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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문사委가 밝힌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 전모/ 유신 ‘공작살인’ 국가서 첫 인정

    의문사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발표 내용을 수사부터 재판까지 부문별로 간추린다. ◆조직결성의 증거 유·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차 인혁당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조직결성과 관련한 증거가 없다.트랜지스터 라디오,공식 출판 서적,학생들 선언문,민주수호국민협의회 관련 자료 등이 있을 뿐 강령,규약,조직문서,감청 기록 등 지하당 결성과 관련된 물증이 없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가한 고문의 실상- 중정 수사관들과 중정에 파견된 경북도경 등의 경찰관들은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구타,몽둥이(야전침대봉 등)찜질,통닭구이고문,물고문,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은 증언했다. 서울시경 소속 경찰 전○○는 국방색의 야전용 전화기로 피의자를 전기고문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경북도경 경찰 이○○은 물고문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지하 보일러실은 고문을 하는 장소라고 진술했다. ◆각본에 의한 수사- 수사 마무리 단계에서 중정에서 갑작스럽게 조사했다.당시에 중정간부가 1차 인혁당 관련 기록을 보고 있었으며 중정에서 짜놓은 각본에 맞춰 조사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수사팀장인 윤○○이 수사관들에게 “물건(조직사건)을 만들라.”고 지시한 일도 있다고 진술했다. ◆고문을 통한 피의자 자백 강요- 수사관 이○○,신○○는 중정의 지시가 사실관계 및 상식과 어긋나는 것이 많이 있었지만 윤○○이 지시하면 무조건 조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피의자들이 처음에는 혐의사실을 부인하더라도 중정 수사팀이 고문을 한차례 하면 그 다음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시인조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관 조사 때 중정 수사관이 참여- 피의자들을 고문 당시 수사관들,검찰서기,피의자들은 검찰관 조사 과정에 중정의 수사관들이 수시로 입회하였으며 “혐의를 부인하면 6국 지하보일러실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였고 검사가 물으면 예라고 답할 것을 강요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서울시경 소속 경찰 나○○은 “대구팀이 중정에서 검찰관과 같이 조사를 한 것은 중정에 있었던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그 목적은 혐의사실을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공판조서 허위 작성- 재판을 지켜본 변호사들 교도관들,피고인의 가족들은 공판기록에 나타난 허위기재 사실은 크게 두 가지라고 입을 모은다.첫째는 부인한 혐의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는 것이고 둘째는 불법적인 고문 수사에 항의하는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것이다. ◆위법한 재판과정- 변호인들이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 증언자를 재판부에 신청을 해도 재판부에서 받아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더구나 피고인들이 고문당한 사실을 증언하면 재판부에서 막는 경우도 있었다.임구호 피고인의 경우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난 뒤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 검찰관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하기까지 했다.피고인 가족도 방청이 한 피고당 1인으로 제한됐으며 기자들도 방청이 제한되어 보도하지 못했다. ◆전격적인 사형집행-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들의 형 집행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다음 날 법무부장관의 지시에 의해서 새벽에 전격적으로 집행됐다.일반적으로 사형수들은 최소한 몇개월,길면 2∼3년 지난뒤 집행된다. ◆유언의 허위작성- 사형수들은 사형장에서 최후진술을 할 수 있고 사형집행명령부 비고란에 기록된다.그런데 사형집행명령부에는 도예종이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고 8명의 비고란 가장 아래에는 모두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기록돼 있다.그러나 당시에 사형 장면을 목격했던 교도관 김○○은 도예종이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단 한마디만 했다고 진술했다. ■조사과정 이모저모/ 18개월간 400명 진술받아 조작 관여자 “시키는 대로”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지난 75년 옥중에서 병을 얻어 사망한 장석구씨 사건을 직권 조사하기로 지난해 3월 결정한 뒤 1년6개월에 걸쳐 수사와 재판에 관여했던 400여명의 진술을 들었다.이 가운데 120여명은 정식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규명위 관계자는 “대부분이 현직에서 퇴직한 상태였으며 치매로 조사가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참고인들은 고문과 사건 조작에 관여한 사실을 강력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규명위측이 유족과 관련자의 진술을 토대로 추궁을 하자 조금씩 사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규명위 조사관들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파견돼 수사에 나섰던 경북도경 소속 경찰관들은 대체로 고문과 강압수사 사실을 시인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중정 직원과 간부들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거나 “중정은 경찰 수사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파견 경찰관과 중정 직원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규명위 관계자는 “경찰관 중에는 ‘공은 중정이 가로채고 나중에 문제될 일은 경찰에 떠밀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한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심지어 중정 간부들이 헌병을 동원해 반발하는 경찰관을 감금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구속하겠다.”고 협박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검찰 관계자들도 책임을 부인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규명위 관계자는 “대부분의 검찰 수사관들이 ‘우리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상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며 발뺌했다.”고 전했다. 일부는 “빨리 사건을 끝내주는 것이 피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사형 당할 수 있는 중대한 혐의사실도 너무 쉽게 시인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하지만 당시 재판부 판사들은 현재 해외에 체류중이거나 소재 파악이 안 돼 규명위로서도 접촉이 쉽지 않았다. 규명위 관계자는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진술을 요청해도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다.’거나 ‘협조는 하겠으나 조서에는 남기지 말아달라.’며 답변을 회피했다.”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 ■재심 어떻게 - 최초 판결 법원 다시 재판 시작 재심은 법원에서 이미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에서 사실 오인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피고인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다.원심의 판결을 뒤집을 명백한 증거가 확보되거나 새로운 사유가 생겼을 때 구제받는 비상절차로 현행 형사소송법은 사법 판단의 안정을 위해 그 요건을 엄격히 한정하고 있다. 재심청구 신청서가 제출되면 재심 사유가 있는 심급의 법원이 심리에 착수,사건 관련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검토하게 된다. 1974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4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다음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된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면 최초 판결을 내린 법원에서부터 다시 재판을 진행해야 하다. 당시 관련자들이 1심인 보통군사법원을 거쳐 2심인 고등군사법원과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통해 형이 집행된 만큼 재심 판단은 군사법원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안동환기자 sunstory@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인혁당 조종받는 민청학련 정부전복기도””/사형선고 20시간만에 핵심8명 전격 형집행 유신시절인 1974년 정부가 발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제2차 인혁당사건으로도 불린다. 도예종씨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한 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배후 조종,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 내용이었다.당시 구속기소된 23명 가운데 75년 4월 대법원에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20시간 만에 가족들도 모르게 형이 집행됐다.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일부는 수사 도중 구속정지 등으로 풀려났으며,구속기소된 인사 가운데 현재 9명이 생존해 있다. 민청학련 사건은 73년 8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을 계기로 반유신 체제운동이 가속화되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당시 박 대통령은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고,위반자를 잡아들였다. 앞서 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이 사주한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해 국가 전복기도가 있었다.”고 발표한 사건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그러나 인권단체에 의해 고문사실이 알려지고 담당 검사들이 사퇴하는 등 홍역을 치르면서 13명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세영기자
  • [씨줄날줄] 아! 최종길 교수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사망한 최종길(서울법대) 교수가29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한상범)가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 행사로 숨졌음이인정된다.”고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다.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억울한 누명을쓰고 죽은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해서도 그렇고 역사를 위해서도 그렇다. 진상규명위는 “최 교수가 중정의 고문과 협박 등 불법수사에도 불구하고 사망 때까지 강요된 간첩자백을 하지 않았다.”며 “의식적·적극적 항거 외에도 권위주의적 공권력 행사에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 또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활동’에 포함된다고볼 수 있는 만큼 최 교수 죽음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말했다.그리고 “고문으로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7층 비상계단에서 내던져져 사망했거나 고문으로 사망한 뒤 수사관들에 의해 자살로 위장되는등의 수법으로 타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최종 판단을내렸다. 그나마 다행이다.어렴풋이 진상이 밝혀지고 고인의 명예가 회복됐으니 말이다.하지만 국외자의 이런 말이 피해자가족에게는 정말 야속하게 들릴지 모른다.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아버지는 간첩이었고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에 어린 아들이 받았을 충격을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으리라.그 노모가 29년을 기다리다 생때같은 아들이 주검으로 돌아온 까닭을 모른 채 한달 전인 지난 4월에 타계했다지 않은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다름 아니다.멀쩡한 대학교수를 고문해서 죽이고,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그에게 간첩의 오명을 씌운 범인들을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15년)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하니 나온 말이다.자식을가슴에 묻은 노모,‘간첩의 아들’이라는 시선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자랐을 아들(광준·38세·경희대 법대 교수),형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뛰어다닌 동생 등 가족은 일찍이 범인들을 용서했다니 논외로 치자.반인륜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애야 한다는 비등한 여론을 가볍게여겨서는 안된다.반드시 범인들의 처벌만을 위해서가 아니다.이웃이 당하는 억울함을 외면하고 권력의 압제에 소극적으로 동조해온 양심의 피고인 우리 모두에게도 경종이 필요한 것이다. △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대법, “강압수사 자백 인정못해”원심 깬 판결 내려

    대법원 3부(주심 尹載植 대법관)는 19일 오락실 업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박용운(50) 전 충북 옥천경찰서장 등 공무원 3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검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자백은 인정할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검찰이 피고인에게 잠을 재우지 않고 며칠 동안 밤샘조사를 하면서 폭언과 강요,회유 끝에 자백을 받아낸것으로 보이는 만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재판부는 또 “피고인측이 제출한 녹취록에는 검찰이 피고인 가운데 한 명에게 법정에서 자백을 번복하지 말도록 회유·협박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강압수사라는 피고인측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 사건을 수사한 대전지검은 “강압적인 수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장택동기자 taecks@
  • 2000 美대통령 선거 뉴햄프셔 예선 분석

    [맨체스터(미 뉴햄프셔주)최철호특파원] 존 매케인 아리조나주 상원의원이1일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예상보다 큰 두자릿수 표차로 조지 부시 텍사스주지사에 승리함으로써 앞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지명 과정은 치열한 장정이될 것으로 전망된다. 애초 1주일전 끝난 아이오와 코커스를 포기한 채 뉴햄프셔주에 와 114회의토론회를 갖는 등 일찍부터 주민접촉을 부지런히 해온 매케인 후보의 승리는예상됐었다. 그러나 네슈아 선거본부에 나타난 매케인 자신도 말했듯 두자릿수 표차는예상밖의 일이며,표차에 주목한 여론의 집중관심을 받으면서 상승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상승세가 11개주가 예비선거를 치르는 3월7일 수퍼 화요일까지 이어질 경우부시의 후보선정은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대선 가도에 돌부리를 만났다”(bump on the road)며 자위한 부시는 ‘항상 선두’라는 그동안의 마음가짐에 큰 상처를 받았으며 타주에서 빠른 시일내에 만회해야만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안게 됐다.커다란 표차는 또한 부시성향으로 길들여졌던 공화당내의 기류에도 상당한 판도변화를 가져올 것으로전망된다. 매케인 자신은 이를 두고 “돈과 정치, 불완전한 선거법안이라는삼각관계가 만들어내는 기존 정치구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고 자평했다. 미 언론들은 정치관심도가 높은 뉴햄프셔주에서 매케인의 승리는 정치가 갖는 부정적인 비판과 클린턴 대통령이 보여준 추문 등,선거자금 논란,강한 미국을 바라는 주민들의 강한 열망이 매케인이란 매개체를 통해 비판의 목소리로 표출된 것으로 분석한다. 민주당의 브래들리 후보가 박빙의 승부로 고어 후보에 다가선 것 또한 같은이유로 풀이된다. 브래들리 후보 역시 “정치에 실망한 사람,우리 세대에 변화를 가져올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힘을 오늘 보여줬다”며 고어 후보에 바싹 따라붙는 위력을 과시,민주당 접전을 예고했다. 아울러 양당의 후보 윤곽은 공화당의 부시 매케인 포브스,민주당의 고어,브래들리 싸움으로 압축된 모습이며 여타 후보들은 곧 거취를 정리할 것으로보인다. 뉴햄프셔 예비선거는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무소속 유권자들의 한표 위력이유감없이 발휘됐다는 분석이다. *2000 美대통령 선거 이모저모 [맨체스터(미뉴햄프셔주) 최철호특파원] 뉴햄프셔 예비선거는 독립심이 강하기로 이름난 뉴햄프셔 주민들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며 공화당 지명전에서존 매케인 애리주나 상원의원이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등 이변과 화제를 낳았다. □부시 주지사를 누른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번 승리는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라고 주장.매케인 의원은 지지자들에게 “이번 승리는 개혁의 전통을 회복하고 있는 공화당에게는 기존 정치의 종식이 시작되고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매케인 상원의원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는 데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솔직함과 유머,애절한 전쟁포로 경험담이 일조를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매케인 의원은 지난해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 ‘나의 조상들의 신념’에서 과거 자신의 금융 스캔들,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전쟁포로 당시 강요된 자백을 한 점 등 자신의 과오를 거리낌없이 공개했고 유권자들로부터 솔직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5년 6개월 동안 전쟁포로로 잡혀있으면서 온갖 학대를받았다는 그의 독특한 전력이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려,그를 지지하게 만들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앨 고어 부통령은 지난 31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주민들 때문에 진땀을흘렸다.고어 부통령은 투표 바로 전날인 이날 맨체스터의 선거본부에서 유권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지를 호소했으나 한 유권자가 장난 전화로 알고 대화를 거부했다고 소개.고어 부통령은 문제의 여인이 상대를 하지 않자“장난이 아닙니다.진짜 앨 고어입니다”라고 거듭 외쳤으나 별무효과.
  • 참고인 진술·정황증거에 나타난 실체

    지난 88년 당시 평민당 김대중(金大中)총재가 서경원(徐敬元)의원으로부터북한의 공작금 1만달러를 받았다는 검찰 발표는 검찰과 안기부의 공조 조작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참고인의 진술과 정황 증거 등을 종합하면 안기부가 89년7월10일쯤 서 의원의 비서관 방양균(房羊均)씨로부터 “흰 종이에 1만달러를 싸 갖고 가는 것을 봤다”는 자백을 받아내 검찰에 넘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검찰이 7월28일 서 의원으로부터 ‘1만달러 제공’ 진술을 얻어냈을 가능성이 짙다.검찰과 안기부가 짜맞추기 수사를 한 것이다. 방씨는 최근 검찰 조사에서 당시 안기부가 서 의원이 1만달러를 솔 담뱃갑2개 크기로 포장해 김 총재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강요했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자백했다고 밝혔다.수사는 정형근(鄭亨根) 당시 대공수사국장이 총괄했다.방씨는 자신을 직접 고문한 김모씨를 최근 만나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방씨 진술대로라면 ‘1만달러 수수 공작’은 안기부에서 시작돼 검찰이 마무리한 셈이다.정형근 의원이 ‘1만달러 수수’ 부분은 검찰이 밝혀낸 것이라고 한 발언과도 배치된다. 더욱이 당시만 하더라도 대공업무과 관련해서는 검찰과 안기부는 탄탄한 공조를 유지했다.안기부가 수사해 송치한 공안사건을 수사하다 송치내용과 다른 점이 발견되면 검찰이 반드시 안기부와 협의 또는 조정을 거치는 게 관례였다.검찰 관계자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 책임자가 당연히 검찰의 수사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며 조율가능성을 내비쳤다. 서 전 의원과 방씨는 안기부뿐 아니라 검찰에서도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방씨는 자신이 당시 안모검사에게 안기부의 수사가 조작됐다고 하니까 ‘사형을 면해줄 테니 시인하라’고 회유했다고 진술했다.서 전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김용래(金容來)씨와 김씨의 친구인 안양정(安亮政)씨가 당시 검찰에제출한 진술서와 2,000달러 환전영수증이 누락됐다는 주장이 사실로 확인된것도 검찰의 공작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수사검사팀은 안기부와의 합작 수사에 대해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따라서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좀더 진행되어야 ‘공작’의 실체가 명백히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주병철기자 bcjoo@ *“어느선까지 소환”고민하는 검찰 검찰이 깊은 시름에 빠졌다.지난해 대전 법조비리사건에 이어 조폐공사 파업유도 및 옷로비 의혹사건에 대한 특별수사로 자존심을 구긴 검찰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 1만달러 수수 공작’사건으로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검찰 내부에서는 심각한 위기라는 탄식의 소리와 함께 ‘이번 기회를 통해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정치권의 논리로 검찰이 수사 검사를 수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앞으로 수사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만도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재수사’라는 칼을 뽑아든 것은 당시 수사에대해 조작 의혹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검찰 수사 발표에서 빠져서는 안될 서경원(徐敬元)전 의원의 보좌관 김용래(金容來)씨와 조흥은행 영등포지점 외환담당 대리 안양정(安亮政)씨 등 참고인의 진술과 물증의 누락 확인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이 같은상황에서 그대로 덮을 경우 검찰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할 것이라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검찰은 특히 당시 수사검사를 어떻게 조사할 것이며 어느 선까지 소환해야하는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검찰 수뇌부는 계속해서 회의를 열어 대책을숙의하고 있다. 당시 안기부에서는 정형근(鄭亨根)수사국장,안응모(安應模)1차장,徐東權(서동권)·박세직(朴世直)안기부장이 수사 보고라인이었다.검찰에서는 서울지검 安鍾澤(안종택)·이상형(李相亨)검사,안강민(安剛民)공안1부장,김기수(金起秀)1차장,김경회(金慶會)검사장,김기춘(金淇春)총장라인이었다. 이와 관련,안기부에서는 당시 안응모 1차장,검찰에서는 안강민 공안1부장까지 소환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적지않다. 주병철기자
  • 徐 前의원 비서관 房羊均씨‘1만弗 수수’허위진술

    서경원(徐敬元) 전 의원 비서관인 방양균(房羊均)씨는 18일 “서전의원 밀입북사건 수사 때 당시 안기부 수사국장이었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게 직접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방씨는 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1만달러 수수 부분은 안기부 조사 때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던 내용”이라고 말했다.다음은 일문입답. ■1만달러 수수는 검찰수사 때 밝혀진 내용 아닌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안기부 수사 때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다.안기부와 검찰이 ‘김대중평민당 총재 죽이기’ 차원에서 함께 조작한 것이다.안기부는 서전의원이 1만달러를 솔 담뱃갑 2개 크기로 포장해 김총재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강요했다. ■정형근 의원에게 고문을 당했나. 당시 대공 수사국장이던 정의원이 직접구타했다.정의원은 수시로 수사실에 들어와 안기부 직원 특별채용을 약속하며 수사에 협조하라면서 김대중 총재만을 겨냥한 질문을 주로 했다. ■검찰에서도 고문을 받았나. 1만달러 부분을 자백할 시점에 사흘간 잠을자지 못했다.수갑을 채우고 포승에 묶인 채 밥을 먹고 대·소변을 봤다.22일간 주임검사였던 안모 검사에게 안기부 조사내용이 조작됐다고 하니까 ‘왜죽을려고 하느냐.사형을 면해줄 테니 시인하라’고 회유했다. ■고문증거가 있나. 당시 재판과정에서 신체감정을 신청,서울대 이정빈 교수가 작성한 신체감정 소견서가 있었다.그러나 지난 12일 조사받는 데 검사가 오히려 나한테 (소견서가)있느냐고 물었다.당시 기록에 첨부돼 있지 않다는 얘기다.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서전의원의 밀입북 사실을 얘기했다고 허위진술한 부분도 기록에 없더라. ■안기부에서 고문을 주로 맡았다는 김모 수사관은 누구인가. 내게 처음으로 1만달러 부분의 허위 자백을 받아낸 인물로 정의원의 총괄지휘를 받아 수사했다.30년간 대공수사에 몸담아오다 지난 93년 퇴직해 경기도 양평에서 살고있다.그는 만일 검찰에 나가게 되면 진실을 얘기하겠다고 했다. 이종락기자
  • [사설] 鄭亨根의원과 인권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제55차 유엔 인권위 회의에 참석해서 현정부의 인권유린 실태를 보고하겠다고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회의는 정의원이 과거 안기부 수사국장과 차장을 지낸 전력을 들어 인권위 참석 취소를 요구하고 있다. 공안사범 고문에 직접 가담한 혐의,북풍공작에 개입한 혐의,13대 총선때 홍사덕(洪思德)의원에 대한 안기부의 흑색선전공작에 개입한 혐의 등이 있는그가 인권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 회의에 참석해서 인권에 관해 발언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뱉기이자 ‘국가망신’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정의원은 국회법사위 위원으로서 논란이 많은 한국의 인권위 설치와 관련,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유엔 인권위에 참석하는 것이라며 “구체적 증거도 없이 명예를 훼손하는 언행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우리는 이 논란에 굳이 끼어들 생각은 없다.그러나 과거 국민의 인권유린과 관련해서 악명이 높았던 안기부 고위직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사람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국민앞에 한마디 진솔한 사과도 없이 감히 인권을 들먹인다는 것은 국민을 얕잡아보는 태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아무리 공의(公義)가 땅에 떨어졌다 해도 그렇다. 그동안 정의원의 안기부 재직시 국민 인권과 관련한 활약상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그래서 우리는 정의원에게 딱 하나만 묻겠다.정의원은 안기부 재직시 그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로부터 고소를 당해 있는 상태다. 그를 고소한 사람은 서경원(徐敬元)전의원이다.89년 당시 평민당 의원이던서씨는 북한을 몰래 방문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고 나왔다.서씨는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당시 평민당 김대중(金大中)총재를 그 사건에 얽어들이기 위해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법정에서 밝혀질 일이다.말하자면 서씨의 고문 주장은 당장은 ‘증거’가 없다.그렇다면,정의원이 유엔 인권위에서 성토하겠다는 총풍사건 피의자에 대한 고문 의혹은 증거가 있는가? 자신에대한 비판은 증거가 있어야 하고,자신이 하는 비판은 증거가 없어도 된다는말인가? 정의원의 제네바행은 전적으로 본인이 결정할 문제다.그럼에도 우리는 그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유엔 인권위에서 현정부의 인권유린을 성토하기에 앞서,자신의 안기부 경력과 자신이 고문 혐의와 관련해 피소된 사실을 밝히라는것이다.그리고 그같은 ‘자백’에 대한 국제인권운동가들의 반응을 전해주기바란다.
  • 일부 재야인사들 鄭亨根의원 과거 고문 사실 폭로

    徐敬元 전의원 등 일부 재야인사들이 대공수사국장 등 안기부 요직을 거친한나라당 鄭亨根의원의 과거 고문사실 등을 폭로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89년 밀입북사건으로 8년7개월의 수감생활을 하다 3·1절 특사로 풀려난 徐전의원이 폭로에 앞장섰다.그는 지난 10일 ‘고문 국회의원 鄭亨根을 심판하는 시민모임 준비위’도 발족시켰다.徐전의원은 “당시 鄭씨가 직원들을 다내보내고 러닝셔츠와 군복바지만 입힌 상태에서 밤 9시15분부터 새벽 1시45분까지 주먹으로 구타했다”면서 “이렇게 직접 당한 사람이 10여명이고 모임에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도 20명이나 된다”고 소개했다.그는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도 “鄭씨가 구두를 신은 채 맨발인 (나의) 발등 위에 올라서서 밟고,주먹으로 머리를 마구 때렸다”고 주장했다.“당시 金大中 평민당 총재가 金日成에게 친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鄭의원은 이에 대해 여권의 사주에 의한 ‘鄭亨根 죽이기 음모’라며 고문사실을 부인했다.鄭의원은 11일 기자회견을 갖고 “국회의원을 어떻게 고문했겠느냐”며 “국정원이 徐전의원 주도 모임에 자금을 지원하고 제휴해서‘정형근 죽이기’에 나서고 있다”고 반격했다. 이에 정치권은 신중한 반응이다.국민회의는 “모든 것은 진실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고 한나라당은 “徐씨가 고문에 의해 간첩이 된 것처럼鄭의원을 물고늘어지는데, 오히려 자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5회)-문학평론가 金宇鍾씨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기를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고 했다.아무리 직관으로 아름다움에 통하는 시라 하더라도 거기서 시인이진정 무엇을 호소하려 했는지 그 개념이 빠져 있다면 그 시는 맹목의 시,동공이 빠져 있는 시,알맹이가 없는 시이다.그러므로 순수문학은 그 작법의 제1장 제1절부터가 진정한 예술정신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金宇鍾씨(70)가 1965년 일본의 교포잡지 ‘한양(漢陽)’지에 발표한 ‘순수의 자기기만’이란 글의 한 대목이다.문학은 현실문제에 어떻게대응할 것인가.60년대 순수-참여논쟁의 중심에는 늘 金씨가 있어 풍요로웠고 든든했다.그에게 순수문학은 “겉볼상만 깨끗한 매춘부의 문학이요 도금(鍍金)문학이요 페인트칠 문학”이었다.그는 “순수의 성벽을 허물고 민중의 광장으로 뛰쳐나오라”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애당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60년대 순수문학에 대한 비판은 그를 문단의 미운 오리새끼로 만들었다. “순수비판과 참여운동은 60년대 초반에는 ‘현대문학’지를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그뒤 60년대 중후반 ‘창작과 비평’ 등이 나오면서 이 운동은 한층 확산돼 갔지요.초기단계에는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당시 문단은 순수문학의 독천장이었어요.한번 이단자가 돼 고립되면 발표지면도 얻기 어려웠지요” 金씨는 지난 57년 ‘현대문학’에 ‘은유법논고’와 ‘이상론’이 趙演鉉선생에 의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현대문학’은 처음부터 순수문학을 표방했다.그가 비록 ‘현대문학’을 통해 평단에 나왔지만 그 지면을 통해 순수문학 타도를 외치기는 곤란한 일이었다.‘한양’지에 글을 발표하게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유신체제를 탄생시킨 朴정권은 문인탄압의 구실을 찾고 있었다.그러던중 문인 몇몇을 ‘한양’지와 연결시켜 이른바 ‘문인간첩단사건’을 만들어내게된 것이다.74년 2월 5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문인 및 지식인 간첩단’을 적발,李浩哲(43·소설가) 任軒永(34·문학평론가) 金宇鍾(45·경희대교수) 鄭乙炳(40·소설가) 張秉禧씨(필명 張伯逸·41·문학평론가) 등 5명의 문인을 반공법 위반 및 간첩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구속된 5명의 문인은 북한 노동당 재일공작지도원 金基深에 포섭돼 문단·언론계 등의 동태를 보고하고 반정부 활동을 선동하는 작품활동을 해왔다는 게 혐의 내용이다.한편 金基深은 49년 북한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62년 민단에위장입적한 뒤 ‘한양사’란 회사를 세워 일본에 오는 문인·학자들을 포섭해왔다는 것이다.‘한양’지는 바로 金基深씨를 발행인으로 한 국문(한글)월간 종합지였다. 金宇鍾씨에 따르면 ‘한양’지는 1973년까지도 주일 한국공보관에 전시돼있었으며 국내에도 정식으로 수입·배포되던 잡지였다.정부기관이나 민단측에서도 이 잡지를 ‘불온’으로 문제삼은 적은 없었다.‘한양’은 구속된 5명의 문인들뿐 아니라 한국의 각계 인사들이 전부터 기고해오던 잡지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은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게 金씨의 설명이다. “‘한양’지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남한의 사회상과 정부시책을 비판적으로 본 측면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곧 반국가단체의 위장출판물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될 수 없어요.그럼에도 당국이 무리하게 기소를 감행한것은 피고인들이 73년 11월 문인 60여명의 연명으로 된 개헌요구 성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며 지식인 사이에 그런 개헌운동의 확산을 막아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검찰당국은 ‘한양’지의 자금 출처가 조총련쪽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그렇게 볼만한 증거는 찾기 힘들다.이에 대해 金씨는 金基深씨가 경영하는 ‘한양원’이라는 음식점에서 나오는 수익과민단계의 협찬광고 등이 그 재원이었다고 증언한다. ‘문인간첩단사건’으로 내몰린 5명의 문인들은 결국 검찰 발표에 앞서 73년 12월 투옥됐다.金宇鍾씨의 회고.“감옥에 들어가면서 이브 몽탕이 주연한 프랑스영화 ‘생사의 고백’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주인공은 억울하게스파이 누명을 쓴채 법정에서 진술하는 연습까지 강요당하지요.그는 텔레비전에 생중계되는 공개재판에서 할 수 없이 스파이임을 자백한 뒤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제 경우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뒤 숱한 반증자료들을 제시했지만 무죄언도를 받지는 못했습니다.결국 몇개월의 형을 산 뒤 74년 6월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출옥되자 金씨는 경희대 국문과 교수직에서 강제휴직됐다.이어 76년 해직됐다.80년 덕성여대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기까지 6년동안의 세월은 소태보다쓴 것이었다.그 시절 그는 피폐한 심신을 추스리기 위해,아니 생계를 위해그림 그리는데 몰두했다.“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가 조개나 잡겠다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외려 깨어진 뱃조각을 주워 모아더 큰 고기를 잡겠다는 오기가 솟더군요.그때 그린 그림들은 모두 분노의 시절 제 마음의 무늬들입니다” 金씨의 삶의 자취는 75년에 나온 에세이집 ‘그래도 살고픈 인생’(학진출판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한낱 수상집에 불과하건만 유신당국은 이 책을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금서목록에 올렸다.“판금조치가 된 이유를 알 수 없어요.살풍경한 감옥의 일상을 그린 글 ‘옥중인생’이 당국의 눈에 거슬렸는지…” 엄혹한 ‘겨울공화국’에서도 金씨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그를 부축했다.그때의 심경을 그는 글로 남겼다.“비단실을타고 봄의 정액이 땅속으로 스며든다.얼어버린 대지는 어느새 봄을 잉태하고…” 그래서 그에게 인생은 ‘그래도 살고픈’ 것인지 모른다.서슬퍼런 감옥의 한평 쪽창 어둠 속에서도 그는 밝게 타오르는 촛불이었다.
  • 민주열사 열전:19/前 성균관대생 崔東(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운동 헌신…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분신/‘인노회’ 관련 구속… 수면기능 망가져 정신분열증세/‘인간 파괴’ 절망의 벼랑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선택 ‘어찌하여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죄를 지었노라고 자백하지 않았느냐? 고문자들 앞에 서거든 유죄임을 인정하고 죽어라.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16세기초 독일의 프리드리히 슈페 폰 랑엔펠트 신부가 했던 말이다.그는 종교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죄인들과 처형장까지 동행했던 참회신부였다.죄없는 사람들이 고문에 버티다 결국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진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수없이 보았다.그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무엇일까.바로 고문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과 고문이 가져오는 인간성 파괴였다. 수십년 독재정권을 겪었던 우리 사회도 고문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문은 정권수호를 위한 강력한 도구였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권에 도전한 사람들이었다. ○법정진술서 “도덕적 승리” 주장 전 성균관대생 崔東(80년 입학)도 그들중 하나였다.그는 10여년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섰다.그러나 어느날 공안기관의 조사를 받은 뒤 정신분열현상을 보이다 황폐한 삶을 마감했다. 최동은 90년 8월7일 한양대의 한 강의실에서 분신자살했다.하지만 그의 유서에는 시국관련 분신자들이 흔히 남기는 ‘독재타도’나 ‘외세타도’ 등 정치적 내용은 없었다.‘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저는 폐인이나 다름 없습니다’란 절망적 몸부림의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이는 그가 걸어왔던 노동자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을 더이상 갈 수 없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분신은 그런 길을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 부정이었던 것이다. 朴炯圭 목사는 장례식 조사에서 이렇게 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다.“지배자들은 사람들에게 굴복할 것을 강요합니다.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정신적으로 불의에 맞설 힘이 없었던 최동 열사는 무릎을 꿇기보다는 마지막 싸움의 무기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최동은 대학1학년때부터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80년 5월 문무대 병영집체교육 거부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였고 2학년때는 공개적 이념동아리인 ‘심산연구회’ 결성을 주도했다.심산(心山)은 성균관대 설립자이고 반독재운동가인 金昌淑 선생의 호이다.최동은 여기서 1학년 후배들 뿐만 아니라 2학년 동기들에게까지 학습을 지도했다.그리고 4학년때 광주항쟁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학내시위를 주도했다가 처음으로 구속된다.이때 재판에서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 승리,도덕적 승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신념에 가득찬 민주투사로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9개월 복역후 출소한 최동은 정부의 복학허용을 개량화 조치라며 거부하고 84년 노동운동에 뛰어든다.부천의 삼창정밀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주)세일에서 재단사로 일한다.수형전력이 발각될까봐 주로 소규모 작업장을 전전하며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의식을 일깨우는데 주력했다.외부에서는 다른 노동운동가들과 연대작업에 힘을 기울였다.그러나 활동가 중심의 노동운동이 현장과의 유리라는 한계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현장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운동’을 표방하는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는 그런 한계를 넘어보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최동은 88년 3월 인노회 결성에서 산파역할을 했다. ○기각된 영장 재청구해 발부 받아 89년 2월 검찰은 국가보안법 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해 인노회 관계자 6명을 구속했다.최동도 4월 부천 심곡동 자취방 앞에서 붙잡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다.하지만 관련자들은 인노회가 공개적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라고 주장했다.담당판사도 인노회가 노동운동을 위한 단체임을 인정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그러나 검찰은 강성의 다른 판사에게 재신청하여 영장을 발부 받는다. 최동은 동료들에게 시간을 벌도록 처음에는 묵비권으로 버티었다.또 고문조작 수사를 막기 위해 취조실 욕조에 머리를 찧어 자해를 기도한다.그러나 경찰병원에서 7바늘을 꿰매는 응급치료만을 받고 다시 20여일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구치소 수감 직전에도 그는 극도의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다칫솔대를 부러뜨려 목을 찌르는 자해를 한다.하지만 이때도 외상만 치료받고 하룻만에 구치소에 수감되고 만다. 최동은 출소후 조사기간 내내 거의 잠을 못자며 취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이 교대로 취조를 했고 취조를 안할 때는 밝은 조명과 괴상한 소음을 이용,잠을 못자게 해 수면기능을 파괴했다고 말했다.고문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수많은 고문중에서도 잠을 안재우는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다고 말한다.어머니 金順玉 여사(62)는 “동이가 구치소 수감 직전부터 이미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경찰병원 의사도 주의깊은 관찰과 치료가 요구된다고 진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구치소에서도 조사 때의 수면기능 파괴로 인한 불면에 계속 시달렸다. 그리고 7월 초부터 심한 발작과 실어증세를 보인다.의도하지 않은 말 등 의식과 행동이 따로 작용하는 증세도 뒤따랐다.책이나 신문도 전혀 못 보는 등 상태가 악화되자 종로신경정신과에서 외래진료를 받았는데 ‘정신분열증’ 진단이 나왔다.하지만 이런 비정상적 정신상태에서도 수감된 채 재판이 계속 진행됐다.9월18일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가 결정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비정상적 정신상태서 재판 출소후 종로신경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적들이 나를 무능하게 만들었다” “AIDS균으로 나를 죽이려 한다”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고 하는 등 극도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였다.그리고 90년 4월 부천의 한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한다.이후 그는 수영장에 가거나 집에서 가까운 한양대로 산책을 나가며 건강회복을 위해 힘쓴다.정치이념이 철저하고 논리가 ‘칼’같아 마오쩌뚱에서 이를 따 ‘마동’으로 불렸던 최동.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와 노동현장에서 인정받았던 이러한 탁월함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노력도 헛되이 스스로 한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말았다.8월 7일 아침 평소처럼 “운동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던 그는 잠시후 검게 탄 시신이 돼 있었다. □약력 ●1960 서울 정동 출생 ●80 서울 환일고 졸업.성균관대 국문과 입학 ●81 학내 동아리 심산연구회 창립●83 광주항쟁 진상규명 요구시위 주도.9개월 복역 ●84 부천에서 노동운동 투신 ●88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결성 ●89 인노회사건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90 한양대에서 분신.한양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운명 ◎崔東 가족들/“치료만 제때 받았어도…” 회한/4남매중 셋이 학생운동/아버지 홧병으로 사망 “제때 치료만 받았어도 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최동의 어머니 김순옥 여사가 가슴에 묻고 있는 안타까움이다.대공분실 조사때부터 입원치료를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고.구치소에서도 ‘충분한 휴식과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계속 무시했다고 한다.결국 출소할 때까지 제대로 손도 못쓴 채 아들의 증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는 것이다.김여사는 아들이 노동운동을 할 때도 부천에 전세방까지 얻어주고 밥도 해주는 ‘후원자’였다.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자 기왕 할거라면 굶지 말고 하라는 모정때문이었다.그런 아들이 제때 치료를 못받아 죽은 것이다. 김여사의 비극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아들의 49재가 끝나자마자 남편 최수호씨(당시 56세)까지 잃은 것이다.여자인 자신과 달리 슬픔과 분노를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기만하다가 홧병으로 가고 말았다고 했다. 4남매중 셋이 학생운동을 한 ‘덕’에 김여사는 구치소라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장남인 최동의 바로 밑 여동생 숙희씨(35)는 서울여대 재학시절 야학문제로 1주일간 유치장 신세를 지고 나왔다.오빠가 구치소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어머니와 함께 옥바라지를 했다.출가했지만 친정어머니인 김여사와 함께 사는 그녀는 “면회때면 제게 항상 귀엣말로 동료들을 조심시키라고 당부했다”며 “오빠이기 이전에 동지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고백한다. 둘째동생 재동씨(34)도 민정당연수원 점거사건으로 영등포구치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고 2년간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다.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 비리누명에 구속된 경관/국가상대 손배소송 승소

    서울지법 민사합의21부(재판장 李弘權 부장판사)는 2일 검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구속된 전 양평경찰서 경관 金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金씨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찰 수사관이 교통사고 가해자 崔모씨를 13시간동안 밤샘 조사하면서 허위자백을 강요,‘경찰관에게 청탁해 뺑소니 사건을 단순사고로 조작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점이 인정된다”면서 “정신적 피해를 입은 金씨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金씨는 93년 평소 친분이 있던 崔씨가 낸 교통사고를 단순 사고로 처리했으나,崔씨가 수원지검 여주지청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으면서 허위 진술을 해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구속됐으며 96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소송을 냈다.
  • 名唱 成又香(이세기의 인물탐구:172)

    ◎민족의 恨한큼 깊고 아득한 울림/동편제 대표격 김세종제 ‘춘향가’ 명맥이어/굵은 통성 세마치장단 할용 꾸밈없는 득음/우렁차고 한이 여울지는 소리 남창 못잖아/판소리 오미 오롯이… 힘든 가풍계승 정업/시류 영합않고 안숙선 등 13제자 길러내 춘전(春田) 成又香은 김세종제(金世宗制) ‘춘향가’의 명맥을 잇는 이 시대 대표적 명창의 한 사람이다.송계(松溪) 김세종은 전북 순창출신으로 조선조말의 申在孝문하에서 수학한 동편제소리의 전설적인 인물.장자백 이동백에 이어 강산제 소리의 대가였던 鄭應玟이 김씨 창제를 이어받았고 춘전이 정응민을 잇고 있다.지난 94년 ‘성우향 판소리인생 55년’ 기념공연만 봐도 그가 소리에 들인 공력이 얼마만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성소리 뒤늦게 소개 춘전이 걸어온 판소리의 길은 민족정서의 심연만큼이나 멀고 깊고 아득하다.그의 성색은 감기다가도 곧게 뻗고 잠기다가도 치솟으며 서럽고 답답한 삶의 애락이 소리전체에 면면히 깔려있다.넘실대는 가락은 물리학적인 음향이 아닌,민중의 아픔과 슬픔,절망과 신명을 능란하게 엇가른다.어느 때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막을듯이 유장한 진양조 장단을 울리다가도 숨이 넘어갈듯 자지러진 휘몰이며 산천초목이 더덩실 춤추고 일어서는 엇모리 단모리의 멋스러움은 가히 절품의 경지다. 마치 ‘남창을 연상케하는 호방하고 장엄한 소리는 삼각산을 등에 지고 대로를 가듯 시원하게 소리판을 짜나간다’고 이보형 문화재전문위원은 평한다.보성소리는 다른 소리제에 비해 뒤늦게 서울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72·74년에 그가 두번에 걸친 연구발표회를 가졌을 때 각 신문은 ‘춘전 강산제의 특색은 굵은 소리인 통성을 많이 쓰고 진양조보다 빠른 세마치장단을 활용하면서도 꾸미지않은 비범한 득음이 가슴을 울린다’고 특필했다. 오죽하면 국악계에선 그의 통큰 소리를 두고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우렁차고도 한이 여울지는 소리에 연전에 작고한 고수 김명환이 무덤에서벌떡 일어나 장단을 치러나온다’고 말할 정도다. 춘전은 전남 화순에서 성영문과 김재녀사이의 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명고수 성차옥이백부이고 명창 주난향과는 고종 사촌간이다.어릴 적 이름은 판례였고 동네의 한학자 한분이 예명과 아호를 내려주었다. 5살이 되자 벌써 백부에게 가곡과 평시조를 배우기 시작했고 화순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화순의 안기순을 독선생으로 모신 것을 비롯 10대에 섭렵한 스승만도 광주의 정광수 남원의 강도근 한애순 강요진 등등이다.그리고 20세가 되던 무렵에 전남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산간벽지로 송계를 찾아들어가 4년간 살이 물러터지도록 김세종제 ‘춘향가’를 사사했으며 다시 서울에 올라와 박초월 박녹주의 ‘흥보가’‘수궁가’의 창제와 더늠을 익히는 등 그의 학습은 문자그대로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소문나있다. 춘전이 처음 회천에 갔을 때 스승은 ‘신식소리나 배우라’고 가르치기를 거절했으나 그의 타고난 성음에 가능성을 느끼고 제자로 받아들였고 ‘김세종제춘향가는 통성으로 우조를 써야한다’고 처음부터 단단히 강조해 마지않았다.스승이 부르는 ‘심청가’의 발림이 너무 애절하여 눈이 퉁퉁 붓도록 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이를 소화해내기 위해 하루 10시간에서 15시간씩 목에서 피를 토하는 가혹한 수업을 받았다. 임종자리에서도 스승은 ‘소리를 변질시키는 것은 정절을 버리는 것과 같다.절대로 소리를 만들지 말고 옛것을 그대로 하라’고 끝까지 타일렀다.‘판소리는 한바디를 기둥삼아 불러야하며 판소리 한바탕에는 맵고 짜고 시고 쓰고 단 오미(五味)가 골고루 배열되어있으나 여러 바디의 좋은 대목만 따다가 조각보같이 짜맞추면 단맛만 앞서고 오미가 결여되어 판소리의 원리가 깨어진다’고 했다. ○“옛것 그대로” 스승 유언 춘전은 스승의 창법에다 다양한 붙임새를 개발하여 장단을 엇붙이는 잉어걸이,완자걸이 등 기묘한 장단붙임과 통성의 덜미소리를 들고나서면서 좌중을 사로잡는다.더구나 소리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통성이 강한데다 소리맺음을 할 때 짧게 끊거나 힘차게 통성으로 올려끊는 스승의 가법을 가장 잘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그래서 그의 공력은 곧잘 ‘설 벼린 칼은 쉬 부러지지만 수만번 단단히 벼린 칼은 바위를 쳐도 끄떡없다’는 이치에 비유되기도 한다.원로 국악인 성경린씨가 ‘성우향의 명창으로서의 대성은 타고난 성음,음악적 재능과 함께 하나같이 높은 스승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그다지 틀리지 않다’는 말은 이런 연유에서다. 70년대 이후 서울에 올라와 활동하면서 긴 곡절끝에 부군과 이혼 후 바둑교실을 열고있는 아들 진성환과 살면서 며느리인 원미혜가 그의 뒤를 잇고있다.삼양동 언덕배기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리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아오는 길에 봉지쌀을 사가지고 오면서 집앞까지 쌀이 새는 줄도 모른채 빈봉지를 들고올 만큼 경황없는 나날을 보냈다.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잔칫집에 나가 창을 부르지 않았고 ‘일반 가객들이 힘들고 난삽하여 꺼리는 가풍이지만 그는 계승의 책임감으로 이를 지켜왔으며 이와 관련하여 제자양성에만 한 평생을 던져왔다. 그의 문하에는 1백여명의 훌륭한 제자들이 도열해있으나 아직 중요무형문화제로 지정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있다.그의 제자중에는 각종 판소리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김수연 김영자 박양덕 안숙선 등 13제자가 있고 그는 5시간 이상이 걸리는 완창발표를 12차례나 갖기도 했다.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술가로서 업적과 소리의 진가는 관객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데도 흙속에 묻힌 보석인듯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얄팍한 세태가 안스럽기만 하다. ○문화재 재정안돼 아쉬움 허무하고 긴 예로(藝路)의 여정에서 인생의 파란이 얼룩져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엄상(嚴霜)속의 정목(貞木)’답게 단 한번도 그늘진 구석을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초연한 자세로 주변을 감싸고 보살핀다.그를 아끼는 기라성같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존경과 선모를 한몸에 받는 이상,그리고 위대한 스승들로부터 이어받은 소중한 유음(遺音)을 전승하는 일을 자신의 정업으로 삼은 이상 그는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스스로 우뚝선 참으로 홍복의 예인에 틀림없다. □그가 걸어온 길 ▲1935년 전남 화순출생 ▲1949년 동일 창극단입단 ▲1950­52년 강도근판소리수업 ▲1953­57년 정응민문하사사 ▲1955년 전국판소리명창대회 1등▲1958년 임방울창극단 입단 ▲1960년부터 한국국악협회 회원 ▲1968·72년 재일교포 위문공연 ▲1972년 제1회 江山 박유전制 ‘심청가’완창발표 ▲1974년 제2회 김세종制 ‘춘향가’완창발표, 전국명인명창대회 장원 ▲1977년 전주대사습대회장원 대통령상수상기념 ‘춘향가’ 완창발 표 ▲1986년부터 국립창극단 초청강사,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연구 분실원장, 김세종제 ‘춘향가’ 완창발표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기능보유자 후보지정 ▲1994년 성우향 판소리인생 55주년기념공연(세종문회관 소강당 ) ▲1998년 김세종제 ‘춘향가’ 발표 성우향판소리연구소 대표, 국악예고 및 서울대등 8개대 출강 KBS국악대상(88년) ‘판소리 수궁가 (전3매)
  • 김종배 의원에 뇌물전달/최영섭씨에 체포영장

    서울지검 특수1부(김성호 부장검사)는 5일 국민회의 김종배 의원(전국구)에게 2천만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는 창해산업 이사 최영섭씨(38)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 검찰 관계자는 “김의원의 혐의사실을 입증하려면 최씨의 진술이 불가피한데도 최씨가 검찰소환에 응하지 않아 검거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최씨는 이날 “회사 돈 2천만원을 빼내 김의원과 알고 지내는 박모씨에게 8백만원을 준 사실은 있지만 김의원에게는 뇌물을 주지 않았는데도 거짓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수사검사와 수사관 등 4명을 불법감금 등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 프락치 진술서 강요 폭행/한총련­감금서 치사까지

    ◎한양대 졸업생이 서성이는 이석씨 발견 인계/조통위 「경호원」,손묶고 감금… 한밤 3시간 조사/아침에 이씨 꼼짝도 안해… 승용차로 병원이송 한총련 소속 학생들은 선반기능공 이석씨에게 경찰 정보원이라고 자백하기를 강요하며 3시간여동안 경찰진압봉과 각목 등으로 마구 때렸다.이씨는 양손을 뒤로 묶인채 비명만 지르다 숨졌다.이씨는 부검 결과 체내 혈액의 절반 가량이 내장으로 흘러들었고 온몸이 피멍투성이였다. ▷감금◁ 3일 하오 5시30분쯤 한양대 학생회관 5층 여자화장실 앞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던 길소연씨(24·여·한양대 교육학과 졸)가 곁에서 서성이던 이석씨를 발견했다. 길씨가 『지방총련 학생이냐』고 묻자 이씨는 『공대에 다니는 친구를 찾으러 왔다』며 계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씨가 뒤쫓아가 『잠시 이야기하자』고 말하자 이씨는 순순히 따라왔다. 교지자료실로 간 길씨는 이씨를 한총련 이준구 조국통일위원장(26·건국대 총학생회장)의 경호원인 권순욱씨(24·건국대 농화학과 4년)와 이호준씨(21·건국대 부동산학과 3년)에게 이석씨를 넘겼다. ▷폭행◁ 권씨 등은 헝겊으로 이석씨의 양손을 묶은뒤 『경찰의 프락치가 아니냐』고 추궁하면서 경찰진압봉과 각목 등으로 폭행했다. 경찰 정보원이라는 진술서를 쓰겠다는 말을 듣고 이들은 이석씨의 묶인 손을 풀어주고 길씨만 남긴채 방을 나섰다. 길씨는 『그 순간 이씨가 갑자기 달려들어 뒤에서 목을 졸랐다』고 말했다.길씨가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비명을 지르자 옆방 한양대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권씨와 이씨가 다시 뛰어나와 이석씨가 감금된 자료실로 들어갔다. 이들은 이석씨의 양손을 뒤로 묶고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린뒤 또다시 폭행했다.이씨의 비명은 복도에까지 들렸다. 하오 11시쯤부터 1시간동안 진술서 4장이 작성됐다.처음 진술내용과 맞지 않을 때마다 구타가 가해졌다. 3시간여에 걸친 조사를 마친뒤 이들은 아침에 계속하기로 하고 같이 잠을 잤다. ▷병원이송◁ 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이석씨가 꼼짝도 하지 않자 3층에 있던 한총련 의료봉사단의 김덕곤씨(22·여·한양대 간호학과 2년)를 찾았다.옷을벗기고 인공호흡,심폐소생 등의 응급조치를 했으나 이씨는 소생하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한양대 총학생회 총무부차장 신대균씨(22·산업공학과 2년)와 폭행에 가담한 권씨가 엘란트라 승용차로 이석씨를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이들은 당직의사에게 이석씨의 상태를 설명하고 보호자 카드에 자신들의 인적사항을 적은뒤 학생회관으로 돌아갔다.
  • 피의자 가혹행위 수사 지휘/검사에 첫 손배판결

    서울지법 민사합의 14부(재판장 장경삼 부장판사)는 30일 히로뽕 판매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무죄 판결을 받은 박모씨가 수사당시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담당 거모 검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거검사는 박씨에게 2백8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그동안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해 지휘책임이 있는 국가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온 것과는 달리 담당검사 개인의 책임을 처음 인정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수사과정의 불법감금과 가혹행위는 수사관들에 의해 이뤄졌지만 거검사가 수사관들로부터 수시로 상황 보고를 받고 수사를 지시한 만큼 사실상 불법감금과 가혹행위를 지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박씨는 지난 91년 12월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고 여관에 감금돼 가혹행위와 자백강요를 당한뒤 향정신성의약품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됐으나 무죄판결을 받고 4개월만에 풀려나자 담당 검사를 상대로 95년 소송을 냈다.
  • 「백범암살 진실」 영구 미제 가능성/안두희 피살과 배후규명 노력

    ◎당사자 통한 진실규명 불가/「참회록」 존재여부 관심 집중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씨의 피살로 백범 암살의 진실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자칫 영구 미궁에 빠질 가능성도 커졌다. 안씨는 지난 49년 6월 범행 이후 지금까지 암살 동기 및 배후에 대해 한번도 속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단독범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진실 규명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60년 4·19 혁명 직후부터였다.「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안씨를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끝내 안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안씨는 87년 권중희씨에게 각목폭행을 당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91년 처음으로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전신인 OSS를 배후로 거론했으며,92년 4월12일에는 김창용 특무대장이 4∼5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암살지시를 했다고 「증언」했다. 92년 9월에는 권씨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범행 6일전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채병덕육군참모총장 등을 만났다』고 말해 당시 권력 핵심부의 배후관련성을 시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씨는 『권씨 등의 강요에 의해 자백한 것』이라고 곧바로 부인해 의문만 증폭시켰다.94년 국회 백범 암살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단독범행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제 진실은 92년 그가 쓰겠다고 약속했던 「참회록」의 존재 가능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안씨의 유품에서 참회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백범암살의 진상규명은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김태균 기자〉 ◎피살 안두희는 누구인가/백범 저격… 47년간 은둔생활/암살죄로 15년형… 6‘25때 사면·군복귀/한때 군납공장 운영… 강원 제2갑부로/4·19후 「응징」 두려워 개명후 자취감춰/87∼88년 권중희씨에 수차례 납치·피습/94년 국회 증언… 암살 배후인물 안밝혀 백범 김구 선생을 지난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저격,암살했던 안두희씨는 범행후 47년 동안 은둔과 잠행속에 살아왔다. 범행 당시 32세의 포병장교였던 안씨는 평생을 「백범 시해범」이라는 꼬리표를 단채,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했다. 안씨는 백범 시해 직후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6·25가 터지면서 당시의 실세였던 김창용 특무대장의 비호로 형집행정지처분을 받아 포병장교로 복귀했으나 전투도중 부상당해 51년 군복을 벗었다.56년 옛 동료장교들의 도움으로 강원도 양구에 군납공장을 지어 군대 부식을 공급하면서 부를 쌓았다.한때 강원도에서 두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후 터진 4·19혁명은 그가 진정한 죄과를 치르게 되는 계기가 됐다.혁명 직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본격적으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공장 문도 닫고 처 박모씨와 3남2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안영준」 등 가명을 써가면서 종로구 명륜동,동대문구 신설동,강원도 양구 등지로 도망다녔다. 안씨를 「응징」하려는 추적자들의 노력도 집요했다.65년 곽태영씨로부터 칼로 두군데나 목을 찔린 뒤 극적으로 살아나는 등 피습이 이어졌다.여러차례 이민을 시도했으나 법무부로부터 출국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실패했다.장성한 자녀들은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다 못해 70년대 말 모두 미국으로 이주했다.부인 박씨도 합의이혼하고 자녀들의 뒤를 따랐다. 86년 김명희씨(63)와 재혼하는 등 은둔에 「성공」,편안한 삶을 살아오던 그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87년 3월 27일 집요하게 그를 추적해온 권중희씨의 피습을 받으면서부터였다. 권씨와의 질긴 악연은 이때부터 이어져 88년 2월,92년 2월과 4월·9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권씨로부터 납치 및 구타를 당했다. 말년에는 언론사의 인터뷰에도 응하고 94년엔 국회 법사위에서 병상에 누운채 증언하는 등 약간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하지만 백범 시해가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는 점은 한결같았다.〈김태균 기자〉 □안두희씨 피습일지 ▲87년 3월27일=권중희씨,서울 마포구청 버스정류장에서 각목으로 안씨의 머리 구타. ▲88년 2월=권씨 등 3명,인천 집에서 안씨를 나무 막대로 구타. ▲92년 2월28일=권씨 등,백범묘소에서 안씨를 각목으로 폭행. ▲92년 4월12일=권씨 등,안씨 집으로 찾아가 안씨 구타. ▲92년 9월23일=권씨 등 4명,안씨를 경기 가평군 농장으로 납치,구타.
  • 살인범 몰려 인권침해 피해/미 교포 5백만불 손배소

    ◎미 경찰·시 상대로 【로스앤젤레스 연합】 지난 7월 캘리포니아 고속도로순찰대(CHP) 경찰관 살해혐의로 체포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최영호씨(34)가 5일 CHP와 풀러턴시및 애너하임시를 상대로 샌타애나연방지법에 피해보상소송을 제기했다. 최씨는 소장에서 경찰이 우연히 사건현장을 지나치다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체포,수감해놓고 피의자의 권리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변호사 등 외부와의 전화연락도 금지한 상태에서 범행시인자백을 강요하는 등 인종차별에 의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최씨의 변호를 맡은 스티븐 얘그먼 변호사는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박탈당한 최씨의 피해보상청구액은 5백만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 김하기씨 오늘 서울로/주중대사관/어제 중서 신병 인도받아

    ◎“북측 유인공장 있었다” 【북경=이석우 특파원】 지난달말 북한에 들어갔다가 지난 14일 북한서 중국 공안당국에 추방형식으로 넘겨진 소설가 김하기씨(본명 김영·38)가 16일 용정서 우리정부에 신병이 인도돼 이날 주중대사관 관계자와 함께 북경에 도착했다.주중 한국대사관측은 김씨를 17일중 서울로 송환한다고 밝혔다. 한편 소식통들은 김씨가 자신의 입북이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이뤄졌으나 북한측의 유인공작도 있었음을 밝혔다고 전했다.김씨는 『취중에 누군가가 북한에서 출판된 내 책의 인세를 받게해줄테니 북한으로 가겠느냐고 해서 입북했다』며 『그러나 고의적인 입북의사는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또 회령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평양으로부터 파견됐다는 북한측 조사관들이 처음에는 안기부 요원임을 자백하도록 강요했으나 자신이 소설가임을 확인하고는 『여기서 새로 장가를 들어살라』는 등 회유를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 장세동 피고­국선변호인 「불협화음」/26차 공판 이모저모

    ◎방학 맞은 여고생들 재판 참관 “눈길” 12·12 및 5·18사건의 피고인과 증인들을 상대로 한 사실심리가 1일의 26차공판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5개월에 걸친 「마라톤 재판」이 막바지에 접어든 이날 방청석에는 방학을 맞은 여고생 3∼4명이 나란히 앉아 재판과정을 지켜봐 눈길. 대원외국어고 김수현양(17)은 『역사적인 재판을 직접 보는 것이 살아있는 공부라고 생각해 반 친구들과 함께 방청하게 됐다』고 소감을 피력.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문인 10명도 공판시작 20여분 전부터 일찌감치 방청석에 자리잡고 재판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박종규 피고인은 증인신문 말미에서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진술강요나 협박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변.박피고인은 『나이도 어린 검사가 「이 사람아,그게 아니잖아」,「당신,밤새워 조사받아도 좋아?」라는 등 반말조의 말을 해 모욕감을 느꼈다』며 『협박은 아니지만 검찰로부터 자백을 유도받은 사실이 있다』고 주장. ○…장세동피고인은 국선변호인의 신문내용이 헬기의 내부구조등 지엽적인 문제로 흐르자 『변호인께서 무엇을 물어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퉁명스럽게 답변해 변호인과 「불협화음」을 내기도. ○…현역군인(육군 중령)으로 증언대에 선 김광택 전20사단 61연대 6중대장은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검문에 불응했을 경우 경고­하퇴부 조준사격이라는 수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진술,계엄군이 무차별 진압을 했다고 증언. ○…최규진 전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장은 증언을 마친뒤 『계엄군으로 참가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숙연한 표정. 최씨는 80년 5월24일 보병학교 병력이 철수중인 자신의 부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과 관련,『사전에 아무런 신분확인 조치없이 중화기로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났다』며 『육군장교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 ○…김영일재판장은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12·12 국정조사 국방위원회 7차회의록 등 20여점과 12·12 사건당시사용된 38구경 권총탄환·M16 소총탄환 등 5점의 압수물을 증거로 채택. 특히 우국일 전보안사 참모장의 업무일지와 일기사본이 증거물에 포함됐으나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5공전사」는 피고인들이 모두 채택에 부동의,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박은호·김상연 기자〉
  • 신문확장경쟁 피해자는 시민/무가지·상품 미끼 장기구독 강요

    ◎뒤늦게 거절하면 공갈·협박까지/배달된 타사신문 몰래 빼내기도 「재벌 신문」과 「대기업형 신문」의 무차별·무분별한 신문보급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시민들이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있다. 이들 신문은 값비싼 「사은품」이나 「공짜 배달」을 미끼로 일단 신문을 보게한 뒤 나중에는 계속 구독하도록 강요하는 수법을 주로 쓰고 있다. 신청하지도 않은 신문이 매일 현관이나 대문 앞에 쌓여 골치를 앓는다. 공짜 물품과 공짜 신문을 덜컥 받았다가 뒤늦게 거절하려면 보급소 직원의 공갈·협박에 곤욕을 치러야 한다. 심지어 재벌 신문 가운데 하나인 A일보는 과당 보급문제로 전국이 들끓고 있는 16·17일에도 서울 주택가 아파트에서 외제 선풍기를 나눠주며 신문확장에 열을 올려 주민들의 빈축을 샀다. 17일 낮 서울 도봉구 도봉2동 한신아파트 입구.A일보 보급소 직원들이 에어컨식 선풍기(대만제품·시가 7만원)를 나눠주며 신문구독을 권유하고 있었다.이 신문은 16일에도 같은 지역에서 선풍기 공세를 폈다.이틀동안 나눠준 선풍기는 1백여대. 이신문은 지난달 25일에도 인천시 서구 S아파트 입구에 버젓이 현수막까지 내걸고 소형트럭에 에어컨 선풍기를 가득 싣고와 이틀동안 1백50부를 보급했다. 한신빌라 주민 황모씨(39·여) 등 주부들은 『신문사인지 보따리 장수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당국이 공정거래 위반 여부 등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같은 달 B일보 서울 반포지국은 아예 사은품 품명과 무료구독기간을 명시한 전단을 뿌리며 확장활동을 벌였다.사은품도 수십만원대 이르는 위성안테나를 비롯해 뻐꾸기시계·비디오 카메라·도자기세트·클래식 CD 등 갖가지였다. 대전시 중구 주민 윤혜숙씨(44)는 5개짜리 공기세트를 경품으로 받고 며칠뒤 이를 취소하려 했으나 『판촉요원에게 수당 1만5천원을 지급했으니 상품과 함께 변상하라』고 억지를 부려 곤욕을 겪었다. 신문 강제투입에 반발한 주민들의 「신문과의 전쟁」도 만만치 않다. 지난 5월 전주시내 S아파트에 입주한 공무원 김모씨(30)는 신문을 넣지 말라는 내용의 쪽지를 대문앞에 써붙였지만 이를 무시한 채 J일보측이 「석달의 무료」라는 말만 되풀이 하며 신문배달을 계속하자 문앞에 빈 종이상자를 준비,신문을 쌓아 두는 방법으로 대응했다.김씨는 동료로 부터 「신문구독강요에 시달린 한 시민이 보급소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내 승소했다」는 얘기를 듣고 솔깃했으나 공무원 신분이라 포기했다. 이 신문의 대전 유천지국장 전모씨(48)는 지난 5월8일 관내 주택가에 무가지를 뿌려오던 중 배달사고를 낸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부 가정에 이미 배달된 타사의 신문을 몰래 빼다가 해당 신문 판매요원들에게 붙잡혔다.전씨는 이들 3개 타사 지국장에게 범행일체를 자백한 뒤 각 지국장에게 70만원씩 모두 2백10만원을 지급했다.〈윤상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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