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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열사 열전:3/崔鍾吉 서울 법대 교수(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 사죄” 외친 참지식인/법학자답게 ‘정의의 저울’로 독재에 항거/반공주의자… 간첩혐의 조사받다 의문사 崔鍾吉은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그는 70년대초 유신독재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그러던 어느날 그의 비판의 소리가 사라졌다.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 속에 죽었기 때문이었다.공작정치를 자행하던 중앙정보부는 그를 간첩이라고 발표했다.독재권력에 의해 그는 간첩으로 왜곡됐다.그러나 죽은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수사중이었던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25일 “구속수사를 받던 崔鍾吉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崔교수가 사망한지 6일 뒤의 발표였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은 물론 崔교수를 아는 사람중 중앙정보부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대부분 고문으로 죽자 자살로 위장했을 것이라고 믿었다.가족들은 검시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장례마저도 소리없이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그의 죽음은 張俊河 선생의 죽음과 더불어 유신시대 최대 의문사 사건이다.그의 의문사는 독재권력의 인권유린과 민주화 탄압 및 공작정치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건 1년여 뒤인 74년 12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崔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조작 실수로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그러한 의혹은 당시 모 신문사 기자가 취재도중 입수해 사제단에 알려온 정보를 바탕으로 제기됐다”고 사건 당시 정보부 직원이었던 P씨가 전한다.P씨는 사제단에 있던 한 신부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그는 “앞서 열린 1주기 추도식때도 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제기됐었으며 몇개 신문의 초판에 실렸던 관련 기사가 밤사이 누락됐었다”고 전했다. 사제단은 88년 10월6일 서울지검 김두희 검사장 앞으로 崔교수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고발장을 제출했다.사제단은 “崔교수 사인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건 관련자로 이후락 정보부장 등 22명을 고발했다.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사건발생 15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민의 관심사로 등장했다.고발은 사건 당시 정보부 감찰실 직원으로 있던 崔교수 동생 종선씨(미국 거주)가 비밀리에 작성했던 수기가 바탕이 됐다.그는 사건 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구가 있던 세브란스 정신병동에 약 1주일간 입원하며 수기를 썼다. 그러나 수사는 겉돌았고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일인 10월18일 “崔교수가 타살됐다는 증거도,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족들과 사제단의 자료,88년 검찰 발표 등을 종합하면 당시 정보부 발표는 의혹 투성이다.먼저 정보부는 “崔교수는 퀼른대학 유학중 중학동창생인 이재원·노봉유(미체포)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유족들은 “주범이 체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섭된 사람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사고이후 시체를 현장에 두지 않고 급히 국립수사연구소로 옮긴 점,가족이나 변호인·의사의 검시 참여를 불허한 점,한장 뿐인 사체사진이 투신 자살(뒷머리가 깨지고,양쪽 손발이 부러졌다는 정보부 발표)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 점 등도 정보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했다.떨어진 지점이라는 곳도 종선씨가 그날 새벽 몰래 가본 결과 핏자국이나 이를 씻어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崔교수가 뛰어내렸다는 화장실 구조도 투신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지적됐다.162㎝의 작고 뚱뚱한 그가 수사관들을 6m 거리에 둔 채 잠긴 창문을 열고 150㎝ 높이의 창문턱을 잡고 올라 투신한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이것은 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면서 건물구조를 잘 아는 동생 종선씨가 제기하는 최대 의혹이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10년전에 지났다.그러나 진상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정부나 국회의 적극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국민들은 당시 관련자들이 참회의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종선씨는 수기에서 “그들도 언젠가 증언대에 서면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착한 형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진실규명에 대한 희망을 나타냈다. ◎외아들 光濬씨/“역사의 진실에 공소시효는 없다” 崔鍾吉 교수의 외아들인 光濬씨(34·부산대 법대 조교수)는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학술회의 때문에 갔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부친 행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그러나 이번에도 새로운 것은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부친 모교인 퀼른대 출신인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알게 됐고,그 이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답답함만 더해 갔습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왜 간첩누명까지 써야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 부친의 은사였던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 등 아버지가 만났던 교수 동료들을 만나 부친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시절 만났던 코헨,박스터,라이샤워 교수들에게도 전화나 편지로 도움을 청했다.“그들은 한결같이 부친의 결백을 믿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고 光濬씨는전한다.특히 세계적인 민법학자 케겔 교수는 75년 독일 슈피겔지에서 崔교수 관련 기사를 읽고 당시 법무장관에게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光濬씨의 어린시절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1주기 추도식 때였어요.당시 명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는데 정보부에서 막아 어머님이 저와 동생을 끌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사람이 많은 시장거리 등을 몇차례씩 통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때문에 여러번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를 옮겨 조금만 있다보면 자신을 보는 친구나 선생님들의 눈치가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고.그는 결국 고등학교만 마치고 유학길을 택해야 했다. 사건 이후 미망인 백경자씨(62·의사)는 “오로지 남편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고 했다.그녀는 당시 열살,여덟살이던 光濬·希晶 남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이사다니기를 반복해야 했고 ‘자랑스런 아버지’였다는 점을 심어주어야 했다.덕분에 光濬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민법학자가 됐다.希晶씨(32)는 성신여대를 나와 출가해 미국에 살고 있다. ◎왜? 촉망받던 그가 죽음을 당했나/권력핵심부 거침없는 비판/독재정권의 ‘눈엣 가시’ 崔鍾吉 교수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이자 의식있는 지식인이었다.그는 모교인 독일 퀼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남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그러나 “모국에서 배움의 의지에 불타는 법대생들 앞에 서는 것이 내 소망이요 소명”이라고 뿌리치며 귀국했다고 가족과 당시 동료교수들은 전한다. 하버드 대학의 코헨,라이샤워,박스터 교수 등은 崔교수에 대해 ‘그는 애국자였으며,위대한 학자요,우리들의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코헨 교수는 후일 미국의 한 신문에 ‘우울한 한국(Gloomy Korea)’이란 기고를 통해 崔교수 죽음을 애도하고 한국 공작정치를 비판했다고 아들 광준씨가 전한다. 간첩혐의에 대해서 가족들은 “본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했다.아들 光焌씨는 “아버님은 학도병 출신입니다.학도병시절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기 전 일본에서 몇개월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한국말을 쓰며접근하는 사람을 매우 조심했다고 당시 친구분들에게서 들었어요.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고 해요.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崔교수를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간 시대적 상황은 무엇일까.사건 2달여전인 73년 8월8일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아울러 조용하던 대학가에서 반 유신시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서울법대에서도 연이어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교내에 진입해 시위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이에 대해 崔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된다”“서울대 총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보부는 결국 수사중이던 간첩사건(崔교수 출두전 간첩사건은 거의 수사가 종결돼 있었다고 사제단은 판단)에 崔교수를 엮어 반유신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던 것 같다.동생 종선씨는 88년“공공연하게 정권을 비판하는 형님을 손보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조사도중 사망하자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 어거지로 간첩혐의를 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崔鍾吉 열사 연보 ▲1931년 충남 공주에서 4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 ▲1950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51년 학도병 입대 통역병 근무 ▲1957년 서울 법대 대학원 졸업 ▲1962년 독일 퀼른대학 법학박사 ▲1964년 서울대 법대 전임강사 ▲1970년 2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수 ▲1972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73년 11월16일 중앙정보부(남산)에 출두 ▲1973년 11월19일 새벽 1시30분 사망
  • 심각한 대졸 취업문제(사설)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업사태 속에 지난해 하반기와 올 상반기 대학 신규졸업자의 취업률이 68년이후 최악인 50.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IMF 한파로 실업자가 20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이라고 취업이 제대로 될리가 없겠지만 대학 신규졸업자의 취업이 이처럼 어렵다는 것은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청운의 꿈 대신 실망과 깊은 좌절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대학가에서는 치열한 취업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본격적인 취업시즌인 올 하반기에는 지난해보다 취업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기 때문이다.일반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마다 많은 대졸 신입사원을 뽑던 은행과 공기업 등이 퇴출이나 통폐합,구조조정으로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는데다 대기업들마저 신규채용을 대폭 줄일 계획이다.취업설명회마다 대졸예정자들이 넘쳐나고 어쩌다 채용공고나 의뢰라도 있으면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려 공고마저 은밀하게 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바늘구멍같이 좁은 취업문을 뚫기위해 전공은 팽개쳐둔채 취업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가 하면 아예 취업을 포기하고 고용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졸업을 미루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군에 입대하는 학생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취업을 위한 ‘재수’‘3수’생들도 수두룩하다.대학이 ‘취업학원’처럼 변하고 있으며 학문적 기초를 다진 건전한 전문인을 양성하는 대학교육의 본질마저 위협받고 있는 걱정스러운 실정이다. 전반적인 실업대책의 마련과 함께 새로 대학을 졸업하는 취업희망자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많은 투자를 하여 기른 젊은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참여 기회를 주는 것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며 기성세대의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신규 대졸자들은 침체된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새로운 수혈이자 원동력이며 내일에 대한 희망이다.보수의 다과(多寡)는 문제가 아니다.오늘의 경제가 어렵다고 하여,있는 사람을 정리하는 것보다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는 것이 손쉽다고 하여 내일에 대한 인력 투자를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성장잠재력은 크게 훼손될것이다. 경제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어려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신규 대졸자의 취업은 늘려야 한다.생각만 있으면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인턴사원을 늘리거나 연봉계약제를 확대하는 것도 검토해봄직 하다.대졸자들도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정부와 기업의 특별한 배려를 당부한다.
  • 무보직 고위공무원 49명 구제/행자부

    ◎11개 부처서 4급이상 인력 충원요청/마지막 구제 조치… 전출희망서 내일까지 접수 조직개편 등으로 보직을 받지못한 4급 이상 행정직 중견 공무원 49명이 구제된다. 행정자치부는 11일 조직개편으로 폐지된 공보처,정무장관 1·2실 및 중앙부처의 4급 이상 중견관리자로서 보직을 받지못한 180여명 가운데 유능한 공무원 49명을 구제키로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이에앞서 교육부 등 11개 부처는 이달 초 행정직 4급 이상의 중견 공무원 49명의 인력충원을 행자부에 요청했다. 인력충원을 요청한 부처와 충원숫자는 교육부가 행정직 4급 11명을 요청한 것을 비롯, 정보통신부 9명,특허청 7명,병무청 6명,국가보훈처 4명,기획예산위원회 3명,국방부 2명 등 11개 부처 49명이다. 행자부는 이에따라 이들 보직대기자들을 상대로 오는 13일까지 부처 전출희망서를 받아 희망한 부처에 명단을 통보하기로 했다. 해당 부처에서는 전출희망자를 대상으로 전문성,업무적응 능력,부처 내부인력 구조와의 조화 등을 고려,면접 등을 통해 전입대상자를 선정한다. 행자부는 이들이 이달 말 중앙인사교류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9월초부터 새로운 부처에서 일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2년에 한차례 있는 부처간 정기인사 교류를 통하지 않고 40여명의 중견관리 공무원들이 한꺼번에 인사교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행자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과 같은 추가적인 구제조치가 앞으로는 더이상 있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히 내년 3월말 각 부처별로 인사심의위원회를 열어 정원을 초과하는 공무원 숫자 만큼 강제적인 직권면직을 시킬 것인 만큼 이번에 많은 대상자들이 전출을 희망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5급 이하 하위직의 경우에도 보직을 받지못한 3,400여명 가운데 800여명이 다른 부처로 전입된 것으로 파악됐다.
  • 수재 복구 젊은이들 나서라(사설)

    지리산에 이어 서울·경기·충청 지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엄청난 인명·재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어디서부터 손을 보아야 할지 망연자실해 있다. 그들의 좌절감과 상실감은 우리에게 또다른 아픔을 준다.9일 집중호우가 그치고 오랜만에 햇살이 비치자 수재민들은 실의를 딛고 복구작업에 비지땀을 흘렸으나 10일 또다시 비가 내리거나 여전히 100㎜ 이상의 호우전선이 중남부에 걸쳐 있어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다행히도 많은 국민이 수재민돕기에 적극 나서 인명·재산 피해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해주고 있다.수재민돕기 모금운동을 통해 고사리손의 돼지저금통이 고스란히 전달되는가 하면 70할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처음 당한 폭우라면서 손수 수레를 끌며 수재 복구작업에 나서는 모습은 역시 우리의 이웃사랑과 공동체의식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있는가를 확인시켜준다. 여기에 육군이 10만명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도로 철도 전기 통신 등 기간시설 복구 및 대민 지원활동에 나섰다.육군은 지난 7일 경기도 송추 계곡 집중호우때부터 지원활동에 나섰으며,10일부터는 이같이 병력을 대거 투입해 주요 침수지역의 물빼기 작업과 유실된 도로 및 제방복구,도로 청소작업을 펼치고 있다. 군에 입대한 우리의 아들들과 같은 세대인 대학생등 젊은이들도 하기방학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수재복구에 적극 나서기를 당부한다.수재지역 봉사활동을 통해 3D(어렵고 위험하고 지저분한 일)를 체험하고 ‘관념적 애국’이 아니라 ‘실제적 애국’이 무엇인지,노동을 통해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의 부모세대들은 60∼70년대 황야와 같은 벌판에 공장을 세우고,중동의 모랫바람을 온몸으로 마시며 달러를 벌어들여와 경제화·산업화를 일구어 냈다.개발시대에 열정을 퍼부으면서 부패구조의 낡은 병폐를 확대재생산한 경우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아버지 세대들은 그동안 이 나라 경제발전의 중심축이 되었던 것이다.이 점을 수재지역을 찾아 경험해보라고 권한다. 오늘의 IMF체제가 온 것은 젊은 세대들이 3D를 기피,외면한 데도 큰 원인이 있다.쉽게 포기하고 쉽게 좌절하며 또 쉽게 세상을 살려고 하는 반면,어렵고 괴로운 일엔 애당초 접근하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IMF체제를 불러온 이유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젊은이들의 수해복구 참여는 아버지 세대들의 에너지원이 무엇인가를 직접 체험하며 국가관을 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아울러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내는 국민적 저력을 후계세대들도 갖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이와함께 정부는 150만명 이상의 실업자들을 수재지역 복구에 투입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기를 바란다.
  • 민주열사 열전:1­2/張俊河 선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체제 맞서 ‘불굴의 투쟁’/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항일운동/해방후 ‘사상계’ 창간 반독재투쟁 선도/朴正熙정권 끝내 부정… 의문의 추락사 “오늘의 헌법(유신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이에 우리 국민은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1973년 12월23일 상오 10시 서울 YMCA회관 회의실.통일당 張俊河 최고위원이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수십명의 보도진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咸錫憲·白樂濬·金壽煥·白基玩·桂勳梯·兪鎭午씨 등 각계 지도급 인사 3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이었던 것이다.이 일로 張俊河 선생은 白基玩씨와 더불어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다.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張俊河 선생.그는 정부수립 이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골짜기에서 불귀의 객이 될때까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5·16쿠데타 때까지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무기로,그 이후에는 직접 몸을 던져 독재와 싸웠다.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78)은 張俊河 선생을 ‘애국자·혁명가·인격자이며 권모술수와 배금주의를 배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서러워했다. ‘사상계’를 빼놓고는 그의 반독재투쟁사를 말하기 어렵다.그의 손아래 동서로 사상계에서 편집부장을 지낸 劉庚煥씨(61·전 문화일보 논설실장)는 “張俊河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신앙에 가까운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사상계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오히려 반독재 정론지로써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란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58년 12월 자유당 정권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개악시켜 통과시킨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張俊河 선생은 61년 7월호에 실린 咸錫憲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목의 글로 중앙정보부장 앞에 불려가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빨리 민정이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또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밀수왕초’,‘매혈자’등으로 몰아부치고 국가원수모독죄 등으로 구속된다.이러한 투쟁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반유신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의 반독재투쟁에 대해 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65)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로 몰아가려는 반통일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했다.劉庚煥씨는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 반공주의자였다.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朴正熙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또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쿠데타는 후세에 좋지 않다는 신념으로 朴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회고했다. 張俊河 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가 광복군 대위 시절 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피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피빛으로.◎張俊河와 朴正熙/광복군대위­일본군중위 출신부터 달라/남로당관련 등 박정희 약점 과감히 들춰 5·16 쿠데타 이후 張俊河 선생이 숨질 때까지 ‘張俊河는 朴正熙의 천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그만큼 앞뒤 안가리고 朴대통령에게 모멸감을 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1966년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하자 재벌밀수규탄대회에 초청된 그는 朴대통령에게 ‘밀수왕초’란 이름을 선물했고,3개월간 옥고를 겪는다.6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그해 4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朴대통령에게 ‘매혈자’란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한 말이었다.이로 인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나 오히려 6월 총선에서 옥중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또 “朴正熙는 과거 남로당 조직책으로 조직원 동료를 팔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로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물” 등 朴대통령의 최대 약점들을 과감하게 들추어냈다. 張俊河 선생의 이런 행태에 대해 평전 ‘재야의 빛 장준하’를 썼던 朴敬洙씨(68)는 “張俊河 선생의 朴正熙관은 애초부터 멸시와 경멸이었던 것 같다. 상대가 일본군 중위일때 그는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였다는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朴正熙의 갖은 폭력을 겪으면서도 분노에 앞서 그 인격 자체를 대단치 않게 본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개헌을 위한 백만인 청원운동으로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던 張俊河 선생은 출감하자 75년 1월 朴대통령에게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고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유족들의 생활/결벽중에 가까운 청빈으로 가족들 큰 고통/문상객도 자기먹을 쌀 가져올 정도로 궁핍 “월급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17살때 시집왔다는 張俊河 선생의 미망인 金熙淑 여사(71)의 말이다.사상계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張俊河 선생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남은 것은 20만원짜리 월세방과 쌀 한 됫박뿐이었다고 전해진다.한 문상객이 미망인의 손을 붙들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거냐”며울자 망연자실해 있던 金여사는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라고 남의 얘기 하듯 했다고 한다. 白基玩씨는 “문상올 사람들에게 자기 먹을 쌀을 가져오라고 연락을 했었다”며 “당시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전셋집을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이렇게 지나칠 만큼의 청빈에 대한 그의 결벽증은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 밖에 없었다.사상계에 대한 탄압으로 항상 빚에 쪼들렸던 것도 이유가 됐다. 3남2녀중 장·차남인 호권·호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세 아들중 호준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한신대를 나와 목사로 있다.딸들은 이대를 졸업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 각각 살고 있다. ◎비극의 수수께끼/추락사한 유해 겨드랑이 피멍자국/17m 벼랑에서 떨어진 안경은 말짱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張俊河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張俊河 선생이 숨져 누워있던약사봉 골짜기의 이 표석문의 ‘멋 훗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당시 검찰의 ‘추락사’발표는 실로 의혹투성이였다.그때 徐燉洋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張俊河 선생은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그는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金龍煥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徐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그리고 그날 낮 金龍煥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이때문에 당시 ‘재야대통령’이라고 불리던 張선생의 사인을 서둘러 추락사로 발표한 의혹을 샀다. “집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를 보니 겨드랑이 밑 양쪽 팔에 피멍이 있었어요. 엉덩이와 팔 두군데 주사기로 찔린 듯한 자국도 있었고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사체가 너무 깨끗했습니다.순간 양쪽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갔다고 직감했지요” 서울 상봉동 셋집에서 장례 대소사를 떠맡았던 劉庚煥씨의 증언이다.또 金龍煥씨가 말한 하산코스가 등산장비 없이는 도저히 내려오기 어려운 벼랑이어서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張俊河 선생이 갖고 있던 커피보온병과 끼고 있던 안경이 17m 높이의 벼랑에서 돌밭으로 떨어져 말짱했다는 불가사의한 의혹 등도 나왔다. 劉庚煥씨는 또“소나무가 휘어진 자국이라며 金龍煥이 말한 부분에 동그랗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칼로 벗겨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연보 ▲1918 평북 의주에서 아버지 張錫仁 목사와 어머니 金京文 여사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1932년 평양 숭실중 입학 ▲1940년 일본신학교 입학 ▲1944년 1월 金熙淑 여사와 결혼,20일 후 학도병으로 입대 ▲1944년 7월 일본군 탈출,중국군 가담 ▲1945년 1월 중국 중경의 광복군에 편입 ▲1945년 11월 金九 선생과 함께 입국,비서로 활동 ▲1948년 한신대 졸업 ▲1953년 월간 ‘사상계’ 발행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 상 수상 ▲1971년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시절을 담은 저서 ‘돌베개’ 출간 ▲1972년 7·4 공동성명 지지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수많은 의혹을 남긴채 숨짐
  • “정계개편 이젠 때가 됐다”/2與의 영입 밑그림

    ◎“9월초 14∼15명 온다” 과반확보 자신감/개혁 걸림돌 사정권 의원은 ‘일체사절’ 여권의 정계개편이 다시 정가의 관심으로 떠올랐다.국회의장을 차지,정국주도권을 잡은데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여권은 이전부터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정운영 ‘그림’을 모색해왔다.야권 의원과 개혁성 인물을 수혈받는 소(小)개편과 정치권 전체의 그림을 바꾸는 대(大)개편이 그것이다.여권 국회의장의 탄생으로 이제 시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판단이다. 국민회의의 1차적인 관심은 야당의원의 영입이다.정국운영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지도 많지도 않은 규모의 영입을 추진중이다.영입 강도가 높으면 그만큼 ‘분열 공작’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 때문이다.따라서 한나라당의 진로와 정국추이를 봐가며 물밑에서 비교적 신중하게 처리하겠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구상이다. 목표는 이전의 ‘한나라당 과반깨기’에서 ‘여권의 과반의석 확보’로 틀었다.의장선거의 승리로 현재의 국면을 활용하려는 자신감이다.‘과반의석’이라면 야당의 거부감을 최소화하고9월 정기국회에서도 개혁입법을 무난하게 관철시킬 수 있는 선으로도 인식하고 있다. 영입시기는 탈당의원들의 명분을 위해 한나라당 전당대회 후 정기국회가 개회되기 전인 9월초가 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9월초 14∼15명선의 야당의원 영입’이 목표인 셈이다. 당내에서 거론되는 영입대상 야권인사는 10여명의 한나라당 의원과 6,7명의 국민신당 의원들.한나라당의 경우 중부권의 H,L,P,R의원,영남권의 J,K,P의원 등이 거명되고 있다.대부분은 의장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이탈한 세력들과 중첩되는 사람들.이들 가운데 7∼8명이 여권과 본격적인 물밑접촉을 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반란자’들의 행위를 사정태풍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로 분석한다.하지만 대부분은 여권이 소개편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영입접촉을 해온 인물들이다.다만 여권이 ‘기대하지 않았던’2명의 의원이 여권의장에 표를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데,이는 사정바람을 피하기 위한 ‘행위’로 여권은 간주한다. 영입대상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이심전심 여권과의 교감을 나눴다고 볼 수 있다.따라서 상당수는 탈당 결행시기만 남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여권 지도부 핵심인사들은 수사대상이거나 기소예정인 사람만큼은 철저히 배제할 방침이다.정계개편을 개혁정치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여권의 ‘작은 그림’은 대체로 이달 하순쯤 모양새가 드러날 전망이다.정치권에 불고있는 ‘사정태풍’은 정계개편에 별다른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 동상이몽/여야 의장선거 득표 계산

    ◎여권­영입대상 6∼8표·국민신당 4∼5표 확보/한나라­‘총리인준’ 물밑작업… 15∼16표차 낙승 여야가 3일 국회의장 선거를 앞두고 표계산에 분주하다.2차 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1차 투표에서는 어느 후보도 과반수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여야는 2차 투표 전략과 상황 전개별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등 다각도의 대책도 세웠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31일 양당 ‘6인 협의회’를 갖고 예상득표율을 점검했다.1차 완승이 목표지만 2차 투표 대책도 점검했다.보유 의석은 국민회의 88석,자민련 49석으로 당선권 과반인 150석에는 13석이 모자란다. 137표 외 추가득표는 국민신당에서 4∼5표,여권 영입추진 대상 의원 6∼8표,무소속 3표 중 1표로 11∼14표를 계산하고 있다.기권·무효표나 반란 1∼2표를 빼면 2차에서 3∼5표차로 야당 후보를 누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권은 국민신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상임위원장 1석과 주요 상임위 배정을 조건으로,한나라당 영입추진 의원들에 대해서는 ‘영입 후 확실한 신분보장’을 조건으로 정지작업중이다.여권의 야당의원 접촉은 ‘의장 선거’뿐만 아니라 의원영입 작업과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된다. 한나라당의 동원가능 인력은 151석 가운데 와병중인 崔炯佑 의원과 외유중인 盧承禹 의원을 뺀 149명.이들 가운데 6∼8석은 갖가지 이유로 이탈할 가능성을 내다본다.하지만 국민신당 8석 가운데 徐錫宰 의원 등 민주계 2명,자민련 의원 중 그동안 총리인준을 놓고 물밑 작업을 벌여온 15명 가운데 10명, 吳世應 후보 친분의원 1∼2명을 감안하면 2차 투표에서 적어도 15∼16석차로 낙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1차에서 결말이 나지 않더라도 한나라당 후보가 여당 후보를 상당한 표차이로 따돌리면 2차에서는 쉽게 이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 병무비리 이후 달라진 병무청/민원은 커녕 안부전화도 “뚝”

    ◎122명 물갈이 인사/“비리척결 최대과제” 병무청이 달라지고 있다.병무비리를 계기로 거듭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변화의 움직임은 바깥쪽에서 먼저 시작됐다.우선 하루에도 수십통씩 걸려오던 민원성 전화가 뚝 끊겼다.입대날짜 확인 등 각종 민원성 전화는 물론 안부전화도 잘 걸려오지 않는다고 한다.병무비리 이후 나타난 신풍속도다.이같은 현상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게 병무청 직원들의 바람이다. 직원들의 의식도 전과 같지 않다.사소한 정에 이끌려 ‘무리한 부탁’을 하던 관행을 스스로 없애려 애쓰고 있다.민원성 전화는 딱부러지게 거절하고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에게도 ‘부탁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입장이 됐다. 李相浩 청장의 의지도 한몫하고 있다.李청장은 최근 병무비리와 관련된 부탁이나 민원은 ‘무조건 NO’라고 말하라고 직원들에 엄명을 내렸다.적발되면 엄중문책하겠다는 경고도 포함됐다. 환부를 도려내기 위한 물갈이도 병행했다.서기관·사무관급 직원 42명과 6급 75명 등 122명의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병무비리의 진원지였던 부서가 그 대상이었다.감독소홀을 물어 감사담당관실의 사무관 이상 4명이 유례없이 전원 교체됐고 서울지방청 역시 사무관급 이상 징병·징모 관련 직원 16명이 대거 바뀌었다.앞으로도 계속 순환보직을 실시할 계획이다. 李청장은 “의식전환을 통해 올바른 공직자상이 설 때 병무비리는 근절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비리근절을 최대 과제로 정해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北間島 개척(秘錄 南柯夢:19)

    ◎“간도 개간해 영유권 회복” 은밀히 제의/관직 물러난 심선택,부국강병책으로 진언/고종,“뜻은 거창하나 재정연구뒤 착수” 지시/심,“삼도 어사삼으면 수령출척 충당” 아뢰니 “흉년에 민폐 끼칠라…” 물리치자 없던 일로 두만강 건너 이북의 땅을 북간도(北間島)라 한다. 지금 연변 조선족이 사는 곳이다.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그리고 발해의 옛 강역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그토록 귀한 땅이 대륙의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은 고려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간도땅을 차지한 민족을 만주족,일명 여진족이라 하는데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학자 가운데는 여진족이 이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금과 청의 역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한국사의 일부로 끌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만일 계속 간도땅을 영유하고 있었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맛보지도 않았을 것이요,일제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간도에 고종황제가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느날 심선택(沈善澤)이 나(정환덕)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전 동부승지 의평(宜平)의 아들이다. 지난해 엄귀인(嚴貴人:엄비)의 여동생에게 장가들어 외척이 되더니 그 인연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자리를 얻어 나갔다. 그러나 겨우 일년이 지나 어머니 상(喪)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상를 마친 뒤 아무 직업도 없이 있다가 드디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매우 좋은 일이 있소이다. 영감께서 황상께 아뢰어 꼭 성취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일이요,창업공신과도 맞먹는 일이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라는 것이었다. 심선택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것은 북간도 개척문제였다. 그래서 정환덕은 “순서대로 조용히 말씀해보시오”라고 말했다. “북간도는 원래는 조선 땅으로 사방이 4천리나 됩니다. 남이(南怡) 장군이 당시에 백두산의 북쪽인 중국 동부지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여기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보면 그 지역이텅비어 있고 관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곳에 공사관(公使館)이나 영사관(領事館)을 설치해 중국과 조선이 서로 무역을 하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 부국강병책이 스스로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는 이 사업을 각별히 힘써서 주선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간도의 지도 한장과 북간도에 관한 사실을 조사한 서류 한 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세종때 남이장군이 세웠다는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목격자도 많은데 일제가 폭파했다는 설이 있다. 그뒤 18세기초에 다시 청나라가 강요하여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에 새로 세우게 되어 백두산 천지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문제된 강이 토문강인데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두만강이 아니라 해란강이라고 주장했다. 심선택은 이같이 간도땅의 역사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에게 건의하여 간도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은 거창한데 재정이 어려워 섣불리 착수할 수가 없다. 아직은 보류하고 재정을 연구한 뒤 착수하기로 하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심선택에게 상감의 교시가 이와같다는 뜻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감의 교시가 비록 그와같다 해도 좋은 방도가 있으니 상감께서 우리일가 심상훈(沈相薰)을 불러 “북간도의 일을 심선택과 상의하여 보라고 처분을 내리시면 방도가 나올 것이니 다시 그렇게 아뢰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대궐에 들어가 다시 아뢰었더니 상감께서 심상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북간도 일은 심선택과 함께 상의해 처리하라”고 교시하시었다. 심상훈은 대한제국의 공신으로 고종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심선택이 심상훈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선택의 말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심상훈이 심선택에게 “상감께서 북간도 일을 어른(심선택)과 상의해보라는 교시를 내리셨는데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감께서 잘 여쭈시어 나를 북쪽 삼도(三島) 어사(御史)로 삼아 옛 식대로 마패(馬牌)를 가지고 현지 수령들을 출척(黜陟)하는 권한을 갖게 해주신다면 일년도 되기 전에 쉽사리 몇천만원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북간도에 들어가 시설을 하면 재정의 부족은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국고(國庫)의 돈으로써 경비를 낭비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농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는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나라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 문화와 의복을 지켰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한국농민들에게 머리를 깎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으면 토지소유권을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백의민족으로서 긍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심상훈과 심선택은 의견충돌이 일어나 각자 화를 내고 헤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심선택은 국가의 일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그 뒤 심상훈이나를 찾아와 “북간도의 일은 다시 여쭈지 말라”고 단단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심상훈이 황상께 입대해서 아뢰기를 “신(臣)이 저의 일가 심선택의 말을 들어보니 북쪽 삼도(三島)백성의 재산을 거두어서 북간도를 개척하자고 하기 때문에 ‘민간의 재정이 고갈돼 있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데 이러한 때를 당해 저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일이 성취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니 서로 관계하고 싶지않다’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황송한 마음은 모두 여쭈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심선택이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저 일가 사람 심상훈이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이와같이 반대하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처음부터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요,심상훈이 반대한 것이 아니니 차차 일의 형편을 보아가며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심선택은 물러가고 말았다. 독도는 우리땅이라 했듯간도도 우리땅이었다. 우리 농민들이 개척한 땅이어서 이름을 간도(墾島)라 불렀던 것인데 일제가 ‘사이 간’자로 바꿔 간도(間島)라 명명했고 1909년에 마침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땅을 중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 징병검사 전문의사제 도입/병무비리 근절대책

    ◎병사용 진단서 발급 요건 강화/8월부터 단계적 시행 □주요 대책 예·체능 특례 점차 폐지 공직자 등 병역 실명제 부정면제자 전원 재검 신장·체중 면제는 축소 선출직 및 고위 공직자에 대한 병역 실명제가 도입된다.신장·체중·질병·심신장애에 의한 면제 범위가 대폭 축소되며 예·체능 특기자에 대한특례 제도도 단계적으로 축소·폐지된다. 병사용 진단서도 임상병리시설 및 자기공명장치(MRI),컴퓨터 단층촬영장치(CT) 등 최신 장비를 갖춘 병원에서만 발급할 수 있게 되며 3년간 현역으로 입대하는 대신 병무청에 소속돼 징병검사만을 전담하는 전문의 제도가 도입된다. 국방부는 27일 이같은 내용의 병무비리 척결대책을 발표하고 元龍洙준위(53·구속) 병무비리와 관련,병역면제를 받았거나 보충역 등으로 하향 조정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사법처리 결과에 따라 신체검사를 다시 실시해 역종을 재판정하겠다고 밝혔다. 국방부의 대책에 따르면 신장 141∼153㎝,또는 196㎝이상이거나 근시시력 -10.00디옵터 이상,원시시력 5.00디옵터 이상인경우 지금까지는 제 2국민역판정을 받았으나 앞으로는 공익근무 요원으로 편입되는 등 병역면제의 범위가 크게 축소된다. 현재 훈련소에서 일괄 실시하는 특기및 부대배치 분류가 9월부터 특기 분류는 훈련소,부대배치 분류는 육군본부로 이원화된다. 대학 등 재학중 입영원을 내는 별도 입영대상자들의 입영부대 및 입영일자도 다음달부터 정상 입대자와 마찬가지로 전산으로 결정되며 의병제대 심의가 현행 1심제에서 2심제로 강화된다.
  • 병무비리 현역군인 7명 추가 공개/단순청탁 117명 징계 회부

    군 검찰은 24일 군입대 사병의 보직과 입대일자 조정 등 병역특혜를 대가로 돈을 받거나 병역비리로 구속된 元龍洙 준위(53)에게 돈을 건넨 현역 군인 7명을 적발,명단을 공개했다.금품을 건네지 않고 직위 등을 이용해 元준위에게 보직이나 부대배치 등을 부탁한 단순청탁자 117명은 징계위원회에 넘기기로 했다. 한편 군 검찰의 수사 결과 元준위는 병역면제 등의 대가로 10명에게서 9천700만원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이에 따라 元준위가 병무비리와 관련해 챙긴 돈은 6억3천여만원으로 늘어났다.
  • ‘행복의 나라’ 한대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5)

    ◎“물좀 주소 물좀 주소 목마르오/시대의 갈증 노래했는데…”/68년부터 명동·대학가 활동/통기타·청바지 문화 선도/2집 앨범 “체제전복” 낙인찍혀/75년 渡美… 음악활동 계속/지난달 일시 귀국 에세이 출간/“개인무대 갖는게 작은 소망”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그날까지’‘옥의 슬픔’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사회상 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사진·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사연들/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철조망 유신압제 상징 이유/‘고무신’·‘첫 앨범 잇따라 판금/‘행복의나라’ 희망 메시지 가득한데 68년 귀국후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 韓大洙의 국내 음악활동은 불과 7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겨냥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64년 부산 경남고교 입학. ▲65년 미국 롱아일랜드 고교로 전학. ▲66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 입학. ▲67년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 전공. ▲68년 귀국.작사·작곡가·가수로 데뷔. ▲69년 드라마센터 공연. ▲70년 군입대. ▲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75년 두번째 앨범 ‘고무신’ 발표,금지.미국으로 돌아감. ▲89년 ‘무한대’ 발표. ▲90년 ‘기억상실’ 발표. ▲91년 ‘천사들의 담화’ 발표. ▲98년 현재 뉴욕에서 사진작가및 창작활동중.자전적 에세이 출간.
  • 하회동 탈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7)

    ◎슬픈 각시… 허풍떠는 양반… 붉은얼굴 말뚝이…/민초의 恨 달래주던 ‘그 얼굴들’/기이한 외모에 걸죽한 입담 절로 나올듯/북청·봉산 등 다른 지방 탈 비교 기회도/30여개국 돌며 수집한 700점 한자리에/아프리카 武像·창·풍물 등 300점 함께 낙동강이 태극모양으로 휘감아 흐른다 해 이름이 붙여졌다는 하회(河回).비옥한 풍산들판을 가로질러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69호)의 고장 하회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마을 입구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독특한 외모의 2층건물이 시선을 모은다.우리나라 최초의 탈전문박물관 ‘하회동탈박물관’이다.20여년간 하회탈을 만들어온 金東表씨(47)가 지난 95년 사재 5억여원을 들여 이룬 평생숙원의 결정체다.고풍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곳은 수원성과 문경새재 관문을 본떠 설계됐다고 한다. 240여평의 박물관 1·2층 전시실에는 우리나라 각 지방과 세계 30여개국에서 수집된 각양각색의 탈 700여점이 전시돼 있다.박물관 바깥에는 탈놀이 공연을 할 수 있는 200여평의 야외공연장이,뒤편에는 金씨가탈을 제작하는 공방이 있다.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기묘한 표정의 우리 전통 탈들이 시선을 낚아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은 살포시 내리깔고 있는 각시탈은 힘든 시집살이를 말해주는 듯 하다.양반탈은 “양반은 대추 세 알 먹고도 배부르다”는 말처럼 허풍과 여유스러움이 배어 있다.둥근 눈과 주름이 많은 눈두덩이에 능청스런 웃음을 띤 파계승탈은 영락없는 호색가상이다.눈·코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붉은 색을 띤 말뚝이는 온갖 심술로 양반들을 골려주기에 제격이다.할미,싹불이,서울아기,옴중,미양할미,샌님,취발이,신장수,종가도령,초란이,문둥이,꺽쇠,먹쇠 등,표정 만큼이나 이름도 다양하고 재미있다. 이런 탈을 쓰고 과거 계급사회의 하층민들은 억눌린 한을 풀어냈다.탈놀이는 70·80년대 군부독재 시대에 대학생들의 대표적인 현실 저항의 몸짓이기도 했다.백정이 소우랑(쇠부랄)을 사라고 선비에게 익살을 떨고 파계승이 ‘부네(소첩이나 기녀의 신분으로 등장)’를 유혹해 놀다가 초랭이(양반의 종)에게 들키는 하회별신굿의 장면들.이것은 상전의위선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독재자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탈은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구수하고 걸죽한 입담을 토해내 우리 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했다. 이곳에는 하회별신굿 외에도 함경도의 북청사자놀이,황해도의 봉산·은율·강령탈춤,경기도의 양주별산대놀이 남사당덧뵈기,서울의 송파산대놀이,영남지방의 고성·통영·가산오광대,수영·동래아류,강원도의 강릉관노가면극 등 중요무형문화재에 등록된 각 지방 탈놀이에 쓰이는 모든 탈이 알기쉽게 구분·전시돼 있다.대부분 각 무형문화재 보존회가 제작했으며 하회탈은 金씨가 제작한 것들이다. 탈의 재료로는 주로 구하기 쉬한 박바가지와 한지,마분지,나무 등이 쓰이는데 金씨가 제작하는 하회탈은 나무로만 제작된다.“하회탈은 전통적으로 토종 오리나무를 써야하나 구하기가 어려워 피나무를 많이 쓴다”는 게 그의 설명.운좋게 金씨가 탈을 제작할 때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은 탈 구경과 함께 공방에 들려 하회탈 제작과정도 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한 외국탈300여점과 각종 생활용품 등을 볼 수 있다.우리 탈이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표정으로 주로 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반면,외국탈은 대체로 엄숙하거나 무표정한 신(神)적 분위기를 낸다.주술적인 목적으로 주로 사용됐던 때문인 듯.그러나 색채가 화려한 게 많고 모양이 아주 다양하다.전쟁을 치르기 전 승전무를 출 때 사용했다는 자이르의 탈은 튀어나온 입술이 영락없는 아프리카인이다.무꾸리(신령을 모시는 사람에게 길흉을 점치는 일)에 사용되는 것으로 여신을 상징한다는 콩고의 탈은 눈을 감은 채 엄숙한 것이 무당 점치는 표정을 빼닮았다. 파도를 다스리는 신을 나타낸다는 쿡제도의 탈은 신령스런 분위기와 세밀하게 조각된 무늬 등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곳에는 탈 이외에도 창,칼,인형,장신구,추장지팡이,모자,나팔 등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나라들의 풍물들이 많아,이 지역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편이다. ◎탈박물관 가는길/안동서 버스로 40분/도산서원·봉정사 등 전통의 향기‘솔솔’ 서울에서 안동까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매일 9회 운행되고,4시간 쯤 걸린다.안동시내에선 하루 6회 운행하는 하회마을행 46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박물관 앞에서 내리면 된다.40분쯤 소요.시간이 촉박해 택시를 타려면 풍산까지만 버스를 타고 그곳부터 택시를 타면 된다.안동에서 풍산까지는 버스가 자주 있다. 개관 시간은 상오 9시30분 부터 하오 6시 까지고 관람에 필요한 시간은 1시간 정도.매주 화요일 휴관한다.관람료는 어른 1,100원,어린이 660원이고 단체는 각각 770원 및 440원이다. 이곳에는 하회동탈박물관 말고도 전통가옥이 잘 보존돼 있는 하회마을을 비롯,병산서원,봉정사,안동민속박물관,도산서원 등 전통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들이 많다.(0571)53­2288·2938 ◎金東表 관장/“단순한 볼거리 탈피 전통문화 배움터로”/私財 5억 들여 건립 자부심/해외공연때마다 구입 열의/유럽·美洲로 발 돌릴 계획 20년 이상 탈과 함께한 때문인지 金東表 관장의 얼굴은 하회탈을 꼭 빼닮았다.그의 탈과의인연은 아주 우연하게 시작됐다.군 입대전 목각기술을 익혔던 그는 제대후 조각가 김창범씨 밑에서 1년간 조수로 일하다 서울 천호동에 개인공방을 냈다.어느날 한 손님이 하회탈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와 똑 같은 탈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金씨는 이내 수락 했던 것.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도저히 같은 표정이 나오지 않았어요.수십번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비슷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고 그때부터 하회탈 제작에 푹 빠져버렸지요.” 그가 만든 하회탈은 각 백화점에서 인기가 있었다.그러나 사업수완이 부족해선지 밑천을 들어먹고 고향인 안동 구담에 내려와 마을회관을 빌려 본격적으로 하회탈제작에 나섰다.문화재보존재단인 ‘한국의집’에 탈을 납품한 그는 안동시청에서 하회마을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탈을 제작해달라고 하자 지난 96년까지 그곳에서 하회탈을 만들었다.그의 하회탈 제작 솜씨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주문을 소화하기가 바쁠 정도였고 돈도 벌어,박물관 건립의 밑천도 마련할 수 있었다. “탈을 보여달라는 사람은 많았지만 공방이좁아 몇개밖에 걸어놓지 못해 항상 안타까웠어요.그때부터 ‘우리나라에 없는 탈박물관을 내가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지요.” 그런데 탈을 모으다 보니 기왕이면 다른 나라의 탈도 함께 전시하자는 욕심이 생겼다고.金씨는 탈문화가 발달했던 아프리카 각국을 돌기도 하고,프랑스 벼룩시장도 기웃거리면서 외국탈을 모았다.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로 각시역할을 하는 그는 해외공연을 갈 때도 그곳에서 탈을 구입하는 것이 일상사가 됐다.대전엑스포가 열렸을 때도 각국 전시관에서 외국탈을 많이 구입했다. 金관장은 탈박물관이 단순한 탈 구경장소가 아닌 탈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와 외국문화를 체험하는 산 교육의 장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이를 위해 우리 탈놀이장면과 탈에 대한 설명을 담은 다양한 시청각자료도 비치해 놓았고,야외공연장을 탈놀이를 비롯한 각종 민속놀이 공간으로 개방해놓고 있다.또 오는 9월 25일∼29일 안동시내와 하회마을에서 열리는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기간에는 박물관에서 ‘아프리카풍물전’을 열기로 했다. 아프리카·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의 다양하고 진귀한 탈도 수집,세계적인 탈박물관으로 발전시키는 게 그의 목표다.
  • 1천만원 주면 ‘고향 앞으로’/병무청탁 비리 실태

    ◎면제·카투사·연기 등 종류따라 금액 달라/원 준위·병무청 직원·군의관 조직적 연계/돈만주면 허리 디스크·정신착란 환자로/청탁 내용별 뇌물액/병역면제­평균 1,300만원/카투사­100만∼1천만원/부대·보직 배치­30만∼500만원 병역면제는 평균 1,300만원,카투사 선발은 100만∼1,000만원,부대·보직배치 및 입대일자 조정은 30만∼500만원. 구속된 元龍洙 준위나 병무청 공무원에게 이 정도의 돈을 건네주면 자식의 병역문제는 ‘OK’였다. 검찰이 23일 발표한 병무청탁 부모 가운데는 변호사·의사·공인회계사·교수·세무사·교사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뇌물을 준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무혐의처리된 단순 청탁자 199명 중에는 3선 의원으로 정당 부총재까지 지낸 S씨와 현직 판사,지방신문 전무 K씨가 있다. 병무비리의 유형은 다양했다.거액의 뇌물을 주고 허위로 허리 디스크나 고혈압·정신착란 등의 진단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거나 카투사 및 공익근무요원 선발,부대배치,입영연기 등의 편의를 받았다. 병무청탁은元준위와 수배중인 朴노항 원사를 핵심고리로 청탁부모,브로커,병무청직원,군의관 등이 연계돼 조직적으로 이뤄졌다.元준위는 부모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와 병역면제 판정 등에 필요한 진단서 등을 朴원사에게 넘겼고 朴씨는 다시 신검 군의관,병무청 직원 등 병무 관계자들에게 받은 돈의 극히 일부를 주는 수법으로 청탁을 성사시켰다. 청탁 내용은 ▲부대배치가 32건 ▲카투사 선발 30건 ▲병역면제와 입영시기 조정 17건 ▲보직 조정 15건 ▲공익근무요원 선발 3건 등이었다. 수배된 崔正男씨(52·부동산임대업)는 지난 해 2월 아들의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허리 디스크로 판정해 달라며 元준위에게 4,200만원을 건네주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창아물산 대표 金昌善씨(52)와 가톨릭대 의대 李在學 교수(56)도 자녀의 병역의무를 피하려고 元준위에게 각각 1,200만원과 800만원을 줬다. 의류상 卓周烈씨(50)와 남편이 공인회계사인 尹順子씨(48)도 현역입영 대상자인 아들을 공익근무요원으로 빼달라는 부탁과 함께 元준위에게 각각 2,500만원과 1,200만원을 건넸다. 서일기업 대표의 부인인 長英子씨(54)는 1,000만원을 주고 아들을 의가사제대를 시키려다 제대로 안되자 돈을 되돌려 받기도 했다. 병무비리의 핵심인 元준위는 평소 친분관계에 따라 금품의 액수를 낮춰 최소 30만원까지 받았다. 검찰은 당초 죄질이 나쁜 청탁 부모 14명을 구속대상으로 정했으나 3명은 달아나고 나머지 11명 중 4명의 영장이 기각돼 결국 7명만 구속했다.가톨릭 의대 李모교수 등에 대한 법원의 영장기각 사유는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이번 수사가 96년 12월부터 올 2월까지 元준위의 수첩에 기재된 438명의 명단을 중심으로 이뤄진 점과 元준위가 10여년 가까이 모병 연락관으로 일했던 점을 감안할 때 병역특혜를 받은 사람은 최소한 3,000∼4,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자민련 “이번 기회 東進해볼까”

    ◎PK지역 자신감 국민신당 의원들에 눈짓/무소속 출신 한나라 의원 등 영입대상 올려 자민련이 동진(東進)을 서두르고 있다. 7·21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해운대·기장을을 따내자 PK(부산·경남)지역에 자신감이 붙었다. 朴泰俊 총재가 진두 지휘에 나섰다. 국민신당 金운환 의원에게 먼저 손짓했다. 선거 다음날 아침 전화를 걸어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는 “정치를 함께 하도록 생각을 잘해보라”고 했다. 사실상 입당 제의다. 金의원은 부산·울산·경남권 영입 대상 1호다. 그는 한때 해운대·기장을도 지역구로 갖고 있었다. 15대 총선 때 갑·을구로 분구되자 손을 뗐다. 한동안 이곳을 관리해온 ‘노하우’를 활용,자민련 金東周 후보를 도와줬다. 朴총재도 서너차례 만났다. 같은 당의 韓利憲 의원도 자민련의 구애대상이다. 자민련은 국민신당이 잇따른 선거 참패로 붕괴직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韓의원이 자민련을 찾을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金의원과 韓의원은 “자민련 입당을 생각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민련은 한나라당 PK지역 출신의원들을 유심히 관찰 중이다. PK지역은 의외로 무소속후보 출신 의원들이 적지 않다. 鄭夢準 金容甲 黃性均 金在千 의원 등은 무소속 출신이다. 구여권인 한나라당에 애착이 덜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 현역의원들 가운데 일부도 비슷한 성향이라는 게 자민련 판단이다. 물론 영남권 영토확장 대상에는 원외 인사도 포함된다. 지난달 입당한 朴翊柱 白璨基 梁在淃 曺亨富 전 의원 등을 새 위원장으로 전진 배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내친 김에 영남권 원외지구당 절반 이상의 교체를 시도할 방침이라는 게 한 관계자의 귀띔이다.
  • ‘병역畢’에 더 많은 혜택을(사설)

    입법예고중인 병역법개정안은 군복무기간을 직장의 근무연한으로 산정해주지 않는 기업주를 300만원 이상,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처벌규정을 신설하고 있다.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부정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나가는 것과 함께 병역의무를 필한 사람에게 여러가지 혜택을 줌으로써 누구나 기꺼이 병역의무를 다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개정안의 취지는 바람직한 것으로 적극 지지한다. 군복무기간의 호봉산정 규정은 현행 병역법에도 있지만 처벌규정이 없어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젊은이는 누구나 병역의무를 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문제가 있다. 元龍洙 준위의 병무비리사건에서도 보았듯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녀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 한다. 비싼 돈 들여 멀쩡한 자식을 병신으로 만들면서까지 병역의무를 기피하려 한다.부유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는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를 보면 ‘너희 부모 양부모 아니니’라고 놀린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한창 장래를 준비하고 학업에 열중해야 할 젊은이들에게 2년여의 기간은 황금같이 귀중하다. 군대에 가고 안 가고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든 이 차이를 보상해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모든 국민에게 병역의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과 면제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 한 군복무기간의 호봉산정뿐 아니라 혜택을 더욱 늘려야 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병역을 필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손해가 아니라 더 이익이 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누구나 기꺼이 병역의무를 다하려 할 것이며 기피하거나 면제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병무비리사범에 대한 처벌은 아무리 강화해도 어떤 수단으로든 교묘하게 빠져나가려 할 것이기 때문에 병무비리를 근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신규채용에서 병역을필한 사람에게 지나친 우대를 해주는 것은 자칫 다른 사람의 기회를 제한하거나 성차별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병역의무를 마치고 복학하는 학생에게는 국비 장학금 등을 우선하여 지원하고 학비감면의 혜택도 고려해봄직 하다. 실직자들을 위해 최근 실시되고 있는 공공근로사업 등에서 병역필자를 우선해주는 방안 등도 있을 것이다.
  • 외환매입 제한 폐지 문답풀이

    ◎소지목적땐 지정은행서만 구입 가능/용도 확실하면 보유금액 제한 안받아 정부가 20일 외환매입 제한을 없애는 등 지난해 10월 말 이전 수준으로 외환거래제도를 대폭 완화했다.주요 내용을 알아본다. ­달라진 내용은. ▲외화 예금과 소지를 목적으로 한 외환매입의 제한이나 실수요를 위한 외환매입시기의 제한이 없어지게 된다.지난해 10월 말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보면 된다. ­예금하기 위해 외화를 사려고 하는 데 언제,얼마까지 살 수 있나. ▲여러 은행에서 아무 때나 얼마든지 매입할 수 있다. ­해외 예치를 위한 매입도 제한이 없나. ▲아니다.국내 예치를 위한 외화매입만 제한이 없어진다. ­해외여행에 대비해 외화를 갖고 있으려고 한다.금액과 매입시기에 제한이 없나. ▲소지목적이라면 언제든지 외화를 매입해도 된다.다만 1인당 연간 2만달러까지만 매입할 수 있다. ­갖고 있을 목적으로 여러 은행에서 각각 1인당 연간 2만달러씩 살수 있나. ▲아니다.소지목적의 외화는 계속 거래하고 있는 지정은행을 통해서만 매입해야 한다.이 은행을 통해 여러차례 외화를 살 수는 있지만 한도가 2만달러로 묶인다는 뜻이다. ­수입대금 결제용 외화도 한개의 지정은행을 통해서만 매입해야 하나. ▲아니다.결제용 등 용도가 분명한 외화는 아무 은행에서나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수출대금으로 받아 보유하고 있는 외화도 금액제한을 받나. ▲수출대금으로 받은 외화는 얼마든지 보유해도 관계없다. ­수입대금 및 용역대가를 지불하려면 외화를 언제 사야 하나. ▲지금까지 수입대금이나 용역대가를 지불하기 위한 외화매입은 실제 지급하는 날로부터 5일 전까지만 허용됐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같은 시기제한이 완전히 없어진다.언제든지 금액에 관계없이 외화를 매입할 수 있다.다만 용처를 입증할 증빙서류가 있어야만 한다.
  • 국산 치아교정장치 나왔다/한국인 특성맞춰 효고 탁월

    ◎1세트 5만원… 가격도 저렴 우리나라 사람의 치열상태와 턱뼈 특성에 맞는 치아교정용 장치(브라켓)가 국내 연구진에 의해 처음 개발됐다.‘코리안 스마트’라는 이 장치는 연세대 치과대학 교정과 박영철 교수팀이 2년반에 걸친 산학연구를 통해 최근 결실을 거둔 것이다. 그동안 사용돼온 수입교정장치는 서양인들의 치아와 턱뼈 기준치에 맞춰 제작된 것이라 우리가 쓰기엔 문제점이 따랐다.우리나라 사람의 치아에 잘 맞지않아 교정도중 이가 이동할때 뿌리에까지 영향을 미쳐 장치를 몇번씩 바꿔야 했고 교정기간도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고안된 교정장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치아위주로 제작된 것이라 교정효과가 훨씬 뛰어나다.정상인 160명을 대상으로 치아의 각도와 크기 두께,턱뼈의 형태 등을 조사해 국내 처음으로 정상인 치아 표준치를 정한 다음 이 수치에 따라 제작됐다.이 표준치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은 서양인에 비해 치아의 크기가 작은 대신 형태는 더 동그랗다.또 턱뼈의 모양은 더 각진것으로 밝혀졌다. 값도 세트당 5만400원으로 종전의 11만2,000원에 비해 절반 수준이며 연간 50억원의 수입대체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박교수는 이달초부터 본격적으로 치과에서 사용중이라고 밝히고 “우리나라 사람들과 치아형태가 비슷한 동남아국가들이나 서구에 거주하고 있는 동양인을 대상으로 수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軍복무자 호봉가산 의무화/위반땐 최고 3천만원 벌금

    ◎공익근무도 공무원시험 5% 가산점/병무청,법개정안 입법예고 앞으로 공공기관은 물론 일반 기업체의 사용자가 근로자의 병역의무 복무기간을 실제 근무기간으로 인정,호봉 승급에 반영해 주지 않으면 300만∼3,00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또 28개월의 공익근무을 마친 복무자도 현역 근무자와 마찬가지로 6급 이하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총점의 5%를 가산점으로 받는다. 병무청은 20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병역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개정안은 관계부처 등과의 협의 및 국회 의결과정 등을 거쳐 빠르면 내년부터 시행된다. 병무청 관계자는 “현행 병역법에도 군 복무기간을 호봉 승급에 반영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으나 위반 업체에 대한 법적 제재조치가 없어 대부분의 기업체들이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의무규정을 이행하지 않는 고용주에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형사 처벌조항을 신설한 것”이라고 밝혔다. 개정안은 또 유학이나 해외 취업 등으로 일정기간 병역의무를 연기한 뒤 귀국하지 않는 경우 귀국보증인에게 물리는 과태료를 현행 3,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올렸다. 공사상자 가족의 범위도 현행 ‘아버지 또는 형제’에서 ‘부 모 또는 형제 자매’로 확대,모 또는 자매가 여군으로 자원 입대해 복무 중 사망하거나 다친 경우에도 가족 중 한사람은 보충역에 편입돼 6개월간의 공익근무만으로 병역의무를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공익근무 요원이 복무 중 정당한 이유없이 출근하지 않는 경우 경고조치와 함께 결근 일수의 5배를 연장 복무하고 4회 이상 경고 조치를 받으면 형사고발해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도록 했다.현재는 공익요원이 복무 중 정당한 직무명령을 어길 경우 현역으로 입대하게 돼있다. 징병검사나 병역 복무기간 중 질병이나 심신장애로 인해 병역 감면처분을 받은 경우 질병 등이 치유되거나 호전돼 본인이 희망하면 재검을 실시해 현역으로 입영할 수 있다. 개정안은 이밖에 지방병무청이 복무기관과 복무분야를 미리 결정해 공익요원을 소집하던 것을 앞으로는 복무기관만 먼저 정하고 구체적인 복무분야는 복무기관이 결정하도록 했다.복무기관이 업무 수요에 따라 공익근무 요원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대학편입 4만1,000명 모집/2학기

    ◎사상 최대… 서울지역 1만2,000명/경기침체로 휴학·미등록 학생 크게 늘어 IMF 이후 휴학생과 군입대생이 급증해 98학년도 2학기 각 대학의 일반 편입학 모집 규모가 사상 최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17일 대학편입 전문기관인 중앙편입사와 김영한국대학편입사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의 올 2학기 일반 편입생 모집 규모는 4만1,000여명으로 지난해 같은 때의 1만3,700여명보다 3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서울지역은 상명대가 973명(천안캠퍼스 포함),성균관대 685명,숙명여대 425명,홍익대 332명,세종대 305명 등 모두 29개 대학이 1만2,000여명을 뽑는다. 지난해는 9,600여명을 뽑았다. 일반 편입학 선발 규모가 지난해보다 대폭 늘어난 것은 IMF 이후 경기침체로 휴학생과 자퇴생,미등록 학생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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