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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정의 독사만평] 한중 수교 30년, 단교 30년/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정재정의 독사만평] 한중 수교 30년, 단교 30년/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1992년 8월 24일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국내에서는 벌써 한중 수교 30년을 돌아보는 학술회의나 특집 보도가 줄을 잇는다. 정부도 곧 큰 기념행사를 벌일 태세다. 같은 날 한국은 또 하나의 중국인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끊었다. 전쟁이나 쿠데타가 아니면 외교관계 단절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중화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971년까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한국을 전폭 지지한 맹방이었다. 필자는 한중 단교 당시 타이베이 주재 한국대사관에 돌멩이가 날아들고, 한국 교민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대만 친구들을 떠올리며 뭔가 마음의 빚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울러 중화민국에 단교 이유를 미리 정중히 설명했더라면 양해는 아니더라도 분노는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한중 단교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실행한 외교관이 전후사정을 정리한 책(‘대만 단교 회고, 중화민국 리포트 1990-1993’)을 보내왔다. 이 책을 읽으며 베테랑 외교관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다는 점에 놀라고, 국가가 신뢰를 잃으면 결국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단교 이후 겉으로나마 중화민국과 평상 관계를 회복하는 데 11개월, 항공을 재개하는 데 12년이나 걸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한국은 냉전구조 해체라는 국제정세 변화에 적극 대응해 이른바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했다. 그 성과는 눈부셔 동구 사회주의 국가 및 소련과 수교하고,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마침 중화민국 또한 엄연히 ‘하나의 중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한국은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일본은 1972년 9월 29일, 미국은 1979년 1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다만 한국의 중화민국 단교는 일본·미국 등과 달리 매우 거칠었다. 일본은 총리가 수교하러 베이징에 가기 일주일 앞서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타이베이에 파견, 총리의 친서를 총통에게 전달하고 양해를 구했다. 게다가 베이징에서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하기 직전 타이베이 주재 대사가 다시 총리 친전을 총통에게 전달하고, 외무성 사무차관은 도쿄 주재 중화민국대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15일 전에 중화민국과 단교하겠다고 발표했다. 타이베이 주재 미국대사는 그 7시간 전에 총통을 예방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단교 일주일 전에 국무차관이 타이베이를 방문해 총통에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새로운 특별관계 수립을 논의했다. 한국은 단교 사흘 전에 외무장관이 서울 주재 중화민국대사를 불러 문서 한 장을 건네며 아무 의견 교환도 없이 기정사실을 통보했다. 아울러 중화민국 대사관·영사관 등의 토지·건물을 수교 즉시 중화인민공화국에 양도한다고 발표했다.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한국 정부가 전통적인 우의·신의·도의를 저버렸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3개월 전에 대통령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더라도 옛 친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총통 특사에게 확언하고, 외무차관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교섭을 시작하면 완전하고 상세하게 중화민국에 알려 주겠다고 보장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국이 올해 중화인민공화국 수교 30년에 취해 중화민국 단교 30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이징과 타이베이 모두 이웃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국이다. 한국이 중화민국과의 단교 과정을 진지하게 성찰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염두에 두면서도 대만과의 실질적 교류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기대한다.
  • 문 대통령 있고 윤 대통령 없는 청남대, 22일까지 무료 개방

    문 대통령 있고 윤 대통령 없는 청남대, 22일까지 무료 개방

    청와대 개방으로 청와대 관람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과거 대통령의 별장으로 활용됐던 청남대도 22일까지 무료로 개방하고 다양한 행사를 마련한다. 충북 청주시에 있는 청남대는 지난 10일부터 오는 22일까지 관람객들을 무료로 맞는다. 휴관일인 16일을 제외하고 누구나 개방 시간(09:00~18:00)에 편하게 들어갈 수 있다. 청남대의 원래 입장료는 5000원(성인 기준)이다. 청남대 내부 건물에선 최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을 제외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대통령기념관 별관에 역대 대통령의 사진이 전시된 공간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사진은 아직 없지만 문재인 대통령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 사진 옆에 걸려 있었다. 대통령기념관 본관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한 전시물은 아직 없지만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과 관련한 전시물을 볼 수 있었다.청남대는 이번 무료 개방 기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14일에는 도립교향악단과 전통연희단의 공연이 열렸다. 15일에는 퓨전 국악과 비보잉 댄스, 전통연희단의 공연이 선보인다. 21일에는 도립교향악단과 히든싱어 우승자인 조현민·박민규의 공연이, 22일에는 퓨전국악과 밴드공연 등을 볼 수 있다.‘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뜻의 청남대는 1983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활용됐다. 대청호가 보이는 184만 4000㎡의 넓은 부지에 조경수 124종 11만 6000여 그루와 야생화 143종 35만여 본이 자란다. 충북은 청남대를 대통령 테마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2015년 역대 대통령 10명(이승만~이명박)의 동상을 청남대 내부에 설치했다. 지난달 이시종 충북지사가 청남대 내부에 새로 지은 임시정부기념관 개관식 축사에서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 계획을 밝힌 것을 두고 일부 시민단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상 건립을 반대하며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 충북 5·18 단체 “청남대에 박근혜 동상은 안 돼”

    충북지역 5·18 단체들이 청남대에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동상을 세우지 말라고 촉구했다.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한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다. 충북 5·18민중항쟁 42주년 행사위원회는 12일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충북도가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며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해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사람의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도발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어 “문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은 청남대의 대통령 기념사업 조례를 제정한 뒤 추진해야 한다”며 “기준과 원칙을 마련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원회는 또 “청남대 안에 설치된 이명박 전 대통령 동상 안내판에는 뇌물과 부정축재로 처벌받은 내용이 추가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이시종 충북지사는 지난달 청남대 임시정부기념관 개관식 축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미처 건립하지 못한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의 동상과 기록화도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지사의 발언에 대해 도는 의견 수렴을 거쳐 건립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5·18 단체들은 이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의 교체도 촉구했다. 충북도가 지난해 두 전직 대통령 동상 앞에 과오가 적힌 안내판을 설치했는데, 독재자를 미화하는 동상이 서 있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모독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단체들은 두 전직 대통령 동상의 대안을 찾기 위한 워크숍을 다음달 4일 진행한다. 같은 날 전국 시민들이 제안한 동상이 공개될 예정이다.
  • “청남대에 박근혜 동상 세우지 마라”

    “청남대에 박근혜 동상 세우지 마라”

    충북지역 5.18단체가 청남대에 더 이상 위압적인 전직 대통령 동상을 세우지 말라고 촉구했다. 충북 5.18민중항쟁 42주년 행사위원회는 12일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충북도가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며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해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사람의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도발에 가깝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문 전 대통령 동상건립은 청남대의 대통령 기념사업 조례를 제정한 뒤 추진해야 한다”며 “기준과 원칙을 마련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청남대 안에 설치된 이명박 전 대통령 동상 안내판에는 뇌물과 부정축재로 처벌받은 내용을 넣어야 한다”며 “5.18단체의 요구를 외면할 경우 어떠한 행동도 강행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이 기자회견을 연 것은 이시종 충북지사가 지난달 청남대 임시정부기념관 개관식 축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미처 건립하지 못한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의 동상과 기록화도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도 관계자는 “동상 추가 제작은 논의된 게 전혀 없다”며 “여러 의견을 수렴해 종합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5.18단체는 이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의 교체도 촉구했다. 5.18단체 요구를 고려해 충북도가 지난해 두 전직 대통령 동상 앞에 과오가 적힌 안내판을 설치했는데, 독재자를 미화하는 동상이 서 있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모독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이들은 “군사반란과 범법자들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동상으로 바꿔야 한다”며 “청남대에 전시된 기록화도 수정하라”고 했다. 충북 5.18단체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의 대안을 찾기위한 워크숍을 다음달 4일 진행한다. 이날 전국의 시민들이 제안한 동상이 공개될 예정이다. 충북도는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를 대통령 테마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전직 대통령 10명의 동상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 30년 전 대만과 단교 참사…中에 대한 과도한 환상 탓

    30년 전 대만과 단교 참사…中에 대한 과도한 환상 탓

    “올해 한중 수교 30주년을 베이징과의 관계에서만 이야기하지만 사실 대만과의 단교 30주년이기도 하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투쟁과 건국을 지원한 나라는 중국이 아닌 대만인데 우리 외교가 43년간 정통성을 둔 타이베이와의 인연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가슴 아픕니다.” 외교 현장에서 36년을 보낸 조희용(67) 전 주캐나다 대사의 저서 ‘대만단교회고:중화민국 리포트 1990~ 1993’(사진)은 노태우 정부 ‘북방 정책’의 대미를 장식한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현장 실무자로서의 씁쓸한 회고이자 기록이다. 당시 주중화민국 한국 대사관 1등 서기관이던 그는 대만과의 난감한 단교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재현했다.최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조 전 대사는 “외교관의 특권은 외교 현장의 경험과 기록이며 이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의 외교를 펼쳐 나가는 것”이라며 “당시 중국과의 조기 수교와 대통령의 방중이란 정책 목표가 모든 것을 압도하면서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전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중국과 수교 협상이 진행되던 도중인 1992년 7월 17일 관련 보도가 나오자 대만 측에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고, 수교를 엿새 앞둔 8월 18일에야 “수교 교섭에서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통보했다. 나흘 뒤 22일 대만 정부는 당시 박노영 주대만 대사를 초치해 “옛 친구를 발로 차 버렸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중국이 이미 한 달 전에 한국과의 수교 계획을 북한에 귀띔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중국만 믿고 있던 우리 정부는 대만과의 신뢰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모양새가 됐다. 조 전 대사는 “당시 중국은 조기 수교 등 우리의 최우선 순위를 간파해 치밀하게 교섭했다”면서 “반면 우리는 중국과 수교하면 남북 관계가 전격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또 “그때 대만에 특사를 파견해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는 등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한중 수교 30년에 대해서는 “우리는 중국에 북한의 개혁·개방과 평화 통일, 북핵 문제에 대한 건설적 역할을 바랐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며 “중국은 대만 고립은 물론 한미 동맹 이완과 두 개의 한국 관리 등 전략적 목표를 상당히 이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된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대해 “경제 성장 둔화 등 국내 문제가 시급할 뿐 아니라 미국과 대만의 관계가 준동맹 수준인 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중국 측 동북공정이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등으로 우리 국민의 혐중 정서가 극대화된 상황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조 전 대사는 “우리 외교가 한미일, 한중일 협력의 균형을 맞추면서 이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의 우려를 중국에 전달하면서도 그동안의 교류와 협력 실적을 바탕으로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대구 시내 걷다 만난 네명의 삶…같은 시간 다른 낭만 엇갈린 삶

    대구 시내 걷다 만난 네명의 삶…같은 시간 다른 낭만 엇갈린 삶

    역사 속 인물의 발자취를 되짚어 걸어 보는 여정은 꽤 독특한 느낌을 안겨 준다. 지금과 사뭇 다른 멋, 낭만, 가치관, 회한 등 다양한 감정들과 만날 수 있어서다. 대구에 유명인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여행 프로그램이 생겼다. 대구라는 거대 도시, 그중에서도 중구라는 작은 지역에서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한동네 사람들 네 명의 삶을 엿보는 상품이다. 음악가 박태준(1900~1986), 시인 이상화(1901~1943), 기업가 이병철(1910~1987), 화가 이인성(1912~1950)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 ‘운수 좋은 날’의 작가 현진건 등 귀에 익은 인물들이 골목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담쟁이덩굴처럼 얽힌 이들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1900년대 초 걸출한 인물들 ‘대구와 인(人)연을 맺다.’ 대구 인물 기행의 상품 이름이다. 대구관광재단이 기획하고 여행 콘텐츠 업체 한국자전거나라가 설계한 일종의 ‘파일럿’ 상품이다. 시범 운영 뒤 관광객들의 호응 여하에 따라 명운이 갈리게 된다. 여정에 나서기 앞서 각 인물의 등장 순서는 중요도가 아닌 연고지 방문 순서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청라언덕부터 찾는다. 대구 도심 한복판에서 허파 노릇을 하는 풋풋한 공간이다. 청라언덕은 인물 기행 중 음악 투어 코스에 포함된 장소다. 여기에 사연을 새긴 이는 작곡가 박태준이다. ‘오빠생각’ 등 누구나 한번은 불러 봤을 동요들을 작곡한 이다. 가이드가 전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박태준이 경남 마산(현 창원)의 창신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재직할 때다. 당시 국어 선생이었던 노산 이은상과 흉금을 터놓고 지내던 그는 옛 마산의 노비산이라는 곳에 함께 올라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박태준의 첫사랑은 대구 계산학교(청라언덕 옆 계성중고의 전신) 시절 짝사랑하던 이웃 신명여고 학생이었다. 자두 열매로 엮인 둘의 달달한 얘기를 들은 이은상이 시를 썼고, 여기에 박태준이 곡을 붙였다. 우리나라 초기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무생각’은 이렇게 태어났다. 청라언덕에서 20분 남짓 진행되는 몰입형 연극을 통해 대략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투어 참가자를 위해 마련된 연극이다. 배우들이 박태준과 이은상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낸다. 청라언덕에는 세 채의 선교사 사택이 남아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적벽돌 건물이다. 대구시에서 옛 건물을 돌아보는 ‘브릭 로드’라는 건축문화 기행 프로그램을 따로 내놓을 정도로 공을 들이는 공간인 만큼 차분하게 살펴보는 게 좋겠다.눈이 쌓인 듯한 대구제일교회 앞 ‘현제명 나무’(이팝나무 노거수로 이 교회에서 활동한 작곡가 현제명의 이름을 땄다)를 지나 대구 3·1만세운동길 ‘90계단’을 내려서면 곧 계산성당이다. 미술 투어의 주인공 이인성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다.●한국 대표 건축물 계산성당 이인성은 인물 기행에선 막내지만 한국 화단에선 천재 화가로 이름이 높다.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요절하기 전까지 조선미술전 대상작(창덕궁상)인 ‘경주의 산곡에서’ 등 수많은 명화를 남겼다. 화단에선 그의 화풍과 연관 지어 ‘한국의 고갱’이라 흔히 일컫는다. 1902년 세워진 계산성당은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 중 하나다. 국운이 쇠하던 조선 말에 수많은 화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삼았을 만큼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하던 곳이다. 계산성당에선 초등학교만 졸업한 가난한 집 아이가 대구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하는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성당 옆엔 ‘이인성 나무’가 있다. 수령 100년을 훌쩍 넘긴 늙은 감나무다. 이인성은 감나무가 어우러진 성당 풍경을 ‘계산동 성당’이란 걸작 수채화에 담아냈다. 투어 도중 대구근대골목단팥빵 본점에선 ‘이인성 아뜰리에’ 연극이 진행된다. 이인성의 삶을 다룬 체험 연극이다. 빵집 자체가 적벽돌의 근대건축물이어서 고풍스런 느낌을 더해 준다. 계산성당 출구쪽 담장에는 여덟 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고사의 기원이 된 뽕나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을 따라왔다가 귀화한 두사충과 조선 과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겼다.●등장인물 이어 주는 무영당 이어 무영당과 만난다. 등장 인물 넷을 하나로 엮어 주는 중요한 장소다. 1937년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근대백화점 무영당은 당시 지역 사회에 신지식을 보급하는 복합문화공간이자 예술가들의 교류 공간으로 기능했다. 박태준은 여기에 음악 연구소를 열었고, 이상화와 이인성은 진부함을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뜻을 가진 모임 ‘영과회’의 아지트로 활용했다. 기업가 이병철은 결이 다소 달랐다. 예술가였던 셋과 달리 그는 무영당의 소유주였던 이근무와 교유했다. 훗날 그의 아들 이건희 회장이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을 통해 이인성의 작품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을 세상에 돌려줬으니, 이를 대를 이은 인연이라 해야 할까.문학 투어의 핵심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저항시인 이상화 생가 터다. 현재는 ‘라일락뜨락 1956’이란 카페가 들어섰다. 카페 뜨락에는 라일락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른바 ‘이상화 나무’다. 수령은 200년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 아래에서 이상화가 태어나 성장하고, 들을 빼앗긴 국민으로서 고뇌했을 것이다. 나사처럼 비틀린 검은 둥치에서 시간의 켜가 그대로 느껴진다. 옛 지적도를 보면 이상화 생가는 주변 집들을 아우르는 400평 규모의 대가였다. 현재 카페가 들어선 곳엔 안채 일부가 있었고 사랑채, 문간채 등 여러 건물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상화는 생가를 32년간 소유하며 창작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카페 이름에 쓰인 ‘1956’이란 숫자는 이상화의 실제 생가 규모가 지적도를 통해 확인된 해를 뜻한다. 생가로 알려진 계산성당 옆 ‘이상화 고가’는 사실 그가 말년에 몸을 의탁했던 장소다. 이상화 생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아울러 친일파 아버지 아래 이복동생만 21명이었다는 이장희, 같은 날 세상을 떠난 현진건 등 친구들과의 비화도 흥미를 끈다. ●‘빼앗긴 들’은 남구 앞산 캠프 워커 부지 최근 그의 시의 모티브가 된 ‘빼앗긴 들’이 남구 앞산 앞의 캠프 워커 부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역 사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종전까지는 수성구 수성못 일대에 있었던 옛 보리밭을 보며 ‘빼앗긴 들’을 떠올렸다는 게 정설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이상화 문학축제 등을 열던 수성구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고, 남구로선 엉겁결에 명소를 얻은 셈이다. 주한 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은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두고 남구청에서 고민 중이라고 하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지켜봐야 할 듯하다. 이상화의 형은 중국에서 광복군, 임시정부 요인 등으로 활동했던 이상정 장군이다.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 의거(1932)의 주인공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일화로 유명하다. 대구에 서양화를 처음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화풍은 서동진으로, 다시 이인성으로 이어진다. 그의 아내는 조선인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다. 둘은 결혼 이후에도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것으로 전해진다.이제 기업가 투어에 나설 차례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이병철 선대 회장이 집에서 삼성상회까지 오가던 출퇴근길이 모티브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살았던 고가는 이건희 전 회장의 생가이기도 하다.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해 1980년대 라면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국수 전성시대를 열었던 ‘별표 국수’ 삼성상회 창업기, 당시 10대였던 이건희 전 회장의 말에 착안해 제일모직 정장과 휴대전화 브랜드인 ‘갤럭시’가 탄생하게 된 비화 등을 들을 수 있다.아, 이 회장 고가의 대문 문고리와 삼성상회 금고가 있었던 자리에 재현한 조형물은 ‘만지면 재복 터지는’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 잊지 마시길. 벌써 표면이 반질반질해졌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관광객들은 이미 ‘부자 기운’ 받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다. ■여행수첩 ←‘대구와 인(人)연을 맺다’는 4개 코스 외에 예술가 3인의 삶을 묶어 돌아보는 전일 코스, 1박 2일 코스 등도 갖췄다. 특히 1박2일 코스는 특급 호텔 숙박 등 가성비가 뛰어나다. 포털 사이트에 상품 이름을 검색하면 곧바로 업체 누리집으로 연결된다. ←계산성당 옆 ‘커피 명가’는 딸기 케이크가 유명하다.  
  • 30년 전 대만과 단교 참사...中에 대한 과도한 환상 있었다

    30년 전 대만과 단교 참사...中에 대한 과도한 환상 있었다

    “올해 한중 수교 30주년을 베이징과의 관계에서만 이야기하지만 사실 대만과의 단교 30주년이기도 하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투쟁과 건국을 지원한 나라는 중국이 아닌 대만인데 우리 외교가 43년간 정통성을 둔 타이베이와의 인연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가슴 아픕니다.” 외교 현장에서 36년을 보낸 조희용(67) 전 주캐나다 대사의 저서 ‘대만단교회고: 중화민국 리포트 1990~1993’은 노태우 정부 ‘북방 정책’의 대미를 장식한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현장 실무자로서의 씁쓸한 회고이자 기록이다. 당시 주중화민국 한국 대사관 1등 서기관이던 그는 대만과의 난감한 단교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재현했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조 전 대사는 “외교관의 특권은 외교 현장의 경험과 기록이며 이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의 외교를 펼쳐 나가는 것”이라며 “당시 중국과의 조기 수교와 대통령의 방중이란 정책 목표가 모든 것을 압도하면서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전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중국과 수교 협상이 진행되던 도중인 1992년 7월 17일 관련 보도가 나오자 대만 측에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고, 수교를 엿새 앞둔 8월 18일에야 “수교 교섭에서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통보했다. 나흘 뒤 22일 대만 정부는 당시 박노영 주대만 대사를 초치해 “옛 친구를 발로 차 버렸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중국이 이미 한 달 전에 한국과의 수교 계획을 북한에 귀띔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중국만 믿고 있던 우리 정부는 대만과의 신뢰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모양새가 됐다.조 전 대사는 “당시 중국은 조기 수교 등 우리의 최우선 순위를 간파해 치밀하게 교섭했다”면서 “반면 우리는 중국과 수교하면 남북 관계가 전격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또 “그때 대만에 특사를 파견해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는 등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한중 수교 30년에 대해서는 “우리는 중국에 북한의 개혁·개방과 평화 통일, 북핵 문제에 대한 건설적 역할을 바랐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며 “중국은 대만 고립은 물론 한미 동맹 이완과 두 개의 한국 관리 등 전략적 목표를 상당히 이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된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대해 “경제 성장 둔화 등 국내 문제가 시급할 뿐 아니라 미국과 대만의 관계가 준동맹 수준인 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중국 측 동북공정이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등으로 우리 국민의 혐중 정서가 극대화된 상황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조 전 대사는 “우리 외교가 한미일, 한중일 협력의 균형을 맞추면서 이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의 우려를 중국에 전달하면서도 그동안의 교류와 협력 실적을 바탕으로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운명으로 여긴 조선… 베델, 기꺼이 항일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운명으로 여긴 조선… 베델, 기꺼이 항일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15개국 417명 안장 양화진 묘원 봄의 묘지는 아름다워서 슬프다. 물오른 푸나무들을 스치고 윤택하게 부풀어 오르는 대기를 헤치며 묘지를 산책한다. 만개한 꽃과 묘비의 빛깔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제아무리 화려한 비석도 정교한 조화도 풀꽃 한 송이의 생기를 이기지 못한다. 죽음은 어떻게든 아름다울 수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이 기억하는 만큼만 죽은 자의 삶이 아름다워질 뿐이다. 운명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그저 인연이라고 하자. 어떤 필연적인 우연, 우연적인 필연이 인연이 돼 이방인들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모른다. 서울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를 나오면 절두산 성지와 양화진 묘원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보인다. 당산철교를 사이에 두고 왼편이 신유박해로 순교한 가톨릭 성인들을 기념하는 절두산순교성지, 오른편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다. 1890년 양화진에 처음 묻힌 외국인은 J W 헤론이었는데, 그는 호러스 알렌을 이은 광혜원 원장으로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삼복 중의 죽음이라 외국인 묘지가 있는 인천 제물포까지 시신을 옮길 수 없어 양화진에 매장한 것이 외인묘지의 유래가 됐다. 현재 15개 국적 417명이 안장돼 있는데 그중 선교사는 6개국 145명이다. 선교사들 외에는 한국에 살던 외국인과 가족들, 해방 후에는 주로 미군들이 묻혔다. ●베델 묘비엔 치열했던 항일과정 빼곡 여기 누운 이들은 시쳇말로 객사를 한 셈이다. 하나 어디에서 살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진폭은 달라질지니, 이곳의 주인들은 먼눈과 너른 보폭으로 낯선 세계에 다다른 모험가들인 게다. 쫄보인 나는 그저 묘비에 새겨진 이방인들의 이름들을 읊조리며 발소리를 눅여 걷는다. 봄의 묘지는 그들이 떠나간 세상의 평화를 모사한 듯 적막하다. 20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서울신문에서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던 중 베델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가 쓴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와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는 현재까지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단 두 편의 해외 소설이다.“그래도 지금 서울 어딘가에 있을 이 친구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을 것 같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조선인을 위해 싸웠다’.”(‘황제 납치 프로젝트’ 중에서) 과연 묘비명은 작가의 상상대로일까? 베델의 묘소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A구역 두 번째 자리에 있다. ‘대한매일신보사장대영국인배설지묘’가 새겨진 묘비와 함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표지가 있다. 묘비는 1910년 일제가 칼과 망치로 비문을 훼손하는 바람에 1964년에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새로 세웠다. 비문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썼던 것을 복원했는데, 언론인의 붓은 작가의 펜과 달리 선명하고 건조하다. 베델이, 1904년부터 1909년까지, 영국에서 일본을 거쳐 조선에 와서, 신문을 만들어 일제 침략 정책에 저항하다가, 옥고를 치른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일목요연하다. 여전히 ‘왜’는 알 수가 없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들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체험과 모험과 커리어 확보 등 갖가지 목적을 가진 그들의 취재 포인트는 백인종과 황인종, 서양과 동양의 대결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것이었다. 삶터를 전쟁터로 내어 준 한국인들은 주인공은커녕 조연조차 못 되는 엑스트라였다. ‘독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 1904’라는 여행기를 남긴 저널리스트 루돌프 차벨의 눈에 한국인들은 이렇게 보였다. “생활신조는 ‘되도록 돈은 많이, 일은 적게, 말은 많게, 담배도 많이, 잠은 오래오래’였다. 때로는 거기에 주벽과 바람기가 추가되었다.” 구제불능의 게으름뱅이! 무능한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은 그토록 한심해 보였다. 이보다 더 날카롭고 사나운 시선도 있다. “백인 여행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체류할 경우 처음 몇 주 동안은 기분 좋은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만약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강력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한국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며,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 번째 선택을 했을 것이다.” 28세에 종군기자로서 북상하는 일본군 대열에 합류했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급진적인 사회주의자 잭 런던의 눈에 한국인은 살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소설 자본론’이라고 평가되는 ‘강철군화’를 읽은 독자에게 런던의 글은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럽다. 물론 작가라는 작자들이 모두 인류애의 화신일 리 없고 반드시 인간적으로 훌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런던은 노동계급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큰돈을 벌어 자신이 증오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성공을 거둔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4개월의 체험으로, 형편없는 도로와 불결한 환경이 아무리 지긋지긋했대도,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일부 한국인만을 만난 상태에서 한국인들의 유일한 장점이 ‘짐을 지는 것’이라고 단정 지은 부주의와 편견은 좀처럼 이해해 주고 싶지 않다. 한층 더 나쁜 것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다운 수려한 문장과 생생한 묘사다. 나쁠 때도, 혹은 나쁠수록 더욱 강렬한 ‘잘 쓴’ 글의 해악이라니!●수송공원에 대한매일신보 사옥 터 당산철교 아래로 이어진 절두산순교성지에 이르러 다리쉼을 한다. 믿음을 위해 목이 잘린 사람들과 수백 년 후까지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도 ‘왜’라는 물음표가 떠 있다.전날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에서 베델의 일터였던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터 표석을 보고, 일민미술관 5층에 있는 신문박물관에서 대한매일신보 보관물을 관람했다. 무심한 돌로 기념하는 자리, 아무리 ‘역사의 그릇’이라지만 빛바랜 종잇장으로 남은 신문 조각을 위해 베델이 목숨을 바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한심하다 못해 살인 충동까지 불러일으켰던 사람들을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마음눈이 필요하다. 베델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서울 용산에서 한 조선인이 어린아이를 업은 부인을 데리고 일본군 병영을 지나갔다. 이때 한 일본 군인이 장난삼아 이들에게 총을 쐈다. 탄환이 여인의 옆구리를 관통해 아이 엄마가 즉사했다. 아이의 한쪽 손도 산산조각이 났다. 아이 아빠가 일본군 병영에 뛰어들어가 장교에게 항의했지만 되레 길거리로 쫓겨났다.”(코리아데일리뉴스 1907년 9월 3일자 기사) 우리의 일상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다. 하대와 멸시를 넘어서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하는 열외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연민과 동정을 기반으로 한 박애와 인류애, 그러니까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추썩임이 보상 없는 일에 기꺼이 뛰어드는 도화선이 된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서양 작가의 대답은 이러하다.“우리(베델과 가상의 소설 주인공)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부터 ‘조선의 형제’를 자처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지른 불에 심하게 데었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불속으로 뛰어들 생각이다. 또 한 번 크게 다칠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우둔하지만 행복하고 유쾌한 개니까. 그 불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까.”(소설 ‘황제의 옥새’ 중에서) 소설가
  • 일제 침탈의 아픔 녹아 있는 용산…애국선열 정신 계승 도시로 우뚝

    일제 침탈의 아픔 녹아 있는 용산…애국선열 정신 계승 도시로 우뚝

    “용산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이자 일제강점기 침탈의 아픔이 녹아 있는 곳입니다. 독립투사들의 행적을 널리 알리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기에 그들의 값진 발자취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하루 뒤인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야외무대에서 안중근 의사 얘기를 다룬 뮤지컬 ‘영웅’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우리들 이 한 손가락, 조국을 위해 바칩니다”라는 ‘단지동맹’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애국선열의 도시 용산’ 선포식에 참석한 주민, 독립운동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200여명이 뜨거운 박수로 호응한 것이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용산구는 발 닿는 곳곳마다 선열들의 흔적이 스며 있는 하나의 야외 박물관”이라며 “애국선열의 도시 선포로 숭모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일회성 행사로 그치고 말 일이 아니라 향후 총 51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될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 조성과 같은 지역의 핵심 발전 사업과 연계해 애국선열 도시의 토대를 놓을 것”이라며 선포식의 의미를 설명했다.선포식이 열린 효창공원은 용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성지’다. 김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7위 선열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지난 11일엔 효창공원 안에 있는 의열사(7위 선열과 안중근 의사 영정을 모신 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임시정부 요인의 넋을 추모하는 숭모제가 열렸다. 용산구는 지난 11일부터 오는 22일까지를 ‘애국선열의 도시 선포 기념주간’으로 정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명언을 담은 깃발 110장을 이태원로와 효창공원 곳곳에 달아 이를 알리고 있다. 용산아트홀 전시실에서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기리는 특별 전시회도 진행 중이다. 선포식 후 특별전 개막식을 찾은 성 구청장은 최재형 선생의 가족사진과 연해주 항일투쟁 중심지 신한촌의 사진 등을 살펴보며 “막대한 재산을 가진 최재형 선생은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생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변변한 공간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성 구청장은 “용산구가 꿈나무종합타운 청사에 최재형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제공하는 등 후원에 나서며 조금이나마 후손된 도리를 해 나가고 있다”며 “용산은 애국선열의 도시로 우뚝 서서 선열들을 늘 기리며, 그 무한한 헌신에 보답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 [자치광장] 근현대사의 보고, 망우역사문화공원/류경기 서울 중랑구청장

    [자치광장] 근현대사의 보고, 망우역사문화공원/류경기 서울 중랑구청장

    19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 민주공화제 정부였으며,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 덕분임을 가슴에 새기며 호국정신을 기리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호국정신 하면 떠오르는 곳이 바로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이다. 이곳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신 박찬익, 서병호 등의 묘소와 도산 안창호의 묘터가 있다. 또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유관순 열사 등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지석영, 박인환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 80여명이 영면해 계신다. 이곳에 계신 분들을 빼놓고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태조 이성계가 사후 능을 정하고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해서 망우(忘憂)라 불린 이곳은 1933년부터 40년 동안 수만 기의 묘역이 있던 공동묘지였다. 지금은 울창한 숲과 5.2㎞의 산책로가 주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힐링되는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다. 중랑구는 ‘역사성, 울창한 숲, 산책로’라는 세 가지 보물을 갖춘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대한민국 대표 명소로 가꾸고 있다. 서울시로부터 관리권을 이관받아 역사적 인물들의 묘역을 정비하고 학술연구와 교육,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역사문화공원으로서 가꾸고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4월 1일 방문객들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일상의 휴식을 느낄 수 있는 중랑망우공간을 개관했다. 공원 입구에서 주민들을 가장 먼저 맞는 이곳은 앞으로 공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관과 함께 진행되는 첫 기획전시는 ‘뜻을 세우다, 나라를 세우다’를 주제로 공원에 영면한 독립운동가들의 자료가 전시된다. 앞으로도 다양하고 의미 있는 전시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숲과 묘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스톡홀름 묘지공원과 마카오 신교도 묘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빈 중앙묘지도 베토벤, 슈베르트 등 수많은 음악 거장들이 잠들어 있어 음악가의 묘지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이곳들에 견줘 부족함이 없다. 역사를 마주하고 싱그러운 자연에서 위로를 받는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보존과 관리에 힘쓰고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모두가 힘을 모아야겠다.
  • 청남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오늘 개관

    청남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오늘 개관

    충북도는 옛 대통령 별장인 청주 문의면 청남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마련했다고 10일 밝혔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맞춰 11일 개관하며 연면적 2393㎡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다. 외형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재현했다. 기념관에는 임시정부 행정수반 역사기록화 8점, 한국통사 등 행정수반 관련 자료 32점, 윤봉길·이봉창 선언문 등 임시정부 활동 자료 67점, 충북 출신 임시정부 요인 자료 65점 등이 전시된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한국광복군 서명문이 담긴 태극기, 일본의 항복문서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복제물이다. 임시정부 청사 포토존, 광복군 태극기 서명하기, 행정수반 어록 살펴보기 등 다양한 체험시설도 갖췄다. 기념관 주변에는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이동녕, 송병조, 양기탁, 김구 등 임시정부 행정수반 8인의 동상이 세워졌다. 충북도 관계자는 “임시정부 행정수반도 대통령과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라며 “근대까지 아우르는 대통령 테마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기념관을 열게 됐다”고 밝혔다. 개관식에는 임시정부 행정수반들의 후손들도 참석한다.
  • 청남대에 임시정부 기념관 문 연다

    청남대에 임시정부 기념관 문 연다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청주시 문의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이 마련됐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맞춰 11일 개관하며 연면적 2393㎡에 지상2층 지하 1층 규모다. 외형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재현했다. 기념관에는 임시정부 행정수반 역사기록화 8점, 한국통사 등 행정수반 관련 자료 32점, 윤봉길·이봉창 선언문 등 임시정부 활동 자료 67점, 충북 출신 임시정부 요인 자료 65점 등이 전시된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한국광복군 서명문이 담긴 태극기, 일본의 항복문서 등도 만나볼수 있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복제물이다. 2층 전시실 옆 북카페에선 독립운동 관련 서적 100권을 열람할 수 있다. 임시정부 청사 포토존, 광복군 태극기 서명하기, 행정수반 어록 살펴보기, 독립운동가 구하기 등 다양한 체험시설도 갖췄다. 기념관 주변에는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이동녕, 송병조, 양기탁, 김구 등 임시정부 행정수반 8인의 동상이 세워져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충북도 관계자는 “임시정부 행정수반도 대통령과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라며 “근대까지 아우르는 대통령 테마관광지를 만들기위해 기념관을 열게 됐다”고 밝혔다. 개관식에는 임시정부 행정수반들의 후손들도 참석한다. 전두환 대통령 재직시절 지어진 청남대는 충북의 대표 관광지로 전직 대통령들의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 어제의 눈물로 피어난 오색빛깔 골목길

    어제의 눈물로 피어난 오색빛깔 골목길

    어느 도시에나 원도심은 있기 마련이다. 부산도 그렇다. 중구를 중심으로 멀리는 일제강점기, 가까이로는 6·25전쟁 당시 피란 수도의 흔적이 여태 남아 있다. 이런 문화유산들을 찬찬히 돌아보는 재미가 아주 각별하다. 반면 부산의 동쪽은 요즘 변화가 극심하다. 새로운 것들이 밀물처럼 들어차고 있다. 해운대 너머 기장 일대의 새로운 놀거리들을 찾아봤다.원도심 투어의 들머리는 중구의 유라리광장이다. 유럽(유)과 아시아(라)가 모여 떠드는 소리(리)의 뜻을 가진 합성어다. 부산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임시수도였다. 1129일의 전쟁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1023일(1026일이란 견해도 있다)이나 대한민국의 중심지였다. 유라리광장 위를 지나는 영도다리는 당시의 대표적인 흔적 중 하나다.●피란민 재회의 장소 ‘영도다리’ 영도다리는 피란민들이 재회의 장소로 약속한 곳이다. 생면부지의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던 영도다리는 전쟁 통에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훗날 만남을 기약하는 장소로 제격이었다. 원래 도개(선박 출입을 위해 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는 것)로 유명한 곳인데, 코로나19 탓에 도개 행사는 잠정 중단됐다. 매달 둘째, 넷째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점검차 도개 작업이 진행될 때만 잠깐 볼 수 있다. 유라리광장 한켠엔 웃음등대가 세워져 있다. 웃고 있는 피에로 형태의 등대다. 부산은 자타가 인정하는 K코미디의 도시다. 웃음등대는 해마다 열리는 부산코미디페스티벌의 마스코트 ‘퍼니’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밤에는 미디어 파사드 등의 이벤트가 진행된다. 유라리광장에서 자갈치 시장 쪽으로 가면 ‘판도라의 숲’이 나온다.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조형물로 다시 제작해 전시했다.여기서 길을 건너면 용두산공원이다. 부산 원도심의 랜드마크라 할 ‘부산타워’가 오벨리스크처럼 솟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타워다. 120m 높이의 부산타워에 오르면 앞으로 갈 원도심 일대는 물론 부산의 명소 대부분이 한눈에 들어온다.●독립운동 전초기지 ‘백산상회’ 용두산공원 옆은 ‘한성1918 부산생활문화센터’다. 1918년 한성은행 부산지점으로 세워졌으니 무려 104년이나 건재한 건물이다. 현재는 부산 원도심 투어의 여행자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옆은 백산기념관이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1885~1943)를 기리는 공간이다. 기념관이 세워진 자리는 1914년 백산이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를 창업한 곳이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개인 사업체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핵심 전초기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운영자금 60% 정도가 백산이 지원한 자금이었을 정도로 백산상회는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할 때 망개떡 상자에 넣어 숨겼다고 한다. 백산의 고향이 경남 의령이고, 이 고장 주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 중 하나가 망개떡이었던 것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그저 주전부리인 줄만 알았던 망개떡이 요깃거리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게 놀랍다.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오프닝 장면으로 유명한 ‘40계단’도 인근에 있다. 장성민(안성기)이 마약상(송영창)을 살해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록밴드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잔잔하게 흐르던 순간 펼쳐진 그 첫 장면은 당시 꽤 큰 반향을 불렀다. 요즘이야 계단 하면 영화 ‘조커’를 떠올리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청춘들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한 장면을 연기하며 내려오곤 했다. ‘40계단’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됐다. 6·25전쟁 때는 산복도로에 정착한 수많은 피란민들이 물동이를 이고 지고 오르내렸던 고난의 계단이었다. 부산의 옛 모습과 마주할 수 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이 문을 닫은 건 다소 아쉽다. 내부 수리를 마치고 오는 6월쯤 재개장 예정이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이 나온다. 좁디좁은 골목에 없는 듯 숨어 있는 문화유산(등록문화재)이다. 캐나다 선교사의 사망보험금으로 매입한 땅에 1924년 지어 올렸다. 서울의 성공회 성당보다 2년 먼저 세워졌다고 한다. 성당 외벽은 붉은 벽돌이다. 세월이 쌓인 탓인지, 여느 벽돌보다 한결 붉다. 건물 오른쪽 회랑 부분을 제외하고 성당은 현재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돔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성당 인근의 부산지방기상청 건물도 1934년에 건립된 문화재(시 지정 기념물)다. 선박의 기관실 형태로 지어진 모습이 독특하다.●부산의 산토리니 ‘감천문화마을’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나 동아대 부민캠퍼스 쪽으로 가면 임시수도기념거리가 나온다. 이 일대에도 문화유산이 많다. 동아대 캠퍼스 내 석당박물관(등록문화재)은 임시수도의 정부청사로 쓰였던 곳이다. 1925년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석조 건물의 자태가 자못 당당하다. 캠퍼스 초입에 서 있던 부산전차(등록문화재)는 교내로 옮겨져 수리 중이다. 1968년까지 시내를 달렸던 부산의 마지막 전차 중 한 대다.동아대 교정 바로 위는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다. 1926년에 건축된 목조 건물이다. 원래 경남도지사 관사였다가 1951년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온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3년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관저로 사용했다. 당시 대통령 집무실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원도심 투어의 종착지는 감천문화마을이다. 산허리를 따라 형형색색의 집들이 계단식으로 늘어섰다. 그리스 산토리니를 닮아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불린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생긴 낙후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환골탈태했다. 감천동 반대편은 아미동이다. ‘비석문화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오래전 일본인 공동묘지였던 곳인데 피란민들이 무덤 위에 집을 짓고 비석, 상석 등을 건축자재로 쓰면서 비석마을로 불리게 됐다. 부산시에서 자체 선정한 1호 등록문화재다. 요즘 부산은 벚꽃이 일품이다. 원도심 주변에 가볼 만한 벚꽃 명소들이 있다. 부산 야경 감상의 ‘고전’으로 꼽히는 황령산은 벚꽃 드라이브로 제격이다. 연분홍 벚꽃과 도심의 불빛이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빵집이 많아 ‘빵천동’이라 불리는 남천동 일대도 벚꽃 명소다. 얼추 40년을 헤아리는 늙은 벚나무들이 빼곡하다. 바람 부는 날엔 오륙도로 가야 한다. 용호동 해안 절벽에 세워진 ‘오륙도 스카이워크’ 아래로 울부짖는 바다의 모습이 장관이다. 스카이워크 뒤의 해맞이공원에선 유채꽃, 수선화 등 봄꽃들이 쪽빛 바다와 기막히게 어우러진다. ■여행수첩 -원도심 전체를 걸어서 돌아보려면 품이 꽤 많이 든다. 용두산공원이나 감천문화마을 등 핵심 포인트에 차를 주차하고 돌아보길 권한다. 원도심 곳곳에 공영, 민영 주차장이 잘 갖춰져 있다. -외지에서 원도심으로 들어가려면 복잡한 시내도로를 타야 한다. 다소 돌더라도 광안대교, 부산항대교(북항대교) 등 외곽도로를 이용하길 권한다. 바다 위로 뜬 다리를 지나며 부산의 외모를 훑어볼 수 있다. -중구청 바로 앞의 유명분식은 ‘쫄우동’으로 이름난 집이다. 쫄우동은 걸쭉한 우동 국물에 쫄면이 들어간 일종의 퓨전음식이다. 요즘 제철 음식은 갈미조개다. 광안리 해변 쪽에 갈미조개와 삼겹살을 함께 구워 먹는 ‘갈삼구이’ 집이 많다.
  • 이것이 치열했던 대일 심리전의 증거

    이것이 치열했던 대일 심리전의 증거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미국 정부에 전달한 대일 심리전단인 ‘종이폭탄’(사진)이 29일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한국독립당 소장파 인사들로 구성된 한국혁명통일촉진회가 1942년 작성한 ‘한국인은 추축국과 싸우는 연합군에 종이폭탄을 제공합니다’라는 제목의 문건을 이날 공개했다. ‘종이폭탄’(Paper Bombs)은 적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입히는 전단을 의미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혁명통일촉진회는 미 연방정부에 대한 제안사항을 담은 문건을 당시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던 이승만에게 보냈다. 이 단체는 1942년 6월 중국 쿤밍(昆明)에서 강창제, 조중철, 김우경 등 한국독립당 소장파 인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태평양전쟁 이후 독립운동 단체 간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직이다. 총 5쪽 분량의 이 문건은 한국어·일본어·베트남어·미얀마어로 각각 작성된 선전물과 이 선전물의 제작 이유 및 살포 시 예상 효과 등을 설명하며 연합국이 효과적으로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 형식의 자료로 구성돼 있다. 촉진회는 선전물에서 ▲한국 동포에겐 3·1혁명정신을 부활시켜 조직적 대혁명을 일으킬 것 ▲일본군 병사에겐 일본 군벌을 타도하고 진실로 일본 민중을 사랑할 것 ▲베트남·미얀마인에겐 인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연합 항일 전선을 구축할 것 등을 촉구했다. 이 문건은 지난해 12월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수집한 조지 맥아피 매큔 문서군에서 보훈처가 발굴했다.
  •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한 사내가 있었다. 잔인한 20세기가 시작되던 해 유달리 덥던 여름에 세상에 났다. 아버지는 소실을 둘씩이나 거느린 한량이었다. 어머니는 사랑을 잃고 의기소침한 여인이었다. 배다른 형제까지 6남 1녀, 아무도 병약한 둘째 아들을 귀애하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컸다. 먼지덩이처럼 구르며 자랐다. 귀 얇은 아버지가 교활한 일본인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은 몰락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열다섯 살에 몰씬한 단내를 좇아 일본과자점에 취직했다. 화과자와 찹쌀모찌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지만 가난한 점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열일곱 살의 생일은 말라리아와 함께 왔다. 열병 끝에 관절염이 생겼다. 이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뼈마디부터 저리고 아팠다. 짧은 생애가 삐걱거렸다.(졸저 ‘백범’ 중에서)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후대의 일이다. 민족 혹은 국가, 어떤 공동체가 역사의 인물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보다 현재의 의미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선양 사업은 잘난 자손의 가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자손이 없거나 한미하면 같은 일을 하고도 역사의 어둠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고향의 지자체에서 자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조차 복불복이다.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우당 이회영 같은 명문거족 출신은 아니더라도 백범처럼 부모의 총애를 담뿍 받았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윤봉길처럼 고향의 뿌리와 월진회를 조직해 함께 활동한 동지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복형제까지 더해 7남매 중의 둘째 아들, 용산에서도 일본 오사카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 안팎 어디서나 누구라도 그에게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았을 게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니 빚도 없었다. 그 고독한 바람의 사내 이봉창이 여기 있었다. ‘이봉창 집터: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이 살던 집터이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 귀퉁이 화단에 더부살이했던 부정확한 표석은 철거됐고, 새로운 표석이 2018년 사용 승인된 용산KCC스위첸아파트 102동 3·4호 라인 현관 맞은편 화단에 자리잡았다. 이봉창 의사는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원효로2가)에서 태어나 경성부 금정(현 효창동) 118번지에서 열한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살았다.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번지수가 불명확해진 탓인지 일부 인터넷 지도에는 집터와 생가터의 표기가 혼동돼 있다. ‘이봉창 집터’ 표석이 있는 102동 앞에서 후문으로 빠져나와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오면 ‘이봉창 역사울림관’이 있다. 거리로는 멀지 않은데 아파트 벽으로 막혀 있으니 아쉽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접근하면 역사울림관을 먼저 보고 표석을 찾는 동선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역사울림관이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 걸 모르고 갔다가 1시간을 꼬박 밖에서 기다리게 됐다. 기념관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에 그냥 돌아갈까 망설였다.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적은 패널과 사진, 기념품 몇 점을 전시한 재미없는 공간이 내가 기억하는 기념관의 전부였다. 그래도 2021년 10월에 개관했다니 뭐라도 다를까 궁금하고, 작은 뜰 앞 툇마루에 놓인 푹신한 방석이 마음에 들어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햇살은 따스하고 사위는 고즈넉하다. 거리를 향해 놓인 벤치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으로 조각이 앉아 있는데, 버튼을 누르니 녹음이 흘러나온다.“군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묻는 사람은 백범이고 답하는 사람은 이봉창이다. 쾌락을 말하는 이봉창의 말에는 허무가 묻어 있다. 허랑하고도 방탕하게, 분진으로 가득한 누항을 떠돈 자의 지독한 피로다. 이봉창의 모습은 전형적인 운동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조직은커녕 소개인이나 소개장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청사를 찾아와 일본인들이 부르는 ‘가정부’(假政府)라는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찾았다.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 쓰는가 하면 엔카를 멋들어지게 불러서 ‘일본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오리 바람에 게다짝을 끌고 청사에 들어오려다 중국인 문지기에게 쫓겨나기까지 했다. 모두가 오해했다. 많은 이가 의심했다. 하지만 백정선이라는 가명을 쓰던 한 사람, 백범만은 그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비장한 태도와 결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는 굳건했다. 그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단순하고, 선명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자유로운 이봉창만의 방식이 있었다. 백범의 매서운 눈빛을 어린아이처럼 맞받으며 반달눈으로 빙긋이 웃던 이봉창은 그렇게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됐다.‘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백범의 원칙은 명확했다.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에 사는 동포들이 보내준 피 같은 돈을 일체의 망설임 없이 이봉창에게 건넸다. 돈은 정직하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은 모험이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 있는 모험이었다. 이봉창은 난생처음 진정한 믿음을 얻었다. “엊그제 선생께서 속주머니를 뒤집어 천여 원의 거액을 제게 주셨지요. 그 돈을 받고 돌아가서는 온밤을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눈물이 절로 흐르더이다. 누더기 단벌 장삼에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형편을 뻔히 아는데, 대관절 저를 어떻게 믿고 이같이 큰돈을 털컥 맡기십니까? 프랑스 조계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 마음대로 써버려도 찾으러 오지 못하실 테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평생에 누가 저를 이토록 믿어 주었겠습니까? 이토록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기다리길 잘했다. 두 칸짜리 한옥 크기의 이봉창 역사울림관은 평면적이고 지루하다는 기존 기념관에 대한 편견을 깬 작지만 새로운 공간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발 모양에 맞춰 의사의 흉상을 마주 보고 서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겠다’는 선서문이 들린다. 한인애국단 단원이 돼 사진을 찍는 증강현실(AR) 체험과 1932년 1월 8일 일왕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현장에 함께하는 가상현실(VR) 체험(VR은 기술적 측면에서 조금 더 개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을 할 수 있다. 이봉창 의거와 사형 집행, 해방 후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기까지의 신문 기사들을 여닫이창을 화면 삼아 띄워 볼 수도 있다. 직접 가보지 못한다면 인터넷을 통한 3D 체험도 가능하다(https://my.matterport.com/show/?m=T9Wk7zuBySz). 오롯이 이봉창 의사를 기리는 공간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제는 그 사내도 영원한 쾌락 속에서 편히 쉬리라. 바람 끝이 많이 따뜻해졌다. 바야흐로 봄인가 보다. 소설가
  • “한중 수교 30년간 최악은 사드 배치… 최고 순간은 미래에 온다”

    “한중 수교 30년간 최악은 사드 배치… 최고 순간은 미래에 온다”

    “한반도 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설치와 같은 민감한 문제로 두 나라 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잘 관리했으면 합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23일 서울신문 평화연구소 박홍환 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교 후 30년이 흘러 양국 관계는 참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기간 내세웠던 사드 추가 배치 공약 이행에 나설 경우 올해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가 크게 악화될 것으로 우려하며 새 정부가 두 나라 협력관계를 해칠 수 있는 사드 추가 배치에 나서면 안 된다는 뜻을 완곡하나마 분명히 밝힌 것이어서 주목된다. 싱 대사는 한중 수교 30년 동안 ‘최악의 순간’으로 2017년 사드 배치 시기를 꼽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中 경제성장은 한국 경제에도 큰 이익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양회의 성과를 꼽아 달라. “올해 전국 양회는 중국이 두 번째 100년 목표를 향한 새 여정을 시작하고 하반기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를 앞둔 시기에 개최됐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유행이 지속되고 지역의 불안 이슈들이 빈발하며 세계 경제 회복이 불안정한 상황이다. 전반적으로 이번 회의는 성과가 크고 유익했으며 눈에 띄는 정책과 목표가 많이 제시됐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은 한다면 반드시 하기 때문에 성장 목표를 달성하고 높은 수준의 안정 속 성장을 실현할 자신이 있다. 이를 통해 세계 경제의 안정적인 회복을 이끌 수 있을 것이고, 중국의 경제 성장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어 한국에도 큰 이익이 된다. -코로나 상황도 심상찮고 올해 걱정이 많다. “베이징동계올림픽은 끝났지만 6월에 청두유니버시아드, 9월에 항저우아시안게임, 그다음에 매우 중요한 당대회가 열린다. 행사가 참 많다. 올해 양회에서는 경제성장률 목표를 5.5%로 정했다. 쉬운 것은 아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이 23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였는데 우리가 5% 성장만 해도 20조 달러가 된다.” -2030년쯤 되면 미국을 앞지르게 된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미국을 앞지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다. 국민들이 각자 분투 목표가 있으니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할 것이다.” -올해 한중 관계는 조금 삐걱거릴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의 만남은 어땠는지. “윤 당선인은 중국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중한 관계도 중요하다고 했고, 좋은 방향으로 좋은 관계로 끌어올리자고 말했다. 시진핑 주석도 중한 관계를 중요시한다고 얘기했다. 두 지도자끼리 교감이 됐으니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면 될 것이다.” -사드 추가 배치라든가 예민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다음에 국민 감정을 키워야 한다. 아주 좋게. 두 나라 모두 상대국의 정치제도와 발전의 길을 충분히 존중하고 서로의 핵심적이고 중대한 관심사도 배려하면서 민감한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자국 안보에 대한 요구를 이해한다. 이와 함께 한국 측이 중국의 안보 관심사를 이해해 주기 바란다. 사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인 만큼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양국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길 바란다. 중국은 한국과 상호존중의 원칙을 지키며 우호를 강화하고 협력에 초점을 맞춰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용의가 있으며 아울러 국익을 확고히 지킬 것이다.” ●인터넷 통해서 이상한 소리 나와 커져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두 나라 국민 마음의 간격을 좁힐 수 있겠는지. “요즘 양국 국민의 감정이 조금 틀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체들이 보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다. 한국에 있는 우리 수만명의 유학생들에게 물으니 한국인이 잘 도와주고 친절하다고, 딱히 중국 사람 싫어 하는 건 없다고 그런다. 아주 잘 지낸다. 다만 코로나 상황 때문에 교류가 안 되는 게 문제다. 맨날 인터넷을 통해서만 하다 보니까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커진다. 윤 당선인이 윤봉길 의사와 한 집안이라고 하시던데 코로나 상황이 끝나 한국 젊은이들이 김구 선생, 임시정부 유적들,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답사하면 두 국민의 감정도 누그러질 것이다. 어려운 시절 함께 항일 전쟁을 했고 몇천 년 동안 같이 붙어 살아온 소중한 이웃이다. 앞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같이 가면 좋지 않을까 한다.” -중국인들이 ‘구동존이’(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통의 이익을 추구한다)를 많이 말하는데 어떤 부분이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윤 당선인도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제도에는 차이가 있어도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성공했고, 중국도 당당히 G2로 올라섰다. 각자 방식대로 사회를 운용하되 같이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두 나라 간 경제적 관련성은 생각보다 훨씬 높다. 한국경제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금까지 중국 경제가 1% 성장하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0.565%였는데, 미국 경제가 1% 성장하면 한국 경제는 0.05% 올라갔다. 한국 측 통계가 이렇다. 두 나라의 경제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특히 지난해 두 나라 간 교역액은 3600억 달러였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떼려야 뗄 수 없고, 요즘 중국 유행어로 ‘이사 갈 수 없는 좋은 이웃’(搬不走的好居)이다. 예민한 문제는 서로 관리하면서 역지사지하면 된다. 중국이 왜 사드를 반대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하니 중국으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 내에서 한한령(限韓令)은 해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 제한은 없다는 것이 여전히 공식적인 입장이다. 최근 2년 동안 중한 관계가 정상 궤도로 돌아오면서 양국의 인문 교류도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다. 현재 중국 영화와 드라마가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일례로 ‘겨우, 서른’(三十而已)을 들 수 있다. 한국 영화 ‘오! 문희’, 드라마 ‘밥 잘 사주는 누나’, ‘슬기로운 감방 생활’, ‘사임당’이 중국에서 방영되는 등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한반도 평화·안정 위해 中 여러 해 노력 -많은 한국인은 중국이 북한을 자제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하는데. “중국은 한반도와 산과 물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혼란이 일어나면 남북 7000만 국민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되고 그다음이 중국이다. 우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가 긴장 상태나 대치 상황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은 확고부동한 화해와 대화의 촉구자다. 여러 해 동안 중국은 한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한반도 문제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지 않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한반도 대화를 촉진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사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 세계는 양측이 합의를 이룰 것으로 크게 기대했지만 그 결과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우리는 미국이 실제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의를 보여 주고 북한과 서로 마주보며 나아가길 바라고 있다. 또 중한 양측이 협력을 강화해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함께 추진해 나가길 바란다.”<계속>
  • 싱하이밍 中 대사 “사드 추가 배치로 양국관계 해쳐선 안돼”

    싱하이밍 中 대사 “사드 추가 배치로 양국관계 해쳐선 안돼”

    중국이 한반도 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기간 내세웠던 사드 추가 배치 공약 이행에 나설 경우 올해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가 크게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23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교 후 30년이 흘러 양국 관계는 참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다”면서 “사드 추가 설치와 같은 민감한 문제로 두 나라 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잘 관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 측이 두 나라 협력관계를 해칠 수 있는 사드 추가 배치에 나서면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싱 대사는 한중 수교 30년 동안 ‘최악의 순간’으로 2017년 사드 배치를 꼽기도 했다. 싱 대사는 “한국의 자국 안보에 대한 요구를 이해한다”면서도 “이와 함께 한국 측이 중국의 안보 관심사를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중국)는 국익을 확고히 지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11일 윤 당선인을 예방해 시진핑 국가주석의 친서를 전달한 사실을 상기시킨 뒤 “두 나라 지도자 사이에 협력 및 우호를 중시한다는 공감대를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두 나라 관계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숱한 곡절을 거쳐 왔다고 돌아본 싱 대사는 두 나라 국민들의 혐한(嫌韓)과 반중(反中) 감정이 일부 매체가 보도한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고 진단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등에 대해 중국 정부가 다소 답답해 보이고 불만족스럽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한국인들이 불안해한다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두 나라의 협력 관계가 더 발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양회의 성과를 꼽아 달라. “올해 전국 양회는 중국이 두 번째 100년 목표를 향한 새 여정을 시작하고 하반기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를 앞둔 시기에 개최됐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유행이 지속되고 지역의 불안 이슈들이 빈발하며 세계 경제 회복이 불안정한 상황이다. 전반적으로 이번 회의는 성과가 크고 유익했으며 눈에 띄는 정책과 목표가 많이 제시됐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은 한다면 반드시 하기 때문에 성장 목표를 달성하고 높은 수준의 안정 속 성장을 실현할 자신이 있다. 이를 통해 세계 경제의 안정적인 회복을 이끌 수 있을 것이고, 중국의 경제 성장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어 한국에도 큰 이익이 된다. -코로나 상황도 심상찮고 올해 걱정이 많다. “베이징동계올림픽은 끝났지만 6월에 청두유니버시아드, 9월에 항저우아시안게임, 그다음에 매우 중요한 당대회가 열린다. 행사가 참 많다. 올해 양회에서는 경제성장률 목표를 5.5%로 정했다. 쉬운 것은 아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이 23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였는데 우리가 5% 성장만 해도 20조 달러가 된다.” -2030년쯤 되면 미국을 앞지르게 된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미국을 앞지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다. 국민들이 각자 분투 목표가 있으니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할 것이다.” -올해 한중 관계는 조금 삐걱거릴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의 만남은 어땠는지. “윤 당선인은 중국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중한 관계도 중요하다고 했고, 좋은 방향으로 좋은 관계로 끌어올리자고 말했다. 시진핑 주석도 중한 관계를 중요시한다고 얘기했다. 두 지도자끼리 교감이 됐으니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면 될 것이다.” -사드 추가 배치라든가 예민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다음에 국민 감정을 기워야 한다. 아주 좋게. 두 나라 모두 상대국의 정치제도와 발전의 길을 충분히 존중하고 서로의 핵심적이고 중대한 관심사도 배려하면서 민감한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자국 안보에 대한 요구를 이해한다. 이와 함께 한국 측이 중국의 안보 관심사를 이해해 주기 바란다. 사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인 만큼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양국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길 바란다. 중국은 한국과 상호존중의 원칙을 지키며 우호를 강화하고 협력에 초점을 맞춰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용의가 있으며 아울러 국익을 확고히 지킬 것이다.”-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두 나라 국민 마음의 간격을 좁힐 수 있겠는지. “요즘 양국 국민의 감정이 조금 틀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체들이 보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다. 한국에 있는 우리 수만명의 유학생들에게 물으니 한국인이 잘 도와주고 친절하다고, 딱히 중국 사람 싫어 하는 건 없다고 그런다. 아주 잘 지낸다. 다만 코로나 상황 때문에 교류가 안 되는 게 문제다. 맨날 인터넷을 통해서만 하다 보니까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커진다. 윤 당선인이 윤봉길 의사와 한 집안이라고 하던데 코로나 상황이 끝나 한국 젊은이들이 김구 선생, 임시정부 유적들,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답사하면 두 국민의 감정도 누그러질 것이다. 어려운 시절 함께 항일 전쟁을 했고 몇천 년 동안 같이 붙어 살아온 소중한 이웃이다. 앞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같이 가면 좋지 않을까 한다.” -중국인들이 ‘구동존이’(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통의 이익을 추구한다)를 많이 말하는데 어떤 부분이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윤 당선인도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제도에는 차이가 있어도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성공했고, 중국도 당당히 G2로 올라섰다. 각자 방식대로 사회를 운용하되 같이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두 나라 간 경제적 관련성은 생각보다 훨씬 높다. 한국경제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금까지 중국 경제가 1% 성장하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0.565%였는데, 미국 경제가 1% 성장하면 한국 경제는 0.05% 올라갔다. 한국 측 통계가 이렇다. 두 나라의 경제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특히 지난해 두 나라 간 교역액은 3600억 달러였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떼려야 뗄 수 없고, 요즘 중국 유행어로 ‘이사 갈 수 없는 좋은 이웃’(搬不走的好隣居)이다. 예민한 문제는 서로 관리하면서 역지사지하면 된다. 중국이 왜 사드를 반대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하니 중국으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 내에서 한한령(限韓令)은 해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 제한은 없다는 것이 여전히 공식적인 입장이다. 최근 2년 동안 중한 관계가 정상 궤도로 돌아오면서 양국의 인문 교류도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다. 현재 중국 영화와 드라마가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일례로 ‘겨우, 서른’(三十而已)을 들 수 있다. 한국 영화 ‘오! 문희’, 드라마 ‘밥 잘 사주는 누나’, ‘슬기로운 감방 생활’, ‘사임당’이 중국에서 방영되는 등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많은 한국인은 중국이 북한을 자제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하는데. “중국은 한반도와 산과 물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혼란이 일어나면 남북 7000만 국민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되고 그다음이 중국이다. 우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가 긴장 상태나 대치 상황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은 확고부동한 화해와 대화의 촉구자다. 여러 해 동안 중국은 한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한반도 문제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지 않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한반도 대화를 촉진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사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 세계는 양측이 합의를 이룰 것으로 크게 기대했지만 그 결과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우리는 미국이 실제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의를 보여 주고 북한과 마주보며 나아가길 바라고 있다. 또 중한 양측이 협력을 강화해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함께 추진해 나가길 바란다.”
  • 조선 독립 위한 불꽃이었나… 죽음으로 완성한 불멸의 넋이여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조선 독립 위한 불꽃이었나… 죽음으로 완성한 불멸의 넋이여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어떤 사람은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기억된다. 죽음으로 삶을 증명하고, 완성한다. “그 사내가 웃었다. 다정하고 습습하게 웃으며 말했다. ㅡ어째 표정이 그러십니까?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하고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왜 슬퍼하십니까? 기뻐하셔야 합니다. 장사는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지니, 아무리 영광으로 기꺼울지라도 죽음이 어찌 기쁠 수만 있는가. 돌이킬 수 없는 길, 예정된 영이별에 나도 모르는 사이 안색이 참담하게 굳어졌던가 보다. 탁상에 놓인 것은 조선독립선서문과 태극기 그리고 두 개의 수류탄이었다. 나는 그에게 폭탄의 사용법을 설명했다. 폭탄 주둥이의 나무마개를 빼내고 금속으로 된 기계를 모두 끼워 넣을 것. 안전핀만은 실행 전날에 뺄 것. 폭탄은 머리가 무언가에 닿아야 터지니 될 수 있는 한 높이 던질 것. 하나는 흙바람으로 세상을 뒤덮고 사람을 미혹하는 괴물들을 물리칠 뇌성벽력의 무기였고, 다른 하나는 고독한 전사가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여는 자살용이었다. 고국의 형에게 보낼 독사진을 찍었다. 입아귀를 활찐 벌린 그의 얼굴은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천진무구했다.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폭탄을 양손에 한 개씩 들었다. 벽에 걸린 태극기를 배경으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끝까지 활달하고 체체했다. ㅡ제가 지금 떠나가면 큰일 한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즐거운 얼굴로 찍으십시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마 우리는 영원히 함께 머무르리라. 은근한 그의 지청구에 나는 가까스로 구겨진 얼굴을 폈다. 착잡하고 침울한 가슴에선 속바람이 들고 피눈물이 흐르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웃었다. 울지 않으려 웃었다.”(졸저 ‘백범’ 중에서)그 사내, 이봉창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서울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한 ‘사유의 방’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연화대 위에 걸터앉아 얼굴을 오른손으로 괸 채 명상하는 형태의 불상’인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되기 전의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전 세계에 70여점이 남아 있는데 그중 20여점이 우리나라에 있다. ‘사유의 방’에는 6세기 후반 제작된 국보 78호와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국보 83호를 모셨다. 관광지나 유적지, 박물관을 방문하는 시간으로는 비 오는 화요일 오전이 최고다. 사람의 독력(毒力)이 미치지 않는 한갓진 순간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주말일지나 박물관의 문을 여는 오전 10시에 맞춰 들어가려 서둘렀다. QR코드를 찍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해 2층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두어 칸 앞쯤에 목적지가 같은 듯한 사람이 보인다. 반가사유상과 독대하는 순간을 빼앗길까 봐 잽싸게 그를 앞질러 ‘사유의 방’에 입성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10시 1분에 온 놈 앞에 10시에 온 놈이 있다. 이미 나보다 더 부지런한 한 분이 반가사유상을 모델로 두고 열심히 촬영 중이시다. 아, 어리석은 나는 부질없는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건축가와 협업한 최초의 유물전시인 ‘사유의 방’은 관람객의 시각·청각·후각까지 고려한 그 자체로 작품이다. 섬세한 조명과 계피향이 은은한 흙벽에 둘러싸인 반가사유상은 사방 어느 편에서 봐도 아름답다. 정면에서 마주 본 얼굴에는 찰나의 환희가 미소로 걸려 있어 거룩하다. 내가 찾아가는 그 사내도 미소가 참 좋았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반가사유상의 그것이라기보다 국립춘천박물관에 상설 전시된 영월 창령사지 오백나한의 그것과 더 닮았다. 나한은 깨달아 해탈했지만 아직 충분한 공덕을 쌓지 못한 존재이기에, 부처보다는 기쁨·슬픔·희망·분노를 모두 품은 인간의 얼굴에 가깝기 때문이다.서울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500여m 떨어진 효창공원 내에 삼의사 묘역이 있다. 무릇 태어나 살고 죽는 것이 생명의 순리지만 그 사내를 이야기할 때는 죽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과 백범 김구 묘역, 의열사와 임정요인 묘역과 삼의사 묘역과 안중근 가묘는 이미 수차례 찾았던 곳이다. 5세에 홍역으로 죽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역이었던 효창원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최초의 골프 코스가 됐다가 해방 후 효창운동장과 효창공원으로 쓰임새가 바뀌었다. 용산이라는 서울의 배꼽 자리가 역사의 펀치를 온몸으로 맞받은 흔적이랄까, 혼란스러운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용산 곳곳에 지금도 선연하다. 역사는 일상과 얼키설키 뒤얽힌 채로 흘러간다. 산책하고 운동하는 시민들을 바라보며 백범과 삼의사와 임정요인들은 조용히 누워 계신다. “조선 민족 불멸의 독립 혼을 중외에 떨친 것은 이 세 분이 으뜸일 것입니다!”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백범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에 묻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송환해 1946년 7월 6일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원에 안장한 것이었다. 아나키스트 백정기를 제외한 두 사람은 백범이 직접 폭탄을 쥐여 준 한인애국단 단원들이다. 졸저 ‘백범’에 테러리즘과 의열투쟁의 차이에 대해 상세하게 언술한 바 있지만 후대의 시시비비와 별개로 백범은 폭탄을 써야 했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바닥, 그곳이 바닥의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젊은 치들이 나누는 객담을 백범이 우연히 듣지 않았다면 이봉창도, 한인애국단도, 어쩌면 임시정부까지도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거창하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이지만 1920년대 말 통합을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하면서 중국 상하이는 무주공산이나 진배없었다. 1930년대 들어 조선과의 연락망이 끊기면서 매월 30원의 집세와 20원의 고용인 월급조차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잔치가 끝난 임정에 남아 떠맡듯 민단장과 재무부장의 감투를 들쓴 백범은 가족을 국내로 돌려보내고 홀로 정청에서 살며 동포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발바닥이 닳은 헝겊신을 꿰어 신고 쓰레기통에서 배춧잎을 주워 먹었다. 이봉창을 만나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저 빛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욱 ‘근대 3부작’의 첫 장에는 실제로 그 시절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역사 속에서 끝내 승리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지금은 정치가들을 위시한 많은 사람이 모범으로 삼으며 숭앙하는 듯하지만, 당시의 그들은 다만 처절하도록 외롭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계속하고 있었을 뿐이다.공원 한가운데 그 사내, 이봉창의 동상이 있다. 옛날의 미남 영화배우처럼 선이 굵은 얼굴이나 우람한 몸피가 전혀 이봉창 의사를 닮지 않았다. 손에 잡고 던지는 폭탄의 모양새도 1932년 일왕의 마차를 향해 던진 마미(麻尾) 수류탄과는 달라 보인다. 1960~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소위 애국선열 동상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사진 자료를 무시하고 만들어졌다. 그 연유에 대해 미술평론가들은 당시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군사정권의 선동적·극적 효과에 대한 요구가 결합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무도 닮지 않은 상상 속의 영웅들이 위대하고 완전무결해질수록 실재했던 인간으로서의 그들은 기쁨·슬픔·희망·분노가 시시때때로 교차하는 우리로부터 멀어져 간 것일지도 모른다. (㉻에 계속) 소설가
  • 국가를, 브랜드를…‘지킨 자’들의 공간 DDP [명품톡+]

    국가를, 브랜드를…‘지킨 자’들의 공간 DDP [명품톡+]

    환국 77주년·창립 101주년…각자에게 다른 ‘땅의 의미’패션 업계 속설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대중화되면 망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죠. ‘일상에서 입는 등산복’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노스페이스·‘포마드에 클러치·회색 카디건’으로 통하는 톰브라운·‘구찌 탬버린백’의 그 구찌가 속설의 대표적 반증입니다. 주춤했던 노스페이스는 다시 ‘클래식’ 패딩 라인으로 살아났고 톰포드는 여전히 톰포드입니다. ‘10대까지 드는 걸 보니 망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구찌는 MZ세대의 지지를 업고 나는 중이죠. 명품 소비층을 확장했다는 평까지 듣습니다. ● 레거시+혁신=이상향? 구찌 매출 상승의 주역은 내부 디자이너에 불과했던 알렉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입니다. 미켈레는 지난 2015년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후 과감한 원색·커다란 로고를 내세우며 구찌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데요.  구찌 내의 고루한 디자인으로 평가받던 레거시를 버리지는 않되 그 위에 ‘볼드’한 색감을 넣은 게 주효했습니다. ‘크고 튀는 남들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MZ세대의 지갑을 열었는데요. 미켈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 이후 구찌는 연간 40~50% 성장세를 기록했죠. 레거시와 혁신의 조합이란 모든 기업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 구찌가 이번에도 참 영리한 선택을 했죠. 이달 4일 시작한 전시는 오는 27일까지 서울 동대문구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켈레의 지난 6년간 레거시를 내세웁니다. 미켈레가 영감받아 만들었던 홍보영상 즉 ‘아트워크’들을 전시하는 ‘구찌 가든 아키타이프: 절대적 전형’을 통해서인데요. 인터넷으로 미리 입장을 신청한 후 디자인 박물관에서 무료 관람 가능합니다. 현장에서 구찌 굿즈를 구매하거나 마이구찌에 등록 후 엽서를 무료로 받을 수 있죠. 굿즈 가격은 6만원부터 40만원대까지 다양합니다.  ● DDP서 환영했던 조상들서대문구에서 다시 만난다 아시나요. 77년 전 DDP 땅 위도 무언가를 환영하는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임시정부가 환국한 해는 1945년입니다. 같은해 12월 1일, 임시정부 환국봉영회가 열린 장소가 현재의 DDP 위치입니다. 같은해 12월 19일 서울운동장, 즉 현재의 DDP에 국민 15만명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임시정부 인사들을 반기는 행사였죠. 아실 겁니다. 독립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요.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도 말입니다. 김구 선생도 임시정부 요인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국을 허락받아야 했으니 말이죠. 이달 1일 서울 서대문구에도 새로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들어선 건데요. 4층 규모의 이 기념관은 아직 카페·기념품숍 등의 완성은 멀었지만 그런대로 손님을 받을 준비가 됐습니다. 기념관이 서대문형무소 옆에 들어선 것도 눈여겨볼 만하죠. 절망에서 희망으로 상징적인 장소가 될 거란 설렘에서요. 4층에선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도 진행 중입니다. ● 국경 의미 없는‘격변의 시대’ 올해는 구찌 창립 101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미켈레의 디지털 친화 혁신은 또 어디로 구찌를 이끌어 갈지 궁금해집니다. 2022년은 임시정부가 돌아온지 77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 분들은 아셨을까요. 임시정부를 환영했던 인파 속 그 분들 말입니다.  77주년이 흘러 서울운동장이 용어도 생소한 DDP가 되고 그 위에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가 한국인에게 구애하며 전시를 열었습니다. ‘양이들이 조선인에게 구애를 한다니 천지개벽할 일이구나’ 하실 듯도 합니다. 그야말로 격변이라고 하시겠네요.
  • 3·1절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열었다

    3·1절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열었다

    3·1절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및 활동 등과 관련한 사료가 전시된 기념관이 1일 공식 개관했다. 국가보훈처는 제103주년 3·1절인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제의 정신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재조명해 후대에 전승될 수 있도록 건립을 추진했던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개관했다”고 밝혔다. 기념관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공약이었으며, 2017년 광복절 경축사를 계기로 본격 추진됐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식에 참석, “취임 첫해 광복절 기념사에서 기념관 건립을 약속한 데 이어 그해 중국 방문 때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기념관 건립을 선열들께 다짐했다. 그 약속과 다짐이 드디어 이뤄졌다”며 각별한 소회를 밝혔다. 옛 서대문구의회 부지에 위치한 기념관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9703㎡(약 2935평) 규모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돼 고문을 당했던 서대문형무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카이로 선언문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던 김붕준(1888∼1950)의 가방과 양복,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가 발간한 독립선언서,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 임시정부 활동과 관련한 문서·사진 1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1층 옥외광장의 ‘역사의 파도’ 상징벽과 3층의 영상작품 ‘돌아오기 위해 떠난 4000㎞’를 설치한 공간도 눈에 띈다. 지난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일(11월 23일)에 개관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지연됐다. 임정기념관은 2일부터 일반 관람객을 맞는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이며 관람료는 무료이고 월요일마다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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