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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 ‘마라톤 영웅’ 손기정 한옥 사라질 위기…“보존 방안 찾아야”

    [단독] ‘마라톤 영웅’ 손기정 한옥 사라질 위기…“보존 방안 찾아야”

    “손기정 선수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민족을 사랑했던 그의 흔적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손기정 선수의 외손자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 서울 용산구 원효로 83길에 있는 전통 한옥. 현대식 주택과 상가들 사이에서 홀로 옛 기풍을 지키고 있는 이곳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고개 숙인 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1912~2002) 선수가 살았던 집이다. 용산구는 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이 집을 ‘근현대 역사문화명소 100곳’으로 지정하고 손 선수를 소개하는 안내판과 벤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방문객이 많다는 민원 때문에 구는 올해 6월 설치물을 철거했다. 12일 찾아간 손 선수의 집에선 한국 마라톤 전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담벼락의 지저분한 낙서와 쓰레기 무단 투기 경고문이 초라함을 더했다. 이마저도 민간 재개발이 추진되면 집 자체가 헐릴 가능성이 크다. 원효로1가 재개발 추진 준비위원회는 이날 기준 70.5%의 주민 동의를 얻어 다음달 서울시에 도시정비형 재개발(옛 역세권시프트) 지구 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계획대로 재개발이 진행된다면 손 선수의 옛집을 포함한 일대 약 10만㎡의 땅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선다. 준비위 관계자는 “손 선수의 집은 문화재 보존지역이 아니어서 재개발 지구에 포함될 것”이라고 전했다. 손 선수가 지도자의 길에 나선 1940년대에 살았던 성북구 안암동 집터도 1980년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면서 헐렸다. 손 선수는 이 집에서 ‘조선마라톤보급회’를 창설하고 제자들을 지도하며 한국 마라톤의 기틀을 닦았다.손 선수는 이후 중구 장충동을 거쳐 용산구에 한옥을 지었다. 유족에 따르면 손 선수는 직접 대목수들에게 의뢰해 집의 설계부터 꼼꼼히 챙겼다. 양옥 대신 한옥을 고집한 것도 우리 것을 소중히 여겼던 그의 뜻이었다고 한다. 손 선수는 1950년대 이 집에서 4년을 살면서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자이자 사위인 이창훈을 지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손 선수의 후손들은 한옥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되길 바란다. 지난 8일 폐막한 2020 도쿄올림픽 개막 전 일본이 올림픽 박물관에 손 선수를 자국 선수로 표현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이에 맞서려면 손 선수의 흔적을 최대한 지키고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의 외손자인 이 사무총장은 “재개발 때 서울시에 기부채납되는 부지 중 공원으로 조성될 곳에 손기정의 집을 옮겨 손기정전시실로 활용하면 역사성을 살려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재개발 허가 조건에 이 같은 방안을 명시해 보존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서울시나 용산구가 손기정의 집을 매입해 문화재로 보존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용산구는 2018년 한옥 매입을 위해 소유자와 접촉했지만, 가격 차이가 커 무산됐다고 전했다. 집의 토지 면적은 약 165㎡로 현재 3.3㎡당 7000만원의 시세가 형성돼 최소 35억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성배 서울시의원은 “역사성이 있는 한옥은 서울시에서 문화유산으로 가꿔 시민들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며 “서울시와 논의해 매입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데니·김구 서명문’ 등 독립 의지 보여준 태극기 3점 보물 된다

    ‘데니·김구 서명문’ 등 독립 의지 보여준 태극기 3점 보물 된다

    현존하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를 포함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태극기 유물 3점이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광복절을 앞둔 12일 국가등록문화재인 ‘데니 태극기’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3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보물은 보통 수백 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 태극기들은 민족 독립 의지 등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문화재청은 지정 이유를 설명했다. ‘데니 태극기’는 고종의 외교 고문이던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가 고종에게서 하사받아 1891년 본국으로 가지고 간 깃발이다. 1981년 그의 후손이 기증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데니는 1886년 청나라의 천거로 외교 고문이 됐지만,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다 파면됐다.<서울신문 2021년 4월 23~24일자 25면> 제작 연대는 1890년쯤으로 추정되며, 가로 262㎝, 세로 182.5㎝로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현존 태극기 가운데 실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료다.’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샤를 메우스)에게 준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를 전했고,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가로 62㎝, 세로 44.3㎝ 크기의 태극기엔 광복군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김구 주석의 글과 인장이 찍혔다.‘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가로 89㎝, 세로 70㎝ 크기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 ‘신대한’ 등 신문류 19점과 함께 나왔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즈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불교계의 항일 의지를 극대화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 등 자료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이밖에 ‘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과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문화재로 등록을 완료했다.
  • 성남문화재단,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카카오페이지 연재

    성남문화재단,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카카오페이지 연재

    경기 성남시 산하 성남문화재단은 광복절인 15일부터 카카오페이지 전용관을 통해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를 연재한다고 12일 밝혔다.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부터 올해까지 3년간 독립운동가 100명의 삶과 정신을 웹툰으로 그려내는 공공문화 콘텐츠 사업이다. 올해 제작하는 34개 작품 가운데 30개의 첫 회를 15일 공개한 뒤 매주 1회 연재를 진행한다.나머지 4개 작품은 연말까지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앞서 2019년과 2020년 제작해 다음웹툰과 EBS툰을 통해 연재 완료한 66개 작품도 카카오페이지 전용관에서 재오픈한다. 올해에는 ‘머털도사’로 유명한 이두호,‘리니지’를 그린 신일숙,대표적인 순정만화 작가인 이은혜 등 37명이 안중근,유관순,한용운 등 독립운동가 웹툰을 만들었다.독도의 거주민과 서식 동식물을 그린 작품도 포함됐다. 2019∼2020년에는 허영만,이현세,지강민 등 작가 87명이 김구,윤봉길,안창호 등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웹툰으로 그렸다. 성남문화재단 관계자는 “독립운동가와 웹툰이라는 이색적이면서도 참신한 조합이 돋보인 프로젝트가 3차 연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며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데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 헌신·희생으로 이뤄낸 광복…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땅과 이름

    헌신·희생으로 이뤄낸 광복…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땅과 이름

    제7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항일 운동가들의 삶을 통해 독립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방송들이 시청자를 찾아간다.KBS 1TV는 15일 오후 7시 55분 특집 다큐멘터리 ‘옥바라지, 그녀들의 독립운동’에서 서대문형무소 건너편에 있던 옥바라지 골목을 조명한다. 지금은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 사라졌지만, 이 골목은 일제강점기 감옥 안과 밖을 필사적으로 이어 준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 펼쳐지던 곳이다. 일제 탄압의 상징으로 독립투사 9만여명이 갇힌 서대문형무소는 수감자들의 식사량을 형량과 노역 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눴다.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사상범은 5등급 이하로 한 끼에 270g 이하의 음식만 제공됐다. 성인 일일 권장 칼로리의 3분의1 수준의 소량이다. 미결수는 식사와 의복을 제공받지 못해 옥바라지가 필수였다.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끊으면 독립에 몸을 바친 이들의 목숨줄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 건너편에 ‘감옥밥 파는 집’, ‘형무소 피고인 차입소’ 등 간판이 즐비한 옥바라지 골목이 생겨난 배경이다. 15일 방송하는 비대면 콘서트 ‘해양영토 더 큰 대한민국’은 선조들이 지켜 온 해양영토의 소중함을 공연을 통해 상기하는 특별 기획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실내 무대 외에도 영토 동쪽 끝 독도, 남쪽 끝 마라도, 서쪽 끝 격렬비열도 등 해양영토 세 곳을 연결한 야외무대도 펼친다. 송창식, 함춘호, 전인권 밴드, 옥주현, 윤하, 포레스텔라, 레떼아모르, 고영열, 김준수, 아스트로, 이날치 등 뮤지션들이 합류했고 뮤지컬 배우 정성화와 그룹 위아이의 김요한이 해양영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이들을 소개하는 프레젠터로 활약한다.EBS는 ‘지식채널e-광복절 특집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방송한다.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생애를 다룬 1부에 이어 19일 0시 10분 2부에서는 ‘조선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를 마련했다. 일본인 소다가 조선을 위해 헌신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선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그는 1905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고 석방 운동을 벌였다. 일본인들의 비난과 조선인들의 의심 속에도 조선의 고아 1000여명을 자식처럼 돌보며 헌신했다. BBS 불교방송은 14일 나라를 지키려 투신한 불교계 인사들을 연이어 조명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일생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헌신한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이자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킨 용성 스님,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활약한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방송한다.
  • 그냥 지나쳤던 독립성지 이번 여름엔 꼭!

    그냥 지나쳤던 독립성지 이번 여름엔 꼭!

    서울 외곽에도 덜 알려진 독립운동의 성지들이 있다. 등산이나 피서, 하다못해 업무 때문에라도 한번쯤 지나쳤을 곳에 선열들의 공간이 숨겨져 있다.봉황각부터 찾는다. 3·1만세운동을 이끈 의암 손병희(1862∼1922) 선생이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지은 교육·수련시설이다. 1912년 세워졌으니 내년이면 꼬박 110년이 되는 건물이다. 현재는 천도교 의창수도원 건물 중 하나다. 박충남 수도원장에 따르면 당시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은 3만평에 이르는 땅을 800원을 주고 매입했다고 한다. 당시 ‘경성’(일제강점기 서울을 부르던 이름)의 규모로 볼 때 의암이 사들인 북한산 일대는 인가가 거의 없는 심산유곡이었을 것이다. 봉황각과 이웃한 도선사도 당시엔 도선암이란 산중 암자였다고 한다. 의암이 이처럼 외딴곳에 수련시설을 지은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를 길러내기 위해서다. 3·1운동을 이끈 33명의 지도자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수학했고, 봉황각 출신 독립투사 483명이 나라 곳곳에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천도교 쪽에선 한발 더 나가 ‘3·1운동의 발상지’로 추앙하는 분위기다. 봉황각 조성 당시엔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자주 의암을 찾았다고 한다. 박 원장은 “두 분이 함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항일 투쟁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벌였을 것”이라며 “봉황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건청궁과 비슷한 형태로 지어진 것도 의친왕의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원장 등 천도교 측의 주장이긴 하나, 역사학계에서 한번쯤 짚어 볼 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의친왕에 대해서도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친왕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5남이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스무 살 아래 동생 영친왕에게 황태자 지위를 내주고, 말년에 영양실조 상태에서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족으로 알려져 있다. 의친왕은 한때 주색에 빠진 파락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한데 이는 자신에게 쏠리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조조의 장막 아래 비굴한 겁쟁이로 지냈던 삼국지 유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광복 이후에도 쉬 바뀌지 않았던지, 그가 영양실조 등으로 죽음을 맞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의친왕이 1919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남긴 글이 인상적이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고도 했다. 비록 중국 안동역(현 단둥역)에서 체포되며 망명 시도는 물거품이 됐지만, 이후에도 그는 일제의 일본행 제안이나 단발령을 거부하는 등 일제와 대립각을 세우며 지냈다. 봉황각은 110년 된 건물치고는 상당히 말끔한 편이다. 그동안 한국전쟁 등 변고가 많았던 걸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자주 썼던 ‘봉황’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판은 당대의 명필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한다. 봉황각 외형은 명성황후의 침전이었던 건청궁 내 곤녕합의 구조와 흡사하다. 봉황각 조성 때 의친왕의 의견이 반영됐을 것이라는 천도교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건물 내부엔 의암 초상화와 3·1운동을 숙의하는 벽화 등이 있다. 봉황각 옆의 기와집은 의암이 실제 기거했던 공간이다. 박 원장에 따르면 의암은 이 사저에서 7년 정도 생활했다고 한다. 봉황각 바로 앞에 있는 적벽돌 건물도 무척 고풍스럽다. 1922년 지어진 천도교 중앙종리원 건물(중앙총부 본관)이다. 원래 종로에 있다가 1970년쯤 수운회관이 들어서면서 현 위치로 고스란히 옮겨 왔다. 옛 중앙총부 건물은 세계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종로에 있을 당시 의암의 사위였던 소파 방정환이 머물며 어린이 잡지를 내는 등 어린이운동을 펼쳤다. 이제 망우리 공원으로 넘어간다.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공동묘지’였던 곳. 한데 잠든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결코 ‘묘지’나 ‘공원’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될, 성지 같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 등 독립지사는 물론 시인 박인환, ‘코리안 엘비스’라 불렸던 가수 차중락, 화가 이중섭, 작가 김말봉 등의 묘가 너른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도산 안창호의 묘터와 태허 유상규의 묘다. 둘의 사연은 몇 번을 곱씹어도 애틋한 감동을 안겨 준다. 태허는 도산의 비서다.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대) 출신의 의사였던 태허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의 비서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다. 그러다 인재가 필요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도산의 권고로 1924년 귀국한 그는 의사와 독립운동가의 길을 병행하다 세균에 감염돼 1936년 39세로 요절하고 만다. 둘의 사연은 2년 뒤 도산이 세상을 뜨기 전 남긴 말이 회자되며 세인의 가슴을 적셨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달리 선산 가튼 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무더 주오.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군이 눕어잇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무더 주오.”(당시 표기법을 따름) 도산에게 태허는 죽음 이후의 세계마저 공유하고 싶은 정신적 아들이자 동지였던 거다. 유관순(1902~1920) 열사의 무덤도 있다. 다만 단독 봉분은 아니고 합장묘 형태다. 일제가 1936년 2만 8000여기에 달하는 이태원 공동묘지의 무연고 분묘를 망우리로 이전할 때 유 열사의 유해도 함께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이태원 합장묘는 공원 초입에 있어서 찾기 쉽다. 태허의 묘와 도산의 묘비는 산자락 중턱에 있어서 20분 남짓 걸어 올라야 한다. 공원 측이 조성한 ‘사잇길’이 지름길이긴 하지만 거의 등산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소 돌더라도 완만하게 오를 수 있는 둘레길로 가길 권한다. 망우리 공원 주차장은 공사 중이다. 주변 주차장에 차를 두거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 광복절 맞아 열린 ‘생존 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

    광복절 맞아 열린 ‘생존 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

    10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10옥사)에서 열린 생존 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초상화를 살펴보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개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현재 생존한 애국지사들의 초상화 16점을 전시한다. 초상화 제작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조소앙 선생의 조카인 조범제 화백이 참여했다.
  • 광복절 맞아 열린 ‘생존 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

    광복절 맞아 열린 ‘생존 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

    10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10옥사)에서 열린 생존 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초상화를 살펴보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개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현재 생존한 애국지사들의 초상화 16점을 전시한다. 초상화 제작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조소앙 선생의 조카인 조범제 화백이 참여했다.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고,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김구 ‘백범일지’) “어머니!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열악하다 못해 인격을 말살하는 감옥 생활은 그 자체로 고문의 수단이라고 할 만큼 혹독했다.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유관순, 이육사, 윤동주, 김동삼, 오동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런 감옥 생활을 18년 5개월이나 견뎌낸 독립운동가가 정이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사람은 일왕 암살을 기도한 박열로 22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일본 감옥에서 복역했다. 정이형은 더 악명 높은 국내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최장기 복역수다.“비로소 인정풍속이 다른 만리타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탄일호(長嘆一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한 곳을 급급히 찾아왔을까. 집에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들은 다 어찌 될까.”(선생의 회고록 중에서)●평북 의주 출신… 장성에서 ‘3·1운동’ 시위 선생은 1897년 9월 16일(음력) 평북 의주 월화면에서 태어났다. 김평식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그는 복벽주의(復主義·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친형 정원익도 독립군에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운동가였다. 형과 스승의 항일 정신을 이어받은 선생은 1919년 1월 독립운동가 김계순, 서상연을 만나 의기투합해 전남 장성으로 내려갔다. 이주 직후 3·1운동이 발발하고 장성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앞장섰다. 친형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장성 북하면에 4년제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 선생은 체포돼 취조를 받았고 다행히 풀려났지만, 장성에서 더 활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조직인 연통제에 참여해 의주 군감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11월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일경에 체포된 형 원익이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자 그 길로 떠난 것이다.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선생은 관전현에 있던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오동진, 김창환을 만났다. 1923년 12월 대한통의부가 군사 체제로 개편되면서 선생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의 부관을 거쳐 이듬해 가을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이 됐다. 첫 임무는 부하 10여명과 봉천성 환인현에서 반(反)통의부 분자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반목 속에 일어난 통합 운동으로 대한통의부는 그해 11월 10여개 독립운동 단체와 더불어 군정기관인 정의부로 확대 개편됐고 선생도 참여했다. ●조선인 밀정·친일파 처단 등 임무 수행 정의부는 정부 형태를 갖추고 서간도 한인 동포들을 통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 육사 출신인 이청천이 군사위원장, 만주의 광복군 총영장을 지낸 오동진이 사령장을 맡아 군사조직을 지휘했다. 선생과 양세봉·문학빈 등 주로 평안도 출신이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25년 3월 18일 선생은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제8중대장 김석하, 제6중대 제3소대장 김정호 등과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일제 경찰서 습격 계획을 세웠다. 그날 자정,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선생은 부하 6명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새벽 5시쯤. 목표로 삼은 벽동경찰서 여해경찰관출장소에 접근했다. 안에는 일경 5명이 있었다. 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니시카와 류키치와 임무, 신현택 등 순사 3명은 절명했고 일본인 순사 1명은 크게 다쳤다. 선생은 대원들과 출장소 건물을 불태우고 총기류 등 군수품을 노획했다. 1926년 3월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부하 병사 20여명과 지린성 한인 동포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금 활동도 하면서 조선인 밀정과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은 독립군을 정탐하는 밀정 처단을 일제와 싸우는 일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쓰야협정’(조선 총독과 중국 측이 독립군 탄압을 목적으로 맺은 협정)으로 군사 활동이 더 어려워지자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복벽주의도 수용하면서 진보주의를 표방한 좌우합작 정당인 고려혁명당이다. “이념 없는 혁명, 이데올로기 없는 독립투쟁은 오히려 무자비한 반동밖에는 초래하지 못한다.” 고려혁명당은 이런 기치를 내세웠다. 천도교 교주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도 동참해 1926년 4월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출범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10여곳에 세포조직을 만들며 세를 키워 나갔다. 그러다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 이동락과 당원들이 일제에 체포돼 당의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선생은 하얼빈으로 이동해 조직 재건을 꾀했지만 1927년 3월 11일 동지 6명과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1차 공판에서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조금의 공포의 빛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1928년 4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마포·대전형무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최시형 아들 최동희 동참해 세 키워나가 “공부하는 이상은 글자만을 배우는 것 아니요. 자기 인격을 향상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니 절대로 악습관에 감염되지 말고 오풍속(汚風俗)에 타락하지 말기를 바란다.” 1941년 당시 이화여고보 3학년에 다니던 맏딸 문경씨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여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딸의 앞날을 걱정하고 올바른 품행을 당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문경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선생과 같이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규창(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과 결혼했다. 광복 후 선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선임됐다. 1947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률조례 제정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남다른 의지를 갖고 활동했다. 일제와의 투쟁과 친일파 엄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었다.●맏딸 정문경씨 독립운동가 이규창과 결혼 “애국자들은 (조선인) 순사들에 의해 죽음에 가까운 고문과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남한 과도정부는 그런 왜놈 앞잡이와 매국노 편을 드는 듯합니다.” 선생은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편지를 보내 친일파 중용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친일파 척결 조례를 폐기하며 무시했다.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도 고려혁명당 때부터 지녀온 신념 때문이었다.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눈 밖에 난 선생은 감시 속에 서울 장교동 집에서 유폐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56년 12월 10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열린세상] 임시정부의 임시헌법과 ‘무진기행’/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열린세상] 임시정부의 임시헌법과 ‘무진기행’/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국은 헌법의 나라다. 인용색인 사이트에서 검색되는 ‘헌법’ 관련 논문은 1만 5000여편이다. 그 중 5000여편의 논문은 제목에 ‘헌법’을 직접 표기했다. 대부분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나 등재 후보지에 게재됐다. 학술지 제호에 헌법을 붙인 경우도 많다. 여러 학술단체가 이름에 헌법을 넣었다. 헌법학 교과서도 상세하다. 천여 페이지는 보통이고 이천 쪽을 넘기기도 한다. 헌법재판소의 산더미 같은 결정을 반영한 결과다. 헌재와 법원에서 헌법소송을 다룬 전문가들이 학계로 편입되고, 헌법 이론은 더욱 정교해졌다. 헌법 연구는 양과 질에서 괄목할 만하다. 한국의 헌법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대한민국 임시헌법’은 1919년 9월 11일 공포됐다. 전문과 8개 장, 58개 조문으로 구성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게 있다고 천명했다. 종교의 자유와 재산의 보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 기본권을 향유한다고 규정했다.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도 빼놓지 않았다. 임시헌법은 3권 분립과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현대의 여느 나라 헌법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임시헌법이 공포된 날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서울의 한성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된 날이기도 하다. 한국 헌법의 뿌리는 임시헌법보다 다섯 달 더 깊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됐다. 임시정부 법령 제1호다. 전문과 10개 조문으로 만들어졌다.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기본권은 제4조에 규정됐는데, 종교, 소유의 자유와 더불어 언론출판의 자유 등이 보장됐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에 빗대어 말하자면 ‘임시헌장’을 만들었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했으므로 목숨을 건 독립운동은 더이상 황제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나라’를 되찾는 일이었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허가나 검열이 없는 표현의 자유, 인위적인 조작과 권력의 부당한 개입에 오염되지 않은 민주주의 공론장이 예정됐다. 1919년 그때의 정부는 타국의 가난한 건물에 세든 ‘임시’였으나 표현의 자유와 민주공화제를 천명한 헌법은 강철보다 강했다. 가히 한국은 헌법의 나라다. 기미년 임시헌법부터 건국 후 제2공화국의 헌법은 언론출판의 자유를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4·19 직후에 개정된 헌법은 아예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금지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개정된 제3공화국의 헌법은 언론출판의 자유에 이것저것 조건을 붙였다. 그 무렵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묘사된 대로 그야말로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헌법 유보 조항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삥 둘러싸 버린 것이었다. ‘공중도덕과 사회윤리’를 명분 삼아 영화와 연예에 대해 검열을 할 수 있다고 정했다. 신문과 통신의 발행 시설 기준, 옥외 집회의 시간과 장소 규제를 법률로 정했다. 언론출판도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와 ‘다른 사람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했다. 권위주의 시절에 언론출판의 자유를 옥죄려고 만들었던 헌법 유보 조항이 무진을 짓누른 안개처럼 일상에 스며들었다. 5·17 군사쿠데타 직후에 개정된 헌법은 명예나 권리를 침해하는 언론출판의 손해배상까지 조문에 도입했다. 현행 헌법 제21조 제4항에 그대로 잔존해 있다. 언론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고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의 찬성 의견이 높은 것을 이유로, 가짜뉴스나 허위조작 정보를 잡겠다면서 헌법 제21조 제4항을 들먹이는 조치들이 전개되고 있다. 남의 나라 땅에 임시로 정부를 세웠던 지난한 시절의 임시헌법에도 도입하지 않았던 헌법 유보 조항을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의도적으로 허위조작 정보를 유통시키는 것은 여론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 공론장을 유린하는 행위다. 그렇다고 그 행위를 법으로 징벌하고 정부로 하여금 시정명령을 내려 징치하려는 발상은 성급하다. 비록 견해가 다른 언론이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언론과 여론의 깔때기가 이물질을 걸러낼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땅에 온전히 정식 정부를 세우고 정규 헌법을 가진 지금 언론출판의 이정표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백 년 전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에 답이 있다.
  • 국립항공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기증자 명판 제막식’ 성료

    국립항공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기증자 명판 제막식’ 성료

    국립항공박물관(관장 최정호)이 지난 1일 기증자 명판 제막식을 성황리에 종료했다고 밝혔다.이번 기증자 명판 제막식은 국립항공박물관 개관 1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박물관 운영에 도움을 준 자료기증자(기관포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마련되었다. 기증자 및 한국공항공사를 비롯한 기증기관과 국토부, 진성준 국회의원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행사에서는 자료를 기증한 개인·단체·기관의 명단을 야외전시장 중앙광장 기둥에 기록하며 이들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김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개관 1주년까지 국내외 145명(기관 포함)이 총 1600여 점의 항공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립항공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항공을 이끈 1세대 항공인(항공정비사 윤창원·배상업, 항법사 김상옥 등)이 소장한 자격증, 사진, 문서, 의복은 살아있는 항공역사로 전시 중이며, 이 중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에서 발굴한 윌로우스 데일리저널(Willows Daily Journal)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비행학교 기사가 수록된 최초의 신문자료로 국립항공박물관을 통해 처음 실물이 공개되었다. 한국공항공사와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제공한 공항운영 자료 및 시설장비와 유양산전의 항공등화는 공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여객산업의 현재를 보여주는 대한항공, 아시아나, 제주항공, 티웨이 등 국적항공사의 복식과기념품 및 훈련기와,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고등훈련기 T-50(한국항공우주산업(주)), 미국연방항공청의 형식승인을 받은 첫 국산 민간항공기 KC-100, 무인기 TR-100(한국항공우주연구원), 초경량 항공기 KLA-100(베셀에어로스페이스) 등은 예비 항공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물이다. 최정호 관장은 “건립 단계부터 개관 1주년까지 대한민국 항공역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 주신 분들이 많은데, 코로나 상황으로 한 분 한 분 모두 모시지 못해 안타깝다. 기증자 예우를 통해 기증자분들의 큰 뜻을 작게나마 보답하고자 한다”며 “우리 박물관은 대한민국의 다양한 항공역사·산업·문화를 수집·보존·전시하고 있으며, 교육·체험 프로그램 등을 통해 항공인재 양성, 항공산업 발전과 문화확산에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및 방역수칙에 따라 참가자 수를 제한하여 진행되었다.
  • 에티오피아 정부군 시장 공습해 64명 사망 참사.. 민간인 대거 포함

    에티오피아 정부군 시장 공습해 64명 사망 참사.. 민간인 대거 포함

    내전 중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정부군이 티그라이주 주도인 메켈레의 토고가 시장을 공습, 최소 백여명이 사상을 당하는 참변이 벌어졌다고 AP통신이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어린이를 포함한 64명의 사망자엔 민간인이 대거 포함됐고, 73명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현지 직원이 전했다.정부군은 이날 반군인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 요원 여러명이 ‘순교자의 날’을 맞이해 토고가에 집결했기 때문에 공습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군은 또 최첨단 기술로 정밀 타격을 시도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 공습 이후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티그라이의 한 주민은 AP와의 인터뷰에서 “이 지역에는 반군이 없다. 정부군 공습으로 죄 없는 내 가족과 친지들의 집만 파괴됐을 뿐”이라며 “정부가 반군을 타격했다는 주장에 주민들이 모욕감을 느낀다”고 했다. 에티오피아 내전은 지난해 11월 아비 아머드 총리가 티그라이 집권 지역 정당인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 축출을 시도하며 불거졌다. 정부군은 약 한달여 만에 승기를 잡아 티그라이에 친정부 임시정부를 수립했지만, TPLF 반군은 시골 지역에서 저항을 이어왔다. 지금까지 양 측 분쟁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고 200만명의 피란민이 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선 지난 21일 아머드 총리의 재집권 여부를 결정할 총선이 진행 중이며, 티그라이 지역에선 아직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다.
  • 왜곡된 교과서·영화… 봉오동전투서 사라진 영웅 최진동·최운산

    왜곡된 교과서·영화… 봉오동전투서 사라진 영웅 최진동·최운산

    “아니, 어찌 이러오? 봉오동 독립전쟁도 청산리전투도 우리 아버지 최운산이 창설한 부대가 치른 전쟁이고, 총사령관은 큰아버지 최진동이지 않소? 어찌 한국에서는 봉오동 전쟁 총사령관은 홍범도라고 하고 청산리 전투 사령관은 김좌진이라고 하오?” 중국에 살던 최운산의 첫째 딸 청옥은 199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TV를 보고 이렇게 흥분했다고 한다. 역사가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독립운동사도 사료 불충분에 정치적인 이유가 더해져 그런 일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봉오동 전투는 진실과 괴리된 측면이 많다. 홍범도만 영웅이 된 데는 정치적 배경도 있고 잘못된 교과서의 탓도 크다. 극적 효과를 추구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왜곡의 정점을 찍었다.●독립운동사 사료 불충분·정치적 이유로 왜곡 청옥의 말처럼 봉오동 전투는 사령관 최진동과 동생인 참모장 최운산이 지휘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이끈 전투였다. 김좌진과 홍범도는 각각 제1연대장, 제2연대장이었다. 교과서는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가르쳤다. 국민의 뇌리에 두 사람만 화석처럼 굳어져 남아 있는 이유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와 김좌진의 활약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만을 영웅화하면서 최진동·최운산은 사라져 버렸다. 굳어진 인식은 바뀌기 어렵지만 그래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후손이 있는 경우는 다르다. 최운산의 맏아들 최봉우는 광복 후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의 딸 최성주씨가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파묻힌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최씨는 지난해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이라는 책을 펴내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최씨를 만나 독립운동에 바친 비운의 가족사를 들었다. 최진동 형제의 아버지 최우삼은 함북 온성이 고향으로 1860년에 태어났고 1880년 무렵 만주 옌볜 도태(道台)로 봉직했다. 도태는 조선 말기에 옌볜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최우삼은 일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주, 한인 마을을 건설했다.최진동은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해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만주 군벌 장쩌림 부대에 있었던 최운산은 장쩌림의 목숨을 구해 주는 등의 각별한 인연으로 봉오동 일대에 부산 면적의 6배나 되는 땅을 갖고 있었다. 또 국수 공장, 콩기름 공장, 양조장, 성냥 공장, 비누 공장을 운영했다. 대규모 목장도 소유해 러시아 군대에 곡물과 소를 수출하는 등 간도 제일의 거부(巨富)였다. ●홍범도 영웅 묘사한 영화 봉오동전투 ‘정점’ 형제는 1912년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을 지킬 목적으로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100여명 규모의 자경단을 만들었다. 또 봉오동 사관학교와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독립군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15년에는 연병장과 막사를 만들고 두께가 1m가 넘는 토성을 건설해 독립군 기지를 구축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 되자 최진동 형제는 670명 규모의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해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통합 논의가 일어 1920년 대한군무도독부를 비롯한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 부대는 조직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났다. 최진동이 부장(府長·사령관), 둘째 최운산이 참모장, 셋째 최치흥이 참모가 됐다. 막대한 재력을 가진 최운산은 각 부대에 주둔지를 제공하고 식량과 피복을 지급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해주까지 진출했던 체코군의 무기를 사들였다. 독립군들은 신형 무기로 체계화된 군사훈련을 받았다. 독립군들은 1920년 초부터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인 5월까지 두만강을 건너 일제의 관서를 수십 차례 공격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최진동 형제는 보름 전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한 달 전부터 주민들도 이주시켰다.대한북로독군부는 참호를 파고 의무부대도 후방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했다. 1920년 6월 7일 새벽부터 일본군은 봉오동을 습격했지만 그들의 패배는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157명의 사망자와 3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주했다.총사령관 최진동 등 지휘부는 최고봉인 봉초봉에 자리잡고 전투를 지휘했다. 전체 작전은 사령관 최진동과 참모들이 세웠다.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는 작전을 준비할 위치도 아니었고 시간도 없었다. 홍범도도 격렬히 싸웠지만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다. 갑자기 그가 이끌던 2중대를 퇴각시킨 것이다. 이 바람에 자리를 사수하던 신민단 대원들이 수적 열세로 전사하고 말았다. 일종의 전술일 수 있지만 최진동은 항명이라며 홍범도를 엄벌하려 했고 동생 운산이 말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당시 독립군은 영화에서처럼 찢어진 군복을 입고 굶주린 게릴라가 아니라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했으며 사격술이 뛰어난 정예군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은 “적(독립군)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00~800m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라고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썼다. 거기에는 최운산의 부인인 김성녀와 봉오동 주민들의 헌신이 있었다. 김성녀는 수천 독립군의 식사를 제공하고 군복을 제조한 병참 책임자였다. 재봉틀 8대로 군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군복 모자에는 태극 견장이 달려 있었고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단 예복이 있을 정도였다. 최운산은 1930년대에도 무장 세력을 유지하며 우수리강 전투, 대황구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을 이끌며 독립 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까지 대황구삼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했다.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다. 광복 직전까지 6번이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다. 매번 극심한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다고 한다. 최운산은 광복을 한 달 열흘 앞둔 1945년 7월 5일 평양으로 갔던 길에 고문 후유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최진동은 일제와 싸우는 동안 부인과 맏아들, 맏며느리를 잃는 아픔을 겪다가 1941년 일제의 압박과 감시 속에서 병마로 사망했다. 최진동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공훈에 비해 등급이 낮다. 최운산은 1977년에야 서훈(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으로 서훈이 올려졌지만 역시 너무 낮다. 홍범도는 2등급인 대통령장, 김좌진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왜 이렇게 최진동 형제는 낮은 서훈을, 그것도 늦게 받고 공적이 파묻혔을까. 최운산의 손녀 최씨는 이렇게 말했다. “1961년 보훈 업무 담당 직원이 최운산에게 서훈을 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자 격분한 아버지(최봉우)가 주먹을 날렸답니다. 그 바람에 서훈도 취소됐다고 합니다.” ●부인 김성녀, 군복 제조 병참 책임자 활동 또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는 정부에 낸 진정서에서 이렇게 썼다. “독립운동 당시 하급 지휘관 및 졸병으로 생존한 독립인사가 자신의 공적을 과대 선전하기 위하여 허무맹랑한 사실과 왜곡되고 과장된 조작 사실로 인하여 오점을 남겼으며 일생을 독립운동과 조국 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총투입하여 투쟁하였으나 공적이 뒤바뀌어져 있기에 독립운동을 하시고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이때가 1969년이다. 하급 지휘관이란 철기 이범석을 지칭한다. 이승만과의 친분으로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은 ‘우둥불’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자신을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과장하고 최진동 형제의 공적을 깔아뭉갰다. 이범석은 당시 20세의 군사학교 교관이었다. 최씨에 따르면 최진동의 자녀가 역사를 소설처럼 써서 왜곡했다며 출판을 말리고 이범석과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최씨는 “얼굴을 보면 최운산의 서훈을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 엄마(최운산의 며느리)가 당고모(최진동의 딸)와 세 번 찾아갔는데 만나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최진동 형제의 공적이 매장된 배후에는 이범석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진동의 후손들은 중국과 미국에 살고 있다. 일부는 한국으로 들어와 어렵게 살고 있다. 최운산의 자녀들도 만주와 북한으로 흩어졌고 최운산의 부인과 아들 최봉우만 남한으로 내려왔다. 최봉우는 1984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만주에 있던 누나, 동생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최운산의 딸 계순과 아들 호석은 한중 수교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거부였던 최진동 형제가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빈털터리가 되었는데도 중국에 남았던 후손들은 지주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쓰고 핍박을 받으며 힘든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처럼.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순천시와 시 관내 기관, 독도수호 의지 담아 ‘한반도기’ 게양 눈길

    순천시와 시 관내 기관, 독도수호 의지 담아 ‘한반도기’ 게양 눈길

    전남 순천시가 14일 순천만국가정원 동문광장에서 순천시 공공·유관기관장들과 함께 독도수호를 위한 한반도기 게양식을 가졌다. 일본이 도쿄올림픽 지도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해 시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시 관내 기관장들이 독도에 대한 우리 주권을 강조하고 독도 수호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시는 2019년부터 시청사 등 산하기관에 한반도기 게양 정책을 펴고 있다. 광복 74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시 승격 70주년을 맞아 남북평화·화해 분위기 확산과 평화통일 기틀 마련을 위해 시청사에 한반도기를 걸고 있다. 현재 시 산하 사업소,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마을회관 등에서 한반도기를 볼수 있다.이날 행사에는 허석 시장을 비롯 허유인 순천시의장, 이승래 순천세무서장, 하수철 순천소방서장 등 20여명의 공공·유관기관장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독도 수호의 마음을 담아 한반도기에 독도를 표기해 게양했다. 이어 도쿄올림픽 지도에 독도 표기를 즉각 삭제할 것을 촉구하며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고 정치적 역사왜곡 행위를 일삼는 일본을 규탄했다. 시는 순천만국가정원과 관련된 국가가 26개국임을 감안 이날 26개 한반도기를 걸었다. 허 시장은 “세계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는 올림픽에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올림픽을 이용해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며 “우리의 땅 독도를 지키기 위해 지방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민과 함께 해 나가며 힘을 보탤 것이다”고 말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일본군 1명 사망” 날조된 역사 ‘봉오동 전투’ [밀리터리 인사이드]

    “일본군 1명 사망” 날조된 역사 ‘봉오동 전투’ [밀리터리 인사이드]

    일본이 만든 ‘봉오동부근전투상보’독립군에 포위됐지만 ‘전사자 1명’양민 학살해 ‘독립군 사살’로 둔갑일제 역사왜곡에 휘둘리지 말아야1920년 6월 7일. 일본군은 한반도 강점 이후 처음으로 무장 독립군에 패배했습니다. 장소는 중국 지린성 봉오동. 바로 ‘봉오동 전투’입니다. 1919년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는 독립군의 승전 소식이 대형 항일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될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전투를 역사에서 지워버렸습니다. 패배를 ‘승리’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런데 조작 기록이 어설펐습니다. 억지로 역사를 바꾸다보니 실수가 있었던 겁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일제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봉오동의 공적을 무참히 깎아내리고, 당시 대승을 알린 임시정부를 헐뜯기까지 합니다. 자랑스러운 무장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6일 현충일을 맞아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에 실린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논문을 바탕으로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 보려 합니다. 일제가 날조한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면 여러분도 저처럼 울컥할 지 모릅니다.●패배한 일본군, 역사를 조작하다 봉오동 전투를 날조하기 위해 일제가 남긴 기록은 ‘봉오동부근전투상보’입니다. 일본군 추격대장 야스카와 사부로 소좌가 작성했습니다. 독립군·일본군의 상태와 지형, 날짜별 전투 진행과정, 병참과 통신수단, 전투에 대한 소견까지 꼼꼼하게 남겼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불과 병사 1명, 부상자는 병사·경찰 각 1명입니다. 반대로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무려 24명이 전사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당시 일제는 독립군을 ‘불령선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부 지시에 불응하는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불한당’ 같은 나쁜 의미로 쓰였습니다. 정규군인 일본군이 불령선인에게 일격을 당한 것은 치욕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패장이 나선 겁니다. 그럼 독립군 전사자 24명은 어디서 나왔을까. 승리했다던 일본군은 ‘날씨 악화’, ‘후속부대 부족’ 등의 이유로 전장 정리를 제대로 못했다고 변명합니다. 꼼꼼하게 적었던 다른 기록과 달리 사살한 독립군의 신원 기록이 없습니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는데, 전공이 있을리 없습니다. 일본군은 당시 인근 양민 23명을 학살했습니다. 일본 경찰과 중국 지방정부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청년은 1명도 없었고 모두 힘없는 노인이나 10세 이하 아이들, 여성들이었습니다. ●양민 24명 학살해 “독립군 전사자” 한춘보씨 일가족 7명 중에선 12세 손자 1명만 용케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습니다. 일본군은 한씨 손자도 죽은 것으로 보고 24명을 독립군 전사자로 둔갑시켜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투 사흘 뒤인 6월 10일자 매일신보에는 “조선사람의 손해는 미상이나, 내어버린 시체가 24요”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일본군의 전사상자 기록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우선 봉오동부근전투상보의 ‘전투사상표’를 보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월강추격대’ 병력은 장교 10명, 준사관 이하 230명, 헌병 11명, 경찰 11명 등 262명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그런데 230명을 기록한 공간에 처음엔 180명으로 썼다가 두줄로 긋고 다시 오른쪽에 220명, 240명으로 표기했다가 다시 지운 뒤 마지막으로 230명을 기록한 흔적이 있습니다.또, 봉오동 전투 하루 전인 6일 오후 9시 30분 두만강을 건너려고 준비할 때 병력은 250명이었는데, 강을 건너 북상한 7일 새벽 3시엔 209명으로 줄었습니다. 심지어 이 인원도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두만강 너머 출발 전 주둔 병력은 기관총 소대를 포함해 495명이었습니다. 매일신보는 10일 “일본군 12명이 사상했다”고 보도했다가 21일엔 “전사자 1명, 부상자 1명”으로 정정했습니다. 일제의 공식 발표가 19일에 있었는데, 이후 사상자 발표를 통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최종 전사상자 수도 군 보고서인 봉오동부근전투상보와 거의 일치합니다. ●日, 임시정부 “157명 사살” 발표에 발끈 반면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부상 300명, 독립군은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상해의 가짜 정부가 불령선인단이 봉오동에서 참패했음에도 오히려 ‘대승’으로 바꿔 여러차례 불온문서를 발표했다”고 발끈했습니다. 대승한 나라가 발끈하다니, 이상합니다. 조작 기록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던 것은 아닐까요.추격대장 야스카와 소좌는 참고 자료에서 독립군이 전원 ‘러시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체코군단이 지원한 최신 ‘모신나강’ 소총입니다. 권총과 탄약도 많았고, 심지어 쌍안경과 ‘폭탄’까지 확보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상당한 사격훈련을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반면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선 “고지가 높아 불리하다”, “지형을 잘 몰라 주력을 놓쳤다”, “도로가 험준하다”, “유력한 노획품을 버리고 왔다”고 둘러댔습니다. 맹색이 ‘대승 지휘관’인데 불리했던 상황만 궁색하게 늘어놓은 것입니다. 전투 상황은 “4면에서 공격받아 전황이 불리했지만, 각 부대가 용감히 조치해 점차 전황이 유리해졌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기록도 거짓으로 봅니다. 사방으로 둘러싼 445, 503, 504, 735 등 4개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도로를 따라 오다 덫에 걸린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일본군, 남쪽으로 공격? 실제는 ‘퇴각’일본군은 남쪽에 위치한 735고지로 ‘공격’해 들어갔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북동쪽으로 진군하던 대규모 병력이 돌연 남쪽을 공격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또 당시 독립군 주력이었던 홍범도·최진동 장군 부대가 북쪽과 동쪽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공격이라는 일본의 기록을 ‘퇴각’으로 바꾸면 깔끔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일본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인근 마을에서 정비한 뒤 곧바로 두만강을 넘어 후퇴했습니다. 일제는 우리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이런 악랄한 방법으로 독립군 승전을 숨겼습니다. 오늘 독립군의 헌신과 희생을 떠올린다면, 일제의 날조된 주장에 동조해선 안 될 겁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청춘맨숀 모던보이와 ‘삐-루 ’ 한 잔, 구상·이중섭과 노포 속 추억 한 잔

    청춘맨숀 모던보이와 ‘삐-루 ’ 한 잔, 구상·이중섭과 노포 속 추억 한 잔

    지난주에 대구를 찾았다. 광역시인 대구에는 많은 명소가 있지만 오로지 ‘힙성로’를 둘러보기 위함이다. 서울에 힙지로(을지로)가 있다면 대구에는 힙성로(북성로)가 있다. 요즘 대구 시민과 관광객에게 인기몰이 중인 북성로 일대를 부르는 별칭이다. 철가루 휘날리던 공구 상가와 토끼굴 같은 한옥 골목이 있던 낡은 원도심이 젊은 셰프와 바리스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트렌드 중심 거리로 탈바꿈했다.●북성로 공업사 골목… 기술·예술 복합창작 공간으로 탈바꿈 망치나 너트, 혹은 십자와 일자 드라이버에다 드릴까지 갈아 낄 수 있는 근사한 전동공구를 사려고 간 것은 물론 아니다. 쓸 일도 없거니와 무척 화가 났을 때 외엔 이런 걸 찾지도 않는다. 북성로를 찾은 이유는 ‘이곳에 오면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귀에 낯선 이들이 많을 테니 우선 북성로(北城路)가 뭔지 알아보자. 북성로는 대구 한복판의 옛 대구읍성 북쪽 거리를 이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상인들이 많이 들어와 상권을 형성하며 순식간에 커졌다. 이 지역을 모토마치(元町)라 불렀다. 혼마치(本町)로 경계를 이룬 길 건너 포정동에도 일본인 거류민이 몰려왔다. 옛 대구읍성이 허물어진 자리에 새로운 중심가 모토마치가 조성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꽤 분주한 상권이 생겨났다. 근대식 극장, 식당, 다방 등 최신 상업 시설이 들어와 거리를 채웠다. 일본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조선 1호점도 이곳에 들어섰다. 백화점엔 조선 팔도에 보기 드문 엘리베이터도 있었다.조선인도 그 사이를 비집고 점포를 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도 이곳에 국수 등 식료품을 팔던 삼성상회를 열며 창업했다. 지금도 그 자리가 보존돼 있다. 늘 돈이 돌던 곳이라 신기한 현대 물품들이 선을 보인 곳이기도 하다. 각지에서 ‘모던보이’와 ‘신여성’이 모여들며 커피와 ‘삐-루’, 댄스 등 신문물을 즐겼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스타필드 1호점에다 현대명품아울렛, 홍대 클럽가, 이태원 먹자골목이 동시에 한곳에 생긴 것이다. 우현서루 같은 민족교육기관도 들어섰다.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시인, 소설가 등 문인과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도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에 모여 전시회나 발표회를 여는 등 문예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신문 기사도 쓰고 자기 글도 쓰는 언론인도 모였다. 마치 19세기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거리 같았다. 국내 최초 음악감상실인 ‘녹향’(현 대구문학관 지하1층)도 광복 직후인 1946년 이곳에 자리를 틀었다. 구하기 힘든 음반을 들여다 놓고 고급 축음기로 들려줬다. 1950년대 북성로에 공구와 소재, 기계부품 가게가 생겨난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팔던 거리에서 유래됐다. 이후 대구에 섬유와 식품산업이 발전하며 관련 부품과 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기지창 역할을 담당했다. 자본과 기술이 서울을 넘볼 정도였다. 북성로는 대한민국 산업을 대표하는 공업 거리가 됐고, 한때 “마음만 먹으면 탱크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돌았다. 그 기술이 지금은 예술이 됐다. 공구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 ‘모루’가 있다. 장인의 경지에 오른 기술인과 예술인들의 컬래버레이션(이종협업)과 기술 전승을 목적으로 세운 공간이다. 원래 ‘달방’(월세방)을 하던 쪽방여관 건물을 ‘기술×예술’ 복합창작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북성로의 정체성을 여실히 내보이는 곳이다. 현재는 북성로 1가와 바로 붙은 향촌동이나 교동, 서성로 일대까지 뭉뚱그려 ‘힙성로’라 부른다. MZ세대에겐 좁은 골목길과 낮은 건물,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카페와 갤러리, 공방, 베이커리, 바(Bar)가 기존 노포와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힙’(hip)했던 덕이다.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하다는 ‘힙’이다. ●철물점 옆 모퉁이 카페 … 젊은 작가 모이는 문화놀이터 옛 북성로는 ‘아재들’의 거리였다. 평균연령이 마흔을 족히 넘었고 성비는 8대2 정도로 중년 남성 비율이 높았다. 서울로 따지면 영등포구 문래동 일대와 닮아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길거리에서 눈만 마주쳐도 싸우자고 덤벼들던 ‘춘추전국’의 시대엔 아마 발걸음조차 딛기 꺼리던 곳이었을 게 분명하다.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을 끼고 돌면 온통 철물점이다. 가게마다 트럭들이 ‘스뎅’(스테인리스) 봉과 파이프를 내리고 모터를 싣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지만 수창초등학교로 향한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작은 카메라를 든 젊은 남녀가 셀피를 찍고 있다. 벽면에는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졌고 얼핏 봐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성들도 두셋 돌아다니고 있다. 달달한 블루베리 요거트를 마실 수 있는 모퉁이 카페도 있다. 북성로엔 이처럼 구(舊)와 신(新)이 공존한다. 영신(迎新)하긴 했어도 아직 송구(送舊)하진 않았다. 북성로의 수십년 역사 중 아주 생경한 풍경일 테지만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갑자기 ‘물’이 바뀐 것은 아니다. 1976년부터 전매청 연초제조창 직원 관사로 사용됐던 수창청춘맨숀은 2016년 문체부 도심 재생 사업에 선정되며 환골탈태했다. 낡은 아파트 숙소의 외벽은 그대로 살리면서 내부를 ‘문화 놀이터’로 만들었다. ‘수창청춘맨숀’으로 명명한 뒤 젊은 작가들이 입주하고 저마다 자신의 창의력을 뽐내는 무대이자 갤러리가 됐다. 얼마 전 유엔이 발표한 연령 구분에 따르면 65세(그것도 만으로)까지 청년이니, 누구든 청춘맨숀에 들러 쉬어 간대도 어색하지 않을 선택이다. 수창청춘맨숀에서 8월 26일까지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를 전시한다. 이달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에 거리극, 창작국악, 낭독뮤지컬, 다원예술 등을 소재로 수창청춘극장도 열린다. 일본인 상권이 장악한 북성로였지만, 항일애국지사 150명을 배출한 사학 우현서루(友弦書樓)도 있었다. 현재 북성로 대구은행 자리가 바로 우현서루다. 우현서루는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4년 이상화 시인의 조부 이동진 선생이 창설한 사학이다. 큰아들 소남 이일우 선생은 1만여권의 서적을 수입해 들여 놓고 매년 젊은 지식인을 뽑아 먹이고 재워 가며 가르쳤다. 191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될 때까지 구국 운동의 요람 역할을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은 소남의 조카다. 이곳을 거쳐 간 독립지사들의 이름만 들어도 놀란다. 박은식(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이동휘(임시정부 국무총리), 장지연(황성신문 주필), 여운형(조선건국동맹), 김지섭(이중교 폭탄투척 지사) 등이다. 폐쇄 이후엔 훗날 대륜고등학교의 뿌리가 된 교남학원이 들어섰는데 교사가 이상화, 학생이 이육사였다. 건물 밖에 우현서루 이미지를 형상화해 놓았고. 내부에는 유물과 관련자료를 전시하고 있다.●이중섭 드나들던 백록다방 재현한 향촌문화관 북성로에서 중앙로 쪽으로 길을 건너면 오른쪽으로는 포정동, 왼쪽으로는 향촌동이 나온다. 서울에서 충무로나 종로 일부까지 ‘힙지로’라 부르듯, 보통은 포정동, 향촌동, 교동 일부까지 묶어서 ‘힙성로’라 지칭한다. 북성로에 큼직큼직한 산업시설이 많았다면 향촌동 쪽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자잘한 상업시설이 즐비했다. 꽃자리 다방 등 다방과 술집, 여인숙과 골목 사이엔 주택도 많은 데다 늘 대구역을 오가는 이들이 많아 향촌동 좁은 골목이 인산인해를 이뤘다.현재 힙성로의 힙한 매력은 어쩌면 70여년 전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동성로와 수성못 주변에 ‘빼앗긴 상권에도 봄은 다시 왔으니까’ 말이다. 향촌문화관에 가면 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당시 ‘리즈’ 시절을 보냈던 향촌동 풍경이 여러 전시물 형태로 있다. 대구 최초 대중교통 부영버스가 거리에 서 있고 오랜 대폿집과 막걸리집이 있다. 피란을 온 이중섭이 매일같이 드나들며 담배 쌈지에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현 갤러리모델 자리), 호수다방, 화월여관(현재 판코리아 성인 콜라텍) 등도 디오라마와 포토존으로 현실 속에 재현해 놓았다. 3, 4층은 대구문학관이다. 시인 구상을 비롯해 현진건, 조지훈, 박두진 등이 대구 향촌동에서 서로 교분을 쌓으며 지냈다. 신상옥, 최은희 등 영화인도 이곳에 있었다. 향촌동 술집 대지바(현재 공사 중)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구를 나누고, 르네상스 음악감상실(현 판코리아 식당)에서 예술혼을 양육했다. 식민침탈 중에도, 동족상잔의 전쟁 중에도 향촌동은 너른 가슴으로 문학을 잉태하고 예술을 생산했다. “함께 읽고 더불어 크게 웃어주게나.” 향촌동에 살던 시인 구상은 이윤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현재 대구문학관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의 육필 원고를 전시 중이다.●‘초토의 시’ 출판기념회 열렸던 꽃자리 다방 1930년대부터 대구 원도심 역할을 톡톡히 해 온 것이 현대에 들어선 오히려 개발을 더디게 했다. 너른 부지가 필요했던 개발 세력은 고불고불한 골목에 낡은 왜식 한옥과 초라한 저층 건물 투성이였던 향촌동과 북성로를 외면했던 것이다. 경상감영 공원이 위치한 포정동부터 향촌문화관까지 향촌동 골목을 둘러보면 화려했던 당시의 영화가 낡은 건물 사이로 투영돼 보인다. 대보백화점, 무궁화백화점 등 당시로선 으리으리한 중대형 유통 시설에다 양화점, 양장점 골목까지 이어지며 ‘대구 멋쟁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맛 좋은 식당도 즐비했다. 그 유명한 뭉티기(생고기 육회)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생고기며 불고기, 국숫집, 찌짐(전)집, 만두집, 냉면집, 곰탕집, 돼지국밥집 등이 향촌동 나들이를 나온 손님들로 긴 줄을 드리웠다. 저렴한 여인숙과 여관, 호텔 등도 곳곳을 채우며 영남 중심도시 대구의 숙박 기능을 담당했다. 극장 만경관 옆 사보이호텔은 1980년대 이 지역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한때 목욕탕이 딸린 여관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새 단장을 하고 다시 그 이름을 지켜 오고 있다. 덕분에 당시 향촌동 식당가의 불빛은 늦은 밤까지 이어져 대구의 뜨거운 밤을 밝히기도 했으나 1980년대 이후 동성로와 반월당, 수성못 인근으로 대구 중심 상권이 옮겨 가면서 ‘구 시내’로 몰락하는 듯했다.향촌동의 이미지는 2010년에 들어 비로소 재해석됐다. 골목 사이로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왔고 노회한 도시를 지키던 터주들은 이를 반겼다. 수제화 골목에는 달달한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커리와 향긋한 커피를 내리는 커피숍, 북카페 등이 들어왔다. 20·30대 시민과 관광객이 너도나도 향촌동을 찾기 시작했다.공구거리 북성로의 정체성을 재해석해 너트와 스패너 모양 마들렌을 구워 파는 북성로 공구빵(베이커리09)도, 예스러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한옥 카페 퍼센트(%) 14-3, 직접 볶아 내린 커피가 맛있는 카페 향촌도 명소다. 예전 구상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자리를 루프톱 카페로 바꾼 꽃자리 다방, 골목 안 여인숙을 개조한 카페 ‘대화의 장’ 등은 금세 인스타그램 성지로 떠올랐다. 좋은 공간이 하도 많아 힙성로 카페 투어를 다니려면 시애틀 못잖게 ‘잠 못 드는 밤’을 각오해야 한다.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저렴한 가격에 세련되고 단단한 솜씨의 수제 구두를 살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반세기 골목을 지켜 온 구둣방도 덩달아 매출이 올랐다. 공방이 인기를 끌며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한국의 밀라노’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한밤에 북적이는 노포… 3000원에 맛보는 석쇠 불고기 원래 여름에 뜨거운 대구라지만 요즘 대구의 밤도 뜨겁다. 힙성로에 한옥이나 옛 여인숙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와 부티크 호텔이 들어서며 맛난 음식에 술 한 잔 걸치는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고 가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같은 힙성로 구역 내에도 권역은 조금 다르다. 교동 쪽에는 새로 생겨난 현대식 바나 카페가 많고 중앙로를 건너오면 오래된 식당과 주점이 많다.원래부터 유명했던 ‘북성로 돼지불고기’와 ‘북성로 우동’을 필두로, 50년 이상 자리를 지켜 온 노포들에 젊은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60년 전부터 생고기를 팔던 대폿집 ‘너구리’는 ‘옛날국수’와 합치며 낮엔 국수, 밤에는 술 손님을 받는데 가격이 아주 저렴하다. 넉넉한 양은 냄비 국수(현지에선 국시) 한 그릇에 단돈 2000원. 오리지널 경상도식 진한 멸치육수 국수를 맛볼 수 있다. 3000원을 더 내면 돼지고기를 얇게 저며 간장 양념에 재워 구워 낸 ‘석쇠 불고기’를 ‘반 인분’ 시켜 먹을 수 있다. 반 인분이라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무조건 2인분을 시켜야 되는 집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게다가 소주 반 병도 팔면서 싫은 기색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힙성로의 경쟁력은 충분하지 않은가. 이 일대는 죄다 노포다. 모두가 상상 이상으로 저렴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성식당을 찾았다. 한 입 크기로 얇게 저며 내 불맛에 충실한 석쇠갈비와 쿰쿰한 된장찌개와 함께 마지막 금복주 한 잔의 얼큰함을 즐긴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 70여년 전 어느 밤 이 변함없는 골목길을, 화가 이중섭도 시인 구상도 역시 비틀대며 걷고 있었을 것이라 가만 상상해 보니, 무척이나 영광이며 감회가 새롭다. 왜 낡아빠진 원도심 따위가 내게 이토록 확고한 여행 동기를 부여했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것 같다. 글 사진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힙성로 여행 체크리스트 (지역번호 053) 어떻게 가지?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 역에서 내리면 된다. 2, 3호선 청라언덕 역이나 1, 2호선 반월당 역에서 내려도 그리 멀지 않다. 버스는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이나 경상감영 앞 등의 노선을 타면 된다. 동대구역에선 401번, 909번, 708번, 급행1번 등이 경상감영공원 앞까지 간다. 뭘 먹지? 이 지역에는 노포들이 많다. 국수와 만두는 꼭 챙겨 먹어야 한다. 뭉티기(생고기)를 즐겨 보는 것도 좋다. 대구식 양념장이 색다르다. 좀더 새로운 스타일을 원한다면 동성로로 넘어가면 된다. 다락방만두는 찐교스, 군만두 등이 맛있고 저렴하다. 마산식당은 씨락육국수(시레기 육개장국수)와 돼지국밥이 유명하다. 한성식당은 석쇠갈비와 오뎅탕으로 술안주하기 좋은 곳. 된장찌개도 일품이다. 옛날국수(너구리 본점)는 2000원이란 황송한 가격에 멸치육수 국수를 맛볼 수 있다. 저녁에는 생고기와 간처녑을 먹으러 많이 찾는다. 상주식당은 추어탕으로 유명한 70년 동성로 노포다. 배추를 넣고 시원하게 끓여 낸다. 어디서 잘까? 여인숙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모텔도 많지만 조금 낙후된 편. 도보로 이동하기 좋은 리버틴호텔도 있다. 간단한 조식도 준다. 헤븐스토리호텔은 대구역과 가깝다. 중앙로 역과 가까운 2월호텔(동성로점)은 진골목, 약령시 등에 접근하기 편리하다.
  • 경찰영웅에 故안맥결 총경·정연호 경위

    경찰영웅에 故안맥결 총경·정연호 경위

    경찰청은 여성 독립운동가 출신 안맥결(1901∼1976) 총경과 국민 생명을 구하려다 순직한 정연호(1977∼2017) 경위를 ‘2021년 경찰영웅’으로 선정했다고 27일 밝혔다.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 총경은 1919년 평양 숭의여학교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1937년 체포돼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 조국 재건에 힘을 보탰던 안 총경은 1946년 여자경찰간부 1기로 경찰에 입직해 1961년 퇴직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서울여자경찰서장,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며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안전한 치안 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정부는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국가수호의 정신으로 평생을 바친 안 총경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대구 수성경찰서 범어지구대에 근무하던 정 경위(당시 경사)는 2017년 12월 21일 “아들이 자살하려고 번개탄을 사서 들어왔는데 막아 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부모와 자살 우려자를 상대로 상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자살 우려자가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 후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옆 방 창문을 통해 그가 투신하려는 상황을 목격한 정 경위는 다급히 그를 구하고자 건물 외벽을 타고 창문으로 접근하다 아파트 9층에서 추락해 순직했다. 정부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 준 정 경위에게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경찰청은 올해 말까지 경찰영웅으로 선정된 안 총경과 정 경위의 과거 근무지에 흉상을 세우고 추모 공간도 조성할 계획이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포토] ‘아수라장’ 폭언·고성 난무한 광복회

    [포토] ‘아수라장’ 폭언·고성 난무한 광복회

    광복회원 김임용 씨가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열린 2차 상벌위원회에 유튜브 기자들과 함께 입장하려다 광복회 관계자들의 제지를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 김붕준 선생의 손자인 김 씨는 지난달 11일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멱살을 잡아 상벌위에 회부됐다. 2021.5.7 연합뉴스
  • 송영길 “당이 정책 주도”… 박정희 띄우고 보훈이슈 선점 광폭행보

    송영길 “당이 정책 주도”… 박정희 띄우고 보훈이슈 선점 광폭행보

    宋 “朴, 국가 헌신”… 이승만·김대중 참배손원일 제독·김종오 장군 묘역도 찾아“與, 세월호는 챙기며 ‘제복’엔 소홀히 해”아들 지적 언급하자 당원들 “野 대표냐” 봉하마을 방문 미루고 정책공부 최우선송영길호 첫 회의서 최고위원들과 온도차친문 지도부와 시작부터 균열행보 보여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취임 첫날부터 전임 지도부와의 차별화를 통해 선명성을 부각했다. 그러나 새 지도부를 장악한 친문(친문재인) 최고위원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가 하면 강성 당원들이 송 대표의 행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시작부터 균열 조짐이 보였다. 송 대표는 3일 서울 국립현충원을 찾아 김대중·김영삼·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송 대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방명록에 “자주국방 공업입국, 국가 발전을 위한 대통령님의 헌신을 기억한다”고 남겼다. 이 전 대통령에게는 “3·1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대통령님의 애국독립정신을 기억한다”고 썼다. 이전 대표들도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지만 추모의 글까지 남기지는 않았다. 손원일 제독, 김종오 장군 묘역을 참배한 것도 이전 지도부와 다르다. 송 대표는 “아들이 그 얘기를 하더라. 유니폼(제복)을 입고 돌아가신 분들에게 민주당이 너무 소홀히 한다는 것”이라며 “세월호는 그렇게 하면서(챙기면서)”라고 말했다. 당원들 사이에서는 당장 “야당 대표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당 대표가 되면 곧장 광주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하는데, 송 대표는 정책 공부를 우선순위로 삼았다. 송 대표는 “4일 봉하마을과 5·18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었지만 이를 6일로 미루는 대신, 부동산·백신 정책을 리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당이 주도하는 당청 관계도 예고했다. 송 대표는 “문재인 정부냐, 민주당 정부냐고 할 때 ‘민주당’ 정부라는 방점이 약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정책도 당보다는 청와대가 주도한 것이 많았다”고 말했다. 대선 경선에 대해서도 “후보 캠프가 아니라 당이 중심이 돼 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일단 ‘당이 주도해 달라’며 당청 간 화합을 주문했다. 민주당에서는 윤호중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문 지도부에 둘러싸인 송 대표가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충돌을 빚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부동산, 검찰개혁, ‘문자폭탄´ 논란으로 대표되는 당심과 민심의 괴리 문제 등 현안에 대한 시각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친문 적자가 아닌 송 대표의 운신폭은 제한적”이라며 “친문이 당 전체를 석권한 구조에서 송 대표가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당장 첫 최고위에서부터 불협화음이 감지됐다. 강성 친문으로 꼽히는 김용민 수석 최고위원은 “당심과 민심이 다르다는 이분법적 논리가 이번 당내 경선 결과를 통해 근거 없음이 확인되었다”며 중단 없는 검찰 개혁과 언론개혁을 외쳤다. 강병원 최고위원도 “종부세 완화는 잘못된 처방”이라며 부동산 규제 완화론을 비판했다. 친문색이 옅은 백혜련·전혜숙 의원이 최고위원회에 들어가며 조화를 이뤘고, 송 대표가 특정 계파에 치우치지 않은 인물로 주요 인선을 채운 점을 고려하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송 대표는 수석대변인에 재선의 고용진 의원을, 대변인에 초선 이용빈 의원을 임명했다. 당 핵심 관계자는 “당의 의사결정 구조상 결국 당대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친문에게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송영길, 박정희·이승만 참배…“민주당이 제복엔 소홀하다더라”

    송영길, 박정희·이승만 참배…“민주당이 제복엔 소홀하다더라”

    박정희 방명록에 “공업입국”…이승만엔 “독립정신”김대중에 “실사구시”·김영삼엔 “군정종식” 방명록 “민주당, 제복 입고 돌아가신 분에 소홀”손원일 제독·김종호 장군 묘역도 참배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를 비롯한 신임 지도부가 3일 첫 공식 일정으로 찾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김대중·김영상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까지 차례로 참배했다. 진보 진영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도 참배함으로써 통합 행보에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송영길 대표는 이날 현충원 방명록에 “민유방본 본고방녕(民惟邦本 本固邦寧). 국민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남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의 묘역을 참배한 뒤에 남긴 방명록에는 “자주국방 공업입국. 국가 발전을 위한 대통령님의 헌신을 기억한다”고 적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 방명록에는 “3·1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대통령님의 애국독립정신을 기억한다”고 남겼다.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방명록에는 “실사구시 정신을 계승해가겠다”고 썼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 묘역 방명록엔 “군정종식, 하나회 해체”를 언급하며 “민주주의를 지켜가겠다”고 적었다. 민주당 대표가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것은 2015년 문재인 대통령이 당대표를 맡았을 때가 처음이다. 이후 추미애·이해찬 전 대표도 각각 취임 후 4명 전직 대통령 묘역을 모두 참배했다. 민주당 신임 지도부는 이와 함께 손원일 제독과 김종오 장군 묘역도 참배했다.송영길 대표는 이날 현충탑 참배를 앞두고 최고위원들에게 “아들이 그 얘기를 하더라. 유니폼(제복)을 입고 돌아가신 분들에게 민주당이 너무 소홀히 한다는 것”이라며 “세월호는 그렇게 하면서(챙기면서)”라고 언급했다고 알려졌다. ‘유니폼 입고 돌아가신 분’은 천안함 순직 장병을 비롯한 군경 순직자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송영길 대표는 “그래서 앞으로 반드시 이런 행사에 내가 안 가면 최고위원들이 가야 한다”며 “내가 그래서 오늘 김종호 묘역을 간다. 6·25 때 춘천에서 북한군을 막아냈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김영호 당대표 비서실장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월호 가족을 챙기듯 공무 군경도 잘 챙기자라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씨줄날줄] 홍익인간/문소영 논설실장

    [씨줄날줄] 홍익인간/문소영 논설실장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법이 정한 교육 가치였다. 고려 말 쓰인 ‘삼국유사’ 고조선조와 ‘제왕운기’ 전조선기에 홍익인간은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면서 제시한 지침으로 적시돼 있다.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건국이념은 원효의 화쟁(和諍)사상, 불교의 ‘교선일치’(敎禪一致) 전통, 유불도(儒彿道)를 통합한 동학(東學) 등 한국 사상의 중요한 골간을 이뤘다. 조선시대에는 뜸하던 이 ‘홍익인간’은 일제강점기에 대종교가 들고나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전 서울대 교수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을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개념은 1950년대에 폐기되다시피 했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에서 부활했다. 박노자 교수는 “안호상의 홍익인간은 일제 시대의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어설프게 표절했다”며 “전체주의적 잠꼬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최근 민형배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12명이 제출한 교육기본법 개정안에서 홍익인간이 빠져 논란이 됐다. 민 의원이 지난달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선 교육이념으로 명시된 ‘홍익인간’을 ‘민주시민’으로 변경했다. 개정 이유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교육지표로 작용하기 어렵고, 1949년 제정된 교육법의 교육이념을 그대로 적용해 사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움직임에 역사학계와 교육계가 반발하고 있다. ‘을사오적’에 빗대 ‘신축(辛丑) 12적’이라고 부를 정도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정하는 교육이념을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회의원 몇 명이 모여 문구 하나 고쳐 바꾸려는 발상 자체가 오만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심이 들끓자 민주당은 입법 철회 의사를 밝혔다. 정부 예산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삭제하려는 움직임도 뒤늦게 알려졌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는 2019년부터 진행된 ‘교육과정 총론 개정방안 연구’ 보고서를 교육부에 제출하면서 “교육기본법 2조에 제시된 홍익인간의 개념을 수정”하라고 제안했다. 여당 의원 12명과 입을 맞춘 듯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교육목표에 비춰 부적절하다”고 적시했다. 몽고 침략기나 일제시대 국난의 시기 홍익인간의 이념은 한민족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 후 국가 건설의 청사진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1장 총칙에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의 이념을 집어넣었다. 기왕에 논란이 된 김에 ‘홍익인간’에 대한 공론화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행하면 어떨까.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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