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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 인 포커스] 라시다 다티 프랑스 새 법무장관

    |파리 이종수특파원|‘화장품 판매원, 간호조무사에서 법무장관까지.’ 라시다 다티(42) 프랑스 신임 법무장관의 ‘인생역정’이 화제다. 그녀는 지난 18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단행한 ‘1기 내각’에서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 이민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장관, 그것도 내각 서열 7위의 법무 장관에 임명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녀가 가난한 집안 환경탓에 고학으로 열정적으로 학업을 이어가면서 남다른 성취 욕구로 자수성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모으고 있다. 그녀는 1965년 11월27일 프랑스 동부 소도시 샬롱-시르-사온에서 모로코 노동자 출신의 아버지와 알제리인 문맹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수입으로 영세민용 임대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그녀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어 ‘주경야독’을 해야 했다.14세때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화장품 판매원을 하기도 했다.16세부터 18세까지는 밤에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공부했다. 당시 그녀가 일했던 생-마리 병원의 간부인 샹탈 로베르는 “1980년대 중반쯤 우리 병원에서 일을 했는데 여름방학 때는 거의 매일 일하다시피했다.”며 “자기에게 엄격하고 성공할만한 자질이 보였는데 법무장관이 돼 자랑스럽다.”고 회고했다. 다티 장관의 삶은 1986년 알뱅 샬랑동 당시 법무장관을 만나면서 큰 전환기를 맞았다. 주 프랑스 알제리 대사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샬랑동 장관을 만난 그녀는 “일자리를 좀 구해달라.”고 당차게 부탁했다.20여년 뒤 법무장관이 될 ‘재목’을 알아봤을까? 다티의 사연을 들은 샬랑동 장관은 다음날 식사를 대접하며 정유회사인 엘프 아키텐느사에 추천서를 써주고 직접 전화까지 했다. 샬랑동 장관의 도움으로 그럴듯한 회사에 처음 취업하게 된 그녀는 3년 동안 회계원으로 일하며 디종의 부르고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석사를 마친 뒤 마트라 통신사에 입사해 회계사로 전문성을 키워갔다. 이어 사주인 장 뤼 라가르데르의 눈에 띄어 영국의 유럽재건개발은행에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국제적 경험을 쌓았다. 내친 김에 1997년 2년 과정의 국립사법학교에 입학해 영역을 넓혔다. 이어 보비니 지방법원 연수생을 거쳐 아미앵 고등법원 재판소 판사, 에브리 법원 검사 등을 거쳤다.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그녀는 사르코지가 내무장관 시절에도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두 차례나 답장이 없었지만 세번째 편지를 보내 사르코지의 허락을 받아냈을 정도로 집념이 강했다. 마침내 2002년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2007년 1월엔 사르코지 후보의 공동대변인으로 활약했다. 법무장관 임명 소식을 듣고 “굉장한 순간이고 내겐 큰 영예”라고 일성을 터뜨린 그녀는 “대통령이 보여준 기대에 부응, 프랑스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vielee@seoul.co.kr
  • ‘승승장구’ 신영 첫 시련

    직접 건설을 하는 시공사가 아니라 종합 부동산개발업체로 승승장구해온 신영이 최근 실패를 맛봤다. 국내 1위 시행사로 자리매김한 신영에는 사실상 첫 실패라는 말도 업계에서는 나오고 있다. 신영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한 충북 청주시 복대동 대농지구의 대규모 주상복합단지 지웰시티 1차분 2164가구 분양이 차질을 빚고 있다. 지난 3월27일 이후 1∼3위 분양에서의 계약이 절반을 밑도는 수준이다. 이같은 계약 저조에 대해 신영은 느긋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신영 관계자는 14일 “극도로 침체된 부동산시장 상황과 비수도권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고려할 때 50%에 육박하는 분양은 비교적 선전한 편”이라며 “조급한 마음을 풀고 느긋하게 (분양완료를) 가을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신영이 지웰시티에서 재미를 못본 것은 최근의 부동산경기 침체에다 평당 분양가가 1140만원 정도로 고가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분양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에 분양했더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오는 9월에는 2차분 1940가구를 분양할 예정이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침체된 부동산시장이 이른 시일내에 되살아날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시청 공무원 출신인 정춘보 회장은 84년 신영을 세웠다. 초창기 ‘복덕방’에서 출발해 종합 부동산개발회사로 끌어올렸다. 자수성가한 셈이다. 신영은 지난 97년 처음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시그마Ⅱ 1094가구를 성공적으로 분양하면서 부동산 개발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시 시그마Ⅱ 시공사인 한라건설이 부도를 맞았지만 신영은 한라건설을 끝까지 밀어줬다. 이후 99년 분당신도시의 주상복합 로얄팰리스(624가구)를 비롯해 지난해 김포 지웰시티(267가구) 등 아파트와 주상복합을 지어 성공적으로 분양해 나름대로 입지를 굳혔다. 신영은 2004년에는 대농을 인수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천재 골퍼’ 미셸 위와 2년간의 광고계약을 맺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계속했다. 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렸다는 말을 듣던 신영이 청주 지웰시티에서 뜻밖에 만난 미분양이라는 ‘암초’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주목된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Local] 제주 새화폐인물 김만덕 선정운동

    ‘김만덕(1739∼1812)을 새 화폐의 인물로.’ 한국은행의 2009년 고액권 발행과 관련, 제주 의녀 김만덕을 새 화폐 인물로 선정하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김만덕은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성공한 기업가이자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존경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나 유관순의 유명세에 가려 전국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경제의 기본 매개인 화폐 인물로는 손색이 없다고 한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장사로 자수성가한 김만덕은 1790년(정조 14년)부터 1794년(정조 19년)까지 제주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자신의 전 재산(1000금)을 털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도민들을 구제했다. 제주라는 변방과 여성, 상업이라는 최말단의 조건에서 김만덕은 국가와 남성, 양반, 관료도 하기 힘든 구휼 활동으로 당시 출륙금지령 하에서 제주 여성으로서는 첫 육지 나들이뿐만 아니라 임금까지 알현했다. 김만덕기념사업회는 오는 7월 ‘나눔의 1000섬 쌓기행사’를 갖고 김만덕을 화폐 인물로 선정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
  • ‘10억弗 넘는 세계부자’ 한국인 10명

    ‘10억弗 넘는 세계부자’ 한국인 10명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8일 발표한 ‘2007년 세계 부자’ 순위에서 빌 게이츠 미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총 560억달러(약 53조원)로 13년째 세계 최고 자리를 지켰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520억달러로 2위를, 멕시코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은 490억달러로 3위를 유지했다.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 장자 대열에 오른 946명 가운데 한국인은 이건희 삼성 회장과 카자흐스탄에서 대형 구리채광업체를 운영하는 차용규 카작무스 대표이사 등 10명이다. 전체적으로 억만장자의 숫자가 작년보다 크게 늘어난 가운데 연령대가 갈수록 젊어지고 있으며, 러시아와 인도 부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평균 연령은 62세로 전년보다 두살 정도 젊어졌고, 전체의 60%가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자수성가형 부자였다. 인도는 36명의 부호가 세계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한 반면 일본은 24명이 리스트에 들었다. 러시아는 53명으로 독일(55명)에 이어 국가 순위 3위로 뛰어올랐다. 미국은 올해 새로 진입한 55명을 비롯해 모두 415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주말탐방] PB마케팅의 세계

    [주말탐방] PB마케팅의 세계

    “나이도 있으신 만큼, 안정적인 재테크가 중요합니다.15억원 가운데 10억원은 정기예금 쪽으로 돌리고, 펀드 등은 5억원만 투자하시죠.” 지난 9일 오전 우리은행 PB(Private Banking) 센터인 서울 서초동 강남교보타워 ‘투체어스’에 들어선 이모(58)씨 부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곳 김인응 팀장이 이들을 상담실로 안내한다. 부부 중 남편은 중견 기업 최고경영자(CEO). 경기도 지역의 땅 보상금 5억원과 평소 갖고 있던 10억원을 합해 모두 15억원을 김 팀장에게 맡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5평 남짓한 상담실 안은 모두 따뜻한 갈색 톤의 카펫과 가구 등 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선율도 은은한 분위기를 더한다. 이씨는 “처음 왔지만 마치 절친한 친구 집에 온 기분”이라면서 “오늘 상담을 통해 상속, 증여, 자녀 장래 상담 등까지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좋은 동반자를 얻었다.”고 흐뭇해했다. ●PB고객 서비스는 연중 무휴 시중 은행들의 PB마케팅이 진화하고 있다. 단순한 금융 자산 관리에서 벗어나 고객의 재산 전반에 대한 ‘토털케어’를 제공하고 있다. 음악회, 미술 전시회, 와인 품평회 등은 기본. 자녀 맞선 프로그램은 물론 풍수지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연중 24시간 무휴는 PB 서비스의 기본이다. 시중은행 PB(Private Banker)들의 일상은 극소수 ‘VVIP’ 고객들을 위해 채워져 있다. 김 팀장의 하루의 시작은 오전 6시. 이때부터 한 시간은 오롯이 독서에 할애한다. 경제학, 심리학, 문학 등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한다. 미팅을 위한 일종의 ‘기초 작업’이다. 출근 시간은 7시40분쯤. 각종 경제 기사와 주가 동향, 금융 지표 등 국내외 시장에 대한 분석에 들어간다. 오전 9시에는 주요 고객들에게 그날의 중요 정보를 이메일로 발송한다. 오전 10시까지는 우수 상품이나 자산 운용방안 등 그날의 미팅을 위한 자료를 정리한다. 일과 시간에는 본격적인 고객과의 미팅이 시작된다. 김 팀장이 하루에 만나는 고객 수는 평균 5명. 그가 관리하는 10억원 이상 금융 자산고객 70여명은 한 달에 한 번은 그를 찾는다. 고객의 대다수는 기업 총수나 변호사, 의사 등 몸이 두 개는 필요한 직업을 갖고 있다.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경우도 많다. 상담을 마치고 나면 오후 9시를 넘기기 일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본과 중국, 베트남 등 해외 주식 시장과 글로벌섹터 등의 정보를 체크한 뒤 오후 10시에야 퇴근한다. 김 팀장은 주말에는 기업체 등 외부 강연에 주로 시간을 쏟는다. 신규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다. 얼마 전 강연에서도 의사 5명을 새 고객으로 맞았다. 그렇지만 그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On’ 상태다. 주말에도 상담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PB는 성실성과 정직성, 전문성을 모두 갖춰야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서 “10년 가까이 관계를 유지하는 고객만 5명이 넘는다.”고 했다. ●골프와 와인, 미술 등은 필수 골프와 와인은 PB들의 필수 취미.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것을 넘어 호흡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취향도 비슷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은행 강남WM센터 이만수 부장은 PB계에 처음 와인 마케팅을 도입했다. 지난 2003년 처음 PB들을 대상으로 한 와인동호회를 만든 뒤, 이를 영업에 적용했다.PB들의 상당수는 포도주를 관리·추천하는 소믈리에 교육 코스를 밟는다. 미술, 음악 등 다른 예술 분야 역시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의 세미나를 통해 평균 이상의 ‘내공’을 쌓고 있다. 이 부장은 50여명의 고객 자산 2100억여원을 관리하고 있다. 이 부장은 “2000년대 들어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신흥 부자들은 대부분 외국 경험을 하면서 와인이나 미술 등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시작하게 됐다.”면서 “이들에게 상류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에티켓과 창의적인 투자를 도울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은 최근 레슨 프로골퍼 출신인 박경호씨를 골프 컨설턴트로 영입했다. 박씨는 PB 고객들을 대상으로 주 2차례 필드 레슨을 갖고, 고객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한 골프 교실도 진행할 예정이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10월 LPGA 투어인 ‘코오롱 하나은행 챔피언십’에 최우수 고객 120여명을 초청, 프로 골퍼들과 라운딩을 주선하기도 했다. 음악회, 미술 전시회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하나은행은 지난 2004년부터 경기도 신갈의 하나은행 연수원 내 야외공연장에서 PB 고객들을 대상으로 연간 10회 정도 서양 고전음악 중심의 ‘하나빌 숲속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2004년 갤러리 뱅크를 처음 선보인 국민은행은 기존의 전시 일변도에서 벗어나 올해에는 미술 동호회 구성과 아트 투어를 유도,PB 고객과의 ‘스킨십’을 높일 계획이다. 이밖에 기업은행은 풍수지리 서비스도 PB 고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VVIP 혼사까지 PB 몫 PB마케팅은 사적인 영역에도 침투하고 있다. 고객의 자녀 혼사는 빼놓을 수 없는 서비스. 하나은행은 정기적으로 VVIP 고객 미혼 자녀들의 맞선 행사를 열고, 고객 자녀들의 커뮤니티 모임도 주선하고 있다. 상류계층 형성을 유도하면서 현재 고객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물론, 미래의 고객까지 창출하는 일석 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5월 결혼정보회사 출신인 김희경 커플매니저를 PB고객부 커플매니징 팀장으로 영입했다. 김 팀장이 지금까지 주선한 고객 자녀는 모두 10쌍. 한 쌍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 고객자녀 초청 미팅파티도 일년에 두번씩 열고 있다. 김 팀장은 “한번 소개하면 99%가 만나겠다고 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면서 “결혼은 자산관리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인 만큼, 커플매칭 프로그램이 고객 유치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PB고객 어떤 대우받나 세계적인 투자기관 메릴린치는 지난해 우리나라의 백만장자 증가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2005년 말 기준 국내 은행권의 5억원 이상 고액 예금계좌는 약 8만여개. 총액은 260조원이 넘는다. 그해 기준으로 은행권 전체 예금의 32%에 해당한다. 은행권이 PB 마케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PB 마케팅이 처음 선보인 것은 1990년대 초반.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0년이 채 안 됐다. 우리은행 투체어스 강남교보타워 김인응 팀장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양한 실적배당 상품이 도입되고 해외시장 분석이 시작되면서 PB 마케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VIP 마케팅은 있었다. 그러나 명절 때 선물을 돌리며 예금을 유치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PB 마케팅은 종합적으로 자산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시중은행들은 PB 센터를 일반 영업점과 따로 두고 전문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다.‘일반인과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다. 대부분 고급 빌딩의 고층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특징. 상당수가 전용 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고객들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PB 센터에서 북적대는 은행 지점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발소리도 들릴 만큼 한적하다. 고객들의 상담 시간이나 횟수는 무제한이다. 고액의 투자나 세금, 이민 문제 등이 걸려 있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전담 PB와 얼굴을 맞대고 상담할 수 있다. 출장 상담은 기본. 신한은행과 기업은행 등은 상속·증여, 세무 문제 등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본점 차원에서 직접 고객을 찾아 자문을 해주기도 한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PB들이 본 한국 부자 유형 시중은행 PB들이 꼽는 한국의 부자는 상속부유층과 자수성가형, 그리고 벼락부자형 등 세 부류다. 상속부유층은 대대에 걸쳐 상당한 부를 유지한 케이스라 부에 대한 관리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면서도 일정 정도 이상의 교육을 받은 경우가 많다. 상당수가 특정 예술 분야에 고급 취미를 갖고 있다. 소위 ‘돈 있는 티’도 잘 내지 않는 편. 표시 안 나는 명품을 선호한다. 다만 자식 교육에는 거금을 아끼지 않는다. 안정적인 자산 운용을 선호한다. 자수성가형은 벤처사업가들이 많다. 연령도 50대로 상대적으로 젊은 편. 그러다 보니 돈 쓰는 행태도 공격적이다. 억대의 외제 고가 승용차나 명품을 ‘가볍게’ 구입한다. 그런 만큼 공격적인 투자를 좋아한다. 벼락부자형은 보상받은 땅값으로 ‘인생’이 달라진 유형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제때 쓸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B들은 이들에 대해서는 현금, 카드 등 각종 지출까지도 관리해주곤 한다. 조언을 잘 따르면 ‘업그레이드’되고, 과소비의 욕망에 굴복하면 부가 오래가지 못한다. 주위의 질시를 못 이겨 이민을 가는 경우도 상당수다.PB들이 기피하는 케이스다. 부자들의 직업별 특성도 다양하다. 먼저 기업가는 머릿속이 온통 ‘사업’으로 가득 차 있다. 와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와인 도매 쪽에 투자하면 어떨까.’라는 식으로 대화가 흘러간다.‘이성’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특징. 한 시중은행 PB는 “항상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이성을 통해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의사 등 의료인 출신 부자의 관심은 ‘돈’이 90% 이상이다. 이들은 혼자 자영업 형태로 병원을 꾸려가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독주를 많이 마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투자를 고민할 시간이 없다 보니 부동산을 많이 사들이면서 의외로 땅부자들이 많다. 한국전쟁 이전 부자 세대들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요즘은 젊은 임대사업자 부자도 많다. 이들은 평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게 특징. 비교적 한가하다 보니 아이디어나 시장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제뜻’을 펼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최태환 칼럼] 이명박 감상 포인트

    [최태환 칼럼] 이명박 감상 포인트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주 신년 기자회견에서 “실물경제 좀 안다고 경제 잘하는 것 아니다.”라고 했다.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겨냥한 발언이다. 지금 지지도는 별거 아니라는 폄하다. 뒤집으면 부담스럽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전 시장의 지지는 고공행진중이다. 현정권의 ‘경제실패’의 반사이익 측면이 크다지만, 엄연한 팩트다. 하지만 탄탄하다 하긴 이르다. 한나라당 지지도 역시 신기루일 수 있다. 며칠전 당의 자체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됐다. 한나라당 지지자 40%가 당을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 아무튼 이 전 시장은 지금 잘나간다. 그는 분명 CEO출신의 강점을 가졌다. 판단력이 빠르다. 추진력이 뛰어나고, 일 처리가 깔끔하다. 그는 해외현장의 경험을 많이 쌓았다. 그 연배로선 드물게 일찍 글로벌화됐다. 디지털을 수용할 수 있는 훈련도 받았다. 해외에 눈뜨지 못했던 산업화 시대였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현재 장로다. 금전 문제 등 도덕성 시비에 흠 잡힐 데가 별로 없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이 모든 것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 강북 뉴타운개발, 버스 중앙차로제 실시 등의 ‘업적’을 가능케 한 바탕이 됐다. 하지만 이런 그의 능력·이력 이면엔 약점도 담겼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은 우선 사람 쓰는 데 있어 한계를 꼽는다. 그는 조직에 대한 로열티와 일에 대한 열정을 중시한다. 건설 회사는 짜여진 도면에 따라 공기에 맞춰, 최상의 제품을 만드는 게 가장 큰 미덕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창의성보다는 재주를 부리지 않는 근면성과 충성심에 방점을 더 둔다. 정교한 개개인의 능력 차이나 개성을 상대적으로 덜 평가한다는 얘기다. 인재를 가벼이 여긴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어렵사리 자수성가한 이력도 그의 용인술 한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시골서 상고를 나와 고려대를 거쳐 대한민국 최대 건설사의 사장자리까지 올랐다. 현대가의 절대신임을 받았다. 오너 2세도 부럽지 않은 신임이었다. 스스로 우뚝섰던 이런 그의 자신감이 사람을 쓰는데, 삼고초려의 정성이 덜 담기게 한다는 분석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약할 수 있다. 실제 그의 주변엔 정치인, 교수, 전문가 등 수많은 인물이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 철학을 가다듬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성들여 모셔온’ 인물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와 일했거나 연줄 연줄의 인물, 자발적 지지자가 중심이다. 짜임새 있는 대선주자 캠프로서 2% 부족한 인상을 주는 이유다. 그래선지 그의 행보나 인터뷰 등을 살펴보면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국가 운영의 그랜드 디자인 같은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 얼마전 한 언론의 전문가 분석도 그랬다. 실용적인 관점에선 호감이 가지만, 상대적으로 미래 비전이나 철학은 약해 보인다는 견해가 많았다. 지금까지 제시된 경제 정책이나 어젠다도 개발시대의 논리에 치우쳤다는 평가였다.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과 진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선주자로 나선 그다. 경제를 벗어난 정책이나 담론도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야 하고, 통합의 철학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본격 경선국면으로 가면, 진면목은 가감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미래비전, 정치력, 인재풀 정비 등 여러 감상 포인트를 어떻게 정리할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이 한권의 책] 침묵했던 제3제국 속살 드러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김기영 옮김, 마티 펴냄)’는 9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우선 독자를 압도한다. 이처럼 두꺼운 자서전을 펴낸 슈페어(1905∼1981)는 과연 누구인가.‘히틀러의 건축가’로서 그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적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긴 장본인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에서 나치 독일의 장관 중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20년 징역형을 언도 받고 복역을 마쳤다. 독일 만하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슈페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1931년 베를린의 대학생을 상대로 맥주홀에서 가진 히틀러의 연설을 처음 들었다. 히틀러에 대한 첫인상은 “열광에 넘치는 분위기 자체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의 모습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모든 것이 적절한 겸손함을 풍겼다.”란 것이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유머를 섞은 그의 연설이 풍기는 분위기와 열정에 빨려든 슈페어는 나치의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한다.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식과 시각적 장치를 맡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히틀러의 신뢰를 얻는다. 히틀러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나치 정권에서 최연소인 37살의 나이에 군수장관에 오른 슈페어는 전시경제를 장악한다. 또한 점령지 강제수용소의 노동력을 군수생산을 위해 착취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모든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히틀러에 맞서 독일의 문화유산과 산업시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 슈페어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랐다. 자기반성과 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태도를 보이며 ‘선량한 나치’ ‘최고의 피고인’으로 불리며 교수형을 면한다. 재판 과정에서는 자신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류가 제시되면 무조건 히틀러의 명령이었다고 설명하는 피고들을 향해 “엄청난 월급을 받는 우편배달부들!”이라고 외쳐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는 자살을 하려고 수건으로 아픈 다리를 묶어 정맥염을 유발하거나, 니코틴도 물에 녹으면 치명적이란 내용을 기억하고 부서진 시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러나 자살 시도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슈페어는 메모광이었다. 감옥에서 군수장관으로서 작성한 업무일지, 편지, 전보 등을 바탕으로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히틀러의 내밀한 모습을 담아낸다. 히틀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비전문성이었다든지, 체중을 항상 걱정했다는 일화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히틀러는 독학으로 자수성가를 이루었기에 모든 분야에 문외한이었지만, 재빠른 두뇌회전으로 전문가가 시도하기 어려운 특별한 방식을 고안했다. 전쟁 초기에는 과감성으로 승세를 잡았지만, 패배가 확산되면서 비전문성은 아집으로 변했다. “끔찍하군! 배를 불룩 내밀고 걸어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그건 바로 정치적 파멸이야.”라고 외치며 채식을 고집했던 히틀러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조롱했다.1943년 이후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히틀러는 “슈페어, 요즘은 친구가 둘뿐이군. 브라운(히틀러의 연인이자 비서었던 에바 브라운)과 개라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 정권의 ‘속살’을 보여주는 ‘기억’은 유일한 내부 증언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럼에도 슈페어의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이란 비난이 뒤따르는, 여전히 논란 속에 놓인 책이다.3만 7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지방시대] 희망심는 전남 양돈사업

    [지방시대] 희망심는 전남 양돈사업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생삼겹살의 인기를 등에 업고 고공 비행하고 있는 돼지값은 지난 10년 동안 농촌경제의 버팀목이 돼왔다.2007년 ‘황금 돼지해’가 밝아오면서 오염이 덜 된 청정지역 전남의 양돈사업 전망도 덩달아 밝다. 돼지농사의 승패를 판가름 하는 새끼돼지 폐사율의 경우 수도권은 40∼50%를 웃돌지만 전남은 30%를 밑돌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에서 돼지 1000마리 이상을 기르는 310가구의 전업 양돈농가가 돼지해의 희망주자이다.1만마리 이상을 기르는 농가는 웬만한 중소기업체 사장이 부럽지않다. ●양돈업은 돼지해의 희망주자 돼지농사 10년 만에 부와 명예를 거머 쥔 강인규(51·전남 나주시 반남면 청송리 청송양돈)씨. 돼지 1만마리를 길러 연 매출 40억원을 올린다. 돼지꿈을 자주 꾸는 탓인지 2002년 이후 연거푸 시의원에 당선됐다. 청송양돈은 1만 5000평 부지에 300평짜리 축사 11동으로 이뤄져 있다. 나주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양돈가이다. 강씨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은 3억 1200만원정도. 마리당 26만원씩 한 달에 1200마리를 판 값이다. 새끼를 180일 동안 키우면 육질이 가장 좋다는 110㎏이 된다. 반면 나가는 돈은 한 달에 2억 7000만원. 사료값 2억원(500t)에 인건비(13명) 2500만원, 약품비·전기료·운영비 등 3500만원, 톱밥구입비 1000만원 등이다. 이것저것 다뺀 4200만원이 순수익이다. 도내에는 강씨같은 부농이 상당수다. 특히 무안군에서 자수성가한 돼지부자 박천재(50·성아농장)씨는 양돈농가에겐 선망의 대상이다.1980년 일로읍 감돈리 고향에서 새끼돼지 10마리로 시작해 지금은 청계면, 현경면 3곳으로 농장을 늘려 3만여마리를 기른다. 변변찮은 학력이지만 30년 동안 고집과 뚝심으로 무장한 외길 승부로 보란 듯 우뚝섰다. 매달 2500∼3000마리를 출하해 줄잡아 연간 매출액이 100억원을 웃돈다. ●매주 목요일은 단체 출산일 나주 청송양돈의 새끼를 낳는 분만사(2동)는 목요일이면 귀청이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다. 어미돼지의 출산통과 새끼돼지의 ‘꿀∼꿀합창’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 임신한 어미돼지 900마리 가운데 40마리가 한꺼번에 새끼를 낳는다. 마리당 10∼12마리씩 하루 평균 400마리가 세상에 나온다. 강씨는 “인공수정 때 출산 날짜를 맞추고 분만일이 다가오면 약물주사로 분만을 유도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야 과학적인 관리(사육)와 출하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새끼들은 출산 후 3일이면 힘 센 순서대로 젖이 잘 나오는 가슴 앞쪽부터 젖꼭지 임자가 정해진다.”고 웃었다. ●모두 실패하고 강씨만 생존 강씨가 돼지농사에 뛰어 든 것은 1992년. 이 때 강씨는 반남농협 직원으로 일하면서 현금 5000만원을 출자했다. 동업자들과 함께 축산발전기금 22억원을 받아 어미돼지 200마리를 사고 축사도 지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다. 달러화 폭등으로 수입곡물인 사료값이 폭등했다. 기존 빚에다 밀린 사료값 8억원, 약품비 2억원 등 10억원이 더해졌다. 함께 시작한 12농가 중 결국 9농가가 손을 들고 떠났다. 이듬해 나머지 3농가도 포기하면서 강씨만 남았다. 자그마치 빚이 32억원(연리 5%)에 사료값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기를 기회로 경영합리화만이 살길이라고 믿은 강씨는 어미돼지 960마리를 800마리로 줄였다. 직원들 급여도 깎았다. 그러나 우려와는 정반대로 외환위기로 소비자들이 돼지고기를 선호하면서 소비량이 급증했다. 돼지값도 덩달아 올랐다. 지난해에는 사상 최고치인 한마리(110㎏)당 30만원을 호가했다. 마리당 8만∼9만원이 남는 그야말로 노다지 사업이었다. 수태율(임신율)과 분만율을 높이고 새끼돼지가 질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보살펴 생존율을 높이자 매출액이 쑥쑥 늘었다. 수태율은 95%, 분만율 90%, 출산에서 판매까지 80%도 어렵다는 출하율이 88%를 기록중이다.2000년 5월 빛이 보였고 2002년부터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지금 빚은 저리(1.5%)의 정책자금 18억원정도로 큰 부담이 없다. 강씨는 “치사율 30%로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서코바이러스(PMWS) 때문에 사육두수가 자동으로 조절돼 돼지값은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돼지농사 미래는 밝다 돼지의 임신 기간은 114일. 어미돼지는 새끼를 낳은 지 5일만에 다시 발정한다. 일년이면 어미돼지 1마리가 2∼3회 출산에 대개 20마리를 낳는다.5년 동안 100마리 정도 새끼를 낳으면 도태시킨다. 때문에 돼지농사는 자금회전이 빨라 수익성이 좋다. 국내 소비자들은 냉동이나 냉장된 수입산보다 생삽겹살을 선호한다. 그래서 판로는 트여 있는 셈이다. 돼지는 출하 1개월 전에는 항생제를 쓰지 않는 안전식품이다. 도축시 항생제 잔류검사에 걸리면 출하정지 3개월을 먹기 때문이다. 강씨는 주변 농가에 새끼돼지를 분양하고 기술교육에도 앞장선다. 돼지농사는 초기투자 자본이 적잖아서 뛰어들기 힘들지만 시설임대나 차츰 규모를 늘려가면 정말 매력있는 사업이란다. 강씨는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지 않고 5000만원을 투자해 2∼3년 동안 돼지를 기르면 길이 보인다.”면서 양돈업 진출을 적극 권유했다. 또 “황토 먹인 기능성 돼지를 생산하고 광주 등 대도시에 직판장을 열어 소비자들 곁으로 한발짝 다가 가겠다.”고 다짐했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돼지배설물 비료로 월 1000만원 수입” 청송양돈의 김재섭(46)농장장은 올해로 28년째 돼지를 기르는 돼지박사다. 돼지 울음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아픈지, 열이 나는지 알 정도이다. 농장 사람들은 “김씨는 모돈(씨받이 어미돼지) 900마리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치켜 세운다. 종돈 선정에서 인공수정, 사육관리, 출하까지 모두 알아서 한다. 인공수정과 출산에는 그의 실력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김씨는 “지금껏 경험으로 한 번에 가장 많은 새끼를 낳은 돼지는 23마리였다.”고 했다. 하지만 어미돼지는 젖꼭지가 14개여서 더 이상의 새끼를 낳으면 다른 어미에게 양자로 보낸단다. 단 돼지 후각은 사람보다 훨씬 예민해서 양자 보낼 때는 입양한 어미돼지의 오줌을 꼭 묻혀서 속여야 한다고 했다. 김씨에 따르면 돼지 배설물도 돈이다. 돼지 배설물을 톱밥에 섞어 3개월 가량 발효시키면 영양가 높은 거름이 된다. 돼지 배설물은 사료에 미생물을 첨가해 먹이기 때문에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어미돼지가 하루에 먹는 사료는 3㎏. 이 가운데 60%인 1.8㎏는 배설물이 된다. 요즘처럼 기온이 떨어지면 체온보존을 위해 사료를 더 많이 준다. 청송농장에서 나오는 배설물은 월 평균 500여t. 다달이 1000만원의 목돈이 된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英 ‘러 前정보요원 암살’ 수사 해외확대

    |파리 이종수특파원|“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그가 폴로늄 210이라는 방사능 동위원소를 섭취한 뒤 사망했다는 것뿐이다.” 지난달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 러시아 연방보안부(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건에 대한 영국 경찰의 공식 입장이다. 현지 언론들은 다양한 루트로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죽음의 배경을 파헤치고 있다. 옵서버지는 3일(현지시간) 리트비넨코가 사망 전 러시아 전직 스파이와 기업가를 협박해 수만 파운드를 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고 전했다. 신문은 올해 초 그가 러시아 학자 줄리아 스베틀리치나야를 만나 많은 FSB 문건들을 보여주면서 동업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리트비넨코의 동료이자 옛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었던 유리 슈베츠는 AP통신 인터뷰에서 “누가 무엇 때문에 리트비넨코를 암살했는지 알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국제 테러리즘의 하나”라고 말했다. 리트비넨코의 아버지 발테르는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와 회견에서 “푸틴이 허락한 가운데 러시아 정보기관 구성원에 의해 살해됐다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리트비넨코의 죽음을 그가 FSB 요원 시절 러시아 정권과 자수성가한 부유계층 사이를 오락가락한 사실과 관련지었다. 신문에 따르면 리트비넨코는 1994년 러시아의 부호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암살미수 사건을 수사하면서 FSB 요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다 1997년 FSB 고위간부가 베레초프스키 살해를 지시하자 FSB에 등을 돌리기 시작,1998년 베레초프스키가 암살 명령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당시 FSB 책임자이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이후 리트비넨코는 내부 부패 사실을 공개하는 등 FSB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면서 구속·수감을 되풀이한 뒤 가족들과 망명 길에 나섰다. 터키를 거쳐 영국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FSB 시절 쌓은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다양한 반 정부 인사들과 전직 FSB 요원들을 만났고 푸틴 대통령 비판에 앞장서면서 암살 위협에 시달려 왔다는 것이다. 한편 영국 테러 수사대 SO15는 러시아를 방문, 런던에서 사망 직전의 리트비넨코를 만난 뒤 러시아로 돌아간 3명의 러시아인 등 용의자를 수사하고 다른 증인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다.vielee@seoul.co.kr
  •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3월 17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변3로서 울린 3발의 총성은 죽은 정인숙(鄭仁淑)양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뜻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아버지의 이름이 밝혀지지않은 3살짜리 어린애를 가진 처녀 엄마라고해서 이러쿵 저러쿵 파다한 후문을 일으킨 것. 타고 난 미모 하나로 밤의 요화로 군림, 각계 실력자들과 어지러운 관계를 가졌던 정인숙(鄭仁淑)양. 45구경 권총탄환 2개로 26세의 나이로 비명에 숨져야했던 그녀의 「짧고도 긴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은 가족 ·친구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정본(正本) 정인숙전(鄭仁淑)傳).」 옛 이름은 정금지(鄭金枝). 해방되던 해인 1945년 2월 13일 대구시 남산동 681의 2에서 전 대구부시장을 지낸 정도환(鄭道換)씨(65)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인숙(仁淑)양의 아버지 정(鄭)씨는 12살 때 일가 중 후손이 없었던 정남수(鄭南洙)씨의 양자로 입양했다. 그러나 입양한 해에 양부 정남수씨가 돌아가자 정(鄭)씨는 호주상속을 받아 바로 그해 11월 인숙양의 어머니인 전(全)씨(61)와 결혼했다. 당시 정씨가 살던 곳은 경북(慶北) 김천(金泉)군 (금릉군) 개영(開寧)면. 정(鄭)씨 일가는 해방되기 전 해까지 줄곧 이 곳에서 살며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이 4형제 중 4남이 바로 인숙양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종욱(宗旭)씨다. 생전 인숙양이 주장하던 것처럼 「뼈대있는 집안」은 아니었다는 게 김천(金泉)일대 주민들의 말이다. 정씨는 행정관리로 출발, 대구(大邱)부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숙(仁淑)양의 출생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아들만 넷을 둔 정씨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딸자식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 과연 불공의 효험이 있었던지 45년 정씨의 아내 전씨는 딸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인숙양 하나가 아닌 딸 쌍동이였다. 그래서 바라던 딸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게 되자 「금이야 옥이야」기르며 이름조차 금지(金枝)·옥지(玉枝)로 지어주었다. 아들 4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금지·옥지 두 쌍동이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만에 옥지는 죽고 금지만 살아 남게 되었다. 옥지가 죽은 다음해 정씨는 자식을 또 보았으나 이번 역시 아들. 그래서 금지의 외동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고 그녀를 아끼는 일가의 귀여움을 독차지. 특히 어머니 전씨가 금지를 위하는 것은 딴 가족들보다 더 심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난 인숙(仁淑)양이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숙(仁淑)양이 대구(大邱)서 국민학교 다닐 시절 인숙(仁淑)양에게 몸종이랄 수 있는 여자아이하나를 따로 두었다. 학교 갈때 따라가는가 하면 세수할때, 밥먹을때 등 노상 인숙(仁淑)양의 옆에 붙어 잔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했다. 인숙(仁淑)의 성격은 더욱 오만해 졌다. 인숙(仁淑)양의 윗 오빠 네 사람은 이런 인숙(仁淑)양을 가리켜 『어머니가 너무 쟤만 위해 주니까 계집애가 버릇이 나빠진다』며 불평, 이따금 여동생 인숙(仁淑)에게 기합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인숙(仁淑)양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 때문에 인숙(仁淑)양의 성격을 끝내 뜯어 고치지 못했다는 둘째오빠 종구(宗九)씨의 말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대구(大邱) S여중에 진학했다. 이 때 아버지 정(鄭)씨는 경북(慶北)도청의 고급 관리로 집안형편이 넉넉할 때였다. 인숙(仁淑)양의 오만한 성격은 더욱 심해지고 이에 따라 오빠들과의 의는 점점 나빠졌다. 호랑이같은 오빠 4명이 인숙(仁淑)양이 조금만 늦게 귀가해도 때리고 꾸지람하기 일쑤. 이래서 정(鄭)씨집은 오만한 인숙(仁淑)양의 기를 꺾으려는 오빠 4명과 인숙(仁淑)을 편들어 주는 어머니 전(全)씨와 인숙의 두 패로 갈리게까지 되었다. 대구 S여고시절 인숙(仁淑)양의 학교성적은 중 이하. 그러나 영어실력만은 대단해 이때부터 이미 외국손님이 오면 안내역을 맡곤 했다. 인숙(仁淑)양이 영어에 능하게 된 데는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현재 일본「도꾜」 의 「아까사끼」서 전기 부속품상을 하고 있는 큰오빠 종원(宗源)씨나 H무역의 대표로 현재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모두 영어라면 귀신. 이런 오빠 밑에서 익힌 인숙(仁淑)양의 영어실력이 뒷날 요정 「선운각」 에서 외국인들에게 술을 따르며 쓰이게 될 줄이야. S여고에 남은 인숙(仁淑)양의 학적부를 들추어보면 『명랑하고 성실하나 안일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되어있다. 인숙(仁淑)양이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가 터졌다.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鄭)씨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가세는 기울기 시작. 이 때무터 인숙(仁淑)양의 집 살림은 어머니 전(全)씨가 계 등으로 꾸려 나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인숙(仁淑)양에게도 심한 충격을 주었다. 낭비벽 심하고 화려했던 인숙(仁淑)양의 생활은 집안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대구(大邱) 남산(南山)동 집을 팔고 삼덕(三德)동으로 이사, 집 규모를 줄여야 하는 등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 62년 S여고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E大 영문과에 진학하겠다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서울엔 인숙(仁淑)양의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S 무역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응시했던 E大 영문과 입시에서 인숙(仁淑)양은 깨끗이 낙방. 세째 오빠 종인(宗仁)씨가 주는 돈으로 M초급대학에 입학했으나 등록금만 내고 학교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직, E大 낙방 등의 겹친 불운은 콧대 센 아가씨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을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온 인숙(仁淑)양이 두차례에 겹친 좌절끝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곤 태어날 때부터의 타고난 미모뿐. 콧대 꺾인 방년 19세의 아가씨 인숙(仁淑)양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미모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요정의 「호스테스」란 생각지도 못했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느냐?』하는것. 그래서 인숙(仁淑)양은 등록한 M여대엔 나가지도 않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렸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작가인 장(張) 모씨. 당시 장(張)씨는 KBS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인숙(仁淑)양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주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야』하며 뽐냈다. 張씨 자신도 張씨가 인숙(仁淑)양의 첫 애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콧대꺾였던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은 유명작가를 애인으로 둠으로써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듯 했다는게 그녀 친구들의 이야기다. 당시 인숙(仁淑)양은 친구를 만날 때마다 張씨를 자랑했다고. 인숙(仁淑)양은 1년남짓 장(張)씨와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겐 『장(張)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했다. 장(張)씨와 동거할 때도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사치벽은 버리지 못했다. 이래서 이따금 장(張)씨와 말다툼을 하고 장(張)씨 집을 뛰쳐나온 인숙(仁淑)양은 친구들 집을 찾아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그러면서 옛날 외동딸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것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상처입은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알게 된 것이 지금 신촌(新村)모처에서 비밀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K「마담」. K 「마담」은 한때 배우 윤(尹)모씨와 동거, 「패션·모델」생활도 한적이 있는 멋장이 「마담」으로 인숙(仁淑)양은 K 「마담」의 소개로 「디자이너」조(趙)모씨를 통해 「패션·모델」로 몇차례 나서기도 했다. 인숙(仁淑)양과 K 「마담」의 관계는 그뒤 줄곧 계속되어 K 「마담」이 경영하는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에 인숙(仁淑)양은 1급 「호스테스」로 나갔었다. 인숙(仁淑)양은 몇차례 「패션·모델」로 나가는 한편 동거하던 장(張)씨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신촌(新村), 수유리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인숙(仁淑)양과 장(張)씨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허영과 장(張)씨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동거 1년만에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러나 장(張)씨가 인숙(仁淑)양으로선 첫 남자였던 만큼 장(張)씨를 향한 인숙(仁淑)양의 마음은 어지간히 강했었다. 피살되기 한달전 인숙(仁淑)양을 만난 한 친구는 『여러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많아 못 살겠다』면서 『그래도 장(張)씨가 제일 잊혀지지 않고 그립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장(張)씨와 헤어진 인숙(仁淑)양이 다음에 발 디딘 곳이 바로 요정 선운각(仙雲閣). 타고 난 미모와 영어실력이 그녀를 선운각(仙雲閣)의 1급 「호스테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운각(仙雲閣)에서 인숙(仁淑)양이 만난 사람이 바로 A씨. 미남이자 이름이 알려져 있는 A씨라 인숙(仁淑)양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A씨를 만나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은 저명 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씨와 인숙(仁淑)양의 관계는 석달남짓 계속되었다는게 당시 인숙(仁淑)양 동료들의 이야기다. A씨를 알게 될 때 인숙(仁淑)양을 가운데 두고 A씨와 역시 A씨만한 실력자 B씨가 한달 남짓 열띤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 인숙(仁淑)양은 선운각(仙雲閣)을 떠나 활동무대를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전부터 아는 K 「마담」이 경영해 오던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을 주무대로 2류급 여배우들을 잘 불러내는 것으로 소문난 S 「마담」집등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러나 비밀요정 「호스테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인숙(仁淑)양은 콧대가 높아 반드시 「마담」들에게 그 날 참석자들을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밤이면 이름있는 사람들과 접하는 인숙(仁淑)양은 낮이면 필동2가에 자리잡은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인숙(仁淑)양 편이었던 어머니 전(全)씨는 남편 정(鄭)씨가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도 남편집에서 살지 않고 인숙(仁淑)양과 단둘이 살며 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필동에서 살때 인숙(仁淑)양은 아들(3)을 낳았다. 인숙(仁淑)양의 가족들은 그 아이가 인숙(仁淑)양의 아이가 아니고 인숙(仁淑) 양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①가족 주장대로 배다른 동생이며 대구(大邱)서 낳아 서울로 데려다 길렀다면 최소한 5살은 되었어야 하는데 3살이라는 점 ②배 다른 동생이라면 미국 갈때 굳이 인숙(仁淑) 양이 아기를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등을 보면 인숙(仁淑) 양의 아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시체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숙(仁淑) 양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바 있다. 더우기 비밀요정가에선 「호스테스」가 아이를 낳는 것은 「터부」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仁淑)양이 아기를 낳았을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충분한 이유란 사후보장. 처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할 아기를 낳을땐 어딘가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건 틀림없는 일이다. 워낙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仁淑)양이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숙(仁淑)양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항간에선 일본에서 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갑(甲)씨, 을(乙)씨, 병(丙)씨등 알만한 이름들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인숙(仁淑)양이 아이를 낳은 후부턴 『내 말 한마디면 안되는 일 없다』혹은 『 서교동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세사람중 한사람일것이라는 소문. 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수속서류 없는 회수여권 MA 10647이 발급된 경위만 하더라고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 어쨌든 아기를 낳은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선 본거지인 비밀요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68년 8월엔 싯가 7백만원이 넘는 단층 석조주택을 사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평소 친하던 K 「마담」 이외엔 좀체로 그녀를 만날 수 가 없었다. 비밀요정 대신 「타워 · 호텔」, 「사보이 · 호텔」, 반도 ·조선 「아케이드」에 자주 나타났다. 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인숙(仁淑)양은 그해 5월에 K 「마담」의 소개로 한남동 조(趙)모씨로 부터 문제의 「코로나」를 사들였다. 이 때 부터 인숙(仁淑)양은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했다. 이번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재일교포인 갑(甲)씨 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인숙(仁淑)양을 거쳐 갔다. 아마도 『 아이를 낳고 보니 무엇보다 돈 걱정이 앞섰던것 같다』는게 인숙(仁淑)양을 아는 친구와 「마담」족의 중론이다. 지난 69년 10월 10일 인숙(仁淑)양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행을 했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친구에게 밝히기론 『 잠시 골치아픈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와야겠다』는 것. 인숙(仁淑)양은 미국서 석달 있다가 되돌아 왔다. 1월21일 다시 돌아온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의문투성이뿐. 『 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 『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하기도 했고 한때는 『 이젠 미국 안갈래』하기도 했다. 사건당일만 해도 자동차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6기통 짜리 흥정을 했다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차를 바꿀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녀의 주변에서 『 미국에 가 있으라』는 「그이」의 요구와 이를 선뜻 응낙치 않은 인숙(仁淑)양의 태도에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지않나 보기도 했다. 어쨌든 3월 17일밤 11시 20분 한강변에 울린 3발의 총성으로 한때의 요화(妖花)정인숙(鄭仁淑)양은 비명에 갔다. 아빠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홀로 남겨 놓은채.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30년전 약속’ 지킨 두 사람

    ‘30년전 약속’ 지킨 두 사람

    “이제야 30년 전의 약속을 지키게 됐습니다. 늦었지만 앞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겠습니다.” 13일 낮 12시 서울 송파구 삼전동의 전통한정식당 ‘하늘담’에서는 지역 무의탁 독거노인을 위한 뜻깊은 ‘칠순 잔치’가 열렸다.30년전 호텔 주방 보조로 만나 ‘요리 기능장’과 ‘경영 전문가’로 자수성가한 두 남자의 약속이 첫 결실을 맺은 자리다. 잔치를 마련한 사람은 지난 4월 하늘담을 함께 개업한 이원식(50)씨와 위경춘(49)씨. 이들은 “돈을 벌면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30년 전에 맺은 둘만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이날 잔치를 열었다. ●30년 전의 아름다운 약속 친형제보다 가까운 이들의 약속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0대 후반에 무작정 상경한 이들은 인천 관광호텔 주방에서 만났다. 무학(無學)과 중학교 중퇴라는 아픔을 함께한 두 사람은 설거지와 청소 등을 하며 우정을 나눴다.“배가 고파서 밥이라도 잘 먹으려고 호텔에 취직했다.”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객지에서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이후 호텔에서 번 돈을 모아 1981년 상경, 청량리에서 자취를 하며 각자의 꿈을 키웠다. “당시 청량리 시장에서 한 할머니로부터 밥을 사먹었어요. 당시 1인분에 500원이었는데 돈이 없어 1인분만 시키는 우리들에게 항상 2인분의 밥을 주셨지요. 그 분의 사랑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성공하면 우리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자고 새끼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어요.” 그래서 이들은 남편과 사별한 뒤 30년 넘게 보증금 800만원, 월세 10만원짜리 사글셋방에 혼자 살아온 신귀수(70·삼전동) 할머니를 위한 칠순 잔치를 마련했다. 하객으로 신 할머니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50여명의 독거노인을 초청했다. 신 할머니는 “평생 처음 생일상을 받아본다.”며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값진 성공 밑바닥에서 시작해 각자의 위치에서 값진 성공을 이룬 두 사람. 충남 예산이 고향인 위씨는 손꼽히는 유명 요리사로 성공했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오산대 조리학과 교수, 프라자호텔 조리장을 거쳐 우리나라 한정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삼청각에서 세계 각국의 정상 및 귀빈의 대접을 도맡았다. 이씨는 초·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5년 만에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 강남에서 잘나가는 학원 수학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이씨는 가난한 독립유공자의 장손으로 어린시절 배고픔을 겪었다. 할아버지는 3·1운동을 했던 고 이석산옹으로 오는 17일 수원 아주대 강당 율곡관에서 열리는 ‘제67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는다. 이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나라사랑과 더불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치셨다.”면서 “앞으로도 ‘나눔’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北유엔주재 차석대사 김명길로 교체

    지난 5년간 북한의 비공식 주미 대사 역할을 해온 한성렬 주유엔 차석대사가 새달 초 교체된다. 후임은 북한 외무성내 미국통으로, 한 대사 후임으로 일찍부터 거론돼온 김명길 군축평화연구소(외무성 산하)수석연구위원. 미 국무부는 28일 김 연구위원에 대한 비자발급 절차가 이미 끝난 상황이라고 확인했다. 자강도 만포의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김 신임 대사는 대학 입학 무렵 부모를 잃은 전형적 자수성가형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워낙 똑똑해 주변에 이름을 날린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종합대 영어과 2학년 재학 중 남미 가이아나로 유학을 갔으며 85년 자메이카 주재 서기관을 거쳐 97년에는 유엔대표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도 지냈다. 지난 95년 북미연락사무소 개설 전문가회담,97년 4자회담 예비회담,2000년 쿠알라룸푸르 북·미 미사일회담 등 미국과의 각종 협상에 대표로 참석했다.2000년 10월 조명록 당시 국방위 제1부위원장 방미시에도 동행했다. 비교적 온건하고 유연한 태도를 보인 한성렬 대사와 달리, 체제 충성도가 높은 강성·원칙주의자 성향이어서 향후 북·미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관심사다.하지만 북한의 ‘뉴욕채널’역할이 한정적이어서 대세에 영향은 없을 것이란 관측도 많다. 부인은 외국 출장 과정에서 만난 고려민항 스튜어디스 출신이라고 한다.김수정기자·연합뉴스 crystal@seoul.co.kr
  • 98년 노벨 생리의학상 페리드 뮤라드 인터뷰

    98년 노벨 생리의학상 페리드 뮤라드 인터뷰

    1998년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페리드 뮤라드(69·휴스턴 텍사스대 교수) 박사가 연세대의 연세노벨포럼(11∼12일) 참석차 한국에 왔다. 비아그라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산화질소 연구로 유명하지만 아직도 두번째 노벨상을 겨냥해 연구하고 있다는 그를 만나 생명공학의 미래와 과학교육에 관해 들어보았다. ▶의사이면서도 기초과학자로서 정진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연구자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파트타임 의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과학연구는 보다 도전적이고 흥미진진하며 보상이 크다. 의사는 환자 몇명을 구할 수 있지만 과학자는 국가, 세계, 인류에 더 큰 규모로 기여할 수 있다. 나는 수백만명의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학생들이 과학을 싫어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떻게 우수한 학생들을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좋은 교사, 흥미를 유발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훌륭한 일인지 학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면 왜 이를 기피하겠는가. 교사는 학생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항상 좋은 답변자가 돼 주어야 한다. ▶한국은 국가적 지원을 받고 있는 과학고등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가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우려를 사고 있다. 과학에 재능있는 학생들이 모험보다는 안정된 직업을 선택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나. -의과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의학공부를 하다 보면 과학에 흥미를 갖게 마련 아닌가. 보다 나은 진단, 보다 나은 치료를 하려면 보다 기초적인 원리를 연구해야 문제해결을 할 수 있다. 의학공부 배경을 갖고 생명과학 분야로 진출하면 훨씬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력 선택 과정은 매우 경직돼 있다. 의과대학의 기초과학 연구수준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박사께서 밟으신 MD-PhD(의사-이학박사) 복수학위과정을 국내에도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미국의 독특한 제도다. 나의 은사인 얼 서덜랜드 교수가 1957년 클리블랜드의 웨스턴 리저브 대학에서 처음 도입했다. 나는 정부로부터 전학년 학비면제에 연간 2000달러씩 잡비도 받았다. 지금은 이 제도가 보편화됐다. 미국 최고의 의사, 미국 최고의 과학자는 의학과 기초과학을 동시에 전공한 사람들 중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진로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경험을 하여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좋다. ▶한국은 IT분야를 이을 경제성장 동력으로서 생명공학을 염두에 두고 국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세계 1위국가인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미국의 생명공학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1940년대 이후 50∼60년 동안 끈질기게 교육, 연구,MD-PhD 과정 등에 투자해 나온 결과다. 생명공학 연구에 지름길이란 없다. 짧은 시간에 결과를 얻으려다간 큰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한국은 이미 경험을 하지 않았나. ▶그래도 수많은 경쟁국가들 속에서 이기려면 전략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끊임없는 투자가 필요하다. 정부, 대학, 기업이 해야 할 역할 중 한 가지라도 빠진다면 성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미국은 GNP의 1∼2%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중국도 비슷하다. 이들은 4∼5년 내 이를 6%까지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싱가포르, 스칸디나비아 국가도 교육과 연구에 성공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 국가들의 장래가 밝다고 본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은 국내외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줄기세포 연구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줄기세포와 복제 연구는 여전히 중요하다. 아직은 극히 초기 연구단계라 실용화 연구까지는 10년,15년 이상이 걸리겠지만 예상되는 혜택은 엄청나다. 조직대체용 세포생성, 유전자치료 벡터효과, 약물전달 체계 기여 등 의학적 응용 외에도 생물공정, 농작물과 가축 등 식량난 해결에도 잠재력이 크다. 과학 연구기회는 제공돼야 한다. ▶줄기세포와 유전공학의 윤리적 문제와 환경파괴 등의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과학의 세계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항상 논쟁이 뒤따른다. 이럴 때 정부관리가 혼자 하는 정책 결정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많았다. 정부와 과학자, 사회가 협력하여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내면 된다. 유전자치료의 경우 너무 앞서나가 문제를 일으켰다. 환자들에게 치명적 손상을 일으킨 사례가 많았다. 기본 시스템을 이해한 후 응용했어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인간복제가 언제 이뤄질 것으로 보는가.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과학적으로 이의 실현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다. 이탈리아 등지에서 인간복제를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거짓말이다.. ▶황우석 박사는 최근 개인연구소를 차려 연구를 재개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과학계가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최소한 산업계 수준에서는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런 과학자는 발본색원해야 한다. 이미 부정으로 낙인찍힌 그를 어떤 생명공학 업체가 고용하겠는가. 소비자가 그가 만든 약을 믿고 쓸 것이라고 기대할 기업이 있을까. 미국에서는 그런 부정을 저지른 과학자가 다시 활동하는 일은 없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투명성, 정직성, 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사실 과학계뿐만 아니라 언론, 기업, 정부 등 어느 조직에도 부정사건은 있다. 대부분은 정직한데 몇 명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가 특히 중시되는 분야에서 이런 부정은 절대 용납돼서는 안될 것이다. ▶당신은 대학교수, 기업체 부회장, 생명공학기업 창업을 거쳐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다양한 직장 경험을 했다. 이들 중 연구개발에 있어 가장 경쟁력 있는 기관은 어느 곳이었는가. -개인적으로는 대학에서의 자유를 가장 좋아한다. 대학에서는 연구비만 확보되면 어떤 연구를 하든지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 대학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고유 역할이 있다.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에서는 새로운 연구를 하면서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당장은 큰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일단 방향이 잡히기만 하면 놀라운 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흥미는 극대화된다. 때로는 여기까지 5∼6년이 소요되기도 하는데 나의 노벨상 수상 업적인 산화질소 연구가 그랬다. 기업은 이렇게 대학연구실에서 만들어낸 기술과 정보를 응용하여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개발연구를 하는 것이다. 정부는 교육과 연구 지원을 하면 된다. ▶당신은 69세 나이에도 여러 직책을 갖고 활동한다. 과학자로서 은퇴적령기는 언제인가. -나는 생의 마지막까지 연구할 것이다. 지금도 10∼15명의 연구팀을 이끌고 줄기세포, 암 치료에 쓸 약품 개발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두번째 노벨상에 도전하고 있다. 앞서도 5명이 2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yshin@seoul.co.kr ■ 뮤라드박사는 누구 페리드 뮤라드 박사는 자수성가형 과학자. 밤잠을 자지 않고 겹치기 일을 하며 학위과정을 마쳤고, 특이한 직장경험을 했다. ●성장 알바니아 이민 2세로 인디애나주 휘팅이란 도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의 식당에서 설거지나 식사주문, 카운터 일을 봤다. 손님들의 주문액수를 암산하여 계산서와 맞춰보는 게임으로 지루함을 달랬다. 부모는 교육을 강조했고 자식들도 부모처럼 중노동을 하지 않으려면 상당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함을 알았다.8학년 때 수업시간에 장래 희망 세 가지로 의사, 교사, 약사를 써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이루었다. ●교육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과정을 마친 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의 의학박사-이학박사 복수학위프로그램에 지원,2개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만난 얼 서덜랜드 교수와 시어돌 롤 교수는 멘토로서 과학에 있어 스승의 중요함을 일깨워줬다. 세포간 신호전달체계를 연구하면서도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등 임상의학 과정을 모두 밟았다. 다섯 자녀 등 가족 부양을 위해 주2회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밤샘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일을 마치면 실험실로 직행했다. 어려운 문제를 풀고, 새로운 원리를 알아내는 데 희열을 느꼈고 무조건 노력했다. ●직업 미 국립보건원(NIH) 심장연구소에 임상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33세 때 버지니아 주립대 조교수로 스카우트됐다. 스탠퍼드 대학 시절까지 18년간 대학교수로 일했다. 애보트사 부회장 겸 연구소장으로 기업 경험을 한 후에는 직접 생명공학 회사를 창립하기도 했다. 1997년 텍사스 휴스턴 대학에 개설된 생물·약리학·생화학 통합 기초과학부와 의과대 임상약리학부의 겸임부장으로 대학에 돌아옴으로써 자신의 커리어 주기를 ‘완성’했다고 말한다.“대학의 자유와 지성, 젊음이 좋다.”는 그는 120여명의 제자를 키웠다. ●연구업적 세포들 사이의 의사소통방법을 연구하던 중 산화질소의 신호전달 역할을 밝혀 1998년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니트로글리세린은 100년 넘게 협심증 치료제로 쓰였으나 작용기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뮤라드 박사는 니트로글리세린의 혈관 이완효과가 이로부터 유리된 산화질소의 효소 활성화 작용 때문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이는 공동수상자인 퍼고트 박사와 이그나로 박사의 연구 성과와 합쳐져 비아그라 개발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그러나 산화질소의 역할은 고혈압, 선천성 심장병, 동맥경화증 등 심혈관계통 질병에 국한되지 않는다. 뮤라드 박사는 세포이식, 위장운동, 줄기세포 증식 및 분화, 유전자 조절, 상처치료, 암 등 다양한 활용분야를 예상하며 현재도 응용기술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 분야는 연구논문은 7만 7000여건, 관련 업체가 30여개에 이를 만큼 각광을 받고 있다. 신연숙 문화담당 대기자 yshin@seoul.co.kr
  • 기업실적 쑥쑥 늘린 공직출신 CEO들

    공무원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다. 대체로 현실위주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데다 뒤늦게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성공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무원 출신으로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는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이들에게서 공무원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행정 경험과 경영 마인드를 잘 섞어서 기업 시너지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전문 경영인일 뿐이다. ●마케팅·위기극복 전문가로 변신 정만원(54) SK네트웍스 사장은 내로라하는 마케팅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행시 21회 출신으로 동력자원부를 거쳤다. 공무원 출신이라면 언뜻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기업 마인드가 깊다. 정 사장의 CEO기질은 SK㈜ 전신인 유공에 입사하면서부터 드러났다. 정유업계에 마케팅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지갑에 넣고 다니는 ‘OK캐쉬백’사업을 성공시켰다.SK텔레콤으로 옮긴 뒤에도 마케팅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한발 앞서 캐낸 무선인터넷 사업은 SK텔레콤의 효자 수익원이 됐다. 능력은 2003년 전무로 승진하면서 SK㈜ 석유마케팅 본부장을 맡아 더욱 빛났다.SK글로벌사태가 터지면서 그는 SK글로벌 정상화 추진본부장을 맡는다. 채권단과 원만한 협상을 이끌어내 SK글로벌사태를 마무리지으면서 재계는 정 사장에게 “마케팅 귀재뿐 아니라 위기극복·업무조정 전문가”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SK네트웍스 사장을 맡고는 ‘서번트 리더십’을 유행시키면서 직원을 하나로 묶고 회사를 조기 회생시켰다. 현재 채권단과 약속한 부분의 90%를 이뤄냈을 정도로 ‘끼’를 발휘하고 있다. ●최연소 시장에서 부동산 개발 사장으로 8년간 ‘남원주식회사 CEO’를 맡았던 최진영(44) 전 남원시장은 지난 7월 말 새로운 도전장을 냈다.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을 지낸 시장이 우림건설 자회사인 우림홀딩스 사장으로 변신, 새바람을 일으켰다. 최 사장은 1998년 최연소 자치단체장 당선, 민간 경영기법을 전도하는 공무원,3선 불출마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CEO으로서의 변신 이유를 묻자 “새로운 인생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우림건설을 택한 이유는 “심영섭 회장을 존경하고,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회사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으로 나가기 전 기업 CEO를 경험했더라면 훨씬 뛰어난 행정을 펼쳤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민간 CEO에 후한 점수를 줬다. 우림건설이나 심 회장하고 특별한 인연은 없다. 우림은 남원시가 지역 특산물 판로를 넓히려고 접촉한 여러 기업중 하나다. 그 뒤 춘향 장학재단에 기부하고 국악 발전에 투자하는 우림의 기업문화에 반하면서 우림과 가까워졌다. 결국에는 우림홀딩스 사장을 맡게됐다. 심 회장과는 일종의 동지(同志) 입장에서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이다. ●계열사 거치면서 그룹 핵심사업 진두지휘 정지택(56) 두산산업개발 사장은 옛 경제기획원 출신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성격이 좋아 적이 없다. 재경원과 기획예산처에서 잘 나갔으나 지난 2000년 공직생활 25년을 스스로의 뜻으로 접었다. 당시 진념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은 민간행을 만류했으나 정 사장의 뜻을 막지는 못했다. 금융회사에서 경영을 배운 뒤 두산그룹으로 옮겼다.‘두산 사태’를 맞으면서 지난 3월 두산그룹의 지주회사나 마찬가지인 두산산업개발 사장을 맡았다. 재계는 정 사장의 경영능력이라면 오너로부터 신임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직원들은 “깐깐한 성격에 빈틈을 보이지 않아 결재 들어갈 때 잔뜩 긴장한다.”고 말한다. 박인구(61) 동원F&B·동원 엔터프라이즈 대표도 성공한 공무원 출신 CEO다. 산업자원부 전신인 상공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매형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권유로 민간 기업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첫 무대가 만성적자이던 동원정밀이었다.3년 6개월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CEO능력을 인정받아 동원산업에서 떨어져나간 F&B 대표를 맡았다. 이곳에서도 보성 녹차, 양반죽 등 히트상품을 내놓으면서 우량기업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3년부터는 동원그룹 지주회사 격인 동원엔터프라이즈 대표도 맡고 있다. ●정통부 관료에서 미디어 사장으로 정보통신부 출신인 서영길(61) TU미디어 사장은 통신 업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CEO로 꼽힌다. 서 사장은 말단 공무원으로 출발, 정통부 공보관, 정보통신지원국장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관료 출신이다. 1998년 비록 PCS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불거진 잡음으로 정통부를 떠났지만 정통부나 통신업계에서 늘 안타까워했던 인물이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업무 처리가 빈틈없던 그는 사면복권되면서 2000년 민간기업으로 옮긴 뒤에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SK캐피탈 감사와 SK C&C 부사장,SK텔레콤 부사장을 거쳐 2004년부터 TU미디어 대표를 맡고 있다. 통신업계는 아직 대중화된 서비스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대박을 터뜨릴 잠재력을 지닌 인물로 보고 있다. GS그룹의 핵심 브레인으로 꼽히는 서경석(59) GS홀딩스 사장도 재경부 출신이다. 행시 9회로 조세정책과장 등을 지냈다. 코스콤 이 사장과는 절친한 사이다.1991년 LG그룹 회장실에서 ‘재무’ 조언을 해준 게 인연이 돼 기업인으로 변신했다.LG투자증권 사장, 극동도시가스 대표이사를 거쳐 2004년부터 GS홀딩스 사장을 맡고 있다. 허창수 그룹 회장이 “이 사람 말이 곧 내 말”이라고 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유동 골뱅이’로 유명한 유성물산교역의 강승모(44) 사장은 이력이 좀 더 독특하다. 행시 28회로 재경부 최연소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던 그가 2000년 돌연 사표를 냈다.“가업(家業)을 잇겠다.”는 게 이유였다. 강 사장은 수출 비중을 늘리고 신제품 개발 등에 공을 쏟아 매출액 360억원, 순익 20억원의 알짜 회사로 키워냈다. 최근 시장에서 히트한 ‘고등어조림’도 그의 작품이다. 류찬희 안미현기자 chani@seoul.co.kr
  • “검은 머리가 나네”…60대 노인의 회춘 비결

    “검은 머리가 나네”…60대 노인의 회춘 비결

    “아니 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검은 머리가 새로 나다니!” 중국 대륙에 7순을 바라보는 한 노인이 검은 머리가 새로 나고 10대 소년처럼 피부가 팽팽해지며 여드름이 나는 등 회춘(回春)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성에서 살고 있는 한 60대 후반의 남성은 얼마전부터 검은 머리카락이 생기고 여드름이 나며,피부가 10대 소년처럼 윤기가 나고 팽팽해지는 등 회춘하고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남국도시보(南國都市報)가 최근 보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올해 68살의 주궈룽(朱國榮)씨.중국 중서부 쓰촨(四川)성 출신인 그는 인쇄공으로 출발,한 푼 두 푼 살뜰히 모아 현재는 어엿한 인쇄소 사장으로 성장한 자수성가형 사업가이다. 사실 주씨는 30대 중반부터 머리가 백발로 변하고 피부가 쭈글쭈글해 노인처럼 보여 ‘애늙은이’ 취급을 받았다.40살이 되던 지난 1978년쯤에는 완전 백발로 변했고,85년부터 주위 사람들의 ‘애늙은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염색을 하고 다녔다. 그러던 차에 지난 6월 어느 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깜짝 놀랐다.집 주변 이발소에 들러 이발을 하면서 염색을 해달라고 하니까,이발사가 검은 머리카락이 나고 있는데 왜 염색을 하느냐며 반문했다고. 주씨는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염색을 해달라고 주문했다.이발사는 “사장님,당신의 머리는 염색할 필요가 없습니다.이미 검은 머리가 나고 있는데요.”라며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그는 너무나 이상해 한동한 말을 잃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주씨에게 ‘신기한 일’은 계속됐다.이 일이 있을 후 자신의 피부를 자세히 살펴보니 쭈굴쭈굴해졌던 피부가 10대 소년처럼 ‘탱탱하고’ 매끄러워졌다.얼굴에 있던 검은 점도 점점 옅어져 어느새 표시가 별로 나지 않았다. 특히 신비한 일은 주씨의 얼굴에 청춘의 심볼인 ‘여드름’까지 돋아나고 있다는데 있다.그는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여드름이 나는지….정말 친구를 보면 창피할 정도”라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큰 병도 없어지고 땀도 덜 흘리는 등 체력도 30대처럼 왕성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30살 전후에 위장병에 걸려 매일 위장약을 먹었는데,요즘에는 소리소문없이 위장병도 사라져 약을 끊었다.전에는 1000m 정도 걸으면 꼭 한번씩 휴식을 취해야 했는데,지금은 그 정도 걸어서는 땀도 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주씨가 어떻게,왜 회춘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하지만 뭔가 특별한 ‘양생법’이 있어 젊어지는 게 아닐까.그는 “특별한 비결요?”라고 뜨악해 하면서 “그런 것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주씨는 몇가지 원칙을 가지고 아주 규칙적인 생활하고 있다.물론 이것도 하나의 ‘양생법‘이 될 수도 있을 것같다.우선 결코 분노하지 않고 낙관적인 사고를 한다.폭음폭식을 하지 않고 녹두밥을 즐긴다.매일 밤 10시 취짐해 오전 6시에 기상하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일이 바쁘면 수면시간이 줄어들 수 있지만,그래도 6시간만은 유지한다는 것 등이다.실천하기 어렵지만,한번 새겨볼 대목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때론 애처롭게… 때론 코믹하게… TV속 아버지像

    때론 애처롭게… 때론 코믹하게… TV속 아버지像

    알츠하이머에 걸린 경찰 아버지. 결국 어린 아들과 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됐지만 혼신을 다해 아이들과 나들이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대기업 간부 아버지. 아내와 이혼한 뒤 수년째 아들을 찾지 않다가 어느날 이뤄진 부자 상봉 이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어머니 역할을 한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의 주변인물로 전락하거나 ‘엄마 파워’가 커지면서 아예 아버지가 없는 가정이 다뤄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에서 아버지들이 살아나고 있다. 때로는 애처롭게, 때로는 코믹하게 그려지면서 아버지들이 오랜만에 제자리 찾기에 나선 모습이다. ●‘아버지도 눈물 흘린다’ KBS 수목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에서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 뒤늦게 가족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눈물을 흘리는 경찰 최장수(유오성 분)를 만날 수 있다. 최장수의 눈물과 가족들의 안타까움에 시청자들도 매회 눈시울을 적신다. 직장인 오유경(33)씨는 “오랜만에 아버지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니 진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의 표상인 탤런트 박인환은 KBS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둘째 딸 설칠(이태란 분)이 집을 나가자 회한의 눈물을 흘리다가 쓰러진다. SBS 주말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주인공 태준(조민기 분)과 태수(이훈 분)는 세월이 흘러 각각 출세밖에 모르는 냉정한 아버지와 뒤늦게 개과천선한 철 없는 아버지가 됐지만, 자식들에 대한 애절한 마음은 똑같다. 특히 4년여 만에 처음 만난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책을 읽어주는 태준의 모습은, 권위적인 아버지의 이면에 숨어 있는 부드러운 부성애를 느끼게 한다. 가족드라마를 표방하는 MBC 주말극 ‘누나’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아버지(조경환 분)가 실종되면서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남은 가족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아버지의 변신은 무죄? 브라운관 속 친근하고 재미있는 아버지들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어느새 20대 청년을 자식으로 둔 아버지가 된 강남길과 김창완은 각각 KBS 일일드라마 ‘열아홉 순정’과 월화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 자식의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 같은 아버지로 등장한다.MBC 수목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에는 밤무대 가수 활동을 하다가 뒤늦게 앨범을 출시하고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소시민 아버지 임하룡이 감칠맛을 더한다.KBS 성장드라마 ‘반올림3’의 주인공 박이준의 중국집 주방장 아버지(이원종 분)는 엄마 없이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 친구들에게 자장면을 대접할 줄 아는 의리파다. ●현실에서의 아버지 모습은 드라마 속 아버지를 보면 현실과 가까운 듯하면서도 동떨어진 모습도 종종 보인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뒤로 한 채 바람을 피우거나, 가족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비춰지기도 한다. 지난달 31일 첫 전파를 탄 EBS 5부작 휴먼 다큐멘터리 ‘다큐-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진솔한 삶을 진지하게 조망하고, 우리가 함께 찾고 만들어갈 진정한 아버지의 상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정성스레 간병하는 아버지, 기러기 아빠와 초보 귀농 아빠, 육아를 위해 과감히 휴직계를 낸 아빠 등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버지들의 헌신과 사랑을 깨닫게 해준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3·1절에 완공될 3·1路의 31층

    3·1절에 완공될 3·1路의 31층

    서울 한복판 3·1로 고가도로 입구에 31층의 새 건물이 들어선다. 건물이름조차 3·1로「빌딩」. 올해 3월1일에 착공되어 내년 3월1일 완공예정인 이 3·1로「빌딩」은 그 높이가 현재까진 우리나라에서 제일높은「빌딩」이자, 철골조(鐵骨組)건물론 동양제3위. 이래저래「3」자「1」자에 얽힌 사연도 많다. 한국에서 제일높은 빌딩 철골건물로는 동양(東洋)3위 3·1로 고가도로 입구「로터리」에 서있는 이 건물은 대지면적에 비해 높이가 너무 높아「빌딩」이라기보다 탑이라는게 옳을듯 하다. 현재로선 한국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지하 2층에 지상 31층. 높이는 92m로 현재 서 있는 한진(韓進)「빌딩」보다 10m가 높고 정부종합청사 보다는 9m50cm가 높다. 철골「콘크리트」의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한진빌딩,「로열·호텔」에 이어 세번째이며,「도꾜」의 무역「센터」(40층),「가스미가세끼·빌딩」(36층)에 이어 동양에서 3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러나 공기(工期)로는 동양최단이다. 워낙 철골「콘크리트」건물은 공기가 짧은 것이 큰 장점이라지만 30층 이상의 건물로 최단공기의 기록은 앞에 든「가스미가세끼·빌딩」의 1년6개월. 그러나 이번3·1로「빌딩」은 올해 3·1절에 착공, 내년 3·1절에 끝낼 예정이니까 공기1년으로 일본의 기록을 앞지르는 것이 된다. 시공을 맡고있는 삼환(三煥)기업측으로서도 최고의 기록이 되는 셈인데 이렇게 서두르는덴 건축주인 김두식(金斗植·45·삼미사대표)씨의 고집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곧장 대일목재(大一木材)에 뛰어든 김씨는 자수성가로 현재 공칭자본금 9억원을 훗가하는 대기업체의 대표가 된 사람. 그의 산하엔 모기업체인 대일목재를 비롯, 대한철광, 삼창해운, 삼미사가 있다. 외국것 보고 화나서 착공 설계·시공도 우리 기술로 『사업관계로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너무 한국이 초라한 느낌이 들어군요. 그래서 이왕이면 한국에도 무슨 기록 하나쯤은 세워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자면 화가 나서 이 집 짓기를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이 김씨의「화」때문에 하필이면 31층이 되었다는 얘기이고, 비싼 값 치러가며 3·1로에 땅을 사들여 3·1절에 착공, 3·1절에 완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 김씨는 평소에도 3·1정신을 무척 찾는 편이어서 사원조례땐 꼭 3·1정신을 예로 든다는 직원들의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3·1정신 때문에 31층은 아니다. 김씨 산하기업중 두 기둥인 삼미사와 대일목재에서 각각 한자씩 따 내어도 3·1이 된다. 『무언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술로 36층을 1년반에 지은 것을 앞지르기 위해 공기를 1년으로 단축, 설계에서 시공까지 모두 우리 기술진에 맡겼다. 본설계는 건축가 김중업(金重業)씨가 맡았다. 대지는 불과 5백30평이지만 연건평은 1만5백평. 층당평수는 3백13평이며 한층의 높이는 2.9m이다. 설계상 재미있는 것은 주(主)건물과 부건물이 따로 따로 올락나다는 것. 「콘크리트」로 쌓아올리는 부건물에는「엘리베이터」층계, 화장실등 부속시설이 들어가게 된다. 萬5백평의 17억짜리「집」자재 80%를 국산으로써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건물엔 여닫는 창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점. 위낙 도심지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소음, 먼지등을 피하기위해 여닫는 창을 만들지 않고 온·냉방과 돌풍장치는「센트럴·히팅·엔드·쿨링·시스템」을 쓰고 있다. 또 각층은 기둥만 있을뿐 툭 틔여져 있어 빌어드는 측이 마음대로 공간을 쪼개쓸 수 있게 되어있다. 총공사비 11억원이니까 평당 약 11만원의 돈이 먹힌 셈이고 여기에 땅값 약6억원(평당 1백10만원)을 합치면 모두 17억원의 돈이 들었다. 대부분의 고층건물들이 관광「호텔」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외국산자재들을 면세 도입한데 비해 그런 특혜 조차를 하나도 받지 않았다는 것도 3·1로「빌딩」측의 자라의 하나. 그 대신 자재의 대부분을 국산품으로 사용, 꼭 필요한 20%의 자재만 외국산을 쓰고 그 나머지는 국내생산품이 없을 경우 신제품 생산의뢰를 해서라도 꼭 국산품 썼단다. 지하 2층은 기계실과 주차장으로 사용, 가장 전세놓기 좋은 1층을 1백%「로비」로 사용함으로써 약 7천5백만원의 전세수입을 포기한 셈인데 3·1「빌딩」만은 영리를 떠나고 싶다는 김씨의 뜻이다. 역학적 구조계산 설계에 전문가 20여명 동원하고 현재 총공정의 약 70%가량이 진행된 이 건물은 이미 주택(住宅)은행등에 40%가량 예약되어 있으며, 건축주인 김씨산하 기업체는 4층 한층만 사용할 예정이다. 공사중 가장 애를 먹은 것은 청계천 복개공사가 된 곳이라 지하수가 많이 나왔던 것. 이를 막기위해 기초공사에 소요된 기일이 약 3개월. 그래서 완공 예정일인 내년 3·1절에 1백%완공은 힘들 것이란 현장실무자측의 얘기다. 또 하나 신경써야 했던건 좁은 면적에 높은 건물을 개우기 위해 설계중 풍력(風力)·횡력(橫力)등 역학적인 구조계산에 무척 신경을 써야 했던 것. 이 구조계산에만 전문가 20여명이 동원되었다고. 이렇게 해서 내년 3월 이건물이 완공되면 서울은 바야흐로 20층시대에서 30층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밖에도 지금 한양(漢陽)「빌딩」(시청앞 옛 대한일보(大韓日報)자리)에 36층 건물을 계획중이며, 악희(樂喜)「빌딩」(저동(苧洞) 쌍룡「빌딩」맞은편 공지)이 43층을 올릴 계획으로 있어 서울의 고층화(高層化)는 무척이나 바쁘게 진행되고 있다. 『고층건물을 많이 지어서 이젠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사는 세상이 와야지요』하는게 3·1로에 31층건물을 짓는 김씨의 70년대식 3·1정신이기도 하다. 『남산이나 북악산이 서울의「스카이·라인」이던 그런 세상이 빨리 사라져야지요. 마천루들의 뾰족한 끝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새「스카이·라인」이 이루어져야해요』 [선데이서울 69년 11/16 제2권 46호 통권 제 60호]
  • 한나라표심 이틀만에 ‘親朴견제’

    4선의 김형오 의원이 13일 한나라당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김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119표 가운데 67표를 얻어 50표에 그친 김무성 의원을 제치고 임기 1년의 원내대표로 뽑혔다. 신임 정책위의장에는 김 원내대표와 러닝메이트로 나선 전재희 의원이 선출됐다. 여성 의원이 정책위 의장이 된 것은 여야를 통틀어 처음이다. 김 신임 원내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1년 6개월 뒤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온 몸을 던지겠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에서는 ‘친박((親朴·친박근혜) 체제’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틀전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최고위원단 5명 가운데 강재섭 대표를 포함한 4명이 친박 계열로 분류된다. 이에 대한 ‘쏠림 방지 표심’이 상대적으로 친박 성향이 덜한 김 원내대표에게 몰렸다는 것이다. 김 원내대표도 이를 의식한 듯 후보 토론회에서 “원내대표 선거마저 대리전을 치러선 안된다.”며 김무성 의원과 각을 세웠다. 러닝 메이트인 정책위의장 후보로 전재희 의원을 선택한 것도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전 의원은 비주류 성향의 모임인 국가발전전략연구회 소속으로 이 전 시장 측근 및 소장파 의원들의 지원을 받았다는 해석이다. 당초 우세를 점치던 김무성 의원은 대표적 ‘친박 인사’라는 이유로 ‘전대 역풍’을 만나 분패한 셈이다. 김 의원은 러닝메이트로 나선 이경재 의원과 공동 명의로 “당의 균형을 위해 심사숙고한 의원 동지들의 선택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고 낙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전당대회 결과에 따른 후유증이 말끔히 씻어진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 신임 원내대표도 김무성 의원보다는 덜하지만 친박 성향으로 분류된다. 지역구가 부산인데다 박 전 대표 시절 사무총장을 지냈다. 따라서 강 대표나 김 원내대표는 공정 이미지를 확보하는 게 과제다. 김 원내대표는 합리적 성품에 논리적이라는 평을 듣는 언론인 출신 4선 의원이다. 부인 지인경씨와 2녀.▲부산(59) ▲서울대 외교학과 ▲동아일보기자 ▲신한국당 기조위원장 ▲국회 과기정위원장 ▲인재영입위원장 ▲14∼17대 의원. 전재희 정책위의장은 여성 최초의 행정고시 합격자로 공직계에서 여성관련 다양한 기록을 세운 자수성가형 재선 의원. 남편 김형률씨와 1남 1녀.▲경북 영천(57) ▲영남대 법정대 ▲노동부 국장 ▲경기 광명시장 ▲16,17대 의원 ▲제3정조위원장 ▲정책위 부의장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유언·유서 등 사전 계약이 우선

    법무부의 민법 개정안대로라면 배우자는 무조건 재산의 50%를 상속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법적 상속비율 조정 내용을 문답으로 풀어 본다.Q:남편이나 아내가 사망하면 무조건 재산의 50%를 배우자가 갖나.A:아니다. 민법에선 ‘사적자치의 원칙’이 우선이어서 당사자의 의사나 양자간 계약이 가장 중요하다. 유언 등을 통해 재산 비율을 정했다면 그것이 우선 적용된다.Q:자수성가해 100억원대 재산을 형성한 남성이 결혼한지 1년만에 자식없이 사망했다면.A:유서나 계약이 없다면 법적 상속 비율로 분할된다. 아내가 50%를 갖고, 나머지 50%는 직계존속(시부모)에게 상속된다.Q:부부가 1억원짜리 아파트를 공동 명의로 갖고 있다가 남편이 사망하면.A:아내는 남편 소유의 5000만원의 50%인 2500만원을 상속받을 수 있다.Q:70대인 아버지가 50대 여성과 재혼한 뒤 1년 만에 작고했다. 그럴 경우에도 계모가 50%를 우선 상속받나.A:유서나 유언, 계약이 없다면 그렇다. 하지만 현행법에도 규정돼 있는 ‘혼인전 부부재산계약’을 통해 상속비율 등을 미리 조정한 경우에는 ‘50%룰’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Q:종중재산은 어떻게 되나.A:종중재산은 보통 장자 명의로 관리되는데 이를 상속재산에 포함한다면 당연히 ‘50% 룰’이 적용된다. 하지만 종중원들이 상속재산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면 상속에서 제외된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서울 자치구 새얼굴] 정동일 중구청장 당선자

    정동일 중구청장 당선자는 ‘자수성가’한 중견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 출신이다. 중학교를 중퇴한 뒤 상경해 자동차 정비사·운전기사와 과일행상 등을 하며 학업을 마쳤고, 지금은 전세계에 체인점을 둔 굴지의 중견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성공한 CEO가 일선 구청장으로 변신한 것은 ‘배 고팠을 때 보리밥 한 그릇 준 사람의 은혜를 절대 잊지 말라.’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다. 그의 성공 발판이 된 ‘제 2의 고향’인 중구 발전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유년시절의 고생이 인생의 전환점 그는 5살 때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시면서 궁핍하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집안형편 때문에 국가재건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재건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가 문을 닫아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15살 때 상경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날’(현재 어버이날)이 되면 아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았는데,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하얀 카네이션을 달았죠. 친구들이 ‘너 엄마가 없구나.’라는 말을 할 때마다 너무 서러워 아직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안이 넉넉했다면 아마 지금의 내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았겠지요.” 이런 어려움들이 자신을 강하게 만든 것은 물론,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게 했다. 그는 당선 직후 맨 먼저 양로원과 고아원 등 관내 사회복지시설과 재래시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내는 내 인생의 등대 서울로 올라온 그는 월급도 없는 자동차정비소에서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웠다. 당시 운전면허자가 귀했던 탓에 군입대해 장성의 운전병으로 발탁됐고, 제대후 모 기업 이사의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여기서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아내 용옥화씨를 만났다. 당시 돈 한푼 없었던 자신을 택한 아내는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하며 하루 연탄 한 장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도 자신을 믿고 따라줬다. 그는 과일행상과 안주 배달 등을 하며 돈을 모았고,1990년 명동에 ‘둘둘치킨’이라는 조그만 치킨점을 냈다. 이 가게는 전국에 300여개가 넘는 체인점과 미국과 일본 등 전세계 7개국에 진출한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아내는 제 인생의 ‘등대’입니다. 지난 27년 동안 내가 힘들어 좌절할 때면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할 때도 제 뜻을 믿고 따라줬습니다.” ●세계적인 중심구로 만드는 게 목표 그는 1998년 중구의회 제 3대 구의원에 당선되면서 지역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2002년에는 서울시의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지역사회 봉사에 앞장섰다. “구 발전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경영 노하우를 풀어놓을 생각입니다. 낙후된 중구를 대한민국, 더 나가 세계적인 중심구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구민들이 저에게 기회를 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먼저 도심 재개발 사업을 통해 도심에 미국 맨해튼의 록펠러센터처럼 중구를 상징할 초고층 빌딩 건설을 추진할 생각이다.70∼8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을 만들어 강북의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복안이다. 또 특목고 유치, 사회보장 시스템 확대, 남산에 테마공원, 청계천에 자전거 도로 설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구민들과 더 많은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 구청장실을 1층으로 옮길 생각이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프로필 ▲출생 1954년 전북 무주 ▲학력 동국대 경영학과, 북한학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3학기(지방자치 전공),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3학기(정치행정 리더십 전공) ▲경력 일동인터내셔널(프랜차이즈 둘둘치킨 회장), 동국대 총동창회 부회장, 중구경제포럼 이사장, 중국 옌볜대 객좌교수, 중국 지린대 겸직교수, 제 3대 중구의원,5·6대 서울시의원, 한나라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저서 희망을 튀겨내는 치킨 아저씨 ▲가족관계 용옥화씨와 1남2녀 ▲취미 등산, 독서 ▲존경하는 인물 이병철,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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