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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대통령 “임정 100년, 특권층 반칙시대 끝내야”

    文대통령 “임정 100년, 특권층 반칙시대 끝내야”

    국무회의 주재…11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정의 대한민국·평화 한반도 위해 담대히 갈 것”문재인 대통령은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민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돼야 하며, 특권층끼리 결탁·담합·공생해 국민의 평범한 삶에 좌절과 상처를 주는 특권과 반칙의 시대를 반드시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9일 오전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지난 100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이룬 국가적 성취 과실이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당초 임정 수립 100주년 행사에 참석하려 했으나, 한미정상회담을 위한 방미 일정으로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새로운 100년의 굳건한 토대”라며 “앞으로 100년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100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특히 “지난 100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이룬 국가적 성취는 이제 국민 삶으로 완성돼야 한다”며 “국민 피땀으로 이룬 국가적 성취의 과실이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이 성장하는 시대”라며 “더는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또 “경제적 불평등·양극화의 그늘을 걷어내고 국민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며 “(이것이) 혁신으로 성장하고 포용으로 함께 누리는 혁신적 포용 국가로 새로운 100년의 기틀을 세우고자 하는 이유”라고 했다. 아울러 “일부에서 우리 역사를 그대로 보지 않고 국민이 이룩한 100년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대한민국의 국가적 성취를 폄훼하는 것은 우리 자부심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이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이라며 “3·1 독립운동으로 탄생한 임시정부는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제에 맞서 자주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써 사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임정은 해방·독립을 넘어 새로운 나라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며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임정과 함께 민주공화국 역사가 시작됐고, 안으론 국민주권·국민기본권을, 밖으로는 인류문화·평화 공헌을 선언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위대한 이상이 우리의 이름 대한민국 국호에 담겨있다”며 “해방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국호·국기·연호와 함께 국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의 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밝혔다. 또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민주와 평화를 향한 선대들의 염원을 계승하고 실현해 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0년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취를 이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그 가치를 모를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국민주권을 실현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역사 또한 놀랍다”며 “4·19혁명으로부터 부마항쟁,5·18 민주화운동,6·10 민주항쟁을 지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국민이 주역이 돼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고 강조했다.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100년 전 임시정부의 이상·염원을 이어받아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첫 정부”라며 “의미가 각별한 만큼 다짐도 각별해야겠다”고 했다. 이어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평화·번영의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며 “그것이 새로운 한반도 시대다.지금 우리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저는 내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며 “북미대화의 조속한 재개와 성과를 위해 최선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100년,선대들의 뜻을 이어받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받들겠다”며 “국민과 함께 혁신적 포용 국가와 정의로운 대한민국, 평화·번영의 한반도를 위해 담대하게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서울포토] 절 하는 이갑성 애국지사 후손들

    [서울포토] 절 하는 이갑성 애국지사 후손들

    9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임시정부묘역에서 이갑성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절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국외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97명이 한국을 찾았다. 안주영 기자jya@seoul.co.kr
  • “나라 위한 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국가유공자 자택에 명패달기 나선 강동

    “나라 위한 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국가유공자 자택에 명패달기 나선 강동

    서울 강동구가 지난 8일 지역의 독립운동가 고 이정수 선생의 유족 자택에 강동구 제1호 독립유공자 명패를 부착한 것을 시작으로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시작한다고 9일 밝혔다.이번 사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유공자와 유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이들을 예우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함께 추진한다. 이정훈 강동구청장은 지난 8일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고 이정수 애국지사의 자녀 이춘근 광복회 강동구지회장의 자택을 방문해 독립유공자 명패를 부착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광복군 소속으로 김광언과 함께 북평지구에서 활동한 이정수 선생은 중국에서 광복군 입대자를 모집하는 초모 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지난 1990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 구청장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 독립유공자와 유족분들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고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구는 앞으로 지역의 국가유공자 1834명에게 명패를 달아줄 계획이다. 4~5월에는 독립유공자, 5~6월에는 민주유공자, 7월부터는 상이군경, 6·25 참전유공자 등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포토] ‘얼쑤’

    [포토] ‘얼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전통 악기 연주를 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인 랄프 안과 손자 로버트 안이 포함됐다. 연합뉴스
  • 박준희 관악구청장 “구청 광장서 임정 100주년 의미 되새겨보세요”

    박준희 관악구청장 “구청 광장서 임정 100주년 의미 되새겨보세요”

    박준희(오른쪽) 서울 관악구청장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구청 광장에 마련된 독립기념관 특별기획 순회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사진전’을 관람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 청사, 한국광복군,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를 하는 윤봉길 의사 등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며 고국을 위한 선열들의 치열한 희생과 헌신을 느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는 12일까지 열린다. 박준희 구청장은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라고 강조하며 “많은 분들이 전시회 관람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악구 제공
  • 100년 전 그날처럼… 상하이서 임정 개회 재현

    100년 전 그날처럼… 상하이서 임정 개회 재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11일)을 맞아 임시정부 출발지였던 중국 상하이에서 전시회, 학술심포지엄, 음악회 등 5일간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주상하이 총영사관은 8일 상하이시 황푸구 마당로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기념관에서 ‘임정 100주년 기념 한국주간 선포식’을 열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보고 동북아 평화를 다짐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된 한국주간 행사는 오는 12일까지 이어진다. 최영삼 상하이 총영사는 기념사에서 “상하이는 조국 독립의 성지이자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곳”이라며 “우리는 오늘 이곳 상하이에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되새기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한국주간 기간 중인 11일 상하이 훙차오 힐튼호텔에서 독립운동가 후손, 정부 및 국회 관계자, 교민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기념행사를 연다. 이 행사에는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5당 원내대표 등 국회의원들도 참여한다. 의원 대표단은 10일 밤 10시부터 이튿날 0시 30분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100년 전 임시의정원 개원 회의 재현 행사도 연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北초소와 최단거리 ‘고성 동해안 GP’ 문화재 된다

    北초소와 최단거리 ‘고성 동해안 GP’ 문화재 된다

    냉전 시대의 아픔과 평화의 염원을 담은 ‘고성 동해안 감시초소(GP)’가 등록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1953년 군사 정전협정 체결 직후 남측 지역에 최초로 설치된 감시초소인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덕산리의 ‘고성 동해안 감시초소’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8일 밝혔다. 동해안 감시초소는 지난해 9월 19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 따라 철거하기로 했으나 역사적 상징성과 활용 가능성을 고려해 보존하기로 결정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동해안 감시초소가 북측 감시초소와 최단 거리에 자리했던 역사성과 상징성 등에서 의미가 크고 남북 화합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시설로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또 ‘세종 구 산일제사 공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 ‘부산 구 동래역사’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세종 구 산일제사 공장’은 일제강점기 누에고치에서 실을 만드는 제사(製絲) 공장으로 사용되다 6·25전쟁 때 조치원여자고등학교 임시교사로 활용됐다. 이 공장은 작업 특성상 내부에 균일한 빛을 받기 위해 북쪽에 창을 높게 설치한 톱날형 지붕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근대기 산업유산인 제사 공장의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등록 결정되면 세종시의 첫 등록문화재가 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민주당 지도부 경교장 방문

    민주당 지도부 경교장 방문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8일 서울 종로구 경교장을 방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태극기를 게양한 후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경교장은 1945년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던 곳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타계 전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장소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이해찬은 김구 집무실로, 황교안은 창원과 통영으로

    이해찬은 김구 집무실로, 황교안은 창원과 통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사흘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은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 선생의 처소를 찾았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선전한 경남을 찾아 유권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는 의미를, 한국당은 비록 창원 성산에서 패배했지만 가능성을 확인한 만큼 지역 민심을 다잡겠다는 행보로 읽힌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를 포함한 지도부는 8일 서울 종로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경교장은 1945년 임정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던 역사적 장소로 김구 선생이 서거한 집무실이다. 최고위에 앞서 임시의정원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하고 경교장을 둘러본 이 대표는 “임시정부의 의미를 잘 살려 국회는 한반도 통일과 한민족 평화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특히 “논의를 해봐야겠지만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치 않을까 생각한다”고도 제안했다. 민주당은 최고위 후 ‘한반도 새 100년 위원회’와 민주연구원 주최로 열린 기념 토론회에 참석하는 등 100주년 기념 분위기를 띄우는 데 집중했다.반면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이날 창원 성산 반송시장에서 감사인사를 시작으로 창원과 통영·고성을 차례로 방문했다. 한국당은 경남 통영·고성에서 정점식 후보가 4만 7082표(59.5%)를 득표해 당선됐고 격전지 창원 성산에서는 강기윤 후보가 4만 2159표(45.2%)로 여영국 정의당 후보에게 504표 차이로 아쉽게 패배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전남교육청, 학교내 친일잔재 청산 본격 착수

    전남도교육청이 학교 내 친일잔재를 청산키로 하고 모든 학교를 대상으로 사전 전수조사를 벌이고 있다. 도교육청은 역사 전공 대학교수, 역사·음악 교원, 민족문제연구소 등 전문가 그룹으로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해 4월 한달 동안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한다. 대상은 교훈·교목 등 학교 상징과 교가, 석물, 학생생활 규정 등이다. 도교육청은 친일 음악가가 작사·작곡한 교가 현황을 파악하고 희망학교를 대상으로 작곡·편곡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친일 관련 석물인 표지석, 흉상 등 존치 여부를 조사한 뒤 교육적 활용 및 이전 비용을 지급한다. 특히 장석웅 교육감의 역점 공약인 조직문화 개선과 연계해 훈화·치사 등 훈도 문화도 점검한다. 두발·복장 검사 등 전반적인 학교 내 일제 잔재 문화을 청산한다는 방침 아래 학생 생활 규정 내용에 대해서도 전체적인 검증을 하기로 했다. 장 교육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학교 내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은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중요한 역사교육의 계기가 될 것이다”며 “아이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황교안 “박영선·김연철 임명강행 땐 결사저항”에 홍영표 반격은

    황교안 “박영선·김연철 임명강행 땐 결사저항”에 홍영표 반격은

    홍영표 “인격모독 끝까지 법적책임 묻을 것” 맞불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8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임명을 강행할 경우 결사저항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두 후보에 대한) 인격모독에 대해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맞받아쳤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박영선·김연철 장관 후보자의 임명을 철회하지 않으면 우리 당은 국민과 함께 결사의 각오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면서 “임명 강행은 야당 반대와 국민 여론은 무시해도 된다고 하는 독선과 오만 불통 정권임을 자인하는 것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국회에서 명백하게 부적격인사로 판명되거나 청문보고서 채택이 거부된 경우 임명을 강행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황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도 “핵심 측근을 무조건 감싸고 매달리는 대통령의 태도가 보기 민망하다”며 “수치를 수치로 모르면 국민이 대통령을 수치로 여기고, 경악을 넘어 분노할 것이다. 대통령의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라고 적었다. 황 대표는 민생대정장을 나설 뜻도 밝혔다. 황 대표는 “정부가 포기한 경제를 살리고, 안보를 튼튼히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품고 민생 대장정에 나설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 민주당은 발끈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경교장에서 연 최고위원회의에서 “두 후보자에 대한 인신공격이 도를 넘어섰다”면서 “장관 후보자의 인격을 모독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유한국당의 행태를 용납하지 않고,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반격했다. 홍 원내대표는 “한국당이 박 후보자에 대해 연일 근거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면서 “청문회 과정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에 대한 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거짓말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이런 식의 공작정치를 하는 것은 대단히 치졸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더이상 대통령의 정당한 인사권 행사를 방해해선 안 된다. 장관 임명 강행이 국정 포기 선언이라는 정치 공세에 동의하는 국민은 없다”면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재송부 요청에 응하지 않고 몽니를 부리는 것은 제1야당”이라고 비판했다. 홍 원내대표는 이날 개회하는 4월 임시국회와 관련, “고성·속초 산불 후속 조치와 민생경제 입법 등 처리해야 할 안건이 아주 많은데 한국당은 4월 국회도 정쟁으로 몰아갈 생각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제안에 대해 총선을 위한 선심성 추경이라고 일축했다”며 “한국당은 지난 넉 달 동안 국민의 민생경제 활성화를 무엇을 했는지 한번 되돌아보라”고 반박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외교부 청사에 걸린 독립운동가

    외교부 청사에 걸린 독립운동가

    7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 너머 외교부 청사 외벽에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임정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선생, 유관순 열사, 도산 안창호 선생의 얼굴 그림이 걸려 있다. 그라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본명 최성욱)의 작품이다. 그는 정독도서관 외벽과 신촌 토끼굴 등에 근현대사에서 주목받은 인물들을 그려 주목받은 예술가다. 뉴스1
  • ‘대화의 희열2’ 호사카 유지, 일본인이 말하는 위안부 “말이 안 돼”

    ‘대화의 희열2’ 호사카 유지, 일본인이 말하는 위안부 “말이 안 돼”

    한일 문제 연구가 호사카 유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6일 방송되는 KBS 2TV ‘대화의 희열2’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누구보다 한일문제에 대해 뜨겁게 연구하고 있는 호사카 유지가 네 번째 게스트로 초대됐다. 호사카 유지는 21년째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소신 발언을 하는 일본 출신 한국인 정치학자다. 그는 독도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는 증거를 찾아냈다. 한일문제에 대해 열띤 대화를 이어갈 호사카 유지와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화두를 던질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때 느꼈던 감정들을 털어놓았다. 당시 일본은 위안부 강제 징용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러한 일본의 뻔뻔한 태도에 호사카 유지는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이는 그가 일본군 위안부 증거를 찾기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다. 호사카 유지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일본 문서를 샅샅이 찾으러 다녔다. 그 성과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 자료집도 출간했다. 호사카 유지는 자신이 위안부 증거들을 최초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라며 당시 느꼈던 충격적인 감정들을 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호사카 유지는 일본이 반성하지 않고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했다. 또한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출연진에게 다양한 생각거리를 안기는 등 한일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6일(오늘) 오후 10시 45분 방송.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독립유공자 후손 97명 한국 온다

    도산 안창호 선생 등 국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97명이 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다. 국가보훈처는 4일 “일제강점기 인재양성과 민족계몽, 실천적 구국운동을 이끌었던 안창호 선생 등 국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97명을 대상으로 8일부터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신민회와 흥사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서리 겸 내무총장을 지낸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93)과 손자 로버트 안(73)을 비롯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국무총리였던 노백린, 이동휘 등 임시정부 요인 후손이 초청됐다. 특히 부부가 함께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했던 김성숙·두쥔훼이(중국인)의 손자이자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두닝우(53)도 한국을 방문해 12일 보훈처가 주관한 감사 만찬에서 특별 헌정 공연을 펼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시흥 월곶동의 새명소 달빛거리내 ‘성공의자’ 눈길

    시흥 월곶동의 새명소 달빛거리내 ‘성공의자’ 눈길

    경기 시흥시 월곶동 달빛거리에 지난 3일 희망과 재기의 상징인 위인테마 성공의자가 설치돼 눈길을 끌고 있다. 성공의자는 2017년부터 시 건설행정과에서 추진하고 있는 월곶동 달빛거리 조성사업의 하나로 추진됐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위인인 월트 디즈니와 백범 김구,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이 달빛거리에 설치됐다. 동상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실제 크기로 정교하게 제작돼 방문객이 함께 앉아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마련됐다. 또 위인 생애에 대한 설명표지도 함께 설치해 단순히 포토존 기능만이 아니라 위인들의 생애를 재조명할 수 있는 교육장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을 통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설치작가는 “월곶이라는 지명에서 착안해 달이 차올랐다 이울고 다시 차오르는 모습에서 재생과 재기를 모티브로 했다”며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위인들을 통해 스트레스로 지친 입시생들과 취업준비생들이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작의도를 설명했다. 박명일 월곶동장은 “월곶동 달빛거리 조성사업으로 월곶동 이미지가 점차 좋아지고 있으며 이번 성공의자가 설치돼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면서 “모두가 찾아오고 싶고 살고 싶은 월곶동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노력해 가겠다”고 밝혔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투쟁의 길로 뛰어든 ‘임정’ 4인을 만나다

    투쟁의 길로 뛰어든 ‘임정’ 4인을 만나다

    이승만, 김원봉, 김구, 안창호. 출생도, 성장도, 추구한 독립 방법도 달랐다. 그러나 이들을 묶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김구는 초대 경무국장, 안창호는 내무총장이었다. 김원봉은 의열단장으로 무력투쟁을 통해 임시정부를 도왔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인생을 던진 4인과의 가상 대화집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들녘)가 최근 출간됐다. 서울신문 기자 출신 김문 작가가 4인을 현재로 불러내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각 인물을 상징하는 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예컨대 김 작가는 지난 3월 인왕산 전망대에서 이승만을 만났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 투신 계기,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지 못했던 이유, 광복 이후 대통령 활동과 탄핵까지를 듣는다. 영화 ‘암살’로 최근에야 알려진 김원봉은 그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만났다. 검은색 양복에 시원시원한 인상의 청년으로 설정했다. 김원봉이 ‘의열단’이란 어떤 단체인지부터 차근차근 설명한다. 효창공원에서 만난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과정, 이봉창, 윤봉길과의 만남 등을 풀어낸다. 도산공원에서 만난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나오게 된 계기 등을 단호한 어조로 설명하기도 한다.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재밌다’는 데 있다. 기자 시절 500명 이상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인터뷰했던 저자의 실력이 돋보인다. 인터뷰가 상당히 매끄럽고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인물마다 개성을 잘 살려내 그들이 당시 겪었을 법한 고뇌를 풀어낸다. 여기에 관련 학자 연구 결과를 꼼꼼히 덧붙여 자칫 엇나가지 않게 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평화의 소녀상’ 1년째 국민대 교정에 서지 못합니다

    ‘평화의 소녀상’ 1년째 국민대 교정에 서지 못합니다

    학교측 “정치 쟁점 소지… 학내 설치 불허” ‘학생회 제작 소녀상 허용’ 대구대와 대비 세움측 “민족사학 건립 뜻따라 앞장서야”국민대 학생들이 학내 설치를 위해 지난해 기금을 모아 만든 ‘평화의 소녀상’이 교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학교 측은 정치 쟁점화 소지가 있어 학내 설치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소녀상을 공개 전시하며 학내 설치를 다시 한번 촉구할 예정이다. 재학생 20여명으로 이뤄진 국민대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측은 4일 하루 동안 평화의 소녀상을 학교 정문 앞에 전시하겠다고 3일 밝혔다. 소녀상은 하루 공개 이후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 교내에서 보관될 것으로 알려졌다. 세움은 지난해 4월부터 소녀상 제작을 위해 기금을 모았고, 올해 2월 주물공정까지 마무리했다. 하지만 학교 측의 반대로 학내 설치는 일단 불발된 상황이다. 세움은 지난달 3700여명 학우들의 서명을 받고 사진전을 개최하는 등 소녀상 건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태준 세움 대표는 “학교 측이 지난해 10월 말 캠퍼스 디자인위원회를 열겠다고 약속한 후 ‘소녀상 건립이 정치적 쟁점화가 될 수 있어 불허한다’는 입장만 내놓았다”며 “이후 총장과의 만남을 요청하고 있지만 학교 측은 대화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국민대가 해방 이후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가들이 세운 민족사학으로 출발한 만큼 소녀상 건립에 앞장서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학교 측은 소녀상의 의미는 이해하지만 학내 설치는 또 다른 문제라는 입장이다. 국민대 관계자는 “지난해와 입장이 달라진 게 없다”며 “국제적 교류나 연구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학내 설치를 반대하는 학생들도 있는 등 복합적 이유가 작용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학내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2017년 대구대에서 최초로 총학생회가 나서 학내에 소녀상을 건립했다. 대구대 측은 “학생회에서 모금운동을 하고 소녀상을 만든 작가가 재능기부를 해줘 건립할 수 있었다”며 “학교가 제작 의도에 동의하기도 했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큰 반대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독립신문 사장 지낸 이광수의 배신… 日법원 “민족개조론 써 총독이 장려했다” 극찬

    독립신문 사장 지낸 이광수의 배신… 日법원 “민족개조론 써 총독이 장려했다” 극찬

    일제 말 ‘천황 신민’ 자처하며 친일 가담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 수감이광수는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며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까지 맡았을 정도로 임시정부에 기여한 바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훗날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 쇠퇴의 원인’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180도 바뀐 모습을 보여 준다. 이광수는 안창호 등이 결성한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있다가 1937년 체포됐는데, 1941년 이 사건의 상고심을 맡은 일제 고등법원 형사부가 앞서 징역 5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을 뒤엎고 심리를 다시 하기로 결정하며 설명한 내용에 이광수의 행적이 잘 드러나 있다. “수양동맹회의 설립자인 이광수는 이전에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일이 있으므로 그 목적을 의심하는 자도 있었으나, 공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 체험과 세계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의 무모함을 깨닫고 회개하여 당국의 양해하에 조선으로 돌아온 자로서 독립주의자들로부터 타기(업신여기거나 아주 더럽게 생각해 돌아보지 않음)를 받은 자이다. 심사숙고한 결과 조선의 번영을 도모하는 길은 공허하고 형식적인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도덕적 체육적으로 개조해 일반적으로 문화를 향상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민족개조론을 써서 잡지 ‘개벽’에 발표해 당시 사이토 총독과도 회견해 그 포부를 진술하고 장려의 말까지 들었다.”(1941년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하라 마사카나에 판결문 일부) 결국 심리가 다시 진행된 이 사건은 같은 해 11월 관련자 36명 전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무렵 이광수를 비롯한 대부분이 친일로 전향해 이들을 처벌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의 친일 행적 논란은 광복 직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판결문 맨 앞에 적힌 그의 이름은 ‘이광수’가 아니라 일본식 이름인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였다. 그는 1940년 매일신보 사설란에 자신의 창씨개명을 발표하면서 “내가 일본적인 명으로 개명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중략)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짐은 광복을 맞이해 오래가지 못했고,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구속돼 수감 생활까지 하게 된다. 그는 친일에 대한 고백서 ‘나의 고백’을 통해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변명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일본은 오늘 정오를 기해 미국에 항복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1901~1989)가 떨리는 목소리로 종전을 선언했다. 광복을 기뻐하는 국민의 만세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중국군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1876~1949)는 크게 낙담했다. 그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일본 항복 받아낸 미국의 ‘리틀보이’ 이날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은 “짐은 제국정부(일본)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해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했다”로 시작한다. 히로히토가 말한 ‘공동선언’이란 1945년 7월 26일 발표한 독일 포츠담 선언을 가리킨다. 연합군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이 선언에는 전후 일본 처리 문제 등이 담겼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항복했다. 포츠담 선언 당시 일본은 혼자서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 사실상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미국은 일본 도심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코드명 ‘리틀보이’가,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투하됐다. 10일 일본은 스위스에 있던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일본이 항복한 직접적 이유는 원자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에도 “적국은 잔학한 원자폭탄을 사용해 수많은 국민들을 살상하고 있다. 그 참상의 범위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더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고 인류의 문명까지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짐작할 만한 구절이다. 민중운동가 함석헌(1901~1989)은 원자폭탄 투하 뒤 찾아온 광복에 대해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는 “우리의 광복은 미국의 원자탄 두 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미국의 폭탄이 없었다면 나라를 되찾지 못했을까. ●독립단체 “광복 위한 결정적 시기 온다” 확신 1930년대 후반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하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이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상대로 국외 무장운동 세력과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격하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폭동과 무장봉기에 나서면 충분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1908~ 1932)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뒤 중국 각지를 떠돌다가 1940년 충칭에 터를 잡았다. 김구는 이때부터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키며 국내에 진입할 준비를 했다. 광복군은 지청천(1888~1957)을 총사령관으로 1940년 9월 결성된 임정 최초의 정규군이다. 초기에는 장교 30여명으로 이뤄진 ‘사병 없는 부대’였다. 1942년 김원봉(1898~1958)이 조선의용대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광복군은 1945년 4월쯤 340여명, 같은 해 8월 700여명 정도였다. 아무리 많아도 1000명을 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은 군속을 포함해 최대 750만명으로 추산된다. 임정이 일대일로 맞붙어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일부 언론에서 “원자탄이 없었어도 김원봉 등 걸출한 혁명가들이 일본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은 “광복군의 규모와 전투 능력을 아무리 높게 쳐도 일본을 몰아내기는 어려웠다. 광복군은 그저 항일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일본군 750만… “광복군이 몰아내긴 힘들어” 그렇다고 임정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체념에만 빠져 있었을까. 아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해 우리 스스로 독립을 얻어내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에는 버마(현 미얀마) 임팔전투에 참가해 1945년 7월 일본군이 패배해 철수할 때까지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8월 중국에 있던 미국 정보기구 육군정보전략본부(OSS)에서 광복군 38명이 특수요원 훈련을 마치고 국내 잠입을 기다렸다.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역사소설 전문 이원규(72) 작가는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두고 국제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장제스(1887~1975) 중국 국민당정부 총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김구 등 임정 수뇌부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 한국은 카이로 회담의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우리를 도왔다. 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장 연구위원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일본은 소련의 참전 등으로 결국은 패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당시 한반도는 (임정의 다각적 노력 등이 맞물려) 광복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연합국 덕에 해방? 독립노력 폄하해선 안돼” 일부 학자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길 힘이 없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 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항복한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 우리를 기다린 것은 ‘한반도 분단’이었다. 당시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뒤 거침없이 한반도로 진격했다. 당시 미군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어 한반도로 바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은 소련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나눠 들어오자”고 제안했다. 당시 임시로 친 철조망이 지금까지도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놨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리가 좀더 주도적으로 독립을 얻어냈다면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과 전쟁, 이념 갈등 등은 없었을 수도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안창호에 내란음모죄 씌운 日…궐석재판 시도했다가 여론 뭇매

    안창호에 내란음모죄 씌운 日…궐석재판 시도했다가 여론 뭇매

    1919년 3·1운동의 힘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동하자 일제는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김규식 등 임시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핵심 요인 16명을 재판에 넘겼다. 일제의 형법은 내란 및 내란 예비음모죄의 경우 3심 법원인 고등법원이 단심제로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등법원 검사장이었던 나카무라 다케조는 1924년 3월 공소를 취소했다. 재판부는 공소 기각 판결을 내리면서 이와 같이 적었다. “(피고인들은) 1919년 3월 이후 조선 각지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에 호응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기관을 조직해 각기 요직에 취임하여 (중략) 1920년 1월경 단연 독립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뜻을 관철하기로 결정하고 계책했다.”(1924년 3월 12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오카모토 시토쿠의 판결문 일부) 검사장이 공소 취소 이유를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들 중 보석으로 풀려난 영국인 조지 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체포되지 않아 재판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는 피고인이 없는 상황에서 궐석재판이라도 감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잡히지를 않으니 궐석재판을 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효력이 없어 공소를 취소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붙잡혔던 쇼는 1920년 단둥에서 신의주로 들어갔다가 일제에 체포됐다. 표면상 이유는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일제는 이륭양행이라는 무역선박회사를 소유한 쇼가 중국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가 국내와 소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피고인은 임시정부와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성질, 목적, 수단 등을 알고도 그 목적 달성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임시정부원 및 연합회원에게 자기 소유의 주택과 기타 건조물을 빌려주고 관리에게 선박을 제공해 상해와 안동 간의 왕래에 사용하게 해 군수품, 문서 등을 운반하고 금품의 발저(송금 등)에는 자기 명의를 사용하게 하고 제국 관헌의 행동을 통보하는 등 내란 예비행위를 방조했다.”(같은 판결문) 하지만 서구 언론을 통해 쇼 체포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일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법원은 쇼를 보석으로 석방했다. 쇼는 이후에도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광복을 2년가량 남겨둔 1943년 11월 생을 마감했다. 3·1 운동이 만들어 낸 임시정부는 상하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 그것도 일제의 경비가 가장 삼엄한 서울 한복판에도 ‘한성정부’가 있었다. 한성정부는 13개 도와 각계 대표자가 모여 대표성과 정통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일제는 일찌감치 진압에 나섰다. “피고인 한남수, 김사국은 변호사 홍면희, 이규갑 등의 권유로 조선국민대회를 조직해 통일적으로 각소에서 봉기하는 독립운동단을 망라해 조선임시정부를 설립함으로써 계통적 독립시위운동을 하도록 기도했다. (중략) 김유인, 김사국 등은 (중략) 경성부 서린동 ‘봉춘관’에 조선 13도의 대표자를 모이게 함과 동시에 학생과 3000명의 노동자를 종로에 모아 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하며 인쇄물을 배부하는 등 실행계획을 만들었다.”(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쓰카하라의 판결문 일부) 이들 중 가장 중한 형을 받은 장채극은 징역 2년, 다른 5명은 징역 1년~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성정부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면서 민주정을 채택함을 분명히 했고 이는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로도 이어졌다. 이들이 작성한 국민대회 취지서는 “3·1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중략) 민족일치의 동작으로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대표자들로서 분회를 조직해 이를 세계에 선포”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약법(約法) 제1조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함’ 등으로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성정부는 당시 연합통신(AP)에도 보도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고,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조직됐다는 점 등에서 훗날 임시정부 통합 과정에서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 사건 피고인 중 한 명이었던 이규갑은 훗날 상하이로 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을 이어 나갔고 해방 후에는 제2대 국회의원까지 지낸 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취하고 운영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만든 연통제와 교통국은 3년여간 운영되다가 일제의 철저한 색출 작업에 무너졌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밀조직이 임시정부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1920년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연통제 운영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47명에 대한 2심 판결이 선고됐다. 이 중 가장 무거운 형인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윤태선이 받은 혐의가 당시 판결문에 자세히 기재돼 있다. “윤태선 및 박상목은 경성부 제동 취운정에서 강대호, 박시목, 송범조라는 자와 회합해 경성에 임시정부 13도 총간부를, 각 도에 그 지부를 설치해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해 독립운동을 할 것을 협의했다. (중략) 일동이 이에 찬동해 지부 조직을 완성했다.”(1920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판결문 일부) 이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연통제 조직이 1919년 7월 즈음 활동을 시작해 1921년 후반 거의 소멸됐다. 국경 인접 지역인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하고는 활발할 활동이 어려웠던 탓이 컸다. 또 면 단위까지 조직된 연통제는 일제에 큰 위협이 됐기 때문에 일제가 짧은 기간 내에 색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연통제 요원들 중 사립학교 교사·학생·전도사·승려 등 지식인이 많았다는 점, 이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가 국내외를 연결하는 민주공화국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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