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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두관, 윤석열 겨냥 “부마항쟁과 6월항쟁 구분 하느냐”

    김두관, 윤석열 겨냥 “부마항쟁과 6월항쟁 구분 하느냐”

    김두관, “광주 눈물은 몇년도 눈물이었느냐”더 문제는 국힘 의원들…배우·연출도 영 아냐”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김두관 의원이 30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겨냥 “부마항쟁과 6월 항쟁을 구분이나 하는지 모를 일”이라고 비난했다. 김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어제 부산을 방문한 윤 후보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며 ‘부마항쟁’이냐고 물었다 한다. 진짜 기가 막혀서 뭐라 할 말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어 “사법시험 준비 하시느라 부마항쟁도, 6월 항쟁도 도서관에서 맞으셨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인의 평균치 상식이란게 있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김 의원은 “윤 후보는 지난 광주묘역을 방문해서 눈물을 흘렸다. 저는 그 눈물이 그래도 광주를 생각하는 ‘악어의 눈물’이라 생각했는데 어제 기사를 보니 혹시 그 눈물이 ‘임진왜란’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아닌가 생각했다”며 “광주 눈물을 몇년도 눈물 이었느냐”고 했다. 김 의원은 “더 문제는 윤석열 후보를 돕겠다고 옆에 있는 국힘 의원들”이라며 “배우를 무대에 보내려면 대사를 외우게 하던가, 대사를 못외우면 옆에서 컨닝 페이퍼라도 들고 있던가 해야지 이런 망신을 시키는 연출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라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이 영화는 배우도, 연출도 영 아닙니다. 10만은 커녕 5만명도 안들 3류 활극으로 끝날 것 같다”며 “이런 식으로 해서 극장에 간판이나 걸릴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앞서 김 의원은 윤 전 총장이 지난 25일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의 책임을 문재인 대통령이 져야 한다고 주장하자 “주인의 뒤꿈치를 무는 개”라며 비난한 바 있다. 윤 전 총장이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을 때에는 “광주 정신을 모욕했다”며 윤 전 총장의 손이 닿은 묘비를 손수건으로 닦기도 했다.
  • 조선시대는 원래 남녀 평등했다고?

    조선시대는 원래 남녀 평등했다고?

    남녘의 한 섬에서 엄청난 규모의 구들장논을 본 적이 있다. 규모도 대단했지만 더 놀라웠던 건 비탈에 층층이 돌을 쌓고 흙을 얹어 논을 만든 이들이 여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남자들은 뭘 했던 걸까. 이 이야기를 전해 준 할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똥지게를 지고도 한시(漢詩)만 읊조리는 남정네가 일은 무슨 일?”일반적으로 조선의 남정네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대략 이와 비슷할 것이다. 배 곯는 식솔들은 외면한 채 책만 읽거나, 곧 죽어도 선비연할 줄만 아는 남자들 말이다. 그렇다면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런 정서는 광범위하고 일관된 것이었을까.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은 이런 의문에 단호히 ‘노’라고 답하고 있다. 책은 조선의 사회상을 거울 삼아 현재의 성 역할론을 되짚어 본 사회비평서다. 당시 일기와 서간, 실록 등을 광범위하게 분석했다. 뜻밖에도 조선은 알려진 것과 다른 점이 많은 왕조인 듯하다. 최소한 16세기까지는 그랬다. 남녀가 평등했고 여권을 존중했다. 정원을 가꾸거나 살림을 돌보고 외조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요리하는 사대부들의 이야기는 이미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백종원 같은 ‘셀럽’들이 취미 삼아 했던 일로 여겼지, 살림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있다. “전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아침저녁 반찬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나쁜지 말이 없니? 무심하다, 무심해.” 표현만으로는 어머니가 자취하는 자식에게 보낸 편지인 듯하지만, 실은 연암 박지원이 1796년에 지방 관리로 일하며 한양의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그의 편지 전문을 보면 당시 요리하는 남자들이 보편적인 사회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그럼 남녀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뤄진 건 언제부터일까. 저자는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 큰 전란 이후 여자에 대한 불평등과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여기에 성리학이 정착되며 남녀의 공존의식을 파괴했고, 남녀의 역할과 지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내외법(內外法)도 강화됐다. 성별 역할 구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건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대를 지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강제로 근대화를 겪으며 집보다 사회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공사가 구분되며 집안은 철저히 사적 영역으로 치부됐다. 동시에 사회는 남자의 영역, 집안은 여자의 영역으로 구분됐다. 조선시대만 해도 집안 자체가 공이면서 사였는데, 이 시기부터는 남녀의 역할 구분만큼이나 집안과 사회의 구분도 뚜렷해졌다. 일제의 식민지 여자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현모양처’ 양성이었다. 현모양처는 우리 고유의 유교 관념이 아닌 일제에 의해 이식된 왜곡된 여성상이다. 조선시대에 ‘양처’는 ‘양민 신분의 처’라는 신분적 개념이었는데 일제는 이를 가사 노동 전담자로 만들었다. ‘현모’ 역시 어진 어머니 정도의 뜻이었는데 일제는 이를 여자의 역할로 바꿨다. 이후 현모양처는 한국 여성의 삶을 규정짓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됐다. 저자는 “여전히 많은 남자들이 근대에 형성된 왜곡된 가부장적 관념에 묶여 있다”며 “이제 남녀 모두가 자유롭고 공평하게 사회 활동과 집안 살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에 창궐한 매독 치료제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에 창궐한 매독 치료제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알렉산드로 6세(교황), 루이 14세(프랑스 왕), 에두아르 마네(화가), 베토벤(작곡가), 하인리히 하이네(시인), 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때의 왜장).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매독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매독의 원인균은 트레포네마팔리덤이라는 병균으로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다. 매독을 서양 세계에 퍼뜨려 수백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바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다. 신대륙의 인디언들이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와 황열병 등으로 절멸의 위기에 내몰렸다면 신대륙에서는 매독을 구대륙으로 보내 ‘앙갚음’을 해 준 셈이다. 매독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당도하기 전부터 잉카 제국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잉카의 목동들은 라마 떼를 이끌고 먼 곳까지 다녔는데 그 동물로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매독균이 인간에게 전파됐다고 한다. 잉카 제국은 라마 암컷을 소유하는 사람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법률까지 제정했지만, 매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세계문화기행’, 이희수). 매독이나 코로나19나 동물을 마구 다룬 인간에게 동물이 내린 형벌인 것이다. 매독은 매화나무 ‘매’(梅) 자를 활용해 ‘梅毒’이라고 쓴다. 매독으로 생기는 피부 궤양의 형상이 매화꽃을 닮았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매독균은 궤양과 발진을 일으키는 데 이어 잠복기를 거쳐 심장과 혈관 등 중요한 신체 장기까지 침범해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러나 성적 접촉만큼 빠른 전파력은 없어 신대륙이 발견된 것은 1492년인데 일본에서 매독이 창궐한 때는 1512년이니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겨우 20년 만에 지구를 돈 것이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조선에서 매독이 처음 발생한 것은 일본보다 빠른 1510년 무렵이다. 이처럼 매독은 조선에서 16세기부터 번져 나갔고, 조선의 개항과 청일전쟁 등을 통해 주변국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급속히 퍼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임질과 함께 매독이 크게 유행했는데, 주범은 공창제도였다. 공창을 만든 이유는 일본인 거류 여성들의 매독 감염이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매독에는 특효약이 없었고 중금속인 수은을 치료제로 쓰기도 했는데 매독보다 수은 중독의 부작용이 더 심각했다. 20세기 들어 매독 치료제가 개발되기 시작했고, 가장 자주 실린 광고의 하나가 매독과 임질 등 성병약 광고였다. 위 광고는 그중 하나인 ‘푸로다’를 선전한 것이다. 광고는 매독의 1~3기 증상을 자세히 설명하며 매독이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인지 깨우쳐 주고 있다. “일본 내무성에서는 공무원을 해외에 파견해 매독 멸종법을 연구하는 중”이라고도 했다.
  • ‘범 내려온다’ 현수막 트집잡은 日…서경덕 “도둑이 제 발 저려”

    ‘범 내려온다’ 현수막 트집잡은 日…서경덕 “도둑이 제 발 저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한국이 도쿄(東京)올림픽 선수촌에 새롭게 내건 현수막 ‘범 내려온다’에 일본 우익과 언론이 반일(反日) 표시라고 트집을 잡는 것은 “세계인들에게 전범국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2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일본이 올림픽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 현수막 문구와 함께 ‘임진왜란’이란 침략의 역사가 세계인들에게 또 회자되는 게 겁이 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 영정 앞에서 찍은 사진을 공유하면서 “일본 우익과 언론은 이 사진을 제일 두려워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지은 죄가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는 뜻의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표현이 지금 일본 정부와 언론, 우익을 대변한다”며 “일본 선수촌 외벽에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걸고 싶다”고 일침했다.도쿄스포츠 신문은 전날 “한국의 새로운 현수막 ‘범 내려온다’도 반일 논쟁을 야기해 파문이 일고 있다”며 일본 내 반응을 전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무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지시한 ‘호랑이 사냥’을 암시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독도도 그려져 있어 한국 영토라는 주장에 성토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 호랑이를 전멸시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관계가 있다”면서 “반일 정서가 깔린 현수막”이라고 주장했다.
  • ‘이순신’ 대신 ‘범 내려온다’ 걸자…日누리꾼 “어이없다”는데

    ‘이순신’ 대신 ‘범 내려온다’ 걸자…日누리꾼 “어이없다”는데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독도 표기, 선수단 도시락 문제 등을 둘러싼 한일 갈등이 고조되는 양상이다. 특히 선수촌 현수막을 놓고 잡음이 일고 있다. 19일 일본 한류 전문 매체 ‘와우코리아’는 대한체육회가 내건 새로운 현수막에 대해 일본 누리꾼들이 분노를 넘어 어이없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누리꾼들은 ‘범 내려온다’라는 글귀가 적힌 새 현수막이 ‘일본이 조선 호랑이를 멸종시켰다’는 믿음을 드러낸다고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일부는 “새 현수막에 독도 표기도 보인다. 현수막 혼란을 틈타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관련 보도에 대한 다른 누리꾼들 반응도 다르지 않다. 한 누리꾼은 “한국은 국제규칙과 국제합의 준수보다 반일 정신이 더 우선시되는 나라”라면서 “이번 선수촌 현수막 건도 올림픽 정신보다 반일 정신을 우선시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경제 성장은 이룩했을지 몰라도, 어린 시절부터 ‘일본은 적’이라는 반일 사상을 지속적으로 주입한 결과 국민성은 한 발자국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대한체육회는 14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 선수촌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에 ‘이순신 현수막’을 내걸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상소를 보낸 것에 착안,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제작했다. 하지만 올림픽 헌장 50조 위반이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지적에 따라 대한체육회는 17일 해당 현수막을 철거했다.IOC 측은 “현수막에 인용된 문구는 전투에 참가하는 장군을 연상시킬 수 있으므로 ‘올림픽 헌장 50조 위반’에 따라 철거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선동을 올림픽 경기장과 시설 등에서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올림픽 헌장에 비춰봤을 때 ‘이순신 현수막’은 정치적 선전에 해당한다는 게 IOC 주장이었다. 이 같은 IOC 결정에는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의 압력이 작용했을 거란 분석이 우세하다. 일본 언론이 “이순신은 반일 영웅으로 한국에서 신격화되고 있다”며 우리 측 현수막을 문제 삼은 데 이어, 하시모토 세이코 도쿄올림픽조직위원장이 “정치적 메시지를 삼가야 한다”고 발언을 내놓고, IOC가 곧장 철거를 요청한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설명이다.문제는 일본 측의 아시타비(我是他非)식 행보다. 대한체육회는 ‘이순신 현수막’을 철거하면서 욱일기에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IOC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조직위는 “욱일기는 정치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경기장 반입 금지 물품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여론전에 나섰다. 극우 정당도 욱일기를 앞세운 시위를 펼치며 갈등에 기름을 붓고 있다. 일본국민당은 대한민국 선수단 본진이 일본에 도착한 19일 선수촌 앞에서 욱일기와 확성기를 동원해 한국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본국민당은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저지르기도 한 ‘혐한 정당’이다. 이를 두고 로이터통신은 양국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우리 측 ‘이순신 현수막’ 철수 소식을 전하면서 “1965년 관계 정상화 이후에도 한일 양국은 여전히 긴장 상태에 있다”고 평가했다.
  • 응원 현수막·후쿠시마 식자재…한국 선수단에 생트집 잡는 日

    응원 현수막·후쿠시마 식자재…한국 선수단에 생트집 잡는 日

    일본이 도쿄올림픽 한국 선수단에 대한 응원과 선수단이 섭취할 음식물 등을 놓고 한국에 딴죽을 걸고 있다. 이에 앞서 일본은 도쿄올림픽 홈페이지 지도에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시하는 등 한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8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와 관련해 “욱일기 디자인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며 정치적인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며 관중 입장이 허용된 일부 경기에 욱일기를 응원 도구로 상용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한국의 대한체육회가 이순신 장군의 명언을 인용한 응원 현수막을 사용했다가 정치적 메시지라는 일본 극우 세력의 반발 때문에 현수막을 치운 것과 비교하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한체육회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의 명언을 인용해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현수막을 올림픽 선수촌 내 한국 선수단 거주층에 내걸었다. 그러자 일본 극우 세력은 정치적 선전을 금지한 올림픽 헌장 50조 위반을 거론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마저 현수막 철거를 요구했다. 결국 대한체육회는 욱일기 사용 또한 올림픽 헌장 50조 위반과 같은 적용을 받기로 IOC의 약속을 받으며 현수막을 철거했지만 정작 도쿄올림픽위원회가 욱일기 사용을 허가하겠다고 나서 갈등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대한체육회는 한반도를 호랑이로 형상화하고 ‘범 내려온다’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으로 바꿔 걸었다. 또 대한체육회가 한국 선수단이 선수촌 식당에서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섭취하지 않도록 인근 호텔을 빌려 급식지원센터를 차린 것을 놓고 일본 자민당 내에서 “트집을 잡는다”, “(후쿠시마 주민의) 마음을 짓밟는 행위”라며 불쾌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여기는 중국] 中언론 “이순신은 항일영웅…일본이 침략전쟁”

    [여기는 중국] 中언론 “이순신은 항일영웅…일본이 침략전쟁”

    일본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단 선수촌에 걸린 응원 문구와 관련해 중국 여론이 들썩이는 분위기다. 최근 도쿄올림픽 한국선수단 선수촌 거주동 앞쪽에 걸린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바탕을 둔 응원문구에 대해 “이런 것은 한국을 배우자’는 등 중국 누리꾼들 사이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나왔다. 중국 유력언론 중국신원왕은 도쿄 올림픽 출전 한국선수단이 3층 베란다 밖에 커다란 태극기를 여러 개 내걸고, 그 아래 쪽으로 ‘신에게는 아직 5000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문구를 게재한 내용을 17일 상세히 보도했다.  이들은 해당 문구가 1592~1598년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 ‘임진왜란’ 중 항왜 명장 이순신 장군의 남긴 명언을 한국 대한체육회가 활용해 내건 응원의 메시지라는 상세 설명도 덧붙였다. 또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왜구를 맞아 용감하게 싸운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 국민들로부터 이순신 장군은 ‘항일 영웅’이라는 추앙을 받아오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이는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해 매우 상세한 소개를 이어갔다.   이와 함께, 해당 메시지가 선수촌에 게재된 직후 일본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 등 일본 정부가 ‘올림픽 정신’ 등을 거론하면서 반발의 입장을 밝혔다는 내용도 연이어 보도했다. 또, 한국 선수단이 머무는 선수촌 밖으로 욱일기와 확성기를 든 우익단체 회원들이 등장해 “어리석은 짓을 하며 반일을 부추긴 한국 선수단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내용도 조명했다.  그러면서 ‘한 시간 남짓 한국 선수촌 앞에서 (우익단체 회원이)시위를 이어갔지만, 일본 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중국 누리꾼들은 “이런 강직한 모습의 한국 선수단과 대한체육회가 대단하다”면서 감탄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분위기다. 해당 내용을 보도한 기사는 중국 최대 규모의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 메인 페이지 상위에 게재되는 등 관심이 쏠린 양상이다.  특히 다수 언론들은 이번 사례와 함께 최근 도쿄 올림픽에 참가하는 한국 선수단을 위해 식자재 조달과 도시락 제공 등의 입장을 밝힌 한국 정부의 대응에 놀라는 분위기다.  중국 국영 언론 관찰자망은 일본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공개한 선수들 식단에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알려진 직후 한국 정부가 선수단의 안전한 식단 제공을 위해 자체적으로 공수한 도시락을 제공키로 한 사실을 보도했다.  앞서 일본 올림픽조직위원회가 공개한 선수단 식단에 후쿠시마산 해산물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당 언론은 분석했다.  특히 해당 언론은 지난 2017년 브라질 올림픽 당시 한국 선수단은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공수한 한식 도시락을 제공받았던 사실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도 선수단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식단을 위해 한국 정부가 직접 식자재를 공수했던 바 있다고 덧붙였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현지 누리꾼들은 “한국은 이런 부분에서 자국민을 알뜰하게 챙기는 것이 부럽다”면서 “우리나라(중국)은 이렇게 할 수 없는 건가요? 매번 사건이 벌어질 때만 잠깐 불같이 일어나서 반일, 혐일을 하지만 사실상 제일 필요한 것은 자국민을 위한 이런 필수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이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한국인들의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이런 성향은 정말 부러운 모습이다”면서 “이 정도 움직임을 매번 보여주고 정부가 나서서 국민을 챙긴다면 과연 어느 국가가 한국인을 쉽게 보고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점은 정말 꼭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고 했다.  한편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도쿄스포츠 등 일부 일본 언론과 현지 여론을 의식해 해당 현수막 철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한체육회는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하고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더 이상의 논쟁을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해당 현수막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 체육회 ‘이순신 현수막’ 철거…IOC “욱일기도 똑같이 적용” 약속

    체육회 ‘이순신 현수막’ 철거…IOC “욱일기도 똑같이 적용” 약속

    대한체육회가 도쿄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한국 선수단 거주층에 내건 ‘이순신 장군 명언’ 현수막을 떼기로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인데, 대신 모든 올림픽 경기장에서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도 올림픽 헌장을 적용하겠다는 IOC의 약속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체육회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아직도 제게 열두 척의 배가 있고,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에서 착안해 ‘신에게는 아직 5000만의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한글 현수막을 제작해 도쿄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의 한국 선수 거주층 발코니 외벽에 부착했다. 온 국민의 응원을 등에 업고 결연한 각오로 도쿄올림픽에 임하겠다는 재치 있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이를 ‘반일 메시지’라며 문제 삼았고, 극우 세력이 나서 일본 제국주의 전범기의 상징인 욱일기를 흔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체육회는 17일 보도자료를 내고 “IOC 관계자가 전날 대한민국 선수단 사무실을 방문해 현수막 철거를 요청했고, 서신으로도 ‘현수막에 인용된 문구는 전투에 참여하는 장군을 연상할 수 있기에 IOC 헌장 50조 위반으로 철거해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체육회는 즉시 IOC에 응원 현수막 문구와 관련해 우리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경기장 내 욱일기 응원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방한 당시 “욱일기는 국가나 문화마다 상징하는 바나 의견이 다른 만큼 정치적 중립성 원칙을 적용한다”면서 “사건이 발생하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할 방침”이라며 모호한 답변을 한 바 있다. 특히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욱일기 디자인은 일본 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그 자체가 정치적 주장이나 차별적 내용은 되지 않아 반입 금지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욱일기의 경기장 내 반입을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했다.그러나 ‘이순신 현수막’을 계기로 욱일기 문제가 다시 부상하자 IOC는 모든 올림픽 경기장에서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도 올림픽 헌장 50조를 적용해 판단하겠다고 체육회에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체육회는 이순신 장군 현수막을 철거하기로 상호 합의했다고 밝혔다. IOC 올림픽 헌장 50조는 경기장 등 어떤 장소에서건 올림픽 기간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전을 불허한다고 명시했다.
  • ‘삼백년 원한 품은’ 대신 ‘삼백연 원앙풍은’으로… 日검열 넘은 ‘목포의 위트’

    ‘삼백년 원한 품은’ 대신 ‘삼백연 원앙풍은’으로… 日검열 넘은 ‘목포의 위트’

    작곡가 이호섭씨는 명실공히 ‘트로트 박사’입니다.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 주현미의 ‘짝사랑’, 편승엽의 ‘찬찬찬’, 이자연의 ‘찰랑찰랑’ 등 수많은 트로트 히트곡을 냈죠. 2019년엔 서강대에서 트로트 뿌리를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트로트가 일본 엔카의 아류라는 이론에 학문으로 맞서기 위해서였답니다. 그 트로트 박사는 이제 새로운 연재 ‘트로트 숨결’을 통해 트로트 속에 담긴 우리의 장단과 창법,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냅니다.‘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유서 깊은 남도의 항구 도시 목포. 온 국민이 애창하는 ‘목포의 눈물’은 민족가요로,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난영은 민족의 연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매년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을 기리는 ‘난영가요제’가 열려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의 꿈의 무대가 될 뿐만 아니라 찾는 이들에게 옛 향수와 정취를 전해 준다.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 목포 명물 유달산과 삼학도(三鶴島), 그리고 노적봉엔 애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옛날 유달산에 무예를 연마하던 한 장사가 있었다. 근처에 살던 세 처녀는 매일 유달산으로 물을 길러 다녔는데, 무공을 연마하고 있던 이 장사를 본 후로는 한결같이 이 장사를 좋아하게 됐다. 장사를 사모하던 세 처녀가 하루에도 수십 번 무공 연마에 몰입하던 장사를 훔쳐보기 위해 유달산으로 올랐다. 세 처녀로 인해 잡념이 생겨 무공이 흐트러지자 드디어 장사는 세 처녀에게 무예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러자 이 세 처녀는 돛단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섬으로 갔다. 그러나 장사는 이 세 처녀가 살아 있으면 자신의 무예를 다 연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때를 위해 더욱 무공에 정진하기로 하고, 가슴 아프지만 활로 이 배를 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세 마리의 학이 솟아올라 날아가고 세 개의 바위가 솟아 섬이 되었다. 후에 사람들은 학 세 마리가 날아오른 세 개의 섬을 삼학도라 불렀다고 한다.‘목포의 눈물’은 1930년대 초 조선일보사와 오케레코드사 공동 주최로 ‘향토찬가모집’ 공모를 통해 목포 출신의 시인 문일석이 응모한 작품이다. 이 가사에 도쿄 음악원을 졸업한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이 불러 세상에 태어났다. 이 노래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조선 독립을 고취하는 가요나 반일 가요를 막으려 일제는 1933년 5월 22일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47호)이라는 취체령(取締令)을 공표했다. 따라서 모든 가요는 사전 심사를 받아 통과를 해야만 레코드로 만들어 부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출판되는 음반의 판매 금지 및 압수 조치는 물론 이미 출반됐더라도 취체 처분되면 압수할 수 있었다. 사전·사후의 이중 통제장치를 마련해 탄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목포의 눈물’ 2절 가사는 노골적으로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가사였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로 시작되는 2절 가사는 누가 봐도 300년 전 임진왜란 때 왜선과 왜병들을 일거에 수장시킨 성웅 이순신 장군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노랫말은 ‘너희 일제가 비록 지금은 조선을 강탈해 수탈하고 있으나, 곧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나타났듯 구국의 영웅이 나타나 너희들을 바다의 제물로 만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총독부 학무국에 심사를 청해 본들 이 노래의 가사는 통과될 수 없었다. “이것 참 곤란하군. 이걸 분명히 놈들이 걸고 넘어질 거라고. 그러니 놈들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작곡가 손목인은 장탄식을 늘어놓으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작사가 문일석이 가만히 손목인의 표정을 살피더니 오랫동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삼백년 원한(三百年 怨恨) 품은’을 ‘삼백연 원앙풍(三柏淵 鴛鴦風)은’으로 말이죠.” “아니, 그러면 원래 의미가 사라져 버리잖아?” “그렇게 보이죠.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발음을 해 보세요. ‘삼백년 원한 품은’처럼 들리잖아요. 그러니 ‘삼백연 원앙풍은’으로 심사를 넣으면 마치 ‘세 그루 잣나무가 서 있는 연못에 천하가 편안하기를 원하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뜻이 되니 놈들이 시비를 못 걸게 되는 거죠.” “그러나 노래를 부를 때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가 되고?” 참 기가 막힌 생각이었다.일제의 검열을 이렇게 기발한 아이디어로 따돌리고 탄생된 노래가 바로 1935년 9월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목포의 눈물’이다. 당시 우리 가요 작가들이 교묘히 일본 당국자의 눈을 피해 민족의 혼을 가요에 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민족의 아픔과 민초들의 애환이 살아 있기에 세월이 흘러가도 이 노래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민족가요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글의 받침이 다음에 이어지는 모음으로 연음되는 자음변용법칙으로 인해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들리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제가 ‘목포의 눈물’을 부랴부랴 금지곡으로 묶었지만, 그때는 이미 조선 천지에 이 노래가 애창되고 있을 때였다.물론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노래들도 사랑, 이별, 향수, 사친(思親) 등을 표현한 통속적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향토찬가’라는 지역성을 빌미로 그 속에 애향심에서 우러나오는 민족적인 정신을 함양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연대를 꾀하고자 기획한 의도에서 탄생한 ‘목포의 눈물’. 그래서 ‘못 오는 임이라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은 임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지 못한 회한으로 읽을 수 있고, ‘항구의 맺은 절개’는 임(조국)과의 합일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유달산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서 있어 오가는 이들로 하여금 민족독립을 위해 애쓴 지사들과 가요의 참다운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삼학도 중의 가장 큰 섬에는 이난영 공원이 조성돼 노래비와 함께 이난영 수목장이 있다.
  • [길섶에서] 비우는 아름다움/서동철 논설위원

    서울신문사 논설실 10층에서 주변을 내려다본다. ‘서울시가 잘한 것은 저 아래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가로막고 있었던 남대문세무서 건물을 허문 거지’ 하고 혼잣말로 칭찬한다. 세무서가 사라진 직후 세종대로에서 온전하게 처음 바라본 성당은 놀랄 만큼 멋졌다. 이 성당이 자랑스러운 사람도, 자랑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자리는 조선 태조가 부인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던 흥천사의 일부였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신덕왕후 정릉과 흥천사의 옛터는 다시 덕수궁의 새로운 터전이 됐다. 한말 영국대사관과 영국 국교인 성공회 교당이 이 자리를 차지한 과정은 흔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회 성당이 서울과 한국 역사를 이루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세무서가 떠난 자리에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을 반지하로 지은 것도 성당의 아름다운 전모를 드러내게 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도 키 작은 전시관 역시 성당을 조금은 가리고 있으니 아쉬움도 없지 않다. 오늘 보니 전시관 위에 새로운 설치 조각이 세워져 있다. 한때는 첨성대 모양의 조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울리는 자리에 있었으면 찬사를 받았을 작품들이 안타깝다.
  • 멍하니, 가만히… 대청에 호며들다

    멍하니, 가만히… 대청에 호며들다

    ‘언택트’와 ‘힐링’. 코로나 시대에 여행계의 유행을 주도한 단어다. 호수는 그 유행의 주무대 중 하나다. 이른바 ‘물멍’을 즐길 수 있는 곳. 초여름의 대청호를 찾았다. 충북 청주와 옥천, 대전 등에 걸쳐 있는 거대한 호수다. 성하를 앞둔 무더운 날씨에도 호숫가엔 격렬하게 햇빛에 항거하고,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뜻밖에 많았다.멀리서 소나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그러나 주변과는 또렷이 구별되는 세력으로 커진 소나기는 먼 산을 적신 뒤 이제 곧 호수를 덮칠 기세였다. 소나기가 호수 방향으로 올 것은 거의 확실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서늘해진 바람이 장판처럼 잔잔했던 호수 위로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기의 내습을 직감한 아이들은 가젤 영양처럼 ‘튀어’ 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비를 피하려는 건지, 소나기를 맞이하는 의식이라도 벌이려는 건지 불분명할 만큼 아이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고조돼 있었다. 예전엔 소나기가 들녘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모습을 드물게나마 봤던 것 같다. 일종의 경험치도 쌓여 있다. 소나기가 다가올 때마다 바람과 기온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대기 중엔 흙냄새도 옅게 묻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건 대도시에 정착한 이후다. 세상은 좀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진 거다.●비 그친 호수엔 사람도 나무도 ‘데칼코마니’ 대청호 ‘멍상정원’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공식 명칭은 ‘명상정원’인데, ‘호수 멍때리기’에 최적의 장소인 듯해 이번에 한해 별명처럼 이리 부르기로 한다. 소나기를 피할 공간이 있었다면 아마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하며 더 오래 ‘멍상정원’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그 자리를 다시 찾았다. 사진작가 2명, 개인방송 진행자 1명 등 겨우 몇 명이서 그 너른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다. 전날 소나기가 퍼부을 때는 혼돈의 호수였지만, 이날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빙판, 장판 등 그 어떤 표현도 잔잔한 호수의 모습을 전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호수 위로 작은 섬과 나무, 사람들이 정확히 반대로 비춰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거울’이 그나마 적확할 듯하다.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데칼코마니라 표현한다. ‘멍상정원’이 속한 곳은 대전 마산동이다. ‘마산동 쉼터’라거나 ‘명상정원’, ‘슬픈 연가 촬영지’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세 곳 모두 한 지역을 이르는 이름이라 봐도 무방하다. 마산동 쉼터 주차장에서 ‘멍상정원’까지는 700m가 조금 넘는 거리다. 나무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조금 더 멀다. 오른쪽으로 먼저 간다. 볼거리를 고려해서다. 물론 정해진 규칙은 없다. 오른쪽 길을 따라 2층 정자를 지나면 우물이 나온다. 우물 곁엔 제멋대로 굽은 못생긴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모습이다. 이른바 ‘J 호러’의 기원이 됐던 일본 영화 ‘링’의 강렬한 인상이 여태 뇌리에 남은 거다. 이 우물은 영화 ‘7년의 밤’이 촬영된 세트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스스로 몸을 던진,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에게 ‘고통의 블랙홀’로 작용했던, 일종의 미장센이다. 이와 비슷한 장르의 영화 ‘살인소설’, 한국형 좀비 영화 ‘창궐’ 등도 이 일대에서 촬영됐다, 고 안내판은 적고 있다. 우물에서 몇 걸음 더 옮기면 ‘물속마을 정원’이다. 크고 작은 장독들과 담장 등으로 멋을 냈다. 의아했다. 왜 갑자기 물속마을 정원이 튀어나온 걸까. 그러다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의 말을 듣고는 머리에서 ‘뎅~’ 하고 종이 울리는 듯했다. 백 회장은 “수몰 전 이 마을의 모습을 꿈에서 종종 본다”고 했다. 외갓집을 찾았던 기억의 단편이 꿈에서 재현될 정도면 수몰민은 얼마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까. 백발 성성한 노인이 수구초심으로 찾아와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노인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실향민은 통일되면 고향 땅을 밟을 희망이나 품지만 수몰민은 갈 고향이 아예 없다고요. (대청호) 물을 빼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물속마을 정원은 수몰의 기억이 담긴 공간인 거다. 한데 여기서 살았을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들의 기억은 그저 눈요기용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물속마을 정원에서 오른쪽으로 난 모래톱은 드라마 ‘슬픈 연가’ 촬영지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휴대전화에 ‘인증샷’으로 저장됐을 만큼 명소다. 액자 형태의 조형물을 세워 한층 ‘폼나게’ 만들었다. 건너편은 ‘멍상정원’이다. 이름처럼 많은 이들이 다양한 자세로 ‘호수멍’을 즐기고 있다. 개미허리처럼 가는 모래톱 건너편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흔히 ‘뜬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름 그대로 평소에는 물에 떠 있다. 그러다 봄철 갈수기나 장마철을 앞두고 미리 물을 빼는 배수기엔 수면 아래 있던 모래톱이 드러나며 뭍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이맘때만 만날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인 셈이다.●수면 아래엔 日에 맞선 동학군 승전의 역사 이쯤에서 백 회장의 말을 조금 더 듣자. 기억을 더 거슬러 오르면 조선시대 당시 ‘멍상정원’ 일대는 주안장터였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4차선 국도 격인 ‘율봉도’가 지나는 길에 형성된 큰마을이었다. 목을 축이려 주막에 들른 이들, 주모와 희롱하는 장돌뱅이들, 육모방망이 흔들며 으스대던 포졸 등 수많은 인간 군상들로 시끌벅적했을 테다. 이상면(75) 서울대 명예교수가 전하는 역사도 무척 흥미롭다. 그의 독자적인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캐냈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듯하다. 현 청남대가 있는 충북 청주 문의면 등 대청호 중상류 일대는 조선시대 정치 경제의 요충지였다. 금강 수계와 ‘율봉도’가 교차하는 지점이어서, 이 일대를 장악하면 아래쪽 삼남까지 통제가 가능했다. 이는 대청호에서 15㎞ 정도 떨어진 청주에 삼남 최대 군사기지인 진남영을 설치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19세기엔 ‘호중동학군’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호중’은 다소 생소한 이름인데, 현재의 청주와 충주, 충남 공주 등의 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호중동학군이 일본군과 맞붙어 승전고를 울린 곳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동학군 승전의 역사는 호수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다. 이들의 이름이 생경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서둘러 이 역사를 인양하는 게 후대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엔 경부선 철길이 놓일 뻔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최단 노선이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대전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유야 자명하다. 일제의 머릿속에 동학군에 당한 참패의 기억이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한없이 조용한 ‘멍상정원’이지만 수면 아래엔 이처럼 숨가쁜 역사가 잠겨 있다. 이상면 명예교수는 호중동학군의 별동대장이었던 이종만(훗날 이종찬으로 개명)의 손자다. 그는 수많은 조상들의 역사가 새겨진 이곳을 찾는 후대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역사가 부여하는 의미를 되새겨 보라”고 권했다.●좁은 틈 지나면 소원 이뤄진다는 ‘신선바위’ 인접한 비룡동엔 신선바위가 있다. 예전 제사유적지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바위 사이엔 겨우 사람 한 명 지나갈 정도로 좁은 틈이 나 있다. 이 틈을 지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대청호를 돌아본다는 건 사실 호반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긴다는 것과 뜻이 같다. 청주 문의면 쪽에서 내비게이션에 대청댐을 찍으면 보통 32번 국도로 안내한다. 하지만 적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늘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문의문화재단지 옆으로 난 대청호반로가 그렇다. 국도에 비해 오가는 차량이 훨씬 적어 한결 호젓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이 도로를 따라 대청댐 쪽으로 가다 보면 현암사와 만난다. 대청호를 굽어볼 수 있는 절집이다. 계단을 통해 올라야 해 적잖이 품이 든다. 현암사 반대편 능선엔 구룡산 장승공원이 있다. 2004년에 폭설로 쓰러진 나무들을 깎아 만든 장승 500여기가 진입로부터 장승공원까지 길게 늘어서 있다. 장승들은 남근 형태가 많다. 안내판은 “여성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남근 형태의 장승을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마산동 쉼터 아래쪽, 그러니까 대청호 남쪽의 옥천 일대에도 볼거리가 많다. 대표적인 곳은 부소담악이다. 수십m 높이의 크고 작은 절벽들이 비단강(금강)을 찢으며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모양새로는 딱 ‘비단강을 가르는 칼’이다. 출발 전 한국관광공사의 윤승환 세종충북지사장이 “하루 코스 언택트 힐링 여행지로 강추”한 곳도 아마 이쯤 어디일 것이다. 절벽의 길이는 700m에 이른다. 절벽 위로 길이 나 있다. 끝까지 갈 수도 있지만 위험하니 절벽 중간쯤의 추소정에서 발걸음을 돌리길 권한다. 부소담악은 사실 멀리서 봐야 제맛이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금강을 가르고 있는 절벽의 기세를 봐야 제대로 완상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적합한 곳은 추소리 마을 뒤 산자락이다. 이곳에 전망대 하나 세우면 단박에 명소로 발돋움할 텐데, 여태 실현되지 않아 못내 아쉽다. 방아실마을 끝자락엔 ‘수생식물학습원’이 있다. 이름으로는 생태교육시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입장료(6000원)를 받는 상업시설이다. 개신교인 다섯 가족이 모여 사는 일종의 신앙촌 같은 곳인데, 내부를 잘 꾸며 놓아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관광객들이 셀피를 많이 찍는 곳은 시설 끝에 있는 작은 교회다.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부소담악 인근의 이백리엔 이지당이 있다. 지방문화재였다가 지난해 말 보물(2107호)로 승격된 국가지정 문화재다. 이지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다 충남 금산 전투에서 순국한 조헌이 후학을 길러내던 서당이다. 조헌 생전에는 각신서당(覺新書堂)으로 불리다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지당(二止堂)이라 고쳐 불렀다. 이지(二止)는 시전에 나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문구에서 끝 단어인 ‘지’(止)자 두 개를 딴 것이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석호리엔 청풍정이 있다. 야산 중턱 끄트머리에서 단아한 자태로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다. 한말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과 기녀 명월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정자 곳곳에 담겨 있다. 옥천은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다. 그의 대표 시 ‘향수’에 나오던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이제 호수로 변했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던 모래사장은 대부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풍경이 그나마 온전히 남은 곳은 대청호 안터지구다. 장계관광지가 있는 장계리와 오대리, 석탄리, 연주리 등을 잇는 지역이다. 지난 5월엔 환경부가 이 일대를 ‘국가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했다. 석탄리 안터마을은 반딧불이 서식지로 유명하다. 지난 15년간 호수 주변에서 농사를 짓지 않으며 반딧불이 서식지를 보존해 왔다. 요즘 석탄리 일대 호안은 초록빛 풀들로 뒤덮였다. 이 역시 배수기 때만 볼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이다. 연주리 쪽에선 둔주봉이 명소다. 등산로 입구에서 황토흙길을 800m쯤 오르면 정상 전망대가 나온다. 발아래로 반전된 한반도 지형이 펼쳐진다. ■여행수첩 →마산동 쉼터는 대청호 중간쯤에 있다. 수도권 등 외지에서 찾을 경우 청주 문의면 혹은 옥천 안남면 방면에서 출발해야 더 효율적으로 대청호를 돌아볼 수 있다. →T맵으로 신선바위를 찍으면 멀리 떨어진 황당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 ‘대전 동구 대청호수로296번길’을 찍고 간 뒤 마을 중간쯤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된다. 20분 정도 소요된다. 신선바위까지는 외진 데다 오가는 이도 별로 없는 만큼 단독 산행보다 동반 산행을 하길 권한다. →장승공원은 승용차로도 갈 수 있지만 찾기는 쉽지 않다. 주차장에서 마을 쪽으로 좀더 들어가야 공원 진입로가 나온다. 여기서 구룡산 정상까지는 불과 500m다. →돌팡깨 식당은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식당이다. 두부, 청국장 등 주요리는 물론 밑반찬까지 싹싹 비울 만큼 정갈하고 맛있다. 검은 돌이 밀집된 ‘돌팡깨’ 바로 앞에 있다.
  • [포토] 고승들의 수행 무예

    [포토] 고승들의 수행 무예

    5일 오전 대구 동구 팔공총림 동화사에서 봉행된 ‘사명대사 추모 다례재’에서 골굴사 스님들이 선무도(禪武道)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선무도는 임진왜란 당시 국운이 풍전등화 같던 시기에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 등 고승들이 수행하던 무예로 작게는 사찰을 지키고 크게는 나라를 수호하는데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2021.7.5 뉴스1
  • 경남도, 한산도 이순신 장군 사당 ‘제승당’ 무료 개방

    경남도, 한산도 이순신 장군 사당 ‘제승당’ 무료 개방

    경남도는 통영시 한산도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113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 ‘경상남도 제승당’을 오는 8일 부터 무료로 개방한다고 5일 밝혔다.통영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인 운주당 터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뒤 이 집에 기거하며 참모들과 작전 계획을 의논하던 집무실이다. 1740년(영조 16년) 통제사 조경이 이 운주당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현재 건물은 1930년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로 영당인 충무사를 비롯해 유허비, 기념비, 귀선각, 한산정, 대첩문 등이 있다. 1976년 이 충무공 유적지 정화사업 등 성역화 작업을 통해 정비를 한 뒤 입장을 유료화 했다. 현재 관람료는 만 19세 이상, 65세 미만 개인은 1000원, 30인 이상 단체는 800원을 받는다. 도에 따르면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요한 사적지인 제승당 관람을 무료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이에 따라 도는 경상남도 제승당 운영 조례안 가운데 관람료 유료화 부분을 ‘관람료는 무료료 한다’는 내용으로 개정했다. 이 제승당 운영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은 지난달 17일 제386회 도의회 정례회에서 의결됐다. 도는 제승당은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뒤 국난을 극복한 국가적인 성지로 알려지면 해마다 방문객이 18만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약 1km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는 바다와 숲을 함께 볼 수 있는 명소다. 도는 이번 제승당 무료개방에 따라 제승당을 비롯해 한산도를 찾는 관광객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한산도는 통영에서 여객선을 타고 오간다. 경남도 관계자는 “1976년 제승당 관람료 징수 조례가 제정된 뒤 거의 반세기 만에 전면 무료화를 시행하는 것으로 무료 개방을 통해 관광객 유치 등 더 많은 유형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 [길섶에서] 음식의 소중함/이종락 논설위원

    조선시대 임금에게 올리던 수라상(水刺床)은 기본음식 외에 12가지 찬품을 올리는 12첩 반상을 원칙으로 했다. 밥·국·김치·장·조치·찜·전골 등 기본 외에 숙채·생채·구이·조림·전·적·자반·젓갈·회·편육·장과·별찬 등을 곁들였다. 그야말로 진수성찬. 하지만 임금이 전란이나 내란을 피해 지방으로 갔을 때는 지참한 식료품이 충분치 않고, 피란지에 맛난 음식이 있지도 않아 초라한 수라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입에 댔다. 인조가 이괄의난으로 6일간 공주로 피란 갔다가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콩고물을 묻힌 떡을 진상하자 이를 맛보고 “절미”(뛰어난 맛)라고 극찬했다. 이후 ‘임절미’로 불리다가 발음상 편의로 ‘인절미’로 굳어졌다. 선조도 임진왜란 때 의주 피란길에 ‘묵’이라는 물고기를 맛보고 ‘은어’(銀魚)라는 근사한 이름을 하사했다. 하지만 환궁한 뒤 다시 먹어보니 옛날의 그 감칠맛이 아니어서 “에이, 도로(다시) 묵이라 불러라”라고 해 도루묵이라는 새 이름이 생겨났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놓인 환경이 열악해야 음식의 제맛을 느끼는 모양이다. 배부른데 웬만한 음식이 성에 찰 리가 있겠는가. 오늘 삼시 세끼도 피란 갔던 임금의 심정으로 소중하게 대해 맛있게 먹어야겠다.
  • “1588년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듯”

    “1588년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듯”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과학 유물이 대거 묻혀 있던 지역은 서울 종로2가 사거리 북서쪽으로 피맛골과 인접한 곳이다.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8방 중 하나로,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했으며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상업시설인 운종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금속활자와 주전의 동제품은 항아리 안에 담겼고 일성정시의와 총통류, 동종은 항아리 옆에 놓여 있었다. 특히 금속활자를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작은 파편으로 절개돼 출토됐다.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됐다. 발굴조사를 맡은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은 “출토 지역 자료를 찾아봐도 관청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면서 “관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평범한 민간에서 사용한 창고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출토 유물들이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귀한 유물이란 점에서 의문이 남는다. 오 원장은 “16~17세기 청진동, 관철동, 관수동 등 청계천 주변에선 이처럼 퇴장 유적, 즉 도망가면서 물건을 묻어 놓고 가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었고, 나중에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화재청은 “발굴 유물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늦은 것이 1588년으로, 그 이후에 같이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것 같다”면서 “보존 처리와 분석 과정을 거쳐 분야별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 왜 인사동에서 발견됐을까...무더기로 발견된 조선전기 금속유물(종합)

    왜 인사동에서 발견됐을까...무더기로 발견된 조선전기 금속유물(종합)

    서울 종로구 인사동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 추정 동제품, 천문시계 부품 등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금속 유물이라는 점이다. 29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 추정 유물만 도기 항아리에 담긴 채로 발견됐다. 천문시계 부품과 조선시대 화포인 총통(銃筒), 동종(銅鐘) 등 상대적으로 큰 나머지 유물은 그 주변에서 출토됐다. 활자를 제외하면 모두 일정한 크기로 부러뜨린 채 묻은 것으로 확인됐다. 활자 일부는 불에 타 엉겨 붙은 상태였다. 발굴조사를 맡은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원장은 “조사 중에 도기 항아리를 보니 금이 나 있었는데, 조각이 떨어지면서 공깃돌 같은 파편 두세 개가 떨어졌다”며 “세척해 보니 금속활자여서 항아리를 통째로 연구원 수장고로 옮겼다”고 설명했다.유물이 나온 지점은 종로2가 사거리, 탑골공원 서쪽이다. 종로 뒤편에 있는 작은 골목인 피맛골과 인접한 땅이다. 이곳은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8방 중 하나로,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상업시설인 운종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물이 확인된 곳은 고고학적으로 큰 의미를 둘 만한 장소는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오 원장은 “건물터 형태를 보면 매우 특이하다”며 “관(官)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서울 시내에서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의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도기 항아리를 기와 조각과 작은 돌로 괸 것을 보면 인위적으로 묻은 정황을 알 수 있다”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화포인 소승자총통이 1588년에 만들어져 가장 늦은 편인데, 1588년 이후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묻었다가 잊혀서 다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그는 “구리는 조선시대에도 비싼 금속이었다”며 “유물을 재화, 즉 값나가는 물건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도 주장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도서관이 삶의 중심… 전주로 책 여행 오세요”

    “도서관이 삶의 중심… 전주로 책 여행 오세요”

    “전주를 가보고 싶은 책 여행도시, 인문관광 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김승수 전북 전주시장은 28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시내 곳곳에 매력적인 도서관을 건립해 책을 만나고 독서를 하기 위해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책의 도시를 만들어 전주의 격을 높이겠다”며 ‘책이 삶이 되는 도시 프로젝트’를 펼쳐 보였다. 시민들이 책으로 소통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며 책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도시로 자리매김한다는 복안이다. 다음은 김 시장과의 일문일답. -‘책의 도시’를 선포하게 된 배경은. “책을 통해 시민들 삶의 질을 바꾸겠다는 의미다. 일반인을 위한 독서 휴식공간과 아이들을 위한 책 놀이터를 대거 확충해 시민 모두가 책과 함께 일상을 즐기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며 함께 성장하는 도시로 만들겠다.” -책과 함께하는 전주시 발전 방향은.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다. ▲삶이 중심이 되는 도서관 ▲책을 쓰고 만드는 시민 ▲모두가 누리는 독서문화 ▲가보고 싶은 책 여행도시 ▲책의 거리 등 5개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인생을 바꿀 한 권의 책을 접하고 삶과 영혼을 윤택하게 가꿀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게 목적이다.” -‘책의 도시 전주’를 소개한다면. “전주는 해마다 책과 독서 축제인 독서대전을 여는 책의 도시다. 조선시대 완판본을 인쇄한 출판문화의 도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 낸 도시라는 자긍심이 있다. 도서관을 삶의 중심 터전으로 만들어 누구나 언제든지 책을 읽거나 쓰고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특별한 도서관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주에서 도서관은 단지 책을 읽고 빌리는 공간이 아니다. 틀을 깨는 시도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도서관이 시민 삶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시민의 삶을 인문으로 떠받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특별한 책 놀이터를 곳곳에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행자도서관, 시집도서관, 책을 쓰고 만드는 책 공작소 등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도서관이 들어섰다. 예술전문도서관, 봉사자도서관, 정원도서관, 길도서관 등을 조성해 가보고 싶은 책 여행도시를 만들겠다.”
  • [책꽂이]

    [책꽂이]

    임진왜란(김영진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국제정치학자의 시각으로 16세기 한중일 3국이 유일하게 전면전을 벌인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과 국제 관계의 변화상을 펼쳐 냈다. 임진왜란이 ‘7년 전쟁’으로 알려졌지만, 저자는 대마도주의 조선 방문부터 명나라 군대 철수까지 12년간 지속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 차원에서 바라본다. 948쪽. 4만 3500원.하늘의 과학(장조원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30여년간 항공 과학 인재들을 길러낸 장조원 한국항공대 교수가 비행기, 로켓, 인공위성처럼 하늘을 나는 모든 장치가 따라야 하는 수학·과학 법칙을 한 권에 담았다. 여객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선 승객 탑승 전부터 진행되는 운항 브리핑 등 현장감이 묻어나는 이야기도 가득하다. 612쪽. 2만 5000원.해양세력 연대기(앤드루 램버트 지음, 박홍경 옮김, 까치 펴냄) 영국 해군사학자인 저자가 고대 아테네, 카르타고,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해양 국가들이 어떻게 국제 질서를 만들어 왔는지 톺아봤다. 이들 국가는 패권 국가의 등장을 경계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고자 했고, 무역 활동을 위협받지 않는 한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542쪽. 2만 5000원.木의 건축(배기철·이도형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건축 전문가인 두 저자가 환경친화적 목조 건축의 발전 가능성을 짚어 보고 국내외 주요 목조 건축물 현황을 소개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콘크리트 건축의 내구성이 크지 않고, 국토의 65%가 산림인 우리나라에서 목조 건축물도 건강하고 쾌적한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16쪽. 2만 3000원.놀이터는 24시(김초엽 외 6인 지음, 자이언트북스 펴냄) 김초엽·배명훈·편혜영·장강명·김금희·박상영·김중혁 등 인기 작가 7명이 게임회사 엔씨소프트와 손잡고 즐거움을 주제로 펴낸 앤솔러지. SF소설 ‘글로버리의 봄’, ‘수요 곡선의 수호자’ 등과 같이 여행과 소비, 일과 놀이에서 즐거움을 각자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단편 7편이 실렸다. 288쪽. 1만 4000원.한글빅뱅(금해랑 지음, 해랑한국어 펴냄) 금해랑 시인이 내외국인 수백 명을 직접 가르치며 완성한 한글 교육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학습지 회사 경력 20년인 저자는 글자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닌, 소리와 의미를 연결해 쉽게 기억하도록 하는 독특한 교육법을 강조한다. 168쪽. 1만 5900원.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코로나19 섬 지역 백신 접종 앞장’ 해군 최초 훈련함 한산도함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코로나19 섬 지역 백신 접종 앞장’ 해군 최초 훈련함 한산도함

    지난 14일, 백신접종이 어려운 낙도 및 무의도서 25개 지역에 대한 코로나19 예방접종이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30세 이상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번 코로나19 예방접종에는 육상과 다른 해상환경을 고려해 특별히 해군함정이 동원되었다. 사실상 처음 시도되는 ‘해상순회접종’으로 해군의 한산도함이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해상순회접종은 전라남도의 적극적인 요청과 협력, 해군의 의료진과 함정 제공 등으로 성사됐다. 가사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도서지역 코로나19 예방접종에는 최근 미국으로부터 공여 받은 얀센 백신이 사용되었다. 얀센 백신은 단 1회 접종만으로도 면역력이 확보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차질 없는 접종을 위해 수송지원본부의 지휘 하에 지난 11일 해군과 해경 합동 모의 훈련을 실시하는 등 철저한 사전준비가 이루어졌다. 이번 임무에 투입된 'ATH-81 한산도함'은 우리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 및 훈련을 목적으로 건조된 함정이다.한산도함은 지난 2013년 방위사업청이 현대중공업과 탐색개발 계약을 체결해 건조가 시작되었다. 2018년 11월 16일 진수식이 거행된 한산도함은 전장 142미터, 4,500톤 급으로 최대속력은 24노트(시속 44km)로 알려지고 있다. 순항속력은 18노트로 7,000마일(12,000km 이상) 이상을 항해할 수 있다. 한산도함은 사관생도의 연안실습과 순항훈련 그리고 보수교육 과정의 함정실습 등을 전담하게 된다. 이를 위해 400여 명 이상의 거주공간은 물론 200명 수용이 가능한 대형 강의실 등 3개의 강의실과 조함 및 기관 등의 실습실을 갖췄다.이밖에 한산도함은 위기 시 기본 전투함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76mm와 40mm 함포를 장착하고 있다. 또한 대유도탄 기만체계 등도 장착하며, 해난사고 시 의무지원 및 인원이송 등 구호활동 지원 등의 다양한 임무도 수행이 가능하다. 한산도함은 교육 및 훈련 외에 국내 군함 중 최대 규모의 의무실과 병상을 갖춰 해상에서 발생하는 대량 전상자의 초기 처치와 후송을 담당하는 전상자 구조 및 치료함 (CRTS: Casualty Receiving and Treatment Ship)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 전상자 구조 및 치료함은 해상이나 도서지역에서 발생한 전상자를 수용하고, 응급처치를 담당하는 '해상응급실' 역할을 하는 함정이다. 이를 위해 자체 의무시설과 인력 그리고 헬기 갑판을 보유하여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육지의 병원으로 신속하게 이송할 수 있다. 한산도함의 헬기갑판에는 상륙기동헬기의 이착함이 가능하며, 해상작전헬기 2대를 격납할 수 있다. 한산도함의 의무구역은 중환자 처치를 위한 대수술실 1실을 포함한 수술실만 3개실에 진료실과 병실도 갖추었다.전체 의무구역 면적은 대형수송함인 독도함의 1.8배에 달한다. 함명인 한산도는 임진왜란 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위치했고, 한산도해전의 배경이라는 점을 고려해 선정되었다. 한산도함은 지난해 10월 22일 진해 군항에서 해군작전사령부 주관아래 취역식이 거행된 바 있다. 김대영 군사평론가 kodefkim@naver.com
  • 권오봉 여수시장, 돌산 ‘노량’ 영화 촬영장 격려

    권오봉 여수시장, 돌산 ‘노량’ 영화 촬영장 격려

    권오봉 여수시장이 지난 8일 영화 ‘노량’ 촬영이 한창인 돌산 진모지구 현장을 찾아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권 시장은 김한민 ㈜빅스톤픽쳐스 감독과 함께 영화촬영장 곳곳을 직접 둘러보며 설명을 들었다. 이 곳에는 거북선, 판옥선, 성곽, 이순신 처소, 운주당, 명군 진영 등이 실제와 같은 형태로 재현돼 있다. 영화 촬영 후 구조물 시설 존치와 사후 활용방안 등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눴다. 권 시장은 “대규모 시설투자와 영화 촬영 스텝 등 유입에 따른 소비 증가로 지역경제 활성화가 기대된다”며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조명한 두 작품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우리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한층 더 빛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수 돌산 진모지구에서는 영화 ‘한산’이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세트장 조성과 촬영을 마쳤으나 코로나19로 개봉이 미뤄지고 있다. 다른 작품인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달부터 다음달 까지 1598년 겨울철 노량 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을 촬영한다. 내년에는 드라마 ‘7년 전쟁’이 촬영될 예정이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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