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장애 입양아 키우는 신주련씨
장애인들에게 척박한 이 땅에 한떨기 들꽃처럼 피어난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장애 입양아를 키우는 신주련씨(40).
그는 우리시대의 ‘천사’다.신씨는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다.너무 힘들어 지칠 때도 많다.그러나신앙과 사랑의 힘으로 고단한 삶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그의 사랑으로 아이는 이제 방끗 웃을 수 있다.그는 탐욕의세상에 사랑의 위대함을 전파하고 있다.그의 사랑은 세상을 바꿀 큰 힘은 아닐지 모른다.그러나 그의 사랑은 큰 감동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신씨를 4월 중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운영하는 일산병원에서 만났다.입양 딸인 아영이는 14개월째의 선천성 뇌기형 아기.아영이는 엄마품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웃는 아이를 내려다 보는 신씨의 얼굴도 아이만큼 맑았다.
아영이를 입양한후 병원이 그의 ‘집’이 됐다.많은 병원을 전전해야만 했다.본격적인 재활치료를 위해 1월10일부터 2월13일까지 세브란스 소아재활병동에 입원했었다.3월7일부터 4월14일까지는 일산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지금대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다.그가 집으로 돌아오며 온 가족이 오랜만에 다시 모였다.부산 이모집에 있던 딸 하영이도 집으로 돌아왔다.신씨의 가족은 다섯 식구.남편 전순걸씨(40),자신이 낳은 삼천중학교 1학년인 아들 현찬이,네살짜리 입양 딸 하영이 그리고 아영이.
하영이는 지난 98년 5월 IMF경제위기 때 파산가정으로부터 입양했다.
신씨 가족은 오랜만에 단란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그러나 가족들은 그 단란함이 길지 않음을 잘 안다.아영이가 5월7일 일산병원에 다시 입원해야 하기 때문이다.하영이는 다시 부산에 있는 이모집으로 가야한다.많은 사람들이 5월의 봄을 즐길 때 신씨 가족은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헤어짐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힘겨운 슬픔이다.대전에는 다시 아들과 남편만이 남게된다.남편은 대전에 있는 홍인호텔에서 경리를 맡고 있다.
가족들은 홀로 떠나야 하는 하영이와의 헤어짐을 특히 안쓰러워한다.이모네 있을 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하고 싶지만 참는단다.전화를 하면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라며 울까봐 전화를 못할 때가 많다고 한다.그 말을하는 신씨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현찬이에게 따뜻한 밥을 제대로 챙겨줄 수 없는 것도 가슴아픈 일입니다”라고 말할 때도 눈물이 고였다.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여러번 눈물을 글썽였다.그 눈물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듯했다.그래도 아영이가 웃을 때는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돌아왔다.
아영이가 신씨 가정에 입양된 것은 2000년 3월.아영이는미혼모의 아이였다.34주만에 태어난 미숙아로 몸무게는 2.
4kg.아영이는 처음부터 힘들었다.너무 많이 울어 이웃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많은 불평을 들어야 했다.눈도 사시고,숨도 몰아쉬고,몸도 뻣뻣하고,잠도 안자고….아영이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너무 힘들었다고 신씨는 말한다.여러병원을 다녔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입양한지 7개월이지난 지난해 10월에야 정밀검사결과 선천성 뇌기형임이 밝혀졌다.병원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그 말을 듣는순간 앞이 캄캄했습니다.집에 돌아와서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주위에서 포기하라는 말을 많이했다고 한다.친정 어머니의 ‘간절한 설득’이 특히 가슴을 아리게 했다.어머니에게 “저 생각하지 말고 엄마 편한대로 살아가면 안돼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그때 “너는 네 아이 때문에울지만 나는 내 딸인 너 때문에 운다”는 어머니의 말을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은 아직도 심하다.우리는 지금 적지않은 장애아들이 버려지는 황량한 세상에 살고있다.장애아란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사람까지 있다.장애인들에게는 너무나 척박한 우리 사회에서 장애아를 입양하여 키우는 신씨 부부는 어떤 사람일까.그들은 어릴 때부터 특별난 사람들은 아니었다.신씨는 고향인 부산의선화여상을 졸업하고 81년 은행에 들어가면서부터 사회봉사에 눈을 떴다.부산 조흥은행 동료들과 봉사활동을 하며‘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여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재활원·고아원 등을 다니며 그들에게 밥도 먹여주고몸도 닦아주고 함께 어울려 놀았다.그것이 즐거웠고 작은행복이었다.그러던 중 여동생 남자친구의 소개로 지금의남편을 만났다.그때 남편은 경성대 3학년이었다.남편도 청년시절부터 교회 봉사활동을 많이 해왔다.그들은 87년 9월 결혼했다.남편의 직장을 따라 대전으로 왔다.
그들은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는데까지 입양하자고 약속했다.봉사활동을 통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너무많음을 알았다.IMF 경제위기때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는 것을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알고 괴로웠다.‘입으로만 입양한다고 했지 행동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들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로 했다.그들의 아름다운 꿈은 하영이의 입양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아영이는 그들의 두번째 꿈이다.
아영이는 너무나 힘겹게 자라고 있지만 신씨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신씨는 재활치료를 받으며 아영이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늦었지만 앞니가 두개나 났다”고 자랑하는 신씨는 행복해 보였다.
그래도 힘들 때가 많다.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겨우 먹고 사는 정도다.경제적 여유도 없으며 장애 입양아를 키우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신씨는 너무나간단하게 말한다.“신앙과 사랑입니다.”말은 간단하지만 실천은 보통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많은 희생의 연속이다.
신씨도 보통사람들의 편한 생활을 동경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편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저도 사람인걸요.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크게 쓰기 위해 선택했다고 받아드립니다.그것은 저에게 축복이죠.”신씨의 얼굴에 경건함이 스쳐 지나간다.
신씨 부부와 아영이는 지난 4월7일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롯데호텔에서 한국을 방문중인 애덤 킹(한국이름오인호)과 그의 미국인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그때 애덤킹의 아버지는 앨범 속의 입양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신씨부부에게 말했다고 한다.신씨는 그 ‘행복’을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다리도 없고 손가락도 네개밖에 없는 애덤 킹이 티타늄 다리로 우뚝 서 희망의 볼을 던지는 밝은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나도 아영이를 저렇게 당당하게 키워야겠다고 다짐했죠.” 애덤 킹은 한국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그러나많은 장애인들이 외국으로 입양돼 가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도 함께 보여주었다.한국사람들은 장애아 입양을 무척 꺼린다.신씨 부부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조금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이고 있다.
신씨는 “시간이 흘렀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도 정성껏 아영이를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한국입양홍보회 홈페이지(www.mpak.co.kr)에는 아영이의 쾌유를 기원하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그러나 아영이의 미래는 사실 불투명하다.
어느 정도까지 나을지 알 수 없다.병원비도 걱정이다.지금까지는 한국입양홍보회를 비롯한 여러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다.그러나 아영이의 밝게 웃는 모습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신씨 부부는 장애아들도 사랑의 보살핌을 받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산 이창순편집위원 cslee@.
*장애아 입양 현실.
우리나라의 장애아 입양 현실은 너무나 부끄럽다.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00년 장애아 국내 입양은 전체 국내입양 1,686명중 1.07%인 18명이었다.같은해 장애아 해외입양은 전체 해외입양 2,360명 중 26.8%인 634명이었다.그나마 조금 다행인 것은 최근 국내 장애아 입양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다.
98년에는 전체 국내입양 2,289명중 장애아는 0.26%인 6명에 지나지 않았다.같은해 해외입양은 2,443명이었으며 그중 장애아는 917명이었다.99년에는 전체 국내 입양 2,492명중 장애아는 0.56%인 14명이었다.같은해 전체 해외입양2,409명중 장애아 입양은 825명이었다.
장애아 입양 가정에는 월 20만원의 생활비와 연 40만원까지의 의료비가 지원된다.그러나 장애아들은 병원 치료가필요한 경우가 많아 정부지원액은 크게 모자란다고 입양가정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