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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유정의 영화 in] 관타나모로 가는 길

    가혹한 역사는 인간을 우연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란 인간이 밟아온 인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때론 역사가 더 힘이 세다. 때로 역사는 마음대로 사람들을 끌고 가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는다. 잔혹하다. 우리를 관통하는 ‘역사의 힘’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 나약해진다. 그 지침을 다시 돌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지만 역사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는 것도 인간이다. 마이클 위터바텀의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지금, 이곳 지구상 가장 뜨거운 격전지인 아프가니스탄을 조감하고 있다. 영국에서 공부 중인 파키스탄 청년 네 명은 우연히 아프가니스탄에 가게 된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들이 호기심으로 아프가니스탄행에 나서게 된 것이다.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세상은 그들은 그냥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인종적 유사성 하나만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하는 알카에다로 지목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가고 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물들은 영어가 희망이 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더 신랄한 고문의 빌미로 전도된다. 자백을 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처럼 심문은 계속된다. 미군은 비디오 화면이나 사진에서 비슷한 얼굴을 찾아내 저 사람이 당신이 아니냐고 밀어붙인다. 아니라는 부정은 의미없는 비명으로 전락한다. 자신을 증명하려 아무리 애써봐도 소용이 없다. 미군에게 붙잡혀 하루 5분의 산책시간만을 허용받은 채 지낸 시간은 자그만치 2년이다.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천천히 소진되어 간다.‘인 디스 월드’로 우리에게 알려진 마이클 윈터바텀은 격전지의 상황을 리얼하게 전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형식을 선택했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이란 등지에서 촬영된 화면은 실제 장면과 섞여 긴장감을 높여 준다. 세미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린 그들을 보면 그 답답한 현실이 바로 전달되는 듯하다. 정말 갑갑한 것은 그들이 아무런 혐의 없이 잡혔던 2년이 영화적 설정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엄연한 현실로 여전히 ‘그들’이 거기에 존재한다. 이는 수용소를 벗어난 다른 아프가니스탄에도 존재하는 사실이다. 그곳은 그렇게 점차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그들의 삶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때 우리의 과거도 역사로 인해 우연적 존재로 전락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그랬고 광주항쟁이 그랬다. 우연히 1980년 5월18일 광주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화인이 남게 된다. 어쩌다 우연히 1987년 6월9일 신촌에 있었다면 지독한 최루가스와 함께 쓰러진 한 남자를 모른다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지독한 역사는 개인의 삶과 추억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전쟁 중인 이 세계,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는 작품이 바로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다. 영화평론가
  • 쥔있는 몸끼리 무허가(無許可) 사랑 30년

    쥔있는 몸끼리 무허가(無許可) 사랑 30년

    30년전- 30고개의 유부남에게 순결을 주었던 18살의 처녀가 50고개에서 우연히 60대가 된 그 첫사랑을 다시 만났다. 이순간 이들 남녀가 다시 불태운, 맺어서는 안될 사랑은 결국 나이에 어울리지않는 죄명으로 쇠고랑을 나란히 차고 말았지만 긴 다홍치마의 멋이 「미니」세대로 변모한 세월에 이르기까지의 30년을 이어온 색다른 이 불의의 사랑 3막이 사연은-. 30년전 아내있는 사내와 이웃사는 처녀가 남몰래 [제1막] 해방이 되기 1년전인 44년봄 아내를 둔 차광희(車光熙)청년(가명·28)은 한마을에 사는 10년연하의 임복영(林福榮·가명) 처녀와 깊은 관계에 빠졌다. 대구시 칠성동 청년단장을 하면서 비교적 마을일에 밝았던 차(車)청년은 그때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구기예(技藝)중학교를 나오고 대구지방법원 교환양으로 일하던 방년18세의 임(林)양과 이웃에 살면서 청년단 일을 핑계로 잦은 접촉을 갖는동안 어느새 정이 들었고 그러다보니 어쩔수 없는 사이가 되고말았다. 그러나 10개월동안 지켜진 이 비밀은 별로 뜬소문없이 끝내 비밀로 묻혀진채 19살 되던해 임양이 대구시 삼덕동 김(金)모씨에게 시집을 가게되면서 「피날레」 간통 제1막은 이로써 무사히 끝났다. [제2막] 이런 내용을 알리없는 불행한 사나이 신랑 김씨는 6·25동란때 군에 입대했으나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결국 그는 아내의 비처녀성을 영원히 모르게 돼고, 임여인과 결혼생활 단3개월을 누렸을 뿐이었다. 「미스」아닌 19살의 「미시즈」임은 그럭저럭 짧은 결혼생활에서 얻은 아들과 단둘이 살다가 6·25 이듬해인 51년 10월 지금의 남편 김기호(金基鎬)씨(가명·46)와 재혼. 그러다 시집간 아가씨는 남편잃고 또 결혼했으니 그때 남편은 28살. 전실소생이 없고 오히려 전남편의 아들이 딸린 그녀 입장에서 재혼생활은 바로 서울로 이사해 옮기면서부터 남편에 대한 정성이 한결 더해졌고 알뜰한 주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들딸을 낳으면서 날과 달이 흐르기 만10년…. 잔잔한 호수에 돌이 던져지는 운명의 61년 겨울이 왔다. 이해 12월 어느날 대구시 태평로3가 통운창고 옆에 있던 언니집에 다니러온 임여인은 그 옛날의 남자 차씨와 식당에서 딱 마주쳤다. 운명이란 참으로 우연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16년만에 만난 그녀는 차씨가 이끄는대로 장소를 옮겨 다방엘 갔고 저녁을 같이든 다음 극장을 거쳐 밤11시30분이 되자 자석에 끌린 사람처럼 그를 따라 나란히 여관을 찾았다. 재회가 빚은 간통 제2막은 그이튿날 그녀가 서울로 올라가기까지 서로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불을 뿜었다. [제3막] 8년이란 세월이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또 흘렀다. 사업을 하는 남편을 따라 대구로 옮긴지도 몇년이 지났다. 무더위가 「아스팔트」를 엿판처럼 녹이는 작년 8월의 어느 하오. 모「택시」회사에 볼일이 있어 좌석「버스」를 타고 영남대학교앞을 지나던 임여인은 누군가 뒤에서 탁치는 촉감을 느끼고 돌아본 순간 까무라치게 놀랐다. 빙긋이 웃으며 서있는 차광희씨는 이제 54살의 「로맨스·그레이」-. 두사람은 「버스」를 내려 그길로 「아카데미」극장옆 A다방에서 밀어를 나누게 됐다. 5년전 아내가 집안에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져 숨진 얼마후 지금의 아내인 권(權)모여인(46)과 재혼했다고 차씨는 말했다. 그러면서 『재혼하기전에 당신을 만나지못한게 한스럽다』고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로부터 몇시간뒤의 일이지만 이들은 어렵지않게 간통 제3막째의 1장을 근처 어느 여관에서 갖고 말았다. 노년기의 마지막 남은 정염을 몽땅 불태울듯 본격화된 제3막째의 50대와 40대의 이 남녀는 얼마전까지 꼬박 1년을 대구근교인 파계사와 동화사며 성당곱창집과 수성못등 유원지를 번갈아가며 밀회를 즐겼다. 그런데 바로 전남편 소생인 임여인의 아들 김모씨(25)가 의붓 아버지에게 귀띔해줌으로써 어머니의 부정이 탄로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임여인으로선 기막힌 업보(業報)인 셈. 시내 향촌동 C다방을 연락「아지트」로 삼은 이들은 작년12월 차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임여인이 다방 「메모」판에 꽂아달라고 어쩌다 아들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때 슬쩍 편지를 호기심에 뜯어본 아들은 그로부터 이를 미끼로 2~3천원씩 수10차례나 어머니를 괴롭혀 돈을 타냈다. 연서(戀書)심부름 부탁받은 전처 소생 아들이 별 직업없이 따로 살림을 해오던 아들 김씨는 궁할때마다 어머니를 위협했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뜯기다못한 그녀는 지쳐 자연 짜증날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거절당할때도 많아진 아들은 어머니가 미웠다. 지난 7월. 아들은 의붓아버지인 김씨에게 넌지시 『어머니에게 딴남자가 있다』는 정도로 일러주었다. 김씨는 머리에 선뜻 지피는게 있었다. 그때마다 외박은 단한번도 없었으나 밤늦게 돌아오는 아내의 잦은 외출이 수상쩍던 남편은 그럴싸한 구실로 또 통금시간이 되어서 들어오는 아내를 불러 따졌다. 지난 11월7일의 일이었다. 아내가 부정을 부인할수록 남편의 의심은 더욱 굳어만갔다. 『재혼이라 하지만 저만을 얼마나 사랑해왔는데…』이렇게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일시에 거꾸로 흐르는것 같은 격한 감정에 빠진 남편은 빨갛게 불에 단 연탄짚게를 임여인의 얼굴에 들이대고 자백을 재촉. 다 듣고난 김씨는 4남매를 낳은 아내와의 이혼소송과 함께 간부 차씨의 처벌을 호소하는 간통고소를 동대구경찰서에 지난 21일 냈다. 남편 김씨(46)는 종업원 4명을 데리고 흑판등 교재도구를 만들어 월5만원 수입으로 착실하게 살아온 가장이었으며, 임여인과함께 구속된 차광희씨(54)는 건축업을 하다가 지금은 C은행본점 00부장대리로 있는 외아들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처지. 그는 임여인을 『책임지겠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미안하다고만 말할뿐 K검사앞에 머리를 조아린 그녀는 더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구(大邱)=임양은(林樑銀) 기자> [선데이서울 70년 12월 6일호 제3권 50호 통권 제 114호]
  • ‘엘리베이터 키스’ 징역6월

    단순 성범죄자와 음란성 편지를 보낸 스토커(다른 사람을 뒤쫓아 가 집요하게 괴롭하는 사람)에 대해 사법 당국의 강도 높은 철퇴가 내려졌다. 법원은 최근 이례적으로 단순 범죄자들에게 잇따라 실형을 선고했고, 검찰은 음란성 쪽지도 원시적인 ‘통신매체’로 규정해 성폭력범죄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단순 성추행이라도 엄벌받아 마땅” 서울 남부지법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고생을 성추행한 이모(60)씨와 친구의 딸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김모(53)씨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의 실형을 잇따라 선고했다고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올해 1월 서울 영등포구 모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귀가하던 여고생 A(17)양에게 키스하는 등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이씨가 피해 배상을 위해 100만원을 공탁했지만 그 죄를 가볍게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A양의 정신적인 피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회복 노력 없이 술을 마셔 기억이 없다는 등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 엄정한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집으로 놀러온 딸의 친구 B(21)씨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 대해 “사건을 자백하고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를 위해 50만원을 공탁한 사실 등이 ‘작량감경(酌量減輕·판사의 재량으로 행해지는 형의 감경)’ 사유로 참작했다.”면서도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 같은 판결에 대해 형사부 판사들은 “최근 성폭력범에 대한 형량이 높아지긴 했지만 두 경우는 비슷한 사건에 비해 상당히 높은 형을 선고했다.”면서도 “이는 성폭력범에 대한 법원의 엄단 의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라고 밝혔다. ●“음란성 쪽지도 원시적인 통신매체다” 서울 남부지검은 짝사랑하는 이웃집 여성에게 속옷 선물에 음란성 쪽지를 넣어 보낸 30대 중반의 C씨에 대해 성폭력범죄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14조의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죄’ 등을 적용해 기소했다.C씨는 이웃에 사는 40대 주부 D씨를 짝사랑해 D씨의 속옷을 훔치는가 하면, 자신이 새로 구입한 속옷에 쪽지를 넣어 사랑을 고백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D씨는 남편과 상의 끝에 A씨를 신고했다.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검사가 기소한 죄명에 대한 관련 조문을 찾아본 뒤 고민에 빠지게 됐다. 성폭력법 14조가 규정하고 있는 통신매체에 ‘쪽지’가 포함되는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재판부는 공판 검사에게 “쪽지를 통신매체로 볼 수 있느냐.”고 질문했고 공판 검사는 당황해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쪽지가 통신매체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전해들은 담당 검사는 “쪽지도 원시적인 통신매체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보냈다. 이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은 다음 달 9일 예정돼 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사르자, 천주교 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양반층의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 남인이었으므로, 탕평책을 내세웠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의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으려고 그들을 교화시켜 유학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 신자들이 많이 천주교 신앙을 버렸으므로, 자연히 중인층의 비중이 높아졌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진산사건(1791) 이후 신유교난(1801)까지의 천주교 지도층을 38명으로 선정하고, 이 가운데 중인이 21명으로 55%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신분미상자 3명을 제외하고 통계를 내면 60%로 높아진다. 중인 지도층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천주신자 신주를 불사르다 초기에 성직자가 없었던 조선 천주교에서는 중요한 교리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북경에 사람을 보내 유권 해석을 구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나무장사를 하던 윤유일(尹有一)인데,1789년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자문,1790년과 1792년에는 성직자 파견 요청을 위해 북경에 다녀왔다. 그는 1790년에 돌아와 “천주교에서는 조상 제사를 금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알림으로써 큰 동요를 일으켰다. 진산군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은 고산 윤선도의 6세손으로 다산 정약용의 외사촌인데,2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1784) 겨울 서울에 올라와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빌려보고,3년 후 정약용 형제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1791년 여름에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교 교리를 지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 외사촌 권상연도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친척과 유림들이 그 사실을 알고 관가에 고발하였다. 진산군수 신사원이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그들은 교리가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전주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자 12월8일에 참수하였다. ●정조 “미혹된 중인을 교화하라” 이 와중에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정조는 탕평 정국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교화정책을 썼다. 형조에서 11월11일에 “사학(邪學) 죄인 정의혁·정인혁·최인길·최인성·손경윤·현계온·허속·김계환·김덕유·최필제·최인철 등 11명을 혹은 형조의 뜰에서 깨우쳐 감화시키기도 하고, 혹은 그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간곡히 깨우쳐 회개하도록 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가운데 신분이 알려진 최인길과 최인철은 역관, 손경윤과 현계온·최필제는 의원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이렇게 전교하였다. “중인 가운데 잘못 미혹된 자들에 대해 반드시 그 소굴을 소탕하려는 것은 한편으로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자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려는 것이다. 중인 무리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常人)도 아닌 중간에 있기 때문에 가장 교화하기 어렵다. 그대들은 이 뜻을 알아서 각별히 조사하여 혹시 한 명이라도 요행으로 누락시키거나, 한 명이라도 잘못 걸려드는 일이 없게 하라. 모두 새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중인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천주교에 심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구조인 문제라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탄압하기보다는 교화시켜 새사람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성경 언문번역본 보급… 평민신자 확보 최필공(崔必恭)은 의원인데, 경거사괴(京居邪魁), 즉 서울에 사는 사학 괴수로 지목되었다.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우고 1790년에 입교한 그는 큰길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을 향해 노방전도를 하였다. 그래서 ‘정조실록’ 15년(1791) 10월23일조에 “예전에는 나라의 금법을 두려워해 어두운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대낮에 마음대로 행하고 공공연히 전파한다. 예전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서 겹겹으로 싸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지금은 제멋대로 간행하여 경향에 반포한다.”고 개탄하는 홍낙안의 편지가 실릴 정도였다. 그가 열렬한 전도활동으로 천주교 지도층이 되자, 조정에서 그를 회유하였다. 작은아버지와 동생이 간청하자 신앙을 버리고 종9품 심약(審藥) 벼슬을 받았으며, 아내를 얻어 장가들고, 집도 구했다. 결과적으로 모범적인 배교자가 되었기에 정조는 “최필공같이 완악한 자도 교화되었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최필공의 예에 따라 도신(道臣)이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라.”고 지방관들을 타일렀다. 그러나 다시 교회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므로, 순조가 즉위하자 1801년에 정약종·이승훈 등의 지도자 5명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초기 천주교 서적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지식층만 읽었다. 양반으로는 남인 학자들 사이에 신앙과 관계없이 널리 읽혔으며, 중인들도 북경을 드나들며 수입해 읽었다.‘승정원일기’ 정조 9년(1785) 4월9일조에 “서양 천주의 책이 처음 역관 무리로부터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지 여러 해 되었다”는 유하원의 상소가 실렸으니,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1784년 이전에도 역관들이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을 수입해왔음을 알 수 있다. 역관 최창현(崔昌顯)은 이승훈이나 이벽 같은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며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다 1784년 겨울에 입교했는데,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활동적이어서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진산사건 이후에 신자층이 평민으로 확산되자, 그는 평민 신도들에게 교리서를 읽히기 위해 ‘성경직해(聖經直解)’를 언문으로 번역해 보급하였다. 그가 도피생활중에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자 배교자가 밀고하여 체포되었다. 포청에서는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배교했지만, 국청에 넘겨지자 배교를 취소했다. 호교문(護敎文)까지 지어 적극적으로 신앙을 지켰으므로,4월8일에 정약종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책판(冊板)을 찾으러 간다.”는 신도의 진술이 있었고, 사학도로 적발된 사람 가운데 인쇄나 출판작업에 종사하는 각수(刻手)가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목판본으로 인쇄한 교리서들이 중인과 평민 신자층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 교리서와 성경 번역을 통해, 암클로 천대받던 언문이 새로워졌다. ●중인, 주문모 신부 입국 돕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자, 몇 년 동안 신자들 사이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1801년 3월15일에 자수하였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당해 숨어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혼자 살아 남기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영부사 이병모는 그가 조선에 들어온 과정을 정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양 학문에 종사하다가 북경 천주관(天主館)에 전입했다고 합니다. 이승훈이 사서(邪書)를 구입해 온 뒤에 정약종의 무리가 사사롭게 양인(洋人)과 왕래하여 교주(敎主) 얻기를 요구했는데, 천주관에 와 있는 양인은 정원이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에 가게 되면 저들이 알게 되므로, 수업하던 중국 사람을 우리나라에 내보낸 것입니다.” 이튿날 주문모 신부를 신문했는데, 그는 아직도 조선말이 서툴러 한문으로 필담하였다. “갑인년(1794) 봄에 조선인 지황(池璜)을 만나 동지사(冬至使) 행차 때에 변문(邊門)이 통하므로 책문(柵門)으로 나왔습니다.(줄임) 처음에 만났던 지황은 을묘년(1795)에 포도청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의주에서 서울까지 학습하기를 원하는 여러 사람의 집을 옮겨다니며 지냈습니다.” 그가 영세를 주었다고 자백한 사람 가운데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의 이름이 나와, 주문모 신부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죽음을 내렸다. 주문모 신부는 6년 전에 이미 잡힐 뻔했는데, 신부는 달아나고 악사(樂師) 지황, 역관 최인길, 나무장사 윤유일만 잡혀서 매맞아 죽었다. 노론에서는 남인 정권이 자파 천주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내자 3명을 때려죽여 입을 막았다고 비난했다. 윤유일은 몰락한 양반이지만, 지황과 최인길은 중인이었다. 초기 천주교에서 중인과 평민의 비중이 커진 사실에 대해 조광 교수는 “남인 학자들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운동적 차원으로 전환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이벽이 1780년대에 한문으로 썼다는 ‘성교요지’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정약종이 1790년대에 언문으로 쓴 ‘쥬교요지’에서는 더 이상 신분평등을 주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정책선거 원년으로] 각 공약별 ‘정책영향평가’ 필요

    선심성 공약은 민주주의를 좀먹는 마약과 같다. 후보들은 집권 후 국정운영에 부담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의 표를 얻는 데 급해 ‘공수표’를 남발한다. 집권 후에는 재원부족 등을 이유로 대부분 폐기된다. 그래서 유권자는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에 지나지 않는다.’는 학습을 거듭하면서 공약이나 정책에 대한 관심을 잃는다. 선심성 공약의 일부는 실행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에서, 수없이 노선을 변경한 고속철도, 그리고 비행기 승객이 없는 공항 등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재원의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후보들이 선심성 공약에 중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고강도 처방이 필요하다.●후보에게 예산운용계획서 제출 의무화를 첫째, 후보들에게 5년간의 예산운용 계획서를 제출토록 해야 한다. 예산규모, 즉 총세입과 총세출을 밝히면 표만 의식해 정부지출을 약속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세출예산을 기능별로 배분하면 집권 후 국가살림살이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정치권은 복잡한 국가예산을 캠프에서 어떻게 짜느냐, 경제 여건이 변하는데 어떻게 미리 예산안을 짜느냐는 등 볼멘소리를 할 테지만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예산안을 짤 능력이 없다면 수권능력이 없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1000건 이상의 ‘공약 물량주의’로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이다. 꼭 필요한 정책, 꼭 지킬 공약만 약속한다면 기준선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이미 5년간의 예산안을 미리 짜는 중장기 예산체제를 도입한 지 오래다. 둘째, 각 공약의 예산 소요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추진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책을 실시할 때 생길 수 있는 장점과 문제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책영향평가’를 제출해야 한다. 단순히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과감히 줄여 나가겠다.’,‘2007년까지 세계 7위의 기술강국에 진입하고 2010년에는 세계 4강의 산업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한 줄짜리 선언적 공약은 유권자의 판단력만 흐리게 할 뿐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무엇인지, 예상되는 비용과 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유권자들은 ‘고무신·막걸리 선거’ 시절의 유권자가 아니라 개방·참여·공유의 ‘웹2.0 시대’ 유권자다. 유권자 수준에 맞는 정보를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다.●경쟁 후보 정책에 대한 평가 문서화 셋째, 경쟁 후보들의 정책에 대해 각 캠프가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에 대해서도 문서화된 의견을 제출해야 한다.각종 의혹이나 지엽말단적인 말꼬리 잡기와 말꼬리 흐리기로 선거를 치를 게 아니라 상대의 정책에 대해 합리적인 반박과 재반박이 있어야 한다. 정당에 정책연구개발비를 제공하고 있는 유권자는 정책에 대한 정당들의 책임 있는 의견을 들을 권리가 있다.
  • 공안사건 피해자 재심 법무부, 법률지원키로

    변호사 선임 비용이 없어 재심 청구에 어려움을 호소(서울신문 7월12일자 1면)해온 ‘차풍길 간첩조작의혹사건’ 피해자 차풍길씨 등 과거 공안사건의 억울한 피해자들이 법무부의 재심지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건 중 재심 권고사안에 대해 재심청구 및 진행 과정에 필요한 법률지원을 할 예정”이라고 19일 밝혔다. 법무부는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진실화해위 공문을 6월29일과 7월12일 두 차례에 걸쳐 받았다.”면서 “내용을 밝힐 단계는 아니나 공문 수령 직후부터 구체적인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청와대는 진실화해위의 권고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서울신문 보도에 따라 대통령 훈령 제정을 통한 ‘권고사항 처리단’ 가동을 12일 결정한 바 있다. 법무부의 재심지원 방안은 크게 3가지다. 법무부는 ▲7월초에 재심지원 TF팀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고 ▲대검찰청에 진실화해위 결정내용을 통보해 재심에 필요한 법률지원 요청했으며 ▲법률지원구조공단에 협조공문 발송했다고 밝혔다.법무부 관계자는 “변호인을 선임할 돈이 없어 재심청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이들이 재심 과정에서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검찰이 나서서 재심을 청구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 관계자는 “검사의 재심청구 권한을 명시한 형사소송법 제424조(재심청구권자)의 입법취지와 달라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했다.해당 형소법 조항은 진범이 따로 있는 사건에서 허위자백으로 확정판결을 받은 가짜 범인의 의사에 반해서 재심을 청구하고 진범을 기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분명히 할 점은 법무부의 재심지원은 검찰의 과거반성 차원임과 동시에 대승적 차원의 지원”이라고 강조,“재심은 실체적 진실규명을 다시 한다는 의미로, 청구인들이 죄를 지었으면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고 죄가 없다면 무죄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갑배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이에 대해 “법은 입법취지에 맞아야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평생 억울한 누명으로 고초를 겪어온 피해자들을 생각해서라도 검찰의 적극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법무부는 다음주쯤 구체적인 지원내용을 공개할 방침이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백의종군하며 화성 살인사건 풀고 싶어”

    “백의종군하며 ‘화성 살인사건’을 해결해 보고 싶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 수사과정에서 한화측과의 부적절한 접촉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강대원 전 남대문경찰서 수사과장(경정)이 회고록 ‘형사 25시’를 탈고했다. 현재 대기발령 중인 강 경정은 8일 “상황이 잘 정리되면 화성경찰서에서 백의종군하며 화성 살인사건을 해결해 보고 싶다.”며 현장 복귀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의 희망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그의 회고록에는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현 광역수사대) 대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실종 여성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유영철을 검거해 살인 행각을 자백받는 과정이 상세히 나타나 있다.●“日 민영방송이 `발길질 사건´ 유도”‘주운 휴대전화를 썼을 뿐’이라고 우기던 유영철에게 그의 지갑에서 나온 여성용 금발찌를 제시하자 ‘여기 있는 형사들 다 특진시켜 주겠다.’며 소리지른 뒤 종이에 ‘혜화동 2명, 구기동 3명…’ 식으로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써내려 갔다고 강 경정은 묘사했다. 당시 발생했던 미제 살인사건 지역의 이름이 하나 둘 뜨기 시작하고 희생자 수가 30명에 가까워질 무렵 반신반의하던 경찰관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것. 강 경정은 또 유영철을 검거하고도 용산서 형사과장으로 좌천된 계기가 된 ‘발길질 사건’을 일본 민영방송이 유도해 일으킨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극적인 장면을 유도하기 위해 일본 방송사가 희생자 어머니에게 부탁해 우산으로 유영철의 모자를 벗기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보복폭행사건 내사 중단 지시 받아”김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과 관련해 강 경정은 “사건 발생 3일 후 첫 제보를 받고 수사에 착수했지만, 윗사람으로부터 내사 중단지시를 받았다.”면서 “각 정보기관과 언론도 이 사건을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모두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 경정은 서울청 기동수사대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유영철 사건을 처리하고 지난해 용산 초등생 성추행 살인사건의 범인을 검거한 ‘베테랑 형사’다. 하지만 유영철을 호송하는 도중 항의하던 유가족을 부하 직원이 발길질한 일에 책임을 지고 보직해임됐다. 이어 용산 초등생 성추행 살인사건 때도 피해자의 장례식 전날 서울 강남 고급술집에서 술자리를 가진 것이 드러나 전보되는 등 ‘비운의 형사’,‘징계 전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갖고 있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지참금이 뭐기에…

    생후 2일된 인도 여자아기가 지참금 때문에 생매장됐다 극적으로 구조됐다.BBC방송은 6일 “자기 외할아버지에 의해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산 채로 묻혔던 여자아기가 농부에 의해 발견돼 극적으로 살아났다.”고 보도했다. 이 비정한 사건은 인도 하이데라바드 남쪽 150㎞ 떨어진 마을에서 일어났다. 이 아기를 살린 농부는 땅에 고사리 같은 손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땅을 파헤쳤다고 말했다. 현지 경찰은 아기의 외할아버지인 압둘 라만을 범인으로 체포했다. 라만은 아이를 산 채로 묻어 죽이려 했다고 자백했다.그는 “딸 넷을 아직 결혼시키지 못했다.”면서 “하나뿐인 손녀라도 다섯번째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현지 경찰은 전했다. 아이의 엄마인 라만의 딸이 아기를 버릴 것에 동의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몸무게가 불과 1.7㎏인 이 아기는 아직 이름도 없으며 인근 병원에서 지금 치료를 받고 있다. 인도의 시골지역에서는 남아선호사상과 지참금 때문에 여자 아기와 어린이를 죽이는 일이 아직도 벌어진다. 인도정부는 지난 20년 동안에 1000만명가량의 여자아이들이 태내에서 혹은 태어나자마자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사법살인 법관 처벌법 만들어야”

    ‘사법 살인’ 등 고의로 법률을 왜곡해 판결을 내린 법관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법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동아대 법학과 허일태(56) 교수는 3일 발간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계간 논문집 ‘형사정책 연구’ 여름호에서 쓴 ‘법왜곡 행위와 사법 살인의 방지를 위한 입법정책’이라는 논문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허 교수는 “법관이 사실관계의 왜곡이나 조작, 부당한 법규 적용 등으로 인해 ‘법왜곡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형법으로 법관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한국형사법학회장을 지냈으며 사형제 폐지 주장과 함께 이를 대체할 ‘절대적 종신형’ 제도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주장했다. 허 교수는 논문에서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부당한 법적용 판결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논문은 당시 유신헌법에 의거해 선포된 긴급조치로 피고인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18시간 만에 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는데 이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규정한 유신헌법 자체가 권력분립주의와 법치국가주의 등 헌법의 근본 규범에 반(反)하기 때문에 긴급조치 역시 무효라고 분석했다. 또 피고인들이 1965년 이미 ‘인혁당사건’에 의한 반공법위반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에 이를 다시 국가보안법에 적용시킨 건 일사부재리 원칙에 반한 것이 된다고 밝혔다. 특히 피고인의 가족 중 1명과 수사기관원 등 일부에게만 재판을 방청하도록 해 공개 재판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변호인의 변호와 피고인의 최후 진술권마저 빼앗은 채 사법살인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경우도 법관이 강압에 의한 피고인의 자백이나 허위·날조된 증거 등을 의심할 이유가 있을 땐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면서 “이런 사건이 독일에서 일어났다면 담당 재판관들은 사법살인미수로 처벌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과 러시아, 스페인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타이완, 중국, 북한 등은 법왜곡행위에 대해 법관이 최고 10년 이하의 구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허 교수는 “‘수사절차나 소송절차에서 어느 당사자에게 유·불리하게 고의로 법률을 왜곡한 법관에게는 소정의 형벌을 가한다.’는 법 규정이 하루빨리 형법에 삽입돼 법왜곡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일생의 파멸이 초래되는 일이 다시는 없게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거짓자백 안했으면 지금 땅속에 있을 것”

    “거짓자백 안했으면 지금 땅속에 있을 것”

    1980년 8월21일, 석달윤(76)씨는 신군부가 장악한 당시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남산 대공분실 168호에서 47일간 고문을 당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고종 10촌 형님 박양민씨 탓이었다. 석씨가 간첩으로 남파된 박씨에게 전남 진도 해안 경비상황을 보고했다며 중정은 자백을 강요했다. 남파공작원 오모씨의 “박씨 간첩활동을 북에서 들은 바 있다.”는 막연한 진술이 근거였다. 수사관들의 고문은 가혹했다. 발로 배를 차고, 머리를 욕조에 담그고, 송곳으로 하반신 곳곳을 찌르고…. 잠은 안 재우면서 잠깨라고 볼펜 심지를 성기에 집어넣고…. 당시 중정 조사실은 피범벅이었다고 한다. 석씨는 결국 “내가 형님의 간첩활동을 도운 게 맞다.”고 자백했고,1981년 1월 안기부는 “고정간첩 15명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달 26일 47차 전원위원회에서 1980년 발생한 ‘석달윤 등 간첩 조작의혹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3일 밝혔다. ●진실위 “반인권적 사건… 재심조치를” 진실화해위는 “장기간 불법구금 및 강압적 상태에서 자백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하고, 사형 등 중형으로 처벌한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 사건”이라면서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 및 재심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27년 만의 진실규명 결정이다. 석씨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떳떳하므로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거짓으로라도 자백하지 않았으면 난 아마 지금 땅속에 있을 것”이라면서 “일주일만 그런 고문을 받으면 김일성이라도 만났다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18년 복역… 지금도 보안관찰 대상 석씨는 무기수로 징역 18년을 살았다. 함께 누명이 벗겨진 박씨의 외조카 김정인씨는 이미 1985년 10월31일 사형당했다. ‘간첩’의 처자식은 생계가 끊겨 두 달 동안 고구마로 연명했고, 고향 진도에서 살지 못해 내쫓기듯 이사했다. 1998년 8월15일 가석방된 석씨는 여전히 공안당국의 보안관찰 대상이고, 고문으로 굽은 허리는 지금도 하루 턱걸이 70개를 해야 펴진다고 한다. 진실화해위 결정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 것에 불과하다. 석씨의 ‘법적’ 간첩혐의는 바뀐 게 없다. 석씨는 “당연히 재심 청구한다. 백번 천번이라도 청구해서 무죄를 인정받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교도소에서 배운 서예솜씨로 석씨는 국전에 수차례 입선했다. 그는 안산에서 통일운동가와 서예가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水公본부장이 ‘운하 보고서’ 유출

    언론에 유포된 37쪽짜리 ‘경부운하 재검토 결과 보고서’는 한국수자원공사의 고위 간부가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유출 경위와 목적 등 석연찮은 점이 많아 의문을 낳고 있다. 경부운하 보고서 유출 의혹을 수사 중인 경기지방경찰청 수사과는 24일 수자원공사 김상우(55) 기술본부장을 소환 조사해 문건 유출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 경찰은 “지난 22일 김 본부장의 사무실과 주거지를 추가 압수수색해 언론사에 유포된 것과 똑같은 문건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경부운하 관련 정부의 태스크포스(TF)의 핵심인 수자원공사 조사기획팀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김 본부장은 지난 5월28일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함께 다니는 결혼정보업체 ‘퍼플스’ 김현중(40) 대표에게 문건을 직접 건넨 것으로 확인됐다. 김 본부장은 대학원생들과의 술자리에서 대운하 얘기를 나누던 중 김 대표가 “평소 운하에 관심이 많았는데 자료를 입수하고 싶다.”고 부탁해 건네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대표는 6월 초 37쪽 문건을 첫 보도한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자를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문건을 전달했다. 김 대표는 경찰에서 “기자와는 평소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진술했다.‘퍼플스’는 2001년 설립,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결혼정보업체로 알려졌다. 경찰은 문건을 유출한 김 본부장에게는 수자원공사법의 직무상 비밀누설 혐의를, 문건을 기자에게 건넨 김 대표는 직무상비밀누설 방조혐의로 불구속 입건했으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적용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25일 김 본부장 등을 다시 불러 정치적 의도에서 문건을 유출했는지, 대가가 있었는지 집중 추궁하기로 했다. 해당 기자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조사할 방침이다. 한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한반도 대운하’ 연구와 관련한 선거법 위반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경찰청 수사과는 이번 주에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고위 간부와 연구용역을 수행한 세종대 이모(37) 교수 등 관련자들을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라고 24일 밝혔다. 이 전 시장이 시정연에 직접 연구를 지시했는지와 연구용역 의뢰 시점이 선거법 위반 여부를 가늠할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에 대해 이 전 시장측의 박형준 대변인은 논평에서 “경찰 수사가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는 각본 수사로 전락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편 지난해 3월 시정연 원장으로 경부운하 문제를 검토했던 강만수 이명박 캠프 경선대책위 정책자문위원(전 재경부 차관)은 이날 서울신문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 전 시장의 경부운하 문제 검토 지시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 중이라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수원 김병철 서울 유영규 임일영기자 kbchul@seoul.co.kr
  • [사회플러스] 김흥주 회장에 징역 7년 구형

    서울 서부지검은 22일 정·관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로 구속 기소된 김흥주(58) 삼주산업(옛 그레이스백화점) 회장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날 서부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본인이 자백하고 있고 혐의 사실이 모두 인정된다.”고 구형 사유를 밝혔다. 김씨는 2001년 골드상호신용금고 인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편의를 봐달라며 김중회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당시 비은행검사1국장)에게 2억 3500만원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김씨는 2001년 3월부터 2002년 4월까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사무실 운영비 8000여만원을 내고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공직자의 인사를 청탁한 혐의도 받고 있다.
  • 꽃만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 5·18 기념재단 엮음

    “…이대로 가다가는 어쩌면 광주가 피바다가 될 것이 뻔했기에 그대로 두고볼 수 만은 없었다. 그래서 손에 각목을 들고 머리띠를 두르고 금남로로 시민들은 모여들었다. 그것이 이상복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로는 상복씨를 아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1권 266쪽) 남은 자와 누리는 자들의 업(業)이요, 트라우마인 5·18은 어김없이 올해도 우리 곁에 돌아왔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했다.“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아직도 많은 상처는 가려져 있고, 밝혀지지 않은 상흔도 적지 않다. 행방불명된 사람과 항쟁 이후 사망한 사람의 가족들은 그 아픔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 행방불명자와 상이 후 사망자들의 기록인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전2권,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5·18기념재단 엮음, 한얼미디어 펴냄)은 지금이 아니면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기억’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항쟁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151명의 죽음에 대한 증언록으로 지난해 발간된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책들은 남겨진 가족들의 구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항쟁 이후 사망한 44명과 행방불명자 56명에 대한 유족들의 기억을 담고 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정수만 회장은 “증언집에 수록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 가족이 품고 살아온 회한의 세월을 통해 우리는 왜 아직도 ‘5·18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고, 그 상처를 사회가 함께 보듬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망각하느냐, 기억하느냐. 선택은 하나다.“이제는 잊고 화해하자.”는 망각의 해법은 “그만하면 됐다.”는 가해자 입장의 선택이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 과거사 청산은 사죄와 용서를 전제로 한 화해가 아니라 야합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런 일은 더이상 안 된다.”는 자책의 심정을 담아 과거를 청산하려 한다.5·18기념재단 이홍길 이사장은 “이 책이 이분들의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그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나누어서 고통의 무게를 줄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한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 여든여섯살의 노모는 지금도 텔레비전에 국립 5·18묘지가 나오면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친다. 전에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어 그의 묘비라도 손으로 만지며 하염없이 울어줄 수 있었지만 이제 바깥 출입이 어려울 만큼 건강이 나빠져 그마저 할 수 없는 처지다.…가난한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제화공으로 일하고 있던 장재근씨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다가 1980년 6월3일 광주월산파출소에 연행되어 상무대 합동수사본부로 넘겨졌다. 그는 상무대에서 장갑차를 운전한 시민군으로 지목되어 허위자백을 강요받기 시작했다.”(2권 266쪽) 가슴속 깊이 묻어둔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은 유족들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27년이라는 세월은 기억의 재생에도 긴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 기억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지금이 아니면 영영 되돌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이 책 곳곳에 넘쳐난다. 각권 1만 5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김승연회장 구속 수감] 법원, 구속영장 발부 배경

    [김승연회장 구속 수감] 법원, 구속영장 발부 배경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결국 ‘인신구속’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김 회장은 청계산으로 가지 않았고, 폭행도 하지 않았다는 당초의 입장을 법정에서 뒤집었다. 자신의 혐의를 일부 인정하고 재판부에 읍소했다. 이처럼 계속되는 말바꾸기가 증거인멸 요인으로 작용하는 등 오히려 자충수로 작용했다는 관측이다. 특히 새로운 목격자 진술이 나오는 데다 조직폭력배 개입 의혹이 증폭되면서 법원은 김 회장을 구속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법원이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지만, 국민적인 관심인 ‘사안의 중대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고려됐다. 김 회장측은 혐의를 인정하면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데 부담을 가질 것이라는 대명제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영장실질심사가 끝난 뒤 김 회장이 다른 경제인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고 “어리석은 아비”라며 자책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피의자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면 구속 사유 가운데 하나인 증거인멸 우려가 줄어든다. 게다가 죄를 뉘우친 피의자는 재판을 받을 때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김 회장의 자백은 태생적으로 ‘일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보복폭행을 사주했다거나 조폭을 동원했다는 부분까지 인정하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 회복할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할 게 불을 보듯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 부분에 승부를 걸었다. 경찰은 휴대전화 통화내역과 피해자 진술을 통해 신빙성 있는 증거가 확보됐다고 판단한 내용만 영장 혐의 사실에 적시했다. 조폭 동원설 등 정황이 포착된 단계의 혐의는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유에 넣었다. 법원은 결국 일부 혐의를 시인한 부분보다는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광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6개 혐의가 모두 소명됐다고 보이며 수사기관에서 더 조사하려고 하는 부분과 관련, 피의자들이 앞으로 증거를 더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된다.”며 수사에 힘을 실어줬다. 임일영 홍희경기자 argus@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18세기 일본에서 쇼군(將軍)이 정권을 세습하면서 가장 먼저 조선통신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박지원은 역관 이언진의 전기 ‘우상전’ 첫머리에서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준비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저축을 늘리고 건물을 수리했으며, 선박을 손질하고 속국의 여러 섬들을 깎아서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기재(奇才)·검객(劍客)·궤기(詭技·술수꾼)·음교(淫巧·기교꾼)·서화(書畵)·문학 같은 여러 분야의 인물들을 에도(江戶)로 모아들여 훈련시키고 계획을 갖추었다. 그런지 몇년 뒤에야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치 상국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손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도 문신으로 삼사(三使)를 선발한 뒤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을 수행원으로 발탁했다. 박지원은 이렇게 기록했다.“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으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은 모두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여러 명이 범인 목격…외교문제로 비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과 일본 두나라가 국력을 기울여서 온갖 전문기예자를 총동원해 맞섰다. 일종의 국제문화박람회라고도 할 수 있다. 무력으로 이름난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군관이다. 이들은 사행단을 호위하며 무예를 과시하거나,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才)를 공연했다.1763년 사행 때에 486명 일행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 선장 유진원은 배 밑창 곳간에 떨어져 죽고, 소동(小童) 김한중은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격군 이광하는 미친 증세가 일어나 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러나 경상도 무관(장교)이었던 도훈도 최천종은 일본인 역관에게 찔려 죽었기에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이는 외국인을 보기 힘들었던 일본에서 200년 동안 연극이나 소설의 소재로 전해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처음 가져온 것으로 널리 알려진 통신사 조엄(1719∼1777) 일행이 에도에서 외교적인 의전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1764년 4월7일 오사카(大阪)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도훈도 최천종이 피살됐다. 이 절에는 500명을 재울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조엄이 새벽에 보고를 듣고 의관과 군관을 급히 보냈더니, 곧이어 한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최천종이 피가 흥건하게 흘러 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닭이 운 뒤에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돌아와 새벽잠을 자는데, 가슴이 답답해 깨어보니 어떤 사람이 가슴에 걸터앉아 칼로 목을 찔렀소. 급히 소리 지르면서 칼날을 뽑고 일어나 잡으려 하자, 범인은 재빨리 달아났소. 이웃방 불빛에 보니 왜인이었소. 나는 어떤 왜인과도 다투거나 원한 맺을 꼬투리가 없으니, 나를 찔러 죽이려 한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죽게 되니 너무 원통하오.” 첩약을 붙이고 약을 달여 마시게 했지만, 최천종은 해가 뜨자 운명했다. 자루가 짧은 창과 ‘어영(魚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이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왜인의 것이었다. 범인이 달아나다 격군 강우문의 발을 밟아 그가 “도적이 나간다.”고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여러명이 목격했다. 조엄은 “범인을 색출해 목숨으로 변상하라.”고 일본측에 통고했다. 밤늦게야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왕복행차를 호위하는 쓰시마 수행원과 살해사건이 일어난 오사카의 법관, 그리고 조선의 역관들이 함께 입회해 검시(檢屍)했다. 최천종은 조엄이 대구 감영에 있을 때부터 신임하던 장교였으므로 정성껏 장례준비를 했다. 14일에 주변 인물들을 신문하던 과정에서 쓰시마 역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하는 편지를 보내고 달아났다. 일본측에서 목격자 진술에 의해 인상서(人相書)를 만들어 배포했다. 범인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 나이 26세, 쓰시마 역관, 얼굴색이 희고 키는 5척3촌이라고 자세하게 밝혔다. 수백명의 수사력이 동원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 ●범인 “거울 도둑으로 몰며 때려 살해했다.” 17일부터 군사 2000명과 배 600척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서,18일 다른 지방에서 체포했으며,19일부터 니시혼간지 경내에서 신문했다. 최천종이 6일 거울을 잃어버렸는데, 스즈키 덴조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말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해 밤늦게 찾아와 살해했다는 동기까지 밝혀졌다. 그러나 과연 거울 하나 때문에 국제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범인을 처형하니 조선 역관과 군관들이 참관해 달라는 통고가 29일에 왔으며,5월2일 삼헌옥(三軒屋)에서 집행했다. 조엄은 김광호를 시켜 최천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원수를 갚았다고 아뢰게 했다. ‘명화잡기(明和雜記)’나 ‘사실문편(事實文編)’을 비롯한 일본측 기록들은 대부분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달라는 독촉 때문에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몇달 걸리는 국제여행 경비를 조정에서 직접 지급하지 않고 인삼을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수행원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른 물건으로 사왔다. 사대부들은 정량을 지켰지만, 역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남몰래 더 가지고 갔다. 몇차례 단속에 발각되면 인삼도 빼앗기고 엄한 처벌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밀무역은 그치지 않았다. 쓰시마 역관들이 에도까지 따라가면서 호위하는 과정에서 인삼을 팔아주었으니,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가지는 과정에서 칼부림이 났을 가능성이 많다. 밀무역 죄를 감추기 위해 거울을 잃어버려 말다툼이 생겼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한양에서 따라온 조선 역관들의 일본어 회화실력이 낮았으므로, 저간의 숨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야기는 계속 부풀었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피살된 사건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최천종이 살해된 사건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작품을 ‘도진고로시(唐人殺し)’라고 한다. 도진(唐人)은 외국인을 가리키며 네덜란드인,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포함된다. 박찬기 교수는 이들 수십종의 작품을 이국인(異國人) 살해, 통역관 살해, 혼혈아의 원수 갚기, 인삼 밀거래에 의한 보복 살해의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국인 살해와 통역관 살해 유형은 가부키(歌舞伎)와 조루리(淨瑠璃)로 상연되었다. 박찬기 교수가 정리한 도표에 의하면 오사카와 교토의 여러 극장에서 1767년부터 1883년까지 42회, 에도에서 5회 상연됐다. ●막부 압력으로 연극 줄거리 바뀌기도 가장 먼저 1767년 2월17일 아라시히나스케 극장에서 상연된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 )’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허구화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글자는 다르지만 제목에 ‘스즈키’라는 음이 들어간 것만 보아도 최천종 살해사건을 다루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열흘도 못 되어 같은 작가가 다른 제목으로 바꿔 같은 극장에서 또 상연했다. 가부키 연표에는 “첫날 둘째 날은 관객의 반응이 좋아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사정이 있어 상연 중지”라고 기록되었는데, 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염려한 막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후에 줄거리가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은 나카야마 라이스케(中山來助)와 지카마츠 도쿠조(近松德三)가 지은 ‘겐마와시사토노다이츠(拳揮廓大通)’이다.1802년에 초연을 시작해 1883년 5월까지 33회나 상연됐다. 이 작품에는 이국인을 살해하는 장면 묘사가 없고, 역관 고사이덴조(香齋傳藏)를 살해하는 유형으로 바뀌었다. 덴조(傳藏)라는 쓰시마 역관의 이름 정도만 남고, 이국인의 복장이나 언어 같은 이국적 정취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佛검찰 “천조각에 질식”

    |파리 이종수특파원|프랑스 검찰은 2일(현지시간) “한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서울 서래마을 영아 시신 2구를 부검한 결과 천 조각에 의해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서부 투르 지청의 필립 바랭 검사는 이날 기자들에게 “아기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천 조각으로 질식사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뭉개진 뒤 부드러운 천에 의해 질식사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같은 부검 결과는 ‘아기들을 목졸라 죽였다.’는 베로니크 쿠르조의 자백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vielee@seoul.co.kr
  • 제주 초등생 실종 40일만에 숨진채 발견

    제주 초등생 실종 40일만에 숨진채 발견

    지난달 16일 집 앞에서 실종된 양지승(9·서귀북초 3)양이 실종 40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시신이 발견된 곳이 양양의 집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곳이어서 경찰의 실종자 수색작업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제주 서귀포경찰서는 24일 오후 5시20분쯤 서귀포시 서홍동 S빌라 지승양의 집에서 50여m 떨어진 감귤 과수원 폐가전제품 더미 밑에 검은색 비닐에 담겨 있는 시신을 경찰견이 찾아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승양의 집 근처 과수원 관리사에서 살며 고물상을 하는 송모(49)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밝혔다. 지승양 실종 이후 경찰과 공무원, 주민,119소방대원, 군인 등 3만여명을 동원해 수색을 했으나 지승양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최근 지승양 인근 주택에 대해 정밀 수색작업을 벌였다. 경찰은 안경과 신발 등이 실종된 지승양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보다 정확한 신원 확인을 위해 국립과학 연구소에 DNA 분석을 의뢰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경찰이 지승양 실종 이후 세 차례나 집중 수색작업을 했던 곳이어서 경찰의 수색작업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뤄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 접수 후 과수원을 대상으로 수차례 집중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아무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지승양의 시신이 다른 곳에 있다가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특히 지승양은 인천 박모군 유괴 살해 사건 이후 실종아동이 발생하면 고속도로와 국도 등의 전광판과 휴대전화 등을 활용해 신속하게 상황을 전파, 실종아동의 조기 발견을 유도하는 ‘앰버 경고(AMBER Alert)’ 1호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경찰은 지승양 실종신고 하루 뒤인 지난달 17일 지승양의 사진 등을 언론에 공개하며 공개수사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경찰이 사건 초기에 공개수사를 하는 바람에 지승양이 희생됐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지승양은 지난달 16일 오후 5시쯤 서귀포시에 있는 피아노학원에서 교습이 끝난 후 학원 차량을 타고 돌아와 집 앞에 내린 뒤 실종됐다. 이후 오후 8시쯤 아버지 양모(43)씨가 경찰에 실종 신고, 경찰이 대대적인 수색 작업과 함께 탐문 수사를 벌여 왔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중국서 외가가던 자매 괴한에 ‘두눈 뽑혀’

    중국 안후이(安徽) 푸난셴(阜南縣)에 사는 자매가 외가로 가는 도중 두 눈을 뽑히는 사건을 당해 중국인들이 경악하고 있다. 양리(楊麗. 17)와 양메이(楊玫. 3) 자매는 지난 5일 외가에 가는 도중 스 모씨에게 폭행을 당해 동생 양메이는 죽고 언니는 눈이 뽑히는 중상을 입었다. 두 눈을 뽑힌 양리는 경찰 조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한 남자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며 “그는 울부짖는 동생을 죽이고 나를 유채밭으로 끌고 가 칼을 이용해 나의 두 눈을 뽑았다.”고 밝혔다. 23일 안후이 린취안셴(臨泉縣)의 경찰 측 관계자는 “이번 사건의 용의자 스 모씨는 올해 37살로 홀로 쓰레기를 주워가며 살고 있다”며 살해 동기에 대해 “우발적 범행으로 동생 살해는 시끄러운 울음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또 경찰은 “후일 자신을 알아볼까 하는 우려에 양리의 두 눈을 뽑았다.”고 용의자의 자백을 전했다. 나우뉴스 신청미 기자 qingmei@seoul.co.kr
  • 日 피격 나가사키 시장 출혈과다로 사망

    日 피격 나가사키 시장 출혈과다로 사망

    |도쿄 박홍기특파원|지난 17일 밤 발생한 일본 나가사카시 이토 잇초(61) 시장의 피격 사망사건으로 일본 정치권이 뒤숭숭하다. 오는 22일 치러질 지방선거와 7월 참의원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일어난 만큼 수사 결과에 따른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이토 시장은 18일 새벽 2시28분쯤 권총 두 발을 맞고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진 지 6시간30분 만에 출혈과다로 숨졌다. 범행 현장에서 이토 시장의 선거운동원들에게 붙잡힌 범인 시루 데쓰야(59)는 경찰 조사에서 “시장을 죽이고 나도 죽으려 했다. 시(市)측과 문제가 있었다.”고 자백했다. 현재 정확한 범행 동기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시루가 공공 사업 입찰을 둘러싼 이토 시장과의 마찰만 진술할 뿐 입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수사는 원한 관계와 함께 이토 시장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정치 테러’ 쪽에 맞춰지고 있다. 특히 시루가 최대 폭력조직인 야마구치계 ‘스이신카이(水心會)의 행동대장이라는 점에 신경을 쓰고 있다. 경찰은 일단 시루가 시측에서 발주하는 공공부문의 토목·건축사업에서 제외된 데 대한 불만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에 비중을 둔 듯하다. 시루가 범행 직전 TV아사히에 이토 시장을 비난하는 편지와 녹음테이프를 우편으로 보낸 이유에서다. 그러나 시루의 진술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잖다.2년 전 자동차 파손 등의 사안만을 가지고 돌연 도로에서 권총 테러까지 저지를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때문에 이토 시장의 정치적인 성향에 비춰 시루의 범행 배후에 대한 의혹이 더해지고 있다. 이토 시장은 히로시마와 함께 2차대전 당시 원폭 투하지역인 시장이었던 만큼 국제회의 등에서 ‘반핵·평화’를 강하게 주장해 왔다. 특히 북핵 실험 이후 일본 내각에서 일었던 ‘핵무기 보유론’을 강력하게 비난하는가 하면 아베 신조 총리의 평화헌법 개정에도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했다. hkpark@seoul.co.kr
  • ‘39전 40기’로 되찾은 생수공장

    사기꾼에게 수십억대의 생수공장을 빼앗긴 50대 사업가가 8년간 40차례의 고소 등 집요한 소송 끝에 되찾았다.12일 청주지검에 따르면 김모(50)씨는 1994년 경남 산청에 지인들과 함께 A음료라는 생수공장을 착공했다. 공사는 마무리를 눈앞에 두고 자금압박이 심해지면서 99년 5월 자금이 바닥 나 중단됐다.인생을 건 회사를 포기하기가 어려웠던 김씨는 지인을 통해 모종합건설사 박모 대표를 소개받아 ‘공사대금 미지급시 생수회사를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 공사비를 충당했다.하지만 박씨는 이후 공사대금을 부풀려 김씨에게 청구한 뒤 대금이 미지급됐다는 이유로 생수공장을 빼앗아 자신이 대표로 있는 건설회사의 실제 사주인 유모씨에게 넘겼다. 김씨는 사기죄로 유씨 등을 처벌해 달라면서 고소를 했지만 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면서 무혐의 처분이 잇따라 내려졌다. 김씨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수사기관이란 수사기관은 죄다 찾아다니며 고소장을 냈고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 또다시 고소장을 냈다.8년 동안 수사기관에 낸 고소장만 39번. 힘든 싸움을 해왔지만 김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씨는 괴로움을 못이겨 여러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청주지검을 찾았다. 검찰은 상습 고소인인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한이 맺히지 않고서야 40차례나 고소를 했겠나.´란 생각에 재수사에 착수했다.검찰은 ‘생수회사 인수에 개입한 적이 없다.’는 유씨의 주장에 주목, 건설사의 주주명부 등을 통해 유씨가 건설사 실소유주임을 밝혀내고 유씨로부터 인수에 개입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유씨는 김씨에게 3일 후에 생수공장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김씨는 검찰에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청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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