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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이즈미 인기 돌풍에 日정가 판도 바뀐다

    24일 치러진 도쿄도 의회 선거는 ‘고이즈미 인기’의 위력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지지율 90%라는 일본 국민의 이상열기가 투표라는 정치행위와 접목돼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여야 각당은 25일 선거 결과를 토대로 7월 말 참의원 선거대책 수립에 착수했다. 연립 여당은 고이즈미 열기를 7월까지 이어가는 묘책을,야당은 열풍을 차단할 대책을 세우느라바쁜 하루를 보냈다. ■무관심층이 움직였다 4년 전(40.80%)과 비교해 투표율이10%포인트 껑충 올랐다.정치 무관심층이 대거 투표장으로발을 돌렸다는 얘기다.선거 전의 각종 여론조사를 보더라도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생겼다는 국민이 크게 늘었다. 무관심층이 돌린 발길은 상당수 자민당으로 향했다.고이즈미 총리가 지원 연설을 해 준 자민당 후보 13명 전원이 당선하는 이례적인 기록도 남겼다.그와 ‘단짝 여배우’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상,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의 아들인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행정개혁상은 자민당 열풍의 주인공이었다. 도의회제2당에서 제4당으로 추락한공산당이나 1석도 차지하지 못한 사민·자유당은 고이즈미 총리의 위력에 짓눌린모습이었다.민주당도 22석을 차지해 간신히 체면은 세웠지만 예상에는 못미쳤다. ■참의원 선거 전망 고이즈미 인기가 확인된 만큼 자민당은참의원 선거에서 단독 과반수 확보에 자신감을 갖는 표정이다.높아진 투표율이 자민당 지지로 이어졌고 지난 98년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도쿄에서 약진했다는 점에 고무돼있다. 역대 도쿄도 의회 선거 결과가 양원 선거에 큰 영향을 주고 특히 자민당이 그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무관심층을 끌어들여 “압승하겠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marry01@
  • 도쿄都의회 선거 자민당 승리

    [도쿄 황성기특파원] 24일 실시된 일본 도쿄도 의회 선거(총의석 127석)에서 집권 자민당이 53석을 획득,승리를 거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에 대한 높은 지지율이 자민당 지지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나 오는 7월 말 참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의 약진이 예상된다. 자민당의 연립정권 파트너인 공명당은 23석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도의회 제2당으로 뛰어 올라 도쿄 시민들이 연정에도 일정한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풀이됐다.제2당(26석)이었던 공산당은 15석 밖에 얻지 못함으로써 제4당으로 추락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약진한 정당은 국회의 제1야당 민주당. 지난 의회 13석에서 22석으로 뛰어 오름으로써 고이즈미 내각에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는 데 대해 도쿄 시민들의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지역 정당인 도쿄·생활자네트워크가 5석,무소속·기타가 8석을 획득함으로써 기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감이 커진 것으로 드러났다.사민당과 자유당은 1석도 얻지 못했다.
  • [데스크 칼럼] 감동의 정치, 그 虛와 實

    여론은 민주당내 어느 세력보다 당정 수뇌부의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개혁·소장파 의원들에게 우호적이다.민심이란 실체가 없는 바람 같은 것이긴 하나 ‘민주당에 인물이 있구나’하며 이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소장·개혁파의 성명 파동이 당의 공식라인에 대한 항명에가까운 데도 지지를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정상 통로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행동’이라는 강변에도 불구하고 당정수뇌부의 전면 쇄신을 요구한 이른바 ‘거사(擧事)’가 민심의 반향을 모으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무엇보다 집권층에 대한 민심의 기대가 바닥을 치고 있기때문이다.의보재정 파탄 등으로 정부 정책이 신뢰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안동수(安東洙)전 법무장관의 ‘43시간 임명 파동’이 겹치면서 이들의 요구가 충정으로 이해되는형국이다. 물밑에서 중심인물로 거론되던 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이확대간부회의에서 전면으로 부상,성명 파동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동교동계와 각을 세워 온 그는 기자들에게 “최고위원이 아니었다면 성명에 동참했을 것”이라고 속내까지드러냈다.2선 후퇴한 권노갑(權魯甲)고문이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정 위원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을 때도 줄곧 침묵으로 버텨온 터여서 작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민심이반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정 위원과개혁·소장파들의 집단행동은 무모하리 만치 ‘탈(脫)정치적’이다.10여명,그것도 정치경험이 짧고 당내 기반이 취약한이들로서는 정치생명을 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행보인 탓이다.정 위원이 간부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도 그들을 에워싼 당내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방증한다. 이들 소장그룹의 행동이 아직 비판의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약간의 감동적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비세(非勢)의 소수가 다수의 실세 주류군에 저항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당을 위한 충정’이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통하는데 기인한다. 그러나 극적인 감동은 변화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의 이번 성명발표는 지난 97년초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소장파 의원들의 ‘시월회 파동’을 빼닮았다.96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민심이 신한국당을 떠나자 당정쇄신을 요구하며 젊은 의원들이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을 몰아쳤다. 4년 뒤에 재연된 민주당 소장파의 집단행동은 과거 신한국당 소장 그룹의 그것처럼 근본적으로 집권 실세들에 대한 부정의 범주에 속한다.최근 김근태(金槿泰)최고위원 등이 ‘과거정권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창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정치의 본질은 부정의 악순환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대학시절 한 은사는 한국정치사 마지막강의에서 “한국정치는 부정(否定)의 역사”라고 했다.민주당 정권은 자유당 정권을,공화당 정권은 민주당 정권을 부정하는 식으로 지난 정권을 부정함으로써 정당성을 찾은 역사라는 것이다.은사는 “이제는 긍정(肯定)의 정치로 전환할때”라며 강의를 맺었다.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의 역풍(逆風)을 불러오기 십상이다.긍정으로 가는 ‘큰 정치’의 길은 그래서 험난하고 멀다. 양승현 정치팀장 yangbak@
  • [씨줄날줄] 국가보안법과 민주화 운동

    우리나라 헌법은 무려 아홉번이나 바뀌었다.자유당 독재를비롯해 5·16,5·17 구데타 정권들이 자기들 편의에 따라 신발에 발 맞추듯 바꿔버린 결과다.천만다행인 것은 그렇게 수난을 당하면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는 무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천만다행’ 때문에 오히려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있는 정도가 아니고 너무나 많다.총칼로 헌정을 뭉개버린 사람들도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한 것이 불행의 시초인 것이다.차라리 이들이 스스로 독재를 표방했더라면 민주 인사들의 죄목이 엉뚱하게 국가보안법 위반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국가보안법 관련자들에 대한민주화 운동 판정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다.이들이 지난 6개월 동안 1000여건의 심의를 하면서 국가보안법 관련사건은 한 건도 손대지 않은 것을 보면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아마도 이들의 고심은 국가보안법 관련자를 일률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물론 선별적으로 한다 해도 실정법상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기준이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관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에 신청된 국가보안법 관련 건은무려 900여 건이나 된다고 한다.물론 엄정하게 가려 봐야 알겠지만 이들 대부분은 적용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담당자의 자의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고무,찬양’그리고‘불고지죄’ 피해자들이다.그나마 이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했거나 공안기관의 조작에 따라 용공의 굴레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다. 양심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근안이라는 인물이 실재했듯이 과거 공안기관이 무수한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따라서 ‘심의위’는 옥석 구별이 지난한 개별사안을 다루기 앞서 몇 가지 원칙이라도 먼저정해야 한다.그것은 첫째 고문 등으로 조작된 사건,둘째 개정 내지 폐지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찬양,고무,불고지죄’ 관련자,셋째 사회주의자임을 자칭하지 않고 북과 내통한증거도 없는 보안법 관련사건 등은 민주화 운동에포함시킨다는 원칙이다. 김재성 논설위원 jsjskim@
  • 맥못추는 日의 HOT

    신세대 보컬그룹 HOT가 일본에선 바닥을 기고 있다.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인기에 눌려 맥을 못춘다. 일본판 ‘HOT 그룹’은 28일 저녁 도쿄 시내 모처에서 만나 인기 회복책을 논의했다.묘수는 찾지 못했다.똘똘 뭉쳐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거니 하며 각자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HOT의 멤버는 민주당 하토야먀 유키오(鳩山由紀夫)·자유당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사민당 도이 다카코(土井 たかこ) 의원 등 야 3당의 대표들이다.일본에선 이들의 이름 첫 글자의 영문을 따 HOT라 부른다. 이들은 지난 3월부터 시작된 매주 월요일의 정례 당수 회담을 고이즈미 내각 발족 이후 부쩍 강화했다.웬만한 신세대 우상보다 인기가 높은 고이즈미 총리의 그늘에 가려 야당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라도 이겨내보자는 공동의 위기의식 때문이다. 3명 모두 일본 정계에서 독특한 컬러로 지지층을 확보하고있는 야당의 ‘대표 선수’다.상업정신에 투철한 대부분의일본 언론들은 ‘장사가 되는’ 고이즈미와는 달리 ‘팔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그래서 이들의설움은 더 크다. 정례 회담에서는 7월의 참의원 선거의 협력방안을 논의하는가 하면 고이즈미 인기를 깰 대책을 궁리한다.그러나 현재로선 묘안이 없어 더욱 답답해 하는 표정이다. 그래도 야당쪽에서는 개헌이나 집단적 방위권 행사 등에서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인 오자와 당수와 도이 당수가 한 자리에 앉아 정국을 숙의하는 것 만으로도 드문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그러나 3당의 정치적 입지가 워낙달라 대여(對與) 투쟁의 공동이념 만들기 같은 ‘작품’이나올 지는 미지수다. 물과 기름격인 ‘HOT’가 공동전선을 펼 만큼 고이즈미 총리의 존재는 야당에게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이 28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고이즈미 총리는 내각 발족 직후보다 2% 포인트 높은 87%를 기록했다.역대 어느 총리도 이런 ‘수퍼 인기’를 누린 적은없었다. 일본인의 이상열기가 ‘위험 수위’에 오지 않았는가 하는걱정섞인 분석을 일부 일본 언론이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 伊총선 ‘중도우파’ 승리

    13일 실시된 이탈리아 총선에서 언론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중도우파 ‘자유의 집 동맹’이 상·하원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성공,일단 승리했다. 이에 따라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7개월 단명’으로 끝났던 한을 풀며 재집권에 다가서게 됐다.베를루스코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59번째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연정구성에 참여한 극우정당이 투표 결과에 불만을내비치고 있어 정국 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탈리아 내무부는 14일 중도우파가 이번 총선에서 163석을 차지,과반수를 넘어섰다고 발표했다.반면 프란체스코 루텔리 전 로마시장이 이끄는 중도좌파 ‘올리브나무 동맹’은 106석을 차지했다.특히 상원에 출마한 6명의 현직 장관이 선거에서 탈락하는 등 중도좌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이탈리아 상원은 선출직 315석과 종신직 9석 등 324석으로 이뤄져 있다. 75%의 직접선거와 25%의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로 구성되는 하원 선거에서도 중도우파 동맹이 앞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총 630명을 뽑는 하원에서 중도우파는과반수 315석을 넘는 330∼360석을 얻은 것으로 집계됐다.반면 중도좌파는 250∼280석을 얻는데 그쳐 14일 패배를 공식시인했다. 중도우파의 승리에도 이탈리아는 정국 불안을 면치 못할전망이다.이탈리아 총리는 안정된 정국 운영을 위해 상·하원 모두의 지지가 필요하다. 특히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군소 정당들의 득표가 연정구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례가 많았다.군소 정당들이 그동안 잦은 연정탈퇴를 반복,이탈리아 정치불안의 원인으로지목돼 왔다.이번 총선에서 군소 정당들은 아직 우파와 좌파 중 어느 쪽과 제휴할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관심의 촛점은 중도우파 동맹에 참여한 움베르토 보시의북부동맹.정당들이 하원에서 의석을 갖기 위해서는 득표율이 4%를 넘어야 한다.14일 새벽까지 이탈리아 전역에서 투표가 계속되는 등 선거혼란으로 인해 선거결과의 공식발표가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보시의 북부동맹이 4%를 얻었는지가 아직 불투명하다. 이에 대해 보시는 “우리가 자유의 집 동맹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했지만 결과는 비참하다”며 연정 탈퇴 의사를 비쳤다.보시는 지난 1994년에도 연정 탈퇴를 발표,베를루스코니를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인물이다.1996년 총선에서북부동맹은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었다. 한편 유럽연합은 이탈리아 총선을 앞두고 극우정당들이 포함된 우파동맹이 승리하면 지난해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극우정당인 자유당이 승리했을 때처럼 이탈리아에 제재를 검토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에 따라 14일 베를루스코니의 총리 당선 소식에 유럽언론들은 비난은 자제한 채 주의를 촉구하고 나섰다.네델란드와 폴란드 언론들은 베를루스코니의 부패 스캔들에 대한 의혹을 보도하면서 유감을 표명했다.반면 프랑스 정부는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서도 오스트리아 총선 때처럼 이탈리아 정부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밝혔다. 로마 외신종합
  • 4·19 통일운동차원 재조명 필요

    올해로 4·19민중항쟁 마흔 한돌.1960년 제4대 정·부통령선거가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치닫자 이에 항거하고 나선 민중들은 마침내 정권을 무너뜨렸다.그러나 70년대까지만 해도 4·19는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 정도로 평가돼 왔고,80,90년대 들어서야 민족·민주운동 측면에서 조금씩 조명되기 시작했다.반세기에 걸친 남북대결 구도하에서 4·19를 통일운동,남북문제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소장 현대사연구자들이 펴낸 ‘4·19와 남북관계’(민연)는 제목부터가 다소 낯설다.사실 따지고 보면 4월 민중항쟁 시기는 민주화문제,통일문제,냉전체제의 변동을 비롯한 국제문제 등 여러 쟁점에 대해 백가쟁명이 이뤄진 시기라고 봐야 한다.그러나 그동안 4·19 관련 연구서는 정치사,운동사를 위주로 국내문제에 국한돼 왔다고 할 수 있다.이책은 바로 이같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4월혁명의연구영역을 넓힌다는 취지에서 기획,집필된 것이다. 먼저 한모니까(이화여대 사학과 박사과정)는 ‘4월민중항쟁시기북한의 남한정세 분석과 통일정책 변화’에서 북한의상황 분석을 통해 4·19가 대남정책과 통일정책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려 했다.이를 위해 그는 당시 평양주재 러시아대사 푸자노프의 ‘비망록’ 등을 입수,분석했다.이에 따르면 1960년 8월 김일성 수상이 제안한 ‘과도적 연방제’방안은 이미 1950년대 중반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의 등장이후 소련측에서 먼저 제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혜영(현대사자료실 연구원·이화여대 석사)은 4월항쟁의결과 위에서 치러진 7·29 총선의 전개과정과 성격을 분석한 논문에서 “사회당 등 혁신정당이 대거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선거에서 실패하고,구악의 뿌리인 자유당계 인사들을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장면 정권의 약체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특히 그는 4월민중항쟁 이후 첫 선거여서 한국 선거사상 가장 공명하게 치러졌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자유당계 인사들의 대거 출마와 민주당내 신·구파 갈등으로 실제로는 대단히 혼탁한 선거였음을 밝혀냈다. 또 김보영(민족통일연구소 연구원·한양대 박사과정)은 ‘4월민중항쟁 시기의 남북협상론’에서 4·19 학생통일단체와혁신정당,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등 혁신단체에서 새롭게 제기한 ‘남북협상론’을 본격적으로 재조명하였다.그는 61년초 영남일보에 장기연재된 김영춘의 글을 집중분석하면서이 글이 남한에서 연방제를 본격 주장한 최초의 글이자 당시 북한에서 주장한 ‘과도적 연방제’보다 더 세련된 구조를 가진 글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홍석률(서울대 강사·박사)과 정창현(중앙일보 기자·국민대 겸임교수)이 공동으로 집필한 ‘4월민중항쟁 연구의 쟁점과 과제’는 지난 40년동안 우리 학계에서 이뤄진 4·19 관련 연구성과를 분야·쟁점별로 총정리한 것.이들은“그동안의 4월항쟁 연구가 역사적 사실 복원 차원이었다면앞으로는 차원을 한단계 높여 시기별 연구별로 연구영역을넓혀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시각·방법론 차원의 연구에서 탈피해 새로운 자료발굴은 물론,4월민중항쟁의 의미와 성격을 전후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시켜 체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만1,000원정운현기자 jwh59@
  • 이승만·이기붕일가 재산 지금돈으로 93억

    ‘4·19혁명’에 의해 무너진 자유당 정권의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과 이기붕(李起鵬)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재산이 요즘 가치로 93억원 정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공개 청구에 의해 정부기록보존소(소장 조기현)가 18일 공개한 ‘특정조사위원회 관계철’에 따르면 4 ·19혁명3개월 후인 7월 허정(許政) 과도내각은 국민들의 과거 청산요구에 부응,특정재산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승만·이기붕일가의 국내외 재산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A4용지 436쪽 분량에 달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전대통령의재산은 15억환,이기붕 가족의 재산은 5억환 정도였다.이 둘의 재산 총액(20억환)은 서울시의 소비자물가 변동(46.4배)을 감안할 때 지금 돈으로 92억8,000만원(1원은 10환)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전대통령 재산으로는 서울 종로구 사저인 이화장(梨花莊)과 한일은행에 예치된 예금 625만4,953환(2,900만원 상당)이 있었으며 당시 이화장에서는 골동품과 미술품 100여점이 확인됐다.또 이기붕 가족의 재산에는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저택과 예금액 6억7,000만환(31억900만원 상당)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재산은 대부분 국가에 환수되지 않은 채상속인이나 연고자에게 양도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기고] 교과서 왜곡과 한일교류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개방에서 비롯된 한·일 양국의 우호적 분위기는 두 나라사이를 가로막던 지난 역사의 어두운 장막을 걷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혹 이러한 표현이 지나친 감상이라면월드컵 공동개최와 대중문화 개방을 통해 한·일 두 나라가 ‘매우 뜻깊은 진전’을 이루어냈다는 말로 바꿔도 무방하다.이는 화해와 우호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면 누구나동감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조마조마하고 마음을 졸여온 불안이 현실로 나타났다.그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다. 모처럼 맞이한 화해 분위기를 초석삼아 21세기 한·일 관계에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 나아가고자 열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교과서 왜곡’은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없다.특히 필자처럼 민간교류에 몸담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다. 국제관계는 모름지기 서로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물론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다만 상대방과의 역사적 관계,현재 상황,미래 등을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선린외교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유아독존 식의 외교관계를 성립할 수 있는 나라는 과거에 없었고,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전면에 나서기 전부터,그러니까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대중문화개방으로 비롯된 해빙무드가 시작되기 전부터 한·일 양국에는 미묘한 흐름이 일어왔다.독도 영유권 분쟁,일본 정치인들의 망언,군대위안부 등의 과거사 문제….그럼에도 그것들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비단 해묵은 문제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모처럼 조성된 화해무드를 흐리지 말자는 양국사이 무언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필자는 바로 이런 부분이 현명한 정치요,외교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번 ‘역사교과서 문제’는 경우가 다르다.교과서란 말 그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침이요,그 나라의 정체성과도 연관된매우 중요한 사안이다.교과서,그것도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생들의 교과서에 주변국과의 선린외교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분명 잘못된 일이다.일본 국내에서 아무리 객관적 평가를 한다 해도 주변국들이 반발한다면거기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시콜콜 교과서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겠다.다만‘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단체와 그들을 후원하는 일부 정치가·학자·언론인들에게 묻고 싶다.“자학에 빠진 일본 교과서를 바로잡는 것”을 반대하는 많은일본인들은 그렇다면 누구인가? 일선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본 교직원조합,야당인 민주당과 자유당 정치지도자들,또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400년 전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 도공들의 비극적 삶과 그 후손들이 겪은 갈등을 엮은 연극이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한·일 합작으로,그것도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운 이때공연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걸 쓴 이가 일본이 자랑하는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에서 극우가 전부는 아니다.우리는 양식 있고 선린관계를 원하는 일본인들과 교류를 계속해야 한다. 강 성 재 한일문화교류센터 대표
  • 4월의 문화인물 함석헌 선생

    독립운동과 민주·인권운동에 공헌하고 ‘씨알사상’을 정립한 함석헌(咸錫憲·1901∼1989) 선생이 4월의 문화인물로선정됐다. 함석헌 선생은 개신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후 주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소화해 동양의 고전과 조화시키면서 독창적인기독교 사상을 이룩한 종교사상가이자 역사를 가르친 교육자이며 민주·인권운동가. 평북 용천 출신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1919년 3.1만세 사건에 적극 참여한 후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편입,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스승으로 모시고 민족과 역사을 배웠다. 1947년 남하한 뒤 6.25 전쟁을 겪으면서 사상의 깊이를 더해 간 함석헌은 자유당정권과 군사정부 치하에서 민주화와인권운동을 하며 재야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월간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등의 글을 쓰는 등 문필 활동을 펼쳤다.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독특한 ‘씨알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파했고,말년에 퀘이커에 가입하여 평화운동에 진력하다 89년 세상을 떠났다. 서동철기자 dcsuh@
  • 2001 길섶에서/ 벼슬

    “인간은 지위로 평가받는다”고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다.그의 잣대로 보면 조선시대 대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이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존경받지 못할 인물임에 분명하다.이들은 살아생전 벼슬이라고는 해본 적이없기 때문이다.반면에 한말 총리대신을 역임한 이완용(李完用)이나 자유당시절 민의원 의장을 지낸 이기붕(李起鵬)이 추앙을 받아야 한다. 환득환실(患得患失)은 무엇을 얻기 위해 걱정하고, 얻은뒤에는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근심하는 경우를 이른다.“대개 훌륭한 선비는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한다.보통의 선비는 쉽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난다.하등(下等)의 선비는 벼슬에 나아가기를 쉽게 하고물러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명재상이던 안자(晏子)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얼마전에 새로 입각한 장관들은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라의종이요,명성의 종이요,일의 종이다”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한다. 박건승 논설위원
  • 현대 비서실 막내린다

    현대그룹 비서실이 32년만에 해체된다. 현대는 27일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의 별세로 비서실 조직이 더 이상 필요없게 돼 조만간 기존의 비서 4명을다른 곳으로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명예회장실은 당분간 남겨두기로 했다. 비서실 역사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현대건설 사장에서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69년부터 시작됐다.건설 사장때는 여직원 1∼2명이 잡일을 거드는 정도였으나,회장이 된 뒤부터비서라는 기구를 만들었고 직원도 4∼5명으로 늘렸다. 초대 비서실장은 이익치(李益治) 전 현대증권 회장.이 전회장 전에 자유당 시절 한희석 국회부의장의 딸인 한경자씨와 한글학자 최현배씨의 손녀인 최은주씨 등이 왕회장을 잠깐 ‘모신’ 적이 있다. 이 전 회장을 필두로 김재수(金在洙) 현대구조조정위원장,이병규(李丙圭)현대백화점 사장,이전갑(李銓甲) 기아차 부사장,홍사성(洪思成) 현대아산 상무,박찬종(朴^^宗)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이사 등이 뒤를 이었다.장수비서로는 이 사장(77∼91년)과 현대자동차 김경배 차장(91∼2000년)이 있다. 사람을 한번 쓰면 오래쓰는 왕회장의 성품탓에 지금까지왕회장 비서는 전·현직을 포함해 남자비서 14명,여비서 16명 등 30명을 넘지 않는다.비서출신의 한 관계자는 “현대그룹 비서실은 종합조정실역할을 해온 삼성 비서실과 달리개인비서의 성격이 강했다”면서 “왕회장이 건강했을 때는1년에 한두번씩 ‘부부 단풍놀이’를 갈 정도로 화기애애했다”고 전했다. 주병철기자 bcjoo@
  • [김삼웅 칼럼]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

    오늘(13일)은 함석헌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사상가·민권운동가·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때,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백성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세상이 공포에싸일 때는 ‘5·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찬양한 세력이 시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증대시켰다. 전두환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는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인 송건호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김삼웅 주필 kimsu@
  • 한나라 하순봉 부총재 발언 논란

    한나라당 하순봉(河舜鳳)부총재가 8일 “지난 연말 여권이저지른 ‘의원 임대’사건은 공산당이나 하는 짓”이라고 발언,논란이 예상된다. 하 부총재는 이날 여의도당사에서 이회창(李會昌)총재를 비롯해 전국 원내·외 지구당위원장들이참석한 가운데 열린 ‘야당 말살·정계개편 음모 규탄대회’에서 “해방 직후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당시 노동당당원을 민주당에 가입시킨 일이 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현 정권의 의원 임대는 자유당 정권때 ‘4사(捨)5입(入)’보다 더 한 작태”라고 덧붙였다. 하 부총재는 “DJP연합은 노추와 노망,노욕의 수치이며 죽을 때까지 (정권을)잡겠다는 망령”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또 “현 정권의 ‘강한 여당론’은 정신병자 같은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민주당 김현미(金賢美)부대변인은 “언제까지 50·60년대판 공산당 타령이나 할 것인지 한심하고 유치하다”고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모리총리 사임 촉구

    일본 4개 야당 지도자들은 21일 모리 요시로(森喜郞)총리의사임을 촉구하기로 합의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총재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자유당,일본공산당,사회민주당 지도자들과 회동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4개 야당이 모리 총리와 연립내각의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퇴진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그러나 모리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언제 제출할지는 합의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토야마 총재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불신임안을 제출할 것이라면서 4당 지도자들이 불신임안 제출 시기를 논의하기 위해 언제든 필요할 때 다시 만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연립내각에 참여하고 있는 공명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오는 7월 중의원 선거 참패를 피하기 위해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 고교실습선의 충돌사고 소식을 접하고도 내기골프를 계속 쳤다는 언론보도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리 총리가 퇴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모리 총리가 소속된 자민당의 한 고위 소식통도 내달초 중의원에서 2001 회계연도 예산안이통과된 후 모리 총리가 사임해야 한다는 것이 자민당의 기본 생각이라고 밝혔다. 도쿄 교도 연합
  • [씨줄날줄] 조용수

    언론사 세무조사,불공정 거래행위 조사에 이어 언론대책문건이 공개돼 정가에 언풍(言風)이 거세다.언론탄압이라는 야당의 공세에 1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자민련 송석찬(宋錫贊) 의원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일어난 ‘민족일보’사건 재판에 당시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역할을 거론하며 이총재의 정계 은퇴를 주장해 파문이 확대되고 있다.송의원의 이총재 공격에 한나라당 김정숙(金貞淑)의원은 ‘용공행위를 애국행위로 둔갑시켰다’며 또 다시 ‘색깔론’을들고나왔다.그러나 언론사 발행인을 사형에 처한 것은 일제때에도 유례없는 언론탄압이자 쿠데타정권이 자행한 ‘사법살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민족일보 조용수(趙鏞壽)사장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용공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것이다. 더욱이 그에게 신문사 설립자금을 줬던 것으로 알려진 이영근씨는 1990년 정부에 의해 국민훈장이 주어져 그가간첩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민족일보는 4·19혁명이 가져온 자유의 공간에서 우리민족의 비원인 통일문제와 소외된 근로계층에 대해집중적으로지면을 할애한 신문이다.당시 유력지가 5만부 정도를 발행할때 3만 5,000부를 발행하며 가판에서는 1위를 달렸다.창간 3개월 정도만 발행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경이적이다. 조용수는 6·25전쟁중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에서 주요간부를 지냈다.북송교포를 실은 열차가 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철로를 베고 눕는 등 재일동포의 북송을 적극 반대했고 비슷한 시기 조봉암(曺奉岩)을 사형으로 몰아간 진보당사건이 일어나자 조봉암의 구명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자유당 정권이붕괴하자 고국으로 돌아와 경북 청송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한다. 당시혁신계였던 그는 ‘평화통일론’과 ‘비미비소(非美非蘇)’를 주장했다. 통일의 방향은 ‘민족적·자주적’입장에서“강대국의 입김에 예속되어서는 안되며 미국이나 소련 어느쪽이든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는것이었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이산가족상봉,경의선연결사업등 남북화해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보면 조용수의혁신적인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죽음과 현재 야당과 언론들이 주장하는언론탄압,어느 것이 진정으로 언론탄압인지 돌아보게 한다. 박찬 논설위원 parkchan@
  • “경찰은 더이상 순사도 짭새도 아닙니다”

    “이제 경찰은 더이상 과거의 경찰이 아닙니다” 경찰청 공보관 강희락(姜熙洛)경무관이 1일 일선경찰의 어려움과 애로사항을 호소하면서 “거듭나는 경찰의 모습이 이 사회에 뿌리내릴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의 서한 1,000여부를 정부 각부처 공보관과 전국 언론사 편집국장,논설위원,사회부장 등 각계각층의 오피니언리더들에게 보내 눈길을 끌고 있다. 강 공보관은 11쪽 분량의 이 서한에서 과거 경찰의 총기사용 문제를예로 들면서 “경찰이 엄정하게 대처하면 ‘권력남용’이라고 하고,유연하게 대처하면 ‘무기력’하다고 비난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경찰은 더이상 일제시대의 ‘순사’나 자유당 시절 부정선거의 ‘하수인’,군사정권시절 최루탄으로 날을 지새며 데모나 막는 ‘짭새’가 아니라 공정한 법을 집행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경찰”이라고 강조했다. 강 공보관은 “2년여동안 이어져온 ‘무최루탄’과 ‘윤락가 단속’‘아셈 서울회의 경비’ 등에서 보여줬던 경찰의 모습을 이어가 국민으로부터 존중받는 경찰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면서 “앞으로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 경찰의 고충을 이해하고 경찰권 행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김삼웅 칼럼] ‘소용돌이 정치’의 현주소

    그레고리 헨더슨이 1968년에 저술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는 지금도 한국 정치의 속성을 이해하는 교과서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주한미대사관 문정관과 정치 담당 자문을 하면서 ‘소용돌이 치는’ 한국 정치의 현장을 지켜보고 분석한내용을 한권의 책으로 저술했다. 헨더슨이 한국에 체류한 시기는 이승만의 폭정이 절정에 달한 자유당 말기부터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우여곡절 끝에 ‘민선 대통령’에 취임한 기간에 해당된다. 헨더슨은 조선시대에서 일제 식민통치와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장면·박정희정권에 이르는 한국 정치의 양상을 정치문화와 정치 발전의 관점에서 분석했다.그리고 한국 정치의 본질을 네 부분으로 집약했다. 첫째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열쇠는 동질성과 중앙집중에있으며,둘째는 엘리트와 대중간에 매개 그룹이 없는 사회관계로 인해한국 정치의 역학은 사회의 모든 활동적 요소들을 태풍의 눈인 중앙권력을 향해 치닫게 하는 거센 소용돌이(vortex)를 닮았으며, 셋째는이런 중앙집중적환경 속에서 한국의 정치는 당파성과 개인 중심, 기회주의성을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하게 되었으며,마지막으로 이런 소용돌이 정치 패턴에 대한 처방은 다원주의와 분권화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외국인이 분석한 한국 정치의 틀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양상으로 운영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더욱 안타까운 일은한국 사회의 소용돌이 패턴이 중앙정치 등 상부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저에도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사회 발전과 정치 변동에 따른 정치인의 새로운 충원과 도태가 이루어지고 헌법과 국회법 등 법률과 제도가 바뀌었으며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어느 정도 분권화도 이루어졌다.또 수평적 정권 교체로인권이 크게 신장되고 사법권과 민간단체들의 영향력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다원성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정치문화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오히려 소용돌이 패턴은 근대화 과정에서 변종되어 악화된 감이 없지 않다.제도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의인주의,사적관계를 중히 여기는 사고,형식주의나 명분주의 집착 등전통적인 태도는 여전히 강하게 이어지고 있다.혈연·학연·지연 등연고주의는 개인이나 각급 단체,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부동의 사회생활법칙으로 자리잡고 있다.무엇보다 저자가 소용돌이를 잠재울대안으로 제시한 중간 매개 집단과 정치 세력들마저도 자체 내에 소용돌이 패턴을 복제하는 경향을 보인다.”(김달중,소용돌이의 정치해제) 지금 우리 정치는 다시 ‘소용돌이’의 블랙홀로 다가서고 있다.1996년 4월에 실시된 제15대 총선때 1,000억원대에 이르는 안기부(현 국정원)자금이 구 여권에 흘러 들어갔다는 검찰의 수사가 정치권을 강타하면서 정국이 혼미 양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경제 회복을 위한 일대 계기가 되기를 바랐던 청와대 여야 영수회담이 입씨름으로 결렬되면서 타협을 모르는 여야 대립은 안기부 선거자금문제가 터지면서 극한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한국 정치의 속성대로 또 한차례 정국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것이고,이로 인해 경제 위축과 사회적 혼미는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검찰은 그동안 실추된 권위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철저하게 진실규명 차원에서 수사해야 한다.국가 안보의 막중한 책임을 맡은 안기부의 국가예산이 특정 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전용됐다면 용서받기 어렵다. 민주당은 이 사건을 국면 호도용이나 다른 정치 목적에 이용해서는안된다.어디까지나 진실규명에서 검찰의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한나라당도 범법 사실을 야당 탄압으로 몰아 정치 공세를 펼 것이 아니라진상규명에 협조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소용돌이 정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과감한 분권화와 지방자치의 활성화 그리고 정당의 민주화가 요구된다.이것은 헨더슨의 주문이기도 하다. 국민은 지금 경기 침체와 실업 그리고 때마침 불어닥친 폭설과 추위에 떨고있다.정치권은 안기부자금 구 여권 불법 유입사건이 ‘사회전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지 않도록 자제하면서 진상규명과경제 살리기에 협력해야 할 것이다. 김삼웅 주필 kimsu@
  • 2001 길섶에서/ 눈은 녹는다

    밤새 눈이 내렸다.세상이 목화솜으로 덮인 듯 포근하다.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온 나라를 천사의 날개로 감싼 모양이다.그러나 환상의 신세계는 금세 질척거리는 현실로 바뀐다.순백의 세계가 오래가지 않는 것은 세상을 일색으로 덮었기 때문이다.뒤끝이 질척거리는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상은 단색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잿빛 하늘,검은 대지가 없으면은빛 산마루의 눈부심도 없다.검은 것이 검고 흰 것이 희기 위해서흑백은 같이 존재해야 한다.빨·주·노·초·파·남·보,일곱색깔도함께 있을 때 제 색깔이 빛난다. 사회주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세상을 붉은 색으로 덮으려 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상의 선’으로 못박아 놓은 강령에 이미 실패가 예고돼 있었던 셈이다.적색이든 백색이든 독재가 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한국 현대사는 자유당,유신,5공,‘설상가상’의 연속이었다.우리가 겪고있는 오늘의 고통은 그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눈이 녹을 때의 질척거림처럼. 김재성 논설위원
  • 대한매일 신년특집/ 대한매일의 어제 오늘 내일

    구한말 항일·민족언론의 필봉을 드날린 대한매일신보는 격동의 한세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질곡과 영욕의 역사로 얼룩져 왔다.일제하에서는 총독부 기관지로 친일보도에 앞장섰으며,해방후 독재정권 하에서는 권력의 대변지로 충실했다.그러나 반세기만의정권교체를 계기로 창간 당시의 제호를 되찾고 다시 태어났다.소유구조 개편을 통한 공익정론지로의 변신을 꾀하는 대한매일의 어제와 오늘,그리고 내일을 정리한다. *어제. 대한매일은 구한말 대표적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정신을 계승한 국내 최고(最古)의 공익 정론지다.1904년 7월18일 영국인 베델(한국이름 裵說)과 애국지사 양기탁(梁起鐸)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잘 알려져 있듯이 구국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다.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밝혔고,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으며,‘처처의병(處處義兵)’이란 고정란을 두어 항일의병투쟁을고무했다.암울한 시기에 국권수호의 보루이자 민족자존의 희망이었던 것이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8월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해방후 매일신보는 미군정청을 거쳐 정부로 귀속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이후 서울신문사의 주주총회 및 간부 인사는 공보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952년 4월 정관개정에 따라공보처장이 공식적으로 서울신문사 회장에 앉게 되었다.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은 1960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 서울신문은 우리 현대사와 영욕을 같이 했다. 이승만 정권 초창기 한때는 좌경·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특히 제헌국회가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구성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극구 지원·옹호하는 등 민족문제에 관해 여타 어느 신문보다도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정권의 대변지로 전락한 이래 역대정권의 ‘홍보지’노릇을 해왔다.이런 연유로 ‘4·19’당시 성난 시위군중에게 사옥이 불탔으며,민주화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80년대 후반에는 한동안 대학가·재야진영으로부터 취재거부를 당하기도했다. 이로 인해 서울신문의 구성원들은 만성적인 정체성 위기에 시달려 왔으며,해바라기성 언론의 전형으로 불리기도 했다.결국 집권자가 경영진을 임명하는 구조하에서 언론 본연의 비판·감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신문사 경영 역시 악순환을 거듭하였다.이는신문 판매·광고에 바탕을 둔 신문사 경영원칙이 시장논리보다는 정부의 계도지 보급정책에 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러한 서울신문이 50여년 굴절의 역사를 접고 새로 태어났다.1998년 11월11일 서울신문은 ‘대한매일’로 제호을 바꾸고 재창간을 선언했다.▲공익을 앞세우는 신문 ▲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이라는 다짐을 실천해가며 대한매일은 새로운 시대를 힘차게 열어가고 있다. 제호를 회복하며 다시 태어난 대한매일은 지난 2년여동안 공익 우선의 민족정론지로서 언론의 소임을 다했다.그것은 먼저 지면을 통해나타났다.특히 근현대사의 왜곡을 바로 잡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련의 장편 기획기사들은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제하 친일파들의 반민족 행각을 자료와 증언으로 고발한 ‘친일의군상’,독재정권과 맞서 민주·인권투쟁을 벌이다 민주제단에 몸을바친 민주투사들의 투쟁사를 조명한 ‘민주열사 열전’,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시민들이 세운 장면 정권을 재조명한 ‘제2공화국과 장면’,일제하 단신으로 침략자를 처단하거나 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지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의·열사들의 항일투쟁기를 복원한 ‘의열 독립투쟁’,재미언론인 문명자씨의 40년간에 걸친 극비 취재파일을 단행본 출간에 앞서 발췌연재한 ‘문명자회고록’,그리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지의 항일유적지를 현지답사·증언을 통해 재조명한 ‘해외 항일유적지를 찾아서’등은 최고의 민족정론지에 값하는 뜻깊은 시리즈였다고 할 수 있다. 재창간 이후 거듭된 일련의 ‘정직한 역사 되찾기’작업은 각종 출판사업으로도 구체화했다.지난 99년 창간 95년과 백범 김구선생 서거 50주년을 맞아 펴낸 ‘백범 김구전집’(전12권)이 그 대표적인예이다.백범 암살 반세기만에 나온 이 전집은 백범에 관한 국내외 문헌자료를 총망라한 역작으로 꼽힌다. 대한매일의 또 하나의 얼굴은 ‘행정뉴스’면이다.공직사회의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행정뉴스’면은 맨 뒷면에 넣어,1면과 같은 체제로 편집해 ‘1면이 둘인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특화된 내용이 돋보여 지난 98년 5월 선 보인 이래 열독률이 꾸준히높아지고 있다. 행정뉴스 면은 단순히 공직사회 소식을 전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공직사회의 구조적 문제점과 애환·비리 등을 낱낱이 짚어 건전한공직사회를 선도하는 지면으로 평가받았다. *내일. 지난 한세기 동안 ‘영욕의 역사’를 밟아온 대한매일은 이제 새로운 한 세기를 맞아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우선 ‘원죄’와도 같은 공적 소유매체로서의 틀을 벗고 ‘독립언론’‘공익언론’으로 거듭나고자 몸부림 치고 있다.99년 12월30일 자매지 ‘스포츠서울’이분사되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끄는 ‘스포츠서울21’로 새 출발한 데 이어 지난 10월에는 편집국장을 편집국 기자들이 직선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본사 편집국장은 편집인을 겸한,신문편집의 실질적인 총책임자로 편집국장 직선은 공정보도를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편집국장 임기는 1년으로,임기가 끝난 뒤에는 중간평가를 통해 연임할수 있도록 해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편집국장 직선제를 관철한 대한매일은 이제 위상 재정립 작업의 핵심이라 할 소유구조 개편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다.‘균등 무상감자후 유상증자’등을 골자로 한 소유구조 개편안은 언론개혁 차원에서범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가운데 정부가 언론사를 소유한 곳은 없다.정부의 언론사 소유는 시대에도 맞지않을 뿐더러 오히려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연합뉴스와 대한매일의 정부소유 구조개편 문제는 현정권의 공약사항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대한매일은 소유구조 개편을 통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과감한 지면혁신을이뤄나갈 계획이다.그동안 대한매일 지면이 독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은 제작자 위주의 ‘일방적 제작방식’이었다면,앞으로는 독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쌍방향식 제작태도’로의 일대전환을 가져올 것이다.특히 남북관계 개선으로 종래의 적대적 대북보도 태도는 일대 전환을가져왔다.아울러 지방화시대와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인한 지면의 다양화 역시 시대적 요청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한매일은 98년 재창간을 계기로 ‘공익정론지’를 지면제작의 모토로 표방했다.이는 국내 대다수의 언론이 사주나 정치권 등 언론사 내외의 압력으로 인해 공익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향후 소유구조 개편을 계기로 대한매일은 명실공히 공익정론지로 거듭나 시대를 이끌고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고급지로 발돋움할 것이다. 정운현 김종면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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