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임진왜란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기념사업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중앙지법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신기술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손해배상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601
  • 과기정책은 전문가 손으로/전일동 연대교수·핵물리학(해시계)

    우리 조상들은 고려청자나 조선조 백자같은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재능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또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몇백년 동안이나 완벽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는 보관소의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이다.이러한 우리기술이 임진왜란때 많은 도공(도공)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려 오늘날 일본 도자기를 낳게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국산도자기보다 앞선 기술을 개발해 냈고 이제 우리쪽에서 그 기술을 역수입하고 있는 형편이다.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같은 사람들이 계승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몇백년 동안에 이렇게 차이가 난 것이다.양쪽 도공들이 서로 노력을 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수준에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외적요인때문임이 분명하다.어떤 역사학자는 임진왜란의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기술약탈에 있었다고 하였다.즉 기술이전을 폭력을 갖고 이행시킨 것이다.이렇게 선진기술을 갈망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은 약탈해간 기술을 아끼고 보호하고 육성하였다.그 하나의 결과가 오늘날의일본 도자기이다.이 작은 역사를 살펴보아도 과학기술정책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엄청난 결과를 실감할 수 있다. 과학기술정책은 누구나 쉽게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과학기술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사회개발의 원동력 또한 경제발전과의 연관성,포괄적으로는 인간과의 상관관계에서 가치관까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중대성등을 비추어 볼때 조예가 깊은 전문가가 담당해야 한다.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전문가가 별로 많지 않은것 같다.과학기술정책 수립과 동시에 정책전문가 양성도 추진해야 한다.대학에서 과학정책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여 고급전문인력 양성에 나서야 할 때이다.한편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중에서 과학기술에 조예가 깊은 인재가 얼마나 될까? 단순히 과학기술의 중요성만 외쳐봐야 과학기술발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요는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국정에 반영되게 행동을 옮길 수 있는 의원이 얼마나 있는가에 달렸다.기술 선진국에서는 그러한 인재들이 국회의원으로 많이 있고 또한 로비스트로 활동도 많이 한다.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 정당내에 과학기술정책 소위원회를 발족시켜야 하며 과학기술 담당 대통령 보좌관을 확충하여 실질적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과학기술처와 교육부간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협력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과학기술은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야만이 비로소 우리손에 쥘수 있게 되고 우리에게 커다란 경제적 발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과학기술정책 담당자와 과학기술자가 일체감을 가졌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과학입국으로의 면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 불교중흥 보우대사 사상 재조명/봉은사 학술세미나

    ◎조선 억불정책속 명종때 꽃피워/주류유교의 지탄으로 「요승」 낙인 억불숭유책으로 불교가 배척됐던 조선시대에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하다 순교한 하응당 보우대사.그의 삶과 사상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7일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발제는 ▲교단부흥의 역사성과 그 의의(김영태·동국대) ▲보우대사의 선사상(서종범·승가대) ▲보우대사의 유교관(송석구·동국대) ▲보우대사의 문학세계(황패강·단국대) ▲보우대사의 교관(이봉춘·동국대) ▲보우대사와 봉은사(김상영·승가대)등 6편.이들은 16세기 중반 멸절위기에까지 처했던 불교를 소생시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잇게해준 공로가 보우대사에게 있다는데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김영태교수는 불교가 조선 국초 11종에서 7종으로 축소되고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됐다가 중종때에 이르러 폐지됐음을 상기시키면서 중의 인증제도인 도첩제 마저 중지됨으로써 불교는 그 발흥이 원천적으로 봉쇄됐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보우대사가 어린 명종을 수렴청정하던 문정대비에 의해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것은 바로 이무렵이며 그후 17년간 많은 불교사적 업적으로 그를 조선불교부흥의 성사라고 평가했다. 이어 황패강교수는 그가 불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유교일변도 사류들의 극렬한 지탄으로 「요승」으로 낙인찍힌 역사사실을 들추어냈다.그럼에도 많은 저술과 높은 문학성을 들어 시문승 또는 학승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는 것이다.또 선종판사로서 그의 흥불업적으로 ▲국가공인 사찰로 지정해 3백여 사찰보호 ▲도첩제부활로 2년간 승려4백명 양성 ▲승과부활로 15년간 유능한 불교인물 배출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불사진흥이 전적으로 문정왕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성급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종교개혁가로서의 업적에 흠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석구교수는 보우의 불교중흥을 통해 임진왜란때 승군이 나올수 있는 기초가 닦여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그러면서 문정왕후는 12세에 등극한 어린 명종을 위해 불교에 심취될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본 송교수는 이때의 불교중흥은 문정왕후의 의지와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던 보우와의 자연스런 만남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다.따라서 일본학자 고교정이 「하응당집해제」에서 보우의 불교중흥을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한 계략이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김상영교수는 보우가 봉은사 주지로 부임한 15 48년부터 제주도로 유배돼 제주목사 변협에게 피살당하는 15 65년까지의 17년을 투쟁기(15 48∼51),안정기및 은퇴기(52∼61),몰락기(62∼65)로 나누어 시기별 활동상을 개괄했다.보우의 몰락과 죽음은 장성해진 명종이 대비의 그늘에서 벗어날 것과 맹목적 호불행위를 금하라는 대신들의 끊임없는 요구에서 발단됐다는 김교수는 명종이 나중에는 태도를 바꾸게 됐고 마침내 65년 대비가 죽자 그의 운명도 종말을 맞았다고 말했다. 한편 봉은사는 이날 학술대회를 계기로 보우대사의 호를 딴 허응장학재단을 발족,보우사상의 체계적 연구를 위한 학자들에 대한 지원과 학술세미나등을 지속적으로 열기로 방침을 세웠다.
  • 김장철(외언내언)

    구한말 주한미국 전권공사를 역임한 사람 HN 앨런.그의 「조선견문기」속에 김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다.그의 김치에 대한 느낌은 모든 외국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역한 냄새가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그들은 그 냄새를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고 쓰고 있다.그러던 그도 결국 김치를 즐겨 먹게 된다.마늘을 빼고서 담근 것이기는 했지만. 우리의 김치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고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부터 발전을 보인다고 말하여진다.물론 그 전이라 하여 없었던 것은 아니다.흥미로운 것이 「위지」동이전의 고구려조 기록.고구려 사람을 가리키면서 「선장양」이라 했는데 이는 발효식품을 잘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발효식품이라면 된장·간장이나 김치·술 따위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다.그렇기는 해도 그때부터서의 특수한 개안이 오늘의 김치로까지 이어진다고는 할 것이다. 『…남은 일 생각하여 집안일마저 하세/무·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다/앞냇물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소/고추·마늘·생강·파에 젓국지 장아찌라/독 곁에 중두리요 바탱이 항아리라/양지에 가가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농가월령가」10월령이 읊는 가락.지금이 음력으로 그 10월의 중순이니 김장철이다.세상이 달라져서 그렇지 늦가을의 커다란 가정행사가 바로 김장담그기.뜰에 장작더미 쌓아놓고 김장독을 파묻어야만 편안한 마음으로 겨울을 날 수 있었던 우리네 조상들이었다. 10일부터 전국 7백군데에서 김장시장이 열린다.올해 김장비용은 4인 가족기준 7만4천여원선이 당국의 추산액.하지만 김장하는 양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이니 그렇게까지 안쓰는 가정도 있을 것이다.언젠가 김장풍속은 아주 스러질 것 같은 그런 흐름이 아닌가.
  • 고향찾은 「오색팔중」 꽃망울 맺다(조약돌)

    ◎임란때 건너갔다 5월에 귀환한 동백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돼 4백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지난 5월 귀환,울산시청 광장정원에 심어진 오색팔중의 울산동백(사진)이 6개월만인 최근 탐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렸다.다섯색깔의 여덟겹 꽃이 핀다해서 오색팔중이라 불리는 이 세계적 희귀동백은 울산시청 정원사 이택수씨(47)에 의해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왔다. 이 동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 군주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진뒤 교토시 지장원 춘사(춘사)앞뜰에 심어진 것을 일본을 방문했던 예총 울산지부장 최종두씨(54)등이 원목의 3세나무 3그루를 갖고와 심은 것이다. 이때 함께 가져와 독립기념관과 사천군 조·명합동묘소앞 뜰에 심은 2그루의 동백도 최근 꽃망울을 맺고있다.
  • 코레아씨 내한초청 씁쓸한 뒷맛/박대출 사회2부기자(오늘의 눈)

    문화부는 지난해부터 조국을 모른채 살고 있는 해외의 우리 핏줄들을 대상으로 「한민족 뿌리찾아주기 운동」을 펴고 있다. 4백년전 임진왜란후에 이탈리아로 건너간 한국인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는 현지 「코레아」씨들의 집성촌에 살고있는 안토니오 코레아씨(51)를 초청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짜놓은 코레아씨의 「조국나들이」일정은 뿌리찾아주기와는 동떨어지게 너무나 형식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용인민속촌 아산현충사 관람과 몇차례의 만찬등 통상적인 외국인들의 관광코스 답사일정이 고작이다. 코레아씨가 입국하던날 김포공항에도 문화부관계자는 한명도 나타나지 않고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만 배포,생색내기에만 급급했다. 이날 공항에 나온 우리측 관계자는 산하단체의 과장 한사람이 고작이었다. 이같이 당국의 무성의한 태도와는 달리 코레아씨가 입국해서 들려준 첫 마디는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살고있는 동네에 허물어진 교회터가 있는데 그 지하의납골당을 발굴,조사해 보면 한국인 시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했다.이번 기회에 인류학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한국인의 후손임을 확인받고 싶은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지난 67년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감동을 느꼈다』면서 그 이유를 강인한 민족성을 지닌 한국인과 같은 핏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외모는 서양인지만 아직도 우리의 시골사람처럼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가 이번 방문으로 그토록 애태우던 할아버지의 나라임을 확인하고 고향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을까. 어렵게 조국을 찾아도 어느 누구도 반갑게 맞는 사람없이 겉치레 관광일정으로 일관,여기가 자신의 뿌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채 조국과의 일체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해외여행 한번 다녀가는 기분으로 돌아갈게 뻔하다. 문화부의 「한민족 뿌리찾아주기 운동」은 지금부터라도 치밀한 계획과 과학적인 접근방법으로 지구촌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의 핏줄을 찾아내 그들에게 뿌리의 자부심과 조국의자랑됨을 심어주는데 한치의 빈틈도 없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 임란 코무덤 국내 이장/일 오카야마소장/여수 충민사 봉안키로

    【여수】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 교외 야산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의 코무덤이 전남 여수시 덕충동 충민사권역에 봉안된다. 임란 코무덤 호국영령환국봉안위원회 위원장인 부산 자비사 박삼중스님과 전라좌수영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정채호)는 2일 충민사 현지에서 이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이같은 합의에 따라 임란 코무덤호국영령환국봉안위원회측은 오는 24일 일본 현지에서 코무덤 영혼환국봉안 한일합동 위령제를 지낸후 26일 국제페리호편으로 부산항에 도착,여천 흥국사에 임시 안장한후 유적지 사용승락과 벌채,도로개설등의 절차를 거친후 6개월후에 충민사 왼쪽 3백m지점에 영구안장할 방침이다.
  • 이런 한국인(외언내언)

    광대뼈가 나오고 입언저리가 순하게 생긴,도포 비슷하지만 주름이 많아서 꼭 조선옷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런 차림을 한 남자의 초상화가 있다.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예술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 인물화다.주인공 이름은 「안토니오 코레아」.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가 서양에 노예로 팔려간 조선소년 「안토니오 코레아」일 것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드는 바로 그사람이다. 그를 데려가 세례도 받게 하고 자유인으로 살게 해준 프란체스코 카르레티가 기록에 남긴 대로라면 그는 로마에 살고 있었어야 한다.그러나 그가 로마서 8백㎞나 떨어진 알비마을에 어떻게 해서 가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코레아의 집성촌이 마련되어 있는 이 알비마을에 그는 정착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그 후예들이 한국을 방문했다.그들로서는 오랜 숙원이었던 「모국방문」인 것이다. 루벤스의 작의를 충동할 만큼 이국적이면서도 고상함이 배어나는 「안토니오 코레아」.노예소년으로서의 그가 어떤 고초를 겪으며 그곳까지 유전해 갔는지,저승길보다 더 멀었을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짐작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온다.오늘 우리를 찾은 그의 후손을 통해 보아도 그는 그냥 막된 조선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다. 4백년이 지나도 피를 나눈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한 것은 그가 지녔던 뿌리에의 긍지가 남긴 유지였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향해 떠도느라고 수백년 잠들지 못한 그의 혼백의 한이 마침내 오늘 그 후손들로 하여금 고국땅을 밟을수 있도록 인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양인의 나라가 아닌 반듯한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났음을 잊지않게 하여 먼훗날 다가올 오늘과 같은 날을 놓치지 않게 한 그를,놀랄만큼 집요한 관심과 자부심으로 조상의 고국찾기를 포기하지 않은 그 후손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안토니오 코레아,그는 감동적인 한국인이다.
  • 적십자포장 박애장 금장 수상 박삼중스님(인터뷰)

    ◎“생을 마감할때까지 재소자귀화 노력” 대한적십자사가 창립87주년을 맞아 수여하는 적십자포장 박애장의 금장 수상자로 선정된 박삼중스님(50·자비사 주지).재소자 교화에 남다른 열의를 쏟아온 그는 늘 봉사하고 그늘진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왔다. 『승려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는데 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합니다.종교가 사회적으로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때에 그래도 어느 구석엔가 사랑을 실천했다는 흔적을 발견한 모양입니다.어느 상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는 25년전 우연히 교도소 법회를 따라갔다가 재소자들의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 평생을 그들의 교화에 바칠것을 결심했다.그동안 수만명 재소자들을 위해 설법을 해오는 동안 3백여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보기도 했다.또 그들의 재활과 가족돕기운동등도 함께 해왔다.『그들은 출옥후 시한폭탄처럼 우리앞에 떨어질수도 있습니다.더 난폭하고 잔인한 재범의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지요.그래서 그들의 순화가 중요한 것입니다.우리의 앞서가는 고삐를 좀 늦추더라도 그들의 손을 잡고 가야 합니다』 스님은 88년 영등포교도소 탈주사건당시 주범 지강헌의 마지막 설득에 나섰을때를 아직도 못잊고 있다.그가 『사기꾼 놈의 새끼들,너부터 쏴죽이겠다』고 절규하는 순간 여지껏 한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일본은 물론 대만·태국등지에서도 재소자들을 위한 설법을 펴온 스님의 바람은 처벌할 사람도 처벌받을 사람도 없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승려로서는 처음 적십자상을 받게된 이번 수상을 계기로 생의 마감까지 이 걸음으로 불행한 현장을 지키겠습니다』 그는 최근 일본 오카야마에서 발견된 임진왜란때 2만여 조선인 코를 베어다 묻은 코무덤의 고국안장을 위한 모임으로 바삐 자리를 떴다.
  • 주한외국문화원/책·영화 등 “세계문화 사랑방”

    ◎7개국에서 설치… 이용방법을 알아보면/도사관엔 각종서적 비치… 자유롭게 대출/어학강좌·미전·음악제 등 프로그램 다양/거의 월∼금요일만 문열어… 유학도 안내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각종 정보와 자료를 얻기위해 주한외국문화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문화원을 두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본,포르투갈등 7개국.각국 문화원은 언어교육프로그램을 비롯,유학안내 문화프로그램등을 마련해 내방인에게 소개하고 있다.특히 이들 외국문화원은 해당외국어습득을 위한 「정보보고」로서 독보적이다. 외국문화원은 결국 자국홍보를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지만 이를 잘 이용할 경우 큰도움을 얻을 수 있다.주한외국문화원이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이용방법등을 알아봤다. ▷미국문화원◁ 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위치한 미국문화원의 공식명칭은 「서울아메리칸센터」.운동권학생들로부터 수난을 겪은 미국공보원이 서울 남영동으로 이사를 간뒤 그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문화원의 주요시설로는 도서자료실이손꼽힌다.자료실이용은 일반회원과 특별회원으로 자격을 분류해 실시하고 있는데 특별회원은 이용희망자가운데 미문화원측이 선별한 사람이나 정치가,교수등 사회지도자급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과학,인문과학,예술관련 서적등 1만여권의 장서가 비치된 도서관은 학생증,주민등록증,신분증을 제시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그러나 도서대출을 위해서는 회원증을 만들어야 한다.특히 이곳에 설치된 컴퓨터단말기를 이용하면 미국도서관자료등 귀중한 최신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상오11시∼하오6시사이에 문을 연다. ▷일본문화원◁ 일본문화원은 지난88년 주한일본대사관 광보관실에서 광보문화원으로 명칭을 바꿨다.명칭변경과 함께 업무도 확대,갤러리를 새로 열고 매일 1회씩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그러나 일본문화원은 일본의 경제력에 비해 미국,유럽국가와는 달리 두드러진 활동을 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용자들의 소감이다.하지만 일본어교육에 대한 지원은 대단해 전문교육과정으로의 자리를 확실하게 다져가고 있다. 도서관은 1백50석 좌석에 1만5천여권의 각종 장서를 비치해 놓고 있다.「책의 나라」일본답게 일본문학,문화관련서적및 정기간행학술지가 풍부하게 갖춰져 있다. ▷프랑스문화원◁ 프랑스문화원은 영화를 통한 문화홍보로 일반에게 더욱 친숙하다.69년 첫설치된이후 국내 영화공부 지망생들사이에「프랑스문화원사단」이 생겨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문화원1층을 프랑스에서 공부한 미술학도의 전시공간으로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고있다. 도서관시설은 월∼금요일의 경우 상오10시부터 하오6시까지,토요일은 11시30분∼6시까지 개방한다. ▷영국문화원◁ 지난 73년 문을 연 영국문화원은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1층에 있다.지하철1,2호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리면 쉽게 찾을 수 있다.영국문화원이 주는 장학금을 받아 학위를 따온 국내학자 3백81명가운데 3분의2가 과학기술분야일정도로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이 영국문화원의 특징. ▷독일문화원◁ 「괴테인스티튜트」로 불리는 독일문화원은 독일만화영화상영,전시회개최,박물관교육세미나등각분야에 걸쳐 꾸준하고 지속적인 문화활동을 펴오고 있다. 특히 89년 4월부터 한국창작음악발전을 위해 시작한 새마당음악제는 다른 문화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프로그램. ▷이탈리아·포르투갈문화원◁ 지난87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개설된 이탈리아문화원은 정기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6월 「이탈리아뉴시네마전」을 한국영상자료전에서 개최하는등 나름대로의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이탈리아문화원은 서울 한남동 우진빌딩4층 대사관안에 함께 있다.도서관개방은 월∼금요일 상오9시부터 하오5시까지이다. 90년에 개설된 포르투갈문화원은 지난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임진왜란에 참가한 포르투갈인」이라는 제목으로 그내용을 기록한 고서전시회를 여는등 한국민과의 공감대형성에 노력하고 있다.문화원은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옆 유고대사관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도서관개장시간은 월∼금요일 상오9시부터 5시30분까지이다.
  • 임진왜란때 전함 판옥선(배/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13)

    ◎명종10년에 개발… 조선 수군의 주력함/갑판이 2층,노군·전투원 일 분담 가능 임진왜란때 조선의 해양방위를 담당한 주력함은 판옥선이다.판옥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전인 명종10년(1555)에 개발되었다.우리나라가 왜구를 막기 위해 소형경쾌선 제작에 주력하고 있을 때,일본의 선박이 대형화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발해낸 함선이 바로 판옥선이다.판옥선은 단층의 종래 군선과는 달리 갑판을 2층으로 설비한 혁신적 전함이었다.종래의 군선은 노를 젓는 노군과 포와 활을 쏘는 전투원이 단층의 갑판에 한데 어울려 있었기 때문에 노를 저으면 포를 사용치 못하고,포를 사용하면 노를 젖지 못함으로써 전투효율이 낮았다.또한 배안에 뛰어들어 육박전을 능사로 하는 왜군이 한명이라도 배 안에 뛰어들면 선내 전체가 동요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판옥선은 노를 젓는 노군을 아래층 갑판의 보호된 장소에 배치시켜 노를 젓는데 전념하게 하고,포를 쏘고 활을 당기는 전투원을 상갑판 위 넓고 높은 장소에 배치하여 발사하는 포탄과 화살의명중률을 높게 하며,적군이 배안으로 뛰어들 수 없게 한 것이었다.임진란 때 조선 수군에게 패한 왜군의 수군장들은 전기에서 조선의 군선들(판옥선)이 성벽과 같이 높아서 도저히 공격할 수 없었다고 했다.판옥선은 선형의 참신성 외에도 일본의 군선보다 월등한 화기를 적재할 수 있었고 선체가 강인하여 왜선을 충돌·파괴시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선은 안택(아다케) 관선(세키부네) 소조(고바야)등 세종류가 있었지만 그 어느것도 판옥선의 전술적 우수성에 미치지 못했다.충무공 이순신은 판옥선의 우수성에 대하여 『왜군이 수전에 패한 것은 그들이 수전에 능숙치 못한 때문이 아니고 군선이 견고하고 장대하지 못하여 대포를 안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평가하였다.이 평가는 판옥선을 실전에 참여시키고 그것을 사령한 충무공의 견해이니만큼 판옥선의 역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전투인원 1백64명을 승선시킨 판옥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후 상당기간 조선의 해양방위를 담당하는 주력 함선으로서 바다의 수문장 임무를담당하였다.
  • 92서울도서전/깊어가는 가을 책의 의미 조명

    ◎새달 2일부터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서/새해 「책의 해」 지정기념 다양한 행사/전자출판·음상도서 등 첨단기술 코너 마련/임란당시 서적·세계편집상 수상작도 전시 92 서울도서전(Seoul Book Fair)이 다음달 2∼8일 서울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내에 마련될 1천8백33평 전시장에서 열린다. 올해로 31회째를 맞는 이번 책 잔치마당은 내년이 「책의 해」로 지정됨에 따라 「책의 해」를 실질적으로 여는 개막행사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또 이번 행사는 「책과 함께 미래사회를 위하여」를 주제로 선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과 정보의 전달매체로서 책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기존 종이책의 관념을 뛰어넘는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도서들이 이곳을 찾을 관람객 25만여명의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즉 전자출판 시스템 개발업체들이 기기 실연을 통해 출판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전자출판 플라자」와 문자와 소리와 화면을 한데 결합시킨 음반 또는 VTR 등을 도서와 함께 하나의상품단위로 발행하는 시청각적 「음상도서 전시대」 등이 특히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특히 눈길을 끄는 특별기획전시 행사로는 「임진왜란 4백주년 도서전」「세계 우수 편집·디자인상 수상도서 전시」「외국에서 번역·출판된 국내도서 전시」 등이 있다.당초 행사계획에 들어 있던 「북한도서 초청전시」는 북한측과의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산됐다. 「임진왜란 4백주년 도서전」은 임란 발발 4백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올바른 성격과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전란 당시의 책과 현대의 책등 임란 관계 문헌을 5부문으로 나누어 전시하는 행사.또 세계저작권조약 가입 5주년을 맞아 마련하는 「외국에서 번역·발행된 국내도서 전시」는 국내도서에 대한 해외에서의 관심을 자극하고 국내도서의 해외보급을 촉진하고자 서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동시에 열리는 기획전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는 국내 각계 각층의 독자 2천명과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좋아하는 국내 소설가 및 작품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한자리에 모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게는 우수도서를 안내해 주고 출판사에는 독자들의 독서성향을 분석·정리해 주어 문학서 출판기획의 방향을 제시한다. 또 출판시장 개방에 대비한 출판유통 현대화 사업의 하나로 지난해 11월부터 도입·시행중인 국제표준도서번호(ISBN)제도와 판매시점정보관리제도(POS)를 이용하여 출판사와 서점들이 어떻게 수주·발주 및 업무관리,재고관리 등을 수행하는지 실제 연출을 통해 보여줄 예정. 이밖에 출판·잡지사가 각사의 특징을 살려 출품 전시하는 사별전시대와 각 출판사의 대표출판물을 분야별로 종합전시하는 종합출판물전시대,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잡지를 분야별로 전시하는 잡지 광장이 마련된다.
  • 개성경공업대,「고려성균관」 개명(북한 이모저모)

    ◎국자감정신 계승… 종합대학으로 승격/창립연도 992년으로 소급 ○…북한은 지난달 20일자로 개성경공업단과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고려시대 성균관(국자감 후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 대학이름을 「고려성균관」이라고 명명키로 했다고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달 20일자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나라의 기술인재 양성사업을 더욱 강화하며 우리 민족의 유구한 교육·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그같이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이 대학의 창립연도를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의 창립연도인 992년 9월 1일로 소급해 정한다고 발표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국자감은 고려 성종때부터 유학을 가르치는 소임을 맡아온 교육기관으로서 충렬왕 원년(1275)에 국학,24년(1298)에 성균감,34년(1308)에 성균관으로 각각 개명됐다가 공민왕5년(1356)에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나 공민왕11년(1362)에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왕조로 넘어왔다. 현재 개성시 부안동에 있는 고려 성균관은 임진왜란 당시소실됐으나 그후 복구됐으며 문묘·기숙사·대성전·명륜당 등 12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북한은 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지난 89년 「고려박물관」을 조성한 바 있다. ○고무공장 가동 중단/「칡넝쿨신」까지 등장 ○…북한의 신발사정이 크게 어려워져 산간오지에서는 칡넝쿨로 만든 「칡 넝쿨신」까지 등장했다. 이와함께 판자조각을 이용한 「나무신」과 폐타이어를 이용해서 만든 슬리퍼도 주민들 사이에서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이처럼 북한의 신발사업이 나빠진 것은 외화부족으로 인해 고무원료 수입이 어려워져 고무의 주생산공장인 평양고무공장의 가동이 중단되고 이로인해 신의주 신발공장 등 주요 신발공장이 제품을 생산해 내지 못한데 기인하고 있다. 이에따라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는 조악하기는 하지만 까만 비닐신을 한켤레 구하면 어머니와 딸이 번갈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먼저 신고 나간 사람이 귀가해야 다른 사람이 외출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북한의 「신발류 공급규정」에 의하면 학생과 노동자들은 2개월에 운동화와 노동화를 각1켤레,사무원은 1년에 구두 1켤레를 공급받도록 돼있으나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운동화는 1년,구두는 2년이 지나야 겨우 지급받을 수 있을 만큼 신발사정이 악화됐다. ○평양 역포구역 야산에 「해외동포묘지」를 조성 ○…북한은 최근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야산에 8정보(약 2만4천평) 규모의 「해외동포묘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가 보도했다. 평양 중심가로부터 약 25Km 떨어진 이곳에는 모두 3천5백구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데 해외동포의 요구를 고려,가족묘(14구까지),부부합장묘,개인묘의 세종류로 나뉘어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북한은 지난 88년 추석을 「휴식일」로 정한 이후부터 주민들의 성묘를 공식적으로 허용해오고 있는데 이번에 해외동포 묘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해외동포들의 북한방문을 유도하기 위한 선전사업의 일환인 것으로 보인다.
  • 일 오카야마 코무덤/11월 한국이장 추진/귀무덤 뒤이어

    【부산=김정한기자】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전리품으로 코를 베어가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 산기슭에 묻어놓았던 「코무덤」이 오는 11월 임란발발 4백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난 4월 귀무덤(이총)환국을 추진했던 박삼중스님(부산 자비사주지)과 부산외대 김문길교수(47)는 그동안 여러차례 현지를 방문,협의끝에 「코무덤」을 오는 11월 한국에 이장키로 했다고 밝혔다.
  • “한산도해저 거북선 존재 확신”/발굴단장 황동환 해군대령

    ◎탐사 2년만에 임란최고 유물 발견 『이번에 발견한 총통은 해군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이 그동안 발굴한 각종 유물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총통을 발견해낸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장 황동환해군대령은 총통의 발견으로 거북선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발굴단은 지난 90년부터 임진왜란 당시 해전이 벌어진 남해 앞바다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벌여 8번째의 탐사에서 총통을 건져올리는 개가를 올렸다. 황대령은 『그동안의 발굴을 통해 각종 해전때 사용됐던 화살촉·철환·도기류 침목선발의 잔해등 각종 유물을 인양했다』고 말했다. 황대령은 별 황자총통의 역사적 가치외에도 이번 발굴을 계기로 앞으로 더많은 해저유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도자기등 많은 유물을 싣고 가던 배가 6백년동안 신안앞 바다밑에 묻혀 있다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거북선이 원형대로 묻혀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해군은 총통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한산도및 당포근해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 문헌안의 거북선 사실입증 첫걸음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등 실증/거북선 실물 인양 가능성 크게 높여/「귀함 별황자총통」 인양의 의미 임진왜란 당시의 대포였던 별황자총통(총통)의 발견은 조선조 전사(전사)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문헌상에만 기록돼 있어 실체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총통이 거북선의 주포였음이 확인됨에 따라 가까운 시일안에 거북선의 잔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까지 갖게 하고 있다.황자총통발견의 의의와 사료로서의 가치·인양과정등을 알아본다. ▷전문가 평가◁ 이번에 발견된 별황자총통(별황자총통)에 대해 문화재 전문위원 조성도씨(해군사관학교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사는 물론 조선후기의 무기발달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국보급으로 평가했다. 거북선에 장착됐던 것으로 보이는 이 총통의 현장실측평가작업에 참가했던 조씨는 『그동안 거북선에 관한 사료(사료)는 상당수 있으나 거북선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 총통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또 『이 총통에 새겨진 제조연대와 발견장소가 임진왜란때의 거북선과 왜국 수군이 싸우던 격전지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제까지 남아있는 조선조의 보물급 대포 16종보다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제작시기만 보더라도 기존의 대포들과는 달리 이 총통은 당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제작연도를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거북선에 장착됐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 문헌상으로만 보존돼오던 거북선의 실체를 입증해주고 있다. 총통이 발견된 해저지점에 대해 그는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을 거둔 곳이며 이장군의 뒤를 이은 2대 수군통제사 원균이 일본군에 대패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총통에 새겨진 귀함황자경적선 일사적선필수장이라는 내용의 칠언시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조선수군의 굴하지 않는 정신을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총통이 거의 원상태로 남아있는 것에 대해 『발견지점에는 모래 자갈층이 30㎝두께의 퇴적층을 이루고 있어 부식을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바다는 조개·기타 유기물질에 의해 퇴적속도가 빨라 침몰된 거북선도 원래 모습을 그대로 지닌채 퇴적층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양경위◁ 고색이 창연한 황자총통에는 귀함이라는 총통의 소속함정과 만력 병신(만력 병신·1596)이라는 제조일시가 명기되어 있어 거북선의 주포임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됐다. 해군은 지난89년 노태우대통령의 지시로 그해 8월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을 해군사관학교에 창설,3년동안 심해잠수요원과 탐사정·소해정·시추장비등을 투입해 탐사작업을 벌인 결과 이번에 거북선과 관계되는 실증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하게 됐다. 발굴단은 그동안 8차례에 걸친 정밀탐사를 통해 거북선이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백87㎦의 해역중 30%인 54·5㎦를 탐사완료하고 앞으로는 한산도와 당포 근해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발굴관계자들은 이번에 총통이 발견된 한산도해역은 임진왜란당시 대해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총통이외의 다른 유물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모두 3척이며 임진왜란이 끝난뒤에도 10여척을 건조한 기록이 있어 당시 수군이 활동하던 남해와 서해에는 거북선이 분명히 매몰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이미 4백년이 지났으며 침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당시의 해안선도 항구의 축조와 매립 등으로 크게 바뀌어 바닷속의 거북선을 인양하기란 한강밑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탐사반원들은 총통발견을 계기로 거북선발굴작업이 크게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외국에서도 지난 60년대에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 1천2백년전의 바이킹배 3척을 인양한바 있고 70년대에는 영국에서 6백년전의 목제군함을 원형그대로 인양한 적이 있다. ▷총통◁ 총통이란 고려시대와 이조시대때 왜구를 격퇴·섬멸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했던 화전·화통·화포등의 화기를 총칭한다. 「공민왕5년(1356)에 총통을 사용해 전을 발사했다」는 고려사 병지의 기록으로보아 14세기 전반부터 이미 유통식 화기인 총통이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원나라에서 전래된 총통은 이조 세종때 서북변경 개척의 적극화로 각종 화기와 화약의 수요가 급증하게 됐고 이에대한 제조기술이 향상되면서 조선화포중에서 가장 큰 천자총통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화포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조선 특유의 형식으로 규격화하는 일이 진행됐다. 총통의 구경에 따라 가장 큰것은 천자,그다음이 지자,현자,황자로 나누었다. 천자문의 맨처음 구인 천·지·현·황순서로 크기를 정한 것이다. 구경 15∼16㎝의 천자총통과 13∼14㎝인 지자총통은 현재 육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2∼13㎝인 현자총통은 해사박물관,구경 11∼12㎝의 황자총통은 현충사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발견된 황자총통에 「별」자가 있는 것은 총통의 위력을 강화한 「특」이라는 뜻이다. 황자총통의 사정거리는 약8백보(1천21m)이며 철환과 화살 또는 유황으로된 화염탄등을 실탄으로 사용할 수 있다.
  • 거북선서 쏘던 포 건져냈다/해군발굴단/한산도앞 충무공 격전해역서

    ◎「만력 병신」 명문… 1596년 주조/구경 5.8㎝,길이 89㎝ 청동제/“한번 쏘아 적선 수장” 칠언대구 새겨 임진왜란당시 거북선에 장착돼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국보급 총통(총통)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거북선탐사작업을 벌여온 해군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단장 황동환대령)은 지난18일 하오3시쯤 경남 통영군 한산면 문어포 서북방 4백60m 한산도 제승당 서북방 1.4㎞(북위34도48분,동경 1백28도27분91초)해역에서 거북선에 장착됐던 것이 확실시되는 별황자총통(별황자총통)1점을 발견,인양했다고 20일 발표했다.이 총통에는 「구함황자경적선 일사적선필수장」(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의 배를 놀라게 하고 한발의 포를 쏘아 적의 배를 반드시 수장시킨다)이라는 7언시와 「만력 병신 육월일조상」이라는 제조일시가 음각되어 있다. 「만력」이란 연호는 중국 명나라 신종때의 연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4년이 되는 서기1596년(선조29년)에 해당되며 왜국과 강화교섭이 한창 진행되던 때이다. 해군 발굴단은 총통의 주조일자와「구함」등의 글자로 미루어 이 총통이 임진왜란당시 거북선에 사용됐던 대포가 확실하다고 밝혔다. ◎10m 해저서 수심10m의 바다밑 펄속에서 인양한 이 총통은 길이 89.5㎝,내구경 5.8㎝,외구경 12.6㎝,중량 65.25㎏으로 재질은 청동으로 되어 있다. 황발굴단장은 지난 12일부터 문어포인근해역에서 해저 탐사를 벌이던 발굴단이 금속탐지기에 이상한 물체가 표착됨에 따라 잠수부를 투입,확인을 한 결과 수심 10m되는 펄밑 30㎝ 지점에서 포신이 45도 기울어져 묻혀있는 총통을 발견,인양하게 됐다고 말했다. 황단장은 인양된 총통을 해군사관학교 조성도교수(문화재전문위원)등 전문가의 실측평가에 의해 임진왜란당시 주조됐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헌상에는 거북선에 관한 자료가 있으나 실증자료가 인양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황자총통이 발견된 한산도해역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이끌고 왜국수군과 격전을 치른 해역으로 그동안 화살촉·철환·침몰선박의 잔해등이 발견된 곳이다.
  • 내가 겪은 「1950년여름」/윤남경 작가

    ◎인공기 보면 아직도 떨리는 이가슴… 『아직도 옛말 삼기는 멀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6·25가 돌아오면 나는 이 말을 되뇌이곤 했었다. 6·25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간 뒤에도 『언제쯤 이런 생활을 옛날얘기삼아 우리 후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마치 우리가 3·1운동 얘기나 임진왜란때 이야기들을 할머니에게 듣듯이 말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은 공산당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숫제 인민공화국 깃발을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볼때 나는 꺄악하고 소리라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극단으로밖에 사물을 판단못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대학기숙사에서 한가롭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우리 귀에 난데없는 대포소리가 쿵쿵하고 울릴 때 우리는 그저 국군의 훈련소리라고만 믿고 있었다.그러나 며칠뒤 사감선생님이 속히 집으로 돌아가거나 지방 학생들은 연고자를 찾아가라고 다급하게 말할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부산이 집이었던 J는 이미 길이 막혀 이리저리 걸식하다시피 살면서 그 시절을 지냈다.영문도 모르고 집에 가 있는 내 귀에 모교인 K여고에서 인민재판을 연 결과 사형선고가 내려진 몇사람 속에 내가 끼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이모님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기독학생회장과 훈육부장을 겸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이모님댁에도 밤마다 내무서(경찰서)원들이 집을 뒤지며 젊은 남자는 인민군으로,젊은 여자는 의용군이나 간호원으로 끌고가는 바람에 거기도 못 있고는 땀띠의 투성이 얼굴로 골방에서 뛰쳐나와 집에 가서 식구들 얼굴을 한번만 보고 어디론가 가리라 하고 집에 가보니 모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에 몇몇집식구들은 다 죽이고 가는데 우리집도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그러니까 빨리 피하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다.그들은 종적인 명령계통은 잘 서 있지만 횡적인 연락에는 둔하니 장소만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큰고모님네와 작은아버지 식구들하고 한 20여명이 성북동에 있는 작은 고모님댁으로 갔으나 가자마자 누군가가 찔렀다면서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아버지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네가 상공장관인 아무개지?』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할머니가 질겁을 하며 권총을 부여잡고 그애는 장관의 동생이라고 소리치시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결국 노인과 어린이만 빼놓고는 우리를 굴비엮듯이 엮어 끌고가니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이 혀를 차며 『어제도 몇십명을 잡아다 뒷동산에서 죽이더니 오늘도 또 저렇게 죽이는구나』하는 말이 들렸다.어머니 친구분중 한사람은 잡혀 갈때 검정고무신과 흰고무신을 한짝씩 신고가면서 내가 죽거든 이 고무신을 보고 찾으라고 하며 끌려갔는데 정말 그들이 도망간 뒤 삼청동 산 웅덩이속에서 얼굴은 썩어 분간할 수가 없었으나 고무신때문에 찾은 일도 있었다. 우리를 끌고간 그들은 한사람 한사람씩 밤새도록 심문을 했으며 새총인지 무슨 총인지를 들고 공연히 사람들 얼굴에 겨냥하며 쏘는 시늉도 해보고 어디서 훔쳤는지 길다란 일본 사무라이 칼을 빼서 사람을 후려치는 흉내도 내보고 갖은 악독한 짓을 다하며 사람을 밤중까지 묶어 두었다.내게는 어디 다니느냐고 하기에 정직히 대학생이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잔인해지더니 『흥! 난 인민학교도 못나왔소.당신 나를 업신여기기요?』하고 대드는게 아닌가.업신여기다니 내 목숨을 쥐고있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했으며 『이승만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등 몇가지 이상한 질문을 던지더니 자기들도 사람 죽이는데 진력이 났는지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그때 풀어주는 것은 정말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모두 말했다.그대신 자기들을 욕하면 또다시 잡아들인다고 협박도 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멋도 모르고 환영하며 협력했던 사람들도 뒤에 알고보니 대부분 쫓겨났거나 숙청당했다는 것이다.이유는 서울에서 이북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으니 반동분자라는 것이다.결국 이용할대로 이용해먹은 뒤에는 발길로 걷어차버리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 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달콤한 말을 하더라도 속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당시 우리들의 심정이었다. 그 더운 복중에도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들으면(들키면 사형이니까 목숨걸고 듣는 단파 라디오였다)미국의 소리방송에서 『여러분 오늘도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하고 나올때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오늘 하루도 죽지않고 살았구나하는 실감때문이었다. 쌀을 구경못하는 배고픔에다가 전쟁전에 먹었던 군것질거리 생각이 나서 참기 어려웠지만 그보다도 사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그들은 자식이 부모를,이웃이 이웃을 모두 못믿고 감시하고 서로 내무서에 일러바치는 자들만이 영웅이라고 가르친 까닭에 정말 누구하고 마음놓고 이야기할수 없었다. 그러나 북쪽사람도 우리 부모요 형제들이다.우리는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사람을 속삭이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그러나 공산주의,김일성주의에 물들은 사람들하고는 아직도 마음놓고 흉금을 털어놓지 못한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인 것이다.
  • 밤나무/단단하고 안썩어 철도침목 이용(나무이야기:12)

    ◎고구려때 도입… 약밤나무 평양에 남아/전국서 과실 연6만여t 생산,수출도 밤나무는 북반구에만 있고 남반구에는 없다.한반도에서는 신의주와 함흥을 연결하는 선의 이남지역이 밤나무 재배의 적지이다.우리나라에는 야생인 산밤나무와 이를 모계로한 여러 품종과 일본산 품종들이 있다.또한 고구려시대에 중국 천진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약밤나무가 평양을 중심으로해 심어져 일명 평양밤 또는 함종률이라 한다.이 지방에는 4백∼5백년생의 약밤나무 노거수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역대 임금마다 밤,대추 등의 재배를 적극 권장해 지금도 한강,금강,낙동강 등 크고 작은 하천가에서 많은 밤나무숲을 보게된다.그러나 그간 유명했던 많은 밤나무숲이 극심했던 밤나무혹벌의 피해와 무분별한 하천의 개발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경상도읍지에는 경남 밀양 수산리,경북 고령,상주의 밤나무숲과 청도의 상지률림,하지률림등 이름난 밤나무숲의 기록이 남아 있다.해방전까지만 해도 경기도는 밤생산의 중심지였다.특히 시흥,고양,양주,화성,부천등은 밤산지로 유명했다.현재의 과천은 밤으로 이름나 그 지명을 고구려때부터 과천으로 불렀다. 한편 1968년부터 농촌의 소득증대 사업으로 대규모 조림단지를 조성,현재 20만㏊에서 년간 6만5천t의 밤을 생산 그중 2만8천t을 수출해 4천7백만달러의 외화를 벌고 있는데 UR2라운드 시대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지혜를 짜낼수 있었으면 한다.특히 밤으로 만든 마롱구랏세는 세계3대 명과의 하나이다.임진왜란전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론과 식량자원으로서의 밤나무 식재론은 유명하다.밤나무는 유실수뿐아니라 중요한 밀원자원이고 목재자원이다.세계각국의 철도침목은 모두 밤나무 침목이었다.밤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점탄성이 커 승차감이 좋고 탄닌을 많이 함유하여 잘 썩지 않기 때문에 다른 수종의 침목이 2∼3년이면 믿는데 비하여 밤나무 침목은 방부처리를 하지 않아도 7∼9년을 견딘다.밤나무의 방부성은 옛날부터 인정되어 경주 천마총내 관의 목책재도 밤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또한 목부도관에 충진체가 발달하여 액체의 흐름을 막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참나무류와 함께 포도주 맥주의 저장용 탱크로 많이 쓰인다.수피에서 채취되는 탄닌은 염료 및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유피용으로 쓰여진다.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밤나무는 주문진 교황리의 밤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미·일·불등 돌며 고문서 찾기… 한국학 발전 이바지 이우성씨

    ◎“해외유출 고서적 수집­정리에 보람”/주로 임진왜란·구한말에 대량반출/국내선 찾아볼수없는 희귀본 수두룩/박제가 산문집등 27종32책 찾아 발간(저자와의 대화) 『우리 선조가 쓴 책들을 복사본으로나마 다시 들여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 관계자들이 쉽게 응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해외로 유출된 우리 고문서들을 다시 수집해 들여와 한국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온 이우성씨(68·전성균관대 교수)가 최근 제5차분으로 3종5책을 출간했다.이로써 그의 호인 벽사(누벽외사)를 따 이름붙여진 「누벽외사해외수질본총서」(아세아문화사 펴냄)는 모두 27종32책으로 틀을 갖췄다. 『표면적으로는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으나 특히 일본의 경우는 한국에도 없는 것을 자기들만 갖겠다는 욕심이 있는 듯했습니다』 이씨가 영인본으로 펴낸 책들은 심의·윤현·홍한주·정원용·안석경 등 조선 초·중기의 이름있는 학자들의 문집도 있지만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이번 5차분은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의 한 사람인 초정 박재가의 시문집 및 관계자료들을 묶은 「초정전서」와 조선 성종조의 문인학자인 사숙재 강희맹의 문집을 묶은 「사숙재집」,조선후기의 학자 좌소산 서유본의 시문집「좌소산인문집」 들이다. 이씨는 앞으로 남겨진 최대 과제로 세종때 70∼80권 분량으로 만들어진 「치평요람」의 재간행을 꼽았다.「치평요람」은 서울대 규장각에 30∼40권 분량이 남아있는데 일본 「동양문고」가 보관중인 50∼60권과 함께 보완하면 원래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치평요람」에는 세종 이전의 정치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망라하여 싣고 있는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없는 사실도 실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책들이 해외로 많이 유출된 것은 임진왜란 시기와 구한말·일제초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호화로운 활자본들이 수없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요토미(풍신)로부터 도쿠가와(덕천)에게 인계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존경각·봉좌문고 등 일본 각처의 장서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전 활자본 하면 희귀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웬만큼 유서있는 장서라면 으레 그 활자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씨는 『활자본으로서 뿐 아니라 그 책 자체가 국내에서 아주 없어져서 책이름조차 잊어버려진 것들이 일본에서는 지금 그대로 전해져 오는것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구한말·일제초의 대량 유출도 주목할 만하다.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왕조실록등을 공공연하게 반출했으며 외국학자들의 손으로 수집·구매해 가져간 책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그 이전 병인양요때에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고문서를 약취해갔다. 『해방후 미국쪽으로 흘러 나간 책들도 적지 않은데 여기에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각종 잡록·비사 및 수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중 상당량이 미국 국회도서관·하버드대합불연경도서관·캘리포니아대극동도서관·콜롬비아대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친필로 된 수사본 그대로 유출되어 국내에서는 그 부본조차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 이씨는 30년동안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로 강의 및 연구를 계속하다 3년전 정년퇴임했다.이씨는 은퇴뒤에도 집근처인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실시학사」를 차려 놓고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안병직·김진균·강만길교수 등과는 「다산연구회」를 결성,정약용의 「목민심서」 전7권(창작과비평사 펴냄)을 펴냈으며 30대의 대학원생 10여명과는 「다산경학세미나」를 주1회씩 열고 있다. 또 그는 지난 90년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을 초청,「국제실학학술대회」를 여는데 앞장섰다.올 10월 제2차 대회가 중국 산동성 제남시 산동대에서 열린다. 이씨 개인적으로는 통일신라에서 개항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중세사를 집필할 계획을 갖고 있다.사회·경제사에 중점을 둘 것이지만 인간중심의 딱딱하지 않은 역사를 쓰겠다는 포부다.
  • 6월 문화인물에 유성룡선생/「징비록」국역등 기념사업 다채

    「6월의 문화인물」에 조선시대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학자인 서애 유성용선생(1542∼1607)이 선정됐다. 문화부는 임진왜란 발발 4백주년이 되는 6월을 맞아 뛰어난 정치역량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오늘에 재조명하기위해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한 6월을 맞아 문화부는 서애선생을 기리며 호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자주국방의식을 새롭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국가보훈처,경상북도와 공동으로 추진한다. 서애선생은 21세부터 이퇴계문하에서 성리에 관한 실천적 학문을 탐구하면서 26세에 문과에 급제,중요관직을 두루역임한 뒤 임란중에는 영의정으로 관서도체찰사와 삼남도체찰사를 겸하며 외교·군무·민정 등에서 뛰어난 정치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임란직전에는 외교와 통상을 통해 일본을 회유하는 한편 이순신·권률 등의 명장을 천거하고 성곽의 축조등 군비확충을 통해 대비했으며 임란이 일어나자 국민을 결집시켜 민관합동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가 전쟁중에 겪은 승패의 자취를 반성·고찰해 집필한 「징▦록」은 임란에 관한 가장 가치있는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외에 「신종록」「영모록」「관화록」등과 문집 10여권이 있다. 주요 기념행사는 다음과 같다. ▲특별전시회 16일∼7월5일 국립중앙박물관 ▲서애사상강연회 국립중앙박물관 ▲유적지답사 27,28일 안동하회마을·영주 병산서원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서애선생 임란당시 활동 특강 14일 안동 하회별신굿전수회관 ▲세미나 20일 프레스센터 ▲징비록국역사업 93년발간 서애선생 기념사업회등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