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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민주 국회상위장­특위장­사무총장 프로필

    ◎김덕규 행정경제위/말솜씨 좋은 외유내강형 3선 재주와 말솜씨가 빼어난 외유내강형의 3선의원. 6·3세대로 구신민당 송원영원내총무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제11대 때 민한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발발이」란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지역구 관리에 열성적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야당사무총장을 무난히 수행한 것이 이번 발탁의 배경이라는 관측. 부인 이정이(51)씨와 사이에 2남. ▲전북 무주(53) ▲고대정외과졸 ▲11·13·14대 의원 ◎이영권 교육위/교수출신 집념형… 지자에 밝아 80년 신군부가 득세하자 광운대 교수을 떠나 민권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당시 전두환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외곬수라는 얘기를 듣고 있으나 집념 하나만은 알아준다는 평가. 당 지자제특위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지방자치문제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당내 비주류로 김상현고문과 친하며 이번 국회직 인선에서도 비주류몫으로 상임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이 정설. 부인 오금련씨(55)와 사이에 1남. ▲전남 장흥(58) ▲조선대 법대졸 ▲민권당대변인 ▲12·13·14대 의원 ▲민주당 전남지부장·당무위원 ◎박상천 보사위원장/정연한 논리·예리한 분석 강점 검사출신의 논리가 정연한 재선의원.민자당의 박희태법사위원장과 고시 13회 동기로 13대 때는 두사람이 여야 대변인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용호상박의 입씨름을 벌이기도.탁월한 법률지식 못지 않게 정치감각도 수준급. 현안에 대한 분석이 예리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소신이 너무 강하고 지나치게 다혈질이라는 지적. 부인 김금자씨(45)와 사이에 1남2녀. ▲전남 고흥(56) ▲서울 법대 졸 ▲순천지청장 ▲13·14대의원 ▲신민당 대변인 ▲국회법률특위간사 ◎조순승 상공자원위/진솔한 성격에 당내신망 높아 미국 미시간대 정치학박사 출신의 야당내 외교통일문제 전문가.미국에서 오래 교수생활을 하다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총재의 권유로 고향인 전남 구례·승주에서 당선된 재선의원. 소탈한 외모대로 담백하고 진솔한 성격으로 당내에서 두루 신망이 높다.미국 조야에 지인이 많아 대미통상문제를풀어 나가는데 역할이 기대된다는 평가.부인 김덕애씨(64)와의 사이에 1남1녀. ▲전남 승주(65) ▲서울대 정치학과졸 정치학박사 ▲미 미조리대 교수 ▲13·14대 의원 ▲민주당 통일국제위원장 ◎홍사덕 노동환경위/이지적 풍모의 「차세대 정치인」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능란한 화술이 돋보이는 3선.중앙일보 기자출신으로 제12대 때는 신민당 대변인으로 특유의 정치적 감각을 발휘,이민우총재의 「삼양동정치」를 좌우한다는 평판속에 양금의 눈총을 받기도.13대 때는 무소속으로 서울 강남을에서 출마,낙선했으나 14대에서 설욕하는 저력을 보이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부인 임경미씨(51)와 사이에 1남2녀. ▲경북 영주(51) ▲서울대 외교학과졸 ▲한국기자협회부회장 ▲11·12·14대 의원 ▲신민당대변인 ▲구민주당부총재 ◎장경우 체신과학위/인선직전 입당… 실리밝은 3선 27일 밤 민주당 전격입당으로 상임위원장을 차지할 정도로 실리에 밝은 3선.막판까지 통합신당의 원내총무직과 민주당 상임위원장직을 저울질 하다 민주당쪽을택했다. 제11대 때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정계에 입문,13·14대 안산·옹진에서 연속 당선.지난 92년 민자당 대통령후보경선 때 이종찬후보진영에 가담,이의원과 함께 새한국당을 창당했으나 끝내 이의원 곁을 떠났다. 부인 김수복씨(47)와의 사이에 3남. ▲경기 시흥(52) ▲고대 경영대졸 ▲11·13·14대의원 ▲민자당 제1사무부총장 ▲새한국당 사무총장 ◎최락도 사무총장/원만한 성격·논리 대응력 겸비 모나지 않은 성격이면서도 논리적 대응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3선의원.특정 계보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스타일. 두번째 출마한 11대 총선에서 아깝게 낙선하자 득표가 저조했던 지역에서 리어카행상을 하며 선거운동을 벌인 집념의 정치인. 3군데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한 학구파.부인 강금순여사(56)와 사이에 2남2녀. ▲전북 김제(56) ▲중앙대 법대 졸 ▲5공특위 간사 ▲민주당 전북도지부장 ▲민주당 당기위원장 ▲12·13·14대 의원 ◎이우정 여성특위/인권·여송운동 헌신 재야 출신 인권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평생을 바쳐온재야출신 원로이면서도 대인관계가 원만하다.고령에도 불구,아직도 목소리가 앳되어 인기. 70년대 3·1구국선언등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초대 여성단체연합회장을 역임하는등 여성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아 신설된 국회여성특위 위원장감으로는 최적격이라는 평가.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신소설 「자유종」의 작가인 이해조씨의 손녀로 독신이다. ▲경기 포천출신(71) ▲한신대졸 ▲서울여대교수 ▲여성단체연합회장 ▲신민당수석최고위원 ▲민주당최고위원·당무위원
  • 민주주류/「홍부의장 선출」 조직적 반발/국회 원구성 이모저모

    ◎이전의장 95표… 황의장 득표율 63% “저조” 제14대 국회 후반기 원구성을 위한 28일의 국회 본회의에서는 일부 야당의원들이 의장선출은 물론 야당몫의 부의장선출에서까지 조직적으로 반발,투표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개회직후 실시된 의장선출투표에서 황락주의장은 총투표수 2백78표 가운데 1백74표를 얻어 무난히 당선됐으나 득표율면에서는 62.6%로 지난 71년 제8대 백두진의장(62.5%) 다음으로 최저를 기록. 반면 이만섭전의장은 무려 95표를 얻어 야당이 조직적으로 황의장에게 반발했음이 입증. 이어 실시된 여당몫 부의장선출투표에서는 이춘구의원이 2백24표를 얻어 의장단 가운데 최고득표율로 피선. 야당이 의장선출투표에서 무더기로 반발한데 대한 여당의 대응반발여부로 관심을 끈 민주당몫 부의장선출투표에서는 내정된 홍영기의원이 과반수가 훨씬 넘는 1백97표를 얻었으나 주류측의 부의장 주자였던 김봉호의원도 31표를 획득,홍의원을 내정한 데 대한 주류측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 이날 의장단선출은 개회뒤 바로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국민당 김동길대표의 갑작스런 의사진행발언으로 지연. 김대표는 발언을 만류하는 이전의장과 한동안 옥신각신한 뒤 새한당 장경우의원의 민주당행을 빗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려고 하면 여당뿐 아니라 야당에서도 무너뜨린다』면서 『왜 국회직을 놓고 그리 흥정이 많은가』라고 민주당을 겨냥. 그는 이어 『이만섭의장이 그만하면 잘했는데 정치적인 힘에 의해 밀려나가니 일말의 설움이 있다』면서 은근히 황의장에 대한 반대투표를 유도. ○…본회의에 앞서 열린 민자당 의원총회에서 지도부는 황락주 의장내정자에 대해 일부에서 있을지도 모를 반란표를 집중 경계. 김종필대표는 『국회의장은 입법부를 이끌어갈 우리의 대표』라면서 『대표를 모시는 정성에 상상을 초월해 웃기는 짓을 하려는 사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 이한동원내총무도 『국회를 제도적으로 개혁한 새국회법에 따라 구성되는 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에 동료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지를 모아달라』고 당부. ○…한편 민주당은 전날 자정까지이어진 최고위원회의에서 상임위원장 인선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해 이날 아침 7시부터 회의를 재개했으나 본회의가 열리기 1시간전까지도 합의를 보지 못하자 이기택대표에게 결정을 위임.이에 따라 주류측은 우선 야권대통합을 내세워 새한국당에서 입당한 장경우의원을 체신과학위원장에 내정. 조순승상공자원위원장은 재선이지만 국제정치학자로서의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실력을 인정받았고 박상천보사위원장은 그동안 정치개혁입법을 위한 여야협상에서 당에 기여한 공헌이 참작됐으며 이우정여성특위위원장은 당내 유일의 여성의원으로 처음부터 따놓은 당상이었다고.
  • 민주 상위장배분 싸움/진경호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제14대 국회 후반기 원구성을 앞두고 민주당은 하나의 「거래」를 했다.상임위원장 자리를 하나 주고 중진급 국회의원 1명을 영입했다. 명분이야 그럴 듯 하다.야권대통합 작업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그리고 어려운 결단을 내린 당사자를 예우해야 하기에 자리를 마련했다는 얘기다. 우리 정치가 그렇게 순수하다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원내교섭단체 정족수가 모자라는 국민당이 그를 영입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민주당이 유일야당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관건이 되고 있는 새한국당의 장경우의원을 빼돌려야 했던 것이다.자리를 안주면 들어오지 않겠다고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라도 상임위원장직을 내준 것이다.27일 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야권대통합의 초석이 되고자 한다』는 그의 거창한 입당선언이 실소를 자아냈지만 그래도 그것까지는 좋았다. 이날 하오 2시부터 민주당 최고위원 9명은 국회에서 주요 당직 및 6개 상임위원장직 인선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회의시작부터 최고위원들은 장의원의 상임위원장직 배정을 놓고 두파로 갈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벌였다.두차례 정회끝에 회의가 끝난 시간은 밤11시45분.무려 10시간 가까이 논쟁을 벌였지만 손에 쥔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에서 이기택대표와 동교동계의 권로갑·한광옥최고위원,유준상최고위원등은 장의원에게 상임위원장직을 주자고 했다.조세형·이부영·노무현최고위원등은 주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나머지 상임위원장 후보들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못했다.회의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의원도 있었고 언성을 높이며 흥분한 의원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장의원의 자질이 상임위원장에는 못미쳤기 때문일까.상임위원장직을 거래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대의 때문일까. 아니다.야당몫의 상임위원장직 6석이 모자라서였을 뿐이다.장의원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자기 측근의원을 상임위원장에 앉히지 못하겠기에 밤 늦도록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앉아 마냥 버텨야만 했던 것이다.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선임된 민주당 상임위원장 6명은 그런 이전투구끝에 승리한「용사」들이다. 어쩌면 9인9색인 민주당과 이전투구는 뗄라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14대 후반기국회 출범/의장단·상임위장단 선출

    ◎상임위원장/운영 이한동/법사 박희태/외무통일 나웅배/내무 김기배/재무 심정구/국방 황명수/문체공 신경식/농림수산 양창식/교통 박재홍/건설 이성호/정보 신상우/행정경제 김덕규/교육 이영권/상공자원 조순승/보사 박상천/노동환경 홍사덕/체신과학 장경우/특위위원장/윤리 이종근/여 이우정 국회는 28일 상·하오에 걸쳐 본회의를 열고 의장에 황락주부의장(민자),부의장에 이춘구의원(민자)과 홍홍기의원(민주)을 선출하는등 제14대 국회 후반기를 이끌어갈 국회의장단및 상임위원장단을 구성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은 김덕규행정경제,이영권교육,조순승상공자원,박상천보사,홍사덕노동환경,장경우체신과학위원장등 6개 상임위원장과 이우정여성특위위원장을 내정했으며 최락도의원을 당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날 본회의는 신설된 정보위원장등 17개 상임위원장과 윤리및 여성특위등 2개 특위위원장을 민자·민주 양당이 내정한 후보들로 선출했다. 여야는 이와 함께 소속의원들에 대해 상임위를 배정했으며 특히 일반 상임위와 겸임인정보위원에 당연직인 이한동민자,신기하민주당원내총무를 비롯,김종호 김영구 신상식 이인제 최병렬(이상 민자)유준상 권로갑 강창성 이부영의원(이상 민주)이 임명됐다. 이날 선출된 상임위와 특위 위원장단은 다음과 같다. ◇상임위=운영 이한동,법사 박희태,외무통일 나웅배,내무 김기배,재무 심정구,국방 황명수,문체공 신경식,농림수산 양창식,교통 박재홍,건설 이성호,정보 신상우(이상 민자),행정경제 김덕규,교육 이영권,상공자원 조순승,보사 박상천,노동환경 홍사덕,체신과학 장경우(이상 민주) ◇특위=예결 김용태,경쟁력 김한규 윤리 이종근(민자),여성 이우정(민주) 한편 새한국당 소속이던 장체신과학위원장은 27일 밤 민주당에 입당했다.
  • 새한국당 장경우의원/민주당입당 선언

    새한국당의 장경우의원(경기 안산·옹진)이 27일 민주당 입당을 선언했다. 장의원은 이날 입당선언을 통해 『정치가 실종된 현실에서 야권의 결집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야권통합논의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민주당에 입당한다』고 밝혔다. 3선인 장의원은 28일 있을 국회 후반기 원구성에서 민주당몫 상임위원장 가운데 한 자리를 내락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지역 안배」따라 의원들 희비교차/민자/국회직 인선 뒷얘기

    ◎계파이해 첨예 대립… 밤늦게까지 논란/민주 황낙주국회의장내정자등 민자당 몫의 국회직 명단이 27일 발표되자 정가에서는 일부 위원장들의 예상밖 인선을 놓고 배경분석과 함께 뒷말이 무성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날 하오 임시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야당몫의 상임위원장 인선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최고위원들간의 견해차이로 밤늦게까지 진통을 거듭해 민자당과 대조. ○…민자당의 이번 인선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지역안배원칙 적용과 함께 경력및 자리에 대한 전문성이 중시되었다는 것이 정설. 이날 발표된 국회직 15명을 출신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인천이 각 2명,충청 4명,호남 1명,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이 각 3명으로 지역안배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 그러나 이처럼 지역별로 고려하다보니 이승윤·심정구의원(인천)등 같은 지역출신 의원들간에 희비가 교차하거나 거의 내정단계였던 정재문·김진재·김봉조의원등 부산·경남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는 후문. 당직자들은 김대통령의 이번 국회직 인선에 대해『아주 잘된 인사』라며 전폭적으로 환영. 김종필대표는 이날 이한동총무가 청와대에서 들고온 인선봉투를 당3역과 함께 개봉한뒤 『총재님께서 인선을 아주 잘 하셨다』고 흡족함을 표시. 박범진대변인은 『황명수전사무총장 나웅배전부총리 김용태전원내총무 등 중진들이 상임위원장단에 포진한 것은 앞으로 상임위 활동의 비중이 증대될 징조』라고 한껏 기대. 한편 민자당은 이번 인선을 앞두고 국회의장과 부의장등 의장단을 뺀 국회직과 관련,몇몇 상임위원장 자리를 제외하고는 복수로 명단을 작성,수일전에 청와대에 보냈으나 정작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알기 때문인지 철저히 함구로 일관. 이총무는 이날 청와대로 출발하기 직전 인선전망을 묻는 취재진들에게 『대통령의 인사방식을 몰라서 그러느냐』고 예상밖의 인사가능성을 시사. ○…민주당은 야당몫 6개 상임위원장 인선을 놓고 각 계파간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선출일을 하루 남겨둔 27일 밤늦게까지 진통을 계속. 특히 이번 인선이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등 당직개편과 맞물린데다 새한국당의 장경우의원에게 입당조건으로 상임위원장직을 줄 것인지를 놓고 최고위원들간에 치열한 설전을 전개. 이날 하오 인선을 매듭짓기 위해 소집된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이기택대표와 유준상최고위원등이 장의원의 상임위원장 임명을 적극 주장했으나 이부영·노무현최고위원등은 이에 반대,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는 후문. 이에앞서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다선우선」과 「중임배제」가 인선원칙으로 결정됨에 따라 3선의 최락도·이영권·이철·홍사덕의원과 김대식전총무등이 상임위원장 0순위로 자연스럽게 부상.이밖에 3선인 김덕규사무총장과 재선인 김병오정책위의장도 중임배제원칙에 따라 상임위원장으로의 이동이 점쳐지기도. 또한 재선의원 가운데서는 당 기여도가 높은 박상천의원도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다른 재선의원들과의 형평성 시비와 함께 장경우의원의 입당과 맞물리면서 신설되는 정보위에 우선 배치하는 것으로 교통정리했다는 전문.
  • 오늘 「신민당」 국회등록… “향후정국의 핵” 으로

    ◎「제3 교섭단체」 가시권에/후반 원구성 상위장 1석 노려/장경우의원 입당여부로 촉각/「야권대통합」 악재에 민주 곤혹 28일 있을 제14대국회 후반기 원구성을 앞두고 제3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국민당과 신정당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새 원내교섭단체의 등장은 앞으로의 정국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정치권의 관심도 그만큼 높다.특히 이른바 「야권대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대통합의 악재가 될까봐 매우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통합선언후 당명을 「신민당」으로 정한 신당측은 통합전당대회에 앞서 우선 27일 원내교섭단체 성격의 「신민회」를 국회에 등록,원내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목표다. 이처럼 원구성에 앞서 교섭단체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상임위원장 1석을 차지하려는데 1차적 목적이 있고 정치자금법에 규정된 여러 혜택도 감안한 때문이다. 한영수의원등 신당주도파는 그동안의 활발한 접촉을 통해 김동길·박철언의원등 국민당소속 10명과 박찬종신정당대표·무소속의 서훈의원,그리고 이미 통합을 전제로 국민당에 입당한 무소속의 양순직·박박식·임춘원·김진영의원등 4명을 포함한 모두 16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국민당 소속의원 가운데 아직 서명을 하지 않은 김용환의원도 처음 생각을 바꿔 서명을 약속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여기에다 무소속의 정태영·이학원의원도 당일까지 서명에 동참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서명의원은 모두 19명에 이른다.「신민회」를 등록하기에는 한명이 모자란다. 때문에 새한국당의 장경우의원및 무소속의 윤영탁·변정일의원등 3명과 계속 접촉을 하며 이들의 합류를 학수고대하고 있다.특히 민주당측으로부터도 입당제의를 받고 있는 장의원에게 원내총무를 이미 「입도선매」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신당주도파는 이들 가운데 최소한 한명만 영입하면 되는만큼 원내교섭단체의 구성을 낙관한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없지는 않다.국민당 내부에서조차 이런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당 소속이면서도 통합신당에의 합류에 거부의사를 밝힌 이자헌의원은 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있고 장경우·윤영탁·정태영·이학원의원등이 서명을 할지도 아직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또한 양순직의원등 입당파 4명에게 주요당직을 「이면계약」한 것이 지금와서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28일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게 되는 박철언의원도 변수일 수밖에 없다. 국민당이 지난 25일 최고위원·당직자 연석회의에서 박의원의 형이 확정되면 대구 수성갑 보궐선거에서의 바람몰이를 바탕삼아 교섭단체 구성을 추진한다는 2단계 전략을 수립,슬쩍 한발짝 물러선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고려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 무소속 4명 국민입당

    양순직·임춘원·박규식·김진영의원등 무소속 국회의원 4명이 7일 국민당에 입당했다. 이들은 이날 상오 서울 여의도 국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을 기대하는 국민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제3정치세력을 복원하는 작업에 함께 참여한다』고 입당이유를 밝혔다.
  • 「야권재편」 민자 겉으론 “태연”

    ◎“제3교섭단체 구성땐 부담” 우려/일각선 “신당면면 비중 낮다” 느긋 국민당과 신정당의 합당선언이후 활발하게 전개되는 야권재편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민자당의 눈길이 매우 조심스럽다. 민자당은 내부적으로 야권재편의 진로와 이에 따른 손익을 계산하는데 분주하지만 아직 겉으로는 뚜렷한 대응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신정당의 합당과 관련,민자당이 일단 주시하는 대목은 김동길·박찬종 두 대표가 제3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있다. 국회의원 12석의 국민당과 단 1석의 신정당이 교섭단체를 이루려면 현재 16명의 무소속의원 가운데 7명 이상을 영입해야 한다. 민자당의 강삼재기조실장은 두 당의 통합에 대해 『당이 하나 새로 생기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그러나 만일 신당이 원내교섭단체까지 이루게 되면 솔직히 고민스럽다』고 토로했다. 최근 국무총리임명동의안의 처리와 국정조사 과정에서 나타나듯 민자당으로서는 솔직히 민주당과의 1대1 상대도 버거운 측면이 있었다.여기에새로 원내교섭단체가 등장,1대2가 된다면 두 야당의 정치협공에 자칫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 일각에서는 김정남 정몽준 정주일 정태영 차수명 김진영의원등 입당을 희망한 일이 있는 무소속의원들을 영입,신당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영입을 위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리고 이는 두가지의 상반된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민자당이 섣불리 무소속의원을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원내교섭단체의 출현을 막기 위해 「공작」을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내심 무소속의원의 영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다.여기에는 통합신당 구성원의 면면이 두려울게 없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어차피 민자당에 입당하기를 원하는 무소속 의원들은 신당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는 반대로 입당을 희망했던 무소속의원들이 민자당에 느꼈던 매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민정계의 한 의원은『최근의 정치상황은 새로 출현하는 신당의 입지를 매우 넓혀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선 국고지원의 증가로 신당이 최소한의 정치자금은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일부지역에서의 반민자 비민주 정서를 감안할 때 자치단체장 선거 참여등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민자당의 본격적인 대응은 야권재편의 흐름이 보다 구체화되는 시점에서부터 나타날 전망이다.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늦게 되면 정치의 중심무대는 한동안 야권에서 독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 “「제3교섭단체」 나올까” 정가 촉각/국민­신정 합당선언 그후

    ◎성사땐 정치구도 변화… 민주 「대표성」 약화/17∼18석 확보 가능성… 양대당의 대응 변수 국민당의 김동길대표와 신정당의 박찬종대표가 30일 통합을 공식 선언하면서 통합신당의 원내교섭단체 구성 가능성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합신당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한다면 지난 대선이후 민자·민주 양당체제로 유지돼온 정치구도가 3당구도로 재편돼 특히 야권의 세력판도에 변화가 불가피해진다.그동안 민주당이 독점해온 야권의 대표성을 상당부분 신당이 잠식하게 돼 정치권에 파장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통합신당의 의석수는 아직까지 13석(국민당 12·신정당 1)이므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7명의 의원을 더 영입해야 한다.대법원 판결에 달린 문제이지만 박철언의원이 실형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하는 일까지를 가상한다면 최소한 8석이상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이다. 국민당은 그동안에도 원내교섭단체를 이룬다는 방침아래 지난달 당발전특위를 구성,무소속의원들을 상대로 영입교섭을 꾸준히 벌여왔다.그 결과 임춘원·박규식·서훈·정주일의원등 4∼5명은 이미 합류의사를 굳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에 따라 국민당의 정기전당대회가 열리는 다음달 하순까지는 17∼18석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제는 나머지 2∼3석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이냐 하는 점이다.이와 관련,김진영·정태영·양순직·장경우의원등이 영입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그러나 한때 가장 입당에 적극적이었던 양순직의원은 박찬종대표와의 위상 때문에 신당합류에 회의적으로 돌아섰고 새한국당의 장경우의원도 이종찬대표와의 정치적 의리등을 고려,원내총무직을 보장받기 전에는 합류가 어렵다는 쪽이어서 이들의 영입작업은 좀더 두고볼 일에 속한다.특히 유일야당의 지위를 위협받게 된 민주당과 민정·공화계 일부의원들의 이탈을 우려하고 있는 민자당의 「방해작전」 가능성도 예상돼 당장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민주당의 이기택대표가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던 야권대통합은 이번 국민·신정당의 소통합에 따라 사실상 실현될 가능성이줄어들었다.반민자·비민주 정서를 갖고 있는 대구·경북지역과 충청권을 집중 공략,지역기반을 구축해 지방자치단체장선거와 총선에 임한다는 장기전략을 세우고 있는 통합신당의 야심이 범야권 유일야당을 추구하는 이대표의 생각과 동떨어져 있는데다 9인9색의 당내사정도 이를 어렵게 하고 있다.
  • 청와대 비서진 집단탈당 소동/정치특위 정당법 개정과정 “실수”

    ◎손질안한 「당원규정」 옮겨 적다 누락 지난해 12월 국회 정치관계법특별위원회가 정당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실무적인 「실수」가 민자당적을 갖고 있는 청와대 비서진등의 집단 탈당사태를 야기,정가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여야 동수로 구성된 정치특위는 당시 국가공무원법의 규정에 따라 정당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공무원의 범위를 개정 정당법에 그대로 옮기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개정될 법에 그 규정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각 부처의 차관과 청와대 비서실장및 비서관,국회의장 비서실장등이 빠졌다.실무자의 실수였다는 것이 정치특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결국 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국회의원,지방의원,선거직 자치단체장,국회의원보좌관,국공립대학 교원등을 제외한 공무원은 정당원이 될 수 없도록 정당법은 개정됐다. 이 때문에 청와대의 박관용비서실장과 이원종정무수석,김영수민정수석,홍인길총무수석,김무성민정·윤원중정무·김재석총무비서관·장학로제1부속실장,김대환총무·박영환·표양호공보비서관,정병국제2부속실장,김길환·오세천민정비서관,김덕봉행정·김도정무비서관,김기수수행실장,그리고 정성철전정무1장관보좌관,강성재국회의장비서실장등 모두 19명의 고위공직자가 새로운 정당법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위법을 저지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민자당은 이러한 사실을 지난달 중순 신·구 정당법의 조문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했다.이에 따라 강국회의장비서실장을 뺀 나머지 인사들은 지난달 22일자로 민자당에 탈당계를 제출,위법상태를 해소하기는 했다.실수에 따른 해프닝이라는 것이 여권의 대체적인 시각이지만 그 여파는 계속되고 있다. 우선 윤원중·김재석·김무성비서관이 전국구의원 예비후보자격을 상실하게 됐다.또 정성철전보좌관(차관급)은 당원자격을 상실한 상태에서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된 셈이 됐다.서울 성북을지구당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강국회의장비서실장은 27일에야 탈당계를 제출했다.재입당 후의 자리는 보장받았다 하더라도 고심끝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협상을 통해 정당법개정안을 만들어 낸 정치특위 위원들은 물론 민자당,민주당,청와대,그리고 법을 적용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조차 이러한 위법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농안법 파동에 이어 국회의 입법과정 특히 의원입법의 허술성,그리고 법운영과정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 삼성엔「서운한」대응/현대 「미운털」벗기기/재벌「거리조정」나선 여권

    ◎정주영씨 「은퇴」 이후 투자물꼬 터주기/현대/승용차사업 “여건성숙 안됐다” 회의적/삼성 재벌기업에 대한 여권의 거리조정이 가속화되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현대그룹 정주영전명예회장의 재계은퇴선언을 계기로 현대그룹의 행동반경은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반면 삼성의 승용차시장진출에는 신중한 태도로 균형잡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민자당의 민주계 핵심당직자는 10일 『현대그룹을 정부가 제재해왔다는 생각은 오해』라면서 『현대 스스로 조만간 국가경제의 주축으로서의 위력을 다시 발휘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그는 『지난 3일 경영은퇴에 관한 정씨의 기자회견이 청와대와 입을 맞춘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하고 『그러나 현대가 정씨문제로 그동안 경제활동에 심리적 위축을 받아왔다면 어떤 형태로든 이는 극복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그룹이 정씨의 기자회견 이후 처음으로 사장단회의를 열어 진취적이고 과감한 투자의욕을 과시한지 하루만의 일이다. 정부가 같은 날 전남 율촌공단의 현대자동차공장을 세울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것도 민자당에서는 무척 반기는 분위기이다. 이미 지난주에 정세분석보고를 통해 정씨와 박태준전포철회장등에 대한 국민화합차원의 조치를 거론했던 민자당은 현대 정상화의 모양과 시기를 놓고 고민해 왔던 게 사실이다. 경제활성화라는 필요에 쫓겨 정씨와 타협하는게 아니라 현대의 경제적 필요에 의한 투자참여가 이루어지기를 내심 바라왔던 것이다. 민자당은 정씨의 은퇴선언 직후 그가 경제활동에서 남긴 업적을 칭찬한 바 있다. 문정수사무총장도 『정씨에 대한 법적처리와 현대그룹에 대한 경제활동의 자유와는 별개』라고 말해 현대그룹의 투자의욕에 기대를 표시했다. 정씨의 6남인 정몽준의원의 입당설이 끊이지 않는 것도 현대와의 앙금을 씻으려는 여권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이에 반해 삼성의 승용차사업참여에 대한 민자당의 시각은 매우 회의적이다. 한 당직자는 『삼성의 승용차생산계획은 일본의 기술제공등 경제적 조건이 매우 우수한 측면이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현대·기아등 기존업체가삼성진입의 충격을 감당해낼 만큼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으로 안다』고 밝혔다. 10조원 규모로 추산됐던 삼성의 승용차공장이 부산에 들어서면 부품등의 연쇄적 파급효과가 엄청나며 이 때문에 부산지역에서는 삼성승용차사업의 허가를 학수고대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지만 민자당은 매우 조심스러워하고 있다.새정부출범전부터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아끼지 않은 데다가 새정부들어 정부와의 유착설로 현대와 비교돼온 삼성에 「특혜」를 주었다는 괜한 의혹을 받기 싫다는 표정이다. 이세기 정책위의장도 『경제는 이제 기업의 자율경영및 경쟁원리에 맡길 때』라고 삼성의 승용차진출에 긍정적인 뜻을 표하면서도 『그러나 경제원리는 국가경제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중복·과잉투자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 주민선택의 시·군 통합(사설)

    주민의 직접투표로 결정된 시·군통합 결과는 그 높은 지지율이 설명하듯 우리 지방행정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밀양시·군을 필두로 30개시,29개군이 통합에 찬성한 것으로 집계됐고 오는 5월2일과 3일의 전남·경기의 5개시,3개군등 5곳 정도가 추가통합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최대 35개 통합시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이 경우 시·군통합 권유대상지역인 49개시,43개군 가운데 시로서는 70%,군으로서는 80%이상의 통합성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번처럼 전국적 규모로 행정구역개편을 시도하면서 주민의 의견이 1백% 반영되기는 그 유례가 없다.특히 해방이후 처음으로 분리나 승격이 아닌 통합방식을 주민 스스로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주민들의 통합에 대한 찬성은 80년대 정치권의 이해에 얽혀 타의에 의해 행정구역이 쪼개진 이후 계속된 인구감소와 빈약해진 자치단체의 역세권을 회복하기 위한 행정구역 원상회복의 뜻으로 나타났다고 볼수 있다. 비록 충북 청원군등 5개군이 통합에 반대했지만 통합에대한 주민들의 지지율이 예상보다 높게 나타난 것은 내무부당국자의 분석처럼 주민들의 뜨거운 애향심과 높은 민주의식에 따른 것으로 지방자치시대를 앞당기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통합의 높은 찬성률이 지방화시대를 대비하여 경쟁력강화를 위한 제도적 구도를 갖출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성과로 꼽는다.이들 통합지역의 경우 앞으로 순수행정비용만 연간 1백10억원을 절감할 수 있고 또한 교육청·농협·의료보험조합등 유관기관이 통합될 때 최대 1백50억원까지 예산절감 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이 재원을 농·어촌 낙후지역 개발에 직접투자함으로써 급속한 지역사회의 발전은 보장받을 수 있다. 이번 6개도 34개시,31개군에서 실시한 의견조사에서 시보다 군쪽의 찬성률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음은 편입당하는 쪽의 불이익을 염려한 주민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는 판단이다.그러한 현상이 꼭 지역이기주의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지만 쓰레기처리장등 도시의 환경사업으로 불편을 강요당하는 경우를 우려한 것으로 이해된다.그러나 도로와 주택건설,상하수도,위락시설건설등 지역개발을 부추겨 도시주변지역주민생활의 질을 개선시킨다는 보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통합을 계기로 종전의 지역주민들이 소외되거나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후속조치가 치밀하게 강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더욱이 이미 공감대가 확인된 이상 두 당사지역 주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여 화합하는 모습만큼 강조될 일은 없다.
  • 체육행사 기념품제공 금지/선관위,사전선거운동사례 국회 제출

    ◎입당권유 위한 호별방문도 규제대상/「당대회 벽보」 1백장이상 게시도 위법 중앙선관위는 15일 국회에 「직무행위및 정당·사회활동과 관련한 사전선거운동 사례예시(안)」을 제출했다. 선관위가 정당활동과 관련해 사전선거운동으로 제시한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사회활동과 관련한 사전선거운동사례는 지난 3월30일자 선관위 지침과 같음,서울신문 3월31일자 보도). ◇창당·개편·합당대회등에 ▲당원이 아닌 선거구민을 참석하게 하는 행위 ▲일반선거구민으로부터 현장에서 입당원서를 받으면서 참석토록 하는 행위 ▲참석자에게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난 선물·기념품을 제공하는 행위 ▲1백장이상의 대회고지벽보를 게시하는 행위 ▲확성기·비디오·멀티비전 등으로 대회상황을 일반시민이 청취할수 있게 하는 행위 ◇당원교육·연수·단합대회등 당원집회에 ▲참석자에게 선물·향응을 제공하는 행위 ▲당원집회를 시장·역광장등 다수인이 왕래하는 장소에서 개최하는 행위 ◇정강·정책등의 홍보와 선전에 있어서 ▲정당의 기관지를 당원이 아닌선거구민에게 배부하는 행위 ▲각종 캠페인을 위한 현수막·벽보등에 후보예정자의 이름 성명 사진등을 싣는 행위. ◇당세확장을 위해 ▲집집마다 다니며 입당을 권유하거나▲정당·후보예정자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면서 금품등을 제공·약속하는 행위 ▲정당의 체육·민속행사 주부대학·교양강좌등에서 입후보예정자를 선전하거나 다수의 참가자에게 기념품등을 제공하는 행위. 한편 선관위가 선거운동으로 보지 않는 행위는 다음과 같다. ▲특정 정당 후보자를 당선시킬 목적 없이 단순히 좋거나 나쁨을 표시하는 행위 ▲정당의 후보자추천을 받기 위한 내부선출행위 ▲선거사무관계자를 물색하는 행위 ▲소속당원만의 통상적 내부활동 ▲선거와 관련없이 정치적 주장 형성을 위한 활동및 당세확장을 위한 정상적 활동 ▲국회·지방의원및 단체장이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직무행위▲사회적 활동이나 지위에 따른 업무행위나 의례적·사교적 행위 ▲학업·수학여행등으로 의사당을 방문한 사람을 식사나 기념품 제공 없이 안내하는등 행위.
  • 일 우익,아사히 신문서 인질극

    ◎2명 권총쏘며 난입… 6시간만에 붙잡혀 【도쿄 연합】 일본 우익단체인 대비회의 우치야마 구니야스 회장대행(41)등 2명이 1일 하오 1시30분경 도쿄도 쓰키치소재 아사히신문 본사 15층에 들어가 권총을 발사하며 인질극을 벌이다 하오 7시10분쯤 경찰의 설득에 따라 밖으로 나와 총포류단속법및 불법침입 혐의로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권총및 일본도,다이나마이트 등으로 무장해 권총 2발을 발사하며 15층 임원응접실에 침입,바리케이드를 치고 약 10여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으나 그후 임원 한사람과 비서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침입당시 발포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인질로 잡힌 두사람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우치야마 회장대행등은 아사히신문사에 들어간뒤 『전후체제에 있어서 아사히신문등 매스컴의 책임을 묻는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거리에 뿌렸다.
  • “사건의 열쇠” 무성 신병확보 총력/조계사 폭력사태 수사 이모저모

    ◎“폭력배 동원” 입증 범종진 활기/경찰,총무원 수사 진전없어 고심 조계사 폭력사태수사는 총무원측이 폭력배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파문이 점차 확산되는 가운데 새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무성스님」이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고 신병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등 내심 부산한 부위기. ○…이번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일부 「편파수사」와 「늑장수사」라는 비난을 의식한듯 『범종추측이 언론에 공개한 비디오테이프와 무선호출기등 증거물을 경찰에는 내주려고 하지 않아 수사 차질을 빚고 있다』며 수사에 진척이 없는 원인을 범종추측에 돌리기도. 한편 수사전담반이 구성된지 이틀째인 이날도 경찰은 『뚜렷한 수사진전사항이 없기 때문에 총무원 관계자들을 소환해 조사할 계획이 없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빈축. ○…경찰은 총무원 관계자에 대한 조사를 위해 기초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무원 관계자를 소환했으나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해 고심. 경찰은 지난달 31일 하오 6시30분쯤 조계종 총무원 규정부장 보일스님을 소환,집행부측의 개입의혹에 대해 집중조사를 벌였으나 규정부장이 이를 전면 부인해 이날 하오 9시30분쯤 귀가조치. 경찰은 또 뒤늦게 총무원 규정부 소속 「무성스님」이 괴청년들을 서울호텔에 집단 투숙시킨 뒤 카드로 숙박료를 결제했다는 정보에 따라 「무성스님」등 규정부 관계자를 추적하고 있으나 이들이 잠적해 소재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은 언론이 범종추의 자료를 근거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보도하는 바람에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수사부진을 언론의 탓으로 돌렸다. 경찰관계자는 『31일 하오5시쯤 서울 종로구 청진동 모호텔에 괴청년들이 집단투숙했으며 총무원 소속 승려가 숙박료를 결제했다는 제보를 받고 확인작업에 들어갔으나 이 내용이 앞서 보도되는 바람에 용의자 신병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불평. ○…이날 서울 성북구 안암동5가 중앙승가대학 본관 지하1층에 마련된 범종추집행부의 실무자들은 당초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던 사법처리 방향이 서의현총무원장측의 폭력배 사주쪽으로 초점이 모아지자 크게 고무된 듯 향후 일정을 짜고 여론을 모아가기위한 대책 마련하느라활기띤 모습. 범종추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경찰의 수사가 미진했으나 서총무원장의 범행이 백일하에 드러나 이젠 경찰도 어쩔수 없을 것』이라며 『이제 종단개혁이 멀지않았다』고 자신감을 피력. ○…도법·희문등 13명의 범종추소속 승려들은 이날에도 「종단개혁을 위한 단식행진」을 7일째 계속하며 서총무원장의 퇴진과 종단개혁을 촉구. 중앙승가대학 별관 3층 법당에 마련된 단식장에는 교계단체·선원·학원대표등을 비롯,월탄·설조·지하등 일부 종회위원들이 무기한 단식에 합세. ○…조계사 총무원청사3층 규정부사무실에는 이날 6∼7명의 직원과 스님들만이 자리에 남아 일손을 놓은채 잡담을 나누는등 어수선한 분위기. 직원들은 『고중록조사계장은 2∼3일전부터 이곳에 나오지 않고 있다』며 고계장의 소재와 무성스님의 신상에 관한 질문에는 『잘 모른다』라는 대답으로만 일관. ○…한편 폭력배들이 집단투숙한 것으로 알려진 종로구 청진동 S호텔의 청소부와 종업원들은 이날 폭력배들의 투숙사실을 확인하려는 취재진들에게 『전혀 알지못한다』『오늘부터 근무하고 있다』는 등으로 발뺌하고 있어 조계사측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 ○…또 범종추측에는 신도들로 생각되는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라 국민들이 이번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보여줬다. ○…지난달 29일 폭력배의 조계사경내 난입당시 바닥에 떨어졌던 무선호출기의 주인은 경기도 광명시에 거주하는 김모씨(30)로 밝혀져 광명일대의 폭력조직이 이번 사건에 가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대두. 사건후 김씨에게 호출기로 연락을 해 경찰과 폭력배와의 공모의혹을 짙게 했던 광명경찰서 Y모경위는 『동네 건달인 김씨가 TV에 나와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기 위해 호출했다』고 해명. ◎총무원 규정부란/승려 비리 적발·징계하는 곳 조계사 총무원 산하 6개 부서의 하나인 규정원은 말 그대로 종단 소속 승려들의 품행을 감찰하는 부서로 사회기관의 감사원에 해당한다.따라서 승려들의 잘못이나 비리등을 적발·소환·징계등을 내리는 것은 물론 평소에도 승려들의 동태를 살펴 총무원 집행부에 알리는 업무를 맡고 있다. 승려들이 종헌과 종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승려를 소환,자체조사를 벌여 사안에 따라 종단안의 사법부기능을 가진 호계(호계)위원회에 회부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규정부의 영향력은 상당히 커 호계위원회는 명목상의 사법부로서의 기능만 할뿐 실제 징계가 규정부의 입김에 의해 결정된다는게 종단 관계자들의 말이다. 규정부는 총무원장이 직접 임명하는 부장,부장의 품신으로 원장이 임명하는 정보·규정··조사등 3국장을 비롯,과장·계장·직원등 17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때문에 규정부는 부장·국장을 포함,직원들까지도 총무원장의 측근들이라는 것이다.규정부의 직원은 승려가 아닌 일반인으로 채용되기도 한다. 특히 규정부는 83년 설악산 신흥사·88년 서울 봉은사 폭력사태등의 종단분규를 비롯,주지 인수인계때의 시비등 크고 작은 종단문제에 개입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계사 폭력사태 시간별 일지◁ 28일 하오11시쯤 인근호텔에 20대 청년30여명 투숙 29일 상오 6시쯤 청년들 호텔 나감 〃 상오 6시10분쯤 조계사 경내에 청년 3백여명 들어와 「 범종추」와 충돌 〃 상오 10시쯤 조계사 인근호텔에 청년 1백여명 다시투숙 〃 하오 1시쯤 신용카드로 결제한뒤 호텔나감 〃 하오 4시10분쯤 서의현총무원장측과 범종추 재충돌,승려 50여명 부상 30일 상오 1시30분 총무원 요청으로 경찰 조계사 진입,범종추 승려 2백17명 연행 30일 상오10시 조계종 총무원 중앙총회강행 신임총무원장 선출
  • 지구온난화 방지/국제 「기후협약」 발효

    ◎2천년까지 탄산가스배출량 45% 줄여야/산업구조 개편 불가피 기후변화협약이 21일 정식으로 발효됐다. 이 협약은 화석연료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으로 석탄·석유등 이산화탄소발생량이 많은 에너지 사용을 감축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14일 47번째로 이 협약에 가입했는데 가입당시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앞으로 3년안에 화석연료사용을 줄이기 위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화석연료사용을 오는 2000년까지 90년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을 장기목표로 하고 있어 화석연료사용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에너지관리공단에 따르면 선진국 주장대로 200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90년 수준으로 동결하려면 우리나라는 44.9%를 줄여야 한다.우리나라 등 개도국 주장대로 90년 EU(유럽연합)의 1인당 평균 배출량 수준으로 동결하더라도 2000년까지 7.7%,2010년에는 24.4%를 줄여야 한다. 에너지공단은 이같은 배출감소량의 60%를 에너지이용 효율향상으로흡수해야 한다며,에너지 관리대상 품목을 에너지 다소비제품인 유도전동기,대형 에어컨,자판기,개인용 컴퓨터,전기세탁기,보일러 등 14개 품목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지금은 전기냉장고,조명기기,승용차,전기 냉방기 등 4개 품목 뿐이다.
  • 일 공명당/외국인 입당 허용/한인 등 투표권 쟁취운동 새전기

    【오사카 교도 연합】 일본 집권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공명당의 오사카현 지구당은 일본정당 중에서는 처음으로 재일 한인을 포함한 영구 거주 외국인들에게 당원가입을 허용키로 했다고 지구당 관계자들이 14일 밝혔다. 관계자들은 이달 초 공명당 오사카 지구당이 이같은 결정을 도쿄 소재 한국민단(민단)측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관계자들은 또 중앙당이 지구당의 이같은 방침을 승인하고 외국인 당원이 당집회에 참석하고 서명을 받는 등 각종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공명당 당 규약은 당원 가입 조건으로 18세 이상이 될 것과 다른 당원 2인 이상의 소개서를 첨부하고 지구당책들의 승인을 받을 것만을 요구하고 있으며 외국인에 대한 어떠한 금지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고 관계자들은 덧붙였다. 민단의 한 고위관계자는 공명당의 이번 결정에 대해 훌륭한 결정이라고 환영하고 이는 일본내 외국인들의 투표권 쟁취 운동에 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 일리에스쿠는 누구인가/차우셰스쿠 몰락후의 혼란 수습

    ◎첫 민선대통령… 개혁의 상징인물 9일 방한한 루마니아의 이온 일리에스쿠대통령(64)은 지난 89년 12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 집권한 첫 민선대통령이다. 그는 한때 차우셰스쿠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부쿠레슈티공대 전자공학부를 졸업하고 공산당에 입당,지난 67년 겨우 38세에 청소년부장관을 역임했다.차우셰스쿠의 공산정권 아래서 출세가도를 달린 것이다.그러다 71년 루마니아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담당서기 때 당의 개혁 노선을 둘러싸고 차우셰스쿠의 눈밖에 나게된다. 곧 티미스라는 조그마한 지방도시로 좌천되고,그때부터 개혁의 상징인물로 성장한다.79년 국가수력위원회위원장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그만둔 뒤 84년부터는 차우셰스쿠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비밀경찰의 주요 감시대상이 된다.5년동안 수모를 겪다 89년 차우셰스쿠정권의 몰락과 그의 죽음을 목도한다.그 사이 그는 루마니아의 가장 강력한 정치가로 성장,대혼란을 수습할 구국전선위원장에 뽑혔다.90년 5월 총선을 거쳐 첫 민선대통령이 되고 92년10월 개헌에 따라 임기 4년의 대통령에 재선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력발전·인권·환경·정치·사회발전등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썼을 만큼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자녀가 없어 부인 에레나여사와 단둘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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