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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시론] 광해군을 위한 변명

    젊었을 적에 센케비치의 영화 ‘쿼바디스’를 보면서 네로(Nero) 황제의 비인도적인 정사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그러나 훗날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아 봤더니 네로가 로마 시를 불태우면서 시를 읊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 아니었고,따라서 그는 그의 학정을 침소봉대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곡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을알고서는 더욱 황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역사 곡필이 어디 네로뿐이었겠으며 어찌 고대의로마뿐이었겠는가.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많은 원혼(怨魂)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했다가 역신으로 몰려 김부식(金富軾)의손에 죽은 묘청(妙淸),세종대왕의 옥체를 걱정한 것이 오히려 한글창제를 반대했다는 누명으로 바뀐 최만리(崔萬理),이순신(李舜臣) 현창사업의 희생양이었던 원균(元均),문중 사학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의 죄인처럼 기록된 김성일(金誠一)….이들은 아마 저 세상에서 눈을감지 못하고 아직도 원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학을 공부하는나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역사의희생양은 광해군이다.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슬픔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그는 늘 고독하고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그러다가 젊은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는 백성을 어루만지며 왜병을 물리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체험했고,국력이 약한 나라의 백성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서자의 몸으로 온갖 우여곡절과 음해를 겪은 후 왕이 되었을 때그는 꿈도 많고 야망도 있는 젊은이였다. 그의 첫번째 꿈은 왜란으로황폐화된 조국의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국고는 바닥이 났으며생산성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경작지를 개간하여 국가의 재원을 확충하고,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대동법(大同法)을 실시케 하여 민생의 안녕을 도모했으며,허준(許浚)으로 하여금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쓰게 하여 질병에 허덕이는 백성을구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왜란으로 인해불타 없어진 많은 서적을 복간(復刊)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신증동국여지승람’이며 ‘용비어천가’가 모두 이때 되살아났다. 위와 같은 공적 이외에 정치가로서 광해군의 제일의 업적은 외교였다.그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하는 그 미묘한 시기에 국경을 튼튼히 함은 물론 탁월한 외교술로써 국가 안보를 튼튼히 했으며,일본과의 조약(己酉條約·1609)을 체결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3각관계에서굳건한 입지를 구축했다.그런 그가 퇴위하자 곧 병자호란이 일어났다.광해군을 아무리 비하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외환이 없었으며,그 시대의 국방과 외교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튼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시대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그는 외치에 몰두하면서 점차 내치를 소홀히 했다.그것이 그만의 실수는 아니며 당시의 정파 싸움 때문이었다고 변명할수도 있다.소북파는 사사건건 정사의 발목을 잡았고,그를 둘러싸고있던 대북파에는 “그게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충신이 없었고,모두가 자신의 보신과 영달에만 눈이 멀어 광해군을 혼군(昏君)으로 몰아갔다.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불효한 것도 사실이고, 이복동생인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어디 그 사람만의책임이며,조선왕조에서 형제를 죽인 왕이 어디 그 사람뿐이었겠는가. 그게 잘한 일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부덕했던 사람도 그처럼 혹평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 야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즉,정치란 우선 안을 다스리고 밖을 보아야 한다.가정이고,조직이고,나라고 따질 것없이 안이 화목하지 않고 행복한 법이 없다.관자(管子)의 말처럼 안에서 의식(衣食)이 풍족해야 밖에 나가 예절을아는 법이다.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는 왜 광해군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이토록 더해지는 걸까. 신복룡 건국대대학원장·정치학
  • [외언내언] 科擧길 걷기

    남북이 ‘경의선 복원’에 합의한 뒤 가장 각광받은 단어가 ‘실크로드’일 것이다.2,000여년전 중국 한나라의 사신 장건(張騫)이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오간 후로 이 길은 유라시아대륙을 잇고 동서 문화가 넘나드는 데 중추적인 몫을 했다.지금은 ‘사이버 실크로드’라는 표현처럼 길의 의미,곧 교류를 상징하는 말로자리잡았다. 국내의 실크로드라면 서울 남대문에서 국토 동남쪽 끝인 부산 동래성까지, 대동여지도 상에 950리로 기록된 ‘영남대로’를 먼저 꼽을만하다.서울∼판교∼충주∼문경새재∼대구 파동∼밀양∼동래로 이어지는 이 길은 신라 때부터 점차 개척돼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한 10대로(大路)가운데 하나가 됐다. 역사가 가장 오랜만큼 이 길에는 조상의 숨결과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다. 조선시대 영남·충청 선비들이 과거 보려고 상경한 행로이자우리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한 조선통신사의 여행길이다.반면에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침략로로 써먹었다.그처럼 문화사적인 가치가 높은 이 길이 1960년대이후 급속한산업화에 휘말려 이제는 그 정확한노정조차 잊혀질 판이다. 영남대로를 오늘에 되살리는 ‘옛 과거(科擧)길 대종주’행사가 산악인·시민·학생·장애인 등 모두 5,000여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20일동안 진행된다.6일 아침 부산 동래향교에서 과거길 떠나는 선비들을 환송하는 옛 의식을 재현하는 것을 시작으로,오는 25일 서울 경복궁 앞에서 벌이는 ‘장원급제 행차’로 끝맺는다.전문산악인 30명이앞장서 전구간을 종주하며 구간별로 그 지역 시민·보이스카우트·장애인단체 들이 걷기에 동참한다. 올들어 우리 옛길을 되찾고 직접 걷는 일에 관심이 높아진 계기는,서울대 유학생인 일본인 도도로키 히로시가 ‘일본인의 영남대로 답사기’를 출간한 데 있었다.하지만 그 체험담에는 우리가 온전히 받이들이기에 적당치 않은 부분이 있어,우리 손으로 제대로 복구하자는뜻에서 산악인들이 이번 대종주를 계획했다. 이들은 올해 영남대로를 복원한 다음 서울∼천안∼전주∼해남의 ‘삼남대로’,서울에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이르는 ‘관동대로’등을연차적으로되살릴 예정이다.‘옛길 찾기’에는 조상의 숨결과 애환을 직접 느낀다는 의미말고도 걷기를 장려해 국민건강을 드높이자는뜻이 있다.특히 ‘주5일 근무제’실시를 앞두고 국민생활에 새로운여가 형태를 제공한다는 취지도 포함했다.그러나 영남대로를 되찾는과정에서 기록이 부실하고 고증해줄 노인층이 거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드러났다는 이야기고 보면 ‘옛길 찾기’는 국민·정부 모두가 힘을 합해 이뤄야 할 문화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여수 진남관 국보로 승격

    문화재청은 24일 문화재위원회 건조물 분과회의를 열어 보물 제324호 여수 진남관(鎭南館)을 국보로 승격시키는 한편 고흥 능가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키로 했다.문화재청은 진남관이 현존하는 지방관아로는 가장 큰 건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의 중심기지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예술적 가치가 뛰어나 국보로 승격하여 보존하게 됐다고 밝혔다.
  • 재일교포 2세 정대성교수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음식’

    대륙문화인 누룩을 이용한 술 제조법이 전파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구치카미사케(口齒み酒)라는 독특한 술이 있었다.여성이 찐쌀을 입안에넣고 잘 씹어 항아리에 토해낸 것을 모아둬 만든 술이다. 침 속의 아말라제는 쌀의 전분질을 당화해 단맛을 내고,효모균의 발효작용에 의해 당이 알코올로 변해 술이 만들어진다.이후 누룩을 사용한 술 제조법이 스스호리라는 고대 백제인에 의해 전해졌다.이 인물에 대한 기록은 일본의 ‘고사기’와 ‘신찬성씨록’에도 나온다.재일교포 2세정대성 시가(滋賀) 현립대 인간문화학부 교수가 지은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음식’(김문길 옮김, 솔 펴냄)은 일본 음식문화의 원형이고대 한반도에 있음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확인해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정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대표적인 음식인 두부 또한 한국인에 의해전해진 것이다.도사(土佐) 고치시(高知市)는 두부로 유명한 고장.이곳이 두부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박호인이란 사람에 의해서다.박호인 일족은 고치시에서 영주의 보호 아래두부조합을 열어 두부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의 후손인 아키즈키 일가가 일본에서 살고 있다.일본 두부는 우리의 것과 사뭇 다르다.“두부모에 머리 맞아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일본 두부는단단하다. 이밖에 우리 음식이 일본의 주된 먹거리가 된 예는 적지않다.쑥갓을일본에서는 고라이기쿠(高麗菊)라고 부르며,에도음식 중에는 가우라이센베이(高麗煎餠)가 있고,구마모토의 명물로는 조선엿이 있다.한편정교수는 일본의 음식이나 그릇 등의 명칭도 한반도의 고어에서 유래했음을 언어학적으로 밝혀 눈길을 끈다.가마솥(가마),냄비(나베),시루(세이로),사발(사바리) 등이 그것이다. 김종면기자
  • [김삼웅 칼럼] ‘민주’ 없고 ‘나라’ 없는 정당행태

    집권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날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은 청와대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는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열어 투자보장협정과 경의선복원,경협을 위한 제도적장치 마련 등을 논의했다.남북화해와 남남대결의 어처구니없는 진풍경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벌어진 것이다. 6·25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7월 피란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권력연장을 위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발췌 개헌파동이다.1592년 임진왜란으로 군신(君臣)이 의주로 피란을 가서도 동인과 서인들은 왜란의 책임을 물어 상대방 탄핵에 열을 올렸다.와중에서 유성룡은 이항복의 비호로 겨우 살아남아서 전란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정치가 국난극복과 민생보호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싸움,이해다툼의방편이었음을 말해준다.지난 2년 동안 IMF환란 극복과정에서 우리 정치가 보인 행태도 임진왜란과 6·25전란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화한 한 외국인은 한국인을 ‘독 속의 게’에 비유했다.독 속에게를 한 마리만 넣어두면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는데여러 마리를 넣어놓으면 서로 올라가는 놈의 발목을 잡기 때문에 결국 한 마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참으로 부끄러운 일면을 지적했다.상생과화합을 내세우면서도 공생보다 독생,밖(外)보다 안(內)에서 싸우길좋아한다. 9월1일 평양에서 끝난 2차 장관급회담의 성과로 이산가족 서신교환,군사긴장 완화 및 군 직통전화 개설을 위한 군 당국자회담,쌀 차관공여,3차 장관급 제주회담,임진강 수해방지공동추진,경협제도화 등 전방위 남북교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러한 남북한간 긴장완화로 한반도를 둘러싼 4강간에 영향력 유지를 위한 미묘한 신경전이 활발해지고 있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이어질 남북간 화해는 환영받을일이지만 동시에 이해 관계자들을 매우 동요시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문제를 재검토하게 하고 중국·일본·러시아간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싼 경쟁관계에 다시 불을 붙이게 될 것”이라 내다 봤다. 한반도 주변의 움직임이 이렇다.국가(민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걱정하는 정치인(정당)이라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관계를 뒷받침하기위해 주변 4강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국회(또는 정당)에 4강과친선협회 등을 강화하여 정부의 입지를 도와야 할 것이다.이때의 ‘정부’는 정권이 아닌 국가와 동의어이다. 의원외교라면 너도나도 미국으로만 몰려가 관광인지 외교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일정을 보내다가 귀국하는 한심한 행태는 시정돼야 한다.미국 외교도 중요하지만 못지 않게 중국·러시아·일본과의 외교적 뒷받침도 남북화해-통일로 가는 길목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2차대전후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은 네 토막으로 쪼개진 나라를 초당파적인 외교력으로 신탁통치를 종식시키고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우리 정치인들도 나라의 장래를 위해 전문성을 바탕으로 친미파·친중파·친일파·친러파로 나뉘어 국익외교에 나서야 한다.그래야 4강에 둘러싸인 반도국가가 안전과 통일을 기약할 수 있다.한말 매국노들처럼 그들의 앞잡이가 되란 말이 아니다. 대미외교를 강화하되 다른 3강과의 관계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는주장이다.그런 역할은 정부의 외교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국회가 담당해야 한다.다른 나라들도 다 그렇게 한다.외교문제가 너무 ‘벅차’다면 내정이라도 성실하게 챙겨야 할 것 아닌가. 폭우와 태풍으로 수많은 이재민이 가족과 재산을 잃고,중국산 농수산물 파동으로 국민이 불안에 떨고,몇달째 계속되는 의사들의 집단파업으로 의료기능이 마비되고,산불피해·구제역·저소득층 보호를위한 추경 등 산적한 현안이 오로지 정치문제로 발목이 잡혀있다.여름 임시국회에 이어 정기국회까지 파행을 거듭하더니 야당은 장외투쟁을 벌인다. 민주당에 ‘민주’ 없고 한나라당에 ‘나라’ 없다는 세간의 지탄을면하려면 민주당은 날치기 등 비민주적 행태를 버리고,한나라당은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대권욕에만 빠져있는 당노선을 바꾸어야 한다.386세대 등 정치개혁을 내걸고 당선된 개혁성향 의원들이 앞장서 정기국회부터 정상화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무노동무임금’원칙이라도지켜라. 김삼웅 주필
  • 장수에 거북선·진해에 논개상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해시가 두 자치단체를 상징하는 논개상과 거북선 모형을 상대방 지역에 서로 설치한다. 논개의 고장인 장수군은 다음달 진해시와의 자매결연 1주년 기념사업으로 임진왜란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동상을 진해시 웅동 안정공원에 설치해 주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진해시에 설치될 논개상은 높이 2.5m의 청동제 동상으로 청소년들에게는 충절정신을 기리는 표상으로 활용된다. 진해시도 이에 대한 답례로 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을 상징하는 거북선 모형을 장수군 논개사당 앞 의암공원에 설치해줄 계획이다. 목재와 동판으로 제작된 거북선 모형은 길이 2.4m,높이 4.2m 크기로 충무공의 호국 얼을 전승하는 역사교육자료로 활용된다. 장수군은 거북선 모형을 의암공원 내 두산저수지에 띄워 논개의 고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지난해 9월14일 자매를 맺은 장수군과 진해시는 청소년 교류수련회,농촌사랑 자연사랑 실천대회 등 행정·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별로 활발하게 교류사업을 펼치고 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김재규’유혹하는 유럽 도자기’역사속 박제된 우리 도자기문화

    도자기가 예술과 문화로 꽃핀 곳은 원래 동양이었다.특히 중국은 당·송대에 걸쳐 절정의 도자기 문화를 일궈냈고 19세기까지 그 명성을이어갔다. 그러나 도자기문화는 실크로드 등을 통해 서양으로 전수된뒤 종주권을 서양에 내주지 않으면 안됐다. 20세기 말에 들어선 유럽이 고급 브랜드를 완전히 장악했다.영국의 ‘웨지우드’‘우스터’‘무어크로프트’,이탈리아의 ‘도치아’,프랑스의 ‘세브르’,독일의‘마이센’,스웨덴의 ‘마리에베르그’,헝가리의 ‘빌모스 즈솔네이’ 등이 세계 도자기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유혹하는 유럽 도자기(김재규 지음, 한길아트 펴냄)는영국에서 앤티크 딜러로 활동하는 저자의 현장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는 도자기문화 입문서다. 도자기문화가 어떻게 태동·발전·전파됐는가를 당대의 시대상과 함께 다뤄 동서문명교류사의 한 단면을 읽게해준다. 유럽의 본격적인 도자기 역사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됐다.독일 마이센의 연금술사였던 보트거와 작센공국의 제후였던 아우구스트2세 아래서 일하던 티룬 하우젠이 부딪치면 투명한 소리를 내는 자기를 개발함으로써 유럽의 도자기 역사는 첫 발을 내딛게 된 것.하지만 초기에는 철분 함량이 많아 색상이 검붉어지는 등 질적인 문제점이 많았다. 1710년 마침내 백색토를 찾아내고 제조공정상의 난점을 해결,유럽도백색자기 시대를 열게 됐다. 16세기까지 도자기기술을 갖고 있던 나라는 중국과 한국 뿐이었다. 일본은 조일전쟁(임진왜란)때 우리 도공들을 붙잡아 가 도자기문화대국으로 성장했다.지금도 유럽의 도자기 명가들은 ‘재퍼네스크’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내며 ‘이마리’나 ‘가키에몬’같은 일본풍 장식을 모방하고 있다.17∼18세기에 이미 ‘시누아즈리(Chinoiserie,중국양식 혹은 취미)’라는 말이 나오게 한 중국이나 고려청자의 나라한국의 도자기가 세계시장에서 ‘치이는’ 것과 대조적이다.무엇이이런 격차를 낳았을까.이 책은 ‘우물안 개구리’식의 자족적 세계에안주해왔던 우리 문화인식의 현주소를 한 번쯤 되돌아 보게 한다. 김종면기자
  • 日승려, 한반도침략 참회의 순례

    과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관련,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한 승려가 참회의 순례에 나섰다. 일본 신텐(神泉)시 산묘법사의 승려 이와타 루조(岩田隆造·63)스님. 지난달 14일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이와타 스님은 한민족에 대한 사죄의마음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는 ‘사죄’(謝罪),‘사은’(謝恩)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 두개의 바랑을 메고 전국을 도보로 다니며 우리 국민에게 참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부산을 출발,진해·진주·순천 등을 거쳐 10일 서울에 왔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주는 등 고마운 나라입니다.그럼에도 일본은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등 씻기 어려운 죄를 지어 왔지요” 이와타 스님은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지않고 있다”며 “심심하면 터져나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너무 부끄럽다”고 말한다. 이번 참회순례에 대해 “우선 개인적이나마 진정 사죄의 모습을 보이고,아울러 자신 뿐만아니라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과거의 만행에 대해참회하고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대만에서 출생,9세때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성장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15년전 이러한 죄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불교에 입문했다.오는 14∼15일엔 천안 독립기념관앞에서 이틀간 ‘사죄의 단식기도’를 올릴 계획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
  • 한산대첩 참전 후손 한자리에

    408년전 이충무공과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수군 무장들의 후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경남 통영시는 오는 13일부터 5일 일정으로 열리는 한산대첩축제때 이충무공과 함께 해전에 참가했던 함장급 이상의 수군 무장 후손 9명을 초청한다고8일 밝혔다. 이번에 참가하는 후손들은 한산대첩을 전후해 이충무공과 함께 해전에 참가했던 수군 무장 후손들로 나갑주(75),선호일(68),이갑환(60),원길상(67),이원상(54),이재엽(31),이종원(64),정경원(64),진종만씨(70)등 9명이다. 이들은 ‘다시쓰는 임진왜란사(학민사)’와 ‘바로잡는 임진왜란사(삶과 꿈)’의 저자인 향토사학자 조중화(趙重華)씨의 추천으로 선정됐다. 나갑주씨는 이순신에게 거북선 제작을 건의하고 직접 제작을 진두 지휘한나대용(羅大用)의 13대 후손이고 선호일씨는 이충무공의 지근거리에서 전투에 참가한 함장출신인 선거이(宣居怡)의 14대 후손이다. 또 원길상씨는 이순신과 잦은 의견차이를 보인 원균(元均)의 후손으로 화해와 한산대첩 승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참석하게 된다.이밖에 이원상씨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때 전라우수사를 지낸 함장출신 이억기(李億棋)의 14대 손이며 이재엽(李載燁)씨는 이순신의 15대 손이다. 후손들의 모임을 마련한 작가 조씨는 “임진왜란 관련 문헌과 족보,종친회등을 통한 엄격한 과정을 통해 선정했다”며 “이들의 초청으로 한산대첩축제는 더욱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통영 이정규기자 jeong@
  • [문화도시 문화거리](3)역사·전통 숨쉬는 진주

    촉석루를 한번 쳐다만 보아도 진주의 절반을 안 것이고,촉석루에 올라 그 아래 펼쳐진 경개를 바라봤다면 진주를 모두 안 것이라는 옛말이 있다.그만큼촉석루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과 의로운 기생 논개의 충절이 더해진 진주의 상징이다. 그러나 촉석루 만으로 진주를 다 알 수 있다 함은 글자 그대로 ‘옛말’이아닐 수 없다.진주의 어제는 보았을지 모르지만,오늘과 내일은 그곳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문화도시로서 진주의 미래를 촉석루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촉석루에 올라보자.“저기 계단에 놓여있는 팻말은 필경 ‘출입금지’를 알리는 거겠지”라고 생각이 미치는 순간 ‘신발을 벗으세요’라는 반가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삼복더위에도 백수십명의 시민들이 이 곳을 찾아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은 단지 시원한 남강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촉석루 건너 칠암동의 강변풍경도 인상적이다.진주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이내옥관장은 광주 출신이지만 진주사랑이 남다르다.그는 진주시민들이 남강변을 강변 다운 풍경으로 가꾸고 있는 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재정 수입 몇 푼 올리자고 아름다운 강변을 아파트 단지로 만들어 버렸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이곳에는 2.9㎞에 이르는 ‘남가람 문화의 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천수교에서 진주교까지가 ‘역사의 거리’,진주교에서 진양교까지가 ‘예술의 거리’이다.조각공원과 야생화·만국화 단지가 들어선 ‘예술의 거리’에는 경남문화예술회관이 자리잡고 있다.국악단과 무용단·관현악단·합창단등 4개 진주시립 예술단체가 활동한다.문예회관앞 남강 둔치에는 백조를 형상화했다는 야외무대도 세워지고 있다. 남가람 문화의 거리가 현대적 문화를 대표한다면,진주성과 천수교 사이의 고미술거리에는 옛 사람들의 체취가 가득하다.20여 곳의 골동품상점이 밀집한이곳의 지명은 서울의 고미술거리와 똑같은 인사동(仁寺洞).한적해 보이는겉모습과는 달리 적지않은 명품들이 거래되고 있어 일본에까지 소문이 났다. 진주성,진주박물관을 한데 엮은 역사문화단지 개발이완료되면 ‘인사동’이 화제에 올랐을 때 “서울을 말하는 거야,진주를 말하는 거야”라는 물음이뒤따를 날도 머지않을 것 같다. 진주의 젊은이들에게 “문화의 거리가 어디냐”는 질문을 던지면,십중팔구는 대안동 젊음의 거리를 떠올린다.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대안동은 서울로치면 명동이나 압구정동쯤에 해당할까.보수적인 도시라지만 이곳에 차없는거리를 만들어 젊은이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소규모 퍼포먼스나 음악공연 등 젊은 취향의 각종 문화행사와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소규모 집회도 벌어진다.이처럼 남가람 문화의 거리와 인사동 고미술거리,대안동 젊음의 거리는 진주성과 촉석루를 가운데 둔 삼각축을 형성한다. 그러나 대안동에서 만난 전주산업대생 서희철씨(23)는 “진주가 역사도시라는 자부심은 있지만 젊은층을 위한 문화적 배려는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한다.진주의 문화가 아직은 역사적 유산에 더 영향을 받고 있고,문화거리들도본 궤도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우회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젊은 세대일수록 이런상황에 불만족을 표시한다. 가수 남인수와 손목인,작곡가 정민섭과 이봉조 등 뛰어난 대중예술인들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이 분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진주시가 이들을 기념하는 향토박물관을 짓기로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들이 과거 엄청난 명성을 날렸다해도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기는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유품전시에 그치기보다는,살아숨쉬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뜻을 존중하는 일은 아닐까.작은 기념관을 가진 야외무대를 만들어 미래세대까지 포용하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매년 10월 개천예술제 행사의 하나로 열리는 남인수가요제에 이어 ‘정민섭 기념 진주 록 페스티벌’이나 ‘이봉조 재즈 페스티벌’등으로 첨단 대중문화를 즐기고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도 되새기는 젊은축제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진주 서동철기자 dcsuh@. *이렇게 가꿉시다서울 인사동거리가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명소가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자연스럽게 형성된 우리 전통민속과 생활 속살을 들춰 보고 싶어하는관광객 특유의 호기심을 자극해서일 것이다.화석화된 박물관이나 전시 목적의 인위적인 민속마을과는 달리 독특한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존심 높은 예향이자 역사의 도시 진주에도 북장대 성벽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골동품거리가 있다.진주 인사동에 있는 이 거리는 고미술품 상인들이 생업을 목적으로 하나둘 모여들면서 생겨난 자생적인 거리라는 점에서 서울 인사동과 흡사하다. 이런 자생적 거리의 활성화의 기본 틀은 거리의 주체인 상인들로부터 찾아내는 것이 옳은 수순이다.그들은 고미술품을 생업으로 삼는 프로들이기 때문에 문화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어떻게 하면 문화의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지도 잘 알고 있다.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열리고 있는 상설 고미술품 경매의 활성화와 전통 고미술품 전시장의 개설이 가장 시급한 시설계획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거리의 표지판이나 정비계획도 중요하지만 전통거리 형성을 위한 활성화의소프트웨어를 제대로 마련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지금의 문화복지회관을 민속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꾸고,도자기·고서화·고가구·한복·전통차·붓·종이·벼루 등의 문방사우에서부터 미술과 관련된 화랑 등이 자리할 수 있는기반 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시 조례를 고쳐서라도 세금 혜택,시설 개보수와 입점에 따른 재정지원이나 저리 융자 등의 정책적인 배려는문화 있는 거리 활성화에 꼭 필요하다. 활기있는 거리를 위한 차없는 거리의 설정,고미술 문화거리에 어울리는 축제의 발굴과 같은 마인드도 필요하다.축제는 고미술 벼룩시장과 같은 주말 장터와 연중 특정일에 고미술품과 풍물이 어울리는 예술 축제를 열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미술품을 사러오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시민들이 거리를 기웃거리다 전통차 한잔 들며 급하디 급히 변해 가는 세상살이에 여유도 가져보고,여행객들에게는 전통미 배인 추억거리를 한 점 사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그런 거리가 문화 거리가 아닐까.
  • 남북한 첫 합작영화 만든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합작영화가 만들어질 전망이다. 11일 현대와 영화계에 따르면 금강산 관광개발을 추진중인 ㈜현대아산측은지난달 말 정주영(鄭周永) 현대 전 명예회장의 방문 때 북한쪽으로부터 합작영화 제작제의를 받고 실무작업을 추진중이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장편 애니메이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가제)을공동 제작키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제작기간은 5년 정도로 잡고 있다”고 밝혔다.현대측이 제작비용(10억원 가량)을 대고 북한은 그림본(작화)납품을 맡는 조건으로 공동작업에 잠정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름을 벗어난…’은 조선조 임진왜란 당시 금강산에서 자란 한 개인의성장기를 중심으로 여러 실존인물들이 얽힌 역사적 사건들을 풀어낸 장편극화다.시나리오 작업과 필름제작,배급 등을 남한이 맡고 북한은 704·506 아동영화 창작소 등에서 그림본을 납품할 예정이다.현대아산쪽은 등장인물 캐릭터를 활용한 공동 수익사업과 다른 극영화 제작도 극비리에 협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병철기자 bcjoo@
  • “양주 회암寺 유생들 방화로 廢寺”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조선초 무학대사가 주석하던 절로 태조 이성계가 퇴위한 뒤 머물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소가 현재 벌이고 있는 2차 발굴조사에서도이 절이 조선의 국찰(國刹)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청동 금탁(琴鐸·처마끝에 매다는 일종의 종)에는 태조 3년(1394년)이라는제작연대와 함께 ‘조선국왕’‘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등 149자의명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조선초 왕실의 전폭적 지원을 받던 회암사가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이 다름 아닌 조선시대를 이끌어간 유림들의 방화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강력히 제기되어 눈길을 끈다. 발굴단은 회암사에 있던 대부분의 건물이 집단방화로 무너져내렸다고 결론짓고 일단 ▲명종대 유생들의 방화와 ▲선조대 임진왜란으로 압축했다. 그런데 발굴 결과 청동불과 석불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얼굴부분이잘려진 상태로 각종 기물과 함께 한곳에 집단 폐기된 채로 출토됐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명종 21년(1566년) 기록에 유림들이 회암사를 태우려 한다는 소문에 왕이 걱정하는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굴단은 회암사 폐사(廢寺)는 유생들의 방화가 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회암사터는 2005년까지 발굴조사한 뒤 종합적인 정비·복원 계획을 마련하여 유적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조선시대 산릉제례 재현

    조선시대 왕과 왕비에 대한 제사의식의 하나인 산릉제례(山陵祭禮)가 재현된다. 문화재청은 ‘건원릉 친향 기신제’(健元陵 親享 忌辰祭)를 27일 11시30분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 태조의 무덤 건원릉에서 봉행한다. 기신제는 초헌관(初獻官)이 장막(大次)에서 제례복으로 갈아입은 뒤 가마(小輿)를 타고 배향관(配享官)과 함께 정자각(丁字閣)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여 21명의 제관과 종친·문무관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다. 조선시대 초에는 왕과 왕비가 승하한 뒤 대상 다음 다음 달에 지내는 담제까지 매월 초하루 및 보름(朔望)과 정초·한식·단오·추석·동지·그믐 등 속절(俗節)에 왕 또는 왕세자가 능에 행차하여 제례를 행하고,담제 후에는 경복궁 문소전(文昭殿)에서 기신제(忌辰祭)를 지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겪은 다음부터는 담제 이후에도 산릉에서 기신제를 봉행했다고 한다. 산릉제례는 문화재청이 지난 1997년부터 관계전문가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해마다 재현하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 [김삼웅 칼럼] 통합민족사 첫걸음될 정상회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오늘 (13일) 김대중대통령이 평양 방문길에오른다. 남북이 갈라진 지 55년만에 꿈같은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반세기가 넘는적대와 반목을 씻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와 전략적 가치 때문에 외부세력의 지배권 경쟁이끊이지 않았다. 마치 유럽의 폴란드나 벨기에처럼 주변세력의 판도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었다. 동북아시아 십자로의 중앙에 위치한 이유로 중·일·러 등 인접세력은 물론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영국 등 역외(域外)세력들까지 전략적 요충으로 넘봤다. 외적의 한반도 침략은 오래고 줄기찼다.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의 고조선침략을 시발로 기원 7세기 수·당의 백제·고구려 침입,10세기 말과 11세기 거란족의 침입,13∼14세기 몽고족 침입,16세기 말 일본 침입,17세기 만주족 침입,19세기 말 일제 침입으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끈질긴 민초들이 외적을 물리치면서 국권을 지켜냈다. 그러나 한말 일제침략으로 망국을 가져오고 해방후 미·소의 분할점령으로시작된 분단사가 오늘에 이른다. 주변 강대국들은 침략과 함께 분할책략도 서슴지 않았다. 단독지배가 어려울 때는 분할을 획책했다. 최초의 분단시도는 임진왜란을 도발한 도요토미히데요시다. 일본은 1594년 강화조건으로 명나라에 조선8도 분할론을 제기했다. 경상·전라·충청·경기도를 일본이 차지하고,서울·강원·황해·평안·함경도를조선에 반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일본은 한번도 침략과 분할점령의야욕을 접지 않았다. 청·일전쟁 직전 영국정부는 전쟁발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한반도 남부를일본이,북부를 청국이 지배하는 조선양분론을 주장했다. 이 제안은 양국이모두 거부하여 무산됐다. 한반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하마터면 네쪽이 날 뻔했다. 미국 합참본부는 ‘JWPC 358-1’이란 한반도와 일본문제 기밀보고서에서 미·영·소·중의 한반도 공동점령을 시도했다. 미국은 서울·인천·부산,소련은 청진·나진·원산,영국은 군산·제주,중국은 평양을 각각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전략은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투항함으로써 작전계획이 대폭 수정되고 결국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마무리되었다. 주변 강국들은 한반도를 지배하거나 단독지배가 어려울땐 분할점령,그도 안되면 중립화를 제기했다. 1882년 일·청이 조선에서 패권장악을 경쟁할 때일본이 미·영·불·독 4개국 협정을 통한 한반도 중립화를 제기한 것이나,일본이 청국과 전쟁(청·일전쟁)을 하면서 조선중립화를 제의한 것은 모두전통적인 한·청관계를 끊고 자신들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주변 강국들의 이해관계가 치열하여 일본은 한반도를 ‘일본의 심장부를 노리는 비수’로,중국은 ‘중국의 머리를 치려는 망치’로,러시아는 ‘자국의 팽창에 분리될 수 없는 행동반경’으로,미국은 ‘극동의 전진기지’로 인식하면서 지배와 분할 또는 영향력 극대화를 노렸다. 이렇게 한민족의 운명은 토착세력보다 외부세력에 의해 형성되고 우리는 그 세력판도에서 ‘운명적’으로 살아왔다.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 확대하고자 주변 4강의 각축이 치열해지고 있다. 4강을 과거식의 침략주의·분할세력으로 도식화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또한 시대와 국제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문제는 우리민족의 주체적 역량이다. 1,300년이 넘는 통일민족국가로서 전통과 역사적 공동체의식에서 분단을 극복하려는 주체의식이 절실하다. 해방공간에서 이념싸움과 정파대결로 통일정부 수립의 기회를 놓친 것을 교훈삼아 인내와 예지로서 4강 외교력을 강화하고 내부적으로는 분리주의·냉전의식을 청산하면서 국제환경을 활용하는 지혜가 시급한 과제다. 많은 나라가 외세침입과 분단책동 그리고 분열과 통합과정을 겪었지만 한민족의 경우는 너무 심했다. 그만큼 교훈과 경험도 다양할 것이다. 오늘 출발하는 김대통령의 북행(北行)과 내일부터 열리는 ‘양김회담’을 남북이 잘활용하여 분단사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계기로 삼아야한다. 정상회담이 그 시발점이 돼야 한다. 김삼웅 주필.
  • ‘오페라 이순신’ 로마 무대 진출

    한국의 ‘오페라 이순신’이 오페라의 본고장 로마에 진출한다. 성곡오페라단(단장 백기현)은 “200년 역사를 지닌 2,000석 규모의 이탈리아 로마오페라극장 초청으로 ‘오페라 이순신’을 오는 12월 5∼7일 이 극장에서 공연한다”고 8일 밝혔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이순신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이순신’은 지난 98년이순신장군 순국 40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충남 아산과 서울 예술의전당 등 무대에 올려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 로마 공연에선 원작 대본을 수정 보완하는 한편 이탈리아측이추천한 쥬세페 마주카와 니콜라 사말레 등 2명에게 위촉,서양음계에 국악리듬을 가미한 새로운 형태로 작곡한 작품을 올리게 된다. 허윤주기자 rara@
  • 인터뷰/ ‘우리 역사 5천년‘ 집필 사학자 이만열교수

    중진 사학자인 이만열 숙명여대교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가최근 교양역사서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냈다(바다출판사).고조선부터 대한제국 말까지의 한국사를 다룬 이 책은 부제가 ‘자주적시각으로 본 우리 민족사’이다. 이교수는 유교사관과 식민주의사관을 벗어나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관점에서한국사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와 관련해 쟁점이 되는 부분들을 직접거론했다. 이교수를 만나자마자 “우리 사회에서 한국사,특히 고대사를 보는 시각에 편차가 매우 큰데 그 원인이 학계에 있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교수는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면서 강단사학계가 연구성과를 대중에게알리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시작했다.용어 자체도 어렵기 마련인 역사학을 쉽게 풀어 전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는 “시간과 정열을 바쳐 역사대중화에 앞장서면 이를 학자적인 노력으로인정하기는 커녕 탤런트적 행동으로 치부하는” 학계 풍토를 우려했다.그 결과 연구업적이 연구실에만 머물러 “사회의 역사인식은 중고교 수준을 넘지못했고,역사의식도 전근대적인 단계에 있다”는 게 이교수의 진단이다. 그러나 그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사관(史觀)에 있음을 내비치고 ‘주범’으로 유교사관과 식민주의사관을 지목했다. 유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 사대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든데다,그 가치관이 충효를 가장 중요시해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충효를 다해야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고 비판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지고 사회적으로는 좀더 평등한 관계를수립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역사 발전”이라고 정의하는 이교수는,충효를 기준삼는 사관으로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근대적 역사 주체의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공박은 더욱 통렬했다.한국사를 자주독립의 역사가 아니라 굴종과 예속의 역사로 왜곡한 것이 식민(주의)사관이라면서 “단지 역사를 보는 관점만이 아니고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까지 규정한다”고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식민주의사관으로 구성된 한국사가 국민에게 좌절과 실의를 안겨주었고,‘민족 냉소주의’에 물들게 했다면서 “잘못된 역사관은 이처럼 폐해가 심각하다”고 개탄했다.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고자 이교수가 책에서 거론한 쟁점은 ‘동이족’‘단군’‘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 역사 축소’‘백제의 요서 지배’‘발해의 건국 주체’ 등등이다. 이 가운데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 봉니’문제는 한사군이 실재했는지,존재했다면 그 위치가 한반도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핵심사항이다.봉니(封泥)란비밀문서를 보낼 때 상자를 진흙으로 봉한 뒤 도장을 찍은 것.평양에서는 낙랑봉니가 많이 출토돼 그동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 이용돼왔다. 그러나 이교수는 “봉니가 발견된 점은 오히려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봉니를 허물어 상자를 여는 곳은 보낸 쪽(낙랑)이 아니라 받은 쪽이므로,봉니가 나오는 평양은 낙랑일 수 없다는 이론이다.사실 이 주장은 정인보가 1930년대 이미 내세웠는데 이교수가 새삼 강조하는까닭은 아직도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교수는 또“임진왜란은 일본이 철저하게 패한 전쟁이므로 우리가 패배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서 그 근거를 조목조목 들었다. 단재 신채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교수는 “단재의 역사학이 방대한만큼 그 주장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비판적·창조적으로 계승할 대목이많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중국과 고대사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단재의 고대사 검증이 현실로 다가서는 느낌을 받는다”고 밝혔다. 이용원기자 ywyi@
  • 한국전쟁 성격규정 본격 연구 ‘큰 걸음’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한국역사연구회(회장 방기중)가 오는 10일 오전10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에서 심포지엄을 연다.주제는 ‘한국전쟁의재인식-분단을 넘어 통일로’. 그동안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다양한 학술대회를 가졌지만 역사학계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처음이다.역사연구회는 “전쟁기원론·전쟁책임론처럼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접근과 분석을 거부하는 대신 미국·옛소련이 최근 비밀해제한 관련문서에 기초해 한국전쟁자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겠다”고 밝혔다. 심포지엄은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교수의 주제발표 ‘화해와 통일을 위한 전쟁인식의 과제’로 시작한다. 서설 성격의 이 논제에서 도교수는 한국전쟁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규정하고 “남북정상회담 등 한반도 전체가 구조조정에 돌입한 지금한국전쟁을 올바르게 마무리하는 일이야말로 평화와 통일로 가는 초석”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문제로 꼽은 것은 전쟁 중의 ■정보전 ·특수전 ■양민학살 ■세균전 등이다.그 중에서도 양민학살은 그 규모와 원인측면에서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고 본다. 정병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1949∼50년 38선 충돌과 북한의 한국전쟁 계획’에서 전쟁전 38선에서 벌어진 남북한 군사 충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한다.또 그 충돌이 북한의 전쟁 계획 수립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남북한 지도부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상대방의 도발을 과장해 강조했는데,특히 북한은 38선 충돌을 통해 ?병력 증강과 훈련,무장강화를 이루었고 ■6·25 당일의 전면남침을 ‘정의로운 반격전’으로 내세우는 전쟁관을 수립하게 됐다고 결론짓는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기광서 조선대 북한학과교수는 ‘소련의 한국전쟁관과 개입과정’을 주제발표한다.기교수는 옛소련 자료를 바탕으로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소극적·방어적으로 대한 이유와,소련공군의 참전을 사실적으로 밝혀낸다. 이밖에 국방군사연구소의 안정애박사는 ‘한국전쟁기 주한미군사고문단의조직과 활동’을,양영조박사는 ‘한국전쟁기 한국 군부의 재편과 정치화 과정’을 발표한다. 이용원기자 ywyi@. *창원대 도진순교수 ‘주제발표’요약. 미국의 정보전문가 도널드 니콜스는 회고록에서 “왜 우리가 한국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는가”자문하면서 “(농민들의)지게 때문”이라 답한 바 있다.한국전쟁은 베트남전·아프카니스탄전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군사전쟁이 아닌폭넓은 대중전선이 병행했다.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은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전선에 동원됐으며 대규모로 학살당했다. 최근 노근리 사건이 문제가 된 뒤 한국전쟁 때의 양민학살이 여러곳에서 터져나온다.한 통계에 따르면 전쟁중 사상·실종·포로·납치된 수는 478만여명에 이르는데,사상자 숫자에서 민간인이 군인의 4∼5배나 된다.이는,옥쇄작전으로 악명 높았던 오키나와전투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군인의 1.5배가 되지않은 사실에 비교하면 기록적인 수치이다.학살에는 우발적인 것도 있지만 단체·조직이 저지른 ‘국가후원적’학살이 대부분이다.미군에 의한 학살도적지 않은데 이는 ‘종족 학살’(genocide)의 면모를 보여준다. 양민학살은(고려때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처럼)대중의 집단 기억에 매우강하게 유전된다.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양민학살에 관한 공식조사가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동티모르의 인권문제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자기땅 자기조상의 학살에는 침묵하는 것,이것이 한국전쟁에 관한 우리 인식의 현주소다. 대중적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독해할 때,또 갈등과 대립을 넘어 화해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데 양민학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 ‘허준’ 종반부로… 예진의 운명은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MBC ‘허준’(월·화 밤9시55분)이 29일부터 8년을 훌쩍 건너뛴다. 6월27일 종방을 앞두고 한달간 방영될 후반부는 임진왜란 전후를 배경으로허준이 정치적 역경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심의(心醫)가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29·30일 방송에서는 허준이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치료하면서 겪는 인빈과의 갈등,선조에 의해 정3품 당상관으로 임명되지만 임진왜란이 터져 피난가는 과정 등이 펼쳐진다.이어 허준이 광해군의 정적이었던 영창대군을 치료해 광해군의 미움을 사 귀양을 가고 유배지에서 ‘동의보감’을 쓰는 과정,유도지와 화해 등이 방송되고 역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다 자신도 병에걸려 숨지면서 끝을 맺는다. 제작진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예진과 허준의 사랑을 어떻게 결말짓느냐다.연출을 맡고 있는 이병훈PD는 “허준이 70대에 죽을 때까지 예진이 옆에 있게 되면 예진의 나이도 65세 정도가 되고 그러면 예진의 모습이 보기 좋지않기 때문에 허준이 유배를 떠날 때 예진이도 어떤 방식으로든 드라마에서사라지게 할 생각”이라면서 “처음에는 예진이가 불치병으로 죽고 예진을치료하는 허준의 간절한 모습을 그릴 예정이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다는 비난이 있어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방영횟수가 40회에서 64회로 늘어나면서 드라마가 지루해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이PD는 “예정보다 방영기간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등 극적요소가 많고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을것”이라고 장담했다. 제작진은 허준의 말년 생활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쏟고있다.노인 허준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일종의 인조 피부를 얼굴에 씌우는특수분장을 쓰고 유배지인 남해안의 경치를 살리기 위해 땅끝마을 해남에 세트도 장만했다. 출연진 역시 상당히 ‘물갈이’돼 신선감을 유지한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다.광해군 역에는 ‘나쁜 친구들’에서 송윤아의 오빠로 나왔던 김승수,언년이 역에는 ‘사랑밖에 난 몰라’에 막내딸로 나왔던 최은주가 등장한다.허준의 맏아들 겸이는 ‘육남매’에서 장남을 연기한 오태경이 맡았고 의녀에도 이승아,고정민 등이 새로 등장한다.한편 MBC는 7월3일과 4일,두차례에 걸쳐 ‘허준’ 연출자와 연기자 등이 촬영에 얽힌 에피소드 등을 들려주는 특집을 마련한다. 장택동기자 taecks@
  • 자치단체 문화재관리 엉망

    서울시내 곳곳에 있는 보물급 문화재와 사적지가 관리소홀과 시민들의 무관심 등으로 훼손되고 있다.경복궁,창덕궁,경희궁처럼 문화재청이나 서울시청이 관리하는 비중있는 문화재보다 구청이 관리하는 문화재가 특히 심하다. 25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거대한유리보호각 안에 갇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지난 84년 촬영한자료사진에는 밝은 회색을 띠고 있었으나 지금은 매연과 산성비,비둘기 배설물에 찌들어 검게 변해 있다. 탑의 전각(轉角) 곳곳은 부서져 있으며,칼로자른 것처럼 날카롭게 잘려나간 전각도 눈에 띈다. 이 공원에는 조선 세조 10년에 창건된 원각사의 내력을 적은 보물 3호 원각사비가 있으나 보물급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한다.비의 뒷면에는 돌로 긁어 쓴 ‘○○○ 천재,성공기원’ 등의 낙서가 선명하다. 탑골공원의 탑과 비를 관리하는 종로구청은 훼손된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문화진흥과 관계자는 “10층 석탑은 너무 심하게 훼손돼 보수할 방법이 없고 비석의 낙서는 보고받은 바 없다”면서 “일손부족으로 문화재 주변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도 벅찬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종로구청이 관리하는 문화재와 사적지는 72곳이지만 기능직 직원 2명이 훼손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1896년 고종이 세자인 순종과 함께 피신한 ‘아관파천’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중구 정동의 옛 러시아 공사관 외벽도 곳곳에 2m 가량의 금이 갔다. 중구청 문화공보실 관계자는 “사적 제253호인 공사관 외벽 균열이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서 “기능직 직원들이 주변 청소를 하는 것 외에전문인력을 통해 문화재를 점검하는 것은 엄두도 못낸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93년 유형문화재 91호로 지정한 2m 높이의 ‘양호(楊鎬)거사비’는 명지대 학생회관 뒤편 동산에 페인트를 뒤집어 쓴 채 쓸쓸히 서 있다.비석 곳곳은 훼손됐으며 거미줄이 쳐져 있어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1764년 영조 4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때 조선을지원하러 온 명나라 장수 양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지만,안내표지판이 설치돼 있지 않아 학교시설을 관리하는 대학 총무과 직원조차 비석의 의미를알지 못한다. 서대문구청은 “양호거사비는 사유지인 대학교정에 있기 때문에 소유와 관리 책임은 모두 명지대학에 있다”면서 “문화재를 보호해달라는 협조공문만보낸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 지건길(池健吉·57) 관장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화재들이 당국과 시민들의 무지로 소리없이 훼손된다”면서 “문화재에대해 지속적으로 홍보를 하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옥빛 溪流 60리’ 삼척 덕풍계곡-용소골

    비경(秘景)은 그 속살을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 법이다. 그동안 제법 매체에 소개돼 사람의 손을 탈 법도 한데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덕풍계곡과 용소골을 거쳐 응봉산(998m)에 오르는 트레킹과 산행 12시간은그야말로 태고의 신비로 들어가는 시간여행. 덕풍계곡은 삼척과 경북 울진군의 경계에 있는 응봉산 서쪽 자락에 몸을 숨기고 있다.국도 7호선에서 삼척시를 지나 원덕읍에서 416번 지방도로 진입,태백으로 달리다 왼쪽으로 틀면 계곡 입구가 나타난다. 서울에서 오후5시 출발한 관계로 덕풍계곡 입구에 이른 것이 밤11시쯤.막 이지러지기 시작한 보름달이 비치는 계곡길을 조심스레 올라간다.얼마전만 해도 1시간 30분을 걸어올라야 했다.그것도 집어삼킬 듯 용틀임하는 계곡물을건너는 모험을 치르고서. 산천어와 버들치가 뛰노는 이곳엔 최근 플라이낚시꾼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금은 다리 5개를 놔 6㎞의 비포장 도로를 덜컹거리며 올라갈 수 있다. 다리 이름도 재미있다.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라는 뜻의 버릿교,부추밭교,칼처럼 쩍 갈라진 계곡이란 뜻의칼등모리교 등등. 아예 차 위로 올라 앉았다. 달과 계곡,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쐬며 30분 달렸을까. 협곡에 갑작스레 탁트인 벌이 나타나고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다.이렇게 우렁찬 개구리 소리는 처음인 것 같다.쭉쭉 뻗은 적송(赤松)과 금강송(金剛松)사이로 인가의 불빛이 얼굴을 내민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9년 흉년에 종자를 찾으려면 찾아 들어가라’했던 삼풍(삼방 풍곡 덕풍)이 바로 이곳.삼방은 산 석탄 나무가 많다해서 붙여진 이름.내삼방에서 나는 소나무는 경복궁 건립에 쓰여질 정도로 재질이 우수하다. 11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전란을 전해들었을 정도의오지.임진왜란때부터 유명한 피난처로 정감록에도 이곳이 나와 있단다. 달빛이 교교한 민박집 마당에서 낯선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모닥불빛에 취하니 ‘햐,좋다’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실 가족끼리 이 곳을 찾은 이라면 이 마을에서 민박하고 냇가에서 천렵하는 것만으로도 도시탈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뒤 왼쪽으로 올라가는 덕풍계곡과 오른쪽으로 이어진 문지계곡은 한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비경을 감추고 있다.물과 기암절벽,소(沼)가 이루어낸 수상교향곡이 ‘정말 대단하다’. 비가 제법 내린 다음날 오를라치면 트레커들끼리 대화가 안될 정도로 물이솟구친다.비경을 범접한 이들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제1용소까지는 그런대로 오를 수 있으나 둘째 셋째 용소는 자일과 등반장비가 꼭 있어야 한다. 옥과 비취를 닮은 물빛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그보다는 암갈색에 가깝다.좁고 길다란 골에 왜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을 퍼붓느냐고 조물주에게 따지기라도할 듯 맹렬하다. 길은 없다.바위를 흠집내고 평평하게 만들어 발 한쪽을 겨우 올려놓을 수 있게 해놨다.발 아래 계곡은 암갈색 아가리를 떡 벌리며 트레커들을 위협한다. 빠지면,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명주실 세 꾸리를 집어넣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다. 5시간이 흘렀을까.제3용소를 지나 ‘도저히 이 계곡의 끝을 볼 수 없구나’생각하고 왼편으로 꺾어드니 슬라이드 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200∼300m는 될법한 폭포가 이어진다. 그리고80도 각도의 치받아오르는 등산로.소나무 참나무가 빽빽한 산판로를턱에 바치게 90분을 오르니 응봉산 정상.세월의 풍화를 이겨낸 고사목의 고집하며 빼곡히 들어찬 삼림이 태백의 힘찬 정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정상에서 왼편으로 나 덕풍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길은 송이버섯 자생지로 채취꾼들이 교묘히 입구를 감춰 길을 잃기 십상이다.그 길을 피하고 울진 쪽으로 하산한다.연분홍 철쭉의 환송을 받으며 쏜살같이 내려 떨어지는 급전직하.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곳곳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고 멀리 날아오르는 새 떼의 울음만 태고의 정적을 깨뜨린다.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한 뒤 선녀들과 가무를 즐겼다는 선녀탕,마당소를 거쳐원탕(源湯)에 이른다. 41℃의 중탄산 나트륨이 함유된 용출수가 솟아난다.이곳에서 덕구온천까지 4㎞.잘 닦여진 산책로를 1시간을 내려와야 12시간의 산행이 마감된다. 유감 하나.응봉산과 계곡에서 간간이 눈에 띄는 낡은 레일.극악스러운 일제는 소나무 착취를 위해 계곡 위쪽과 삼림에도 레일을 깔았다. 글·사진 삼척임병선기자 bsnim@. *제천-영월-태백 가는 길. ■가는 길 ▲자가운전 시간이 넉넉하다면 영동고속도로를 이용,강릉까지 간뒤 동해안 일주도로로 갈아타 바다내음을 맡으며 삼척까지 갈 수 있다.빠듯한 일정이라면 중앙고속도로로 제천에 이른 뒤 38번국도로 갈아타 영월을 거쳐 595번 지방도로로 태백에 이르러 지방도로 41번을 탄다. ▲대중교통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이용,태백까지 간 뒤 태백터미널(0395-52-3100)에서 호산가는 버스를 이용한다. ■조심 여름 장마철은 계곡물이 불어나는 관계로 매우 위험하다.5·6월이 적기인 셈. ■이런 재미도 발길이 잦다보니 풍곡리 안에도 민박집이 많이 세워지고 있다.반장인 이희철씨 집(0397-572-7378)은 8개 정도의 방을 갖추었는데 10개 정도의 방을 더 만드느라 톱질이 요란하다. 산행후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수질을 자랑하는 덕구온천(0565-782-0677,02-517-9286)에 들러 피로를 씻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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