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자서전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서강대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뉴욕시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2차 지급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 고폭탄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84
  • [명사가 걸어온 길] 4.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명사가 걸어온 길] 4.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1960∼70년대 기타 하나 들고 혜성같이 나타나 한국 가요계를 풍미했던 신중현(75). 그에겐 ‘록의 대부’며 ‘록의 비조’ ‘6현의 연금술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많은 가수와 음악인들은 역사의 기억 너머로 묻혀졌던 그의 묵은 음악을 다시 꺼내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중현을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당대의 숱한 히트곡과 스타들을 만들고 배출한 불세출의 명인이지만 정작 그의 삶은 굴곡으로 점철돼 있다. 그 질곡의 길을 걷게 한 단초는 배고픔과 외로움이라고 신중현은 말한다. 하지만 그의 삶과 분신인 음악에 담긴 메시지는 한 가지, ‘새로운 것들을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 그래서일까, 한국 가요계의 이단아이자 진보주의자였던 그는 2006년 은퇴를 앞두고 내놓은 자서전 제목도 이렇게 썼다.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2006년 7월 신중현이 전격 은퇴 선언을 한 뒤 마지막 전국 순회공연을 준비할 무렵,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록의 대부’라는 제목으로 신중현의 살아온 이야기를 실었다. 최근 경기 용인시 양지면의 거처에서 만나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기억하느냐’는 첫 질문에 신중현은 “나도 의외였다”고 했다. 유난히 작은 키에 ‘작은 거인’이란 별명이 겹쳤다. 신장이 얼마나 되느냐는 미련한 질문에 “한 번도 재 본 적이 없어 모른다”며 무심코 던진 한마디.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꼭 곡예 같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줄 위에서 움직이는 꼴이라고 할까.” 용인 거처는 은퇴와 함께 1986년부터 20여년간 음악 활동의 아지트로 썼던 서울 송파구 문정동 ‘우드스탁’ 생활을 마감하고 2007년 새로 튼 보금자리. 거처 겸 연습실, 작은 공연장을 갖춘 공간이다. 지금도 대패며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을 다듬고 만들고 있다. 혼자 작업실을 꾸미느라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어린 시절 그 험한 고생을 했는데 이까짓 거야”라며 초년 시절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주에서 이용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6·25전쟁 통에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충북 진천으로 옮겨 어렵게 살아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1년 새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사별한 고아. 동생을 친척 집에 맡기고 상경해 제약회사를 하는 친척 집에 얹혀살았다. “공장 일이 너무 힘들고 서러웠어요. 판자 쪼가리에 군용 전화선을 매어 만든 기타를 치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공장 일을 해 모은 돈으로 기타를 사서 혼자 연습하다가 고교 2학년 때 집을 뛰쳐나와 서울 종로 바닥을 전전했다. 당시 종로엔 ‘기타 잘 치는 신중현’이란 명망이 파다했고 미8군 무용수 눈에 띄어 오디션을 거쳐 미8군 플로어쇼에 데뷔한 게 음악 인생의 시작이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보수도 당시로선 큰돈이었고 미군부대 공연 때마다 최상급 대우를 받았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재키’ ‘히키’ ‘스코시’라는 별명이 미군들 사이에 퍼졌고 공연이 끝나면 악수를 청하는 미군들이 줄을 섰다. 미군 정보부 요원들이 출입하는 용산역 건너편 ‘시빌리언 클럽’에서 1960년 가졌던 첫 기타 독주 공연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연주가 끝난 뒤 떨려서 인사도 못 하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들어 보니 미군 전원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미8군 스타 생활을 5년 정도 했을까. 베트남전이 터지고 주한 미군이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면서 미군부대 쇼도 시들해졌다. 미8군 생활을 접은 건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연을 하면서 늘 외국곡을 그대로 따라 연주하고 부르는 데 회의가 들곤 했지요.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져 가던 때였습니다.” 당시 한국 가요계는 남진, 나훈아로 대변되는 트로트의 세상. ‘한국 가요계를 바꿔보자’며 국내 가요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대중들은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가 천착했던 로큰롤이며 사이키델릭 록은 낯설기만 한 것이었다. “우리 가요계의 수준이 서방세계의 음악과 너무 차이 났어요. 당시 미군부대 공연 때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는 미군들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훌륭한 콘텐츠를 갖고 있으면서도 문화적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걸까.’ 그 창피함과 문제의식은 이후 한국적 특성을 살린 록으로 뻗친다. 한국 최초의 록 밴드 ‘애드4’(Add4)를 시작으로 그룹 ‘조커스’ ‘던키스’ ‘퀘스천스’ ‘더 맨’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실험적인 음악을 구가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룹 활동을 하면서 발굴해 낸 스타들은 숱했고 음반사와 가수들은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빗속의 여인’이며 ‘커피 한잔’ ‘님아’ ‘떠나야 할 그 사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미인’…. 그리고 그 노래들을 부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미화, 장현, 박인수…. 인생의 굴곡은 사이클을 이룬다고 했던가. 전국에 ‘신중현표’ 음악이 깔리고 입을 통해 번져 갈 무렵, 그는 군사정권의 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괘씸죄’로 인한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다.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던 게 미운털이 됐던 것 같아요.” 죄목은 ‘대마초 공급책’이다. “미군부대 공연장엔 당시 월남전에 반대하는 히피들이 많이 모였어요. 대마초며 마리화나를 상습적으로 즐겼던 그들은 우리 집에도 드나들었고 집에 그런 환각제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모진 고문과 심문 끝에 정신병원과 교도소 신세를 졌고 그가 만든 100여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1987년에야 그의 곡들이 해금됐지만 ‘대마초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기만 한 생트집이다. “따져 보면 저를 지옥으로 몰아간 이벤트지요.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어요.” 이후 소공연을 하면서 기타 산조 ‘무위자연’이며 ‘김삿갓’ 같은 한국적인 곡들을 발표했지만 회생 기미가 없었다. 마침내 2006년 은퇴선언을 하고 용인에서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그런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낸 건 2009년 미국 기타 전문 회사 펜더로부터 헌정 기타를 수여받은 일이다. 에릭 클랩턴, 제프 벡, 에디 반 헤일런 등 기라성 같은 음악인들만 받았다는 그 기타다. 세계에선 여섯 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이라는 펜더 기타 헌정. “마치 신의 선물 같았어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계시라고나 할까.” 그는 ‘신의 부름’이라는 그 사건 이후 또 다른 삶을 시작했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무엇보다 록 음악이 태동된 본향으로부터 이어진 그에 대한 관심이 놀랍기만 하다. 미국 음반사 ‘라이트 인 디 애틱’은 2011년 사이키델릭 록 모음집과 그가 제작한 김정미의 ‘나우’를 발매한 데 이어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을 CD로 제작해 현지 시장에 내놓았다. 지난해 9월엔 미국 음반사의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무대에도 섰다. 오는 10월 그 음반사의 초청으로 같은 장소에서 재공연도 예정돼 있다. 칩거에 들었던 황혼의 음악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좀처럼 뒤돌아볼 줄 모르는 천성 때문인 것 같아요. 음악 하는 사람은 먼저 치열한 수양을 통해 실력을 쌓아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요즘 팬들을 몰고 다니는 젊은 아이돌 가수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지만 실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지요.” 실제로 신중현이 ‘6현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바탕엔 뼈를 깎는 수행과 노력이 있다. 미8군 데뷔 전 기타 교습서며 주한 미군방송 AFKN을 통해 접한 곡들을 손이 갈라지도록 연습했다. 1960년대 초반엔 해군 군악대장을 지낸 이교숙 선생을 사사하며 화성법을 배웠고 그 덕에 작곡에 천착했던 것도 사실이다. 약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 중 세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3·3주법’이며 5음계를 적용한 화성법이나 곡 편성도 전 세계에서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소문나 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철학은 또 무엇일까. 놀랍게도 노자와 장자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대마초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두 살 연하인 부인 명정강씨가 가져다준 노자와 장자 책은 그의 음악과 인생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낮은 자세로 살다 보면 다칠 게 없어요. 책을 보면서 마음을 비울 때 많은 것을 얻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세상에 많은 도움을 주면서도 낮은 데로 묵묵히 흐르는 물을 이길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에게 낮음의 철학을 깨우치게 한 책들을 소개한 부인은 미8군 시절 만난 여성 그룹 드러머 출신. 록밴드 시나위의 리더인 큰아들 대철, 기타와 키보드에 모두 능한 둘째 아들 윤철, 드럼 스틱을 잡은 셋째 석철은 모두 아버지 신중현의 길을 따르고 있는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다. 4부자는 지난해 12월 함께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대견합니다. 돈벌이에 매달리지 않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걱정스러우면서도 흐뭇하지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실력자라는 세 아들을 포함해 가족들에겐 못난 가장이자 아버지였다고 말하는 신중현. “지금은 떨어져 사는 부인과의 사실상 별리도 음악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는 말을 전하는 그의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그 숱한 히트곡과 스타들을 만들었으면서도 드러난 스캔들 한 번 없었다는 그의 꼿꼿하고 고집스러운 음악 인생이 고스란히 읽히는 대목이다. 그가 남은 생애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평생을 받쳐 천착했던 한국적인 음악이다.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인’과 ‘아름다운 강산’을 입에 올린다. 각설이 타령조를 록에 얹은 ‘미인’과 국악풍의 전설 같은 노래. 그토록 열정을 쏟아 만들고 세상을 향해 외쳤지만 번번이 외면받았던 노래들을 요즘 젊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고 다시 찾아 불러 신이 난단다. 요즘은 자신의 음악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정리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다. 작은 공연을 생중계할 수 있는 공연장 만들기도 한창이다. 6가닥의 기타 줄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살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노장의 버팀목은 철석같은 의지일 것이다.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한·일 미래의 길을 묻는다] 日, 8월까지 우경화 스케줄… “양국 미래 위해 대화 계속해야”

    [한·일 미래의 길을 묻는다] 日, 8월까지 우경화 스케줄… “양국 미래 위해 대화 계속해야”

    ‘우경화 행보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거나, 혹은 과거를 치유하며 관계 복원을 시도하거나….’ 25일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와 지난해 말 집권 여당이 된 아베 신조 정부 간의 올해 한·일 관계 전망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렇다. 그동안 얼음장 같던 양국 관계에 기회와 위기 요인이 모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극단적인 대립 구도로 가면 양국 관계는 ‘양패구상’(兩敗俱傷·서로 싸우다 양쪽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상처만 입음)격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올해 국내 정치 일정을 감안하면 양국 관계는 특히 아베 총리의 ‘우익 본능’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첫 1년의 한·일 관계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룬 한·일 기본조약(1965년) 체결 50주년인 2015년 박근혜 임기 중반까지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당선인은 자서전인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다른 어느 나라와의 관계보다 인내심이 더 필요한 게 일본과의 외교이고, 양국 모두 서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인식을 드러낸 바 있다. “일본과 진심을 털어놓는 대화를 계속한다면 조금씩 풀려갈 것으로 믿는다”고도 했다. 역사와의 화해를 위해서는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뜻도 밝혔다. 첫 변수로는 22일 일본 시마네현이 여는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행사 수위가 꼽힌다. 아베 총리 등 주요 각료들이 불참을 표명했지만 자민당은 다케시마의 날을 정부 행사로 승격하겠다는 총선 공약을 실행하려는 기류가 짙다. 일본 정부는 독도 등 자국의 영토분쟁 전담 부서인 ‘영토·주권대책 기획조정실’을 신설하며 우익·보수 세력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총리 산하에 조직을 신설한 건, 독도 문제 등을 정권 차원의 핵심 과제로 격상시켰다는 의미인 동시에 아베 내각이 우익 공약 실천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한다. 3월에는 독도 영유권 기술 및 과거사 왜곡을 강화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는 일본 고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된다. 곧 이어 아베 총리가 4월에 열리는 야스쿠니신사 춘계 예대제에 참배할지도 주목된다. 자민당과 2차 세계대전 전몰자 유족 모임인 일본유족회는 아베의 참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06년 첫 집권 때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지만 자민당 총재였던 지난해 10월 참배한 후 “임기 중 야스쿠니 참배를 못한 게 통한의 극한”이라고 밝힌 바 있다. 4~5월에는 일본 외교정책 기조인 외교청서가 발간된다. 7월 참의원 선거와 8월 이내 발표되는 방위백서는 양국 관계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마저 승리할 경우 아베의 우익 기조도 강화될 것으로 점쳐진다. 우리 정부 당국자는 12일 “아베 총리가 참의원 선거 때까지는 경기 부양 등 내치에 집중하며 대외 강경 정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도 “선거에 승리하면 아베 기조를 본격 추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아베 총리는 임기 중 일본 평화헌법을 개정해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격상하고 집단 자위권 행사를 용인해야 한다는 기조를 보여 왔다. 참의원 선거 결과와 맞물려 방위백서가 우경화 전략을 어떤 식으로 드러낼지 주목된다. 일본 정부의 경제 기조인 ‘엔저 정책’도 변수로 여겨진다. 한국 경제의 체감 피해가 확대되면 반일 기류가 퍼질 수도 있다. 환율 효과가 국내 경제 실적에 본격 반영되면 우리 주력 산업의 수출에 현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양국의 새 정부가 출범하지만 한·일 관계뿐 아니라 중·일 관계와 미·일 관계 속에서 일본의 유동성이 커 한·일 양국의 새로운 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엔저 문제는 우리 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보디 블로’(Body Blow·몸통 공격)로 한국 경제가 일본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는 국민 감정을 자극하는 긴장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우경화 흐름에 대화를 차단하거나 협력을 기피하는 건 우리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제언하고 있다. 역내 안정을 위해서도 양국 간 갈등을 관리하며, 내실 있는 조용한 외교를 통한 신뢰 회복에 양국이 힘써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미주통신] 세계 최고 스트리커, 안 벗겠다 선언 이유가…

    벌거벗은 채로 경기장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사람, 이른바 스트리커(streaker)의 세계 1인자인 마크 로버츠(49)가 이제 더는 벗는 행위를 하지 않고 은퇴를 선언했다고 영국의 일간 데일리메일이 1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1993년 홍콩에서 펼쳐졌던 럭비 경기장에서 첫 나체 퍼포먼스를 선보인 그는 세계유명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무려 519회의 세계 최대 스트리커 기록을 가지고 있다. 2004년에는 미국 텍사스 주에서 열렸던 슈퍼볼 경기에서 나체로 등장하여 전 세계 87개국 1억 3천만 명의 시청자가 이를 지켜본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은퇴를 선언한 이유가 바로 그의 둘째 아들 마크(19)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의 아들은 자신의 친구들이 아버지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웃는 모습이 창피하다고 말했고 로버츠는 이에 마지막으로 519회의 스트리킹을 하고 나서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로버츠는 원래 자신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며 포르노 스타가 아니라 오직 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이러한 행위를 펼쳐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년 동안 이러한 행위로 서른 번이 넘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600만 원이 넘는 벌금을 내었다고 언론은 전했다. 로버츠는 자신의 스트리커 일대기를 담은 자서전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미주통신] 전직 미군 최고 저격수 사격장에서 피살

    [미주통신] 전직 미군 최고 저격수 사격장에서 피살

    전직 미 해군 특수요원 출신으로 최고의 저격수로 명성을 날렸던 크리스 카일(39)이 미국 텍사스의 한 사격장에서 같은 미군 베테랑 출신에게 피살된 채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고 미 언론들이 3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크리스 카일은 미 해군 네이비실 출신으로 근무 당시 1999년부터 2009년 동안 이라크전 등에서 150명이 넘는 적들을 저격해 사살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자서전인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를 통해 밝혔으며 이 책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등 그를 미군 최고의 저격수에 자리매김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현지 경찰은 사건 직후 카일의 차를 타고 달아나던 에디 라우스(25)를 체포했다고 밝혔다. 라우스는 군인 출신으로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건 당일 그의 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사격 연습을 도와주던 카일과 또 한 명의 사람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미 재향군인 사무국이 발표한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매일 22명의 미군이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명꼴로 자살하는 것으로 과거보다 그 수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2일 미 언론들은 전했다.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말이 죽었다, 너와 통할 수 없다, 나도 말없이 사라진다

    말이 죽었다, 너와 통할 수 없다, 나도 말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멸종한 공룡에 열광하고 매머드를 그리워하며 살아 있는 화석 물고기 실러캔스의 존재에 감정이 고양된다. 그런데 현재진행형인 언어의 사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왜 백악기 공룡 화석에 대한 열광만도 못한 것일까.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전 세계에서 소멸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소수민족의 언어는 보름에 한개꼴로 사라지고 있고, 2100년까지 살아남을 언어는 고작 150개 정도일 것으로 전망된다. 한개의 언어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적정 인구가 1억명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남북한 7000만명이 쓰는 한국어도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최연소로 2013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애란(33)의 단편소설 ‘침묵의 미래’는 소멸 위기에 처한 소수민족의 언어에 관한 소설이다. 1월 초 시상식에서 권영민 평론가가 이 소설을 두고 ‘말에 의한 말의 운명에 대해 쓴 알레고리적 소설’이라고 소개했을 때 궁금증이 한껏 고조됐었다. 한 종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상실하는 과정은 문화와 역사, 그 존재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문화적 제국주의에 의한 지구 다양성의 파괴라고 할까. 종의 다양성은 동식물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삶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나’는 언어로서, 후두암 때문에 고생하던 아흔 살 노인이 죽은 뒤 빠져나온 언어의 혼이다. 노인이 살던 곳은 중앙에서 비켜난 황량한 땅에 세워진 ‘소수언어박물관’이다. 낮에는 박물관, 밤에는 기숙사가 된다. 소수언어를 지키고 있는 고령의 언어담지자 한두명은 ‘마지막 화자’들이다. 이들은 대화할 수 없다. 그저 1000여개의 전시장을 각각 지키고 앉아 드문드문 관람객이 찾아오면 인사말을 건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보여줄 뿐이다. 대화와 소통이 안 돼도 언어라 할 수 있을까. 김애란은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쩌렁쩌렁한 모어(母語) 한복판에, 우주 한가운데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뒤늦게 울어 봐야 소용없었다. 다 죽고 살아남은 건 오직 자기 자신과 엄청나게 아름답고 어마어마하게 정교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그 ‘말’뿐이라는 걸….”(16쪽) 소설은 묻고 있다.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세웠다는 박물관이 오히려 잊어버리기 위해, 멸시하기 위해, 죽여 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냐고. 그저 기록과 관리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기계적 배려에 대한 독설이다. 당선작과 함께 실린, 김애란이 직접 뽑은 대표작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나 문학적 자서전 ‘카드놀이’, 선배 작가인 편혜영이 쓴 ‘작가론: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당선작과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카드놀이’에서 김애란은 ‘송방’(가게)이라는 말을 듣고 “모름지기 부모란 자식들에게 옛말을 새말처럼 알려주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지…”라고 서술한다. 편혜영의 작가론은 김애란을 두고 “유머를 다룰 줄 안다”고 평가하는데 그 맥락도 이해할 수 있다. 편혜영은 “애란이는 눈으로 생각하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애는 검고 커다란 눈을 장난스럽게 뜨고 우선 세계를 오래, 고이, 깊이, 머물러 바라본 후에 검은 눈으로 자기 안쪽을 들여다본다. (중략) 근육을 수축해 생각을 도약한 다음 애란이는 대개 농담으로 착지한다”고 했다. 2013년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펴냄)에는 이 밖에도 우수상을 받은 8개 작품이 소개됐다. 멕시코에서 날아온 한 통의 이메일을 통해 어린 시절 멕시코 삼촌이 들려주던 아코디언 선율과 먼 곳에 대한 향수를 그린 함정임의 ‘기억의 고고학’과 성폭행범으로 지목돼 고통을 당해야 했던 한 남자를 피해 당사자인 소녀와 대면시킴으로써 거짓과 타협해 간신히 파국을 면한 위태로운 삶을 보여주는 편혜영의 ‘밤의 마침’, 건조하면서도 사실적이고 강한 흡입력을 보이는 김이설의 ‘흉몽’ 등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현장 행정] 관악구 어르신 자서전 제작 지원

    [현장 행정] 관악구 어르신 자서전 제작 지원

    “한평생을 되돌아보면서 눈물로 책을 썼습니다.” 29일 관악구청 강당에서 열린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나온 권춘도(73) 할아버지는 지난 삶을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1941년 경북 고령군에서 태어난 그는 식당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포목, 가마공장, 농기구수리센터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6남매를 키우며 기반을 잡을 때쯤 부도를 맞았다. 포장마차마저 실패한 뒤 태백산에서 3년간의 수도생활을 거치며 안정을 찾은 그는 지금까지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그의 기구한 인생은 관악구의 ‘어르신 자서전 제작 지원 사업’을 통해 ‘빗자루와 같은 인생길’로 묶였다. 관악구는 독서문화 진흥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부터 노인들의 자서전 제작을 돕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노인들에게 인생을 회고·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다음 세대들이 노인들의 지혜를 배워가자는 취지다. 권 할아버지를 포함, 지금까지 총 15명의 노인들이 구 지원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자서전으로 묶었다. 사업은 만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대상으로 선정되면 구술·녹취, 자료 수집, 집필, 발간 등을 위해 1인당 200만원의 제작비가 지원된다. 제작은 전문기관이 맡아 진행한다. 발간된 자서전은 구립도서관 등에 비치돼 지역사료로 활용된다. 이번에는 권 할아버지를 포함해 총 9명(남자 6명, 여자 3명)이 자서전을 냈다. 김광영(82) 할아버지는 ‘봉사로 꽃피운 인생’을 통해 6·25전쟁 당시 중부전선에서 훈장을 받았던 얘기를, 김기선(74) 할아버지는 ‘서울 토박이의 현대사 여행’을 통해 4·19혁명 참가 경험담 등을 담았다. 방성열(69) 할아버지는 ‘외길 인생’을, 양상진(67) 할아버지는 ‘구원받은 나의 영혼과 삶’을, 우선경(75) 할머니는 ‘반딧불은 별이 되었다’를, 이청자(70) 할머니는 ‘그분의 뜻을 따라’를, 장영헌(87) 할아버지는 ‘노시인의 삶과 신앙의 시’를, 최옥희(78) 할머니는 ‘그래도 아름다운 인생’을 냈다. 구는 올해는 10명의 노인에게 자서전 집필·발간 비용으로 1인당 250만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특히 100세 이상 노인에게는 30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한다. 유종필 구청장은 “유명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어르신들이 자서전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분 한분의 역사가 모두 우리의 삶과 현대사가 녹아 있는 귀중한 역사”라며 “어르신 자서전 지원 사업은 다른 자치구에는 유례가 없는 사업으로 관심이 큰 만큼 계속 확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약물 영웅’ 암스트롱, ‘거짓 자서전’ 피소

    금지약물 복용으로 몰락한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41·미국)이 ‘거짓부렁’을 자서전이라 속여 팔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24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암스트롱의 자서전 ‘이것은 자전거 얘기가 아닙니다’를 구입한 롭 슈터츠먼 등 100여명의 원고들은 그의 도핑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새크라멘토 연방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들은 출판사 펭귄, 랜덤하우스와 크라운 등도 허위광고, 사기 등의 잘못을 저질렀다며 5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고 ‘애틀랜틱 와이어’는 전했다. 2000년 발간된 이 책과 2003년 발간된 후속작 ‘1%의 희망’에서 암스트롱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공이 ‘끝없는 훈련, 적절한 식단, 뛰어난 정신력과 성공을 향한 강한 열망 덕분’이라고 소개했다. 슈터츠먼은 “2005년 암스트롱을 만났을 때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를 감명 깊게 읽었으며 친구들에게 추천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고 돌아봤다. 지난해 미국 반도핑기구(USADA)의 보고서 발간 이후 도핑 사실을 계속 부인해 오던 암스트롱은 지난 17일 방영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비로소 잘못을 시인했다. 한편 로이터통신이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에 의뢰해 지난 18~22일 1240명을 조사한 결과 12%만이 그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48%는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워지자 진실을 털어놓았다고 보았고, 3분의1은 훼손된 이미지를 회복하려 진실을 털어놓았다고 받아들였다. 강동삼 기자 kangtong@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2. 의술로 인술 실천하는 김희수 건양대 총장 (상)

    [명사가 걸어온 길] 2. 의술로 인술 실천하는 김희수 건양대 총장 (상)

    1950년 세브란스 의대(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자그마한 안과 개원의로 시작해 예순셋에 건양대학교를 설립하고, 일흔셋에 800병상 규모의 건양대 병원을 일군 사람. 3년 대학 총장 임기를 두 번이나 채우고도 모자라 임기를 4년으로 늘려 12년째 총장직을 지키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에 견줘 결코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부도옹’(不倒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부도옹은 무슨…. 난 그처럼 대단하지 않아. 그는 천하의 경륜을 논했지만 난 고작 대학 하나잖아. 그렇지만 듣고보니 그럴 법도 하네” 김희수. 올해 여든다섯이지만 “꿈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그에게서 물리적인 나이를 읽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서는 이런 그를 두고 “너무 오래 거머쥐고 있는 게 아니냐”거나 “이제는 자리 내려놓을 때도 됐다”고들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다 이유가 있어. 나는 지금도 더 일하고 싶어. 열정도, 건강도 문제가 없거든. 나도 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세월 거꾸로 사는 사람 없잖우.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해. ‘그러니 내게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김 총장에게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정색하고 말문을 열었다. “뭐 내세울 게 있어야지. 그렇지만 내가 헤쳐온 삶이 젊은이들에게 도전의 의미를 되새기거나 용기를 부추기는 자극은 될거야. 결코 쉬운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 번도 내가 이뤄야 할 것들을 잊어본 적이 없거든. 뭔가 성취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그걸 말하고 싶어. 목표를 갖고 살라는 거지” 그가 삶의 지표로 삼아온 원칙 같은 게 궁금했다. “좌우명이라는 게 너무 평범해서 실망할거야.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기본에 충실하자’는 말처럼 함축적으로 내 삶을 표현한 말이 없어. ‘정직’은 사람의 기본이고, ‘노력’은 성공의 기본이며, ‘치료’는 병원, ‘교육’은 학교의 기본이잖우. 이런 기본만 지키면 뭐든 다 돼. 공자도 그랬잖아 ‘군자무본 본립이도생’(君子務本 本立而道生·군자의 본연은 근본을 닦는 것이며, 근본이 바로 서야 도가 생긴다)이라고.”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의 성장기는 그 시절의 대부분이 그랬듯 가난과의 동거였다. “가난했지.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는데, 30∼40마지기 정도였으니 중농쯤 되나 그랬어. 농사뿐이 아니야. 소, 돼지는 물론 양봉에 누에까지 쳤어. 한 방의 반은 누에 잠틀이었는데, 까만 누에 똥 속에서 먹고 자고 했지, 뭐. 내 형제가 3남 4녀였는데, 형들 꼼짝 못하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도 막내라 사랑 좀 받고 자랐어요.” 그렇지만 성장기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그는 주저없이 형을 꼽았다. “아, 나완 나이가 열여덟살이나 차이가 나니 형이 아니라 아버지 같았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땐 다 그랬지. 가난하지, 애들은 생기는 족족 많이 났지, 그래서 젖먹이 동생을 손 위 형이나 누나가 맡아서들 키우던 그런 시절이었잖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지만, 그때는 다들 그러니 그게 궁핍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살았지. 그러려니 하고.” 평생 애써 일군 부를 악다귀처럼 그러쥐지 않고 대학 설립에 쏟아부은 데서 보듯 그는 청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1950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도미, 뉴욕 프랜시스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그는 일리노이주립대 안과대학원과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1959년에 귀국했다. 전쟁으로 피폐하고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이 미국에서 겪은 경험은 충격이었다. 전쟁과 분단으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살던 때, 그의 눈에 비친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갖 물산이 넘치고, 큰 집에 차량이 즐비한 도로, 자유분방한 사람들의 표정이 어우러진 유토피아였다. 그런 미국을 보면서 도미 후 처음 형님한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느님이 계신데,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그런 미국을 보면서 그가 가슴에 새긴 것은 ‘잘사는 나라, 건강한 국민’이었다. 이미 결혼해 고국에 처자식을 두고 홀로 이국으로 떠나온 그에게 ‘남다른 노력’은 숙명이었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대학원을 학비 부담없이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육영 의지를 키우는 자극제가 됐다. “생각해 봐. 전쟁통에 피죽 먹기도 어려운 때잖어. 우리 마누라가 조그만 미장원을 해서 번 돈으로 유학와서 공부하는 내가 한눈을 팔 수가 없지. 그땐 공부밖에 할 게 없었어.” 이로부터 3년 뒤인 1962년 서울에서 그의 꿈의 모태인 김안과를 개원했다. 당시 미국의 선진 의료를 체험한 그는 국내에서 안과 분야의 독보적 의사로 인정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다. “돈 엄청 벌었지. 진료비를 전부 현금으로 받던 시절인데, 병원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하루 3000명까지 환자를 봤어. 일과를 마치고 나면 자루에 가득한 돈을 셀 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은행원에게 정산을 맡기기도 했는데, 매일 500만원씩 그러모았지. 요샛돈으로 치면 그게 얼마야.” 그러나 그는 결코 돈의 미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벌었지만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달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공의 기억을 묻자 뜻밖에 그는 ‘치료의 기쁨’을 말했다. “난 돈보다 내가 치료한 환자들이 감사하다고 인사할 때가 제일 기뻤고, 그걸 성공이라고 믿었어. 어떤 이는 두고 두고 내게 인사를 오기도 해. 의사로서 그 이상의 성공이란 게 있을 수 없잖아요.” 그는 돈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일제 때 의학을 공부해 공의로 일한 큰형님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된 그가 말하는 바람직한 의사상은 ‘질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의사’였다. “요새 어떤 병원은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성 안질환자가 오면 치료 못 한다며 다른 병원으로 보낸대. 그게 뭐야. 그건 의사가 할 일이 아니지. 내 큰형님이 공의로 일할 땐 치료비가 없어 돈 대신 달걀이나 참깨를 가져온 사람도 많았는데, 한번도 형님이 그걸 타박하지 않아. 그걸 보며 나도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게 일한 그가 많은 돈을 번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를 주시했다. ‘저 많은 돈을 어떻게 쓸까’하는 호사가적 관심이었다. 이 무렵, 그는 사람들이 놀랄만 한 결정을 한다.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찾은 부의 용처는 육영사업이었다. 1983년 그의 육영의지가 얻은 첫 결실은 고향인 충남 논산에 양촌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이었다. 작다면 작은 그 실천이 30여년 뒤 거대한 교육사업으로 결실을 맺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육영이라는 게 이를테면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일인데, 그보다 보람 있는 일이 어딨겠어. 고향 유지들이 찾아와 면리에 하나뿐인 중학교가 운영난이 심각하니 인수해달라는 거야. 고민 끝에 부채를 떠안고 1억 2000만원에 인수했지. 어쩌겠어. 애들 공부는 시켜야잖어. 그게 지금의 건양중·고등학교야.”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우뚝하고 걸출한 인재만 바라보는 건 아니다. 딱히 분별하자면 그는 열정이 있는 청년을 좋아한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그가 펴낸 자서전 제목도 ‘여든의 청년이 스무살 청년에게’다. 여기에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고언이 담겨있다. “나도 하는데, 나보다 훨씬 젊고, 힘세고, 시간 많은 너희가 왜 못하겠는가. 해보지 않으면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너는 분명 할 수 있다.” 이런 그를 두고 이어령 교수도 “그 분이 평소 얼마나 젊은이들을 사랑하는지를 알면 그 분을 다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육영사업이라는 게 돈욕심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다. 잠깐은 몰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런 육영사업에 그가 생애를 투자한 것은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고, 젊은이들에게 꼭 주고 싶은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가 1986년이었지.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던 신극범 박사가 하루는 고향에 전문대학 하나 세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처음엔 망설였지. 지금도 벅찬데 대학이라니….” 고민이 깊었다. 주변 의견도 찬반으로 갈렸다. 나이도 있고, 병원 경영에다 중고등학교도 만만찮은 일인데, 한 술 더 떠 당시 대학가는 온통 민주화 바람으로 학교마다 재단들이 곤욕을 치를 때였다.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발 들여놓으면 뼈도 못 추린다는 거였다. 그러나 찬성 쪽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육영사업이라는 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봐야 하고, 지역사회를 보더라도 중고등학교를 대학으로 확장하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계속>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씨줄날줄] 손자 보는 할머니/임태순 논설위원

    흑인인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인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가 미국 시민으로 성장,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의 힘이 컸다. 던햄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한 딸을 대신해 오바마를 1971년부터 1979년까지 키웠다. 사고와 감성, 가치관이 형성되는 10~18세 때의 민감한 사춘기 시절이었다. 던햄은 오바마가 편견 없이 자랄 수 있도록 흑인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준 것은 물론 애국과 근면, 이웃 사랑 등의 소중한 가치를 가르쳐 주었다. 오바마가 2008년 11월 한창 선거전이 치열한데도 하와이로 가 임종을 앞둔 외할머니를 위문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할아버지·할머니와 손주와의 관계는 유별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에게 아끼던 쌈짓돈을 용돈으로 선뜻 내주는 게 조부모들이다.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손주를 잘 가르쳐 번듯한 인물로 키운 경우도 많다. 노벨상을 수상한 퀴리 부인의 딸 이렌을 교육한 사람은 외할아버지 외젠이었다. 그는 손녀에게 빅토르 위고의 책을 읽어주고 식물학, 박물학 등 다양한 학문에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힘입어 이렌 부부 역시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해 어머니와 딸이 대를 이어 노벨상을 타는 진기록을 남겼다.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도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 도움으로 독서 습관을 들였다며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토로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서신을 보내 교육시킨 것도 유명한 일화다. 부모를 건너뛴 할아버지·할머니와 손주 간의 ‘격대(隔代)교육’은 여러모로 긍정적이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것과 달리 조부모들은 한결 여유있고 너그러운 자세로 손주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기 때문이다. 대가족시대엔 흔했던 격대교육이 핵가족으로 사라졌다가 고령화 시대와 양육난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손주 양육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손자나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들의 주간 노동시간은 47.2시간이었다. 주 5일 근무로 치면 하루 9.44시간이니 노인들에겐 격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손주를 돌보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에 걸린다는 할머니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되면 부모·자식 관계도 좋지 않게 되고 찰떡 궁합인 조손(祖孫)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황혼 육아의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도록 자식들이 근로조건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잘 키운 손주가 대통령 되는 걸 보지 않겠는가.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서울광장] 2월 25일 밤 놓아야 할 것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2월 25일 밤 놓아야 할 것들/진경호 논설위원

    그날 밤이 어떤지는 김대중 자서전에 나와 있다. “…청와대에 밤이 왔다. 나를 그토록 핍박했던 역대 집권자들이 머무르던 곳. 깊이 생각했다. 그들은 과연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내는 방이 너무 넓어서 놀라는 눈치였다. 그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70대의 우리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2월 25일, 정권교체의 새 역사를 쓴 날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청와대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적었다. 멀리 박정희가 있었고, 전두환·노태우가 있었고, 바로 그제 자신의 영원한 맞수 김영삼이 밤새 뒤척였을 그 침실에서, 김대중은 헤쳐온 날들과 헤쳐갈 날들이 뒤엉킨 군무(群舞)에 그만 잠을 잃었다. 한 달 뒤면 ‘김대중을 그토록 핍박했던 집권자’의 딸이, 어린 시절 격동의 18년을 보냈고, 끝내 부모를 모두 빼앗아간 청와대에 들어선다. 아버지가 비운을 맞았던 만 61세의 나이로, 33년 4개월 전까지 아버지가 있었던 침소로 들어선다. 어떠할까. 질곡의 정치사와 개인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품은 그가 2013년 2월 25일 밤 홀로 대면할 상념은 무엇일까. 누구에게 견줘야 어림할 수 있을까. ‘잘살아보세….’ 그 밤 박근혜를 짓누를 상념의 무게를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 끝자락에 움켜쥘 단어는 아마도 이 유업(遺業)일 것이다. 제 식대로밖에 모르는 북한과, 결이 거친 대외경제와, 숨이 가쁜 민생과, 이젠 DNA로 유전되는 것만 같은 지역과 이념의 강파른 대치를 풀고, 묶고, 바로 세우겠노라 다짐하며 신발끈을 동여맬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김영삼은 ‘개핵’(개혁)을 외치며 내달렸고, ‘선상님’ 김대중은 만기친람(萬機親覽)이 뭔지를 몸소 내보였다. 노무현은 정체 모를 ‘그들’과 내내 싸웠고, 이명박은 전봇대 숫자까지 챙겼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청와대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면 다시 가을, 겨울이 됐다. 자식 문제로, 측근 비리로, 실정으로 몇 번씩들 머리를 숙였다. 1년도 못 돼 노무현 비서실의 민정수석 문재인은 이빨이 10개나 빠졌고, 이명박 청와대의 ‘얼리버드’들은 새벽 5시면 집을 나서야 했지만, 청와대의 5년차는 늘 한숨으로 채워졌다. 독주(獨奏)의 끝은 항상 그랬다. ‘선거의 여왕’이 성공한 대통령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성취는 그 자체로 독배(毒杯)다. 그 앞에 서면 누구든 작아지고 하명을 기다리며 시립(侍立)하게 만드는 박근혜이고 보면 전임 누구보다 많은 독배에 둘러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벌써 그런 징후들이 감지된다. 정부 조직개편안의 밀실 탄생이 그 증좌의 하나다. 잡음을 막겠다며 밀실을 택했고, 공론은 없이 통보만 있었다. ‘나를 따르라’ 식의 박정희형 리더십이 어른댄다. 윤창중 대변인을 낳은 ‘나홀로 인사’와, 완장을 찬 그가 ‘나만 기자다’라고 외치며 인수위와 기자실 사이의 쪽길을 홀로 내달리는 과유불급의 행태도 박근혜의 앞날을 걱정케 한다. 5·16 쿠데타 이후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결과가 과정을 지배하는 역사를 헤쳐왔다. “나처럼 불행한 군인은 다시 없어야 한다”고 박정희는 말했지만, 그가 이룬 고도성장은 목적과 결과가 수단과 과정을 지배하는 가치 왜곡을 초래했다. 갖은 양태의 선거 부정을 저지른 통합진보당의 이정희가 고개 빳빳이 들고 “박근혜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멀리 보면 이런 결과지상주의의 잔재다.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는 5년이 돼야 한다. 그 어떤 목적도 수단을 지배할 수 없다는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독선과 독주의 리더십으로 새드엔딩을 자초한 대한민국 권력의 불행한 역사를 끊는 5년이 돼야 한다. 남은 한 달 인수위 과정이 이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다. 2월 25일 박근혜 당선인은 지난 반세기 이 나라에 환희와 눈물을 안겨준 박정희와 마주선다. 제의(祭儀)의 밤이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홀로 설 시간이다. 부친이 이루지 못한 화해와 포용의 새 날을 여는 아침을 맞기 바란다. jade@seoul.co.kr
  • [서울광장] 을파소 총리가 보고 싶다/임태순 논설위원

    [서울광장] 을파소 총리가 보고 싶다/임태순 논설위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등 새 정부 출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어제 정부조직 개편안이 발표된 데 이어 다음 주에는 국무총리를 지명하고 장관 인선 등의 후속 조치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새 정부 조각의 꽃으로는 단연 국무총리일 것이다. 총리는 의전서열 5위로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재소장 다음이지만 행정부를 관장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상징성이 크다. 누가 초대 총리가 되느냐에 따라 새 정부의 방향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 하늘 아래 태양이 하나이듯이 권력은 생리적으로 나누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흔히들 권력은 나눌 수도, 나눠질 수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지난 대선에서 스스로 권력을 나누겠다며 총리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책임총리제를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이는 물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에 정해진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에 부정적이었던 그가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은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에게 약속한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내각 구성권을 가져야 하며 따라서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임명에 관여할 합리적 근거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표를 얻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권한이 비대해진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책임총리제를 들고 나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새 총리 인선을 두고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온다. 선거가 박빙 구도였던 만큼 반대편을 끌어안는 화합을 제1 덕목으로 꼽는가 하면 행정능력을 겸비한 소신 있는 인물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다. 방송작가 신봉승씨는 지난해 11월 책을 내면서 조선시대 올스타 행정각료를 소개했다. 임금 27명, 유명인물 600~70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임금은 단연 세종이었으며, 국무총리로는 황희일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조선 중기의 재상 오리 이원익을 꼽았다. 아마 오리가 청렴하면서도 백성과 친근하게 지낸 화합형이라는 점이 높은 평점을 받은 것 같다. 지난주 동네 도서관에 갔다 우연히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라는 책에 눈길이 갔다. 인수위와 정부가 선거 때 발표한 복지공약 이행을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을파소(乙巴素·?~203)가 뭔가 해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을파소는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서기 193년 빈민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기에 갚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진대(賑貸)법을 실시한 인물이다. 하지만 을파소가 재상에 올라 자신의 뜻을 펴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고국천왕은 귀족들의 반란을 수습한 뒤 신하들에게 초야에 묻힌 인재를 추천해줄 것을 당부했다. 신하들이 안류를 천거했으나 안류는 자신은 미천하다며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를 추천했다. 왕이 농사를 짓던 을파소를 궁으로 불러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해 우태(于台)로 삼으며 대우했으나 을파소는 극구 사양했다. 그 정도 지위로는 막강한 왕의 외척이나 귀족세력과 싸우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눈치챈 왕이 국상(國相)을 제수하자 을파소는 비로소 조정에 나갔다. 진대법은 이처럼 안류의 양보, 을파소의 배포, 왕의 결단이 어우러져 탄생하게 됐다. 여기에 더해 왕이 국상의 명을 받들지 않는 자는 엄명에 처하겠다며 을파소에게 힘을 실어주니 곡식을 빌려주고 고리이자를 받던 귀족들도 진대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관계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근혜 당선인의 책임총리제에 대한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을파소와 같은 명재상의 배출 여부는 박 당선인에게 달려 있다. 총리 적임자를 발굴, 소신껏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힘을 실어주면 된다. stslim@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예술과 삶을 말하다(하)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예술과 삶을 말하다(하)

    시인 고은(80)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예술과 문학론, 사랑과 술을 빼놓을 수 없다. 한 30대 문학평론가는 고은에 대해 “선생은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핀 이름 모를 꽃의 존재에 대해서도 경남의 꽃, 대한민국의 꽃, 아시아의 꽃, 지구의 꽃, 태양계의 꽃, 우주계의 꽃으로 인식하고 들여다보는 확장된 시각을 이미 1960~70년대부터 드러낸 것이 특징”이라고 평했다. 지금이야 당연한 시각인 것 같은데 당시에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시에 대한 고은의 욕망은 이런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야 끝나는 시. 아니 모든 멸망 뒤에 다시 이어지는 시. 우주 허공계의 시. 나라는 존재 따위 다 사라져 버린 영구 부재의 시. 시. 시.시. 미치겠다.” (1974년 9월 24일 일기) 고은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강화할 때 그의 문우이자 술친구인 민음사 박맹호 사장과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사장은 ‘문학을 지켜라. 정치의 자승자박은 안 된다’라며 찬성하지 않았지만, 고은은 자신의 방식대로 문학을 끌어안았다. “시대에 지지 말자./ 시대를 팽개치지 말자./ 시대는 가고 문학은 남는다./ 문학은 그가 태어난 시대를 떠난다.”(1974년 12월 23일 일기)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 서재에서 고은은 “내 운명은 시다. 평론도 소설도 써봤지만, 시로서 내 삶을 완결해야 한다. 이제 막 새로운 시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다른 시들이 들어오고 있다. 시인으로서 끝 무렵이 아니라 시작 무렵이다. 나에게는 종결이 없다”라고 말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1958년 등단한 고은은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년)을 시작으로 41살까지 6권의 책을 냈다. 그의 저작활동은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왕성해져, 1986년 1권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24년 동안 만인보 시집만 30권을 냈다. 외국에 고은이 ‘만인보’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이유다. 만인보 외에 시집과 소설, 평론집, 산문집, 시선집, 여행서, 동화집, 동시집, 전기, 자서전, 편집한 책까지 합치면 150여권이 된다. 2013년 새해 벽두에는 1973~1976년까지 일기를 묶은 ‘바람의 사상’과 평론가 김형수와 대담한 ‘두 세기의 달빛’을 한길사에서 펴냈다. 대담집은 앞으로 7~8권 더 나올 예정이어서 고은이 낸 책은 조만간 160여권을 훌쩍 넘을 것이다. 시인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고은은 “모국어로 시인이 되어야 할 운명인 사람인데, 소학교에 입학하니 조선어 사용이 금지됐다. 모국어를 상실함으로써 배움을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죄다.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밤이면 머슴 대길에게 비밀리에 한글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한글 덕에 해방되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했다. ‘국문을 아는 사람 손들어’라고 했을 때 고은이 유일했단다. 흔히 그의 프로필에 종교는 불교로 나와 있다. 20대에 10년을 승려로 살았으니, 으레 그리 짐작한다. 그러나 흰 종이에 육필로 시를 적어나가는 고은은 “나에겐 백지가 종교다. 다른 종교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완벽한 백지가 있으니까, 다른 완벽함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삶은 힘들어지고, 문학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고은은 “한국전쟁 당시 사람들 속에 진짜 시적인 것이 있었다. 그 시대를 견뎌온 힘은 강력한 정서, 시적인 품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시가 더 풍부했다. 시단의 시적인 성취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사람들은 시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지금은 시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줄었는데, 오히려 시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 시인들이 시적인 품성이 갖춰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설적이다”고 현상을 분석했다. 그는 오히려 예비 작가나 기성 작가들에게 조언했다. “자아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다. 산 너머 이웃마을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는 자아의 골짜기에서만 머물지 말고 나와서, 세상을 돌아보고, 바라보고 해야 한다. 현대인의 특징은 시력이 약해져, 먼 곳을 보지 못한다. 인류가 짐승일 때는 멀리까지 바라봤다. 문명 속에서 익숙해진 시야라서, 아파트 단지의 건너편 창문을 바라본다. 시야가 연장되지 않고 누에고치처럼 내면에 둥지를 튼다. 그러면 어떤 때는 자신에 충실하지만, 자칫 자폐가 된다. 예술은 끊임없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삐걱삐걱’ 소리가 들려야 하고, 뜨거운 숨결이 밖으로 나가고 밖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야 한다. 안 그러면 사막이 돼 양쪽이 다 죽어버린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를 맡아 ‘참여파’는 물론이고 ‘순수파’까지 101명을 그러모아 ‘101 선언’을 추진한 저항시인다운 문학론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이었느냐? 1974년 12월 27일의 일기를 보자. “문학은 비겁한 것인가. 문학은 현실에 대해, 힘에 대해, 이렇게밖에 존속될 수 없는 것인가. (중략) 절대로 권력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우리는 팔 하나씩 잘라버려야 한다. 자유실천문협은 한국문협, 자유문협, 그리고 한국문인협회의 그것일 수 없기 때문에 현대 한국문학사를 새로 쓰는 문학의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문학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는 일도 경계할 것이다. 문학은 문학으로 끝난다.” 지금은 하회탈 같이 속탈한 웃음을 짓는 고은이지만 1951년 교사시절이나 승려로 지낸 시절의 사진은 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여간 부담스러운 얼굴이 아니다. 고은은 “고비와 극한을 많이 경험해서 그렇다. 마음의 평화는 인생의 후반기, 지금부터 한 20여년 전에서야 얻었다”고 했다. “내 마그마는 마음의 지하에서 여전히 타고 있는데, 지층까지 올라오지 않도록 달래놓고 유보시키고 하는 것이다. 어느덧 내 무의식의 일상이 지하의 마그마를 노출시키지 않도록 조절하고 달래주고 있다. 나는 본능의 신성성을 인정한다. 본능은 천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아주 신성한 것이다. 그것을 내 규범에 의해 억압하면 내가 싫어한다. 그것이 나의 자연이다. 불이 나의 친구다. 그러니까 ‘얘가 덜 필요한가보다’ 하면 자기가 물러나주고, 필요한 듯싶으면 기꺼이 다가오고 그래준다.” 본능의 신성성을 높이 평가한 덕분인지 고은의 여성편력은 화려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그러나 그는 1974년 9월 5일에 만난, 당시 덕성여대 강의를 나가던 15세 연하의 이상화(66·중앙대 영문과 교수)를 만난 뒤로 사랑에 빠졌다. 이 즈음 고은은 “한 달도 안 됐는데 결혼을 생각해야 할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일기에 써놓았다. 결혼식은 만난 지 약 10년 만인 1983년에야 했다. 고은의 나이 50살 때다. ‘생활은 문학의 무덤’이라던 고은의 부인 사랑은 지극하다. 2008년 고은이 그림 전시를 한 뒤로는 생일이 되면 고은 부부는 그림을 그려 생일선물을 대신한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결혼 이후 성실한 가장으로 살았고, 특히 딸을 얻은 뒤로 우주를 얻은 듯 기뻐했다”고 회고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부인 이상화 교수는 고은의 통역을 자청해 왔다. 흔히 전문통역사들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고은의 발언을 풀어 설명한다면, 이 교수는 그러지 않는다. 이 교수는 “고은 시인은 발언 자체가 시다. 시를 산문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고은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이다. 고은은 “사람들이 그렇게 술 마시며 언제 시를 쓰느냐고 묻지만, 나는 일을 다 털고 난 뒤에 술을 마신다. 일을 했으니 나를 방임하고, 해방시켜줘야 한다”고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황홀했던 주막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주량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주량은 내가 측정한 적이 없다. 가장 오래 마신 기록은 이틀을 잠 안자고 계속 마신 적이 있다. 서너 명이 마시다 다 떨어지고, 최종적으로 둘이 대작했는데 내가 졌다. 고은을 이긴 사람이 누구냐고? 다들 죽었다”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고은에게 술은 대부분 “대취”와 “뻗었다” 사이에 있었다. 맑은 소주를 좋아했다. ‘대취’ 무렵의 그의 술친구를 직함을 생략하고 순서 없이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박맹호, 박성룡, 김현, 이청준, 이어령, 남재희, 한승헌, 김병익, 황석영, 손소희, 이시영, 김승옥, 조해일, 백낙청, 김동리, 이문구, 서정주, 최순우, 조세형, 김현종, 최인호, 김기영, 신경림, 염무웅, 권영민, 민음사 여직원 3명 등등. ‘황홀한 주막’은 서울 종로구 청진동 가락지와 열차집, 신촌 역전 술집, 낭만, 서린동 술집 등등으로 무교동과 청진동, 광화문 언저리다.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술자리는 1960년대 어느 날 새벽 1~2시에 혼자 마시던 술이다. 잠든 세상에서 비장한 비극성을 즐기며 “나는 세상을 숙직하는 자다. 세상을 지키는 취기다”라며 마셔댄 것이다. 연세도 있는데 술을 끊을 것인가? “술을 끊으면, 수사자에게 수염이 없는 것 같다, 원숭이에게 꼬리가 없는 것 같다, 조가비에게 진주가 없는 것 같다. 이별하지 말고 작별을 했다가 다시 만나야지. 옛날 삼거리 주막집에서 나그네들이 만나서 술 마신 뒤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하면서 손을 흔들면서 헤어지듯이 그래야지. 술에게 가혹하게 굴면 안 된다. 얼마나 헌신적으로 잘해줬느냐. 술이 운다. ”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동북아 역사 아픈 성찰로 현시대 깨달음 있어야”

    “동북아 역사 아픈 성찰로 현시대 깨달음 있어야”

    “21세기 들어 서양에서 ‘아시아가 세계를 지도해야 한다’고 축사를 건네지만 동북아시아의 실제 상황은 중국, 일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침략적 갈등 관계에 있다. 역사에 대한 아픈 성찰 위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시인 고은(80)은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1973~1977년 쓴 일기를 묶은 ‘바람의 사상’과 1940~1950년대를 회상하며 평론가 김형수와 대담한 내용을 묶은 ‘두 세기의 달빛’ 등 2권의 책을 출간한 기념으로 7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동아시아 정세를 이렇게 분석했다. “1월에는 복 받으라는 덕담만 해야 한다”고 한자락을 깔면서도 그는 “국내도 48대51로 짝 갈라진 것인데 정치 구호로서 사회 통합이 쉽게 제안되지만 물질적, 사상적 토대를 놓아야만 통합이 가능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두 권의 책 중 고은 개인에 대한 관심이 많으면 ‘바람의 사상’을 읽어 보길 권한다. 일기에는 시대 상황 및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또 최근 자서전 ‘책’을 펴낸 민음사 박맹호 회장과의 각별한 관계가 소개됐고 소설가 송기원·이문구, 시인 이시영, 평론가 이어령, 권영민 등과 무시로 술집을 들락거린 40대 시인의 발자취도 어른거린다. 고은은 “경봉 스님이 일기를 쓴다는 것을 알고는 ‘다비식에 불쏘시개로 쓰려고 그러시나’ 하며 일기를 경멸했는데 이제는 호흡 같아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게 됐다. 숨을 놓을 때나 이 짓을 놓지 않을까”라고 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작가의 가슴과 육성을 느낄 수 있는 책으로, 특히 ‘바람의 사상’은 유신의 한가운데서 시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지향을 시작했는지를 느끼게 하는 만큼 젊은 작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은은 “이탈리아 베네치아대학 초청으로 올 2월 중순부터 6월까지 그곳에 머물며 명예박사학위도 받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세시봉’ 윤형주의 음악과 인생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 가수 윤형주(65)가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삼인 펴냄)다. 책은 ‘내 인생의 열 가지 풍경’과 ‘세시봉의 친구들’ 등 두 개 테마로 나눠져 있다. 전반부 10개 풍경들엔 자신이 겪어온 삶의 편린들을 빼곡하게 담았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치욕스러웠던 대마초 파동, 가수를 ‘풍각쟁이’라고 여겼던 아버지와 의 갈등, 공연 기획자로서 겪었던 실패담 등 내밀한 이야기들로 채웠다. 책은 저자가 ‘트윈 폴리오’를 해체하고 연세대 의대에 복귀한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10개의 풍경 가운데 맨 마지막 장인 ‘윤형주는 가수다’ 편에서 다시 가수 입문과 ‘트윈 폴리오’ 결성까지 과정을 그린다. 자서전의 일반적인 패턴인 시간의 흐름을 살짝 비튼 것. 트윈 폴리오를 해체한 뒤, 다시 방송을 통해 음악계에 복귀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모멘텀이었다는 뜻이었을까. 후반부는 ‘절친’들에 관한 장이다. 연세대 동기동창인 콧수염 가수 이장희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보헤미안’으로, 양희은은 ‘언제나 씩씩한, 그러나 애틋한 내 동생’으로, 김세환은 ‘멋쟁이 내 동생’으로 그려진다. 그에게 조영남은 ‘엉뚱함의 최고봉’이었고, 전유성은 ‘숫기 없는 개그맨 1호’였다. 한데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고, 뜻밖의 사람이 보이기도 한다. 가수 이종용이 그렇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듯한 이종용과 ‘엄친아’ 윤형주가 교분을 나누었다는 게 의외다.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 잠깐 등장하는 ‘꼽슬이’도 마찬가지. 반면 ‘트윈 폴리오’의 파트너였던 송창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송창식이 모든 얘기들에 배경처럼 깔려 있어서” 따로 항목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보편적인 잣대로만 보면, 사실 송창식과 저자는 그리 어울리는 편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우리는 많이 달랐다.”고 했다. 이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게 어디 음악적 지향점뿐이랴. 그러나 의외의 조합이었던 ‘트윈 폴리오’는 약 2년 동안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이크’ 등 번안곡을 히트시키며 당대의 가요계를 휘어잡았으니 말이다. 부조화의 역설이다. 예나 지금이나 저자는 활동 영역이 넓다. 밖의 시선으로 그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한데 스스로 “윤형주는 가수”란다. 담백하다. 덧대고 뺄 게 없다. 그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이름”이고 “내 인생의 가장 설레는 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책 말미에 자신의 히트곡과 애창곡을 담은 CD를 남겨뒀다. 1만 3800원.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박근혜 당선자의 당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 탄생이라는 기록도 만들었다. 청와대에서 영애(令愛)로 유년기를 보낸 퍼스트레이디 대리는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됐다. 박 당선자의 삶과 정치 여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박 당선자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부모님을 꼽는다. 그는 1990년 일기에서 “비범하셨던 부모님을 모셨던 것부터가 험난한 내 인생 길을 예고해 주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20대에 부모님을 모두 흉탄에 잃은 비운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전차 타고 등교한 대통령의 딸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고 육 여사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 대구 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해 재직 중이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일했다. 박 당선자의 외조부인 육종관은 육 여사가 과거 혼인 경력이 있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육 여사는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딱딱한 군인 이미지와 달리 가족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분”, “젊은 시절 아버지는 로맨티스트”라고 회상했다. 육 여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고 할 만큼 신뢰와 애정을 가졌다. 특히 육 여사에 대해서는 단아한 외모와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을 떠올린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의 어린시절 의장 또는 대통령의 자녀라고 해서 특권의식을 갖지 않도록 평범한 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이었다.”고 적었다. 박 당선자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어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학점은 4.0 만점에 3.82였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가 사학을 전공하길 바랐으나 박 당선자는 산업 역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전자공학을 택했다. 졸업 직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친 뒤 강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지만 순식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육 여사 장례 6일 만에 퍼스트레이디역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했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자는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영문도 모른 채 귀국길에 올랐다가 가판대에 놓여진 신문 1면에 육 여사의 사진과 ‘암살’이라는 글자를 보고 “온 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 왔다.”고 회상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의 장례식을 치른 지 엿새 만에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참석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청와대에 들어온 민원을 점검하고 영세 기업, 소외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수행했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어 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주고받기도 했다. 1974년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퍼스트레이디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박 당선자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어 가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며 외교적 식견도 넓어졌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을 당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팽팽하게 맞섰으나 박 당선자가 로절린 여사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원활하게 풀어가 ‘근혜·카터 회담’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육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맏딸인 박 당선자에게 많은 의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려고 너를 두었는가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1974년 11월 일기에서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또다시 비극을 맞았다. 27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접한 박 당선자는 가장 먼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날 밤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직접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박 당선자는 장례를 치른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공개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매진했다. 박 당선자는 이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표현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가 청와대 시절 자신들에게 겸손을 강조한 이유도 신당동에 돌아와서야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권력의 중심부인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이다. 당시 박 당선자가 적은 일기들에는 특히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많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들이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고 배신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반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어차피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1981년 8월), “계속해서 인간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충성을 얘기하고 뭐가 어떻고 말이 많았던 그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은 자리 하나였다.”(1989년 1월 17일) 등 박 당선자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 기간도 오래 지속됐다. 박 당선자는 198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는 등 기념사업회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추도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청와대를 떠난 18년의 세월이 은둔, 칩거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 박 당선자는 “쓴웃음이 나온다.”면서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 당선자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으로 1980~1990년 사이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박 당선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결국 평범함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마음의 평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며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계기로 박 당선자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뿌리 깊은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을 따라 경제 안정에 주력했고 가까스로 일으켰는데 무너져 내렸다는 허탈함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 당선자의 정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헌정 사상 첫 부녀대통령… 34년만에 청와대 재입성

    헌정 사상 첫 부녀대통령… 34년만에 청와대 재입성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남은 생을 모두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넘어야 할 산이 아무리 험난하고 가파르다 할지라도 쉽게 주저앉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박근혜 당선자가 1997년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마음가짐을 자서전에 남긴 내용이다. 이러한 각오를 시험이라도 하듯 박 당선자의 15년 정치여정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의 40여년 삶만큼 파고가 높았다. 박 당선자의 측근들은 그에 대해 “진일보하는 정치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 주지는 않지만 정치 여정의 전체를 놓고 보면 한 단계씩 발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박 당선자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국가 부도 위기, 대량 실업사태와 생활고에 대한 기사를 접하며 박 당선자는 “가슴 밑바닥까지 분노가 일었다.”고 했다. 수많은 국민들이 피땀을 흘린 결과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데 대한 허탈함과 위기감이었다. 그는 1997년 12월 10일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996년 총선 직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경북 구미에 출마할 것을 제의했으나 정치에 별 뜻이 없다며 거절했다. ●“국민과 아픔 함께” 국회 본회의장 첫 발언 당선자는 이어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된 직후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90%가 넘는 상황에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여당 국민회의 엄삼탁 후보와 맞붙어야 했다. 이른바 ‘달성대첩’이다. 조직과 자금이 없었던 박 당선자는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유권자들과 만났다. 그는 “어느 후보보다 가난한 선거를 치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큰 차이로 이겨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나라가 어려운 때 정치에 입문하게 되어 더욱 어깨가 무겁다. 앞으로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본회의장 발언대에 처음 선 박 당선자는 이렇게 밝혔다. 2000년 총선을 통해 16대 국회의원이 된 뒤 박 당선자는 전당대회 부총재 경선에 도전장을 냈다. 여성 몫 부총재 자리를 당연직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경선을 통해 2위로 부총재에 당선된 뒤 박 당선자는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정당의 구조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치시스템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당내 분란을 일으키고 종종 왕따가 됐고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정치개혁의 핵심으로 상향식 공천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이끌다가 같은 해 11월 한나라당이 자신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자 합당했다.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던 2002년 5월 박 당선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두 번째 대권 도전에 실패한 뒤 한나라당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차떼기, 탄핵역풍 등으로 위기에 놓였다. 박 당선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가 됐다. 이 자리에서 박 당선자는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한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섰다.”면서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당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호소했다. ●대표때 정당 사상 첫 ‘대국민 약속 실천 백서’ 발간 침몰 위기의 한나라당 선장이 된 박 당선자는 우선 당사에서 나와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으로 개혁의 참모습을 보여 드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명동성당, 조계사, 영락교회 등 종교계를 다니며 사죄의 뜻을 보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비관적인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얻었다. 이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둥지를 튼 뒤에도 천안의 연수원을 사회에 환원했고, 비리 등의 혐의로 당원권이 정지된 당원, 중진의원들을 직접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개혁 의지를 강조했다. 박 당선자는 또 원내 정당, 정책 정당, 디지털 정당을 목표로 내세워 실천했다. 당 대표가 의원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함께 토론을 하도록 의원총회 형식을 바꿨고 정책이나 민원 관련 내용을 꼼꼼히 메모한 뒤 모두 실현에 옮겨 정당 사상 처음으로 ‘대국민 약속실천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당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스스로도 미니홈피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소통을 활발히 했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그동안 당 대표가 휘둘렀던 공천권을 시·도당에 돌려보냈다. “박근혜 실험정치 기로에 섰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 당선자가 2년 3개월 동안 대표직에 있으면서 네 번의 보궐선거를 비롯한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당 대표 임기를 모두 채운 유일한 대표였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당 대표 때부터 생겼다.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열흘 남짓 앞두고 5월 20일 박 당선자는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를 위해 신촌사거리를 찾았다가 피습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 갔던 박 당선자는 “남은 인생은 하늘이 내게 주신 덤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았기에 거둬 갈 수 있었던 생명을 남겨 둔 것”이라고 말했다. 병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대전은요?”라며 당시 지방선거의 판세를 걱정했다는 일화도 유명하고,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박 당선자는 2006년 6월 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17대 대선 경선을 준비했다. 그는 이임식에서 “국민 여러분께서 보내 주신 사랑을 큰 빚으로 생각하고 평생 갚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에서도 모든 유세현장에서 했던 이 말은 박 당선자 스스로도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며 다짐”이라고 했다. ●17대 땐 MB에 당내 경선 져 대권 재도전 2007년 이명박 대통령과의 경선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한나라당 내 친이명박계, 친박근혜계의 계파가 나뉘고 갈등이 심화됐다. BBK를 비롯해 이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을 친박 진영에서 대거 제기하고 친이계가 이에 맞서면서 본선을 능가하는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박 당선자는 2007년 8월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는 모두 승리했지만 국민여론조사의 벽에 부딪혀 석패했다. 흰색 상의를 입은 박 당선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경선 결과에 승복한다고 밝힌 연설은 ‘아름다운 승복’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박 당선자는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총선 공천을 두고 친이계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친박계 인사들이 공천에 대거 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이후 복당 문제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해 박 당선자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후 몇몇 정책에 대해 박 당선자가 이 대통령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우며 당내 계파 갈등은 4년 내내 골이 깊었다. 박 당선자는 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최대한 드러나지 않은 행보를 하고 입장 밝히기를 꺼렸지만 박 당선자는 내내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고 야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지녔다. 박 당선자는 2009년 4월 이상득 전 의원의 정치개입 논란이 일자 “이번 사건은 정치의 수치”라고 했고 같은 해 7월 미디어법 논란 당시 “(여당)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며 수정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2009년 이후 이 대통령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 두 사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박 당선자는 세종시 수정안이 평소 정치 신념인 원칙과 신뢰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청와대와 ‘강도’라는 비유까지 써가며 거침없이 설전을 주고받았고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에는 직접 발언대에 서서 반대토론에 나섰다. 18대 국회에서 유일한 경우였고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무산됐다. 박 당선자는 2010년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을 발족하는 등 비공식적인 활동을 하며 대선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이 또다시 큰 위기에 닥쳤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이 불거지면서 민심을 잃고 추락했다. 또 한 번 박 당선자에게 구원 요청이 쇄도했다. 박 당선자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쇄신을 진두지휘했다.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과감히 삭제하고 경제민주화의 가치를 넣었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 결과 100석 안팎에 그칠 것이라던 지난 4·11 총선에서 152석을 획득하며 제1당을 유지하며 박 당선자의 위력이 또 한번 발휘됐다.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 당선자는 “이번 대선이 저의 마지막 정치 여정”이라며 국회의원직까지 내던지고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2월 19일 박 당선자의 15년 정치 여정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새 기록을 남기며 새롭게 시작됐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134㎝ 작은거인 ‘희망은 계속 자란다’

    134㎝ 작은거인 ‘희망은 계속 자란다’

    김해영(47·여)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장은 키가 134㎝밖에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망에서 희망을 길어낸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가 올 연말 상복이 터졌다. 얼마 전 환경재단이 발표한 ‘2012년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에 선정된 데 이어 오는 22일에는 KBS 감동대상 희망상을 받는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는 그가 시상식을 위해 17일 귀국한다. 김씨는 올 초 자서전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로 세상에 큰 울림을 줬다. 밀려드는 강연 요청과 방송 출연을 마다하지 않고 희망을 전파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김씨의 인생은 그 자체로 감동 드라마였다.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1965년 갓 태어난 딸을 방바닥에 내던졌다. 척추를 다친 그의 키는 딱 134㎝에서 멈췄다. 술에 찌들어 살던 아버지는 김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살했다.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는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 넌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라며 매질을 해댔다. 지독한 가난과 폭력. 14세 소녀는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피해 한의원으로 갔다. 월급 3만원을 받으며 식모살이를 했다. 죽을 결심도 여러번 했지만 ‘나 하나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가겠지?’란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해 ‘딱 오늘까지만 살자.’고 매일 아침 되뇌었다. 김씨는 직업훈련원에서 편물기술을 배우며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전국기능대회·국제장애인기능대회 등 상을 휩쓸었고, 고입·대입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생활은 안정을 찾았지만 허전한 마음은 주체할 길 없었다. 1990년 홀연히 아프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보츠와나의 한 직업학교에서 아무 희망도 없는 아이들에게 14년 동안 편물 기술자로, 선교사로 봉사했다. 2009년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 국제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 한의원 창문을 보며 눈물 짓던 14세 식모는 이제 번듯한 복지사로 검은 대륙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김씨는 “아프리카에 직업학교를 설립해 편물기술뿐 아니라 꿈·희망·열정도 나눠주고 싶다.”면서 “큰 꿈도 오늘이 모여서 된 것이고, 멀리 가는 길도 한 걸음부터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독서·공부 여건 마련… ‘지식복지’ 실현

    “이제 빵을 주는 물질적 복지를 넘어 지식복지로 가야 합니다.” 유종필 관악구청장은 익숙지 않은 개념인 ‘지식복지’를 강조한다. 지식·정보가 힘이 되고 교육이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현실에서 누구나 책을 맘껏 볼 수 있고 또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자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추진된 것이 유 구청장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지식문화특구’, ‘교육혁신특구’ 사업들이다. 12일 관악구에 따르면 우선 유 구청장이 지난 2년간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걸어서 10분거리 도서관 조성 사업’이 대표적이다. 구는 유휴공간, 컨테이너 건축 등을 활용해 지역 곳곳에 작은 도서관을 꾸준히 설립하고 있다. 지난달 구청 로비 유휴공간에 문을 연 ‘용꿈꾸는 작은도서관’은 유 구청장 취임 이래 16번째로 문을 연 도서관이다. 구는 도서관을 독서의 공간뿐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 지역 공동체 활성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역 내 위치한 서울대학교와의 관학 협력 사업도 다양하게 벌이고 있다. 대학생 재능기부를 통한 멘토링 프로그램, 교수들과 함께 하는 특강,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미래인재 육성 프로젝트, 인문학 산책, 법체험 교실 등 두 기관 사이 협력사업은 70여개에 달한다. 박서규 교육지원과장은 “교육은 쌍방향 소통이 이뤄져야 학생들이 꿈을 가질 수 있다.”며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면 그 위에서 학생들이 마음껏 뒹굴며 자연스럽게 성장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관악구는 내년부터 지역 주민들이 인문학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찾아가는 인문학 대중화 사업을 추진하고, 어르신 자서전 발간을 지원하는 등 평생교육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출판은 인간의 DNA 같아… 후퇴 없을 것”

    “출판은 인간의 DNA 같아… 후퇴 없을 것”

    “미리 말해둡니다. 해피 뉴이어!” 11일 팔순을 맞아 자서전 ‘책’을 낸 박맹호(79) 민음사 회장은 기자간담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출근해서 업무를 보는 현역으로서 300권을 갓 넘어선 ‘세계문학전집’을 1000권까지 내고 싶다는 말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 활기찬 목소리였다. 박 회장은 196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사무실에 첫 간판을 단 이후 민음사를 한국의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낸 출판계의 산증인. 그 민음사는 이제 비룡소,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등을 자회사로 두고 문학과 인문을 넘어 아동, 과학을 아우르는 거대 출판사가 됐다. 장녀 박상희(50) 비룡소 대표 등 2세가 박 회장의 뜻을 잇고 있다. 자서전에는 성공한 사업가로 정치인의 꿈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의 집요한 종용(?)에도 불구하고 사업과 정치를 벗어나 문학도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 그럼에도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출판업을 물려주게 된 얘기, 출판을 하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뒷얘기와 인연들을 빼곡히 채워넣었다. 박 회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아무래도 첫 책 ‘요가’를 꼽았다. 1966년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3만부 판매 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인기를 끌어서 기억에 남는 게 아니었다. “쉽게 만들어 쉽게 돈 벌 수 있겠구나 생각한 거죠. 그래서 쉽게 했는데 두 번째 책부터 완전히 박살이 났죠.” 약사이던 부인이 팔았던 활명수가 10원하던 시절이었는데 빚이 3000만원이었다고 했다. 출판의 미래가 어둡다는 전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베스트셀러라는 게 1960년대에 2만부, 1970~1980년대에 50만~60만부, 1980년대 이후 밀리언셀러 정도가 됐어요. 우리 산업 발달과 함께 출판도 꾸준히 커온 것이지요. 출판은 인간의 DNA와 같은 겁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책을 찾을 수밖에 없고, 결국 어떤 책을 언제 어떻게 공급하느냐의 문제이지요. 그래서 출판 자체가 후퇴한다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서전에는 박 회장이 문학청년 시절이던 1955년에 쓴 단편소설 ‘자유 풍속’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소설로 작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지만 자유당 정권을 너무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등단에는 실패한 작품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18대 대통령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18대 대통령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대통령님, 사교육문제 좀 해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한 고등학생 올림”,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유쾌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일반 국민들이 18대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내놓은 손때 묻은 책들에 적힌 글귀 중 일부다. 18대 대통령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골라 첫 페이지에 대통령에게 바라는 희망과 비전을 전달하는 ‘국민의 서재’ 캠페인이 화제다. 이 운동은 일반 대학생, 인터넷 서점 알라딘, 아름다운가게 등이 함께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 서재 운동본부 측은 책을 매개로 국민과 정치권이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건강한 정치문화를 만들기 위해 책 모으기에 나선지 두달여 만인 28일 현재 200여권이 모였다고 밝혔다. 책은 대통령 선거날까지 모았다가 당선인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후보별 캠프 쪽과 이미 협의를 마친 상태다. 전국 각계각층에서 모인 책의 종류는 에세이, 소설, 자기계발서, 시집 등 다양하다. 참여한 국민 또한 고사리 손의 어린이부터 입시경쟁에 내몰린 청소년들, 취업난에 시달리는 20대, 내 집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30·40·50대 등 다양하다. 전하는 메시지도 가지각색이다. ‘문학 시간에 소설읽기’라는 책을 전달하며 표지에 “대통령님, 사교육문제 좀 해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한 고등학생 올림”이란 편지글을 남긴 청소년도 있고, ‘기발한 자살여행’ 책을 전한 김기명씨는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유쾌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글을 남겨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정희씨는 ‘지식e 1권’ 책을 전하며 “집값이 너무나 많이 부풀려졌다. 누구나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도 자신이 지지하는 각 후보를 지칭하며 책을 전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특히 박근혜 후보에게는 미국의 유명 여성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을 비롯한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전하며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기대감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