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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 송정헌 여사 별세

    애국지사 송정헌 여사 별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경호원 유평파 선생의 아내인 애국지사 송정헌 여사가 지난 22일 중국 난징(南京)에서 별세했다. 91세. 1919년 중국 항저우에서 중국인으로 출생한 여사는 1937년 중국 강서성 노산구강 폐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당시 임정 의정원 의원이자 광복군 군의처장이던 유진동 선생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남편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했고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정부는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해는 귀국 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될 계획이다. 유가족으로는 장남인 유수송씨 등 3남 1녀.
  • [씨줄날줄]인도 女權 혁명/박대출 논설위원

    승당(承堂) 임영신은 여성 장관 1호다.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승당은 대한여자국민당 창당을 주도했다. 최초의 여성 정당이다. 광복 첫해인 1945년 10월3일 창당됐다. 승당은 또 여성 국회의원 1호다.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경북 안동 보궐선거를 통해 등원했다. 여성 당수(黨首) 1호는 박순천 여사다. 1965년 민주당 때다. 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면 방순희 여사가 있다. 그는 1938년 임시정부 의정원 한남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사실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인 셈이다. 반세기를 넘어 여풍(女風) 의 시대다. 정치권도 상승세다. 선두그룹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있다. 박 전 대표는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합쳐서 보면 부녀 당수 1호다. 한나라당 조윤선 의원은 최초의 여성 대변인이다. 이후로 여성 대변인 시대가 열렸다. 조 의원은 두번째 대변인을 그만둘 때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그 기록은 지난달부터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이어가고 있다. 17대 총선 때부터 여성 대변인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됐다. 이제 정당 여성 대변인은 최소한 절반이다. 양적으로 살펴보자. 15대 국회까지 여성 의원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했다. 제헌 의회부터 합쳐봐야 85명. 전체 의원의 2.3%에 그쳤다. 16대 들어 16명으로 처음으로 두 자릿수에 올랐다. 17대는 39명으로 배가됐다. 이번 18대는 41명이다. 전체 의원의 13.7%로 늘었다. 그래도 수적으로 열세다. 인도 상원이 최근 파격 법안을 가결했다. 연방·지방의회 의석 중 3분의1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게 골자다. 14년 표류하다 성사됐다. 다음 주 하원 표결도 무난하다고 한다. 여성 차별이 심한 인도 현실에서 가히 혁명 수준이다. 여성 비율은 연방 하원 10.8%, 상원 8.8%, 지방의원 8.8%에 불과하다. 우리 국회도 최근 공직선거법을 바꿨다. 지방의원 정수의 2분의1 이상을 공천하는 지역에선 여성을 1명 이상 공천해야 한다. 현재 광역의원 12%, 기초 의원 15%가 여성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개정안대로 하면 여성 의원이 8~10%포인트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얼핏 보면 인도에 근접한다. 그런데 허울만 그럴듯하다. 지방선거만 해당된다. 국회의원과는 무관하다. 남성 위주의 국회는 요지부동이다. 하나 더 있다. 여성 후보난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등록한 여성 예비후보는 한 자릿수에 그친다. 광역단체장 4.5%, 기초단체장 3.3%, 광역의원 3.3%, 교육감 6.3%. 여야의 영입 노력이 아쉽다. 물론 더 채우는 건 여성들의 몫이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천주교 100년만에 도마 안중근 품다

    천주교 100년만에 도마 안중근 품다

    도마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도였다. 이토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그는 성호를 그으며 감사 기도를 올렸고, 뤼순 감옥에서 형장으로 나아갈 때도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는 18살에 영세를 받은 이후 마지막까지 신앙을 놓지 않은 신실한 천주교인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주교는 그를 적극 품지 않았다. 십계명의 하나인 ‘살인죄’를 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텔(1854~1933) 주교는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 성사를 원한 안 의사의 요청을 거부했다. 심지어 명령을 어기고 안 의사에게 성사를 베푼 빌렘 신부에게 미사 집전 금지 조치를 내렸다. ●공식미사 외면한 천주교 왜? 그런 천주교가 안 의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해 그의 순국 100주기를 맞아 처음 공식 추모미사를 여는 것이다. 집전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맡았다. 그동안 소규모 미사는 있었으나 교구 차원에서 대규모 추모미사를 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 천주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등을 통해 안 의사의 기독교 정신과 세계평화 정신을 기리는 각종 추모 행사도 함께 진행한다. 순국 100주년 미사는 안 의사의 순국일인 오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봉헌된다. 이 자리에서 정 추기경은 미사 강론을 통해 천주교인으로서의 안 의사를 다시 알리고, 동양은 물론 세계 평화를 꿈꾼 숭고한 정신과 신앙을 기릴 예정이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안 의사를 공식 복권한 것은 아니다. 살인했다는 이유로 공식 파문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파문이 없으니 복권도 있을 리 없다. 대신 한국 천주교는 1993년 김수환(2009년 선종) 추기경이 “일제 치하 교회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과오를 범한 데 연대 책임을 느낀다.”고 한 것을 상징적인 복권으로 여기고 이후 추모 행사를 조금씩 개최하고 있다. ●10월 평양서 남북공동 추모행사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는 25~27일 뤼순 일대 안 의사 관련 유적지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남북한 공동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 남측 기념사업회에서 100명,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위원장 장재언 북한적십자 총재)에서 30명가량이 참석해 공동 미사를 보고 유적지 탐방, 안 의사 평화정신 계승·실천 방안 토론회 등을 이어간다. 윤원태 기념사업회 실장은 “안 의사는 남북 공동으로 추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독립투사”라면서 “오는 10월 의거 기념 행사를 평양에서 공동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회는 홈페이지(www.greatkorean.org)를 통해 사이버 추모 전시관도 운영한다. 천주교평신도 모임인 ‘직암선교후원회’는 뤼순 감옥 인근의 중국 다롄한인성당, 일본 오타시 성당 신자들과 함께 한·중·일 신자가 참여하는 ‘묵주기도 100만단 봉헌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를 묵상하며 드리는 묵상기도는 ‘주님의 기도’ 한 번, ‘성모송’ 열 번, ‘영광송’ 한 번을 1단으로 삼는다. 지난해 10월26일 시작한 봉헌운동은 이달 4일 현재 목표치를 훨씬 넘어 154만 7408단이 누적됐다. 후원회는 인터넷카페(cafe.daum.net/jigammissions)에서 댓글 형식으로 기도를 취합하고 있다. 안 의사 신앙과 사상 현대화를 주제로 한 원고와 서평도 모집 중이다. 대안공동체의 하나인 천주교 예수살이공동체(대표 박기호 신부)는 23~27일 닷새간 ‘안중근 순국 100주년 기념 순례’를 진행한다. 안 의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추모 미사에도 참석한다. ●기독교·불교 “천주교 신자인데…” 원불교도 지난 11일 전남 함평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 청사 복원터에서 ‘안중근 장군 순국 100주년 특별 천도재’를 올렸다. 행사를 진행한 정광일 청년아카데미 대표는 “안 의사와 원불교는 직접적 인연이 없으나 100주기를 맞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범국민운동 차원에서 행사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오는 26일 복원터에서 안 의사 추도식 및 동상 제막식도 연다. 반면 기독교나 불교계는 안 의사 100주기와 관련해 이렇다 할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이 소극적 행보의 한 원인으로 풀이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17개大 연합 해외봉사활동 눈길

    대학생들이 연합해 ‘프로보노(전문성을 토대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 활동을 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17개 대학 모임인 ‘국인(國人)’ 소속 대학생들은 오는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오사카에 있는 한인학교인 건국중·고교를 찾아 한글로 된 헌 책 400여권을 전달하고 교류방안을 논의한다. 우리나라 교포 자녀들이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하는 ‘한글나눔프로젝트’의 하나로 회원들은 한국의 정체성이 담긴 책을 서너 달에 걸쳐 모았다. 여기에는 ‘조선왕조실록’ ‘백범일지’ ‘칼의 노래’ ‘한국문화기행’ 등이 포함돼 있다. 올 여름방학에는 건국학교를 다시 방문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며, 전세계에 퍼져 있는 한인학교로 대상을 넓혀 나갈 방침이다. 회원들은 또 매년 1월 중국을 찾아 임시정부 청사와 한국기업 등을 방문하고, 중국 학생들과 한·중 관계에 관한 토론회를 갖고 있다. 학생들은 특히 해외방문에 드는 비용은 외부의 도움없이 각자 아르바이트를 통해 모아 활동의 순수성을 지향하고 있다. 2008년에는 기아체험활동을 통해 500여만원의 후원금을 모아 아프리카에 식수 펌프를 설치했고, 강원도 오지 분교 학생들을 서울로 초청해 여름학교를 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위치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로 평가될 만하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시론]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시론]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다시 3·1절을 맞는다. 어김없이 오전 10시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1분간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 세련된 기념사와 우아한 독립유공자 포상, 장엄한 ‘기미독립선언문’ 낭독 등이 끝나면 “이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으로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는 ‘삼일절 노래’를 부르고는 만세 삼창을 끝으로 뿔뿔이 제 갈 길로 흩어질 것이다. 묵념의 순간만이라도 순국선열들의 고통과 염원을 상기했던가. 식민통치 압제 아래서 2000여회에 이르는, 그리고 세계 최대의 평화적인 만세 시위운동 참가자 200여만명의 함성에 귀 기울였던가. 3·1운동 후 1년간 피살 7500여, 부상 4만여, 피체 5만여, 가옥 소각 700여, 교회 소각 60여, 학교 소각 3, 헌병 즉결 태형 1만여, 약식 태형 1500여….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일제 침략자들의 각종 고문들, 대나무 바늘로 손톱 밑 찌르기, 시신과 함께 잠재우기, 철사를 달구어 남자 성기나 여자 음문·유방 난자, 발가벗겨 담뱃불과 다리미로 지지기, 기름종이를 국부에 삽입하여 불붙이기 등등…. 그런데도 신문은 일본인 순사가 시위 군중에게 음경 절단을 당했다는 등 허위 기사로 ‘불법 폭력 시위’라 우겼고 일부 비뚤어진 동포는 거기에 동조하기도 했다. 아니, 그런 비뚤어진 동포가 그때만 있었고 오늘에는 없을까. 그런 만행에도 식민통치의 경제 개발로 우리나라가 더 살기 좋아졌다는 논리에 따르면 3·1운동은 ‘불법 난동’일 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헌법전문처럼 ‘삼일정신’은 근대 민족혁명사의 모태이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천명하면서 “인류 평등의 대의”와 “전 인류 공존동생권(同生權)”을 위한 세계평화를 주창한다. 이어 “침략주의, 강권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타매(唾罵)하고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來) 하도다.”고 절규한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세계사적 관점으로 보면 한 나라가 남의 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될 당위성을 밝힌 미국의 ‘독립선언문’(1774)이나, 현대 인권사상의 교본인 프랑스의 ‘인권선언문’(1789)에 뒤지지 않는 명문이다. 약간 번잡스러운 앞의 글이나, 너무 간결한 법률 조항인 뒤의 글이 지닌 아쉬움을 극복하고 유려 장엄한 문체로 인권과 독립정신 이념에다 민주화와 도덕의식 강조, 세계평화사상을 동시에 접합시킨 게 ‘기미독립선언문’이다. 글쓴이와 민족대표 33인 중 3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옥에 티로 거슬리지만 그 정신은 고전적인 ‘홍익사상’을 제치고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외의 여러 항일투쟁 세력들이 삼일정신을 면면히 승계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를 가차없이 비판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헌법전문은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유일한 적통으로 ‘4·19 민주이념’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이미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화운동’ 역시 삼일정신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찬연한 민족 민주주의 이념의 모태인 3·1운동을 기리는 ‘3·1문화상’ 역대 수상자 가운데 13명의 친일파가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많은 친일파 명의의 기념사업이나 포상제도 역시 헌법전문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라는 삼일절 노래 가사는 선열들에게 이 나라를 봐달라고 할 만큼 우리가 떳떳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표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우리 힘으로는 헝클어진 이 나라를 어쩔 수 없으니 돌아가신 당신들께서 다시 민족을 굽어 살펴달라는 애원일까. 아무래도 우리는 아직까지 “이 날을 길이 빛내자.”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 ‘진관사 태극기’ 3·1절 맞아 공개

    ‘진관사 태극기’ 3·1절 맞아 공개

    지난해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와 항일독립신문이 3·1절을 맞아 일반에 공개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6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진관사 태극기와 ‘신대한’, ‘독립신문’ 등 항일신문 20여점을 전시한다고 24일 밝혔다. 태극기와 문건은 진관사측이 지난해 5월26일 경내 칠성각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불단과 기둥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가로 89㎝, 세로 70㎝, 태극 지름 32㎝인 태극기는 사찰에서는 처음 발견된 태극기다. 당시 불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항일운동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陰)과 4괘를 덧칠한 형태로 제작돼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됐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458호다. 함께 전시되는 문건은 3·1운동 직후 발간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 6점,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4점,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대한’ 3점과 친일파를 꾸짖고 항일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경고문 2점 등 20점이다. 이들 문건은 모두 1919년 제작됐으며 태극기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신문에는 시 ‘태극기’와 태극기의 의미와 제작법을 설명한 ‘태극국기신설’ 등이 실려 있고 경고문에도 태극기가 교차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당시 진관사를 근거지로 임시정부와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던 백초월(1878~1944) 스님이 이들 태극기와 문건을 숨겨 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3·1절 애국지사 105명 포상

    3·1절 애국지사 105명 포상

    정부는 23일 91주년 3·1절을 맞아 105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하기로 했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3명, 건국포장 21명, 대통령표창 51명이다. 여성 4명, 외국인 1명이 포함됐다. 포상은 3·1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해외 거주자는 재외공관을 통해 유족에게 전달된다. 국가보훈처에 소속된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이 활동 당시의 행형기록과 일제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 등을 찾는 등 적극적으로 자료를 챙겼다. 이번 포상자 중 60%인 63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정됐다. 특히 15명은 판결문 등 공적 입증자료를 통해 활동내용을 발굴한 뒤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 등을 역추적해 후손을 찾아 포상하게 됐다.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이경호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해도 옹진에서 독립선언서 배포로 징역 1년 6개월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활동 등으로 총 3차례에 걸쳐 7년 이상의 옥고를 치른 후 순국한 것으로 이번에 새로 확인됐다. 미국 선교사로 3·1운동을 후원한 윌리엄 린튼 선생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돼 미국에 거주하는 유족들에게 훈장이 전달될 예정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분단 떠안은 광복… 날선 이념대립이 전쟁 불러

    조국의 해방은 절실했고, 침략적 제국주의는 대를 이었다. 이념으로 재편된 국제 정세는 조국을 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었다. 제국 간의 다툼과 이해관계의 공존 속에서 한민족의 평화에 대한 갈망은 깊어만 갈 뿐 아니라 요원하기까지 했다. 1945년 8월15일 오전 종로 거리 등 서울 곳곳에는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국민들은 반드시 들어라.’라는 내용의 방이 붙었다. 그리고 낮 12시. 라디오 앞에 모여든 흰 옷 입은 백성들은 지직거리는 기계음 속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 즉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느릿하고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훗날 시인 서정주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처럼 “못 가도 100년은 가리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그렇게 패망했다. 8월6일과 9일 사흘 간격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두 발은 수십만명의 일본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일본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했다. ‘각의’, ‘황족회의’, ‘어전회의’ 등을 거친 끝에 일왕은 직접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14일 밤 11시40분 항복선언 발표를 녹음했다. ●질곡의 씨앗이 된 비(非) 자주적 독립 광복(光復)이었다. 식민의 설움을 겪던 백성들은 라디오 방송을 들은 8월15일 그날은 감격을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일제히 광장으로, 거리로,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독립에 ‘스스로’ ‘자주’가 빠져 있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결정으로 광복군특공대가 1년 남짓 동안 준비해왔던 국내 진공작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자력이 아닌 상태로 일본의 항복이 나왔다는 점에서 독립은 ‘비자주적’인 측면이 강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훈련하다가 일본의 항복선언을 듣고 무산된 계획에 오히려 땅을 치며 통곡한 특공대원들의 모습은 한반도에 드리워진 또 다른 불안한 미래를 상징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이번 전쟁에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적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손에 맡겨지게 됐다. 오로지 평화와 독립만을 간절히 바랐던 한반도의 백성들은 순진했고, 침략의 이해관계와 앙상한 이념의 대립을 앞세운 제국주의에게 약소국 백성들의 순수한 열정은 안중에 없었다. 갇힌 독립투사들의 석방, 강제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청년들의 귀환, 임시정부가 아닌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의 수립 등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분단(分斷)이라는 업보만 덤으로 떠안겨졌다. 강대국들의 협상 결과 아프리카 대륙의 여느 나라들처럼 한반도에도 뜬금없는 38선이 직선으로 그어졌고, 그해 9월 남쪽에는 미 군정이, 북쪽에는 8월 말 소련의 군정이 들어섰다. 1948년 8월 비록 단독 정부였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모양과 주체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식민의 시간은 연장됐다. ●남북으로 갈라져 연장된 식민통치 국제연합(UN)은 공식적으로 남북 총선거를 결의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이 거부하면서 UN은 2월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다시 결의했다. 김구·김규식 등 단독 선거, 단독 정부를 반대한 정치인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UN 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북쪽에도 남북 요인회담을 제안했다. 그 결과 그해 4월19일 김구와 김규식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지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방북을 감행하고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요인 15인회담, 이른바 ‘4김’(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회담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며 이러한 안간힘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날 선 이념의 대립으로 민족이 서로 적대하는 속에서 한국 전쟁의 발발은 필연이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일제 식민통치 도구들 美군정 그대로 대물림

    비록 비자주적 독립이었지만, 이후 건국과 정부 수립만이라도 우리 힘으로 이뤄냈다면 훗날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해방 이후 진행된 미 군정 3년은 이후 수십년 동안 한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 군정은 일제가 효과적인 식민통치 도구로 삼았던 법과 제도 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또한 친일관료, 일본군·만주군 출신, 경찰 조직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이들이 고스란히 재등용되며 미 군정의 그늘 아래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게 됐다. 언어생활, 법령, 교육, 학계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일본의 잔재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게 된 배경이다. 미 군정은 1945년 9월7일 선포됐고,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이르는 2년 11개월 동안 실시됐다. 미 군정청은 우선 전국적 치안권의 확립을 위하여 9월14일 군정 장관의 성명으로 일인 경찰관을 포함한 이전의 일제 경찰관을 그대로 존속시켜 치안유지의 책임을 맡겼다. 그때까지 자생적으로 치안 임무 등을 부분적으로 수행하던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 등은 경찰권 행사가 금지됐다. 그 근거는 조선 백성들이 독립의 보증수표로만 믿었던 포츠담 회담이었다. 1945년 7월26일 포츠담회담의 밀약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설정,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독립의 보장이 아니라 민족 분단의 첫 단추였다.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나온 미·소의 남북 신탁통치 결의 역시 분단을 부채질하는 촉매가 됐다. 반면 건국준비위원회는 우파와 좌파 합작의 형태를 띠며 자체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의구심을 자극하며 미 군정에 의해 부정됐다. 또한 환국을 서두르던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 역시 미 군정에 의해 입국이 지연됐고, 나중에야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하도록 허용됐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이렇게 미국에 의해 부정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교육칼럼] 백범정신과 교육자

    [교육칼럼] 백범정신과 교육자

    몇 해 전 겨울, 교내 교사 20명이 중국 상하이임시정부청사를 방문했다. 빨래가 길가에 널려 있는 허름한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상하이임시정부청사는 낡은 3층집이었다. 임시정부 요원들이 사용했던 물건, 그들의 사진, 침구들이 잘 보존돼 있었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남의 나라 한 구석, 보잘것 없는 곳에 임시정부라고 차려놓고 독립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곳에는 김구 선생님의 집무 모습 사진도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8세 때 동학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라를 위한 걱정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고, 그 후 백범은 상하이로 망명가 다음달 4월 13일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그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고, 우리 힘으로 독립을 얻기 위해 난징에 한국인 무관학교도 설치했다. 1944년에는 상하이임시정부 수장이 되었고, 마침내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책임자였던 그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열강들의 ‘정치게임’에 휘말려 힘을 잃게 됐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우리나라는 임시정부로부터 이어진 ‘정통성’이라는 명맥을 이어가지 못했다. 백범의 ‘나의 소원’ 중 일부 대목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 글을 보면 백범은 그 시절부터 물질의 힘이 아니라 문화의 힘이 세계를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그의 정신은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문제와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까지 닿아있었다. 정의로운 일, ‘한민족다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않은 이른바 ‘백범의 정신’은 어디서 길러진 것일까. 어린시절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 선생을 만나 한학의 가르침을 받고 평생 이를 지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최근 교육계에서 발생하는 비리들을 보면 ‘교육자답지’ 못한 일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조차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답다.’는 것은 그 직종이나 그 계층에 부여하는 자격 요건이거나 기대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잘 유지하려면 그런 기대치에 부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한다. 기대치에 최소한이 아닌 최대한으로 가까울수록 그 사람은 ‘~답다.’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생긴다. 교육자에게 특히 ‘교육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세로 막중한 자기 무게를 다시 가늠해볼 일이다. 백범은 정부 없는 시절 수장이었음에도 막일꾼같은 자세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필자도 백범처럼 교육자로서 훼손된 자존심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마디 소원으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나라가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 ‘~다운’ 사람들로 가득찬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나라는 분명 아주 아름다운 나라일 것이다.” 이홍자 서울사대여중 교장
  •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일제 이전과 광복 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동안 경제사가들 사이에는 이른바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대립해 왔지만, 이는 경제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먼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을 낙후된 ‘봉건국가’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광복 후의 ‘대한민국 근대화’를 일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이론인 동시에 일제 이전의 자생적 근대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이 이론을 따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18세기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에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실적이 충분히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수탈론·근대화론은 경제적 측면만 부각 더욱이 ‘근대화론’은 한국인의 치열한 항일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극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제시대를 ‘노예상태’로 이해하고 목숨을 던져 투쟁한 것은 ‘근대화’의 고마움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었던가? 또 광복후 대한민국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망국의 수치를 씻으려는 자존심의 폭발이 응집력을 높였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탈론’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일제에 저항한 것은 수탈에 대한 저항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말 의병운동은 경제수탈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국권 박탈에 대한 저항이었고, 일제시대의 항일운동도 마찬가지다. ‘근대화론’이나 ‘수탈론’이나 한국인의 드높은 ‘주권정신’과 ‘문화적 자존심’을 무시한 이론이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 17세기 중엽부터 찾아온 서양과 직접 교류하면서 경제, 기술, 군사면에서 조선을 앞서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와 인문문화의 수준은 조선보다 낙후되어 있어서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에서 간 통신사(通信使)에 열광하면서 조선문화를 배우려고 애썼다. 조선은 쇄국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양이 찾아오지 않아 경제와 군사에서 뒤지게 된 것이다. 망국의 원인은 ‘붓문화’가 ‘칼문화’에 꺾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대 일본을 건설한 주역이 한국인이고, 그 후로 수 천년간 선진문화를 건네준 것이 한국인이므로, 정신적으로 일본이 한국인을 압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생긴 일본인의 열등의식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압살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역으로 일본을 마음 속으로 멸시하는 정서를 낳았던 것이다. ●양복·기차 등은 근대화 아닌 서양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서양이론을 끌어다가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시대의 국민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일제시대 한국인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에 표출된 국민여망은 ‘대한국’의 회복이었고, 그들의 손에 쥔 것도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였다. 국외에 세워진 많은 독립단체들도 모두 ‘대한국’ 회복을 저항의 목표로 삼았다. 총독부가 정한 ‘조선’이라는 칭호는 국내에서만 강제로 사용될 뿐이었다. 그 ‘대한국’을 민주공화국 정부로 재건한 것이 ‘상해 임시정부’다. 임정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았고, ‘헌법’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어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광복 후의 ‘대한민국’이 ‘대한제국’과 ‘임정’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고,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총독부’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확실하게 계승했음을 말해준다.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1987년의 개정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도 그런 뜻을 함축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바탕을 둔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산업화와 근대화의 삽질을 힘차게 시작했다. 정체(政體)는 제국이었으나, 정체의 목표는 민국(民國)이었다. 삼한(三韓), 즉 삼국(三國)의 영토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을 국호에 담았고, 조선시대부터 국기처럼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와 어기(御旗)로 확정했다. 일제 36년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의 ‘국권’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집요한 사투를 벌인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면, 일제시대를 경제에만 한정하여 바라보는 것은 역사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영화를 보고, 서양문화를 접했다는 것은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화’나 ‘서양화’로 부르는 것이 옳다. 이런 따위의 ‘서양화’는 이미 1876년의 개항 이후로 우리 스스로 모두 시작한 일들이므로 하등 새로울 것도 없다. ●한국은 붓문화 재인식해야 한국의 정치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와 치열한 교육열, 그리고 고도로 세련된 민본정치와 관료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봉건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막부시대 말기까지 이런 정치문화를 갖지 못했다. 높은 인문문화와 교육열의 전통이 지금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원동력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의 발전은 ‘기적’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의 전통이 되살아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과 칼이 부딪치면 당장은 붓이 꺾인다. 그러나 길게 보면, 붓의 위력이 칼을 이긴다는 것이 고금의 진리다. 일본은 이제 칼 문화의 한계를 철저히 반성해야 하고, 우리는 붓 문화의 전통을 한탄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역사학 전공)
  • [씨줄날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김성호 논설위원

    중국 충칭(重慶)직할시가 홍위병 531명이 매장된 집단 무덤을 문화재로 지정해 영구보존한다고 한다. 홍위병이 무엇인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6년 칭화대 부속 중학교 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된 마오쩌둥의 붉은 위병이다. 10여년간 1300만명이 구습성, 구사상, 구관습, 구문화의 사구(四舊) 타파를 내걸고 ‘악질분자’를 색출, 수십만명이 박해를 받아 처형됐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목숨을 끊었다. 문혁을 관통하며 극단의 폭력을 일삼아 중국에서도 심하게 비판받는 홍위병들의 집단 무덤을 문화재로 삼는다니 놀랄 일이다. 홍위병 무덤을 문화재로 삼자는 결단에 쏠리는 관심의 핵은 ‘역사의 보존’이다. 잘못된 역사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해 후세들이 과거를 반성케 하는 교육현장으로 삼겠다는 천명이다. 곳곳에 산재한 나치의 유대인 학살현장이며 동유럽 각국이 나치의 폭력과 희생의 흔적들을 모은 박물관을 세워 놓은 것도 아픈 기억들을 반추해 역사의 거울로 삼자는 이사위감(以史爲鑑) 정신의 실천이나 다름없다. 최근 국내에도 일제치하의 어두운 잔재들을 복원해 되살리자는 운동이 번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역사의 흔적을 담는 그릇으로 박물관만 한 게 있을까. 단지 지난 시절 유산들을 보여 주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 될 때 박물관은 제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이름을 단 박물관이야 말해 뭣 할까. 문화체육관광부가 8월까지 목표를 세워 건립 중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큰 관심을 받는 것도 교육과 연구의 기능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담는 총지가 긴요하다. 대한민국의 타이틀을 얹어 현대 한국사를 고스란히 담는 박물관이니 한 점 부끄럼 없는 공간으로 일궈 내야 할 것이다. 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혼돈을 빚고 있다.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 시점으로 정의한 건립위에 광복회가 반기를 들었다. 대한민국이 3·1독립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뺀 것에 대한 불만 표출이다. 1948년이 정부수립 시점인지 대한민국 수립일인지를 가리지 않은 채 건국박물관으로 세우겠다는 방향에 반발이 예상된다. 형식과 내용을 따질 때 박물관은 담길 내용에 무게를 싣는 게 마땅하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여 주는 공간답게 가감 없는 구성이 마땅하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활약상, 그 법통 역시 빠져선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형식과 명분 싸움보다는 실질적인 내용 담기에 치중함이 낫지 않을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11일만에 생존자 구조… 아이티정부 “수색 종료”

    11일만에 생존자 구조… 아이티정부 “수색 종료”

    “콜라를 마시며 버텼다.” 아이티 강진이 발생한 지 11일 만인 23일(현지시간) 구조된 위스몽 엑상튀(25)는 지치고 여윈 상태였다. 그러나 열흘 넘게 5m 높이의 건물 잔해에 깔려 옴짝달싹 못했던 것 치고는 비교적 건강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호텔 ‘나폴리인’의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던 중 지진으로 매몰됐던 엑상튀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매일 콜라를 마시고 과자를 조금씩 먹었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어서 그저 기도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프랑스 구조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앞서 아이티 정부는 전날 오후 4시를 기해 매몰자 수색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엑상튀가 기적적으로 구조되면서 추가 생존자에 대한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각국에서 파견된 60여개의 구조팀은 개별적인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구조대가 22일 대통령궁 인근에서 22세 남성을 구했고, 같은 날 84세의 할머니 마리 카리다 로맹이 변변한 장비도 없는 이웃과 친척들의 사투 끝에 구조됐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지금까지 국제 수색구조대가 132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밝혔다. 이번 강진으로 숨진 사망자는 23일 현재 15만명으로 집계됐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아이티 정부 대변인 마리로랑 조슬랭 라세그 문화공보부 장관은 “정부가 수습한 시신은 15만여구이지만 여기에는 가족들이 수습한 시신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종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아이티 주민들은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지난 21일 업무를 재개한 아이티 중앙은행은 다른 은행들도 영업을 재개할 것을 지시했다. 은행연합회는 고객 1인당 최대 2500달러의 예금을 인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과 노점 상인들도 영업을 재개했으며 일부 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교통정체까지 빚어지고 있다. 7~8개 한국 봉제업체들도 일부 피해 복구를 완료하고 22일부터 공장을 정상 가동하기 시작하는 등 많은 기업과 공장들이 업무를 재개했다. 한편 프레발 대통령은 “아이티 국민들을 위해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22일 밝혔다. 프레발 대통령은 이날 오후 임시정부 청사에서 아이티 주재 대사를 겸임 중인 강성주 도미니카공화국 주재 한국대사를 만나 이같이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캐나다의 스타들은 22일 아이티 돕기 모금방송에 대거 참여해 7300만달러(약 840억원)의 성금을 모았다. MTV 등이 기획한 생방송 프로그램 ‘아이티에 희망을’에는 사회를 맡은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를 비롯해 마돈나, 비욘세 등 130여명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해 아이티 지원 동참을 촉구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민족종교, 항일독립운동 구심점

    19세기 후반 이 땅에는 대종교·동학·천도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들이 발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력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1915년 10월 종교 통제안을 공포, 민족성을 일깨우는 민족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결과였다. 당시 민족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을 떠나 민족을 지탱한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을 전후한 4년은 민족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정기에 속한다. 대종교의 경우 1대 교주 나철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를 조직,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청 3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를 부조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했다. 이어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 이완용·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신도 및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만주 동삼성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해 북로군정서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신 대토벌작전을 전개, 대종교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919년에는 천도교가 주축이 돼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특별 성미’로 교인 1명당 3~10원씩 모두 30만원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조달했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명에 불과했던 1920년에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릴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 요인들을 포섭해 천도교를 분열시켰다. 또한 혁신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종교로서의 권위를 잃도록 했다. 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는 1920년대 무장조직 ‘야단’을 조직,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합병해 북간도 지역의 반일무장투쟁단체들의 연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림교도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청림교를 ‘가장 극심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44년 청림교 사건을 조작, 120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50~60명을 살해했다. 일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결국 청림교는 소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는 매년 12명의 독립운동가를 월별로 지정해 발표하고 있다. 이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추모행사와 전시회 등 기념사업을 벌인다.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사상, 공적 등을 집중 홍보함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포스터는 지하철 역 또는 각 관공서, 초·중·고교 등지에서 접할 수 있다. ●선정위, 관련단체 추천받아 결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매년 보훈관서·광복회·독립기념관 등 관련기관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뒤 ‘선정위원회’에 상정해 활동내용과 훈격, 운동계열 등을 심사해 결정한다. 여성 독립운동가도 매년 1명 이상 선정하고 있다. 1992년 1월부터 2010년 1월 현재까지 모두 217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선정됐다. ●여성 독립운동가 매년 1명 뽑아 국가보훈처는 이미 지난해 말 2010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모두 선정했다. 언론·교육투쟁에 앞장선 방한민 선생(1월)과 도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김상덕 선생(2월), 화성 3·1 만세운동의 선봉에 선 차희식 선생(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견 간부로 군사활동 지원에 헌신한 염온동 선생(4월), 한국 광복군 제3지대 간부로 광복군 모집 활동과 여성의 참여를 독려한 오광심 여사(5월) 등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역대 정부수반 거처 6곳 되살린다

    역대 정부수반 거처 6곳 되살린다

    경교장과 이화장 등 역대 정부수반들이 머물던 유적들이 본격적으로 정비된다. 서울시는 임시정부 귀국 후 첫 국무회의가 열렸던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과 대한민국 초대정부의 조각본부였던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 등 6곳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24일 밝혔다. 복원사업에는 장면 전 총리와 윤보선·박정희·최규하 전 대통령의 가옥도 포함됐다. 경교장은 2011년 11월까지 전면 복원된다. 이를 위해 시는 지난해부터 건물 소유주인 삼성측과 협의를 거쳐 정밀 안전진단과 설계에 착수했다. 문화재청과 협의해 내년 6월에는 복원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올해 사적 497호로 뒤늦게 승격된 이화장은 내년까지 정비계획이 마무리된다. 이곳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2013년까지 공사를 마칠 예정이다. 종로구 명륜동의 장면 전 총리 가옥은 이미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올 상반기 사랑채와 대문, 축대 등의 복원을 마쳤고, 현재 유족들이 거주하는 안채 등에 대한 복원공사를 진행 중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일반에 공개된다. 이미 보수공사를 마친 종로구 안국동의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은 개방 확대를 놓고 유족과 협의 중이다. 중구 신당동의 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의 경우 원형 고증작업을 거쳐 설계와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지난 7월 서울시가 매입해 영구 보존하고 있는 마포구 서교동의 최규하 전 대통령 가옥은 유품 기록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내년 중 일반에 공개된다. 시 관계자는 “6곳의 복원사업이 모두 완료되면 주변 명소와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무슨 영화 볼까]

    ■ 시크릿(스릴러/18세 관람가) 감독 윤재구 줄거리 악명 높은 조직의 2인자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장에 출동한 성열(차승원)은 범인이 남긴 듯한 유리잔의 립스틱 자국과 떨어진 단추, 귀걸이 한쪽을 찾아내고 충격에 빠진다. 오늘 아침 외출 준비를 하던 아내(송윤아)의 입술 색깔, 아내의 옷에 달려있던 단추와 귀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본능적으로 증거물을 모두 없애는 성열. 그는 사건 당일 찾아온 여자를 봤다고 증언하는 결정적 목격자마저 협박해 빼돌린다. 감상 비밀도 반전도 많은 영화. ■ 비상(액션·드라마/18세 관람가) 감독 박정훈 줄거리 엑스트라 생활과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가는 시범(김범)은 ‘인생 한방’을 기대하며 배우의 꿈을 품고 살아가지만 단짝 친구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그에게 인생을 걸고 싶은 사랑이 나타난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범에게 호수(배수빈)는 호스트바에서 일할 것을 권해오고 결국 시범은 화려한 밤의 배우인 호스트가 된다. 역시 첫사랑의 아픔을 품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호수는 그에게 든든한 배경이 돼 준다. 감상 여자의 환상을 사로잡는 호스트들의 순도 100% 사랑이야기. ■ 시간의 춤(다큐멘터리/전체 관람가) 감독 송일곤 줄거리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 100여 전 그 쿠바에는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를 거쳐 바람처럼 흘러간 300여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4년 뒤면 부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억세게 살았다. 학교를 세워 우리말을 가르치고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께 독립자금을 보내며 체 게바라의 혁명에도 동참하면서. 하지만 그 누구도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감상 가슴 한 켠의 뭉클함! 감동을 받고 싶다면. ■ 카운테스(드라마·스릴러/18세 관람가) 감독 줄리 델피 줄거리 16세기 루마니아. 아름다운 외모와 막강한 부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줄리 델피). 다른 귀족들의 질투로 고립된 삶을 살던 어느 날, 그녀는 파티에서 만난 젊고 매력적인 귀족 청년 이스트반(다니엘 브륄)과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와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점점 늙고 추해지는 자신이 불안하기만 한데. 감상 사랑 때문에 잔인해지는 여인의 삶.
  • [영화리뷰] 송일곤감독 첫 장편다큐 ‘시간의 춤’

    [영화리뷰] 송일곤감독 첫 장편다큐 ‘시간의 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쿠바는 아득한 이름이다. 지리상 거리도 멀고 정치적으론 비수교국이다. 그럼에도 막연히 쿠바를 동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몇 년 전 화제를 모은 ‘체 게바라 평전’과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바로 쿠바 열풍의 주역. 그리고 또 한 편의 작품 ‘시간의 춤’이 세 번째 주역이 될 태세다. 송일곤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의 춤’은 쿠바를 살아 가는 한인 후세들의 삶을 기록한다. 100여년 전 300여명의 한인들은 ‘4년 뒤 부자가 돼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제물포항에서 멕시코로 출항하는 배를 탔다. 노예처럼 일했지만 고국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비만 빚으로 지게 됐을 뿐이다. 그들이 받는 품삯은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에도 부족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했다. 에네켄 농장일을 하며 마찬가지로 힘들게 살았지만, 학교를 세워 한국어를 가르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부치며 정체성을 꼿꼿이 이어 갔다. 지금 비록 1세와 2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3~5세들 역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하고 있다. 여전히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봄이 오면’, ‘꼬부랑 할머니’ 노래를 배우고 조상들의 기억을 함께 되새기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이방인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뿌리를 박고 살고 있는 지금 이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한인 후세들은 말한다. “쿠바는 나의 조국이다. 나의 출생을 지켜봐 주고 나에게 삶을 준, 그래서 커다란 애정을 품고 있는 땅!”(디모테오), “안토니오랑 결혼도 했고 알리시아도 태어났고 잘 지내는 걸요. 모든 것을 이뤘다고 느껴요.”(박영희) 쿠바와 한국이 야구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 거냐는 물음에 호르헤는 “쿠바를 응원할 거야. 난 여기 사니까. 난 이미 쿠바인이지.”라고 답한다. 단편 ‘소풍’, 장편 ‘꽃섬’, ‘거미숲’, ‘마법사’들로 자기만의 영상언어를 보여줬던 송일곤 감독은 4주에 걸친 쿠바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이 영화를 완성했다. 그는 쿠바 한인에 관한 다큐의 여정을 이렇게 소개한다. “살사와 차차차를 추고, 쿠바 축제에서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는, 지중해빛 피부를 가진 그들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나와 같은 것은 무엇이고, 다른 것은 무엇일지…. 단절되었던 긴 시간을 함께 넘으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자 한다.” 다소 심각한 소재를 다룬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점이 영화관람까지 무겁게 만들진 않는다. 애써 민족주의나 동포애를 주창하기보다 쿠바 한인들의 삶을 잔잔하게 직시함으로써, 마치 낯선 여행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 영화 전반에 흐르는 라틴 음악과 춤은 묵힌 감성을 지그시 자극한다. 방준석 음악감독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비롯해 ‘나쁜 남자’,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쿠바의 선술집 청년’ 등의 노래가 향연을 벌이며, 클래식 발레리나이자 라틴 댄서인 디아날리스(한인 5세)가 관능적인 탱고와 살사로 눈을 사로잡는다. 카리브 해안의 쪽빛 파도, 창백한 슬픔이 서린 공동묘지 세멘테리오 콜론, 도시 아바나의 고풍스런 거리 등 쿠바의 아름다운 풍광을 접하는 즐거움도 크다. 배우 이하나의 차분한 내레이션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공감과 감동을 더욱 깊게 한다. 새달 3일 개봉. 전체 관람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특파원 칼럼] 對中외교 노하우·인맥 이어지길/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對中외교 노하우·인맥 이어지길/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중국에 베이징, 허베이(河北), 지린(吉林), 네이멍구(내몽골) 등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는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이 있습니다. 여기 큰 지도에 색깔별로 표시돼 있지요. 이제 이 지도는 치우겠습니다. 지명이 없는 지도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지목하는 이 곳은 어디일까요?” 지난 14일 오후 중국 중서부의 핵심도시 충칭(重慶)직할시의 최대 번화가인 관음교 중심광장은 온통 한국 물결이었다. ‘충칭·한국 우호주간’ 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된 한국전통음식 체험 등의 문화활동에 참여하려는 충칭 시민들이 광장을 빼곡히 메웠다. 한국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표시하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충칭시 진위안(源)호텔 3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에너지·환경·IT·금융·건설·물류 등 산업분야별 투자설명회에서는 한국의 산업노하우를 배우고, 투자를 유치하려는 지역경제인 및 공무원들의 질문과 설명이 쏟아졌다. 충칭은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힘겹게 몸을 기댄 곳이다.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놓였던 임시정부 청사는 충칭시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극적으로 보존됐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청사보다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도 좋아 선열들의 뜨거운 넋을 되새기기 위해 방문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는 장소다. 충칭은 중국 정부의 최대 역점사업인 ‘서부대개발’의 중요한 거점도시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2012년 말 열리는 중국공산당 18기 전국대표대회(전대)에서 서열 9위 이내인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한 보시라이(薄熙來) 당서기가 2007년 말 부임한 이후 발전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서열 25위 이내인 공산당 정치국원이기도 한 그는 상무부장 출신답게 전문적이고, 저돌적으로 투자유치를 통한 ‘지역경제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 행사를 주관한 주중 한국대사관의 신정승 대사를 만나 나눈 대화는 다분히 고무적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 5년을 보낸 충칭은 한국과 매우 특별한 관계”라며 “나 역시 한국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보시라이 서기는 또 “많은 기업들과 동행해줘 고맙다.”며 충칭과 한국의 윈윈(Win-Win)을 강조했다. 충칭 당서기 부임 후 2년간 한 차례도 외국을 방문하지 않은 그는 곧 한국을 맨 처음 순방지로 찾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지난 3월에도 한·중 바둑대회 개최의사를 피력하는 등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려는 자세를 보여주곤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사실상 ‘G2’(미국, 중국)로 대우받고 있다. 전세계 각국이 중국과의 경제협력 끈을 맺기 위해 적극적이다. 기회를 잡기 위한 선제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2003년부터 매년 상·하반기 한 차례씩 중국 각 성·시를 돌며 우호주간 행사를 열고 있다. 지난해에는 톈진(天津)시·산둥(山東)성과 광시(廣西)장족자치구·윈난(雲南)성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16개 성·시에 한국 기업과 한국 문화를 알렸다. 보시라이 서기처럼 깊은 인상이 각인된 지역 ‘링다오(領導·지도자)’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연을 상당히 귀중하게 여기는 중국인들의 심성을 감안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임이 분명하다. 세계 경제가 한묶음으로 물려 돌아가면서 경제외교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모처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라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주중 한국대사관의 대(對)중 경제외교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 경제외교 노하우와 인맥이 축적돼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박홍환 베이징특파원 stinger@seoul.co.kr
  • 브라질·온두라스 ‘셀라야 격돌’

    군 쿠데타로 축출됐다가 3개월만에 비밀 입국해 주 온두라스 브라질 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마누엘 셀라야 전 온두라스 대통령 문제가 브라질-온두라스 간 외교문제로 본격 비화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셀라야 전 대통령의 신변안전이 확실히 보장될 때까지 브라질 대사관에 머물게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현지 언론이 26일 보도했다. 이에 대해 로베르토 미첼레티 임시 대통령은 27일 브라질 정부에 “셀라야의 신병을 어떻게 할 건지 10일안에 결정하라.”고 경고해 양국간 갈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미첼레티는 또 만약 브라질이 그때까지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추가 (압박) 조치를 단행하겠다고 대변인실을 통해 밝혔다고 AP통신이 이날 전했다. 룰라 대통령은 전날 미국 피츠버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끝난 뒤 가진 회견에서도 “비정상적인 것은 셀라야 전 대통령이 온두라스로 귀국한 사실이 아니라 미첼레티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 앉아 있는 점”이라며 쿠데타 집권세력을 비난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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