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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대·사할린징용 희생자 3백69명/내일 대일손배소 제기

    ◎민간법률구조회 대일민간법률구조회(회장 지익표변호사)는 27일 종군위안부와 사할린강제징용자및 유족등 일제침략의 피해자 3백69명을 원고로 하는 「일제침략으로 인한 불법행위 책임존재확인등 청구소송」을 오는 29일 한일합방 82주년을 맞아 도쿄지방재판소에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조경한선생과 김행식민족대표 33인 유족회장을 비롯,종군위안부 생존자와 유족,부도환사건 생존자와 유족,사할린 강제징용피해자와 희생자유족,오키나와 징발피해자와 유족등이 원고로 나선다. 구조회는 이번 소송에서 ▲일제침략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를 지배한 불법행위 ▲한국불법지배기간중 자행된 토지수탈및 민족말살행위 ▲태평양전쟁중의 불법행위 ▲태평양전쟁으로 초래된 국토분단및 민족이산의 책임규명 등을 요구하고 일제의 침략에 따른 피해배상을 촉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구조회는 또 일본측에 태평양전쟁 사망자의 유해 송환을 청구하고 사죄를 요구하기로 했다. 특히태평양전쟁이 국토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지적,일본 정부에 국토를 통일하기까지 소요되는 추정비용 2천억달러를 지불할 책임이 있음을 주장할 계획이다. 구조회 부회장 용태영변호사등 변호사 5명과 원고 10명은 28일 소장을 내기 위해 일본에 건너갈 예정이다.
  • 「팔」 자치 관련 핵심논의 시작

    【워싱턴 로이터 연합】 이스라엘은 25일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제6차 중동평화회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문제와 관련된 3개항의 새로운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팔레스타인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적 논의가 곧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협상대표인 엘리아킴 루빈스테인은 팔레스타인측과의 첫 회담을 가진뒤 『자치정부 구성을 위한 여러가지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새로운 제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으나 팔레스타인측 대변인 하난 아쉬라이는 이스라엘의 제안이 ▲팔레스타인측 제안에 대한 대응제안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대한 임시정부 수립문제 ▲자치기구가 담당할 15개의 관할 분야 제시 등 3가지라고 말했다.
  • 한·중문화교류 “봇물시대” 개막

    ◎수교계기로 분야별 상호협력 전망 점검/학술/발해유적발굴·자료교환 기대/출판/저작권 인정문제 새 국면 예상/방송/PD 등 교류… 협력논의 활발/미술/중국화 등 대량유입바람 일듯 한·중 수교를 계기로 양국간의 문화교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이미 상당한 수준의 교류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져 오긴 했으나 물밑교류로는 불가능했던 상호협력의 장이 열릴것으로 기대된다.특히 방송·출판·학술·미술분야등에서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예상된다°한·중문화교류의 새 양상을 전망해보고 바람직한 우리의 교류자세를 짚어본다. ▷학술◁ 간접·다자적인 교류에 머물렀던 한·중학술교류는 이번 양국수교로 공식적이고 쌍무적·직접적인 교류의 길이 열림에 따라 본격화될 전망이다. 고조선·고구려·발해에 이르는 고대사연구의 보고인 만주지역에 대한 유적발굴과 자료접근은 미수교상태에서 국내학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했다.때문에 이번 수교로 양국 학자들의 공동연구가 활발해져 발해사등 고대사에 대한 양국 학자들의 견해차를 좁혀 양국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학계는 내다보고 있다. ○고대사정립 새 전기로 만주지역의 발해유적발굴과 관련,중국당국은 그동안 상당히 폐쇄적인 입장을 고수,지난 89년 서울신문사가 고고학자들과 공동으로 이 지역에 대한 발굴작업을 시도했을 때에도 유적지 답사는 물론 사진촬영까지 가로 막은 바 있다. 이밖에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백두산정계비,간도문제,그리고 독립운동사부분등도 홍콩·일본등을 통한 간접자료가 아닌 1차자료의 공개로 사실관계가 보다 명확하게 규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상과 관련,민족진영연구가 주류를 이루는 국내학계에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등 공산주의운동계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학문적인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영석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양국간의 국교수립으로 공식적인 학술교류가 가능해진 이상 빠른 시일안에 중국사회과학원과 공식교류의 길을 터 양국간의 학술정보교환은 물론 자료공개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세대 김달중교수(동서문제연구원장)는 『그동안 국내 학계의 중국연구는 사회주의국가연구라는 맥락에서 다방면에 걸쳐 진행돼 왔다』면서 『양국수교로 전 분야에 걸친 공동연구가 활기를 띠겠지만 무엇보다도 양국간의 최우선 관심사인 경제협력분야에 대한 연구가 가장 많을 것』으로 내다봤다. ▷출판◁ 한·중 수교룰 계기로 양국 출판물의 저작권 인정 문제가 새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저작권에 관한 국제조약인 「베른조약」에 가입을 신청,회원자격 취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중국은 10월 우리 정부와 저작권에 관한 논의를 가질 예정이다. ○공동·분업식 출판 가능 출판분야에 관한한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중국이 저작권 논의에서 우위에 설 것은 분명하다.따라서 중국측은 우리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세계저작권조약」(UCC)보다 저작권의 보호에서 앞서는 「베른조약」의 규정들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 예상되고 있다. 이 경우 저작권 보호기간이 지난 중국고전들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최근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있는 중국의 현대문학작품들에 많은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베른조약」의 경우 지은이가 죽은 뒤 50년까지 저작권이 인정되기 때문. 최근 국내에서 번역,출판돼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국 현대소설 「시인의 죽음」(다이 호우잉 지음),「사람아 아 사람아」(〃),「하늘의 발자국소리」(〃),「황화」(바오미 지음) 등은 나중에 협상대상에 오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쇄기술이 중국보다 앞서기 때문에 함께 분업식으로 출판에 참여하는 공동출판의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경제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어 한·중출판교류가 우리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출판인들은 말한다. ▷방송◁ 한중수교로 국내방송사가 그동안 추진해오던 한중방송교류 협력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KBS·MBC·SbS등 국내 방송3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교에 대비,중국 방송제도와 방송현황 검토작업을 벌여와 실무차원의 협력만을 남겨놓고 있는 상태다. ○인적·물적교류 가속화 KBS의 경우 지난 2월 정량 대외협력시장이 북경과 연변을 방문,북경 CCTV(중앙TV)와 연변한인방송사장을 만나 수교후 방송교류에 원칙적으로 합의를 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따라 KBS측은 수교에 대비,지난3월 이미 공보처에 교류허가신청을 내놓은 상태로 수교를 계기로 지국설치·PD 기자및 프로그램교류등 본격적인 실무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MBC측도 최근 최창봉사장이 북경CCTV와 연변 방송사등을 시찰,양국간 방송협력을 논의하고 돌아왔으며 SBS측은 로컬방송인 점을 감안,지역방송인 북경TV측을 표재순전무가 지난6월 방문,협력에 관한 원칙적 합의를 끝내 이번 수교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류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수교에 따른 방송교류의 본격적인 추진으로 국내 방송사들의 드라마제작폭도 넓어질 전망이다. KBS의 경우 19세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양씨일가의 삶을 그린 드라마 「정든님」이 현재 원래 주인공인 연변배우 림홍화(양홍련역)의 방한이 막혀 파행적으로 진행중인데 배우교류가 가속화되면 원래의 캐스팅대로 림홍화의 출연이 가능해지고 스토리전개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제작진들은기대하고 있다. ▷미술◁ 동양화의 원류로 일컬어지는 중국본토미술이 국내에 소개된지는 햇수로 이미 5년을 넘어서고있다. 지난88년부터 공산권 예술의 유입이 활발해지면서 중국화전시회는 연평균 7∼8회를 넘어 총 30∼40회 열린바 있다. 이에 비하면 국내작가의 중국진출은 다소 미진해 최근 3∼4년사이에 10여건정도에 이른다. ○미술품수입 절차 완화 다행히 국내화단과 미술시장의 여건상 중국화의 유입으로 인한 혼란과 영향력은 크지 않았으나 공식수교가 이뤄진 이제부터는 다양한 중국미술품의 유입에 긴장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우리 고고학연구에 새로운 고증자료가 될 문화재급의 미술품유입이 활발해질 전망이며 수입절차의 간소화에 따라 같은 동양권인 우리생활전반에 깊이 침투할수있는 다채로운 수공예품이나 정상급 서화의 대거 유입이 예상되기때문이다. 반면 중국에는 아직 미술시장이 형성돼있지않아 중국미술품의 유입과 같은 차원에서 경제적 목적이 우선된 우리미술의 진출은 당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북방외교의 대미”/민자 김 대표,한·중수교 환영 논평

    ◎민주·국민도 “환영” 성명 여야는 24일 상호 각각 한중수교와 관련한 논평이나 성명을 발표하고 역사적인 한중수교를 환영하면서 남북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영삼민자당대표는 이날 『한중수교는 우리정부의 끈질긴 북방외교의 성과로서 북방외교의 대미를 장식하게 됐으며 이번 수교로 양국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유대가 강화되어 양국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민주당도 성명을 채택,『역사적 현실이고 세계사적인 대세로서 이를 환영한다』면서 『그러나 정부는 60년이상 임시정부에 대한 후원,카이로선언 등으로 우리의 독립에 기여하고 우리정부를 지지해온 대만의 의리를 배반했으며 경제면에서도 실리를 저버린 측면이 크다』고 주장했다. 국민당은 변정일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한중수교는 냉전시대의 종식과 국제협력 시대의 개막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비춰볼때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한층 높이는 일로 환영한다』면서 『그러나 수교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우방이었던 대만정부와국민들에 대한 고려가 소홀했으며 대만정부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부의 조처가 뒤따라야 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 북경 하늘의 태극기/문호영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24일 상오11시30분 북경 건국문외대가 1호 국제무역중심 건물 4층. 불과 2시간여전만 해도 주북경 한국무역대표부였던 이곳에 「대한민국 대사관」이란 한글 간판이 붙여지고 태극기가 입구 오른쪽에 세워졌다. 이에앞서 상오9시15분 조어대 방비원에서 열린 한중 수교공동성명 서명식은 중국 중앙전시대(CC­TV)의 전파를 타고 생방송으로 중국 전역에 흘러나갔다.중국이 양국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앞뜰에 심어놓은 무궁화의 모습도 함께 비쳐졌다. 조어대근처 거리에는 명절에나 내걸리는 다양한 색깔의 천이 게양됐고 북경시내 한국음식점을 찾는 손님들과 중국인 종업원들은 TV를 보고나서는 「하오」(호)를 연발했다. 북경 동삼환로에 있는 한국식당 「서라벌」의 주방장 이상순씨(48)는 『1년2개월동안 북경에서 살았지만 오늘같이 감개무량한 날은 처음』이라며 『이곳에서 고용한 종업원들도 22일부터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는 한국식당에서 일하는 게 매우 기분좋은 모양』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처럼 한중수교의 들뜬 분위기는 북경의 관청가는 물론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도 역력하다. 이제 「대한민국」이란 글씨와 태극기는 중국땅 어디에서도 떳떳이 제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게 됐다. 불과 반세기전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나라,아직도 북한을 형제국가로 생각하는 나라,그리고 이념과 체제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중국하늘에 태극기가 펄럭이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 임시정부청사가 있었던 상해와 중경의 뒷골목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태극기,90년 「북경」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에서도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따내야 비로소 잠깐씩 올라가던 태극기와 비교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라의 힘이 커진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92년 8월24일 북경하늘의 태극기는 중국이 북한의 눈치를 보지않고 한국과 국교를 맺도록 한 우리의 힘을 웅변하고 있다.
  • 외언내언

    충남 천안군 목천면 흑성산기슭 1백20만평의 부지에 독립기념관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완공된 것은 87년 8월15일.광복42주년을 맞는 날이었다.애초에는 그전해인 86년 8월15일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불과 열흘 남겨놓고 불이 나는 바람에 1년 늦추어졌다.◆독립기념관은 처음부터 민주혼의 각성위에 지어진 집이다.일본역사교과서가 지난날의 한일관계를 왜곡,기술한데 분노한 전국민이 한푼·두푼 내놓은 정성어린 성금으로 이룩된 「민족의 대성전」.코흘리개 꼬마에서부터 8순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동포 모두가 벽돌한장씩을 쌓아올린 민족정기의 요람이기도 하다.◆독립기념관은 겨레의 집,민족전통관,근대민족운동관,3·1운동관,독립전쟁관,임시정부관,대한민국관등 7개동으로 이루어져있고 수집된 자료는 4만3천2백91점.우리조상들의 웅건했던 기개를 화폭에 담은 그림과 유물,일제때 선혈을 뿌렸던 독립운동가들의 살아숨쉬는 유품들이 망라되어 있다.◆그런데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88년에 4백14만명이 다녀갔으나해마다 20%씩 감소,지난해엔 1백79만명에 그쳤고 올들어서는 7월말까지 97만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안타까운 일이다.◆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산부족으로 일손이 모자라 전시유물들이 제때제때 교체되지 못하고 있을뿐 아니라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그래서 독립기념관측은 일손을 대폭 늘려 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하고 주위의 동·서계곡에 「청소년수련장」「민속박물관」「첨단과학관」등을 세우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예산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거의 포기한 상태.독립기념관이 단조로운 유물전시관에서 종합역사공원으로 탈바꿈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이」 점령지 자치정부 구성 채비/“팔,내년봄 총선거”

    ◎라빈 과정허용 밝혀 【워싱턴·텔아비브 AFP 연합】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14일 이스라엘 점령 지역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내년봄 실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라빈 총리는 미PBS방송과의 회견에서 『이스라엘 점령 지역 거주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 행정위원회를 선출하게 될 총선거가 내년 4월이나 5월 실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빈 총리는 이 행정위원회가 입법기관이 아니라 「잠정 자치 정부 준비 기관」이라고 말했다. 라빈 총리는 오는 12월1일까지 선거방식에 대한 협정에 합의하고 내년 2월1일까지는 행정위원회의 「활동영역」을 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팔레스타인 임시정부수립이 의심과 증오,편견을 없애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 새장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독립유공자 1백95명 포상/임정의원 현정건선생등 4명 독립장

    ◎47돌 광복절 맞아 정부는 오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공을 세운유공자 1백95명에게 건국훈장등 정부포상을 실시한다. 이번 정부포상에서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돼 독립운동을 한 현정건선생등 4명이 건국훈장 독립장을,중국 만주에서 정의부대표로서 신민부·참의부 등과의 통합을 추진하고 조선독립촉진회의 조직활동을 벌인 이규동선생등 17명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는다. 또 일본 동경 정칙학원 중학교 야간부 재학중 일본의 패망과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시국담을 발표해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른 강덕재선생(72·생존)등 43명이 건국훈장 애족장을,강재호선생등 1백5명이 대통령표창등을 각각 받는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정부포상을 받은 유공자는 모두 6천84명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포상을 받게 되는 유공자들 가운데는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선생의 어머니 곽락원여사(39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와 조부,부친에 이어 3대째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된 임수명선생(건국포장·서울신문 8월13일자 17면 보도),여성으로서 3·1독립만세시위 등에 참가하다 옥고를 치른 최은희여사 등도 포함돼 있다. ◆DB편집자주:명단생략
  • 3대 독립운동가문 첫 공인

    ◎4대 임주수씨,광복절에 선친 건국훈장 수상 확정/을사조약후 무장항일운동 주도/1대/부친도와 독립의군부결성 기여/2대/전북지역 군자금모금·운반담당/3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증손자가 국가로 부터 서훈을 받게 돼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 탄생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자결한 돈헌(돈헌)임병찬선생의 손자 임수명선생(지난 77년 80세로 사망)이 오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됨으로써 3대에 걸친 이 집안의 조국독립 의지가 함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1대 임병찬선생은 62년 독립장을,2대 임응철선생(지난 31년 60세로 사망)은 90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었다.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조국광복을 위해 대를 이어 몸바친 3대가 모두 「공식」인정을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임병찬선생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선생과 함께 향리인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의 한일합방후에는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시·도 대표 3백29명으로 독립의군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5월 체포돼 전남 여수군 거문도에 감금당한 뒤 끝내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2년후 목숨을 끊었다. 구한말 홍문관 학사와 승정원 비서승등을 역임한 2대 임응철선생은 부친을 도와 독립의군부 결성및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협등과 함께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했고 그해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3대 임수명선생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임병찬선생이 거문도에 감금돼 있는 동안 뒷바라지를 한 데 이어 아버지 임응철선생을 따라 조선독립대동단에 들어가서는 전북지단 이사를 맡아 김흥순등 수십명을 가입시켰으며 이들로 부터 걷은 군자금을 서울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1·2대가 쉽게 공적을 인정받은데 비해 임수명선생의 「독립유공」은 그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그의 활동이 워낙 비밀스러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4대째인 임주수씨(68·경기도 수원시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208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내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그 지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입수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됐다. 그 자신 독립운동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막일을 하며 어렵게 성장한 임주수씨는 현재도 월세 20만원짜리 20평형 아파트에서 부인 이지순씨(64)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위해 헌신해온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사실과,선대가 남긴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며 깨끗이 살아왔다』면서 『다만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만 생각하고 왜색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드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선조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 안중근의사 흉상 66년만에 환향(단신 패트롤)

    ◎상해 임정서 제작… 소장 중국인 매입 ◇상해임시정부가 제작한 안중근의사 대리석 흉상 1점이 한 민간인 문화재 수집가에 의해 6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오성환씨(65·청로유적사적발굴연구회 부회장·청주시 사직2동7가 최근 독립국가연합의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는 한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사들여온 이 흉상은 상해임시정부가 지난 1926년 12월 안의사를 가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이 흉상은 좌대를 포함해 높이 20㎝,폭 15㎝,두께 8㎝,무게 4㎏의 소형으로 좌대 상단에 「민족영렬 안중근」,중간부분에 「상해대한임시정부 국무령 김구 등 조」,하단엔 「천추만세」라고 각각 새겨져 이 흉상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의사의 거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제작됐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오씨는 지난달 초에도 하바로프스크의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역시 안의사가 옥중에서 쓴 「제일강산」 휘호가 양각된 대리석 현판을 들여와 관심을 끌었었다. 오씨는 지금까지 들여온 현판과 흉상 외에 안의사등 애국열사 6명이 쓴 혈서를 새긴 반일결사대기념비,조선광복군 성립대회 기념비등 상해임시정부에 의해 제작된 독립운동 관련 유물 2점을 자신이 접촉한 하바로프스크의 중국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 안중근의사 친필휘호현판 65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아마추어 수집가 러시아서 구입해와 【청주=한만교기자】 상해임시정부가 제작하고 안중근의사의 친필 휘호가 양각된 대리석현판 1점이 아마추어 문화재 수집가에 의해 65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민간인으로 구성된 청·노유적사적발굴연구회(회장 오윤환)부회장인 오성환씨(65·청주시 사직2동7)가 최근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는 한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구입해 가져온 이 대리석 현판은 지난1927년 2월 상해임시정부가 제작한 것이다. 이 대리석 현판은 가로 51㎝,세로 36·5㎝ 크기로 앞면에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제일강산 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이라고 쓴 친필 휘호와 함께 안의사의 수인이 양각돼 있다.
  • 아프간신정부 회교관습 복고정책/“13년전으로 돌아가라”

    ◎음주·오락영화 금지… 여성엔 차도르 강요/철저한 남녀분리,식당,버스도 좌석 나눠 나지불라 친소정권이 물러나고 무자헤딘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아프간 국민들은 13년동안의 공산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게됐으나 정부의 강력한 이슬람회귀정책으로 새로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4월에 새로 들어선 시브가툴라 모자디디 임시정부는 그동안 마르크스주의 지배 아래서 허물어진 모든 제도와 타락한 생활습관들을 정통 회교율법으로 복귀시키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다소 자유분방해진 국민들이 생활습관을 과거방식으로 되돌리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아프간은 원래 수니파 회교율법에 충실한 국가였으나 지난 1979년 친소 강경파 카르말의 쿠데타 이후 소련의 위성국이 됐으며 특히 5만여명의 소련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이슬람 생활전통이 상당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모자디디정부는 이슬람화의 첫작업으로 최근 음주와 각성제 복용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다시 쓰도록 하는 명령을 공포했다.또 전 공무원에게 정오예배 부활을 지시하고 오락영화 상영을 금지시키는 한편 반이슬람적 출판물 회수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같은 조치로 수도 카불 시내에서는 맥주나 보드카등 주류판매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으며 특급호텔에서조차도 술구경을 할 수가 없게 됐다.이때문에 소련군을 통해 술을 배운 아프간 술꾼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술을 구할 수 없게 된것은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외국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상점들이 모인 치켄스트리트의 슈퍼마켓에서도 술종류는 모두 치워져 찾아볼 수가 없다. 이슬람화정책으로 가장 큰 고통을 당하게 된것은 여성들.그동안 화려한 화장에 비교적 세련된 소련옷들을 즐기던 아프간 여성들은 이제는 화장도 금지된채 손과 발을 제외하고는 온몸을 천으로 둘러싸고 다니게 됐기 때문이다.카불시내의 유일한 특급호텔인 콘티넨탈호텔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맞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승무원이 나와있는 항공사 벽광고들을 모두 떼어버렸다. 그러나 이같은 여성들의 전통의상 착용은 직장여성들의 경우 업무수행에큰 불편을 주고 있어 많은 반발을 사고 있기도 하다.나지불라정권 당시 남녀차별을 없앰으로써 공무원이나 일반회사에 다니는 여성들이 급증,현재 23만명에 달하고 있다. 한편 TV를 통해 매주 방영되던 오락영화들은 모두 이슬람 교리방송으로 대체되었고 그동안 인도 홍콩 등에서 수입한 각종 애정영화들을 상영,짭짤하게 재미를 보던 시내 극장들도 대부분 폐관됐다. 이슬람전통은 또한 남녀를 철저히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에 최근들어 시내 음식점들은 남자석과 여자석을 분리해놓기 시작했으며 버스회사들에서도 남녀석을 분리하기 위한 차체수리를 하고 있다. 정부의 이같은 급격한 조치에 대해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과거의 경험이 있어 비교적 쉽게 적응해가고 있으나 젊은층은 몹시 힘들어 하고 있어 많은 불만을 사고 있다.또한 외국인들도 이제는 더이상 푹파인 검은 눈에 오똑한 콧날의 아리안계 미녀가 많은 아프간 여성들을 볼 수 없으며 술도 못먹게 된데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 유림사업회에 금일봉

    노대통령은 18일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주 유림선생 기념사업회에 김학준공보수석비서관을 보내 선생어록비 건립에 보태도록 금일봉을 전달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독립군지휘,만주태평령서 일 연대 섬멸/33년 6·10대첩 독립전쟁 최대승리로 기록/무장투쟁 한평생… 40년 광복군사령관 역임/광복후엔 대동청년단 결성,“민족단결” 호소… 제헌­2대의원도 지내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산 지청천장군이 선정됐다.6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기승을 부렸던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의 이이즈카연대를 섬멸한 공을 세우고 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해방후 귀국한 지장군은 제헌의원과 2대의원을 지내고 57년1월15일 69세로 별세했다.지장군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 태평령에서 한국독립군 2천5백명과 중국군 2천명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던 지청천장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오늘의 공격은 2천만 대한인민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손 만대를 위해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훈화였으나 결전을 앞둔 독립군 병사들의 뼛속까지 사무쳐 대부분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굳게 다짐했다. ○소총등 다량 노획 이날 일본의 정예부대인 이이즈카연대는 한중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4시간동안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군복 3천벌,박격포 5문,군용물자 20마차,담요 3천장,평사포 3문,소총 1백50정을 노획해 한국독립사상 가장 큰 전승을 기록했다. 지청천장군의 태평령전투는 독립전쟁사중 20연대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2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대의 지장군이 지휘한 태평령전투가 규모와 노획물이 더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장군은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을 위한 청년장교들을 양성한 교육자로,광복후에는 제헌의원·청년운동 등으로 평생을 애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지장군은 1888년 2월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이씨)밑에서 자란 지장군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도입한 아저씨 지석영의 권고로 교동국민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지장군은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적의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지장군에게 『나는 너를 죽어 없는 아들로 생각하겠다.구국의 일군이 되지 못하거든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말고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일 정규육사 출신 적도 도쿄에 도착한 지장군은 일본의 눈부신 문물을 보고 놀라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되찾는 첨병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일본 유년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정규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장군은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치되어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전투경험이 만주에서의 독립군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지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독립운동의 요람이던 만주 봉천성 통화현에 도착,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육사출신의 김광서장군과 구한말 군관출신인 신팔균 김창환 이범석 오광선등 쟁쟁한 인재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장군은 교성대장(교성대장)에 이어 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기반이 공고해질수록 일본의 독립군 탄압도 집요해져 지장군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의 밀산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등과 합세,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를 통합했다. 지장군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주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장군은 체포되어 러시아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만주에 돌아온 지장군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규합,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됐다. 정의부소속 군대를 지휘하게 된 지장군은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군부대를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지장군은 만주지역의 중국군 이두·정초·고봉림장군 등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쌍성보,경박호,동경성,사도하자,대전자등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장군은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간 만주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1933년 8월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다시피하여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은 지장군을 하남성의 낙양군관학교로 초청,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임정 군무부장에 넓고 넓은 만주땅을 베개삼아 죽으리라던 지장군은 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낙양으로 내려가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고 1937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40년 9월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됐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한편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작성·암호해득등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지장군은 1946년 4월2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귀국했다. 귀국후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잡을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구상,대동청년단을 구성했다. 지청천단장은 전국청년지도후원회를 결성하고 『뭉치라,길은 하나이다』라는 구호로 민족단결을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과 50년 5·30총선에 출마하여 초대 및 2대국회의원이 된 지장군은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지장군은 57년 1월15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62년 지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장군은 달수씨와 복영씨등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도 모두 광복군으로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달수씨는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69년에 작고했으며 복영씨는 현재 지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다. ◎탁월한 전략·순수한 군인정신의 귀감/역사적 평가/이현희 성신여대교수 백산 지청천장군은 70평생을 조국과 겨레의 행복을 위해 보냈다. 8·15이전의 60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에 보냈으며 귀국후에는 제헌의원과 2대의원으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무관학교 학생으로 입학해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지장군은 평생을 통해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참군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다. 지장군이 일본육사에 진학한 의도는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일본육사에 유학,현대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지장군은 훗날 만주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본육사에서 배운 군사학을 활용했다. 열악한 무장,숫적인 열세,보잘것 없는 보급을 받으면서도 지장군은 일본정규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의 현지 지휘관들은 『지청천이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에 우리의 격전이 무색하다』고 격찬 한 사실을 보아도 지장군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장군은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5년동안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 후방교란,연합군과의 연합작전,심리전 등을펴 명실공히 독립군의 최고지도자로 역을 다했다. 그는 건국후에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의병독립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광복이후의 혼미한 정국에서 지장군의 크고 높은 뜻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장군이 별세한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크고 높은 뜻이 마침내 달성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행스럽다 하겠다.
  • 백범암살진상규명위 어제한글회관서 출범

    「백범 김구선생시해 진상규명위원회」(회장 이강훈광복회 회장)는 27일 하오4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한글회관 2층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갖고 정식출범했다.이 자리에는 이시찬(88)한국독립당동지회 회장,채문식(67)민자당 고문,양순식(67)국민당 고문등 독립유공자및 정계인사와 권중희(56)·곽태영(57)·김용희(72)씨등 백범암살범 안두희씨(75)를 집요하게 추적했던 인사등이 참석했다. 이 위원회 김용희법정투쟁위원장은 『헌법에 현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것으로 명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임시정부의 수반을 시해한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위축시키는 행위』라며 『백범 시해에 관련된 배후세력을 밝혀내 처벌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 민족자존의 회복/우홍제 본사 편집위원(굄돌)

    오래전 사회정화와 도덕성회복 운동에 관계했던 원로 한분이 탄식조로 했던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해방이후에도 줄곧 친일파가 득세한 사회분위기속에서 애국이니 정의니 하는 말이 도대체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수 있겠는가』 이분의 지적은 약소국가였던 이 나라 백성이 그토록 고대했던 해방을 맞았는데도 친일파가 계속 권세를 누리고 독립운동가는 외면을 당하다시피 했던 우리 현대사의 한 장이 국민들의 사회관 국가관을 비뚤어지게 만든 근인이란 것이었다. 항일독립투쟁에 나섰더니 3대째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중이며 친일했던 인사들은 3대째 잘 살고 있다 한다.독립운동을 하느라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아 가세가 기울어 졌으니 그런 와중에서 자식들이 제대로 배울수가 없었을 터이다.친일인사들의 경우는 물론 이와 정반대일게다. 얼마전부터 메스컴에는 백범 김구선생 살해범인 안두희의 자백과 배후조종인물들에 관한 기사가 계속 실리고 있다. 백범과 관련된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이 해방후의 이 땅에서 홀대를 받은 뚜렷한 또 하나의사실로는 독립공채 보상문제를 들수 있을 것같다. 항일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해외에 거주했던 교포들을 대상으로 독립공채가 발행됐으나 해방이후 백범살해사건이 난 뒤엔 유독 중국에서 임시정부에 의해 발행된 공채에는 보상이 이뤄지질 않았다.까맣게 잊혀졌던 이 문제는 80년대초 한 국회의원의 노력에 의한 입법으로 세상에 자세히 알려져 겨우 해결됐다.그나마 그때까지 공채를 간직했던 사람들은 얼마 안됐고 일부는 선대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보상받기 보다는 가보로 보존하겠다고 말한것으로 기자의 취재기록에 남아있다. 민족적인 울분을 자아내는 정신대문제도 독립운동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적잖은 것 같다. 선열의 몸을 바친 독립투쟁이나 정신대피해자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던 통한은 모두가 분명히 일제만행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와 관련,정신대피해에 대해 일본측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할 게다. 그러나 일제를 탓 하기에 앞서 친일파득세 독립운동가 쇠락의 과거잘못된 역사흐름을 재조명,이제부터라도 반성과 비판의 거울로 삼고 애국적 차원에서 자체적인 보상등의 방법으로 정신대패해자를 우리가 앞장 서 적극 감싸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같다. 일제가 준 상처를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해나가지 못한다면 민족자존을 바탕으로 한 새가치관 확립도 쉽지 않을 것이다.
  • 아프간­「모자디디」에의 기대(해외사설)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시하투라 모자디디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4년 유혈사태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임시정부 평의회의장인 모자디디는 대중들로부터도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가 의장이 되리라고는 강경반군파와 온건파 모두도 예상 못했었다. 모자디디가 이끄는 아프간구국전선은 인원이 몇백명밖에 안되는 숱한 반군세력 중에서 가장 작은 조직중의 하나이다. 무자헤딘(반군)지도자들은 89년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했을때도 그를 대표로 추대했었다. 모자디디는 65세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존경하는 흰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다수족인 파슈트족 출신이다.코란 교리학자로 교수출신인 그는 「어려운 시대를 밝히는 이성의 목소리」로,중용을 지킬줄 아는 현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강경파들의 살해 위협에도 극단적인 행동은 척결되어야 한다고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모자디디는 『서구와도 대화의 창구를 열어 놓아야 한다』며 파슈트어·페르시아어·아랍어 이외에 영어를 배운 사람이다. 그의지난날은 전투와 망명으로 이어진 고난의 시절이었으며 온건노선을 고집해 왔다.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강경파 반군지도자인 굴루딘 헤크마티아르가 권력을 잡지나 않을까 우려했으나 모자디디가 평의회의장이 됨으로써 새로운 출발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이같은 희망이 꺾여서는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모자디디가 의장이 됨으로써 헤크마티아르의 강경세력과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 아메드 샤 마수드의 온건세력의 중재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며 이미 그러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은 그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있으며 아프간 회교과도정부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헤크마티아르의 강경파는 무력으로 권력을 잡을 기회를 틈틈이 노릴것은 틀림없다. 흰수염 모자디디가 정황이 불안한 카불에서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 아프간 강경반군 과정구성 지지/“중립인사 참여땐 동참”

    ◎온건파 카불입성… 주도권 장악/강경파 수도 잠입… 충돌 우려도 【카불 AFP 로이터 연합】 아프가니스탄의 강경 반군 헤즈비 이슬라미의 지도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예르는 23일 아프간내에 무자헤딘 과도정부 설립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모든 반군 세력들이 공정한 비율로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불 라디오 방송은 헤크마티예르가 이날 보하마드 라피에 부통령과 아프간 돔부 로우가르에서 가진 전격 회담에서 이같이 말했으며 임시정부 참가대표들은 서로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 중립적인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헤크마티예르는 또1년내에 아프간에서 총선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방송은 전했다. 한편 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한 반군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위해 23일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베논 세반 유엔특사는 무자헤딘 반군간에 빠른 합의가 이뤄지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카불 AP 연합】 아프가나스탄 회교 반군 온건 세력은 22일 강경파를 따돌린채 임정을 구성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내전 발발후 처음으로 병력을 수도 카불에 무혈입성시키는 등 정국 주도권을 한층 강화했다. 【카불 로이터 연합】 아프가니스탄 강경파 반군이 수도 카불에 대한 무력침공을 경고한 가운데 대립 상태에 있는 무자헤딘 반군들은 23일 각각 수도 카불에 은밀히 잠입,반군간 유혈충돌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한편 아프간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온건파 자미아티 이슬라미 지도자인 아메드 샤 마수드가 사실상 카불을 장악하고 있다고 이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관리는 『수천명에 이르는 마수드의 병사들이 카불 시내에 진주해 있으며 휘하 군사 전문가들이 군부대에 배치돼 이미 무장을 완료한 상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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