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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인의 입맛, 순창 고추장에… 직접 만들고 맛보며 가져가세요”

    “세계인의 입맛, 순창 고추장에… 직접 만들고 맛보며 가져가세요”

    우리나라 대표 발효식품인 고추장. 고추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이 바로 전북 순창군이다. 우리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인 고추장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순창고추장에 대한 역사는 고문서에도 잘 나와 있다.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창에 들렀을 때 한 농가에서 순창고추장의 전신인 ‘초시’를 먹어 보고 이 맛을 잊지 못해 조선을 건국하고 임금(태조)에 오른 후 순창군수에게 진상토록 했다는 구전부터 임진왜란 이후 전래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순창고추장 기록이 처음 서술된 건 숙종 때 이시필이 쓴 ‘소문사설’이다. 헌종 때 발간한 ‘오주연문장전산고’, 순조 때 편찬된 ‘규합총서’에도 순창고추장을 지역특산품으로 소개하며 조리법이 실려 있다.이처럼 순창고추장의 오랜 역사를 테마로 한 순창장류축제가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한다. 순창군은 다음달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순창 발효테마파크 및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 일원에서 장류축제를 연다고 14일 밝혔다. ‘세계인의 입맛, 순창에 담다’라는 슬로건으로 전국의 관광객을 맞이한다. ●이벤트 시간 떡볶이·떡꼬치 무료 나눔 순창장류축제에서 ‘고추장’을 맛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번 축제는 매운맛대회, 지역민이 꾸미는 문화공연, 우리가족 자랑 등 지루할 틈이 없이 다양한 행사로 꽉 채워졌다. 우선 관광객들이 함께 고추장을 상징하는 티셔츠나 두건을 착용한 후 다 함께 고추장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전통 고추장, 토마토 고추장, 매실 고추장 등 참가자가 직접 만든 고추장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고추장을 만들어 보지 않았어도 걱정할 필요 없다. 고추장 명인의 설명에 따라 손쉽게 만들 수 있다. 고추장이 유명하다고 해서 고추장만 먹을 수 없다. 고추장을 활용한 대표적인 음식은 떡볶이다. 떡볶이도 이제 한류의 영향으로 K음식의 대표주자가 됐다. 행사장에는 토마토 고추장, 불고기소스, 로제소스 떡볶이 등 가지각색의 떡볶이를 먹어 볼 수 있게 떡볶이 마을을 만들었다. 축제 기간 밥, 면, 떡 어디에 활용해도 맛있는 만능 소스로 만든 떡꼬치도 준비했다. 순창 장류 소스마다 가진 특색을 살려 운영되는 떡볶이 마을에서 먹고 싶은 맛의 떡볶이와 떡꼬치를 먹으며 출출한 배를 채울 수 있다. 이벤트 타임에는 무료로 떡볶이와 떡꼬치 나눔도 예정돼 있다.●순창고추장 임금님 진상 행렬도 재연 순창장류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중 하나는 ‘순창고추장 임금님 진상 행렬’이다. 이번 진상 행렬은 임금님의 입맛을 사로잡은 진미, 순창고추장을 임금님께 올리는 모습을 재연함으로써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순창고추장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관광객들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퍼레이드 행렬에 꼬리 물기로 참여해 흥을 느껴 볼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추억을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다. 축제장 주변에 2만 포기가량의 국화꽃을 심어 최고의 포토존을 완성했다. 국화꽃과 함께 사진 한 장이면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공연도 준비돼 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자랑하는 금과들소리 공연과 순창 민속놀이 한마당, 농악 퍼레이드 등 어르신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예정이다. 5대 명창공연과 초대 가수로 꾸며지는 장류 음악회, 장류고을청소년 어울마당, 신나는 예술버스 공연도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방문객과 100m 길이 가래떡 만들어 올해 순창장류축제는 볼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100m의 가래떡을 3줄, 총 300m 가래떡을 방문객들이 함께 참여해 만들어 보는 콘텐츠를 준비했다. 노랑, 빨강, 흰색 가래떡을 꼬아서 하나의 가래떡을 만드는 시간을 갖는다. 고추장은 쌀가루, 고춧가루, 메줏가루 등으로 만든다. 흰색은 쌀가루, 빨간색은 고춧가루, 노랑은 메줏가루를 상징해 고추장을 만드는 과정을 가래떡으로 표현해 보고자 이번 콘텐츠를 기획했다. 순창 장류 소스를 활용한 숯불구이 체험존도 조성했다. 숯불구이용 발효 소스 만들기 체험과 함께 맛있는 숯불구이를 맛볼 수 있다. 숯불구이 된장소스와 감식초 드레싱을 만들고 숯불구이 고추장소스와 매실청 드레싱도 만든다. 축제장 내 푸드트럭뿐 아니라 각 읍면 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먹거리 부스도 방문객의 허기를 채울 예정이다. 읍면별로 특색 있는 전통음식들로 구성해 순창만의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행사장 발효테마파크 핫플로 떠올라 축제가 열리는 발효테마파크는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발효테마파크에는 푸드사이언스관, 미생물뮤지엄, 실내체육놀이시설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실내체육놀이시설은 ‘세대통합 놀이문화과학복합센터’ 내 연면적 850㎡ 규모로 조성됐으며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됐다. 피트니스 트레이닝, 브레인 트레이닝, 헬스게임 등 50여종의 재미있는 콘텐츠를 통해 게임뿐만 아니라 스포츠도 즐길 수 있다. 4차 산업 기술을 활용한 무동력 트레드밀과 화면 속 뉴욕, 서울 등에서 자전거 타기, 어드벤처존과 클레이사격, 권총 사격 등 레저스포츠 공간도 마련돼 있다. 미생물 뮤지엄 1층에는 미생물의 모양과 특징을 주제로 아이들의 신체놀이 활동이 가능한 미생물 서커스 놀이공간이 있다. 2층은 몸속 미생물, 일상 속 미생물 등 우리와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미생물을 주제로 현미경 체험, 미생물 게임존과 같은 상설 전시로 꾸며졌다. 다년생 식물원엔 판다누스, 대만 고무나무, 부겐베리아 등 50여종의 아열대식물과 형형색색의 드라이플라워로 조성된 쉼터가 있다. 발효테마파크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편히 쉬면서 감상할 수 있는 휴게공간이다.
  •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최전선 영남 방어 수훈… ‘조선의 양장’ 꼽아[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최전선 영남 방어 수훈… ‘조선의 양장’ 꼽아[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정기룡(1562~1622)은 1592년 왜란 발발 당시 만 30세의 초급 무관이었다. 1586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병법 훈련을 관장하는 훈련원의 종8품 봉사(奉事)로 있었다. 이후 7년에 걸친 전쟁은 국가에는 위기였지만 담력과 용력, 병법 지식을 두루 갖춘 젊은 장수에게는 입지를 빠르게 다지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명나라 원병의 제독 마귀(麻貴)는 ‘조선의 양장’(良長·뛰어난 장수)으로 이순신·한명련·권율과 함께 정기룡을 들기도 했다. 정기룡은 정유재란 이후에도 왜적의 재침(再侵) 우려가 높아질 때마다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와 경상도방어사로 최전선인 영남 지역 방어의 책임을 우선적으로 맡았던 대표적 무장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직책이었던 삼도수군통제사로 통영의 진중에서 생을 마쳤다.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은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 땅 곤양 출신이다. 그가 무과에 급제하는 과정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처음 이름은 무수(茂壽)였는데 선조가 신룡(神龍)이 종루(鐘樓)에서 일어나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내관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무과 시험을 보러 온 정기룡이 종루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그를 불러들인 선조가 그의 됨됨이를 보고는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줄거리다. 영조시대 문인 황경원이 지은 정기룡 묘지명에도 등장하는데 사실처럼 회자되곤 한다. 그런데 그의 두 형 이름이 몽룡(夢龍)와 인룡(仁龍)인 것을 보면 기룡 역시 원래 이름인 듯하다. 설화는 그가 무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정기룡의 전투 기록은 남원 의병장 출신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처음 보인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던 4월 30일자다. 앞서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영남 방어의 책임을 맡기는데, 성응길과 조경을 각각 경상도좌우방어사로 삼았다. 훈련원 봉사 정기룡은 이때 조경 우방어사 휘하에 편입된 듯하다. ‘전라도방어사 곽영이 김산(김천) 추풍역에서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경상도우방어사 조경을 치려 했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정기룡이 돌진해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조경의 상처는 심각해 결국 방어사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병력을 해산해야 했다.경상도 순찰사 휘하에 배속된 정기룡은 이탁영이 남긴 ‘정만록’(征蠻錄)에 다시 등장한다. 경상감영 아전 이탁영이 순찰사 김수를 수행하면서 쓴 종군일기다. 정기룡은 충청·전라·경상 3도 근왕군이 왜군에 어이없이 패한 용인전투에 참전한다. 5월 4일자다. ‘멀리 연기와 불꽃이 곳곳에 치솟는다. 사상(使相·순찰사)은 경상도 장사 50명 남짓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유곡찰방 김충민이 적진으로 돌격해 왜적의 머리 하나를 베고 봉사 정기룡과 강만남, 군수 김경로도 각각 하나씩을 베어 왔다. 동향인 박태고도 왜병 둘을 쏘아죽이고 돌아왔다. 그 반가움을 어찌 말로 다 하랴.’ 경상감영 아전의 영남 군사 중심 서술은 불가피했다. 왜란 발발 당시 만30세 초급 무관선조가 ‘기룡’ 이름 내렸다는 설화개전 당시 종8품→정3품 목사로영조, 그의 공 기려 ‘충의’ 시호 내려잇단 전과에 고향 곤양 수성장에용화산 전투 승전 후 상주성 수복왜적 주요 보급로 확보 ‘숨통’ 죄어묘지에 ‘100차례 전투 패한 적 없어’ 정기룡에 대한 설명은 조금 더 이어진다. ‘정기룡은 진산(진주)의 동풍(同風) 강세정의 사위인데 경상도 김산 접전에서 머리 두 개를 베었고, 지금 다시 베어 이미 세 개가 되어 당상관이 될 만하니 축하할 일이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적의 머리 한 개를 베어 오면 공사천을 가리지 않고 등과한 것으로 하며, 두 개를 얻으면 6품관으로 올리며, 세 개는 당상관에 올리고 왜적 장수의 머리를 베면 가선대부로 올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에 해당하는 품계다. ‘동풍’이란 자신과 같은 아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정기룡을 더욱 강조해서 서술한 이유일 것이다. 잇따라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린 정기룡은 고향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됐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진주성으로 차출되면서 그에게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런데 초유사 김성일은 정기룡마저 진주성으로 불러들여 유병장(游兵將)으로 삼는다. 김성일은 9월 경상우도관찰사에 오르자 정기룡을 다시 상주 가(假)판관, 곧 임시판관에 임명했다. 상주는 순변사 이일이 가토 기요마사 선발대에 참패한 고을이다. 상주판관 권길도 북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순국했다. 상주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 정기룡은 김산 남쪽 금오산에 진을 쳤다. 상주목사 김해는 고을 백성을 이끌고 일월산 용화동에 머물고 있었다. 왜적이 용화동을 포위한 상황에서 정기룡의 공격이 시작됐다. 묘지명은 당시를 이렇게 적었다. ‘공이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왜노들이 산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지세가 험했다. 이에 우인(優人·배우)이 된 듯 말 위로 올라 “휘익” 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며 서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가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 왜노들이 생포하려 공의 뒤를 매우 급하게 쫓았다. 공이 왜노를 유인해 평원으로 나오게 한 뒤 재빨리 공격하자 왜노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정기룡은 용화동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상주성을 공략한다. 왜적이 상주성에 은거하며 나오지 않자 백성들과 함께 서정(西亭)에 진을 치고 횃불을 묶어 공격했다. 왜적의 방비가 취약한 동문 밖 밤나무 숲에 군사를 숨겨두고 한밤중에 호각 신호로 서문으로 쳐들어가 막사에 불을 붙였다. 왜적이 놀라 동문으로 달아났는데 밤나무 숲 병사들이 400명 남짓한 적의 목을 베고 마침내 성을 수복했다. 1592년 11월이다. 왜적의 부산포 상륙 직후 속절없이 내주었던 경상도지만, 7월 영천성과 9월 경주성에 이어 상주성마저 되찾은 것이다. 왜적은 뜻하지 않게 보급선이 평안도까지 한없이 늘어진 마당이었다. 여기에 길목의 주요 거점마저 조선군에 내주어 교통로 확보가 쉽지 않았으니 군량을 약탈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선군은 명나라 군사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도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분전하고 있었다. 정기룡의 후손인 정구정이 1746년(영조22) 펴낸 ‘매헌실기’에는 상주 판관 시절을 언급하고 있다. 1593년 봄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한편 관가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종자로 나눠 주었으며 파괴된 제방을 다시 쌓고 둔전을 경영해 군량미를 확보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유정, 사대수, 조승훈을 맞아 응접했고, 5월에는 상주 가판관에서 상주 판관으로 승진했다.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부인 진주 강씨가 치마를 잘라 공에게 편지를 남기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정기룡은 8월 상주 가목사에, 이듬해 11월 상주 목사에 잇따라 임명됐다. 1593년 11월 5일 선조실록에는 임금과 대신들의 대화 내용이 실려 있다. 동지중추부사 박진이 “기룡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다시 말을 타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조경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고 하자 선조는 “옛적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다. 정기룡 같은 사람을 판관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항오란 군사를 줄세운 것을 뜻하는데 병졸에서 입신한 무장을 언급할 때 쓰는 표현이다. 개전 당시 종8품 봉사가 만 2년도 되기 전에 정3품 목사로 뛰어올랐으니 그야말로 수직 상승이었다.그러자 영의정 류성룡이 “기룡은 젊고 재략이 있는가 하면 목민(牧民)에도 능하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한다. 상주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을 목사로 올리면 다시 판관을 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물다”고 거들었다. 상주 목사는 문관이 맡는 자리여서 군사보좌관인 판관이 있어야 했지만, 정기룡이 목사가 되면 판관을 별도로 임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영의정 겸 도체찰사 이원익이 도원수 권율·방어사 곽재우와 상주에서 계책을 논의했는데 “기룡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정기룡은 경상도 지역에 머물며 토왜대장(討倭大將)으로 활약했다. 왜란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로 왜적 침입에 대비했다. 묘지명은 상징적 표현을 담아 다음과 같이 정기룡을 기렸다. ‘공은 사람됨이 걸출하고 용맹스러운 위엄이 있었으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잘했다. 신장 7척에 눈이 밝아 밤에도 터럭까지 볼 수 있었고, 소리는 큰 종과 같아서 길게 휘파람을 불면 10리 밖까지 들렸다. 어렸을 때부터 강개했고 100차례 전투에서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었다. 죽인 적군이 1만명을 헤아리니 왜노들이 지금까지도 그 위엄을 두려워해 어린아이가 울 때 문득 공의 이름을 불러 그치게 하곤 한다.’ 영조가 추증한 시호는 충의(忠毅)다.
  • 해남 “불멸의 명량! 충무공 정신 기린다”

    전남 해남군은 ‘불멸의 명량! 호국의 울돌목!’ 2023 명량대첩축제가 오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해남~진도 울돌목 일원에서 개최된다고 31일 밝혔다. 명량대첩축제는 임진왜란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과 민초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기적의 대승, 명량대첩 승리를 기념하는 호국 역사문화축제로 매년 열리고 있다. 올해 축제에는 해남을 주무대로 명량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공연, 부대행사가 마련된다. 특히 명량대첩축제의 백미인 해상전투 재현은 대형 전광판에 3D 영상이 더해진 실감몰입형 확장현실(XR이머시브미디어) 공연과 1000여대의 드론이 울돌목의 하늘을 수놓는 드론쇼로 펼쳐진다. 미디어 해전과 드론쇼는 8~9일 이틀에 걸쳐 야간에 열리며 울돌목 밤바다의 화려한 조명과 어우러져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명량대첩의 역사와 조선시대 문화를 느껴보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부대행사도 축제장 곳곳에서 열린다. 축제는 첫날 약무호남제례를 시작으로 해남과 진도 군민들이 깃발을 들고 진도대교를 건너 출정식에 참여하는 퍼레이드가 장관을 이룬 가운데 개막식과 해상전투 재현이 이어지며 볼거리, 체험거리도 마련된다.
  • 국방부가 제기한 홍범도 장군 관련 의혹 살펴보니… “역사 왜곡, 그마저도 부실해”

    국방부가 제기한 홍범도 장군 관련 의혹 살펴보니… “역사 왜곡, 그마저도 부실해”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주장하는 ‘홍 장군 행적 관련 의혹’이 근거가 부실한 역사왜곡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0일 서울신문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과 그들이 쓴 논문을 검토한 결과 국방부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편협하게 취합했고 일부는 사실관계 자체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공식자료와도 상충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국방부가 제기한 의혹은 크게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과 연관돼 있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자유시 참변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던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홍 장군 부대가 자유시참변에 직접 가담했다는 기록 자체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국방부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이라는 논문에서 “자유시참변 당시 홍 장군은 휘하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말했다. 자유시 참변은 거세진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1년 1~3월 볼셰비키가 시베리아에 세운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에 있는 스보보드니(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부대 가운데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와 상하이파(대한의용군)의 주도권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홍 장군은 이들과 큰 이해관계가 없었던데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자유시참변과 홍 장군이 직접 관련 없고 논란이 될만한 행적도 없다는 건 ‘정설’ 수준도 아니고 그냥 ‘객관적 사실’이라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오세호 국민대 교양학부 강사는 “홍 장군은 자유시참변 당시 피해자들한테서 테러를 당해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당시 이들의 명분이 ‘왜 그때 우리를 공격했느냐’가 아니라 ‘왜 그때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았느냐’였다”면서 “당시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계봉우는 훗날 카자흐스탄에서 홍 장군과 같은 마을에 거주했지만 홍 장군을 비난한 적이 없다”고 소개했다. 국방부가 자유시참변 당시 희생자 규모를 “독립군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했다고 밝힌 것 역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따르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론 사망자가 36명,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600여명이다. 당시 대한의용군 병력이 1000명 내외였다. 장 연구원은 “당시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큰 저항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 강사 역시 “도망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곧바로 연해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만 봐도 피해자 규모를 과장할 수 없다는 한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자유시참변 당시 홍 장군이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했다며 의혹을 제기한 것 역시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윤 교수는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이라는 논문에서 “독립군의 어른인 홍 장군이 재판에 회부된 독립군 부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판관으로 참석한 것이라고 본다. 실제 재판에서 유죄판결(징역 2년형)을 받은 건 3명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도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도 있다”는 국방부 주장 역시 빨치산의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이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서 독립군 부대를 빨치산부대로 지칭하는 표현이 적잖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장 연구원은 “빨치산은 비정규 게릴라를 가리키는 용어다. 당시 빨치산 활동이라고 하는 건 민간의용군, 비유하자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같은 개념이었다”고 꼬집었다. 소련공산당에 1927년 입당한 것에 대해서도 장 연구원은 “홍 장군이 1868년에 태어났다. 1927년에는 이미 59세였다. 당시 기준으론 적잖은 고령이었고, 소련 영토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은퇴한 독립군 대장이라는 입장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와 적대관계인 소련과 연대하는 건 자연스런 행보였다. 소련공산당 가입 이후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 尹정부 저격 존재감 살린 軍출신 김병주, 재선 날개 펼칠까[주간 여의도 Who?]

    尹정부 저격 존재감 살린 軍출신 김병주, 재선 날개 펼칠까[주간 여의도 Who?]

    매주 금요일 [주간 여의도 Who?]가 온라인을 통해 독자를 찾아갑니다. 서울신문 정당팀이 ‘주간 여의도 인물’을 선정해 탐구합니다. 지난 일주일 국회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정치인의 말과 움직임을 다각도로 포착해 분석합니다.“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과 관련해 장관이나 차관 말이 다 다르고 해명도 우왕좌왕합니다. 경찰에서 하는 것은 채 상병 사건만이고 박정훈 대령의 항명 등에 대해 수사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특검으로 가야 합니다.”(지난 22일 KBS 방송 인터뷰) “이번 한미일 정상회의는 우리 국익 차원에서 득보다 실이 많은 회의였다고 봅니다. 미국 입장에서 20년간 공들였던 외교의 틀을 만든 반면에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국익 중심의 외교 틀을 한꺼번에 무너뜨림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의 불안정성이 높아졌습니다.” (지난 21일 BBS 방송 인터뷰) 국회 국방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과 한미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윤석열 정부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보기 드문 4성 장군 출신으로 특유의 강골 무인 성향을 드러내며 당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군사·안보 분야에서 ‘이슈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채 상병 순직 수사 ‘윗선’ 외압 의혹 제기한미일 정상회의 성과 비판 앞장서 주목 김 의원은 고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보고서가 경찰에 이첩됐다 국방부로 회수되는 과정에서 윗선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애초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총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해 달라는 해병대 수사관 보고서에 결재했지만, 돌연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해병대 1사단장을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실 등 윗선 외압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 사건은 박정훈 대령의 항명 사건이라고 야당의 특검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김 의원을 필두로 한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 2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 장관이 지난달 30일 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에 서명한 뒤 다음 날 결재를 번복한 배경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이 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짚어봐야겠다고 판단해 급하게 보류시켰다”고 해명했지만, 김 의원은 “해병대에서 수사한 것을 장관이 재검토하라고 한 것은 직권 남용”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한미일 정상회의에 대해서도 ‘준군사동맹’이라고 주장해 이 장관과 재차 설전을 벌였다. 이 장관과 육사 40기 동기이기도 한 김 의원은 육군 미사일사령관과 3군단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냈다. 40년 가까운 군 생활로 군의 속성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 국방부에서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의원으로 통한다. 김 의원은 지난 1월에는 북한 무인기 침투에 대한 정부의 ‘안보 무능’을 파헤치는데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손자병법 즐겨읽고 유연한 사고 지역구 공천 전망은 밝지 않아 김 의원이 안보 전문가로서 적극적으로 당내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동력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만만찮은 공천 때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례 대표인 김 의원은 군 출신임에도 남북 화해 협력과 평화를 중시하는 민주당 내에서 유연한 사고를 갖춘 인물로 호평받아왔다. 평소 손자병법을 즐겨 읽는 그는 지난해 전당대회에서 낙선한 한 의원이 “팬덤 정치 때문에 졌다”고 이야기하자 “장수가 왜 무기를 평가하냐”며 “임진왜란 때 조총이 등장했듯 신무기가 나왔는데 신무기를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순간 장수는 지는 것”이라고 조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 동료 의원은 “보수 정당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산으로 김 의원이 필요한데 당내에선 비례 대표를 한 번 더 시켜드려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전했다. 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에 출마하는 비례대표 의원은 단수공천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공천룰을 확정하면서 김 의원은 더 바빠지게 됐다. 그는 지난 4월 같은 당 김한정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 남양주을에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사는 그는 “집과 가깝고 육사생도 시절 남양주 별내로 행군을 자주했다”고 사유를 밝혔다. 하지만 경북 예천이 고향인 김 의원은 강원 강릉고 출신으로 지난 총선 때 강원권역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뛴 경력이 있어 강원 지역을 놔두고 굳이 남양주에 출마하냐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 때 남양주을에선 민주당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53.82%를 득표하는 등 ‘텃밭’으로 꼽힌다. 민주당 관계자는 25일 “현역 의원끼리 붙으면 경선을 거쳐야 하는데 재선인 김한정 의원이 지역 조직을 장악해놓은 상황에서 김 의원이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전국 9척… 혈세 먹는 애물단지 거북선

    전국 9척… 혈세 먹는 애물단지 거북선

    423년 전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지금은 혈세 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관광객이 줄면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전남도와 경남도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거북선은 전남에 3척(여수·해남·진도 각 1척), 경남에 8척(통영 4척, 거제 1척, 사천 2척, 남해 1척) 등 총 11척으로 총제작비만 300억원에 이른다. 이순신 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부터 전남을 비롯한 경남 지역 지자체들이 경쟁하듯 거북선을 건조했다. 그러나 관광객이 줄면서 해마다 수억원에 달하는 수선유지비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11척 가운데 현재 9척이 남아 있다. 경남 거제시가 지난 2011년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의 하나로 국비 포함 16억원을 들여 120t급 거북선을 건조했으나 지난달 폐기 처리됐다. 목재는 소각하고 금속은 고물상으로 넘겼다. 남해안 지자체가 만든 거북선 가운데 첫 폐기 사례다. 경남 사천시는 8억 7000만원을 들여 만든 거북선형 유람선을 4700만원에 매각해 제작비의 5%만 건졌다. 다른 지자체에 있는 거북선도 상황은 비슷하다. 진도와 해남의 거북선은 모두 조선 수군의 배를 모델로 만든 목조배다. 바다에 띄우려면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정비해야 한다. 그러나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적자가 늘어 현재는 뭍에서 전시용으로 사용된다. 진도 판옥선은 76t, 18m 규모로 진도군이 2010년 9억원을 들여 건조했다. 명량대첩의 현장을 관광객들이 볼 수 있게 유람선 역할을 했지만 건조한 지 5년 만에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졌다. 관광객 발길이 줄어 수입은 감소했는데 선장과 선원 인건비, 유지·보수비가 갈수록 늘었기 때문이다. 해남 우수영에 있는 울돌목 거북선은 2008년 전남개발공사가 46억원을 들여 관광유람선으로 건조해 2017년까지 운행했지만 30억원의 적자가 누적돼 결국 운항을 중단했다. 전남개발공사는 2019년 해남군의 거북선 활성화 계획에 따라 무상으로 양여했지만 운항은 다시 중단됐다. 박종찬 광주대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는 “전남과 경남에 흩어져 있는 거북선을 운영하려면 지자체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며 “계속 관광자원을 유지하려면 목제 시설 특성상 유지보수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차라리 한 곳으로 역량을 집중하거나 아니면 세 곳의 콘텐츠를 연계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혈세 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거북선’ 대책 없나

    혈세 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거북선’ 대책 없나

    423년 전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관리가 부실하고 관광객들이 외면해 대책이 시급하다. 23일 전남도와 경남도에 따르면 전국 거북선은 전남에 3척(여수 1척, 해남 1척, 진도 1척)이고 경남에 8척(통영 4척, 거제 1척, 사천 2척, 남해 1척), 총 11척으로 거북선 제작비가 300억원에 이른다. 이순신 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부터 전남을 비롯한 경남지역 지자체들이 경쟁하듯 거북선을 건조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줄면서 해마다 수억 원에 달하는 수선유지비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11척 가운데 현재 9척이 보존되고 있다. 경남 거제시가 지난 2011년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의 하나로 국비 포함 16억원을 들여 120톤급 거북선을 건조했다. 승선 체험을 비롯한 관광용으로 건조했지만 새고 한쪽으로 기울어 결국 뭍에 올려 전시하다가 태풍으로 선체가 파손돼 공매에 부쳤다. 거북선은 154만5380원에 낙찰됐지만 지난 7월 해체해 폐기물이 되고 말았다. 남해안 지자체가 만든 거북선 가운데 파쇄 소각된 첫 사례다. 경남 사천시는 8억 7000만 원 들여 만든 거북선형 유람선을 4,700만 원에 매각해 제작비 5%만 건졌다. 현재 지자체들이 보존하고 있는 거북선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진도와 해남의 거북선은 모두 조선 수군의 배를 모델로 만든 목조 배다. 바다에 띄우려면 정기적인 관리와 시설 정비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관광객들 발길이 뜸해지면서 적자가 늘어 현재는 바다가 아닌 뭍에서 전시용으로 전락했다. 진도 판옥선은 76톤, 18미터 규모의 선박으로 진도군이 지난 2010년 사업비 9억원을 들여 만들었다. 명량대첩의 현장을 관광객들이 볼 수 있게 유람선의 역할을 했지만 건조한지 5년 만에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졌다. 관광객 발길이 줄어 수입은 줄었는데 선장과 선원들 인건비, 유지·보수비가 갈수록 늘었기 때문이다. 해남 우수영에 있는 거북선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8년 전남개발공사가 46억원을 들여 건조해 2017년까지 해상 운행을 했지만 30억원의 적자가 늘어나면서 운영상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해상 운행을 중단했다. 전남개발공사는 2019년 해남군의 거북선 활성화 계획에 따라 무상으로 넘겨줬지만 다시 중단됐다. 4척을 보유한 경남 통영시는 유지관리비로 해마다 1억~2억 원을 쓰고 있다. 최근 1척을 조선소에 맡겨 수리비 4억 3000만 원을 지급했다. 4척의 유지보수비만 10억 원을 넘어갈수록 걱정이 태산이다. 2019년 관광객 7명이 추락한 전남 여수 거북선은 4억 8000만 원을 들여 보수해 지난 7월 8일 운영을 재개했다. 그러나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마지못해 버티고 있다. 지자체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거북선은 문화재가 아닌데 사실상 문화재 취급을 받고 있어 쉽게 처분도 못한다”고 털어놨다. 박종찬 광주대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는 “전남과 경남에 흩어져 있는 거북선을 운영하려면 지자체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라며 “계속 관광자원을 유지하려면 목제 시설 특성상 유지보수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차라리 한 곳으로 역량을 집중하거나, 아니면 세 곳의 콘텐츠를 연계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우리나라 첫 사람이름 딴 공항 생기나...경남도의회 이순신 국제공항 명명 건의안

    우리나라 첫 사람이름 딴 공항 생기나...경남도의회 이순신 국제공항 명명 건의안

    경남도의회가 부산 가덕도에 건설되는 신공항 이름을 ‘이순신 국제공항’으로 명명하자는 대정부 건의안을 다음달 임시회에서 채택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딴 공항이 생길지 주목된다.경남도의회는 국민의힘 박춘덕 의원 등 45명의 의원이 ‘가덕도 신공항 공식 명칭 이순신 국제공항(Yi Sun-sin International Airport) 지정 촉구 대정부 건의안’을 최근 발의했다고 22일 밝혔다. 박 의원 등은 “동남권 지역발전을 위한 숙원사업인 가덕도 신공항 건설 파급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역명을 딴 공항이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세계적 영향력이 큰 공항명칭이 필요하다”고 건의안 제안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해외에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딴 공항이 많다”며 “유럽 중심지 파리에 ‘샤를드골 공항’, 미국의 관문으로 통하는 뉴욕에 ‘존 F. 케네디 공항’, 이탈리아 로마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인도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공항’ 등을 사례로 들었다. 의원들은 건의안에서 “이순신은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으로 수많은 역경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정신적 근간이 되고 있다”며 “가덕도 신공항 명칭을 이순신 국제공항으로 명명하면 대단한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가 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부산·경남·전남 등이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을 조성해 세계적인 걷기코스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세계인들이 동남권 관문공항인 이순신 국제공항으로 출입국하게 되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신공항이 건설되는 가덕도 주변 남해안은 이순신 장군의 무패 신화가 깃든 역사적인 지역으로, 이순신 공항이 들어선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고 덧붙였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수군 첫 승전지였던 거제 옥포를 비롯해 사천, 고성 당항포, 통영 한산도, 진해 안골포 등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려 있고, 가덕도는 부산포 해전 승리의 교두보였던 천성진성이 있는 곳이다”고 설명했다. 의원들은 “가덕도 신공항의 관제탑과 비행기계류장 등을 이순신과 거북선을 형상화하는 구조물로 설계해 공항을 랜드마크로 만들어 세계적인 공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이순신 국제공항 명명에 국민과 정치권 합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공론의 장을 마련할 것”을 건의했다. 경남도의회는 다음달 개회하는 제407회 임시회에서 이순신 국제공항 건의안을 채택해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토교통부장관, 각 정당대표, 경남도지사와 부산시장 등에게 보낼 예정이다. 국토교통부 예규 ‘공항명칭 관리지침’ 제4조에는 공항 이름은 소재지 시·군명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그 밖에 공항명칭으로 사용이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 [정재정의 독사만평] 한일 우호의 새 동력, 신조선통신사/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정재정의 독사만평] 한일 우호의 새 동력, 신조선통신사/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6일 일본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와 함께 통신사 행렬과 국서 교환 행사가 성대하게 재현됐다. 지난달 28, 29일 부산에서는 통신사선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와 출항식이 열렸다. 이들 행사는 관계자와 시민들의 참가로 성황을 이루었다. 필자는 통신사 정사 역을 맡아 행렬 주도와 국서 교환 임무를 수행했다. 2017년 10월 두 나라가 함께 통신사 관련 유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프로젝트에서 한국 측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았던 것이 인연이 됐다. 필자는 해신제 축문을 낭독했다. ‘해신이시여! 조심조심 갓난아기를 보살피듯 바다에는 해로운 바람이 그치고 양국 관계에는 이로운 바람을 불게 하시어 이번 13차 통신사 항해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도와주소서’라고 빌었다. 국서로는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 선린외교와 문화 교류에 앞장섰던 통신사의 성신교린(誠信交隣) 정신을 바탕으로 한일이 서로 믿고 교류하며, 통신사의 가치가 양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당대를 넘어 미래로 계승되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이번 조선통신사 재현은 종래에 비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한국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통신사선을 재조해 212년 만에 운항했다.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 외교는 1811년 쓰시마 방문이 12차로 마지막이었다. 이후 양국은 몇 차례 통신사 외교 재개에 나섰지만 국내외 사정의 변화로 실현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일은 침략과 저항으로 점철된 근대 70년을 살았다. 이번에 재건된 통신사선의 쓰시마 입항은 단절된 항해 역사를 잇는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둘째, 한일 관계 악화와 코로나 유행으로 4년 동안 중단된 통신사 행렬과 국서 교환을 재개했다. 원래 통신사선은 2018년에 진수를 마치고 2019년에 통신사와 함께 쓰시마로 항해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반일정책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이를 막았다. 게다가 코로나 유행이 겹쳐 통신사마저 네 번이나 발이 묶였다. 따라서 이번에 정상적으로 열린 이즈하라항 축제와 통신사 재현은 부산과 쓰시마의 약화된 교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신(新)조선통신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사·부사 이외에 종사관을 새로 임명해 삼사체제를 갖췄다. 셋째, 윤석열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측면에서 돕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일본을 왕래한 통신사는 국서와 예물을 주고받으며 평화롭고 대등한 외교관계를 구축했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은 적대관계에서 벗어나 260년 동안 선린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는 일본의 10여개 번에서는 문화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따라서 통신사의 재현은 반일·혐한에 얼어붙은 양국민의 마음을 녹이고 국가 간 우호 협력을 증진하는 데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 나아가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여러 나라에는 외교와 교류를 통해 상대의 체면과 사정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국익과 국위를 지킬 수 있는 지혜와 교훈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쓰시마를 종단하면서 이즈하라항 축제와 조선통신사 재현의 앞날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25년 전 필자가 처음 쓰시마를 방문했을 때 인구는 4만명이었는데 지금은 2만 7000명으로 대폭 줄었다. 길가에 빈집이 수두룩하다. 경제도 분명히 어려울 터이다. 그럼에도 쓰시마 민관은 한국에서 온 손님을 예전처럼 극진히 대접했다. 이즈하라항 축제와 조선통신사 재현이 계속 성황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부산과 쓰시마가 함께 번영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두 지역은 평소에도 각 분야에서 서로 이익이 되는 사업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게 필요하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다. 민간·지역의 상생 교류가 활발해야 국가·정부의 우호 협력도 강고해진다.
  • [열린세상] 중국이 미래라는 착각/최우선 국립외교원 교수

    [열린세상] 중국이 미래라는 착각/최우선 국립외교원 교수

    광해군은 현실주의자였다. 임진왜란 기간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쌓은 외교 경험과 군사지식은 그를 명분론을 넘어선 현실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명과의 전통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력하게 부상하는 후금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정책을 추구했다. 거대한 패권경쟁 속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약자인 조선의 안위를 보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정책과 상관없이 후금은 조선을 제압하고 경쟁자인 명과의 대결에 집중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국가의 패권경쟁 결과가 불확실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후금과의 충돌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광해군의 정책은 전략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제거된 후 인조와 집권세력은 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후금을 적대하는 친명정책을 추진했다. 명분론에 따른 이러한 비현실적인 정책은 병자호란의 비극이 발생하는 데 기여했다. 1633년 후금은 전략회의에서 몽골, 명, 조선 중 조선을 마지막 공격 대상으로 결정했다. 이미 명과의 육로 연결이 단절된 가장 약한 조선을 먼저 공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627년 정묘호란을 경험한 이후에도 조선은 점차 보다 분명하게 친명정책을 추진했다. 1636년 청으로 국호를 바꾼 홍타이지를 황제로 칭하길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결정한 후 조선은 병자호란을 맞았다. 미중 경쟁과 한국의 정책에 대한 논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명청 교체기와 미중 경쟁을 유사한 상황으로 평가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떠오르는 중국이 과거의 청처럼 미래의 패권국가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광해군이 했던 것처럼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외교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역사적 유추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국이 지배하는 패권질서였다. 중국을 견제할 만한 국력을 가진 동맹국이 없는 상황에서 주변국들의 유일한 대안은 중국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외교적 지배를 의미했다. 그리고 17세기 명청 교체기와 같은 패권 이행의 시기에 주변국들은 대륙 강국들의 승패를 지켜본 후 승자에게 편승하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이었다. 20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세력균형 질서로 바뀌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동아시아에 관여하기 시작한 미국은 이후 오랜 기간 역외 균형자로서 패권국가의 등장을 막고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패권국가 등장이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냉전 종식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안정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미래에도 오랜 기간 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2030년대 후반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에 대해 군사적으로 강력한 우위를 유지하고 경제적으로 대등한 규모와 질적 우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인도, 일본, 러시아 등 주요국들은 역외 균형자인 미국과 거대 동맹을 결성해 지리적으로 근접한 중국을 견제할 것이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더라도 오랫동안 세력균형을 깨고 패권국가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현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편 한국은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한다. 대륙국가인 중국의 강대국화는 자연히 거대한 잠재적 위협의 성장을 의미한다. 중국은 이미 군사력 투사 능력을 강화하면서 세력권 확장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현상 유지에 공동이익을 가진 미국과의 동맹에 분명한 전략적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군사혁신을 통해 강력한 거부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는 자비에 의존하는 편승을 통해 생존할 수밖에 없었던 패권의 시대가 아니라 세력균형의 시대를 살고 있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임진왜란 역사기록물 ‘용사잡록’ 완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임진왜란 역사기록물 ‘용사잡록’ 완역

    임진왜란 당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약포(藥圃) 정탁이 쓴 ‘용사잡록’(龍蛇雜錄) 국문 번역서가 나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군사문헌집 번역사업 일환으로 정탁이 군사 업무를 하면서 접한 각종 문서를 모아 정리한 용사잡록을 국문으로 번역 발간했다고 1일 밝혔다. 정탁은 1526년 태어났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을 보좌했고 2년 뒤 우의정에 임명됐다. 파직된 충무공 이순신 구명운동에 적극 나선 것으로도 유명하다. 용사잡록에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조정은 물론 조선과 명나라, 명과 일본 사이에 주고 받은 각종 공문과 편지 등이 포함돼 있다. 사명대사의 보고서, 명나라 해군 제독 유정의 공문서, 일본군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의 편지 등도 수록돼 있다.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8년 보물 제494-6호로 지정됐다. 번역은 중국사를 전공한 순천향대 임상훈 교수, 경인교대 기전문화연구소 안광호 연구원이 담당했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김경록 선임연구원이 전문해제를 집필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이 책은 조선·명·일본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전쟁 과정과 위기 극복 노력뿐 아니라 전쟁 당시 정치, 군사적 공조와 갈등이 고스란히 수록된 역사 자료”라고 평가했다.
  • 국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영정·동상 모습이 약간씩 다른 이유 [한ZOOM]  

    국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영정·동상 모습이 약간씩 다른 이유 [한ZOOM]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세 가지 변수가 등장한다. 첫째는 선조 임금의 피난이었다. 전국시대 일본의 전쟁은 상대방 다이묘(영주)를 붙잡아 처형하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왜군은 조선을 침략하자마자 선조를 붙잡기 위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한양을 향해 진격한다. 그러나 왜군이 한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피난을 가버리고 난 후였다. 둘째는 의병이었다. 왜군 병사인 사무라이들은 원래 농민이었다. 사무라이들은 농번기에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다이묘(영주)들은 농한기에만 전쟁을 했다.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는 농번기에도 전쟁을 할 수 있는 직업 군인을 만들어 군인과 농민을 분리시켰다.이 병농분리(兵農分利) 덕분에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군역을 지는 병농일치(兵農一致) 사회였다. 왜군은 군인이 아닌 농민이 의병이 되어 싸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살생을 금지하는 승려들까지 승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웠다. 실제 임진왜란의 승리는 의병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로 가장 큰 변수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체계적으로 훈련된 수군, 완벽에 가까운 전략 그리고 1592년 5월 사천해전부터 등장한 거북선의 활약으로, 왜군은 후방보급이 막힌 것은 물론 이순신과의 모든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그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이름만으로도 왜군을 떨게 했던 이순신 장군의 존재 이순신 장군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황은 역전되기 시작한다. 명나라와 일본이 종전협상에 들어가지만 조선의 절반을 달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조건을 제시한 일본 때문에 결국 협상은 결렬된다. 그 동안 군대를 재정비 한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킨다. 그런데 일본에게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순신 장군을 처리할 계략을 짠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요시라’가 조정에 ‘1597년 1월 11일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부산을 통해 들어올 것이다’라는 거짓정보를 흘린다. 이 정보를 믿은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출정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거짓정보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고민에 빠진다. 이대로 출정하면 분명 수군이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그러나 출정을 하지 않으면 자신은 왕명을 어긴 대역죄인이 될 것이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지키기 위해 출정하지 않는다. 분노한 선조는 왕명을 어긴 이순신 장군을 한양으로 압송해 모진 고문을 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하고 도원수 권율 장군의 부대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내린다. 지금으로 따지면 해군참모총장을 이등병으로 강등하고 군복도 없이 부대를 따라다니며 잡일을 하게 한 것이었다. 그 동안 수많은 전장에서 왜군을 격퇴해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수군 피해를 막기 위해 택한 ‘백의종군’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모진 고문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 장군이 있는 경상남도 합천으로 향한다. 그런데 겨우 마음을 다스리던 그에게 비보가 전달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고향 충청남도 아산에서 약 보름을 머문 이순신 장군은 다시 합천으로 먼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이순신 장군이 없는 조선 수군은 같은 해 7월 경상남도 거제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궤멸된다. 전장에서 수없이 많이 죽음을 느끼면서, 매순간 암살의 위협을 느끼면서,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결정을 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고뇌와 함께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킨 임금과 조정으로부터 느낀 배신감, 억울한 누명으로 계급까지 강탈당한 모멸감, 어머니 죽음 앞에서 느낀 슬픔까지, 백의종군 길을 걸으며 이순신 장군이 가졌을 수없이 많은 감정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이렇게 많은 고뇌와 고통 속에서 점점 변해갔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훼손·도난 당한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표준 영정이다. 이 표준영정은 장우성 화백의 1953년 작품으로, 1973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장우성 화백 친일 논란으로 표준영정 해제 논의 중에 있다고 한다. 표준영정 외에도 이순신 장군 초상화가 전해내려 왔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었거나 도난 되었다고 한다. 한편,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충렬사와 한산도 제승당에는 또 다른 영정이 있다. 이 영정은 ‘왜군과 치열한 전쟁이 있었던 역사적인 곳인 만큼 표준영정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모습의 영정이 필요하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1977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두 화백 모두 이순신 장군의 실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설명하는 사료가 너무 부족해 상상력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따뜻한 마음과 정갈하고 온화함이 느껴지는 이 영정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이순신 장군이 느낀 고뇌가 주름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더구나, 모진 고문, 백의종군의 억울함,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까지 한꺼번에 겹치면서 고뇌와 슬픔이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뒤덮었을 것이다. 사람은 시련을 겪으면 외모가 바뀐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명 받았을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당시 평균수명이 35~45세라는 일부 연구결과에 비춰본다면 고령인 이순신 장군의 외적변화는 더욱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영화 ‘한산’과 ‘명량’에서 보여준 이순신 장군의 모습 김한빈 감독 영화 ‘한산:용의 출현’(2022)과 ‘명량’(2014)’은 전쟁 초반 학익진(鶴翼陣)이 등장하는 ‘한산대첩’ 그리고 전쟁 후반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후 남아있는 12척의 배로 전쟁의 판세를 다시 뒤집은 ‘명량해전’을 그린 작품이다. ‘한산’에서는 박해일 배우가, ‘명량’에서는 최민식 배우가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았다. 박해일 배우가 진지하고 과묵하며 정갈한 모습의 전쟁 초기 이순신 장군을 보여준다면, 최민식 배우는 모진 고문과 백의종군의 고난을 거치면서 겪은 고뇌가 얼굴에 드러나는 전쟁 후기 이순신 장군을 보여준다.  국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 부산에서 시작해 서해방향으로 가면 통영, 남해, 여수 등 남해안 대부분의 도시에서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다시 목포, 군산, 인천까지 이르는 서해안 도시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해안도시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위해 걸었던 서울에서 경상남도 합천에 이르는 수많은 내륙 도시들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도시들을 여행하면 늘 만감이 교차한다. ‘이순신 장군을 관광상품으로 너무 우려먹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잠깐 들면서도, 그 만큼 그 분의 행적과 업적이 이 땅 구석구석 남아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동안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 [씨줄날줄] 화왕산성의 기억/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화왕산성의 기억/서동철 논설위원

    망우당 곽재우는 ‘홍의장군’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의 명장이다. 그는 정유재란 때도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맞서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곽재우’와 ‘화왕산성’을 동시에 치면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이름이 줄줄이 뜬다.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은 ‘화왕산성에 들어가 함께 고생한 기록’이다. 화왕산성 방어에 기여했다는 700명 남짓의 이름이 실려 있다. 곽재우 후손 곽원갑이 쓰고 박윤광이 펴냈다. 앞부분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왜란 발발 직후를 담았고, 뒷부분 동고록에 정유재란을 다뤄 ‘창의록’(倡義錄)이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용사’는 용의 해인 1592년 임진년과 뱀의 해인 1593년 계사년을 가리킨다. 동고록의 머리 부분에는 방어사 곽재우를 비롯해 종사관 성안의, 조방장 이영, 조전장 장응기, 장서기 배대유, 장무관 박효관 등이 보인다. 그런데 창녕 화왕산성에 안동과 경주는 물론 멀리 떨어진 서울 지역 인사도 등장하는 것은 뜻밖이다. 특히 당시 4도 도체찰사 류성룡과 경상도 도체찰사 이원익,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운룡이 산성에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화왕산성을 함께 지켰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영남 남인이라는 것이다. ‘창의록’은 1734년(영조 10년) 안팎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조는 당색과 관계없이 관직에 등용한다는 탕평책을 펴면서도 노론을 우대했다. 정치적 약자인 남인은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자신들이 주도한 항전의 역사를 부각시켜 내부를 결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경계인 창녕의 화왕산성이 선택됐다는 게 역사학계의 시각이다. 박윤광은 1736년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움직임을 반대하는 남인들의 연명 상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착시 현상이 깊어지는 것이 문제다. 화왕산성에서는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동고록의 등장인물 가운데 격전에서 승리한 듯 왜곡되는 현상마저 적지 않다. ‘가공의 역사’에 또 다른 ‘소설’이 더해지는 악순환은 화왕산성에 그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시대든 공적 평가가 이념, 곧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화왕산성 사례는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 16억 들인 ‘거제 거북선’ 결국 잿더미 된다

    16억 들인 ‘거제 거북선’ 결국 잿더미 된다

    경남도가 12년 전 16억여원을 들여 제작해 거제시에 인계한 ‘1592년 거북선’이 결국 폐기물로 소각처리된다. 거제시는 ‘1592년 거북선’을 일반입찰에서 154만원에 낙찰받았던 A씨가 인수포기 의사를 밝힘에 따라 이를 폐기처분하기로 결정했다고 27일 밝혔다. 교육자 출신인 A씨는 관련 시설에 기부할 생각으로 지난달 16일 낙찰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무로 만든 거북선은 길이 26.5m, 높이 6.06m, 폭 6.87m, 무게 120여t이다. 현재 몸체 대부분이 썩어 뒤쪽 상당부분은 부서져 내렸다. 이동·관리가 힘들어 거북선을 기부받겠다는 곳이 없자 A씨는 현재 전시된 조선해양문화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로 옮기려 했으나, 파손 우려와 수천만원의 운송 비용이 예상돼 결국 인수를 포기했다. 거제시는 태풍이 오기 전인 다음달 10일까지 거북선을 폐기하기 위해 이른 시일 안에 업체를 선정, 목재는 폐기물로 처리하고 철재는 고물로 매각할 예정이다. 문제의 거북선은 경남도가 2011년 김태호 전 지사 때 ‘이순신 프로젝트’의 하나로 만든 것이다. 당시 경남도는 전문가 고증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남해를 누비며 일본군을 물리친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고 강조했다. 이름도 ‘1592년 거북선’으로 지었다. 경남도는 애초 국내산 최고급 금강송으로 만들기로 했으나 미국산 소나무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 업체 대표가 구속되는 등 태생부터 부실 논란이 있었다. 제작비는 16억 4500만원이 들었다. 이 거북선은 2011년 6월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해양문화관 앞 바다에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배 안으로 바닷물이 스며들고 흔들림이 심해 2012년 7월 31일 육상으로 끌어올렸다. 2013년 2월 거제시가 인수했으나 방부처리 등이 부실해 목재가 썩고 뒤틀려 지난해까지 보수하는 데만 1억 5000여만원이 들었다. 거제시는 2019년 수리를 위한 실시설계 결과 당장 3억원이 넘게 들고 해마다 수리를 계속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짐에 따라 경매에 부쳐 낙찰자가 없으면 폐기하기로 했다. 1억 1750만원으로 평가된 거북선은 7회 유찰됐고, 마지막 입찰에서 A씨가 이순신 장군 음력 탄신일인 1545년 3월 8일에 맞춰 적어낸 154만 5380원으로 낙찰받았다.
  • 16억 들여 만든 ‘1592년 거북선’ 결국 소각장으로...거제시 폐기 최종결정.

    16억 들여 만든 ‘1592년 거북선’ 결국 소각장으로...거제시 폐기 최종결정.

    경남도가 12년전 16억여원을 들여 제작해 거제시에 인계한 ‘1592년 거북선’이 결국 폐기물 소각장에서 소각처리된다.거제시는 1592년 거북선을 일반입찰에서 154만원에 낙찰받았던 A씨가 인수포기 의사를 밝힘에 따라 폐기처분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27일 밝혔다. 거제시는 이날 A씨에게 입찰 계약해지 통보서를 보냈다. 교육자 출신인 A씨는 거북선을 폐기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관련 시설에 기부할 생각으로 지난달 16일 낙찰받았다.나무로 만든 거북선은 길이 26.5m, 높이 6.06m, 폭 6.87m, 무게 120여t이다. 현재 몸체 대부분이 썩어 뒷쪽 상당부분은 부서져 내렸다. 이동·관리가 힘들어 거북선을 기부받겠다는 곳이 없자 A씨는 현재 전시돼 있는 조선해양문화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 옮겨 전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운송과정에 파손 우려와 수천만원의 운송비용이 예상돼 A씨는 고심끝에 지난 23일 거제시에 인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거제시는 태풍이 오기전에 다음달 10일까지 해당 거북선 폐기처분 작업을 마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빠른 시일안에 폐기처리업체를 선정한 뒤 거북선을 현재 있는 곳에서 해체한 뒤 목재는 폐기물 소각장으로 옮겨 태우고 철재는 고물로 매각할 예정이다. 계약에 따라 거제시는 A씨가 낸 낙찰대금 154만원 가운데 거북선이 낙찰뒤 공유재산 부지에 있었던 기간만큼 사용료를 제외하고 85만여원을 돌려줄 예정이다.문제의 거북선은 경남도가 2011년 김태호 전 지사 재임시절에 ‘이순신 프로젝트’의 하나로 만들것이다. 당시 경남도는 전문가 고증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때 남해를 누비며 일본군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한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고 강조했다. 이름도 1592년 거북선으로 지었다. 경남도는 국내산 최고급 금강송으로 거북선을 만들기로 했으나 충남 서천군 지역 업체가 미국산 소나무를 사용해 만든 사실이 드러나 업체 대표가 구속되는 등 1592년 거북선은 태생부터 부실논란을 안고 태어났다. 국비와 도비, 시비 등 모두 20억원으로 계약했던 거북선 제작비는 부실건조 책임 등을 물어 최종 16억 4500만원이 들었다.2011년 6월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해양문화관 앞 바다에 도착한 거북선은 해상에 전시할 계획이었지만 배안으로 바닷물이 스며들고 흔들림이 심해 2012년 7월 31일 육상으로 끌어올렸다. 2013년 2월 거제시가 공식 인수를 받아 2013년 부터 육상관람을 개시했으나 방부처리 등이 완벽하게 되지 않아 목재가 썩고 뒤틀리는 현상이 계속 발생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수리와 도색 등 보수공사에 모두 1억 5000여만원이 들었다. 2019년 거제시는 거북선 수리를 위한 실시설계 결과 당장 수리에 3억원이 넘게 들고 해마다 수리를 계속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짐에 따라 전문가 자문과 지역 주민의견 수렴 등을 거쳐 폐기처분 하는것으로 내부방침을 정했다. 이어 공유재산심의회 심의결과 일반입찰을 실시해 응찰자가 없으면 폐기처리하도록 결정됐다. 입찰가 산정을 위한 감정에서 1억 1750만원으로 평가된 거북선은 7번 입찰에서 모두 유찰됐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추가 실시한 입찰에서 A씨가 이순신 장군 음력 탄신일 1545년 3월 8일에 맞춰 적어낸 154만 5380원에 낙찰을 받았다.거제시 관계자는 “부실 논란을 안고 태어난 1592년 거북선 관리·보존과 관광자원 활용을 위해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내구연한이 다돼 폐기처분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 유찰 7번 수모 ‘짝퉁 거북선’, 낙찰자마저 포기했다

    유찰 7번 수모 ‘짝퉁 거북선’, 낙찰자마저 포기했다

    154만원 낙찰자, 인도 포기… 소각 수순20억 들였으나 저급품 소나무 사용 논란부식 심해 유지비만 1억 5000만원 들어 20억원을 들여 제작했지만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한 ‘1592 거북선’이 결국 소각·폐기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경남 거제시는 1592 거북선을 폐기하기로 결정하고 곧 소각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이 거북선은 지난달 16일 진행된 ‘거제시 공유재산 매각 일반입찰’에서 7번의 유찰 끝에 154만원에 낙찰돼 활용 방안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낙찰자가 인도 기한이었던 지난 26일까지 인도해가지 않으면서 결국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이 거북선은 2010년 경남도가 진행한 이순신 프로젝트 일환으로, 김태호 전 지사 재임 당시 2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2011년 건조됐다. 길이 25.6m, 폭 8.67m, 높이 6.06m의 3층 구조인 거북선은 사료 고증을 토대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모습으로 만들어져 ‘1592 거북선’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제작 당시 금강송을 사용했다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저급품인 미국산 소나무를 섞어 만든 사실이 드러나면서 ‘짝퉁’ 논란이 일었다. 애초 지세포항 앞바다에 정박해 놓고 승선 체험 등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흔들림이 심하고 물이 새는 등의 이유로 1년여 만에 육지로 올라온 후 조선해양문화관 앞마당에 전시됐다. 또 방부 처리를 소홀히 해 목재가 심하게 부식되거나 뒤틀렸고 지난해 태풍 힌남노 때는 선미(꼬리) 부분이 파손돼 폐기 처분 의견이 나왔다. 시는 거북선 유지보수를 위해 2015년부터 연평균 2000만원, 총 1억 5000만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가 매각에 나섰지만 100t이 넘는 무게와 심한 부식 등으로 7번이나 유찰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낙찰가 154만원은 최초 제작비인 20억원과 비교하면 0.077%에 불과하다. 낙찰자는 이순신 장군 관련 시설에 이 거북선을 기증할 계획이었으나 이동과 관리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되면서 인도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 관계자는 “나무는 소각장에서 불태우고 철물은 고물상에 팔 계획”이라며 “안타깝지만 복구와 관리가 어려워 폐기 처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 국민의힘, 文 전 대통령 향해 “가짜 자연인” “중국 대변”

    국민의힘, 文 전 대통령 향해 “가짜 자연인” “중국 대변”

    국민의힘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 6·25 전쟁이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었다고 주장하는 책을 추천한 것을 두고 “‘북한 바라기’만 하는 전직 대통령이 개탄스럽다”고 비판했다. 윤희석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6·25가 북한의 침략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 것”이라며 “북한 김정은 정권의 ‘가짜 평화쇼’에 놀아나 안보를 망가뜨려 놓고 대체 무슨 염치로 선열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날을 망치는가”라고 말했다. 이어 “군 통수권자였던 이의 인식이 이렇게 잘못돼 있었던 탓에 지난 정권 내내 대북 굴종 정책이 지속됐음은 물론, 북한의 온갖 도발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이자 장성 출신인 신원식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가짜 자연인’ 문 전 대통령의 6·25 전쟁 왜곡에 유감을 표한다”며 “문 전 대통령 스스로 종북(從北)·종중(從中)주의를 자백한 꼴”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 전 대통령의 (책 추천) 글에 6·25 전쟁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북한을 감싸려는 의도 외에는 달리 해석되지 않는다”면서 문 전 대통령을 향해 “6·25 전쟁 대신 ‘한국전쟁’으로 표현한 저의가 뭔가. 6·25 전쟁이 국제전이라면 김일성의 불법 기습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임을 부정하는 건가”라고 물었다. 강대식 최고위원도 이날 “6·25 전쟁이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었다는 주장은 6·25 전쟁이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중국 입장과 일맥상통한다”며 “문재인 정부 때의 국방부 자료, 구소련 기밀문서 등을 통해 볼 때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임이 명백함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분이 북한과 중국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매우 부적절한 언행이었다”고 비난했다. 이준석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문 전 대통령의 글을 공유하며 “정치적인 인물이 남들이 잘 안 쓰는 용어를 쓴다면 그 안에 정치적인 함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면서 “김일성의 기획된 전쟁 도발을 ‘국제관계 속에서의 산물’ 정도로 미화시켜주는 용어는 정치적 의미가 크고 위험하다. 저 말 절대 쓰지 맙시다”라고 했다. 지상욱 전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미·중 대리전’ 주장은 전쟁 책임의 절반이 미국에 있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북한 책임을 은폐하는 것으로 중국의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며 “왜 아예 임진왜란도 명일 전쟁이라고 하지”라고 했다. 앞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 73주년인 전날 페이스북에 ‘1950 미중전쟁’을 추천하며 “‘1950 미중전쟁’은 한국전쟁이 국제전이었음을 보여준다”며 “전쟁의 시원부터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힘이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고 밝혔다.
  • 사졸보다 앞장서 일당백… 왜군 떨게 한 ‘노원평 전투’ 승리 이끌었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사졸보다 앞장서 일당백… 왜군 떨게 한 ‘노원평 전투’ 승리 이끌었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고언백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작원관전투의 밀양부사 박진, 이치전투의 동복현감 황진, 구미포전투의 강원도조방장 원호 장군과 함께 육전(陸戰) 4대 명장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행주대첩 이후 왜적은 한양도성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군량미가 떨어지면 경기도 일대로 노략질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양주목사 고언백은 불암산과 북한산 일대를 거점으로 왜군이 도성 밖으로 몰려나올 때마다 타격을 가했다. 왜적이 결국 도성을 포기하고 남쪽 해안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의 하나도 보급이 철저히 차단됐기 때문이다. 고언백은 선조가 총애하는 무장(武將)이기도 했는데, 양주 일대에 몰려 있는 조선 왕릉들을 수호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차례로 휩쓸며 5월 3일 도성을 점령했다. 경상도는 왜적의 상륙지이자 북상의 통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경상도 동쪽 지역은 왜적의 침입을 피한 고을도 적지 않았다. 1593년 6월 조정은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전국의 피해 상황을 집계하게 되는데, 그 결과 경상도 지역 67개 고을 가운데 피해를 입지 않은 고을이 22개에 이르렀다. 하지만 경기도는 37개 고을 가운데 섬 지역인 강화와 교동을 제외한 35개 고을이 왜적의 말발굽에 휩쓸렸다. 고언백은 가장 수난이 컸던 경기도를 대표하는 장수다.●선조가 총애… 왕릉 수호 결정적 역할 고언백(高彦伯·?~1608)은 경기도 교동현이 고향이다. 무덤도 이곳에 있다. 지금은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이 된 교동도에는 2014년 연륙교가 놓였다. 고언백은 교동의 향리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1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니 향리 집안에서 일어선 무관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강화도 서쪽 교동도는 국방의 요지다. 임진왜란 이후인 1629년(인조 7)에는 남양만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군절도사영이 교동도로 옮겨 가면서 현에서 부로 승격하기도 했다. 경기수사가 교동부사를 겸임하는 체제였다. 개전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발대가 파죽지세로 북상할 때 고언백은 도순변사 신립의 척후장(斥候將)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 나섰다. 7000명에 이르는 조선정규군이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자 선조가 서둘러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고언백이 이끈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하면서 왜적의 머리 40급 남짓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고언백은 양주 일대에서 흩어졌던 군사를 다시 모아 유격전을 펼쳤다. 의병사에서도 고언백을 경기의병장의 한 사람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가 됐다. 선조실록에 고언백은 5월 28일자 ‘대신이 대탄(大灘) 방비에 대해 아뢰다’라는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대탄은 한탄강이다. ‘대탄의 방비는 임진의 방비와 비교할 때 훨씬 허술하고 제장(諸將)의 명칭 또한 정해지지 않았으니 대응책에 미진한 점이 있을까 염려된다’면서 ‘고언백은 조방장(助防將)이란 칭호를 주어 전선 수비에 협력하게 하면 이익이 될 듯하다’고 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이미 무너진 줄 모르고 상류의 한탄강 방어를 논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고언백에 대한 조정의 신뢰는 높았다. 조정은 이때 고언백을 평양으로 부른 듯하다. 선조가 평양성을 버린 이후 고언백은 밤중에 대동강 건너의 적진을 기습해 수백 명을 쏘아 죽이고 300필 남짓한 말을 빼앗아 오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자 선조는 고언백을 당상관인 양주목사로 승진시켜 왕릉을 비롯한 동교(東郊) 방비의 책임을 맡긴다. 당시는 양주 온릉은 물론 서울 정릉·태릉·강릉·의릉, 구리 동구릉, 남양주 광릉·사릉·흥릉·유릉이 모두 양주땅이었다.●실록에도 “위엄·명성 서울까지 퍼져” 9월 12일자 선조실록은 ‘경기감사 심대의 장계를 보니 ‘양주목사 고언백은 한 달 사이에 세 차례나 싸움에 이겨 위엄스러움과 명성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왕왕 멀리서 호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백성은 한 사람도 창의(倡義)한 자가 없었는데 김향린 등이 이번에 군기(軍器)를 바쳐 왔으니 가상한 일입니다. 성 안에서 마음을 다해 내응한 자와 왜적의 목을 베어 군문에 가져오는 자는 모두 전일의 죄를 속해 주고 많은 상을 내리겠다는 뜻을 성안에 알려 백성들로 하여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라 적었다. 고언백의 연승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성 내부 백성 사이에 왜적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싹트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월 들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과 양주목사 고언백을 평양성 수복에 투입하라는 선조의 명이 내려진다. 대신들은 ‘도성 백성이 오로지 고언백을 의지하고 있으며 양주 이북을 지킬 만한 장수도 없다’며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비변사가 ‘고언백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있으며, 도성 백성들이 모의해서 내응한 것도 그의 힘이다. 평양에 와서 다른 장수의 지휘를 받게 하면 그저 한 사람의 용장(勇將)에 불과할 뿐이니 양주에 남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고언백은 12월 종2품 경기도방어사에 오른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무덤인 강릉과 중종비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을 파헤치려는 왜적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고언백에게 가의대부를 가자(加資)하는 내용을 다룬 선조실록에는 사관(史官)의 견해가 적혀 있다. ‘언백은 궁마(弓馬)를 잘 다루었는데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고 애써 힘을 내 공격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적으로 하여금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했다. 또 적의 형세를 잘 염탐해 한밤에 기습하거나 숲속에서 저격했는데 자신이 사졸(士卒)들보다 앞서서 싸웠으며 그가 쏜 화살이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전후해 머리를 벤 것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으므로 왜적이 매우 두려워했다.’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되찾았다. 2월에는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은 도성을 탈환하고자 경기지역에 출몰하는 왜적을 소탕하는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3월 26~27일 마들평야를 내려다보는 삼각산(북한산)과 수락산·불암산 일대에 매복한 조선군은 약탈에 나선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를 공격한다. 도원수 김명원, 황해도방어사 이시언, 평안도좌방어사 정희립, 순변사 이빈, 평안도조방장 박명현, 의승장 사명대사 유정의 연합군이었다. 노원평(蘆原平) 전투다. 주역은 당연히 불암산성을 고쳐쌓아 근거지로 삼고 있던 고언백이었다. 노원평 싸움을 두고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와 견줄 만하다’라고 했다. 그만큼 큰 승리였다. 도성 외곽에서 조선군이 선전하자 왜군은 활동 범위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4월 20일 한성에서 물러난다.●임해군 내통죄 몰려 고문 끝 사망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왜군이 한강을 건너자 조선군은 이들을 추격하고자 했지만 방해가 시작됐다. 명군은 행주대첩의 영웅 전라감사 권율을 압송해 한강을 건너간 이유를 따져 물었다. 순변사 이빈과 방어사 고언백은 급보로 ‘명군이 강변에 늘어서 군사가 진격하지 못하도록 했고, 순변사의 중위선봉장 변양준의 목에 칼을 씌워 끌고 가는 바람에 상처가 심해 피를 토했다’고 조정에 알리기도 했다. 고언백의 군대도 명나라 사대수 총병의 20명 남짓한 하인들이 줄지어 서서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힐책하며 억류한 채 놓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에도 고언백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와 경상도방어사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영남지역에서 무공을 쌓았다. 선조는 1597년 1월 21일 그를 불러들인 자리에서 “그동안 몇 곳의 변장(邊將)을 지냈는가” 하고 물었다. 고언백은 “처음에는 북병사의 군관, 다음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되었고 사신을 따라 북경에도 여덟 차례 갔다. 이후 청성만호를 거쳐 선공감 주부가 됐다. 임진년에 신립을 따라 갔다가 달천에서 패하자 신이 외로운 군사 50명과 양주와 연천 사이를 출입하면서 장정을 불러모으고 있을 때 왜구는 이미 경성에 들어왔다”고 했다. 스스로 밝힌 이력이다. 선무공신 3등에 오르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년 임해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 끝에 죽었다. 인조반정으로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 초여름 ‘슬로시티’ 충남 예산을 찾는 5가지 이유 [투어노트]

    초여름 ‘슬로시티’ 충남 예산을 찾는 5가지 이유 [투어노트]

    쉼 없이 달려온 한해도 어느덧 절반 넘어서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가기 좋은 시기다. 6월의 끝자락엔 봄의 잔잔한 풍경과 여름의 싱그러움을 모두 담고 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충남 예산은 전통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져 ‘힐링 도시’다. 천년 고찰 수덕사와 600년 역사를 이어온 덕산 온천수로 즐기는 온천 워터파크 스플라스 리솜, 그리고 전국적인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예산상설시장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국내 유일의 보부상촌인 ‘내포 보부상촌’에서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호를 걸으며 남은 시간을 설계할 수 있다.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넉넉한 인심과 역사의 향기 가득한 ‘슬로시티’ 예산에서 삶의 활력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초여름 예산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 5곳을 소개한다. ‘뉴트로’ 먹방 여행의 성지…예산상설시장 예산상설시장은 외식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의 손길이 더해져 올 초 전국적인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원래 예산상설시장은 1926년 ‘오일장’이 서던 이 지역 최대 시장이었지만 인구감소로 인한 전통시장의 침체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수백 개에 달하던 점포와 노점이 하나둘 문을 닫으며 침체기에 접어든 예산시장에 손을 내민 것은 예산이 고향인 백종원 대표였다. 그는 예산의 ‘상설시장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시장 내 공실로 방치됐던 빈 상가를 사들여 옛 모습을 담은 식당으로 개조했다. 지난 1월 개장 이후 한 달 만에 10만명을 돌파하며 인기를 끌었지만, 위생과 가격 문제 등이 불거졌다. 결국 지난 3월 한 달간 휴장한 뒤 화장실과 퇴식구 등 리모델링을 통해 4월 다시 문을 열었다. 시장에는 1월 문을 연 금오바베큐(닭 바비큐), 신광정육점(돼지 토시살), 선봉국수(파기름 비빔국수), 시장 닭볶음(꽈리고추 닭볶음탕), 불판빌려주는집(상차림) 5개 외에 대흥상회(먹태 구이), 예터칼국수(바지락칼국수), 시장중국집(탕수육), 고려떡집(고기 떡), 어서와U(아메리카노), 또복이네(제육볶음) 등 16곳이 새롭게 들어섰다. 식당마다 목재와 타일을 활용한 레트로 인테리어들이 돋보인다. 하지만 주요 맛집들이 장터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 있어 좁은 시장 내에 많은 관광객이 몰릴 때는 매우 복잡하며, 식당마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 주소 : 충남 예산군 예산읍 형제고개로 967 - 운영시간 : 오전 11시~오후 9시(점포별로 운영시간 다름)   600년 역사 덕산 온천수로 즐기는 온천 워터파크…스플라스 리솜 스플라스 리솜은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덕산 온천수로 즐기는 건강한 온천 워터파크 리조트다. 덕산 온천수는 워터파크 내 15개의 야외 노천탕, 워터 슬라이드, 바데풀 등 물놀이 시설뿐만 아니라 406개의 전 객실에 공급된다. 워터파크는 MZ세대를 위한 스릴만점 어트렉션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물놀이 시설도 갖추고 있다. 급강하를 반복하는 워터 롤러코스터인 ‘마스터 플라스터’, 튜브를 타고 빙글빙글 돌며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는 ‘튜브 슬라이드’, 레시싱과 같이 아찔한 속도를 자랑하는 ‘스피드 슬라이드’가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최대 2m 파고를 자랑하는 급류 파도 풀로 마치 계곡 래프팅과 같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밤에는 국내 워터파크 최초로 야간 패들 보트를 체험할 수 있는 패들 비치가 있다. 초보자를 위해 패들의 기본자세와 노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전문 강사들의 기초 교육이 무료로 진행된다. 7월 중순부터 물놀이 마니아를 위해 강렬하고 신나는 공연과 이벤트를 더한 ‘워프 페스티벌’을 선보인다. DJ의 EDM 쇼와 댄서들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마치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울러 핀란드 전통 사우나와 핀란드 오크통 사우나를 새롭게 오픈해 물놀이에 지친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했다. MZ세대를 위한 팝업스토어도 운영된다. 서울 성수동과 부산 광안리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송월타올의 타올쿤 팝업스토어가 중부권에서 처음으로 열린다. 타올쿤이 새겨진 감각적인 생활소품과 함께 타올쿤과 협업한 스플라스 한정굿즈도 선보인다.  주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온천단지3로 45-7 운영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한국 근현대 미술사 거장의 흔적이 담긴 천년고찰…수덕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은 고려 충렬왕 때인 1308년에 건립됐다. 수덕사는 일주문에서 시작해 금강문, 사천왕문, 황하정루,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대웅전 양옆에는 스님들이 수도하는 백련당과 청련당이 있다. 수덕사는 미술계 인사와도 인연이 많은 사찰이다. 일주문 인근에 있는 수덕여관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과 한국 현대 미술사의 거장 이응노(1904~1989),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장욱진(1917~1990) 화가의 흔적이 남겨진 곳이다. 가장 먼저 수덕사를 찾은 인사는 나혜석이었다. 나혜석은 일본의 도쿄 여자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야수파 화풍을 익혔다. 1931년 남편과 이혼을 한 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나혜석은 이곳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 스님(1896~1971)을 찾아왔다. 이어 이응노는 수덕여관에 머물던 나혜석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이응노 화백은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화가 수업을 마친 뒤 귀국해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난 뒤 수덕여관을 매입했다. 장욱진은 1934년 성홍열에 걸려 요양차 수덕사를 찾았다가 나혜석을 만난다. 평소 고모가 극진히 모신 만공 스님이 어린 장욱진을 6개월간 돌보게 된다. 나혜석은 수덕사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며 장욱진을 격려했다.  주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 운영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국내 유일의 보부상 촌 체험 마을… 내포 보부상 촌 내포 보부상 촌은 보부상에 대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보부상의 고유문화와 상업 정신 등 보부상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시와 체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내포보부상촌은 내포 문화권 개발계획 확정 고시에 따라 2020년 보부상 문화의 거점인 예산 덕산지역에 6만 3695.8㎡ 규모로 조성됐다. 보부상을 주제로 보부상 유통문화전시관, 저잣거리 및 난장, 무형문화재 공연장, 체험 공방 등 가족과 아이들이 함께 즐기고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내포 보부상은 사통팔달의 요지였던 내포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보부상으로 1850년 예산, 덕산, 면천, 당진 등 4개 고을이 연합된 보부상 조직인 예덕 상무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부분의 보부상 조직이 일제강점기에 해체됐지만, 그 이후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보부상 조직이다. ‘장돌뱅이’ 등으로 불리는 보부상은 패랭이(대나무 줄기로 만든 작은 갓)를 쓰고 봇짐을 진 채 전국 시장을 따라 떠돌던 행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규율을 가진 조직이 운영됐고, 엄청난 힘을 갖춘 무력 집단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 의주로 피난 갈 때 보부상들이 식량을 나르고 국왕을 호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 주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온천단지1로 55 - 운영시간 : 오전 10시~오후 7시(토·일 오후 8시·매주 월요일 휴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예당호 예당호는 둘레가 40km, 너비가 2k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시원스레 펼쳐진 저수지와 출렁다리, 조각공원, 음악분수 등 일상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기 좋은 휴식공간이다. 인기 명소는 예당호의 펼쳐진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출렁다리다. 길이 402m의 출렁다리는 바닥 아래로 수면이 훤히 내려 보여 마치 수면 위를 걷는 듯한 색다른 감동을 준다. 출렁다리는 성인 3000여 명이 다닐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졌다. 출렁다리에서 예당호 생태공원까지 데크길이 이어져 산책하기 좋다. 출렁다리 아래 음악분수는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다채로운 물과 빛의 향연을 제공한다. 지난해 10월 예당호 모노레일이 개통해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느린 속도로 1.4km 거리를 20분간 운행하며 예당호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주소 : 충남 예산군 응봉면 예당관광로 158 운영시간 : 오전 9시~오후 8시(매월 첫째 주 월요일 휴무) 
  • [서울광장] 역사의 들머리에 오해가 끼어들면/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역사의 들머리에 오해가 끼어들면/서동철 논설위원

    임진왜란 당시 웅천현감이었던 허일은 ‘조선왕조실록’에 딱 두 차례 등장한다. 개전 초기 일방적으로 왜적에 밀리던 상황을 다룬 1592년 6월 28일자 선조실록이 첫 번째다. 경상감사 김수가 올린 일종의 긴급 상황보고서를 전재한 것이다. 치계(馳啓)는 이랬다. ‘거제현령 김준민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죽음으로 기약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웅천현감 허일은 적이 경내를 침범하기도 전에 먼저 도주했고, 성주판관 고현은 젊은 무부(武夫)로 홀로 먼저 도피했으며, 개령현감 이희급, 선산부사 정경달, 상주목사 김해와 상주판관 권길, 문경현감 신길원 등은 모두 도망가 숨어 버려 적이 가는지 머무는지를 일절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다음날인 6월 29일이다. 비변사의 상주 내용으로 허일을 언급한 전날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사근 찰방 김종민을 추가했다. ‘적의 무리가 그 지역을 지나가자 도망하여 숨었으니 죄를 범한 것이 가볍지 않다’고 비판했다. 조선이 왜적 침입에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고, 또한 실제 전쟁이 일어나자 관료들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읽히곤 한다. 불명예스럽게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에게는 치욕이다. 물론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기에 급급해 숨어 버렸다면 어떤 비판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웅천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읍이 됐다. 당시 일본에서 인기 높았던 분청과 백자 가마가 밀집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국제무역이 활발한 고을이었다. 왜군이 침범하자 그들의 상륙지가 됐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다음에는 왜성을 쌓고 버틴 곳이 또한 웅천이다. 하지만 웅천현의 군사는 수백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수만 명 단위로 몰려든 왜적을 막아 내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허일은 실제로는 이런 인물이었다. 초기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다음 삼포수방사 겸 웅천현감으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그러고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다섯 아들과 출전해 최경회 의병장과 합세했다. 끝없이 밀려오는 왜적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자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고, 두 아들은 한산도해전에서 전사했다. 허일뿐만이 아니다. 고현은 성주 의병으로 활약해 훗날 병조참의가 증직됐다. 정경달은 선산을 떠나지 않고 유격전을 펼쳤고 이순신의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김해는 의병을 규합해 정기룡 장군과 상주성 탈환에 힘을 보태다 순절했다. 권길은 상주 북천전투에서 전사했다. ‘김종민’을 ‘징비록’에서는 ‘김종무’라 적었다. 그 역시 북천에서 순국했다. 신길원은 충주로 몰려가는 왜적의 조총을 맞고 포로가 됐다. 왜장이 항복을 권유했음에도 꾸짖다 팔다리를 모두 절단당했다. 평가는 후하지 않지만, 경상감사 김수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인물이다. 왜란을 앞두고도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김수는 해안 지역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는 데 힘썼다. 축성 작업 인원을 확보하고자 반발을 무릅쓰고 지역 사족까지 동원했으니 홍의장군 곽재우와 갈등을 빚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왜적 침입은 기정사실이었고 위기의식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있었다. 김수는 진주성에서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었다. 이후 경상도 서부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 왜적이 휩쓸고 지나간 고을 수령이 감사의 행방을 쫓아 보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풍문에 의지한 치계일지언정 수령들이 ‘정위치’를 지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 김수의 보고를 거짓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임진왜란 첫머리를 이렇게 적으면서 오늘날까지도 ‘부끄러운 전쟁’으로 인상 지운 것은 유감스럽다. 그 결과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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