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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면·동 비치 방독면 애물단지로

    읍·면·동 비치 방독면 애물단지로

    #28일 울산 A동주민센터 민방위 장비창고. 1991년부터 2005년까지 생산된 민방위용 방독면이 박스 96개(한 박스 10개)에 든 채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곳에 보관된 962개 방독면 가운데 98.8%인 951개가 2005년 이전 생산돼 유효기간(5년)을 넘긴 제품이다. 이 중에는 지난해 성능검사에서 불량으로 판명돼 폐기처분 된 방독면(1991년 생산)도 24개가 포함돼 있다. 박스 옆에는 새로 구입한 방독면 정화통들이 별도 포장돼 있다. ●울산 등 전국에 340만개 보급 전국의 읍·면·동 주민센터에 비치된 민방위용 방독면이 대부분 유효기간을 넘긴 제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예산 부족 등으로 방독면 공급이 2006년 이후 4년째 중단됐다. 방독면 성능 유지를 위한 정화통 교체는 여전히 이뤄질 뿐이다. 28일 소방방재청과 전국 지자체에 따르면 민방위용 방독면은 전쟁 등 유사시를 대비해 1986년부터 2005년까지 전국 읍·면·동 주민센터에 총 340만개가 보급됐다. 방독면은 국비(30%)와 지방비(광역 35%·기초 35%)로 구입됐다. 방독면의 유효기간이 5년이다. 울산 A동주민센터에 보관중인 방독면 박스에는 ‘방독면 유효기간(정화통 제외) 5년’과 ‘정화통 유효기간(밀폐상태) 5년’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울산 A주민센터가 보관 중인 전체 962개 중 2005년산 11개를 제외한 나머지 98.8%인 951개는 이미 유효기간을 넘겼다. 이 중 지난해 폐기처분 대상에 포함된 1991년산이 24개나 됐고, 10년이 넘은 제품(1999년 이전 생산)도 558개로 확인됐다. 이처럼 보관 중인 방독면 대부분이 유효기간을 넘긴 점은 전국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사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전국 읍·면·동은 방독면 구입당시 포장상태로 창고에 쌓아 두고 있다. 게다가 민방위 창고는 평상시 거의 이용하지 않아 방독면의 기능을 떨어트리는 습기와 통풍의 문제점도 안고 있다. ●보급 중단돼도 정화통 교체… 예산낭비 이에 대해 소방방재청과 지자체는 “보관만 잘하면 유효기간에 상관없이 통상적으로 14~15년간 사용할 수 있다.”며 “매년 군 기관에 의뢰해 성능검사를 실시해 성능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지난해 군 기관에 성능검사를 의뢰한 결과 1991년산만 불량으로 나왔고, 1992~93년 생산제품은 괜찮은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방독면이 전국 340만개가 넘어 오래된 제품을 대상으로 성능검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개봉을 안했다고 해서 보관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고, 20년 가까이 창고에 쌓여있던 제품 중 일부가 샘플검사를 통과했다고 해서 모두가 적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일반적으로는 유효기간을 지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기초단체들이 2006년 방독면 보급 중단 이후 성능연장을 위해 해마다 수백만수천만원의 예산을 정화통 신제품 교체에 투입하고 있다. 지자체 한 관계자는 “방독면은 그냥 창고에 쌓아 두는 게 현실”이라며 “이미 보급이 중단된 만큼 정화통 교체 등에 불필요한 예산을 투입하는 것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친박 정수성 입당 놓고 한나라 술렁

    친박계인 무소속 정수성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 신청이 친이·친박간 갈등에 새로운 불씨를 던지고 있다.친이계는 정 의원의 입당 문제가 친이·친박간 화합 논의에 장애가 되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당내 분란을 촉발할 수 있는 정 의원의 입당 문제를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4·29 경주 재선거에서 한나라당 정종복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정 의원은 지난 17일 입당을 신청했다.하지만 친박 쪽의 입장은 다르다. 박근혜 전 대표는 18일 국회내 한 행사에 참석했다가 기자들과 만나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자신의 안보특보를 지낸 정 의원의 입당 신청에 대해 “(당에) 들어오면 좋지요.”라고 밝혔다. 박 전 대표가 최근 당내 현안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의중이 실린 발언으로 여겨진다.하지만 친이 쪽은 마뜩잖은 표정이다. 지난 15일 친박 복당 의원들이 당협위원장을 승계한 틈을 타 ‘내친김에 밀고 들어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며 불쾌감을 내보였다.장광근 사무총장은 “빨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오늘 최고위원회에서 긍정적이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굳이 서두르느냐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입장을 정리했다.”고 선을 그었다. 장 총장은 “정 의원은 친박 복당 의원들과 달리 한나라당에 복당하는 게 아니라 새로 입당하는 것인데 이는 최고위원회가 아니라 시·도당에서 결정할 문제”라면서 “최고위원회 분위기를 경북도당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결국 정 의원의 입당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 당내 분위기다. 친이 쪽에서 향후 친이·친박간 화합의 징검다리 격으로 정 의원의 입당을 카드로 활용할 심산도 없지 않아 보인다.친박 쪽에서도 당장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성헌 의원은 “한나라당 후보가 선거에서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다. 바로 입당 조치를 하면 한나라당으로 뛴 사람들이 섭섭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 의원의 입당 문제를 놓고 화합 카드 운운하며 정치적인 의미까지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친이 쪽의 기류에 일침을 놓았다.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北 김정운 후계 구도] 세습과정 다른점

    [北 김정운 후계 구도] 세습과정 다른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정운이 후계자로 확실시되는 것으로 정보당국도 파악하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운의 후계과정에서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뭘까. 김 위원장은 1961년 노동당에 입당해 선전선동부, 조직지도부에서 활동하면서 경쟁자들을 숙청해 나갔다. 권력승계 작업은 1971년 김일성 주석이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사노청) 6차 연설에서 권력세습 의사를 밝히며 시작됐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39세. 김정일 위원장은 당 중앙위 정치위원에 임명된 1974년 사실상 후계자가 됐다. 공식 지명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이뤄졌다. 김 위원장은 당의 정치국원이자 당 비서국의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당내 서열 2위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해 나가는 방식으로 권력을 승계 받았다. 김정일은 이 과정에서 ‘수령인 김일성의 혁명 전통을 가장 훌륭하게 계승,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김정일’이라는 혁명계승 후계자론도 만들었다. 김 위원장과 아들 정운은 혈통에 의한 권력 세습 및 후계자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후계자 지명까지의 절차 및 과정, 속도 등은 다르다. 김 위원장이 후계자가 됐던 1970년대에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비교적 괜찮았다. 김일성 부자에 대한 북한 인민과 권력 엘리트들의 충성도가 높았던 편이다. 때문에 2대 세습에 대한 북한 내 반감 및 권력 투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상황은 과거와는 다르다.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됐을 때에 비해 체제 위기가 심화됐다. 북한 주민들의 살림살이도 매우 나빠졌다. 김 위원장의 아들 3명을 중심으로 후계자로 만들려는 권력 그룹도 나눠져 있다. 이러한 권력 갈등 탓에 김 위원장은 지난 2005년 권력 후계 구도 조기 마련안을 건의받았으나 권력 분열 양상을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논의를 중단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지난해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권력 승계 작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은 올 1월 정운의 25회 생일에 그를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교시가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비밀리에 내려갔다. 이후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국방위원 겸임)을 중심으로 국방위가 후계구도 구축을 은밀하게 추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정운의 후계자 지명 작업이 최근 5개월 사이에 속전속결로 진행된 셈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청문회스타… 대통령… 투신… 풍운의 정치역정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청문회스타… 대통령… 투신… 풍운의 정치역정

    23일 오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줄곧 우리 사회의 주류와 다투는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대통령 임기 중에도 노 전 대통령은 수많은 성역과 금기에 맞서 고군분투했다. 그가 불러 일으킨 ‘노풍(風)’은 주류 사회에 불어 닥친 비주류의 ‘반란의 바람’과도 같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아버지 노판석(사망)씨와 어머니 이순례(사망)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 자매로는 큰형 영현(사망)씨와 둘째형 건평(67·구속)씨, 누나 명자(81)·영옥(71)씨가 있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영 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각각 졸업했다. ●고졸로 사시 합격… ‘인권 변호사’로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자란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 원주에 있던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만기 제대 후 노 전 대통령은 같은 고향 출신인 부인 권양숙(62)여사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36)·딸 정연(34)씨를 낳았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권 여사는 할아버지의 병 문안차 고향에 갔다가 군에서 막 제대한 노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연인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고졸 출신에게 사법시험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통과한 뒤 두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였다. ‘변호사 노무현’은 곧 ‘인권 변호사’로 인식된다. 1981년 5공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명 남짓을 기소한,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을 변론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학생과 노동자 등이 연루된 사건을 도맡아 변호하면서 ‘인권 변호사’로 알려지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인생은 한마디로 ‘풍운아’라고 요약할 수 있다.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 1988년 국회 입성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재야인사 영입 사례로 이뤄졌다. 그는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며 ‘청문회 스타’로 부각됐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1996년 서울 종로 패배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계속되는 패배로 정치권의 야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당시 민주당 잔류파와 함께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가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지지 등으로 의견이 갈릴 때 “시대의 과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이어 1998년 7월 종로 보궐선거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쓴 맛을 보게 된다. ●‘노사모’ 바람 일으켜 대통령 당선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은 새로운 전기로 작용했다.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정치인 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 차례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듯, 약점을 보완하는 기간이었다.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뒤 노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대선 후보경선 준비에 나선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했다. 몇 차례 말 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지지도 하락을 겪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다시 힘을 얻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소액기부를 유도하기 위해 나눠 준 ‘희망돼지 저금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표 하루 전날 정 후보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그는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대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의 행보 역시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었다.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 일으켜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며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떠받친 것은 ‘충돌’과 ‘도전’이었다. ‘도덕성’은 힘의 근원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성장기와 자수성가형 인생 스토리는 ‘못 가진 자’에 위안을 주며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측근인 안희정·최도술 씨 등 386세력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형 건평씨를 둘러싸고 2003년 1월 인사개입설을 시작으로 재임 기간 내내 친인척 비리 의혹이 불거졌지만 노 전 대통령은 그때마다 ‘도덕성’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 방패막이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지난해 12월 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59·구속)씨에게서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 6300만원을 받아 구속 수감됐다. ●수뢰혐의로 수사받자 비극적 최후 이어 노 전 대통령이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권 여사가 박 회장의 돈을 받아 썼다는 글을 올린 이후 권 여사와 아들 건호씨가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노 전 대통령 자신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만은 다를 것이다.’고 평가했던 많은 국민에게는 실망을 안겨줬다. 굴곡 많던 정치인생을 버티게 했던 유일한 자산을 잃게 된 셈이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구 시대의 막내가 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4·29 재보선 이후 여야 거물들 행보] (3) 정몽준 한나라 최고위원

    [4·29 재보선 이후 여야 거물들 행보] (3) 정몽준 한나라 최고위원

    “한나라당은 엉성한 친목단체다.” 한나라당이 4·29 재·보선에서 참패한 직후 정몽준(얼굴) 최고위원이 낸 쓴소리다. 당이 친이·친박으로 나뉘어 계파싸움에만 몰두하다 재·보선에서 참패했다는 것이다. 정 최고위원은 지난 대선 당시 입당한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계파갈등을 비판해 왔다. 친이·친박 구도 자체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만을 ‘정치적 상수(常數)’로 규정하는 프레임이라고 정 최고위원은 보고 있다. 이 구도에서는 정 최고위원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마땅치 않다. 큰 꿈을 품고 있는 정 최고위원으로서는 이 구도가 흔들리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정 최고위원 쪽의 한 관계자는 8일 “이 대통령은 차기 대선에 나오지도 않는다.”면서 “‘친이·친박’ 구도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오히려 ‘친박·비박(非朴)’ 구도가 맞다.”고 말했다. 정 최고위원이 차기 대선의 ‘상수’인 박 전 대표에 대항할 ‘비박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도 읽힌다. 이런 측면에서 정 최고위원은 이재오 전 최고위원에게도 “언젠가는 함께 일하고 싶다.”며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최고위원 쪽은 “두 사람은 16대 국회 당시 국회 교육위에 소속돼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며 ‘인연’을 강조했다. 정 최고위원은 이 전 최고위원을 평소 ‘이재오 선배’라고 부른다. 정 최고위원의 외곽조직과 이 전 최고위원의 외곽 지지그룹이 연대를 모색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정 최고위원은 아직 대중 득표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 최고위원이 지난 울산 북구 재선거에 그렇게 공을 들인 것도 당내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차세대 주자로서의 가능성을 높이고 친이·친박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대중적 지지가 절실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내 기반이 없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정 최고위원 쪽이 항상 “이 대통령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정 최고위원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자평한다. 선거 현장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약점인 당 기여도를 높였고, 유세 현장을 돌며 당내 인사들과 접촉면을 넓혔다는 것이다. 정 최고위원은 재·보선에 이어 당에 불어닥친 쇄신과 화합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정치보폭을 넓히기 위한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지난 4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 쇄신책의 일환으로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출 방식을 바꾸자며 당헌·당규 수정을 요구했다. 친이 쪽이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박 전 대표가 “당헌·당규에 따라 원칙대로 하자.”는 것과 대비된다.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자격으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집행위원회 및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정 최고위원은 귀국 후인 10일 당 쇄신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친이와 친박의 균열 속에서 정 최고위원이 입지 확대를 위한 묘수를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盧 전대통령 소환] 청문회 스타 의원→대통령→포괄적 뇌물 피의자로

    [盧 전대통령 소환] 청문회 스타 의원→대통령→포괄적 뇌물 피의자로

    정치인 노무현의 인생은 ‘풍운아’로 요약할 수 있다.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 1988년 국회 입성 과정부터 그랬다.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재야인사 영입 사례로 발탁됐다. 이어 같은해 ‘5공 청문회’에서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1996년 서울 종로 패배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그는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당시 민주당 잔류파들과 함께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지지 등으로 의견이 갈릴 때 “시대의 과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이어 1998년 7월 종로 보선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쓴 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출마는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간판을 달며 ‘동서 분할 종식’, ‘국민 통합’이라는 주제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국민적 지지의 출발점인 ‘노사모’도 이 무렵 탄생한다.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은 새로운 전기로 작용했다.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정치인 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번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듯, 약점을 보완하는 기간이었다.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뒤 본격적인 대선 후보경선 준비에 나선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했다. 몇 차례 말 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지지도 하락을 경험했지만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16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는 등 정치적 굴곡은 계속됐다. 그의 20년 정치 인생은 ‘충돌’과 ‘도전’의 역사였다. ‘도덕성’은 힘의 근원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성장기와 자수성가형 인생 스토리는 ‘못가진 자’에 위로를 주며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이 두가지는 노무현 정부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했다. 향후 판결 내용에 따라 자연인 노무현은 그에 합당한 권리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30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과 대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인으로서의 기반은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의 최선은 대의(大義)를 따르는 것이며, 차선이 대세(大勢)’라고 하던 정치인 노무현은 이제 그 둘을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내려 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4·29 재보선] 전주 덕진 무소속 정동영 “민주당 대안세력 한데 묶겠다”

    “오늘의 승리는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당의 쇄신과 변화를 열망하는 전주시민들의 뜻입니다.” 민주당 텃밭에서 무소속 돌풍을 선도하며 정계에 복귀한 전주 덕진 정동영(56)당선자는 “상처투성이가 된 아들을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감싸준 시민들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그는 “전주시민들이 보내준 지지는 민주당의 잘못된 공천에 대한 심판”이라고 당선 소감을 밝힌 뒤 “민주당에 복당해 잘못 가고 있는 현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강조했다. 정 당선자는 자신의 선거구인 덕진보다는 오히려 무소속 연대를 한 전주 완산갑 신건 후보를 지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다른 후보들을 여유있게 따돌렸다. 특히 민주당 김근식 후보는 득표율이 13%에 그쳐 정 당선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정 당선자측에서는 그가 6년 만에 국회의원 배지를 다시 달게 된 것을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는 “무소속 연대한 전주 완산갑의 신건 후보와 함께 반드시 민주당에 입당해 강한 야당을 만들겠다.”면서 “강한 야당은 강한 인물과 정책이 뒷받침돼야 하며, 대안 역할을 못하는 민주당을 강화하고 재건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강한 정책과 인물로 재편, 체질을 강화해 역주행하는 한나라당을 견제해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민주당은 정권을 내준 뒤 성찰의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계기로 성찰해야 합니다.” 정 당선자는 “민주, 개혁, 평화세력이 뭉쳐야 민주당이 대안세력의 될 수 있다.”면서 “이들 세력을 한 데 묶기 위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정치적으로 다시 태어난 만큼 새로운 정치를 펴겠다.”면서 “정치가 절망과 고통이 아닌 위로와 의지가 되는 ‘신념의 정치’, 힘 없고 고통받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자신 없으면 정치 하지 말라”

    “자신 없으면 정치 하지 말라”

    한나라당 박순자 최고위원이 19일 경주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박 정수성 후보에 대해 “정치인이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내 친이·친박간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는 경주 재선거를 둘러싸고 당 지도부가 친박 무소속 후보를 공개적으로 성토한 것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박 최고위원은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정 후보가 한나라당 특정 정치인의 사진을 걸어 놓고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자유”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한나라당에 입당도 하지 않고, 공천 신청도 하지 않은 채 그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정치적인 도의가 아니다. 그 분은 정치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 후보가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특보였다는 점을 앞세워 박 전 대표를 표심 훑기에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친박계의 한 의원은 “사견일 뿐”이라면서도 “벌써부터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박대출 선임기자 정가 In&Out] 정동영-DJ와 손학규

    “형님. 동영입니다. ○○에 있습니다.” 정동영(DY)은 권노갑에게 수시로 전화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다. 앞서 권노갑은 병원신세를 졌다. 감옥에서 얻은 지병 때문이다. 정동영은 병문안을 갔다. 권노갑 사면 뒤에도 인사갔다. 정동영은 계속 고개 숙였다. 권노갑은 미움을 풀었다.권 전 국민회의 고문은 김대중(DJ)계의 맏형이다. 정 전 통일장관의 입당원서도 받았다. 물심 양면으로 도왔다. 2000년 12월 둘이 만났다. 정 전 장관이 얘기를 꺼냈다. “형님보고 부통령, 김현철이라고 합니다.” 이틀 뒤 ‘권노갑 퇴진론’을 선창했다. 권 전 고문은 분노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개탄했다.DY는 4·29 재보선 출마를 선언했다. 전주 덕진에 출마하겠단다. 원군은 많지 않다. 박지원 의원은 환영이다. DJ와 연관짓기도 한다. 반면 정세균 대표는 ‘공천불가’다. 최재성 강기정 백원우 조정식 의원은 극력 반대다. 이들에게 DY는 ‘권노갑 신세’다. 대권에 뜻을 둔 이들도 반대그룹이다. 그래서 열심히 전화를 걸고 있다. 정동영식 ‘스킨십정치’, ‘전화정치’다.손학규 전 대표와 대비된다. 처신과 행보의 차이다. 손 전 대표는 춘천에서 칩거 중이다. 부인과 농가에서 지낸다. 일 주일에 한두 번 서울에 다녀간다. 문상이나 일이 있을 때다. 새해 초 측근들과 신년회를 가졌다. 재보선 출마 얘기가 나왔다. 그는 일축했다. “장관, 도지사도 해보고, 배지도 세 번 달았다. 무슨 재보선이냐. 나에게는 큰 꿈이 있다.”1992년 12월19일.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번복한다면 ‘국민을 속이고 역사를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3년만에 뒤집었다. DY는 “서울 동작을에 뼈를 묻겠다.”고 했다. 1년만에 “전주는 정치적 모태”라고 한다. DJ와 닮은 꼴이다.DJ의 뒤집기는 정교했다. ‘국민과 역사를 속이는’ 과정은 치밀했다. 아·태평화재단 설립(1994년)→조순 서울시장 옹립(1995년 지방선거)→정계복귀 선언→제1야당 구축(1996년 총선). 본인은 대중과 거리를 뒀다. 친위대가 대신 군불을 땠다. 추종세력이 떠미는 모양새로 복귀했다. 정 전 장관은 직접 승부수다. DJ와 다른 꼴이다.민주당이 DY 복귀를 놓고 시끄럽다. ‘상처 입은 복귀’가 될 공산이 크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의 출마 포기로 상처는 더 커지게 됐다. 그가 모를 리 없다. 원외 생활 6년째다. 더 오래가면 미래를 보장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훈평 전 의원이 동조한다. 그는 “8년을 논다면 대선 주자로선 치명적”이라고 분석했다.DJ의 뒤집기를 놓고 여론은 험했다. 언론은 무차별 폭격했다. DY도 닮은 꼴이다. DJ는 1997년 초 지지도가 10%대였다. 박찬종 후보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럼에도 역전을 이끌어냈다. 김종필과의 연합-이회창·이인제 분열이 먹혀들었다. 표심의 망각증도 한몫했다. DY는 22일 귀국했다. 이번 주가 내홍의 정점이 될 것 같다. 정 대표와는 전북 맹주-대권 경쟁이 걸려 있다. 공천탈락-무소속 출마는 정면 충돌이다. 절충안도 나온다. 부평을 혹은 10월 재·보선 출마 등이다. ‘뼈’, ‘모태’와 다른 지역이다. ‘살점’이란 얘긴가. 두사람의 담판이 주목된다. 손 전 지사도 ‘10월 준비설’이 나돈다. 수원 장안 재·보선 출마 얘기다. 역시 두고 볼 일이다. dcpark@seoul.co.kr
  • 친박 정수성 사무소 개소… 박근혜 불참

    친박 정수성 사무소 개소… 박근혜 불참

    4·29 경주 재선거의 막이 올랐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박 정수성 예비후보가 20일 현지에서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갖고 출사표를 던졌다. 관심을 모았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개소식에 불참했다. 이날 박씨 문중의 최대 행사인 ‘신라시조대왕 춘분대제’도 예정돼 있어 경주 방문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박 전 대표는 경주에 가지 않았다. 경주행 자체가 무소속 정 후보에 대한 지원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후보의 개소식에는 한나라당 소속 친박 의원들도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 자칫 해당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하겠다는 뜻이다. 친박 쪽의 한 의원은 이날 “박 전 대표는 이번 재·보선에 조용히 있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면서 “친박이 정 후보를 지원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원유세도 지도부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친박 진영의 거리두기와 무관하게 경주 재선거는 친이·친박의 대리전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정 후보 쪽 관계자는 “박 전 대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면서 “박 전 대표가 경주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지역에서는 정 후보가 친박 후보라는 것을 다 안다.”고 말했다. 정 후보 쪽은 지난해 12월 출판기념회에 박 전 대표가 참석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반응이다. 정 후보도 “선거에 승리해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이 지역의 친박 정서에 호소하고 있다. 반면 권토중래를 노리는, 친이 쪽 정종복 전 의원은 지난달 21일 선거사무실을 연 뒤 일찌감치 재선거 승리를 위해 움직여 왔다. 친이 쪽도 이상득 의원의 최측근인 정 전 의원의 승리를 위해 당력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안경률 사무총장도 “무소속 정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입당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다만 이 의원은 공천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경주 방문을 자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피하고, 친이·친박 구도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부평을 ‘필승카드’ 뽑기

    부평을 ‘필승카드’ 뽑기

    4월 재·보선의 승부처인 인천 부평을 공천을 두고 여야의 고심이 깊다. 승리를 보장할 마땅한 인물이 선뜻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일단 GM대우가 위치한 지역 특색을 고려해 경제전문가를 내세운다는 방침을 정했다. 안경률 사무총장은 19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후보, 경영 마인드가 있는 후보, 경제를 잘 아는 후보를 내서 국민에게 평가와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 영입설이 나오지만 아직은 아이디어 차원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 전 장관은 과거 정권 사람 아니냐.”고 반문한 뒤 “이윤호 장관은 좋은 카드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결심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전했다. 두 사람 모두 이 지역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점도 당의 선택을 어렵게 한다. 이런 점에서 대우그룹 사장 출신으로 부평을에서 15대 의원을 지낸 이재명 전 의원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전 의원은 아직도 지역에서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 대통령과도 가까운 사이다. 이 전 의원은 14대 국회에서 민자당 전국구로 영입돼 이 대통령과 나란히 의정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98년 국민의 정부 시절 탈당해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로 입당한 것이 흠이다. 민주당은 지난 18일 전주 덕진과 함께 부평을을 전략공천지로 확정한 뒤 비공개로 후보를 물색하고 있다. 당 안팎에선 정세균 대표가 전주 덕진 출마를 선언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에게 부평을 출마를 제안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무소속 출마도 불사하겠다는 정 전 장관의 출마지역 번복 가능성이 낮고, 부평을 유권자에게도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어 성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또 다른 정치 거물의 차출설도 나온다.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후보군으로 꼽힌다. 손 전 지사의 경우 지금까지 정치 복귀를 완강히 고사해 왔지만, 당 지도부가 어려운 당 사정을 설명하고 출마를 요청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그렇게 되면 손 전 지사는 정 전 장관과는 반대로 명분을 갖고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대우차 생산직 근무 경력이 있는 홍영표 전 재정경제부 FTA 국내대책본부장과 이 지역 구의원·시의원·국회의원을 역임한 홍미영 전 의원도 거론된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공천 상황을 탐색하며 막판까지 철저한 보안 속에 후보를 엄선할 것으로 전해졌다. 홍성규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한나라 “정치보다 경제”

    한나라당이 4·29 재·보선을 ‘정권심판론’으로 몰고가는 민주당의 전략에 대해 ‘경제살리기’로 맞불을 놓았다.박희태 대표의 불출마 선언으로 야당의 ‘정권심판론’이 한풀 꺾인 상황에서 경제전문가 영입을 거론하며 재·보선의 ‘정치색 빼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한 관계자는 18일 “야구로 치면 ‘치고 달리기’ 작전인 셈”이라고 말했다.박 대표는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 연석회의에서 “이번 재·보선은 경제살리기 재·보선”이라면서 “경제살리기를 위해 국민의 신뢰를 받을 후보자를 내세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경제에 걸겠다.”고도 했다.당 공천심사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인천 부평을과 울산 북구의 경우 전략공천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면서 “특히 GM대우 공장이 위치한 인천 부평을은 지역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GM대우의 회생을 위해 경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영입을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4월 재·보선의 승부처인 이 지역에 민주당이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에 반해 한나라당은 경제전문가를 내세워 승부를 걸겠다는 계산이다. 공심위는 인천 부평을과 울산 북구의 현지 실사 결과를 청취하고 각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맞춤형 후보를 압축하고 있다. 아직 후보군이 형성돼 있지 않은 울산 북구의 경우 19일까지 공천을 신청받고 후보자를 고를 예정이다.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 공천 상황을 봐가며 우리 쪽 후보를 내세울 것”이라면서 “민주당에 비하면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안경률 사무총장은 이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정 전 장관의 출마를 언급하며 “대선후보까지 한 사람이 지역까지 바꿔서 출마하는 게 맞지 않다.”면서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의 인천 부평을 공천 가능성에 대해 안 총장은 “아직 당에서 정확한 입장을 정한 것은 없다.”면서 “어떤 후보가 들어가는 게 지역과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을 지에 초점을 맞춰 심사를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안 총장은 경주 출마를 선언한 친박의 무소속 정수성 후보가 ‘당선시 한나라당 입당’ 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한나라당은 아무나 무조건 입당을 받는 데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박대표 “순리대로” 친박 “정치적 결단을”

    6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지난해 7월 복당한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을 만났다.박 대표가 복당파 친박 의원들과 따로 회동을 가진 것은 처음이다. 친박 진영의 홍사덕·김무성·이해봉·박종근·유기준 의원 등 15명이 참석했다.박 대표는 당내 친이(친이명박)와 친박간 현안인 당협위원장 교체 문제를 논의하며 ‘당내 화합’에 방점을 찍었다. 4월 재·보선 결과가 본인의 거취는 물론 오는 6월 미디어 관련법 등이 걸린 3차 입법전이나 여권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당내 화합이 절실하다는 주문이었다.이날 친박 좌장인 김무성 의원은 당협위원장 교체 문제에 대해 “지난 총선 때 민의의 심판을 받은 대로 현역 의원 우선 원칙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해달라.”면서 “이제는 선택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지난해 전당대회 이후 친박 의원들을, 정치적 결단으로 입당시킨 정신에 입각해 모든 문제를 순리대로 풀어나가겠다.”고 말했다. 김효재 대표 비서실장은 “순리대로 한다는 것은 정치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얘기한다.”고 부연했다.박 대표의 이 같은 언급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지난달 21일 부산에서 친박 의원들과 만나 “순리대로 풀어나가겠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회동에 참석한 친박 의원들은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기준 의원은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전했다.하지만 이날 회동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안경률 사무총장은 불참했다. 당의 한 관계자는 “당협위원장 교체의 실무책임자인 안 총장이 친박 의원들과 만나는 게 아무래도 껄끄럽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이날 회동은 박 대표 입장에서는 4월 재·보선 승리를 위해 친박 진영에 손을 내민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현재 당 안팎에서는 4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길 만한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당 대표로서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박 대표가 당내 비주류인 친박 진영에 급하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도 보인다.박 대표는 회동 직후 기자들과 만나 자신의 재·보선 출마 여부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즉답을 피했다. 이와 관련, 안 총장은 이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박 대표가 아직 특별한 말씀이 없고 당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된 바가 없지만, 야당 후보로 대선 후보니 거물이니 하는 분들을 전략 공천할 경우 우리 당도 전략공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전략 공천을 한다면 박 대표도 나서야 하지 않겠나 논의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강경파인 친이재오계로 분류되는 안 총장의 이같은 발언은 “여권의 안정을 위해 박 대표는 당선이 확실한 곳에 출마해야 한다.”는 당내 기류와 배치되는 것이어서 공천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진보에 길을 묻다 8] 채진원 “진보정당 설계부터 잘못

    [진보에 길을 묻다 8] 채진원 “진보정당 설계부터 잘못

     민주노총은 내우외환에 빠져 있고 민주노동당은 ‘입법 전쟁’의 와중에 존재감이 엷다.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희망을 품었던 이들에게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왜 이렇게 됐을까..  국민승리 21부터 민주노동당 창당과 감격적인 원내 진입,그리고 그 뒤의 내리막길을 줄곧 지켜본 채진원(40) 전 민주노동당 의정정책실장은 애초의 정당 설계가 잘못됐다고 단언한다.채 전 실장은 10여년 민주노동당의 부침을 지켜본 경험을 녹여내 지난 1월 심사를 통과한 박사학위 논문 ‘민주노동당의 변화와 정당모델의 적실성’을 통해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대중정당 모델을 따라 민주노총이란 조직된 노동자를 물적 기반으로 삼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화,탈이념화 상황에선 파편화된 노동자나 서민 대중을 대변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짚었다.  ’진보에 길을 묻다’ 8회 주인공으로 3일 만난 채 전 실장은 “민주노총을 토대로 손쉽게 창당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지기반을 민주노총 이외에 다수의 비정규직,서민에 확대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민주노동당 퇴조의 원인을 짚었다.2004년 원내 진입한 민주노동당은 이듬해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충격의 참패를 기록한 뒤 당내 헤게모니가 정파 대표에서 원내 의원에게로 옮겨졌는데 채 전 실장은 이런 흐름에서 원내정당 모델이 더욱 적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이를 이번 논문에 담아낸 것이다.  그가 구상하는 원내정당 모델은 “국민과 소통능력이 있고 정책개발 능력이 있는 원내 의원이 시민사회와 연계해 수평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축,생활정치적 요구들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이념과 계급,정파가 줄어드는 대신,서민들의 요구와 필요를 캐치할 수 있는 반응성과 이 과정에서 드러난 욕구를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절실해진다.  민주노동당이 안팎에 과시했던 진성당원제가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파 대표들에 의해 포획돼 사실 투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발언권이 폭넓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도 극복될 수 있다고 했다.그는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역동성과 네트워크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했다.정당들이 시민들의 요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해 보수나 진보나 모두 ‘의회민주주의의 무덤’이라고 개탄했던 상황을 면밀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드러난 “다성악적인 진보를 구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당 모델은 원내 의원들이 시민사회와 네트워크하면서 토의가 강조되는 원내정당 모델”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개혁을 이루려면 물적 기반으로 삼는 조직된 노동자,정규직만을 더이상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비정규직이나 서민 대중을 위해 기득권을 버릴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진정한 환골탈태란 주문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박사학위 논문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녹여든 것 같다.  당 활동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한계에 봉착했다.시민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어졌다.어떤 정책과 이슈,쟁점 등에 대해 시민들을 설득할 만큼 잘 알지도 못했고, 전문성도 떨어졌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2004년 원내진출 이후 높아진 기대에 견줘 당내 정파싸움,민주노총의 권력 다툼과 부패 등을 보면서 당의 지지기반인 비정규직이 당에서 떠나는 것을 보면서 당의 전망과 집권 가능성을 회의하게 됐지만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했다.공부를 시작하고 여러 가지를 검토한 결과,지도부의 무능이나 이기심,오류 때문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른 변화를 당이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지구화 정보화 탈냉전이란 거대한 변화에 맞는 정당모델,정치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80년대식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당의 한계나 오류를 극복해야 되겠다고 판단했다.    ●의정정책실장 등을 맡으면서 당내 갈등을 피부로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  2004년 제1 정책위원회 정책국장,2005년 3월부터 의정실장을 맡으면서 정파 지도부와 원내 의원들의 갈등을 목격했다.갈등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당의 문제점을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했다.  당시 당에선 대중정당 모델을 철저히 추종했고 원내정당화 모델을 철저히 반대했다.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죽했으면 국회의원이 당 지도부가 될 수 없게 제도까지 만들었겠는가.중앙당 지도부는 의원들을 통제하려 했는데 현실은 국민들이나 일반 시민들은 의원들을 먼저 바라보았다.의원들이 많은 역할을 하기 위해선 자율권이 필요했는데 중앙당에선 통제하고 싶어했던 거다.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중앙당 지도부가 손을 들었다.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당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국민들이 바라보는 것은 이름도 모르는 정파 대표가 아니라 의원들이었던 것이다.따라서 당의 헤게모니 자체가 점차적으로 원내 의원들 중심으로 넘어갔고 당의 구조도 조금씩 바뀌게 됐다.    ●민주노동당 10년의 공과를 정리하면.  정당 사상 최초로 민주노총이란 조직된 노동자가 창당한 노동자계급정당,사회주의적 이념정당,진보적 대중정당으로서 독점적이고 편향적인 기득권층과 보수세력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서민들의 이익을 다양하게 대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고, 그 가능성을 2004년 원내진출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공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또는 지구화,정보화,후기산업화,탈이념화 등의 달라진 시대상황은 과거 단일한 노동자 계급과 조직으로 뭉칠 수 있었던 정당에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화이트 칼라와 블루칼라,정규직과 비정규직,노동조합원과 비노동조합원으로 파편화되고,노동자의 이익이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노동조합도 당도 유연한 네트워크 조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그 변화의 시대에 하나의 이념과 단일한 위계조직을 강조하는 운동권 모델을 고집함으로써 더 많은 비정규직과 서민들의 복잡한 이익에 반응하지 못했다.결국 대기업 소속과 정규직,조합원으로 표현되는 상층노동계의 이익만을 대변하게 되면서 다수의 비정규직과 약자들이 이탈하게 된 것은 그 한계라 할 수 있다.그 문제가 집약돼 나타난 것이 2005년 울산 북구 재선거 패배였다.  다시 말해 민주노총이 시대착오적인 계급환원주의 노선과 사회주의적 계급정당노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은 산업화시대에 유행했던 조직논리,이념논리,정당논리,이른바 대중정당모델에 집착했던 것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울산 북구 패배 이후 2007년 대선을 앞두고도 같은 잘못이 되풀이된 이유는.  많은 불만과 문제 제기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정당모델까지 검토하지 못한 것은 당이 민주노총이란 조직된 노동자를 모태로 출범한 한계라고 생각한다.민주노총을 토대로 상대적으로 쉽게 창당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지기반을 민주노총 이외에 다수의 비정규직,서민에 확대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흔히 민주노동당의 두 가지 성역이 있다고 했는데 민주노총과 북한이란 성역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당모델을 원내정당 모델로 바꿨으면 오늘날의 위기가 없었을까,이런 역질문이 가능할 것 같은데.  원내정당화 모델을 생각한 것은 당의 헤게모니가 원내 의원 중심으로 넘어가는 국면과 맞물려서였다.울산 북구 패배 이후 당의 총체적 위기가 확인됐다.지지율이 18%에서 5% 이하로 바닥을 쳤다.울산은 노동자 밀집지역이어서 대중정당 모델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는 곳이었는데 패배를 했고 그 패배의 원인이 비정규직의 외면과 이탈 속에서 당이 망가진 것이었다.그 늪을 벗어나기 위한 대안이 그나마 국민들로부터 소통능력과 정책능력을 인정받은 의원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확인이 됐는데도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진 못했다.민주노동당은 대단히 위계적인 조직이다.그 조직에 아직까지도 민주노총의 헤게모니가 작용하고 있다.30%의 할당제가 관철되고 있다.국민적 차원에서 개방,분권적인 개혁,다양한 이념을 수용해야 한다는 전략 등이 철저히 가로막힌다.  2007년 대선 후보를 경선해야 한다는 안팎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본선 경쟁력이 있는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내세웠다.개방형 경선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확인하고도 폐쇄적인 당원 직선제로 지분이 큰 정파들은 국민들이 원하는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내세웠고 선거 패배를 자초했다.  민주노총의 한계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확대하지 못한 자업자득이었다.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지 않는 한 민주노동당의 앞날은 어렵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의 변화가 감지되나.  18대 총선 이후 많은 노력을 했다고 본다.하지만 미진한 것은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여전히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당을 개방화,분권화,네트워크화해야 하는데 민주노총의 기득권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4월 재보선에서 국민경선 대신 민중경선 으로 후보를 선출하려 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이탈을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선거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논문의 문제의식을 조금 더 구체화하면.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정당으로 대중정당 모델이냐 원내정당 모델이냐는 학계 논쟁이 있었다.최장집 교수 등이 얘기한 대중정당 모델이 시대적인 적실성이 있다고 보았다.원내진출 이후 당 생활을 해보니 한계가 많이 드러났다.사회 변화에 적응 못한 정당 모델을 추구한 결과라고 보았다.  대중정당 모델의 쇠퇴는 당지도부의 리더십과 운영상의 오류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배경 때문이었다.시대에 뒤처진 대중정당모델을 고집했을 때 이념과 정파의 편향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더 많은 비정규직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선 대중정당 모델을 포기하고 대안이 되는 모델을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고 본다.  당의 위기가 닥쳤을 때 결국엔 의원들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의정 활동을 지켜보면서 이를 대중정당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것이 대안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런 얘기들을 분당 이전부터 해온 것으로 아는데 반응들은 어땠는지.  비정규직을 더 많이 대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원인을 따질 때 그들은 사람의 문제,성품의 문제 이런 쪽으로 봤다.더 좋은 사람이 비정규직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정당모델을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론이다.    ●진보신당은 원내정당 모델에 부합한다고 보는지.  분당 이후 반작용으로 신규 당원이 입당하고 민주노총 같은 조직적 기반이 없이 출발했다는 점에서,노회찬과 심상정이란 두 전직 의원의 지지층이 흡수된 측면이 있어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현역 의원이 없어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중정당모델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  산업화 시대의 대중은 노동자 계급이라 할 수 있었다.후기 산업화 사회에선 대중이라 함은 비정규직,비노조원,화이트칼라처럼 어느 곳에 소속될 수 없는,유동성이 큰 사람들이다.비조직된 대중이 더 많다.위계적인 조직 구도가 아닌 네트워크화된 대중만이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유연성이 대중의 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동과 사회’ 지난해 12월호에 기고한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란 제목의 글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웠다.선진 노동자들이 왜 다양성을 잃고 기득권층으로 고착됐는지.  개인과 조직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위계적인 조직에 속하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면 개성이나 끼를 발산할 수 있다.계급환원적인 생각,집단을 궁극선(善)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전체주의적 사고로 고착화된다.특정한 사안에 대한 집단행동을 이끌어낼 땐 유리하지만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처음 창당 때는 진성당원제라는 당원들의 참여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있겠다는 기대를 했는데 이념적으로 편향된 당내 정파 지도자들이 당을 포획해놓고 있었다.다수의 당원은 말을 사실상 제대로 못하고 기껏해야 투표하는 것이고 발언권이라든가 소통이 보장되지 않고 당내 민주주의에서 소외되고 자존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페이퍼 당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참여민주주의란 이상이 당을 장악한 정파 엘리트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하니까 이탈할 수밖에 없게 되고 재미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의원들이 당에 묶여 있으면 정파가 시키는 대로 당의 눈치를 봐야 한다.소신있게 큰 이득을 위해 국민과 소통할 수 없고 당내 정파구도가 약화되고 의원들에 권력이 넘어가면 소통능력과 정책능력이 검증된 의원들이 국민들과 소통할 공간이 열렸다는 의미가 된다.    ●꿈꾸는 진보정당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진보라는 개념부터 시작하자.보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것이 진보의 논리지만 진보만이 진리라는 역편향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단성악(單聲樂)적인 구도가 있다.그러나 다양성과 복잡성 및 유동성이 커지는 시대에는 다성악(多聲樂)적인 진보가 필요하다고 본다.즉,진보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다성악(多聲樂)적인 세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진보라는 시각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의견 중에 하나의 의견정도로,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잠정적인 결론 수준에서 존재하도록 의식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저는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공존방식으로서의 진보, 다양성 속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둘째. 다성악적인 진보를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 모델로서 원내 의원들이 시민사회와 네트워크 하면서 토의가 강조되는 원내정당모델이라고 믿는다.    ●그런 내용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보다 어떤 점에서 진전됐느냐 묻는다면.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역동성과 네트워크가 하나의 답이 된다고 본다.정당들이 시민들의 요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지 않나.최장집 교수도 그런 점에서 지적당했다.촛불시위 때 시민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에 반응하지 못했던 정당들의 한계를 봤다.이게 핵심이다.시민들의 생활정치에 대한 욕구에 반응하는 정당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념과 계급 정파가 줄어들더라도 서민들의 욕구와 필요를 캐치할 수 있는 반응성이 있어야 한다.소통 속에서 발견된 욕구를 정책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 생산능력이 담보될 때 정당으로서 생존할 수 있다.원내정당 모델이 바로 그런 것이다.    ●두 당과 무엇이 달라지는지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대중정당 모델에선 당의 이념과 게급,정파,조직이 강조되는데 이것이 약화될 것이다.당이 원내 의원 중심으로 가져가면서 유권자,시민사회와의 연계 부분이 강조된다.당원 중심을 벗어나 일반 유권자,지지자들도 당내 중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시민사회의 요구가 전달되고 이것들이 의회에서 토의를 통해 합의되고 정책 결정이 되고 국민에게 성과물로 다가온다.    ●명칭은 원내정당 모델이지만 정당은 조그맣고도 시민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당 조직은 엘리트가 강조되는 게 당연하다.다만 행위자가 정파냐 아니면 국민들의 이익이나 선호에 접근할 수 있는 원내 의원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만큼 물적 기반이 없어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고정된 지지기반이 없어 불안정할 수있다.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잘 되고 있느냐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민주노총이란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이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과거 지지기반으로 갈 수 있겠는가.간다면 상층 노동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금 더 좁아진 정당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연성이 큰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데 느슨한 수준의 네트워크를 가능케하는 것은 정책능력과 소통능력 뿐이다.그때그때 이슈가 터지고 시민들의 요구가 터져나올 때 생활상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원내정당 모델이 대안이라고 본다.  원내정당 모델이 현실에서 나타날 때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하지만 대중정당 모델보다 낫다는 생각이다.원내정당 모델을 현실에서 구현할 때 당내 의사결정 구조를 어떻게 분산화하고 개방화할 것인가가 중요하다.진보신당의 지못미 당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새 이슈를 개발하고 정책으로 대응하고 새로운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    ●진보정당 통합이나 반(反)MB 전선에 참여하라는 사회적 압력이 점증할 것이란 지적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이명박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함께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있을 수 있다.진보진영내에서 힘이 약하면, 함께 뭉쳐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소수의 의견이 배제당할 가능성이 있다.진보정당이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 합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채진원씨가 걸어온 길  늦깎이 초보 연구자라고 자신을 낮춘 채진원(40) 전 민주노동당 의정정책실장은 국민승리 21에 1998년 입당해 지난해 진보신당과 분당하기 전까지 민주노동당의 10년을 고스란히 지켜본 인물.단국대 사학과 88학번인 채 연구원은 민주노동당에서 경험한 희로애락과 한계를 바탕으로 2005년 경희대 정치학과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했고 지난 1월에야 어렵사리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  2004년 원내 진출 전까지 민주노동당의 대표적인 민생 법안인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이자제한법’.정치개혁의 대표 법안으로 손꼽히는 ‘1인 2표 정당명부비례대표 도입’에 관여했던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창당 이후 정책위원회 제1정책조정위원회 정책국장으로 정치관계법을 담당했으며 이후 의정정책실장으로 의원들의 의정활동과 정책 지원을 담당했다.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부인의 외조를 위해 중앙당을 사직한 뒤 평당원으로 남아있다가 지난해 3월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제안한 혁신안 ‘생활속의 진보’가 부결되자 탈당했다.현재 어느 당에도 몸담고 있지 않다.  전문연구자의 길을 걷는 한편 기회가 닿으면 의정활동이나 입법을 돕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부고] 이정일 前국회의원 별세

    이정일 전남일보 회장이 4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62세. 전남 해남 출신인 고인은 1988년 전남일보사를 설립했다. 2000년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뒤 16,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유족은 부인 정영희씨와 2남1녀.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6일 오전 4시10분. (02)3010-2631.
  • [여의도 블로그] 최연희 한나라 복당설 배경은

    지난 2006년 여기자 성추행 혐의로 물의를 빚어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무소속 최연희(강원 동해·삼척) 의원의 복당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야당은 물론 여성계와 동해·삼척 지역 현역 한나라당 당협위원장 등의 반대 움직임이 거세다. 박희태 대표 쪽은 24일 “강원도당에서 최 의원의 재입당을 추진하고 있고 이를 승인해야 하는 중앙당 최고위원들도 모두 찬성하는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오는 4월 당협위원장 선거에서 거의 100% 선출, 복당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최근 최 의원을 만나 복당 문제를 논의했으며, 최 의원은 조만간 복당 절차를 밟을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도당 위원장인 이계진 의원도 “성추행 사건 당시 현장에 있어 사태를 잘 아는 입장인 만큼 개인적으로 최 의원의 복당을 찬성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미 개인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고 참회하신 데다 인품과 능력에 대한 지역 주민의 신망과 지지도 높다.”고 밝혔다. 반대 의견도 적지 않다. 지난해 4월 최 의원의 복당 심사를 보류했던 권영세 전 사무총장은 “지역 신망을 받아 지역에서는 면책이 됐을 지 모르겠지만 한나라당이 최 의원을 받아들여야 할지는 이와 전혀 별개의 문제”라면서 “야당 시절에 사실상 출당 조치를 해놓고 여당이 됐다고 스스로에게 온정주의로 나가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동해·삼척 지역 정인억 당협위원장은 26일 당원들과 함께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최 의원의 복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하지만 당내에서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 데다 개인적으로 참회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는 의견이 많다. 내년 지방선거에 대비해 강원 지역 주민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최 의원의 복당이 필요하다는 당내 여론도 우세하다. 최 의원은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고,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 사퇴촉구결의안이 가결되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2007년 6월 2심 재판부는 최 의원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었던 1심을 깨고 벌금 500만원의 선고 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한나라당, ‘꽃보다 남자’ 패러디…‘H4’ 등장

    한나라당, ‘꽃보다 남자’ 패러디…‘H4’ 등장

     ‘꽃보다 경제’  드라마 ‘꽃보다 남자’(KBS 2TV)의 인기가 국회까지 날아들었다.한나라당은 지난 20일 국정핵심과제 관련 특위 활동을 ‘꽃보다 남자’ 출연진에 빗대 소개한 패러디물을 중앙당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이 패러디물에 등장하는 ‘한나라반 신설특위 위원장 ‘H4’는 구준표(이민호)에 정몽준 최고위원(구몽표),소이정(김범)에 공성진 최고위원(소이공), 윤지후(김현중)에 허태열 최고위원(허지후), 송우빈(김준 분)에 안경률 사무총장(안경빈)이 각각 합성됐다.또 여주인공 금잔디(구혜선)에 박순자 최고위원(금순디)의 얼굴이 합성됐다.  각 인물들의 설명도 구체적이다.  아름다운국토가꾸기특위 위원장을 맡은 ‘구몽표’ 정 최고위원에 대해서는 “전학 오자마자 반장 선거에서 차점을 차지한 실력파”라며 “한국고(한국고등학교)의 환경친화적 발전을 위해 ‘4대강 물길 살리기’와 ‘저탄소 녹색성장’에 발벗고 나섬”이라고 설명돼 있다.2007년 대선 직전 입당한 것을 ‘전학’으로,당대표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한 것을 ‘반장 선거에서 차점’으로 표현한 것.   정치선진화특위 위원장인 ‘허지후’ 허태열 최고위원은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품의 전 한나라반 총무부장”이라고 소개하면서 “’법보다 해머’가 급훈인 민주반과 함께 원활하게 학생회를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며 민주당을 비꼬기도 했다.  미래위기관리 특위를 이끄는 ‘소이공’ 공성진 최고위원은 “미래학 특기생으로 한국고 입학. 패싸움 위험이 상존해 있는 한국고 주변 고교의 동향을 파악하고, 위기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점검할 예정”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나눔봉사특위의 ‘안경빈’ 안경률 사무총장은 “성실하고 듬직한 한나라당 총무부장”이라면서 “각 줄반장들을 독려하여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급우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점검에 나설 계획”이라고 소개됐고,일자리 특위를 이끌어 갈 ‘금순디’ 박순자 최고위원은 “한나라반 홍일점 지도부로,공단이 밀집한 안산 출신으로서 청년·여성·노인 등 소외계층 일자리 창출과 일자리 나누기 대책 마련에 골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이색 홍보에 대해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재미있다.한나라당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는 격려의견이 있는가 하면 “저럴 시간있으면 정치나 제대로 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upgradej’란 네티즌은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면서 “젊은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노력하는 한나라당의 모습에 응원을 보낸다.”는 고 격려했다.또 “센스있는 패러디다.꽃보다 경제! 아주 좋다.”(ararechang), “한나라당도 ‘꽃보다 남자’ 열풍에 동참?경제만 살려달라.”(jykang)과 같은 의견도 있었다.  반면 네티즌 ‘lmj8312’은 “이런 홍보물을 만들 시간이 있으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내세운 법안을 다시 살펴보는게 어떨까.”라며 “국민들의 인기를 끌려면 이런 패러디를 만들어 홍보하는 것보다 묵묵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라.”라고 비판했다.이 외에도 “경제를 살려야 하실 분들이 한심하게 이런 홍보물이나 만들다니….끔찍하다.”(aplis6880) “이런 아이디어를 낼 시간에 정말 국민의 고충을 생각해라.”(misail666) 등의 비판도 있었다. 한편 한 네티즌은 이 패러디를 다시 패러디해 ‘소통보다 분통’이란 제목의 포스터를 제작해 올리기도 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그래도 이땅에 계십니다”

    “그래도 이땅에 계십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의 영원한 삶을 시작했다. 20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어제 내린 눈, 비는 흔적이 없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환히 밝히기라도 하듯 성당을 감싼 하늘이 청정하기만 하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신자와 시민이 성당 정문부터 들머리, 대성당 입구를 가득 메워 발디딜 틈이 없다. 밤사이 손이 시릴 만큼 쌀쌀했던 날씨마저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성의 물결엔 주눅이 들었다. 입당 성가로 시작된 장례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신자석을 향해 누운 채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김추기경의 뜻을 따라 일상 그대로 진행되는 미사의 의식들. 하느님이 고인을 평화와 빛으로 불러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와 말씀전례. 그리고 이어진 ‘가장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된다.’는 복음은 김 추기경이 생전 즐겨 읽고 인용한 말씀. 성당 곳곳에 흐느낌의 파도가 인다. 성찬전례에 이어 주교단과 유족이 일일이 김 추기경을 돌아 올리는 영성체 예식, 그리고 고별사가 이어졌다. “세상살이가 어려운 시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바보 웃음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떠난 님의 사랑과 나눔의 큰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들을 고인은 듣고 있을까. 두 시간 만에 미사가 끝나고 성당 북쪽 문을 통해 서울대교구의 가장 젊은 사제 8명이 운구를 시작하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신자와 수녀들이 일제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린다. 운구차량이 서서히 성당을 벗어나자 아쉬운 듯 뒤를 따르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울음이 명동을 뒤덮는다. 때마침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33번의 종소리. 추기경은 이제 더 이상 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 성직자 묘역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20분가량. 남산1호터널과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들기까지 길가 곳곳에서 손을 흔들거나 성호를 긋는 시민들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운구차량 행렬이 매몰차게 느껴진다. 묘역에 다다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 사이, 첫 한국인 주교이자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의 묘 바로 옆에 준비된 추기경의 자리가 눈에 든다. 기다리던 신도들의 찬송과 기도, 산에서 울려퍼지는 정진석 추기경의 축복에 이어 하관이 있자 울음과 기도가 바람에 섞인다. 이제 정말로 추기경을 보내야 한다. 주교단과 수도자, 유족 대표가 관 위에 흙을 덮자 참례자들이 입을 모아 위령 성가를 부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 무거운 짐진 자 멍에 벗겨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김 추기경의 영원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우리들의 바보’ 영면하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의 영원한 삶을 시작했다. 20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어제 내린 눈, 비는 흔적이 없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환히 밝히기라도 하듯 성당을 감싼 하늘이 청정하기만 하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신자와 시민이 성당 정문부터 들머리, 대성당 입구를 가득 메워 발디딜 틈이 없다. 밤사이 손이 시릴 만큼 쌀쌀했던 날씨마저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성의 물결엔 주눅이 들었다. 입당 성가로 시작된 장례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신자석을 향해 누운 채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소박하게 치러달라.’는 김추기경의 뜻을 따라 일상 그대로 진행되는 미사의 의식들. 하느님이 고인을 평화와 빛으로 불러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와 말씀전례. 그리고 이어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된다.’는 복음은 김 추기경이 생전 즐겨 읽고 인용한 말씀. 성당 곳곳에 흐느낌의 파도가 인다. 성찬전례에 이어 주교단과 유족이 일일이 김 추기경을 돌아 올리는 영성체 예식, 그리고 고별사가 이어졌다. “세상살이가 어려운 시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이 더욱 안타깝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바보 웃음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떠난 님의 사랑과 나눔의 큰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들을 고인은 듣고 있을까. 두 시간 만에 미사가 끝나고 성당 북쪽 문을 통해 서울대교구의 가장 젊은 사제 8명이 운구를 시작하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신자와 수녀들이 일제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린다. 운구차량이 서서히 성당을 벗어나자 아쉬운 듯 뒤를 따르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울음이 명동을 뒤덮는다. 때마침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33번의 종소리. 추기경은 이제 더 이상 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 성직자 묘역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20분가량. 남산1호터널과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들기까지 길가 곳곳에서 손을 흔들거나 성호를 긋는 시민들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운구차량 행렬이 매몰차게 느껴진다. 묘역에 다다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 사이, 첫 한국인 주교이자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의 묘 바로 옆에 준비된 추기경의 자리가 눈에 든다. 기다리던 신도들의 찬송과 기도, 산에서 울려퍼지는 정진석 추기경의 축복에 이어 하관이 있자 울음과 기도가 바람에 섞인다. 이제 정말로 추기경을 보내야 한다. 주교단과 수도자, 유족 대표가 관 위에 흙을 덮자 참례자들이 입을 모아 위령 성가를 부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목마른 사람은 내게 오라. 무거운 짐진 자 멍에 벗겨주고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리.’ 김 추기경의 영원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글 / 서울신문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빛바랜 서울대 지역균형 선발

    빛바랜 서울대 지역균형 선발

    서울대 지역균형선발전형이 시행 5년째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도입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지역균형선발전형의 심층면접 비중을 줄이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8일 서울신문과 민주당 김영진 의원실이 공동조사한 결과 올해 서울대 지역균형선발 전형 합격자 765명 가운데 44.6%인 341명이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지역 출신이었다. 수도권 합격자 가운데서도 다시 지역 편중 현상이 나타났다. 경기도 출신 합격자 135명 가운데 58.5%인 79명이 고양, 성남, 부천, 용인, 수원 지역에 몰려 있었다. 반면 양주, 안성, 의왕시와 연천, 가평, 여주, 양평군은 합격자가 한 명도 없었다. 서울도 지역균형선발 합격자 149명 가운데 37명(24.8%)이 이른바 ‘사교육 특구’로 불리는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와 양천·노원구 출신 학생이었다. 성동구 출신 합격자는 한 명도 없었다. 입시전문가들은 “지역균형선발제가 소외지역 학생들에게 크게 유리할 게 없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지역균형 전형은 수능과 심층면접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소외지역 학생들을 위해 내신 위주 평가를 하겠다는 취지이다. 하지만 2단계 심층 면접에다 수능최저 학력 기준이 있어서 여전히 대도시 지역 학생들에게 유리하기는 마찬가지다. 김영진 의원은 “심층면접이 본고사 수준으로 치러지는 등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지역 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려는 원래 취지를 생각하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 입시전문가는 “제도 도입취지에 맞추려면 면접비중을 줄이거나 민족사관고처럼 지역별 고교생에 따른 할당 인원과 전형 기준을 못 채우면 일반전형으로 넘기는 등 개선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시·수시를 합한 전체 합격자의 수도권 출신 비율도 증가하고 있었다. 지역균형선발제 시행 전인 2004년, 전체 합격자의 55.2%를 차지했던 수도권 학생 비율은 지난해 57.4%, 제도시행 5년째인 올해 58.4%를 기록했다. 제도 시행 전보다 불균형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전국 고3 학생 가운데 수도권 학생 비율은 48.9%다. 제도 도입당시 28%까지 떨어질 거라던 서울출신 합격자 비율도 2004년 38.1%, 올해 36.7%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서울대 김영정 입학관리본부장은 “지역할당제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며 “서울에 학생수가 많기 때문에 균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다른 기사 보러가기] 서울시, 맨유 후원 재계약 논란 “불황에는 역시 자격증만한 게 없지” ‘모자 쓰면 머리가 더 빠진다’는 말 진짜일까? ‘이스라엘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죽겠습니다” 행안부 인사청문회 TF팀 ‘진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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