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임진왜란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가해자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임대주택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현대미술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유혈사태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600
  • [시론] 쉬운 한글과 어려운 한국어/장두식 단국대 대학원 초빙교수

    [시론] 쉬운 한글과 어려운 한국어/장두식 단국대 대학원 초빙교수

    지난 추석 연휴에 한국어를 잘하는 젊은 외국인들이 나오는 방송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미국에서 한국어가 가장 어려운 외국어로 꼽힌다고 한다. 한국어와 영미어가 친족 관계가 아니고 문자인 한글은 알파벳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한국과 미국이 밀접한 접촉을 한 경험이 많지 않다. 그러니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는 어려운 외국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런데 ‘한국어는 어렵지만 한글은 쉽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필자는 지난 4년 동안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ELTE)대학교 한국학과에서 한국어문학을 강의했다. 제자들은 대부분 청소년기부터 한류 문화에 푹 빠져 있었던 학생들이었다. ‘김나지움’(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엑소’나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따라 불렀던 학생들은 한국어에 겁을 먹지 않았다. 첫 강의 시간에 신입생들은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만들어 내는 소리에 신기해하면서 한글의 원리를 금방 이해했다. ‘언너’, ‘크리스틴’, ‘니콜렛’ 등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기도 했다. 헝가리어가 핀우그르어 계통이기 때문에 한국어 문법이 낯설지 않고 영어나 독일어보다 이해하기 쉽다고 웃으면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2학년이 되고 나자 한국어가 너무 어렵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법이 아니라 어휘들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 제자가 “‘천하’, ‘세상’, ‘누리’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어휘잖아요. 한국 고유어보다 한자 어휘가 많다 보니 좀 복잡해요”라고 하소연한다. 한글을 문자로 사용했던 시기보다 한자로 표기했던 시기가 길기 때문에 한국어에는 한자 어휘가 많다는 것을 설명하자 “인터넷에서 논문을 검색하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어린이’라는 고유어 어휘보다 ‘아동’이라는 한자어 어휘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제자들의 파란 눈에는 고유어 어휘와 한자어 어휘가 구별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제자들이 부전공으로 중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하기 때문인가라고 생각하다가 한국어에서 한자어 어휘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게 되었다. 헝가리 1956년 반소 혁명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소련군 탱크에 저항하는 부다페스트 아동’이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라는 고유어 어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아동’이라고 썼을까. 조선 중기의 문인 유몽인은 ‘유야담’에서 제비가 유식해서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謂知之 不知謂不知 是知也·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논어’를 지저귀고, 개구리도 ‘맹자’를 읽어서 ‘독락악여중락악숙락’(獨樂樂與衆樂樂孰樂·홀로 즐거워하는 것과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즐거운가)이라고 운다는 조선 속담에 관해 쓰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신 황백룡과 독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선 제비들은 ‘논어’를 읽는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백룡이 중국에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는데 개구리들이 ‘맹자’를 읽어서 ‘독락악여중락악숙락’이라고 운다고 하여 그를 놀라게 했다. 백룡은 북경어가 아니라 강남 사투리로 발음하면 개구리 울음과 아주 비슷하다고 덧붙이기까지 한다. 그가 조선 속담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 알고 보니 중국 속담이었던 것이다. 그의 황당한 경험이 바로 현재 한국어의 실상이 아닌가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높다’라고 말하면 어색하게 느껴진다. 오랫동안 한자를 빌려 쓰다 보니 생경한 한자어들조차 한국어 속에서 태연하게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을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어에서 고유어 어휘들의 위상이 높지 않다. 이는 한국의 학자와 문학자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도 독일의 괴테와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쉬운 한글을 가진 어려운 한국어라는 역설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 [금요 포커스] 우리에겐 혁신의 DNA가 있다/박형수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금요 포커스] 우리에겐 혁신의 DNA가 있다/박형수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최근 ‘소득 주도 성장’에 이어 ‘혁신 성장’이 키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가 쓴 ‘제4의 혁명’이란 책을 보면 지구촌 정부들은 자신들이 처한 경제·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 개혁은 물론 정부 자체를 혁신하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이나 싱가포르를 롤모델 삼아 보다 나은 정부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데 우리 정부도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새로운 국가의 탄생이야말로 경제적 선택을 제약하는 제도적 환경을 바꿈으로써 경제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지난해 방영된 TV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과 이방원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개국을 놓고 흥미진진한 대결을 펼쳤다. 경제사학자 김재호 교수의 책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에 따르면 조선왕조 개창을 주도한 ‘신흥사대부’는 고려왕조 지배층인 ‘문벌귀족’과 경제적 기반이나 정치적·사상적 지향점이 크게 달랐다. 과전법에 의한 대토지 소유 개혁, 귀족 타파 및 양천제(良賤制)로의 신분제 개편, 능력 본위의 관리선발제도인 과거제 강화, 농본주의 및 3년마다의 호구조사 등을 통해 경제적 변화를 이끌어 내 조선왕조가 518년이나 지속될 기틀을 닦았다고 한다. 실제 삼국이 통일된 7세기경 200만명이던 인구가 2배가 되는 데 600년 이상 걸렸는데, 1392년 555만명에서 1600년 1172만명으로 조선 건국 이후 불과 200여년 만에 인구가 2배가 됐다. 경지 면적도 1392년 80만결에서 1432년 171만결로 40년 만에 2배가 됐다. 이후 우리나라는 4대 사화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경제·사회가 피폐해졌지만 성리학(유교) 교조주의에 빠져서 1750년대 ‘대분기’의 중요한 시기를 놓쳤다. 급기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는 자력에 의한 산업화와 근대화에 실패해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1876년 개항한 후 86년이나 지난 1962년에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음에도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1980년대 초에는 높은 물가를 잡고 안정 성장 기조로 경제 체질을 변경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0월 발간된 부즈 앨런 해밀턴의 ‘21세기를 향한 한국 경제의 재도약’ 보고서가 한국 경제에 대해 ‘행동은 없고 말만 무성했다’고 비판했음에도 우리는 금융·기업·노동·정부의 4대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최근에도 정부의 혁신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2014~2016년)과 노동·공공·교육·금융의 4대 개혁을 추진했다. 기획재정부는 2012년, 2015년에 이어 제3기 중장기전략위원회를 통해 4차 산업혁명, 인구구조 변화, 사회자본 등 3대 과제에 대한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새 정부도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 나가면서 수출 주도 성장의 대안적인 성장 모델로 소득 주도 성장론에 이어 혁신 성장론을 제시하면서 연말까지의 주요 대책 발표 일정을 공개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신설됐고, 며칠 전에는 민간 주도의 혁신 역량을 결집하고 국민·시장과 소통할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경제 철학의 전환’을 통해 노동의 자유, 토지의 자유, 투자의 자유, 왕래의 자유라는 네 가지 구조 개혁을 ‘패키지 딜’로 추진하는 ‘슘페터식’ 성장 정책의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많은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우리에게는 국가 전략과 미래 비전을 만들 능력은 충분하고도 넘치지만, 이를 구체화하고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사 결정과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역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선조로부터 미래를 대비하고 필요한 혁신을 해낼 DNA를 ‘이미’ 물려받은 우리가 이념적 갈등과 논쟁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가시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만 있다면 혁신 성장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서동철 칼럼] 남한산성에도 있었던 ‘낭만의 정치’

    [서동철 칼럼] 남한산성에도 있었던 ‘낭만의 정치’

    남한산성을 종종 찾는다. 산성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북문에서 성곽을 따라 수어장대에 오른다. 이곳에서 반대편 성곽을 따라 남문으로 내려오면 다시 산성리다. 발걸음은 수어장대에서 한참 동안 머문다. 날씨가 좋으면 잠실 일대까지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일품이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송파들을 가득 채우다시피 몰려드는 청군(淸軍)의 깃발을 바라보는 것은 공포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다. 수어장대에 올라 송파들을 바라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호란(胡亂)에 얽힌 역사가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끊임없이 새롭게 재생산되면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난 추석 연휴에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도 소설가 김훈의 원작이 발표되었을 때와는 또 다른 화제를 지금껏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도 주인공은 청음 김상헌(1570~1652)과 지천 최명길(1586~1647)이다. 척화파와 주화파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명분과 원칙을 지키고자 목숨을 내걸었던 청음과 오명(汚名)을 뒤집어쓸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현실을 좇은 지천이다. 대척점에 서 있던 두 인물이 하나의 역사적 장면에 등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극적이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인조의 이마에 흙이 묻어 있는 영화 속 장면은 인상적이다. ‘치욕의 극치’를 상징하는 연출적 기법일 것이다. 그런데 원작자의 설명은 좀더 마음에 다가온다. 원작자는 “소설에서도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멀리서 올라오는 초봄의 흙냄새를 맡는다. 아마 태어나 처음으로 흙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다가오는 작은 희망의 싹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병자호란을 ‘정치적 파벌로 갈라진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해 나라를 말아먹은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외적(外敵)에 무릎 꿇는 치욕은 겪었을지언정 주화파는 국체(國體)를 보전(保全)하는 역할을 했고, 척화파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양립은 상보적(相補的)으로 작용했다. 정치적 견해를 완전히 달리했던 두 사람이지만 청나라 심양에서 두 해 동안 감옥살이를 함께하면서 서로를 이해했다. 청음은 호란이 끝나고 4년이 지난 1641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고자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심양으로 끌려갔다. 조선은 결국 청나라의 압박에 출병을 결정하는데, 최명길은 명나라에 밀사를 보내 사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청나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최명길은 혼자 책임을 감당하겠다며 목숨을 걸고 심양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호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협력했다. 두 사람에 대한 백강 이경여(1585~1657)의 평가는 그런대로 맥을 짚고 있다. 백강은 ‘두 어른의 학문과 정치는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인데 /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이라고 읊었다. 말할 것도 없이 ‘큰 절개’란 청음을, ‘큰 공적’이란 지천을 가리킨다. 사실 조선의 가장 큰 불행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아니다. 이후의 사생결단식 붕당정치가 정치 왜곡을 낳고, 결국 말기 증상인 세도정치가 장기화하면서 망국으로 귀결된 것이 더 큰 불행이었다. 이 과정에서 농암 김창협(1651~1708)이 1698년 명곡 최석정(1646~1715)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는 상징적이다. 농암은 청음의 증손자, 명곡은 지천의 손자다. 두 집안은 청음과 지천의 ‘연경 화해’ 이후 세교(世交)를 이어 갔다. 그런데 농암과 명곡의 시대에 이르러 두 집안이 속한 당파는 함께 가기 어려울 만큼 멀어졌다. 편지의 제목은 ‘절교를 선언하다’이다. 이유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니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정치적 견해의 대립이 상보적으로 작용하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참담한 남한산성에도 낭만의 정치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낭만의 정치가 사라지면 망국이 가깝다는 것을 조선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 준다. dcsuh@seoul.co.kr
  • [한필원의 골목길 통신] 전쟁과 마을

    [한필원의 골목길 통신] 전쟁과 마을

    지난달 하순 설악산에서 시작한 단풍이 쉬지 않고 남쪽으로 번져 이제 팔공산까지 곱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단풍 하면 떠오르는 내장산이 바로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단풍 나들이객들은 주로 이름난 산을 찾지만 마을의 단풍도 볼만하다. 팔공산의 단풍도 좋지만 그 바로 남쪽에 있는 옻골마을의 단풍은 더욱 예쁘다. 마을 동쪽 검덕봉이 붉게 물드는 시간, 새갓이라고 불리는 서쪽 산은 울창한 소나무로 푸르러서 색의 대비 효과를 연출한다. 고운 단풍으로 오래된 마을은 더욱 평화롭게 보인다. 물론 단풍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언제나 평화로운 광경을 목격한다.오래된 마을들의 상당수는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한반도에서 대대적으로 이주가 일어났던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동쪽 산에서 단풍이 불붙기 시작한 옻골마을이 그렇다. 전쟁을 겪고 만들어졌기 때문일까.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 시내가 흐르는, 평화로운 정취가 그윽한 곳이 마을의 입지로 선호됐다. 마을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에 신당을 마련하고 한 해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마을은 한마디로 자연과 하나 되어 대대로 평화롭게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보는 마을의 평화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성주 한개마을에 갔을 때 이상한 집이 하나 있었다. 휑하니 너른 터에 팔작지붕의 대문채만 있어 어리둥절했다. 안채와 사랑채 등은 6·25전쟁 때 다 파괴됐다고 한다.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됐을 때 한개마을은 전선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음에도 마을에 있는 한옥 여러 채가 파손되거나 완전히 소실됐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대문채만 쓸쓸하게 빈터를 지키고 있었다. 1930년의 임시 국세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에 2만 8336곳의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사적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국가문화재 마을은 여덟 곳뿐이다. 오래된 집들이 남아 있어야 국가문화재가 될 수 있는데 그런 마을이 이렇게 적다. 그 가장 큰 이유는 20세기 후반의 개발 광풍이 무수한 마을을 송두리째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국가문화재 마을이 있는 지역은 개발 압력이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인 셈이다. 그런데 외진 곳에 있어도 오래된 집들이 별로 없는 마을도 많다. 김천 원터마을에는 99칸의 종가를 비롯해 오래된 집들이 많았지만 6·25전쟁 탓에 국가문화재가 될 수 없었다. 그때 종가 등 멋진 한옥 여러 채가 파괴됐고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입구 쪽에 재건주택이라는 이름의 왜소한 집들이 급히 지어졌다. 현재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한옥은 작은 종가인데, 6·25전쟁 때 안마당과 사랑채 지붕에 폭탄이 떨어졌다. 안채는 기둥이 파편을 받아 낸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 30년 전 그 기둥을 실측하다가 파편 자국을 만졌을 때의 소름 끼침이 지금도 내 감각에서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땠을지 물을 필요도 없겠다. 평생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리라. 국가문화재 마을에서도 종종 전쟁의 깊은 상처와 마주친다. 낙안읍성의 동헌 앞에 있던 낙민루는 6·25전쟁 때 불타 버렸다. 정월 대보름, 신당에 모여 당산제를 지낸 주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우렁찬 함성과 함께 큰줄당기기 놀이를 할 때 수령이 올라가 유유히 그 광경을 관람했던 아름다운 누각이다. 낙민루가 불탈 때쯤 고성 왕곡마을의 한호근 가옥 장독대에는 포탄 한 발이 떨어졌다. 포탄과 총알만이 집과 마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 인근 삼포리로 피난 갔다 와 보니 집의 한쪽 날개가 없어졌더라고요….” 왕곡마을에 갔을 때 함성식 가옥의 주인이 내게 한 말이다. 적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을에 들어온 아군이 집을 뜯어서 불 때 버렸다는 것이다. 개발 광풍도 미치지 않는 외진 곳까지 찾아가 평화의 장소인 마을을 파괴하는 것이 전쟁이다. 정주 공간의 파괴는 바로 인간의 파괴다. 그리고 다시 평화를 찾으려면 실로 오랜 아픔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집은 복구할 수 있지만 전쟁을 겪으며 갈라진 육신과 정신을 아물리는 데는 인간의 한평생이 모자란다.
  • 김보애 황치훈, 오늘(18일) 발인..투병 끝 별세한 안타까운 별

    김보애 황치훈, 오늘(18일) 발인..투병 끝 별세한 안타까운 별

    배우 김보애, 황치훈의 발인식이 오늘(18일) 진행된다. 김보애는 지난 14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 지난해 11월 뇌종양을 진단 받고 약 1년 간의 투병 생활을 해온 끝에 세상을 등졌다. 한국 최초 화장품 모델이었던 고인은 스타 가족으로도 유명했다. 1959년 당대 톱스타였던 고 김진규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피아골’, ‘하녀’, ‘벙어리 삼룡이’, ‘순교자’, ‘난중일기’, ‘삼포 가는 길’, ‘카인의 후예’ 등 600여편에 출연한 김진규는 1950~7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명배우. 김진아와 막내아들 김진근도 배우로 활동했다. 연기자 출신 한국무용가 김보옥이 고인의 동생이며 배우 이덕화가 고인의 제부다. 고인은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치며 ‘슬프지 않은 학이 되어’, ‘잃어버린 요일’, ‘귀뚜라미 산조’ 등 시집 4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또 김진규의 연기 인생과 당대 영화계 풍토를 옮긴 에세이 ‘내 운명의 별 김진규’, 고급 한정식집을 운영하며 겪었던 일들을 담은 ‘죽어도 못잊어’를 펴내 화제를 모았다. 2000년에는 영화기획사 NS21을 설립해 남북영화 교류를 추진했고 2003년에는 월간 ‘민족21’의 회장 겸 공동발행인을 맡는 등 남북교류 사업에도 앞장서왔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3호이며 발인은 18일 오전 9시. 장지는 신세계공원묘원이다.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 황치훈은 지난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1년간 뇌출혈로 투병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안기고 있다. 황치훈은 1974년 KBS 드라마 ‘황희정승’으로 데뷔해 ‘호랑이 선생님’ ‘임진왜란’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으며 1988년 앨범 ‘추억 속의 그대’를 내는 등 가수로도 활동했다. 2005년 수입 차 영업사원으로 변신했으나 2007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딸이 있으며, 발인은 오는 18일 오전 9시다. 빈소는 경기도 양주시 큰길장례문화원.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열린세상] 우리 민족의 외교 유전자/이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열린세상] 우리 민족의 외교 유전자/이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지난 추석 연휴 때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다. 늘 그랬듯이 적전 분열과 삼전도의 굴욕 장면을 보며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교훈을 찾아야 했다. 그 굴욕은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였고, 우리 세대에겐 어떤 교훈이 될까. 우리는 환난과 치욕의 역사를 일상생활처럼 무심하게 되새겨 왔다. 필자가 학생 시절 배웠던 고조선의 역사는 한나라에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실상은 고조선이 1년 이상을 분전했고 한나라는 육군과 해군 장수를 모두 처벌할 정도로 고전했다. 단지 지배층 내부의 분열로 패망했을 뿐이다. 우리가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 민족사의 원류로 소중히 하는 것은 그 대륙적 야성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야성을 언제부터 상실했을까. 현대의 우리 민족에게 그 야성적 민족 유전자는 남아 있는지, 아니면 그저 외세에 굴종하는 변이 유전자만 물려받았는지, 시대를 관통하는 일관된 원형이 있기는 한지 알 수가 없다. 한 명의 대통령이 오래 집권하던 시절에는 그러려니 했겠지만, 우리 정치가 민주화된 오늘날 어떤 유전자와 전통이 대외 관계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정치지도자들은 어떤 원칙에 따라 외교 전략을 설계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북핵 위기와 외교안보의 딜레마 속에서 더욱 궁금해진다. 필자는 40년 전 외교사가 재미있어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근대 아시아 외교사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과 미·일 관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한국은 강대국 간의 전쟁과 흥정의 대상으로만 등장했다. 모두가 남들의 외교사였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정리한 외교사가 아직 없다. 중국은 10여년 전에 이미 ‘신중국외교사’라는 책이 몇 종류나 있었다. 평화공존 5개 원칙을 축으로 하는 1949년 이후 중국 외교의 특징을 ‘대국주의와 (아편전쟁 이후) 100년의 콤플렉스’라고 했다. 일본은 2013년 이와나미(岩波)서점이 6권 분량의 ‘일본의 외교’를 간행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15년부터 한국 외교사 프로젝트를 시작해 3년째인 내년에 8권으로 구성되는 ‘한국 외교사’를 편찬할 예정이다. 좀 과도한 욕심을 내서 고대 중국과 고조선 간의 전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항일투쟁과 대한민국의 1980년대까지를 관통하는 대외 관계사를 펼쳐 내기로 했다. 필자는 40년을 기다려 온 수요자로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두 가지 소망을 담았다. 우선 우리 민족 외교의 실패와 성공의 사례 속에서 그 유전자와 변이 과정을 찾는 것이다. 그러자면 치욕으로 얼룩진 근대 외교사만이 아니라 더 멀고 긴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은 내외 정세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세심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국절 논쟁도 민족사의 긴 여정에서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면 앞으로는 정치인들이 국가의 품격이나 국민의 안위와 관련되는 안보 문제를 보수와 진보로 분열된 진영 논리만으로 함부로 논하지는 않겠지 라는 소망이다. 우리 민족사의 긴 여정에서 국가 누란의 위기 때마다 지배계층 내부의 분열은 민족의 치욕을 초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가을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명의 심유경(沈惟敬)이 휴전 조건으로 조선의 분할을 논의한 것이 외세에 의한 최초의 민족 분단 획책이었다. 300년 후인 19세기 말 청?일, 러?일 간의 한반도 분단에 관한 흥정은 결국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백제의 멸망도 지배층 내부의 분열에 의한 요인이 컸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과 주전론이나, 조선 말기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도 그렇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었다”는 교훈뿐 아니라 저항과 단합을 통한 재건과 부흥의 성공 사례도 새롭게 부각될 것이다. 한국 외교사 편찬 사업에는 시대별로 유수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어 좋은 결과물이 기대된다. 물론 첫술에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외교의 역사적 유전자를 찾는 과정의 시작이라는 의의는 크다. 계속해서 보완해 가면 훌륭한 한국 외교사가 완성될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은 앞으로 외교안보 위기를 극복하는 통찰력을 여기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황치훈 별세, 결혼 1년 반 만에 식물인간 투병 ‘16일 별세’

    황치훈 별세, 결혼 1년 반 만에 식물인간 투병 ‘16일 별세’

    황치훈이 지난 16일 별세했다. 향년 46세.17일 황치훈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양주시 큰길장례문화원에 따르면 11년간 뇌출혈로 투병해온 황치훈이 전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황치훈은 지난 2007년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11년 투병해왔다. 특히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사고를 당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황치훈은 1974년 KBS 드라마 ‘황희정승’으로 데뷔해 ‘호랑이 선생님’ ‘임진왜란’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으며 1988년 앨범 ‘추억 속의 그대’를 내는 등 가수로도 활동했다. 2005년 수입 차 영업사원으로 변신했으나 2007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딸이 있으며, 발인은 오는 18일 오전 9시다. 빈소는 경기도 양주시 큰길장례문화원.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정치인들 권력 잘못 쓰면 5000만이 촛불 들어 바꿔야”

    “정치인들 권력 잘못 쓰면 5000만이 촛불 들어 바꿔야”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 정치인들의 부정·불의를 용서해선 안 된다. 정치인들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잘못 행사했을 땐 거둬들여야 한다. 5000만이 촛불을 들어 바꿔야 한다.”한국 문단의 거목 조정래 작가가 ‘국민주권론’을 설파했다. 16일 서울 성동구청 대강당에서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주제로 열린 ‘제106회 성동명사특강’에서다. 강당을 가득 메운 500여 청중은 조 작가의 힘 있는 ‘연설’에 열렬히 환호했다. 조 작가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다 대한민국이다. 주인의식을 잊으면 안 된다”며 “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자유롭게 드는 정권을 만들고 그 정권이 잘못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쓸 소설 주제가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다. 과연 우리는 주인인가, 법적으로 주인 권한을 보장받고 있는가, 주인 자격을 행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등으로 역사적 울림을 주었던 조 작가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의 운명은 역사를 기억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반도는 대륙으로부터 끝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는 섬나라 일본에도 괴롭힘을 당했다. 한반도 5000년 역사 동안 931번 침략당했다. 80%는 중국, 20%는 일본이고 병자호란, 임진왜란이 큰 사건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리면 다시 5000년 동안 931번의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미래 과제다.” 조 작가는 통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강대국은 민족주의를 시대착오적, 반인류적이라고 한다. 강대국이 식민통치가 아닌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약소국을 억압·핍박할 때 약소국은 민족주의로 뭉쳐야 한다. 약소국일수록 민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 유대인 600만명을 죽인 배타적이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히틀러 민족주의’를 들어 민족주의를 나쁘다고 매도한다. 하지만 ‘약소국 민족주의’는 개방적, 타협적, 방어적 민족주의다. 이른바 신민족주의다. 줏대를 세우면서 가면 우리 민족의 앞날엔 과거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성동명사특강’은 2008년 9월 박동규 서울대 교수의 강연으로 시작, 누적 청중 6만명이 넘는 인기강좌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대패삼겹살’이 ‘크게 패한 석장의 고기’라고요? 부경대생, 366건 잘못된 외국어 표기 찾아

    대패삼겹살’이 ‘크게 패한 석장의 고기’라고요? 부경대생, 366건 잘못된 외국어 표기 찾아

    ‘大敗三枚肉’(대패삼겹살). ‘まぜ飯’(비빔밥).‘全年午休’(연중무휴), ‘伊基台水?公?’(이기대 수변공원…. 부산의 주요 관광지 안내표지판과 식당 음식차림표 등에 엉터리 외국어 표기가 많은것으로 조사됐다. 부경대 대학특성화 사업단는 지난 6월 한 달 동안 한국인 학생과 외국 유학생을 한 조로 구성, 남포동·중앙동권역, 서면·부산대권역, 해운대·광안리·부경대권역 등 3개 권역을 대상으로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등 3개 외국어 표기를 적어놓은 음식차림표, 안내표지판 등을 조사했다고 11일 밝혔다. 조사 결과 이들 학생들이 찾아낸 엉터리 표기는 무려 366건에 달했다. 사업단에 따르면 부산 해운대의 한 식당 차림표에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대패삼겹살’을 ‘大敗三枚肉’으로 표기해놓았다. 이를 풀면 ‘크게 패배한 석장의 고기’라는 이상한 말이 되고 만다. ‘얇게 썬 삼겹살’이니까 ‘うすいサムギョプサル’이 맞다. 또 다른 식당 차림표에는 ‘まぜ飯’이라고 적어놓았다.우리 대표 먹거리인 ‘비빔밥’을 일본어로 적으려고 ‘섞다’라는 뜻의 ‘まぜ’를 ‘飯’(밥) 앞에 붙였는데 틀린 표기다. 국립국어원이 정한 ‘비빔밥’의 일본어 표기는 ‘ビビンバ’이다. 중국어 표기들은 우리 관습대로 쓰인 경우가 많았다. ‘연중무휴’의 바른 표기는 ‘全年午休’인데도 ‘年中午休’로 표기되어 있다.부산 이기대 공원 표지판은 ‘伊基台水边公园’라고 잘못 적혀 있다. 음은 같지만 뜻이 달라진 경우다. 이기대는 임진왜란 때 두 명의 기생(二妓)이 왜군 장수를 껴안고 뛰어들었다는 구전 설화에서 유래된 이름이므로 ‘二妓台水边公园’이 맞다. 어떤 식당에는 소의 앞가슴 아래쪽 살인 ‘차돌박이’와 밥이 딸린 요리이름을 ‘Rice with roast premium beef’라고 얼렁뚱땅 적어놓았다. 맞는 표현은 ‘Rice with beef brisket’이다. 이 사업단은 이번에 실시한 ‘외국어 표기 조사결과’를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 측에 전달하고 수정을 요청하기로 했다. 사업단은 또 국립국어원이 외국어로 표기하지 못한 음식이름을 포함해 모두 200여개 음식이름의 바른 외국어 표기를 손수 만들어 식당에 알려주기로 했다. 손동주 단장은 “일본어의 잘못된 표기가 유독 많았다”며 “심지어 부산의 현관인 부산역과 김해공항 등에도 잘못된 표기가 많이 있었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문 대통령 안동 하회마을 방문…그가 방명록에 남긴 ‘징비정신’이란

    문 대통령 안동 하회마을 방문…그가 방명록에 남긴 ‘징비정신’이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추석 연휴를 맞아 6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인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대구·경북(TK) 지역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문 대통령과 김 여사는 이날 낮 12시 20분쯤 하회마을을 방문해 서애 류성용(1542~1607) 선생의 종손인 류창해씨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연휴를 맞아 하회마을로 나들이를 온 시민들과 마을 주민들은 하회마을을 ‘깜짝 방문’한 문 대통령과 김 여사를 반겼다.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이기도 한 서애 류성용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66년(명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예문관 등을 거쳐 삼정승(조선시대 정1품 관직인 좌의정·우의정·영의정을 가리키는 말)을 모두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는 왜적이 쳐들어올 것으로 판단해 권율(1537~1599) 장군, 이순신(1545∼1598) 장군을 중용하도록 왕에게 추천했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 건축을 건의했으며 군비 확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문 대통령과 김 여사는 서애 류성용 선생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영모각’, 서애의 종택(종가가 대대로 사용하는 집)인 ‘충효당’, 그리고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의 대종택인 ‘양진당’ 등을 관람하고 참석자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이어 서애의 대종손인 류상봉씨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문중의 가보 두 점을 문 대통령과 김 여사에게 펼쳐 보였다. 이 두 점은 왕이 겸암에게 관직을 내린다는 교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애의 아버지인 류중영에게 문경공 시호를 내린다는 내용의 시장(諡狀)이라고 청와대는 밝혔다. ‘시장’이란 재상이나 유교에 밝은 사람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건의할 때 그가 살았을 때의 일들을 적어 올리던 글을 가리킨다.문 대통령과 김 여사는 또 서애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병산서원을 방문해 방명록에 “서애 류성룡의 징비정신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새기고 만들어야 할 정신입니다 2017.10.6 문재인”라고 썼다. ‘징비’란 지난 잘못과 비리를 경계하고 삼간다는 뜻이다. 서애가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 ‘징비록’이다. 1969년 국보 제132호로도 지정된 이 책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명불허전’ 김남길·김아중, 해피냐 새드냐…놓치면 안 될 관전포인트 ‘셋’

    ‘명불허전’ 김남길·김아중, 해피냐 새드냐…놓치면 안 될 관전포인트 ‘셋’

    조선왕복 메디활극 ‘명불허전’이 최종회까지 단 2회만을 남겨두고 관전 포인트를 밝혔다.tvN 토일드라마 ‘명불허전’(연출 홍종찬, 극본 김은희, 제작 본팩토리)이 종영까지 단 2회만을 남겨두고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한다. ‘명불허전’은 허임(김남길 분)과 최연경(김아중 분)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확인하며 의사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내 시청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조선왕복이라는 신선한 설정으로 예측불가의 전개를 만들며 주말을 순간 삭제해왔던 블랙홀 드라마인 만큼 결말을 앞두고 예측이 뜨겁다. 이에 제작진은 남은 2회를 더 짜릿하게 시청할 수 있는 관전 포인트를 공개했다. #김남길X김아중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해피 or 새드 결말 예측 ‘핫’ 폭주 중 지난 14회에서 허임은 연이(신린아 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갔고, 최연경은 홀로 서울에 남았다. 허임과 최연경의 재회 여부는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뜨겁다. 김남길과 김아중 역시 허임과 최연경의 선택을 관전 포인트로 뽑았을 만큼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가 핵심. 김남길은 “허임의 변화와 더불어 그의 선택을 지켜봐달라”고 짚었고 김아중은 “성장 과정을 함께 한 허임과 최연경이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허임은 최연경에게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환자 연이와의 약속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조선행을 선택했다. 허임과 의사로서 공명해온 최연경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도 홀로 보냈다. 김남길과 김아중도 강조한 허임과 최연경의 선택이 ‘명불허전’에 걸맞은 결말을 선사하게 될지 기대가 모아진다. #김남길X김아중의 최대 위기 직면! 신린아X윤주상 살릴 수 있을까? 숱한 역경과 위기를 함께 겪으며 성장했던 허임과 최연경이 각자의 위치에 돌아가자마자 위기와 직면했다. 허임이 돌아간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왜군이 한양까지 당도한 전란의 한가운데였다. 허준(엄효섭 분)의 처소도 왜군에 의해 초토화된 상태였다. 연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행을 결심한 허임이 허준과 연이를 찾는 과정도 쉽지 않을 전망.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전란 상황에서 하루하루 위태로운 위기들이 이어진다. 과연 허임이 연이를 살릴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최연경 역시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 최천술(윤주상 분)이 쓰러지며 위기를 맞았다.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최천술과도 화해한 최연경은 직접 수술을 집도할 예정이다. 최연경이 최천술의 수술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도 남은 2회, 집중해서 봐야 할 관전 포인트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 침통의 마지막 비밀은? 조선왕복의 끝은 무엇?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던 침통이 왜 허임 앞에 나타났는지 지난 14회에서 밝혀졌다. ‘침’은 의원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하기에 침통은 좋은 재주를 지녔지만 그릇된 마음으로 의술을 행하거나 과오를 통해 좌절한 의원들에게 나타났다. 그렇게 허준에 이어 허임 앞에도 신묘한 힘을 가진 침통이 나타났던 것. 죽음의 위기가 닥친 순간 마다 조선과 서울로 왕복시키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고, 의원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재주를 옳은 방향으로 쓸 수 있게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최천술은 조선으로 떠나는 허임을 바라보며 “그 아이(연이)가 마지막 고리였나 보구먼. 돌아오고 싶다고 그게 되는 줄 알아. 이제는 맘대로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해 조선왕복이 멈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조선왕복은 ‘명불허전’ 결말과 직결되기 때문에 과연 조선왕복의 끝이 언제가 될지, 조선으로 돌아간 허임이 다시 서울에 있는 최연경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명불허전’ 제작진은 “그 동안 쌓아온 서사를 완결 지을 결정적 순간이 남은 2회에 펼쳐진다. 허임과 최연경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지 지켜봐 달라”고 밝혔다. 한편, 마지막 결말만을 남겨 두고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키며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명불허전’ 15회는 오늘(30일) 밤 9시 tvN에서 방송된다. 사진제공=tvN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말은 오고 사람은 가고… 한양과 제주 이어 주던 땅끝 마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말은 오고 사람은 가고… 한양과 제주 이어 주던 땅끝 마을

    제주의 유배 역사는 이제 관광자원으로도 적지 않은 몫을 한다. 추사가 위리안치됐던 서귀포 대정에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세 개의 유배길도 만들어졌는데, 추사 유배길과 성안 유배길, 면암 유배길이 그것이다. 제주시의 성안 유배길은 제주목 관아를 나서 제주읍성터를 따라 면암 최익현과 우암 송시열, 광해군, 성호 이익을 비롯한 유배인의 흔적을 만난다. 면암 유배길은 최익현이 유배에서 풀린 뒤 한라산에 올랐던 루트라고 한다.육지와 제주를 잇는 해로(海路)도 궁금하다. 뱃길은 유배인과 관리뿐 아니라 모든 문물(文物)의 통로였다. 제주의 양대(兩大) 항구는 화북포와 조천포였다. 송시열과 김정희, 최익현은 화북포로 제주에 들어갔다. 하지만 청음 김상헌은 해배(解配)되고 조천포에서 제주를 떠났다. 제주를 방문한 점필재 김종직도 조천관에서 순풍을 기다리다 한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한양을 오가는 관리들의 숙소였던 조천관은 터만 남았다. 하지만 조천 연북정(戀北亭)은 이른바 유배 문화가 각광받으며 인기 있는 탐방지로 떠올랐다. ‘궁궐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연북정의 이름부터 유배자의 정서와 맞물려 감회를 자아낸다. 물론 임금의 관심을 간청하는 마음은 벼슬아치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화북리도 19세기에는 공북리(拱北里)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공북’이란 임금을 향해 손을 모은다는 뜻이니 연북정의 작명원리와 일맥상통한다. 헌종시대 제주목사를 지낸 응와 이헌조는 연북정 주변에서 조천항 일대의 풍경을 묘사한 시를 남겼다. ‘바다 고을에서 제일 번화한 마을 /조천관 바깥에 깃발을 멈추었다 /이진(梨津) 사공은 바람을 타 배질하고 /선흘 사람들은 가랑비 맞으며 밭갈이하네’ 선흘은 조천의 마을이고 이진은 바다 건너 해남의 포구다. 조천으로 들어오는 육지 배가 출항하는 대표적 포구가 이진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오늘은 바로 그 해남 이진포로 간다. 전남 해남군 북평면의 이진리는 오늘날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마을 앞 포구에 서면 왼쪽으로 달도를 거쳐 완도를 잇는 사장교인 완도대교의 주탑(主塔)이 있다. 이진에서는 땅끝도 멀지 않다. 그야말로 한반도 최남단이다.동네 초입에서는 지금 이진성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조선은 1588년(선조 21) 이진에 군진을 세운 데 이어 1627년(인조 5)에는 종4품 만호가 지휘하는 만호진으로 승격시킨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데다 을묘왜변과 임진왜란으로 이진포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진성은 방어를 위한 목책과 해자까지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몰려드는 적군으로부터 성문을 방어하는 옹성도 일부 남아 있다. 이진성 안팎에서는 최근에 세운 친절한 안내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른바 관방유적(關防遺蹟)으로 중요성을 알리면서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이곳이 한양과 제주를 잇는 간선로를 이루는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은 포구에서도 찾지 못했다. 조선시대라면 군선(軍船)이며 관공선(官公船)이 적지 않게 정박하고 있었을 이진항이지만, 지금은 1t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고깃배들만 한가롭게 떠 있다. 그런데 포구에서 가장 가까운 민가의 나지막한 돌담에 눈이 간다. 담장을 이루는 돌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대부분이다. 마치 제주도의 담장을 연상시킨다.집주인 아저씨는 “이것들이 제주에서 싣고 온 돌이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기 언덕 위 동네로 올라가면 더 많으니 한번 가 보라”고 일러 준다. 현무암들은 제주말(馬)의 하역항으로 이진의 역사를 보여 준다. 먼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이 바람과 파도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은 평형수(平衡水)가 있기 때문인데, 과거에는 그 평형수 역할을 돌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내리면 제주에서 싣고 온 현무암은 더이상 쓸모가 없었으니 항구에 그대로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는 고려시대 이후 군마(軍馬) 사육장이었다. 물론 제주말을 반입하는 항구가 이진이 유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진 마량(馬梁)의 마도진(馬島鎭) 만호성 주변에서도 현무암이 발견된다고 한다. 땅이름으로 짐작해 봐도 마량은 중요한 제주말 반입항의 하나였을 것이다. 강진의 옛 이름인 탐진(耽津)도 탐라(耽羅), 곧 제주를 오가는 항구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 해도 이진의 현무암은 마량의 그것보다 많다. 현무암의 많고 적음은 배에 실어 운송한 말의 숫자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이진은 말 수송선을 포함해 조선 후기 제주를 오가는 선박의 출입통제소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제주로 가는 또 다른 항구였던 강진 남당포를 출발한 배도 큰 바다로 바로 나가지 않고 완도 북쪽의 이진포를 거쳤다. 고산자 김정호(1804~1866?)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고 기록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임제 백호는 1577년(선조 10) 제주목사로 있던 아버지 임진을 만나고 돌아와 ‘남명소승’(南冥小乘)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임제는 12월 6일 강진 남당포를 출발해 저녁 늦게 이진보(梨津堡)에 이른다. 남당포는 간척이 이루어져 오늘날 옛 지형을 알 길이 없는데 강진읍 남포리로 추정하고 있다. 임제가 이진에서 배웅 나온 관리들과 작별한 것은 바야흐로 큰바다 항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임제는 9일 밤 제주 조천포에 도착한다. 돌아올 때는 화북포에서 출발해 해남 관두포로 상륙했다. 해남반도 서쪽의 관두포는 고려시대 이후 오래된 제주 뱃길의 항구였다. 김정호가 ‘이진성에는 해월루가 있다’고 적은 대목은 사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해남군은 최근 해남 남창리에 달량진성과 해월루를 복원했다. 북평면 소재지인 남창리는 해남과 완도를 잇는 땅끝대로를 사이에 두고 이진리와 마주 본다. 달량진성은 수군 만호 주둔지였지만, 이진에 만호진이 설치되면서 군진이 아닌 환곡을 위한 곡식창고인 남창으로 바뀌었다. 이진과 남창리는 실제로 멀지 않다. 고산자가 착각한 이유일 것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도 해월루를 이진 동쪽이 아닌 서쪽에 두었다. 지금 해월루 아래는 해변 산책 데크도 만들어 놓았으니 달량진 유적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이진포 북쪽은 해발 498.6m 달마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기기묘묘한 암봉이 인상적인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하다. 하지만 반대편 이진에서 바라본 달마산의 표정은 조금 온화하다. 달마산이라면 아름다운 절 미황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황사는 달마산의 북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진포에서 달마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미황사 창건 설화가 문득 생각났다. 신라 경덕왕 시절 황금빛 피부의 외래인이 범패 소리를 울리며 노를 저어 땅끝마을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나 경전과 불상 및 탱화를 의조화상에게 건네주었고, 싣고 왔던 바위를 부수고 나온 검은 소가 점지한 자리에 절을 세우니, 곧 미황사라는 것이다. 흔히 인도 불교가 바다로 직접 전래된 증거로 이 설화를 들기도 한다. 그 ‘사자포’는 미황사에서 최단거리 항구인 이진포로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글 사진 dcsuh@seoul.co.kr
  • 혼자 또는 함께… ‘벽화마을’ 따라 걸어볼까

    혼자 또는 함께… ‘벽화마을’ 따라 걸어볼까

    가을. 걷기 좋은 계절이다. 한국관광공사가 10월에 걷기 좋은 길 9곳을 선정했다. 주제는 벽화따라 걷는 길이다. 한가위 황금연휴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걸어도 좋고, 친구끼리, 혹은 혼자서 차분하게 걸어도 좋겠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www.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인천둘레길 11코스(인천 중구)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그럴수록 우리는 연탄이나 산동네 등 희미해져가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인천둘레길 11코스는 ‘연탄길’이라 불린다. 이름만으로도 연탄이 가득 쌓인 골목길을 누비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연탄길’은 사라져가는 풍경을 아직 붙잡고 있다. 재개발에 밀려 사라져가는 골목길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미로 같은 산동네 풍경이 아직도 남아있다. 코스는 도원역을 출발해 우각로문화마을~인천세무서~금창동주민센터~창영초등학교~배다리 헌책방거리~송현근린공원~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동인천역 순으로 돈다. 거리는 5.2㎞ 정도다.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032)433-2122. 2. 묵호 논골담길 1~3길 (강릉 동해시)묵호항에서 언덕 위 등대까지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 묵호등대마을은 전형적인 달동네다. 비록 집은 비좁지만 바다를 마당으로 삼은 덕에 조망이 시원하다. 마을 담벼락마다 그려진 벽화는 강렬한 리얼리티가 담겨 있다. 지역 화가들이 머구리, 어부 등 실제 주민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마을 구석구석을 따라 이어진 논골담1길~2길~3길~묵호등대 순으로 이어서 걸으면 좋다. 거리는 1㎞ 정도다. 동해시 문화관광과 (033)530-2232. 3. 바우길 5코스 바다 호숫길 (강원 강릉시)강릉 바우길 5구간 바다호숫길은 경포호와 4㎞에 걸쳐 이어지는 해송숲길의 청신함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여기에 커피향 그윽한 안목해변과 금강소나무 숲길이 함께 어우러진다. 최근 조성된 안목항 ‘버스 타는 그림골목’도 이 코스에 있다. 5코스의 북쪽 끝인 사천진항은 강릉 물회의 진원지이다. 식도락가들에게도 권할만하다. 사천해변공원을 출발해 경포인공폭포~경포대~허난설헌기념관~강문해변~송정해변쉼터~강릉항(죽도봉)~솔바람다리~남항진 순으로 돌아본다. 거리는 16㎞. 강릉시 관광과 (033)640-5126. 4. 마비정 누리길 1~3코스(대구 달성군)마비정누리길은 마비정벽화마을을 기점으로 삼필봉, 가창 정대리, 화원자연휴양림을 각각 종점으로 하는 3개의 코스로 나뉜다. 말(馬)과 관련된 아련한 전설이 있는 마비정누리길의 중심은 마비정벽화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1960~70년대의 농촌의 풍경과 시대분위기를 토담과 벽담을 활용해 표현했다. 마을 안쪽의 사랑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1코스(마비정벽화마을~삼필봉)는 1.5㎞, 2코스(마비정벽화마을~가창 정대리) 5.5㎞, 3코스(마비정벽화마을 ~ 화원자연휴양림) 1.4㎞다. 달성군청 관광과 (053)668-3913. 5. 대구 골목투어 4코스 삼덕 봉산 문화길(대구 중구)골목투어는 대구의 원도심이라 불리는 중구의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골목길이다. 동네와 동네를 실핏줄처럼 이어주는 골목에서는 잊혀진 대구 역사,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려온다. 그 가운데 4코스 삼덕 봉산 문화길은 역사와 예술이 숨 쉬는 길이다. 요즘 한창 뉴스의 중심에 있는 김광석길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출발해 삼덕동문화거리~김광석길~봉산문화거리~대구향교~건들바위 순이다. 거리는 약 5㎞. 대구 중구 관광개발과 (053)661-2624. 6. 느린꼬부랑길 1코스 옛이야기길(충남 예산군)느린꼬부랑길은 슬로시티로 지정된 대흥마을 곳곳을 누비는 길이다.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이 마을에서 유래했다. 느린꼬부랑길 1코스 옛이야기길은 의좋은 형제 공원에서 시작해 되돌아오는 코스다. 소소한 시골마을 풍경과 봉수산 중턱에 자리한 봉수산자연휴양림에서 바라보는 예당저수지 풍경, 동헌 앞에 자리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 등 슬로시티 대흥의 다양함을 만나게 된다. 예당저수지의 물결처럼 한적한 마을에는 벽화가 소박하게 그려져 있어 옛 풍경을 더해준다. 코스는 방문자센터~관록재들~봉수산자연휴양림~애기폭포~대흥동헌~방문자센터다. 거리는 5.1㎞. 대흥슬로시티 방문자센터 (041)331-3727. 7.도란도란 시나브로길 1코스(전북 전주시) 도란도란 시나브로길은 전주 한옥마을 남쪽에 있는 전주한벽문화관을 출발해 남고산성 너머 원당마을로 내려섰다가 전주천 둑길을 따라 다시 한옥마을(전주향교)로 돌아오는 원점회귀형 걷기길이다. 골목마다 재미있는 벽화들이 숨어 있는 옥류마을, 자만마을 등이 이 길의 절정이다. 특히 자만벽화마을은 글로벌한 스토리들이 벽화로 그려져 골목마다 명화 전시장을 방불케한다. 5년 전 어떤 화가가 남은 페인트를 재활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40호 이상의 집 담벼락과 대문이 갤러리로 변했다. 코스는 한옥마을(전통문화관)~남천교~산성벽화마을~관성묘~분기점~천경대~만경대~억경대~분기점~원당마을~전주천~천주교성지~전주자연생태박물관~한벽당~자만마을~오목대~향교다. 거리는 12㎞다. 전주 문화관광 콜센터 (063)222-1000. 8. 양림동 둘레길(광주 남구)광주 양림동 둘레길은 경주 ‘황리단길’과 함께 요즘 뜨고 있는 도심 골목이다. 근대역사문화마을로도 유명한 양림동은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벽화로 수를 놓았다. 심지어 PC방 벽에도 근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19세기 초 이곳에 자리 잡은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으며,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인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그 중 백미다. 또 구한말에 지어진 고래등같은 한옥과 소박한 민가, 모던한 문화 공간이 걷기 여행자를 유혹한다. 코스는 양림동 커뮤니티 센터~광주 정공엄지려와 충견상~이장우 가옥~최승효 가옥~뒹굴동굴~양림파출소~양파정~통기타거리~사직공원산책로~충현원~다형 김현승 시비~선교사묘원~우일선 선교사 사택~피터슨 선교사 사택~호랑가시나무~커티스 메모리얼홀~3.1만세운동 기념동상~수피아홀~윈스브로우홀~푸른길~정율성 거리~정율성 생가~3.1만세운동 발상지~오웬 기념각~어비슨 기념관이다. 거리는 4.5㎞. 광주 남구청 문화관광과 (062)607-2331. 9. 우수영 강강술래길(전남 해남군)우수영강강술래길은 임진왜란 당시 해전사에 영원히 남을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과 조선 수군의 본영이었던 전라우수영을 잇는 길이다. 걸음마다 충무공과 조선 수군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우수영마을은 골목마다 벽화, 조형작품, 작은 갤러리 등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코스는 울돌목물살체험장~울돌목해안데크~전라우수영~강강수월래전수관~우수영유스호스텔~청룡산쉼터정자~충무사연리지~충무사~우수영해안데크~우수영항~법정스님생가~방죽샘~명량대첩비~우수영5일장~망해루다. 거리는 7.3㎞. 해남군 관광안내 (061)532-1330.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철은 권력… 철은 예술… 철은 삶이다

    철은 권력… 철은 예술… 철은 삶이다

    한·중·일 등 730여점 전시무덤 속 덩이쇠들 ‘권력’ 상징63빌딩 높이와 맞먹는 양 출토 비격진천뢰는 왜군 격퇴 필살기‘예술’된 철불… 기술 발달 시사“시대의 큰 문제들은 말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만 해결된다.” 유럽 평화 구도와 독일 통일을 이룬 ‘철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말이다. 이 한 문장에 인류사를 이끌어온 ‘철’의 막강한 힘이 압축돼 있다. 우주에서 날아온 운철로 만든 히타이트 제국의 고대 무기부터 현대의 우주선까지, 철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금속으로 역사를 움직여 왔다. 문명의 이기로 인간을 이롭게 하면서도 살상의 도구로 인간을 해치기도 했던 철. 그 다채로운 속성이 피워낸 문화사를 한국, 중국, 일본, 서아시아 등에서 출토된 유물 730여점으로 짚어보는 전시가 열린다. 26일부터 11월 2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특별전 ‘쇠·철·강-철의 문화사’다.철은 ‘권력’이었다. 고대 무덤의 부장품은 곧 무덤 주인이 지닌 정치·사회적 권력의 크기였다. 특히 신라 왕릉인 경주 황남대총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덩이쇠들은 철이 권력의 상징이자 화폐의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무덤에서 나온 3200여점의 철기 부장품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덩이쇠들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243m로, 서울 여의도 63빌딩 높이와 맞먹는다.1부 전시가 인류와 철의 첫 만남을 세계사적으로 조명했다면 2부 전시 ‘철, 권력을 낳다’에서는 한반도에 철기가 등장한 이후 고대부터 조선까지 철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 주는 다양한 철기 유물이 등장한다. 특히 권력욕이 촉발시킨 전쟁이 낳은 갖가지 철제 무기와 갑옷들이 눈길을 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서 발견된 고구려 벽화무덤 퉁거우 12호분 벽화 속 개마무사(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말 탄 병사)에서 기원한 신라와 가야의 철갑 무사의 면면을 10여점의 갑옷과 투구, 입체 영상으로 구현한 전시는 전장의 한가운데 선 듯, 실감을 더한다. 보물 857호인 대완구와 대완구로 쏘면 사방으로 철 파편이 튀어 적을 공격하는 공 모양 포탄 비격진천뢰도 전시장에 나왔다. 비격진천뢰는 폭발하면 하늘을 뒤흔드는 우레 소리가 난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조선 최고의 무기였다.철은 ‘예술’이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서산 보원사지의 철불 철제여래좌상은 양감이 넘치는 웅장한 체구,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과 유려한 옷주름 등으로 ‘통일신라의 걸작’ 석굴암 본존을 연상시키며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거친 금속인 철로 부드러운 표면과 자연스러운 표정, 옷 주름 등을 묘사한 세부 표현은 통일 신라 이후 일상으로 들어온 철을 예술로 빚어낼 만큼 선인들의 철을 다루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음을 보여 준다.금과 은으로 천마의 화려한 자태를 새겨 넣은 ‘철제금은상감 발걸이’에는 통일신라 시대 뛰어난 금속 공예 기술이 압축돼 있다. 3부 전시 ‘철, 삶 속으로 들어오다’에서는 이처럼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일상에 스며든 철이 생활 도구를 넘어 종교적 상징물, 예술품으로 거듭나는 극적인 변화상을 선보인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동서양을 넘어 인류가 가장 널리 사용해 온 금속인 철은 역사의 전환기를 이끄는 동력이었다”며 “인류사에서 철이 지닌 가치와 역할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지금까지는 물론 미래에도 우리의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할 철의 속살을 되짚어 보시길 바란다”고 소개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스포트라이트] 닭장으로 들어간 넘버투…AI 잡기 ‘넘버원’

    [스포트라이트] 닭장으로 들어간 넘버투…AI 잡기 ‘넘버원’

    “2016년 12월 26일 전북도청 5급 이상 공무원 100여명과 함께 현장에 들어가서 닭을 죽이는 살처분 작업을 했다. 백신 예방접종 주사를 맞았고, 복용약인 타미플루도 살처분 이후 일주일간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닭들은 A4 종이 크기의 닭장마다 2~3마리씩이나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에서 모이만 먹고 알을 낳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닭을 닭장에서 꺼내어 플라스틱 통에 넣고 매몰지까지 옮겨서 쏟아부었는데 마스크를 썼어도 계분 냄새가 코를 찔렀고 닭장에서 닭을 꺼내는 순간 퍼덕거리는 닭의 날갯짓에 닭털과 분진이 날렸다.”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난중일기’란 기록으로 남겼듯 김일재(57) 전 전북 부지사는 현장행정 사례집 ‘지방 현장행정 25시’를 통해 조류인플루엔자(AI)와의 사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현재 행정안전부 정부혁신조직실장인 그는 지난 8월까지 전북 부지사로, 2009년에는 기획관리실장으로 전북에서 모두 3년여간 근무했다. 가족과 떨어져 단신으로 전주에 부임한 김 실장은 퇴근 후 업무 기록을 남겨 이를 ‘지방 현장행정 25시’란 이름으로 묶어 냈다. 그가 기록을 남기게 된 계기는 AI였다. 전북 고창군 동림저수지에는 겨울 철새인 가창오리떼가 40만 마리씩 머무는데 철새는 AI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해마다 반복되는 AI를 근절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체계적으로 남겨진 기록이 없어 직접 쓰게 된 것이다. AI 대응 과정에서 중앙부처 회의, 대통령 권한대행 등이 참여한 영상회의에서 수많은 정책 제언을 내놓은 김 실장의 별명은 어느새 ‘AI 스타’가 됐다. 같이 회의에 참석한 지방자치단체 부단체장과 시·도 축산 관계관들이 붙인 영광스러운 별명이었다.김 실장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26일 직접 살처분 작업에도 뛰어들었다. 전국 지자체의 노력에도 AI는 계속 확산했고, 170만 마리의 닭을 키우는 김제시 용지면의 대규모 산란계 사육지역에서 AI가 발생해 선제적 예방 조치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농가에서는 ‘농약을 먹고 자살하겠다’며 반발했고, 군부대의 협조는 부모들의 항의 민원 때문에 받기 어려웠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인들이 살처분에 투입됐다 AI가 확산할 우려가 있어 국방부는 이미 살처분에 사병들을 투입할 수 없다는 지침을 내린 상태였다. 결국 김 실장은 직접 닭을 묻었고, 간부 공무원들이 나서자 공무원노조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매년 10월은 다시 AI가 창궐하기 시작할 시점이라 이미 지자체들은 AI 예방을 위해 방역 작업을 시작했다. 김 실장은 “소와 돼지 등에는 구제역 예방 백신 주사를 놓지만 닭은 숫자가 너무 많아 AI 백신 접종은 엄두도 못 낸다”며 “그런데 중국에서는 닭에도 일일이 백신 주사를 놓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읍·면·동까지 2000여명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컴퓨터 영상회의를 새로 도입해 실시간으로 긴밀한 의사소통이 이뤄지도록 한 것도 김 실장이다. AI 대책 회의를 하느라 모인 차량 때문에 오히려 AI가 번지는 상황을 막고,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하나의 작은 국가와 마찬가지인 지방자치단체의 ‘넘버2’ 책임자로 일한 그가 ‘지방 현장행정 25시’를 통해 강조하는 두 가지 원칙은 ‘기록’과 ‘현장’이다. AI와 같은 사태에 대한 대응 경험과 지식을 매년 축적하지 않으면 인사발령으로 책임자가 바뀌었을 때 예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스스로 기록을 만들어 낸 것과 동시에 공무원들도 생산자료를 모두 ‘나라e음 시스템’에 올려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처럼 공무원 사고의 중심은 중앙이 아니라 지방 현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책현장을 직접 보면서 지역 현안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장에 답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신한균 도예전 29일까지 메사빌딩 한수서 개최

    신한균 도예전 29일까지 메사빌딩 한수서 개최

    ‘신한균 도예展: 신정희 선생을 추모하며’가 서울 중구 명동 메사 빌딩 한수 특별전시홀에서 29일까지 열린다.한국 도예계의 거장 신정희 선생의 작고 1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대를 이은 아들 신한균 작품전이 개최된 것이다. 신정희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난 신한균 작가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도예가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일본, 유럽 등에도 널리 알려진 한국을 대표하는 사기장이다. 그는 조선사발의 전통을 재현해 내고, 우리의 전통도예 기법을 복원하고 발전시켜오고 있으며 도예이론을 체계화하였다.또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의 삶을 다룬 장편 역사소설 ‘신의 그릇’과 ‘우리 사발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달항아리를 비롯해 한국문화의 미(美)와 혼(魂)이 담긴 총 8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쏟아지는 트렌드 홍수 속에서 대를 이어 전해지는 우리 전통의 소중함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다. 이기철 기자 chuli@seoul.co.kr
  • ‘이순신 전적지 스토링텔링 테마투어’ 인기

    ‘이순신 전적지 스토링텔링 테마투어’ 인기

    이순신전략연구소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시행하고 있는 ‘이순신 전적지 스토리텔링 테마 투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순신 전적지 스토리텔링 테마 투어’는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당일 혹은 1박2일 일정으로 이순신 장군 전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으로부터 위탁 받아 전국의 7개 단체가 시행하는 ‘2017 톡톡 이순신 충무공탐험대’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순신전략연구소 관계자는 “학생들에게는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생생한 체험교육의 기회가 되고 있으며, 일반인들 또한 역사기행에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4월 28일 이순신 장군 탄신기념일에는 서울 상곡초등학교 학생들이 ‘톡톡 이순신 충무공 탐험대 발대식’에 참가한 후 아산현충사와 이순신 장군 묘소를 참배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코레일과 협의해 ‘거북선 열차’를 띄워 인천지역 학생 및 일반인 200여 명과 함께 전남 보성의 이순신 전적지를 답사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중학생 자유학기와 관련해서도 인기를 끌어 지난 7월 27일에는 경희중학교 학생 25명이 1박2일로 전남 해남의 명량해전지와 전라우수영지를 답사하고, 거북선 승선과 활쏘기 체험 등을 경험했다. 오는 9월 22~23일에는 중평중학교 학생 28명이 경남 통영의 한산대첩 현장을 찾아갈 예정이다. 일반인들의 참여도 적극적이다. 송파구 부동산 최고위과정 멤버들은 통영과 한산도의 이순신 전적지를 다녀왔으며, 한화그룹의 전직 임원모임인 한화회는 2박3일 일정으로 남해안 이순신전적지를 답사했다. 오는 10월 24일에는 경상북도 교장선생님들이 청렴연수의 일환으로 통영과 남해 노량을 답사할 예정이다. 참여자들은 “출발하기 전 사전 교육을 실시하고,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도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대해 강의를 진행함과 더불어 현장에 가서는 재미있는 스토리텔링 역사 교육으로, 재미가 더해졌다”고 후기를 전했다. 한편 테마투어와 관련한 더 자세한 사항은 이순신전략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자치광장] 대한제국 선포한 환구단을 복원하자/최창식 서울 중구청장

    [자치광장] 대한제국 선포한 환구단을 복원하자/최창식 서울 중구청장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낭인들을 시켜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치욕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나라의 운명을 더이상 주변국에 맡길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제의 자리에 오를 계획을 세운다.먼저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光武)로 바꾸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 축조에 나섰다. 환구단 후보지는 경운궁 가까이에 있는 소공동의 남별궁 터였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 사신의 숙소로 사용된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만듦으로써 하늘에 대한 제사가 중국 황제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린 것이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3층의 원형 제단인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날 백성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 환호했다. 황제 즉위식 다음날 고종이 국호를 ‘대한’으로 한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환구단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세웠다. 1960년대 후반 화재로 소실된 철도호텔 자리에 들어선 것이 지금의 조선호텔이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빼앗긴 1910년까지 13년 정도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자주독립국을 꿈꾸었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 국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승됐다. 최근 동북아 정세는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당시와 흡사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자칫 주변 강대국의 이해타산에 따라 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깊다. 물론 대한제국 당시와 달리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수준의 국방력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지만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을 둘러싸고 국론이 갈라져 참으로 걱정스럽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인 오는 10월 12일을 맞아 21세기 상황에 걸맞게 국난을 헤쳐 나가고자 자주적 정신을 함양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일제가 훼손한 환구단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자리에 있는 조선호텔을 을지로 미공병단 부지나 신당동 기동대 자리 등에 대체부지를 마련해 이전할 수 있도록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중국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어엿한 자주국임을 선포한 이곳을 현재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나라임을 알릴 수 있는 상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발효 음식 이야기] 콩이 낳은 3형제, 그 깊은 맛

    [발효 음식 이야기] 콩이 낳은 3형제, 그 깊은 맛

    ‘한 마을의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한 집안의 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장’(醬)은 오랜 세월 우리 음식의 뿌리로 기능해 왔다. 장이란 콩을 삶아 소금에 절인 것을 발효시켜 만든 전통의 조미료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장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문헌 ‘주례’(周禮)에 고기로 만든 육장에 대해 언급한 것이 최초다. 그러나 콩으로 만드는 ‘두장’(豆醬)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발효라는 독특한 제조 방식과 한반도가 원산지인 콩이 만나 우리의 고유한 식문화 기틀을 이룬 셈이다. 오늘날에는 짠 음식을 기피하면서 장류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지만, 적정량을 사용하면 음식의 맛과 영양에 깊이를 더해 주는 고마운 음식이다.국내 문헌에 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145년 ‘삼국사기’에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편에 “신문왕(神文王) 3년(서기 683년) 왕실의 폐백 품목 중에 장, 삶은 콩을 발효시킨 시(?)가 포함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이전부터 대두를 활용해 만든 발효식품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방증이다. 또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은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 “발해의 명물은 책성에서 생산되는 된장”이라는 등의 기록이 나와 우리의 장맛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콩으로 만든 장, 우리나라서 탄생 오늘날 우리 식탁에서 가장 두루 쓰이는 장은 고추장이다. 고추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호초’(胡椒)나 ‘천초’(川椒)와 같이 매운맛을 내는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 오다가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들어오면서 기존의 된장을 만들던 콩 가공 기술과 고추라는 신재료가 만나 지금의 고추장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과거에는 집집마다 고추장을 2~3종류 담가 두고 음식에 따라 구별해 사용했다. 그중 찹쌀가루를 엿기름 물에 풀어 끓여 만드는 찹쌀고추장을 가장 귀하게 여겨 음식의 색을 낼 때 쓰고, 다른 고추장보다 단맛이 적고 칼칼한 보리고추장은 쌈장을 만들 때 주로 사용했다. 또 밀가루로 만든 고추장은 찌개나 국을 끓일 때, 장아찌를 만들 때 조미료로 썼다. 고추장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순창 고추장’과 관련해서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스승인 무학대사를 만나러 순창에 갔을 때 고추장의 전신으로 알려진 ‘초시’를 먹어 보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진상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00년대 초의 문헌 ‘규합총서’에도 순창과 천안의 고추장이 팔도의 명물 중 하나로 소개됐다. 대상 청정원이 1989년 전북 순창에 공장을 건립하고 ‘순창 고추장’을 출시해 시장 1위를 석권하면서 그 이름이 더욱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항아리의 숨 쉬는 원리를 이용해 인위적인 미생물 접종 없이도 효소 활성화가 가능한 전통의 발효숙성 방식인 ‘항아리 원리 발효공법’ 및 태양광을 활용한 살균공법을 적용하는 등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해 깊은 맛을 구현해 냈다는 것이 대상 측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72개국으로도 수출하고 있으며, 지난 5년 동안 해외 매출이 연평균 10%씩 성장해 지난해에는 3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고추장은 특유의 감칠맛 나는 매운맛 덕분에 외국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장류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장류 수출 비중은 고추장이 59.3%로 선두를 달렸다. 이어 간장 25.4%, 된장 15.3% 순이다. 그러나 장의 원조는 콩을 발효시킨 된장이다. 된장의 ‘된’은 물기가 적고 점도가 높다는 의미로 액체 형태의 간장과 구분되지만, 지금처럼 간장과 된장이 따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장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까지 등장했다. 당시 문헌 ‘구황보유방’에는 “콩 1말을 무르게 삶아 밀 5되를 볶아 함께 섞어서 메주를 만든다”고 나와 있다. 지금같이 콩만으로 메주를 만들어 된장을 담그는 방법은 ‘증보산림경제’에 나오는데 “콩을 물에 씻고 하룻밤 물에 담갔다가 건져서 익힌 것을 절구에 찧어서 둥글게 메주 모양으로 만든 다음 한 치 정도의 반월형으로 썰어 만든다”고 설명돼 있다. 이처럼 제조법이 보편적으로 알려진 덕분에 된장은 고추장과 간장에 비해 오늘날까지도 집에서 직접 담그는 ‘재래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 업계에 따르면 소비자의 약 50%가 자가 조달을 통해 된장을 먹는다고 알려졌다.●고추 도입 전 고추장에 호초·천초 등 사용 그러나 간장과 고추장에 비해 레시피 개발이 이뤄져 있지 않은 데다 맞벌이 가정과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된장 시장은 정체 상태다. 지난 5년 동안 된장 시장 규모는 약 500억~600억원대에 머물러 있다. 간장과 고추장이 약 1300억~1900억원대 수준인 것에 비하면 절반에도 크게 못 미치는 셈이다. 쌈장이 2011년 630억원에서 2016년 700억원으로, 초고추장이 2011년 310억원에서 2016년 400억원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과도 대비된다. 업체들은 저마다 연구개발에 공을 들이며 현대인의 입맛에 맞춘 각종 제품을 출시하는 등 ‘된장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대상 청정원은 전국 각지의 균주 1000여종을 수집한 끝에 메주를 발효에 사용하는 ‘바실러스’라는 균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 순창 지역 명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선별해 낸 발효 균주를 활용한 ‘순창발효메주’도 개발했다. 샘표는 자체적인 된장의 맛을 좌우하는 곰팡이와 향을 결정하는 고초균을 함께 사용하는 자체 ‘복합 발효’ 기술을 개발했다. 또 콩알 하나하나에 고초균을 결합하는 ‘콩알메주공법’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콩을 절구에 찧어 메주를 만들던 전통 방식에서 착안해 절구와 같은 온도와 압력, 물의 양으로 메주를 만들어 내는 기술도 자체 개발했다는 설명이다.●1890년대 이후 개량식 간장 보급 된장의 동생 격인 간장도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다. 간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조선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콩으로 만든 메주를 이용해 간장과 된장을 함께 얻는 ‘병용장’을 만드는 방법이 18세기 ‘증보산림경제’에 등장하는데, 이 방법이 오늘날의 간장 담그는 방법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890년대에는 일본에 의해 개량식 간장이 보급됐으며, 이후 1940년대 대량 유통되기 시작했다. 업체별로 분류가 조금씩 다르지만, 간장은 제조 방식과 사용법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한국의 전통 제조 방식에 따라 100% 콩으로만 만들어진 간장을 ‘조선간장’이라고 하는데, 염도가 높고 색상이 옅어 음식의 본래 색을 유지하면서도 간을 맞출 수 있다. 이 때문에 주로 국, 찌개 등 국물 요리의 맛을 내는 데 주로 쓰이며, 각종 나물을 무칠 때도 사용된다. 콩과 소맥을 발효시켜 만드는 ‘양조간장’은 감칠맛이 뛰어나고 깊고 풍부한 향이 특색이다. 열에 의해 향이 사라지기 쉽기 때문에 열을 많이 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침 요리나 생선회를 찍어 먹는 소스, 무침, 샐러드 드레싱 등으로 쓰기에 적합한 간장이다. 그러나 워낙 감칠맛이 뛰어나 일반적인 볶음이나 구이, 찜 요리에도 두루 쓰인다. 일반적인 양조간장에 맛의 주성분인 아미노산 함량이 높은 간장을 혼합한 것은 ‘진간장’이라고 한다. 양조간장의 풍미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열을 가해도 맛이 잘 변하지 않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간장이다. 장조림, 갈비찜, 간장게장 등에 주로 쓰인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사상 처음 언론에 공개된 잠수함 수중생활 보니...

    사상 처음 언론에 공개된 잠수함 수중생활 보니...

    “함수 전방에 적 항공기 출현,비상! 긴급잠항!”지난 12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출항한 해군의 1200t급 9번째 잠수함인 이억기함(SS-071)에서 갑자기 비상경보가 발령됐다. 잠수함 함교에 설치된 둥근 막대 모양의 잠망경만 물 밖으로 내밀며 조용히 움직이던 중 긴급한 무전이 오갔다. 해군기지 부두에서 8㎞가량 수중으로 이동하던 중 잠망경에 가상의 적 항공기가 포착된 것이다. 긴박한 순간 승조원들은 전광석화와 같이 정해진 자신의 위치로 움직였다. 길이 56m의 기다란 선체가 급격히 기울어지는 순간에도 승조원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함장인 강병오(해사 52기) 중령의 명령에 따라 조타기로 잠수함을 운전하는 타수가 깊은 바다로 잠수함을 몰며 “16m, 18m, 20m, 40m 통과”, “목표심도 잡기 끝”이라고 외쳤다. 그 순간 또 한차례 긴급한 보고가 무전기를 타고 흘렀다. “적 함정 출현! 어뢰 발사 준비!” 수중의 이억기함 승조원들이 음향센서를 이용해 16㎞ 전방의 적 수상함의 위치를 식별하고 12㎞ 앞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장면을 실전과 동일하게 연출했다. 강 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장관이 독일제 SUT 중어뢰 발사 버튼을 눌렀다.잠수함 음향센서에 의해 적 수상함을 명중시킨 어뢰 폭음이 감지되자 잠망경을 올려 최종 확인했다. 적 수상함이 격침된 것으로 실전 같은 가상훈련은 끝났다. 긴급 잠항부터 무장 버튼 발사까지 긴박감 넘치는 장면에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 이억기함은 함수에 화재가 발생한 상황을 가정한 진압 훈련 시범도 보였다. 해군은 209급(1천200t급) 잠수함의 수중 기동과 수중작전 상황 등을 처음으로 국내 언론에 공개했다.잠수함 승조원들의 수중 전투태세와 함 내부 생활이 공개된 것은 해군의 잠수함 운용 25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이억기 장군(1561~1597)의 이름을 딴 이억기함은 9척이 건조되는 209급의 마지막 잠수함이다. 대우조선에서 국내기술로 건조되어 2001년 12월 취역했다. 또 해군은 잠수함 승조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도 여과 없이 공개했다. 잠수함 내에서는 세탁을 할 수 없어 빨랫감은 봉지에 밀봉해 놓고, 입항 후 집으로 가져간다. 몇 주간 항해에도 담배를 피울 수 없고, 휴대전화 사용이나 TV 시청도 불가능하다. 보안 인가를 받은 DVD 정도를 반입할 수 있다. 바닷물을 정화한 물을 사용하는 데 그나마 아껴 써야 하므로 샤워는 주 1회, 10분 정도로 제한된다. 평소 물티슈를 이용해 몸을 닦는다고 한다. 잠수함 내부 공기는 스노클 마스트로 환기한다. 스노클 마스트를 수면 밖으로 내보내 바깥 공기를 빨아들이고 들어온 공기는 내부에 있는 환풍기를 통해 함 전체로 전달한다. 바닷물을 정화해서 사용하는 식수 맛은 밍밍하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비좁은 침대도 2∼3명이 교대로 사용하고, 밥도 좁은 테이블에서 어깨를 마주 대고 먹는다. 적 잠수함에 노출되지 않도록 소음을 통제해야 하는 잠수함 내에서는 ‘작은 소리로 대화’, ‘발소리 작게’ 원칙에 따라 운동은 턱걸이, 푸시업, 스트레칭 정도로 끝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