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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에 IT주재관 파견

    주중 한국대사관에 국장급(3급) 정보통신 주재관이 파견된다. 9일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정부는 작년말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1.8%,전체수출의 28%를 점하는 IT산업의 중요성을감안,세계 최대의 이동통신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IT주재관 1명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임종태(林宗泰) 지식정보산업과장을 주재관으로선발,이르면 이달말쯤 중국 베이징으로 파견할 예정이다. 중국에 IT주재관이 파견됨에 따라 이동통신 표준협력 추진을 위한 정부간 협력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박대출기자 dcpark@
  • NGO/ 시민단체·국회 축구장서 ‘한판’

    2002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들이 축구붐을 조성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현역 국회의원 축구팀과 시민단체 활동가 축구팀이 한판 승부를 벌였다. 국회의원팀은 무소속 정몽준(鄭夢準·대한축구협회장)의원을 비롯해 민주당 장영달(張永達),이재정(李在禎),장성민(張誠珉),임종석(林鍾晳),송영길(宋永吉) 의원 등이 선수로 뛰었고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 원내총무 등이 응원을 했다. 이에 맞서 참여연대 박원순(朴元淳) 사무처장,민중연대 박석운(朴錫運) 집행위원장,민언련 성유보(成裕普) 이사장,함께하는 시민행동 하승창(河勝彰) 사무처장 등으로 구성된 시민사회단체팀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과시하며 일진일퇴 공방을 벌였다. 경기 시작 4분만에 장성민 의원이 선취골을 기록했으나 환경정의시민연대 서왕진(徐旺鎭) 사무국장이 곧바로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이날 승부는 전후반 한골씩을 기록한 장 의원의 수훈으로 국회의원팀이 3대2로 승리했다.경기는 10월15일까지 계속되는 ‘제1회 생활체육시민축구 전국대회’에 앞서 축하겸 친선을 다지기 위해 열렸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민중연대가 주최,40일 동안 펼치는 이번 대회는 참여연대,경실련,민교협 등 80여개의 시민단체들이 참여한다.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정치든 축구든 구경꾼에 머무르기보다는 직접 참여할 때 더욱 재미있고 주인의식도 생기게 된다”면서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與소장파 ‘해임가결’ 항의농성

    민주당 개혁파 소장 의원들의 모임인 ‘바른정치모임’ 소속 의원들은 3일 임동원(林東源) 통일장관 해임건의안 가결에 항의,국회의원회관 117호실에서 규탄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에는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정동채(鄭東采) 신기남(辛基南) 천정배(千正培) 김태홍(金泰弘) 정장선(鄭長善)이종걸(李鍾杰) 송영길(宋永吉) 임종석(任鍾晳) 의원 등 9명이 참여했다. 홍원상기자 wshong@
  • 헌법재판소 “낙선운동 금지 위헌”

    현행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가운데 시민단체의낙천·낙선운동을 금지하고,선거 전 일정기간 동안 선거운동을 제한한 조항은 합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權誠·河炅喆 재판관)는 30일시민사회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58 ·59조가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헌법에 위배된다며 총선시민연대가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재판관 전원이 같은 의견으로 기각했다.또 선거전 일정기간 동안 현역 국회의원에게만의정보고 활동을 허용하고 현역이 아닌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선거운동은 제한한 93·111조가 평등권에 위배된다며 민주당 임종석(任鍾晳) 의원 등 6명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서도 합헌 결정을 내렸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건설업계 프로젝트 파이낸싱 뜬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택업계에 새로운 사업추진 방식으로 부상하고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은행돈이 아파트 사업에 눈을돌리면서 부도업체 땅이라도 사업성만 뛰어나면 거액의 대출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미은행 등 금융기관 컨소시엄과 한국토지신탁,㈜건영은 죽전택지개발지구 2블럭에 1,000억원의 대출약정을 체결했다. 이른바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개별 아파트 사업에 무보증으로 이같은 대출이 이뤄지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화의,법정관리 기업이많은 건설업계로서는 금융권의 대출조건이 까다로워 사업비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따라 아파트를 지으면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땅도 손쉽게 매각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프로젝트 파이낸싱 기법이 도입되면서 이들 업체들도 사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건영의 죽전 2블럭은 대지면적이 2만8,332평으로 33∼59평형 아파트 1,258가구가 들어서게 된다.오는 9월 15일 다른업체들과 동시분양을 추진중이다.건영은 그동안 이부지의토지비 잔금 마련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건영의 프로젝트 파이낸싱 성공으로 다른 업체들에게도 이같은 방식이 확산될 전망이다. 이번 프로젝트 파이낸싱 중개 및 사업성 분석을 맡은 미르하우징 임종근(林鍾根) 사장은 “기존방식과 달리 해당 사업지의 사업성만을 보고 이뤄진 파이낸싱”이라며 “이번파이낸싱 성사로 다른 금융기관과 주택업체들도 이같은 방식의 도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곤기자
  • ‘김중권 파문’ 민주 반응

    28일 아침 민주당 김중권(金重權) 대표가 주재한 ‘당4역회의’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평소 회의 참석자들은 기자들 앞에서 만큼은 농담을 던지는 등 여유있는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인데,이날은 모두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의 얼굴인 대표가 직접 일으킨 ‘당무거부’ 파문인 만큼,부담이 적지 않은 듯 했다. 기자가 이날 만나본 민주당내 인사들은 대체로 김 대표의당무거부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심정을 일견 이해는 하지만,그래도 요즘처럼 여당이 어려운 때에 대표가 당무 자체를 거부한 행동은 지나쳤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대다수는 이번 파문이 순수한 충정의 발로라기보다는 여권내 파워 게임에서 비롯됐다는 판단 탓인 듯,어느 한쪽 편을 드는 등 깊숙이 발을 들여놓기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한편에서는 김 대표가 이번 파문을 통해 스스로의 권위를추락시킴으로써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다는 평가가 적지 않게 나왔다. ■다수는 관망= 일부 김 대표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김 대표의 입장에 지지를 표명하는 의원을 찾기 힘들었다.김 대표의 당내 기반이 취약한 탓도 있지만,근본적으로 이번 사태가 동교동계와 김 대표간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됐다는판단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 5월말 집단으로 당정쇄신을 요구했던 개혁소장파 의원들이 관망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단적인 예다.임종석(任鍾晳)의원은 “이번 일이 언젠가는 터질 것으로 이미 예견했었다”며 “권력투쟁의 속성을 갖고 있는 만큼,인위적으로억누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사태가 진행되도록 지켜보는 게오히려 낫다”고 말했다.임 의원은 “이런 문제는 소장파가나설 만한 성격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천정배(千正培)의원도 “이번 일로 우리가 요구했던 당정쇄신의 정당성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면서도 별다른 행동을 할 뜻은 보이지 않았다. ■싸늘한 시선= 김 대표의 행동에 보다 노골적으로 비판을가하는 쪽도 있었다.쇄신파인 김태홍(金泰弘) 의원은 “꼭그 방법 밖에 없었나…”라고 운을 뗀 뒤 “이 사건으로 대통령의 레임덕이 앞당겨지고 당의 권위가 추락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원은 “김 대표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는 당 대표를 쥐고 흔들어 놓고,이제와서는 청와대 쪽을 보고 반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김대표가 ‘왕자병’에 걸려있는 것 같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몇몇 최고위원들도 우회적으로 김 대표에 반하는 입장을나타냈다.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은 “10월 재·보선에 거당적으로 나서면 조직과 비용을 엄청나게 동원해야 하는데,그러면 야당도 똑같이 따라할테고,결국 국민의 정치불신을심화시킬 것”이라며 김 대표의 출마에 회의적인 의견을 보였다.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도 “재·보선은 어디까지나 재·보선일 뿐”이라며 “물론 이기면 좋겠지만,지면 모든 게끝장난다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도 옳지 않다”고 밝혔다. 한 소장파 의원은 “김 대표가 당무를 거부하는 듯 하다가,바로 복귀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확인시켜주기만 했다”며 “김 대표로서는 얻은 것 없이 상처만 입은 꼴”이라고말했다. 김상연 홍원상기자 carlos@
  • 정년퇴직 교원 849명 훈·포장 수여(2)

    ◇홍조근정훈장▼강원△심인섭 소양중 교장△임양근 강릉여중 교장△김연주 북원여중 교장▼경기△심영섭 능서초 교장△장영배 북내초 교장△최영자 강선초 교장△정정환 선동초 교장△이완녕 범계중 교장△정춘국 일산중 교장△김진강과천고 교장△최성락 백마고 교장△리조훈 송탄고 교장▼경남△문병용 축동초 교장△권정숙 옥종중 교장△이지곤 내서중 교장△박성부 합포중 교장△안석환 서포중 교장△차일효 진해여중 교장△정연수 동진중 교장△김삼홍 동진중 교감△허경열 무안중 교감△공원석 합천중 교장△김정권 진해고 교장△박은욱 단성고 교장△이범순 함양제일고 교장▼경북△박정웅 포항대흥초 교장△김태환 유림초 교감△김동연 안동고 교장△김규병 영천공업고 교장△정준기 영동고 교장△여기창 경북교육청 장학관△박영철 김천중앙고 교장△윤한오상고 교사△김석기 강구상고 교장△최봉현 대도중 교장△이종옥 소수중 교장△안한근 공검중 교장△허진열 영주부석고 교장▼광주△이혜자 광주효광중 교장△오희열 상무중 교장△이정헌 월곡중 교장△김성기 지원중 교장△김문곤 지원중 교감△김기원 각화중 교장△류이열 용봉중 교사△백희동 금남중 교장△박형국 광주기계공고 교감△김옥빈 학생교육원 원장▼교육부△윤영소 국제교육진흥원 교육연구관▼대구△장삼도 대구동덕초 교장△이수문 대곡중 교장△백춘이 덕화여자중 교장▼대전△이종기 동대전중 교장▲교수△황해선 동의대△최재종 경원대△김원중 포항공과대△김동철 순천대△정병수 성균관대△이용훈 한국해양대△현문길 동아대△오진곤 전북대△김명호 덕성여대△변대현 홍익대△전명현홍익대△김상욱 경북대△손병기 경북대△변영수 고려대△김돈균 부산대△김종훈 연세대△이종성 연세대△유공조 경희대△박경호 강원대△이병기 강원대△김수원 계명대△이상옥 서울대△박형석 서울대△안원영 서울대▼부산△정무진 남부교육청 장학관△안영환 용호중 교장△이상원 동항중 교장△고후진 금사중 교장△김성찬 경남고 교장△남호상 대천리중 교장△양화자 천마초 교장△이일영 운송초 교장▼울산△김종우 울산서여중 교감△윤동원 울산여고 교장△강대호 태화초 교장▼인천△정용주 청학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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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지는 것을 찾아] 백지위의 사색 ‘원고지’

    신춘문예 응모작을 준비를 하는 예비작가나 원고 마감을 앞둔 전업 작가들에겐 ‘백지의 공포’로 다가온다는 원고지. 네모 한칸 한칸에 혼이라도 집어넣듯이 글을 채워나가다 또다른 영감이 떠오르면 거칠게 원고지를 찢어버린다.그러길여러번 글쓰는 작업을 마칠 때쯤이면 어느새 방안에는 구겨진 원고지가 수북이 쌓이게 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전업 작가나 신문 기자들조차 컴퓨터를 이용해 원고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육필 원고와 함께 잉크,펜,만년필 등도 점점 기능이 무뎌져 가고 있다.요즘 이른바 컴퓨터 세대들은 예전에 펜과 원고지로 글을 썼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부산의 향토사학자 최해군(崔海君·76)옹은 지금도 원고지와 만년필을 고집하고 있다. 또 부산대 임종찬(57·국어국문학과)교수는 “한장한장 넘어갈 때의 쾌감 때문에 원고지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컴퓨터에 의한 글쓰기의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원고지를 고집하는 이들은 “컴퓨터가 문명의 이기(利器)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랜기간 습관 때문에 종이와 펜을 가지고 쓰는 것이편하다”고 말한다.임교수는 “핑계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컴퓨터를 이용하면 자신도 모르게 문장이 단조롭고 기계화돼글이 무미건조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한글 타자기가 등장한 것은 40여년 전이지만 통계로 볼 때 80년대 초까지도 신문·잡지사 등에서 공모하는신춘문예와 외부 원고를 타자로 쓴 것은 채 10%도 넘지 않았다.당연히 육필원고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가장 흔했던 것이 200자 원고지.신문사에선 나름대로만든 원고지도 있었지만 전업 작가들은 400자나 1,000자 같은 원고지도 많이 썼다. 이같은 전업작가나 선배 기자들의 육필 원고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휘갈긴 악필도 많았다.특히 한자를 섞었을 경우에는 고전문을 해독하는 것처럼 어려움도 뒤따라 상당한 노하우가 있어야 했다. 신문사의 수습이나 초년병 기자가 쓴 원고지는 데스크의 교정과정에서 온통 붉은 사이펜으로 색칠 되기도. 그러나 80년대 후반기부터 컴퓨터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으면서 원고지는 서서히 퇴조했다.또한 90년대 들어 PC통신과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종이와 펜이 푸대접을 받게 됐다. 도서출판 ‘해성’의 김성배 사장은 “요즘도 어쩌다 육필원고를 대하게 되는데 정성은 이해가 되면서도 촌스럽거나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원고지는 이제 학교에서 글짓기 시간에나 접할 수 있을뿐글의 양을 측정하기 위한 단위로 전락돼버렸다. 요즘도 원고를 청탁할 때나 글을 응모할 때 ‘원고지00장 내외로 보내세요’라는 문구를 흔히 볼 수 있다.하지만 이마저 ‘A4용지,B4용지∼’ 등의 말로 대체되고 있어 머지않아 원고지는 사전속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를 운명에 놓였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프로야구선수협, 자문위원 위촉

    프로야구 선수협의회는 22일 서울 홀리데이인서울 호텔에서 자문위원 14명에 대한 위촉식을 갖는다. 자문위원단 명단= 이학래(한양대) 이광택(국민대) 나영일(서울대·이상 교수) 임종석(민주당) 남경필(한나라당) 정진석(자민련·이상 국회의원) 허구연 하일성(이상 야구해설가) 박도영 성민섭 김주영(이상 변호사) 이종남(스포츠서울 이사) 이강원(경실련 국장) 김소식(일구회 회장)
  • 故 임종국선생 ‘친일문학론’ 재발간

    평생을 친일문제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林鍾國) 선생이한일협정 체결 이듬해인 지난 66년 발간한,그의 대표저서인 ‘친일문학론’이 재발간된다.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 준비위(위원장 한상범·민족문제연구소장)는 21일 “최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국제적비난을 사고 있고,국내에서도 친일문학인을 찬양·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이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재발간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친일문학론’ 재발간은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중앙대 겸임교수)가 맡아 원본 ‘친일문학론’을 기초로 국민들이 ‘친일’문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시 풀어쓸 계획이다. ‘일제암흑기의 작가와 작품’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친일문학론’은 이광수·김용제·김동환·백철·모윤숙 등 50여명의 친일문학인과 그들의 작품의 친일성에 대한 해석과 함께 식민지시대 정치·사회적 배경,일제의 문화통치기구,각종 친일단체의 활동 등을 담고 있다.이번에 재발간되는 ‘친일문학론’은 모두 3권으로,1권은 영인(影印) 기념소장본,2권 ‘풀어쓴 친일문학론’은 고등학생 정도의눈높이에 맞춰 연말쯤 나올 예정이다.또 3권 ‘속(續)친일문학론’은 그동안 연구되지 않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대학생 및 지식인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해 내년 3월 1일쯤 발간할 계획이다. 임 교수는 “친일문학론은 당시만해도 일종의 금기였던‘친일’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 한국 현대 지성사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으며,현재도 친일문제 연구에 일종의 바이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일문학론’은 한때 임종국 선생과 같은 출판사에 근무했던 허창씨의 평화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초판 2,000부가운데 절반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80년대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로 부각되면서 이후 수 차례 재판발행을 거듭해 왔다. 정운현기자 jwh59@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3)지조와 훼절

    파인과 최정희의 연애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강력한 방해자로 등장한 인물이 시인 김종한(金鍾漢,1914∼1944,일부 문학사전에는 1916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착오임)이었다.‘문장’지를 통해 정지용으로부터 “경쾌한 코닥 카메라 취미”의 “명암이 적확한 회화”란 평을 들으며 그는 1939년 보무도 당당하게 등단했다.이미 그는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한 경력에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1937)이란 후광까지 입었던 터라 정지용 사단인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이한직·박남수와 더불어 시인으로서의 앞길이 창창한 유망주였다.“조금 더,단 1년만이라도 오래 살았더라면 ‘청록집’은 4인 시집이 되었을지 모른다”(大村益夫 ‘윤동주와 한국문학’ 중 ‘김종한에 대하여’)고 할 정도로 암흑기 그의 시는 돋보였다.고향이 파인과 같은 함북 경성(鏡城)이었다는 사실을상기하면 필시 배신자는 고향에서 나온다는 말이 맞을까. 김종한은 최정희에게 끈질기고 추잡하며 노골적이고 야성적인 글을 끊임없이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신당동 집으로 찾아가기까지 했던근대 한국문단 ‘스토커’의 챔피언급이었다.그는 삼천리사와 신당동 두 곳으로 여러 형태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사연은 노골적인 사랑의 고백이자,위협이고 유혹인데한글과 일어를 뒤섞어 썼다.“승녀(僧女)는 되지 마시기 바라오며”란 구절을 미망인에게 함부로 한 걸로 볼 때 그는진작부터 최정희에게 깊은 연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나는 고독한 시계입니다.당신은 내 안의 진자(振子)입니다”는 고백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고,“두 번 주신 엽서에 의하면생존본능의 정력이 소모된 듯한 표정이 보이는 고로 근심하고 있습니다.피차 일반이기도 하려니와,나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깨트려 가려는 자세를 강조하기로 결심했습니다.이것이 연애편질 수가 있다면 나는 좀더 행복자였을 텐데”에 이르면 매우 노골적이 된다.즐겁게 지낸다는 최정희의 편지에 대하여 애인이라도 생겼는지 걱정이라고 덤비는 김종한의 방자함은 한계가 없다.“좋은 동무를 얻었으니 반생이나 동반하려고 공상하지 않은 바도 아니었는데--벌써 절교의 자세를취하십니다 그려.크게 반성하시고 회신을 주시기 바라오며,동경은 오늘도 비가 옵니다.참,”이란 글로 미뤄 보면 어지간한 스토커였던 것같다. “애기(지원,어렸을 때 아란으로 부름.1942년)가 났다지요? 애기 어미는 아마 고양이가 낙태한 듯한 거룩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추측하오며,여하간 크게 축복지지(祝福之地).여무언야(餘無言也)”란 편지를 보낸 이 시인에게 아무리 사람 좋은 최정희인들 고분고분하진 않았을 터이다.이내 절교장을 받은 듯 “이제는 신사로 대접해 주세요”라는 애원조가되지만,“지금 떠나갑니다.명년 춘삼월,다시 뵈올 때까지,연애도 많이 하시고 소설도 많이 쓰시기 바라오며”란 야유가또 등장한다. 이렇게 끈질겼던 김종한은 대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었던가.일본대학 예술과 학생 때부터 부인화보사(婦人畵報社)에 아르바이트로 나가다가 졸업(1939) 후 정식직원이된 그는 고구려 문인 을파소(乙巴素)를 필명으로 삼았다가‘달밭집’(月田茂)이라는 고향의 택호를 창씨개명으로 정한 괴짜였다.“순수하고 자아가 강한 만큼,서울에 나와서도 가는곳마다 충돌하여 문단 동료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했다.그는 1942년 도쿄로부터 귀국,‘국민문학’ 편집을 맡았는데,한 때(1943.5)는 경성일보 기자였던 유명한 재일동포 작가김달수(金達壽)와 종로구 사간동 같은 집에 하숙을 하며 가깝게 지냈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은 김종한을 일언지하에 친일파로 몰아댔는데 오무라 교수는 그가 싱가포르 함락을찬양했던 친일시를 예술성이 없다고 몰아친 용기나,“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온돌에 누워 있어도 훌륭한 황민이 될 수 있다”(좌담 ‘국민문학의 방향’)고 한 말을 주시한다.‘국민문학’에 1년3개월간 근무하다 사직한 그는 정지용을 비롯한 토착적인 민족정서가 강한 홍사용·백석·김동환·주요한·유치환 등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려 진력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이루지 못한 연애처럼 그의 문학적 위상 또한아직도 중음신으로 떠돌고 있다. 시인이라고 다 김종한처럼 경박하지는 않다.그 반대편에 이육사(李陸史)의 편지는 무게를 보탠다.이 강철의 투지를 지닌 대륙적 남성 시인은 절친했던 이병각(李秉珏)시인 부부가 폐병으로 눕자 아예 동거하며 주위의 만류를 듣기는 커녕자신이 피하면 친구가 병이 더 심한 줄 알고 불안해 한다며오히려 가까이 지냈다.1941년은 그에게 액운의 해였다.이병각과 부인의 장례를 다 치른 그는 부친상까지 당했다.너무쇠약해 졌음을 느끼고 여기 저기 요양을 다닌 건 1942년이었는데,항상 바빴던 그에게 여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건강의 악화 때문이었다.최정희에게 보낸 ‘무량사(無量寺)에서’란 편지는 이 무렵의 글일 터인데,대체 무량사란어떤 절인가.김시습이 난세를 피해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의탁했던 곳이다.“백제란 나라는 어디까지나 산문적이란것을 말해줍니다”는 함의는 무엇일까.신라의 지배계급 문학이었던 향가와는 달리 백제의 전설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설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뜻일까.“깨어져 와전(瓦)을 비치고 가는 가냘픈 가을 빛살을 이곳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는모양”이라고 나라 잃은 몽매한 백성들을 안타까워 하면서,“무량사만은 오늘 저녁에도 쇠북 소리가 그치지 않고 나겠지요”라고 문학인의 사명을 쇠북소리에 빗대어 토로하는 이 행동주의 시인의 심경을 꿰뚫어 보라. 이 삭막해 보이는 민족해방투사 시인에게도 연인이 있었던가.모든 선진 사상을 흡수 실천했으면서도 정작 가풍을 좇아 조혼으로 결코 행복스럽지 못했던 부부생활이었던 이육사. 신석초는 “그에게도 단 한 사람의 비밀한 여성이 있었다는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다”(신석초 ‘이육사의 인물’)고 귀띔했지만 그게 누군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너는 무삼 일로 사막의 공주같아 연지 찍은 붉은 입술을내 근심에 표백된 돛대에 거느뇨 /오--안타까운 신월(新月)”(‘해후’)이라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를 닮은 시가바로 그녀를 그린 작품이라 전한다.비밀결사 대원답게 그는영원히 자신의 연인을 철저히 숨긴 채 친구가 옮겨준 폐병으로 쇠잔해져 자신이 동양의 파리라며 동경했던 도시 북경에서 옥사했다.지조와 사랑은 일치하는 것일까. 이육사와는 사뭇 다른 사랑의 실천자에 이효석이 있다.“이효석씨 하고는 그가 결혼하기 전부터 가깝게 사귀었다.…수송동 그 방에다 살림을 꾸미고 여기서 먹고 자고 했는데,얼마 안돼서 부인이 친정으로 가고 그 방에서 나는 칼도마질이랑 하는 여자를 목격할 수 있었다.…이효석씨는 ‘칼도마 위의 여자’를 ‘넥타이 갈아매는 기분’으로 사귀었다고 나중에 부인에게도,내게도 말했다”(최정희 ‘조광·삼천리 시절’)는 대목은 유명한 문단 야사의 한 토막이다.자신의 바람기까지 익히 알고있는 최정희에게 이효석은 마음 놓고 편지로 모든 아픔을 털어 놓는다.경성제대의 수재였던 그가 18세의 이경원과 결혼하자 호구지책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는데 입 빠른 평론가 이갑기(李甲基)가 “너도 개가됐구나”라고 모독하자 파인의 고향 경성 농업학교 교사로내려갔다가 평양 숭실전문 교수로 자리를 바꾼 게 1934년.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이 1938년 폐교당하자 대동공업전문학교로 옮겼는데,편지는 이 내역을 말해준다.메밀꽃 분위기보다는 장미,된장보다는 버터를 더 사랑했던 이 수재는 편지에서 보듯이 함북 주을(朱乙)온천을 끔찍히 좋아했다.길명지구대란 명승과 함께 68도의 라듐이 내뿜었던 전국 1위의 이휴양지가 이국취향의 유미주의자 이효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아내가 죽은(1940) 뒤 실의에 빠진 모습이 편지에 역력히 나타나있는데,그 자신도 1942년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꼭 편지에 깊은 뜻이 담긴 것만이 중요하진 않다.화가 김환기(金煥基)의 풋감 그림이 싱싱한 편지는 내용에 못지 않게글씨 자체가 예술품이다.문인과 화가의 관계가 늘상 가깝듯이 김환기도 그림 재료를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김동환·최정희를 조우했었는데,헤어져 전차에 올라 생각해 보니 최에게는 건강 안부를 놓쳤고,김은 화가 이종우(李鍾禹)로착각하고 인사를 했다는 고백이다.이 편지는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다.김환기가 이종우로 알고 인사를 한 뒤 헤어져서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동환’이었다는 사실은 뇌리에 최·김 둘이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을 개연성도 있다는 묘미가 느껴진다.사람을 몰라 봤던 데 대한 사과의 편진데 이럴 경우 대개는 어물쩍 넘기는 게 오히려 예의일 듯 하건만 굳이밝히면서 다음에 만나면 오토밀이라도 사 드리겠다는 화가의 진솔성이 애교롭다.김환기가 눈치를 챘든 않았든 이 무렵은 파인과 최정희가 꽤나 깊어졌던 때일 것 같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8·15특집 한일 관계 갈등을 넘어/ 친일논의 현재적 의미

    친일논쟁의 끝은 과연 언제쯤일까. 광복 56년을 맞은 오늘날까지도 ‘친일논쟁’은 그칠 줄모르고 거듭되고 있다.이해당사자간에 치열한 공방을 벌이지만 뚜렷한 결론도 없고,논쟁이 정리되지도 않은 채 끝나곤 한다.겉으로 보기에는 소모적이고 분열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친일논쟁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라는 점에서 이른 시일안에 매듭지어져야 할 사안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친일논쟁중 가장 크게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사안은 박정희 전대통령과 미당 서정주 시인을 둘러싼 논쟁이다.이들둘을 둘러싼 논쟁은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불거졌다. ‘박정희기념관’의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직 그에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기념관을 짓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또 중앙일보가 추진하고 있는 ‘미당문학상’의 제정을반대하는 사람들은 미당의 문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친일경력 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이와 관련,강창일 배재대 교수는 “특정인물의친일행적을 둘러싼 논쟁을특정인에 대한 비방으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어 논의 자체가 진지하게 이뤄진 경우가 드물었다”면서 “시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논쟁은 불가피하며 이를 비난으로 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실제로 박정희 전대통령과미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친일행적을 아예 도외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현대사 연구자는 “대중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인물일수록 역사적·민족적 평가는 엄정해야 된다”고 전제하고 “특히 식민지시대를 겪은 현대인의 경우 그가 친일 활동을 했는지 여부는 인물평가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잣대”라고 말했다. 거듭되는 친일논쟁에 대해 ‘전국민의 친일파론’을 들고나와 친일논쟁의 논점을 흐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최근 소설가 이문열씨는 조선일보와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일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친일파가 되지않았다는 보장이 없다는 주장을 펴,그의 역사인식 자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친일문제연구가인 고 임종국씨가 “친일인사들은친일행적을 희석시키기 위해 친일문제를 전국민적 차원으로 걸핏하면 확대시킨다”고 지적한,그런 현상을 나타내는것이다. 흔히 친일논쟁을 소모적인 ‘비난전’으로 보는 사람들은공정한 평가 잣대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엄격히 말해 적절치 못하다는 게 학계의다수설이다. 많은 학자들은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이 하나의 기준이라고 본다.다만 이 법에따라 구성된 반민특위가 활동 도중 와해됨으로써 평가(단죄)의 잣대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친일논쟁을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자신이나 선대의 친일행적을 사죄하는 경우도있다.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 박사는 자신이 일제말기군수를 지낸 사실을 수차례에 걸쳐 글과 강연을 통해 민족앞에 사죄했었다.또 친일문인인 파인 김동환 시인의 3남김영식씨는 선대의 친일행적을 공개 사과했었다.2공화국당시 국방부장관을 지낸 현석호도 회고록에서 친일행적을사죄하기도 했다.독립운동가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인간에게 과오는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이를 참회하고 사죄할 줄 아는 것”이라면서 “친일인사 역시 민족앞에 사죄한다면 화해의 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새천년의 입구에서 과거사에만 매달리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그러나 이는 우리나라가 중국 등 아시아국가나 프랑스 등 유럽과 달리 ‘역사청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국민적 합의를 통해 친일논쟁을마무리짓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단죄의 대상자들이대다수 사망해 법적 청산은 불가능하게 됐지만,대상자들의친일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역사적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2)삼천리사와 최정희

    ‘삼천리’사 김동환에게 찾아갔을 무렵의 최정희는 매우어려운 처지였다.“저쪽에서 인적 사항에 대해서 물어올 때어떻게 대답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처녀 행세를 하면서까지 직업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법률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미 남의 아내로서 임신까지 하고 있는 사실을,남을 속이기 위해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서영은,‘생의 태풍 속을 무구한 노(櫓)로’)는 표현 그대로의 심경이었다.연보마다 틀리기에 바로잡기가 쉽지 않은최정희의 젊은 시절은 중앙보육학교 졸업 후 경남 함안유치원에 잠시 근무,곧 도일(1929),도쿄에서 유치원(三河)에 근무하면서 유치진·김동원이 주축이었던 ‘학생극예술좌’에참여,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유영과의 사랑과 결혼으로 점철된다. 1907년 선산에서 태어난 김유영은 대구고교(현 경북고)에서 서울 보성고교로 전학,졸업(1925) 후 ‘조선영화예술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 중 영화촬영소와 기술 견학을위해 1929년 도일,귀국하여 최정희와 결혼한 것은 1930년 3월 5일이었다.부부관계와 경제적 여건이 다 나빴던 최정희는 1931년 9월부터 ‘삼천리’사에 근무하면서 한국문단의귀염둥이로 부상했지만 그 운명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당장 아들 익조(益祚,1932.3.5∼1974.9.27)를 낳고자 근무 6개월만에 퇴사,출산 석 달 뒤 재입사,또 퇴사를 거듭하면서카프 제 2차 검거로 전주형무소 투옥(1934),조선일보 출판부를 비롯한 잡지사를 전전하다가 1938년에 ‘삼천리’에재입사했다. 최정희는 이 무렵의 참담했던 생활 속에서도 낙천성으로많은 문인들과 문학지의 기자라는 신분으로 폭넓은 교우관계를 가졌는데,역시 그 중심에는 파인 김동환이 위치한다. 아명이 삼룡(三龍)이었던 김동환은 ‘삼국지’의 패장(覇將) 유비(劉備)가 파촉(巴蜀)에서 대망을 이뤘다는 고사에서“인세(人世)의 고행이란 고행의 맨 밑바닥 길을 순교자와같은 걸음으로 묵묵히 파 들어가 보자”(‘독자 제현에 보내는 편지’)는 취의를 가진 ‘파인’을 아호로 삼았다.그는 고행자처럼 독학으로 자수성가,문화분야 뿐이 아니라 사회부의 명기자로 나도향·김팔봉과함께 이름을 떨치며 언론자유를 위한 철필(鐵筆)구락부,노동운동 현장 취재 등에투신했다.1929년 9월 12일∼10월 31일간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할 때 총독부는 공개적으로 기자들에게 2천5백원(당시 쌀 한가마에 13원이었다)이란 촌지(寸志)가 아닌 거지(巨志)를 분배했는데, 여기에다 도쿄 관광에 안 간대신 현금으로 챙긴 돈으로 파인은 ‘삼천리’를 창간했다. 아호 ‘파인’에 걸맞게 고행의 인생행로를 선택했던 그가홀연히 “파촉 정신은 이제는 싫어졌습니다”면서 “내 몸에 정열이 있으니,이 정열이 끄는 대로 자꾸자꾸 먼 곳으로훨훨 날고 싶습니다”(위와 같은 글)는 구실을 달아 ‘취공(鷲公)’으로 호를 바꾼 게 1937년,즉 중일전쟁이 나던 해정초였다. 이어 1939년 11월 10일 총독부령 제19호 민사령(民事令) 개정으로 촉발된 ‘창씨개명’ 때 김동환은 강릉김씨 문중이 결정한 가나에(金江)란 성 대신, 시로야마(白山靑樹, 태백·소백의 푸른나무란 뜻)로 정했는데 그 속내는 이해됨직하다.‘삼천리’는 사세가 어려워져 ‘삼천리문학’(1938년에 2집 발간)은 아예 정간했고,사업 확장을 위해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시도(1940)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정진석 ‘언론인 파인 김동환’).그런 와중에도 최정희에게 위로차 휴가를 줬을 테고,그녀는 내키지 않지만 석왕사(釋王寺)로 떠나,여관에서 파인에게 편지를 보낸 건 1939년인 것 같다.“피서라고 하오나 제 마음은 도무지 한가하지 못합니다.…종종 좋은 자연조차 잊어버리고 멍하니 앉아서 비오는 밖을 내다보는 일이 있습니다”는 구절은 최정희의 착잡한 심경이 표상된다.인정 후한 파인은 우선 최정희에게 두둑한 여비도 못 줘서 보내 놓고는 곧 돈을 마련해부치마고 약속했는데,“이렇게 비가 와서는 오래 못 있을것” 같기에 “부쳐 주신다던 것은 조금도 염려 말아 주십시오”,“금강산이랑 부전고원(赴戰高原)이랑 죄다 보기로했는데 틀린 것 같습니다”는 언급이 저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문맥으로 보면 예사롭지 않은 낌새는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둘 사이가 밀착한 것 같지는 않는데,이런 미묘한 감정적인 교류는 1940년 12월 진주에서 파인이 최정희에게 보낸엽서에도 그대로 드러난다.“촉석루도 서장대도 논개사(論介祀)도 일순(一巡)하고 부윤(府尹·현 시장)의 안내로 지금 여사(旅舍)에 앉은 자리외다.옛 고적이 어떻게도 많고,또 마음을 흔드는지요”란 구절에 담고 싶었던 속마음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오른쪽에 남강을 끼고 왼쪽 촉석루가바라보이는 풍경은 비록 대일본제국이 만든 2전짜리 엽서일망정 망국의 한을 품기에 모자람이 없다. 더구나 파인의 발길은 단순한 소일이 아니었다.1939년 10월 29일 오전 10시40분 부민관(府民館·현 서울시의회 청사) 중강당에서 결성된 ‘조선문인협회’는 이듬해 12월 ‘총후(銃後)사상운동을 위한 전선(全鮮)순회강연회’를 열기로 했다.제1반(경부선)은 파인·유진오 등이 참가,부산(12월 8일),마산(9일),진주(10일),대구(11일),청주(12일),공주(13일)를 순회했고,제2반(호남선)은 정인섭·이헌구 등,제3반(경의선)은 백철·최재서 등,제4반(함경선)은 이효석·함대훈 등이 참여했다(임종국 ‘친일문학론’). 김동환의 시국강연은 여러 정황으로 볼때 선동적이기보다는 인정미에 초점을 맞춘 대중위무(慰撫) 형식이었다는 게정평이었지만,‘삼천리’를 ‘대동아(大東亞)’로 개제(1942년 3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하는 등 잡지와 단체의 역할때문에 개인적인 미덕이 평가절하 당했다.이 무렵 파인은안서 김억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울에 빈 객사가 많으니 1인의 괴테,1인의 소크라테스가 나와서 우리 젊은이 갈길 가르쳐 좋을 때 아니리까.”(‘삼천리’ 1938.10)라는 내면적인 갈등을 담아내고 있는데,문학인의 내면적인 고뇌가 일상성으로부터의 일탈을 유도하는 예는 허다한지라 최정희와의관계도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의 점강법을 탄 것으로 보인다.이에 비하면 최정희는 매우 낙관적이다. 그녀는 처음 ‘삼천리’에 입사(1931)했을 때 사무실엔 전화기가 없어서 원고 청탁은 직접 방문이나 편지로 이뤄졌다고 회고하면서 몇몇 재미있는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조광·삼천리 시절’). 바로 이 말을 뒷받침 주는 글들이 박태원, 이태준의편지이다.둘 다 정동 ‘중앙방송국 최정희 선생’으로 보낸것인데, 1940년 5월부터 그녀는 방송국 제2방송부에서 일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삼천리’원고청탁인가 하고 의아할 것이지만,여전히 파인의 일을 함께 했던 것으로보인다. 회고록에서 최정희는 이태준과의 관계를 맨 먼저꺼낸다. 최정희는 입사(1931) 직후 이태준에게 소설을 청탁(단편‘불우 선생’이 ‘삼천리’ 1932.4월호에 게재)한 이후 여러차례 편지 왕래가 있었음이 드러난다.이태준은 그녀에게 성북동 248번지(지금의 상허문학관.1933년 이곳으로 이사,1943년 철원 안협으로 낙향했다가 8·15후 상경하여 이듬해 여름 월북할 때까지 거주)에서 최정희에게 편지를 썼는데, “언문소설 꾸준히 쓰셔야 합니다”란 끝구절이 인상적이다. 최정희와 이태준의 친밀성을 알려주는 임옥인의 편지를 이대목에서 함께 읽는 게 좋을 듯하다. 그녀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주소가 세 가지로 나뉜다.‘신당동 304의 152’와,삼천리사,그리고 ‘동숭동 5-1’인데,맨 뒤의 것은 1949년 1월 20일∼1957년의 최정희 거주지이기에 해방 후 편지들이다.문제는 앞의 두 주소인데,여러 정황으로 볼 때 최정희가 방송국과 삼천리사 일을 동시에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또 “언젠가 원산여관(바로 파인에게 편지를 썼던)에서만나 뵈온 후 글이라곤 처음으로 올리게”되었다는 구절로봐서 이 편지가 1940년 4월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임옥인은 함북 길주 출신으로 나라여고사(奈良女高師,여자사범대학) 시절부터 습작을 하면서 ‘문장’지로 등단하고싶다고 보챘는데,최정희는 흔연히 이태준에게 소개해 줄 정도로 가까웠으며,그 효험도 있었던 것으로 편지에 드러난다.물론 이태준은 작품선정이 까다로워 고쳐 쓰게 했는데,특이한 것은 3회나 추천을 거치도록 등단 관문이 까다로웠다는 점이다.박태원과 최정희의 옥상 노래자랑 일화는 너무유명하다.하도 노래 잘 한다고 뽐내기에 내기를 먼저 신청한 쪽은 최정희였다.출근 시간에 맞춰 나타난 박태원과 옥상에 올라가 서로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를 몇 시간,드디어 남자 쪽이 패배를 자인하여 다과점에서 푸딩을 샀다는회상기를 연상하면서 그의 편지를 읽으면 더 운치가 있을것이다. 박태원은 교북동에 살다가 바로 1940년 ‘돈암동 487-22’에다 대지를 사 집을 지어 이사했기에 미처 원고를 쓸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25때 월북,학창시절의 친구 정인택의 미망인과 재혼(1955),중풍으로 전신불수와 실명 사태(1977)에서 대작 ‘갑오농민전쟁’을 남긴 그는 한국의밀턴이란 칭송을 받을만 하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靜中動 여름정국] (5)소장파의 정국 해법

    “여야가 너무 일찍 대권 프로그램을 가동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은지 이제 1년 남짓 지난 초선의원의 정국 진단은 예상보다 명쾌했다.숱한 고민을 한 흔적이 묻어났다. 3일 민주당 임종석(任鍾晳) 의원은 “여야 지도부가 내년대선을 지나치게 의식, 모든 정치 현안들을 선거에 유리한지 불리한지에 맞춰 대응하다 보니 한치의 양보없는 싸움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평소 심각한 표정의 한나라당 김영춘(金榮春) 의원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경색정국이 답답한 듯 이날은 얼굴이더 굳어 있었다. 김 의원은 ‘여당 책임론’에 무게를 실었다.“지난 해연말부터 정권의 지지율이 떨어지다보니 현 정권이 자꾸무리수를 두게 되면서 정치불안이 심화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민심을 수습하는 길은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데도,여권이 오히려 강경 대응을 해온 것이 진짜 문제가됐다”고 강조했다.이에 따라 야당도 살아남기 위한 차원에서 강하게 저지막을 치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됐다는 게그의 분석이다. 물론 소속 당을 향한‘쓴 소리’도 빼놓지 않았다.김 의원은 “야당도 생존의 논리에만 사로잡혀 과도한 추측이나극단적 표현으로 지나치게 대여 공세를 취한 것이 정쟁을더욱 부추기게 됐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임 의원은 “양비론을 펴고 싶지는 않지만…”이라면서도 여야 모두에게 ‘진실한 노력’을 촉구했다. 먼저 “여당은 소수정권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야당에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며 자기 당에 고언을 던졌다.“정무수석이나 장관들이 중요 현안이 있을 때 직접 야당의 총재나 정책위의장을 찾아가는 노력만 보여도 사태는아마 많이 달라질 것이다” 야당에는 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그는 “야당이 너무빨리 대권 프로그램을 가동했다는 느낌”이라며 “이렇게매 사안마다 지나치게 정부를 흔들면 결국 손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임 의원은 단적인 예로 “전세계가 인정하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까지 야당이 냉전논리로 딴죽을 걸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의원은 “여야가 하루 속히 ‘자유투표제(cross voting)’를 도입,당론을 최소화하고 의원 개개인의 소신을 극대화하는 것도 정쟁을 줄일 수 있는 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상연 이지운기자 carlos@
  • ‘8·15’ 때 쇄신책 없나

    지난 5월말 집단으로 당정 쇄신을 요구했던 민주당 소장파들이 8·15를 전후 대다수 외국에 머물 예정이어서 그배경이 주목된다. 이는 소장파들이 8·15를 앞두고 삼삼오오 모임을 가지면서 긴장감을 높일 것이란 당초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오히려 무심하다는 느낌을 준다.이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8·15 광복절 때 인적 쇄신을 포함한 당정쇄신 방안을발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과도 무관치 않다. 2차 쇄신 성명을 주도했던 천정배(千正培) 의원은 지난달 30일 가족과 유럽으로 휴가를 떠났으며,광복절 이후인 18일에야 귀국할 예정이다. 소장파의 쇄신 요구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도 오는 11일부터 22일까지 호주와 뉴질랜드를 돌며 인터넷사업을 시찰할 계획이다. 1차 성명에 참여했던 정장선(鄭長善) 의원도 이달 중순휴가를 떠난다.김태홍(金泰弘) 의원은 지난 1일 출국,오는8일까지 미국 뉴욕의 친지 집에 머물 계획이다. 송영길(宋永吉) 의원은 다음주 ‘단식요가원’에 들어가건강을 추스르기로 했으며,신기남(辛基南) 의원도 비슷한때 휴가를 간다. 임종석(任鍾晳) 의원은 성명파에 반대했던 정균환(鄭均桓) 총재특보단장 및 김민석(金民錫) 의원 등과 함께 오는 21일 미국 의회를 방문할 계획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8·15 때 별다른 당정 쇄신책이나오지 않을 것이란 점을 미리 감지한 소장파들이 추가 행동에 대한 여론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리를피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주춤해지는 ‘개혁연대’/ 김근태·노무현 제갈길 가나

    차기 대선과 관련,민주당내 ‘개혁후보론’의 중심 인물로거론되며 연대 가능성이 점쳐지던 노무현(盧武鉉)상임고문과 김근태(金槿泰)최고위원이 상반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노 고문은 소장파와의 거리를 더욱 좁히며 개혁 이미지 제고작업에 속도를 내는 반면,김 위원은 ‘개혁’이란 단어에서 얽매이기 보다는 다른 그림을 그리려는 자세가 역력하다. 이에 따라 ‘노-김 개혁연대론’도 주춤해지는 형국이다. 노 고문은 오는 7일 개혁파 모임인 ‘바른정치실천연구회’의 천정배(千正培)·신기남(辛基南)·정동채(鄭東采)·임종석(任鍾晳)의원 등과 골프를 치며 우의를 다지기로 했다.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천 의원 등 몇몇 개혁 소장파 의원으로부터 비롯된 지지세를 확산시키려는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노 고문은 31일 불교방송에 출연,“나는 동서화합과 민주세력 대연합,계층간 갈등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접점’에 서 있다”는 ‘접점론’을 제시하며 자신이 대선후보로 가장 적임이라는 주장을 거듭하기도 했다. 반면 김 위원은 이날 기자들과만나 “우리 사회를 개혁 대 보수로 가르는 논리에 반대한다”며 ‘개혁연대론’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김 위원은 “지금은 개혁에 집착할 게 아니라 지역주의 청산과 부패추방 등에 힘을 모아야 한다”며 기존의 ‘신(新)민주연합론’을 다시 들고 나왔다. 김 위원은 특히 “한나라당의 정체성은 반(反)개혁적이라기보다는 정쟁적·퇴영적으로 보는 게 맞다”는 말까지 동원할 정도로 ‘개혁’이란 슬로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와 관련 정치권에서는 “개혁연대론이 나온 이후 김 위원이 노 고문 쪽으로 흡수되는 국면으로 가자 김 위원이 손을뿌리치는 것 같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상연기자 carlos@
  • 8월의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으며,한국애국부인회 재건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鄭靖和)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3.1만세운동 후인 1920년독립운동단체 대표이던 시아버지와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이후 31년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정에 전달했다. 22년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기도 한 선생은 일제의 패망으로 1946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왔다.당시 임정 요인 가운데 선생이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이가없었다.이동녕 선생이 중국 사천성에서 외롭게 숨질 때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43년에는 임시정부내 좌우익 통합을 위해 여성 차원의 민족통일전선인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는데 주요 역할을 하기도 했다.광복 이듬해 귀국한 선생은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김구(金九) 선생의 노선을 지지했다.정부는 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與소장파 ‘개혁연대’ 추진

    민주당내 핵심 개혁소장파 의원들이 개혁성향의 여당 대선후보 옹립을 최종 목표로 한 범개혁세력 모임(가칭 ‘개혁연대’) 결성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여권내 대권후보 선정을 둘러싼 세력간 힘겨루기가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임종석(任鍾晳) 의원은 26일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온 개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차기 대통령은 반드시 개혁성향의 인물이 돼야 한다는 데 당내 상당수 의원들이 공감하고 있다”면서 “개혁성향 의원들이 하나로 결집,그 힘으로 대선후보를 밀 수 있는 공식모임을 만들기 위해 의원들을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초선급에서는 임 의원과 이재정(李在禎) 의원이,재선급에서는 신기남(辛基南) 의원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으며,향후 장영달(張永達) 의원 등 3선급 이상도 가세할 것으로관측된다. 임 의원은 “당장 당내에 산재한 여러 개혁모임,즉 바른정치실천연구회·열린정치포럼·국민정치연구회·13인 모임·여의도정담·젊은 한국·대안과 실천 소속 의원들을 한 데 아울러 모임을 출범시키더라도 50명선을 확보할수 있다”면서 “이 정도면 당내 후보 경선에서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애드벌룬 띄운 여권 개혁파

    임종석(任鍾晳)의원 등 민주당의 핵심 개혁성향 의원들이범개혁세력 모임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성사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여권내 대선후보 선정을 둘러싼 세력다툼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개혁파의 구상= 개혁파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혁성향 후보를 여당의 대선후보로 선출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런 속내를노골화하는 것은 당장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다. 26일 김태홍(金泰弘)·김성호(金成鎬)의원 등이 천정배(千正培)의원의 ‘개혁후보론’에 대해 “당력을 분산시킬 우려가 있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같은 이유로 풀이된다. 따라서 당분간은 ‘언론개혁’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개혁과제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힘을 모으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연대의 필요성을 높여나가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상당수 개혁파 의원들은 지난 6일 47명의 개혁성향 의원들이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에 무척고무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표는 대선후보 배출= 500명선의 모임을 결성하면,그 다음은 무시못할힘을 행사할 수 있다.일각에서는 민주화세력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김근태(金槿泰)최고위원을 모임의 대표로,노무현(盧武鉉)상임고문은 고문으로 위촉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기하고 있다.그리고 이 두 사람 가운데 당선가능성이 높은 쪽을 최종 후보로 민다는 것이다. ■성사 가능성 있나= 현실적으로 50명선의 거대 모임 결성은불가능하다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같은 민주화세력 출신이라고는 해도 의원마다 이해관계가 조금씩 다른 데다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냄새를 풍기는 모임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꺼려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실제 이해찬(李海瓚)·임채정(林采正)의원 등은 모임 가입을 권유받고 있으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도 서울시장과 대선 출마 사이에서 아직결정을 못내려 선뜻 응답을 안하고 있다고 한다. ■파장= 개혁 세력이 결집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외세력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특히 ‘대세론’의 이인제(李仁濟)최고위원측에서 시큰둥한 반응이다.이 위원측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니 판을 키워줄 수가 있고,가만히 있자니자칫 판도가 바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상연기자 carlos@
  • [전통주 이야기](12)부산 금정산성 막걸리

    ‘항우 장사도 세 주전자를 비울 수 없다’는 게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다.금정산성 막걸리는 부산 금정구 금성동의산성마을에서 250여년 내려 온 전통 술이다. 막걸리는 고을마다 있을 정도로 많지만 민속주의 반열에들어선 것은 금정산성 막걸리가 유일하다.대한민국 민속주1호로 지정됐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주민들이 출자한 막걸리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8도 짜리 막걸리와 집에서 빚는 가양주가 있다. 집에서 빚는 산성 막걸리의 맥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산성마을 우물집 박경숙(朴京淑·44)씨는 전통 양식대로 누룩과 고두밥,물 3가지 재료만으로 제조한다.우물집에 들어서면 은은하고 구수한 술익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우물집의 산성막걸리는 14도쯤 된다. 재래종 밀을 섞어 만든 누룩을 황토방에서 회색 누룩꽃이보일 때까지 보름가량 띄우고 일반미 고두밥을 준비하면 준비는 거의 다 된 셈이다.박씨는 “껍질이 두꺼운 재래종 밀로 누룩을 만들어야 제맛이 나지만 재배 면적이 줄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커다란 독에다 고두밥과 누룩을 비벼섞어 발효시키면 밑술이 된다.인공 발효제는 전혀 쓰지 않는다. 여름철에는 4∼5일,겨울철에는 1주일 가량 지나면 거품이보글보글 끓어오르면서 밑술이 발효된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조선 숙종때(1750년) 금정산성을 다시 고쳐 쌓을 때 힘을 돋우기 위한 농주(農酒)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시대에는 산성에서 막걸리 빚는 양에 따라 인근의 곡물값이 오르내렸을 정도였다.60년부터 주세법상 누룩 제조가 금지돼 밀주로 단속되기도 했으나 80년 민속주 1호로 지정되면서 고유한 맛이 끊어지지 않았다. 산성 막걸리는 숙취에서 오는 두통이 없지만 장기간 보관할 수 없는 게 흠이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임종찬 부산대 교수의 맛평가. “술은 우선 눈으로 맛보고 그 다음 혀로 맛보는 것입니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30년이 넘게 산성 막걸리에 젖어 산다는 부산대 국문학과 임종찬(57) 교수는 “산성 막걸리는 백문불여일음(百聞不如一飮)으로 한번 마셔보지 않고는 진맛을 모르다”고 자랑했다. 산성 막걸리는 툭툭하고 약간 뻑뻑하게걸러지는데 눈으로척 봐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고 혀끝에 대지르는 알싸한진한 맛이 가히 일품이라는 것이다. 산성술은 막걸리 보다는 술독에서 그냥 떠올린 징주(澄酒)가 매운 맛이 더하고 향이 진하므로 술깨나 마셔 본 사람은산성술 그것도 징주를 즐겨 찾는다고 일러준다. 부산 이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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