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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떼돈 번다’의 떼돈, 그 유래를 아시나요?

    ‘떼돈 번다’의 떼돈, 그 유래를 아시나요?

    ‘통나무를 떼로 가지런히 엮어서 물에 띄워 사람이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것.’ 뗏목의 사전적 의미다. 문화적 의미로는 ‘추억’ ‘옛것’ 또는 ‘사라져 가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문화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 뗏목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철도·트럭이나 육로가 마땅치 않았던 시절, 뗏목은 먼 곳으로 나무를 운반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나마 남은 옛날 전통방식의 뗏목을 보려면 영월에서 열리는 동강축제나 정선에서 열리는 정선아라리축제에 가야한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점심 무렵이 다 돼서야 도착한 영월군 거운리 둥글바위 앞은 뗏목을 만드는 사람들로 붐빈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판을 이르는 ‘동가리’ 여럿이 이미 강물에 올라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되돌아 간 듯 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 시절 뗏목을 모는 떼꾼(또는 떼사공)들은 영월에서 길이 30m, 폭 3~4m 가량의 동가리 12개를 엮어 서울의 노량진과 마포ㆍ뚝섬으로 나무를 날랐다. 물이 많을 때에는 사나흘이면 당도했지만 가물면 달포를 넘기기도 했다. 뗏목과 떼꾼의 가장 화려한 시절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당시였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니 나무 수요가 높아졌고, 덩달아 떼꾼의 몸값도 높아졌다. ‘떼돈 번다’의 떼돈도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당시 떼꾼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 해서 떼돈이라는 말이 나왔다지만, 실제 ‘떼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는 각양각색이다. 1950년대 떼꾼으로 생계를 이었다는 엄달섭(74)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예전에는 강 근처 총총히 주막이 있었지. 가문 때에는 주막에서 배로 막걸리를 싣고 와 팔았는데, 한 주전자에 3전 정도 했던 시절이었어. 돈 내고 남의 술 먹다보니 떼돈 다 날리고 남는 게 없었지 뭐. 허허” 뿐만 아니라 급류에 휩쓸려 뗏목이 부숴 지기라도 하면 수리비가 들었고, 서울과 동강을 오가는데 워낙 시일이 오래 걸리다 보니 밥값도 만만치 않게 들어 오히려 돈 모으기가 어려웠다면서 “떼돈은 그저 돈을 떼로 썼다는 뜻이여.”라는 풀이도 곁들인다. 떼꾼들의 시절은 강물을 따라 흘러갔지만 여전히 옛것을 기억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동강 축제에 뗏목은 여전히 머물러 있다. 이곳에서 문명의 손길이라고는 통나무를 자르는 전기톱 정도. 방향을 조절하는 ‘그래’를 끼우는 일이나 통나무를 서로 엮어 동가리를 만드는 일 모두 사람의 손만 빌리는 전통방식을 고수한다. 사라져 가는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전통 뗏목을 만드는 방식은 맥이 끊기기 직전까지 와 있다. 거운리 안에서 뗏목 전통 제작과정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올해 축제에 떼꾼으로 참여한 엄달섭씨와 엄월열(77)씨를 비롯해 4명 정도가 전부다. 영월군이 나서 거운리와 손잡고 근근이 명맥은 이어가지만 정형화된 제작 매뉴얼이 없기 때문에 계승이 어렵다. “이젠 나이가 들어 사공노릇도 못하는데 언제까지 이걸 만들 수 있을런지 모르지…”라며 작은 탄식을 하는 엄 노인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똇목을 만드는 일은 반나절 이상을 꼬박 움직여야 한다. 통나무가 모여 동가리가 되고 떼를 이룬다. 밧줄로 동가리를 연결하고 뗏목 제작 전용 못인 ‘뗏못’으로 고정한 뒤 노의 구실을 하는 그래를 매달면 뗏목 띄울 준비가 끝난다. 뗏목이 완성되면 영월군민과 동강의 안녕을 비는 고사가 진행된다. 떼꾼들이 흰 모시옷으로 갈아입은 뒤 뗏목에 오르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기약 없는 뗏목과 떼꾼이 붉은 동강을 따라 천천히 멀어져 간다. ※영월 동강 축제는? 매년 여름 열리는 동강 축제는 전통뗏목 시연행사를 시작으로, 다양한 문화 체험과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전통문화 보존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해 매년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영월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사진·영상=김상인 VJ bowwow@seoul.co.kr
  • [씨줄날줄] 광화문 현판/함혜리 논설위원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뒤 최고의 길지를 택해 지금의 경복궁을 지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경복궁 건설 책임을 맡았던 정도전에게 모든 건물과 문의 이름을 짓도록 명했다. 정도전은 태조 4년(1395년) 10월7일 경복궁의 남쪽 정문이 정남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정문(正門)이라 이름 붙였다. 이 문의 명칭은 세종 8년(1426년)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光化門)으로 바뀌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타 없어지고 고종 2년(1865년)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복원됐다.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목조 다락이 불에 타 없어졌다. 현판도 이때 사라졌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광화문을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 원래 자리에 세우고 박 전 대통령은 직접 한글로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써 걸었다. 광화문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계속된다. 참여정부 시절 재야 사학계에서는 광화문 복원이 크게 잘못됐다고 목청을 높였다. 위치가 13.5 m 뒤로 밀렸고, 문의 방향각이 3.5도 틀렸으며, 글자순서도 우좌횡서가 아니라 좌우횡서로 그 의미를 반감시켰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2006년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고, 한글 현판도 교체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이 사료 수집 중 다시 세워진 광화문의 현판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총지휘한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는 것을 확인했다. 임태영을 광화문 현판의 서사관(書寫官)이라 표기하고 있는 공사일지 ‘경복궁 영건일기’에서였다. 일제시대 찍은 광화문 사진 등을 근거로 글씨체를 복원해 냈다. 오는 8월15일 광화문 새 현판 일반 공개를 앞두고 논란이 재점화됐다. 정부는 문화재 복원은 원형 그대로를 살리는 것인 만큼 옛 한자 현판을 거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글단체 등은 시대정신을 살려 훈민정음 글씨체로 된 현판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글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판에 한자로 된 현판 제막식은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등 20여개 단체는 광화문의 박 전 대통령 친필 한글 현판 철거가 ‘박정희대통령 흔적지우기’의 일환이라며 친필 현판을 다시 내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기세다. 경솔한 결정으로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낳게 한 장본인은 부끄러워할 줄이나 아는지 궁금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대표적 양반마을… 새벽 낭보에 주민들 “경사”

    대표적 양반마을… 새벽 낭보에 주민들 “경사”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600여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 동성(同性)·반촌(班村)마을이다. 역사의 향기가 담겨 있는 조선시대 기와집과 초가 등 고 건축양식과 전통 생활·문화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돼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120여가구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 내에는 400~500년 된 고가옥을 비롯해 총 125가옥이 강을 향해 배치돼 있으며 가옥들은 기와집 162동, 초가집 211동 등 모두 437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 4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마을을 다녀간 뒤 세계적 관광지로 부상했다. 경주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등 두 집안이 혼인을 맺은 이후 500년동안 전통을 잇는 유서깊은 반촌마을이다. 조선시대 신분 제도와 건축과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18현(賢) 중의 한 사람인 저명한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을에는 100채가 넘는 기와집과 초가집, 노비들이 살던 가랍집 등 150여채의 전통 가옥이 있으며, 가옥들은 설창산의 안골·두동골·물봉골·장태골 등 4개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배치됐다. 집의 위치에서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위계 질서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1일 새벽 브라질에서 날아들면서 안동과 경주는 잔칫집 분위기다. 하회마을에는 아침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알리는 현수막과 애드벌룬이 걸려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고 축하 탈춤공연과 나룻배 체험에 이어 풍천면 풍물패가 하회마을을 한 바퀴 돌며 잔치 분위기를 더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도 아침 일찍부터 환영 현수막을 내걸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자축했다. 이명환 양동마을보존회 총무는 “양동마을이 민속마을에서 세계적인 전통마을로 위상이 격상돼 기쁘다.”며 “앞으로 양동마을의 보존이 더욱 체계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동·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이승기 “나보다 500살 연상 여친 소개합니다”

    이승기 “나보다 500살 연상 여친 소개합니다”

    배우 이승기가 500살 연상의 여자친구를 소개했다.오는 8월 방송되는 SBS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차대웅 역을 맡은 이승기는 19일 오후 국내 최초 드라마 캐릭터로 개설한 트위터에 극중 구미호로 출연하는 배우 신민아와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이승기는 사진과 함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라고 글을 시작하며 “이름: 구미호. 생년월일: 1400년초 정도(정확히 기억 안난다고 함)”라고 구미호의 신상정보를 밝혔다.특히 이승기가 여자친구 구미호의 인맥으로 “태조 이성계님과 동년배, 세종대왕 어릴 적부터 지켜봐옴. 이순신장군 어머니가 손녀뻘”이라고 재치 있게 적어 웃음을 자아낸다. 또 “임진왜란 즈음 삼신할매에게 봉인됨”이라고 구미호가 봉인된 이유를 설명했다.이어 그는 “대웅이보다 500살 정도 연상이지만 절대동안을 자랑하며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인 내 여자친구 구.미.호.!를 소개합니다!!^^*”고 글을 남겨 여자친구 자랑에 여념없는 팔불출같은 모습을 보였다.이승기가 올린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두 분 너무 잘 어울린다. 질투난다.”, “두 사람 너무 다정한거 아니냐”, “드라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한편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500년 전에 살았던 구미호(신민아 분)가 21세기에 다시 깨어나 차대웅(이승기 분)을 쫓아다니며 최첨단 문명을 새롭게 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이다. 오는 8월 11일부터 SBS 수목드라마 ‘나쁜남자’의 후속으로 방송될 예정이다.사진 = 차대웅 트위터서울신문NTN 강서정 인턴기자 sacredmoon@seoulntn.com
  • [씨줄날줄] 송덕비/이춘규 논설위원

    전국의 도시·마을 입구에서 송덕비(頌德碑)를 쉽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현감의 공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불망비(不忘碑)가 다수다. 임진왜란 때 지원했던 명나라 장수 송덕비도 있다. 유서 깊은 도시에는 수십개씩 송덕비가 늘어선 이른바 ‘비석거리’가 많다. 지방관들의 선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겨 선정비(善政碑)라고도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세운 송덕비였다. 마음대로 송덕비를 세울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공적 내용을 엄격히 심사했지만 엉터리도 많았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핑계로 돈을 거두어들이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한 배경이다. 주민들에게 비석 건립을 강요한 관리들의 위선과 악정에 대한 분풀이로 ‘비사치기(비석차기)’ 놀이가 있을 정도다. 반대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송덕비를 세우려 해도 끝내 사양한 청백리도 적지 않았다. 순절비(殉節碑)·충렬비(忠烈碑)·대첩비(大捷碑) 등도 있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변 높이 5.7m의 거대한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쟁하다 삼전도로 나와 항복한 뒤 세운 청 태종 공덕비이다. 굴욕의 상징이라며 고종과 주민들에 의해 두 번이나 땅 속에 묻혔다가 홍수로 드러났고, 이전을 거듭하다 371년이 지난 올 봄에야 원래 위치에 옮겨졌다. 비문의 글씨를 쓴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쓰게 됐고, 벼슬도 버리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부끄러운 송덕비가 많았다. 해방 뒤 상당히 사라졌다. 을사5적 박제순 등의 송덕비는 철거 논란이 뜨거웠다. 현대에도 송덕비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정치인이나 관료, 경제인, 예술인 등의 송덕비가 많지만 때로는 논란을 유발하기도 했다. 물론 송덕비가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수백년이 지나면 풍화작용으로 내용의 해독이 어렵다. 오래 전의 한자들은 읽기 어려운 것이 많다. 이처럼 송덕비는 무상할 뿐이다. 12년간 재직하고 퇴임한 전직 동작구청장의 송덕비가 화제다. 서울 동작문화원이 지난달 30일 퇴임한 김우중(68) 전 구청장의 업적을 새긴 너비 1m, 높이 1.5m의 표지석을 최근 문화원 앞에 세웠다. 표지석에는 그의 약력과 학력, 수상 내역, 부모와 배우자의 이름 등이 쓰여 있다. 큰 덕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자발적 모금으로 세워졌다지만 뒷말이 무성하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이순신 대신 거북선 지휘봉 잡은 ‘손문욱’이 일본인?

    이순신 대신 거북선 지휘봉 잡은 ‘손문욱’이 일본인?

    1598년 임진왜란 당시 숨을 거둔 이순신을 대신해 지휘봉을 든 인물의 정체가 밝혀졌다. 주인공은 바로 일본의 장수 손문욱이다. 3일 오후 8시 방송된 KBS 1TV ‘역사스페셜-이순신 대장선의 미스터리 손문욱’ 편에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인 손문욱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난중일기에도, 징비록에도 손문옥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다. 당시 그의 이름은 손문욱이 아닌 이문욱으로 돼 있고 일본 기록에는 손문식, 손문혹이라고도 적혀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장수로 참전한 손문옥은 점령지 남해의 일본군 관리로 임명됐다. 다시 조선으로 귀순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을 지휘하고 공신으로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이렀다. 사진 = KBS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숭례문 땅속의 1.6m 찾았다

    숭례문 땅속의 1.6m 찾았다

    최소 3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숭례문의 속살이 드러났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30일 서울 남대문로 4가 숭례문 발굴 현장에서 설명회를 갖고 “지난 4월부터 성 문루를 떠받치는 석축 기단인 육축(陸築)의 인접 지역 800㎡를 발굴조사한 결과 현재의 지표보다 160㎝ 아래에서 조선 태조 때 숭례문을 처음 쌓을 당시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육축의 기초 지대석과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모양의 문)의 문지도리석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숭례문 육축 석재 1~2단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숭례문 육축의 원래 높이도 현재 6.4m가 아닌 8m임이 확인됐다. 또 15~16세기 조선전기 도로는 현재 지표 160~170㎝ 아래, 17~20세기 중·후기 도로면은 지표 30~50㎝ 아래 지점에서 각각 확인돼 임진왜란 뒤 숭례문 일대 지표면이 1m 이상 상승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조선 전기 도로는 지금의 아스팔트 도로를 닦는 방식과 흡사하게 잡석과 자갈, 흙 등을 다진 다음 회색 모래를 깔아 만들어졌으며, 중·후기 도로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이태원 지명 유래 說·說·說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효종(1619~1659)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효종 때 배밭이 많은 동네라는 까닭으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고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뜻으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왜란 중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태원은 이방인 공동체 성격이 강한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조선 때부터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일본군 사령부가 머문 뒤 군사지역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가 1882∼1984년 주둔했고, 1910∼1945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한국전쟁 뒤 미군이 이태원 상권을 주도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미군 유흥가로 거듭나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57년 미군의 외박·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겼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 대상 매춘업소가 남산3호 터널 입구부터 이태원 입구까지 해방촌과 삼각지 파출소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가 조성됐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돼 88올림픽 당시 이태원 상가 점포는 1800개에 이를 정도로 쇼핑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올림픽 때 하루 평균 6000명의 외국인이 약 3억달러를 썼다는 연구 논문도 있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서울에 제갈공명·관우 사당 있다

    삼국지의 대표적 등장인물인 제갈공명과 관우가 서울시내에서 버젓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민간신앙 형태로 정착된 사당 때문이다. 22일 서울시에 따르면 중구 예장동에 위치한 와룡묘는 제갈공명을 받드는 사당이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이 사당에서는 해마다 음력 6월24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평상시에도 신도들이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구 방산동 성제묘(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호)와 장충동 관성묘는 관우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이중 성제묘는 민간인에 의해 지어져 지금도 마을 토박이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시 관계자는 “제갈공명과 관우를 모신 사당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에 의해 세워진 뒤 차츰 부귀와 건강을 기원하는 민간신앙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인왕산 서쪽 자락 선바위 아래에 자리잡은 국사당(중요 민속자료 제28호)은 민간신앙을 믿는 신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을 모신 국가사당인 국사당은 당초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 조선신궁이 지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초기에는 이곳에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형태로 바뀌었다. 서울시내에는 종묘와 같은 국가사당 외에 용산구 서빙고동 부군당(서울시 민속자료 제2호)과 종로구 평창동 보현산신각(서울시 민속자료 제3호) 등 민간사당도 곳곳에 남아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열린세상]척화와 주화/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척화와 주화/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외적이 침입했을 때 이에 맞서 싸울 것인가, 화해를 할 것인가 하는 논란은 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나자,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로 논의가 갈렸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척화를 표방한 데 반해 민주당과 재야는 주화를 표방했다. 이명박 정부는 어뢰로 천안함을 두 동강 낸 북한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민주당에서는 그래봐야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 피차가 재앙을 당할 것이니 북한을 잘 달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척화와 주화의 대립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이러한 척화와 주화의 대립은 지난번 6·2지방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나라당 후보들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물증이 나온 만큼 그들을 응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북행위를 근절해야 하니, 북한에 대해 동정적인 발언을 하는 야당에 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민주당은 득표를 위해 국민을 전쟁위험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양자가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으나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과도한 억지논리를 펴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물증이 북한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느니, 좌초 등 어뢰가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한 침몰일 것이라느니, 조사결과를 0.00001%도 믿을 수 없다느니 하는 논란 등이 그러하다. 병자호란 때에도 국론이 척화와 주화로 갈려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김상헌(尙憲)을 비롯한 척화파와 최명길(崔鳴吉)을 위시한 주화파가 그러하다. 김상헌의 논리는 조선은 위화도(?化島) 회군 이후 친명정책을 썼고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소생할 수 있었으니, 명나라의 원수인 청나라는 곧 우리의 원수라는 것이다. 혹 나라가 망할지라도 명과의 의리를 잃어버리면 금수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을 갚기 위해 위명(爲明)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최명길은 위명도 좋고, 대의명분도 좋지만 우선 우리나라를 보존하고 나서 할 일이지 명분을 위해 백성을 어육(魚肉)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위명도 좋지만 존국(存國)부터 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명길은 목숨을 걸었다. 단신으로 청군의 진영으로 가 침략의 이유를 따지면서 시간을 벌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갈 수 있게 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청군과 타협해 조선 조정의 항복을 이끌어 냄으로써 나라는 보전했다. 그리고는 중 독보를 보내 명나라와 내통하다가 발각되어 잡혀가 사형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김상헌도 삼전도비(三田渡碑)를 훼손했다는 헛소문 때문에 역시 청의 사형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화해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청의 심문에 끝까지 버티는 것을 보고 이름을 얻기 위해 척화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김상헌은 최명길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각 방법은 다르지만 나라를 사랑해서 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여야의 대결은 어떤가? 병자호란 때와 비교하면 한나라당이 척화파요, 민주당이 주화파다. 양당은 각각 타당한 논리가 있겠지만 국익을 위해, 국민을 위해 어떤 방법이 최선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 어느 면에서 당리당략을 떠나야 한다. 호전적인 적을 앞에 놓고 자당의 유·불리를 따져서는 안 되는 주장을 일삼는다면 국가와 국민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북한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적으로 패악을 부리는 것을 용납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여야는 앞으로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 천안함 사건을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국익을 위해서 상호보완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잘못하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나라를 그르치는 빌미가 되고 망국적인 당쟁의 폐해를 재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 울산박물관 명품유물 모시기

    울산박물관 명품유물 모시기

    울산시 박물관추진단은 상반기 유물구입 공고를 통해 ‘조국구도(曺國舅圖)’와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호작도(虎鵲圖)’ 등 명품유물을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입했다고 24일 밝혔다. ‘조국구도’는 도교 8선 가운데 한 명인 조국구가 악기를 들고 서 있고 좌우에 악기를 불거나 복숭아 광주리를 진 소년 3명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의 ‘신선도 8폭병풍’의 ‘조국구도’와 거의 같은 구성과 표현을 보여줘 관심을 끌고 있다. ‘동래부순절도’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백성들의 항전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1834년 변곤(卞崑 1801∼?)이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현재 육군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392호 ‘동래부순절도’(1834년작)와 구성과 구도가 거의 유사하다. ‘호작도’는 꼬리를 치켜든 호랑이를 소나무 위에서 까치가 내려다보는 그림으로 17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호랑이의 털이 살아있는 듯 묘사가 섬세하다. 김우림 박물관추진단장은 “내년 6월 울산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전시 및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준 높은 유물을 계속 구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서울 古木에 얽힌 사연 아시나요

    서울 古木에 얽힌 사연 아시나요

    1000만명이 사는 서울에도 1000년 묵은 나무가 있다. 18일 서울시가 발표한 ‘천연기념물(11그루), 보호수(214그루) 자료’에 따르면 최고령 나무는 서울시 기념물이자 천연기념물 271호인 신림동 굴참나무다. 난곡사거리에서 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에 있다. 고려 때 강감찬(948~1031) 장군이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나무로, 주민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아직도 굵은 도토리를 맺는다. 높이는 17m이고, 가슴 높이에서 잰 나무 둘레는 2.5m, 지름 1m이다. 워낙 커 차지하는 면적만 324㎡이다. 서울시 보호수 1호인 방학4동 은행나무는 871살이다. 높이 25m, 둘레 10.7m로 서울시 천연기념물 나무 및 보호수 중 가장 크다. 박정희 대통령 타계 1년 전인 1978년에 불이 나 소방차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때 나라가 위험해지면 스스로 가지를 태워 재앙을 예고해 준다는 소문이 퍼져 ‘애국나무’로 불린다. 1.2m에 이르는 유주(乳株)를 지녀 아들을 낳게 한다는 신령수로도 통한다. 오랜 은행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주는 텅빈 나무둥치를 뚫고 치솟아 허공에 매달린 뿌리 일부분으로, 산모가 이를 만지면 아들을 낳고 젖이 잘 나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480여살의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있는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터는 조선 중종 시절 영의정 정광필의 집으로, 꿈에 정승 허리띠 12개를 나무에 건 이후 400년간 12명의 정승이 났다고 알려졌다. 임진왜란 때 나무를 베려던 왜군을 동네 노파가 생선 1마리를 주고 말렸는데 당시의 상처가 뿌리 부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성수동 느티나무는 경복궁 증축 때 징벌됐으나 주민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해 빠진 뒤 대감나무로 불렸다. 이후 이 동네에는 ‘전해 내려오는 나무가 있는 고을’이라는 뜻으로 전나무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농4동 물푸레나무에는 수호신이 깃들어 6·25 전쟁 때 이곳에 피신한 사람은 그 누구도 사망하지 않았다고 서울시는 소개했다. 이밖에 가회동 헌법재판소에는 수령 600년인 백송(천연기념물 8호)이, 조계사에는 수령 500년의 백송(5호)이, 창경궁에는 700년생 향나무(194호)가 있다. 만리동2가 양정중 터에 있는 참나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 선수가 히틀러에게서 받은 것이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열린세상] 한국인의 명분주의/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 한국인의 명분주의/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인은 명분을 중시하고, 중국인은 실리를 중시하고, 일본인은 의리를 중시한다는 말이 있다. 조선의 지배사상은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에서는 명분과 체면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중국은 정복왕조가 많이 들어서 한족(漢族)이 3등민족으로 떨어질 때도 있었다. 중국사의 절반 이상은 오랑캐의 역사였다. 정복자인 오랑캐 지배 하에서 살자면 실리와 신용을 목숨처럼 여겨야 한다. 반면에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무사사회라 ‘오야붕-꼬붕’의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니 윗사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고, 죽으라면 죽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민족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사회는 유교사회였다. 유교에서는 정명(正名)을 중시했다. 바른 명분, 이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조선은 문치주의를 신봉했으며,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국가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도덕적 수양이 되어 있어야 가장(家長)도 되고 국가의 관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수기(修己)를 한 다음에 치인(治人)을 해야 했다. 도덕적으로 수양된 군자(君子)라야만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배우는 교재나 과거시험 과목도 도덕서인 유교경전이었다. 도덕시험에 통과해야 국가나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유교사회에서는 분수(分數)를 중시했다. 차별을 기정사실화하는 분(分)의 사회였다. 양반(兩班)·중인(中人)·양인(良人)·천인(賤人)의 신분 차별이 있고, 남녀의 차별이 있고, 주노(主奴)의 차별이 있고, 노소(少)의 차별이 있고, 적서(嫡庶)의 차별이 있다. 차별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다. 어찌 보면 유교는 차별의 종교이다. 이 점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와 상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자가 일찍이 현불초(賢不肖)를 인정한 이상 차별은 없을 수 없다. 똑똑한 사람은 군자로서 노심자(心者)가 되고, 못난 사람은 소인으로서 노력자(努力者)가 되며, 노심자는 노력자를 다스리고, 노력자는 노심자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능력주의가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사회에서는 교육이 중시되었다. 요즈음 한국 사람들의 교육열이 높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국이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이 교육열 때문이다. 조선의 가장 큰 대의명분은 존명사대(尊明事大)였다. 이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의 명분이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의 명분이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반정명분이요, 북벌론(北伐論)의 복수설치(讐雪恥)의 명분이기도 하다. 비록 강대국이기는 하나 청나라를 배격하고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위해 사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조선 정부의 외교정책이었다. 이는 금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간 송나라의 주자학적 민족주의를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힘은 없지만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워 민족적 자긍심을 뽐내 보자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은 문화사대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드시 무력이 강한 나라에 복속하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나라를 섬기고자 한 것이다. 청나라는 문화적으로 조선의 수하에 있던 나라인 데다가 조선이 존경해 마지않는 명나라를 정벌했으니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벌론이 그것이다. 반대로 북학론(北學論)은 청나라 문화가 명나라 문화 못지않게 높은 수준이니 오히려 배워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도 조선 후기의 정국은 노론 명분주의자들이 계속 주도해 왔기 때문에 명분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그리하여 서구세력이 밀려왔을 때도 실리를 취하지 못해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도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는 명분사회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구의 실리지상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히려 명분보다 실리를 더 존중하는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씨줄날줄]세종대로/노주석 논설위원

    성군 세종대왕의 정식 칭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대왕이다. 세종은 묘호(廟號)이고, 장헌은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시호(諡號)이다. 영문예무는 사후 신하들이 올린 존호(尊號)이고, 인성명효는 아들 문종이 바친 시호이다. 세종이라는 호칭은 묘호를 지칭한다. 나머지 시호와 존호는 대왕의 업적이나 능력, 인성을 나타낸다. 묘호란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존호이다. 박영규의 ‘조선의 왕실과 외척’(김영사)에 따르면 묘호는 조(祖)와 종(宗) 두 가지 중 하나를 쓴다.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이나 ‘입승왈조(入承曰祖) 계승왈종(繼承曰宗)’이 원칙이다. 쉽게 설명하면 왕조를 세우거나 그에 비견되는 업적을 세웠다면 조를, 나머지엔 종을 붙인다고 보면 된다. 고려는 태조(왕건)가 유일하다. 시호법의 원조인 중국에서도 개국시조가 아닌 조는 원의 세조(쿠빌라이)와 명의 성조, 청의 세조와 성조 등 4명 뿐이다. 조선은 좀 복잡하다.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6명이 있다. 신명호의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생활’(돌베개)을 보면 세조 사후 신하들이 묘호를 신종, 성종 등으로 올리자 뒤를 이은 아들 예종이 “대행 마마께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을 알지 못하는가?”라면서 몇 번을 되물린 끝에 힘들게 고쳤다. 선조는 임진왜란 승전의 공이,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시켜 유교이념을 지켰고, 순조는 서학 침투를 막았고, 영조와 정조는 당쟁을 막은 업적을 인정받았다. 세조와 인조는 처음부터 조를 받았지만, 나머지는 후대에 변경됐다. 본래 선조는 선종, 영조는 영종, 정조는 정종, 순조는 순종이었다. 예외 없이 종을 조로 바꿨다.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는 종을 받고 싶었지만, 신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세종대왕도 조를 받지 못했다. 영토를 넓히고, 한글을 창제한 업적으로 따지자면 태조에 못지않은데도 말이다. 서울 광화문 입구에서 서울역 앞을 잇는 2200m 길이의 국가상징 대로에 ‘세종대로’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세종대왕을 기리는 작명이다. 지금까지는 세종로, 태평로로 나뉘었지만 한 길로 통일된다. 도로명 통일에 머물러선 안 된다.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처럼 인간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쉬는 중심거리가 조성돼야 한다. 국가상징 대로의 위상에 어울리는 보행자 네트워크 구축과 상응하는 주변 개발이 필요하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이순신의 또 다른 면모 고스란히…‘교감 완역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中日記)’가 국내 최초로 완역됐다. 400여년의 시간 동안 묻혀 있던 을미년(1595) 일기가 새로 햇빛을 봤고, 기존 판본에서 오역됐던 부분이 새로 수정됐다. 임진왜란 발발 석 달 전인 임진년(1592) 1월1일부터 시작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무술년(1598) 11월17일까지 쓴 ‘난중일기’ 자체의 가치는 현 시점에서 따져보더라도 최고 수준의 종군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긴박한 진중에서 초서로 흘려쓴 기록이기에 정확한 해독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교감 완역 난중일기’(노승석 옮김, 민음사 펴냄)는 한학자이자 초서 연구가인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가 2004년 문화재청이 초고본을 판독하는 문화재 디지털정보화 사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7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의 결과물이다. 노 교수는 교감학(校勘學)의 창을 통해 그동안의 미해독 글자들을 모두 해독했고, 기존 판본의 인명과 지명 등 오류 100여곳도 바로잡았다. 교감학이란 고증학의 하나로 경전의 문장, 문자 등의 오기(誤記) ·오전(誤傳) 등을 다른 책과 비교 대조하여 바로잡는 학문 방법이다. 2008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알려진 ‘충무공유사’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난중일기’ 판본에서 누락된 32일치 일기를 발견했다. 특히 그동안 전서본만 전해 오던 ‘을미일기’의 일기초가 노 교수의 작업을 통해 발굴된 점은 의미가 깊다. 전황을 중심으로 기술된 ‘난중일기’의 대부분 내용과 달리, 새로 발굴된 기록은 개인의 감상과 가정사 중심으로 적혀 있다. 권율, 원균 등에 대한 평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순신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민음사는 “이번에 펴낸 ‘난중일기’는 초고본에서 문맥과 문헌을 참고해 91건을 바로잡았고 전서본으로 29건, ‘난중일기초’로 3건, 새로 발견된 일기초로는 58건을 교감·수정했다”며 “교감한 원문을 전부 수록하고 세심한 주석도 달았다”고 설명했다. 3만 5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철학적인 만화 액션영화 변신

    철학적인 만화 액션영화 변신

    박흥용의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오는 29일 스크린에 걸린다. 작가주의 만화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이야기꾼에 의해 영화로 옮겨진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비상한 관심을 끈다. 임진왜란 즈음을 배경으로 꿈을 좇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검객과 세상을 뒤집으려는 검객의 이야기를 다룬 원작은 1996년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저작상을 받았고,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때 ‘한국의 책 100’ 안에 들었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영화와 만화는 상당히 다르다. 만화가 정적이고 철학적이라면, 영화는 동적이고 액션이 강조됐다. 만화는 민초들의 삶을 살피지만, 영화는 동인·서인으로 나눠져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던 당쟁을 풍자하는 데 힘을 쏟는다. ‘황산벌’, ‘왕의 남자’에 이어 세 번째 사극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만화는 그 이미지가 각인되니까 영화와의 장르적 차이를 분명하게 가져가는 게 힘들었다.”면서 “원작은 견자의 1인칭 성장 드라마에 황정학이 함께하는 버디 스토리이고, 그 배경에 이몽학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하지만 영화에서는 캐릭터 모두 부각시키는 게 긴장감을 끌어가는 데 더 좋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박흥용 화백은 “시집간 딸 간섭 안 하는 것처럼 원작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 원작과는 독립적인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원작을 장거리 경주로 치면 영화는 이몽학을 엔진으로 삼아 벌이는 단거리 경주”라고 평가했다. 영화와 원작 만화의 차이를 캐릭터를 중심으로 풀어봤다. ●견자(백성현) 원작에서 견자(犬子)는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하지만 영화는 맹인 검객 황정학과 대동계 수장 이몽학을 두 축으로 굴러가고 있어 비중이 줄어든다. 견자는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고 원래 이름은 한견주다. 원작에선 집안은 넉넉하지만 출세와는 거리가 먼 양반의 서자로 나온다. 누명을 쓰고 관아에서 고문을 받았다가 상처를 치료해준 황정학에게 매료돼 그를 스승 삼아 함께 세상 여행에 나선다. 견자는 결국 검을 지팡이 삼아 구도자의 길을 걷는 당대 최고 검객으로 거듭난다. 서자로서 세상에 대해 울분을 갖고 있다는 점은 원작과 영화의 공통점. 그러나 영화 속 견자는 세도가의 서자로 설정됐고, 이몽학에게 온 집안이 몰살 당하는 바람에 복수심에 불타 그 뒤를 쫓는 인물로 등장한다. ●황정학(황정민) 침술로 유명했던 실존 인물이다. 영화 속 견자-황정학 사이는 코믹 요소가 두드러진다. 인생 공부나 검술 공부에서 견자의 멘토 노릇을 하는 것은 만화나 영화나 마찬가지. 영화 속 황정학은 이몽학과 함께 정여립의 친구이자 대동계 핵심 인물로 등장하지만 원작에서의 황정학은 대동계와 전혀 관련이 없다. 이몽학과 대립각을 세우며 승부를 겨루지도 않는다. 영화와 달리 원작에서는 병으로 세상을 뜬다. 영화에서 입으로 ‘딱, 딱’ 소리를 내며 거리를 가늠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원작에서 따왔다. 영화에서는 장님이라는 약점을 딛고 최고 칼잡이가 된 황정학의 과거를 다루지 않고 있어 아쉽다. 누더기 삼베옷에 지팡이로 세상을 더듬거리는 맹인 검객을 더 매력적이고 코믹한 캐릭터로 만든 황정민은 “맹학교에서 수업도 받고, 송구스럽게도 그분들의 허락을 받고 캠코더로 동작이나 눈의 느낌들을 많이 담아내 간신히 흉내냈다.”고 털어놓았다. ●이몽학(차승원) 역시 역사 속 실존 인물이다. 전주 이씨 집안으로 왕족이었지만 서자였다. 임진왜란 때 반란을 일으켰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됐다고 역사는 쓰고 있다. 평등 세상을 꿈꾸며 세상을 뒤집기 위해 반란을 도모한다는 설정은 만화나 영화의 공통점. 만화에서 그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지만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크게 세 차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비중은 절대적으로 커져 황정학·견자와 극적인 대결 구도를 연출한다. 원작 막바지에 이몽학은 견자와 칼을 섞지만 승부를 내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 원작에선 이몽학이 최후를 맞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다소 추상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컸던 이몽학을 영웅과 악당의 경계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재탄생시킨 차승원은 “원작의 이몽학을 야수성과 야만성이 깃든 인물로 봤다. 그러한 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흡혈귀 같은) 송곳니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백지(한지혜) 원작에서 견자와 인연이 얽히는 여성 캐릭터는 모두 네 명. 견자에게 첫 경험을 안겨주는 기생 가희, 견자가 정인으로 여기는 여인이지만 왜구에게 몸이 더럽혀져 자살하는 기생 백지 등이다. 네 명의 캐릭터를 섞어놓은 백지는 자신을 버린 이몽학을 만나기 위해 견자와 황정학을 따라 나서는 것으로 설정됐다. 한지혜가 처음으로 정통 사극에 도전해 도도하고 도발적인 백지를 만들어냈다. 여러 캐릭터를 하나로 뭉친 것에 견줘 역할이 크지는 않다. 박흥용 작가는 이 부분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했다. 숨막히듯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도 중간에 호흡을 고르는 여백의 역할을 백지라는 캐릭터가 맡았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뇌출혈’ 황치훈, 식물인간 투병기 공개...시청자 ‘울컥’

    ‘뇌출혈’ 황치훈, 식물인간 투병기 공개...시청자 ‘울컥’

    뇌출혈로 투병중인 황치훈(39)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지난 22일 오후 5시 방송된 Y-STAR ‘스타뉴스’에서는 임동진 목사와 황치훈의 특별한 인연과 사연이 공개돼 시청자들의 눈가를 적셨다. 황치훈은 ‘호랑이 선생님’, ‘고교생일기’, ‘임진왜란’ 등의 드라마를 통해 하이틴스타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2007년 6월, 결혼 1년 반 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까지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황치훈은 부모의 연이은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연예계를 떠나서도 노래와 연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 자동차 딜러로 변신,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중 쓰러져 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방송 후 시청자들은 해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랜 시간 누워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하냐. 힘내라!” “풋풋하고 행복해 보였던 황치훈의 과거 모습이 생각나 더욱 슬펐다.” “가족들이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쾌유를 빈다.” 등의 글을 남기며 응원했다. 사진 = Y STAR 제공 서울신문NTN 김경미 기자 84rornfl@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구르믈..’ 차승원·이준익, 화보 속 코믹호흡도 ‘척척’

    ‘구르믈..’ 차승원·이준익, 화보 속 코믹호흡도 ‘척척’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이준익 감독과 배우 차승원이 영화에 이어 패션 화보에서도 찰떡 호흡을 자랑하며 새로운 영화계 콤비의 탄생을 알렸다. 차승원과 이준익 감독은 패션잡지 ‘엘르’와 함께 ‘남자 이야기’라는 주제로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차간지’라는 별명을 가진 차승원은 다양한 화보 촬영 경험을 통해 쌓아온 노하우로 촬영 현장을 즐겼고, 이준익 감독은 숨은 끼를 발휘하며 모델 못지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화보 속에서 다양한 남자의 매력을 선보인 차승원과 이준익 감독은 강한 남자의 카리스마를 내뿜기도 하고, 장난기 가득한 친구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등 즐겁게 촬영을 진행했다. 특히 이준익 감독이 차승원의 밧줄로 사로잡힌 채 끌려가는 모습을 촬영할 때는 두 사람의 위트가 돋보이며 큰 웃음을 자아냈다.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선보이며 현장 관계자들의 환호를 받은 이준익 감독에게 차승원은 “이준익 감독이 배우를 해도 되겠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한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임진왜란 직전을 배경으로 혼돈의 시대에 맞선 세 남자와 한 여인의 사랑을 담은 액션 서사극이다. ‘황산벌’, ‘왕의 남자’를 잇는 이준익 감독의 3번째 사극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반란군 이몽학으로 변신한 차승원은 오는 29일 만날 수 있다. 사진 = 엘르 서울신문NTN 박민경 기자 minkyu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차승원 “갓 쓰고 도포입고.. 처음엔 싫었다” (인터뷰)

    차승원 “갓 쓰고 도포입고.. 처음엔 싫었다” (인터뷰)

    차승원은 다소 지쳐보였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개봉을 단 일주일 앞둔 차승원은 최근 주연배우로서 끊임없는 홍보 활동에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22일 오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차승원은 “요즘 상당히 바빠졌다.”며 가벼운 푸념을 솔직하게 건넸다. 하지만 차승원 특유의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조금도 빛 바라지 않은 채였다. ◆ ‘구르믈..’ 앞에 선 ‘왕의 남자’, 부담일줄 알았어? 29일 개봉을 앞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천만 관객의 사랑을 받은 ‘왕의 남자’를 잇는 이준익 감독의 신작 사극이다. 조선시대의 ‘암흑기’라 불리는 16세기 임진왜란 직전을 배경으로 서얼 왕족(차승원 분)의 반란과 이에 맞선 맹인 검객(황정민 분)의 대결을 그린 이 작품은 제작 단계부터 대중의 환호를 한 몸에 받았다. ‘왕의 남자’라는 거대한 선배작을 둔만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한껏 부풀었고, 배우와 제작진은 그만큼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승원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준익 감독님은 부담을 느끼실 수도 있어요. 저만한 대작을 성공시켰으니, 이번에도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실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왕의 남자’에 참여했던 배우가 아닙니다. 제겐 부담보다 좋은 점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승원은 ‘왕의 남자’ 덕분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한층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전혀 모르는 작품이 아니라 이미 관심의 대상인 영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저는 ‘왕의 남자’ 같은 대작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든든히 받쳐주는 것 같아 좋은 걸요.” ◆ 갓을 쓴 ‘조선시대 남자’, 무력할 줄 알았어? 이렇게 자신만만한 차승원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앞에서 멈칫하게 만든 요인이 있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차승원이 맡은 역할은 서울 왕족 이몽학.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차승원은 “처음에는 갓을 쓴 조선시대 남자 역할이 무척 싫었다.”고 고백했다. “예전에 한 촬영장에서 인형으로 만든 조선시대 남자들의 모습을 봤어요. 근데 갓을 쓰고 평상에 앉아있는 선비들의 모습이 그토록 무기력해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차승원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이몽학을 누구보다 강인하고 야수 같은 인물로 연기해냈다. 조선의 관습이었던 갓과 창백한 도포조차도 칼을 휘두르는 이몽학의 카리스마를 가리지 못할 만큼. 송곳니에 의치까지 덧붙이며 잔악스런 이미지를 부각시킨 차승원은 이몽학을 왕족 선비면서도 야만스런 혁명가로 만들었다. “제가 피하고 싶었던 무력함을 넘어, 조선시대에는 그 당시의 풍류와 멋이 있었어요. 우리 민족에게 이런 멋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영화든 다른 콘텐츠든 끊임없이 전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승원은 ‘역사극을 잘 만드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이준익 감독의 말은 인용하며 “사극은 만들기도 기획하기도 힘든 장르지만, 많이 만들어져야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런 의지를 반영이라도 하듯, 오는 6월 개봉을 앞둔 차승원의 차기작 ‘포화 속으로’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를 다룬다. 차승원은 “올해가 6·25 발발 60주년인데다가, 분단국가에서 전후세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차기작을 설명했다. “‘포화 속으로’는 역사극이라기보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죠. 제가 맡은 북한군 유격부대 대장 박무랑도 실존인물이구요. 영화이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풀어간 부분도 있지만, 우리 땅에서 일어난 비극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는 데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서울신문NTN 박민경 기자 minkyung@seoulntn.com / 사진=한윤종 기자, 영화사아침@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황치훈, 뇌출혈 투병기 공개돼 시청자 ‘눈물’

    황치훈, 뇌출혈 투병기 공개돼 시청자 ‘눈물’

    뇌출혈로 투병중인 황치훈(39)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22일 오후 5시 방송된 Y-STAR ‘스타뉴스’에서는 임동진 목사와 황치훈의 특별한 인연과 사연이 공개돼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호랑이 선생님’, ‘고교생일기’, ‘임진왜란’ 등의 드라마를 통해 하이틴스타로 사랑을 받은 황치훈은 ‘추억속의 그대’란 노래로 이름을 알린 연예인. 지난 2007년 6월, 결혼 1년반 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까지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황치훈은 부모의 연이은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연예계를 떠나서도 노래와 연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 자동차 딜러로 변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다. 현재 황치훈에게 큰 의지가 되고 힘이 돼 주는 이는 배우 출신 임동진 목사. 임동진 목사는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있는 황치훈을 위해 곁을 지키고 있다. 임동진 목사는 40여년간 인기 배우로 활동했으나 갑작스런 갑상선암 선고와 뇌경색 등 큰 시련을 겪은 뒤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사진 = Y-Star 서울신문NTN 박영웅 기자 her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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