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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사 풍성...부산 서구 한달간

    “3.1운동 100주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겠습니다” 부산서구는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월 한달 간 다양한 행사를 편다고 22일 밝혔다. 부산 서구에 따르면 3월 1일 오전 10시30분 구덕운동장 내 버스주차장에서는 ‘서구와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구덕운동장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조선인 차별대우에 항거해 일으킨 ‘부산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사건’)’가 일어난 역사적인 곳이다. 기념식은 구덕운동장 내 버스주차장에서 열리는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재현하는 ‘서구민 선언문’ 낭독, 서구여성합창단의 3.1절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이 있을 예정이다. 식전행사로는 풍물패의 길놀이, 페이스페인팅, 태극풍선 배부 등이 마련된다.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300여 명의 참석자들이 구덕운동장 정문을 출발해 동대신로터리, 동아대 부민캠퍼스에 이르는 1.5㎞ 구간에서 3.1운동 당시의 만세삼창 재현, 태극기 몹 등 거리퍼레이드에 나선다. 서구 및 서구자원봉사센터 홈페이지에 ‘시민 참가 신청 창구’를 마련해 오는 28일까지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며, 참가 학생들에게는 자원봉사활동 시간을 제공한다. 또 동대신2동 중앙공원 내 부산광복기념관 일원에서는 문화행사 ‘그날의 함성! 100년의 기억’이 3월 한 달간 열린다. 개막식은 3월 1일 오후 2시 거행되며, 부산시립예술단과 함께하는 문화공연, 광복기념관 투어, 초·중·고생 대상 ‘나라사랑 태극기 만들기’ 체험 이벤트 등이 있을 예정이다. 이밖에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는 부산시립예술단의 문화예술공연, 매주 토·일요일 오후 2시에는 ‘독립, 희망을 노래하다’ 테마기획 영화제가 열리고, ‘나에게 보내는 독립엽서, 광복우체통’ 무료발송 이벤트, ’캘리그라피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어록‘ 야외 특별전시회가한 달 내내 진행된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공사끝난 하얼빈역으로 안중근 기념관 옮겨갈 수 있을까?

    [특파원 생생리포트] 공사끝난 하얼빈역으로 안중근 기념관 옮겨갈 수 있을까?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조명받는 가운데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거사 장소인 하얼빈역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공사가 끝난 하얼빈역에는 이전 안중근 기념관의 자취가 모두 사라졌다.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시내에 있다. 원래 2014년 1월 19일 하얼빈 기차역에 문을 열었었다. 안 의사는 거사 직전 11일 동안 하얼빈에 머물며 하얼빈 기차역, 조린공원, 하원가(옛 일본총영사관), 삼림가(당시 하얼빈 한민회장이었던 김성백의 집), 채가구 등에 발자취를 남겼다. 기념관은 안 의사가 하얼빈에 머문 행적을 중심으로 그의 인물사와 사상, 거사 및 순국 과정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안 의사 기념관은 2013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하얼빈역 거사 장소를 알 수 있도록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부탁으로 세워졌다. 중국 정부의 주도로 문을 연 하얼빈역 안 의사 기념관은 3년간 30만여명이 방문했다. 하지만 개관 3년 만인 2017년 하얼빈 기차역 공사 때문에 하얼빈 시내 조선족 민속박물관 1층으로 옮겨와야만 했다. 기념관 2층에는 조선족 민속박물관과 조선족 음악가인 정율성 기념관이 있다.하얼빈역에 있었던 기존 기념관은 통유리창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던 격발 장소를 볼 수 있어 110년 전 역사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각각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가 섰던 기차역 플랫폼 위치에는 바닥의 표지를 비롯해 ‘안중근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 사살사건 발생지’란 게시판과 조명도 설치돼 있었다. 현재 안 의사 기념관은 그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조선반도의 독립을 위해 31년 짧은 생애를 바쳤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긴 하지만 조선민족예술관 안에 있어 안 의사가 조선족이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하얼빈 기차역의 전면 개조 공사는 지난해 12월 25일 마무리됐다. 1899년 건립된 하얼빈역은 그동안 6차례 증축공사를 했으며 이번 공사는 2015년 1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3년간에 걸쳐 이뤄졌다. 신설 하얼빈역은 100년 전의 모습을 되살려 유럽의 스타일과 현대적 요소를 조화시킨 ‘동양의 작은 파리’와 같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평가다. 베이징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하얼빈 기차역에서 1909년 10월 26일 있었던 안 의사의 거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사관측은 하얼빈역으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다시 이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글·사진 하얼빈·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펜을 든 동양 소년, 독립을 외치다

    [그 책속 이미지] 펜을 든 동양 소년, 독립을 외치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정상천 지음/산지니/316쪽/1만 6000원 빛바랜 흑백사진, 서양 소년들 사이로 익숙한 외모의 동양 소년이 앉아 있다. 다부진 입매가 돋보이는 소년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권유로 프랑스로 유학 간 서영해(원 안)다. 우리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보베시의 ‘리세’에서 파란 눈의 축구부 급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엄혹했던 시절, 일제에 저항해 어떤 이는 총과 폭탄을 들었지만 어떤 이는 펜을 들고 낯선 땅에 갔다. 외교관이자 언론인, 소설가였던 서영해는 일생을 서방세계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데 힘썼다.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고 할 정도로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양대 외교 축이었지만, 안타깝게 역사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책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막내로 활동하다 1920년 프랑스로 유학 간 청년 서영해를 그린다. 그는 임정 외무부의 지시로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상을 전 유럽에 알렸다. 불어로 장편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과 민담집 ‘거울, 불행의 원인’ 등도 집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유럽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여인 엘리자와 결혼해 아들 스테판을 낳았고, 스테판의 딸인 수지 왕이 할아버지의 첫 전기에 추천사를 썼다. “할아버지는 흐르는 물에 과감히 역행해서 헤엄치는,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대단한 이상주의자였고, 평화수호자였으며, 반파시스트이자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애국자였을 것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독립운동가 144명 생애 한 권에… 인명사전 출간

    독립운동가 144명 생애 한 권에… 인명사전 출간

    김구, 유관순,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 144명의 전 생애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이 출간됐다. 독립기념관은 2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출판보고회를 열고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는 편찬사업을 시작한 이래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전3권)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 인명사전은 단순 나열식이 아니라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독립운동 활동을 상세히 기록한 전기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특별판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장(31명)과 대통령장(91명) 서훈을 받은 122명과 독립장 서훈자 가운데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인정된 22명 등 독립운동가 총 144명의 삶과 투쟁이 기록돼 있다. 1권과 2권에는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과 유관순 열사가 포함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김구 주석 등 각료급 독립운동가들이 수록됐다. 3권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인 쑨원, 장제스, 헐버트, 스코필드 등이 수록됐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최근 독립유공자 지정 여부로 논란이 된 김원봉 의열단장 등 북한정권 수립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다루지 않았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원봉 선생은 의열단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인물로 독립운동 공적에서는 걸출하지만 정치권의 반대로 원고를 준비해 놓고도 싣지 못했다”며 “2024년 완간되는 사전에 (김원봉 선생도) 넣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여성독립운동가 51인의 이름 GS25 도시락에 스티커 부착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 편의점들이 우리 역사 알리기에 앞장선다.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은 국가보훈처와 손잡고 여성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캠페인을 22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이어 간다고 21일 밝혔다. 캠페인은 전국 1만 3500개 GS25와 GS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도시락 상품에 여성독립운동가 51인의 이름과 공적이 담긴 스티커를 부착해 홍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오는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는 고객 100명과 임직원 10명이 함께 임시정부 인사의 주요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2박 3일 일정의 ‘상하이 임시정부 견학’도 계획 중이다. GS리테일은 “허만정 GS그룹 창업주가 100여년 전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해 상하이 임시정부의 후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에 착안해 이번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편의점 CU(씨유)의 BFG리테일도 독립기념관과 함께 ‘함께해요 3·1운동 100주년 캠페인’을 진행한다. 점포 내 안내게시판에 3월 손병희 선생을 시작으로 12월 윤봉길 의사까지 ‘2019 이달의 독립운동가’ 포스터를 매월 게시한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공연으로 되새기는 독립… 28일 ‘도봉100人 평화음악회’

    서울 도봉구는 오는 28일 창동역사문화공원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도봉100人 평화음악회’를 개최한다. 도봉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비폭력 평화정신의 메시지를 담아 도봉구민 100명이 출연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로 진행될 예정이다. 낮 12시부터 행사장에서는 독립운동 훈장만들기,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청사 포토존 부스를 운영한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유적지 답사, ‘암살’ 영화 상영, 저항시 낭송 등도 이어진다. 오후 7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도봉100人 평화음악회’에서는 평화의 소녀상 무용 퍼포먼스, 뮤지컬 ‘창동의 세 마리 사자’, 도봉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등이 펼쳐진다. 이동진 구청장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영등포, 中 상하이 황푸구와 우호협력

    서울 영등포구가 중국 상하이시 황푸구와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영등포구는 채현일 구청장이 지난 18일 차오커젠 항푸구 구장과 함께 우호협력의향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금융, 의료, 문화, 교육, 과학, 체육,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호협력 관계를 이어갈 것을 합의했다. 인구 65만명인 황푸구는 상하이시의 정치·경제·행정·문화의 중심지로 상하이의 심장이라 불린다. 전통적인 자연경관과 현대적인 신도시의 조화를 이룬 국제도시이며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날 체결식에서 채 구청장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에 황푸구와 우호협력을 체결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향후 실질적 교류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두 도시가 함께 발전해 나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채 구청장을 비롯한 구 관계자는 우호협력의향서 체결식에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방문했다. 이곳에서 애국가 제창과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하며 우리나라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렸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3·1절 100주년 남북 공동행사 무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3·1절에 개최하려던 남북공동 기념행사가 무산됐다. 통일부는 21일 “북한이 남북 공동기념행사가 이번에 어렵겠다고 오늘 공식적으로 통보해 왔다”고 밝혔다. 북측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 앞으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명의의 통지문을 보내 이렇게 알려 왔다. 북측은 시기적으로 행사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통일부는 설명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도 고위 당정청 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북측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을 2월 말 개최하는 상황에서 곧이어 남북 공동행사를 치르는 것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며 “이 밖에 여러 환경이 남북 공동행사를 하기에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공동 기념하기 위해 실무적 방안을 협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북측에 공동행사와 음악회 등 기념사업 관련 제안을 전달했다. 또 지난 1일 개성공동연락사무소에서 열린 정례회의 때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 김광성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장을 만나 공동행사 개최 문제를 논의했다. 공동행사 무산에는 북미 정상회담 준비에 따른 북한의 실무적 부담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견해 차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남측은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를 건국의 뿌리로 보고 있다. 반면 김일성 주석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에 무게를 싣는 북측은 임시정부를 하나의 ‘당파 투쟁’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통일부는 “공동 기념행사가 어렵게 됐다고 전체 (평양)공동선언이 이행되지 않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100년 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걸렸던 태극기

    100년 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걸렸던 태극기

    2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어린이 관람객들이 전시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를 유심히 보고 있다. 이 태극기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걸었던 것으로, 임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붕준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만들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중국산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중국산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생활 디자인으로 인기 중국산 휩쓸자 국내 제조업체 5곳도 안돼 태극기 부대도 중국산 흔드는 씁쓸한 풍경 규격 안 맞고 깃봉도 없는 짝퉁 저질 제품“40개 살 테니까 조금만 깎아줘.” 서울 중구 남대문의 한 문구점 앞에서 태극기 머리띠를 구입하던 한 어르신이 점원에게 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그가 고른 물건은 ‘made in china’. 즉 중국산 태극기다. 중국산임을 알고 사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선택권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물건을 사며 제조국까지 유심히 살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는 박영효가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직접 만든 것을 처음으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우리 민족의 얼과 한으로 존재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한 것이 바로 이 태극기다. 이처럼 숭고한 존재였던 태극기는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우리 일상 속 문화 코드로 변모했고 정부는 관련 훈령도 개정한다. 속옷, 양말 등 일회용 소모품 등과 같이 태극기의 품위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물품에 대해 사용 범위를 제한하던 것을 삭제하고, “국기의 깃 면에 구멍을 내거나 절단해 사용하는 경우나 국민이 혐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활용되는 경우”만 그 활용을 제한했다. 전에 없던 태극기 특수였지만 이때 중국산 태극기도 많이 흘러들어왔다.중국산 태극기는 순식간에 시장을 잠식해 나가며 태극기 산업을 위협했다. 국민들의 태극기 게양률도 계속 감소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태극기를 직접 제조하는 업체는 5곳이 채 안 된다. 폐수처리가 필요한 염색은 섬유 공단 안에서 해야 하므로 따로 맡기고 염색이 된 원단을 받아 공장에서 재가공한다. 재단, 재봉 등 대부분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며 등장한 태극기 부대는 국내업체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규모 행사에 쓰이는 태극기는 중국산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국산은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만큼 질적인 차이도 크다. 태극기는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라 제작돼야 한다. 중국산이 이러한 규정을 지킬 리 없다. 규격에 맞지 않는 모양은 물론이거니와 깃봉도 없는 저질이 난무한다. 그야말로 짝퉁이다. 애국을 말하면서 짝퉁 태극기를 흔드는 장면은 못내 씁쓸하다. 올해는 3ㆍ1 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3ㆍ1절을 앞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존중받고 널리 휘날려야 할 태극기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태극기 부대의 부정적 이미지 확산이 시민의 태극기 구매 욕구를 떨어뜨렸고 지자체 또한 태극기 사용에 있어 조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성수동에서 태극기 제작업체를 운영하는 정구택(69) 동영산업 대표는 ‘태극기에 정치적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이 걱정된다’며 ‘하루 빨리 태극기가 다시 사랑받길 바란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글 사진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文 “‘평화의 길’ 간디 정신 한국인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

    文 “‘평화의 길’ 간디 정신 한국인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

    문재인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21일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마하트마 간디 흉상 제막식’에서 아시아 평화·번영을 기원했다. 1박2일 일정으로 이날 국빈 방한한 모디 총리는 문 대통령 부부와 함께 제막식에 참석한 뒤 롯데월드타워에서 친교 만찬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제막식 축사에서 “위대한 영혼 간디 탄생 150주년을 축하한다. 올해는 한국에도 뜻깊은 해로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며 “‘평화가 길이다’라는 간디의 가르침이 한국인의 가슴에도 영원히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간디의 위대한 정신이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의 평화·번영으로 실현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앞서 인도 정부의 ‘간디 탄생 15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는 연세대에 흉상을 기증했다. 행사에는 연세대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이자 기념사업 위원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참석했다.  모디 총리는 22일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인도는 문재인 정부 신남방정책의 핵심 국가로 지난해 7월 문 대통령이 국빈 방문한 바 있다.  롯데월드타워를 방문지로 고른 것은 인도 발전의 롤모델로 한국을 제시해 온 총리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모디 총리는 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에게 서신과 자신의 시집도 선물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안양시, 생존애국지사 자택에 독립유공자 명패달기 운동 전개

    안양시, 생존애국지사 자택에 독립유공자 명패달기 운동 전개

    경기도 안양시는 3.1절을 앞두고 최대호 시장이 애국지사 김국주(95) 옹을 방문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21일 밝혔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진행되고 있는 생존애국지사 자택 명패달기운동의 일환이다. 지난 20일 최 시장은 경기남부보훈지청장, 광복회안양시지회장과 함께 김국주 옹의 자택을 방문 현관에 독립유공자 명패를 부착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가 예우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며 김씨 부부와 환담을 했다. 앞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보훈단체장 간담회도 개최했다. 192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 씨는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 강점기 막바지인 1944년 중국 쉬저우(徐州)지역에서 활동했다. 1945년에는 안후이성 하류지구 연락책임자로 임명돼 지하거점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상해지구 공작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광복군 활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1977년 건국포장을 수상했다. 현재 안양에는 5746명의 국가유공자가 거주하고 있다. 시는 오는 2021년까지 3개년 사업으로 국가유공자 자택 명패달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김연아·박정현·정재일이 유관순 열사의 노래 다시 부른다

    김연아·박정현·정재일이 유관순 열사의 노래 다시 부른다

    ‘피겨여왕’ 김연아와 가수 박정현, 음악감독 정재일의 합작으로 유관순 열사의 노래가 재탄생한다.21일 KB국민은행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다시 부르는 여옥사 8호실의 노래’ 등 ‘100년 전 외침이 100년 후 대한민국에게’ 캠페인을 연다고 밝혔다. 이번 캠페인에서는 가사만 남았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7인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노래가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 환송행사 ‘하나의 봄’을 맡은 음악감독 정재일의 작곡으로 재현됐다. 가수 박정현씨가 노래를 부르고 KB금융그룹 모델 김연아씨가 나레이션을 맡았다.정재일씨는 “어떠한 선율도 역사라는 진정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겸손함을 바탕으로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희망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여성독립운동가 7명의 마음을 짙은 밤을 뚫어야 비로서 맞이할 수 있는 동틀녘을 떠올리며 곡에 담아 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박정현씨는 “이번 음원 프로젝트는 역사와 문화의 의미있는 콜라보”라면서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100년 전 선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어받아 100년 후 대한민국 국민에게 전하는 유산과도 같다”고 말했다. KB국민은행은 음원과 뮤직비디오 영상의 공유와 좋아요 건수(건당 3100원)에 따라 최대 1억원을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태화관 터에 3·1독립선언광장을 조성하는데 후원할 예정이다. 음원은 26일 KB국민은행 홈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 글러브엔터테인먼트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된다. 뮤직비디오 영상은 오는 27일 KB금융그룹과 KB국민은행의 SNS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을 아십니까”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을 아십니까”

    1919년 3월 삼천리강산은 뜨거웠다. 일제 야욕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부천에서도 항일 시위가 이어졌다. 100년 전 그날 우리는 민족독립의 새날을 꿈꿨다. 3·1운동 100주년. 부천시는 그때의 함성과 뜨거운 가슴을 기억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기 위해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는다. ■부천에서 만나는 3.1운동 발자취…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 1919년 3월 24일 3·1 만세운동 여파가 부천에도 불어 닥쳤다. 당시 부천군 계남면 중리(현 심곡동·중동 일대) 주민들이 일제의 농민 수탈정책에 불만을 품고 계남면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과 벽체·집기류·서류 등을 부수거나 훼손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당시 계남면사무소 직원들은 다음날인 25일 아침부터 인접 부내면사무소에서 집무했다. 27일에는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면사무소 부근 민가를 일시 빌려서 집무했다. 이런 사실을 당시 부내면 서기 이경응이 경찰서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돌자 시위 군중들이 이경응의 집을 습격해 가옥·가구 등을 모두 파괴해 가옥은 네 기둥과 지붕만 남고 벽과 창문 등은 모두 파괴됐다는 기록이 있다. 부천의 항일 만세운동 사적지인 당시 계남면사무소 자리는 현재 경원여객 차고지(경인로 244-5)로, 최근 항일유적지임을 알리는 바닥돌과 안내판이 세워졌다. 이 밖에도 부천에는 1927년 10월 일본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해 농민조합운동이 있었던 부평수리조합 터(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1927년 9월 24일 당시 소사역 하역노동자들이 일본인 역장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해 동맹파업을 일으킨 소사역 하역노동자 동맹파업지(현 심곡본동 부천역사) 등 항일운동 사적지가 있다. ■안중근공원에서 열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항일 민족정신을 기리는 대표적인 장소로 20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반입된 안중근 의사 동상을 유치해 조성한 부천의 안중근공원을 꼽을 수 있다. 시는 오는 3월 1일 이곳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독립선언서 낭독, 국가유공자 표창, 기념사, 삼일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이 진행된다. 기념공연으로는 부천의 독립운동을 다룬 초이스 뮤지컬 컴퍼니의 연극 공연이 마련된다. 기념식 후에는 시민들과 함께 손태극기를 흔들며 3.1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거리행진을 벌인다. 행진은 안중근공원부터 부천우체국, 뉴서울아파트 등을 지나 시청 잔디광장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부대행사로는 시청 1층 로비에서 ‘3.1운동, 부천과 만나는 100년’ 전시회가 열린다. 부천의 독립운동과 3.1운동 기념사업을 소개하는 전시는 3월 1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다. 한편 안중근공원에서는 매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추모제가 열리고 10월 26일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일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3·1운동 기념 만화벽화, 특별강연, 영화상영, 기념마라톤 등 다양한 기념사업 부천시는 이 외에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한국만화박물관 광장 외벽에는 3·1운동 기념 만화벽화를 조성한다. 박물관 관람객과 시민들의 캐리커처로 3·1 만세운동을 벽화로 재현해 3월 1일부터 8월까지 전시한다. 3월 1일 박물관 로비에서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태극기 그리기 체험을 진행하고 1층 상영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생을 그린 영화 ‘동주’를 상영한다. 항일운동 코스튬 플레이어의 만세 퍼포먼스도 열릴 예정이다. 상동도서관에서는 역사릴레이 강연 ‘역사의 그날-시민과 소통하다’를 연다. 3월 2일, 9일에는 한국근현대사 및 민족운동 연구자로 저명한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16일에는 ‘단박에 한국사’, ‘헌법의 상상력’ 등 베스트셀러 역사도서를 집필한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 강연한다. 심곡도서관에서도 3월 8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강좌 ‘인물로 배우는 역사, 독립운동가 대 친일파’를 개최하고, 3월 1~10일 도서관 로비에서 항일저항 작품을 전시하는 3·1운동 100주년 도서 전시전을 연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무료 영화 상영도 진행한다. 22일 영화 ‘밀정’을 시작으로 3월 8일 ‘박열’, 3월 15일 ‘귀향’, 3월 22일 ‘암살’이 시청 어울마당에서 저녁 7시에 상영된다. 삼일절에 부천종합운동장에서는 ‘3·1절 100주년 기념 부천마라톤대회’가 열린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제주 여성 독립운동가·교육자 최정숙을 기억하다

    제주 여성 독립운동가·교육자 최정숙을 기억하다

    제주의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최정숙(1902~1977) 자료집이 발간됐다.제주도 설문대여성문화센터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기 위해 ‘최정숙-최정숙을 만난 사람들’ 구술자료집을 발간했다고 20일 밝혔다. 센터는 ‘최정숙을 기리는 모임’과 함께 2017년부터 2년간 최정숙과 가까이 지냈던 46명의 구술을 묶어 550쪽 분량의 구술자료집을 만들었다. 최정숙 선생의 흔적을 찾아 신성여고, 진명여고, 이화여대, 고려대 의대 등을 탐방조사했다. 자료집은 중앙기관과 전국 도서관, 유관기관, 교육청 등에 배포할 예정이다. 최정숙은 최초의 여성 교육감이자 초대 제주교육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해방 후 여성 교육에 매진해 부녀회를 조직하는 등 여성의식 개혁에 앞장섰다. 신성여중고 교장으로서 여성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3년 최정숙 선생에게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센터 관계자는 “구술자료집은 암울한 시대에도 정의를 위해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자세와 제주도민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최정숙 선생님의 고귀한 생애를 만날 수 있다”며 “최정숙이라는 선각 인물의 정신을 계승하고,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김구의 비서’ 김우전 前 광복회장 별세

    ‘김구의 비서’ 김우전 前 광복회장 별세

    광복군 출신으로 광복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김우전(金祐銓) 선생이 20일 오전 8시 12분쯤 별세했다. 98세.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재일 학생 민족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 고유문화유지계몽단에 가입해 활동했다.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돼 중국으로 파병되자 부대를 탈출해 그해 5월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이어 중국 제10전구 중앙군관학교 분교 간부훈련단 한광반을 졸업한 뒤 곧바로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미국 제14항공단에 연합군 연락장교로 파견됐다.1945년 3월 한미공동작전계획(OSS 훈련)에 따라 미군 OSS(국방부 전략지원사령부) 본부에서 광복군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암호문을 제작하고,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락 임무 등을 수행했다. 같은 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기요 비서(기밀을 다루는 중요한 비서)에 임명돼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선생은 1992년 광복회 부회장, 1999년과 2015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2003년 광복회장을 각각 맡았다. 그는 2003년 2월 광복회장 취임 이후 2004년 4월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월급 전액과 본인의 독립유공자 연금을 합친 돈 5000만원을 독립유공자 손·자녀 지원용 장학금으로 쾌척해 훈훈한 감동을 줬다.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에 대한 역사인식의 부족과 왜곡’,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공동작전에 관한 연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에 관한 역사 재조명, ‘한국광복군의 OSS 특공작전’ 등 다수의 논문과 ‘김구통일론’,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다. 발인은 22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빈소는 서울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이다. (02)2225-1004.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靑, 임시정부 수립 4월 11일 임시공휴일 검토

    청와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은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국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로 4월 11일 임시공휴일 지정을 제안했다”며 “현재 여론 수렴 등의 과정을 거치며 (임시 공휴일 지정을)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4월 1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데는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뿌리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임시 공휴일은 법정 공휴일과 달리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 재가를 거쳐 대통령령으로 확정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제’로 하는 임시 헌장을 제정하면서 수립됐다. 정부는 그동안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던 4월 13일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식을 거행해 왔다. 하지만 학계에서 임시 헌장을 제정한 4월 11일이 맞다고 주장해 왔고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발견되면서 올해 처음으로 이날 기념식을 연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3·1운동 100년, 그날 만세 외친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3·1운동 100년, 그날 만세 외친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산 자, 죽은 자가 함께 7년의 큰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기다려 온 것은 조선 독립의 네 글자인 고로 영험한 하늘이 조선 독립 선언의 기회를 준 것이니 조선민족 중 정신병자 외에 독립만세의 선동을 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서형묵·농업·43세) “나의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목적 및 행위는 정의와 인도에 따른 것이니 죄로 인정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조선민족의 당당한 행위이고 공명정대한 목적이므로 죄에 대해 불복하고 상고한다.”(김수영·교직원·37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판결문에 담긴 일부 내용이다. 3·1운동 과정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은 평범한 조선인들이 법원에 상고 이유를 밝힌 것이다. 판결문에서 보듯 평범한 시민들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 역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100년 전 나라를 위해 발벗고 싸웠던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마련된다. 22일 개막하는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 주는 자료 200여점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생을 보여 주는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과 활동 공간을 조명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애쓴 한인들과 그 후손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3부 ‘고향, 꿈을 꾸다’로 구성된다. ‘1919년 고등법원 판결문’을 비롯해 일제의 탄압 실상을 알리며 전 세계 기독교인에게 지원을 요청한 ‘대한민국 야소교회 대표자 호소문’, 1919년 8월 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인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 다양한 자료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9월 15일까지 서울 중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③ 미완의 ‘대한민국’ <끝>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실망스럽지만 임정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선거불참…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인파로 붐볐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국 행사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중국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운 끝에 상황을 수습했다. 이때부터 미 군정은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임정 해체 공작도 개시했다.이후 김구의 여러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나뉘었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결국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불행했다. 1947년 7월 여운형(1886~1947)은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죽이려고) 위협해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른바 ‘과거 낭인’으로 살았다.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이름 뿐인 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던 민족단일국가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정을 세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일본 항복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청와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4·11 임시공휴일 지정 검토”

    청와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4·11 임시공휴일 지정 검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청와대가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임시공휴일은 법정공휴일과 달리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 재가를 거쳐 대통령령으로 확정된다. 20일 KBS가 “청와대가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보도한 이후, 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국민과 함께하기 위한 뜻으로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 부대변인은 “현재 여론 수렴 등의 과정을 거치는 등 임시공휴일 지정 여부를 검토 중”이라면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건국의 뿌리는 1948년 정부 수립이 아닌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앞서 정부는 2017년 추석을 맞아 국민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자는 취지로 그해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 적이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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