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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책꽂이]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안도현 지음, 송필용 그림, 다선출판사 펴냄) 식물을 노래한 안도현 시인의 시 50편에 송필용 화백의 그림을 곁들인 시화선집. 서른다섯 살이 되어 애기똥풀을 처음 알았다는 시인은 “나는 식물의 이름을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애기똥풀이라는 존재를 내 안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썼다. 108쪽. 1만 2000원.가만한 나날(김세희 지음, 민음사 펴냄) 2015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연애, 취직, 결혼 등 사회초년생에게 막중한 과업이 된 사건을 통과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리는 사소하지만 특별한 사회생활 보고서, 인간관계 관찰일지다. 328쪽. 1만 2000원.영어의 힘(멜빈 브래그 지음, 김명숙·문안나 옮김, 사이 펴냄) 영국 BBC에서 30년 이상 프로듀서로 일하며 영어에 관한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해 온 저자가 겨우 15만명이 쓰던 게르만어 방언에 불과했던 영어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하게 됐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504쪽. 1만 9500원.안 아프게 백년을 사는 생체리듬의 비밀(막시밀리안 모저 지음, 이덕임 옮김, 추수밭 펴냄) ‘시간치료학’을 개척한 의학자인 저자가 생체시계의 작동 원리와 이를 활용해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안내한다. ‘최적의 업무 리듬은 90분 일하고 15분 쉬는 것이다’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팁들이 많다. 256쪽. 1만 5000원.중력(권기태 지음, 다산책방 펴냄) 2006년 ‘파라다이스 가든’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의 장편소설. 2006년 당시 대한민국 우주인 선발 경쟁을 가까이서 취재했던 기자 출신 작가는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한 탈락자의 퇴장에 주목했다. 우주를 꿈꾸던 한 샐러리맨 연구원이 우주인 선발 경쟁에 도전,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동료들을 격려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456쪽. 1만 4800원.만화 우계 성혼(성기영 지음, 이현주 그림, 여름언덕 펴냄) 율곡 이이, 송강 정철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깊게 교유했던 조선시대 성리학자 우계 성혼(1535~1598)의 삶과 학문 세계를 만화로 펴냈다. 성혼의 14대 손인 작가가 젊어서는 벼슬자리를 멀리한 채 학문에 정진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금에게 직언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쓴 선조를 그렸다. 224쪽. 1만 2000원.
  • 임종기 전남도의원, 전라좌수영 복원과 충민사 관리소 신설해야 촉구

    임종기 전남도의원, 전라좌수영 복원과 충민사 관리소 신설해야 촉구

    전남도의회가 14일 제328회 임시회를 열어 임종기 의원(더불어민주당·순천2)이 대표 발의한 ‘전라좌수영 복원과 충민사 관리소 신설 촉구 건의안’을 채택했다. 임 의원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도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오면서 안타깝게도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됐다”며 “4·27 판문점 선언과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등 평화를 향한 숨가쁜 발걸음이 고조된 이 시점에서 국난을 극복했던 지난날을 되새겨야한다”고 강조했다. 전라좌수영은 1479년 승격한 군영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후 임전태세를 완비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 크게 기여했다. 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國家軍儲 皆?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나라의 군사·군량·군비는 모두 호남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다’는 말로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호남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그 호남에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좌·우수영 수군, 호남의병과 승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충민사’는 이 충무공 전사 후 1601년 왕명으로 지어진 전국 최초 국립사당이다. 1993년 사적 제381호로 지정돼 충무공 유적 영구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을 뿐 국가관리가 미흡한 실정이다. 임 의원은 “417년간 남해안 방어와 임진왜란 국난극복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을 정부가 직접 나서서 복원해야한다”며 “충민사에 임진왜란의 실증적 연구 고찰을 위한 학예연구관을 배치하고 충민사 관리소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의회는 이번 건의안을 정부와 문화재청, 청와대 등에 보낼 계획이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AP “드라마 ‘고퀄’에 해리 포터도 인기…北 대중문화 업그레이드”

    AP “드라마 ‘고퀄’에 해리 포터도 인기…北 대중문화 업그레이드”

    시대에 뒤떨어지는 구닥다리로 여겨지던 북한의 대중문화가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 하에서 눈에 띌 만큼 나아지고 있다고 AP통신이 13일 평양발 기사를 통해 보도했다. AP는 핫팬츠 차림의 무용수, 에어조던 스타일의 신발 공장, 그리고 정말로 ‘볼 만한 재미’가 있는 TV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이 북한에서 나오고 있다며 이를 ‘김정은의 문화혁명’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두드러진 분야로 TV 프로그램을 AP통신은 꼽았다. 지난해 7월부터 조선중앙TV에서 방영되는 연속극 ‘임진년의 심마니들’과 북한의 유명 만화 ‘소년장수’의 애니메이션판이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개성 인삼 약탈과 이에 저항한 조선 심마니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가 그리는 ‘반일’과 ‘국수주의’는 흔하디 흔한 주제지만, 작품의 퀄리티는 과거 북한의 TV 프로그램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통신은 “배우들의 연기는 불쾌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더욱 강렬하고, 플롯은 더욱 매력적이며, 세트와 의상은 과거와 비교해 확실히 더 정교해졌다”고 평가했다. 북한 억양이 강하기는 해도 북한 연기자들의 일본어 연기도 대체로 정확하다고도 평했다. 애니메이션 ‘소년장수’ 역시 컴퓨터 효과를 솜씨 좋게 사용해, 시각적으로 세계 유명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AP는 전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모바일용 게임으로도 제작됐다. AP는 음악 분야에서 모란봉악단을 주목했다. AP는 “대중문화를 업그레이드하려는 김정은 위원장의 첫 시도는 2011년 말 집권과 거의 동시에 창설한 모란봉악단에서 시작됐다”면서 이 악단이 미니스커트 차림에 최신 유행의 짧은 머리를 한 소속 단원들의 공연으로 유명하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예술단을 내려보낸 일이나, 김정은 위원장이 레드벨벳 등 한국 걸그룹 등의 공연을 관람한 일도 AP는 비중 있게 소개했다. AP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인민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류원신발공장 노동자 김경희씨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소비문화에서도 대중의 기호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봤다. 외국 문화 수용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AP에 따르면 인도 ‘발리우드 영화’가 북한에서 인기를 끌면서 최근에는 김일성광장 건너편 극장에서 인도 영화 ‘세 얼간이’가 상영되기도 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북한 최대 도서관인 인민대학습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서 중 하나다. 이러한 북한의 대중문화 업그레이드는 북한 대중이 혹독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외국 문화에 친숙해지고 있음을 북한 정권 내부에서도 자각했음을 보여준다고 AP는 분석했다. 그러나 여전히 군악대와 ‘조선옷’(한복) 차림의 가수들의 공연이 평양 음악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려는 어떤 노력도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는 한계를 보여준다고 AP는 평가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옥중 투쟁을 하다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음도 분명하다. 유관순은 3·1운동과 동일시되고 있고 항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유독 유 열사만 부각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여러 편 있다. 친일·우익 인사들이 광복 직후 자신들의 과거를 정화하여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찾으려고 열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항거는 이화여중 동문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 등이 기념사업회를 발기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제에 저항했다가 친일로 돌아선 인물로 광복이 되자 자신들의 행적을 덮으려고 유관순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익 인사들의 유관순 기념사업이다. 미 군정하인 1947년 9월 결성된 유관순기념사업회는유관순 기념비, 영화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의 전기를 간행했다(정상우,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그중에는 유관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조병옥이 있다.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동안 복역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친일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두 집 건너 살던 이웃으로 그의 아버지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 방편으로 유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켰다(전해주,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네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이런 연유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다른 인물들의 공적은 거의 파묻혔다. 실제 주동자로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김구응 의사(義士)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이 주도했음을 밝히고 특히 모친까지 학살당한 김 의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천안군 병천시(川市·아우내장터)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인을 소집하야 독립을 선언할 새 일경이 아민(我民)의 기수(旗手)를 자(刺)코져 하거늘 기수는 적수(赤手)로 검도(劍刀)를 집(執)하니 유혈이 임리(淋·뚝뚝 흘러 흥건하게 떨어짐)할 시에…”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에 이렇게 씌어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거의 똑같이 서술하면서 주모자를 김구응이라고 했다.김 의사는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으로 1887년 7월 27일 천안 병천면 가전리 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깨우친 의사는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훈도(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과 조인원의 아들 조만형은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충청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김 의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3월 13일 고향 병천에 내려온 유관순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과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유관순과 지역의 학생, 교인들은 진명학교와 교회 등에서 밤낮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이 어린 유관순에게 최일선 연락 책임을 맡긴 것도 김 의사였다. 그는 천안 동부 6개 면과 오창, 청주, 진천, 연기 등 각지와 비밀 연락망을 짜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총궐기하도록 밀령을 전달했다. 유관순이 연락과 봉화 책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의사는 전체 계획을 짠 리더였다. 조인원은 현장에서 군중을 이끈 행동대장 격이었다. 김 의사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도 장년층과 노년층을 설득하고 부녀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그믐날 밤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를 필두로 천안 주변의 총 24개 봉우리에서 봉화가 타올랐다. 거사 일로 정한 4월 1일 아침 아우내장터에는 전날 밤 타오른 횃불을 보고 장꾼을 가장한 군중 3000여명이 모여들었다. 군중은 점점 불어나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6000명을 넘어섰다. 김 의사는 두루마리로 된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했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불과 50보 거리의 지척에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만세운동은 극히 평화적이었다. 군중이 점점 늘어나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커졌다. 오후 2시쯤 천안헌병분대에서 헌병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유중권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발포에 놀라 군중은 일단 흩어졌지만, 오후 4시쯤 발포와 살인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져 15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갔다. 김 의사는 독립선언문을 말아 들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헌병들은 깃발을 들고 있던 기수를 칼로 찌르려 했고 기수가 맨손으로 칼을 잡자 그대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의사는 그들의 잔인무도함을 비난하며 꾸짖었다. 황망한 중에도 정연한 논리로 대응했다. 일본 헌병은 논리에서 밀리자 김 의사를 총으로 쏴 쓰러뜨리고는 총검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의사는 시신이 되어서도 독립선언서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오후 6시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참살당한 말을 들은 의사의 어머니 최 여사가 달려왔다. 여사는 헌병의 멱살을 잡아채며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을 찾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헌병은 사정없이 총을 쏘아 즉사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김 의사의 나이 32세, 최 여사의 나이 66세였다. 아우내장터 시위로 김 의사 등 19명이 죽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크게 다쳤다.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병천면 가전리 뒷산에 의사의 시신을 묻었다. 김 의사의 사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선생의 손자 김운식(70)씨에게 들은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김 의사는 아들 셋을 뒀는데 맏아들이 열 살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김 의사의 부인, 즉 김씨의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 안성 친정으로 갔다고 한다. 의사의 맏아들은 그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와 인천에서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작은 공장에 취업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친일파들은 위세를 떨치고 김원봉 같은 독립운동가는 도리어 빨갱이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한 저항감에 좌익 사상에 빠졌다”고 말했다. 맏아들은 6·25가 터진 후 공장 인민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와는 다르다고 판단해 9·28 수복 후 국군에 자수했다. 자수했지만 방면되지 않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 몇 달 뒤 1·4후퇴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천감옥의 좌익사범들을 총살했는데 그때 희생되고 말았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다른 후손들도 천안을 떠나 곳곳을 전전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 아우내장터를 찾았다. 두 개의 내(川)를 아우른다(竝)는 뜻인 아우내를 일본인들이 병천(竝川)이라는 한자어로 지명을 바꿨다. 근처엔 유관순기념관도 있고 해마다 만세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만세운동 현장임을 알려주는 표지도 없고 순댓집 간판만 즐비했다. 단지 시장 입구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 있다. “아우내에는 순대만 있고 역사는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국 외교사 한눈에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국 외교사 한눈에

    고대에서 근대까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를 통사로 정리한 책이 처음 나왔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환경 변화와 이에 대응한 우리 노력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전체 4권 가운데 고려, 조선, 근대편 3권을 최근 출간했다고 28일 밝혔다. 책은 동북아역사재단이 2015년 7월 구상한 뒤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외교사 편찬위원회’에 위촉해 진행한 3년 6개월 동안의 결과물이다. 한국사, 일본사, 중국사와 국제정치학 전문가 등 모두 50여명이 참여했다. 집필 중인 고대편은 3월쯤 발간한다. 책은 시대별 국제환경의 특징을 살피고, 선조들이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지, 어떤 선택이 가능했고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다룬다. 고려편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격변하는 주변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고려 외교의 여러 국면을 살핀다. 주변국에서 ‘국격’을 인정받아 정치적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고려 외교의 노력을 재조명한다. 조선편은 명과 청의 정치·군사·문화적 압력과 일본의 군사적 도전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지키려던 조선 외교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사대교린의 원칙을 지향했지만, 대륙과 일본의 역학관계에 따라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에 휘말렸다. 근대편은 개항 이후 대한제국 시기,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다. 좌절과 실패의 역사로 낙인된 이 시기에 관한 오해를 불식하고, 생존과 독립을 위한 한국의 외교적 노력과 그 한계를 들여다본다. 책은 특히 한국의 대외관계를 국제 정치의 종속변수로 여기는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데에도 초점을 뒀다. 한국 외교의 전개과정에서 우리의 시각과 주체적 면모를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구대열 편찬위원장은 “한국외교사는 국제 환경에 관한 한국인의 대응과 투쟁의 기록으로, 한국사의 지엽적인 부분이 아니다”라면서 “이번 책으로 주변국과 엄정하고 건설적인 학문적 토론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세계문화유산 불국사가 품은 불교 이야기

    세계문화유산 불국사가 품은 불교 이야기

    2018년에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7사찰에 앞서 24년 전에 이미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먼저 찾았다.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진흥왕 때부터 대형 사찰들이 건립된다. 진흥왕 때 황룡사가 건립되고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가 건립 되었다. 무열왕이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할 무렵 신라에는 원효와 의상이라는 걸출한 승려가 있었고 이중 의상은 당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돌아와 통일 신라에 화엄경을 설파하고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후 그의 제자들이 신라의 불교를 더 융성하게 한다.불국사는 그 선상에서 지어진 사찰이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며 감은사를 짓고 만파식적을 얻었다. 이후 문무왕의 증손인 경덕왕 때 불국사와 석굴암이 지어졌고 석굴암의 방향이 문무 왕릉을 향해 감은사와 같이 문무왕을 기리고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문무대왕의 유지대로 외세를 억누르기 위한 기원의 의미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불국사에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그 하나는 김대성에 대한 설화고 또 하나는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설화다. 김대성에 대한 전설은 불국사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고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은 무영탑이라 부르는 석가탑에 대한 이야기다. 2대의 왕을 위해 왕명을 받들어 김대성이 지은 것이 효자로 이름난 재상 김대성이 지은 것으로 잘못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을 재현한 절이다.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과거의 부처이며 극락세계의 영주인 아미타불,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보살 역시 따로 모셨다. 네 개의 영역은 크기는 물론 마당의 높이가 다른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다.석가탑 앞에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모셨으니 부처님만 네 분을 모신 절이다. 이중 그 중심은 현세의 부처를 모신 대웅전 영역이다. 도솔천의 33천을 상징하는 청운교 백운교 33계단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여기부터는 불국이다. 계단의 수에 대해서는 34단이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첫 단을 지반과 같은 높이였다고 보면 33단이 된다. 다른 사찰의 경우라면 자하문은 불이문이 되었을 것이다. 계단을 교(橋)라 한 것은 부처의 나라로 들어가는 다리역할을 한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또 범영루 우측의 수구에서는 물이 떨어져 밑의 연못에 떨어졌을 것이며 청운교 아치밑에는 이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었다면 다리교를 쓰는 것이 맞을 것이다.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한 기록을 보면 지금의 불국사 앞 마당에도 연지의 터가 발견되었고 여기서 기와등이 발견되었다. 자하는 자색 안개를 뜻 하는데 수구에서 물이 떨어지며 물안개가 피어났는데 그 안개가 자색이었다고도 한다. 또 자하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주 빛 금색 안개를 말한다. 자하문의 안쪽에 해와 달이 함께 그려진 것은 자하문 안의 불국이 해와 달을 위의 하늘에 있다는 의미로 불국임을 다시 알려준다. 자하문에 평주와 고주를 연결하는 계량 또는 소 꼬리같이 생겨 우미량이라고 하는 부재를 하나는 위로 휘고 하나는 아래로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니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지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해와 달이 다 있는 불국을 표현하였다.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청하여 석가탑을 비롯한 석조물을 건조 하였는데 몇 해가 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 아사녀가 불국사로 찾아간다. 아녀자가 불사를 조성하는 곳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하여 그녀를 들이지 않고 무영지에서 가서 지성으로 기도를 하며 기다리라한다. 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무영지에 비칠 것이니 그때가 되면 아사달을 만날 것이라 하였다. 지성으로 기도를 하며 기다렸으나 끝내 그림자는 비추지 아니하였다.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는 무영지에 몸을 던졌다 한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이다.해와 달 위에 떠있는 불국이니 어찌 그림자가 있을 수 있겠나? 불국사의 경내가 불국임을 이야기 하는 또 하나의 설화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다는 것이다. 분별은 실체와 상관없이 개념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 깨끗하고 더러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같은 구별은 원래 하나인 세상을 인간이 둘로 나누는 것이다. 부처가 되면 이런 분별이 없어지고 비로써 하나의 세상에 있게 된다. 그림자가 없다는 이야기는 석가모니는 현세의 부처이기 때문에 분별을 하지 않고 분별이 없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림자가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석가탑은 애초에 그림자가 없는 탑이었다. 아사녀는 결국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의 그림자가 생기길 기다린 것이다.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자비의 부처님 전설에 희생된 아사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종교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서글픈 이야기다.석가탑과 다보탑은 두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아미타불이 과거의 부처이며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라면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의 교주다. 몸 전체가 진신사리가 되어 보석처럼 빛나는 화려한 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스로 어느 곳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나의 보탑이 솟아나와 그 설법을 증명 하리라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역시 보탑이 솟아 나왔다 하여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석가탑과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함께 조성한 것이다. 석가탑은 2단의 기단 아래 자연석의 기반이 있다. 석가모니가 앉아있던 바위를 상장한다. 남산 용장사지의 석탑이 바위 위에 앉은 모습이 연상된다. 석가탑의 해체 복원 시 사리함과 함께 무구정광 다라니경 목판 인쇄본이 나왔다. 이 목판 인쇄본은 최초의 목판 인쇄기록을 바꾸는 중요한 문화재로 천년이 넘은 한지의 우수성도 함께 입증되었다. 다보탑의 다섯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의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한 사리장엄구와 이불 병좌상이 없는 것은 일제 때 해체 복원되며 사라진 것이라 추측한다. 이불 병좌상은 다보여래가 자신의 보탑 안에 자리의 반을 내어주어 석가모니 부처와 다보여래가 함께 나란히 앉은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해체복원이 원래의 상태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나 불국사나 석굴암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그렇지 못하였다. 불국사의 석축을 보면 원형의 석축과 복원된 석축이 확연히 다른 것이 보인다. 원래의 석축은 크고 넓은 자연석위에 그랭이질 된 장대석을 얹어 자연과 인고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편 그랭이 공법으로 잘 맞춰진 석축은 지진을 버텨낼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여러 전란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 등이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 때문이었다.불국사의 대웅전의 영역은 기하학적으로도 거의 완벽하다.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은 정확히 중심이 일치하는 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석가탑과 다보탑, 영역을 구획하는 회랑은 그 중심축에서 완전히 대칭이다. 또 석가탑과 다보탑의 중심거리의 반을 기준 척으로 계산하면 대웅전 영역의 가로는 기준척의 네 배고 길이는 다섯 배가 된다. 또 석가탑과 다보탑의 하부 기단너비는 같으며 대웅전의 폭은 이 기단 너비의 세배가 된다. 또 대웅전 영역의 전면 두 꼭지 점과 대웅전 뒷벽의 중심을 연결하면 정삼각형이 된다. 기준척도를 가지고 그 비율로 만들어낸 정확한 규칙이 보인다. 이 완벽한 대칭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형태에서 깨진다. 백제 미륵사의 경우 같은 쌍탑 이지만 두 탑의 모양이 같다. 이에 비해 불국사는 그 대칭의 경직성이 두 탑에서 깨진다. 그 깨진 대칭은 영역 전면의 양 끝에 범영루와 자경루에서 회복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한 석가탑의 연장선에 있는 범영루는 누각을 받이는 석조의 화려한 주초부터 건물까지 화려함을 자랑하고 화려한 다보탑의 연장선에 있는 자경루는 꾸밈없이 간결하다. 양쪽이 간결함과 화려함을 나눠서 그 무게감을 맞추어 대칭속의 비대칭, 비대칭 합의 대칭을 완벽하게 구현 하였다.아미타 부처가 있는 영역은 그 지반의 높이와 계단의 단수가 낮다. 극락왕생을 빌어준다는 그 극락이 이곳이니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렸을까?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 들어가는데 이는 극락정토가 연화와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이를 의미한다. 서방 극락정토의 부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연화교의 계단석 바닥에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한 장의 꽃잎으로 볼 수도 있고 한 송이의 꽃으로 볼 수도 있다. 꽃잎이라 보면 꽃잎을 즈려밟고 오르는 것이고 꽃송이라면 피지 않은 봉우리를 보며 올라가서 부처님을 만나고 내려올 땐 부처의 법력으로 활짝 핀 연꽃을 보며 내려오는 형상이 된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축소판이고 조금 간결해진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아미타불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안양문 이고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은 극락전이다. 아미타불은 화엄종에서 본존불로 모시는 극락정토의 부처이며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부처님이다. 불국사는 경덕왕 때 지어졌다고 하나 무설전은 문무왕 때 지어졌고 대규모 사찰이 아닌 작은 사찰로는 경덕왕 이전에 존재 했으며 경덕왕 때 대규모로 중수되어 큰 사찰이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80여종 2000여 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덕왕은 불국사 외에 석굴암을 조성하였고 불교유적의 보고인 남산과 월성의 남쪽 끝을 연결하는 월정교를 축조하는 등 신라의 대표적 유적들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불심과 효심이 깊고 예술적 감각도 뛰어난 성군이 아니었을까 싶다. 임진왜란 때 석조물과 일부 건물만 남기고 전소 되었고 중수와 방치를 거쳐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문화공보부 시절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 되었다.복원된 현재의 불국사가 원형에 비해 미흡하다는 지적들이 많음에도 지금의 모습으로도 우리의 대표적 유적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불국사 앞의 마당과 연못을 비롯 원형이 복원된 모습을 상상해본다. 경주에 가면 작년 가을에 복원된 월정교도 꼭 들러보시길 권한다.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가 생각나는, 누각으로 덮인 누교로는 유일한 다리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무를 시간을 벌기위해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젖게 하여 요석공주와 설총을 만들었다는 낭만적인 설화가 깃든 곳이니 사랑하는 이와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글 사진: 최세일 한건축 대표
  • [서울광장] 개혁개방 설계사 꿈꾸는 ‘북한판 덩샤오핑’/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개혁개방 설계사 꿈꾸는 ‘북한판 덩샤오핑’/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북·중 관계는 늘 혼돈스럽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항일투쟁과 6·25 전쟁 과정에서 피로 맺어진 혈맹이면서도 상호 불신의 뿌리도 깊다. 한마디로 애증이 교차하는 이중적 관계다.2011년 11월 대권을 거머쥔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해 3월 1차 북·중 정상회담 성사 전까지 6년 4개월 동안 핵개발에 몰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 시기는 친중파 거두인 장성택 처형(2013년 12월)과 네 차례 핵실험 등으로 촉발된, 북·중 수교 7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첨예한 갈등기였다. 이런 북·중 관계는 지난해 6월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 전후로 급반전됐다. 불과 10개월 사이 ‘신밀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견 혼란스러운 상황 전개지만 보다 긴 호흡으로 양국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7년간 북·중 간 갈등의 핵심은 국익 불일치 때문이었다. 올해로 개혁개방 40년을 맞는 중국은 서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경제개발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반면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북한은 국가의 존망을 걸고 핵 개발과 폐쇄 정책에 매달려야 했다. 혈맹이라도 국익 앞에서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냉혹한 국제정세를 여과 없이 보여 준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말기,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한·미 관계를 연상시킨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북한이 비핵화로 방향을 틀면서 양국의 국익 불일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북·중 신밀월 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의미다. 북·중이 지난해 5월 다롄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적 협력을 통한 공동운명체라는 점에 합의한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4차 북·중 회담 결과를 놓고 보수언론들을 중심으로 한·미·일 동맹 복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북·중·러-한·미·일 대결 구도’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한반도 평화체제 대신 신냉전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단견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안보와 외교 문제를 이용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우리가 직면한 한반도, 동북아 정세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우려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정상 국가화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는 북·미 간 적대적 관계 청산과 북·미 수교를 전제로 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의미한다.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은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북한은 개발도상국으로 경제발전에 전념한다는 구상이다. 중국이 죽의 장막에서 나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결정적 계기는 1979년 미·중 수교였다.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안보 위협를 걷어낸 중국은 자신감을 갖고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북한의 지도부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의 ‘조선의 꿈(朝鮮夢)’은 덩샤오핑과 같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의미다. 2018년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 중지와 사회주의 경제 강국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덩샤오핑 주도로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을 확정한, 1978년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를 연상시킨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안보위기는 늘 삼각구도에서 발생했다. 임진왜란은 조선·명·일본 사이에서, 병자호란은 조선·명·후금(청나라)의 삼각 구도에서 사달이 났다. 현재의 안보위기 역시 6·25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중국·해양세력(미국·일본)의 각축전에서 비롯됐다. 역사적 경험에 비춰 우리의 국익 극대화 법칙은 자명하다. 남북 관계 개선을 기반으로 자기 주도적 균형·실용 외교 전력이 우리의 살길이다. 남북 관계가 과거의 대결로 회귀할 경우 균형 외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한쪽을 골라 잡는 식의 편승외교는 스스로 운신을 좁히면서 영구 분단을 자초하는 길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25년간 한국이 우리의 국익을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친 것처럼 북한 또한 친중과 친미를 병행하는 개방 국가로 유인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좀더 미국과 가깝게 되고 우리가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 한반도는 미·중 대립을 완화하는 완충·중립지대로 발전할 수 있다. oilman@seoul.co.kr
  • ‘안양스토리북’ 발간... 지명유래, 전설, 민담 등 수록.

    ‘안양스토리북’ 발간... 지명유래, 전설, 민담 등 수록.

    1596년 이순신 장군은 수원으로 가던 중 말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인덕원에서 한참을 쉬어갔다.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난중일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인덕원은 조선시대 환관들이 은퇴해 살던 곳으로 덕을 많이 베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기도 안양시는 지역의 지명 유래와 전설, 민담을 하나로 묶은 ‘안양스토리북’을 발간했다고 5일 밝혔다. 각계 원로의 의견 수렴과 고문서 참고,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다. 누구나 흥미를 갖고 쉽게 볼 수 있도록 일러스트와 사진·삽화 등 시각적인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안양스토리북은 전통마을, 산과 하천 등에 대한 지명유래 49건과 전설미담 21건 등 총 70건으로 구성됐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처럼 생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안양9동 전통마을인 ‘능골’은 사도세자 능 후보지역이었다는 이유로 능골이 됐다, ‘병목안’이란 명칭은 지세가 병목처럼 생겨서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현재 재개발이 한창인 안양6동 ‘소골안’은 골짜기 안에서 소를 많이 키워서 유래됐다고 한다. 또 귀인동 전통마을로 남아있던 ‘귀인마을’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들이 머물렀다고 해서 ‘귀인’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망령골고개 주변에 있어 이름 붙여진 관양1동 ‘망령골’은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탄생설화가 서려있는 곳이다. 안양의 명산 수리산의 명칭은 어디서 유래됐을까? 그옛날 천지개벽으로 바닷물이 밀려왔는데 산 꼭데기가 독수리가 앉을 정도로 솟아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 ‘안양스토리북’에는 이밖에도 정조대왕이 중앙동을 지나 사도세자 능으로 참배 갔던 이야기, 한양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던 상인들이 민배기(평촌동)에 머물렀던 이야기, 1919년 군포장(호계3동)에서 민중 20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건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됐다. 시 관계자는 “그동안 다양한 지역역사 수록집을 발간했지만 학술적 집필방식으로 활용도가 낮았다”며 “모두가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새로운 집필방식으로 ‘안양스토리북’을 펴내게 됐다”고 밝혔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미각 만족 행운 가득 ‘돼지투어’

    미각 만족 행운 가득 ‘돼지투어’

    기해년 황금돼지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희망찬 새해 기운과 더불어 돼지가 상징하는 복을 한껏 받으러 ‘돼지투어’를 떠나보면 어떨까. 예로부터 친숙한 가축이자 지금도 우리 먹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돼지와 관련한 여행지가 전국 곳곳에 많다. 한국관광공사가 밝아오는 새해를 맞아 돼지투어를 주제로 1월에 가볼 만한 여행지를 추천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당신이 몰랐던 돼지의 진실 돼지는 더럽고 탐욕스럽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면 ‘돼지보러오면돼지’에 가보자. 돼지의 수명이 10~15년 이상이고 잠자리와 화장실을 구분하며 지능지수는 70~85로 개보다 높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된다. 돼지인공수정센터를 운영하던 이종영 촌장이 돼지와 함께 행복해지는 법을 고민한 끝에 2011년 돼지박물관, 문화·홍보관, 공연장, 치유정원 등을 갖춘 교육공간을 세웠다. 공연장에서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미니돼지 중 똑똑한 녀석들 5~6마리가 장애물넘기, 공굴리기 등 재주를 하루 4차례 선보인다. 공연과 연계된 소시지 만들기 체험에서는 돼지고기와 육가공식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근처 독일식 온천 테르메덴과 한국 만화 역사를 담은 청강만화역사박물관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매달 첫째 토요일 ‘삼소데이’ 두툼한 생삼겹살에 간장소스, 지글지글 불판에 고기 익는 소리. 청주 삼겹살거리의 풍경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삼겹살 특화거리가 들어선 서문시장은 청주시민들에겐 추억의 장소다. 버스터미널이 이전한 뒤 쇠락의 길을 걷던 시장은 2012년 삼겹살거리가 조성되며 활기를 찾았다. 먹자골목에는 삼겹살 전문점 15곳이 모여 있다. 두툼한 돼지고기를 간장소스에 담갔다가 굽는 청주식 삼겹살이 유명하다. 고기는 물론 국산이다. 곁들이는 파절이 역시 청주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는데 여기에 묵은지까지 더해 ‘삼겹살 삼합’이 완성된다. 매달 첫째 토요일에는 삼겹살과 소주를 엮은 ‘삼소데이’ 이벤트가 열린다. 청주식 삼겹살로 배를 채운 뒤엔 대청호 변 전통가옥과 미술관이 어우러진 문화재단지, 겨울 성벽길이 운치 있는 상당산성으로 찾아가 보자.삼겹살 뺨치는 흑돼지 다리맛 남원 하면 춘향전과 추어탕 정도만 떠오른다면 흑돼지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자. 지리산 자락의 남원 운봉 지역은 예부터 흑돼지로 유명했다. 흑돼지는 백돼지에 비해 육질이 부드럽다. 앞다리와 뒷다리도 쫄깃하다. 다른 돼지의 경우 질기고 푸석푸석해 찌개용으로 팔리는 부위지만 흑돼지 다리는 구이용으로 팔린다. 포도당과 유리아미노산이 다른 돼지고기보다 풍부한데 완전히 익히면 감칠맛이 사라지기 때문에 적당히 붉은빛이 돌 때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 육질이 부드러워 수육을 만들 때는 조금 덜 삶는 것이 요령이다. 광주~대구 고속도로 지리산IC로 빠져나오면 길 양쪽에서 흑돼지고기 가게를 여럿 찾을 수 있다. 운봉읍 화수리에는 흑돼지로 하몽과 살라미를 만드는 곳도 있다. 광한루원과 춘향테마파크, 실상사를 함께 보면 남원 여행이 완성된다.만지면 복 되는 복돼지 2007년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에서 돼지 조각이 우연히 발견됐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다시 지어진 1750년부터 따져도 250년 넘는 극락전에서 돼지 조각이 발견된 일은 큰 화제가 됐다. 불국사에서는 ‘극락전 복돼지’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짓고 100일 법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누구나 쉽게 보고 만질 수 있게 극락전 앞에 자그마한 복돼지상도 만들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불국사를 찾는 여행객은 누구나 복돼지상을 만지면서 행운을 빈다. 기념촬영을 하고 현판 뒤의 돼지 조각까지 봤다면 극락전에 들어가 아미타불 앞에서 스스로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가르침을 새기면 어떨까.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다보탑, 석가탑 등 불국사가 품은 보물들을 돌아보자. 대릉원, 첨성대, 월지는 밤이면 조명이 아름답다.가락국 후궁은 황금돼지 창원에는 돼지와 관련된 여행지 두 곳이 있다. 돝섬과 저도가 그곳이다. 마산항에서 배를 타고 10여분 들어가면 만나는 돝섬에는 황금돼지 전설이 내려온다. 가락국 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미희가 어느 날 작은 섬으로 숨어들었는데 신하들이 환궁을 요청하자 황금돼지로 변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병사들이 활을 쏘자 한 줄기 빛이 내려오더니 섬이 돼지가 누운 모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돝섬 입구 황금돼지상이 여행자를 반갑게 맞는다. 출렁다리를 건너고 조각 작품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저도 역시 섬이 돼지 모양이라 붙은 이름이다. 다리로 육지와 이어져 접근하기 편하다. ‘콰이강의다리 스카이워크’는 섬의 명소다. 입구에 귀여운 돼지 조형물과 사랑의 자물쇠, 느린 우체통 등이 있어 데이트 코스로 그만이다.신나게 미끄럼 타는 아기돼지 휴애리자연생활공원은 ‘제주 속 작은 제주’라고 불릴 만큼 제주다운 것들을 한데 모아 놓은 향토공원이다. 다양한 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미끄럼 타는 아기돼지들을 볼 수 있는 ‘흑돼지야 놀자’다. 흑돼지 20여 마리가 미끄럼틀에 아장아장 올라가 신나게 내려오는 모습을 보다보면 엄마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다음 출연자는 거위다. 하얀 거위 떼가 뒤뚱뒤뚱 올라가 날개를 퍼덕이며 미끄럼을 탄다. 일정 금액을 내면 시간 제한 없이 감귤을 따고 맛보고 가져갈 수 있는 감귤 체험도 인기다. 공원은 요즘 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다. 한겨울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육질이 쫀득하고 풍미가 좋은 것으로 알려진 제주 흑돼지는 고기국수, 돔베고기, 몸국 등 향토음식 재료로 쓰인다. 공원에서 가까운 표선면 가시리에 가면 제주 전통 순댓국을 맛볼 수 있다.
  • [금요칼럼] 평창과 조선출범기 문화권/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평창과 조선출범기 문화권/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강원도 평창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는 우리나라 동계 스포츠의 성지다. 지난 2월 동계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계적인 겨울 스포츠의 명소로도 거듭났다. 그런데 이 고장에 동계 스포츠 말고 또 어떤 문화가 있는지 질문을 던져본다.물론 평창은 한국 오대산 신앙의 중심지다. 상원사 동종과 목조문수보살좌상,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등은 국보, 적멸보궁은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불교 문화가 아니라면 관동대로의 중심이었다는 이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눈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주 평창문화원에서는 ‘국구사우(國舅祠宇) 발굴 및 복원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국구는 임금의 장인이다. 평창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할아버지인 목조의 장인과 장모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었다. 목조 이안사의 부인 평창 이씨는 훗날 효비로 추증됐는데, 그의 아버지 이숙과 어머니 정씨의 무덤이 평창에 있었다고 한다. 평창군청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군청은 평창읍에 있다. 평창읍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주변에 보이는 도시가 아니다. 동계올림픽 개·폐회식이 열린 횡계는 대관령면의 면 소재지일 뿐이다. 평창읍은 고속도로에서 30분 이상 구불구불한 국도를 타고 들어가야 나타난다. 동계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 가운데도 평창읍내에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을 듯싶다. 평창은 조선 초기에도 인구가 적었지만, 효비의 내향(內鄕·왕비의 친정)이어서 태조 3년(1394) 현에서 군으로 승격됐다. 국구사우의 위치는 아직 확실치 않다. 고종 9년(1872) 제작했다는 오면지도(五面地圖)에서는 평창의 진산인 노산(魯山) 아래 관사와 객사, 국구사우가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덤 자리를 알 수 없게 되자, 관아 주변에 사당을 세웠다는 정조 12년(1788) ‘국조보감’ 기록과 일치한다. 지역에서는 국구사우를 옛터에 다시 짓고 제사도 이어 가기를 희망한다. 평창관아는 일제강점기 헐리고 그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섰다. 사우 터를 찾으려면 관아 터에 대한 전면적 시굴조사가 불가피하다. 그러니 국구사우 터를 찾는 노력은 평창관아 터를 찾는 노력이기도 하다. 관아의 복원은 장기 과제가 되겠지만, 관아 터 시굴조사와 국구사우 터 발굴조사, 그리고 사우 및 치제(致祭)의 복원만으로도 평창을 역사의 고장으로 다시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참에 태백산록과 영동을 아우르는 지역의 역사적 연관성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삼척에는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와 어머니 삼척 이씨의 무덤인 준경묘와 영경묘가 있다. 사돈의 무덤이 각각 삼척과 평창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척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무덤도 있다.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킨 뒤 공양왕과 두 아들을 삼척으로 보낸 뒤 목 졸라 죽였다. 그러고는 공양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를 오늘날 동해 땅 삼화사에서 베풀게 했다. 삼화사 수륙재는 오늘날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정선에는 조선왕조가 출범하자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숨어들어 살았다는 거칠현동(居七賢洞)이 있다. 이곳에는 거칠현사(居七賢祀)와 칠현비(七賢碑)도 세워졌다. 정선아라리가 이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평창, 정선, 동해, 삼척은 한데 모여 있는 이웃 고을이다. 이들을 조선출범기 문화권, 혹은 여말선초(麗末鮮初) 문화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국구사우 역시 이 독특한 문화권을 이루는 결정적 요소의 하나다. 네 고장이 힘을 합쳐 이 문화권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꾸어 나간다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도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청년 문재인의 시간은 - 해남 대흥사(大興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청년 문재인의 시간은 - 해남 대흥사(大興寺)

    “아버지 49재를 치른 바로 다음 날,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떠났습니다. 대흥사 내 대광명전이라는 고즈넉한 암자에서 참 열심히 고시공부를 했습니다.” <문재인이 드립니다. 리더스북, 2012>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대흥사는 대통령의 절집으로 유명하다. 청년 시절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암자 끝 귀퉁이 방에서 꿈을 놓치지 않던 젊은이는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우뚝 서 있다. 그가 머물던 초라한 암자 귀퉁이 방에는 지금도 누군가 꿈을 찾아 삶의 한 조각을 담아두고 있다. 방의 숫자가 공교롭게도 7번이다. 7번방의 기적이 이루어진 해남 대흥사로 가 보자.해남 대흥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명을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초기 의승군(義僧軍) 총대장 서산대사,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뿌리인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 그리고 대한민국 제 19대 대통령 문재인.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 지역명은 대둔산)의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인 큰 절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할 정도의 절집이니 규모나 연혁이 그리 만만한 절이 아님은 증명된다.우선 대흥사가 본격적으로 중흥된 연유는 바로 서산대사에 기인한다. 1592년(선조 25)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옛 승관(僧官)인 휴정(休靜, 서산대사)을 불러 승군을 만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두었고 이후 대흥사는 본격적인 중흥의 시기를 맞이한다.또한 초의선사(1786~1866)가 대흥사에 머물며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장하며 스스로도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다. 이후 호남 지역에서 우리나라 전통의 차문화가 발전하는 데 대흥사는 그 중심에 들어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년 문재인이 1978년에 대흥사 대광명전 암자 끝방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여 1차 시험에 합격한 사연이 대흥사에는 지금도 남아있다.대흥사는 이러한 인물들과 아울러 사찰 내 당우나 암자, 선방 등의 독특한 가람배치도 유명하다. 절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기준으로 대웅전과 명부전 등이 있는 북원(北院), 천불전을 중심으로 가허루, 동국선원 등이 있는 남원(南院)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외에도 서산대사와 선조, 정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표충사 구역, 스님들이 머무는 공간인 대광명전 구역 등이 있다. 이외에도 경내 당우들에 남아 있는 현판 글씨들은 조선 시대 서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표충사는 정조대왕,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 이광사, 백설당 지붕밑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가허루는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가 현재도 남아 있다. <해남 대흥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해남을 방문한다면 적극 추천. 대흥사는 6.25전쟁 중에서도 훼손되지 않아 사찰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2. 누구와 함께? - 누구라도. 해남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두류산의 풍광은 빼어나다. 3. 가는 방법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534-5502~3(061) - 해남터미널 (061-534-0881) → 대흥사(대둔사) - 군내버스 : 06:30 ~ 19:40 (30분 간격 / 25분 소요) 절 입구 매표소 아래 종점까지 운행 (종점에서 절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4. 감탄하는 점은? - 생각보다 원형이 잘 보조된 큰 절 집. 유서 깊은 호남 전통 사찰의 맥을 제대로 담고 있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명성에 비해 방문객들이 많지 않다. 교통편이 수월하지는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대웅보전, 가허루, 표충사, 절집 아래에 있는 여관인 유선관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100년 전통의 최초의 여관인 ‘유선관’의 식사, 떡갈비 ‘천일식당’, ‘소망식당’, 남도 한정식 ‘진일관’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daeheungsa.co.kr/home/main.as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고산 윤선도 기념관, 다산초당, 해남우항리공룡화석지, 땅끝마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해남 대흥사는 절집 자체의 규모가 크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굳이 대통령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 말고 호국불교의 원형인 서산대사와 우리나라 차문화의 원류였던 초의선사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방문 가치가 있다. 적극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한양서 가장 깊은 계곡 삼청동천 물길… 북촌의 힘이었구나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한양서 가장 깊은 계곡 삼청동천 물길… 북촌의 힘이었구나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4회 삼청동(삼청공원의 겨울) 편이 동짓날인 지난 22일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경복궁역 5번 출구에 모인 참석자들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국무총리 서울공관~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서울 요새화의 산물, 방호연막탄 지주~제1호 도시계획공원 삼청공원을 차례로 둘러봤다. 청와대 앞 무궁화동산과 왕실에서 길어먹던 복정우물·성제우물, 북창이라고 불렸던 신식무기 제조창 금융연수원 안 번사창, 칠보사의 큰 법당 옆 500년 묵은 느티나무도 구경했다. 종착지인 삼청공원은 덕수궁 돌담길과 함께 한때 연인들의 성지였다. 삼청동천(三淸洞天)에 공원을 만들자는 여론에 따라 1940년 조성됐다.도시에서 물길과 사람길 그리고 건물의 생몰을 살펴보면 도시형태의 변화가 보인다. 삼청동을 이해하려면 물길을 먼저 알아야 한다. 삼청터널 어림에서 발원, 동십자각을 거쳐 청계천까지 2900m를 흐르는 삼청동 계곡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면 삼청동의 역사를 놓칠 공산이 크다. 20세기 역사학의 지평을 연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는 평면이 아니라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3차원의 입체이며, 최소 3층짜리 건물의 구조를 띠고 있다고 역설했다. 상층부에는 단기지속의 시간을 나타내는 사건사(事件史)가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삼청동 계곡이 복개돼 집이 들어서고, 용도가 변경되고, 증축이 일어나며, 개축했다가 철거되는, 반세기에 걸친 변화이다. 정치적 시간의 흐름이다. 중간층에는 경제·사회·문화 등 좀더 장기적이며 불변적인 요소를 포함한 문명사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국면사(局面史)로서의 사회적 시간이 흐른다. 유교 논리가 판친 조선사회에서는 의외인 도교의 신전 삼청전(삼청보전)과 도교의 제사의식을 행하는 관청 소격서의 존재가 그것이다. 500여년에 걸친 제도와 문명사가 읽힌다.브로델은 맨 아래를 구조사(構造史)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사람의 행위에 의해 변하는 사건사와 국면사에 비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지리적 시간을 말한다. 비록 삼청동천이 복개돼 길로 바뀌고, 계곡에 집이 들어섰지만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의 지형적 본질은 바뀌지 않고 장기 지속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악산이라는 이름은 진국백(鎭國伯)이라는 관직에 봉해진 여신을 모신 백악신사에서 유래했다. 마주 보이는 목멱산(남산)에는 목멱대왕을 모시는 목멱신사를 두고 제사를 올렸다. 왕의 시선이 머무는 남산에 한 등급 위의 신분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주산 아래 법궁 경복궁을 세운 것은 만고불변의 원칙이었다. 백악산은 세 개의 골짜기를 거느리고 있는데 하나는 서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백운동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흐르는 삼청동천이다. 마지막은 도성 밖 백악의 북서쪽 사면을 돌아가는 백석동천이다. 백운동천은 개천(청계천)의 원류를 이루고 삼청동천은 북창교~소격교~장원서 앞 다리~경복궁 건춘문을 따라 흘렀다. 동십자각을 벗어나면서 서울의 4부 학당 중학을 만나 중학천으로 이름이 바뀐 뒤 교보문고 앞 혜정교에서 개천과 합류했다. 백석동천은 세검정을 거쳐 홍제천과 만났다. 조선시대 백악산 양쪽 삼청동천과 백운동천,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 낙산 서쪽 쌍계동천, 남산 아래 청학동천이 한양 5대 계곡으로 꼽혔다. 그중 삼청동천을 으뜸으로 쳤다. 동천(洞天)이나 동천(洞川) 또는 동문(洞門)은 수려한 골짜기를 일컫는 말이다. 같은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자연부락을 ‘골짜기 동’(洞)이라고 부른 데서 기원했다. 골짜기 동에 ‘하늘 천’(天) 자를 붙여 쓴 것은 신선이 노닐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1960년대 말 지금의 모습으로 복개되기 전까지 삼청동천은 서울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계곡이었다.용재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삼청동은 소격서 동쪽에 있다”고 썼고, 손곡 이달도 “삼청보전(삼청전)은 예 모습 그대로인데…”라는 시를 읊었다. 정조는 ‘삼청녹음’(三淸綠陰)을 나라 안 으뜸가는 8개의 경치인 ‘국도팔영’에 꼽았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도 ‘유(遊)삼청동기’를 통해 탄복했다. 삼청터널 어림에서 발원한 물길이 칠보사와 삼청공원을 지나 금융연수원 앞에 있던 북창교(금융연수원 안 번사청을 북창이라고 했음)에서 합쳐져 태화궁(국무총리 서울공관) 앞 너른 계곡에서 절정을 이뤘다. 총리공관 앞에 서면 ‘북촌8경’ 중 8경인 삼청동 돌계단이 거대한 병풍바위 절벽 사이에 뚫려 있는 게 보인다.유심히 관찰하면 바위에 새겨진 ‘삼청동문’(三淸洞門)이라는 암각 글씨 중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50m가 넘는 바위벽에 가로·세로 70㎝ 크기의 4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울시등록문화재 제58호이다.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콘크리트가 흘러내려 글씨가 일부 훼손됐다. 골목 안 지붕 위에 올라가지 않으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글씨의 주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숙종 때 명필 김경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해응이 쓴 ‘동국명산기’에는 김경문, 유본예의 ‘한경지략’에는 이상겸, 장지연의 ‘유삼청동기’에는 송시열의 필적으로 엇갈린다. 총리공관 자리에는 조선시대 태화궁이 있었다. 1970년 삼청동에 흡수되기 전까지 이 동네 이름은 태화동이었다. 국회의장 공관을 거쳐 1961년부터 국무총리 공관으로 사용 중이다. 공관 안에는 서울시 천연기념물 제254호인 900년 묵은 등나무와 255호인 300년 묵은 키 11m의 측백나무가 있다. 등나무는 키 16m, 둘레 1.8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맞은편 삼청동 산35 꼭대기에는 세종 때의 청백리 맹사성이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불던 집터가 있다. 맹씨 일가가 살아 ‘맹동산’이라고도 한다.오백 살 넘은 느티나무가 일품인 칠보사 옆 계곡에 운룡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운룡정’(雲龍亭)이라는 바위 각자만 남아 있다. ‘서촌 5사정’은 운룡정을 비롯해 옥인동의 등룡정, 사직동의 대송정과 등과정, 누상동의 백호정을 일컬었다. 칠성당에 제사 지낼 때, 정조의 수라상에 올렸던 성제정(星祭井) 혹은 형제우물, 양푼우물이 칠보사 위 60m 지점에 있다. 우물 옆 벽면에 ‘운룡천’(雲龍泉)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삼청동은 북쪽으로 부암동·성북동, 동쪽으로 가회동·계동·원서동, 남쪽으로 팔판동, 서쪽으로 청운동과 4면을 접하고 있다. 삼청동이라는 동명은 도교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성진(三淸星辰)을 모시는 삼청전이 있던 데서 유래했다. 삼청전의 위치는 삼청공원 서쪽 백련봉 기슭 ‘영월암’이라는 바위 글씨 근처로 추정된다. 스물두 살의 가난한 청년 연암 박지원이 백련봉 아래 이장오의 별장에 세 들어 살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시를 지은 곳이다. 조선 말 장동 김씨 세도가 김조순과 김유근 부자의 별서 터가 삼청동에 있었다. 김조순이 살던 옥호정은 금융연수원 길 건너편에 있고 김유근의 집 백련사는 감사원 아래 국군서울지구병원 안에 있다. 이들의 집 앞에는 인사 청탁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삼청전의 후광이 장동 김씨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전무후무한 세도와 정권교체기 금융연수원 안에 설치되는 새 정부 인수위원회의 권세로 이어졌다는 후문이 있다. 태조는 소격전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태종 때 삼청동파출소 뒤 소격서 터에 자리잡았다. 세조는 소격서로 개칭했다. 성종 때 도가사상 배격을 요구하는 조광조 등 유학자들의 반대에 못 이겨 산속 깊이 내쫓겼다. 제후국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관왕묘 신앙에 밀려 빛을 잃었다. 소격동이라는 동명과 소격서 터 푯돌로 남았다. 삼청동은 중국보다 더한 공자의 나라 조선에서 드문 도교의 흔적이다. 삼청동 밑바닥을 흐르는 삼청동천 물길이 ‘북촌의 힘’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서울의 영화2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 ●일시:12월 29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을지로 3가역 12번 출구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무능·교활한 사대부의 폭력, 여인들을 권력 유지의 제물로 삼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무능·교활한 사대부의 폭력, 여인들을 권력 유지의 제물로 삼다

    6월에 6·25전쟁을 떠올린다면 12월엔 병자호란을 기억하자. 자진한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염하(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를 흐르는 한강 하구)를 하얗게 덮었다는 그 겨울,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저희의 아내요 어머니요 딸인 이 땅의 여인들을 주검으로 내몬 저 사대부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교활과 폭력을 돌아보자.강화도는 무능한 권력자들에게 천혜의 도피처였다. 13세기 고려말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38년간 간 피란살이를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에 콕 박혀 40일 가까이 버텼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판단 잘못으로 남한산성으로 도주했지만, 도착한 다음날 새벽 강화도로 탈출을 시도했다. 12월 14, 15일의 일이었다. 인조보다 한나절 빨리 나선 탓에 강화도로 갈 수 있었던 세자빈과 왕실 가족 행렬 뒤로는 수많은 권세가의 가족들이 줄을 이었다. 영의정 김류는 아들(경징)을 안찰사로 삼아 왕실을 호종하면서 처첩, 며느리, 손녀 등을 딸려 보냈다. 강화 유수 장신은 우의정 장유의 동생이었다. 척화 및 주전론을 이끈 김상헌의 형 김상용도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무능 앞에선 천혜의 요새도 무용지물이었다. 1월 22일 새벽 청군은 특별한 저항 없이 갑곶 등에 상륙했고 불과 반나절 만에 강화성을 함락했다. 김경징과 장신은 사직과 왕실을 내팽개치고 나룻배로 도망쳤다. 함락된 강화도 여인들의 운명은 참혹했다. 적의 칼에 찔려 죽으면 다행이었다. 지아비나 아들로부터 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엔 참상의 일부가 나온다. 윤선거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맸다. 이돈오의 아내 김씨는 시어머니 동서와 함께 목을 찔렀다.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에 숨어 있다가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 유인립의 아내는 끝까지 버티다 꼿꼿하게 선 채로 죽었다…. 김경징이 도망간 뒤 남겨진 여인들은 남자들의 강요로 자살했다고 한다. 정선흥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아내를 꾸짖어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자결토록 했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부연했다. “염하엔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사람들은 애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인 잔혹사의 시작일 뿐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간 피로인은 추정치로 대략 50만~60만명. 당시 조선 인구가 1000만여명이었으니, ‘온 나라 백성 중 태반이 연루돼 있’었다. 여인은 20만여명.청은 인질로 끌고 왔지만 너무 많아 부담스러웠다. 청 태종은 이듬해 속환을 지시했다. 사대부 권력자들이 사람을 놓아 흥정했다. 좌의정 이성구는 아들의 속환가로 1500냥을 내놓았고, 영의정 김류는 첩과 딸 속환가로 1000냥을 내놓았다. 조선인 몸값은 수십, 수백 배 뛰었다. 정묘호란 당시 속환가는 남자 닷 냥, 여자 석 냥 정도였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 양반이라도 열 냥을 넘지 않았다. 서민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심양일기’에 이런 이야기를 실었다. ‘한 어머니가 딸을 속환하려고 200냥까지는 어찌어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은 300냥을 불렀고, 다시 250냥으로 낮췄지만 그다음부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집안 사정을 아는 딸은 자신의 몸값으로 말미암아 부모님이 겪을 어려움을 생각하고는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 보다 못해 최명길이 심양으로 가 청 태종과 담판을 했다. 돌아올 때는 3만여명의 조선인이 그와 함께 귀향했다. 그즈음 조정에서는 해괴한 논의가 벌어졌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인조편 1938년 3월 11일자. 봉림대군의 장인 장유와 전 승지 한이겸이 상소문을 동시에 올렸다. 장유는 “며느리가 속환되어 왔는데 조상의 제사를 차마 받들 수 없으니 외아들이 이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고 한이겸은 “딸이 어렵사리 속환되어 왔는데 사위가 딸을 버리겠다고 하니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조정의 논의는 “이미 정절을 잃어 대의가 끊겼으니 억지로 결합하게 할 수 없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최명길이 나섰다. “나라가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허다한 부녀자들은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될 것입니다.”임진왜란 때도 있었던 논란이었다. 선조는 이항복 등 중신의 뜻에 따라 전쟁 중 인질로 붙들려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부인들을 내쫓지 못하게 했다. 인조는 최명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물러설 사대부가 아니었다. 실록 5월 1일자. 부제학 이경여, 교리 심동구·성이성, 수찬 최유해가 상소문을 올렸다. “어찌 강제로 다시 결합하게 하여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비록 일제히 이혼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더라도 재취하거나 그대로 데리고 살거나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이 자유의사지 실은 한 가정의 며느리요 아내요 어미를 멋대로 내치는 것을 합법화하라는 것이었다. 패륜이 ‘사대부의 가풍’이었다. 인조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경연 자리에서 특진관 조문수가 다시 꺼냈다. “돌아온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어찌 다시 억지로 합해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조선을 동방패륜지국으로 만들면서도, 입술엔 동방예의지국을 올렸다. 6월 13일 사헌부와 예조가 문제를 제기했다. “정절을 잃은 부인에게 어찌 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들며 대를 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구가 이들을 거들었고, 최명길이 반론을 펴자 우의정 신경진이 반박했다. 인조는 잘라 말했다. “선조 때의 사례에 따르도록 하라.” 이른바 ‘대의’와 ‘절의’는 주전파 사대부가 전쟁으로 나라를 거덜 내고도 권력을 쥘 수 있는 유일한 핑계. 1640년 9월 22일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장유의 부인이 낸 상소문이었다. “(내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합니다.” 인조는 흔들렸다. 자신의 안사돈(봉림대군의 장모)이 칠거지악까지 들고 나온 데다 주변엔 최명길 같은 신하도 없었다. “특별히 그의 소청만 윤허하니 이 일을 관례로 삼지 말라.” 장유의 아들에게만 허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과 며느리를 버리기 시작했다. 병자호란 이후 10년간 돌아온 여인은 2만 5000여명에서 5만여명(추정치). 사대부들의 생떼가 빗발치자 인조는 인질이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홍제천을 회절강으로 삼았다. 환향녀가 그곳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을 되찾은 것으로 간주해 내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 회절강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1649년 ‘북벌’의 기치와 함께 주전파를 중용한 효종이 즉위했다. 효종은 즉시 환향녀 소박을 자유화했다. 평민 가정에서도 며느리를 내치기 시작했다. 환향녀에 대한 손가락질은 집안에서 시작돼 동네로 번졌다. 환향녀의 이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없도록 한 마을도 있었다. 집안의 환향녀는 들보에 목을 매거나, 칼로 손목을 그었다. 내쳐진 여인들은 회절강에 몸을 던졌다. 홍제천 모래내엔 여인들의 주검이 하얗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간 여인이 1만여명에 이르렀다나? 죽지 못한 이들은 서대문 밖에서 술과 몸을 팔았다. 청국 사람들과 심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도 있었다. ‘환향녀’의 참극은 사대부 주전론자들의 행운이었다. 전쟁 책임론을 덮고, 대의명분 논쟁의 주도권과 함께 권력도 쥘 수 있었다. 그 손끝에서 나온 실록의 ‘역사’는 예컨대 이러했다.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가 최명길이다. 통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장유는) 조정에서는 명신이었고,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공훈은 마원과 등애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와 구양수를 앞질렀다.” 흑백을 바꿨다. 대명천지에. 논설고문 kbc@seoul.co.kr
  • [포토]일본서 찾은 한국 도자의 빛

    [포토]일본서 찾은 한국 도자의 빛

    400년 전통의 다카토리가마의 15대 계승자 가메이 미라쿠(龜井味樂·57)가 빚어낸 작품.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이 만든 다카토리가마의 명맥을 이으면서 조선 기법의 뿌리는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카토리가마 제공 다카토리가마 15대 계승자 가메이 미라쿠 인터뷰 보기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가마의 조상 팔산, 임란때 ‘흑대장’에 의해 끌려왔죠…독자적 작품 남겨”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가마의 조상 팔산, 임란때 ‘흑대장’에 의해 끌려왔죠…독자적 작품 남겨”

    가마의 ‘한국 뿌리’ 찾는 다카토리 가마 15대 계승자“우리 가마의 뿌리를 찾고 싶습니다. ‘조선전쟁’(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때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장군이 철수하면서 데려왔던 도공이 우리 가마의 시작입니다. 그 도공은 조선의 이도(韋土)라는 곳에서 도기를 굽던 ‘팔산(八山·일본 이름 하치야마)’이란 사람입니다. 그가 게이초 5년(1600년)에 시작한 것이 다카토리가마(高取燒)의 시초입니다. 우리 가마의 조상 즉 도조(陶祖)이죠.”400년 전통의 다카토리가마의 15대 계승자 가메이 미라쿠(龜井味樂·57)는 “초대 팔산이 살던 한국 마을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언제까지나 수수께끼 상태로 남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가메이는 지난달 30일 경남 양산에서 열린 ‘2018년도 법기리요지 국제학술심포지엄(NPO 법기도자 주관·이사장 신한균)’에서 ‘다카토리야키의 역사와 고려다완(조선사발)의 매력’이란 주제 발표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 그를 인터뷰했다. 조선 사발을 일본에서는 통상 ‘고려 다완’으로 부른다. “마을 노인 ‘흑대장’ 이야기 기록과 일부 부합항아리 사금파리 발견...초기엔 웅기마을 있어” 한국을 5번째 방문했다는 그는 뿌리찾기 과정을 설명했다. “이도에서 팔산을 데려왔다는 막연한 기록만 가지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위토, 정호, 팔산, 팔산리 등 시골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마을의 노인으로부터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노인의 구전에 의하면 ‘흑대장(黑大將)이 일본으로 철수할 때 하룻 밤에 마을 사람들을 전부 데려가 마을이 없어졌습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일부는 기록과 맥이 통합니다. 연행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흑대장 이야기’로 전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흑대장은 구로다(黑田)을 말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노인이 말한 그 마을에는 김치 항아리의 사금파리가 수 없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초기의 일본 하치아먀(八山) 마을에는 옹기를 만드는 작은 집단이 있었습니다만 몇가지 더 검증이 필요합니다.” 다카토리 가마라는 이름 유래도 설명했다. “지쿠젠(筑前·후쿠오카현 북서부의 옛 이름)에 끌려온 팔산이 다카토리산(鷹取山) 기슭에 가마를 열었습니다. 그때부터 산이름을 따서 다카토리야키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그리워해 발음이 같은 고려의 고(高)를 따서 다카토리(高取) 가마로 바꿔불렸습니다. 팔산 자신은 일본식 이름 ‘타카도리 하치조(高取八藏)’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팔산은 당시엔 50석의 녹을 받는 무사 신분으로 영주의 보호를 받았다. 다카토리 가마는 3대에서 팔산의 자녀가 없어 대가 끊어졌다. 사위도 없었다. “다카토리 가마는 4대째부터의 제자가 대를 이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다카토리라는 가마 이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계승자가 한국 이름을 5대째 이어오는 심수관가(家)와는 차이가 난다. “팔산, 50석 녹봉 받는 무사 신분...영주가 보호조선 그리워해 가마 이름 ‘高’ 넣어 다카토리로4대째부터 제자 계승...15대째 가마 이름 습명”다카토리 가마의 명성은 일본에서 높다. 일본의 유명 차인 고보리 엔슈(小堀 遠州·1579~1647)의 지도로 차도구를 만든 엔슈칠요(遠州七窯) 가운데 하나다. 오키나와에서부터 홋카이도까지의 수만개의 가마가 있는 나라에서 일본의 대표적 자랑거리인 다도와 관련해 타카도리 가마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667년 아사쿠라로 이전하면서 엔슈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다카토리 가마의 스타일이 완전히 변했고, 독자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조선의 체취가 남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700년대 이전한 히가시사라야마(東皿山) 가마 시절엔 1000개를 구워 최고의 한 점만 남기고 999점은 깨버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남은 작품들은 정말 놀랍죠.” 2001년 15대 다카토리를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함)한 그는 요즘도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한다. “어릴 때부터 13대, 14대 계승자가 작업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지요. 요즘엔 보통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지요. 오랜 역사 속에서 선인들이 일으킨 기술을 전승하고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가마에 불을 지핀 다음이거나 이럴 때는 작업이 없어 쉬기도 하지만요.” 사가미술대에서 도예학과를 마치고, 여러 곳에서 전시회도 많이 하고, 상도 많이 받았다. 미국 센추리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공예회 정회원으로 도예교실도 운영한다. 그의 아들 가메이 히사아키(27)가 16대를 잇기 위해 수업중이라고 한다. “아들도 대학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마 고유의 전통 기법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도자기 대신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다른 일을 하고싶다거나 별다른 거부의 의사 표시가 없었다”고 답했다.“도자기 천점 구워 한 점만 남기는 장인 정신요즘도 10시간씩 일 해...아들에 전수 작업” 한국과 일본, 중국 도자기에 관해 묻자는 그는 다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재작년 카라츠야키(唐津燒) 수장 나카자도 다로에몬과 중국 자주요(磁州窯)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방문인데다 대학생 시절 자주요 작품을 흉내내본 적이 있어 관심이 컸습니다. 옛 도자기를 보노라니 놀라운 작품에 눈이 커졌습니다만 현재의 작품은 질감 등에서 실망을 느꼈습니다. 반면 3년 전 한국의 분청 사기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분청의 퇴색된 듯한 그 느낌의 작품이 제 취향에 맞아서인지 자주요의 그것보다 훨씬 감동이 컸습니다. 일본의 옛 도자기는 보면 어느 지역의 것인지 알 수 있지만 현대 도자기는 지역 구별이 어려워졌습니다.” “조선사발 ‘산봉우리의 꽃’...거친 조형미 완벽한국 흙·유약으로 한국 전통 가마서 구워보고파” “저는 ‘엔슈 다카토리’를 주축으로 하는 도자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다완에 흥미가 끌립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전해진 초기의 타카도리 가마의 기법이고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거친 도토(陶土)를 사용해 투박하고 거친 조형미가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조형에서 드러난 매화피는 정말 놀랍죠. 조선사발은 산봉우리의 꽃과 같습니다. 지금은 제 가마에서 사용하는 흙이 달라 옛 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흙을 수입하는 것은 검역 관계상 쉽지도 않습니다. 한국의 흙과 유약을 사용해 한국 전통 가마에서 한번 구워보고 싶기도 합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통도사 가는 길 - 양산 통도사(通度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통도사 가는 길 - 양산 통도사(通度寺)

    “나는 왜 통도를 ‘通道(통도)’로 알았을까?” <민음사,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1996> 대부분 눈치채지는 못할 듯 하다.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의 현판을 보고 있자면 가운데 글자인 ‘도’는 길을 뜻하는 ‘道(도)’가 아니라 법이나 단위, 수준, 경지를 뜻하는 ‘度(도)’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통도'는 일반 중생들 지레짐작의 ‘길이 통한다’라는 의미보다는 결국 승려가 되고자 하는 자가 ‘부처가 다다른 수준, 즉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라는 출가 발원(發願)을 되짚는 말이다. 이리하여 통도사는 일반인의 상식에서 벗어나 다시금 반전의 의미를 갖게 된다.국내에 위치한 사찰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특징 및 가람배치를 통하여 절집으로서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중에서 삼보사찰의 경우 이러한 성격을 더욱 더 잘 나타내고 있다. 즉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유명하며, 합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로, 순천의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로 총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僧寶) 사찰로 이름나 있다.이중 통도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 제1 적멸보궁이기에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적멸보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을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그 중 통도사가 으뜸인 셈이다. 통도사 법당의 모양도 무척이나 특이하다. 하나의 법당이지만 방향에 따라 다른 이름을 품고 있다. 동쪽방향으로 법당에 들어가면 대웅전이 되고, 남쪽으로 올라서면 금강계단이라 부르며, 서쪽으로는 대방광전의 이름으로, 북쪽은 적멸보궁의 현판을 걸고 있다. 이리하니 예로부터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품고 있다는 자신감에 여느 사찰에서나 즐겨 사용하는 흔한 가람배치 형식은 취하지 않고 스스로의 개성을 확실히 갖추고 있다.여기서 또 한 번 관람객의 호기심을 살짝 흔드는 글자가 통도사에 숨어 있다. 흔히들 통도사에는 유명한 금강계단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저기 계단이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지 묻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흔히들 계단이라 하여 ‘오르내리는’ 용도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의 ‘계단’은 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을 의미한다. 즉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장소에서 ‘금처럼 굳센 계율을 새로이 승려가 되는 사람이 받는 제단’이라는 뜻으로 대웅전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통도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46년(신라 선덕여왕 15) 자장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데 이때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643년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 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봉안한 곳이 통도사다. 자장은 계단(戒檀)을 쌓고 난 뒤 승려를 배출하고자 노력하였다.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사찰이 전부 소실되어 현재 우리가 만나는 통도사의 건물들은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들로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선원, 응진전, 명부전, 삼성각, 산신각,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세존비각,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不二門) 등 조선의 시간과 더불어 통도사 만의 깊은 시간을 넉넉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통도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다. 한 번은 가 볼만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연인들. 늦은 가을. 3. 가는 방법은? - KTX울산(통도사)역에서 13번 시내버스를 이용. (첫차 07:12 / 막차 21:13 / 운행횟수 16회) 소요 시간은 30분정도. 택시 이용시 소요 시간은 20분정도이며 택시요금은 25,000원정도. 4. 감탄하는 점은? - 대웅전, 금강계단. 영축산의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늦가을 풍광.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이면 인산인해. 주중도 방문객이 많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금강계단, 대웅전, 세존비각, 명부전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산채비빔밥 ‘경기식당’, 조촐한 시골 분식 ‘달맞이꽃 분식’, 홍합밥 ‘동심’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tongdosa.or.kr/kor/index.ph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놀이공원 ‘통도 환타지아’, 동래 범어사, 금정산성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통도사는 큰 절집이다. 일주문에서 불이문,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가람배치와 더불어 진신사리를 품고 있다는 시찰의 자부심이 한껏 느껴지는 대형 사찰이다. 늦은 가을이 제격인 사찰.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해상·공중 동시 상륙작전 ‘노적봉함’ 해군에 인도

    해상·공중 동시 상륙작전 ‘노적봉함’ 해군에 인도

    방위사업청은 21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차기상륙함(LST-Ⅱ) ‘노적봉함’을 해군에 인도한다고 밝혔다. 방사청이 해군에 인도하는 노적봉함은 2014년 11월 첫 번째 차기상륙함인 천왕봉함을 시작으로 천자봉함, 일출봉함에 이은 마지막 네 번째 함정이다.노적봉함은 기존에 해군이 보유한 고준봉급 상륙함보다 기동속력과 탑재능력 및 장거리 수송지원 능력이 향상된 것이 특징이다. 4900톤급 규모의 노적봉함은 최대속력 23노트(약 40㎞)로 항해가 가능하고 120여 명의 승조원이 탑승해 운용하게 된다. 또 함 내에 국산 전투체계와 지휘통제체계를 갖춘 상륙작전지휘소를 보유해 지휘관의 효과적인 작전지휘가 가능하다. 또 병력 300여 명과 상륙주정 3척, 전차 2대, 상륙돌격장갑차 8대를 동시에 탑재할 수 있고 함미갑판에 상륙기동헬기 2기가 이착륙이 가능해 해상과 공중으로 동시에 전력을 전개하는 ‘초수평선 상륙작전’ 수행능력을 보유한 함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적봉함은 국내에서 지명도가 높은 산의 봉우리를 상륙함의 함명으로 사용해 온 해군의 관례에 따라 전남 목포 유달산의 ‘노적봉’에서 이름을 착안했다. 방사청은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 바위에 볏짚을 덮은 후 군량미로 위장하여 왜군의 침략을 저지하고 아군의 사기를 높인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라고 설명했다. 노적봉함은 2015년 11월 현대중공업에서 건조를 시작해 인수 시운전과 국방기술품질원의 정부 품질보증을 받아 앞으로 4개월간 해군의 승조원 숙달훈련 등의 과정을 거쳐 내년 전반기 중 실전 임무에 투입될 예정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 권위 회복하려던 ‘조선의 주자’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 권위 회복하려던 ‘조선의 주자’

    “우리나라는 작고 힘이 약하여 비록 큰일을 할 수는 없으나 항상 ‘억울함과 애통함을 품은 채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을 그대들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천지가 만물을 낸 것이나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올곧음(直)’일 뿐이었고, 공자와 맹자 이래로 전해온 것도 오직 올곧음뿐이었다. 주자가 임종시에 문인들에게 고했던 말씀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제군들은 기억하도록 하라.” -윤봉구가 지은 송시열 묘지(墓誌)송시열이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훈계한 내용이다.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 그 가르침은 바로 타협하지 않는 ‘올곧음’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의 일생의 좌우명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위기의 시대에 어젠다를 제시하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은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병자호란 때 나라의 치욕을 목도한 이후 송시열은 벼슬할 생각을 접고 산림에 은거해 학문에 몰두했다가 효종 때에 올린 ‘기축봉사’와 ‘정유봉사’를 통해 이후 나라가 지향해야 할 청사진을 제시했다. 우암은 여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학문적 성과를 드러낸다. 그 내용은 세제를 바로잡고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할 것, 궁궐과 신하들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 궁중의 사치를 금하고 검약을 실천할 것, 내수사를 혁파할 것, 왕이 학문에 힘쓸 것, 속오군이나 대동법 등 정책을 일관성 있게 시행할 것, 공자-주자로 이어지는 학통을 확립할 것, 북벌을 위해 내정을 개혁할 것 등이다. 구체적인 정책뿐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의 기강을 다시 세우고자 북벌을 제시하고 주자학을 이념화해 사상을 단속함으로써 기존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때보다 지배층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전 국토가 유린당한 사태는 왜란 때보다 덜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항복했다는 치욕과 정신적 지주인 명나라의 멸망으로 사대부 층에서는 기존의 가치와 권위가 흔들리는 혼돈을 겪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엇을 제안해야 할 것인가. 주자를 깊이 연구해왔던 송시열은 오랑캐의 위협 하에 있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주자가 처했던 남송시대와 유사하다고 봤다. 그리하여 대외적인 문제뿐 아니라 국내 정치, 학문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주자의 권위와 의리를 내세워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적을 물리치려면 내치부터 닦아야 ‘송시열’ 하면 ‘북벌론’을 떠올린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땅에 떨어진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중화를 존숭하고 이적을 물리쳐야 한다(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명분을 시대의 사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론에 관해서는 ‘현실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을 많이 한다. 한편으로 ‘효종은 진심이었으나 송시열은 명분만 동조했을 뿐 실제 결행 의지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의 처지에서 북벌은 언제나 내치의 수행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정사를 잘 수행하여 이적을 물리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공자가 ‘춘추’를 지어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천하 후세에 밝히셨으니, 혈기를 지닌 자라면 중국을 존숭해야 하고 이적을 추악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중략)…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오랑캐는 군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라고 마음을 굳게 정하여 원한을 잊지 말고 원통함을 품고서 공손한 언사 속에 분노를 더욱 깊이 감추고 예물을 바치는 중에 와신상담하는 마음을 더욱 절실히 가지십시오.” -‘기축봉사’ 효종: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이오, 경이 전에 말하기를 ‘병력을 기르는 일과 백성을 기르는 길은 반드시 서로 방해가 된다’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서로 방해가 되지 않겠소? 송시열: 그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주자의 말씀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재력에 관계되는 것을 일절 함부로 쓰지 말고 모두 군수(軍需)로 돌리면 군수가 점차 넉넉해질 것입니다. 효종: 주자의 말씀은 과연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이오? 송시열: 옛 성인의 말씀에는 간혹 시대와 형편이 달라 시행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주자의 말씀은 시대와 형편이 지금과 매우 가깝고 또 주자가 만났던 시대상도 오늘날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신은 그 말씀을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대설화’ 명나라를 존숭한다는 것은 단지 사대의 의리나 임진왜란 때 구원해준 의리 때문만이 아니다. 명나라는 중화라는 문명의 상징, 정주학이라는 도학의 근원지로 사대부층에는 정신적으로도 부모의 나라였다. 따라서 북벌론은 당시의 급격한 상실감을 메우고 자존심을 부지해주기 위한 하나의 치유책으로 일정한 역할이 있었다고 보인다. 즉 송시열에게 북벌은 실행 가능성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흩어진 민심을 단속하고 내치를 다지며 국가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동력이었다. #주자를 믿고 이단을 물리치라 송시열: 윤휴의 죄 중에는 무슨 일이 가장 큰가? 권상하: 역모죄가 가장 큽니다. 송시열: 그대의 궁리공부(窮理工夫)가 깊지 못하구나. 권상하: 그렇다면 주자를 모욕한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송시열: 그렇다. 사람치고 성현을 모욕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느냐? -권상하가 기록한 어록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이 조선을 이끌어줄 대안이라 여겼다. 그 자신도 주자학에 조예가 깊어 수십 권의 관련 저서를 남겼다. 이러한 주자학에 대한 신념과 타협을 모르는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주자와 대치되는 학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과 배척을 가했다. 청나라의 현실적 패권을 인정하고자 했던 허적은 역모로 숙청됐다. 경전에 대해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하고 우암의 예설에 반론을 제기했던 윤휴에게는 ‘사문난적’의 이름이 더해졌다. 역모보다 주자를 모욕하는 것이 더 큰 죄라고 여겼기 때문에 역적의 누명은 후에 신원되더라도 사문난적이란 오명은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역적을 편드는 무리가 역적보다 더 나쁘다는 논리로 윤선거나 윤증과 불화하여 서인 내에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당파에 따라 극명하게 다르다.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의 송시열 졸기에서는 “송시열이 윤휴와 윤증을 배척할 때에 비록 송시열을 존중하는 자라도 혹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그 끝에 가서는 마침내 모두 송시열의 말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라고 했다. 그러나 소론이 편찬한 ‘숙종보궐실록’의 송시열 졸기에서는 “한마디 말이 회덕(懷德·송시열)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견과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도 곧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라며 그 실상을 보여준다. 숙종 때 당파 간 교체가 있었지만, 영조 이후로 노론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송시열은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받고 ‘대로(大老)’라 불린다. 그리고 그의 노선은 이후 200여년간 노론의 의리가 되었다. 김성애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송자대전’은 왕명으로 편찬·간행… 성에 ‘子’ 붙인 제명 전무후무 문집은 숙종 43년(1717년)과 정조 11년(1787년), 1927년 모두 세 차례 간행됐다. 숙종 때는 활자본으로, 정조 때는 목판본으로 간행됐다. 두 번 모두 국가의 지원 하에 왕명으로 편찬하고 간행했다. 특히 정조 때 236권 102책이란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간행한 ‘송자대전(宋子大全)’은 성에 ‘자(子)’를 붙인 제명부터 유례없는 전무후무한 것이다. 문집의 제목은 대개 저자의 호나 시호, 관직명을 붙여 ‘00문집’, ‘00유고’ 등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예컨대 숙종 때 발간한 ‘우암선생문집’이 그렇다. ‘우암선생’과 ‘송자’라는 명칭은 우암의 공식적인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후 우암의 저서와 행적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작업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습유, 속습유, 부록 등을 모두 합치면 261권 113책이란 거질이 된다. 원문은 현재 한국고전종합DB에서 서비스한다. 또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80년대 ‘송자대전’ 주요 작품을 뽑아 번역해 ‘국역송자대전’을 출간했는데, 현재 완역 중이다.
  • 한국 전통과학, 왜 변방에 머물렀나

    한국 전통과학, 왜 변방에 머물렀나

    첨성대·측우기·사상의학 등 독창성 보여 수준 낮지 않았지만 세계적 기여는 작아 옛 천문 기록, 태양계·은하 분석에 도움 한의학·신기술 합치면 예방의학 등 발전“중국의 전통과학은 왜 발전하지 못했는가?” 영국의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을 써 과학사학자로 더 유명하다. 니덤은 13세기까지 서양이 넘볼 수 없을 정도의 과학기술을 가졌던 중국이 근대과학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를 찾아 나섰다. 중국 전통과학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밝혀냄으로써 중국 과학이 세계 과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줄기로 자리잡게 됐다. 과학사학자들은 한국의 전통과학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국수주의적 관점이나 무조건적인 배척이라는 양극단을 벗어나 한국의 전통과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충고하고 있다. 14일 오후 국립과천과학관에서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통과학포럼’이 열렸다. 이번 포럼은 과천과학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존 전통과학관을 한국과학문명관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한국 전통과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 세계 최초 우량계인 측우기, 표음문자 한글, 중의학과는 다른 철학을 보여주는 한의학인 사상의학이다. 임진왜란 때 사용된 일종의 행글라이더인 비거(飛車)나 포탄인 비격진천뢰도 한국 과학의 독창성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된다.이런 뛰어난 과학기술 유산을 갖고 있음에도 한국 전통과학이 세계 과학사의 변방에 머물러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세계 과학 발전에 기여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측우기로 비의 양을 정확히 계측하기는 했지만 세계 다른 지역의 측정 과학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고 첨성대나 한글, 사상의학에서 독창성과 우수성은 높지만 세계적 파급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조발제를 맡은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과학사) 교수는 “니덤은 세계 각국의 과학을 바다로 향하는 강의 여러 지류로 표현했는데 한국 전통과학의 현재는 이 같은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며 “더군다나 우리나라 과학유물이나 전통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들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은 한국 과학문명을 정확히 읽는 것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에 집중하는 이유는 한국 과학문명의 수준을 외국인들에게 쉽게 알리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개화기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신 교수는 해석했다. 한국 전통과학문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맥락, 더 나아가 과학기술 전반의 구조와 변천과정을 바탕으로 한 문명론적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과학발전에 기여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전통 과학기술은 해당 시대의 정치, 군사, 경제, 복지, 문화부문을 뒷받침해 왔고 동시대 동아시아 주변국들과의 수준과 비교했을 때도 뒤처지지 않았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한국 과학문명 수준을 무시하거나 ‘한국에는 과학문명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특히 현대 과학적 관점에서 주목받는 분야는 천문학이다. 실제 청동기 시대 천문유적을 비롯해 기원전 1세기 삼국시대 초기부터 천문현상이 기록돼 왔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분량의 천문기록이 실록이나 관청의 일기로 남아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최근 고천문연구를 통해 역사문헌 속 천문 현상들이 실제로는 헬리혜성이나 케플러초신성, 태양 흑점과 오로라 활동을 관측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과거의 천문기록은 천체현상의 통계적 분석은 물론 태양계나 우리 은하 특성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은다.동의보감과 사상의학으로 대표되는 한의학 역시 현대의학 기술과 빅데이터, 인공지능과 통합함으로써 예방의학이나 환자 맞춤형 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도 크다.이처럼 잘 보존된 과학문화는 단순히 문화유산으로 가치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의 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신 교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외부 세계의 자극에 대해 어떻게 역동적으로 대응해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문명의 패턴”이라며 “한국 전통과학이 당대 동아시아 각국과 경쟁하며 발전해 온 모습은 ‘오래된 미래’라는 차원에서 한국 과학이 나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나당동맹에서 한미동맹까지…‘빈틈없는 공조’의 그늘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나당동맹에서 한미동맹까지…‘빈틈없는 공조’의 그늘

    2015년 일본은 졸지에 ‘빨판상어’라는 듣기 거북한 별명을 얻었다. ‘미군이 시키면 무엇이든 하는 빨판상어’다. 국민감정이 안 좋은 한국이나 중국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다. 자국의 학자들이 붙였다.2015년 8월 19일 야마모토 다로 의원은 참의원 전체회의에서 아베 신조 총리에게 물었다. “미군이 요구하면 헌법을 짓밟고라도, 국민의 생활을 파괴해서라도, 온 힘을 다해 따르는데…이런 나라를 독립국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아베 정권이 원전 재가동,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비밀보호법, 집단자위권에 이어 안보법제까지 강행하려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구상 제3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2012년)를 베낀 것 아니냐며 한 질문이었다. 아미티지 보고서에는 ‘일본이 2류 국가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일본이 자신에게 강제하는 (군사력 증강, 역내 개입 등의) 제약을 풀고,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략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일본의 TPP 참여 등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의석에서는 이런 야유가 쏟아졌다. “그런 것쯤은 국회의원이라면 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으니 국회의원 노릇도 정치인 시늉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촌뜨기처럼 그런 얘기는 왜 하는가.” 여기서 ‘그것’이란 ‘미국의 속국’을 뜻했다. 일본은 한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동맹을 미국과 맺고 있다. 전시작전권이 주한미군에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작전권은 총리에게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학자나 정치인들은 미국에 대한 속국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미국과 지구상에서 가장 예속적인 동맹을 맺고도 허구한 날 ‘더 강력한 동맹’을 촉구하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사뭇 다르다.다로의 논쟁을 계기로 정치학자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대담 형식의 ‘속국 민주주의론’을 출간했다. 우치다는 이렇게 말했다. “속국의 입장을 수용하고, 맹세한 자만이 이 나라의 지배층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지난 70년간 일본에 자리잡은 지배구조다.” 시라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일본의 천황은 미국”이라며 “존황양이가 아닌 존미양이가 일본의 깃발이 되었다”고 말했다. 우치다의 지적처럼 많은 한국의 엘리트 집단은 “미국 정부의 환심을 얼마나 사느냐가 정치적 능력으로 인정받는다”(박태균 서울대 국제 관계학부 교수)고 굳게 믿는다.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는 만사 제쳐 놓고 미국으로 달려가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고, 낙선한 자도 미국에서 소일하다 돌아온다. 김무성 의원이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DC에서 ‘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느냐’는 투로 최근 한국 대사를 몰아붙인 것도 그런 ‘환심사기’로 읽혔다. 족벌언론들은 틈만 나면 ‘미국과 한 몸이 되라’(일체화, 一體化)고 외쳤다. 5월 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자 이들은 환호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자석을 계속 유지하면서 비핵화와 평화를 달성하려면 미국과 강력한 한 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중앙일보, 5월 23일자) “지금은 한·미가 한 몸이 돼서 북을 설득하고 때로 압박해 가면서 이른 시일 내 핵 폐기를 결심하도록 해야 할 때이다.”(조선일보, 5월 27일자) 이런 일체화론(‘한몸론’)은 ‘빈틈없는 공조’ 등 때마다 여러 가지 수사로 나타나지만, 최소한 미국의 뜻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뜻에는 차이가 없다. ‘일체화론’은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들어오면서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그 뿌리는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나당동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은 이 동맹을 빌미로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 고려는 종주국인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새로 굴기하는 명을 치려다가 왕조 자체가 몰락했다. 명과 군신관계를 맺었던 조선은 인조 때 중원의 새로운 패자 후금(청)과 맞서다가 국민과 국토를 어육으로 만들었다. 조선 말 조미수호협상 때는 청의 이홍장이 교섭을 대신했으며, 이홍장은 ‘조선은 청의 속방이다’를 제1조로 한 초안을 미국에 제시했다. ‘일체화’라는 표현이 실제로 등장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부터였다. 이용구, 송병준 등 ‘일진회’가 제기한 ‘일한일체화론’이 그것이다. 절찬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제작진은 지난 7월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냈다. 구한말 실제로 존재했던 일본 흑룡회를 등장시켜 친일 미화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흑룡회는 19세기 말부터 일찌감치 조선병합론을 주장했던 일본의 극우단체였다. 제작진이 이 단체의 한성지부장이란 인물을 영웅적인 무사로 등장시켰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본 군부와 정계에 넓은 인맥을 가진 흑룡회는 19세기 말 일본인보다 더 일본스러운 조선인들을 키워 조선 병탄에 앞세웠다. 이용구(진보회)와 송병준(일진회)이 1904년 12월 2일 ‘일진회’로 통합할 때 후견 집단이 바로 흑룡회였다. 통합 직전 두 사람이 내건 기치가 ‘일한일체화와 문명화’였고, 서약의 표시로 회원들에게 단발을 촉구했다. 일진회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과 한 몸’임을 과시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 지원에 앞장섰다. 북진수송대를 조직해 1905년 6월부터 10월까지 무려 11만 4500명(연인원)의 회원을 동원했으며, 비용 대부분도 일진회가 부담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진회는 11월 5일 이런 성명을 냈다. “(외교의 권한은) 차라리 우방 정부(일본)에 위임하여 그 힘에 의지하여 국권을 보유하는 것도 폐하 대권의 선양이 아닐까.…그 지도 보호 아래 국가의 독립과 안녕, 행복을 영원무궁하게 유지하고자 이에 감히 선언한다.” 흑룡회의 실력자 우치다 료헤이는 당시 일진회 고문이었다. 성명 발표 후 12일 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다(을사늑약). 1909년 7월 6일 일본 정부는 병탄 방침을 확정했다. 이에 이용구는 일본과 정치체제의 통합을 추진하자며 ‘정합방론’을 제시하고, 12월 4일 일진회 이름으로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사직과 백성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는 데 달려 있다.’ 일본은 이듬해 8월 대한국을 병탄했다. 일체화론의 귀결이었다. 지난 11월 2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부지가 공개됐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에 접수당한 뒤부터 한국인에게 금단의 땅이었으니 113년 만이었다. 그곳엔 주한일본군 사령부와 일본군 20사단이 주둔했고, 조선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해방 후엔 미군에 접수돼 총독 관저는 미군 병원으로, 일본군작전센터는 미군 벙커로, 일본군 장교 숙소는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건물로 쓰였다. 일본군 병기지창엔 미군 공병대와 시설대가 들어섰다. 1905년 일본군이 접수하기 이전에도 이곳은 ‘종주국’의 기지로 쓰였다. 고려 때는 몽골군의 병참기지가,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의 군대, 그리고 1895년엔 청일전쟁의 승자인 일본군이 주둔했다. 용산 기지 터는 더 강한 동맹을 앞세운 ‘일체화론자’들의 성지였으며 한국인에겐 ‘속국’의 상징이었다. 한·미동맹에 침을 뱉으려는 게 아니다. 한·미동맹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켰고, 이후에도 북한의 남침 의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문제는 이 나라를 번방도 속방도 아니요, 아예 속국으로 하자는 일체화론자들이다. 전쟁 중에도 동맹의 그늘에 숨어 권력 쟁취에 여념이 없었고, 평시엔 미군과 미 정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권세와 영달을 누리려는 자들 말이다. 그들은 요즘 북한을 ‘핵을 가진 적’에서 ‘핵과 침략 의도를 포기한 이웃’으로 바꾸려는 정부의 노력을 필사적으로 방해한다. 일부 국민을 선동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과 한국이 한 몸이 돼야 한다고 외치도록 선동한다. 권력의 화수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구한말 이용구와 송병준이 일진회 회원들을 앞세워 일장기를 흔들며 일한일체화를 부르짖었던 것과 판박이가 아니고 무엇일까. 논설고문 kb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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