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자서전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혈관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안보실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월계동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대체 차량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84
  • 슈뢰더‘제3의길’어디로?

    게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이끄는 집권 사민당(SPD)이 10일 실시된 베를린 시의회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사민당은 선거 직후 발표된 출구조사에서 22.4%의 득표율을 기록,40.5%의기민당(CDU)에 크게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18.7%로 선전한 구 공산당 후신인 민사당(PDS)을 가까스로 따돌렸다.엣센주와 자를란트,브란덴부르크,튀링겐,작센 주에 이어 집권 1년동안 6번째 연쇄 패배다.이미 분데스라트(상원)에서의 다수당 위치는 상실했다. 특히 이번 베를린 선거결과는 2차대전 이후 사민당의 베를린 선거 사상 최악의 기록.적녹(赤綠)연정의 장래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정계개편론이 거론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슈뢰더총리의 실각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사민당의 잇단 참패는 슈뢰더정부가 추진중인 300만 마르크(170억달러)의재정삭감 등 긴축 재정을 기초로한 사회복지 축소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잃었음을 뜻한다.슈뢰더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기초한 ‘제3의 길’이 갈 곳을 잃었다는 의미다. 사민당내에서조차 ‘좌파 정도’를 이탈했다는 좌파의 공격으로 슈뢰더는곤경에 처하게 됐다. 슈뢰더 총리와의 불화로 지난 3월 재무장관직과 사민당 당수직에서 사퇴한 오스카 라퐁텐이 슈뢰더 총리의 실정을 비난하며 사민당 내분을 부추기고 있다. 아직 사민당내 좌파에 세력을 갖고 있는 라퐁텐 전 당수는 곧 출간될 자서전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를 통해 선거 패배의 책임은 슈뢰더 총리에게있으며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사민당의 추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슈뢰더의 정치생명의 관건은 내년 5월 치러질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의회선거.이 지역은 사민당의 전통적 텃밭이다.사민당의 운명,그리고 슈뢰더의 정치적 생명이 이곳에서 판가름 난다는 분석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의열 독립투쟁](7) 백정기 의사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방법론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투쟁방략 중 하나였다.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는 일찍이 무정부주의사상(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선각자였다. 일제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물론,소수의 특권계급(공산당 등)이나 일당독재,약탈적 경제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 등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였다.따라서 이런 한국인들의 무정부주의운동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라고 설파하고,민중이주체가 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혁명론적 투쟁방법론을 제창한 사실은주목된다.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조직적 기반 등이 별로 없는 식민지의 민중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의·열투쟁은 오히려 정당한수단이 되는 것이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러나 같은 곳에서 윤 의사와 거의 동시에일제 침략세력을 응징코자 한 영걸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백정기 의사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백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공원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도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백의사는 1896년 1월(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수원으로 뒷날 호를 구파(鷗波)라 하여 ‘백구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여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또 신학문도 배워 정치·경제·사상사에 대한 식견을 갖추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목격하고 고향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이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상경,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를 꾀했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펑톈(奉天,현 瀋陽)으로 망명했다.이곳에서 후일 ‘육삼정 의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동지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1920년 겨울부터 1923년 후반기까지는 군자금 조달과 주요 기관·시설파괴등을 목적으로 국내와 일본 도쿄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1923년 말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김창숙(金昌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큰 영향을 받았다.특히 이때 이들과 교유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그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유자명(柳子明)등과 함께 재중 한인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이 연맹은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조직이었다. 1930년 4월에는 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역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했으며 그해 10월말 정화암 등과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특히 백 의사는 이곳에서 일부독립운동가들의 민중 억압을 비판하는연극을 공연하여 재만 한인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지병이 악화로 1931년 5월경 상하이로 돌아온 의사는 몸을 요양하는 한편,영국인 전차회사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평소의 소신을 펼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있던 백 의사는 마침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항일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에게 4천만 엔(圓)이란 거액을 지원,중국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하이의‘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백 의사를 비롯해 정화암·이강훈·원심창(元心昌)등 10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3년 3월5일 상하이에 있는 백 의사의 아파트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거에 나서겠다고 해 제비뽑기로 주동자를 뽑게 되었다.추첨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 원심창도 동행을 자청,최종 3인이 선정되었다. 마침내 운명의 1933년 3월 17일.중국인 동지 왕야차오(王亞樵)로부터 입수한 권총과 수류탄,고성능 폭탄을 품에 간직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밤 8시경 육삼정 건너편 송강춘(松江春)이란 음식점에서 아리요시 등이 회합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거를 눈앞에 둔 순간 미리 거사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던 일본·중국 관헌에게 세 사람 모두 붙잡혀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과는 적지 않았다.거사 직후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비롯해 중국 신문은 물론 국내의 주요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장에서 피체된 백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사하야(諫早)감옥에서 복역중 1934년 6월 5일 영양실조와 병고로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 김구 선생의 지시로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리고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연구원‘文博 *‘육삼정 의거' 나머지 2人은 ‘육삼정 의거’의 주역 3인 중 나머지 두 동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우선 두 동지 가운데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이 선생은 올해 9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하고 있다. 금년 백범 50주기 추도식에서도 자필로 쓴 추도문을 낭독했다.젊어서 백야김좌진(金佐鎭)장군을 곁에서 모셨으며 백 의사와 함께 체포된 후 15년형을선고받고 일본감옥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일본 현지에서 백의사등 3의사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으며 60년까지 재일거류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혁명후 귀국해서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60년대말부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비롯,독립운동 관련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과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원심창(元心昌,일명 元勳) 선생 역시 백 의사와 같이 체포되어 무기징역을언도받고 복역중 8·15해방을 맞아 투옥 22년만에 일본 가고시마형무소에서석방됐다. 해방후 민단(民團)창립에 참가,11·12대 중앙단장을 지냈다.71년 7월 4일 일본에서 타계후 ‘의사’로 추존돼 재일한국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백정기 의사 유족근황과 추모사업 백정기 의사는 의거 당시 기혼자였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순국했다.현재 백 의사의 유족으로 등록된 백계현(白械鉉·65)씨는 백 의사의 동생 백진수(白珍守·46년 작고)씨의 아들로 백 의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사람이다.백의사의 동생 진수씨도 국내 항일 공적으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백 의사의 양자 계현씨는 한 때 공직생활과 개인사업을 하였으며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의사 추모사업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주로 추진되고 있다.정읍시는 수년전부터 시 예산으로 백 의사의 사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IMF사태 이후 자금난으로 모두 중단된 실정이다.현재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朴在福·전 정읍시의회의장)가 구성돼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으며매년 4월 13일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서 공동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기념물로는 58년 전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읍에 세워진 ‘순국기념비’와 독립기념관경내의 ‘어록비’ 등이 있다. 정운현기자
  • 金대통령 관련서적 해외출간 잇따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자서전과 저술이 해외에서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수십년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온 김 대통령의 철학과 인간적 면모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특히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경제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 가는지,경제정책의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김대통령의 저술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로도 풀이된다. 지난해 4월부터 지금까지 해외에서 출간된 김 대통령의 자서전이나 관련 서적은 모두 8종으로 다음과 같다. ▲일본 센소쇼보(千早書房)출판사 ‘나의 삶 나의길’ 일어판(98년 4월)▲일본 NHK출판사 ‘나의 자서전’ 증보판(98년 9월) ▲중국 외문(外文)출판사 ‘나의 삶 나의길’ 중어판(98년 9월)▲러시아 리퍼블릭출판사 ‘대한민국김대중 대통령’전기 노어판(98년 12월) ▲러시아 리퍼블릭출판사 ‘새로운시작을 위하여’ 노어판(98년 12월) ▲뉴욕 첼시 하우스 퍼블리셔스 ‘세계의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99년 1월)▲스웨덴 스톡홀름대출판사 ‘옥중서신’스웨덴어판(99년8월)▲중국 중앙민족대학출판사 ‘DJ nomics’ 중어판(99년 8월)양승현기자 yangbak@
  • 뉴스피플 8월26일자 발행

    대한매일신보사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피플’ 최신호(8월26일자,8월17일 발매)는 ‘복지국가 확립’을 강조한 김대중대통령의 8·15경축사를 계기로 빈민층에 대한 복지정책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턱없이 부족한 복지시설과 ‘불법’이라는 이유로 철거를 종용당하는 무허가 복지시설 등 현정부의 복지정책을 밀착취재했다. 또 김대통령의 8·15경축사 행간을 분석해 정치개혁과 재벌개혁 구상,재벌해체 전망 등을 세밀하게 짚어봤다. 정년단축,명예퇴직 급증으로 빚어진 초등학교 교사난의 실상과 최근 인기를얻고 있는 ‘인터넷 학위 따기’현상과 그 문제점 등도 꼼꼼하게 살펴봤다. 이밖에 최근 우리사회에서 유교적 가치를 놓고 벌어지는 ‘공자 논쟁’의 이모저모와 한국인 최초의 교황청 외교관 장인남 몬시뇰 인터뷰,‘5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2차대전 당시 위안부로서의 참혹한 생활을 자서전으로 엮어낸 네덜란드 출신 오헤른여사의 호주 멜버른 현지 인터뷰 등도 읽을거리다.
  • 일제戰犯 입국금지법 있으나마나

    일제전범 입국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개정 출입국관리법이 발효된지 1년반이 지났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출입국관리법 시행 주무부처인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13일 “이 분야 전문가나 관련 단체로부터 자료를 입수해 입국금지 대상자 선정을 위한 작업을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예산과 인력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말했다. 그는 이어 “구체적 전범행위를 가리기 힘든 데다 도쿄재판 등을 통해 이미전범으로 규정된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사망했거나 고령이어서 대상자선정이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개정 출입국관리법 통과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한나라당 이미경 의원측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은 “최근법무부에 확인한 결과 입국금지 대상자로 선정된 일제전범이 한명도 없었다”고 밝혔다. 정대협 양기강 총무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입국금지 대상 일제전범을선정할 수 있다” 면서 “여론에 밀려 개정 출입국관리법을 통과시킨 정부가외교관계 악화운운하며 눈치를 보는 바람에 대상자 선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비난하며 법무부장관 면담을 요청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양총무는 또 “대상자 선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자서전에 일본군인들을 위해위안소를 설치했다고 자랑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일본 전총리가 마음대로 한국을 드나들면서 친한파인 양 행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법무부는 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원순(朴元淳) 변호사를 비롯한 일제전범 관련 전문가들을 통해 일본이 패망한 뒤 전범처벌을 위해 개최됐던 도쿄재판 관련 마이크로 필름 등을 입수해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
  •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갱의 타히티 기행’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폴 고갱(1848∼1903). 연금술사와도 같은 황홀한 색채감각을 보여준 감성의 천재.그를 생각하면 두 권의 책이 함께 떠오른다.고갱이 직접 쓰고 그린 ‘고갱의 타히티 기행’과 고갱을 소재로 한 영국 작가 서머싯몸의 ‘달과 6펜스’다.몸은 ‘고갱의 타히티 기행’의 서문에서도 “지금고갱은 내 서재에 있다”고 적고 있다.그만큼 ‘고갱의 타히티 기행’은 자연인 고갱을 바로 가까이서 느끼게 하는 책이다. 최근 도서출판 서해문집에서 ‘고갱의 타히티 기행’을 펴냈다.특히 이번에 선보인 ‘고갱의 타히티 기행’(남진현 옮김)은 고갱의 타히티 체류기간중제작한 목판화 10점과 수채화들이 그대로 담긴 오세아니판(版)을 완역한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책의 원래 제목은 ‘노아 노아(Noa Noa)’.타히티 말로‘향기로운,향기로운’이라는 뜻이다.고갱은 타히티에서의 삶에 대한 기록과 함께 마오리족에게 구전돼 내려오는 고대 신화를 문학적으로 가공해 이 책에 담았다.세밀하면서도 경쾌한 고갱의 문체는 여백에 그린 수채화와 예술혼을담은 목판화와 더불어 천재 예술가의 영혼을 느끼게 한다. 광활한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군도의 작고 아름다운 섬 타히티.온화한 열대기후에 울창한 정글이 있는 이 섬에서 고갱은 오염되지 않고,타락하지 않고,유럽적이지도 않은 아름다운 원주민들을 만났다.그림을 그리고 종려나무 아래를 거닐면서 낙원의 삶을 꿈꿨다.그러나 유럽의 문명이라는 악을 피해 타히티로 건너간 그의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타히티 섬에서 보냈다.그는 타히티 생활중 스스로 정신적 유언장이라 여겼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우리는 누구이며,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비롯,‘타히티의 전원’등 필생의 대작을 남겼다.하지만 당시의 유럽 화단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1903년 고갱은 마지막 도피처인 도미니크 섬에서 심부름하는 소년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55세로 생을 마감했다. 풍요로운 열대의 풍경을 그림 그리듯 묘사한 ‘고갱의 타히티 기행’은 고갱의 내면의 자서전으로,또한 한 편의 어엿한 기행문학작품으로 읽힐 만하다. 김종면기자 jmkim@k.daily.com
  • 박흥호 나모인터랙티브사장 “3년내 세계시장 석권 자신”

    국내 소프트웨어업계에서 옹골진 실력으로 탄탄한 기반을 쌓아온 ‘나모인터랙티브’가 마침내 본격적인 세계시장 공략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나모는 지난달 29일 홈페이지 제작용 소프트웨어인 ‘나모 웹 에디터 3.0’을 일본에 3년동안 60만개(소비자가 기준 600억원) 수출하기로 현지 에모리(江守)상사와 계약했다.개인용 소프트웨어 수출로는 국내 최대규모. “일본 수출은 시작일 뿐이지만,외국의 개인 컴퓨터이용자들이 한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첫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가슴 뿌듯합니다.” 박흥호 사장(36)은 “일본내 인터넷 인구 1,500만명 가운데 홈페이지를 갖고 있거나 만들 계획인 사람은 한국의 20배가 넘는 1,000만명으로 조사됐다”며 “이 거대시장에서 1년내 2위,3년안에 1위에 오르겠다”고 말했다.곧영어판과 프랑스어판도 미국과 유럽에 대규모로 수출한다.현재 마무리 협상을 진행중인 미국 ‘디지털 리버’나 프랑스 ‘와스카’ 등의 대형 유통망을 타게 되면 앞으로 3년동안 미국 150만개,유럽 30만개는 문제가 없을 전망이다.“생각한 것을 그대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옮기고 싶은 데 잘 안될 때는 누구나 속 터지게 마련이지요.그래서 애프터서비스를 해외시장 개척의 최고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나모 웹에디터 3.0은 지난 3월 출시 이후 3만여개가 팔렸으며,국내 개인용홈페이지 3개 중 2개는 나모 웹에디터시리즈를 이용해 제작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박사장은 워드프로세서 ‘글글’의 개발 주역으로 알려진 소프트업계의 스타.이력도 예사롭지 않다.‘국어선생님’출신이다.부산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89년 한글의 기계화에 평생을 바친 고 공병우박사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깨달음’을 얻었고 이듬해 교직을 떠나 이찬진,김형집,우원식,정내권씨 등과 함께 ‘한글과 컴퓨터’(한컴)를 세웠다. 95년 한컴을 떠나기까지 그는 한글의 컴퓨터화에 작지않은 족적을 남겼다. 컴퓨터 용어의 한글화와 수식 편집기·맞춤법 교정기·한자 자전·유의어 사전·영한 사전·한글학회 큰사전 등의 개발을 주도했고,오늘날의 한글 소프트웨어 도움말 프로그램의 기본틀을 잡았다.한컴이 지난해 한글개발 포기를선언했을 때 누구보다도 한글 살리기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홀로서기에 나선뒤에도 그는 ‘인터넷 속의 한글’에 주력했다.인터넷 브라우저에서 한글을 바로 볼수 있는 ‘나모 HWP뷰어’,인터넷 검색엔진 ‘두레박’ 등 줄곧 이쪽 분야를 개척해왔고,또 100% 소비자들의 만족을 이끌어냈다. 요즘 해외출장이 부쩍 잦아진 박사장의 청사진 속에는 세계 모든 나라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김태균기자
  • [데스크시각] 만델라의 귀향

    ‘실직해서 직업 없음.새 부인과 부양가족 많음’ 지난 5년 동안 세계인들에게 ‘아프리카의 희망’으로 여겨져온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그의 고별식이 열린 지난달 30일 소웨토 축구경기장 입구에 누군가가 만델라의 처지를 희화해 걸어놓은 플래카드 글귀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인 타보 음베키 부통령의 유세장에서 잠깐의 시간을 할애받아 가진 고별식에서 국민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우선 ‘쿠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 2-3년 동안은 대통령 시절의 회고록 집필에 몰두하고나머지 기간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는 7월18일로 81세를 맞는 그의 나이로 볼 때 어디까지 실현 가능할지 모른다.그러나 현재 그의 힘의 나이는 캘린더 나이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측근들의 말로 미루어 가능할 수도 있다.실제로 그는 지난해 7월 전 모잠비크 대통령 미망인 그라사 마셸을 새부인으로 맞아,노익장을 과시했으며 새부인의아이 4명과 자신의 두딸이 나은 손자들까지 10명이 훨씬 넘는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다. 그가 돌아갈 쿠누는 인도양에 연한 트란스케이주 코사(Khosa)족의 작은 시골 마을.현재 이복동생이 살고 있으며 40여마리의 소와 가족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옥수수밭이 전부다.과거와 달라진 것은 만델라가 설립한 ‘만델라 어린이 기금’에서 새로 지어준 학교가 하나 들어섰다는 것뿐이다. 또하나 이곳에는 그의 귀향을 맞아 최근 조그만 집이 한채 들어섰다.붉은벽돌로 된 그 집은 그가 로벤섬에서 27년간 투옥생활을 보내며 연금되었던농가주택과 흡사하게 단층으로 소박하게 지어졌다.악몽같은 생활이었지만 그곳도 이미 자신의 고향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이같은 귀향 계획을 1994년 펴낸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서 밝히면서 “쿠누에서는 내가 모든 방향을 잘 알기 때문에 밤이 되어 깜깜해도 먹을 것을 찾으려고 헤맬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귀향 이유를 설명했다. 만델라의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훌륭한 것은 우리의 ‘지역감정’보다도훨씬 정도가 심했던 ‘인종감정’의 골을 어느 정도 해소시켰다는 것이다. 흑인 76%,백인 13%,아시아계 2.5%,혼혈 8.5%라는 복잡한 인종구성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그동안 소수 백인정부가 철저한 인종격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펴왔다. 이는 단순한 인종차별정책과는 달리 이른바 ‘홈랜드’라는 10개 자치국가를 건설,자국 내 전체 흑인을 제한된 지역 내로 몰아넣어 백인들과 근본적으로 격리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만델라가 이끈 투쟁으로 소수 백인지배가 끝났을 때 백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흑인들의 보복이었다.그러나 만델라는 비폭력을 약속했고 취임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출범,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범죄는 규명하돼사면을 통해 인종간 화합을 추진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과 진실추구 개념이 생성된 곳이 바로 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음을 상기할 때 전직 대통령 만델라의 빈손 귀향은 또하나의 머나먼 여정의 출발이고 그가 단순한 ‘아프리카의 희망’을 뛰어넘어 ‘인류의 희망’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ranuma@
  • ‘DJ 책’ 모스크바서 인기

    모스크바 유민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앞두고 김대통령에 대한 러시아어판 책들이 러시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하나는 김병국 교수(고려대)가 쓴 ‘한국 대통령 김대중-행정가,정치가,학자’(모스크바공화국출판사)란 책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출판사에서 낸 김 대통령 자서전인 ‘새로운 시대’란 책이다. 두 권의 책은 모스크바 대학가 학생들이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찾고 있다는것이 이곳 대학가 서점 관계자의 얘기.모스크바대학 구내 서점의 20대 종업원인 타치아나란씨는 “일부 학생과 교수들의 요구로 어렵게 10여권을 구해놓았으나 모두 팔렸다”면서 “절품이 돼 더 이상 진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점 관계자들은 김 대통령이 모스크바대학을 방문,학생들과 대화를 갖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국의 유학생들도 이 책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한국 대통령 김대중’이란 책은 그의 영문판 서적을 예브게니바자노프 러시아 외교아카데미부원장이 번역한 것이다.‘새로운 시대’란 책은 김 대통령이 직접 써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1996년 미국에서 영문판으로 발행된 것을 역시 바자노프 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 [화제의 책] 마일스

    끊임 없는 실험정신으로 퓨전재즈 등 재즈의 다양한 장르를 개척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자서전 ‘마일스’(전 3권,성기완 옮김)가 나왔다. 마일스가 재즈와 함께한 40년 인생사는 곧 스윙,비밥,쿨재즈,하드밥,프리재즈,퓨전재즈의 탄생사였다.이 책은 마일스가 죽기 2년전인 89년까지 명 트럼펫 연주자로서,불후의 재즈음악 작곡가로서 그의 인생을 담고 있다.19살때 줄리어드 음악학교 중퇴,당대의 재즈 명장이던 찰리 파커와의 만남,쿨재즈의 길을 연 앨범 ‘쿨의 탄생’ 발표,즉흥연주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앨범 ‘카인드 오브 블루’ 발표 등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마일스는 69년록음악을 재즈에 접목한 ‘비치스 블루’를 발표,퓨전재즈란 새로운 장르를개척한다.희대의 실험작으로 평가되는 이 앨범은 그의 실험정신의 절정이었다. 이 책은 마일스의 구술을 저널리스트인 퀸스 트루프가 기록한 것으로 흑인특유의 비속어와 같은 말의 반복까지 여과 없이 서술한 게 특징.40∼80년대뉴욕의 재즈계를 거울 보듯 들여다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각권 8,000원. 임창용기자
  • ‘자유라는 화두-한국 자유주의자의 열 가지 표정’

    우리 시대의 자유주의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일제 식민지시대와 뒤이은 분단,또 잇따른 독재정권 하에서 껍데기로만 남아온 슬로건 ‘자유’.그 비틀린 시대에도 ‘자유’를 삶의 화두로 삼아 시대의 곁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있었다.도서출판 삼인에서 펴낸 ‘자유라는 화두-한국 자유주의자의 열 가지 표정’은 우리 시대 자유주의자 10명의 그들나름의 자유로운 ‘몸짓’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에서 ‘자유주의자’라는 울타리에 넣고 있는 사람들은 여류화가 나혜석,소설가 최인훈,문학평론가 김현,작가 전혜린,시인 김수영,영화감독 장선우,무용가 홍신자,작가겸 평론가 복거일·마광수교수,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등 10명.얼핏 보아도 이들은 기성(旣成)과 안주(安住)로부터의 ‘자유’를갈망했음이 엿보인다. ‘거침없는 글쓰기’로 성역과 금기에 도전해온 ‘전투적 자유주의자’ 강준만 교수가 그렇고 “여자도 사람이다”며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 되고저’했던 여류화가 나혜석이 그렇다.자서전적 수상록 ‘자유를 위한 변명’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춤추듯 순간을 살았다”는 전위무용가 홍신자는독신을 결심했던 것도 자유를 위해서였고 뒤늦게 40세 때 12세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한 것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결국 ‘자유’라는 것은 이것 저것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나 할까.홍씨를 쓴 필자 강무성씨는 “내가 아는 한 홍신자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한 적이 없다”며 “따라서 그는 자유주의자 여부를 따지는 논의에서 미리부터 멀리,자유롭게 있는 것이다”고 홍씨의 ‘자유’를 자리매김한다. ‘음란물’ 필화 끝에 대학강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했던 마광수 교수는 어떤 ‘색깔’의 자유주의자일까.그를 논한 최연구씨는 “마교수의 사상은 한마디로 ‘야한 정신’인데,이 야한 정신이란 다름아닌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자유 정신’”이라고 그려내고 있다. “나는 평범한 것을 증오한다”며 평범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증오로 30세짧은 생을 살다간 서울대 법대출신의 작가 전혜린.그의 자유주의는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나를 절망케 한다”며 여자라는 ‘옷’을 벗어버림으로써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나의’ 도시는 뮌헨이요,슈바빙”이라고 할만큼 그는 슈바빙을 사랑했고 그리워했다.그러나 한겨레 최재봉 기자는 슈바빙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노라며 ‘폴란드 망명정부의지폐처럼 속절없이 스러져버린 전혜린’의 이름을 되뇌이고 있다.이국땅 슈바빙을 “와이셔츠 단추를 푼 분위기”라며 ‘자유’를 만끽했던 전혜린의‘자유주의’는 이미 세인의 기억속에서조차 ‘자유’롭다. 이 책에 등장하는 10명이 한국의 자유주의(자)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다.그러나 ‘자유’를 지향해온 이들을 통해 자유의 의미,시대와 자유의 상관관계,그 굴절과 저항의 맥락을 짚어보는 데는 하나의 ‘거울’이 될 수는 있을것이다.이 책은 삼인이 ‘레드 콤플렉스’‘보수주의자들’‘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에 이어 다섯번째로 내놓은 ‘인물비평’ 시리즈다. 9,000원.
  • [바로잡습니다]

    지난 3월2일자 3면 ‘독립선언서 100종 넘는다’ 제하 기사에서 일제하 독립선언서 연표가 양력과 음력 구분없이 표기됐으나 대한독립선언서의 선포일자 1919년 2월은 음력 기준표기 였고 2·8독립선언서 이하 16종의 선포일자는 양력 기준 표기였음을 알려 드립니다.또 ‘최초의 독립선언서는?’제하기사에서 趙恒來 평택대교수가 박찬익의 자서전을 언급하며 “대한독립선언서가 2·8독립선언서보다 앞선다”고 말했으나 확인결과 박찬익은 자서전을쓴 일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고칩니다.
  • 전경련 국제자문위원 日대표적 극우인사 위촉 말썽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국제자문단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일본의 이토추상사 세지마 류조(瀨島龍三)고문이 일본의 대표적 극우인사로 알려져 학계의비난 여론이 거세다. 학계에 따르면 세지마 고문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장교로 침략전쟁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한일합방에 대해서도 침략임을 부인하는 입장을 피력해 왔다고 한다. 동국대 법학과 韓相範교수는 “세지마고문이 지난 95년 펴낸 자서전 ‘기산하(幾山河)’에서 ‘1910년 한일합병을 침략내지 식민지화라고 정의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부적당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세지마 고문은 일본육사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2차대전말 관동군 장교로 있다가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에서 10년간 수형생활을 겪기도 해 일본우익들로부터 신화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형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이토추상사의 자문역에 취임,동남아시아 등지를 상대로 상품판매나 해외발주에 남다른 수완을 보여 회사를 일으켰다.韓교수는 “전경련이 국가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외국 유력인사들을 자문위원으로 기용한 뜻은 알겠지만 세지마같은 사람을 포함시킨것은 민족적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일”이라고 개탄했다.또 “일부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대응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전경견 고위관계자는 “세지마고문을 영입한 것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것”이라면서 “89세의 나이에도 불구,그가 일본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한 만큼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되리라고 보고 추천했다”고 해명했다.
  • 왜 롯데 辛회장 노렸나

    ‘왜 辛格浩회장 부친 묘소였을까’ 8일 롯데그룹 辛회장의 부친 묘소 도굴 사건의 주범 鄭金溶씨(38)가 검거돼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지만 범인들이 범행 대상으로 辛회장 부친 묘소를 선택한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다. 지난 7일 검거된 공범 任鍾淳씨(34)는 당초 辛회장 부친의 묘를 범행대상으로 삼게된 것은 우연히 ‘辛格浩의 비밀’이라는 책을 보고난 뒤였다고 주장했었다.자서전에 따르면 辛회장이 엄청난 부자인데다 효심이 깊어 유골을 볼모로 협박하면 돈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경찰은 한 때 鄭씨가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 연고가 있어 범행 대상을 辛회장 부친의 묘로 정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하지만 조사결과 아무런연고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롯데와의 원한 관계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鄭씨는 이날 검거된 뒤 “‘辛格浩씨 부친의 묘를 파면 보물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범행을 했지만 막상 무덤을 파고보니 예상과는 달리금품이 없어 유해를 훔쳤다”고 진술했다. 결국 어디서 나온지도 알 수 없는 소문이 이같은 희대의 범죄를 불러왔다는 것이 경찰의 시각이다. 李志運
  • 롯데회장 부친 묘소 도굴사건 鄭씨 진술로 본 사건전모

    롯데그룹 辛格浩회장의 부친 묘소 도굴사건은 빚에 쪼들린 鄭金溶씨와 任鍾淳씨가 빚을 갚기 위해 저지른 ‘단순사건’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鄭씨 등은 辛회장 부친 묘소에 파묻혔을 것으로 생각한 보석을 범행대상으로 노렸다가 보석이 없자 즉흥적으로 유골을 꺼내 돈을 뜯기로 생각을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鄭씨는 8일 경찰에서 “밭떼기 채소상을 하다 4,000만원을 빚을 진 상태에서 任씨도 8,000만원의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辛회장 부친의 묘소에 있는 보석을 꺼내 빚을 갚으려고 범행을 모의했다”고 진술했다.또 “범행 계획은 모두 내가 세웠으며 任씨는 내 지시만 따랐을 뿐”이라며 추가 공범이나배후세력을 부인했다. 경찰도 롯데그룹에 협박전화를 한 음성이 鄭씨임을 확인,일단 추가 공범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 鄭씨는 지난 달 28일 우연히 辛회장의 부친 묘소에 보석이있다는 소문을 듣고 任씨에게 ‘신격호의 비밀’이라는 자서전을 구입토록지시했다.그러나 자서전에 묘지의 위치가 언급돼 있지 않자 출판사에 확인전화를 걸었다. 鄭씨 등은 다음 날인 지난 1일 사전답사차 울산으로 내려갔고 이틀 뒤인 3일 묘소를 도굴했다. 그러나 소문과 달리 묘소에 보석이 없자 시신의 일부라도 가져가 롯데그룹을 협박하면 거액을 뜯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鄭씨가 범행 이틀 뒤인 지난 5일 任씨와 만났을 때 상당히 괴로워했다는 任씨의 진술을 보더라도 처음부터 협박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이들의 범행이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석연치 않은 점도 많아배후인물 및 여죄 가능성에 대해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辛회장의 부친 묘소에 보물이 있다고 鄭씨에게 전한 인물이 이들과 함께 공모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어떤 것일까.최근 작가 宋友惠씨는 한 월간지 기고를 통해 “그동안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알려져온 ‘대한독립선언서’(사진)는 사실은 대한독립의군부가 1919년 3월 중순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한것”이라며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선언서가이보다 앞선 최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宋씨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선포일자인 ‘단군기원 4252년 2월’은 음력을사용한 것으로 그 시기는 양력으로는 3월 중순 이후”라고 주장했다.宋씨는증거자료로 ‘독립신문’의 기자가 대한독립선언의 현장인 지린을 찾아가 당시 독립선언에 참가했던 朴贊翼씨 등을 만나 취재한 기사를 공개했다.宋씨가 공개한 1919년 10월 7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대한독립선언은 박찬익 등이 1919년 3월 중순 발기하여 선포한 것으로 나와있다. 한편 그동안 ‘대한독립선언서’를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주장해온 趙恒來평택대 교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일자를 음력으로 본 것은 공문서 등에서 양력을 이미 사용하던 당시의 추세와 맞지 않다”며 “박찬익의 자서전에도 대한독립선언서가 2·8,3·1독립선언서보다 앞선다고 나와있어 宋씨의주장은 믿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鄭雲鉉
  • 외언내언-諸廷坵의원과 현충원

    ‘신부와 벽돌공’은 지난 9일 타계한 諸廷坵의원의 자서전이다.이 책은 12일 국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영결사처럼 “가진 자보다 없는 자,강한자보다 약한 자와 늘 함께 있기를 생활철학으로 삼았으며 독재권력에 맞선민주화 운동가였고 낮은 곳을 향해 정의를 추구하면서 도시 영세민들과 동고동락해온 실천적 지식인이자 깨끗한 정치를 지향했던 올곧은 정치인”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 준다.아울러 그가 온 몸을 던진 치열한 삶으로 수행의길을 걸었던 구도자였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서울 청계천 판자촌의 야학교사(72년)로 시작해 양평동 철거민들과 함께 시흥에 ‘복음자리’ 공동체 마을을 건설(77년)하고 목동·상계동 등지의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 운동을 이끈 공로로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86년)됐을 때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다.“뭔가 잘못됐습니다.저는 제 일을 통해받을 상을 이미 다 받은 사람입니다”.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받았다는상은 “가난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었다.그는 막사이사이상을 ‘천막사이사이상’으로 받아들였다. 복음자리로 이주했던 겨울,돌도 지나지 않은 첫딸이 급성폐렴에 걸렸을 때그는 가난의 위선(?)을 벗는다.“처의 친구 아버지 병원을 찾아 아름이를 살리고 난 후 나는 결코 가난한 판자촌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돈이 없는 것은 그들과 같을지 모르지만 돈 아닌 무형의 자산인 중·고·대학의 친구들,친척들…판자촌 주민들 중에 나처럼 무료로 급성폐렴에 걸린자식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그때까지 나는 내가 똑같은 판자촌 주민이요,도시빈민이라는 허구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그릇된 것을 보면 ‘불같고 송곳같은 성질’로 ‘욕쟁이요 싸움꾼’으로 자신을 내던져 부서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 또한 지녔다. “돈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난을 넘어 가난하게 살 수 있는 힘… 자신을더 철저히 버림으로써 가난에 접근해 가는 적극적인 방법”을 찾은 그는 “더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정치판”에 “걸레가 되겠다”는 각오로 들어선 다음에도 현실정치의 더러움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다 갔다.아내와세 딸에게 18평짜리 슬레이트 집 한채와 빚 7천만원,그리고 ‘가짐 없는 자유’라는 가훈을 남기고. 그런 그가 구차한 규정에 묶여 국립현충원에 눕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諸의원 자신은 현충원보다 빈민들 사이에 묻히고 싶어했을지 모르지만..
  • 조약돌…李宗基변호사 구로을再選 옥중출마 밝혀

    ▒대전법조비리 사건으로 구속수감 중인 李宗基변호사(47)가 다음달 말 실시될 서울 구로을 재선거에 옥중 출마할 뜻을 밝혔다. 李변호사의 변호인인 金炫변호사는 12일 “지난 9일 李변호사가 선거준비를 부탁했다”면서 “사법개혁을 이슈로 삼아 정책대결을 펼치겠다는 것이 李변호사의 구상”이라고 전했다. 金변호사는 “李변호사가 지난해부터 정계에 나갈 생각으로 꾸준히 준비해오다 이번 사건으로 꿈이 좌절되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밝혔다. 李변호사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하면 무소속으로 출마할 예정이며 선거비용은 준비중인 자서전의 인세를 미리 받아 충당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 외언내언-경찰청장의 고백록

    고백이라는 말은 마음속의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것을 말한다.사람이과거의 잘못이나 죄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백이라는 과정을거쳐야 한다.고백을 내용으로 한 자서전도 있다.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의 고백록이다.이들의 자서전인 고백록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내용이 마음속의 진실을 드러내는 고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없겠다. 李茂永 신임 서울경찰청장의 ‘고백록’이라는 것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물론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루소의 고백록과 같은 자서전을 펴낸 것은 아니다.하지만 경찰의 적폐를 스스로 들추어내고 경찰이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선언했다 해서 그의 말에 언론이 그렇게 이름붙였다.권력은 자기행동을 합리화할 힘이 있다.권력은 오만하고 교만한 속성을 갖는다.권력으로부터 잘못한것을 잘못했다고 인정 받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그런 권력기관의 책임자가 스스로 자기 조직의 치부를 적출해내었다.얼마나 숨김없이 드러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언론에서는 그것을 고백록이라고 불러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그만큼 우리 경찰이 국민과 함께한 경찰이었다기보다 권력의논리에 지배돼왔음을 방증해주는 대목 같기도 하다. 어쨌든 李청장은 이렇게 고백했다.지난달 16일 일선 서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의 일이라 한다.소위 ‘빽’을 쓰면 교통사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뀌게 된다고 했다.그의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경찰이 범죄꾼을 잡으러가지는 않고 순찰함에 사인만 하고 온다고 했다.뿐만 아니다.경찰이 있어야할 곳엔 없고 없어야 할 곳엔 있다고도 했다.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그렇지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국민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아는 일이었다.그것을 경찰이 선뜻 인정하고 반성을 안했을 뿐이다.이제 경찰책임자에 의해 고백이 이루어졌으므로 이같은적폐는 혁파될 것으로 기대해 봄직하다.경찰은 진정 국민에게 철저히 봉사하는 경찰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李청장의 고백록은 교양자료로 경찰간부들에게 배포된다고 한다.교양도 좋지만 그렇게 끝낼 일은 아니다.즉시 경찰의 개혁운동으로 실천돼야 한다.잘못된 과거와의 단절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더구나 아직도 신선하기는 하지만 때늦은 고백인 것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李宗基변호사 정신상태 온전”

    沈在淪 대구고검장은 지난 27일 항명회견에서 “李宗基변호사가 정신적인공황상태에 있다”면서 자신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는 李변호사의 진술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사관계자들이 전하는 李변호사의 정신상태는 정반대다.李변호사는 수사관계자들도 놀랄 정도로 사소한 일조차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수임비리와 관련된 사건명만 대면 원고와 피고의 이름은 물론,1심과 2심의 선고내용 등을 줄줄이 읊을 정도로 ‘지극히 온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沈고검장이 소개한 사건도 당시 정황을 정확하게 진술했다는 후문이다.따라서 “황망한 상태의 李변호사를 검찰이 괴롭혀 나를 희생양으로 지목했다”는 沈고검장의 항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단언한다. 李변호사는 수임비리 사건이 터진 뒤 주변 사람들에게 “자서전을 쓸 계획이니 신문스크랩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검찰은 문민정부 때H변호사가 자서전을 통해 검찰재직 당시 외압에 의해 수사가 중단된 각종 사례를 공개함으로써 곤경에 빠졌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전례없을 정도로‘철저하고도 공정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이 때문에 특정인을 표적삼아 수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任炳先 bsnim@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