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임시정부
    2025-12-18
    검색기록 지우기
  • 경제혁신
    2025-12-18
    검색기록 지우기
  • 사회관계망서비스
    2025-12-18
    검색기록 지우기
  • 지방교부세
    2025-12-18
    검색기록 지우기
  • 항암치료
    2025-12-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071
  • [이들을 기억해 주세요] 종로署에 폭탄 던진 김상옥 의사

    [이들을 기억해 주세요] 종로署에 폭탄 던진 김상옥 의사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 기관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기념식이 22일 오전 11시 서울 효제초등학교에서 열린다고 국가보훈처가 21일 밝혔다. 효제초등학교는 김 의사의 출신 학교다. 김 의사는 1919년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0년 김 의사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며 의열단에 가입해 무력을 사용하는 의혈투쟁을 준비했고,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여러 명을 다치게 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독립운동가 이름 딴 美 초교 개교 10주년 맞아 졸업생 초청

    독립운동가 이름 딴 美 초교 개교 10주년 맞아 졸업생 초청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김호(1884∼1968·미국명 찰스 호 김) 선생의 이름을 딴 ‘찰스 H 김 초등학교’가 다음달 24일 개교 10주년을 맞아 1회 졸업생을 초청하는 행사를 연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14년 도미해 캘리포니아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재미동포와 유학생을 위한 육영 사업에 힘쓰면서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했다. ‘신한민보’를 발행해 동포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리들리에 ‘로스앤젤레스 한인센터’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LA 통합교육구 교육위원회는 2006년 LA 한인타운 3가와 옥스퍼드 애비뉴 인근에 있는 공립 초교의 교명을 그의 미국이름을 따 ‘찰스 H 김 초등학교’로 결정했다. 아시아계의 이름이 미국의 공립학교 이름으로 채택된 것은 처음이었다. 찰스 H 김 교육재단 대표를 맡은 친손녀인 데이지에타 김(66)은“재학 시절 추억과 10년의 도전 등을 재학생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밝혔다. 참석을 원하는 졸업생은 2월 7일까지 전화(213-368-5600)나 이메일(info@charleshkimedfund.org)로 알려주면 된다.
  • “전두환 정권 참여 김종인 다른 대통령 평가해보라”

    “전두환 정권 참여 김종인 다른 대통령 평가해보라”

    한상진(왼쪽)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의 ‘이승만 국부’ 발언을 놓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18일 논쟁 2라운드에 들어갔다. 전날 한 위원장과 김종인(오른쪽) 더민주 선거대책위원장은 “대한민국을 세운 공적에 유의해 국부에 준하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3선 개헌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람이다. 국부로 볼 수 없다”며 공방을 벌인 바 있다. 한 위원장은 이날 확대 기획조정회의에서 “가장 많은 정권에 참여한 기록을 갖고 있는 김 위원장이 이 전 대통령 ‘국부’ 발언을 비판했다”며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했던 인사로서 다른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해주시길 요청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과거 전력을 언급하며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이어 그는 “과거 통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입장”이라고 재반박하며 “더이상 단절과 반목의 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할 때가 됐다”고 제안했다. 이날 자신을 4·19 유공자라고 밝힌 한 할아버지가 당사를 방문, 한 위원장의 사과를 요구해 한때 소란을 빚기도 했다. 정청래 더민주 최고위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정권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정교과서의 최종 목표가 1948년을 건국절로 하고 항일독립 역사와 친일의 역사를 지우겠다는 것”이라며 “어찌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목표, 복심과 똑같은 말을 야당을 자처하는 국민의당에서 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 위원장을 ‘진부한 뉴라이트 학자’로 규정하고 “국민의당은 대한민국 건국절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이라고 보는지 아니면 박 대통령과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1948년 8월 15일 건국일에 있다고 보는지 공식 입장을 표명해달라”고 날을 세웠다. 한편 이날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외부영입 인사를 공개했다. 더민주는 김민영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과 오성규 전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을 영입했다고 밝혔다. 더민주는 이른바 ‘박원순맨’을 영입했다고 소개했지만, 김 전 사무처장의 경우 2012년 대선에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바 있어 사실상 ‘친문’(친문재인) 인사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 전 처장은 2011년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대외협력위원장을, 오 전 이사장은 기획조정실장을 맡았다. 국민의당도 광주지법 송기석 전 부장판사를 영입했다고 밝혀 주춤하던 외부인사 영입 움직임을 재개했다. 전남 고흥 출신의 송 부장판사는 광주고법과 광주지법 목포·가정지원, 순천지원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원로 서예가 유천 이동익 선생 네 번째 개인전

    원로 서예가 유천 이동익 선생 네 번째 개인전

    “붓을 잡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정열을 서도에 쏟았다”는 원로 서예가 유천(攸川) 이동익(76) 선생의 네 번째 개인전이 12일부터 서울 명륜동 성균갤러리에서 열린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문중의 종손인 선생은 이번 ‘유천 이동익 선생 성균관대 초청 서예전시회’의 주제를 ‘나라를 다시 생각한다’로 내걸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일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뜻을 더듬어 전시회마다 일관되게 선보였던 ‘애국시’에 무게를 실었다. 석주 선생의 ‘경학사 취지서’와 ‘만주기사’, 매천 황현의 ‘절명시 사수’, 충무공의 ‘진중음’ 등이 출품된다. 특히 퇴계 이황의 ‘매화시’ 91수를 이어 쓴 50m 대작 ‘매화무진장’이 기대를 모은다. 2월 12일까지. (02)733-6565.
  • 용산구 새내기 공무원들 의열사 참배로 새해맞이

    용산구 새내기 공무원들 의열사 참배로 새해맞이

    용산구의 새내기 공무원들이 순국선열에 참배하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성장현 구청장은 7일 오후 신임 9급 공무원 28명(행정직 26명, 세무직 2명)에게 발령장을 주고서 지역 내 효창원의 의열사를 함께 참배했다. 의열사는 백범 김구 등 일제강점기 상하이임시정부 요인 7명의 영정이 안치된 곳이다. 신임 직원들이 새해 의열사를 참배한 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성 구청장이 새내기 직원들에게 역사의식 갖기를 강조한 건 ‘호국 도시’로서 용산의 위상을 고려한 조치다. 구에는 효창원 외에 전쟁기념관과 유관순추모공원 등 여러 추모 시설이 있다. 특히 지난해 9월에는 구 예산으로 유관순추모공원 안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건립하고 인근 도로명을 ‘유관순길’로 바꿨다. 유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순국한 뒤 용산의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일제가 군용기지 조성을 위해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해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성 구청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직원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공복으로서 소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박문각 종로 고시학원과 함께하는 실전강좌] 한국사

    [박문각 종로 고시학원과 함께하는 실전강좌] 한국사

    서울신문은 많은 수험생이 응시하는 7·9급 공무원 시험에 대비해 국어·한국사·영어 등 필수과목에 대한 실전강좌를 마련했다. 박문각 종로고시학원 강사들의 도움을 받아 과목별 주요 문제와 해설을 싣는다. 최근 한국사 과목에서는 전반적으로 기본적인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다. (문제) 다음 밑줄 친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왕의 이름은 소(昭)다. 치세 초반에는 신하에게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송사를 처리하는 데 현명했다. 빈민을 구휼하고, 유학을 중히 여기며, 노비를 조사하여 풀어 주었다.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거의 태평의 정치를 이뤘다. 중반 이후로는 신하를 많이 죽이고, 불법(佛法)을 지나치게 좋아하며 절도가 없이 사치스러웠다. -고려사절요- ①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했다. ②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③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사심관과 기인제도를 마련했다. ④승려인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해설) 제시문은 최승로가 고려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건의하면서 제시한 5대조 정적평 중에서 광종에 대해 평가한 내용으로 밑줄 친 왕은 고려 광종이다. 고려 광종은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공복제, 칭제건원, 주현공부법 등을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②는 고려 성종의 업적. ③은 고려 태조가 호족을 통합·견제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 ④는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억압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정답) ① (문제) 다음 기록이 보이는 왕대의 정치 변화를 바르게 설명한 것은. (왕이) 양역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했다. 왕이 말했다. “포나 결포는 모두 문제점이 있다. 이제는 1필로 줄이는 것으로 온전히 돌아갈 것이니 경들은 대책을 강구하라.” ①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됐다. ②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해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했다. ③정치 집단이 소수의 가문 출신으로 좁아지면서 그 기반이 축소됐다. ④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관료들을 중심으로 탕평 정국을 운영했다. (해설) 제시문의 왕은 조선 후기의 영조이고, 영조가 실시한 정책은 군포를 1년에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이다. 영조는 온건한 인물을 골고루 등용하는 완론 탕평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분당을 없앨 것을 내세워 새로운 집단인 이른바 탕평파를 육성, 이들에게 정국을 주도하게 했다. ①서인에 의해 일당 전제화가 대두된 시기는 조선 숙종 때, ②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이 발생한 시기는 현종 때, ③소수의 외척 세력이 정권을 주도하는 시기는 19세기의 세도 정치 시기. (정답) ④ (문제)해방 이후 건국 과정을 시대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개최 ㉣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른 총선거 실시 ① ㉠ - ㉡ - ㉢ - ㉣ ② ㉡ - ㉢ - ㉠ - ㉣ ③ ㉢ - ㉣ - ㉡ - ㉠ ④ ㉡ - ㉣ - ㉢ - ㉠ (해설) 자주 출제되는 해방 이후의 건국 과정에 관한 순서를 찾는 문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여운형 등은 조선 건국 동맹을 모체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군과의 협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조직을 다시 개편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5년 12월에 미·영·소 3국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해 최고 5년간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 통치안, 2주 이내 미·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 소집 등을 결정했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1946년 3월)된 후 중도파를 중심으로 1946년 7월 좌우합작 위원회를 결성해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마저 결렬(1947년 5월)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1947년 11월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정답) ② 조민주 박문각 종로고시학원 강사
  • ‘자화자찬’은 없다… 냉정한 눈으로 본 광복 70년·극단적 대립 없다… 긴밀 협력 이어 온 한일 50년

    ‘자화자찬’은 없다… 냉정한 눈으로 본 광복 70년·극단적 대립 없다… 긴밀 협력 이어 온 한일 50년

    “‘한강의 기적’이나 ‘세계 유일’ 등과 같은 화려한 수식어는 배제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이라는 한·일 양국 간 반목과 매년 되풀이되는 독도와 과거사 마찰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가 극단적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동북아역사재단) 광복 7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의 역사적인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광복 70주년 학술서 시리즈와 한·일관계사 시리즈가 22일 나란히 출간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이 이날 발간한 ‘광복 70년 시리즈’(전 6권)는 정치, 외교안보, 경제, 산림녹화,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의 공과를 담았다. 한중연 측은 “달콤한 자화자찬 식의 형용사를 나열해 대한민국의 70년을 꾸민 게 아니라 자료와 실제 수치를 근거로 광복 이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냉정히 평가했다”며 “스포츠와 의식주 70년 변화상 등을 덧붙여 9권으로 영문 번역으로도 완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45년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 과제는 현재진행형이다. 1권 ‘한국의 외교안보와 통일 70년’에서는 지난 시기 외교안보와 통일 정책을 역사적으로 정리했다. 3권 ‘한국의 정치 70년’에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어 1948년 대한민국이 세워진 이후 개발독재와 권위주의 체제, 민주화 전개 과정을 서술했다. 4권 ‘한국의 경제발전 70년’에서는 성장과 분배, 금융, 재정, 노동 등 한국 경제의 현재와 문제를 생각해 보는 장을 마련했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이경준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가 분야별 대표 필진으로 참여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한·일 양국 관계의 50년사를 아우르는 책 ‘한일관계사 1965-2015’ 시리즈 전 3권을 냈다. 한국과 일본의 중견·소장파 연구자 51명이 1965년 이후 한·일 관계를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세 분야로 나눠 다각적인 분석과 검토를 시도했다. 국교정상화를 이룬 지 50년이 됐지만 양국 관계는 정상 간 대면조차 꺼리고, 양 국민의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가 급속히 떨어질 정도로 악화된 모습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한·일 관계는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성공적인 관계’라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비대칭적이고 수직적인 제국과 식민지 관계에서 국교정상화 후 50년 만에 대칭적이고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됐다는 점에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책 발간에 맞춰 이날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전문가 간담회를 개최했다. 1990년대 이후 빈번해진 역사 마찰에도 불구하고 양국이 극단적인 대립을 회피하면서 다방면에서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했던 건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인권 존중이라는 기본적 가치와 규범을 공유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간담회에는 대표 집필자인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 이소자키 노리요 일본 가쿠슈인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판소리로 재탄생한 굴곡진 김구의 생애

    판소리로 재탄생한 굴곡진 김구의 생애

    독립운동의 상징인 백범 김구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창작 판소리로 재탄생한다. 성남아트센터는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오는 26일 오후 4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무대에 올린다.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는 김구 선생의 사상과 철학, 문학적인 감동이 서려 있는 ‘백범일지’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민족을 위한 삶을 살아온 백범 선생의 고뇌와 자취를 집중 조명한다. 임진택 명창이 연극의 대본에 해당하는 창본을 직접 쓰고 진양조, 중모리 같은 장단을 붙여 총 3시간 완창 공연으로 완성했다. 일제 치하 임시정부 주석으로 해방 이후 분단과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자 헌신하다 안두희의 암살 총탄에 쓰러진 그의 굴곡진 생애를 총 3부에 걸쳐 구성진 판소리로 풀어낸다. 공연은 1부 ‘빼앗긴 나라-청년 역정’, 2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3부 ‘갈라진 나라-해방시대’로 구성된다. 1부와 2부는 왕기철, 왕기석 명창이 맡았다. 3부는 임진택 명창이 출연해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을 바친 독립과 통일의 여정과 그의 숭고한 뜻을 진양조 장단에 싣는다. ‘광대 명창’으로 불리는 임진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로 ‘소리내력’, ‘오월광주’, ‘남한산성’ 등 창작 판소리에 출연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에 소리꾼 유봉 역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국내 판소리학사 1호로 올해 국악 인생 40년을 맞은 왕기철은 동생인 왕기석 정읍시립국악단 단장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관람료는 전석 1만원. 만 7세 이상 관람할 수 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광화문광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70주년 기념전시회”
  • 임정 100주년 기념관 세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이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인 2019년에 맞춰 추진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는 23일 서울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창립총회 및 학술대회를 갖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가적·법적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2019년 이전까지 기념관 전시자료 준비, 관련 연구작업, 임시정부기념관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임시의정원으로 시작된 국회 창설 100주년이기도 한 해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67~1932)의 손자인 이종찬 위원장은 “임시정부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장기간의 망명정부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었고,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면서 “우리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다는 말이 들어 있을 뿐 한 세기가 다 되도록 기념관 하나 갖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기념관 건립 추진의 취지를 설명했다. 창립총회에 이어 열린 학술대회에서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1919년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긴밀한 관계성을 역설했다. 한 교수는 “1919년 국가인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그 대한민국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해방 뒤 정부를 설립하며 임시정부를 거의 완전하게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등 세계 17개국 917개소에 한국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산재돼 있다”면서 “상하이를 비롯해 항저우, 창사, 류저우, 충칭 등 5곳에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가 복원돼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독립기념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전시실 일부에만 관련 내용이 있을 뿐으로 이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대접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향후 건립될 기념관의 전시 구성과 지향점, 연구 사업과 교육 프로그램, 운영 체계와 인적 구성 등에 대해 구체적인 안을 내놓았다. 건립추진위원회는 2019년까지 3·1운동 100주년 기념 조형물과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 부지와 예산 확보, 전시 자료 준비, 연구 작업 등을 본격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다. 앞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은 여러 단체에서 건립을 추진했으나 모두 무산된 바 있다. 위원회 관계자는 “7월 17일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4개월여의 작업을 거쳐 발족에 이르렀다”면서 “독립운동,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념사업회들을 아우르면서 기념관 설립의 구심점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송혜교 “해외유명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서없어 넘 불편했어요”

    송혜교 “해외유명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서없어 넘 불편했어요”

    “해외에 나가게 되면 그 나라의 대표 미술관 및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한국어 서비스가 제공이 안돼 있으면 참 불편했어요. 앞으로도 한국어안내서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전 세계 주요 미술관 및 박물관에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해 온 배우 송혜교와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이번에는 캐나다 최대 박물관인 로열 온타리오 뮤지엄(ROM)에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했다고 19일 밝혔다.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ROM은 세계 최고의 자연사 및 문화 박물관 중 하나로 600만 점 이상의 유일무이한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세계 관광객들이 토론토 방문 시 반드시 찾아가는 캐나다의 대표 박물관이다. 이번 한국어 안내서 제작에는 세계한인학생연합회 캐나다 지부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각 층마다의 전시물 소개를 비롯해 박물관 내의 식사, 쇼핑, 일일투어 등을 전면컬러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향후 3만부를 비치할 예정이다. 이번 일을 기획한 서 교수는 “세계적인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보면 아직도 한국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곳이 참 많다. 이런 곳에 한국어 서비스를 유치해 한국인 관람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아직도 한글 및 한국어의 존재 유무를 모르는 외국인들도 상당수다.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이런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한국어 서비스를 비치하게 되면 한글의 존재 유무도 홍보할 수 있어서 좋다”고 덧붙였다. 그간 이 둘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보스턴 미술관 등에도 한국어 서비스를 지원해 왔으며 또한 중국의 상해 및 중경 임시정부청사, 네덜란드 이준 열사 기념관, 미국의 안창호 기념관 등 해외 독립유적지에도 꾸준히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한편 서 교수는 “내년부터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 등 유럽쪽 대표 미술관 및 박물관과 세계 유명 관광지에도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더 노력할 예정”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이명선 전문기자 mslee@seoul.co.kr
  • 이 안을 채워 주세요

    이 안을 채워 주세요

    강북구는 국채보상운동 통문, 김구 선생 혈투사, 대한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투쟁사 등 근현대사 유물을 수집한다고 16일 밝혔다. 구는 지난 1월 44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해 북한산 자락 수유동에 근현대사기념관(조감도)을 착공했으며 내년 3월 완공 예정이다. 근현대사기념관을 운영할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98점의 전시유물을 정해 본격 수집에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동학운동 당시 북접의 최시형이 발행한 첩지(문서), 관동창의대장 차첩(의병대장의 문서), 국채보상운동 통문(문서), 김구 주석 최근 언론집, 김구 선생 혈투사, 여운형 선생 투쟁사, 대한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투쟁사, 순국선열혈투사 등 98점을 전시유물로 정했다. 구한말부터 정부 수립 전후와 4·19혁명까지의 근현대사 관련 유물을 갖고 있는 개인이나 문화재 매매업자, 법인은 강북구 문화체육과(02-901-6204)로 연락하면 판매할 수도 있다. 도굴품, 도난품 및 문화재 관련 사범은 판매가 불가능하다. 사발통문, 오방색군기, 손병희 초상화, 을사조약문, 정미7조약문, 병합조약문, 순종의 칙유, 데라우치 유고, 헤이그특사 위임장, 만국평화회의보, 대동단결선언문, 무오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등 전시에 필요하지만 구입이 불가능한 유물은 독립기념관 등 9개 기관으로부터 복제해서 갖추게 된다. 박겸수 구청장은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근현대사기념관은 시민과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주고 애국심을 키우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북한산둘레길 수유탐방지원센터 뒤편 4·19길에 연면적 951㎡,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로 세워진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광복회 “국정교과서 ‘건국절’ 기술 반대”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들로 구성된 광복회가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대한민국 수립’으로 보는 건국절 추진에 강력 반발했다. 광복회는 10일 결의문을 통해 “8·15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려는 것은 정부가 우리 역사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폄훼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며 “새로 집필될 역사 교과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반(反)헌법적인 내용이 실리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해 국민들의 역사 의식과 정서에 혼란을 초래하는 시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의문은 지난 9~10일 광복회 간부 200여명이 참여한 워크숍에서 논의된 후 작성됐다. 건국절이란 일부 보수 성향의 학자들이 이승만 정부가 탄생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기됐다. 그러나 건국절은 대한민국이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수립일’로 … 근현대사 비율은 50% → 40%로 줄인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수립일’로 … 근현대사 비율은 50% → 40%로 줄인다

    2017년 3월부터 중·고교 신입생들이 배우게 될 국정 역사(중), 한국사(고) 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었던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수립일’로 기술된다. 근현대사 비율은 현재의 50%에서 40%로 줄어든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헌법과 충돌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4일 “(황교안 국무총리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언급한 모든 것이 편찬 기준에 포함될 것”이라며 “빠진 것이 있으면 의견을 더 들어서 추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황 총리 등은 앞서 3일 국정화 고시를 확정, 발표하면서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천안함 피격 사건 ▲산업화와 민주화의 서술 등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황 총리 등이 언급한 사건이나 사안들에 대한 수정이 집중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해 이 부분들이 향후 공정성, 중립성 검증 과정에서 논란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황 총리는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으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기술된 역사 교과서가 있다. 대한민국은 마치 국가가 아니라 정부단체가 조직된 것처럼 의미를 축소하는 반면 북한은 ‘정권 수립’도 아닌 ‘국가 수립’으로 건국의 의미를 크게 부여해 오히려 북한에 국가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의미를 왜곡 전달하고 있다”고 했다. 황 총리의 이 지적에 따라 편찬 기준이 정해지면 1948년 8월 15일을 ‘정부 수립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건국)일’로 표현해야 한다. 이 경우 김 위원장이 밝힌 ‘헌법정신과 객관적 사실에 입각’이라는 교과서 편찬의 첫 번째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불가피해진다. 헌법 전문은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다. 1948년 제헌국회 개회사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밝히고 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시정부 법통은 민족 정통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잣대”라며 “이제까지는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에 정통성이 있지만 뉴라이트 진영에서 주장하는 대로 임시정부 법통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세운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이 세운 나라로 남북이 대등한 관계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진재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집필진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리해 교과서에 서술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교육과정에 이미 선사·고대·고려·조선과 근대·현대가 6대4 정도의 비율로 정해져 있고 여기에 맞춰 교과서가 나온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2011년 한국사와 근현대사의 통합으로 5대5 비율이었던 전근대사와 근현대사의 서술 비중이 6대4로 바뀐다는 뜻이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해외여행 | 다시 피가 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해외여행 | 다시 피가 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러시아’라는 세 글자가 내 속에서 퍼 올리는 건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음습하고 도덕적인 문학적 상념, 아침이면 의례처럼 볼륨을 높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축축한 자조에 딱 들어맞는 ‘안나 게르만’의 로망스, 시적인 위로를 주는 ‘샤갈’의 그림들, 어감마저 차가운 ‘소련’이라는 이름, 저항의 로커 ‘빅토르 최’ 그리고 뜻도 모른 채 외던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무자비한 해체의 역사…. 그 거대한 땅덩이의 체취를 맡고서야 알았다. 러시아의 실체는 도표화된 관념보다 몽롱하고, 드물게 아름답다는 것을. 편협한 인식을 뒤로한 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심장 뛰는 일인지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러시아 “‘스파시바спаси?бо’라고 해요!”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사인이 떴을 때, ‘고맙습니다’가 러시아어로 무엇이냐고 묻는 타이완 승객에게 스튜어디스가 말했다. 그녀는 친절하게 ‘시’에 강세를 줘야 한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스파시바’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를 거쳐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러시아어가 되었다. 지도 위에서만큼 러시아연방이 기세등등해 보일 때도 없다. 호주보다 두 배 이상 큰,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이 나라에서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찾을 때는 손가락 방향을 오른쪽으로 한참 이동시켜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중심도시다. 분명 이국인데, 거리에는 늘씬한 금발의 미녀들이 넘치는데,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건 아마 DNA에 박힌 기억 때문일 게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시대를 지나고 1900년대 초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여기니까.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에서 짐작하듯 작은 변방도시에 불과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가 부여한 의미는 노골적이다. 겨울에도 연안이 심하게 얼지 않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는 1년 내내 항만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 전략적 항구도시와 군항으로는 적격이었다. 극동함대 사령부 등 해군기지가 주둔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원조물자가 옮겨지는 거점이기도 했으며, 극동 지역 외교와 상업의 중심지로도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함정 10여 대를 격침시켰다는 잠수함 C-56(‘C’는 러시아어로 ‘에스’라고 읽는다. ‘중형급’이라는 표시)은 찬란했던 전장을 회고하는 구소련의 늙은 해군처럼 해양공원 앞 뭍에서 긴 휴식에 들어 있었다. 길이 77m의 이 강철 영웅에겐 엔진을 돌리던 승조원들의 함성은 사라지고 그들이 남긴 훈장과 어뢰, 기관총을 자랑하는 게 유일한 일과가 되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6.5m 좁은 폭, 그 안의 희박한 공기 탓인지 머리가 띵해져 잠수함에서 나왔다. 옆으로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영원의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붉은 카네이션을 놓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마침 뒤편 기도소에서 종이 울린다. 1941년과 1945년을 오르내리던 그 소리는 전쟁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평화로웠다. 1891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2세의 황태자 시절, 그의 방문을 기념해 세웠다는 개선문은 불과 몇 걸음 뒤다. 왜소한 풍채를 화려하게 치장한 그 건축물은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천성을 숨기고 자신만만한 ‘척’했다는 황제의 운명과 닮아 보였다. 혁명 후 파괴된 것을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해도 원형을 되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제정러시아의 문장이던 쌍두 독수리는 개선문 꼭대기에서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세련되고 번화한 스베트란스카야 거리Svetlanskaya Street. 횡단보도의 초록 불은 바뀌는 순간 이미 9를 세고 있다. 으름장 놓는 선생님 같은 신호등을 째려보며 잰 발길을 놀려야 하는 일이 잦았다. 100년도 넘는 바로크양식의 건물들이 자리한 가로수 길을 걷고 있자니 막연히 ‘여긴, 유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거만하리만치 딱딱한 표정의 러시아인들을 보고 그 생각은 접기로 한다. 유라시아주의를 바탕으로 강대국을 재건한다는 국가의 외교정책에 이바지하듯,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이곳은 오로지 극동 러시아라는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다. 스베트란스카야로부터 두 블록 떨어져 자리한 중앙광장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기리는 동상만이 생생할 뿐, 혁명전사광장이라는 옛 이름은 의미 없어 보였다. 금요일이면 주말시장이 열리고 신년축제와 기념일 퍼레이드 등 이벤트의 무대가 된 지 오래다. 과거에도 지금도 이곳에서 집회는 계속되지만 혁명에서 놀이로 그 주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전설만 남은 영웅들의 흔적 블라디보스토크 둘째 날, 신한촌부터 찾았다. 신한촌은 일본에 의해 침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졌던 장소다.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상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전설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를 비롯해 신채호, 안중근, 안창호 등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아파트촌 어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이 신한촌 터라는 것을 눈치 챌 길은 보호 철책에 둘러싸인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이 전부였다. 한인들이 살길을 찾아 연해주 땅을 처음 밟은 것이 1863년. 블라디보스토크가 극동 해군기지로 부상하면서 그들은 군항에서 작업인부로 일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시내 중심부였다. 하지만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당국은 1893년 서쪽 아무르만 해안가로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을 ‘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우리말로는 개척리開拓里로 불렀다. 이후 1911년, 또 한 번의 위생 문제로 북쪽 2km 떨어진 라게르 산비탈로 이주한 한인들은 ‘노바야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신한촌’를 형성했고, 이전의 거주지는 구한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4년, 신한촌은 3,000명이 거주하며 점차 자리를 잡아 갔지만 1937년, 스탈린이 극동에 살던 한인 17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면서 신한촌의 한인들 역시 카자흐스탄 등지로 이송되고 그 자리는 유럽과 러시아 노동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길이가 다른 커다란 세 개의 석조물. 가운데는 한국, 왼쪽은 북한, 오른쪽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 한민족을 상징한다는 기념탑 앞에서 조국의 미래를 밤새워 고민했을 독립 영웅들의 절절함을 가늠해 보기란 쉽지 않았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라는 기념탑의 글귀는 길 잃은 아이처럼 애처롭고 속상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블라디보스토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독수리 둥지’라는 뜻의 오리노예 그네즈도 산 정상은 214m에 불과하지만 도시에서 가장 높다. 계단을 올라서니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만든 아우 키릴로스와 형 메소디오스 형제의 동상이 십자가를 들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바다 위에는 2012년 APEC 정상회담에 맞춰 완공한 루스키섬까지 이어진 금각만 대교가 장쾌했다. 서울 남산에서처럼 연인들이 자물쇠를 걸며 사랑을 맹세하는 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촬영이 한창인 신랑신부가 난간 틈을 비집고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 신부보다 예쁜 들러리는 뭇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르만 해변공원까지는 걸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명물인 메드베드카곰새우를 주문했다. 비릿하고 고소한 맛이 찬 맥주와 묘하게 어울렸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에 네덜란드 맥주를 마시는 청년들,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서 CF의 한 장면처럼 등장한 처녀들, 낚시를 즐기는 부부…. 히죽대며 그들의 모습을 훔치는 사이 새우껍데기만 자꾸 쌓여 갔다. ●하바롭스크Khabarovsk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의 하룻밤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열차 출발 시간은 저녁 9시. 서둘러 짐을 챙기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향한다. 지는 해에 순종하며 기차역이 차분히 물들고 있었다. 1907년부터 5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기차역은 제정 러시아의 건축양식으로 제법 낭만적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다. 이곳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9,288km. 플랫폼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철로를 달렸다는 증기기관차도 보였다. 출발은 저녁 9시인데 플랫폼의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킨다. 철도역의 모든 시간표는 모스크바가 기준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난민처럼 바닥에다 가방을 열어 젖히고 주섬주섬 필요한 물건만 미리 챙겼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승무원은 여권과 승차권을 확인하고 탑승을 종용했다. 9번 칸, 객실번호 6호 23번. 4인 1실, 양쪽으로 2층 침대가 놓인 객실 ‘쿠페’는 좁았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서서히 열차가 움직이고, 시간이 지나야 시원해질 것이라는 차장의 말처럼 에어컨은 30분이 지나서야 제 기능을 발휘했다. 하바롭스크 도착은 내일 아침 8시. 무궁화호보다 더 느린 기차를 타고 밤새 11시간을 달려야 한다. 하얀 자작나무숲,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올 법한 눈보라, 잠들지 않는 백야.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엄청난 로망을 품은 사람들은 흔히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 러시아에 오기 전,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다는 친구는 말했다. “러시아 애들은 책만 읽고 얘기도 가족들끼리 소곤소곤. 같이 보드카 마시자던 러시아 아저씨 아니었으면 심심해서 아마 미쳐 버렸을 걸!” 모스크바까지 꼬박 달리는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열차에서의 하룻밤만으로 그 기분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낮도 아닌 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래야 반사되는 객실 내부가 전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 가이드북을 뒤적이다 음악을 듣고, 러시아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복도를 기웃대다가, 키릴문자가 새겨진 맥주를 마시고 남은 소시지 3개를 승무원에게 내미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은 없었다. 다행히 수다 떨 일행들이 있어 시간은 잘 갔다. 잠자리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꺾이는 철로마다 침대가 심하게 덜컹대긴 했다. 하지만 낮에 흘린 땀이나 미처 못 지운 바지의 소스 자국, 떡진 머리도 문제될 게 없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잠결에 2층 침대로부터 커튼콜처럼 내려왔다 올라가는 이불에 깜짝깜짝 놀라거나, 변기가 막힌 줄도 모르고 30분을 화장실 문 앞에서 참던 일만 빼면. 창문 너머 흘러가는 자작나무 사이로 스미는 햇빛을 보고 잠에 빠졌는데, 곧 정차한다는 소리에 허둥지둥 이불을 박차고 객실 문을 열어젖힌다. 열차가 멈춘 곳. 하바롭스크였다. 조금 더 머물고 싶던 도시 하바롭스크는 1991년 블라디보스토크가 개방되기 전까지 극동지역의 중심지였다. 이제는 그 영광을 물려줬지만 하바롭스크는 마치 권세를 내려놓은 자가 여유를 즐기듯 유유자적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레닌광장 북쪽에 자리한 청동 레닌상이다. 레닌이 사망한 이듬해인 1925년에 세워졌다는데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레닌의 동상이 철거된 데 반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이곳에서는 아직 건재하다. 레닌이 굽어보고 있는 광장은 하바롭스크의 행정 중심지다. 동쪽으로 하바롭스크주 정부청사가 보였다. 아침을 맞은 광장에는 벤치에서 조용히 휴식을 즐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둘기가 사람보다 많았다. 레닌광장 아래로 아무르스키 거리를 쭉 따라가면 길은 아무르 강변의 콤소몰 광장까지 잇닿는다. 콤소몰은 구소련 시절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의 이름이다. 광장에는 혁명 전사들의 모습이 조각된 오벨리스크가 굳건하고, 꼭대기에 소비에트를 상징하는 별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광장 위 우스벤스키 성당이다. 성모승천성당으로 불리는 그곳은 소비에트 시절 파괴된 후 2001년 다시 동화 같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무르강이 눈앞인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총 길이만 2,800여 킬로미터. 몽골에서 발원해 하바롭스크를 거쳐 오호츠크해로 흐르는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 부르는 그 강이다. 전망대 앞에는 강에 이름을 제공한 시베리아 초대 총독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있는데, 여행지에서 만난 아무르라는 이름들은 죄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향토박물관은 잠시 비를 피하기에는 맞춤이었다.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박물관으로 본래 이름은 ‘그라제코프 주립 자연사박물관’. 이 역시 설립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122년의 전통이 축적된 내부에는 시베리아 메머드, 아무르 호랑이, 원주민인 나나이족과 우데게이족의 생활모습 등 하바롭스크주의 역사와 자연, 민속 등 자료 15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구관에는 소비에트 시절과 관련한 물품들만 전시되어 있는데, 포스터부터 장신구까지 세월의 때가 묻은 낯설고 이색적인 소소함이 눈길을 끌었다. 강을 따라 북쪽에 다다르니 또 다른 아름다운 러시아정교회 성당이 자리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은 황금색 돔과 새하얀 성당이 질서정연했고 내부는 황홀했다. 천장에 그려진 그리스도와 네 명의 사도, 정면 6층 제단의 성모와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이콘(성상화)은 다른 세상의 것인 듯 신비롭고 이질적이었다. 이콘에 향했던 눈길은 머리를 가리고 촛불을 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 한참을 머물렀다. 진지하고 경건했다. 그 경배의 몸짓 뒤에서 할 것이라고는 숨소리를 죽이는 것 외에는 없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road시베리아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총길이 9,288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1891년에 착공해 1916년에 완공됐다. 90여 개의 도시를 거치는 동안 시간대만 7번이 바뀌고, 지나는 역만 60여 개다. 급행열차를 타면 일주일이 걸린다. 열차의 출발과 도착시간은 모스크바가 기준이다. 열차의 객실 등급은 1등석인 2인 1실의 ‘룩스Lyux’, 2등석 4인 1실의 ‘쿠페Kupe’, 3등석 6인실의 ‘플라츠카르타Pratskartny’와 지정 번호가 없는 8인 좌석의 ‘옵스치Obschy’로 나뉜다. 룩스와 쿠페는 객실이 분리되어 있지만 3등석은 객실 구분 없이 개방되어 있다. 콘센트가 있는 것은 1등석 객실뿐이다. 2등석은 객실 내부 말고 복도에 네 개, 화장실 밖과 안에 각 한 개씩 있다. 멀티 탭을 가져가면 도움이 된다. 열차 칸마다 뜨거운 물이 비치되어 라면이나 커피를 먹을 수 있다. 열차 한 칸당 두 명의 승무원이 교대근무하며 객실을 살피고 간단한 먹을거리도 판매한다. 술과 담배는 규정상 금지되어 있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흡연자들은 보통 역에 정차할 때마다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재빨리 오른다. 러시아 철도청 www.rzd.ru 러시아정교회 러시아정교회는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비잔티움의 동방정교를 받아들여 민족신앙과 결합한 종교다. 러시아정교회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양파 모양의 돔 ‘루꼬비짜’다. 눈이 많이 오는 러시아에서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흰색과 황금색은 러시아정교회 초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색채로 흰색은 평화와 순결, 황금색은 신성을 상징한다. 예배는 사제는 있지만 설교는 하지 않고, 의자 없이 서서 참여한다. 또 악기의 반주 없이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성가를 부른다. 러시아정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1990년 소련 최고회의에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후부터다. ●이르쿠츠크Irkutsk 아! 바이칼 비행기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를 가기 위한 관문. 둘러 볼 겨를 없이 아침이면 또 길을 떠나야 한다. 설렘과 염려를 교차시키느라 잠은 쉬 들지 못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의 들머리까지는 버스로 3시간 반. 부리야트족 자치구인 우스찌아르다를 스치는 동안에는 가을을 준비하는 스텝짧은 풀로 뒤덮인 초원이 길게 이어졌다. 어렴풋이 호수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버스가 멈춘 곳은 사휴르따 선착장이다. 목적지인 알혼섬을 가기 위해 철부선에 올랐다. 배는 물살을 가른 지 30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과 자동차를 섬에 부려놓았고, 세상사 다 겪은 아이처럼 옹골찬 ‘우아직러시아 군용차량을 개조한 4륜 승합차’이 벌써 마중 나와 있었다. 운전기사 안톤은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까지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며 돌투성이 길을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요란한 진동 모터 위에 앉은 듯 엉덩이는 시종 덜덜거렸다. 바이칼 호수가 품은 22개의 섬 중 알혼은 가장 크고,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이다. 거제도의 두 배쯤 되는데, 다섯 개 마을의 주민 1,500명 가운데 대부분은 후지르 마을에 모여 산다. ‘알혼’은 부리야트 원주민어로 ‘태양이 비추는 땅’이라는 뜻이다. 연 강수량이 200mm에 불과해 스텝과 사막 그리고 화강암과 침엽수림이 전부다. 그 황량함을 심장처럼 품은 바이칼호수를 향해 원주민들은 ‘바이칼은 서 있는 불. 아직도 그 불은 식지 않고 있다’며 경외심과 두려움을 표현해 왔다. 숙소에 짐을 내리고 부르한Burkhan 바위가 보이는 언덕으로 갔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13개의 세르게 신목. 조상신들이 모이는 곳을 지나니 검푸른 호수 앞으로 정좌한 두 개의 지엄한 바위가 보였다. 샤머니즘의 성지로 알려진 바로 그 자리다. 주위에는 히말라야에서 방금 내려온 성자 같은 복장을 한 외국인들이 손을 맞잡고 명상에 잠겨 있었고, 가부좌를 튼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이도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건지 모르겠지만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도, 북방 몽골인종의 시원이 서린 곳이라는 학설도, 부리야트인의 피를 이어받은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도,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바이칼 호 자체보다 신성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아직은 섬의 가장 북쪽 하보이곶으로 달렸다. 날카로운 송곳니 모양을 한 절벽. 그곳에서 보는 바이칼은 호수가 아니라 바다, 그것도 대양이었다. 경계도 모른 채 펼쳐진 호수는 텅 빈 채 근원에 닿을 듯 아스라해서, 차라리 공허했다. 그날 밤, 호숫가에 앉아 마신, 수심 200m의 바이칼호 물로 만들었다는 보드카는 파도소리와 함께 목젖을 뜨겁게 타고 흘렀다. 떠나기 전 호수를 꼭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새벽 5시 혼자 숙소를 나섰다. 인기척 없는 마을을 두리번대며 방향을 가늠하고는 그 언덕에 다시 올랐다. 부르한 바위 앞, 잠이 덜 깬 호수는 몸을 뒤척였고 바람은 초연했다. 그리고…. 영원한 작별인 양 호수에 건넨 말은 이것뿐이었다. “스파시바… 바이칼.” ▶travel info AIRLINE대한항공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노선의 출발편은 매일 인천에서 오전 10시10분에 출발해 오후 1시50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고, 귀국편은 오후 2시50분에 출발해 오전 7시10분에 인천에 도착한다. 이르쿠츠크 노선은 12월25일부터 1월15일까지 동계노선을 주 2회(월·금요일)씩 총 6회 운항할 예정이다. 출발편은 저녁 8시50분 인천에서 출발, 밤 12시5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 귀국편은 새벽 2시30분 출발, 오전 7시10분 인천에 도착한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2시간 10분, 이르쿠츠크까지는 3시간 40분이 소요된다. SHOPPING알까기 인형 ‘마트료시카’19세기 말에 탄생한 나무로 만든 러시아 인형으로 엄마를 뜻하는 러시아어 ‘마티’에서 유래했다. 일본 전통인형인 ‘다루마’에서 영감을 얻어 1891년 러시아 민속공예화가 세르게이 말루틴이 처음 디자인했다고 전해진다. 둥근 몸통 안에는 작은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 있는데, 일본정부에 선물하려고 만든 1세트 72개가 들어있는 대형 마트료시카는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시대에 따라 외형도 변해서 만화영화의 캐릭터나 대중음악가, 스포츠 스타나 정치인의 얼굴을 담은 마트료시카도 볼 수 있다. 가격은 싼 것은 대개 400~700루블 정도이지만 디자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FOOD국민음식 ‘보르쉬’와 ‘샤슬릭’ 러시아의 음식은 슬라브 전통에 서유럽과 몽골,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지역의 영향을 받아 대개 짜고 달고 신, 자극적이고 복합적인 맛이다. 대표적인 슬라브 전통음식인 ‘보르쉬’는 감자, 당근, 양배추에 비트와 토마토로 색을 낸 스프다. 샤슬릭은 러시아어로 ‘꼬치구이’라는 뜻이다. 이름보다는 맛 ‘오물‘오물은 바이칼호에서만 서식하는 토착 물고기다. 생긴 것은 우리의 청어와 닮았다. 회나 탕, 튀김, 샐러드 등 다양하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자작나무에 훈제한 오물이 가장 인기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 리스트비얀카에는 오물을 파는 가게들이 잔뜩 있다. 가시가 적고 비리지 않아 담백하다. 39°도 41°도 아닌 40° ‘러시안 보드카’러시아를 대표하는 술, 보드카Vodka는 러시아어 ‘물voda’에서 유래되었다. 감자나 옥수수, 보리 등을 원료로 한 증류수로 무색, 무취, 무미다. 러시아 속담에 ‘4,000km는 길도 아니고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며 40도가 아니면 술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19세기 후반,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가장 입맛에 잘 맞고 숙취를 일으키는 불순물이 제일 잘 걸러지는 최상의 알코올 도수가 40%라는 것을 발견했다. 보드카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밤 11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도수 15% 이상의 주류 판매도 금하고 있다. MUSEUM연해주의 모든 것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1890년 개관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이다. 1906년 구시베리아 상업은행 건물로 옮겨졌는데,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지방을 서방에 알린 탐험가의 이름이다. 3층 건물 안에 연해주의 자연과 지리, 민속학, 고고학 사료들과 동식물 표본집, 화폐 등 약 20만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제가 딱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한국관에서는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물을 볼 수 있다.20 Svetlanskaya Str. Vladivostok +7 4232 414 082 100루블평일 09:00~18:00, 토·일요일 09:00~17:30 HOTEL바이칼호 바로 옆 ‘바이칼로프 오스트록’알혼섬의 후지르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로 된 시베리아 전통가옥 형태의 숙소다. 2013년 문을 열었는데 114개의 객실에 250명을 수용할 정도로 알혼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특히 바이칼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해서 객실과 레스토랑에서 호수가 보이고 새벽에도 밤에도 산책을 할 수 있는데다, 부르한 바위까지도 도보로 20분 거리다. 7, 8월 성수기 스탠다드 트윈룸의 경우, 아침식사 포함 1박에 4,500루블(약 8만원), 화장실과 샤워실은 객실 3개가 있는 한 층에서 공동으로 사용한다. 욕실용품은 비치되어 있지 않다. 호숫가에서 바비큐를 할 수 있도록 그릴과 장작, 숯 등 일체의 도구도 대여해 준다. 666137, Russia, Irkutsk Region, Olkhonskyi District, Village Khuzir, Street Pribreznaya, 3+7 3952 404 202 www.baikalovostrog.ru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대한항공 www.koreanair.com 참좋은여행 www.verygoodtour.com
  •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흉상 서울대에서 제막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흉상 서울대에서 제막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 등을 저술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1859~1925) 선생의 흉상이 30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사범대학 역사관 앞에서 제막됐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박은식 선생은 1900년부터 서울대 사범대학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하며 서양식 교육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할 것을 주장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1905년에는 서울신문의 모태인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전태원 서울대 사범대학장은 “땅은 빼앗겼어도 국혼이 살아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박은식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때”라고 말했다. 흉상 건립은 박은식 선생 타계 90주년에 맞춰 지난해 4월부터 서울대 사범대학 주도로 추진됐다. 실제 제작은 올 4월 시작돼 10월에 완성됐다. 제작은 서울대 조소과 전준 명예교수가 맡았다. 전 교수는 “독립운동가인 박은식 선생의 내면을 표정에 담아내는 작업이 쉽지 않아 제작 기간이 다소 길어졌다”며 “선생의 인생이 응축돼 있는 노년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흉상 앞에는 “국교(國敎), 국사(國史)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한국통사의 결론 부분을 새긴 화강석을 세웠다. 제막식에는 박은식 선생의 손자인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해 이수성 전 국무총리, 성낙인 서울대 총장,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말이 2차례 나오는데 남한에 대해서는 24차례나 나온다. 남한과 북한의 분량 차이를 고려해도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김재춘 교육부 차관이 지난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방안’ 브리핑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배경으로 들었던 특정 교과서의 ‘좌편향’에 대한 예시다. 야권과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가 국정화 전환 자체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내년 말 모습을 드러낼 국정교과서가 이념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교육부가 명명한 대로 진보와 보수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려면 논쟁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 이념과 세대를 아우르는 큰 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 검정제는 국민을 통합하고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 인식을 기르는 데 이바지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이념 논쟁과 편향성 논란을 일으켜 왔다”고 국정화 전환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교육부가 검정체제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문제로 꼽았던 부분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근현대사 부분이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를 분석한 비공개 자료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을 보면 ▲해방 후 남북한의 토지개혁 ▲6·25전쟁 ▲대한민국의 정통성(건국)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6군사정변 ▲박정희의 공과 ▲10월 유신 등 18개 주제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돼 있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문이 났을 때 교육부가 다른 7종의 교과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정을 지시했던 부분들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국정교과서가 출간됐을 때 진보 진영에서 해당 부분의 서술을 놓고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기도 하다. 양정현 한국역사교육학회장(부산대 교수)은 “새 국정교과서의 필진이 구성되지 않고 내용 역시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국정화를 추진해 온 교육부와 새누리당의 그간 움직임으로 미뤄 볼 때 근현대사 부분은 현재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식으로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선 국정교과서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검정교과서 가운데 금성출판사의 서술인 ‘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인과 친일파 소유지, 지주 소유 토지 등을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373쪽)’는 대목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2013년 금성출판사 측에 ‘분배된 토지에 대해서는 매매와 소작, 저당이 금지됐다는 점을 기술하라’고 수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6·25전쟁 부분에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들이 대거 들어갈 수 있다. 미래엔 교과서에는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317쪽)라고 기술돼 있다. 교육부는 이런 부분에 대해 ‘6·25전쟁의 책임이 남북 모두에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찰명령 제1호’나 ‘전투명령 제1호’ 등 북한의 기습 남침을 보여 줄 수 있는 자료들을 수록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해선 ‘건국일’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 건국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는 이번 국정화와 별도로 앞서 개정된 2015 교육과정에서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를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꿨다. 교육부 관계자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쓰는데 우리는 ‘정부 수립’이라고 쓰며 스스로 격하한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인 정진후 정의당 의원은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도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가 현재 검정교과서의 문제로 든 18개 주제 가운데 4개 주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것이다.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공적은 부각시키고 잘못은 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5·16군사정변’에 대해 비상교육과 미래엔, 천재교육 등에서는 “군사정권으로 인해 민주화를 지향한 4·19혁명 정신이 사실상 부정됐다”고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교육부는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과 관련해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과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 역시 성과가 컸던 만큼 부작용도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금성출판사) 등으로 서술한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교육부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한 삭제를 집필진에 지시했다. 반면 새마을운동의 경우 보수 성향의 교학사 교과서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농촌 발전운동’이라고 했는데 교육부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관점의 차이”라고 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새 국정교과서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사관’의 문제점을 들어 지나치게 밝은 부분만 쓰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현 정권에 유리한 내용만 쓰게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박정희의 5·16정변이 쿠데타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주의가 억압됐다는 점 등을 수록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정한 교과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교학사를 제외한 7종의 교과서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서술한 점이 논란이 됐다. 교육부는 “천재교육, 두산동아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직접 언급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전쟁의 불가피성과 교과서임을 감안할 때 과도한 표현으로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학살’이라는 표현은 의도성, 무모함, 잔혹함 등을 내포한 것으로 자칫 국군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 이에 따라 국정교과서에서는 베트남 파병의 당위성과 효과 등에 국한돼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  조성을 한국사학사학회장(아주대 사학과 교수)은 “교육부가 검정교과서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은 뉴라이트에서 만든 자료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며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교육부가 직접 나서서 학술적 근거가 타당한지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문재인 대표 “정권바뀌면 사라질 1년짜리 시한부 교과서”

    문재인 대표 “정권바뀌면 사라질 1년짜리 시한부 교과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14일 한국사 국정교과서에 대해 “어용학자를 동원해 만든다 해도 정권이 바뀌면 사라질 1년짜리 시한부 교과서일 뿐”이라고 말했다.  문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고작 1년짜리 ‘정권 교과서’를 위해 민생을 내팽개치고 이념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참으로 나쁜 정부”라며 이같이 비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1200회 수요집회’에 참석한 문 대표는 “정부가 추진한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위안부 사진을 두고 ‘일본군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일본 아베 정권과 같은 시각으로 왜곡 기술했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분노가 아베와 박근혜 대통령을 동시에 겨냥하게 될 것이다. 채택률 제로의 교학서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돌린다고 해서 성공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앞서 문 대표는 전날 밤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새누리당이 최근 현수막으로 내건)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는 새누리당의 18번이 또 나왔다”며 “그런데 그게 사실이면, 검인정 교과서들을 합격시켜준 박근혜정권이 책임지고 물러나야할 일 아닌가요? 최소한 교육부장관은 해임감”이라고 비판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싸움은 21세기 친일파와 21세기 독립파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원내대표는 “‘역사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김구,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배울 것이고, 임시정부는 상해로 망명한 독립투사의 정치단체로 격하될 것이고, 을사오적을 근대화의 선각자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이 대한민국 헌정을 유린했다면 딸(박 대통령)의 10월 유신은 대한민국 역사를 유린하려고 한다”고 박 대통령을 겨냥했다. 전날 박 대통령이 역사교육에서 정쟁·이념대립으로 국민을 갈라선 안 된다고 말한 데 대해서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역사해석 단일화를 올바른 역사교육이라고 포장했다. 새로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비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 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 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말이 2차례 나오는데 남한에 대해서는 24차례나 나온다. 남한과 북한의 분량 차이를 고려해도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김재춘 교육부 차관이 지난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방안’ 브리핑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배경으로 들었던 특정 교과서의 ‘좌편향’에 대한 예시다. 야권과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가 국정화 전환 자체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내년 말 모습을 드러낼 국정교과서가 이념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교육부가 명명한 대로 진보와 보수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려면 논쟁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 이념과 세대를 아우르는 큰 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 검정제는 국민을 통합하고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 인식을 기르는 데 이바지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이념 논쟁과 편향성 논란을 일으켜 왔다”고 국정화 전환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교육부가 검정체제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문제로 꼽았던 부분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근현대사 부분이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를 분석한 비공개 자료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을 보면 ▲해방 후 남북한의 토지개혁 ▲6·25전쟁 ▲대한민국의 정통성(건국)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6군사정변 ▲박정희의 공과 ▲10월 유신 등 18개 주제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돼 있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문이 났을 때 교육부가 다른 7종의 교과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정을 지시했던 부분들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국정교과서가 출간됐을 때 진보 진영에서 해당 부분의 서술을 놓고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기도 하다. 양정현 한국역사교육학회장(부산대 교수)은 “새 국정교과서의 필진이 구성되지 않고 내용 역시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국정화를 추진해 온 교육부와 새누리당의 그간 움직임으로 미뤄 볼 때 근현대사 부분은 현재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식으로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선 국정교과서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검정교과서 가운데 금성출판사의 서술인 ‘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인과 친일파 소유지, 지주 소유 토지 등을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373쪽)는 대목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2013년 금성출판사 측에 ‘분배된 토지에 대해서는 매매와 소작, 저당이 금지됐다는 점을 기술하라’고 수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6·25전쟁 부분에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들이 대거 들어갈 수 있다. 미래엔 교과서에는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317쪽)라고 기술돼 있다. 교육부는 이런 부분에 대해 ‘6·25전쟁의 책임이 남북 모두에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찰명령 제1호’나 ‘전투명령 제1호’ 등 북한의 기습 남침을 보여 줄 수 있는 자료들을 수록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해선 ‘건국일’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 건국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는 이번 국정화와 별도로 앞서 개정된 2015 교육과정에서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를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꿨다. 교육부 관계자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쓰는데 우리는 ‘정부 수립’이라고 쓰며 스스로 격하한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인 정진후 정의당 의원은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도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가 현재 검정교과서의 문제로 든 18개 주제 가운데 4개 주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것이다.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공적은 부각시키고 잘못은 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5·16군사정변’에 대해 비상교육과 미래엔, 천재교육 등에서는 “군사정권으로 인해 민주화를 지향한 4·19혁명 정신이 사실상 부정됐다”고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교육부는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과 관련해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과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 역시 성과가 컸던 만큼 부작용도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금성출판사) 등으로 서술한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교육부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한 삭제를 집필진에 지시했다. 반면 새마을운동의 경우 보수 성향의 교학사 교과서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농촌 발전운동’이라고 했는데 교육부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관점의 차이”라고 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새 국정교과서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사관’의 문제점을 들어 지나치게 밝은 부분만 쓰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현 정권에 유리한 내용만 쓰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의 5·16정변이 쿠데타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주의가 억압됐다는 점 등을 수록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정한 교과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교학사를 제외한 7종의 교과서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서술한 점이 논란이 됐다. 교육부는 “천재교육, 두산동아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직접 언급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전쟁의 불가피성과 교과서임을 감안할 때 과도한 표현으로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학살’이라는 표현은 의도성, 무모함, 잔혹함 등을 내포한 것으로 자칫 국군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 이에 따라 국정교과서에서는 베트남 파병의 당위성과 효과 등에 국한돼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 조성을 한국사학사학회장(아주대 사학과 교수)은 “교육부가 검정교과서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은 뉴라이트에서 만든 자료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며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교육부가 직접 나서서 학술적 근거가 타당한지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구본영 칼럼] 톈안먼 성루 너머로 보이는 통일의 길

    [구본영 칼럼] 톈안먼 성루 너머로 보이는 통일의 길

    지난주 톈안먼 광장은 중화굴기(中華堀起)의 현장이었다. 중국이 지상 최대의 전승절 열병식으로 세계인들에게 보여 준 위용은 전율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단하의 군사 퍼레이드보다 온통 톈안먼 성루로 쏠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선 단상 한가운데로 말이다. 앞줄 끄트머리 북한 대표 최룡해의 실루엣도 어렴풋이 비쳤다. 톈안먼 성루가 놓칠 수 없는 통일 외교의 무대였기 때문일까. 박 대통령은 동맹인 미국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열병식에 참석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식에서는 “독일 통일의 사례에서도 봤듯이 통일을 하려면 주변국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속내를 비쳤다. 물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는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해 줘야 한다”는 인식은 원론적으로 적실하다. 중국은 3대째 권력 세습 중인 ‘김씨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아닌가. 하긴 통독 과정에서도 옛 소련이 막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차 대전 전범국 독일은 미국과 영국·프랑스, 그리고 소련에 의해 분단됐지만, 전승국들은 애초 강대한 통일 독일의 재탄생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서독은 미국의 지지에 이어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소련마저 통독에 동의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연 중국이 소련처럼 북한 대신 우리의 손을 들어줄 건가. 속단하긴 아직 이르다. 시 주석의 중국몽(夢)과 우리가 그리는 통일의 비전은 다를 수 있는 탓이다. 중국도 핵 개발로 동북아의 안정을 깨는 북한이 점점 부담스럽지만, 미국과의 패권 경쟁을 앞두고 북한이란 완충지대를 버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성루 외교’로 복잡한 통일 퍼즐의 첫 단추 하나가 겨우 풀렸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지뢰 도발에 유감을 표명하고 남북 대화와 교류 확대를 약속한 ‘8·25 합의’ 후 북한의 태도를 보라. 북한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설사 인공지구위성을 발사한다고 해도 (남측) 당국이 이를 구실로 남북 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예고하며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 노선을 고수하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평화통일은 최선의 목표여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도 이를 표방한다. 다만 그런 당위성대로 흐르지 않을 때를 대비한 ‘통일 플랜 B’도 꼭 필요하다. 얼마 전 통일준비위 심포지엄에서 러시아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흡수 통일이 아닌 점진적 통일은 사실상 환상에 불과하다”고 제3자의 객관적 시각을 전했다. “(가능성은 적지만) 북한의 개발독재가 성공한다면 장기적 평화 공존이 가능할 것”이라는 사족과 함께. 세습체제의 포기를 뜻하는 합의 통일에 북한이 응할 리 없고, 북이 핵을 움켜쥔 채 개발독재에 성공한다면 분단이 장기화한다는 불길한 얘기다. 그렇다면 통일 퍼즐 맞추기의 다음 수순은? 역시 통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통독 전 서독은 경제력이나 인권, 복지뿐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사회주의체제 동독을 압도했다. 그러기에 동독 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기꺼이 서독 주도의 ‘통일 열차’에 탑승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경제력은 북한을 압도하지만, 군사력은 그러지 못한 게 현실이다. 잠수함과 핵·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은 외려 열세다. 미·소 냉전을 종식시킨 원동력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힘의 우위에 기반한 화해정책’이었다. 미국이 전략무기 감축협상 등 데탕트 노선과 함께 ‘스타워스’(우주전쟁)를 불사할 태세를 보이자 경제난으로 고민하던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의 결단을 내렸다. 대만과 양안 대화를 하고 있는 중국도 이번에 톈안먼 쇼윈도에 최첨단 무기들을 내놓지 않았나. 통일 대업을 이루려면 주변국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경제력과 복지, 군사력 등 전 부문에서 우리의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 인류 역사상 초유의 실험인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독일식 통일이라는 ‘원치 않는 사태’에서 허둥대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의 내실부터 다져야 하겠다. 이런 상식을 뛰어넘어 통일 퍼즐을 맞추는 ‘신의 한 수’는 어디에도 없다. 논설고문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