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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임진강 황복/김종면 논설위원

    황복을 이야기할 때 으레 인용하는 시구가 있다. “복숭아꽃 봉오리 터지고 갈대가 싹틀 때 하돈(河豚)이 하류에서 올라온다네.”라는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다. 여기 등장하는 하돈, 즉 ‘강의 돼지’가 바로 황복이다. 산란기에 황허나 양쯔강에 나타나 돼지울음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생김새가 돼지와 비슷해 ‘돈’자가 붙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소동파는 황복을 너무 좋아해 양주 관리로 있을 때는 그 맛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그는 황복을 죽음과 맞바꿀 만한 맛이라고 했다. 옆구리에 노란 줄이 있어 그렇게 불리는 황복은 살이 쫄깃하고 맛이 담백해 복어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그야말로 ‘황금복’이라 할 만하다. 경기 파주시 임진강에 황복이 돌아왔다고 환호성이다. 황복은 진달래가 필 무렵 서해에서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는다. 강에서 태어난 뒤 바다로 나가 3∼4년쯤 자란 뒤 다시 강으로 돌아와 산란하는 대표적인 회귀성 어종이다. 일반 복어는 바다에서 잡히지만 황복은 임진강 일대에서만 잡힌다. 4월 말에 시작해 6월 중순까지 50여일간,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제철이다. 몇십년 전만해도 임진강에는 황복이 지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씨가 마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길 만큼 ‘희귀종’이 됐다. 임진강 물이 줄고 오염된 데다 산란을 위한 강바닥의 자갈과 모래가 소실돼 펄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2003년부터 꾸준히 펼쳐온 임진강 치어방류 사업 덕분에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 새끼들이 자라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돌아오고 있다니 그 귀환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생태적 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서해와 만나는 임진강 어귀 등에서는 싹쓸이식 묻지마 황복잡이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산 황점복을 임진강 황복으로 속여 파는 얄팍한 상혼은 이제 사라졌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의 오염을 막는 것이다. 임진강 유역에 건설 중인 군남홍수조절지가 강의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민도 상인도 당국도 부디 어렵사리 생환한 황복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 생태맹(生態盲)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민통선 통일대교 자전거로 ‘고고씽’

    오는 9월부터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민통선 내 통일대교를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된다. 경기도는 10일 경의선 임진강역을 출발해 통일대교 북단까지 2.4㎞의 자전거 주행 코스를 개설, 9월부터 운영하기로 국토해양부, 행정안전부, 국방부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 코스는 길이 1.1㎞ 통일대교를 포함, 모두 민통선 철책 안쪽 지역으로 일반인들이 평소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도는 매월 둘째주 일요일 3시간가량 인터넷이나 전화 등을 통해 사전 신청을 받아 선정하는 300명에게 통일대교를 개방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도는 임진각역을 출발해 조평도, 통일대교 남단을 돌아오는 길이 12.3㎞의 민통선 밖 자전거 주행 코스도 개설, 같은 시기부터 운영하기로 했다. 도는 임진각 인근지역의 이 같은 자전거 코스 이용객들을 위해 다음달 개통예정인 경의선 운행 전철에 자전거 전용칸을 별도 운영하고 임진각역에도 자전거 진·출입을 위한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기 위해 국토해양부와 협의하기로 했다. 또 임진강역에서 출발, 도라산전망대와 제3땅굴, 통일촌을 돌아보는 기존 관광 프로그램에 자전거 여행도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이밖에 도는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해 남한강 및 북한강, 한강본류 양변에 400㎞의 자전거 도로를 개설하는 등 2020년까지 1조 2580억원을 들여 2125㎞의 자전거 도로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소나무 스치는 바람 그 속에 빠져든다

    소나무 스치는 바람 그 속에 빠져든다

    한국화가 문봉선(48) 홍익대교수의 수묵화에서는 바람이 흐른다. 폭풍우를 동반해 소용돌이치는가 하면 잦아드는 흐느낌도 있다. 버드나무 이파리 하나만 살짝 떨구는, 그러면서 부는 듯 마는 듯한다. 특히 그의 ‘소나무’에는 언제나 모질게도 불어대는 바람을 온몸으로 지탱해내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있다. 바람 덕분에 그의 수묵화는 한여름 무더위의 지루함도 한방에 날려버릴 기세다. 종잡을 수도 없고 다 좇을 수도 없는 바람의 유혹에 넋을 잃는 재미가 매력이다. 바람 많은 제주도 출신이어서 그럴까. 바람은 그의 그림의 바탕이자 근본이다. ●16일까지 인사동 선화랑에서 전시 문 교수가 6~16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동정지간(動靜之間)-비어 있는 풍경 또는 차 있는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한다. 한국화 또는 동양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엷어지고 있고, 그나마 대학을 졸업한 전공자들도 서양화로 돌아서는 상황에서 꾸준히 작업을 멈추지 않는 문 교수나 그의 전시를 여는 화랑이나 다소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현대미술로의 쏠림현상이 심화된 데다 화랑측에서 봤을 때 그의 그림값이 제자리(?) 걸음이기 때문이다. 잦은 야외 스케치 탓인지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린 문 교수는 기자 간담회에서 “지금까지 수묵화에 천착해 왔기에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한국화를 끼고 사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1907~1997) 선생에게 서예를 오랫동안 배웠으며 전각(관상용 도장)은 김양동 선생에게 15년 동안 익혔다. 그가 대학에서 동양화 전공을 한 것은 당연한 귀착일 것이다. 최근에는 현대미술의 조류를 이해하기 위해 서양화도 2년여 공부했다. 수묵화는 100호 안팎의 넓은 한지에 그리고, 전각은 엄지 손톱만 한 돌에 새겨야 하는 것이니 서로 판이하게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교집합이다. 그는 “손톱만 한 돌을 새기다 보면 100호 크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은 나이 40에 중국에서 초서를 익힌 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서예가들 사이에서 초서는 글씨가 아니라 서양의 추상화처럼 예술가적인 기질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된다. 문 교수는 “초서를 배운 뒤에야 글씨나 그림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기량을 속필로 써내려가야 하는 초서가 완성되자 그의 수묵화는 ‘단칼에 베듯이’ 망설임 없이 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약 10시간이 걸린다. 목욕재계하고 붓들을 잘 빨아서 가지런히 늘어놓고, 텅빈 화선지 앞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먹을 갈면서 화면을 구상한다. 이렇게 9시간의 준비가 끝나면 1시간 만에 진경을 바탕으로 한 심상의 그림을 일필휘지로 그려낸다. 그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그림을 시작하는 첫 호흡이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완성해내는 것. 붓 끝을 일단 떼어낸 자리에는 객칠이나 다른 수정을 꺼려한다. ●‘실경추상’ 수묵화 매력 물씬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주는 ‘실경추상’ 수묵화는 이런 맛이 물씬 풍긴다. 그는 왜 추상화냐는 질문에 “풍경을 쥐어 짰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물과 닮도록 충실히 그려내는 것보다, 약간 덜 그리면서 여백을 남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추상화에 가까운 현대 수묵화는 임진강에서 스케치를 하고 그 풍경에 심상을 담아서 ‘덜’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운무가 끼기 좋은 비오는 날 스케치를 나가면, 자연은 어디를 덜 그려야 하는 지를 스스로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그의 수묵화에는 흐느끼는 듯한 바람과 유려한 강물이 흐른다. 농담의 조절만으로 갈대숲이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환영처럼 말이다. 그 강렬함은 관람객 스스로 각자의 안목으로 그림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겠다. (02)734-0458.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한국전 당시 영국군 전투 책으로

    11년째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한국전쟁 당시 영국군이 치른 치열한 전투를 담은 책 ‘투 더 라스트 라운드’(마지막 총알)를 영국 출판사 오럼을 통해 최근 펴냈다. 새먼은 영국 더 타임스와 미국 워싱턴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을 겸하고 있다. 그의 책은 1951년 4월22일 밤부터 사흘 동안 임진강 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공세에 휩쓸렸던 영국군 29연대의 이야기를 사상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조명해 눈길을 끈다.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던 4000명가량의 29연대는 7배에 달하는 2만 7000여명의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고, 전사자 140명을 포함해 1091명의 사상자를 냈다. 새먼은 21일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의 애시턴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한국은 짧은 세월 동안 위대한 업적을 쌓으며 잘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됐지만 한국 전쟁을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내년이 한국전쟁 60주년인데 한국 정부나 한국 사회가 거대한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거국적인 자리를 마련했으면 한다.” 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도시와 산] 강화 고려산

    [도시와 산] 강화 고려산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을 제쳐 놓거나 화려함만 찾는 경향이 있다. 산의 경우도 서너 시간 이상 차를 타고 가거나 산세가 수려해야 명산이란 인식이 은연중에 배어 있다. 인천 강화의 고려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의 역사성에 밀려 강화에서조차 ‘대표산’이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태산준령과 빼어난 계곡도 없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달라진다. 인천시내에서는 물론 서울 서부지역에서도 대중교통으로 1시간 거리로 부담없이 찾을 수 있다. 곳곳에 오랜 역사의 자취도 널려 있다. 각종 빛깔의 꽃이 만발해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진가도 알게 한다. 도심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함께 즐길 오래 묵은 친구 같은 산이다. 때마침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진달래 군락이 요즘 절정을 이뤄 가는 발걸음이 사뿐할 것이다. ●곳곳이 문화 유적지 고려산은 일반적으로 국화리 마을회관에서 출발, 청련사를 거쳐 정상에 오른다. 도로가 뚫린 청련사까지 1㎞, 이곳부터 정상까지 1.3㎞로 1시간가량 걸린다. 청련사는 고려산의 유래가 담겨 있다. 고구려 장수왕 4년, 인도의 승려 천축조사가 고려산에서 절터를 찾던 중 정상 연못에 핀 다섯 색상의 연꽃을 날려 하얀 꽃이 떨어진 곳에 백련사를 지었다고 한다. 노란 꽃이 떨어진 자리에 황련사, 청색꽃 자리에 청련사, 적색꽃 자리에 적석사, 흑색꽃 자리에 흑련사를 세웠다. 청련사만 조사가 원하는 곳에 떨어지지 못해 원통한 나머지 ‘원통암’이란 암자를 지어 현재 3개의 사찰(백련사·청련사·적석사)과 1개의 암자가 160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정상(해발 436m)에 오르면 북한 송악산과 연백을 비롯해 교동도 일대의 강화 앞바다, 영종도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다와 이어지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도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대로 하산하면 가지 않은 것만 못하다. 서쪽의 낙조봉으로 이어지는 4㎞의 능선길 주변엔 유적지가 산재해 진짜 묘미는 여기서부터다. 능선을 2㎞가량 걸으면 고인돌군(群)이 나타난다. 강화고인돌은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 고려산 기슭을 따라 130여 기가 분포돼 있다. 부근리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다. 강화고인돌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 고도보다 100~200m 높은 지역에 있어 이채롭다. 특히 고려산 정상 능선길에 있는 21기의 고인돌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황선국(50·인천 연수동)씨는 “옛날에는 기중기 같은 중장비가 없었는데 어떻게 수톤에 달하는 돌을 이곳으로 옮겼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향토사학자 양태부(50)씨는 “고려산 기슭에 거주하던 고대인들이 능선에 무덤을 만들었을 것”이라며 “당시에 나름대로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이 무술을 연마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는 치마대가 나타난다. 연개소문이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 연못인 오련지는 정상과 7~8부 능선에 분포돼 있다. 낙조봉에서 적석사 쪽으로 내려가면 우리나라 3대 낙조 조망대인 낙조대가 나온다. 동해안 정동진의 반대쪽에 있다 해서 ‘정서진’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바라보는 서해 석양은 ‘강화 8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적석사에는 조선 중기 유명한 서예가인 윤순이 쓴 사적비가 있다. ●진달래 군락의 향연 진달래는 고려산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봄만 되면 정상 앞 비탈에는 잡목이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다. 산 정상에서 능선 북사면을 따라 355봉까지 약 1㎞를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향연을 만들어낸다. 등산보다는 진달래 감상이 우선이면 산 뒤편에서 오르는 게 빠르고 편하다. 48번 국도에서 백련사를 거쳐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축제 기간 찾는 관광객들은 대개 이 길을 택한다. 대신 교통혼잡과 포장도로를 통해 산을 오르는 밋밋함을 감내해야 한다. 올해 진달래축제는 11일 시작돼 20일까지 펼쳐진다. 도시의 복잡함과 스트레스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매년 10만명 이상이 다녀간다. 글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연개소문 메아리 들리나요 고려산에는 만주와 요동을 호령했던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에 대한 민간신앙이 짙게 깔려 있다. 강화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고려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믿는다. 정통 역사서에는 연개소문이 태어난 연도와 장소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연개소문과 고려산의 연관성은 1932년 강화지역 향토사학자 박헌용이 쓴 ‘속수증보강도지’에 언급돼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고려산 시루메봉 밑에서 태어나 무예를 닦았다. 이런 내용은 1993년 부근리에 세워진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에도 보인다. 연개소문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치마대와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의 연못인 오련지가 현재 보존돼 있다. 연개소문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 성황사도 고려산 중턱에 있었다고 한다. 향토사학자 양태부씨는 “분명하지 않지만 연개소문과 연관된 사적이 많은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려산은 옛날부터 강화지역에서 신내림을 받거나 신을 모실 때 찾던 영산(靈山)이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산신제와 서낭제를 지내고 있다. 이같은 무속신앙 역시 연개소문과 관련이 있다. 산 자락인 고천4리에 자리잡은 ‘고려산 굿당’은 이러한 것을 잘 드러낸다. 다른 굿당들이 대개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 장수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연개소문을 신으로 받든다. 이곳에 있는 산신각은 연개소문을 산신령으로 모신다. 글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北로켓발사 日대응에 김정일 웃었을 것”

    “北로켓발사 日대응에 김정일 웃었을 것”

    │도쿄 박홍기특파원│“북한의 로켓 발사는 문제가 많다. 주변국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하지만 일본의 과잉 반응에 김정일 위원장도 웃었을 것 같다.” 북한의 내부 실상을 담은 계간지 ‘임진강’의 발행인 겸 편집장인 이시마루 지로(47)가 밝힌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견해다. ‘임진강’은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직접 취재해 몰래 전달한 내용을 싣는 잡지로 지난해 4월 창간됐다. 이시마루는 북한의 로켓 발사와 관련, “인공위성이 궤도에 올라갔는지 여부를 떠나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성공했다.”고 밝혔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을 비롯, 전세계의 관심을 충분히 끈 데다 기술적으로 사정거리도 지난 2006년 대포동1호에 비해 크게 늘었음을 증명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대응에 대해 “일본의 과잉반응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북한의 돕는 결과를 낳았다.”면서 “로켓 발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이 북한의 미디어전략인 만큼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를 비롯해 아소 다로 총리는 이른바 ‘단기(單期)정권’이다. 때문에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권은 대북 정책을 이용,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다. 선거를 위해서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대북정책이 없는 탓이다. 그렇다 보니 북한의 강도에 맞춰 똑같이 대응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과거사 청산, 납치문제 등 현안 해결에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냉정하게 북한의 내부를 파악해야 하는 아소 정권은 국민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면서 “국민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내부 사정과 관련, “중국에 1주일 동안 머물다 지난 1일 귀국했다.”고 말한 뒤 “북한에서도 김 위원장이 늙고 아픈 만큼 변화가 와야 한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정일 정권에 대해 불신이 크다. 실패한 정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서다. 영양실조가 속출하고 있다. 시장에만 쌀이 있을 정도다. 취재원들은 군인들도 감자 6개로 끼니를 때운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일본의 로켓 요격 방침에 북한에서는 등화관제나 대피 훈련이 시행됐다. 하지만 국민들은 미사일에 관심이 없다.” 이시마루는 “북한의 로켓 발사는 정권의 위기감에서 비롯됐다.”면서 “한시라도 빨리 미국과의 직접 교섭을 위한 목적이 다분하다.“고 분석했다. hkpark@seoul.co.kr
  • ‘경기도 강변살자’ 152개 한강잇기

    경기도는 3일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 한강·임진강 합류지점에 대한 준설사업을 하는 등 경기지역 한강을 살리기 위한 152개 ‘한강잇기’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기도 강변살자’라는 테마로 추진되는 한강잇기 사업은 ▲한강 본류(양평 양수리~한강 하구)와 ▲남한강(여주·이천~양주 양수리) ▲북한강(가평~양수리) 3개 권역으로 나눠 수해 걱정 없는 안전한 한강잇기,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한강잇기 등 6대 기본 방향, 20개 분야 152개 사업으로 진행된다. 한강 권역에서는 한강·임진강 합류지점 준설, 김포~개성간 육상 도로망 확충, 김포 한강 시네폴리스 조성, 행주산성 역사공원 조성, 한강하구 철책선 제거 등 53개 사업이 추진된다. 이와 함께 김포 강령포, 조감포, 마근포 등 한강 하구와 나루터를 복원하는 등 한강 일대를 수변 복합문화도시로 조성한다. 북한강 권역에는 5254억원을 투자,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일대 생태복원사업, 양평 소나기마을 인근 공원 조성, 가평 대성관광지 조성, 청평 호반 레저스포츠 시설 조성 사업 등이 진행된다. 경기도는 이같은 사업을 통해 이 일대를 친환경 휴식 및 레저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모두 6조 1969억원을 투자해 문화·예술의 체험관광지로 육성할 예정인 남한강 권역에서는 남한강 테마 관광열차 운행, 이포나루 등 6개 포구·나루 복원, 이천 남한강변 수상스포츠 시설 설치, 여주 한글타운 조성, 여주 강천면 남한강 도리섬 정비사업 등이 추진된다. 권역별 사업과 함께 전 한강 수계 24개 시·군에 걸쳐 398㎞의 자전거도로도 조성할 예정이다. 도는 이미 해당 사업에 1조 9800여억원을 투자했으며 올해 2조 1701억원, 내년 3조 8746억원, 2011년 이후 14조 8529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이재율 경기도 기획조정실장은 “한강 잇기 사업은 단절된 한강의 남북을 잇고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전국플러스] 파주시, 파평산에 수목원 조성

    파주시 파평산에 수목원이 조성된다. 시는 2011년까지 60억원을 들여 파평면 율곡리 일대 30만㎡에 ‘파평산수목원’(가칭)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3일 밝혔다. DMZ 인근에 위치한 파평산은 자연생태가 잘 보존된 곳으로, 시는 이 수목원을 축으로 감악산 산촌생태마을, 임진강체험관광, 판문점 통일안보관광과 연계한 안보관광벨트를 구축할 예정이다. 수목원에는 리기다소나무·참나무 등 침·활엽수림, 철쭉·진달래 등 관목, 야생화 등의 전시시설과 산림체험장, 수목 관찰로, 종자저장고 등이 설치된다. 파평산에는 수령 30년이 넘은 등 참나무류와 소나무류가 많아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박물관 크기보다 운영기금확보 중요”

    전곡리 선사유적을 발굴한 주역의 한 사람인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운정1지구의 몇몇 지점에도 발굴조사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배 교수는 “이곳에서 나온 주먹도끼는 한탄강의 전곡리 유적과 임진강의 장파리 유적의 그것과 맥을 같이한다.”면서 “하지만 다수의 발굴조사기관이 참여하는 바람에 운정1지구의 전모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평가했다.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배 교수는 “교하신도시처럼 거대한 개발사업부지에는 훌륭한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박물관 하나쯤은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교하신도시에도 계획단계에서부터 문화공간부지가 많이 들어있는 만큼 ‘운정구석기박물관’같은 특수 박물관으로 하나쯤 용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배 교수는 그러나 “대한주택공사나 한국토지공사,지방자치단체같은 공공성 있는 기관들은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박물관을 세울 뜻이 있어도 운영 과정에 어려움을 들어 망설이곤 하는 것도 사실”이라면서 “사업 시행기관도 그렇고 박물관을 요구하는 쪽도 그렇고 규모를 너무 크게 하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처음 박물관을 지을 때 100억원의 예산이 가능하다면 50억원만 건물을 짓는 데 쓰고,나머지 50억원은 운영기금화하여 영구적으로 재원조달이 될 수 있도록 규모를 적정화하는 것이 좋다.”면서 “또 공공기관이 대학 연구소와 공동으로 운영하면 인건비 등 운영비도 적게 들고 운영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구석기박물관 세워 문화자존심 지켜야”

    “구석기박물관 세워 문화자존심 지켜야”

    경기 파주 교하읍은 한반도 중부의 대표적인 하천인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곳에 있다.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완만한 구릉지가 대부분으로 넓은 평야가 가까이 있다.지리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통일 이후 이곳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지리적 요충지이다.교하신도시 조성공사는 대한주택공사와 파주시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사업이다.1,2.3지구를 모두 합치면 1647만㎥로 분당신도시보다 크다. 현재 발굴조사가 벌어지고 있는 운정1지구는 면적이 489만㎡로 지표조사 단계에서부터 47곳에서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재 운정1지구에서 출토되고 있는 구석기는 10만년 전 안팎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곳에서는 현재 주먹도끼를 비롯해 다양한 구석기가 나오고 있지만, 후기 구석기의 대표적 제조법인 돌날떼기수법의 존재를 보여주는 돌날 유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기 이전의 구석기로 볼 수 있다고 발굴 조사를 벌이고 있는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의 이융조 원장은 설명했다. ●운정1지구 47곳서 유물 출토 운정1지구에서는 2004년 말 이후 시굴 빛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특히 구석기 분야에서 상당한 발굴성과를 거두었다.그럼에도 언론의 주목을 크게 끌지 못한 것은 운정1지구 거의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발굴조사 결과가 한 데 모아지는 창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서는 22일 지도위원회를 가진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비롯하여 경기문화재연구원,중앙문화재연구원,고려문화재연구원 등이 시굴 및 발굴 조사를 벌였거나,지금도 벌이고 있다.하지만 발굴 결과는 개별 조사기관의 산발적인 발표에 그쳤을 뿐 종합적으로 공표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는 놀랄 만한 발굴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언론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따라서 일부 중요 유적의 보존이나 유물 보존을 위한 박물관 및 유물전시관의 필요성도 한 두 사람의 학자에 의해서만 제기됐을 뿐이었다. 따라서 사업주체인 주택공사와 파주시도 유적 보존 및 유물 보존 및 전시 시설 건립의 필요성을 그다지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융조 원장은 “교하신도시에 박물관이나 유물전시관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출토된 중요유물은 국립박물관에 귀속되고,나머지 유물은 발굴에 참여한 조사기관들이 보관하게 되는 등 뿔뿔이 흩어져 시간이 흐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조차 없게 된다.”면서 “뿐만 아니라 교하신도시에 입주하는 주민들이 누려야 할 커다란 문화적 자산과 자부심을 빼앗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파주시·주공,보존 마인드 부족 이에 따라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개발 사업 시행자인 파주시와 주택공사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하면서도,적어도 같은 개발지역 안에서 문화재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조사기관끼리는 연구성과를 공유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희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과거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파리시장 시절 시내에서 신석기유적이 발견됐을 때 현장을 방문하여 공사를 중단시키고 박물관을 짓도록 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이 땅에서도 재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축제와 해넘이 해돋이 명소

    축제와 해넘이 해돋이 명소

    한 해가 시나브로 저물어 갑니다.저마다 각별한 송구영신의 자리가 될 장소를 물색하는 때이기도 하지요.어디건 좋을 겁니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라면 말입니다.지는 해와 솟는 해를 모두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본다는 것,가슴 뻐근한 감동이자 가장 행복한 순간 아니겠습니까. 전국의 해맞이·해넘이 명소들을 모았습니다.겨울 축제 등 볼거리가 더해진 곳들입니다. ●수도권 ▲경기 파주 31일 오후 4시부터 자유로변 심학산 일대에서 ‘2008 파주 해넘이 축제’를 연다.심학산은 임진강 너머 해넘이 풍경이 곱기로 소문난 곳.시는 등산로 주변에 청사초롱을 설치해 송년 분위기를 돋울 계획이다.조덕배·나무자전거 공연,소원풍선 날리기 등 행사가 펼쳐진다. ▲경기 가평 상면 행현리의 아침고요수목원은 새해 2월28일까지 100만개의 전구에 불을 밝히는 ‘오색별빛 정원전’을 연다.매일 오후 5시~8시30분 수목원 내 나무와 꽃에 설치된 갖가지 색깔의 전구들이 화려한 빛을 발한다. ▲강원 고성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1일 오전 7시 해돋이 축제가 열린다.범종 타종식과 군악대 연주,전자바이올린 공연 등의 행사가 준비됐다. ▲강원 태백 새해 일출산행을 말할 때 가장 앞줄에 서는 산이 태백산이다.특히 겨울철 설경과 일출이 어우러지면 선계가 따로 없을 비경을 펼쳐낸다.해돋이를 보려면 야간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젠 등의 장비는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한다.새해 1월30일~2월8일 ‘태백산 눈축제’가 태백산 도립공원,오투리조트 등에서 열린다. ●충청권 ▲충남 당진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 한진한나루 등에서 31일~새해 1일 해돋이 축제를 연다.특히 왜목마을은 전남 순천 와온마을,전남 무안 도리포구,충남 서천 춘장대 등과 더불어 일출과 일몰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으뜸가는 명소로 꼽힌다.야트막한 석문산 정상에 올라 장고항 용무치와 국화도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맛이 일품. ▲충북 청원 문의면 문의문화재단지 일대에서 새해 1일 해맞이 행사를 연다.문의문화재단지는 ‘대통령의 별장’ 청남대와 대청호 등을 아우르고 있는 곳.특히 대청호에서 맞는 일출 풍경이 빼어나다. ▲충북 영동 19~21일 영동읍 부용리 난계국악당 등에서 곶감페스티벌이 열린다.나만의 감 잼 만들기,감잎·감껍질 물에 족욕하기 등 체험행사와 감·곶감 시식행사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됐다. ●영남권 ▲부산 31일~새해 1일 용두산공원에서 새해소망 적기와 소망풍선 날리기,새해맞이 불꽃쇼 등의 행사가 열린다.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해상선박퍼레이드와 헬리콥터 축하비행 등이 펼쳐진다. ▲경북 포항 대보리 호미곶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일출 명소.바다 한가운데 솟아오른 상생의 손과 등대박물관 등 볼거리도 많다.31일~새해 1일 1만명 떡국만들기 체험행사 등이 열린다. ▲경남 사천 남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특히 해안을 따라 펼쳐진 실안~사천간해안관광도로변 어디서고 해가 벌이는 빛의 축제와 마주할 수 있다.새해 1일 오전 6시부터 삼천포대교 일대에서 사랑의 엽서보내기(1만 3000장),새해 소망떡국 나누어 먹기(1만 3000인분) 등의 행사가 열린다. ●호남권 ▲전남 목포 31일 로데오광장 주변에서 퍼레이드와 패션쇼 등 거리축제가 열린다.새해 1일 오전 5시 퀸메리호를 타고 영암호까지 다녀오는 선상 해맞이 행사도 마련했다.해군 군악대 공연 등 다채로운 선상 프로그램이 함께 한다.참가인원은 3000여명.참가비 1만 2000원. ▲전남 완도 청해포구 촬영장에서 31일 해넘이축제를 연다.군내리 동망산에 조성된 다도해 일출공원을 찾는 것도 좋겠다.2만명 정도가 동시에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곳.공간이 한정된 공원 내 완도타워는 추첨을 통해 입장객 130명을 선정한다.19일까지 완도군 인터넷 홈페이지와 우편 등으로 신청받는다. ▲전남 해남 31일~새해 1일 땅끝마을 일출전망대와 땅끝탑 일대에서 해넘이·해맞이 축제가 열린다.‘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은 빼어난 해넘이 풍광을 자랑하는 곳.남도의 거찰 미황사도 빼놓을 수 없다.발 아래 펼쳐진 다도해 사이로 지는 해를 조망하는 맛이 일품이다.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에 올라도 좋겠다.날이 좋을 땐 멀리 제주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전북 전주 31일~새해 1일 풍남문 일대에서 제야축제를 연다.한벽예술단의 난타공연,비보이 공연,타종행사 등 송년행사가 펼쳐진 뒤 불꽃놀이,세찬(歲饌)나누기 등 새해맞이 행사가 이어진다. ●알아서 손해볼 것 없는 연말 이벤트 연말연시 알뜰여행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한국관광공사는 새해 1월7일까지 ‘겨울 여행 추천 e-메일 보내기 이벤트’를 벌인다.관광공사 홈페이지(visitkorea.or.kr)를 통해 주변의 고마운 분들에게 국내 겨울 여행지를 추천하는 이메일을 발송하면 된다.참가자들에게 추첨을 통해 노트북·MP3 등을 제공한다. 우리테마투어는 해돋이여행 기획상품을 선보였다.강원도 정동진과 대관령목장,경북 강구항 등 일출 명소들을 찾아가는 상품이다.특히 차량 정체가 심한 강릉~정동진 구간을 바다열차로 연결해 편의성을 더했다.20,24,26,31일 출발.4만 5000원~6만5000원.(02)733~0882.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자료제공 한국관광공사
  • [Metro] 임진강·한탄강 합수머리에 자연생태 체험 파크 조성

    경기도는 경관이 빼어난 임진강, 한탄강 합수머리(두 갈래 이상의 물이 한데 모이는 곳) 지역에 137억원을 들여 ‘자연생태 체험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고 3일 밝혔다. 도는 내년도 공유재산관리계획안에 체험파크 조성계획을 반영, 최근 도의회에 제출했다. 계획에 따르면 도는 2011년 6월 완공을 목표로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8만 280㎡에 생태 체험파크를 조성한다. 체험파크에는 전천후 온실과 탐방객 숙소, 교육장 등이 들어선다. 또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던 고사리 등 고비과 종류의 양치식물원(1000㎡)과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는 뗏목 체험장도 조성된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길섶에서] 압구정과 반구정/임태순 논설위원

    한강변은 예부터 권세가들이 정자를 지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조선초 세조∼성종 때의 세도가 한명회도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이웃 경치 좋은 곳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압구(狎鷗)라는 말처럼 오리와 갈매기가 강가에서 평화롭게 노닐어 중국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할 정도였다. 지난여름 임진강변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을 찾았다.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즐기기 위해 만든 정자다. 사라진 압구정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반구정에서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는 맛도 놓치기 아까웠다. 반백의 문화해설사는 “절경에 지은 압구정은 없어졌지만 수수한 자태의 반구정이 남아 있는 것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인 신경림선생도 ‘나무’라는 시에서 “나무를 길러본 사람은 잘나거나 큰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못나고 볼품없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우쭐대고 웃자란 나무가 햇빛을 독차지해 뽑히거나 베어지는 것을 안다.”고 했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임진각 주변에 DMZ생태공원

    임진각 주변에 DMZ생태공원

    경기 파주시 임진각 주변이 청소년 생태체험공간으로 조성된다. 또 임진강 일대 군 철책선이 제거되고 황포돛배를 띄우는 등 새로운 관광지로 탈바꿈한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는 23일 임진각에서 ‘버터플라이랜드 아시아(BLA)’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2010년까지 1600억원을 들여 평화누리 28만 8295㎡에 청소년 생태체험 공간 ‘DMZ 에코파크(ECO PAR K·조감도)’를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DMZ 에코파크는 나비·희귀 곤충관·조류생태관·DMZ 홍보관 등 전시시설과 나비관련 연구 실험실·정보센터·영상관·갤러리·로봇관 등 교육·연구시설, 테마광장과 이벤트광장 등 야외 레포츠 공간 등으로 꾸며지고 습지·수목원·산림욕장도 갖추게 된다. 또 공원내에는 화훼원과 음악분수, 조각 등 조경시설, 청소년들이 일정기간 머물 수 있는 유스호스텔, 편의시설 등도 들어선다. 사업은 BLA측이 공원을 조성해 도에 기부채납한 뒤 30년간 운영하는 건설이전운영영(BTO) 방식으로 추진된다. 도는 BLA측과 실시협약체결과 사업시행자 지정 등을 마치고 내년 상반기 공사를 시작해 2010년 초에 문을 열 계획이다. 이 밖에 도는 유네스코에 임진각 주변 DMZ 일대를 생물보전지역으로 지정할 계획이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가 피란해 있던 곳이 강화도였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조선 군신들은 ‘변변한 수군도 없고 바다에도 익숙지 못한 청군이 강화도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너졌고 피란해 있던 피붙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강화도를 장악하라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도발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조의 입도(入島)를 막지 못할 경우 전쟁은 분명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타이지는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1637년 1월 중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묘수란 다름 아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강화도만 공취(攻取)하면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청태종실록’에는 홍타이지가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하들에게 1월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은 청군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한편 병선 제작에 돌입했다.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끌어 모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선을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 불리는 작은 수레도 제작했다. 수군이 미약하고 해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을 제작하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에 대한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에서 귀순해 왔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사안일에 젖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홍타이지는 1637년 1월18일까지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유보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나오지 않자, 홍타이지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강화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월19일, 청군은 자신들이 제작한 작은 배 80척을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당시 강화도 건너편에는 도르곤, 호게(豪格), 공유덕 등 청군 지휘부가 1만 6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21일까지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있던 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어떠했을까? 당시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가와 친지들만을 노골적으로 챙겨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강화도로 들어온 뒤에도 김경징의 행태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강화도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청군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경징은 광성진(廣城津) 부근에 약간의 수군을 배치했을 뿐,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강화도의 대안인 김포 주변을 감시하고,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금성탕지’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그는 참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孝宗))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검찰사 김경징을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또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가 죽자,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민구를 대신 충청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민구는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회피했다.‘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의 ‘백’까지 이용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조처에는 손을 놓았던 것이다. ●무너지는 강화도 김경징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여전히 안일에 젖어 있던 1월21일, 심상치 않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이다.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적의 목을 베려고 덤볐다. 그가 허위 보고를 통해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명목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곶(甲串)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같은 보고가 들어오자 김경징은 다급해졌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토록 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명을 이끌고 진해루(鎭海樓)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리 방어 훈련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임기응변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김경징은 장병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화약을 조금씩 분급하면서 그것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적의 상륙 시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는 조처였다. 강화도가 함락될 경우, 화약 분급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월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분승시켜 공격을 개시했다.‘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청군의 일부 선박에는 홍이포까지 거치되어 있었다. 홍이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자 조선군의 사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전투 경험도 없고,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철옹성’ 강화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6) 힘겨운 화친 시도

    [병자호란 다시 읽기] (86) 힘겨운 화친 시도

    조선이 상황에 떠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리한 조건에서 화친이 이루어지려면 어느 정도는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조선은 청을 위협할 만한 ‘군사적 카드’가 없었다. 근왕병이 오리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또 강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게 된 책임의 소재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그런데 ‘책임 소재’를 규명하기 위한 공방전 또한 결코 만만한 싸움이 아니었다. 청은 조선이 제시하는 논리와 입장을 자못 치밀하게 반박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래저래 화전(和戰) 양면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청,‘명=천하’ 인식을 부정하다 청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놓고 벌인 논쟁에서 역사적 사례까지 끌어다가 조선의 논리와 입장을 반박했다. 청은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라고 권유하기 위해 왔던 몽골 버일러들의 편지를 접수하지 않은 것을 전쟁의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몽골 버일러들과의 면담 자체를 거부했는데, 몽골과는 국서를 주고받은 전례가 없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 바 있다. 이미 1637년 1월2일,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보낸 서신에서 조선이 내세운 명분을 반박했다. 그 핵심은 정묘호란 당시 인조와 조선 조정이 강화를 논의했던 상대가 자신의 조카와 제왕(諸王)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후금 원정군의 사령관은 홍타이지의 이복형 아민(阿敏)이었고, 강화도를 왕래하면서 조선과 화친 교섭을 주도했던 사람은 한족 출신의 귀순자 유해(劉海)였다. 홍타이지의 반박에는 ‘정묘호란 당시에는 나의 부하들과 함께 화친 문제를 논의했으면서 작년에는 왜 똑같은 부하인 몽골 버일러들을 접견조차 하지 않았느냐?’는 힐문이 담겨 있었다. 홍타이지는 이어 고려시대의 고사(故事)를 거론했다. 몽골 버일러들이 모두 원(元)제국의 후손이라는 것, 조선이 계승했던 고려가 원을 섬기고 해마다 조공했던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런 몽골에 신속(臣屬)했던 고려의 후예인 조선이 몽골 버일러들을 접견하는 것조차 거부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조선이 1월13일에 보낸 국서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이 베푼 은혜(再造之恩) 때문에 그들을 배신할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정면으로 반박했다. 조선은 ‘우리가 일본의 침략으로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神宗) 황제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해 주셨다.’고 말한 바 있다. 1월17일에 보낸 답서에서 홍타이지는 ‘천하는 크고 나라는 많다. 너희를 구해준 것은 오직 명나라 하나뿐인데, 너희는 어찌해서 천하를 운운하는가? 명나라와 너희가 허탄(虛誕)하고 망령된 것은 끝이 없구나.’라고 공박했다. 청은 대릉하(大凌河) 전투에서 승리했던 무렵부터 이미 명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상대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시도해 왔다. 심지어 명을 남조(南朝), 또는 주조(朱朝,朱元璋이 세운 국가라는 뜻)라고 폄하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러니 명을 여전히 ‘천하’로 여기고, 그들과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청에 신복(臣服)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조선의 태도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홍타이지, 신속(臣屬)할 것을 요구하다 1월17일에 보낸 답서에서 홍타이지는 작심한 듯 조선이 보낸 국서에 대한 반박과 비아냥, 그리고 협박하는 내용의 언사들을 쏟아냈다. 그는 자신의 거병(擧兵)이 전적으로 조선의 ‘잘못’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홍타이지는 먼저 인조가 1636년 3월 평안감사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의 내용을 문제삼았다. 유시문의 내용 가운데 ‘장차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으려 하니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는 내용은 정묘호란 당시 맺은 맹약을 조선이 먼저 어겼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라고 운운한 것도 맹렬히 비난했다.‘전쟁을 모르는 나라’가 왜 과거에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느냐고 힐문했다. 그는 조선이 자신들을 가리켜 노적(奴賊, 천한 도둑이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것도 문제삼았다.‘도둑(賊)이란 몸을 숨겨 몰래 훔치는 자를 가리키는데, 우리가 과연 도둑이라면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체포하지 않고 내버려두느냐?’고 비아냥댔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홍타이지가 내세운 반박의 논리를 다시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그들이 제시한 과거의 ‘사실’ 자체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다, 정보 수집 능력에서 그들에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조와 조선 조정의 ‘본심’이 담긴 유시문을 자국 영토 안에서 용골대의 복병에게 탈취당한 것이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회유와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자신은 ‘형세를 따라 항복을 청하는 자는 무사히 보호하지만,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징벌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이 자신의 판도(版圖) 안으로 들어오면 적자(赤子)와 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사실상 조선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공식적인 첫 문서였다. 이미 1월16일, 청군은 남한산성에서 잘 보이는 지점에 ‘초항(招降)’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쓰여진 깃발을 세워 놓은 바 있었다. 바로 하루 뒤, 항복을 요구하는 답서를 보낸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답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를 직접 거론하며 다시 한번 채근했다.‘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 조선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보낸 국서에 대한 답변을 미뤄왔던 청의 본심과 요구 조건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무조건 항복하여 청의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교섭을 잘 하면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조선의 판단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조선, 벼랑 끝으로 몰리다 인조는 홍타이지가 보낸 답서에 대응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신료들을 불렀다. 홍서봉은 홍타이지의 답서 내용이 과대망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부 신료들은 그들을 평소 ‘노적’이라 지칭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사과하는 자세로 유감을 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명길은 그들의 전력(戰力)이 증강되고 있는 것, 도르곤(多爾袞)을 중심으로 강화도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실제 당시 청군의 화력은 획기적으로 증강되고 있었다.1월10일, 두도(杜度) 등이 홍이포(紅夷砲)와 대장군포(大將軍砲) 등 중화기들을 남한산성 앞으로 끌고 와 배치했던 것이다. 이들 화기와 청군의 증원군은 본래 1월6일 임진강 북쪽까지 남하했다가 강의 얼음이 녹는 바람에 건너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강물이 다시 얼어붙었고, 증원군은 순식간에 산성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까지 조선을 외면하는 형국이었다. 항복하라는 요구에 조선이 응하지 않을 경우, 홍이포의 포탄이 산성 안으로 날아올 판이었다. 이미 대릉하 공략전에서 홍이포를 비롯한 청군 화포의 위력은 결정적으로 발휘된 바 있다. 홍이포 포탄에 맞은 성의 돈대(墩臺)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끝까지 성을 사수(死守)하겠다던 명군의 의지도 같이 무너져 내렸었다.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노골적으로 항복을 종용했던 데에는 증원군이 도착하고 홍이포 등의 수송과 배치가 완료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조선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항복’을 선택할 것인가? ‘전원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결전을 선택할 것인가? 벼랑 끝에 몰린 남한산성은 종사(宗社)의 운명을 결정할 최후의 선택을 앞에 두고 다시 술렁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민족의 아픔 담긴 노래 통해 역사 보고 싶어”

    “민족의 아픔 담긴 노래 통해 역사 보고 싶어”

    |도쿄 박홍기특파원|“노래에도 민족의 아픔과 설움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지요. 그래서 노래를 통해 역사를 보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금지된 노래·조선반도 음악백년사’를 펴낸 재일동포 2세 성악가인 전월선(田月仙·50)씨가 밝힌 출간 배경이다. 그는 “‘일본강점 100년’을 맞는 2010년을 염두에 두고 부제를 ‘조선반도 음악백년사’로 달았다.”고 말했다. ●일본·북한서 금지된 노래도 소개 도쿄에서 태어난 전씨는 일본음악계를 대표하는 소프라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다.1985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 앞에서 노래했고,1994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 ‘카르멘’에 주역으로 나섰다.2002년에는 도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주최한 김대중 대통령 환영 공연에도 출연했다. 이번에 내놓은 책은 일제강점기, 남북 분단, 군사정권 등 역사의 굴곡에 따라 부를 수 없었거나 부르기를 꺼릴 수밖에 없었던 노래들의 뒷이야기를 담았다.‘아리랑’과 ‘봉선화’,‘임진강’,‘그리운 금강산’,‘동백아가씨’,‘고려산천 내사랑’,‘아침이슬’,‘노란샤쓰의 사나이’….2006년 펴낸 자전적 논픽션 ‘해협의 아리아’에서 못다한 노래에 얽힌 사연도 담았다. 전씨는 “한국에서 허용하지 않았던 노래를 주로 다뤘지만 일본·북한에서 금지된 노래도 소개했다.”면서 “가능한 한 자료보다는 해당 노래의 작사·작곡가 등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터도 찾아 가봤다.”고 밝혔다. ‘해협을 넘나드는 가희(歌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전씨는 일본 공연 때엔 되도록 한국 가곡을 두세 곡 정도 부른다고 했다. 북한 노래 ‘임진강’은 음반으로 냈을 만큼 즐겨 부른다. 이 노래는 1968년 일본 그룹사운드 ‘포크 크루세이더’가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음반이 출시되기 직전 북한과 조총련이 강하게 반발해 처음에는 발매되지 못했고, 전파도 탈 수 없었다. ●10월 도쿄서 막 올릴 오페라 ‘춘향전´ 준비 한창 그는 ‘임진강’을 두고 “아름다운 노래로 한국에서는 1994년 처음 불렀다.”면서 ‘임진강 맑은 물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라는 가사를 읊조렸다.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씨가 금강산을 방문할 때 ‘이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며 미리 안내원으로부터 주의를 받는 일화도 소개했다. “봉선화는 곡절도 많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막았고, 지금은 작곡가인 홍난파 선생이 친일파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잘 불려지지 않지요. 노래가 가진 사연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전씨는 한국의 뉴서울오페라단이 오는 10월 도쿄에서 막을 올릴 오페라 ‘춘향전’에서 춘향역을 맡아 연습에 한창 바쁘다. 그는 “춘향역을 두번이나 해봤지만 늘 새롭게 흥분된다.”며 웃었다. hkpar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3년 발품 들인 국토백과전서

    3년 발품 들인 국토백과전서

    1964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과 함께 등단한 소설가 박태순(66)은 타고난 여행문학 작가이다. 국토기행(紀行) 문집으로 ‘작가 기행’ ‘국토와 민중’ 등을 펴냈고, 역사인물기행 ‘인간과 역사’, 한국기층문화 기행 ‘사상의 고향’ 등을 발표했다.1991년에는 서울신문에 중국기행 ‘신 열하일기’를 연재했다. 작가들에게 여행은 사실 떼내버리기 힘든 몸속의 장기 같은 것이긴 하지만 도대체가 그의 타고난 여행벽은 세월의 무게조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직까지 왕성하다. ●인문지리·사회상·인물 등 아울러 작가는 3년 전 또다시 배낭과 펜을 챙겨들고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국토문화대계, 국토백과전서라고 할 만한 살아 움직이는 국토인문학의 결과물을 내놓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발벗고 길에 나서는 일’과 ‘문닫고 글과 씨름을 벌이는 작업’에 꼬박 3년 동안 외곬으로 매달렸다. 최근 출간된 ‘나의 국토 나의 산하’(전3권, 한길사 펴냄)에는 이처럼 그가 발벗고 길에 나서서 찾아낸 우리 국토 39군데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작가의 기존 기행문집과 마찬가지로 자연예찬이나 주관적인 감상문 형태의 여행기와는 사뭇 다르다. 국토의 인문지리와 사회변동 양상, 그 역사속의 인물과 문학까지 아우르는 일종의 국토백과전서라고 할까. “백두산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과연 무엇일까. 앞전도 아닌 뒷전에서 알현하는 송구스러움을 뭐라 여쭐지 참으로 민망하다.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숙인다.‘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나는 초라하고 남루하며 궁색하다.…시인은 나를 꾸짖는다. 너는 이 산을 오른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인즉 범하고 있는 게 아닌지 느끼기나 해보는가.”(제1권 113∼114쪽,‘거대한 뿌리 백두산’ 가운데) 기행문들은 성격에 따라 세 권에 나뉘어 수록돼 있다.‘나의 국토인문지리지’라는 부제가 붙은 1권은 청계천, 백두산, 지리산, 임진강 등을 탐방한 내용을 토대로 거대담론으로서의 ‘서사국토’를 담고 있다. “오오 거리는 나의 모든 설움이다”로 마무리되는 김수영의 시 ‘거리’를 텍스트 삼아 청계천을 산책한 작가는 도시화(복개)와 역도시화(복원)를 거듭한 ‘천변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안의 사람들을 ‘고독한 군중’으로 명명했다. ●지리산 등 39곳 진면목 재발견 2권 ‘시인의 마음으로’에서는 국토가 들려주는 미시담론을 알록달록 색깔있게 들려주고 있다.‘무진기행’ 등의 문학작품이나 옛 선비들의 문예기행을 뒤좇아 국토의 동남해안-중남해안-서남해안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순례기행에서는 우리 국토의 맛깔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마지막 3권 ‘인간의 길 시대의 풍경’에서는 동해안 종단기행과 중부내륙 횡단기행의 두 코스를 따라가며 길에서 건져 올린 인간과 시대, 길과 풍경에 대한 생각들을 담았다. 작가는 종횡무진 발품을 판 이번 국토기행에서 과연 새로운 무엇을 발견했을까. 작가는 “국토 언어는 기본적으로 희망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면서 이번 국토체험의 의미를 ‘부드러운 국토의 발견’으로 요약했다. 국토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인생이 충실해지고 생활이 넓어진다는 작가는 도시문학, 농촌문학, 향토문학, 역사문학이 있는 것처럼 ‘국토문학’이 당연히 있어야 하고, 이번 작업은 ‘국토기행문학’의 형태일 수 있다고 했다. 책 속에는 ‘장승’ ‘초가’ 등 민속적 피사체에 천착한 베테탕 사진작가 황헌만씨가 작가와 함께 다니며 촬영한 국토사진들이 함께 수록돼 있다. 각권 1만 8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유적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에게 돌려줘 애정 갖게 하는 것”

    ‘유적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입을 막고 보존하기보다 활용방안을 세워 시민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경기도 고구려 유적 보존과 정비를 위한 심포지엄’에 나서는 주제발표자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다. 경기도 지역 고구려 유적의 보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이 심포지엄은 10일 경기 수원시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열린다. 경기도의 고구려 유적은 서울시 광진구 및 중랑구와 맞닿은 구리시의 아차산보루와 용마산보루, 망우산보루를 비롯하여 모두 63곳에 이른다. 고양 고봉산성과 의정부 사패산보루, 양주 천보산보루, 파주 덕진산성, 연천 호로고루, 포천 성동리산성 등 경기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475년부터 이 지역을 백제에 다시 내준 551년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세워진 군사시설이다. 미리 공개된 발표문에서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는 대부분 전망 좋은 등산로에 위치하여 지속적이고 심각한 훼손 위험에 직면해 있다.”면서 “하지만 등산로를 폐쇄하여 접근을 막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활용을 전제로 하는 현대적인 유적의 보존 개념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각의 보루를 하나의 역사 유적으로 통합하는 공원 개념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면서 “발굴조사가 끝난 홍련봉1보루는 복원하고 이웃에는 유적전시관을 건립하여 ‘고구려 유적 수학여행 및 역사유적 답사코스’ 등 구체적인 목표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김홍식 명지대 교수는 “임진강 유역의 군사요새인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면서 “특히 뱃길로 세 유적을 이어 고구려가 임진강·한탄강 일대에 군사시설을 세운 이유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허미형·신명종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 연구원은 “양주지역에는 29곳의 고구려 보루가 있지만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고, 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어 접근도 쉽지 않다.”면서 “하지만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는 만큼 안내판을 세우고 등반지도에 유적의 위치를 표시하는 한편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하여 고구려 변방의 군사유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허미형 연구원은 “고구려 유적이 훼손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사유지에 위치하고 있고, 비지정문화재여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보호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시민들이 즐겨찾을 수 있는 활용방안이 마련되어 유적에 애착을 갖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본격적인 예산지원도 뒤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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