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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율곡의 학문태도 비판하고 율곡, 퇴계의 글 냉정히 지적하다

    퇴계, 율곡의 학문태도 비판하고 율곡, 퇴계의 글 냉정히 지적하다

    “옳은 것을 배워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천행(天行)을 살펴 자강불식(自强不息)하고 지세(地勢)를 살펴 후덕재물(厚德載物)하는 것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율곡 이이), “사물의 이치는 지선(至善)하지만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옳음이 있으면 그름이 있습니다. 격물궁리(格物窮理)라는 것은 그 시비와 선악을 따져 (그릇된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취하는 것일 뿐입니다.”(퇴계 이황) 북송 시대의 학자 사마광의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을 놓고 두 사람은 부딪친다. 율곡이 사물의 움직임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자 퇴계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 것이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퇴계와 율곡은 1558년 처음 만난다. 23세인 율곡이 처가인 성주를 찾았다가 외가인 강릉으로 가는 길에 58세를 맞은 퇴계의 처소를 방문한 것이다. 이이가 시를 지어 ‘이 몸은 도를 듣기를 구하는 것이지, 반나절의 한가로움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라오’라고 하자 이황은 ‘명성 아래 헛된 선비가 없음을 이제야 알았다’고 화답한다. 이황은 또 강릉으로 간 율곡에게 편지와 시를 보내 당신은 재주가 뛰어나니 올바른 길로 가면 많은 성취를 이룰 것이라고 격려하고 율곡이 어머니를 잃은 뒤 불교에 빠져들자 탄식하지 말라며 위로한다. 그러나 학문의 지향점에서는 양보가 없었다. 격물치지론에 대한 논쟁도 이때 나온 것이다. 이광호 연세대 교수가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란 책을 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와 시를 번역하고 해설과 주를 달았다. 격물치지론, 중용 1장 등도 보충 자료로 실었다. 성리학자로서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율곡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폈다는 점에서 뚜렷이 대비된다. 편역자는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의 손가락이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는 것처럼 퇴계의 관심은 하늘을, 율곡은 땅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퇴계가 하늘의 진리에 대한 앎과 실천을 통해 사람의 삶과 하늘을 하나로 연결 짓는 것을 철학적 과제(이기이원론)로 삼았다면 율곡은 넓은 우주를 보면서도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기일원론)에 관심을 가졌다. 퇴계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수기’(修己)했고, 율곡은 민생을 개혁하려는 ‘치인’(治人)에 치중했다. 이러한 차이는 뒷날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퇴계는 1570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강한 어조로 율곡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경계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 율곡도 마찬가지였다. 율곡은 퇴계 사후 제문과 추모글을 썼지만 친구인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요즘 글을 보니 정암(整菴) 나순흠이 최고요, 퇴계가 다음이요, 화담(花潭) 서경덕이 그다음인데 그중 정암과 화담은 스스로 터득한 맛(自得之味)이 많고, 퇴계는 모방한 맛(依樣之味)이 많다”고 했다. 물론 퇴계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역자는 “율곡이 학문적 다름을 수용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퇴계는 주자의 학설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생각이 정당함을 입증하려 했다”며 이런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생각이 융합되거나 변증법적으로 통일돼 한 단계 더 고양되지 않고 평행선을 그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임태순 선임기자 stslim@seoul.co.kr
  • 중국어로 인사말과 마무리·中 고전 인용… 칭화대 연설 ‘뜨거운 호응’

    “국가 간의 관계도 국민들 간의 신뢰와 지도자들 간의 신뢰가 두터워진다면 더욱 긴밀해질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중 사흘째인 지난 29일 베이징의 명문 칭화대(淸華大)를 찾아 한·중 관계의 비전과 ‘새로운 한반도’를 키워드로 삼는 ‘새로운 20년을 여는 한·중 신뢰의 여정’을 주제로 연설을 했다. 박 대통령은 22분간 진행된 연설에서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인사말과 마무리 등 10분 이상을 중국어로 말해 기립박수를 받는 등 11차례 학생들의 박수를 이끌어 냈다. 박 대통령은 중국 고전인 관자(菅子)와 중용(中庸), 제갈량(諸葛亮)의 고사 등을 인용하며 한·중 간 신뢰와 우의 구축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우선 제갈량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적은 계자서(誡子書)에 나오는 ‘담박영정’(淡泊寧靜·군자의 행실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 고사를 인용,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 가면서 깨우친 게 있다면 인생이란 살고 가면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고 100년을 살다 가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결국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면서 “바르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또 자신이 그동안 밝혀 온 대북정책 구상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설명하면서 ‘새로운 동북아’와 ‘새로운 한반도’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중국의 젊은이 여러분이 이 원대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며 한·중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칭화대의 교훈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끊임없이 스스로 힘써 정진하고, 덕행을 쌓아 만물을 이끌라)도 중국어로 언급하는 등 확실한 ‘중국통(通)’임을 과시했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微博)에서 ‘박근혜’가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기록하는 등 중국 네티즌들도 이날 연설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연설에 앞서 이 대학 출신으로 현재 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최고 직위에 오른 류옌둥(劉延東) 부총리를 만나 반가워하며 포옹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연설을 마친 뒤 선물로 칭화대 교문 모형과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중국철학사’의 저자 펑유란(馮友蘭·1894~1990)이 쓴 당나라 한시 족자를 받았으며, 참석한 학생들에게 자신의 중국어판 자서전을 선물했다. 펑유란의 족자는 우리의 문화재청 격인 국가문물국에 등록돼 있는 ‘문화재’로 문물국 허가를 받아 박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베이징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朴대통령 中칭화대 연설 전문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방중 사흘째인 29일 베이징(北京)의 명문 칭화대(淸華大)를 찾아 ‘새로운 20년을 여는 한중 신뢰의 여정’을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다음은 연설 전문.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천지닝(陳吉寧) 총장님과 교직원 여러분, 그리고 칭화대 학생 여러분, 오늘 중국의 명문 칭화대학의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칭화대 학생 여러분을 보니, 곡식을 심으면 일년 후에 수확을 하고, 나무를 심으면 십년 후에 결실을 맺지만, 사람을 기르면 백년 후가 든든하다는 중국고전 관자(管子)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곳 칭화대의 교훈이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교훈처럼 쉬지 않고 정진에 힘쓰고, 덕성을 함양한 결과 시진핑 주석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을 배출했고,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생각과 열정이 중국의 밝은 내일을 열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한국과 중국이 열어갈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학생 여러분, 한국과 중국은 수천 년의 역사를 함께 해오면서 다양한 문물과 사상을 교류해왔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공유하는 것이 많고, 문화적으로도 통하는 데가 많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1992년에 수교한 지 약 2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호협력의 발전 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동안 교역액은 무려 40배나 늘었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와 선박이 하루에 백편이 넘습니다. 양국 공히 약 6만명의 학생들이 서로 유학을 하고 있는데, 이곳 칭화대에도 1천400여명의 한국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 국민들은 어려서부터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 같은 고전을 책이나 만화를 통해서 접해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중국에 관광 오게 되면, 마치 잘 아는 곳에 온 것처럼 친근감을 느끼곤 합니다. 저도 오래전에 소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는 말이 정말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곳저곳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든가, 관포지교(管鮑之交), 삼고초려(三顧草廬)같은 중국 고사성어들은 한국 사람들도 일반 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입니다. 저는 양국이 불과 20년 만에 이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렇게 문화적인 인연이 뿌리 깊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공감대야말로 정말 소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 저녁 저는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우정의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의 K-POP 가수들과 중국의 대중가수들이 함께 공연을 했는데, 양국 젊은이들이 문화로 하나가 되는 현장을 보면서 참 반가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중국 선현들의 책과 글을 많이 읽었고, 중국 노래도 좋아하는데, 이렇게 문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마음으로 가까워지고, 친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생 여러분, 저는 한중 관계가 이제 더욱 성숙하고, 내실있는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 국민의 신뢰인데, 저는 외교 역시 ‘신뢰외교’를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도 국민들 간의 신뢰와 지도자들 간의 신뢰가 두터워진다면 더욱 긴밀해질 것입니다. 저와 시진핑 주석은 지난 2005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저장성 당 서기였던 시 주석과 만나‘새마을 운동과 신농촌 운동’을 비롯해서 다양한 양국 현안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시주석과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 더욱 발전적인 대화와 협력을 해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20년의 성공적 한중관계를 넘어 새로운 20년을 여는 신뢰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틀 전 제가 시 주석과 함께 채택한 ‘한중미래비전 공동성명’은 이러한 여정을 위한 청사진이자 로드맵입니다. 현재 두 나라 정부는 무역자유화를 목표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될 경우, 양국 경제관계는 더욱 성숙한 단계로 발전할 것이고, 새로운 경제도약을 이뤄가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동북아의 공동번영과 역내 경제통합을 위한 견인차가 될 것입니다. 또한, 기후변화와 환경 등 글로벌 상생을 위한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벌써 우리 젊은이들은 자발적인 협력사업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예로, ‘한중 미래숲’이란 민간단체는 양국 젊은이들과 함께 2006년부터 네이멍구 지역 사막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600만 그루를 식수했습니다. 중국 내륙의 사막화를 막아 황사를 줄이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양국의 좋은 협력사례이고, 앞으로 이런 협력 모델을 더욱 확대해 가야 할 것입니다. 양국의 뿌리 깊은 문화적 자산과 역량이 한국에서는 한풍(漢風), 중국에서는 한류(韓流)라는 새로운 문화적 교류로 양국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가깝게 만들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과 중국이 함께, 아름다운 문화의 꽃을 더 활짝 피워서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생 여러분, 지금 전 세계가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서 아시아 국가들이 다방면에서 서로 협력을 강화해 간다면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정세는 매우 불안정합니다. 역내 국가 간에 경제적인 상호의존은 확대되는데, 역사와 안보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불신으로 인해 정치, 안보 협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시아 패러독스’ 현상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동북아에는 역내 국가간에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고 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자적 매커니즘이 없습니다. 중용에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멀리 가고자 하면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높이 오르고자 하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국가 간에도 서로의 신뢰를 키우고, 함께 난관을 헤쳐 가며,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동북아 지역도 역내 국가들이 함께 모여서 기후변화와 환경, 재난구조, 원자력안전 문제 같이 함께 할 수 있는 연성 이슈부터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차 정치, 안보분야까지 협력의 범위를 넓혀가는 다자간 대화 프로세스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신념을 담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대해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논의를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한국과 중국이 신뢰의 동반자가 되어‘새로운 동북아’를 함께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칭화대 학생 여러분, 저는 동북아에 진정한 평화와 협력을 가져오려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새로운 한반도’ 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한 구성원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아시아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한반도가 제가 그리는 ‘새로운 한반도’의 모습입니다. 저는 한반도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은 남북한이 불신과 대립의 악순환에서 못 벗어나고 있으나, 저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은 핵보유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일치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세계와 교류하고, 국제사회의 투자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핵개발을 하는 북한에 세계 어느 나라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내건 핵무기 개발과 경제건설의 병행 노선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고, 스스로 고립만 자초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만약 북한이 핵을 버리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는 변화의 길로 들어선다면, 한국은 북한을 적극 도울 것이고, 동북아 전체가 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한 구성원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된다면, 동북 3성 개발을 비롯해서 중국의 번영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문제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가 사라진 동북아 지역은 풍부한 노동력과 세계 최고의 자본과 기술을 결합하여 세계 경제를 견인하는‘지구촌의 성장 엔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보다 역동적이고 많은 성공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한국과 중국의 젊은이 여러분이 이 원대한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칭화인 여러분이 그런 ‘새로운 한반도’, ‘새로운 동북아’ 를 만드는데 동반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 여러분, 한국과 중국의 강물은 하나의 바다에서 만납니다. 중국의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한국의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서해 바다에서 만나 하나가 됩니다. 지금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지도아래, ‘중국의 꿈’(中國夢)을 향해 힘차게 전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도 국민 행복시대와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한반도라는 한국의 꿈(韓國夢)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국민 행복, 인민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나라의 강물이 하나의 바다에서 만나듯이, 중국의 꿈(中國夢)과 한국의 꿈(韓國夢)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꿈과 중국의 꿈이 함께 한다면, 새로운 동북아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과 중국이 함께 꾸는 꿈은 아름답고, 한국과 중국이 함께하는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젊은 여러분의 삶에는 앞으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저에게도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의 꿈은 전자공학을 전공해서 나라의 산업역군이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어머니를 여의면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고, 아버님을 여의면서 한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저는 많은 철학서적과 고전을 읽으면서 좋은 글귀는 노트에 적어두고 늘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고통을 이겨내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가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글귀 중 하나가 제갈량이 아들에게 보낸 배움과 수신에 관한 글입니다. 마음이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원대한 이상을 이룰 수 없다. 그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가면서, 제가 깨우친 게 있다면 인생이란 살고 가면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100년을 살다가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결국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르고 진실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련을 겪더라도 고난을 벗 삼고, 진실을 등대삼아 나아간다면, 결국 절망도 나를 단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굴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꿈으로 채워 가면서 더 큰 미래,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문화와 인문교류를 통해서 더 가까운 나라로 발전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여러분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종교플러스]

    ‘혜민스님과 템플스테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은 다음 달 5∼7일 충남 공주 태화산 전통불교문화원에서 ‘혜민스님과 함께하는 마음 치유 템플스테이’를 연다. ‘마음자리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야 하는 시간’이라는 주제의 이번 템플스테이는 혜민 스님이 온라인 묵언수행을 선언한 후 오프라인에서 청년들과 만나 소통하는 자리. ‘혜민스님의 행복한 묻고 답하기’ ‘이야기로 풀어요-대화 명상’ 등 마음속 갈등과 분노,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을 함께 찾는다. 숲길명상, 108배 등 불교문화와 전통을 익히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템플스테이 참가비 전액은 공익법인 아름다운동행에 기부한다. 농아목회자 성서지도강습회 한국베델성서연구원은 다음 달 8∼10일 경기 용인시 루터대에서 ‘제2회 농아목회자를 위한 베델성서지도자강습회’를 연다. 이 강습회는 기독교한국루터회 주최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농아목회자·성서지도자 교육과정. 올해는 농아 목회자뿐만 아니라 사모, 전도사 등 교회 관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다. 루터대학교 엄현섭·박성완 교수가 강습회를 이끌며 2명의 전문 수화통역자가 동참한다. 강의를 비롯해 숙박·숙식·교재 등 강습회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전액 무료로 진행한다. 한국카리타스 20주년 행사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해외원조 기구인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한국카리타스·이사장 김운회 주교)은 해외원조를 시작한 지 20주년을 맞아 29일 오후 2시 서울 광진구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다. 한국 카리타스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복지·재난 구호활동을 담당하는 국제카리타스 회원 기구로, 지난 20년 동안 655개 사업에 약 300억원을 지원했다. 기념행사는 김운회 주교의 주례로 봉헌되는 감사미사를 비롯해 기념식, 축하공연 및 사진전시 등으로 진행된다. (02)2279-9204.
  • [한국·베트남 수교 20주년 특집] 현지에 냉연공장… 동남아 공략기지로

    [한국·베트남 수교 20주년 특집] 현지에 냉연공장… 동남아 공략기지로

    동남아시아 가정집 10곳 중 7곳은 포스코의 스테인리스 제품을 사용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코는 지난 3월 베트남 호찌민시 인근 연짝공단에 연산 15만t 규모의 ‘포스코VST’ 스테인리스 신냉연공장을 준공하고, 12월 현재 차질 없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 냉연공장은 2010년 12월 착공 이후 1억 3000만 달러를 투자해 완공됐고, 이로써 베트남 현지 법인 포스코VST 생산 규모는 23만 5000t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2015년 압연기를 추가로 설치하게 되면 포스코VST는 연간 28만 5000t의 스테인리스 냉연제품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에 따라 포스코VST는 2011년 12월 출범한 태국의 ‘포스코타이녹스’와 함께 동남아 지역의 최대 스테인리스 냉연제품 생산업체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의 스테인리스 냉연 수요는 2012년 75만t에서 향후 연평균 8%로 고속 성장, 2015년에 95만t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는 동남아 냉연 수요의 67%를 점유하고 있는 베트남과 태국에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양국의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경쟁업체들의 동남아 시장 진출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또 한국의 포항, 중국의 장자강과 칭다오의 스테인리스 공장과 함께 동남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여기에 내년에 터키 TST 냉연공장이 준공되면 포스코는 스테인리스 냉연 제품 비율이 60% 선에서 73%까지 확대되고 중국-동남아-터키에 이르는 글로벌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준공된 신냉연공장은 세계 최고의 최신예 설비로 베트남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안정적으로 생산, 현지 수입대체 및 고용창출 등 베트남 경제 발전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사설] 흥행 좇다 물병·계란세례 부른 민주당 경선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을 지켜보노라면 왜 지금 2012년 한국 정치에 ‘안철수 바람’이 꺾일 줄 모르는지 그 이유의 일단이 읽혀진다. ‘완전국민참여경선’을 내세워 모바일 투표를 도입하고, 지역별 순회 경선 방식을 채택하며 흥행몰이에 나섰으나 양상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불안정한 모바일 투표는 지난달 첫 제주경선에서부터 비문(非문재인) 후보들의 경선 보이콧이라는 파행을 낳았고, 9일 대전·충남·세종 경선에서는 단상으로 계란과 물병이 날아들고 각 후보 지지자들이 뒤엉킨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재인 후보와 손학규·김두관·정세균 등 비문 후보들의 갈등이 위험 수위로 치달은 지 오래고,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의 동반 퇴진을 요구하는 소속 의원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문 후보가 지역순회 경선 10연승을 달리며 과반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다지만 지금의 반목과 분열이 계속되는 한 그가 최종 후보가 되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을 떠안게 돼 표심을 끌어모으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이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의 핵심 요인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졸속 경선이다. 국민 모두가 목도하듯 모바일 투표가 내포한 혼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람몰이에만 골몰한 정치공학이 분란을 자초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자강(自强) 의지의 실종이다. 안철수라는 장외주자와 연대만 하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또 다른 정치공학적 얕은 계산이 스스로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때 안철수 바람에 밀려 후보조차 내지 못했건만, 이를 수모로 인식하기는커녕 후보 단일화를 대선 승리의 또 다른 방편 정도로 생각하는 안이한 인식이 문제의 핵심이다. 민주당은 제1야당 본연의 모습을 하루속히 되찾아야 한다. 안 원장을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 제1야당의 장벽으로 인식할 때 바로 설 수 있다. ‘새누리당의 안철수 불출마 종용’ 논란 앞에서 득실을 따지느라 허둥대는 모습으론 표심을 살 수 없다. 바람몰이에 대한 유혹을 떨치고 대대적인 당 쇄신과 함께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책과 비전으로 무장해 대선에 임하기 바란다.
  • ‘빅텐트’ 전략? 安 무소속 출마? 민주당 입당?

    ‘빅텐트’ 전략? 安 무소속 출마? 민주당 입당?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보수표 결집에 맞설 야권의 대선 전략은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협공’이다. 민주당의 전통 지지층과 안 원장의 정치 기반인 중도층 표를 야권 단일후보로 수렴하는 게 최선의 전략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민주당 대선 경선이 종착점을 향하고 있고, 안 원장의 등판이 초읽기가 되면서 야권 단일 후보 논의는 현실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안 원장의 ‘입당 후 단일화 경선’은 민주당의 1순위 시나리오였다. 민주당 후보와 또 한 번의 단일화 경선을 치르며 국민적 관심을 모을 수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누가 최종 후보가 되든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굳어진 ‘불임 정당’의 오명도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높지 앞다는 게 중론이다.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 불신을 지지 동력화하고 있는 안 원장이 민심을 거스르며 ‘호랑이굴’로 들어 가겠느냐는 점이다. 또 다른 방식은 안 원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민주당 후보와 당 밖에서 단일화하는 ‘박원순 모델’이다. 이 역시 민주당 지지층 균열이 난제다. 무엇보다 정당 기반이 없는 무소속 대통령은 전례 없는 정치 실험이다. 안 원장의 선택지 중 하나가 신당 창당 등 독자 세력화를 통한 민주당과의 통합이다. 문재인 경선 후보가 거론했던 ‘공동정부론’과 민주당·안철수·시민사회가 연대하는 빅텐트 전략, 이른바 ‘시민연합정부론’과도 맥이 닿는다. 일각에서는 안 원장을 중심으로 진보와 보수, 중도를 아우르는 ‘안철수발(發) 정계개편’을 점친다. 민주당은 안 원장의 무소속 독자 출마 가능성은 낮게 본다. 박 후보와 민주당, 안 원장이 각자도생하는 3자 구도는 대선 필패라는 게 중론이다. 당의 주된 기조는 ‘자강론’(自强論)이다. 경선 선두인 문 후보와 안 원장 간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게 근거다. 지난달 29일 리서치뷰의 박근혜·안철수·문재인 3자 대결에서 문 후보는 22.7%로, 안 원장의 30.4%에 10% 포인트 이내로 바짝 붙었다. 지난 5일 리얼미터의 야권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는 문 후보는 38.1%로 안 원장(40.8%)과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 후보 확정시 문재인의 ‘컨벤션 효과’도 있다. 안 원장과의 단일화 경선이 승산있는 게임이라는 인식이다. 정치권은 대선 후보 등록일(11월 25~26일) 전후를 야권 단일화의 데드라인으로 보고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농촌진흥청, 케냐·에티오피아 농업기술 전수현장을 가다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농촌진흥청, 케냐·에티오피아 농업기술 전수현장을 가다

    2009년 이탈리아 라퀼라. G8 확대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빈곤했던 시절의 식량위기를 극복한 점을 강조해 눈길을 끈다. 그는 “내 아버지가 케냐에서 미국으로 유학 왔을 당시에 케냐는 한국보다 잘살았지만, 이후 케냐를 비롯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이 한국은 부국(富國)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의 말처럼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한국의 ‘녹색혁명’은 아프리카인들에게 가장 탐나는 발전 모델이 되고 있다. 이에 농촌진흥청이 검은 대륙에서 펼치는 농업기술 전수사업의 현장을 찾았다. 최근 케냐 직항편이 취항하면서 13시간 비행으로 한층 가까워진 아프리카. 케냐는 해발 1700m의 고산지대로 7~8월에도 아침 저녁은 물론 낮에도 쌀쌀하다. 케냐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면서도 생산성은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것을 거둬들이는 수준이다.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서쪽으로 25㎞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개발(KOPIA) 센터. 한국에서 파견된 연구원들과 현지인들이 시험 재배한 무의 수확이 한창이다. 현지인 작업반장인 찬둘라(37)씨는 어른 머리통만 한 큰 무를 손에 들고 활짝 웃으며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가서 선진 농법을 빠짐없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KOPIA는 농촌진흥청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시아·남미의 15개 개발도상국에서 농업기술을 지원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농촌진흥청 김현순 국외농업기술과장은 “한국의 씨감자와 고품질 쌀 생산기술은 물론 그린 빌리지 조성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진 연구원은 “전기·통신 등 기반시설도 부족하고, 열대성 질병과 문화적인 이질감이 있지만 우리가 선진 농업기술로 케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농촌진흥청은 우리의 ‘소 번식기술’을 아프리카에 전파해 축산발전과 농가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국제축산연구소(ILRI) 파견연구원인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의 조창연 박사는 “과학적으로 체계화된 수정란이식기술을 케냐 현지에 적용,우유와 고기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빈곤 퇴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촌진흥청은 긴 가뭄으로 메마른 아프리카에 최소한의 물로 농작물을 키울 수 있는 기술도 전수하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한국·아프리카 농식품기술 협력협의체(KAFACI)의 국가별 맞춤형 시범사업의 하나로 올해부터 에티오피아에 농경지 물 관리기술 지원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농업연수를 다녀왔던 솔로몬 아세파 에티오피아농업연구청장은 “전 국민의 8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에티오피아가 잘살 수 있도록 보다 많은 한국의 선진 농업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코피아센터 조현묵 소장은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고품질 채소 재배와 축산기술 개발이 중점사업”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유일의 6·25 참전국, 1인당 국민소득 300달러, 말라리아·에이즈·영양결핍 등으로 인한 영아사망률 세계 1위…. 아프리카 53개국 중 최빈국인 에티오피아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새로운 꽃’을 의미한다. 코피아센터 이신영 연구원은 “한국의 농업기술로 에티오피아에 ‘새로운 꽃’을 활짝 피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의 아프리카에 대한 농업원조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지원이다. 스스로 자국의 농업성장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 재현하도록 하는 새로운 사업방식이다. 박현출 농촌진흥청장은 “단순한 자원 획득이나 서구와 같은 물질 중심 원조가 아닌, 식민지와 가난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현지인들의 정신과 삶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며 “개도국 농민들의 소득을 증가시키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업”이라고 덧붙였다. 아프리카는 현재 한국의 앞선 농업기술과 경험에 목말라 하며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절대빈곤’이라는 우리의 역사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된 발전 경험이 여러 아프리카 국가에 동질감과 함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지의 검은 대륙에서 ‘농업 한류’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이다. 글 사진 케냐 나이로비·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jongwon@seoul.co.kr
  • 김정은 위상 높이려는 北… 언론들 일제히 ‘원수’ 호칭

    김정은 위상 높이려는 北… 언론들 일제히 ‘원수’ 호칭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근 ‘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은 뒤 북한 매체들이 김 제1위원장을 일제히 ‘원수’로 호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에는 최고 지도자를 원수로 호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젊은 지도자인 김정은의 호칭을 높여 위상과 권위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 조선중앙TV, 조선중앙방송, 평양방송 등 모든 매체들은 김 제1위원장이 원수 칭호를 받은 지난 18일 이후 그의 이름 뒤에 ‘동지’와 함께 ‘원수’를 대대적으로 붙여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전까지는 주로 ‘김정은 동지’ 또는 ‘김정은 최고사령관’ 등으로 호칭했다. 조선중앙방송은 26일 전승절(7월 27일) 경축행사의 자강도 전쟁노병 대표 참석 소식을 전하면서 “각 계층 근로자, 가족들이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사랑에 의해 평양으로 떠나가는 전쟁노병들을 환송했다.”고 전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민주 대선 주자들, 등판 앞둔 安을 보는 눈빛은

    민주 대선 주자들, 등판 앞둔 安을 보는 눈빛은

    범야권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9일 저서를 통해 정치 참여 의지를 표출하면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들과의 관계 설정이 주목된다.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룰을 확정하고 대선 국면으로 본격 전환하는 시점에서 안 원장의 대선 등판이 예고된 것이다. 범야권 주자 중 지지율 1위를 놓고 안 원장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문재인 상임고문 측은 대선에서 안 원장과의 연대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 고문의 캠프 내에서도 안 원장 스스로 정치적 성향을 범야권에 설정하고 있고, 정권교체에 대한 인식과 정책 비전에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판단하고 있다. 문 고문 스스로도 안 원장에 대해 “정권교체를 위해 함께해 나갈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안 원장의 출마 여부는 전적으로 안 원장의 판단이지만 정권교체가 된 이후에도 개혁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강조해 왔다. 민주당 자강론을 강조해 온 김두관 전 경남지사 측은 당내 경선 이후 안 원장과의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연대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 전 지사가 평소 가치와 정책 연대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만큼 안 원장과의 연대는 시너지 효과도 크다는 판단이다. 김 전 지사도 이날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선거에는 합종연횡과 연대가 있을 수 있고, (당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제외한 연대가 이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 고문의 공동정부론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손학규 상임고문 측은 안 원장의 정치적 행보가 당내 경선에 영향을 줄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손 고문 측 인사는 “안 원장의 대선 출마부터 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여할 뜻조차 불분명해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안 원장이 당내 경선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만큼 경선 후 안 원장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안 원장 측 유민영 대변인은 “적당한 시기에 언론간담회를 가질 계획이며 북콘서트 개최 등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행보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리먼사태보다 심각”… 세계 중앙은행 경기부양 ‘승부수’

    “리먼사태보다 심각”… 세계 중앙은행 경기부양 ‘승부수’

    경기가 좀처럼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중국과 유럽중앙은행이 일제히 금리 인하에 나섰다. 영국은 기준금리가 사실상 제로 금리나 다름없어 양적완화 규모를 늘리면서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경기부양 모드에 가세했다. 5일 중국이 채 한 달도 안 돼 또다시 기준금리를 전격 인하한 것은 중국의 경제상황이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보다 심각하다는 신호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조만간 기준금리는 물론 지급준비율을 추가로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 당국은 경제의 3대 축인 투자·소비·수출이 좀처럼 부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지난달 4년 만에 금리를 내렸지만 한창 위축된 기업들의 경제활동을 진작시켜 경기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드러나자 예상을 깨고 한달 만에 다시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HSBC가 지난달 말 발표한 중국 제조업체들의 6월 신규 수출주문지수는 45.9로 지난 2009년 3월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지난 5월 중국의 수출이 15.3% 증가하며 호전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으나 신규주문이 줄어들면서 6월 상황은 둔화될 것이 확실시된다. 소매 증가폭은 연일 둔화되고 있으며, 부동산 시장 억제 정책으로 투자도 살아나지 않고 있다. 대외경제무역대학 공공관리학원 리창안(李長安) 교수는 “중국 경제 둔화로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아 실물경제는 2008년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친황다오(秦皇島) 석탄 재고량은 연일 기록을 경신하며 가격이 8주째 연속 하락하고 있으며, 장쑤(江蘇)성 장자강(張家港)시의 한 화력발전소의 경우 최근 주 3일 휴업할 정도로 일감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금리인하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상무부 연구원 메이신위(梅新育)는 “중국이 경제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통화정책 방향을 이미 완화쪽으로 틀었다.”고 진단했다. 연내에 기준금리는 최소 1차례, 지급준비율은 3차례가량 추가 인하가 예상된다. 상황이 나빴던 지난 2008년의 경우 기준금리 인하가 9월 16일, 10월 9일, 10월 30일 등 한 달도 안 되는 간격으로 연속 세 차례 이뤄졌다. 유럽도 상황이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의 지난 5월 실업률은 11.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올해 유로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0.3%로 위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제임스 닉슨 소시에테제네랄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기준금리 인하는 현 시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그보다 예금금리를 제로로 내렸다는 것은 ECB의 경기부양책이 새 영역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예금금리를 제로로 내릴 경우 유럽 은행들은 이자 수익이 거의 없어 ECB에 자금을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기관이나 기업, 개인들에 대한 대출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대출금리 인하는 시중은행의 금리 하락으로 이어져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서울 유대근기자 jhj@seoul.co.kr
  • 민주 - 安 단일화 딜레마… 대선 주도권싸움 시작됐다

    민주 - 安 단일화 딜레마… 대선 주도권싸움 시작됐다

    민주통합당의 ‘안철수 딜레마’가 깊어지고 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 발언이 거세지는 와중에 안 원장 측이 “상처 내기”라고 반격한 건 향후 양측 모두의 정치적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입지 확대를 노리는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당내 경선이든 후보 단일화든 안 원장을 경쟁자로 상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견제론은 불가피하다. 민주당으로서도 자체 대선 후보의 경쟁력 강화 논리인 ‘자강론’이 거센 상황에서 안 원장의 전략적 모호성에 끌려가는 건 자당 후보들의 지지율 제고에도 독배가 된다. 한편으로는 안 원장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관계를 탄력적으로 설정해야 하는 민주당에는 정치적 딜레마가 된다. 현실적으로 잠재적 야권 후보인 안 원장과의 단일화 가능성은 상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원장의 대변인 격인 유민영 한림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가 지난 19일 제기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신뢰를 만든다.”,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생각하기 바란다.”는 메시지도 야권 연대를 위해 자중하라는 무언의 경고로 해석되고 있다. 유 교수는 20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내가 공보 담당으로 논평을 낸 만큼 이유가 분명히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안 원장의 의중이 실린 정치적 메시지라는 뜻이다. 안 원장 측의 속도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최근 안 원장과 만난 것으로 알려진 민주당 A 전 의원은 이날 “안 원장이 조만간 입장을 표명할 것으로 안다.”면서 “출마에 대한 안 원장의 명확한 입장이 밝혀지면 논란은 수그러들 것이다. 같이 가기 위해 다툼은 자제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리우+20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안철수 재단 발족 준비가 끝나면 입장을 밝히지 않겠느냐.”며 “남(민주당)이 이래라저래라 해서 끌려 다닐 사람이 아니고 준비가 되면 입장 표명을 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재단이 다음 달 중에 발족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민주당과 안 원장의 주도권 경쟁 측면에서는 안 원장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형국이다. 이해찬 대표는 지난 18일에 이어 이날 다시 “안 원장이 다음 달 20일까지는 민주당 입당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 스스로 안 원장에게 데드라인을 제시하며 재차 압박한 셈이다. 추미애 대선후보경선준비기획단장은 최고위원회의에서 대선 경선 룰과 관련, “런던 올림픽 시작 전인 7월 25일까지 1차 목표로 경선안을 만들겠다.”고 시한을 밝혔다. 민주당 최고위는 대통령 후보자 선출기한을 종전 대선 180일 전에서 80일 전으로 변경, 의결한 뒤 당무위원회로 회부했다. 9월 말까지 대선 후보를 내겠다는 뜻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안 원장의 독자 출마로는 대선 승리 가능성이 낮고 민주당 후보보다 지지율이 더 높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각자 판단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고 안 원장 측이 반박하고 있지만 이 대표의 발언은 안 원장에게는 정치적 입지를 제한시키는 측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적 우군으로 바라보던 안 원장에 대한 당내 인식 변화도 거세지고 있다. 민주당 대선후보경선준비기획부단장인 설훈 의원은 “대선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안 원장이 적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군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 3선 중진 의원은 “더 이상 장외에서 야권 지지표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는 건 곤란하다.”며 “안 원장이 정당 정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국가 지도자를 꿈꾼다면 민주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들어와 변화를 만드는 용기를 보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강약이나 완급의 조절이 있을 뿐 안 원장 측과 주도권 다툼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본격적으로 검증 무대에 오르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당과의 관계 설정과 대선 등판 시기, 방식 등 정치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 낼지가 안 원장의 정치적 역량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안동환·이범수·송수연기자 ipsofacto@seoul.co.kr
  •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가 19일 ‘연평해전 10년’을 앞두고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북한 해병의 증언을 소개했다.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가 2002년 6월 29일 해전 직후 취재했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평양음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장 대표는 2004년 탈북할 때까지 5년 넘게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로 일했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 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 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 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 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뢴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파편 흔적으로 보이는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 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 조끼입니다. 방탄 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 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날 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 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 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 같은 경우엔 기름 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 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 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 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 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루(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루요?” “전번 1차 때 충돌 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루를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 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 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 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분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 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 조타란 기본 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 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 조타 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 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러나 나이 든 해병들만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보게” 국장의 질문에 군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 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 지도원이 정치 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 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 우세나 함선 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 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 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 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 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 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2차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1차 교전은 진 전투였다면 2차는 이긴 전쟁’이었다며 8전대 해병들에게 감사와 선물을 보냈다. 함장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보위 지도원은 국기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다른 해병들에게도 국기 훈장 2~3급과 함께 김정일 이름이 박힌 컬러 TV가 선물로 하달됐다. 그 후 함장은 세 딸에게 아버지가 남긴 복수의 유산이란 내용을 담은 연극 ‘세 파편’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가 19일 ‘연평해전 10년’을 앞두고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북한 해병의 증언을 소개했다.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가 2002년 6월 29일 해전 직후 취재했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평양음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장 대표는 2004년 탈북할 때까지 5년 넘게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로 일했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 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 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 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 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뢴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파편 흔적으로 보이는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 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 조끼입니다. 방탄 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 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날 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 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 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 같은 경우엔 기름 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 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 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 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 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루(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루요?” “전번 1차 때 충돌 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루를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 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 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 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분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 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 조타란 기본 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 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 조타 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 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러나 나이 든 해병들만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보게” 국장의 질문에 군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 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 지도원이 정치 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 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 우세나 함선 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 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 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 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 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 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2차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1차 교전은 진 전투였다면 2차는 이긴 전쟁’이었다며 8전대 해병들에게 감사와 선물을 보냈다. 함장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보위 지도원은 국기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다른 해병들에게도 국기 훈장 2~3급과 함께 김정일 이름이 박힌 컬러 TV가 선물로 하달됐다. 그 후 함장은 세 딸에게 아버지가 남긴 복수의 유산이란 내용을 담은 연극 ‘세 파편’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일 死因은 뇌혈전”

    지난해 12월 숨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원인이 뇌혈전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17일 YTN 보도에 따르면 고(故) 김정일 위원장은 사망 당일인 지난해 12월 17일 새벽 잠에서 깨어나 자강도 현지 시찰을 강행하다 전용 열차 안에서 뇌혈전이 발생해 사망했다. 이 같은 내용은 북한이 최근 중문판으로 발간한 김정일 위원장의 최후 1년 화보집 ‘위대한 삶의 최후 1년~2011년’을 통해 알려졌다. YTN은 중국 현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4·15(김일성 주석 생일 100주년)는 다가오는데 주민에게 무엇을 해 줄까 고민하는 꿈을 꿨다. 평양 주민들은 문제가 없는 걸 직접 확인했는데 이제 제일 낙후한 자강도에 가서 4·15 준비 상황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큰 꿈’ 키워? 합쳐? 내맘 나도 몰라

    ‘큰 꿈’ 키워? 합쳐? 내맘 나도 몰라

    민주통합당 유력 대권주자들이 자강(自强·자체 대선 후보 역량 강화)이냐 인수합병(M&A·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영입 혹은 단일화)이냐를 놓고 미묘한 기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해찬 대표는 지난 11일 상임고문단과의 오찬에서 9월 중순까지 당 대선 후보를 확정한 뒤 11월 초·중순 안 원장과의 단일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안 원장과의 공동정부론까지 제기한 문재인(얼굴 위) 상임고문은 정치개혁모임 간담회에서 안 원장을 공격하면서 안 원장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자강론으로 돌아선 게 아니냐는 관측이 돌았다. 문 고문의 공동정부론을 비판한 김두관(가운데) 경남지사도 안 원장과의 10월 단일화론을 거론했다. 손학규(아래) 상임고문은 자강론자로 비쳐진다. 문 고문은 지난 12일 “제가 비교우위에 있는 것은 민주당이라는 전통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힘이 하나로 모아져 선출되면 막연한 상태의 지지와 비교할 수 없다. 저는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측근은 13일 “정권과 정치의 교체를 바라는 모든 세력이 다 같이 뭉쳐야 새누리당 후보에게 이길 수 있다. 안 원장과도 같이 가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안 원장과 함께 불신받는 기성정치의 교체를 바라는 시민의 뜻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 고문이 안 원장에게 후보를 양보해 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당내 우려를 의식한 듯 “안 원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문 고문은 정권·정치 교체의 적임자는 본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역동적으로 후보를 결정, 지지율을 올리면 자력으로 본선에서 이길 수 있고 지지율이 낮을 경우 단일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지사도 전날 “10월에도 안 원장의 지지율이 더 높으면 단일화해서 11~12월에 뛰면 된다.”고 말해 자강론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대두되자 측근들은 13일 “와전됐다. 대선 스케줄상 그때 그럴 수 있다는 얘기다. 정치를 해 본 사람이 당을 기반으로 자강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한 측근은 “당을 쇄신하고,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당의 후보를 키우고, 당의 후보가 나가면 필승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안 원장은 기본적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거머리가 득실대는 논에 맨발로 들어가 모내기 한 번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유지 중이라고 했다. 손 고문은 안 원장 조기 영입론이나 단일화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수시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현재도 경쟁력 있는 당의 후보가 있기 때문에 경선을 통해 뽑아서 열심히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안 원장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다. 미리 정치공학적으로 얘기하면 안 된다. 왜 지금부터 안철수 얘기냐.”는 입장을 갖고 있다. 손 고문 측은 자강론 자체도 스스로를 비하하고 패배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자강론은 민주당이 너무 약했을 때나 쓸 법한 말이고, 민주당은 통합 뒤 안 원장 없이도 지지율에서 새누리당을 앞선 저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대선에서 이길 충분한 자체 동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안 원장의 높은 지지율은 기성정치권에 대한 불신 때문이지 철옹성은 아니라고 말한다. 조직도 없고, 인물만 떠다니는 격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열린세상] 제국주의에 선악은 없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제국주의에 선악은 없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지난 한달간 4차례에 걸쳐 원로 사학자인 최문형 선생의 특강을 들었다. 한국연구재단 주최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였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 올바른 역사 인식의 저해 요인은 역사 연구의 쇄국화에 있다. 원인과 결과를 따로 분리해서 기술하면 그 역사는 이미 가치를 잃게 된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국제사적 시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한국 사학계에 주는 고언이 마음에 와 닿는다. 마지막 강의에서 노학자는 물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병합’을 공식 선언할 때까지 왜 5년이란 세월이 걸렸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고? 평생 학문 연구에 천착해 남다른 업적을 쌓은 석학의 일갈(一喝)이 죽비소리처럼 미몽을 깨운다. 의병의 줄기찬 저항 때문이었다는 한국 사학계의 통설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막을 힘이 없었다거나,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맺은 후 미·영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다는 우리의 통념도 틀린 것이었다. 당시 만주에 대한 기득권을 지키려 한 러시아는 일본에 여전히 버거운 존재였다. 만주 이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미국도 일본의 독식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삼키는 데 5년이나 걸린 이유는 만주 이권을 둘러싸고 러·미와의 갈등 해소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열강에게 만주에 대한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열강은 일본의 만주 지배를 막기 위한 카드로 한국을 이용했다. 우리는 외교권을 빼앗겼지만 1906년 러시아 총영사로 부임한 플란슨은 신임장을 일왕이 아닌 고종황제에게 제정했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보호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지 병합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논거였다. “대한제국의 주권 불가침을 인정하며 국제사회에서 이를 밝힐 수 있도록 대표를 초청한다.” 1907년 니콜라이 2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우리 대표를 초청했다. 그러나 그해 6월 넬리도프 러시아 대표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우리 특사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몇 달 사이에 러시아의 대유럽정책이 독일과 보조를 맞추던 것에서 영·불과 협력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일본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에서의 이해가 일본과 합치한 러시아가 수수방관하자, 일제는 고종을 폐위하고 ‘정미7조약’을 강박해 내정 관할권까지 강탈해 갔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대놓고 한국을 삼킬 수 없었다. 일본의 만주 지배를 반대하는 미국이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1909년 태프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만주 침투에 박차를 가해 ‘만주 제철도 중립화안’을 내걸고 러·일 두 나라의 만주 분할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포석에 위협을 느낀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1910년 7월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병합’을 허용했다. 독일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의 동맹국 러시아와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만주에 일본과 같은 사활이 걸린 이해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은 대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으며 그럴 능력도 없었다. 대한제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그때 열강 중 어느 하나 우리 편은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러시아도 자국의 국익을 위주로 우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침략할 능력이 있거나 없을 뿐 제국주의에 선악(善惡)은 물론 최악(最惡)·차악(次惡)도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화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은 열강의 이해가 엇갈리는 세력 각축장이라는 점이다. 주변국의 동향에 대한 위정자들의 오판과 무지가 어떤 참극을 빚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로 다가서는 오늘. 우리가 찾을 ‘징전비후’(懲前毖後)의 교훈은 자력 없이 남의 힘을 이용하는 책략만으로는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에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견실한 자강만이 우리의 번영을 지키는 방패일 터이다.
  • “동양철학 우수성 알리는데 매진”

    “동양철학 우수성 알리는데 매진”

    김정일(47) 중천철학재단 대표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영문판 철학서적을 출판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학작품의 경우 영어로 번역되는 일은 있지만 처음부터 영어로 출판된 책은 없었다. 그것도 철학분야에서는 더욱 드문 일이다. 김 박사가 출판한 영문판 철학서적의 제목은 ‘시공여인생2’(Space, Time and Life 2), 처음 출판된 책에 두 번째를 의미하는 ‘2’를 붙은 것은 이 책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김 박사의 아버지는 2008년 고인이 된 중천 김충열 전 고려대 교수로, 도올 김용옥 선생의 스승으로 더 유명하다. 김용옥 선생은 대학시절 김충열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동양학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 당시 김용옥 선생은 “김충열 교수의 노자강의 세 번째 시간에 동양 철학의 사유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는 예지라고 믿게 되면서 일생을 이 학문을 연구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충열 교수는 아시아권에서 유가와 불가, 도가를 통합하고, 감정과 이성의 융합철학을 이끌어 낸 동양철학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이런 김충열 교수가 불혹의 나이에 첫 집필한 책이 다름아닌 ‘시공여인생’이었고,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출판된 국내 첫 서적이었다. 43년의 시간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제목의 책을 출판하면서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 5살이던 김 박사는 아버지의 책 표지에 붓글씨를 직접 써 넣었다. 김 박사는 “책에 대한 발상은 아버지로부터 나왔다. 나의 아버지는 동양철학의 아버지였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며 “처음에는 철학이라는 학문과 아버지에 대한 반발도 심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철학에 대한 반발심리로 물리학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미국 유학 도중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지금에 이르게 됐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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