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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임정청사 관리 “엉망”/중국 시 산하 구 문물보호소에서 운영

    ◎우리말 아는 관리인 없어/싸구려 기념품 판매 열중/유물·유품 전시요청 묵살 중국 상해시의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막대한 자금을 들인 복원작업에도 불구하고 관리소홀로 오히려 선열들의 독립정신에 상채기를 내고 있다. 한국측의 재정지원으로 임정청사가 복원된 것은 지난 4월13일.이후 상해시 노만구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노만구 문물보호관리소에서 관리를 맡고 있으나 관리소홀과 무신경으로 역사적 의의를 잃어가고 있다.당시 30만달러의 복원비를 지원한 우리측의 삼성물산은 관리권을 우리측에 주도록 요구했으나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중국의 방침에 따라 중국이 관리권을 갖게됐었다. 그러나 노만구는 이후 관리권을 내세워 우리측이 원하는 전시물들을 제대로 진열하지 않는 등 우리측의 계속적인 복원노력을 백안시하며 일방적인 운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독립기념관측이 관련 유물·유품을 수집,임정청사에 보낼 예정이었으나 중국측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다.중국측은 또 조선족을 채용,안내를 맡도록 약속했으나 현재 임정청사를 관리하는 5∼6명의 직원 가운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1명도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임정청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전시된 자료와 청사의 구체적인 연원등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하는 등 역사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데도 크게 미흡한 실정이다.임정청사 입구의 안내소격인 「접대소」에서도 우리측이 전달한 사진과 책자등 관련자료는 구비하지 않은채 주로 중국어 서적과 중국제 접시,손수건등 기념품만 판매하는등 역사적 유적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특히 우리측이 제작,VTR과 함께 보내준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영화는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영사기가 고장났다』는 이유로 단 한차례도 상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임정청사의 복원에 관계해온 독립기념관측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상해시와 임정청사관리세부협정을 체결할 것을 구상중이나 중국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의 윤봉석연구원은『중국이 임정청사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문화재라기보다는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관광자원이라는 차원에서 관리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광복회의 백계현사무총장은 『소유권은 가질수 없더라도 관리권만은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 문민정부 첫 광복절에 생각한다(특별대담)

    ◎친일세력 축출이 정기회복 지름길/관료사회서 온존… 국가기강 확립 걸림돌/총독부 청사 철거 현정권 임기중 실현을/임정선열 5위 봉환 역사적 쾌거/문제있는 독립유공자 재심 절실/정신대문제 등 일제만행 규명… 사죄 꼭 받아내야 15일로 광복 마흔여덟돌을 맞았다.특히 문민정부 출범 첫해에 맞이한 광복절은 여느때보다 뜻깊다.상해임정 선열들의 유해가 봉환되고 구조선총독부청사,총독관저가 철거되는 등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작업이 사실상 처음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문민정부가 처음으로 맞는 8·15 광복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우리 민족이 풀어나가야 할 향후 과제를 좌담으로 정리해본다.이날 좌담회에는 김승곤광복회회장과 신용하서울대교수가 참석했다. □참석자 김승곤 광복회 회장 신용하 서울대 교수 ▲김회장=광복을 맞아 12년동안 항일운동을 하며 떠돌던 중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놀랍게도 친일파들의 권세가 여전하더군요. 더구나 극심한 좌우익 투쟁을 교묘히 이용해 친일파들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51년 광주의 한 신문사에 입사할 때도 독립운동사실을 숨겨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나 순국선열들이 지금껏 이역을 떠돌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껏 관료사회를 쥐고 있던 이들 친일파때문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습니다.독립운동가들이 그동안 제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죠.그만큼 우리 사회의 친일세력은 뿌리가 깊습니다. 이번 임정선열 5위의 봉환은 친일파들때문에 퇴색해버린 민족정기를 되살릴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또한 이를 통해 국가기강도 바로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신교수=우리 헌법 전문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계승을 명문화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 정책을 시행하는데는 문제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임정 요인의 유해 5위를 공식적으로 국내에 봉환한 것은 매우 획기적입니다.즉 민족의 정기를 학립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독립정신을 계승 발전해 세계속의 한국으로 발돋움,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정신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고요. 김영삼대통령이 그동안 논란속에서 미루어 왔던 구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토록 지시한 것은 확실한 용단이라 생각합니다.옛 총독관저의 철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문제는 김대통령의 민족정기 앙양의지와는 달리 일부 세력과 관료들의 개혁의지가 부족하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김회장=총독부 청사의 건립의도부터 생각해봅시다.우리 임금이 살던 경복궁안에 짓지 않았습니까.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지요.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총독부 건물은 일제의 상징입니다.해방과 동시에 가장 먼저 철거됐어야 합니다. 물론 이승만대통령때부터 역대 정권들이 철거를 고려했었지요.그러나 지금껏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이는 행정부에 있는 친일수구세력들의 방해때문입니다. ▲신교수=조선총독부를 지을당시 일본의 건축전문가들은 남산이나 서울시청자리를 주장했습니다.그러나 당시 데라우치총독이 영구 통치를선언하는 의미에서 조선왕궁의 정궁인 근정전을 헐고 짓도록 했습니다.즉 일제가 한국 식민통치의 상징을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를 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입니다.5000년 역사를 일제의 식민통치 상징에 넣어놓았으니 민족적 열등감을 「배양」시키고 일본인에게는 우월감을 조장해 왔습니다.5공때는 철거계획이 한때 검토됐으나 무산됐고 6공때도 연구됐지요.그러나 경비문제를 들고 나온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철거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관료들이 대통령을 속인 것입니다.뜯어다가 복원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게 반대이유이지만 이 건물은 복원가치가 없습니다.우리 고유의 유물도 아닌데 뭣때문에 복원합니까.정 아쉽다면 모형을 하나 만들어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관내에 전시하면 그만이지요.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박물관의 이전시기입니다.정부에서는 2000년까지 완공한다고 발표했는데 김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97년까지 마쳐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막강한 수구세력에 의해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회장=그렇습니다.김대통령 임기안에 이전해야 합니다.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친일세력들이 남아있습니다.김대통령이 퇴임한 뒤에 이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우며 이전에 반대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화제를 돌려 정신대문제를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최근 일본 연립정부가 우리 한국인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가 위안부로 이용한 사실을 인정한데 대해 마치 대단한 의미가 담긴 양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본정부가 사과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정신대문제에 대해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을 놓고 우리 외무부가 『외교적으로 정신대문제는 청산됐다』고 밝힌 것은 성급한 것입니다. ▲신교수=동감입니다.새로 들어선 일본의 연립정부는 정신대문제와 관련해 전후청산차원이라며 「강제성」만을 인정했습니다.범죄행위에 대해 배상이나 사죄는 없는데 이는 용납할 수 없으며 일본에 휘말리는 우리의 외교정책은 자주외교 대등외교가 아니라고 봅니다.독일은 패전후 즉시 사죄하고 배상금을 물었는데 일본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김회장=정신대문제를 포함해 일제 만행에 대해 전반적인 진상규명과 일본의 전적인 사죄가 있어야 합니다. 가을로 예정된 김대통령의 일본방문에서는 분명한 답변을 일본정부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신교수=잘못된 과거역사의 청산은 물론 국제화시대의 대처라는 측면에서도 친일파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시급합니다.민족의식이 소멸되면 강대국에 종속될 수 밖에 없지요.이완용이가 나라를 판 대가인 은사금으로 사들인 땅을 증손이 나타나 법원에 제소,여러건 승소판결을 받았지요.이는 제2의 이완용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김구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에게 암살당하고도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이러한 것들은 건국직후 친일파들을 몰아내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보훈처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포상을 받은 경우라도 친일행각에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이 있으면 재심해야 합니다.그러나 그 기준은 엄격하고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김회장=친일파에 대한 재조명이 역사적 과제임은 분명합니다.문제는 현실적으로 친일파를 어떤 기준으로 가려낼 것인가 하는 겁니다.정부로서도 친일파에 대한 역사재조명이 무척 어려울 줄 압니다.그러나 서두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작업을 벌여나간다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해봅니다. ▲신교수=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최근 들어선 일본 연립내각의 핵심인 오자와 이치로는 PKO법안의 초안 배경이 된 「오자와특별조사위」를 이끌어온 인물입니다.이 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앞으로 국제사회가 미주권 EC권 일본권 등 3개 블록화되므로 일본이 아시아지역의 통합과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한국은 일본의 아시아정책의 개편대상중의 하나이므로 자칫 말려들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종속될 위험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김회장=일본은 한일관계를 영원한 동반자인양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러나 6백90억달러의 무역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관계가 동반자일수 있습니까.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발전을이룩할 수 있었습니다.동북아시아의 전략거점으로 일본을 택한 미국이 각종 기술원조를 아끼지 않으면서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성장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나 일본은 겉으로는 동반자 운운하면서 우리나라에 기술지원을 꺼리고 있습니다.우리나라를 경제협력국이 아니라 시장으로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이런 상태에서 양국이 진정한 협조적 관계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우리 국민의 반일감정은 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그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김대통령의 가을 일본방문에서는 반드시 말뿐이 아닌 실질적인 일본의 사죄를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이와함께 기술이전과 무역역조시정등에 대한 일본정부의 실질적인 약속을 보장받아야 할 것입니다.
  • 국민장이상 수준… 국민적 행사 강조/건국후 처음 「국민제전」

    ◎다른 선열유해 봉환때도 적용될듯 10일 상해임시정부 선열5위의 영결식은 「국민제전」의 형식으로 치러졌다. 「국민제전」이라는 말은 지난 6월 정부가 이들 선열의 봉환을 본격 추진하면서 고심 끝에 만들어낸 장례명칭이다. 「봉환제전」으로 이름붙이는 것도 고려됐으나 국민적 행사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같이 결정됐다. 국민장 이상의 수준으로 하면서도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돼 장례를 치른 선열들에 대해 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거푸 장례를 지내는 일을 피하기 위해 국민제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따라서 「국민제전」은 건국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명칭이야 어찌됐건 황인성국무총리가 제전위원장을 맡은 것이나 지난 5일 상해에서의 천묘식에서부터 이날 영결식까지 6일동안인 행사기간 등은 국민장 수준과 같다. 정부는 앞으로도 안중근의사등 해외에 묻혀있는 순국선열의 유해가 확인되는 대로 봉환할 계획으로 있어 유사한 국민제전이 더 있을 전망이다. 한편 건국이후 지금까지 치러진 국장과 국민장은 모두 12차례이다.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등 국가원수의 사망때 치러지는 국장은 지금까지 박정희대통령 시해때 한차례 거행됐었다. 국민장은 지난 83년 아웅산테러사건으로 희생된 서석준 전부총리등 정부사절 6명의 장례까지 11차례 거행됐다. 이에 앞서서는 74년 8월14일부터 5일동안 거행된 육영수여사 장례로 김종필총리가 장의위원장을 맡았었다. 건국이후 최초의 국민장은 49년6월 26일부터 거행된 김구 상해임시정부 주석의 장례로 7월5일까지 10일동안 거행됐다.
  • “유지 받들어 애국애족정신 실천”/황인성 제전위원장 추모사

    48주년의 뜻깊은 광복절을 닷새 앞둔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다섯분의 유해를 멀리 중국 상해에서 모셔와 이곳 국립묘지에 유택을 마련하는 영결의 제전에 머리 숙이고 있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박은식선생님의 그 거룩하신 존명을 다시 불러봅니다.신규식선생님,노백린선생님,김인전선생님,그리고 안태국선생님의 존명을 온 국민과 함께 다시 불러 봅니다. 선열들께서 1919년 4월13일 상해에서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권회복을 위한 우리민족의 유일한 합법정부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에 그 독립정신이 이어지고 있음은 우리 헌법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시다가 망국의 한을 품은채 이국땅에서 순국하신 다섯분 선열들의 발자취를 이 자리에서 되새겨 보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선열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그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르게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선열들께서 나라잃은 설움속에 와신상담하며 보내신 생애가 얼마나 고난에 찬 것이었으며 몽매에도 잊지 못한 조국광복의 뜻을 끝내 펴지 못하고 객서하신 통한이 얼마나 크셨습니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가족은 흩어지고 심지어 자손마저 끊겨 가까운 유족을 볼 수 없는 우리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합니다. 바야흐로 김영삼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는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귀감삼아 신한국 건설의 기치아래 21세기의 번영과 영광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환국하지 못하신 여러 선열들을 하루빨리 조국의 품안으로 모실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드리며 그리하여 그분들의 고혼이나마 조국에서 평안히 안식하실 수 있도록 해드릴 것입니다.
  • 「민족정기 회복」 불댕기고…/임정선열 5위 국립묘지에 영면

    ◎“그리던 조국에 고이 잠드소서”/국민제전 거쳐 어제 안장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선생등 지난5일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열 5위의 영결식이 10일 상오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앞에서 국민제전으로 거행됐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린 이날 영결식은 제전위원장인 황인성 국무총리,이만섭 국회의장,김덕주 대법원장등 3부요인을 비롯,각계인사와 김승곤 광복회장등 광복회원,유족·일반시민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0여분동안 엄숙하게 진행됐다. 이날 영결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고인에 대한 묵념,제전집행위원장인 이병대 국가보훈처장의 약력보고,제전위원장인 황총리의 추모사와 김광복회장의 추념사,종교의식,헌화및 분향,조가,조포등의 순으로 거행됐다. 황총리는 추모사에서 『박은식 선생등 선열 다섯분은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임시정부를 튼튼히 해 조국광복의 토대를 마련한 분들』이라고 말하고 『7천만 한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의 대업도 선열의 거룩한 유지와 보살핌으로 멀지않아 성취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선열의 개인신앙등에 따라 기독교,불교,천주교,대종교순으로 종교의식을 진행한데 이어 3부요인과 유족대표및 여야정당대표순으로 헌화와 분향을 했다. 영결식이 끝난뒤 선열 5인의 유해는 상오11시 10분쯤 새로 조성된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옮겨져 하관,헌토,성분,조총,묵념의 순으로 안장식을 가진뒤 영원히 조국땅에 묻혔다. 임정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유해는 4단계구조로 된 임정묘역 맨위 상단 정부수반급묘역의 중앙에,국무총리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노백린,신규식,김인전 선생은 바로 아래 국무위원급 묘역 중앙 장방형의 유택에,안태국 선생의 유해는 애국지사묘역에 각각 모셔졌다. ◎선열87위 봉환 추진/황 총리 황인성국무총리는 10일 『아직 유해가 봉환되지 않은 87위의 선렬에 대해서도 안장실태가 확인되는대로 유족과의 협의를 거쳐 봉환을 추진하거나 유족들이 희망할 경우 현지에서 단장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황총리는 이날 상해 임시정부 선렬 5위유해봉환 국민제전을 마친뒤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선열의 유해 봉환행사를 성공적으로 엄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국민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임정 선열 5위 오늘 영결식/국립묘지서 국민제전으로

    박은식선생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5위의 영결식이 10일 상오 서울 동작동 현충문 앞에서 국민제전위원장인 황인성국무총리,이만섭국회의장,김덕주대법원장등 3부요인을 비롯,각계인사,김승곤광복회장등 광복회원,외교사절·유족·일반시민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제전으로 거행된다. 이날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약력보고,추모사에 이어 종교의식으로 거행되는데 종교의식은 선열의 개인신앙과 전체신도수등을 고려,기독교 불교 천주교 대종교순으로 진행된다. 선열 5위의 유해는 영결식이 끝난 뒤 이날 낮12시쯤 국립묘지에 새로 조성된 임시정부요인묘역에서 국민제전집행위원장인 이병대국가보훈처장의 주관으로 안치식을 갖고 안장된다.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뒤편에 조성되는 임정요인묘역은 1천9백평으로 오는 10월 완공될 예정이나 이들 5위의 유택조성은 모두 마무리 됐다. 임정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선생의 유해는 4단계구조로 된 묘역 맨위 상단 정부수반급묘역 중앙에,국무총리와 의정원의장을 지낸 노백린 신규식선생과 김인전선생은 바로 아래 국무위원급 묘역 중앙에 각각 장방형의 유택이 마련됐다. 임정요인묘역에는 앞으로 현재 국립묘지안에 별도로 안장된 이승만전대통령을 제외한 이상용선생등 임정수반 7분과 국무위원급 26명등 33위의 유해가 추가로 모셔질 예정이다. 한편 보훈처는 임정 선열 5위 영결식에서 사용될 조가로 광복회에서 추천한 「선열추념가」(작사·작곡자 미상)를 최종선정했다고 밝혔다.
  • “옛 총독부 건물 헐어라”/김대통령 지시

    ◎민족정기 회복차원 조치/“통일대비 새 국립박물관 건립”/곧특별위 구성… 공정발표/철거잔해 이전 복원 않기로/정부 김영삼대통령은 9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속히 해체하고 통일에대비한 새국립박물관을 새로 건립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철거잔해는 이전복원하지 않을 방침인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은 이날 『광복절을 앞두고 ,그리고 민주공화정의 법통을 최초로 세운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봉환에 즈음하여 고뇌속에 심사숙고해 왔거니와 아무래도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는 조선총독부건물을 가능한한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여기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우리 조상의 빛나는 유산이자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조선총독부건물의 해체와 함께 통일한민족시대에 대비,5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합당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는 문제를 정부가 조속히 적극적으로 검토·착수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는 김대통령의 이같은 지시에 따라 문화체육부를 중심으로 새박물관건립및 총독부건물 해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한뒤 빠른 시일내에 작업일정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우리 모두는 민족사의 잘못된 큰줄기를 바로잡아 세계속의 한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이번 작업이 민족사복원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 청와대의 한관계자는 조선총독부건물의 해체와 새국립박물관 건립수순에 대해 『새박물관을 건립하는데 7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문화재를 임시로 옮길 수 있는 건물을 찾아 문화재를 옮긴뒤 총독부건물을 철거할 것』이라고 말해 김대통령의 임기중에 철거가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했다.
  • 환국 임정선열 5위 어제까지 15만 참배

    박은식 선생등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는 참배 마지막날인 9일에도 4만여명의 조문객이 다녀가 일반인들에게 참배가 허용된 지난6일 이후 모두 15만여명의 각계인사및 일반시민들이 조문·분향을 했다. 영현봉안관에는 이날 상오 현승종 전총리,윤동윤 체신부장관,송종의 서울지검장,김효은 경찰청장등을 비롯한 각계인사외에 국군정보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등 단체참배객들과 가족단위의 일반 참배객들로 붐볐다.
  • 문민정부로 이어진 임정법통/조항래 숙대교수 (특별기고)

    ◎임정5위 봉환제전에 부쳐 1948년7월 우리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헌법 전문에서는 광복과 함께 건국된 대한민국을 민족사적 본질에서 3·1민족독립혁명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인 계속성,즉 이념적인 정통성을 계승하는 정부로 천명하고 있다. ○정통성 계승 천명 1987년10월의 개정헌법 전문에서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계승자라는 것을 제헌헌법 보다 더욱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임시정부의 정통성·법통성 계승자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했다. 그러나 이같은 이념은 한동안 형식논리에 불과했거나,아니면 오히려 형식논리조차 거부될 만큼 위험한 분위기가 치솟아 대한민국의 이념을 혼탁하게 만들었다.이는 정부수립 초창기에 정치인의 민족사적 인식의 결함,또는 반민족사적 인물이 정계의 주체세력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의 이념적 맥락에 대한 형식논리조차 거부되는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양심을 외면한 인물이 쉽게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광복후에 민주정화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8·15 광복의 고비에서 민족의 정화는 당연히 양심적 단결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일본 제국주의의 우리나라 침략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민족역사의 승리가 1919년의 3·1민족독립혁명이었다.이의 최대 성과가 중국 상해에서 수립·선포되어 대표성과 대본영으로서의 광복정책의 구심점을 형성했던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948)였다.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단일화된 3·1민족독립혁명 전후의 여러개의 임시정부는 이동령·안창호·신규식·김구·조소앙·박은식·이시영·조완구·노백린·김인전·윤현진·이유필·신익희 등 40여명의 요인들이 30년 동안을 하루도 문민공화정부의 간판을 내리지 않고 하루 한끼씩이나마 연명하는 극심한 경제적 압박속에서도 부단히 광복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불굴의 광복투쟁 임정요인들은 한결같이 내정·교통·군사·외교·교육·문화·사법·재정 등의 여러가지 국가와 정부적 기능을 발휘하면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국내외를 통할 통치해 왔다.요인들은 이제 전통적인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 정부를 헌법에 기초해서 오직 광복정책 중심으로 펴나가,1945년에는 그 직할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조직적으로 훈련해서 국내정진작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대의정치,민의 창달 정치를 실시해 나갔다. 따라서 임시정부가 조국광복의 구심점으로 인정되어 우방각국의 승인을 받아 카이로·테헤란·포츠담선언 등 국제회의에서 우리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8·15 이후 환국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절대적으로 국민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임시정부가 자주적이고 발전된 정치의식에 의해 운영되어 문민민주적 법통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임시정부 30년사가 우리의 제1공화국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고,임시정부의 건국연후인 1919년을 대한민국의 건국기원(민국)으로 공식 준용되어야 하며,그것은 오늘날 문민공화정부의 개혁정치로 연결되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라 할수 있다. ○민족에게 큰 의미 따라서 70여년동안 상해 만국공원에 안치되어 있던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등 임시정부 요인 다섯분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10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의식은 우리 모두에게 이같은 맥락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들 임시정부 요인들은 민족수난기에 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한 후 이역에서 묻혔던 우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들이다. 이 다섯분의 안장을 계기로 광복사상 중요한 의미를 모두 상기해야 할것이다.이는 또 헌법에 명시한대로 우리가 임시정부의 정통성·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확인시키는 계기이기도 하다.
  • 환국선열에 참배하는 마음들(사설)

    고국에 봉환된 박은식선생등 임정요인 다섯분의 유해가 안치된 국립묘지 영현 봉안관에 추모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일반인 참배가 시작된 첫날 6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정부기관장·정치인·사회단체인사들과 시민들이 몰려들어 실로 70년만에 유해로 환국한 선열들의 높고 거룩한 뜻을 기리며 참배했다.둘째날인 7일에도 주말을 이용하여 더 많은 참배객들이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와 분향을 했다.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임정요인 다섯분의 선열앞에서 경건하게 머리숙인 시민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먼저 조국광복을 위해 한 평생 투쟁하다가 이국땅에서 숨진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되새겼을 것이다.이역 망명지에서 기약없는 세월을 풍손로숙으로 보내며 오로지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애쓰시던 그분들에 대해 흠모의 염이 가슴을 메웠으리라.다음에는 너무나 늦은 환국에 대해 선열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른들,조국의 광복을 보지못하고 이국땅에서 순국하신지 근 70년이다.조국이 광복된 뒤로도반세기 가까운 연륜이 지나서야 꿈에 그리던 고국땅에 묻히게 된 것이다.상해만국공원묘지에 돌보는 이 없이 쓸쓸히 방치되었다 이제야 모시게 된 것을 우리 국민 모두는 깊은 회한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때늦은 봉환이지만 임정요인의 고국 안장은 두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새 문민정부가 실질적으로 승계했다는 점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의 법통성이 상해임정에 있다」고 명기하고 있으나 그동안 선언적 의미에 그쳤을 따름이다.이번 유해 봉환은 법통성 계승의 가시적 첫 조처이며 이를 계기로 정부는 임정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각종 시책을 펴나가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둘째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일제치하에서 국내의 많은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혹은 협박·회유에 넘어가 변절하고 친일했던 경우에 비긴다면 임정요인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광복투쟁은 얼마나 찬연하고 우뚝한가.우리 역사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울때감연히 일어서 나라를 구하는 선열들의 항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연면한 민족정기의 발현이다.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민족정기를 전수하는데 이번 행사는 큰 역할을 하게 되었으리라 믿는다.민족정기는 나라를 융성하게 하는 원동력이요,국력의 원천이다. 다섯분의 유해는 10일 국립묘지 임정요인묘역에 안장된다.시민들이 영현 봉안관에 참배할 기회는 오늘과 내일 이틀 뿐이다.방학중인 자녀들의 손을 잡고 엄숙한 역사의 현장에 나서 보자.순국선열의 영령앞에 옷깃 여미고 분향 올리며 그분들의 거룩한 뜻을 되새겨보자.
  • 임정선열 5위 상해 천묘식 이모저모

    ◎국화에 싸인 영정주의 애국가 울러펴져/북한 자극않게 행사규모 대폭 축소/중국관리,“앞으로도 유해봉환 협조” ○…임시정부 선열 5위가 국내에 봉환되기에 앞서 5일 상오 중국 상해 만국공묘내에서 열린 천묘식은 애국가가 연주되는 속에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32분동안 엄숙하게 거행. 만국공묘 한쪽에 설치된 제단에는 선열 5위의 영정과 옥함이 국화꽃속에 설치돼 경건한 천묘식 분위기를 한결 높여줬다. 이날 천묘식 식장에는 유해봉안에 따른 북한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김영삼대통령과 3부요인의 화환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애국가 봉창도 생략. 천묘식은 유족및 각계대표의 헌화 및 분향으로 끝났는데 임시정부 선열 5위들이 한창 독립운동을 할 때 즐겨부르던 「애국지사의 노래」가 식종료후 은은하게 울려퍼지기도. 「양자강 깊은 물에 낚시 드리우고 독립의 시절 낚던 애국지사들」이란 가사에서는 참석자들의 콧등이 시큰할 정도. ○…천묘식을 마친 선열 5위의 영정 및 옥함은 곧바로 버스에 옮겨져 상해 강교국제공항으로 출발. 선열5위의 영정 및 옥함은 이날 아침 봉환단이 타고온 KE6146 특별기편에 실려 상오11시34분 서울로 향했다. ○…이번에 봉환된 박은식선생등 임시정부요인 5위의 유해가 묻혀있던 중국 상해시 만국공묘는 중국의 민족지도자 손문선생의 부인 송경령여사의 이름을 따 「송경령능원」으로도 불리는 곳. 만국공묘 외국인 묘역에는 6백여묘의 외국인 묘가 들어서 있는데 우리 애국지사 유해의 경우 임정요인 5위를 포함,모두 10여위가 있다. ○…이번 임시정부 요인 봉환과 관련해 우리 정부는 감사의 표시로 10만달러를 만국공묘관리사무소에 전달. ○…중국측과의 봉환협상이 막바지에 이르자 북한측이 박은식·노백린·안태국선생등 3분의 고향이 황해도와 평남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북한으로의 봉환을 중국측에 강력히 주장,한때 협상의 암초로 작용.우리측은 이에대해 임정요인 5위의 유가족들이 국내에 모두 있는 점을 강조,중국측을 설득했으며 중국은 당초의 수락의사를 재확인해 주면서 대신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천묘행사 규모를 대폭 축소해 줄 것을 공식요청. ○…박은식·노백린·안태국선생의 묘가 지금까지 보존된 데는 한 독립운동가의 숨은 노력때문이었다. 지난 55년쯤 이들 3위의 유해가 원래 안치됐던 중국 상해의 정안사 공동묘지가 폐쇄되면서 무연고 묘로 분류돼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상해에 살고 있던 독립운동가 선우혁씨가 우여곡절끝에 만국공묘로 이장했다는 것. 선우씨는 안태국선생의 손녀사위로 당시 홍콩에서 무역중개상을 하던 이의석씨에게 연락,이장비 등을 융통받아 이장을 성사시켰다고. ○…선열 5위의 유해가 안장돼 있던 만국공묘관리처의 유국우소장(52)은 이번 유해봉환에 대해 『유족들의 요망에 따라 한국으로 유해를 봉환하게 됐다』면서 『이날을 위해 중국정부는 70여년간 선열들의 유골을 관리,보존해왔다』고 소감을 피력. 유소장은 『중국측은 인도주의적 입장과 중·한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고려해 모든 봉환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같은 정신에 입각해 한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이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 ○…유족대표들은 3일 상오11시 상해에 미리 도착,4일 가진 유해발굴과 화장식에 참석했는데 임정수립 74년만에 유해를 모시게 된 한이 복받친듯 목이 메이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는 모습. 파묘작업은 유족대표와 윤해중 상해주재 한국총영사등이 참석,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흰가운을 입은 중국인 인부들이 묘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 발굴된 유골은 흰종이와 삼베가 깔린 목관에 모셔졌으며 목관은 붉은 천이 덮이고 그 위에 대형태극기가 덮여져 만국공묘에서 자동차로 20∼30분거리인 화장장 「용화빈의관」에서 화장됐다. ○…4일 상오8시30분부터 만국공묘 묘역에서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2시간가량 진행된 파묘식에서는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선생의 순으로 길이 80㎝ 폭 40㎝의 유골항아리가 발견됐으나 진흙과 빗물이 뒤범벅돼서 유족들의 가슴을 메어지게 했다. 박은식선생의 유골은 하나하나 발견됐으나 두개골부분은 바스러진 채 몇점 조각으로만 거두어졌으며 신규식선생의 경우에는 유골항아리에 세개의 구멍이 뚫린덮개가 그런대로 잘 덮인 상태로 발굴됐다. 그러나 노백린선생의 유골항아리는 깨진 채 발견됐으며 김인전선생과 안태국선생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도 덮개가 없는 상태였으며 선열 5위의 유해는 오랜 풍상으로 모두 시꺼멓게 변색이 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5위 봉환추진 일지 ▲5·27=김영삼대통령,방한중인 전기침중국외교부장에게 유해봉환을 제의 ▲6·3=중국정부,유해봉환 수락 ▲6·23=국무회의서 임정 선열5위봉환 국민제전계획확정및 국민제전위원회(위원장 황인성국무총리)구성 ▲6·29∼7·3=유해봉환 실무협의반 파견,이장절차와 의식관계등 합의 ▲7·30=「임정의 역사적 재조명」이란 주제로 학술회의 개최 ▲8·3=유족대표 상해도착 ▲8·4=상해 만국공묘에서 파묘및 화장 ▲8·5=만국공묘에서 한국식으로 천묘행사 거행.김포공항서 유해봉영행사,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안치 ▲8·5∼9=3부요인을 비롯한 시민·학생등 일반인 참배및 분향 ▲8·10=영결식및 유해안장
  • “세계도약 계기로”/여야 성명

    여·야는 5일 임정선열 5위의 유해봉환과 관련한 성명을 통해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한민족이 세계로 도약하는데 진력할 것을 각각 다짐했다. 민자당의 조용직부대변인은 이날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슴벅찬 감회를 느낀다』면서 『새로 탄생한 문민정부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의 설훈부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옷깃을 여미며 선열들을 모신다』면서 『이번에 봉환된 5위외에도 아직도 이역땅에 외롭게 묻혀있는 많은 순국선열들의 유해가 모두 본국으로 송환될수 있도록 정부당국이 노력해야한다』고 말했다.
  • 임정선열 5위 70여년만에 돌아오다/문민법통 새정부서 계승발전

    ◎김 대통령 담화/남은 87위 조속봉환에도 최선/어제 상해서 환국… 10일 국립묘지 안장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선생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가 5일 하오 사후 70여년만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중국 상해 만국공묘에서 국내로 봉환된 임정 선열5위의 유해봉영식은 이날 하오 김포공항 귀빈주차장에서 제전위원장인 황인성국무총리및 제전위원·유족대표·시민등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황총리는 봉영사를 통해 『선열들께서는 혹독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불굴의 투지와 용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시고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이 나라의 법통과 민족사의 맥을 이어주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열 5위의 유해는 박은식선생의 유해를 선두로 김포공항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경찰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국립묘지 영현 봉안관으로 운구돼 안치,3부요인과 각계 대표등의 헌화와 분향을 받았다. 유해영결식은 오는 10일 상오7시30분까지 일반조객들의 참배를 받은뒤 상오10시 국립묘지 현충문 앞에서 각계인사와 외교사절·시민 6천여명이 참석,국민장급인 국민제전으로 거행된다. 이번 임정 선열 5위의 유해봉환으로 국내로 봉환된 유해는 28위로 늘었다. 이에앞서 천묘식이 5일 상오 중국 상해 만국공묘에서 봉안단·유족대표등 1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다. 봉환단장인 이충길보훈처차장은 추모사에서 『선열들의 불멸의 정신은 겨레의 가슴속에 면면히 맥을 이어 오늘의 광복과 번영된 조국의 영광으로 결실맺었다』고 말했다. ◎제2건국 이룩 다짐 김영삼대통령은 5일 『새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문민적인 정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선언하고 『임시정부 선열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애국에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날 「임시정부 애국선열 유해봉환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독립운동이 그때의 애국이라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경제를 살리며,국가기강을 바로잡아 나가고,맡은 바 책무를 다하여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오늘의 애국』이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오늘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국무총리·의정원의장·법무총장·신민회총감등 요인의 유해를 우리땅에 모셔오는 것은 우리나라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이 된다』면서 『정부는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제전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것을 참으로 뜻깊게 생각하며 커다란 자부와 긍지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아직 봉환되지 못한 87위의 유해봉환을 위해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그분들과 그가족들의 못다한 한을 풀어드리고 항일독립운동의 민족정기를 계승,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우리국민 모두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영령들에 대해 뜨거운 존경과 감사를 바쳐주기를 희망한다』면서 『이를 계기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애국심이 뜨겁게 소생해 우리의 손으로 제2의 건국을 이룩해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87위 조속봉환 지시 김영삼대통령은 5일 미봉환 애국선열 87위도 하루빨리 조국에 안장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박관용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현재 명단이 파악된 87위는 중국에 양기탁등 75위,일본에 강상립등 1위,미국에 서재필등 3위,러시아에 김공사등 8위가 있으나 이중 66위는 정확한 묘소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 임정선열 유해봉환 대통령 담화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세곳(서울·노영·상해)의 임정이 통합된 단일 민주정부입니다. 민주공화정을 표방하고 3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도입,대한민국의 법통을 세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것을 전문에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새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문민적인 정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오늘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국무총리,의정원 의장,법무총장,신민회총감등 요인의 유해를 우리땅에 모셔오는 것은 우리나라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이 됩니다. 정부로서는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제전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것을 참으로 뜻깊게 생각하며 커다란 자부와 긍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풍찬노숙하면서 나라를 찾으려 하셨고 그 과정에서 쓰러져 이국의 땅에 묻혔습니다. 살아 생전에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독립이 다 된 날,본국에 돌아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일찍이 『생전에 한번 정부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문지기』가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노백린군무총장은 『단 한번이라도 정복을 입고 말을 탄 채 조국의 남대문으로 입성』하기를 소원했으나 해방되기 22년전에 돌아가셨다가 60년만에 한줌의 재로 되어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조국에 유해를 모시게 되었으니 저 세상에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조국은 어제의 비운과 좌절을 딛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고 있습니다. 조국의 땅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봉환하지 못한 87위의 유해 봉환을 위해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그 분들과 그 가족들의 못다한 한을 풀어드리고 항일독립운동의 민족정기를 계승,발양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박은식대통령은 민족의 「통사」를 쓰고 「독립운동의 혈사」를 썼으며 독립을 이룩한 뒤에 광복사를 자신의 손으로 쓰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마지 않더니 1925년에 돌아가시니 최초의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신규식국무총리는 을사조약때 『망국인으로 살기보다는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지사의 길』이라면서 자살을 기도,한쪽 눈이 사시가 되셨습니다. 이분은 유명한 「한국혼」이라는 글에서 『오호라,동포여,치욕을 알리는 피는 선열들이 이미 뿌리고 갔다.치욕을 씻기 위한 피는 우리들이 흘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던 「애국」이란 말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유해 봉환을 계기로 애국에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분들이 애국의 충정 하나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셨듯이 우리 역시 그같은 애국심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분들이 그때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의 조국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독립운동이 그때의 애국이라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경제를 살리며 국가기강을 바로 잡아나가고 맡은 바 책무를 다하여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오늘의 애국입니다. 광복절과 10일 제전일을 앞두고 우리 국민 모두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영령들에 대해 뜨거운 존경과 감사를 바쳐주기를 희망합니다.이기간중에 국민의 자발적인 참배가 줄을 이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애국심이 뜨겁게 소생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제2의 건국을 이룩해내야 하겠습니다.
  • 상해임정 5위 봉환을 보고/이현희 성신여대(특별기고)

    순국하신지 70여년만에야 꿈에도 못잊던 조국의 품안에 안겨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5)27년을 다진 다섯분,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선생의 유해가 이역땅에 묻힌지 70여년만에 문민정부의 외교적 결실로 봉환의 꿈을 이루게 됐다. ○70여년만에 조국품에 5위분은 대개가 1920년부터 1926년사이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시대(1919∼32)에 그 기반을 다지거나 화합과 광복정책의 방략,전략전술등을 인출해 내던 지혜로운 분들이었다.거개가 40대에 순국하신 아픈 기억을 일제하의 우리국민들에게 안겨주신분들이다. 백암 박은식은 민족사학자요 유학자이며 언론인,교육·개화사상가로서도 당대를 누비던 개결한 선비였다.임정에 참여하기 전후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뛰어난 저술을 통해 일제강점하에서 좌절·방황·자포자기하던 내외 겨레에게 소생하는 민족혼을 심어주었다.이승만임정대통령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지도체제를 국무령중심으로 고치고 물러난뒤 곧 서거하셨다.항상『나는 대통령에 연연하지 않아』라고 말씀하셨던 그는 돌아가실 때는 『벼슬은 때가 되면 하는 것인데 정작 국민의 심복임을 아는 사람이 적소.독립투쟁은 단결이 가장 중요하오』라면서 당시의 임정요인들간의 갈등을 우려하고 경계하셨다. 예관 신규식은 구한국군에서부터 시작해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이듬해 신해혁명때 손문을 도와 중국 혁명동지와 안면을 넓히면서 임정의 기반을 닦았다.동제사·혁명당·신한청년당등의 조직을 통해 임정을 실질적으로 수립,선포케 하는데 중심역할을 맡아 동분서주하였다.국무총리와 법무총장등을 역임하면서 중국 광주에 있던 손문의 호법정부를 방문,최초로 임정의 국제적인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인 개가를 올렸다. 그는 한국혼,민족정기·의식·철학을 강조한 분이다.그는 『민족혼이 빠지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외쳤다. 계원 노백린은 전통적인 무관으로서 이미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구한국군에서 무관학교교장등을 지낸뒤 임정에 참여,국군통수체계를 정립하는데 기여했다.그뒤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사 양성소를 열고 비행사를 길러 공군창설의 기반을 굳힌뒤 3·1운동이후 상해 임정으로 다시 합류해 군무총장(국방장관)국무총리를 역임하다가 서거하셨다. ○애국의 진솔함 엿보여 그는 1926년 운명직전 상해의 10평 남짓한 누옥에서 말달리는 시늉을 하면서 『가자 서울로,내조국은 한국이다.어서가자』라고 외쳤다.슬프기까지 한 나라사랑의 진솔함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동오 안태국은 임정과는 직접 관련이 적다.도산 안창호선생의 인척으로 상해에 와서 활동하다가 1920년 5위분중에서 제일 먼저 작고하셨다.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는데 핵심역할을 했고,데라우치조선총독 사살계획에 연루돼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도산은 그에 대한 추도사에서 『동오선생은 선비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순수한 애국심만으로 나라사랑의 큰 뜻을 평생 펴왔다』고 그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경재 김인전은 목사출신이었다.고향은 충남 서천이나 평양신학교를 나온 총신계통의 골수신앙인이었다.교육입국의 기치아래 후진을 양성하다가 3·1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뒤 상해임정에 합류하였다.학무총장대리·학무차장과,임시의정원 부의장·의장을 역임하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간사등 임정후원단체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외국인 풍모가 풍긴 도덕성이 뛰어난 분이었다.임정의 재정등 안살림을 도맡았고 요인들이 분열하지 않고 화합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분이었다.그는 『우리가 누굴 탓할 계제가 못됩니다.내자신을 돌보면서 근신하고 가치기준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합시다』고 강조해왔다.설교조의 웅변에 상해 3·1예배당안은 늘 숙연했었다. ○역사적의미 되새겨야 상해 만국공묘에는 아직도 윤현진 김가진 이영선등 알 수 있는 분들의 묘가 더있다.이번 유해봉환은 그 시작이어야한다.이를 계기로 나라사랑의 큰 뜻을 펴다가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순국하신 더많은 애국선열의 유해를 그리던 조국강산으로 모셔와야 할 것이다.오늘부터 9일까지의 참배기간동안 국립묘지를 찾으며,그리고 10일의 안장식날 조기를 달며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엄숙히 되새겨야 할 것이다.그것이 애국의 실체를 후손에게 가르치고,수많은 희생이 오늘의 한국을 탄생시켰다는 역사적사실을 후손에게 되새기게 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 “뒤늦은 국내봉환에 송구”/봉환단장 이충길 보훈처차장

    ◎66위 아직 소재파악못해 안타까워 『국민들의 큰 관심속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를 무사히 고국에 봉환하게 돼 더없이 기쁩니다』 임정선열 유해봉환단장으로 상해 천묘식에 참석했던 이충길국가보훈처차장은 유해봉환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무척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차장은 『봉환에 앞서 며칠동안은 잠도 제대로 못잘 정도로 부담감을 느꼈다』면서 『봉환단장을 맡으면서부터는 몸가짐에도 남다른 신경을 썼다』고 토로했다. ­이번 봉환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석을 놓고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던 다섯분의 유해를 영면 70여년만에 국내로 봉환하게 된데 대해 송구스러움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이번 봉환은 우리 민족에게는 정말 뜻깊은 일이며 법통계승과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있어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 입니다. 이차장은 『유해봉환에 적극 협조해 준 중국 정부와 상해시 당국,그리고 우리 공관원과 현지 교포들에게 거듭 감사드린다』면서 북한측의 봉환방해공작이 없었던 점이 천만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독립유공자로서 해외에 안장돼 있는 분은 얼마나 되며 그동안의 봉환실적과 봉환자의 안장실태는 어떠합니까. ▲가장 어려운 점은 묘소 소재의 확인입니다.묘소소재확인,독립유공자와 유해의 동일성 문제는 독립유공자의 활동당시 동료나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재 조사를 실시,정확한 검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앞으로도 관계전문가와 현지 동포 등을 통해 사적지답사 및 묘소실태조사를 실시,미봉환된 선열들의 묘소확인과 봉환작업을 계속 추진하겠습니다. ­앞으로의 봉환추진계획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현재 미봉환된 유해 87위 가운데 21위는 묘소가 확인되었으나 66위는 아직 소재를 모릅니다.확인된 21위는 유족과 협의,국내 봉환을 추진하겠으며 합장 등으로 개별확인이 곤란하거나 유족들이 현지묘소 단장을 희망할 때는 단장을 해줌으로써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려나갈 생각입니다.
  • 임정선열 다섯분 봉환하며(사설)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바친 선열들이 광복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채 이국땅에 묻혀 계시다는 사실은 광복된 조국에 사는 국민으로서는 생각만해도 송구스럽고 죄만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한해 이태의 일도 아니고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보낸 형편이고 보면 부끄러움과 아픔은 더욱더 커진다.반드시 정성이 모자랐다기 보다는 그동안 지구촌을 지배한 냉전기류에 연유했다는 것도 사실이다.비록 그렇다해도 우리의 마음이 평안할수는 없다.애국혼을 풍손로숙시키는 듯한 그런 애절함이 있다. 그분들중 우선 임시정부요인 다섯분­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선생의 유해가 오늘5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다.오전에 상하이(상해)만국공묘에서 천묘식을 가진다음 오후에는 김포공항에 도착,국립묘지의 영현봉안관에 안치되게 된다.이날부터 9일까지는 참배를 위해 일반인에 공개되며 10일에는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안장된다.유족들의 한만 풀리는게 아니다.모시는게 늦었다고는 해도 국민 모두의 가슴까지 후련하게 적셔주는 일이 아닐수 없다.그분들도 이제고국의 품에 안겨 비로소 편히 잠들게 된것이다. 이를 성사시킨것은 시대의 흐름이다.얼어붙어 있었던 중국이 개방의 물결을 타면서 우리와 국교를 맺은 일로부터 비롯된다.지난5월 방한한 전기침중국외교부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애국선열 유해봉환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고 전부장이 쾌히 응낙함으로써 급속한 진전을 보기에 이른것이다. 이번 유해봉환은 중국정부의 대한관을 읽을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도 뜻이 깊다.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정부로 계승되고 있음을 중국정부가 인정한 것이 유해봉환에의 협조라고 하겠기 때문이다.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묻혀야 할 당위성을 갖고있다.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이 다섯분의 유해와 영혼을 모셔들이면서 우리의 광복전후사가 다시 정리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번더 해본다.항일과 친일을 분명히 가리지못한 상황속에서 순국선열과 그 후예가 외로워야했던 사실은 우리를 많이 부끄럽게 하는것이기 때문이다.이분들의 무언의 질타가 들리는양하다.또 이분들이 소망하는것은 허리잘린 조국이 아니다.통일에의 의지를 더 굳건히 할것을 촉구한다. 이분들의 「귀국」은 아직도 못돌아온 다른 87위의 독립유공자 유해와 영혼을 생각하게도 한다.그 봉환노력이 계속되어야겠고 행방을 모르는 66위에 대한 소재파악 노력도 뒤따라야 할것이다. 오늘 오후부터 9일까지의 참배기간동안 국립묘지를 찾아보도록 하자.10일의 안장식날은 잊지들 말고 조기를 달도록 하자.
  • “선열공적 되새기는 계기돼야”/유해봉환 준비 바쁜 김승곤 광복회장

    ◎독립유공자 대대적 발굴사업 추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우리 국민 모두가 선열들의 공적을 새롭게 기리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 입니다』 유해봉환을 앞두고 나름대로 준비작업에 한창인 광복회 김승곤회장(78)은 유해봉환에 따른 감회가 각별하다고 밝히면서 『유해봉환이 민족기강 확립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해봉환에 대한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국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이미 70여년전에 돌아가신 선열들을 늦게나마 고국에 모실 수 있게 돼 기쁩니다. 우리 풍습으로는 한번 땅에 묻힌 분에 대해서는 다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하지만 일찍이 모셔왔어야 할 민족지도자들을 뒤늦게나마 국민들의 환영속에 모셔와 고국에 「영원한 유택」을 마련할 수 있게 돼 다행으로 생각합니다.그동안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뿐 아니라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오늘과 같은 결실을 거두게 된 것으로 봅니다』 지난 33년 18세의 나이로 중국 남경으로 망명,군사학교인 조선의열단 간부학교2기로 졸업한 뒤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독립운동을 벌인 김회장은 나이답지 않게 아직도 정정함을 과시하면서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는 듯 했다. 김회장은 『임정요인들의 유해가 국가적인 관심속에 고국으로 귀환하는 시점에 광복회장직을 맡고 있어 개인적으로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이번 유해봉환에 대한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 헌법전문과 김영삼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 정부의 정통성의 뿌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데 있다고 봅니다.민족정기를 한차원 더 높이는 데도 한 몫을 했습니다.또 국민들이 선열들의 업적을 되새겨 자신을 각성하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해봉환을 위해 그동안 광복회측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압니다. 『보훈처등 정부관련부서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해왔지만 우리도 「조국」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국민들의 가슴속에 심어줄 절호의 기회로 보고 힘을 쏟았습니다.그동안 4천명 광복회원들이 같이 뛰었습니다.지난 65년 광복회가 설립된 이후 어쩌면 이번 처럼 경사스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다시한번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임시정부 선열들이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워 나간 모습을 특히 청소년층에게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청소년들의 건전한 의식형성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임정요인등 애국지사유해가 87위나 됩니다.추가 유해봉환과 관련된 계획은 있는지요. 『이번 유해봉환으로 추가 유해봉환사업은 가속화 될 것입니다.광복회에서도 중국·러시아등지에 묻혀있으면서 아직 안장장소가 확인되지 않은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찾아 정부측과 봉환을 협의할 생각입니다.오는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1만명 가까운 독립유공자를 새로 발굴,포상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발맞춰 우리도 대대적인 자체발굴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 임정선열 유해 오늘 봉환

    박은식선생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5위의 유해가 5일 하오 광복 4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정부는 이날 하오 2시 김포공항 제2청사 귀빈주차장에서 유해가 중국 상해에서 봉환된 직후 봉환국민제전위원장인 황인성국무총리 주재로 유족대표·제전위원 및 일반 시민등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영식을 거행한다. 정부는 봉영식이 끝난 뒤 선열 5위의 유해를 김포공항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20여대의 차량행렬로 운구,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옮겨 3부요인과 각계 대표의 헌화·분향을 받을 예정이다. 또 오는 10일 상오 영결식이 거행될때까지 공무원 시민 학생등 일반조객도 참배할수 있다. 이에앞서 5일 상오 9시30분부터 상해 만국공묘에서는 이충길보훈처차장을 단장으로 한 봉환단 및 유족대표,현지 동포등 2백여명이 참석,천묘식을 갖는다.
  • 10일 집집마다 태극기 걸기/상해임정요인 5위 환국제전 조기로

    정부는 상해임시정부 선렬5위 유해봉환 국민제전과 제48주년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 게양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키로 했다. 총무처는 3일 「전가구·전직장 국기게양운동 추진계획」을 마련,오는 10일 거행되는 국민제전 당일에는 모든 국민이 상오7시부터 하오6시까지 조기를 게양토록 하고 15일 광복절에도 전국의 가구가 태극기를 게양토록 적극 장려,국민적 자긍심과 일체감을 조성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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