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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플러스] “종교 관계없이 모든 사람 쉴 수 있는 휴양 도량으로 건립”

    [현장 플러스] “종교 관계없이 모든 사람 쉴 수 있는 휴양 도량으로 건립”

    북한산 서암사가 48칸 규모, 5년 계획으로 복원된다. 2004년 토지매입 완료를 시작으로 2007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된 후 15년 만이다. 서암사는 조선 시대 숙종 때 승려 광헌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서 북한산성을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수문(水門)과 대서문 일대의 축성과 관리를 맡았던 곳이다. 그렇다 보니 서암사지는 북한산성 백운동 계곡 옆에 있는 절터로 등산로 입구에 있어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다. 북한산성은 축성사적 의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산성 내부의 행궁, 사찰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서암사는 산성의 준공과 더불어 건립되기 시작했던 11개 사찰 중의 하나로 133칸 규모 창건됐다. 복원사업을 위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결과 서암사지는 1만 1000여평의 절터에 대웅전과 산신각, 세심루와 군기고가 있었다. 또 조선 시대의 수파면 기와편과 청화백자편, 명문기와, 백자편 등이 출토되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주었다. 이에 따라 본지는 북한산 서암사 복원에 앞장서온 혜안 스님을 만나 그 과정을 인터뷰했다. 혜안 스님은 “부처님 제자로서 조상의 얼을 되살리고 부처님 도량을 복원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이 쉬어 갈 수 있는 휴양 도량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서암사가 조선시대에는 ‘호국 도량’이었다면 21세기에는 ‘힐링 도량’이길 바란다는 것이다. 호국의 보훈 가족이기도 한 혜안 스님. 그가 ‘휴양과 힐링’ 도량으로 추진하는 북한산 서암사의 문화재 복원사업의 성공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북한산 서암사 복원사업이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첫 삽을 뜨게 됐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그간의 소회를 부탁드립니다. -잘 알다시피 북한산 서암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6년에 시작됐습니다. 2007년 경기도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문화재 지정이 가결된 후 발굴조사를 확대한 결과 1만 1000여평의 터에 대웅전과 산신각, 세심류, 군기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특히 발굴조사에서 조선조 수파면 기와편과 청화백자편, 명문기와, 백자편 등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 복원사업을 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초기에 힘도 들었습니다.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 복원에 긍지를 갖고 참고 인내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조들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인 데다 부처님 도량을 가꾸게 됐다고 생각하니 그 보람된 기쁨이 크다고 할까요. 그간의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이 봄눈 녹듯 합니다. →스님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군요. 그렇다면 북한산 서암사지 복원사업에 나선 배경은 무엇인가요. -서암사지는 북한산성 수구문 주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구축과 수비를 위해 광헌스님이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133칸 규모로 창건한 사찰로서 수구문 일대의 산성 구축과 수비를 담당하는 역할을 해오다 갑오개혁 때 승병이 해산되면서 19세기 말에 폐사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서암사는 호국 도량으로 역할을 해 온 사찰입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조상의 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요. →그렇다면 북한산 서암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서암사는 북한산에 위치해 있잖습니까. 우선 북한산은 높이가 848m며, 면적은 78.45㎢로 서울특별시에서 39.7㎢, 경기도에서 38.7㎢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은 지정학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불교적 시각에서도 신성한 곳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이는 북한산 내 문수봉, 보현봉, 원효봉, 의상봉 등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산성 내 건립된 승영사찰들은 중흥사를 수사찰로 삼아 전체적으로 팔도도총섭이 겸하는 승대장 1명과 각사승장 11명, 의승 350명이 주둔했습니다. 의승은 각 도에 있는 승려들 중에서 차출해 2개월씩 복무하도록 했죠. 그러니까, 서암사는 북한산이라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자락에 위치했습니다. 성지의 명성에 맞게 서암사도 조성된 다수의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북한산은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러 남한산과 함께 지리적 위치 등의 이유로 수도방위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의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커졌죠. 그래서 문헌에 따르면 숙종 당시 1711년 2월에 이르러 산성 축성과 함께 서암사도 건립되게 됐는데요, 서암사는 처음 133칸 규모로 창건됐으나 이후 107칸으로 규모가 축소되기도 했다고 합니다.→서암사지는 특히 경기도 문화재자료 140호로 등재가 돼 있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004년도에 땅을 매입했는데요. 서암사는 북한지 등에 수록된 고지도를 통해 볼 때 현재의 위치와 일치해 고증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문화재 지정에 따른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의 유물이 출토돼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특히 조산된 서암사 절터의 규모는 총 1만 1000여평으로 그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경기도는 2007년 8월 30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506과 509를 비롯해 총 9필지에 대해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등재를 했습니다. 그동안 문화재 발굴해서 현재 2권의 책이 간행됐고, 3권 발행이 예정돼 있습니다. 사실, 발굴과정에서 재정과 행정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서암사 복원사업을 추진하는데 재정과 행정에서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문화재 복원사업을 여러 관청에서 관장을 하는 데서 오는 행정절차가 까다롭고 또 복잡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불필요한 시간적 낭비가 많아 복원사업이 더디게 진척됐죠. 특히 2009년에는 국정감사까지 진행되기도 했고요. 허가가 지연되면서 그로인한 어려움이 컸습니다. 현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문화재 복원사업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힘써 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앞서 서암사는 과거 133칸으로 대규모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원 규모는 얼마이며, 몇 년간 진행되는가요. -1차 복원은 48칸으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2차 발굴과 3차 발굴도 해야 되는데, 재정이 턱없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5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서암사 복원이 완성되면 북한산의 새로운 문화명소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신가요. -북한산성의 정문은 고양시 대서문인데요. 대서문에서 계곡 탐방로 방향으로 그러니까, 서암사지는 북한산성 백운동 계곡 옆에 있는 절터잖습니까. 특히 서암사는 북한산성 내의 여러 사찰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함으로써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죠. 나아가 서암사에는 현재에도 큰 바위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르는 이 바위 아래에는 큰 계곡물이 있고, 옛 선인들이 ‘탁족(濯足)’을 즐기던 서암사 넓적바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암사가 복원되면 많은 사람이 찾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유원지 등 자연휴양림으로서 손색이 없는 곳인 만큼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쉬어 갈 수 있는 도량을 세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기도와 고양시를 비롯한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문화재 복원사업에는 많은 재원이 소요됩니다. 반명 각 행정기관 등 정부의 문화재국의 재정은 너무 미약합니다. 그렇다 보니 지원되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죠. 그런 만큼 경기도와 고양시는 문화재 발굴과 복원이라는 큰 틀에서 행정을 모아 주시고, 재정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서암사(西巖寺) 서암사지(西巖寺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옛 절터다. 2007년 8월 13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됐다. 서암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때 북한산성 축성 이후 잦은 왜란과 호란에서 큰 활약을 했던 승려들을 활용하기 위해 산성 내에 건립한 11개 사찰 가운데 하나다. 규모는 133칸으로 승려 광헌(廣軒)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고려 문인 민지(閔漬:1248~1326)가 살았던 유지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민지사(閔漬寺)로 불렸다. 수문 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은 전하지 않는다.
  • 이명박 ‘무술옥사’ 무슨 의미? 김어준 “셀프 역사화…코미디”

    이명박 ‘무술옥사’ 무슨 의미? 김어준 “셀프 역사화…코미디”

    이명박 전 대통령은 9일 구속기소가 확정되자 미리 써둔 성명서를 페이스북에 올려 자신에게 제기된 4대 혐의를 적극적으로 반박했다.이 전 대통령이 페이스북을 통해 부인한 혐의는 크게 ▲ 불법 정치자금 수수 ▲ 국정원 특활비 전용 ▲ 다스 실소유주 의혹 ▲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문제 등 4가지다. 이 전 대통령은 “댓글 관련 수사로 조사받은 군인과 국정원 직원 200여명을 제외하고도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수석·비서관·행정관 등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가히 ‘무술옥사(戊戌獄事)’라 할 만하다”며 억울함을 거듭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의 ‘페이스북 입장문’에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10일 “아예 전면 부정을 작정한 프레임 짜기에 불과하다. 미리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서 어떤 상황이 나오든 나는 부정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 원내대표는 BBS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내용을 보고 하나하나 부정하고 시인하는 게 아니라 전면적으로 부정하겠다고 아예 작정을 하고 계획된 진술”이라고 의도를 짚었다. 방송인 김어준도 이날 자신이 진행하는 tbs라디오 ‘뉴스공장’에서 “무술옥사, 무술년에 감옥에 갇힌 역사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원래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그 시기에 굉장히 중요한 사건을 사가들이 이름을 붙인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구속이 정치적 박해를 당해서 벌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며 스스로 무술옥사라 칭했다. 역사를 떠나 현실 인식이 이 정도이다. 본인을 스스로 역사화하는 셀프 역사화다”라고 힐난했다. 끝으로 김어준은 “친박집회처럼 누군가 자신을 변호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무술옥사를 듣고 누가 ‘그렇지, 이건 무술옥사야’라고 하면서 들고 일어나겠는가”라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코미디”라고 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용산,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보수 완료

    용산,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보수 완료

    서울 용산구는 최근 원효로4가 87에 위치한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강화비) 보수공사를 완료했다고 8일 발혔다.구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비석을 들어 올려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주위에 울타리를 둘렀다. 주민들이 강화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구로 안내판도 세웠다. 강화비는 조선시대 비석으로 약 1.7m 크기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당시 명군과 왜군 사이에 있었던 화의 결정을 담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대표는 참석하지도 않은 채 명나라 대표 심유경과 왜군 대표 가토 기요마사가 강화협상을 벌였던 곳인데 심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현재 심원정은 없어지고 기념비석만 남아 있다. 성장현 구청장은 “강화비는 임진왜란 당시를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며 “부끄럽고 쓰린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감추기보다 제대로 알고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고궁의 절정… 경치를 잠시 빌리다

    고궁의 절정… 경치를 잠시 빌리다

    새봄이 되면 고궁마다 봄맞이 행사를 엽니다. 행사는 대개 금지된 영역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쪽문을 열고, 경복궁 경회루로 오르는 계단의 문도 활짝 엽니다. 이런 행사들의 핵심은 왕의 눈높이에서 궁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고궁들의 화양연화가 시작됐습니다. 다 돌아볼 수는 없더라도, 한 곳쯤은 찾아 물오른 봄 풍경을 만끽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계단식 화단·꽃담… 창덕궁 낙선재의 백미 ‘뒤란’ 낙선재는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이 1847년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지은 건물이다.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석복헌과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가 머물던 수강재도 딸려 있다. 석복헌은 단청이 없다. 소박하고 단아하다. 호리병, 포도 등 다산을 기원하는 문양도 건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맘때 낙선재 구역의 백미는 뒤란이다. 매화가 흐드러진 화계(계단식 화단)와 각종 무늬로 치장한 꽃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뒤란에서 눈여겨볼 것은 괴석이다. 화강암 받침대에 특이하게 생긴 돌을 받쳐 놓았다. 받침대 중 하나엔 소영주(小瀛洲)라고 씌어 있다. 영주는 신선 세계다. 그러니 받침대의 주장은 이 공간이 곧 선경이라는 것일 터다. 뒤란의 위는 야트막한 산자락이다. 낙선재 구역에 딸린 전용 후원이다.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된 영역이다. 바로 이곳에 발을 딛는 것이 특별 관람의 핵심이다. 취운정에서 작은 쪽문을 오르면 곧 한정당이다. 건물 주변엔 담장이 둘러쳐 있다. 이 담장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반드시 까치발을 하고 봐야 한다. 그래야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완벽한 진경산수화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인왕·백악·낙산·남산 한눈에 볼 수 있는 ‘상량정’ 작은 쪽문을 하나 더 지나면 제법 너른 터에 육각형 정자와 긴 창고형 건물이 나온다. 정자는 ‘상량정’이라 적힌 편액을 달고 있다. 한데 편액이 매우 작다. 어른이 배냇저고리를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글씨를 왼쪽부터 쓴 것도 그렇다. 상량정의 옛 이름은 평원루다. 상량정 위로 오르면 인왕과 백악, 낙산, 남산 등 한양을 에워싼 4개의 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 있어 이 모습을 볼 수 없다. 아쉽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열댓 개 정도의 계단만 오르면 천하의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데 말이다. 상량정 옆의 묵직한 건물은 예전 장서각이다. 여기서 무수히 많은 한글소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를 따로 ‘낙선재본’이라 부른다. 상량정 옆 담장에 새겨진 무늬가 인상적이다. 부(富) 자와 수(壽) 자를 형상화한 문양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담장을 지나는 문은 만월문이다. 보름달처럼 둥근 형태다. 문 자체도 예쁘지만, 안에 담기는 풍경은 더 예쁘다. 이제 막 꽃잎을 연 돌배나무와 창덕궁 전각의 기와지붕, 그리고 멀리 백악의 봉긋한 봉우리가 함께 담긴다.●왕이 정사 살피던 ‘인정전’ 내부 관람도 감동 인정전(국보 225호) 내부 관람도 낙선재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인정전은 왕이 정사를 살피던 공간이다. 20분 남짓 왕이 된 기분을 낼 수 있다. 인정전에 들면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길 권한다. 왕뿐 아니라 신하, 내시 등 자리를 바꿀 때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정전은 밖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중층 구조다. 그 압도적인 공간감은 신하의 자리에 서서 볼 때 최대치를 이룬다. 사실 가장 재미없는 것은 왕의 시선이다. 왕이 앉은 자리가 곧 풍경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어좌와 일월오봉병,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금강송 기둥, 천장의 화려한 봉황 조각 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외려 말석의 신하 자리다. 전등, 유리창, 커튼 등 근대적 요소가 가미된 전환기의 궁궐 모습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좋겠다. 궐내각사 특별 관람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관리들의 활동 공간을 복원한 곳이다. 상시 개방되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감동이 한결 깊어진다. ●풍경을 액자처럼 보는 ‘낙양각’… 경복궁 경회루의 백미 경복궁에선 경회루 개방 행사가 준비됐다. 경회루는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어 올린 누각이다. 경회루 2층은 바닥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중앙부가 가장 높고, 가운데 공간이 한 뼘 남짓 낮다. 바깥 공간 역시 또 한 뼘 정도 낮다. 높이가 다른 경계 구역엔 분합문을 달았다. 문을 내리면 폐쇄된 공간이 되고 열면 터진 마루가 된다. 참고할 것 하나. ‘인증샷’ 찍은 뒤 휴대전화를 잘 챙겨야 한다.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마루 틈으로 소지품이 빠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빠진 소지품은 ‘이번 생’에선 찾을 방도가 없다. 아주 먼 훗날 경회루를 중수할 때나 가능하다. 낙양각은 경회루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독특한 문양을 새겨 바깥 풍경이 액자처럼 보이게 했다. 옛사람들은 한옥의 창을 단순히 창으로만 보지 않았다. 풍경을 담는 액자로 봤다. 이처럼 밖의 풍경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차경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소유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길 뿐이다. 이 덕에 붓질 한 번 하지 않고도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수백 장의 풍경화를 내걸 수 있다. 낙양각은 네 방향 모두 절경을 품고 있다. 특히 남쪽 방향이 인상적이다. 근정전과 수정전 등의 전각들이 낙양각을 채운다. 수정전 옆은 잔디밭이다. 잔디밭은 ‘궁궐의 눈물’과 같은 것이다. 오래전 빼곡했던 궐내각사가 사라진 흔적이기 때문이다.●덕수궁 내 유일하게 단청 없는 건물 ‘석어당’ 덕수궁에선 석어당 개방이 봄 행사의 백미다. 석어당은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 건물이다. 유일한 2층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원래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뒤 선조가 15년을 지내면서 덕수궁의 모태가 됐다. 병에 걸린 선조를 위해 허준이 분주히 오가고, 선조가 승하하고, 대청마루에 앉은 인목대비가 뜨락에 광해군을 꿇린 채 호되게 꾸짖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석어당 2층에서 굽어보는 살구꽃 핀 풍경이 아름답다. 문을 열면 사방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곧바로 여성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줄곧 무게만 잡던 중년 남성들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걸린다. 글 사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창덕궁 낙선재 특별 개방은 오는 28일까지 매주 목~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진행된다. 창덕궁누리집(www.cdg.go.kr)에서 예약해야 한다. 다만 거의 모든 날짜가 매진이어서 아쉽다. 낙선재는 화계 위 공간만 진입이 제한된다. 후원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낙선재 구역의 화양연화가 이제 막 시작된 만큼 이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게 좋겠다. 인정전 내부 관람은 10월까지 매주 목~토요일 1일 4회( 오전 10시 30분, 11시, 오후 2시, 2시 30분) 운영된다. 당일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신청받는다. 1회 입장 인원은 30명이다. 우천 시엔 취소된다. 궐내각사는 상시 볼 수 있지만 특별 관람 기간엔 전문 해설사가 동행한다. 10월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운영된다. 역시 예약해야 한다. 덕수궁 석어당, 함녕전 개방은 5일까지다. 밖에서는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석어당과 ‘한 세트’인 살구꽃은 지난달 29일쯤 피기 시작했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더니 벌써 절정을 지나 낙화하고 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내부 관람은 화·토요일 오전 9시와 오후 4시에 각각 진행된다. 덕수궁관리소 누리집(www.deoksugung.go.kr)에서 예약해야 한다. 현재 진품으로 전시 중인 일월오봉병은 이달 중 교체된다. 서둘러 봐 두는 게 좋겠다. 경회루(국보 224호) 특별 관람은 10월 말까지 주중 3회(오전 10시, 오후 2시, 4시), 주말 4회(오전 11시 추가) 진행된다. 소요 시간은 30~40분이다. 회당 최대 관람 인원은 70명(`내국인 60명, 외국인 10명)이다. 경복궁 누리집(www.royalpalace.go.kr)에서 예약제로 운영된다. 1인당 최대 4명까지 예약할 수 있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남편 여읜 고려·조선의 신분 높은 여인들 승려가 되어 ‘죄’를 씻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남편 여읜 고려·조선의 신분 높은 여인들 승려가 되어 ‘죄’를 씻다

    정업원(淨業院)은 불교국가 고려의 국책 비구니 사찰이었다. 왕가(王家)를 비롯해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남편을 여의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정업원의 전통은 이어졌다. 업(業)이란 중생이 지은 선악(善惡)과 그 응보를 가리킨다. 정업원이란 살아생전의 잘못을 깨끗하게 씻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정업원에 몸담은 여인들이 지은 가장 큰 잘못은 아마도 남편을 먼저 저세상에 보낸 죄가 아닐까 싶다.고려시대 정업원이 언제 창건됐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1164년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를 임시수도로 삼았을 때도 정업원을 지정해 비구니들이 모여 살도록 했고, 환도한 이후 다시 정업원을 운영했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하면서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세웠다. ●고려 의종 이전부터 존재… 창건 시기 불명확 국가가 운영하는 정업원이라는 이름의 비구니 사찰이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다양한 이유로 승려가 되어 절에 머무는 전통은 건국 초기부터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국의 세력가와 혼인해 결속력을 높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는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西京)에서도 지역의 유력호족 김행파의 두 딸과 각각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태조가 서경의 부인들을 돌아보지 않자 두 사람은 출가해 비구니가 됐고, 태조가 이런 사실을 알고는 서경에 대서원(大西院)과 소서원(小西院)이라는 비구니 사찰을 세워 두 여인을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들이 태조의 제19비 대서원부인과 제20비 소서원부인이다. 공민왕의 제2비 혜비(惠妃) 이씨는 고려 말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인 계림부원군 이제현과 수춘국부인 박씨의 소생이다. 공민왕의 정비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명문가의 딸을 후비로 들이자는 조정 공론에 따라 간택됐다. 혜비는 공민왕이 시해되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자 조선 태종이 부의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혜화궁주로 불리던 혜비는 당시 조선왕실 정업원의 주지 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정업원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정업원구기비는 한양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이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낙산으로 휘돌아 오르는 길 중간이다. 구기비 보호각은 청룡사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정업원구기비란 정업원 옛 터에 세운 비석이라는 뜻이다. 영조가 단종비 정순왕후를 기리고자 1771년 친필로 ‘정업원구기’ 다섯 글자를 써서 새겼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에서 살해된 뒤 정업원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생을 보낸 것을 넘어 최근에는 정순왕후 스스로 ‘정업원주지 노산군부인 송씨’(淨業院住持 魯山君夫人 宋氏)라고 쓴 문서가 발견됐다. 정순왕후가 아예 정업원으로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임진왜란 때 창덕궁 일대 전소되면서 폐사 조선 초기 정업원은 창덕궁 서북쪽 원서동에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성종실록’에는 ‘정업원은 궁궐의 담장 곁에 있는데 범패(梵唄) 소리가 궁중까지 들리니 진실로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라는 대사헌 박건의 상소가 나온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범패는 불교 의식에 쓰이는 음악이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세 차례 폐지됐다가 설치되기를 반복했다. 세종 시대인 1448년 없어졌다가 호불왕(好佛王)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세조에 의해 1457년 옛 터에 다시 세워졌다. 정업원은 연산군이 1504년 창덕궁 주변을 사냥터로 만들면서 다시 폐지됐다. 중종반정 이후 정업원 건물은 독서당으로 활용됐다. 이후 명종의 어머니로 불교의 부흥을 꾀했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1546년 다시 세워진다. ‘명종실록’에는 “인수궁을 선왕의 후궁을 위하여 수리하도록 하고, 정업원은 인수궁에 소속시켰다가 아울러 수리하여 선왕의 후궁 가운데 연고가 생기는 이를 이주시키도록 하라’는 전교가 보인다. 정업원은 임진왜란 때 창덕궁 일대가 모두 불타면서 폐사됐다. ‘선조실록’에는 “정업원 등의 옛터에 여승이라 불리는 자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고 있다”는 상소에 임금이 “정업원의 일은 비록 옛터에다 초가집을 지어 거처하는 장소로 삼고 있지만…허물고 내쫓기까지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고 답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정업원의 기능이 왜란 이후에도 그런대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러다 1666년(현종 2) 실록에는 “인수(仁壽)와 자수(慈壽)의 두 이원(尼院)을 혁파하여, 자수원 것은 재목과 기와를 성균관에 내려 학사를 수리하는 데 쓰게 하고 인수원 자재는 옮겨다가 질병가를 짓도록 했다. 질병가는 궁인 가운데 질병이 든 자를 거처하게 하는 집”이라는 내용이 있다. 인수원과 자수원이란 선왕 후궁들의 거처였던 인수궁과 자수궁의 부속 사찰을 일컫는 표현일 것이다. 정순왕후가 정업원주지를 맡고 있던 시기는 연산군이 창덕궁 옆 정업원을 철폐한 이후, 명종이 복설(復設)하기 이전이다. 도성 내부에서 쫓겨난 정업원의 비구니들이 도성 바깥 인창방에 다시 절을 세운 것이다. 인창방은 오늘날 흥인지문 밖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에 해당한다.●비구니 사찰 청룡사에 정순왕후 출가설도 정업원구기비를 둘러보고 나면 담장 너머 청룡사와의 관계가 궁금하다. 오늘날 청룡사는 정업원처럼 비구니 사찰이다. 청룡사 측은 정순왕후가 출가한 절로 한때 이름이 정업원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922년 비구니 혜원을 주석하게 했다는 역사도 전한다. 하지만 구기비를 세울 당시 주변에는 정업원도, 청룡사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왕실 부속 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은폐된 공간에서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기를 강요당했던 궁녀들의 존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고, 정업원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사실상 같은 역할을 하는 사찰이 필요했다. 정업원구기비가 세워진 곳은 이런 절을 세울 적지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청룡사는 19세기 이후 은퇴한 궁녀들이 여생을 보내는 사찰로 쓰였고, 역시 낙산 동쪽 기슭으로 구기비 언덕 너머에 있는 보문사도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잘 알려진 것처럼 정순왕후는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난 이후 인창방에 살면서 남편이 귀양 가서 죽은 영월 쪽에 바라다보이는 집 뒤편 돌산에 올라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영조는 정업원구기비를 세우면서 이 봉우리에도 동망봉(東望峰)이라고 친필로 써서 새겼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영조 어필 표석도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동망봉 봉우리는 체육공원이 됐고, 한켠에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새긴 최근의 작은 표석이 하나 보일 뿐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금천, 호암산성 가치 알린다

    서울 금천구는 사적 제343호인 호암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다음달부터 문화재청의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28일 밝혔다. 구는 앞서 지난해 9월 ‘내가 그린 생생한 호암산성’이라는 사업명의 계획서를 제출해 해당 사업 공모에 선정됐다. 문화재 전문 해설사와 함께 호암산성의 문화유산을 탐방하고, 그 안에 담긴 얘기와 정신을 배우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임진왜란 당시 호암산성에 진지를 차리고 왜구에 맞서 싸웠던 선거이 장군과 그 휘하 결사대의 항쟁을 기리는 프로그램도 준비됐다. 호암산성을 주제로 한 영상 공모전도 열린다. 프로그램별 일정과 참여 방법 등 상세한 내용은 코리아헤리티지센터 홈페이지(www.hse-korea.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 임진강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까지 선상(船上) 연회가 벌어졌다. 참석자는 경기도관찰사 홍경보와 연천현감 신유한, 양천현령 정선이었다. 이날은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1037~1101)가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660주년이었다고 한다. 우화정은 경기 연천군 중면 대사리에 있었다. 지금은 임진강댐 상류 북한 땅이다. 청천 신유한이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라면 겸재 정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 뱃놀이에서 신유한은 ‘의적벽부’(擬赤壁賦)를 지었고 겸재는 배가 우화정에서 떠나는 장면과 웅연에 닿는 모습을 각각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그림에 담았다. 여기에 창애 홍경보의 서문이 더해진 시화첩을 세 벌 만들어 나누어 가졌으니 유명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비로 변하는 것이 우화(羽化)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도교적 표현이다. 소동파의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는 ‘적벽부’ 구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겸재는 이 구절의 신선 선(仙) 자를 배 선(船) 자로 살짝 비틀어 화제(畵題)로 삼았다. 신유한(1681∼1752)은 집안 배경이 변변치 않은 탓에 늦은 나이까지 지방관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와 문장에서만큼은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1719년(숙종 45)에는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통신사 제술관은 여간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뽑힐 수 없었다. 신유한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도 통신사행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1719~1720년 일본을 여행하면서 지리·풍속·제도는 물론 자연환경까지 자세히 적었으니 곧 ‘해유록’(海遊錄)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사명대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사명대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평가를 붙인 ‘분충서난록’(奮忠難錄)을 편찬하기도 했다.●오늘날 고운사 중심은 대웅전… 과거엔 극락전 오늘은 ‘컬링의 고장’으로 떠오른 경북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로 간다. 의성군 동북쪽의 고운사는 안동과 경계를 이루는 등운산(登雲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절 이름만으로도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857~?)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친다. 신유한을 떠올린 것은 그가 평해군수 시절인 1729년(영조 5) 고운사의 사적기를 썼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기는 1918년 오시온이 지은 또 다른 사적기와 함께 이 절의 역사를 구성하는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고운사는 절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한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연꽃이 반쯤 피어난 부용반개형상의 천하명당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유교·도교에 모두 통달해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양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을 빌려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들이다’. 고운사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흩어진 60곳 남짓한 절들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 지은 산문을 지나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역시 최근 조성한 대웅전을 비롯한 30개 남짓한 전각이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고운사는 ‘사세(寺勢)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칸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지금은 교구본사로는 작은 사찰로 전락했다’고 적어 놓았으니 지금보다 훨씬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오늘날 고운사의 중심은 웅장한 대웅전 주변이라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중심은 극락전이었다. 극락전과 마주 보는 우화루 사이 양옆으로 만덕당과 종무소가 사방에서 마당을 에워싼 일종의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행한 형태다. 극락전 영역은 소박하기만 하다.●가운루, 구름 탄 누각 의미… 등운산 계곡 가로질러 종교적 의미에서 절의 중심이 어디든, 고운사의 상징은 우화루와 가운루다. 등운산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가운루는 과거 다리 역할을 했다. 가운루란 구름을 타고 앉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곧 신선의 세계다. 고운이라는 최치원의 아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화루란 이름에서는 곧바로 홍경보, 신유한, 정선의 임진강 뱃놀이가 떠오른다. 사찰의 강당은 부처가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빌려 우화루(雨花樓)라 이름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은 찻집으로 쓰는 고운사 우화루에도 내부에는 우화루(雨花樓)란 편액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우화루와 가운루는 이 절이 최치원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과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화루 명칭은 신선·부처님 가르침 동시에 상징 고운사가 신유한에게 사적기를 청한 것도 청천이 유학은 물론 불교와 도교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천은 사적기 서두에 ‘1728년 고운사 스님이 찾아와 청하는 것을 서류에 파묻힐 만큼 바빠 응하지 못했는데, 이듬해 사자(使者) 셋이 고운사 주지의 글을 다시 들고 오니 거절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고운사의 역사를 정리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사적기는 신유한이 관련 사료를 엄격히 고증해 서술했다기보다는 스님들이 알고 있는 구전(口傳) 자료를 재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청천의 사적기에는 ‘의상대사 창건’ 다음에 최치원이 등장하지 않고 곧바로 ‘고려 건국 초 운주화상 중수’로 넘어간다. 최치원의 고운사 중창설(說)과 이후 절 이름 변경설(說)은 신유한이 사적기를 쓰던 시기에는 아직 널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대사가 고운사를 의승군의 전초기지로 썼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사명대사 전문가’인 신유한은 역시 사적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운사와 최치원과의 관계로 국한하면 신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은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보고 있고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신라 후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유한의 사적기에 왜 최치원과의 관계가 서술되지 않았고 오시온의 사적기에는 왜 들어가게 됐는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극락전이 서쪽에 있는 건 서방정토 상징성 살린 것 가운루의 존재에서 보듯 고운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그 동서쪽에 전각이 있는 사찰이었다. 극락전 영역이 서쪽에 자리잡은 것은 주존(主尊)인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정토의 상징성을 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계곡 동쪽은 모니전(牟尼殿) 영역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전각이다. 흔히 이런 전각을 대웅전이라 부르지만 절의 큰법당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대웅전은 1992년 가운루 상류의 계곡을 메우고 모니전 영역을 해체해 세운 것이다. 모니전 옛 건물은 대웅전 동쪽의 삼층석탑 위로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나한전이다. 조촐함에서 닮은 나한전과 삼층석탑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인 양 자연스러운 조화를 보여 준다. 일주문 밖으로는 화엄승가대학원이 보인다. 산내 암자인 운수암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신유한은 운수암기(雲水庵記)도 남겼으니 이래저래 고운사와는 인연이 깊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전북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방향을 잡아 시내를 막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타난다. 만복사가 있던 자리다. ‘춘향가’의 몇몇 고전소설 판본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관아로 행차하기에 앞서 만복사를 찾아 노승들이 춘향을 위해 재를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은 김연수제 판소리 ‘춘향가’에도 있다. 춘향을 월매가 만복사에 시주하고 불공을 드린 공덕으로 낳은 자식으로 그리고 있다.잘 알려진 대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금오신화’의 한 편으로 ‘만복사저포기’를 남겼다. 저포(樗浦)는 윷놀이다. 양생(梁生)은 부처님과 내기를 해서 이긴 다음 아름다운 처자를 만나 이승의 3년에 해당하는 꿈같은 사흘을 지내고는 헤어진다. 이 처자는 왜구에 죽은 혼령으로, 이후 양생도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줄거리다.소설 속 여주인공이 부처님에게 바친 축원문에는 당시 사정이 담겨 있다. ‘지난번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지금 만복사에 가면 텅 빈 마당에서 높이 1.6m의 당당한 석제 불좌(佛座)를 만날 수 있다. 소설에서도 양생이 불좌 뒤에 숨어 아름다운 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 불좌가 아닐까 싶다. 매월당과 시대를 초월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최척전’을 지은 현곡 조위한(1567∼1649)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휘하에서 종군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최척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성 옥영의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정유재란 당시 남원이 왜군에 함락됨에 따라 가족이 붙들려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과 기적적인 재회를 그렸다. 소설 속에서 최척은 만복사에서 가까운 동네에 산다. ‘춘향전’이 조선 후기 남원의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면 ‘만복사저포기’와 ‘최척전’은 각각 조선 초기와 중기 왜적의 침입에 따른 살육과 파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원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 기슭이다. 왜구의 세력은 단순한 해적 수준을 크게 넘어섰다. ‘만복사저포기’가 묘사한 대로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극성을 부렸다. 특히 14세기 후반기 피해가 가장 커서 고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계는 고려시대 왜구의 발생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누고 있다. 1223년 현재의 김해인 금주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1265년까지 10차례 이상 침입했는데, 대부분 선박 2~3척 규모였다. 왜구는 1350년부터 연안뿐 아니라 내륙에도 출몰한다. 해안 조창에서 걷은 세곡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선이 공격 목표가 되자, 고려가 세곡 운송의 상당 부분을 육운(陸運)으로 전환한 것이 이유의 하나가 됐다. 대형 선단을 이룬 왜구는 개경이 지척인 강화 교동도에도 출몰했고, 조정은 천도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는 태조가 즉위한 뒤 5년 동안에만 53차례나 침입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시대 왜구의 남원 침입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에 배를 매고 하삼도에 들어와 연해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선은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신우’라 했다. 왜구가 충청·전라·경상도를 휩쓴 참상은 ‘만복사저포기’와 매우 닮아 있다. 당시 고려는 금강 하구 진포에 정박한 왜구의 선단을 최무선 장군의 화포로 모두 불사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한다. 이어 남원으로 몰려들어 운봉 인월역 황산에 진을 친 왜구를 당시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섬멸한 것이 황산대첩이다. 황산대첩비는 1577년(선조 10) 이 싸움의 현장에 세운 것이다. 만복사는 남원 시내 서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황산대첩비를 찾으려면 자동차를 타고 시내에서 동쪽으로 20분쯤 달려야 한다. 이성계가 어린 두목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끈 왜구를 무찌른 현장이다. 당시 지명 인월(印月)은 이후 인월(引月)로 바뀌었다. 부처의 교화가 세상 곳곳에 비친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따온 듯한 불교적 이름이 황산대첩 당시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밤 보름달을 끌어올려 왜구를 물리쳤다는 설화 속 의미로 대체됐다.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겪는다. 조선총독부는 ‘학술상 사료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이라면서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라고 했다. 결국 1945년 1월 폭파됐고, 지금의 비석은 1957년 복원한 것이다. 그러니 대첩비는 받침돌과 지붕돌만 옛것이다. 하지만 파비각(破碑閣)에 비석 조각이 남아 있으니 역사적 의미는 훨씬 커졌다. 1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다. 이성계는 대첩 이듬해 함께 싸운 원수와 종사관들의 이름을 이곳 바위에 새겼다. 일제는 이 글씨도 정으로 쪼아내 지금은 알아볼 수가 없다. 황산에 승전의 역사가 있다면 남원 시내에는 패전의 역사가 곳곳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곡창 호남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를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한 왜군은 정유재란을 벌이면서 전라도를 먼저 점령하고 북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끈 왜군 5만 6000명은 1597년 8월 13일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성은 전라 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000명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남원 백성들까지 모두 1만명이 합심해 싸웠지만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 왜란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하고 1612년(광해군 4) 사당을 세웠다. 지금의 만인의총은 옛 남원역 근처에 있던 것을 1964년 옮긴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남원성의 흔적은 시내에서 만인의총으로 가는 중간에 일부가 남아 있다. 옛 남원읍성의 서북쪽 모서리에 해당한다. 시내 남문로 골목 안에 있는 관왕묘도 왜란의 흔적이다. 남원싸움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은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1599년 자신들의 수호신인 관우의 사당을 지었다. 성 동문 밖에 있던 것을 174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관왕묘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담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안평대군 병풍 등 168점 국립중앙도서관에 오다

    안평대군 병풍 등 168점 국립중앙도서관에 오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고문헌 연구가 동혼재(東昏齋) 석한남씨에게서 지난 1월 26일 고문헌과 옛 글씨 133종, 168점을 5년 동안 기탁받았다고 12일 밝혔다.유물 가운데 ‘안평대군행초서십폭병풍’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144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최항의 ‘불설무량수경’도 최초 공개된다. 세조 임금이 사망하고, 그다음 해인 1469년(예종1년) 봄 임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려고 썼다. 이 밖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선 동래부사 송상현이 보유한 ‘허백당유집’, 조선 초기 학자 조말손이 소장했던 금속활자본 ‘사기’도 포함됐다고 도서관은 덧붙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오는 10월 2일부터 11월 25일까지 본관 1층 전시실에서 동혼재 기탁 기념 특별전 ‘소장인(所藏印)으로 만나 본 옛 문헌의 세계(가제)’를 연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울산 울주군, 동아시아 국가와 도자기·옹기 문화교류 추진

    울산 울주군이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열리는 울산옹기축제와 지역 옹기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동아시아 국가 간 교류를 추진한다. 11일 울주군에 따르면 군은 이를 위해 최근 옹기협회 관계자 등과 일본 사가현 다케오시를 방문해 지역 공무원·장인들과 간담회를 하고 관련 업무를 협의했다. 간담회에서 울주군과 다케오시는 옹기문화 교류사업 추진에 대해 깊은 의견을 나눴다. 또 본격 교류에 앞서 다케오시 측이 울산옹기축제를 방문해 강연과 시연 등 교류 행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옹기마을 옹기박물관이 마련하는 동아시아 도기 특별전에 다케오시 도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다. 사가현은 일본 규슈 지방의 도시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옹기장인과 도공들이 정착, 옹기와 도자기 문화가 꽃을 피웠다. 울주군 관계자는 “올해 옹기축제 기간 열리는 국제교류 행사 이후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옹기문화 교류를 본격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18회째를 맞는 울산옹기축제는 5월 4일부터 7일까지 울산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열린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구한말 의병서 전통소금까지…향토 콘텐츠로 잇단 탈바꿈

    구한말 의병에서 전통 소금, 한양으로 통하던 조선 시대 옛길까지 지방에 산재한 역사 및 문화 자원들이 특색 있는 ‘향토 콘텐츠’로 탈바꿈하고 있다. 7일 한국문화원연합회에 따르면 광주시 광산문화원은 ‘어등산 의병’을 향토 콘텐츠로 재조명하고 있다. 어등산은 구한말 항일 항쟁의 최대 격전지로, 호남 의병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을사늑약,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시기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체 교전 가운데 47.3%가 호남에서 벌어졌으며 교전 의병 수도 전체 의병의 61%에 달했다. 광산문화원이 향토 콘텐츠로 주목한 존재가 바로 ‘어등산 의병’. 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실사 기법으로 제작하고 지역의 역사문화 체험장으로 만들었다. 충남 태안문화원은 전국 유일의 전통 소금 ‘자염’ 등을 디지털 영상 콘텐츠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인천문화원은 강화와 옹진에 산재한 고려 가마터와 중국 사신을 위한 객관, 원의 황후가 된 기황후 이야기를 향토 콘텐츠로 제작했다. 조선 시대의 옛길도 문화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경남 밀양문화원은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자 임진왜란 요새였던 영남대로의 각 구간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와 민초들의 삶을 조명한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강물과 함께 사라지다 ? 진주성 촉석루(矗石樓)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강물과 함께 사라지다 ? 진주성 촉석루(矗石樓)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중략)” (변영로의 시, ‘논개’ 중 일부) 술이라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던 격정의 낭만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의 작품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생명을 지키고 있는 시가 바로 ‘논개’(1922)다. 1920년대는 말 그대로 ‘조선’이라는 두 글자만 보아도 의기(義氣)가 꺾여버린 시절이었다. 이 때 젊은 변영로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倭將)의 허리춤을 움켜쥐고 진주 남강(南江)의 바닥으로 끌고 내려간 한 여인의 모습을 시로 당당히 그려내었다. 논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진주성 촉석루(矗石樓)로 가 보자. 논개(論介, 1574~1593) 혹은 주논개(朱論介)의 신분을 두고 아직도 말이 많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다산시문집’의 표현대로 의로운 기생, 즉 ‘의기(義妓)라는 주장도 있는 반면, 전라북도 장수지역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현재는 후자의 기록을 증거삼아 논개의 절개를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당시 논개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이끄는 도중 이듬해인 1593년, 조정으로부터 경상 우도(慶尙 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성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싸울 시간도 없이 곧바로 진주성은 함락되고 그는 순국한다. 이에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리의 연회를 벌일 때, 한 일본 장수와 함께 진주 남강으로 투신, 순절(殉節)하였다. 그녀가 몸을 던진 바윗돌을 두고 진주 사람들은 의암(義巖)이라고 지금도 부른다. 바로 논개의 항일 정신이 살아있는 촉석루와 의암이 있는 곳이 진주성(晋州城)이다.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쌓은 석성(둘레 1,760m) 진주성은 고려 우왕5년 (1379)에 기존 토성을 석성으로 수축한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한 곳이기도 하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진주성의 여러 성곽 및 사당들은 한국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한 것들이 많다. 이중 논개의 자취가 남아 있는 촉석루(矗石樓)도 이 시기에 다시 지어졌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의 원래 누각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주성에는 촉석루와 더불어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義妓祠), 왜장을 안고 투신한 바위인 의암(義巖), 영남포정사 문루, 북장대, 서장대, 국립진주박물관, 창렬사 등 한나절 넉넉하게 다가오는 봄바람을 맞을 공간이 많아 진주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진주성 촉석루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진주에 가 볼 일이 있다면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3. 가는 방법은?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대표전화: 055)749-5171 - 진주성에서 진주역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내 인사광장에서 126번 127번 승차 4. 감탄하는 점은? - 촉석루 이외에도 관람객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넓디 넓은 잔디밭.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진주 시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식 장소. 6. 꼭 봐야할 장소는? - 촉석루, 의암, 국립박물관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진주비빔밥 ’천황식당‘, 찜닭 ’진주통닭‘, ’육거리곰탕‘, 비빔냉면 ’하연옥‘, ’황포냉면‘, ’삼삼밀면‘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castle.jinju.go.kr/main/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진양호, 경상남도 수목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진주성은 진주 시내에 위치한 넓은 공원이다. 가족 단위로 나들이 가기에는 안성 맞춤인 곳.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봄은 기차 타고 먼저 온다

    봄은 기차 타고 먼저 온다

    바람의 끝이 유순해졌다. 긴 겨울이 끝나고 있는 거다. 도회지 사람들이 봄이 오는 산과 바다를 가장 빨리 만나는 방법은 기차 여행이다. 한국관광공사에서 3월에 가볼 만한 곳을 추천했다. 기차와 도시 철도를 이용한 봄 여행이 테마다. 이번 달부터는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가볼 만한 곳이 추가된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사진 한국관광공사공항철도 - 장봉도·무의도 한나절 섬 여행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로 떠나는 인천 무의도와 장봉도는 한나절 여행에 제격이다. 공항철도는 서울역~인천공항1터미널역을 논스톱으로 운행하는 직통열차(43분 소요)와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열차(약 60분 소요)가 있다. 인천공항에서 무의도까지는 자기부상열차로 가는 게 편리하다. 인천공항1터미널역 교통센터 2층에서 용유역까지 15분 간격으로 무료 운행한다. 장봉도는 무의도보다 배 타는 시간이 길어 한나절이 빠듯하다. 공항철도 일반열차 운서역에서 버스로 갈아타면 영종도 삼목선착장에 도착한다. 삼목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고 신도를 거쳐 40분가량 들어가면 장봉도에 이른다. 중구 관광진흥실 (032)760-6492, 옹진군 관광문화과 (032)899-2211~4.바다열차 - 동해의 푸르름을 상영합니다 기차 안의 창문은 아름다운 자연을 상영하는 영화관 스크린과 같다. 접근하기 힘든 오지의 비경을 편하게 즐길 수 있어 매력적이다. 바다열차는 강릉 정동진역에서 출발해 추암역 등을 거쳐 삼척역까지 운행한다. 주말에는 매진되는 경우가 많아 예매하는 게 좋다. 왕복 3시간 10분~3시간 30분(안인역 미경유 시 약 2시간 10분) 걸린다. 정선아리랑열차는 청량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가는 관광 열차다. 흔히 ‘A-트레인’이라 불린다. 낮 12시 30분쯤 정선역 도착, 출발은 오후 5시 37분이다. 이 시간 동안 정선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다. 레일바이크를 타려면 종착역인 아우라지역까지 가야 한다. 전망은 열차 끝자락의 1호차가 가장 좋다. 바다열차 (033)573-5474.대전지하철 - 벽화마을 구경에 족욕까지 대전도시철도는 대전·충청 지역의 유일한 지하철이다. 벽화거리 새마을동네가 있는 현충원역, 무료 족욕체험장이 자리한 유성온천역, 대전예술의전당과 이응노미술관, 한밭수목원이 모인 정부청사역 등 대전 여행의 핵심 명소에 지하철이 지나간다. 대전역에서 중앙로역, 중구청역을 잇는 1.1㎞ 구간은 원도심의 볼거리를 책임진다. 대전중앙시장, 으능정이문화의거리, 대전스카이로드, 성심당,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등록문화재 18호)으로 향하는 중앙로지하상가 출구를 외워두면 하루 여행 코스가 완벽해진다. 소제동 벽화거리도 찾을 만하다. 대전역에서 5분 거리다. 대전시 관광진흥과 (042)270-3982.광주지하철 - 송정역시장부터 양림동까지 광주는 주요 명소들이 지하철로 연결돼 있다. 게다가 수도권에서 KTX로 두 시간 안쪽에 닿을 수 있어 차 없이 여행하기 편하다. 지하철 광주송정역 인근에 광주의 핫플레이스인 1913송정역시장이 있다. 문화 예술에 관심 있는 이라면 광주극장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필수 코스다. 광주극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상영관이 하나인 극장이다. 지금도 수작업으로 입간판을 제작하고 있다. 광주극장은 금남로4가역,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문화전당역에서 가깝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은 남광주역이 가깝다. 양림동은 100여년 전 세워진 근대건축물과 전통 한옥이 어우러진 멋스러운 동네다. 맞은편은 5·18자유공원이다. 광주시 관광진흥과 (062)613-3661.부산 동해선 - 도심서 전철로 바다까지 쭉 동해선은 부산 부전역에서 일광역까지 운행하는 복선전철이다. 복잡한 부산 도심을 거쳐 37분이면 일광역에 도착한다. 게다가 복선전철이라 요금도 싸다. 일광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일광해수욕장이고, 기장역에서 버스를 타면 죽성드림성당과 대변항에 닿는다. 죽성드림성당은 드라마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주변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기장죽성리왜성이 있다. 바다 풍광을 즐기는 전망대로 맞춤하다. 오시리아역에서는 국립부산과학관이 가깝다. 벡스코역 인근의 수영사적공원은 역사를 만나는 공간이다. 철도 여행만으로 아쉬움이 남는다면 송도해상케이블카를 타보는 것도 좋겠다. 높이 86m에서 바다 위를 가로질러 짜릿하다. 부산관광공사 (051)780-2168.동해선 - 포항~영덕 34분, 바다를 달리다 동해선은 지난 1월 26일 경북 포항과 영덕 구간에서 부분 개통했다. 포항에서 영덕까지 34분이면 닿는다. 강원 삼척까지 전 구간이 연결되는 시점은 2020년으로 예정됐다. 동해선 기차는 외관이 앙증맞다. 세 량이 전부인 기차 안팎은 분홍색 복사꽃과 대게 등 영덕과 포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알록달록 꾸며졌다. 새로 생긴 네 개 역도 각기 매력이 있다. 역에서 5분쯤 걸어가면 넘실거리는 파도를 만나는 월포역, 장사 상륙작전이 펼쳐진 장사역, 대게가 손짓하는 강구역, 이국적인 풍광이 멋진 영덕풍력발전단지와 가슴 시원해지는 죽도산전망대, 기와지붕과 흙담이 정겨운 괴시마을로 이어주는 영덕역 등 설렘 가득한 바다 역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영덕군 문화관광과 (054)730-6533.DMZ - 네시간이면 북녘… 외국인 인기 짱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가라서 가능한 여행이 있다. 비무장지대(DMZ) 열차를 타고 DMZ에 다녀오는 안보 관광이다. 내국인은 신분증, 외국인은 여권을 준비한다. 출발지는 용산역이다. 수~일요일 오전 10시 8분 용산역에서 출발해 DMZ를 둘러보고, 오후 5시 54분 용산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북녘땅을 코앞에서 마주할 수 있다. 서울역에서도 탑승할 수 있다. 도라산역은 남쪽의 마지막 역이다. 이곳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통일촌, 도라전망대, 제3땅굴을 차례로 돌아본다. 용산역 주변에도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서울역 인근에서는 서울로7017, 남대문시장 등이 꼽힌다. 레츠코레일 1544-7788(한국어), 1599-7777(영어).
  • 남해~하동 새 연륙교 명칭 ‘노량대교’로 결정

    남해~하동 새 연륙교 명칭 ‘노량대교’로 결정

    경남 남해군과 하동군을 잇는 새 교량 명칭이 ‘노량대교’로 결정되자 남해군이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준비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노량대교는 하동군이 제안한 이름이다. 남해군은 ‘제2남해대교’를 주장했다. 남해군을 비롯해 남해지역 민·관으로 구성된 ‘제2남해대교 명칭관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15일 남해대교 옆에 건설되는 새 교량 명칭을 노량대교로 확정한 국가지명위원회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동대책위는 “국가지명위가 기본 원칙이나 기준이 없이 명칭을 결정하다보니 지역끼리 의견이 맞서는 상황에서 한쪽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하는 등 오히려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동대책위는 남해군이 주장한 제2남해대교 명칭을 관철하기 위해 빠른 시일안에 국가지명위에 이의신청을 하고 행정소송을 내기로 지난 12일 긴급대책회의에서 의견을 모았다. 공동대책위는 설연휴가 지난 뒤 오는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지명위 결정에 불복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앞으로 계획 등을 밝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경남도에 따르면 국가지명위는 ‘지난 9일 열린 회의에서 남해-하동 새 연륙교 명칭을 심의해 노량대교로 결정했다’는 공문을 도로 보냈다. 국가지명위는 회의에서 남해·하동 두 부군수로부터 두 군에서 주장하는 명칭 당위성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표결을 해 투표결과(노량대교 12표, 제2남해대교 6표)에 따라 새 교량 명칭을 노량대교로 결정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은 국가지명위에서 노량대교 명칭이 결정됨에 따라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명칭 결정을 고시해 남해-하동사이 새 연륙교 명칭은 노량대교로 최종 확정됐다. 남해군 공동대책위는 “국가지명위 결정은 교량명칭을 정할 때 섬 지명을 따라야 한다는 기준을 따르지 않는 등 문제가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동군은 새 교량이 건설되는 하동군 금남면과 남해군 설천면 두 곳에 모두 ‘노량리’라는 공통된 지명이 있고 다리 아래 바다 해협도 ‘노량해협’이며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이순신 장군 마지막 해전지라는 역사성 등을 감안할 때 노량대교가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며 국가지명위 결정을 환영했다. 경남도도 국토지명과 관련한 최고 의결기관에서 결정됐고 결정 절차에도 문제가 없으므로 남해군은 아쉬움이 있더라도 노량대교 명칭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은 1973년 6월 건설한 남해대교 교통·물동량이 늘자 2522억원을 들여 국도 19호선 3.1㎞ 확장공사와 함께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교량을 남해대교 옆에 건설하고 있다. 새 교량은 당초 오는 6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공사기간이 3개월 늦어져 9월 완공 예정이다. 남해군은 새 교량은 2009년 설계때 부터 가칭 제2남해대교로 불렸고, 남해군민 생명줄이라는 이유로 제2남해대교를 주장했다. 하동군은 새 교량 아래를 흐르는 바다 명칭이 노량해협이고 이순신 장군 승전 의미 등을 담아 노량대교를 주장했다. 경남도지명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말부터 12월 사이 3차례 새 교량 명칭을 심의했으나 두 지자체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국가지명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임진왜란으로 소실 전 경복궁 원형 담은 그림 복원

    임진왜란으로 소실 전 경복궁 원형 담은 그림 복원

    서울시 서울역사박물관이 18세기 말~19세기 후반 사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도’를 복원해 7일 최초 공개했다.경복궁 내 건물의 배치 모습을 그린 ‘경복궁도’는 현재까지 10여점이 발견됐지만, 족자 형태로 보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족자의 크기는 세로 127.6㎝, 가로 71.3㎝다. 특히 이번에 복원된 ‘경복궁도’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기 전의 경복궁 모습이 담겨 있다. 소실됐던 경복궁은 270여년 만에 고종 시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다. 박물관 측은 이 ‘경복궁도’가 경복궁 중건에 앞서 임진왜란 이전의 모습을 고증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문소전(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나 충순당(후원에 있던 전각)의 위치가 담겨 있지만, 경복궁 중건 이후 새로 세워진 건물 등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16년 이 ‘경복궁도’를 공개 구입했으며 1년여 동안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제작 당시의 원형으로 복원했다. 또 보존 처리 과정에서 배접지(그림을 보강하기 위해 뒷면에 붙이는 종이)로 사용된 고문서 5점(과거 답안지)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이보게, 귀티나게 쉬어 보시게

    이보게, 귀티나게 쉬어 보시게

    경남 의령을 찾아갑니다. 재물복을 나눠준다는 솥바위가 목적지입니다. 원래는 홍의장군 곽재우의 무용담이 깃든 전승지였지요. 한데 요즘은 ‘부자 되는 바위’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의령엔 볼거리가 꽤 많습니다. 힘 하나 안 들이고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한우산, 기골이 장대한 봉황대 등의 자연 풍경에 옛 향기 그윽한 고택들이 수없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아마 1박2일 일정으로도 모자랄 겁니다.의령을 돌다 보면 인상적인 논두렁을 흔히 보게 된다. 돌로 촘촘하게 두럭을 쌓아 논배미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흙을 쌓아 만든 보통의 논두렁과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다. 농가의 담장이며 논두렁들이 죄다 이런 모습이다. 돌담 두른 시골 마을이 어디 여기뿐일까만, 의령은 유독 그 수가 많다. 낡은 마을들을 보자면 언뜻 발전이 더디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한데 그보다는 옛것을 완고하게 지켜내고 있다는 게 맞을 듯하다.솥바위부터 찾아간다.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솥바위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다. 얄팍하다거나 미신에 현혹됐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사진 찍어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올려 두면 미구에 솥바위의 기운이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솥바위는 의령과 함안이 경계를 이룬 남강변에 있다. 한자로는 정암(鼎岩)이라 쓴다. 이름 그대로 솥(鼎)처럼 생긴 바위(岩)다. 바위 절반은 수면 위로 노출됐고, 절반은 수면 아래 잠겼다. 물 아래쪽에도 세 발 달린 솥처럼 세 개의 바위가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솥은 예부터 풍요를 뜻했다. 솥바위에도 이와 관련된 옛이야기가 전해 온다. 반경 20리(8㎞) 이내에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솥의 다리가 뻗은 세 방향에서 큰 부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솥바위에서 세 방향에 해당되는 의령의 정곡면 중교리에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함안 군북면 동촌리에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 진주 지수면 승산리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과 GS그룹 허정구 회장 등의 생가가 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창업주 4명이 솥바위 인근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물론 후대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한데 만든 이야기치고는 퍽 기발하고 정교하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 치부하기보다 ‘풍수지리적 기운’에 더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솥바위 일대는 예부터 정암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2000여 왜적을 섬멸한 전승지였다. 당시 의병을 이끈 곽재우 장군은 밀려드는 왜적을 맞아 의령 곳곳에 전승지를 남겼다. 솥바위는 그중 하나다.솥바위에서 남강을 따라 8㎞쯤 거슬러 오르면 정곡면 중곡리다. 이 마을에 삼성그룹을 일궈 낸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생가가 있다. 이 회장의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생가는 뜻밖에 소박하다. ‘고대광실’일 것이란 선입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다. 생가는 안채와 바깥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둔 광채 등으로 구성됐다. 나란히 선 안채와 바깥채의 자태가 단정하다. 어디 한구석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초가집의 소박함과 기와집의 엄정함을 동시에 갖춘 듯하다. 생가 주변으로 ‘역사·문화 부자길’이 조성돼 있다. 거리는 14.5㎞다. 의병 전적지, 탑바위, 성황리 소나무(천연기념물 359호) 등을 돌아본다.호사가들은 의령 9경 가운데 솥바위(5경)와 탑바위(6경), 봉황대(3경)의 코끼리 바위를 따로 묶어 ‘3대 기도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탑바위는 정곡면 호미산의 수직절벽 위에 얹혀 있는 바위다. 얇고 편평한 돌판이 탑처럼 층층이 쌓인 형태다. 높이는 8m 정도다. 탑바위 바로 아래는 비구니 스님들의 기도처인 불양암이다.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른다. 강 너머는 들녘이다. 땅은 깃들어 사는 사람 모두에게 요족한 삶을 안겨 줄 만큼 넓다. 궁류면의 봉황대는 거대한 석벽을 일컫는다. 판석처럼 주름 접힌 바위들의 자태가 우람하다. 바위 아래는 일붕사다. 동굴 속에 지은 대웅전으로 이름난 절집이다.부자 여정의 마지막 코스는 한우산이다. 한자로는 찰 한(寒)에 비 우(雨) 자를 쓴다. ‘차가운 비의 산’이란 뜻이다. 한우산은 정상 언저리까지 도로가 나 있다. 이 덕에 승용차로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도로는 이리저리 굽었다. 그 모양이 색소폰을 닮아 ‘색소폰 도로’라 불리기도 한다. 한우산 정상은 파노라마 전망대다. 지리산 천황봉과 합천 황매산 등 인근의 명산들이 360도로 펼쳐진다. 정상 아래 산사면에 설화원이 있다. 도깨비 전설을 토대로 조성한 짧은 산책로다. 도깨비 등 여러 형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부자 여정의 마지막 주인공은 설화원 끝자락의 ‘망개떡 나눠 주는 도깨비’다. 망개떡은 의령 특산품으로, 망개나무 잎으로 싼 떡을 일컫는다.부자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깨비가 들고 있는 망개떡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다. 관광객이 망개떡을 만질 때마다 ‘돈 나와라, 뚝딱!’이라 외쳤으면 좋으련만, 이 도깨비는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 당최 방망이 휘두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설화원 일대는 철쭉 군락지다. 봄이 되면 산 사면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 터다. 그 장면만 눈에 담아도 부자 소리 들을 만하겠다. 의령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고향이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격전을 치렀던 현장들이 의령 곳곳에 널려 있다. 생가는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마을에 들면 ‘현고수’(懸鼓樹)가 객을 맞는다.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이다. 곽재우 장군이 1592년 첫 의병을 일으킬 때 이 나무에 북을 매달고 거병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의 수령은 ‘고작’ 550년 안팎이지만 담긴 사연이 깊어 천연기념물(493호)로 지정됐다. 현고수 바로 뒤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 터다. 한국전쟁 당시 전파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현재 생가 터에 세워진 건물은 다른 성씨를 가진 이의 소유다. 쇠락한 건물을 보고 있자면 씁쓸한 느낌이 든다. 나라를 구한 영웅의 뒤안길을 보는 듯해서다. 당시 곽재우 장군은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임금이 논공행상에서조차 무능했던 셈이다. 의령읍내 끝자락에 있는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그를 도운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이채로운 디자인의 충의각, 500년을 살아낸 모과나무 등 볼거리가 많다. 구름다리도 의령의 명물이다. 세 개의 출렁다리가 중심부로 수렴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세 발 달린 솥바위를 형상화한 듯하다. 출렁대는 다리 위를 걷다 보면 오금이 저릴 만큼 짜릿하다. 글 사진 의령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55 →가는 길: 솥바위는 의령 남쪽에 있다. 남해고속도로 군북나들목이 가깝다. 솥바위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 혹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는 게 수월하다. 한우산 등 의령 서쪽부터 짚어 내려가겠다면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편하다. 한우산은 해넘이나 해돋이 때에 맞춰 찾으면 좋다.→맛집: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소바다. 소바는 메밀을 주재료로 만든 면을 일컫는다. 일본식 표현을 차용해 쓰고 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한다. 의령 소바는 다소 슴슴하다. 맵짠 여느 경상도 음식과 결이 다르다. 다만 고명으로 얹은 장조림 고기는 짭조름하다. 이 덕에 간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다. 보다 차진 맛을 원한다면 고춧가루 풀고 간장을 한 바퀴 돌리면 된다. 다시식당(573-2514), 화정식당(572-1122), 체인 식당의 본점인 의령소바(572-0885) 등이 알려졌다. 소고기국밥도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맛은 평이한 편이다. 중동식당(572-3377)과 마주한 종로식당(573-2785), 수정식당(573-2465) 등이 알려졌다. 주전부리의 최고봉은 망개떡이다. 차진 떡과 달달한 팥소가 기막히게 어울린다. 현지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곽재우 장군의 부인이 전장에 나가는 장령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비롯된 음식이란 점에서 진주비빔밥과 비슷하다. 전통시장 안쪽에 다수의 망개떡집이 있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금산→전주 침범 왜군 두 차례 격전… ‘곡창 ’ 호남 지킨 관군ㆍ의병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금산→전주 침범 왜군 두 차례 격전… ‘곡창 ’ 호남 지킨 관군ㆍ의병들

    큰 대(大) 자에 이길 첩(捷) 자, 대첩이란 곧 크게 이긴 싸움을 이른다. 흔히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면 1592년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같은 해 10월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그리고 이듬해 2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을 들곤 한다. 꺼져 가던 목숨을 가까스로 이어 가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 발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가 지휘하는 왜군 1만 8700명을 태운 배는 전날 밤 이미 부산진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 왜군은 이튿날 안개가 걷히자 상륙해 부산진성을 포위했고 첨사 정발이 이끄는 500명 남짓 조선군은 전원이 장렬히 전사한다. 이후 왜군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양도성을 향해 파죽지세로 북상한다.북변 방비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립 장군이 갑작스럽게 삼도순변사에 임명된 이후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 그로부터 보름도 지나지 않은 4월 28일이다. 탄금대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은 우왕좌왕했고, 결국 선조는 한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치 승리로 권율 전라도 순찰사 올라 행주대첩 한편으로 왜군은 곡창 호남으로 진출하려 안간힘을 썼는데 당연히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왜군이 장악한 부산진-한양 라인에서 호남으로 가는 방법은 수군(水軍)이 해로를 장악하거나, 보군(步軍)이 진주를 공략해 서진(西進)하거나, 지금은 충청도 땅이 된 전라도 금산에서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로 가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왜 수군은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대패해 기세가 꺾였고, 보군은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에 가로막혀 쉽사리 서쪽을 넘보지 못했다. 결국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 병력으로 하여금 이치를 공략하게 했다. 배치재라고도 하는 이치는 오늘날 충청남도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의 경계에 해당한다. 해발 340m의 고갯마루에 서면 완주 쪽으로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대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골짜기에 배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광주목사 권율은 7월 8일 1500명 남짓한 군사를 지휘해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복병전으로 왜군을 격퇴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관군(官軍)이 거둔 첫 번째 대승이었다. 권율은 이치의 승리로 전라도 순찰사에 올랐고, 같은 직함으로 이듬해 행주대첩의 명장이 된다. 권율의 휘하에는 화순 동복현감 황진도 있었다. 세종시대 명재상 황희의 5대손이라고 한다. 황진 역시 이치 승리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에 올랐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한 그는 경기도 죽산 전투 이후 패퇴하는 적을 경상도 상주까지 추격해 연전연승하기도 했다. 그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막아내다 머리에 조총을 맞고 전사했다. ‘선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해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장 위대기·공시억 등과 재를 점거해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해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해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수들을 독려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은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부친 순국 소식에 장ㆍ차남 참전 나섰다 모두 전사 당시 왜군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도 의병에게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치 전투 당시 권율 장군의 휘하에도 적지 않은 의병이 가세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월 3일 관군과 합동으로 금산성을 공격하다 순국한다. 옥천의 조헌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 18일 금산성을 공격했지만 모두 순절하고 만다.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이들의 무덤이다. 전라도 익산 유생 이보와 소행진은 금산에서 들려온 조헌 의병의 순절 소식에 400명 남짓한 의병을 규합한다. 이들은 금산으로 향하다 8월 27일 이치에서 왜군과 맞닥뜨렸다. 400명의 무명 의병은 급조한 활, 낫과 쇠스랑 같은 농기구를 들고 왜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모두 순국했다. 소행진의 큰아들 소계는 아버지 장사를 마치자 금산으로 달려갔고, 작은아들 소동도 형의 순국 소식에 금산으로 달려가 전사했다. 소동의 부인 민씨는 강화 친정에서 남편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권율 대첩비 1940년 왜경이 파괴… 1964년 재건 이치에 가려면 대전통영고속도로는 금산, 호남고속도로는 논산이나 전주를 경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치 전투라는 하나의 역사를 기리건만 유적은 ‘금산 이치대첩지’와 ‘완주 이치전적지’로 나뉘어 있다. 이치대첩지는 충남 기념물 154호로, 이치전적지는 전북 기념물 26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금산이 1963년 충남에 편입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굳어졌다. 완주 전적지는 이치 정상에 있다. 길가에 ‘이치전적지’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안쪽으로 ‘무민공(武愍公) 황진장군 이현(梨峴)대첩비’가 보인다. 이치전적지 비석은 1993년, 이현대첩비는 2006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첩비 뒤편에 숨어 있는 ‘이치대첩유허비’(遺墟碑)에서는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조금은 느껴진다. 전적지 옆에는 휴게소가 있다. 탐방객은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게 마련인데, 전적지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 휴게소와 주차장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으로 행정구역이 갈린다. 이곳에서 금산쪽으로 1.5㎞쯤 달리면 대첩지가 나타난다. ‘이치대첩문’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권율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와 대첩비각이 보인다.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都元帥權公梨峙大捷碑)는 당초 금곡사(金谷祠)와 함께 1902년 건립됐다. 하지만 1940년 일본 경찰이 비석과 사당을 모두 파괴했고, 지금의 비석은 1964년 다시 세운 것이다.●무명 의병 희생 외면하다 2016년 ‘반성 비석 ’ 세워 이치전적지와 이치대첩지는 행정구역뿐 아니라 기리는 주체도 갈려 있다. 전적지는 황진의 기념물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대첩지는 완벽하게 권율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념물이 승리한 관군의 역사만 기억할 뿐 무명 의병의 희생은 외면하고 있다는 반성도 뒤따랐다. 2016년 전적지에 400명의 무명 의병을 기리는 작은 비석이 세워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름하여 ‘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다. 이런 글귀도 보인다. ‘관군의 주력부대가 승리를 거둔 7월 전투는 세상에 자세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병이 주도한 8월 전투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 묻혀지고 있다. 그것이 아쉬워 이 비를 세워 바로 알리고자 한다.’ 글ㆍ사진 dcsuh@seoul.co.kr
  • 의병장 김면 ‘2월의 호국인물’

    의병장 김면 ‘2월의 호국인물’

    전쟁기념관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하며 국난 극복에 앞장선 의병장 김면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54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김면은 1592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고령 일대에서 20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해 대적했다. 그의 의병군은 개산포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왜군에 타격을 가했다. 이듬해 금산에서 충청·전라지역 의병군과 힘을 합쳐 왜군과 결전을 준비하던 김면은 병에 걸려 같은 해 3월 세상을 떠났다.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기자 도읍지는 漢 낙랑군 조선현… 평양은 후대 상상의 산물일 뿐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기자 도읍지는 漢 낙랑군 조선현… 평양은 후대 상상의 산물일 뿐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400여년 전의 17세기 평양으로 돌아간다면 기자(箕子)가 평양에 왔었다고 믿기 십상일 것이다. 평양에 기자의 유적·유물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기전 12세기경의 인물인 기자가 평양으로 왔다는 인식은 사후 2400여년 후인 서기 12세기부터, 기자의 평양 유적은 서기 14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에는 유적이 만들어진 지 이미 40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진위 구별이 쉽지 않았다. 기자가 평양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을 믿고 싶었던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굳이 진위를 밝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기자의 지팡이 조선 선조 때 윤두수(尹斗壽·1533~1601)는 평양감사 시절 ‘평양지’를 편찬했는데 서문에서 “평양은 기자의 옛 도읍이다”라고 썼다. 윤두수는 “평양성의 남쪽에 기자가 만든 정전(井田)이 있고 … 성 북쪽에 토산(?山)이 있는데 기자의 의관(衣冠)을 묻은 곳이다. … 그 외에도 기자궁(箕子宮), 기자정(箕子井), 기자의 지팡이(箕子杖)가 있다”고 말했다. 평양에 기자의 궁전이 있고, 기자의 의관을 묻은 토산이 있고, 우물인 기자정이 있고 기자의 지팡이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가 평양에서 실시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모형도 만들어 놨다. 사각형 농지를 우물 정(井) 자 형태로 나누면 아홉 구획의 농지가 생기는데, 여덟 가구가 한 구획씩 경작하고 가운데는 공동으로 경작해 세금으로 내는 이상적인 토지제도가 정전제다.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尹根壽·1537~1616)는 ‘평안도 감찰사로 나가는 박자룡(朴子龍)을 전송하는 서문’에서 “(평양에는) 기자의 지팡이가 있어서 감사가 관아에 있을 때 그 지팡이 한 쌍을 가지고 앞에서 인도했다”고 말했다. 윤근수는 자신이 등나무(?)로 만든 기자의 지팡이를 직접 보았는데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으니 개탄스럽다”고 한탄했다. ●중국에 역수출된 평양기자 기자가 평양에 왔으니 그 후손들도 있어야 했다. 조선 중·후기 문신 미수(眉?) 허목(許穆)은 ‘동사’(東史)의 ‘기자(箕子)세가’에서 “기자의 후손은 기씨(奇氏),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라고 말했다. 조선의 기씨·한씨·선우씨가 기자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런데 송나라의 문인 소식(蘇軾·1037~1101)과 원나라 문인 조맹부(趙孟頫·1254~1322)가 중국의 선우(鮮于)씨들에게 써 준 글들에서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쓴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광해군 때 예조판서였던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건의에 따라 선우식(鮮于寔)이 평양 기자 사당의 제사를 주관하게 됐다.평양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던 지역이었고, 기자 무덤은 이들의 단골 방문지가 됐다. 평양의 기자 유적은 중국에도 널리 퍼졌고, 중국인들이 거꾸로 조선인들에게 물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영조 42년(1766년)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연기’(燕記)에서 중국 허난(河南)성 출신의 한림(翰林) 팽관(彭冠)과 나눈 이야기를 실었다. 팽관이 “기자의 후손이 지금 조선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홍대용은 “평양에 기자의 무덤과 사당이 있는데 그의 후손들이 세습하면서 사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전(井田)의 유적지가 아직도 있으니 고증할 만합니다”라고 답했다. 14세기 이후 만들어진 평양의 기자 유적들이 거꾸로 중국인들에게 ‘기자동래설’의 증거로 역(逆)사용됐던 것이다. ●조선 후기 학자들의 의심 그런데 조선 후기 중국의 1차 사료들을 검토하는 학풍이 일면서 “기자가 정말 평양으로 왔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강역고’(疆域考)의 ‘조선고’(朝鮮考)에서 “내가 살펴보니 요즘 사람들은 기자조선에 대해서 많이 의심하면서 혹 요동에 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라고 썼다. 기자조선이 평양 일대가 아니라 고대 요동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사숙(私淑)했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도 그런 학자였다. 그는 기자가 평양에 왔다고는 생각했지만 기자의 강역에 대해서 쓴 ‘조선지방’(朝鮮地方)에서는 기자가 당초에 봉함을 받은 지역이 “연나라에 접근해 있었으니 지금 만리장성 밖 요심(遼瀋·만주) 지역이 모두 강역 내”라고 썼다. 기자조선이 지금의 베이징 부근에 있던 연나라와 국경을 접해 있었으니 요심과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부근의 만리장성을 넘는 지역이 모두 그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이익은 또한 ‘병영’(幷營)이라는 글에서는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 … 순(舜)시대의 병주(幷州)와 영주(營州)가 아니겠는가”라고도 말했다. 병주는 베이징 부근이고, 영주는 산둥성 일대를 뜻한다.●기자조선 위치가 중요한 이유 기자조선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현재 북한 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동북아 역사전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의 도읍지 평양이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됐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섰으므로 북한 강역이 중국의 역사 영토라는 것이 중국은 물론 국내 식민사학계의 논리다. 그럼 중국 사료도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한나라의 정사인 ‘한서’(漢書)에는 한나라의 행정구역을 설명한 ‘지리지’가 있다. ‘한서’의 ‘지리지’ 주석은 낙랑군 조선현이 기자가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낙랑군 조선현을 찾으면 된다. 한 무제(武帝)는 원봉(元封) 5년(서기전 106) 전국을 13개 주(州)로 나누어 각각 자사(刺史)를 두었다. 지금의 베이징 지역에 있던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는 산하에 여덟 개 군을 두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낙랑군이다. 한나라는 전국에 30리 단위로 설치한 역참(驛站)에서 말을 갈아타 가면서 행정 문서를 주(州)나 군(郡)에 전달하게 했다. 한 주(州) 내의 산하 군들에는 보통 하루나 늦어도 이틀이면 행정문서가 전달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유주(베이징)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을 지나서 천산산맥, 장백산맥, 낭림산맥 등의 험준한 산맥을 넘고, 허베이성 난하와 요녕성 대릉하, 요하를 건너고 압록강과 청천강 등을 건너 하루나 이틀 안에 평양에 행정문서를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자조선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의 산물이다.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隋)나라 양제(煬帝·재위 604~618) 때 인물 배구(裵矩)는 서역에 관한 지리서인 ‘서역도기’(西域圖記)를 지어 올릴 정도로 지리에 밝은 인물이었다. ‘수서’(隋書)의 ‘배구 열전’에 따르면 그는 수 양제에게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나라 때 기자를 봉한 곳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봉함을 받았다는 고죽국에 대해서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의 ‘고죽안시’(孤竹安市)에서 “고죽국은 영평부(永平府)에 있다”고 말했다. 영평부 자리가 기자조선이 있던 자리라는 뜻인데, 명·청 때의 영평부는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龍)현이다. 청나라 때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영평부 북쪽 40리에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조선성(朝鮮城)이 있다”고 말해서 영평부 자리가 기자조선의 도읍임을 밝혔다. 앞으로 후술하겠지만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이 옛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 지역이라는 사료는 이외에도 많다. 평양은 고려 후기 유학자들이 기자의 도읍으로 끌어들였을 뿐 중국의 여러 사료들은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을 기자의 도읍지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할 중국 사료는 많다. 중국이나 일본의 눈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의 전환이 시급한 때다. ■기자와 선우씨 조선에서 ‘선’자 따고 우땅 ‘우’를 합쳐 선우…선우씨 정통처럼 인식 ‘상우록’(尙友錄)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는데, 그 아들 중 한 명인 중(仲)이 우(于)땅을 채지(采地·봉토)로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선(鮮) 자를 따고 우땅에서 우(于) 자를 따서 선우(鮮于)씨가 됐다는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재위 1368~1398) 때 중령별장(中領別將) 선우경(鮮于京)의 7대 후손이라는 선우식(寔)이 평안도 태천(泰川) 평양의 기자 사당인 숭인전(崇仁殿) 곁에 와서 살았다. 그래서 그를 기자의 후예로 인정해 광해군 때 숭인전 전감(殿監)에 제수했고, 그 자손이 대대로 전감직을 세습함으로써 선우씨가 기자의 정통처럼 인식됐다.
  • [정찬주의 산중일기] 낙향한 작가의 예의

    [정찬주의 산중일기] 낙향한 작가의 예의

    폭설이 내리면 산방 부근의 산길은 어김없이 끊긴다. 아침 체조를 하는 셈 치고 산방으로 오는 언덕길 한쪽의 눈만 치우는 데도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과격한 아침 체조는 더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삽으로 적설의 무게를 경험해 보니 그렇다. 힘을 무리하게 받은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만류해도 오겠다는 손님이 있으니 언덕길이라도 터 준 대가다. 눈이 쌓이지 않는 고흥 땅 사람들은 폭설로 산길이 막혔다고 해도 믿기지 않았던 듯하다. 승용차로 오다가 끝내 운전할 수 없다면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까. 나와 약속한 2월 초의 강연 행사가 다가오고 있으니 공무원인 그분들 마음이 급했던 것도 같다.안사람은 식당에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분들에게 떡국을 내놓았는데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산중 반찬으로 동치미와 김치밖에 없었지만. 그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려 응달의 눈까지 다 녹아 지금은 이른 봄 날씨처럼 포근하다. 겨울비가 제설 작업을 말끔하게 한 셈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가뭄도 어느 정도 해갈되지 않았나 싶다. 산방 마당의 연못에도 제법 빗물이 고여 있다. 놀랍게도 마당가에는 푸른 싹들이 점점이 돋아 있다. 눈 속에서 얼음새꽃처럼 스스로 발열이라도 했는지 파랗게 살아 있다. 손톱만 한 어린 질경이 잎도 보인다. 생명력이 질겨서 질경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봄날에 잡초를 뽑을 때 아무래도 녀석에게는 호미가 덜 갈지도 모르겠다.산길이 뚫린 뒤 첫 번째 손님은 보성읍에 사는 김아무개씨다. 작년에 탄원서를 써 주었는데 해가 바뀌었다며 날짜를 수정해 달라고 한다. 현재 영어의 몸이 된 김아무개씨의 직장 상사를 위해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탄원서다. 김아무개씨의 상사는 나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전후 사정을 살펴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텐데 명색이 작가로서 직접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모른 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대서소 직원처럼 고향 사람들이 요구하는 글을 거절하지 못하고 대행하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요구하는 글도 여러 가지다. 탄광에서 희생한 광부들을 기리는 화순탄광 위령비 비문부터 다산 정약용이 화순에서 2년 동안 ‘맹자’를 공부해 다산학의 바탕을 다졌던바 화순읍내 공원의 조형물에 새겨질 ‘화순과 다산 이야기’를 써 주었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느 선각자의 공덕비 비문을 지어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다산 동상 옆에 소개한 ‘화순과 다산 이야기’와 천년고찰 쌍봉사에 세워진 시판(詩板), 즉 초의 선사와 고려시대 지식인 김극기 시 번역은 주관이 가미됐으므로 나를 밝혔지만 다른 글들에는 모두 내 이름을 뺐다. 지역민을 도운 선각자나 탄광 희생자를 위한 글에 내 이름이 들어가면 누가 될 것 같아서였다. 몇 해 전에는 난생처음으로 별세한 분을 애도하는 조사를 쓴 적도 있다. 물론 생전에 그분이 남긴 공덕을 충분히 헤아려 본 뒤에 쓴 글이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연을 대며 내 산방을 찾아와 부탁하면 대부분은 외면을 못 하고 만다. 재작년에는 면사무소 앞의 커다란 입석에 새길 글을 지어 주었는데, ‘면민의 날’에 감사패를 받고 나서 쑥스럽기만 해 슬그머니 행사장을 나온 적도 있다. 내가 사는 이양면은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의 정중앙이다. 그래서 지은 문구가 ‘꿈꾸는 남도의 심장, 의로운 볕고을 이양’이었다. 의로운 볕고을이라고 한 까닭은 이양면 계당산에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한말 의병훈련 터인 ‘쌍산의소’(雙山義所)가 있고 양명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은 글은 고흥에도 있다.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수군이 처음으로 승전한 싸움이 절이도(거금도) 해전인데, 승전탑의 비문과 해전의 배경을 설명한 사각형의 돌에 새긴 글도 내가 작성한 것이다. 앞에서 나를 대서소 직원 같다고 표현했는데 무보수로 썼다는 점이 그분들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고향 사람들이 부탁하는 글에는 고료를 청구하지 못할 게 뻔하다. 고향에 뼈를 묻으려고 낙향한 작가로서 최소한의 기부이자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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