해지면서 떠났던 새들도 날아와 철새 도래지로 변모했다. 남구 삼호동 대숲은 매년 여름 백로 4000여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국내 최대의 백로 서식지가 됐다. 고니·황로붉은갈매기·청둥오리 등 총 52종 8만 6370여마리의 철새가 태화강에 둥지를 틀고 있다. 태화강 복원사업은 2005년 열린 국제포경위원회(IWC)와 전국체전을 통해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라디오 연설에서 “완전히 죽었던 태화강을 준설 등 친환경적으로 정비해 생명력이 넘치는 울산의 보물로 만들었다.”며 태화강을 4대강 정비사업의 모델로 제시했다. 글 사진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생태복원 절실한 나주 영산강 하구둑에 강 막혀 썩는 냄새 풀풀 강물은 한마디로 녹조공장이었다. 물속이 온통 녹조띠로 뒤덮였고, 물결이 일 때마다 속에서 한꺼풀씩 더 나왔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수온이 올라가면서 물속 곳곳에서 부영양화로 물거품이 부글부글 일었다. ●30㎞ 강 따라 녹조 덩어리 둥둥 지난 2일 오후 전남 영산강 하류에서 함평천이 합류하는 동강대교 아래까지 75리길(30여㎞)을 3시간 가량 배를 타고 돌아봤다. 이대로 방치하면 죽음의 강이 될 게 뻔할 정도로 심각했다. 배의 스크루에 밀려 올라오는 흙탕물에서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영산강 뱃길탐사는 하구둑 인근인 영암 나불도 선착장에서 시작됐다. 선착장 바지선에는 물 속에서 건져낸 폐어망 등 쓰레기가 한 무더기다. 3㎞에 이르는 강폭, 10m 넘는 물 속에는 상류에서 30년 가까이 밀려와 쌓인 쓰레기가 켜켜이 묻혀 있다. 배를 모는 전도영(54) 선장은 “1995년 이전에는 녹조 현상이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강물이 오염되면서 붕어와 메기 등 토종 어류가 사라지고 배스가 점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기잡이 주민들도 거의 모두 강을 등졌다. 한창 건설 중인 멋진 사장교가 보였다. 이곳은 영산강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협곡이다. 수심도 25m로 가장 깊다. 10㎞쯤 올라가니 상사바위다. 탐사길 내내 강에서 고기잡이 배도, 그 흔한 새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강의 현주소다. 간혹 갈대 속에 빈 배만 한두 척 매여 있다. 2㎞를 더 가니 오른쪽에서 영암천이 합쳐졌다. 강물 위로 솟아 있는 ‘멍수바위’에 등대가 있다. 바로 옆에서는 환경정화선이 한창 쓰레기를 건져내고 있다. 조금 더 오르자 삼포강이 합쳐졌다. 삼포강을 따라가면 마한시대 권력집단임을 알려주는 나주시 반남면 반남고분군에 이른다. 몽탄대교 지점부터는 강폭이 크게 좁아졌다. 다리 아래로는 산이 없어 물길이 일직선이다. 하지만 다리 위로는 산이 많아 물길이 뱀처럼 두세 번 구부러졌다. 강폭도 하천처럼 좁아졌다. 선상에서 수질분석을 하던 이해훈 전남도보건환경연구원은 “몽탄대교 바로 지난 지점의 용존산소량은 2.4㎎/ℓ로 나타났고 2㎎/ℓ 이하는 물고기조차 살기 힘든 상태”라고 말했다. ●용존산소량 2.4㎎/ℓ… 물고기도 도망 바람이 불자 시큼한 냄새가 실려왔다. 굽이굽이 돈 물길은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느러지 마을을 만들어냈다. 이 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처럼 아름답다. 관광 개발대상 ‘0순위’라고 한다. 함평천이 합류하는 사리포 앞에서 탐사선이 멈췄다. 옛날 명산 장어로 유명한 곳이다. 배 스크루에 폐그물이 걸렸다. 배를 옮겨 타고 동강대교 포구에서 내리면서 탐사를 끝마쳐야 했다. 영산강은 상류에 4개 댐이 생기고 1981년 하류에 하구둑(4351m)이 생기면서 강물로서 생명을 다하고 영산호가 됐다. 수면 면적도 109㎢에서 35㎢로 줄었다. 둑 안에 갇힌 강물은 2억 5000만t으로 영암과 해남지역 간척지 논 540만㏊에 물을 공급한다. 국토해양부는 2011년까지 영산강 살리기에 2조 6000억원을 들여 수자원 1억t 추가 확보하고 수질을 2급수로 복원할 계획이다. 글 사진 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31년만의 부활’ 우포늪 따오기 4남매 성장기 14세 이하 성매매 급증 왜 55세 새내기 공무원 나올까 “갱년기 부인에 과도한 성관계 요구 이혼사유” 수천마리 벌 공습에 미프로야구 경기 52분 중단 잭슨 마지막 리허설 동영상 “멀쩡했네”
  • [주말 화제] ‘31년만의 부활’ 우포늪 따오기 4남매 성장일기

    [주말 화제] ‘31년만의 부활’ 우포늪 따오기 4남매 성장일기

    고향이 ‘코리아’인 따오기가 지난 5월4일 태어난 지 두 달이 됐다. 1978년 판문점 근처에서 관찰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따오기가 31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이 한국산 따오기는 지난해 10월17일 중국에서 건너온 ‘양저우’와 ‘룽팅’ 한 쌍의 새끼다. 한국에 따오기 번창의 임무를 띤 이들 부부는 네마리의 새끼를 얻어 식구를 여섯으로 불렸다. 일단은 성공이다.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 198호인 따오기 가족은 경남 창녕군 따오기복원센터에서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부화한 지 2개월 된 따오기 2세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산미꾸라지 하루 300g 냠냠 맏이인 나는 지난 5월4일 밤 11시28분에 육추기(인공부화기)에서 태어났습니다. 엄마 룽팅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4월1일) 낳은 알에서 나왔습니다. 엄마는 세 차례에 걸쳐 열개의 알을 낳았습니다. 나와 세 동생은 알을 깨고 부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아쉽게도 세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 60g이던 몸무게가 지금은 300g이 넘습니다. 두 동생의 몸무게도 나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 해놓은 표시가 없으면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6월23일 태어난 막내는 아직 육추기안에 있습니다. 엄마·아빠는 우리옆 별도의 사육시설에서 지냅니다. 우리는 하루에 두세 차례 산 미꾸라지를 먹습니다. 죽은 미꾸라지는 절대 먹지 않고,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우리가 먹는 미꾸라지는 중금속을 비롯해 나쁜 성분이 있는지 철저히 검증받습니다. 하루에 엄마·아빠는 450g, 우리 셋은 300g의 미꾸라지를 먹습니다. 사육사가 아침 9시와 오후 2시 규칙적으로 우리에게 미꾸라지를 줍니다. ●아직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라 나와 동생들은 해가 지고 나면 사육장 안에 있는 3m 높이의 횃대 위로 올라가 잠을 잡니다. 아침 해뜰 무렵이면 활동을 시작합니다. 밤에는 훨훨 나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틈틈이 날개를 펴고 퍼득거리며 나는 연습을 합니다. 우리가 더 크면 더 넓은 곳에서 비행연습을 할 수 있도록 야외훈련장을 지어준다고 합니다. 사육사와 연구원들이 우리에게 올 때는 회색으로 된 유니폼을 입고, 또 그 전에 철저하게 소독을 한다고 합니다. 질병 등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색상이 혼란스럽게 바뀌면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지요. 외부인들은 우리를 직접 볼 수 없습니다. 멀리 떨어진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답니다. ●곧 이름, 형제도 갖게 됩니다 나와 동생들은 암·수가 아직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암·수 구별은 DNA 검사를 해야 한답니다. 경북대에서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나는 맏이라고는 하지만, 동생들에게 내가 큰 오빠인지,큰 누나인지 말해줄 수 없습니다. 1978년 이후 한국 출생 따오기 공식 1세인 우리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경남도가 널리 공모해서 예쁜 이름을 지어준다고 합니다. 이달 중에 좋은 이름을 선정해 명명식을 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립니다. 우리 따오기 가족은 5~6년쯤 뒤 식구수가 쉰 마리 넘게 불어나면 인근 우포늪을 비롯해 한국의 자연으로 연차적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한국이 고향인 우리들도 빨리 2·3·4세를 번식해 한국의 아름다운 산과 들 곳곳에 따오기가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글 사진 창녕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생사 엇갈린 태화강과 영산강의 차이는? 14세 이하 성매매 급증 왜 55세 새내기 공무원 나올까 “갱년기 부인에 과도한 성관계 요구 이혼사유” 수천마리 벌 공습에 미프로야구 경기 52분 중단 잭슨 마지막 리허설 동영상 “멀쩡했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