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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20 재무회의] “밀리면 끝장”… 신라의 달빛 아래 선 ‘환율의 錢士들’

    [G20 재무회의] “밀리면 끝장”… 신라의 달빛 아래 선 ‘환율의 錢士들’

    ①시장친화적 개혁주의자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61)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시장 친화적인 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2007년 10월부터 IMF를 이끌고 있다. 1976년 사회당에 입당한 뒤 파리 인근 사르셀시의 시장을 지냈다. 1991년 프랑스 산업부장관에 오른 뒤 1997~1999년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국제경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며 재무장관 재직 당시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화 채택 협상에 관여했다. 최근 환율 전쟁과 관련해 위안화 저평가가 세계경제 긴장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해 서방 중심의 경제 논리를 드러냈다. ②경제·외교 정통한 중국통 로버트 졸릭(57) 세계은행 총재는 경제와 외교에 정통한 ‘부시 가문의 사람’이다. 부시가(家) 2대에 걸쳐 국무부 부장관 등 공직을 두루 거쳤다. 무역대표부 대표 시절엔 중국과 타이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스와스모어대에서 역사학, 하버드대에서 법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표적인 ‘중국통’으로 그가 2007년 국무부를 떠나자 중국 외교부가 “중·미 양국의 신뢰 증진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미·중 간 환율 갈등에 대해서는 중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평소 “역사는 이웃을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에는 미래가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자신의 경제철학을 피력했다. ③비서방 출신 첫 사무총장 멕시코 출신인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은 미국과 서방 지역 이외에서 선출된 첫 번째 인물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직업관료 출신으로 1994년 멕시코의 경제위기 극복에 상당한 역할을 하며 국제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영국 리즈대에서 경제학 학·석사 학위를 딴 뒤 멕시코 국립개발은행장을 거쳐 1994~1998년 외무장관, 1998~2000년 재무장관을 지냈다. 2000년에는 스위스 다보스 세계 경제포럼이 발행하는 월드링크지가 선정한 ‘꿈의 정부’의 재무장관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환율 보호무역주의’가 세계 경제에 재앙을 가져온다며 미국과 중국에 냉정해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④적극적 재정책 中성장 주역 셰쉬런(謝旭人·63) 중국 재무부 부장은 금융위기 이후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중국 경제성장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90년 재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공공서비스 지원 확대, 농업세 폐지 등 개혁적인 정책을 주도해 왔다. 1947년 10월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에서 태어나 1967년 닝보시 진하이기계공장(鎭海機械廠)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198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90년 재정부 종합계획사 부사장을 시작으로 중앙금융업무위원회 부서기, 국가경제무역위원회 부주임 등을 지냈다. 2003년 중국 최고의 세무관인 국가세무총국장을 거쳐 2007년부터 재무부 부장을 맡고 있다. ⑤중국의 앨런 그린스펀 별명 저우샤오촨(周小川·62) 중국 인민은행장은 ‘중국의 앨런 그린스펀’으로 불린다. 중국 장쑤(江蘇)성 출신으로 아버지 저우젠난은 전 국가주석 장쩌민과도 인연이 깊었다. 1975년 북경화공학원을 졸업하고 1985년 칭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1년 중국은행 부행장으로 금융계에 들어왔다. 국가외환관리 국장,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 등 요직을 거친 뒤 2002년 칭화대 동문인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부상하면서 인민은행장으로 승진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따른 금융시장 개방과 중국은행·공상은행의 증시 상장을 주도했다. 또 위안화 고정환율제 폐지 등 시장경제 친화적 개혁을 단행해 서방으로부터 평가를 받았다. ⑥일본 제로금리 단행 시라가와 마사아키(61) 일본은행 총재는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경제학 교수 출신이다. 최근 경기 부양을 위해 ‘포괄적인 통화정책 완화’를 기조로 잡고 제로금리를 단행하는가 하면 외환 시장에도 개입했다. 도쿄대 경제학부 졸업 직후인 1972년 일본은행에 입행해 2006년까지 34년간 경력을 쌓았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땄고 교토대에서 공공정책 교육부 교수를 역임했다. 일본은행 뉴욕 주재 참사와 국제국 참사를 거쳐 국제 금융에도 조예가 깊다. 총재 취임 당시 주요 기관의 수장을 맡았던 경력이 전무해 지도력이 약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⑦英 고강도 예산긴축 행보 조지 오스본(39) 영국 재무장관은 지난 5월 취임 당시 만 38세로 124년만에 가장 젊은 재무장관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학생 시절부터 단짝인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강도높은 예산 긴축안을 밀어붙이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세계적 벽지회사 ‘오스본 앤드 리틀’ 공동 창업자의 장남으로 명문 사립학교인 세인트폴스쿨과 옥스퍼드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졸업 후 언론사 시험에 낙방한 뒤 방향을 정치로 틀어 1994년 보수당 연구조직에 몸담았다. 2001년 체셔 지역 하원의원이 됐으며 2004년 보수당 예비 내각의 재무장관이 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계속했다. ⑧친 월가… 아시아전문가 티머시 가이트너(49) 미국 재무부 장관은 친 월가(街) 인사로 분류되며 대표적인 아시아통이다.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 시절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주도적으로 해결했다. 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다트머스대에서 아시아학 학사, 1985년 존스홉킨스대 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88년부터 미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재무부 국제담당 차관, 2001년 국제통화기금(IMF) 정책개발평가국장을 거쳐 2003년 42세의 나이에 IMF 외환위기를 수습한 경험을 높게 평가받아 제9대 뉴욕연준 총재에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단기채권의 만기를 연장하는 데도 깊숙이 개입했다. ⑨대공황 연구 권위자 벤 버냉키(57)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2006년부터 연준 의장을 맡고 있다. 2005년 6월부터 백악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부시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자문했다.1930년대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로서 전임 의장인 그린스펀에 비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성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3년 12월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났고 1975년 하버드대 경제학 학사, 1979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FRB의 역할 등에 대해 연구했다. ⑩서브프라임 위기대응 호평 ‘유로존의 수호자’로 불리는 장 클로드 트리셰(68)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는 프랑스의 공무원 출신이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을 인정받아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42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 낭시의 국립광업학교를 나와 1966년 파리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딴 뒤 파리정치학 연구소, 파리 고등행정학교를 거쳤다. 금융감독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1978년 대통령 경제고문 등을 거쳐 1993년 프랑스 중앙은행의 총재가 됐다. 2003년 유럽 중앙은행의 제2대 총재로 임명됐다.
  • 우향우 선회 여권잠룡 2인의 ‘이념 전략’

    우향우 선회 여권잠룡 2인의 ‘이념 전략’

    최근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좌로 일보’ 움직이는 추세다. 여당 지도부가 성장보다는 복지와 서민을 이야기하고, 한나라당의 대표적 대권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는 ‘복지국가’를 내세우며 중도 노선을 걷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전당대회를 통해 기존의 중도개혁 노선에서 진보 쪽으로 한 걸음 옮겨갔다. 하지만 이런 ‘좌클릭’ 열풍 속에서 오른쪽을 향하는 두 정치인이 있다. 바로 김문수 경기지사와 이재오 특임장관이다. 민중당 출신인 두 동지의 서로 다른 ‘우향우’ 전략과 그 이유를 조명해 봤다. ■ 이재오 특임장관 점진적 右 “진보가치 소홀히 하면 안돼” 이재오 특임장관은 민주화운동으로 5번의 옥고를 치렀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 열사의 상징이었던 그가 민중당 깃발을 들고 나와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친 뒤 신한국당에 입당해 여의도에 입성했을 때 변절이라는 비판이 나왔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장관은 자서전 ‘함박웃음’에서 민중당 해체 이후 진보정당이라는 가치를 놓아버린 데 대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계층의 구분과 생활 수준 정도 같은 단순지표로 국민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 장관은 정치를 하면서 일관성을 잃은 일이 없다고 강조한다. 자서전에서도 “민중당이 성공을 거두고 대안야당으로서 순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정치인으로서 나의 모습은 지금과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또 신한국당 입당 뒤에도 ‘야당 안에서의 야당생활’을 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민중당 동지였던 김문수 경기지사가 급격히 오른쪽으로 돌아선 것과 달리 이 장관은 여전히 한발은 왼쪽에서 완전히 빼지 않은 채 서서히 보수에 젖어드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그는 선택적 복지보다는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고, 이념의 과잉을 지양하는 동시에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양립을 중시한다. 보수를 기반으로 하지만, 서민들을 위해서는 진보적인 가치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오랫동안 이 장관을 보좌해 온 김해진 특임차관은 “이 장관의 경우 독재에 맞서긴 했지만 투쟁성향은 이념투쟁이 아닌 민주화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 “기본적으로 보수를 바탕으로 하되 진보적 가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장관은 자서전에서도 1972년 10월 유신반대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됐을 당시를 회상하며 “가만히 감옥에 앉아 생각해 보니 참 억울했다. 내가 친북적 사상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민주화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국가는 민주화운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반공법, 국가보안법 아래 죄 없는 사람들을 빨갛게 색칠해 사회와 격리시키는 데 혈안이 됐다.”고 했다. 이 장관은 본인의 대권 행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말을 아낀 채 김 지사를 포함, 한나라당 대권 주자가 나온다면 도울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권 ‘잠룡’으로서 본인의 이념 성향을 명확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앞으로 더욱 보폭을 넓힐 수 있다고 의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는 “내가 지난날에 민주화운동을 했던 것은 군사독재가 장기화되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무너지고 전체주의로 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면서 “그렇게 본다면 보수에 가치를 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제 기본적인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만 남북 분단 상황에서 진보적 가치를 너무 소외시키거나 극단시하게 되면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좀 장벽이 생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김문수 경기지사 “사회주의 혁명은 거짓말” 급진적 右 김문수 경기지사의 ‘급진적’ 우향우 전략은 최근 정치권의 화제 가운데 하나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김 지사 스스로 ‘사회주의자’에서 ‘자유민주주의자’로 사상 전향을 한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에 더 관심을 끈다. 김 지사는 지난 8일 최고경영자(CEO) 조찬 특강과 지난 11일 세종포럼 특강에서 자신의 ‘변신’ 이유를 소상하게 밝혔다. “나는 혁명을 꿈꾸다 감옥에 갔다. 군사독재·재벌·미제 타도를 외쳤다. 그런데 출소 뒤 소련에 갔다 온 친구들이 ‘청바지 한장이면 예쁜 아가씨들이 하룻밤을 팔 정도로 비참하다’고 전했다. 혁명적인 리더십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거짓말이었다.” 현재 자신의 이념적 좌표도 자세하게 밝혔다. “우리나라의 혼란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규공무원 100명 중 대한민국을 누가 건국했냐고 물으면 이승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5명이 안 된다. (공무원조차) 이승만 대통령을 나쁜 영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김 지사를 놓고 정치권은 “대선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김 지사가 본격적인 우향우 전략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2 지방선거 직후로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한나라당이 고전한 6·2 지방선거에서 김 지사는 친 노무현 세력의 핵심이자 야권의 단일후보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대승을 거뒀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크게 고전한 상황에서 김 지사의 큰 승리는 더욱 돋보였다. 마침 세종시 원안 수정 논란 등과 관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우려를 나타내던 보수층에서 김 지사 ‘대안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층으로서는 김 지사의 과거 운동권 전력이나 민중당 경력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 지사의 한 측근은 “아직도 보수층에서 김 지사의 민중당 경력을 문제 삼아 보수주의가 맞느냐는 의구심을 제기한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바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김 지사 측으로서는 빠르고, 전면적인 우향우 전략이 필요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지사의 ‘전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핵심 멤버였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함께 주도했던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는 “세상을 바꾸려 했던 옛날의 꿈이 그분의 소중한 자산이 되길 바라지만 그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반면 운동권 시절부터 제도 정치권에서도 뜻을 함께하는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은 “국민을 사랑하고, 국가비전을 생각하며, 현장을 중시하는 김 지사의 정신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0·3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등장한 것은 김 지사 측으로서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은 최근 “김 지사는 손학규씨가 민주당 대표가 되는 순간 끝났다고 본다.”고 말했다. 운동권 출신, 경기지사 경력, 친서민 이미지가 겹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김 지사 측은 “김 지사는 한나라당을 지켰고, 손 대표는 한나라당을 떠났다.”면서 “김 지사가 오히려 박근혜 전 대표보다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지사의 우향우 전략이 성공해 보수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얘기로 보인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구의회 의장을 만나다] 영등포구 박정자 의장

    [구의회 의장을 만나다] 영등포구 박정자 의장

    “영등포구에 여성회관을 반드시 짓도록 하겠습니다.” 박정자 서울 영등포구의회 의장은 여성의원답게 여성 복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박 의장은 “예산 부족은 이해하지만 대부분의 구에 있는 여성회관이 영등포구에는 없다.”며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산 장려정책과 함께 명품 보육시설 건립 등을 통한 보육서비스 개선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영등포구가 다른 구에 비해 보육시설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명품 보육시설 건립을 통해 아이돌봄과 육아 정보 제공 등 종합적인 보육시설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 의장은 재개발 예정지 등 낙후된 곳이 많다며 저소득층과 장애인, 노인 등 소외계층에 대한 세심한 보살핌도 강조했다. 박 의장은 “소외계층들도 경제적 자립 속에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인 일자리 창출 등 지원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또 의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 마련에도 관심이 높다. 최근에는 의원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활용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구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하고자 하는 취지로 마련됐다. 지난 3일 실시된 교육은 전자회의록 시스템, 개인 홈페이지 등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강조되는 시대 흐름에 맞춰 ‘인터넷 기초’와 ‘홈페이지 활용법’, ‘트위터 활용법’ 등에 관한 교육을 했다. 참석한 의원들은 각자 본인의 홈페이지 게시판 자료를 수정해보고, 트위터에 가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했다. 교육을 받은 의원들은 “교육의 효과가 높았고, 정보화 시대 소통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는 반응이다. 박 의장은 “이번 교육을 계기로 인터넷을 활용한 의정활동과 의회홍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구민에게 더 친숙한 구의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의회 운영 방안에 대해서는 5선 의원답게 “15년 의정활동하면서 의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며 “17명의 의원들이 서로 화합하고 의정활동이 원활해지게 적극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또 집행부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도 박 의장은 “조길형 구청장이 민주당 소속이지만 조 구청장도 구의원 3선 출신이고, 구의장도 지냈기 때문에 의회와의 소통에 어려움은 없다.”며 “구의 발전을 위한 서로 간의 공감대가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영등포구의회는 영등포구 의회는 한나라당 9석, 민주당 8석 등 모두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6·2 지방선거 당시 박정자 의장이 무소속으로 당선돼 여야가 각각 8석으로 균형을 이뤘지만 박 의장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균형이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여야 간의 날선 공방도 있었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정당 간의 이견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의원들과 충분히 논의하고 협력하겠다.”고 화합을 강조했다. 부의장은 한나라당 소속 김종태 의원이 맡았다. 대신 운영위원회와 행정위원회, 사회건설위원회 등의 3개 상임위원장 중 두 자리는 민주당에 배려했다. 행정위원장은 민주당 윤동규 의원이, 사회건설위원장은 윤준용 의원이 맡았다. 운영위원장은 한나라당 오인영 의원에게 돌아갔다. 윤 행정위원장은 “교육분야에 집중 투자해 젊은 부부들이 보육과 교육을 안심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한번 이사오면 이사가지 않는 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브라질 대선 실시… 호우세피 당선 유력

    브라질 대선 실시… 호우세피 당선 유력

    남미 신흥경제국으로 떠오르는 브라질이 3일(현지시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의 뒤를 이을 후임자를 뽑는다. 국내외 관심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45~55%에 달해 일찌감치 유력 후보로 자리잡은 집권 노동자당(PT) 소속 딜마 호우세피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를 결정지을지 여부에 쏠려 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룰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호우세피 후보가 승리할 것이 확실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호우세피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를 확정짓지 못할 경우 2위 득표자와 오는 31일 결선투표를 치른다. 이번 대선에선 호우세피 후보 외에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의 주제 세하(68), 녹색당(PV)의 마리나 시우바(52·여) 등 총 9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호우세피 후보가 승리하면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며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2006~2010년 집권)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2007년 12월~현재)에 이어 남미 지역에서 세 번째 여성 정상이 된다.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총선에서는 연방 상원의원 81명 가운데 3분의2, 연방 하원의원 513명, 주지사 27명, 각 주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전문가들은 노동자당을 포함해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10개 정당이 연방상원 81석 중 50석 이상, 연방하원 513석 가운데 370석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전국 27개 주 가운데 최소한 17곳에서 범여권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브라질 헌법은 18~70세 국민이 의무적으로 투표를 하도록 규정했다. 정당한 사유 없이 투표하지 않으면 소액의 벌금을 내게 돼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호우세피 후보는 1947년 불가리아 이민자 후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 시절이던 1964년 쿠데타가 일어난 뒤 반정부 무장투쟁 조직에서 활동했다. 1970년 체포돼 3년간 수감생활을 하며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출감 뒤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6년부터 2002년까지 포르투 알레그레 시정부와 리우그란데두술 주정부에서 재무국장과 에너지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2001년 노동자당(PT)에 입당한 뒤 이듬해 대선에서 룰라 캠프의 에너지정책을 입안했다. 에너지장관을 거쳐 2005년 한국의 총리에 해당하는 수석장관으로 국정을 총괄했다.
  • 검찰 기소방침에 ‘무투표’ 출당 조치

    검찰 기소방침에 ‘무투표’ 출당 조치

    한나라당은 2일 ‘투표 없이’ 강용석 의원을 출당시켰다. 오후 비공개로 진행한 의원총회에서 재적의원(172명) 3분의2 이상인 136명이 참석, 만장일치로 당 윤리위원회가 의결한 제명안을 의결했다. 한나라당이 소속 의원을 제명 조치한 것은 처음이다. 강 의원은 앞으로 5년 동안 한나라당에 입당할 수 없다. 정옥임 원내대변인은 ‘무투표’와 관련, “당규상 제명처리는 기립이나 거수로 하게 돼 있지만 동료 의원의 정치적 생명이 걸려 있는 민감한 문제인 만큼 의총 의장인 김무성 원내대표가 이의가 있는지 수차례 물어 결정했다.”고 전했다. 정 대변인은 “강 의원의 명예로운 마무리를 위해 여러 각도의 노력과 배려가 있었고 그 과정에 인사청문회도 있었다. 도덕적 윤리의식을 외면하기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이날 오전 검찰이 강 의원을 무고 혐의로 기소할 것이라는 소식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자진탈당을 권유하기 위해 두 차례 의총을 연기하면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 중진 의원들의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강 의원은 앞으로의 검찰조사 및 법정싸움에서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탈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강 의원은 이날 의총에 참석하지 않았다. 강 의원은 지난 7월16일 국회의장배 전국 대학생 토론대회에 참석했던 대학생들과의 만찬석상에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여학생에게 성희롱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면서 당 윤리위에서 제명 결정을 받았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길라드 호주총리 등 ‘세계 여성 지도자 10인’에

    길라드 호주총리 등 ‘세계 여성 지도자 10인’에

    오는 10월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23일(현지시간)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세계의 여성 지도자 10인’을 발표했다. 여성 지도자 10인에는 지난 21일 치른 총선에서 과반 의석 획득에 실패한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와 세계 최초로 동성 연인과 결혼한 현직 총리로 기록 된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아이슬란드 총리,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에 이어 당선 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이 포함됐다. 타임은 10명의 정치인 중 길라드 호주 총리를 첫 번째로 소개하면서 지난 6월 물러난 케빈 러드 전 총리의 뒤를 이어 위기에 빠진 노동당을 지휘하고 있는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라고 전했다.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한 노동당 길라드 총리는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녹색당과 정책 연합을 맺는 한편 당선된 무소속 후보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시귀르다르도티르 아이슬란드 첫 여성 총리는 지난 6월 동성 연인 요니나 레오스도티르와의 합법적 결혼 사실을 공표하면서 세계인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항공사 승무원 출신의 아이슬란드 총리는 노동조합에 조합원으로 참여하다 사회민주당에 입당, 1978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최근 동성결혼 합법화 등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임 대통령인 남편 키르치네르의 임기 중 지지율을 넘어서며 재선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밖에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리투아니아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엘런 존슨 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카믈라 퍼사드 비베사르 트리니다드토바고 총리, 라우라 친치야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10인’에 들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정계 뛰어든 여군 중대장 윤혜연 선진당 부대변인

    정계 뛰어든 여군 중대장 윤혜연 선진당 부대변인

    여군 중대장이 여의도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자유선진당 부대변인 공개채용에서 40대1의 경쟁률을 뚫은 윤혜연(31)씨가 주인공이다. 2002년 여군 사관(학사장교) 47기로 임관해 지난해 6월 말 전역한 윤 부대변인은 자유선진당의 ‘입’이라는 새 역할로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디게 됐다. ●무남독녀지만 강하게 자란 ‘무술 고수’ 지난 21일 만난 그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여군 입대, 자유선진당 입당 모두 새로운 도전의 연장선”이라며 새 도전길에 대한 설렘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부산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여군 사관에 지원할 때도 주변에서 의아해하는 시선이 많았다.”면서 “정치를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열정이 없는 게 아니다. 새로운 일을 즐기는 편인데 즐기며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군으로 입대했던 이유부터 물어봤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강하고 멋있는 이미지 때문”이란다. 윤 부대변인은 “아버지가 부사관 출신인데 아들을 낳으면 꼭 장교를 시킬 계획이셨다. 그 소원을 풀어 드리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고 강조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지만 공주보다는 한 인간이 되도록 가정 교육을 받았다는 그는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며 합기도 도장, 태권도 도장을 보내셨다. 또 자기의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웅변도 배우게 하셨다.”면서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선택이 참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합기도 공인 3단, 태권도 1단의 ‘고수’다. ●군 전역후 퇴직금 몽땅 털어 해외여행 윤 부대변인은 전역과 자유선진당 입당 사이 1년 공백기에 대해서는“대학 졸업과 동시에 바로 군에 입대하면서 한번도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역하면 무조건 6개월간은 여행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서 “전역하자마자 퇴직금을 몽땅 털어서 유럽과 미국을 둘러보고 전국 일주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여행 때 만난 외국인 친구들도 여군 출신이라고 말하면 굉장히 신기해했다.”면서 “그런데 남한과 북한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외국 친구들이 많아 일일이 가르쳐 주느라 꽤 고생했다. 한국 기업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국이나 한국의 정치 현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 아팠다.”고 덧붙였다. ●화장 기술 없어 맨 얼굴로 면접시험 윤 부대변인은 이회창 대표의 열혈 팬이라고 자처했다. “2002년 임관한 뒤 낯선 환경, 고된 훈련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면서 “그해 9월 이 대표가 쓴 ‘아름다운 원칙’이라는 책을 접하게 됐는데, 원리원칙을 강조해온 정치인이지만 인간적인 따스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목표점을 묻는 질문에 대해선 겸손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나름의 계획은 있지만 부대변인 역할에 흠이 없도록 완성도를 높이는 게 눈앞의 최우선 과제라며 비켜 갔다. 대신 “부대변인 선발 면접 때 화장 기술이 없어서 거의 맨 얼굴로 시험을 봤는데 그런 솔직한 면모, 당당한 기백이 살아 있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글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8·8개각 지상청문회]8·8개각 청문회 미리보니…“방송장악 개입” “투기” 잼정

    [8·8개각 지상청문회]8·8개각 청문회 미리보니…“방송장악 개입” “투기” 잼정

    ■신재민 문화장관 후보자 코드인사·방송장악 개입 의혹 이슈 “기분은 나쁘지만, 특별히 새로운 게 없어서 고민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의 한 보좌관이 11일 전한 말이다. 이른바 ‘실세’로 꼽히는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야권이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하겠다며 벼르고는 있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카드’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청문회도 지루한 실세 공방, 혹은 ‘코드 논란’ 등 정치 공세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병역·재산 등 신상 큰 흠결 없어 우선 병역이나 재산 등 개인적인 부분에서 신 후보자의 흠결을 찾기는 쉽지않다. 재산의 경우 ‘8·8개각’에 포함된 국무위원 후보자 가운데 가장 많다. 지난 4월 정부와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본인 명의의 서울 자양동 자택(11억 1200만원)과 예금(4억 2507만원), 채무(2900만원) 등을 합해 18억 2496만원이다.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아파트 평가액은 줄었지만 예금이 늘면서 지난해에 견줘 1억 2848만원 증가했다. 병역은 공군 이병으로 마쳤다. 병무청은 독자였기 때문에 6개월 보충역으로 근무한 뒤 전역했다고 설명했다. YTN 지분 매각 발언과 정연주 KBS 사장 해임 과정에서 터진 구설수 등은 청문회에서 다시 등장할 소지가 크다. 신 후보자는 2차관 시절이던 2008년 8월 ‘YTN 공기업 지분 전량 매각설’을 주장해 월권시비에 휘말렸다. 정연주 사장 해임 사태 때도 “KBS 사장에 대한 임명권은 물론 해임권도 대통령에게 있다.” 등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야권에서는 이런 발언들을 묶어 신 후보자의 언론관이나 방송 장악개입 의혹 등을 추궁한다는 복안이다. 문화부 보조금 지급문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 지붕 두 수장 사태’ 등 산하단체장 임면 과정에서 불거진 이른바 ‘코드 논란’ 등도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野 “새로운 게 없어 고민이다” 하지만 대부분 국회 상임위에서 다뤄졌거나 법적 절차가 마무리 된 사안들이어서 다소 ‘선도’(鮮度)가 떨어진다는 데 야권의 고민이 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이재훈 지경장관 후보자 부인소유 상가 3채… 투기의혹 쟁점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쟁점이 많지 않아 인물보다 정책 위주의 검증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자가 정통관료 출신인 데다 민주당 의원들과 두루두루 친해 야당의 집중 공격은 피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공직자 출신치고 과다해 보이는 상가 보유와 그에 따른 부동산 투기 의혹, 옛 열린우리당의 수석 전문위원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으로 말을 갈아탄 점 등은 쟁점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2008년 3월28일 관보에 공개된 공직자 재산변동에 따르면 이 후보자는 총 15억 9972만원을 신고했다. 당시 서울 대치동 아파트 등 부동산가격 상승으로 재산이 전년보다 5900여만원 늘었다. 지난해 4·29 재보궐 선거(인천 부평을)에 출마할 때는 14억 3391만원으로 재산 신고를 했다. 이 후보자는 본인 명의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아파트(108.52㎡)를 소유하고 있다. 또 부인 김송경씨 명의로 노원구와 중구에 각각 상가 한 채와 종로구에 근린생활시설(주택가 상가 시설) 한 채를 갖고 있다. 병역은 1979년 5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전투경찰 상경으로 전역했다. ●“노후대비용으로 마련한 것” 부인 김송경씨가 2005년에 상가 3채(상가 2채와 근린생활시설 1채)를 구입한 것에 대해 부동산 투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이 후보자는 지난해 4·29 재·보궐 선거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의혹과 관련해 “노후 대비용으로 마련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상가라고 해도 실상은 3.3㎡ 규모의 좌판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우리당서 한나라로… 철새 논란 이 후보자는 참여정부 시절에 산업자원부(현 지경부) 차관을 지냈고, 열린우리당의 수석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 입당해 지난해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야당과 여당을 오고간 행보에 대한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이 후보자는 일부 언론에 “열린우리당 파견은 정책 소통을 위해서 차출되거나 부처 인사에서 파견돼 보내진 것”이라면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마오쩌둥·류샤오치 악연… 후대엔 해빙무드?

    마오쩌둥·류샤오치 악연… 후대엔 해빙무드?

    최근 중국내 최연소 장군으로 승진한 마오쩌둥 전 주석의 손자 마오신위(왼쪽·毛新宇·40) 군사과학원 전략연구부 부부장에게 장군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이 마오에게 숙청당했던 류샤오치(오른쪽·劉少奇) 전 주석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군부내 태자당(당·정·군 원로의 자녀들)간의 미묘한 가족사가 화제다. 마오신위는 5일 인터넷 매체인 왕이(網易)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달 20일 오전 군사과학원 내에서 장군 진급식이 있었다.”면서 “군사과학원 정치위원인 류위안(劉源·59) 상장(대장)이 소장(준장) 계급장을 달아줬다.”고 말했다. 류샤오치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왕광메이(王光美) 사이에서 태어난 류 상장은 198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허난성 부성장을 지낸 뒤 1992년부터는 인민해방군 소속인 무장경찰 부대로 옮겨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난해 최고 계급인 상장으로 승진했다. 마오쩌둥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류샤오치는 마오가 주도한 대약진운동 실패 직후인 1959년 중국의 제2대 주석에 올랐으며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하는 등 마오를 강하게 비판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당에서 제명당한 뒤 가택연금됐다. 1968년 7월18일 홍위병의 습격을 받아 폭행과 폭언을 당한 뒤 지병이 악화돼 1969년 11월12일 허난성 카이펑(開封)에서 사망했다. 한편 마오신위는 자신이 최연소 장군으로 승진한 것과 관련, “가족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며 할아버지의 ‘후광’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또 “정치와 관련된 일에 관여하고 싶다.”며 정계 입문 의사도 피력했다. 이 같은 발언은 지난 2일 중국 관영매체가 그의 최연소 장성 진급을 보도한 이래 처음 나온 것이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기로에 선 민주당-인물 포커스] ③ 손학규 전 대표

    [기로에 선 민주당-인물 포커스] ③ 손학규 전 대표

    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는 만나기 힘든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의중은 점조직처럼 퍼진 측근들의 말을 종합해야 겨우 짐작할 수 있다. 선거가 있을 때만 지원유세를 하고,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만간 그의 얼굴을 하루에도 몇차례씩 볼 수 있을 것 같다. 민주당이 지도부 총사퇴에 따른 비상대책위 체제에 돌입했고, 전당대회 국면이 본격화되면서 손 전 대표도 현재 머무르고 있는 춘천에서 여의도로 활동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게 됐다. 한 측근은 3일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 초에는 전면에 나설 것”이라고 귀띔했다. 다만 이 같은 전망은 측근들의 희망 사항일 수도 있다. 측근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만 결정은 혼자 하는 게 손 전 대표의 특징이기도 하다. 손 전 대표는 2년 전 당 대표 자리에서 떠난 뒤 줄곧 ‘차별화’ 전략을 써왔다. 측근들은 언제나 “손 전 대표는 당권 경쟁에는 관심이 없고, 민주당이 어떻게 하면 국민의 신뢰를 얻어 2012년 정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뜻이 아무리 높다 해도 결국 대선이 목표이고, 대선으로 가려면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거머쥐어야 한다. 의도가 어떻든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당은 현재 주류·비주류가 전당대회 준비기구 구성과 대표 선출 방식을 놓고 샅바싸움을 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손 전 대표가 더 뜸을 들이다가는 출발부터 삐끗할 수 있다. 비록 거리는 뒀지만 손 전 대표가 현실정치에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3차례의 재·보선과 지방선거를 지원했고, 경기지사 선거에서 유시민·김진표 단일화를 이끌 정도로 친노(친노무현) 세력과도 관계를 호전시켰다. 386그룹의 지지도 여전하다. 손 전 대표의 강점은 호남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는 당세를 수도권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운동권 출신에다 대학교수, 국회의원, 장관, 당 대표 등을 두루 거쳤다. 경쟁자인 정동영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대패한 게 뼈아프고, 정세균 전 대표는 인지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아 고민이다. 손 전 대표는 이런 고민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이적했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그의 정책과 비전이 민주당과 맞는지도 미지수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로 비판한 바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당내 선거는 결국 조직력에서 승부가 갈리는데, 손 전 대표가 과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는지 의문”이라면서 “민주당에 입당한 뒤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하고, 국회의원 선거(종로)에서도 패해 승리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는 한계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5선’ 최장수 구의원 윤주철씨 공천불만 자살

    지난 6·2지방선거 때 구의원에 출마했던 전 구의회 의장이 ‘나’ 번을 배정받는 바람에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6·2지방선거에서 서울 구로 나 선거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윤주철(57)씨가 지난달 30일 구로5동 자신의 선거사무실에서 목을 매 숨졌다고 2일 밝혔다. 윤씨는 3장의 유서를 남겼으며 여기에는 공천 심사과정에 대한 불만 등이 기록돼 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윤씨는 유서에서 ‘공천 과정에 위원장의 약속 위반…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주변 몇몇 사람들이 미워서 견디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지역위원장이 진성당원(매달 2000원의 회비를 내는 당원)을 많이 모집하면 ‘가’ 번을 준다고 해서 570명에게 입당원서를 받아 상대편보다 2배 이상 더 받았다.”면서 “(‘가’번 공천이 아닌) ‘나’ 번 배정은 지역위원장의 횡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고경화 한나라당 구로을지구당 위원장은 “윤 전 의원은 5선이라 ‘나’번으로 배정해도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당원 확대는 하나의 요건이었을 뿐이다. 공천심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들의 수사의뢰가 없어 공천심사 과정에 대해 수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최재무 구로구의정회 회장은 “공천심사과정에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거나 TV 토론회 같은 객관적인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씨는 1991년 구의원선거가 처음 시행될 때 최연소로 구의원에 당선된 뒤 내리 다섯 번 구의원을 한 최장수 의원으로, 2001년에는 제3대 구로구의회 의장을 맡았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12·12 쿠데타’ 맞선 참군인

    ‘12·12 쿠데타’ 맞선 참군인

    26일 79세를 일기로 별세한 장태완 전 국회의원의 빈소에 신군부 인사들이 찾아와 ‘화해의 손길’을 건넸다. 27일 오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종구 전 국방장관 등이 찾아와 장 전 의원을 조문했다. 투병 중이라 거동이 불편한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장례식장에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장 전 의원은 격랑을 헤쳐온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군인 중 한 명이다. 지난 1979년 발생한 ‘12·12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군인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신군부 쿠데타에 맞서 싸운 꿋꿋한 참군인이었다. ●장세동·이종구씨 조문 ‘화해의 손길’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구상고를 다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 사선을 넘나들었다. 특히 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했다가 베트남전쟁 참전 때 ‘사상 불순자’로 찍히기도 했다. 1971년 1월 장군으로 승진한 그는 수경사 참모장과 26사단장 등을 거쳐 10·26 직후 수경사령관에 올랐다. 이때부터 참군인으로 살아온 고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수경사령관 취임 불과 1개월 만에 신군부에 의해 ‘12·12사태’가 터졌다. 그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군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진압에 나섰다. 생전 장 전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며 “그러나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고백했다. 신군부 진압에 실패한 장 전 의원은 곧바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돼 서빙고 분실에서 두 달간의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강제로 벗어야 했고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TV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세상을 버리고, 서울대에 다니던 외아들은 행방불명됐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절치부심하며 통한의 삶을 살아오던 고인은 1993년 민주당 ‘12·12쿠데타 진상조사위’를 통해 공개증언에 나서며 ‘진실 알리기’에 나섰다. 군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2·12사태’에 대한 역사적 판단 이전에 사법적 처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진압 나서” 장 전 의원은 ‘12·12사태’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 등에서 ‘12·12사태’ 당시 목숨을 던져 쿠데타를 진압하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참군인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994년 자유경선으로 재향군인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2000년 민주당에 입당, 16대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민주당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후보 보훈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에는 쿠데타를 막지 못한 ‘한’을 풀고자 쿠데타를 막는 국가시스템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다. ‘12·12사태’가 발생한 지 31년이 지나 쿠데타군에 분연히 맞섰던 이 시대의 참군인은 이렇게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병호씨와 딸 현리씨, 사위 박용찬(인터젠 대표)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결식은 향군장으로 29일 오전 8시30분 치러진다. (02)3010-2231.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12.12 사태’ 장태완 전 국회의원 별세

    장태완 전 국회의원이 26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고인은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교육참모부 차장, 수도경비사령관을 역임했으나 1979년 12.12 사태 시 신군부측에 맞서 강제 예편됐다. 이후1994년 최초의 자유경선에 의해 재향군인회장으로 당선, 2000년 3월 민주당 입당, 같은 해 1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이병호씨와 딸 현리씨, 사위 박용찬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아나운서 되려면 다 줄 생각해야” 與, 성희롱 발언 강용석의원 제명

    “아나운서 되려면 다 줄 생각해야” 與, 성희롱 발언 강용석의원 제명

    한나라당 윤리위원회가 여대생 성희롱 논란을 빚은 강용석(41·마포을) 의원을 제명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강 의원은 이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주성영 윤리위 부위원장은 20일 “강 의원이 당원으로서 당의 위신을 훼손, 징계사유에 해당한다.”면서 “윤리위원 11명 가운데 출석위원 7명과 위임받은 2명의 찬성으로 제명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당헌·당규상 최고 수위의 중징계인 제명 처분은 의원총회에서 재적 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확정되고, 확정시 5년 안에는 재입당이 불가능하다. 중앙일보는 이날 “강 의원이 지난 16일 국회의장배 대학생 토론대회에 참석한 학생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보도했다. 또 지난해 청와대를 방문한 여학생에게는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옆에 사모님만 없었으면 네 (전화)번호 따갔을 것”이라고 하고, 학생들에게 “심사위원들은 (토론)내용을 안 듣고 참가자의 얼굴을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강 의원은 윤리위 출석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나운서와 방송기자를 놓고 고민 중이라는 여학생에게 기자가 더 나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을 뿐이고, 청와대에 갔던 사실이 기억나서 ‘그때 대통령께서 전공과 학교를 묻지 않았느냐.’고 한 것”이라면서 “해당 여학생과 오전에 통화해 봤는데, 실제로 문제가 되는 말을 들은 사실이 없고 기자에게도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또 “허위·왜곡 보도를 한 중앙일보를 상대로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주 부위원장은 “강 의원의 소명이 윤리위원들을 설득시키기에 부족했다.”면서 “여러 관련 보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황을 확인했고, 두 차례 회의를 연 결과 제명 결정을 내릴 만큼의 사실관계는 규명됐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또 “윤리위의 결정은 지도부와 사전 상의 없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앞서 조해진 대변인도 국회 브리핑을 통해 “안상수 대표가 단호하고 엄중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전체 여성의원들도 성명을 내고 “보도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국회의원의 품위 손상은 물론 젊은 여성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킨 중대한 실수”라고 규탄했다. 한국아나운서협회는 성명을 내고 “강 의원의 천박한 여성관과 비뚤어진 직업관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망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금 당장 의원직을 사퇴하라.”고 비난했다. 이처럼 강 의원이 강하게 부인하는데도 한나라당이 사태가 불거진 지 불과 반나절 만에 신속하게 결단을 내린 것은 7·2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최대한 차단하자는 의도로 해석된다. 2006년 5·31 지방선거를 불과 석 달 앞두고 발생한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에 이어 또다시 성희롱 ‘이력’이 불거진 데다 당장 야당들이 일제히 성명을 내 한나라당을 ‘성희롱정당’으로 규정하며 공세를 펼친 것도 위기감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조 대변인은 “비슷한 일로 당이 많이 힘들었는데,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 또 일어나 개탄스럽고, 강경대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라고 전했다. 유지혜·허백윤기자 wisepen@seoul.co.kr
  • 안상수·정세균 “재보선 양보하시죠”

    안상수·정세균 “재보선 양보하시죠”

    한나라당 안상수 신임 대표가 16일 취임 인사차 민주당 정세균,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를 잇달아 방문했다. 두 상견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안 대표는 정치이념이 엇갈리는 정 대표와는 뼈 있는 농담을, 보수대연합의 ‘파트너’가 될 이 대표와는 화기애애한 덕담을 주고받았다. 먼저 안 대표와 정 대표는 첫 만남에서 ‘큰 정치’, ‘경륜 있는 정치’를 강조하며 상생 정치를 다짐했다. 하지만 화제가 7·28 재보선으로 넘어가자 신경전이 펼쳐졌다. 안 대표는 “우리한테도 몇 석 남겨 줘야 살지 않겠느냐. 당 대표 되고 바로 목 떼려고 하지는 않겠죠.”라고 말했다. 이에 정 대표는 “한나라당 의석이 176석으로 늘어났는데, 개혁 진영이 100석은 되어야 심리적 균형이라도 잡을 수 있다. 크게 양보해 달라.”고 맞받았다. 특히 정 대표는 서울 은평을에 출마한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을 빗대 “어떤 후보는 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던데 (안 대표는) 그냥 당사에 계속 계시라.”고도 했다. 반면 안 대표는 이 대표와의 상견례에선 과거 인연 등을 되짚으며 친근감을 과시했다. 안 대표는 “1996년 신한국당이 창당되면서 이 대표가 먼저 입당하고 보름 후에 내가 따라서 입당했다.”면서 “이 대표가 10년 가까이 모시는 동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정치를 가르쳐 주셨다.”고 말했다. 이에 이 대표는 “총리 떼고 변호사할 때 안 대표가 선동해서 정치에 입문했다.”면서 “집권여당 대표로서 힘든 일 많겠지만 서로 감싸면서 잘할 것”이라고 덕담했다. 안 대표와 동행한 원희목 비서실장과 조해진 대변인도 각각 이 대표의 대선 공약위원, 총재 보좌역을 맡았던 인연를 소개했다. 이에 안 대표가 “(이 대표를) 도로 모셔갈까요.”라고 운을 뗐고, 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선진당으로)들어오시죠.”라고 화답했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오전 자택을 찾은 안 대표에게 “내각책임제는 우리나라에서 망한 제도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한 그런 실패한 제도를 다시 할 필요는 없다.”며 현행 대통령제 유지를 당부했다. 홍성규·강주리기자 cool@seoul.co.kr
  • [씨줄날줄] 만델라 데이/육철수 논설위원

    1963년 7월12일.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에겐 일생일대의 비운을 안긴 날이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무장부 수장이던 만델라는 그 전날 알제리에서 특공훈련을 마치고 남아공으로 돌아왔다. 더반에서 ANC 의장을 만나고 이튿날 승용차로 요하네스버그로 향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ANC에 흑인 첩자를 심어놓았을 줄은…. 만델라가 눈을 감고 은신처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꿈에 푹 젖어 있을 즈음, 백인 경찰들이 탄 승용차 몇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만델라는 가명(假名)을 대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허사였다. 경찰관은 미소를 띠며 “당신은 넬슨 만델라요. 체포하겠소!”라고 소리쳤다. 상황은 참 싱겁게 끝났다. 만델라 자신도 이날이 27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첫날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 길게 봐야 하는 법. 만델라가 체포된 날은 먼 훗날 세계 평화주의자이자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의 탄생에 밑거름이 된 첫날이었다. 1942년 ANC에 몸담아 평생을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운 그의 공로는 이미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1912년 남아공 흑인들이 창설한 ANC가 비인종·비폭력 저항운동을 표방했다는 점은 만델라의 투쟁을 더욱 빛나게 한다. 정당성도 부여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1893년부터 20년간 남아공에서 노예로 이주한 7만여명의 인도인을 위해 무저항 권리투쟁을 펼친 게 ANC에 큰 영향을 미친 점도 흥미롭다. 결국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으로 이어진 500여년간의 뿌리깊은 아파르트헤이트가 간디와 넬슨이라는 세계적 두 평화주의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나 할까. 만델라는 내일 92세 생일을 맞는다. 남아공은 지난해 그의 생일(7월18일)을 ‘만델라 데이’로 지정했다. 만델라의 박애주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유엔에도 기념일 지정을 요청했다. 유엔은 지난해 11월 이를 받아들여 ‘국제 넬슨 만델라의 날(Nelson Mandela International Day)’을 제정했다. 그의 생애 중 ANC 입당 후 지금까지 인권운동과 인류평화에 헌신한 67년을 상징하기 위해 ‘67분 봉사활동’을 벌인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힐튼 데니스 주한 남아공 대사가 서울 옥수동 몬테소리 어린이집을 찾아 67분간 봉사활동을 한다는 소식이다. 흑인에 대한 유혈과 억압의 진실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화해로 마무리지은 만델라의 ‘사람 사랑’이 세계 모든 나라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소년가장 출신의 온건 보수

    소년가장 출신의 온건 보수

    ‘조용한 카리스마’, ‘라이네 강의 케네디’ 새 독일 대통령으로 뽑힌 크리스티안 불프 당선자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소년가장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위치에 오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1959년 북부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마저 병으로 쓰러지자 10대때부터 가계와 여동생을 떠맡았다.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오스나브뤼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특히 16세였던 1975년 기민당에 입당한 뒤 당 학생연맹의 연방의장, 당 청년동맹 위원으로 활동했을 만큼 정치 성향이 강했다. 1994년과 1998년 니더작센 주총리직을 놓고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연방총리와 벌인 두 차례의 대결에서 패배했지만, 슈뢰더가 연방총리에 선출된 뒤인 2003년 2전3기 끝에 니더작센 주지사에 올라 연임에도 성공했다. 정치적 기반을 착실히 닦은 셈이다. 불프 당선자의 정치색은 온건 보수주의 쪽이다. 세련된 매너로 일반 국민은 물론 정치적 경쟁자들로부터도 신망이 높다. 한때 연방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2008년 “난 알파형(우두머리) 남자에 어울리는 야망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다. 니더작센 주에서 연방과 마찬가지로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했으며, 지난해 10월 연방의 감세계획을 지지했다. 대학시절 만난 변호사 크리스티안네 여사와 1988년 결혼해 딸을 뒀지만 2006년 이혼했다. 이후 2008년 총리실 공보보좌관이자 아들 하나를 둔 베타나 여사와 재혼, 아들 한 명을 더 낳았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新 차이나 리포트] 급증하는 신앙 인구

    베이징에 사는 딩구이팡(丁桂芳·31)은 최근 몇년간 교회의 변화가 놀랍기만 하다. 모태신앙 기독교 신자인 그는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종교를 가진 사람은 어머니와 자신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종교가 없는 사람이 더 많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교회 밖에서도 신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신론을 원칙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 체제하에서도 경제 발전과 함께 “신은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이 늘고 있다. 중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공산당의 기본 원칙은 신앙의 자유는 허락하되 포교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 역시도 ‘양지’의 종교 시설의 경우 전도를 사실상 묵인하면서 완화되고 있다. 정부 공식 종교인 통계는 수년째 1억명에 머물고 있지만, 각종 조사나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는 변화가 감지된다. 베이징 11개 교회 중 세번째로 큰 시쓰 강와스(西四 缸瓦市)의 ‘베이징예수회당’은 최근 신자가 급격히 늘어 예배 횟수를 하루 2번에서 4번으로 늘렸다. 전도사 류신위안(劉新元·24)은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찾는 신자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곳에는 목사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여성이다. 창사에서 만난 류린(劉琳·22)은 공산당 가입 대신 종교를 선택했다. 불교를 믿는 그는 “당원은 뭔가 훌륭한 점이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입당하면 좋긴 하다.”면서도 “하지만 굳이 종교를 버려가면서까지 공산당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상하이 화둥사범대학교(華東師範大學校) 연구팀이 2007년 실시한 조사에서 이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16세 이상 인구의 31.4%에 이르는 3억명 정도로 추정됐다. 특히 기독교 신자가 크게 늘어, 1990년대 후반 정부 통계 기준 1000만명에서 4000만명으로 증가했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2008년 올림픽 직전 미 일간지 시카고트리뷴과 공영방송 PBS의 탐사보도에서는 7000만명으로 추산됐고 그중에는 공산당원도 포함돼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중국 정부는 국제 사회의 눈을 의식, 종교 시설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베이징예수회당의 경우 1920년대 돈이 없어 땅을 사지 않고 불법으로 건물을 지었다. 정부가 올림픽을 앞두고 교회 지원에 10억위안(약 1750억원)을 투입, 이제는 땅까지 교회 소유가 됐다. 시 정부는 지난해 초 베이징 남서쪽에 있는 성당의 재건축을 위해 1100만위안을 지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전 세계에서 정부의 종교 억압이 가장 심한 나라다. 종교 및 공공 생활에 관한 퓨(Pew) 포럼의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신자들에 대해 갖는 적대감은 낮지만 정부의 제약은 조사 대상 64개국 가운데 가장 컸다. 베이징·창사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新 차이나 리포트] “톈안먼? 건물이죠… 공산당은 취업용이고요”

    [新 차이나 리포트] “톈안먼? 건물이죠… 공산당은 취업용이고요”

    신세대를 이해하면 그 나라의 미래가 보인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세대인 1980·90년대생들을 들여다보면 중국의 변화 방향과 폭을 가늠할 수 있다. 급증하는 종교 신도들을 통해서도 달라지는 중국을 엿볼 수 있다.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당 체제 아래서 “신은 있다.”라고 말한다.달라진 중국 신세대와 신자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1. “톈안먼(天安門)이 왜 인터넷에서 검색이 안 돼요?” 중국 창사(長沙)의 후난대학교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룽솨이(龍帥·19)는 ‘톈안먼 사건’이 검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1989년 사건을 아느냐.’고 묻자 고개를 젓는다. ‘톈안먼 사건’을 몰랐던 터라 정부의 인터넷 통제 정책을 얘기하면서 언급한 톈안먼을 있는 그대로, ‘베이징의 건축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항저우(杭州)의 저장대학교에 재학 중인 장잉(張穎·19)도 마찬가지였다. 톈안먼 사건은 물론 인터넷 통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 우한(武漢)에서 만난 쉬제(許捷·21)는 공산당에 대한 생각을 묻자 “나와 큰 연관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당원이 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가입은 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기업에 취업하려면 당원이 유리하니까요. 다른 일을 하더라도 당원이면 한번 ‘검증’ 받았다고 인식되니까, 일단 입당은 하려고요.” 민주화와 정치는 중국 신세대의 관심 밖에 있었다. 톈안먼 사태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들어 본 적은 있어도 ‘깊게 알고 싶지 않다.’든지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는 얘기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 만난 샤오팡(蕭芳·20)은 “인터넷을 통제하는 정책은 온당하다.”고까지 주장했다. 대신 취업 걱정과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이 그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여행 잡지 기자인 리양(李楊·24)은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은 뒤 “요즘 최대 관심사는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이라고 전했다. 돈을 벌면 독일 유학을 가고 싶다고도 했다. 대학생 마징(馬靜·20)은 “2008년 위기 이후 금융이 인기있는 학과가 됐다.”며 전공 선택 이유를 설명했다. 선호하는 직업은 한국 신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고, 대기업 입사를 희망했다. 베이징 영화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하는 차이멍제(柴夢?·21)는 “성공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톈진에 사는 대학교 4학년 스청훙(史成紅·23)은 “부모님이 원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긴 했지만 큰 회사에서 돈도 더 벌고 내 능력 이상의 것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의 신세대는 ‘인터넷 세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도 인터넷으로 과제를 하고 친구들과는 ‘QQ’(메신저)로 대화한다. 최근 광둥(廣東)성의 혼다차 포산(佛山)공장 파업을 주도한 ‘신세대 농민공’ 역시 ‘QQ’와 휴대전화 문자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류징(劉靜·22)은 “컴퓨터를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제가 잘 안 된다.”면서 “인터넷 없이는 하루도 살기 어렵다.”고 전했다. 인터넷을 통해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소황제(小皇帝)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바깥 세상에 눈을 뜬 이들은 금기시되는 공산당에 대한 비판에도 거침 없었다. 샤먼(廈門)의 대학원생 린산(林?·24)은 인터넷 통제에 대해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면서 “주제만 조금 바꾸면 검색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공산당이) 우매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수도사범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둥링위(董玲玉·20) 역시 “국가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고 꼬집었다. 글·사진 베이징·톈진·우한·창사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시·도지사 당선자에게 듣는다⑩] 김문수 경기지사 “배부른 한나라 공천 잘못”

    [시·도지사 당선자에게 듣는다⑩] 김문수 경기지사 “배부른 한나라 공천 잘못”

    김문수 경기지사가 여당의 6·2지방선거 패인은 잘못된 공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지사는 13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패배 요인은 (국민들의)여당에 대한 견제도 있었지만 (한나라당의)잘못된 공천에도 있었다.”고 꾸짖었다. 김 지사는 “(한나라당이)권력을 독차지하다 보니 민심을 헤아리지 못했다. 솔직히 배가 많이 불렀다.”고 지적했다. 여권 핵심자들 가운데 6·2지방선거 패인을 놓고 직설적으로 공천 문제를 지적하기는 김 지사가 처음이어서 그의 발언이 미치는 파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김 지사를 만나 도정 방향과 정치적 포부를 들어봤다. →수도권에서 한나라당 체면을 세웠다. 민심도 제대로 읽었을 텐데. -바닥 민심을 헤아린 게 주효했다. 접경지역이나 한센촌 등 오지를 가리지 않고 경기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그 지역 주민들도 지사가 그런 곳까지 올줄 몰랐다고 했다. 오지 주민들을 비롯해 택시기사·공장 노동자·소외된 주민들이 지지를 해준 게 큰 힘이됐다. 권력이라는 게 교만하면 망한다. 더 낮춰야 한다. 모든 권력을 한나라당이 독식하고 있었다. 달도 차면 기운다. 천안함 사태는 민심 이반을 완화시켜준 것에 불과하지 패인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더욱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공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권력을 독차지하다 보니 민심을 헤아리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솔직히 배가 많이 불렀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하고 청와대도 예외는 아니다. 나도 공천을 해봤지만 이런 공천은 없었다. 공천권은 국회의원 사유물이 아니다. 국회의원에게 공천권을 주는 것은 난센스다. 개방형 완전 국민경선제로 가야 한다. →4대강 사업과 세종시 건설은. -세종시 문제는 지역 문제가 아니다. 국가로 봐서 수도를 분할해서 여기저기 옮기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4대강 사업 중 한강이 경기도에 있는데, 한강살리기 사업으로 수질이 10년 만에 가장 좋아졌다. 6개 관련 기초단체 가운데 가평을 제외한 5개 자치단체가 한나라당 후보로 모두 찬성하고 있다. 주민들도 찬성하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몰려와 데모하고 있다. 도의회에서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수도권 기초단체장들이 대거 야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대수도론이 힘이 빠질 것이란 관측이 있다. -주민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 당적 차이는 큰 문제가 안 된다. 주민을 위하고 더 크게는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안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협의한다면 대수도권으로 뜻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다. 여소야대 상황이지만 대화 창구를 다변화하고 대화 전문가를 포진시킬 것이다. 의회를 더 중요시하면서 내 자신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문제될 것 없다. 그것 말고 답이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무상급식에 대한 입장은. -점진적인 무상급식을 하자는 소신엔 변화가 없다. 사실 밥 먹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육과 과외 문제가 더 심각한데도 야당에서는 이를 선거에 이용해 재미를 봤다. 아이들을 볼모로 이같은 이슈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상급식을 확대하고 싶다면 현재 자치단체가 하고 있는 방학 중 무상급식이라도 교육청이 갖고 가야 한다. 학교의 급식시설을 방학 중에도 가동해 끼니를 거르는 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당내 기반이 탄탄해졌는데 2012년 대선에 출마할 것인가. -민선 5기가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음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도지사직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앞으로 도정 운영 계획은. -경기도는 많은 규제에 묶여 있다. 특히 북부지역은 군사 규제·그린벨트·상수원 보호 등 겹겹 규제로 외자 유치나 기업 투자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 규제를 풀어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 GTX(광역급행철도), 서해안 개발 등 도민들의 기대가 큰 사업도 계획대로 추진한다. 보육과 교육도 통합적으로 해야한다. 위기가정 무한돌봄사업을 비롯, 24시간 보육시설, 꿈나무 안심학교 등을 확대할 방침이다. 글 사진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김문수 당선자는 노동운동가 출신이자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경기도 첫 재선 도지사다. 1951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을 하다 1974년 민청학력 사건으로 제적됐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1990년 이재오 현 국민권익위원장 등과 민중당을 창당해 제도권 진입을 모색했다. 그러나 1996년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에 입당해 부천 소사에서 15대부터 내리 3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6년 경기지사직까지 거머쥐면서 단숨에 잠재적 대선주자군으로 부상했다. 부인 설난영씨와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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