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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겨여왕’ 김연아,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 대기록

    ‘피겨여왕’ 김연아,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 대기록

    피겨여왕 김연아(24)가 올포디움을 기록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해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 최초로 올포디움의 영예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시니어 대회 결과로 여부를 결정하지만 김연아의 경우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서 모두 입상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연아, 여자 피겨 역사 최초로.. “역시 퀸”

    김연아, 여자 피겨 역사 최초로.. “역시 퀸”

    피겨여왕 김연아(24)가 올포디움을 기록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해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 최초로 올포디움의 영예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시니어 대회 결과로 여부를 결정하지만 김연아의 경우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서 모두 입상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연아 올포디움, 3위 아래로 내려간 적 없어 ‘피겨 여왕의 위엄’

    피겨여왕 김연아(24)가 올포디움을 기록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해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 최초로 올포디움의 영예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시니어 대회 결과로 여부를 결정하지만 김연아의 경우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서 모두 입상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女연예인 출신 프로 카레이서 1호 이화선씨

    [김문이 만난사람] 女연예인 출신 프로 카레이서 1호 이화선씨

    인간의 본능 중 가장 역동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마 ‘질주본능’일 것이다. 두 발로 달리든, 아니면 두 바퀴 자전거나 오토바이, 그리고 네 바퀴 자동차를 이용해 달리든, 그 내면의 본능을 표출하는 것은 무궁무진하지 않을까. 특히 오늘날 스포츠에서 ‘스피드’는 승패를 가름하며 그 결과에 따라 웃고 울게 하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다. 이러한 질주본능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이화선(34)씨는 10년 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레이싱계에 입문했다. 2000년 슈퍼모델 대회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TV 예능프로그램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길을 걸었다. 그러던 2004년 갑자기 레이싱 대회의 헬멧을 쓰고 떡 하니 나타나 주목을 끌었다. 여성으로서는 험난한 길이기에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았고 연습 도중 몇 차례나 자동차가 뒤집어지는 대형 사고가 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포기하지 않고 강한 승부근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2009년에는 여자 연예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연봉을 받는 프로 레이서가 돼 또 한번 화제가 됐다. 그 해 ‘CJ 오 슈퍼레이스챔피언십 1600클래스 5전’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시합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면서 ‘레이싱계의 꽃’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다. 2011년에는 여자 연예인 최초로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땄고 매년 문인화를 그려 전시회에 참가하는 등 화가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연예와 스포츠, 그리고 예술 방면에서 끼를 맘껏 발산하는 이씨를 지난 20일 소속(CJ레이싱팀) 캠프가 있는 경기도 용인에서 만났다. 먼저 카레이서 생활 10년의 소감을 말한다. “벌써 10년이 됐네요. 물론 즐거운 날들이었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생각해 보니 풋풋한 여자 나이 24살에 많은 남자들 틈에 들어가 20대를 거침없이 질주했네요. 제가 입문할 때에는 여자 레이서가 없었어요. 지금은 여러 명 되는데 제가 가장 언니랍니다. 후배 지원자들은 저를 멘토처럼 생각하며 (레이싱계에)들어오는 것 같아요. 여자 레이서로서 길을 닦았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뿌듯하지요.” 10년 동안 레이서 생활을 하면서 지루하게 여긴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레이싱의 매력에 빠져든다고 했다. 프로가 된 후에는 승부근성이 더 강해졌고 시합 때면 공격적인 질주본능이 저절로 생겨난다며 웃는다. 2011년에 당했던 아찔한 사고를 잠시 회고한다. 태백 레이싱파크에서 열린 대회였다. 당시 상대 선수 자동차와 추돌한 뒤 둘 다 공중으로 뜨면서 차가 완전히 뒤집혔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이씨는 침착하게 벨트를 풀고 빠져나왔다. 상대 선수는 기절했다가 이씨가 괜찮으냐고 하자 그때야 깨어났다. “처음에는 무서울 것 같았지만 사고를 경험을 하고 나서는 오히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차는 엉망이 됐지만 말이죠. 서킷에서 코너를 돌 때 상대 차가 제 차를 벽으로 몰아붙여 사고 위험도 많았지요. 그럴수록 스포츠맨십을 발휘해서 성질 죽이고 침착하게 핸들을 잡곤 합니다.” 어떻게 해서 카레이서가 됐을까. 2004년 10월이다. 이씨는 스피드웨이가 있는 용인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탤런트 겸 카레이서로 활동하는 이세창씨가 이씨에게 자동차 경주시합이 있으니 구경을 오라고 했다. 평소 둘은 오빠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고 이세창씨는 카레이서 연예인팀(류시원, 김진표, 안재모 등)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이씨는 자동차 경주시합을 보고 단박에 흥미를 느꼈다. 며칠 뒤였다. 정식 시합이 아닌 이벤트 경주가 용인에서 열렸는데 규칙 중 하나가 팀당 여자 연예인 드라이버를 한 명씩 가담시키는 것이었다. 이세창씨의 권유를 받은 이씨는 주저할 것 없이 1998년에 취득한 면허증(장롱면허)을 꺼내 들고 출전하게 됐다. 그는 이때 시합 이틀 전 첫 연습 트랙에서 사고를 쳤다. 코너를 막 도는 순간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 페달을 밟아 1.5m높이의 펜스에 부딪히면서 밖으로 나가떨어졌던 것. 차는 다 망가졌고 팀에서 부랴부랴 차를 고친 다음 겨우 시합에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이씨는 데뷔할 때부터 요란을 떨었다. 이후 2005년부터 매년 9회 정도 출전하면서 카레이서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지금까지 공인 경기 출전만 32회(비공인 포함 40회)로 국내 여성 드라이버 중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정말 후회를 한번도 안 했을까. “아마추어 시절에는 경기 때마다 엄마가 구경 오셨어요. 2006년 한 시합 때 전복사고가 났습니다. 119구급차가 급히 오고 그랬는데 저는 멀쩡했거든요. 이때 엄마가 위험하다며 레이싱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그 해에 일반 도로에서 신호를 위반한 차 때문에 접촉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고수’가 있는가 싶어 2007년 한 해는 출전을 안 했습니다. 그때도 카레이서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어요.” 1년 동안 쉬면서도 시합장에 꾸준히 나가 구경을 했고 또한 틈틈이 연습을 하면서 스피드 감각을 유지했다. 이듬해 열린 ‘2008 RV챔피언십’에 출전해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고 내친김에 2009년 프로로 전향을 하게 됐다. 그는 레이싱계에서 겁없는 질주본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담력 또한 선천적으로 강한 편이다. 일반 도로를 주행할 때 사고 직전의 위기에 부닥치면 대부분의 여성 드라이버들은 깜짝 놀라 무척 당황하지만 그는 ‘어, 사고 날 뻔 했구나’ 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가 처음 레이서가 되려고 했을 때 집에서 반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남자 같은 담력이 더 거칠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일반 도로에서 속도를 얼마까지 내봤느냐고 슬쩍 물어보자 약간 망설이더니 “아무도 없을 때 잠깐 시속 260㎞까지 밟아봤다”고 대답했다. 이어 “주변에 제 차를 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되도록 잘 안 태워주려고 한다”면서 “가끔 카레이서의 차를 탔다며 속도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수록 어린이가 탄 것처럼 천천히 운전한다. 카레이서로서 책임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는 어릴 때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좋아했다. 그래서 예술고나 미술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초등학생 때에는 부모와 함께 거의 매주 관악산에 오를 만큼 산을 좋아했고 그럴수록 도전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그만큼 꿈도 많았다. 한참 동안은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집안 친척들 가운데 공무원이 많아 의사의 꿈을 접고 국정원에 들어가려고 했다. 은밀하지만 활동적인 공무원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대학 진학할 때에는 중앙부처 경제직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숙명여대 경제학과를 택했다. 한참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대학 3학년 때 아는 언니가 “우리 모델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라는 말에 솔깃했다. 얼마 후 모델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 등에 출연하다가 이세창씨의 권유로 카레이서로 변신을 하면서 인생의 진로가 확 바뀌게 됐던 것이다. 아울러 2011년 경비행기 자격증을 취득해 5시간 동안 단독비행을 경험했으며 안산국제항공전에서 MC를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연예인 하정우, 구혜선 등과 같이 매년 그룹전을 통해 그림솜씨를 과시하고 있다. 내년에는 개인전을 열 계획이며 이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지인들한테 직접 그리고 쓴 서화 연하장을 보낼 정도로 애정과 열정을 쏟고 있다. 멈출 줄 모르는 그의 끼는 올해에도 계속된다. 요트 자격증을 딸 예정이며 레이서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계속 써나갈 계획이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세상 모든 형태는 인연으로 생긴다는 ‘색즉시공’을 잠시 언급하다가 “나이 30대는 20대보다 훨씬 좋다. 나이가 주는 여유가 점점 생겨난다. 인생은 길며 차근차근 해나가겠다”고 대답한다. “인간 이화선의 0순위는 사람 냄새 나게 살고 후회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호가 하나 생겼어요. 여목(如木)입니다. 뿌리는 한 곳에 두고 가지는 햇빛을 향해 뻗는다는 뜻이지요.” 그는 아직 미혼이다. 어떤 상대를 원할까. 생각의 폭이 넓고 고집이 센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남자면 좋겠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언제까지 카레이서 생활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학교 다닐 때 달리기 선수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다리로 달리는 것도 좋고 온종일 차를 타고 달려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차에서 먹고 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질주는 타고난 본능인 것 같아요. 오는 4월 19일 인제 경기장에서 시합 있으니 보러오세요(웃음).” 경찰공무원이었던 부친이 몇해 전 세상을 떠나자 이씨가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 셋이서 함께 살고 있으며 휴일 TV 요리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머니가 막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면 이씨는 곧바로 어머니 손을 잡고 춘천으로 훌쩍 떠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화선 프로 카레이서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문여고 재학 때 가수 이효리와 같은 반에서 생활했으며 숙명여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한국슈퍼모델대회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진출했다. TV 드라마 ‘골뱅이’(SBS, 2000년), ‘쌍둥이네’(SBS, 2001년), ‘조선에서 왔소이다’(MBC, 2004년), ‘포도밭 그 사나이’(KBS, 2006년), ‘세 남자’(tvN, 2009년) 등에 출연했다. 영화 ‘색즉시공 시즌 2’(2007년) 등에도 출연했다. 2004년 카레이서에 입문했으며 2009년 프로로 전향했다. 국내 여성 드라이버 중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 (공인경기 32회)하고 있다. 2004년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 5전(5라운드라는 뜻) 1위, 2007년 클릭 스피드 페스티벌 챌린지 영클래스 1전 우승, 2009년 CJ 오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1600클래스 5전 2위, 2012년 헬로모바일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벤투스클래스 1전 5위 등을 차지했다. 2008년 제16회 춘사대상영화제 신인여우상, 2011년 한국모터스포츠어워드 헤드그렌 인기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CJ레이싱팀에 소속돼 있으면서 사단법인 한국모델협회 지도위원과 슈퍼모델 수상자들 모임인 ‘아름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 김연아, 여자 피겨 역사상 최초로..

    김연아, 여자 피겨 역사상 최초로..

    피겨여왕 김연아(24)가 올포디움을 기록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해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 최초로 올포디움의 영예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시니어 대회 결과로 여부를 결정하지만 김연아의 경우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서 모두 입상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연아, 여자 피겨에 역사적 기록 남기고 퇴장

    피겨여왕 김연아(24)가 올포디움을 기록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해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 최초로 올포디움의 영예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시니어 대회 결과로 여부를 결정하지만 김연아의 경우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서 모두 입상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연아, 피겨에 역사적 기록 남기다

    피겨여왕 김연아(24)가 올포디움을 기록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 입상해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 최초로 올포디움의 영예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시니어 대회 결과로 여부를 결정하지만 김연아의 경우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서 모두 입상해 더욱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연아, 女피겨 역사상 최초 ‘올포디움’…주니어까지 석권

    김연아, 女피겨 역사상 최초 ‘올포디움’…주니어까지 석권

    김연아가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최초로 올포디움(All Podium)을 달성했다. 김연아는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경기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대회 결과로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팅 100년 역사상 여자 싱글부문에서 최초로 올포디움을 달성했다. 올포디움이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내에 입상하는 것을 뜻한다. 올포디움은 1960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캐롤 헤이스가 최초로 기록했다고 알려졌으나 1953년 세계 선수권에서 4위를 한 기록이 발견돼 김연아가 단독이자 최초로 올포디움을 기록한 여자 피겨 선수가 됐다. 또한 피겨계의 올포디움은 시니어 출전대회만 놓고 집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연아는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를 통틀어서 올포디움을 기록해 눈길을 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고향미소 담은 이 사진… 발길 붙잡네요

    고향미소 담은 이 사진… 발길 붙잡네요

    “우리 할머니는 91세예요. 약간 치매가 있으시고요. 그리고 아침마다 소 밥을 주세요. 설날이 돼서 막내 고모도 오시고 가족사진 찍자고 집 앞마당으로 나가니 소도 찍어야 하신답니다. 할머니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전문가가 찍은 세련된 사진은 아니다. 투박하지만 시골의 정취와 가족 사랑이 한껏 묻어난다. 명절날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 할머니가 애지중지 여기는 소까지 등장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성북구 허미라 주무관이 ‘성북직원 가족사랑 사진전’에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다음 달 23일까지 열리는 사진전이 주민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올해 ‘효도 성북’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 구가 일상 생활에서 효 실천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한 사진전이다. 집안 어른과 함께 정겹고 행복한 가족 모습을 담거나 어르신 행복 도시 성북 이미지를 표현한 사진을 접수했다. 출품된 79점 가운데 심사를 통해 입상작 39점을 선정했다. 입상작과 출품작 모두 구청 현관에 마련된 특설 게시판에 걸려 주민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앞으로도 구는 백일장과 수기, 부모에게 쓰는 편지 공모 등 효 사상을 고취할 수 있는 문화 행사를 꾸준히 열 계획이다. 특히 주민 대상으로는 ‘효도 성북’을 위한 3대 실천 과제를 공모하는 등 민관이 함께 노력할 예정이다. 김영배 구청장은 “이번 사진전이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올바른 노인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포토]율리아 리프니츠카야 넘어지는 순간 ‘와장창’

    김연아를 위협할 ‘신성’으로 꼽히던 러시아의 율리야 리프니츠카야(16)가 기대 이하의 성적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리프니츠카야는 20일(한국시간)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65.23점을 얻는데 그쳤다. 앞서 김연아가 기록한 74.92점보다 9.69점이나 낮은 점수를 받으며 5위에 머물렀다. 경기를 마친 뒤 리프니츠카야는 “잘 준비했고 긴장이나 압박감도 없었는데다 관중도 나를 도왔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면서 실망감을 내비쳤다. 단체전에서 대담한 연기를 펼치며 러시아가 금메달을 따내는 데 큰 역할을 한 그는 이날 러시아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남자 싱글에서 ‘피겨 황제’ 예브게니 플류셴코(31)가 기권해 금메달을 수확하지 못한 데다 전날에는 남자 아이스하키 8강에서 러시아가 충격패를 당해 리프니츠카야의 선전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리프니츠카야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듯 트리플 플립에서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리프니츠카야는 “슬프다. 점프가 좋지 못했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이어 “점수가 예상했던 것만큼 낮지는 않았다”면서 “아직 메달을 경쟁을 할 수 있다”며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에테리 투트베리드제 코치는 “기술적인 실수였고 입상권에 가까운 성적을 거뒀다”면서 “리프니츠카야는 ‘아이’가 아니라 ‘선수’”라며 중압감을 이겨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우리 전통 화법 중에 ‘낙화’(畵)라는 것이 있다. 화선지, 나무, 천, 가죽 등의 재료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글씨와 문양을 그려 넣는다. 붓이 아닌 인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화와 공예의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그 맥을 잇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서 일반인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낙화를 그리려면 고도의 수련과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따라서 끊임없는 장인정신으로 달궈진 예술 혼이 아니면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와 끊임없는 정진이 요구된다. 지난 13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25번 국도를 따라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가 누청삼거리 부근에 버섯 모양의 집 두 동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었다. 한 집은 ‘청목화랑’이고 다른 한 집은 ‘낙화 체험장’이다. 먼저 ‘청목화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8m 길이의 12폭 병풍 ‘낙화강산무진도’(畵江山無盡圖)가 떡하니 진열돼 있었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를 전통 낙화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정조, 순조 때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작품인 ‘강산무진도’는 조선 회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대 걸작 중의 하나다. ‘어떻게 이런 대작을 인두로 다 그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몇 발자국 옮기자 종이가 아닌 나무에 직접 그린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낙화산수도, 사군자, 연과 버들 등 여러 그림들이 앙증맞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합해서 모두 100여점이다. 김영조(64)씨는 국내 유일의 전통 낙화장인(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이다. 22세 때 낙화에 입문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전통 낙화의 맥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명감으로 42년째 낙화 인생의 길을 오롯이 걸어오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일까. 그가 오는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해 한국 낙화의 전통미를 한껏 알릴 예정이다. 그토록 소망했던 우리의 전통 낙화가 처음으로 외국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하여 김씨는 어느 때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화랑 옆에 있는 작업실에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예술도시 아솔로에서 5월 한 달간 열립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조직위원회에서 초청하는 전문작가들만 참가한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낙화가 그들과 함께 세계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애지중지 여기는 작품 7점을 엄선해 전시할 예정이다.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낙화 기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까지 시연할 예정이다. 그가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지난해 9월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탈리아 작가와 에이전시들이 전시된 낙화와 대작을 시연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그를 초청했다. 불에 달군 인두로 그려도 타지 않고, 특유의 원근법으로 살아 있는 산수화를 잘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낙화는 중국과 한국에만 있는데 특히 한국의 낙화를 더 알아줍니다. 예술성이 높아 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지요. 이번 아솔로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인 낙화 예술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겠습니다.” 낙화 전수자인 그의 딸 유진씨도 동행해 비엔날레 현장에서 함께 시연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낙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면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에 낙화와 관련해 1598년에 태어난 정부인 장씨를 언급하고 있어 문헌상으로는 400년 역사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822년쯤 밀양 박씨 박창규가 임금님 앞에 가서 시연할 정도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장안 양반집에 낙화 그림이 한 점씩은 대부분 있었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김씨의 스승은 일제강점기 때 활발히 활동했던 운포 백학기와 설봉 최성수의 계보를 잇는 전원 전창진이다. 전원은 1972년 서울 종로에서 한국낙화연구소를 차려 낙화를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출판업으로 전향했다. 당시 전원의 제자가 여러 명 있었으나 김씨가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맥을 잇고 있다. 김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충북의 천도교 책임자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정치에 관심이 많아 27세 때 부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을 졌다. 이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김씨 가족은 서울 뚝섬 쪽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당시 서울시가 무허가촌에 살고 있는 시민을 강제로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장남인 김씨가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원래 김씨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곧바로 종이를 사다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를 도와 바느질도 곧잘 했다. 지금의 예능적 끼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중학교 때에는 동양화를 좋아해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런 김씨를 보고 미술 선생도 미술분야로 진로를 정해 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꿈을 접고 취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알아보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낙화연구생 모집’이라는 신문광고를 보게 됐다. 이게 뭘까. 그때만 해도 낙화라는 말이 생소했다. 그러나 그림도 배울 수 있고 취업도 보장된다는 내용에 곧바로 모집광고를 낸 종로에 있는 한국낙화연구소로 달려갔다. “그때 장교빌딩 5층에 학원(낙화연구소)이 있었지요. 30여명의 수강생들에게 낙화를 가르치는 전창진 선생님의 모습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마음이 금방 끌리더군요. 처음에는 아주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는 집이 성남이라 낙화연구소에서 기숙하며 열심히 배웠다. 스승이 그려준 낙화를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그렸다. 낙화의 소재는 주로 동양화에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사군자로 시작해 나중에는 꽃과 새, 산수, 인물 등을 배워 나갔다. 잠 잘 시간을 줄여가며 낙화에 몰두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낙화연구소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30명이 넘던 수강생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김씨는 남아 있는 낙화연구소 수강생 5명과 함께 종로2가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합숙을 하며 낙화를 연습했다. 나중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제작과 판매를 하며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혼자 남게 된 그는 기념품을 제작해 전국 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판매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던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 100여점을 풀어놨는데 10여점이 팔렸다. 이어 속리산 입구에 기념품 상점을 열었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기념품을 팔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동안 소망했던 일, 즉 자신의 공방을 열어 본격적으로 전통 낙화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에 가서 전통회화를 감상하고 연구를 했다. 회화와 도록에 나와 있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무에 낙()을 하는 기술과 종이에 낙을 하는 기술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두의 온도가 적당하고 손놀림이 빨라야 종이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두의 열로 그림과 선의 음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반복된 노력 끝에 마음대로 종이에 낙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게 됐다. 그는 2007년부터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 10여 차례 수상을 하게 됐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김씨의 낙화기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것을 권했다. 결국 심사과정을 거쳐 2010년 10월에 지정됐다. 그동안 그린 낙화는 수천점에 이른다. 외국인들에게는 그의 산수화와 마애불이 특히 인기가 높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을 국내외에 꾸준히 선보이고 후진 양성에 진력해 예술적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영조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낙화에 입문했다.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79년 청목화랑을 개원했다. 2010년에 충북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장으로 지정됐으며 현재 한국 낙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국내외 활동 이력으로는 일본 궁기현(宮岐縣) 낙화전(2003년), 인도 세계공예심포지엄 워크숍 참가(2012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통공예작가 워크숍 참가(2013년) 등이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선(2007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입선(2008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2009년) 등이다.
  • 씨티은행도 180억 대출사기 당해

    KT ENS 협력업체의 수천억원대 대출 사기로 금융권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한국씨티은행도 수백억원대의 대출 사기를 당한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아직까지는 추가 피해를 당한 금융사가 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금융 당국은 모든 금융사에 매출채권 실태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는 등 긴급 점검에 나섰다. 금융권에 따르면 씨티은행은 삼성전자 중국 현지 법인의 납품 업체인 디지텍시스템스가 매출채권 등을 일부 위조해 1700만 달러(180억원)를 허위 대출한 혐의로 최근 검찰에 고발했다. 이는 KT ENS와는 별개의 사건이지만 매출채권 등을 위조했다는 점에서 사기 수법은 비슷해 보인다.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디지텍시스템스는 삼성전자 중국 법인 2곳에 모바일용 터치패널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 업체다. 해외 매출채권 팩토링(수출 기업이 채권을 금융사에 양도하고 대출받아 수출대금을 현금화하는 기법)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선적서 등 관련 서류를 일부 위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대출 원리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씨티은행이 삼성전자 중국 법인과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위조 혐의가 드러났다”고 전했다. 씨티은행이 대출 사기를 당한 해외 매출채권 팩토링은 국내 기업들이 납품대금을 현금화하는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과 흡사한 구조다. 이런 팩토링이나 신용장(LC) 기반 무역거래는 해외 수입상의 신용도나 매출채권의 진위를 파악하는 게 국내 납품거래보다 어려워 조사과정에서 연루 금융사가 더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 올림픽 3연패 실패 “엉덩방아 너무 아쉽다”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 올림픽 3연패 실패 “엉덩방아 너무 아쉽다”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 “엉덩방아 너무 아쉽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혔지만 끝내 입상권 문턱을 넘지 못한 비운의 스타들이 속출했다. 12일(한국시간) 러시아 소치의 쿠토르 익스트림파크에서 열린 스노보드 남자 하프파이프의 최대 이변은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28·미국)의 부진이었다. 숀 화이트는 2006년 토리노,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하프파이프 2연패를 달성하는 등 10년 넘게 이 종목을 지배했다. ’스노보드 황제’로 불리는 숀 화이트는 올림픽 3연패 기대와 함께 소치 올림픽을 빛낼 최고 스타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많이 달랐다. 예선 1위로 신나게 결승에 나갈 때까지는 좋았으나 결승 1차 시기에서 거푸 엉덩방아를 찧는 통에 최종 4위에 머물렀다. 숀 화이트는 1차 시기에서 11위로 밀려 메달권 진입을 위한 2차 시기에 안정적 플레이에 치중했다. 숀 화이트는 결과적으로 엉덩방아 탓에 공들여 준비한 고난도 신기술을 보여주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네티즌들은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도 어쩔 수 없네”,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 3연패 못해서 너무 아쉽다”, “스노보드 황제 숀화이트, 나도 기대했는데 아깝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민식 사진 갤러리’ 새달 문연다

    ‘최민식 사진 갤러리’ 새달 문연다

    부산 서구 아미동 산복도로에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 선생의 사진 갤러리가 들어선다. 부산시는 주민복합문화공간인 ‘아미 문화학습관’ 2층에 최민식 작가 사진갤러리를 만들어 다음 달 말 개관한다고 11일 밝혔다. 아미 문화학습관은 시가 2012년부터 시행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2차 연도 사업 핵심 시설이다. 시비 12억원이 투입돼 지하 1층, 지상 3층 전체 면적 410.52㎡ 규모로 지난해 12월 말에 준공됐다. 최민식 작가는 ‘인간’(Human)이란 주제로 서민의 고단한 삶과 힘없고 소외된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962년 타이완국제사진전에서 처음 입선한 뒤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 20여개국의 사진공모전에서 220점이 입상, 입선되는 등 그의 사진은 세계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68년 개인사진집 ‘휴먼’ 제1집을 낸 이후 2010년 제14집을 출간하기까지 열정적으로 사진 작업에 몰두했다. 사진갤러리에는 생전의 뜻에 따라 유족이 제공한 유품과 국가기록원에 소장 중인 1960~1970년대 서민 생활상이 담긴 희귀 작품이 전시되고 작가 일대기와 사진 영상도 상영될 예정이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이전의 나를 버렸다…‘낭만주의’ 임동혁 잠시 접어둡니다

    이전의 나를 버렸다…‘낭만주의’ 임동혁 잠시 접어둡니다

    “‘얘가 왜 이걸 친다는 거지?’ 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임동혁 하면 늘 ‘낭만주의, 쇼팽’이라는 관객들의 오해에 도전하려고요. 제 스스로를 세게 ‘테스트’하는 무대인 셈이죠.”(웃음) 지난 5일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전화를 받은 피아니스트 임동혁(30)의 목소리는 자정을 넘긴 시간인데도 활기가 넘쳐났다. “내가 지닌 자질과 원하는 것이 너무 달라 괴리감이 컸다”는 고백과는 대조적인 톤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속도감 있게 건너온 몇 마디에 그가 내적 분투 끝에 뭔가 방향을 잡았다는 사실이 직감됐다. 2년 만의 국내 리사이틀 무대를 “이전의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곡들로 채운다”고 말한 것도 그랬다. 드뷔시의 ‘달빛’, 바흐의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등이다. 오는 18일 서울 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전국 7개 도시에서 이어질 독주회에서 치열한 고민만큼 더 단단히 여물어진 그의 타건을 확인할 수 있다. “임동혁은 낭만주의 곡만 어울린다는 오해가 많았어요. 감정이 풍부하고 자유롭게 노래하듯 치는 게 제 스타일이니까요. 그러니 긴장감과 절제력이 필요한 베토벤을 칠 때면 무대 위에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정확한 연주를 하려면 무대 위에선 강심장이어야 해요. 하지만 무대에만 올라가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무대 공포증’을 지닌 저로선 힘든 일이었죠.” 2003~2007년 세계 3대 콩쿠르(퀸엘리자베스·쇼팽·차이콥스키)를 모두 휩쓸며 ‘신동’으로 불려온 피아니스트가 무대 공포증이라니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는 “피아노는 알면 알수록 어렵고, 나 자신에게 바라는 게 많아지더라”고 했다. 음악 얘기는 절대 나누지 않았던 그가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차 있었는데, 요즘엔 곡 하나를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내 안의 나’와 매일 싸워요. 내가 갖고 있는 걸로만 먹고살려니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거죠.” 그의 고민을 들은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그에게 다니엘 바렌보임의 모차르트 협주곡을 들려줬다. 그리고 그는 ‘Less is more’(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란 결론을 손에 쥐었다. 덜어내고 힘을 뺄수록 풍요로워지는 절제의 미학을 알게 된 것이다. “목표가 생긴 것만으로도 흐뭇해요. 제 성향은 바꿀 수 없겠지만 또 전지전능할 수는 없겠지만, 음악을 폭넓게 아우르고 다재다능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순도 100%의 음악 얘기 끝에 그가 문득 다른 꿈을 꺼내놓았다. “요즘은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어, 유니세프가 있네’ 하곤, 한 달에 얼마씩 기부를 시작하는 식이죠. 옛날 같았으면 누가 ‘넌 꿈이 뭐니’ 물으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돼서 유명해지고 행복한 삶을 꾸리고 싶다’고 말했을 거예요. 지금도 유명해지고 싶은 건 같지만 관점이 달라졌어요.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거죠. 재단을 세워 (음악에)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오는 8월 그가 국제 콩쿠르의 첫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모스크바 청소년쇼팽콩쿠르가 그 꿈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청소년쇼팽콩쿠르는 그가 열두 살 소년이던 1996년 형(피아니스트 임동민)과 나란히 1, 2위에 입상해 세계에 이름을 알린 출발점이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노부스 콰르텟, 모차르트콩쿠르 현악사중주 1위

    노부스 콰르텟, 모차르트콩쿠르 현악사중주 1위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제11회 국제 모차르트콩쿠르에서 현악사중주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노부스 콰르텟은 지난 5일(현지시간) 열린 최종 결선에서 슈베르트 콰르텟자츠, 베르그 서정 모음곡과 모차르트 현악 사중주 K.428을 연주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국내 현악사중주단이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은 처음이다. 해당 콩쿠르에서 현악사중주 부문에서 1위가 나온 것도 첫 사례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1975년 시작된 모차르트콩쿠르는 3~5년 주기로 열린다. 바이올린 김재영·김영욱, 비올라 이승원, 첼로 문웅휘 등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노부스 콰르텟은 2012년 독일 최고 권위의 콩쿠르인 ARD 국제 음악 콩쿠르 현악사중주 부문에서 2위에 입상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동계올림픽 비인기 종목 걱정마! 우리 기업들 든든한 후원군으로

    1억원이 넘는 비싼 썰매값 탓에 남의 썰매를 빌려 연습했던 한국 봅슬레이팀 원윤종, 서영우 선수가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는 첫 메달에 도전한다. 봅슬레이는 썰매에 누운 채 얼음 트랙을 내달리며 시간을 겨루는 운동경기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스팔트 훈련으로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토로할 정도였지만 지난달 9일 미국 아메리카컵 2인승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해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런 ‘기적 같은 일’ 뒤에는 대우인터내셔널과 롯데백화점 같은 든든한 기업들의 후원이 있었다. 물론 기업이 밑지는 장사를 하는 건 아니다. 기업 입장에서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원은 적은 돈으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기업과 선수가 ‘윈윈’하는 셈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비인기 종목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선수들의 실력이 빠르게 늘고 국민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어 축구나 야구 같은 인기 스포츠만큼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우인터내셔널은 2011~2018년 봅슬레이팀에 대한 국내외 훈련비, 썰매 구입비, 선수단 차량 지원을 하고 있지만 연간 소요되는 비용은 3억원 정도다. 하지만 선수들은 최하위에서 금메달을 넘볼 정도로 급성장했다. 2010∼2011년 봅슬레이를 지원했던 롯데백화점은 올해 루지(썰매에 누운 채 얼음 트랙을 미끄러져 시간을 다투는 운동경기) 국가대표팀에 1억원을 후원했다. 올 소치 동계올림픽 예상 수입액이 100억 달러(약 10조 70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약소’한 수준이다. 하지만 루지팀은 처음으로 올림픽 전 종목 출전 자격을 얻은 데 이어 팀 계주에서 메달 획득을 기대하고 있다. 삼성도 1997년부터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사를 맡아 스피드스케이팅·쇼트트랙 등 빙상 종목 전반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왔다. 이번 올림픽 공식 후원사인 삼성전자는 올림픽 공식 제품인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3’를 각국 선수단 전원(3000여명)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이 밖에 한라는 아이스하키팀을, CJ는 한국 스노보드팀을 꾸준히 지원해 왔다. 특히 CJ가 후원해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한 김호준(스노보드 하프파이프)과 아시아 선수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5위에 입상한 최재우(프리스타일 모굴 스키) 등 2명 모두 당당히 이번 올림픽에 출전해 회사 관계자들을 뿌듯하게 하고 있다. 2018년까지 대한컬링경기연맹에 100억원 상당을 후원하기로 한 신세계는 지난해 제1회 ‘신세계·이마트 전국컬링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민적 관심도가 높아진 덕인지 컬링도 올림픽 여자 부문에서 5명을 처음 내보낸다. 업계 관계자는 “비인기 종목에서 동메달이라도 나온다면 해당 기업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경기 결과에 대해 재계 안팎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에쓰오일, 동계올림픽 빙상 메달 따면 포상금 지급키로

    에쓰오일, 동계올림픽 빙상 메달 따면 포상금 지급키로

    에쓰오일이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빙상 국가대표 선수에게 포상금을 지원한다. 에쓰오일은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의 동기 부여와 격려 차원에서 입상 성적에 따라 포상금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27일 밝혔다. 포상금은 금메달은 2000만원(단체전 선수 각 1000만원), 은메달 1000만원(〃 각 500만원),동메달 500만원(〃 각 300만원)이다. 나세르 알 마하셔 에쓰오일 최고경영자(CEO)는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트는 동계 스포츠의 대표적인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지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선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포상금 지원을 약속했다”면서 “엄청난 노력과 열정으로 세계 정상의 실력을 갖춘 빙상 영웅들의 선전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포상금은 올림픽이 끝난 뒤 전달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4번째 무대… 이번엔 엄마의 힘 발휘해야죠”

    “4번째 무대… 이번엔 엄마의 힘 발휘해야죠”

    “소치에서는 30위까지 올라 보겠습니다. 힘든 길을 걸었지만 가족과 주변 분들의 뜨거운 격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54㎝, 45㎏. ‘설원의 마라톤’ 크로스컨트리 여자 선수라고는 보기 어려운 가냘픈 체구다. 그러나 ‘악바리’ 근성 하나만으로 벌써 네 번째 올림픽 무대에 선다. 출산도 그의 도전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작은 철인’이라 부르는 이유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크로스컨트리에서 이채원(33·경기도체육회)은 상징적인 존재다. 중학생이던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동계체전에서만 무려 51개의 금메달을 따내 역대 최다 기록을 갖고 있다. 평창 대화고 1학년이던 열여섯에 처음 태극마크를 달아 17년째이며,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부터 소치까지 한 번도 올림픽에 빠지지 않았다. 국내 최강이지만 세계 무대의 벽은 높았다. 솔트레이크시티와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하위권에 머물렀고 2010년 밴쿠버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개인 스프린트 78명 중 54위에 그쳤다. 선수로서는 전성기였던 2006~07시즌 국제스키연맹(FIS) 랭킹이 131위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200위권 이후에 자리했다. 밴쿠버 대회 직후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한 이채원은 한때 은퇴를 고민했지만 눈밭을 떠날 수 없었다. 운동선수 출신 남편의 든든한 외조를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마침내 기적을 일궜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개인 스프린트에서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것. 누구도 입상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악바리 근성이 마침내 ‘일’을 냈다. 이채원은 23일 전화 인터뷰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던 순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학 4학년 때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내가 왜 이 길을 걸었을까’ 많은 후회를 했지만 스스로를 가다듬고 이겨내다 보니 좋은 결실을 얻었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얻은 이채원은 지난 3년 동안 소치만 바라보며 뛰었다.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아이를 가졌으나 FIS 포인트를 따겠다는 욕심으로 아홉 달이 될 때까지 주변에 숨긴 채 경기에 나섰다. 건강한 딸을 낳은 이채원은 석 달 뒤 복귀했고 지난해 동계체전에서 개인 통산 49~51번째 금메달을 거푸 거머쥐었다. 이채원은 소치에서도 출전 가능한 모든 종목에 나선다는 각오다. 유일한 여자 선수인 탓에 단체 경기에는 나설 수 없지만, 개인 종목은 스프린트와 개인출발을 가리지 않고 나간다. 2018년 평창에서 피날레를 장식하겠다는 이채원에게 순위는 의미가 없다.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면 금메달을 딴 것과 다름없다. 이채원은 설 연휴도 반납한 채 평창에서 훈련을 하다 다음달 1일 소치로 건너간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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