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北 벗어난 선택과 집중을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5월부터 한 달 간격으로 워싱턴,도쿄,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정상외교를 전개하였다.집권 초기 산적한 국내 현안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숨가쁘게 이들 3국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우리의 미래는 이들 주변 강국들과 숙명적으로 맺어져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말이 정상외교이지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북한 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3국과의 정책 조율에 모든 역량을 소진한 회담이었다.워싱턴에서는 ‘위협이 증대될 경우 추가적 조치의 검토’,도쿄에서는 ‘다자대화 프로세스에 대한 강한 기대’를,그리고 베이징에서는 ‘한반도문제의 당사자로서 건설적인 역할’ 등 자구 하나하나에 매달리고 그 의미 해석에 따른 국내외의 파장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북핵문제는 자칫 엄청난 사태를 몰고 올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하고도 민감한 사항이다.이 문제를 놓고 주변국 모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교차하고 있다.경쟁적인 주변 강국을 상대함에 있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고,더구나당사자인 북한이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도 우리 정부의 고충을 더해주고 있다.그러나 진짜 문제는 북핵문제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과 목표,정책과 전략,의지와 역량이 부족하고 부실하다는 데 있다.누구를 탓하고 변명하거나 우리끼리 내부 소모전을 벌이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
21세기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은 9·11 이후 본토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은 보통국가화하는 것을 목표로 정치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15억 인구를 가진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미국과 어깨를 겨룰 세계 강국으로 도약하고 있다.좋건 싫건 이러한 국가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21세기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새로운 선택은 발상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하다.무엇보다 북한문제를 통해 국제사회를 바라보던 시각부터 교정해야 한다.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는 6·15공동선언의 신화에 묻혀 국가역량을 남북관계 개선에 쏟아 부었고 민족과 통일이란 구호 속에 남남갈등으로 허송세월하였다.서독은 통일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에 치중하였고 구호와 상징보다는 실질적인 동독 주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치중하였다.통일도 민족공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통합유럽의 일원으로서 접근함으로써 평화적으로 달성하였다.
남북관계의 개선도,민족과 통일도 우리에겐 중요한 역사적 과제이다.그러나 앞으로는 우리 사회 내부와 국제사회로부터 남북문제,북한문제,통일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해야 한다.선택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세워야만 21세기 우리의 희망과 미래가 있다.
올바른 선택 다음은 집중이다.미·일·중 3국과의 정상회담 최대 성과는 대통령이 변화하는 주변 3국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21세기의 새로운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하였다는 것이다.미국과의 완전한 동반자 관계,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전면적 협력동반자로서의 한·중 관계는 향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의 기본 목표이자 생존 전략이다.
지난 시기 우리는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킴으로써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딛고 고도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그러나 남북관계만 잘되면 모든 걸 망쳐도 좋다는 사고가 우리 정부의 관심과 역량을 분산시켰으며 국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IMF는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나 정상회담 이후 국민소득 1만달러 고지는 몇 년째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동굴속의 민족공조’를 접고 국제사회와의 완전한 동반자관계,새로운 파트너십,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역량과 국민의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한다.그러한 선택과 집중만이 북한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유 호 열
고려대 교수 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