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임시정부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087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민족적 항일투쟁이 독립 이끌어냈다/구한말서 해방까지 광복운동사

    ◎상해임정 19년 출범… 독립운동 주도/독립군부대 1920년 1∼3월 국내진공 24회/윤봉길의사등 의거 잇따라 일본인 간담을 서늘케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그래서 암울했던 질곡의 시대는 더욱 길고 지루했다.그 칠흑 같은 어둠의 세월에서 맞은 19 45 년8월 15일 광복은 민족의 새로운 탄생이고 부활이었다.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19 05 년을사조약 부터 기산하면 40년만의 일이다.또 19 10년 8월 29일 국치일로 시작해서는 정확히 34년11개월 보름만에 이룩한 민족의 해방이었다.그리고 나서 올해로 광복 50주년.격동의 시대로 흔히 회자되는 그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에게 지금 광복의 의미가 희석되어 있다.그리하여 더러는 민족해방을 연합군 승리가 안겨다 준 선물 정도로 여긴다.이는 당치 않은 판단이다.광복은 일제침략에 저항한 민족독립운동이 이끌어낸 자존의 역사인 것이다. 광복은 일제침략에 저항한 민족독립운동이 이끌어 낸 자존의 역사인 것이다. 광복을 성취하기까지의 반일독립운동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른바 국치일 때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이어진 민족주의 운동이다.1919년의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3·1운동은 「독립선언서」가 보여주는 것 처럼 목적이 현대국가 건설에 있다.그리고 이 운동에 2백만명의 민중이 직접 뛰어들어 일본으로부터 독립,국민국가를 세우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탄압되어 현대적 국민국가를 마련할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고 말았다.이에 따라 독립정신의 실체적 형태를 갖춘 여러 임시정부가 주로 해외에서 태어났다.그 대표적 임시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정부(3월17일)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4월10일)다.거기에 국내 한성임시정부(4월23일)가 하나 더 늘어났다.이 임시정부들은 민족지도자들의 협의를 거쳐 1919년9월 상하이에서 하나의 정부로 출범하기에 이른다. 임시정부는 3·1운동에 의해 집약된 민족의지가 깔린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이기도 했다.상하이 시기(1919∼1932년)에는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을 지도하는데 주력해왔다.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으로 민주공화제를 임시헌장에 도입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의지는 강했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반일민족독립을 통해 장차 조국광복이 오리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심어주었다.그리고 중국을 비롯,만주·노령지역을 향한 망명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독립은 동 단체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독립군의 창설과 재편성이 이루어져 북간도와 서간도에 만도 34개부대가 포진했다.노령지역에도 이와 맞먹는 독립군 부대가 생겨났다.북간도의 대한독립군과 복로군정서,군무도독부,서간도의 배산무사단과 태극단 등이 그것이다. 그 독립운동의 힘은 때로 국내로 역류되었다.일본군 쪽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1∼3월까지 3개월 동안 독립군부대의 국내진공은 24차례에 이르고 있다. 항일독립전쟁 중 가장 빛나는 전투는 1920년10월 김좌진·나중소가 지휘했던 일군과의 청산리싸움이다.청산리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에는 북로군정서(북로군정서)독립군 1천6백명이 나서 6일동안 10여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독립군부대들은전략상 러시아영토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이동 중에 밀산에서 독립군부대들을 통합,3천5백명 병력의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서일을 비롯,지청천·홍범도 등의 독립군 중진들이 모두 망라되었다.이들은 소비에트 적군의 안내로 자유시에 집결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독립군은 1921년6월22일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군의 공격을 받는다.적군의 배신으로 얼룩진 이 참사가 흑해사변으로도 불리는 자유시사건이다. 이렇듯 나라를 잃고 유랑한 항일독립군의 전열이 한때 일그러지지만,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계속되었다.그 하나가 1932년4월 윤봉길의거인데,이 사건은 침체해 있던 임시정부를 회생시키는데 기여했다.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9월17일.김구주석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침략군에 쫓겨 상하이로부터 근거지를 7번째 옮겨 마지막 기착한 중칭시기(중경시기·1940∼1945년)의 일이었다.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맞추어 대일선전포고를 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중국·인도·버마전선에 참전시켰다.미군의 특수부대 OSS와 합동작전을 펴기도 했던 광복군은 국내에 투입할 계획이었으나,일본이 서둘러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민족해방의 광복을 성취한 데는 중국대륙에서의 임시정부나 독립군의 항일저항이 크게 뒷받침되었다. 광복은 결코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민족독립운동에 의한 광복의 빛이 지난 시대에 오랫동안 가리워졌지만,오늘의 민주주의 헌법은 국가의 정통성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찾았다.그래서 광복50년 이후의 현대사는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세계 한 가운데 우뚝한 자존의 역사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 연표 ▲1910년8월29일:한일합병 조약문 발표. ▲1911년12월19일:이상설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근업회를,서일등은 북간도에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조직. ▲1913년5월13일:안창호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창립. ▲1919년2월8일:동경유학생 6백여명이 동경 YMCA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3월1일:민족대표 33인(4인 불참)이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탑골공원을 비롯,전국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됨.▲1919년4월10일:상해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을 개원하고 의정원법 통과 및 내각을 조직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920년10월20일:북로군정서 김좌진·이범석부대가 청산리에서 일군과 싸워 대승. ▲1921년1월:만주 독립군부대들이 통합,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단조직. ▲1929년11월3일: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 ▲1932년4월29일: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상해 홍구(강구)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백천의칙)등 10명을 사상케 함. ▲1945년7월:광복군이 이범석 휘하의 국내정진군총지휘부 설치,국내진입작전 결정. ▲1945년8월15일:일제의 강점으로부터 광복.
  • 해외독립운동2천명 새로 포상/정부,광복50주년 285개기념행사확정

    ◎7월까지 중경 임시정부 청사 복원/총독부 중앙지붕 우선 폭파 철거/주요행사/독립운동 사적지 순례/세계한민족 축전 개최/50주년 기록영화 제작/부산 「백산상회」 복원 정부는 30일 광복50주년이 되는 새해 한햇동안 중앙정부차원에서 주관하는 81개 사업을 포함,모두 7백억원을 들여 2백85개 기념사업을 벌이기로 확정했다. 광복50주년 기념사업회(위원장 김계수)가 확정한 기념사업계획안에 따르면 각 정부부처가 주관하는 사업이 56개로 1백51억원의 예산이 소요되며 정부투자기관및 산하단체사업이 25개로 1백87억원이 투입된다.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사업은 1벡87개로 3백63억원이 들고 민간사업으로는 열기구경연대회 등 17건이 선정되었다. 정부는 새해 독립운동의 주무대이던 중국·러시아 등을 중심으로 해외항일독립운동가 2만여명에 대한 유공사례를 정밀점검해 그 가운데 2천명이상을 새로 포상하기로 했으며 7월까지 중경 임시정부청사를 복원할 계획이다. 8월15일 광복50주년 기념식도 국립중앙박물관 앞 광장과 세종로를 잇는 옥외에서 치르고 행사진행요원 6천명,공식초청인원 3만명 이외에 일반인도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상최대의 행사가 되게 힐 방침이다. 특히 광복절기념식 식후행사로서 지금은 국립박물관인 일제총독부건물의 중앙지붕을 폭파,철거하기로 했다.나머지 건물부분은 96년초부터 본격철거를 시작한다. 이밖에 주요한 광복절기념행사는 ▲광복길놀이 ▲독립운동사적지 순례▲광복50주년 기록영화제작 ▲세계한민족축전 ▲우주소년단 큰잔치 ▲독립관건립 기공식 ▲독립운동 본거지이던 부산의 「백산상회」 복원 ▲광주학생운동기념공원 조성 등이다.
  • 체첸공에 러 무력투입 임박/전투기 6대 그로즈니 외곽 포격

    ◎옐친,“질서회복 조치 시행”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특약】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1일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꾀하고 있는 체첸공화국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고 선언한 가운데 정체불명의 전투기가 그로즈니를 폭격하는등 이 지역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공보실은 이날 성명을 내고 『러시아대통령의 지도력과 통제아래 체첸공화국내 상황을 개선하고 헌정상의 법질서를 결정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시행중』이라고 밝히는 한편 『이것이 비상사태선포를 자동적으로 의미하진 않는다』고만 밝혔다. 그러나 옐친대통령이 체첸공화국의 적대세력들에 대해 무기를 버리도록 요구한 최후통첩시한인 1일 상오6시(한국시간 1일 정오)가 지난지 수시간뒤 정체불명의 전투기 6대가 수도 그로즈니 외곽을 폭격했다. 현지 로이터통신기자는 전투기들이 그로즈니상공을 최소한 2차례 비행한뒤 공항부근에 폭탄을 투하했으며 폭음에 이어 2개의 검은 연기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고 전했다. 정체를 알수 없는 전투기들은 지난달 29일과 30일에도 그로즈니를 폭격했으며 체첸공화국은 러시아측 소행이라고 비난했으나 러시아공군은 이를 부인했다. 체첸공화국내의 상황은 1일 상오중 평온을 유지했으나 그로즈니 서쪽 1백여㎞ 떨어진 북오세티아의 블라디카프카즈공항에서는 이날 수십대의 러시아군 수송기들이 병력을 수송하는 광경이 목격됐다. 러시아군은 이밖에 북오세티아의 모즈도크에도 60여대의 장갑차들을 집결시켰다고 러시아 정부소식통들이 말했다. 러시아군의 무력개입을 우려해 그로즈니를 탈출하려는 민간인들은 이날도 속속 피난길에 올라 도시 중심가는 한산했다. ◎러 자치공 독립 차단 안간힘/체첸공­러 정면대치 안팎/“연방해체 우려… 이탈 절대불가” 입장 견지/무력개입땐 유엔 반발·회교권 자극 가능성 체첸공화국 사태가 체첸·러시아간 정면대결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러시아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체첸공은 지난달 29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보낸 「48시간이내 무장해제」 최후통첩을 즉각 거부한데 대해 러시아가 전투기와 헬기를 동원,수도 그로즈니를 공습하자 그로즈니에서 부녀자들을 소개하기로 하는등 결사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있다. 이에대해 러시아는 체첸공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될 것에 대비,내무부 소속 보안군 병력들을 인근 북오세티아공화국에 집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체첸공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개입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와 체첸공간의 긴장관계는 지난 91년 11월 러시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틈을 타 체첸공이 독립을 선언하면서부터.러시아 남부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위치한 체첸공은 현재 러시아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89개 자치지역 및 공화국의 하나로 인구 1백20만명의 회교공화국이며 풍부한 석유자원을 보유,경제적 자립이 가능한 지역으로 알려져 왔다. 체첸공에서 독립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쿠데타 발발에 앞서 같은해 옛 소련의 공군장성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부터다.두다예프는 대통령에 선출되자마자 옛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 이후 활발해지고 있던 이슬람재건운동에 힘입어 「러시아제국으로부터의 민족해방·독립투쟁」을 내세우며 러시아연방조약협정과 지난해 실시된 러시아총선에 불참하는등 지금까지 독자노선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체첸공내의 반정부·친러시아세력은 지난 8월 두다예프 대통령의 해임과 임시정부수립을 선언,체첸공 정부군과 대립해 왔으며 이번에도 체첸공정부를 공격해서 거의 정권을 무너뜨리는듯 했으나 실패해서 최근의 긴장사태를 불러 일으켜 왔다. 현재 체첸공의 독립요구에 대해 러시아는 「절대불가」의 입장이다.체첸공의 독립을 인정할 경우 그 여파가 러시아내 독립을 요구하는 다른 민족으로까지 확산돼 자칫 러시아연방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또 체첸공은 러시아내에서 유수한 유전지대인데다 옛 소련의 화약고인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등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러시아로서는 쉽게 포기할수도 없다. 그렇다고 섣불리 무력개입을 단행할수도 없는 것이 러시아의 입장이다.무력개입으로 인해 국제적인 비난은 물론 체첸공을 지지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란등 회교권을자극,러시아와 회교세력의 전면대결을 초래할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체첸공 반군들이 현정권을 무너뜨리기를 기대하면서 은밀히 지원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 「광복 50년… 세계로 미래로」/내년 기념사업·행사 윤곽

    ◎경축식뒤 총독부 돔 철거로 절정/5백만 해외동포 이민사 영상자료로/독립기념관선 국권회복역사 대축제/8월엔 세계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김계수)의 사업계획안의 윤곽이 대체로 정해졌다.위원회는 그동안 광복 50주년인 내년을 앞두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 잡고 지난 반세기 동안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유례 없는 발전을 이룩한 우리의 과거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념사업을 추진해 왔다.여기에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을 통해 세계화 개방화 시대에 대비하는 국가발전과 민족통일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목표도 덧붙여졌다.위원회는 이달말 최종 사업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광복 50주년,통일로 미래로」라는 슬로건 아래 「현대 한국민족의 역사적 조명」 「화합과 참여의 공동체 실현」 「세계에의 도전과 미래 창조」등 3가지를 기념사업의 주제로 정했다.또 광복 50주년의 의미가 뚜렷이 나타나도록 진행하되 분위기가 광복절에 절정에 달할 수 있도록 일관성 있는 주제를 부각시킬 방침이다.이와함께 해외동포까지 참가하는 민족적 행사가 되도록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예술등 모든 분야에 걸친 다각적인 행사를 통해 새로운 세대들에게 역사의 교훈 위에서 21세기의 밝은 비전을 제시한다는 기본방향을 마련해 놓고 있다. 위원회는 정부 지방 민간등 3개 부문으로 나누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우선 정부와 산하단체들은 1백88억원이 투입되는 78개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또 각 시·도는 국비와 지방비등 6백17억원을 들여 2백7개 각종 사업을 벌인다.민간및 시민단체들은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제안한 15개 사업과 신문공고등을 통해 제안받은 62개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기념사업은 「민족의 역사적 조명」 「우리의 현실 진단」 「미래의 비전 제시」 「국민화합과 참여의 장 마련」등 4개 부문으로 나뉘어 추진된다. 위원회는 국내·외의 숨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함으로써 민족의 명예와 긍지를 높이고 「민속생활사 전시」(5∼7월) 「근대 백년 민속풍물전」(8∼10월)을 통해 과거사를 회고할 계획이다.또 8월에는 자라나는 세대를 상대로 상해임시정부청사와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연변지역등 국내·외의 독립운동 사적지 순례를 실시하고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경제전시관을 설치하고 수출상품전도 열 예정이다. 또 종합학술행사(7∼8월)와 5백만 해외동포의 이민사와 현지에서의 삶을 집대성한 영상자료와 「세계 한민족 총서」도 제작할 예정이다.8월11일부터 18일까지는 1백여개 나라에 산재한 독립유공자등 1천여명을 초청해 조국애와 한민족의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는 축제를 여는 한편 5월부터 10월까지 독립기념관에서 일제의 탄압상과 선조들의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소개하는 대축제를 개최한다. 이와 함께 무궁화통신위성 발사 기념행사(6월),민족통일 대토론회및 학술세미나(4∼10월),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8월),지구촌 우주소년단 큰잔치(8월)를 잇따라 열어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계획이다. 내년 광복절에 즈음해서는 경축식과 광화문 종로 대학로를 잇는 「광복의 그날」 퍼레이드와 광복길놀이(8월13∼15일)를 준비하고 있으며 경축식이 끝난 뒤 곧바로 구총독부 건물의 중앙돔을 일부 철거하는 행사도 갖는다.
  • 이달 문화인물/단재 신채호선생

    ◎문체부,심포지엄·자료전·추모집 발간 등 추진/독립투사·사학자·언론인으로서의 삶 조명 문화체육부는 12월의 문화인물에 단재 신채호선생을 선정했다. 단재는 한평생 일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독립투사였고 한국사 연구에 힘써 주체적인 민족사관을 확립한 사학자였으며 명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통렬히 비판한 언론인이었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같은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언론인의 길을 선택,「황성신문」에 일본의 조선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된 선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일본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기 위해 이 신문에 「독사신론」을 연재,「신라침공설」과 「임나부 경영설」 등을 철저히 비판했다. 단재는 1910년 4월 중국 청도에 망명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근업신문」에서 활동하다가 14년에는 조선사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등 우리민족의 옛 터전을 둘러보기도 했다. 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의정원 의원,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한 뒤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창간,임정의 노선을 비판했다. 이어 22년 「조선혁명선언」을 발표,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한 독립쟁취를 부르짖었고 27년에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했다. 28년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중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중 36년 2월 순국했다.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고 「조선상고사」를 일간지에 연재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의 붓을 놓지 않았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론」 등이 있다. 문화체육부는 12월 한달동안 관련단체와 함께 학술 심포지엄과 자료 전시회를 열고 추모집을 발간하는 등 단재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를 다채롭게 마련한다.
  • 광복50년 기념사업 48개로/규모 축소…예산도 절반줄여 1백50억

    ◎정부,청와대보고 정부는 26일 내년에 있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을 중앙경축식및 옛 총독부건물 철거등 중점사업 18개와 관련사업 30개 등 모두 48개로 잠정확정하고 그 내용을 김영삼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시형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은 이날 청와대에서 김대통령에게 흑자예산편성과 긴축기조에 부응,사업규모를 당초의 90개에서 48개로 축소하고 예산도 3백억원에서 1백50억원으로 줄이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대신 민간단체들의 자발적인 기념행사 추진을 적극 유도할 방침이라고 김실장은 밝혔다. 정부가 잠정확정한 중점사업은 ▲옛 총독부건물 철거등 「경축식및 대축전분야」3개 ▲중경임시정부 청사 복원등 「역사적 조명분야」6개 ▲세계한민족 총서 제작등 「공동체 실현분야」6개 ▲한국음악인 대향연등「미래창조분야」 3개등이다. 또 ▲독립유공자의 발굴과 포상 ▲해외선열의 유해봉환및 묘소단장 ▲시·도별 통일문제 토톤회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등도 추진한다. 정부는 이러한 사업내용과 함께 광복50주년 기념 휘장,로고 등도 곧 확정,다음달초 발표할 예정이다.
  • 독립유공자 후손 박유철·양준자씨 부부(인터뷰)

    ◎“애국선열 유해봉환 적극 나서야”/고생하는 유공자가족에 죄송/서훈늘리고 보상금 올려주실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은 민족사의 영원한 거울입니다.그것이 흐려졌으면 다시 닦아 들여다 보면서 미래의 진로를 열어 나가야지요.그분들의 피나는 독립투쟁의 역정과 죽음으로 항거한 애국애족 정신을 생각하면 이렇게 살아서 선열들을 기리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장손 박유철씨(56·건설부 건설공무원 교육원장)와 항일언론인 우강 양기탁 선생의 손녀 양준자씨(50·안양 대신대 교회음악과 교수) 부부의 해방 50돌을 앞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강남아파트 1동 101호.잘 가꿔진 상록화분이 인상적인 널찍한 응접실 북쪽 벽에는 백암 선생의 영정과 「국혼은 살아있다」는 휘호가 나란히 걸려있어 청사에 빛난 민족선각자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도 있듯이 생존 유공자나 후손들은 대부분 불우한 생활을해왔습니다.유족들중엔 배우지 못한 탓에 무직자들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그런 점에서 최근 정부가 독립유공서훈자를 늘리고 보상금을 인상하는 등 예우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친(박시창 장군·전 광복회회장)이 오랫동안 군에 봉직했던 관계로 자신은 다행히 교육도 제대로 받고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오직 정신적 자부심 하나로 애옥살이를 견뎌내고 있는 다른 유공자 가족들을 보면 괜히 죄스런 생각마저 든다고 박씨는 말한다.현재 광복회 이사이기도 한 박씨의 집안은 친가,외가,처가 모두가 독립운동과 연결돼 있다.친할아버지 백암,처할아버지 우강선생 외에 외할아버지인 최중호 옹은 임정에서 김구선생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으며 선친 또한 김홍일 장군과 함께 중국대륙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다. 두사람은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됐지만 며느리감이 우강선생의 손녀란 말에 박씨의 부친이 더 열성적으로 결합을 추진했다고.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쳐야한다는 것이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때 동지들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셨다고 합니다.선친께서는 늘 「평생 네 할아버지처럼 겸손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한 백암의 인품으로 인해 인맥과 분파로 얽혀있던 당시 상해 독립운동가 사회에서도 선생만은 적이 없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될 수 있었을 것이란게 박씨의 설명이다. 지난해 8월 박은식선생을 비롯,중국 상해시 만국공묘에 안장돼 있던 애국선열 5위의 유해가 국내에 무사히 봉환,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던 것을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무엇보다 가슴 뿌듯하게 생각한다는 박씨.하지만 아직도 많은 독립유공자들의 유해가 해외에 산재해 있는만큼 이들의 조속한 국내 봉환을 위해서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유해봉환문제는 부인 양준자 여사에게는 한층 간절한 소망이자 아픔으로 다가온다.올 봄 우강선생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확인됐지만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혁작업때 인근 물구덩이에 매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국무령으로까지 추대된 할아버지는 당시 임정의 동상이몽에 회의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그래서 말년엔 고당암이라는 한적한 시골암자에 칩거,중국인들을 상대로 참선과 기공을 가르치며 수도자같은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아버지(양효손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6·25때 납북)로부터 귓결에 전해들은 것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지만 양준자 여사의 조부에 대한 정은 유별나다.『늦어도 해방 50돌을 맞는 내년까지는 할아버님의 유해를 반드시 모셔와 고국땅에서 편히 쉬시도록 하겠습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학규장군/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광복군 대일후방공작 지휘/조선혁명 이끌고 일군과 2백회 전투/중국거주 동포 3만명 무사귀국도 도와 백파 김학규장군(1900년11월24일∼1967년9월20일)은 평남 평원군 서해면 선산리에서 출생,소년기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독립사상을 몸에 익히게 됐다. 당시 만주에는 이시영·이회영·이상룡등 많은 애국지사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어 항일의식이 넓게 퍼져 있었다.이들은 만주에서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 등 교포교육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선생은 신흥강습소의 후신으로 설치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조직돼 있던 조선의용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항일무장활동에 투신했다.선생은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일대 독립운동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펼친 경신대학살을 피해 봉천으로 탈출,교포가 운영하는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데 힘을 쏟았다.선생은 1929년 학교를 그만두고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예하부대인 조선혁명군에서 총사령 양세봉장군의 참모장으로 일했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항해 반일투쟁의 기치를 든 당취오등 중국 의용군과 서로 연계,공동전선을 펼쳐 큰 전공을 쌓았다. 한·중 양국연합군은 1932년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일제와 2백여차례의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11월들어 당취오가 일본의 공세에 밀려 군벌 장학량에게로 피신하고 다른 의용군지도자들도 잇따라 잠적함에 따라 조선혁명군도 약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혁명군은 이같이 곤궁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남경에서 장개석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김구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등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선생을 대표로 파견했다. 선생은 이에 따라 1934년5월 부인과 함께 농부로 변장하고 남경에 도착,김규식·유동열·김원봉등 독립운동단체의 지도급인사들을 만나 인적·물적 지원문제를 논의했다.이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가진 결과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서는 이념·노선등에서 제각각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선결과제라는 데 합의,우선 각 단체를 통합키로 결정했다. 선생은 이같은 남경 현지의 분위기를 조선혁명군본부에 전달,1935년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돼 남경통일대회에 참가했다.남경통일대회에는 선생의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등 5개 단체가 참여했다.그러나 1937년7월 일제가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에 대해 전면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중국군이 일제에 밀리면서 중국정부마저 중경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자 선생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한구·장사등지로 이동하게 됐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40년에 이르러 마침내 통합신당인 한국독립당을 건설,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선생은 광복군에서 총사령 겸 참모장인 이범석장군의 참모장대리로 임명돼 적후방공작을 담당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예하에 5개지대를 편성,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선생,3지대장에 공진원등을 임명했다.선생은 1941년 다시 3지대장으로 임명돼 1945년 해방까지 대일선전·초모공작·정보수집등의 일을 수행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있던 지하공작원들은 중국군과 미첩보기구 OSS에서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업무수행과정에서 미 14항공대 소속 버치대위와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해방직전인 1945년5월에는 14항공대사령관 센 노트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선생은 또 한국내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한국인을 후방침투요원으로 양성,국내진입작전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독립군 20명을 결사대로 선발,미 OSS에서 1개월동안 훈련을 실시하던중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아깝게 참전기회를 잃었다. 선생은 광복이후 중국땅에 살고 있던 3만여명의 동포가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뒤 1948년 느즈막히 귀국,1967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중에 「임시정부 유산」 보전 요청/한중총리회담

    ◎“흡수통일 불원… 북에 전달을”/경제·문화교류 확대 합의 이영덕 국무총리는 1일 상오 방한중인 이붕 중국총리의 예방을 받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제·문화 협력등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했다. 이영덕 총리는 이 자리에서 두 나라의 오랜 우의를 강조한 뒤 중국의 전산망 구축사업에 우리의 통신·전자업체들의 참여및 상해와 중경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 유산의 보전·관리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영덕 총리는 또 『우리가 절대로 흡수통일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것임을 북한에 반드시 전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붕 총리는 『중·한 양국은 한반도 정세에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도 한반도의 긴장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나라 총리는 이어 협력관계를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예술 공연등 문화학술교류도 증진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붕 총리는 이 자리에서 이영덕 총리를 중국으로 초청,앞으로 외교경로를 통해 이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이붕 총리는 국회를 방문,황낙주 국회의장과 김종필민자당·이기택 민주당대표 등 여야 지도자들과 면담하고 두나라의 우호증진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붕 총리는 이날 낮 이영덕 총리 주최로 총리공관에서 오찬을 함께 한뒤 하오에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을 시찰하고 구자경 럭키금성그룹회장을 만났으며 저녁에는 롯데호텔에서 경제4단체장이 공동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 아라파트,“예루살렘 회복” 선언/팔수도로 즉각 인정 요구

    ◎이­회교게릴라.치열한 포격전 지속 【가자·아카바(요르단) AFP 로이터 연합】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20일 예루살렘에 관한 전투가 임박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와 후세인 요르단왕에게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해 줄것을 요구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암만이나 기타 어느 곳에서 어떤 협정이 체결되든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수도』라면서 『다음번 전투는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며 이 전투가 임박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지난 17일 암만에서 가조인된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이 예루살렘의 회교성지를 요르단 책임하에 둘 것을 규정함으로써 이스라엘·PLO 자치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요르단 협상대표들은 20일 양국 지도자가 내주 서명할 평화조약의 구체적 내용을 최종 마무리,3년간에 걸친 평화협상을 끝냈다. 【예루살렘 로이터 연합】 이스라엘이 텔아비브 버스테러사건과 관련,레바논 남부에 포격을 가해 민간인 7명이 사망한데 이어 레바논내 회교게릴라들이 21일 이스라엘 북부지역에 2차례 로켓공격을 퍼붓는 등 양측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다. 이스라엘 군사소식통들은 레바논내 회교게릴라들이 이날 새벽(현지시간) 갈리리 동부지역에 잇따라 카튜샤 로켓 공격을 가하는등 지난 20일밤 이후 4차례나 공격을 가해왔다고 밝혔다. 회교게릴라들의 로켓공격으로 이스라엘 북부지역의 가옥 한채가 파괴됐으나 부상자등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이스라엘 라디오방송이 보도했다. ◎이의 가자·요르단서안 봉쇄 파장/중동에 「피의 보복」 재연 가능성/이·회교파 상호 보복전 전개 다짐/군사력투입땐 「팔」 자치 위기 봉착 텔아비브에서의 버스 폭탄테러에 이어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대한 폐쇄조치로 맞대응함에따라 중동에 일고 있는 화해무드가 다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폭탄테러는 또 팔레스타인 자치에 많은 과제가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과격파 회교도들의 저항으로 야기된 이같은 사태발전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등이 중동평화를 위한 공로로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까지 했으나 보다 완벽한 중동평화달성을 위해서는 아직도 건너야할 강과 넘어야할 산이 많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폭탄테러사건은 지난 17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46년간의 적대행위를 청산하는 평화협정에 가조인한 이틀후에 발생,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회교저항운동이라는 의미의 「하마스」 산하 무장조직 「이제딘 알 카삼」은 『예루살렘에 회교 깃발이 휘날리는 날까지 이스라엘에 대해 중단없는 전쟁을 전개하겠다』고 다짐해 앞으로도 테러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대한 이스라엘의 대응도 강경해 「피의 보복」이 악순환될 가능성도 없지않다.「눈에는 눈」이라는 철저한 보복을 반복해온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하마스」를 「공적1호」로 선포하고 즉각 응징을 선언했다.응징책의 하나로 이스라엘은 우선 요르단강 서안및 가자지구에 대한 무기한 폐쇄조치를 단행함에따라 앞으로 대규모 검거선풍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스라엘은 지난 82∼85년 레바논을 점령했을 때 이번과 같은 일련의 자살공격에 대해 철저히 군사적 보복을 했다.그러나 이번에 군사적 보복을 감행할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를 위해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킨 이스라엘­PLO 협정을 위반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들의 테러는 특히 아라파트 임시정부의 자치능력을 약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아라파트 의장은 회교과격파들의 테러봉쇄 압력을 받을 것으로 보이며 테러봉쇄에 실패할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도 위기를 맞을 위험성이 있다.더욱이 중동의 강국 이란등이 지원하는 과격파들의 테러는 전체적인 중동평화의 중대한 위협으로 존재하고 있다.
  • 아리스티드 조각에 착수

    【포르토프랭스 로이터 AFP 연합】 국민들의 열광적 환영속에 귀국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아이티 대통령은 16일 임시정부 각료들과 회의를 갖고 조각 문제를 비롯,앞으로 남은 임기중의 정책 우선순위 등을 협의하는 등 집무에 들어갔다. 미관계자들은 아리스티드대통령이 15일 밤 귀국후 임시정부 각료와 의회 지도자들을 비롯,각계 지도자들과 회담했다고 밝히고 16일에는 정부활동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다고 전했다.
  •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김구선생 추모시 발견

    광복투쟁의 선구자 이봉창의사의 순국 62주기에 때맞춰 백범 김구선생이 이의사를 기렸던 추모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재홍)는 10일 김구선생이 서거하던 지난 49년 자신이 의거를 지시했던 이의사의 32년1월8일 도쿄 사쿠라다문 일왕 히로히토 폭탄테러사건을 기념해 쓴 추모시가 최근 박삼중스님이 고서상을 통해 입수,발견됐다고 밝혔다. 한지에 쓰인 72자의 한문시는 작성일이 임시정부 수립 31년째인 1949년을 의미하는 「대한민국 31년 1월8일」로 끝부분에 『이봉창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문 의거를 기념하며』라는 말과 함께 친필 서명과 낙관이 찍혀 있어 이의사에 대한 추모시임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이날 상오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의열사에서 독립유공자와 사회단체관계자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의사 순국 62주기 추모제전」을 갖고 이 시를 이의사 영정에 봉정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성환선생/서울신문사 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임정 무장단체 「광복진선」 결성/중국시찰 가쓰라 일본총리 암살기도/만주서 교포에 문맹퇴치운동도 펼쳐 청사 조성환선생(1875년7월9일∼1948년10월7일)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항일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25세때인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해 군복을 입은 선생은 일부 선배군인들이 주요보직을 차지하기 위해 일제와 야합을 일삼는데 분개,숙군을 외치다 군을 떠나게 됐다. 선생은 『썩은 군대는 나라를 망친다』면서 부패군인의 제거를 주장,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복역 3년만에 특사로 풀려나온뒤 신민회에 가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07년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에는 선생과 같은 무관출신,양기탁등 언론인,이회영등 교육자,민족자본가,안창호등 해외국권회복 운동가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동휘·노백린등 다른 무관학교 출신자 14명과 함께 신민회에 가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주 북간도를 돌아보았으며 1910년 국권침탈을 맞아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믿기시작했다.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는 나철이 창시한 종교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내에서 만주 동삼성으로 자리를 옮겨 포교중이었다. 선생은 1912년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1년동안 유배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유배를 마친뒤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청소년교육에 몰두하던중 1918년 만주길림에서 「대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가운데 1명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19년 국내에서 발발한 3·1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가 사이에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선생은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군무부 총장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차장에 임명됐으며 4개월후 동만주에서 활동중인 중광단에 참가,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선생은 이와 별도로 대종교도들을 규합,정의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어 1920년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제관동군이 추격에 나서자 이를 피해 노령 이만으로 이동,이곳에서 이청천·홍범도·안무등과 함께 고려의용군을 결성하고 의용군을 모집해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의 꾐에 넘어간 소련이 독립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기습해오자 동료들과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단체들은 1923년 재통합에 나서 군정서·의군부·혈성단·독립단·광복단·국민회·신민단·대진단·의민단등 9개 단체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한 군사연합회 준비회의를 열었으며 선생은 이 과정에서 연락책을 맡았다. 선생은 이 모임이 진척을 보이지않자 김좌진을 중심으로 창설된 신민회에 참여,중앙집행위원회 외교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정서를 모체로 하는 신민부는 백두산에서 흑룡강,장춘에서 구참까지를 활동무대로 정하고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한족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면서 민족반역자의 징계,일본기관 습격등을 주임무로 삼았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정의부·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 조직운동등을 통해 흩어져있는 독립운동단체를 통일시키기 위해 수년동안 힘을 쏟았으나 정당의 이합집산이 심해 뚜렷한 진전을 얻지 못했다. 선생은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뜻이 맞는 이동녕·차이석·엄항섭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곽무장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선생은 같은해 이청천등과 함께 독립군 군사학편찬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돼 군사관련 교재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1년뒤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선생은 1939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광복군을 양성키로 한데 따라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돼 광복군설립의 기초를 닦았으며 1940년9월17일 마침내 광복군이 창설되자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으로 임명됐다. 선생은 4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국측의 광복군 무력화 움직임을 무산시켰으며 43년에는 국무위원에 올라 대일전쟁을 지도했다. 선생은 45년 들어 임시의정원 제4과 군무·교통위원으로 일하다 8·15해방을 맞아 같은해 12월 동료 임정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선생은 환국 이후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등을 지내다 48년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황영하 총무처장관 오늘∼13일 중국방문

    황영하총무처장관은 중국국무원의 송덕복인사부장(장관)초청으로 7일부터 13일까지 중국을 방문,두나라 사이의 공무원 교류 확대와 중국 인사제도 개혁을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한다. 황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북경지역에서 장기연수중인 우리나라 공무원 24명과 간담회도 가지며 상해에도 들러 임시정부청사등을 시찰할 예정이다.
  • 아리스티드 내일 귀국/미선 “아이티경찰 폭력 불용”

    【포르토프랭스 로이터 AP 연합】 미국과 아이티 군사정부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 지난 3일간 침묵을 지켜온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아이티 대통령은 21일 윌리엄 페리 미국방장관을 비롯,국방부 고위관리및 군관계자들과 만난 뒤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이 아이티에 병력을 파견,아이티의 민주주의회복을 지원하고있는데 지지를 표시한 뒤『늦어도 24일까지는 아이티로 귀국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아리스티드는 또 장 벨리요트 전국방장관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발표한뒤 3년전 자신과 함께 물러난 모든 행정당국자들은 즉각 해당기관의 업무를 재개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21일 아이티에 상륙한 미군이 포르토프랭스 시가지 등에서 치안 지원업무에 들어간 가운데 아이티경찰의 시위 과격진압 행위를 비난하면서 아이티 국민에 대한 경찰및 군의 폭력행사를 용납치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정지도자 세드라 “사임후 고국잔류” 【뉴욕·포르토프랭스 로이터 AFP 연합】 아이티 군부지도자 라울 세드라 장군은 미국과 합의한마감시한까지 사임할 계획이나 고국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21일 밝혔다. 세드라 장군은 이날 미CBS 방송에 출연,『아이티 헌법은 추방을 금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퇴진시한인 다음달 15일이후에도 아이티에 머물 것이라는 세드라의 발언은 이에 반대하는 미국정부와 갈등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 광복 50돌 기념사업 대폭 축소/당초 90개서 48개로

    ◎예산도 1백50억으로 반감 정부는 내년에 있을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을 경축식등 중점사업 18개,독립유공자의 발굴과 포상등 관련사업 30개등 모두 48개로 잠정 확정했다. 이는 처음에 계획했던 90개에서 대폭 축소된 것이며 이에 따라 예산도 3백억원에서 1백50억원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정부는 대신 민간차원의 기념행사를 보다 확대하기로 하고 민간단체들의 자발적인 기념행사 추진을 적극 유도할 방침이다. 정부가 잠정 확정한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은 다음과 같다. ▷중점사업◁ ▲광복 50주년 중앙경축식 ▲구총독부 철거행사·미술전 ▲광복길놀이 ▲중경임시정부청사 복원행사 ▲독립유공자위문 격려행사및 해외유공자 초청 ▲광복 50주년 기록영화제작 ▲근대백년 민속풍물전및 생활사 전시 ▲전통음악대공연및 창작 국악무용극 ▲경제전시관 설치및 수출상품 전시회 ▲세계한민족 삶 소개 영상자료 제작 ▲세계한민족 총서 제작 ▲95세계한민족 축전 ▲독립기념관 대축제 ▲예술의 전당 종합예술축전 ▲농어촌 한마당 전진대회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 ▲세계속의 한국경제 대토론회 ▲TV기획 민족통일 대토론회 ▷관련사업◁ ▲독립유공자 대대적 발굴 포상 ▲독립유공자 관련 추모사업 ▲해외선열 유해봉환및 묘소단장 ▲국내외 독립운동 사적지 순례 ▲독립운동 관련 해외사료조사및 문헌발굴 보급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재조명 ▲한국독립운동사 재조명학술대회 ▲제3차 한·중 국제학술대회 ▲일제식민지 정책 학술대회 ▲광복반세기 경제사회상 책자발간 ▲국내외 순회 사진전 ▲광복50주년 기념 민족예술경연대회 ▲무궁화 우수품종 전시회 ▲한국미술의 오늘 전시회 ▲광복50주년 기념교포행사 ▲세계적인 대형뮤지컬 창작 순회공연 ▲광복 50주년 기념 시·도별 통일문제 대토론회 ▲95미주한민족 통일포럼 ▲세계한민족 통일문제 대토론회 ▲전국대학생 통일논문 현상공모 ▲국립중앙극장 창작예술 특별공연 ▲광복50주년 기념 종합학술대회 ▲재외한국인 초청 청소년 과학경진대회 ▲한·일 문화 온고이지신 ▲통일한마음 달리기 대회▲국민체육문화축제 ▲KOREA CUP 국제축구대회 ▲21세기 10대우주강국 도약을 향한 우주주간 선포 ▲기념우표 발행
  • 안무장군/봉오동·청산리대첩의 얼굴없는 주역(이달의 독립운동가)

    ◎국민회군 조직,김좌진·홍범도와 연합/회령·강양동 일군 습격… 국내 진입 시도/모아산서 일기습받아 피랍… 42세 순국 안무장군(1883년 6월29일∼1924년 9월7일)은 김좌진·홍범도장군등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대표적인 무장항일투사이다. 호가 청전인 안장군은 함북 경성에서 출생,1889년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입대해 하사관을 거쳐 교련관으로 근무한 정규군인이다. 안선생은 1907년 8월1일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강제해산한데 따라 잠시 고향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아 북간도로 망명,독립운동가로 나서게 됐다. 선생은 이동휘가 활약하고 있던 북간도 명동에 도착한뒤 동지들과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예하에 국민회군 3백명을 편성,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높아지자 다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본격적으로 무기반입·독립군 훈련을 펼쳤다. 당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각지에 10여개의 지방회와 80여개의 지회를 두는등 한창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세력이 확산됨에 따라 산하 군사조직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선생의 국민회군등 2개 조직을 두게 된다. 바로 이 부대들이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의 하나로 손꼽히는 북간도 봉오동 전투를 치른 주역이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중화기를 동원,국내진입을 꾀하는 독립군부대를 토벌하려는데 맞서 독립군이 일제를 일패도지시킨 전투이다. 1920년 5월28일.무장독립단체들은 국내진입작전을 펼치기 위해 대한군북로도군부를 조직하고 병력을 화룡현 봉오동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모인 병력은 홍범도와 안무계의 5백50명등 모두 1천2백명이었으며 무기는 기관총 2문·총기 1천1백정·수류탄등 1백개등에 불과했다. 먼저 이들 무장독립군은 같은해 5·6월 두차례에 걸쳐 함북 회령과 강양동의 일제초소를 공격,국내진입 가능성여부를 타진했다. 일제는 이에 따라 나남 주둔 19사단의 보병대대 및 기관총대 1개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중국땅으로 건너와 「독립군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독립군은 공격에 나선 일제의 주력을봉오동으로 유인,4시간여에 걸친 포위전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정무원은 『적군의 사자 1백57명·중상 2백여명·경상 1백여명이요,아군의 사자 4인·중상 2인』이라고 피아 피해상황을 밝혔다. 안장군이 이 전투에서 맹활약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봉오동 전투는 일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독립군의 전력을 재평가,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게 됐다. 일제의 대대적 작전을 감지한 독립군은 안장군의 국민회부대를 화룡현 이도구지역으로 이동시키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등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지방의 밀림지대로 기지를 옮기도록 했다. 당시 집결한 병력은 사상 최대규모인 2천여명에 이르렀다. 독립군은 이런 배치로 유명한 청산리대첩에 대한 준비를 갖춘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홍범도·안무 3장군의 부대등이 연합,이·삼도구 서북쪽 심산 밀림지대에서 일제 「토벌군」2만여명과 밤낮 구별없이 6일동안 치른 전투이다. 독립군은 이 청산리대첩에서 일제를 철저히 괴멸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일제 19사단이 추가로 출동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다시 더멀리 밀산으로 이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립군은 밀산이 너무 비좁은 지역이라 장기주둔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아래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하바로스크 위쪽 알렉세호스크)로 이동했다가 일제와의 불화를 우려한 러시아로부터 큰 타격을 받고 주력을 잃는 비극을 겪게 됐다. 러시아는 1921년 6월 일제의 요구에 따라 독립군을 무장해제키로 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갑자기 독립군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당시 피해상황에 대해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에서 발표한 「자유시사변에 대한 성토문」은 『독립군 2백72명이 전사하고 9백17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변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안장군의 부대는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북간도로 돌아왔다. 안장군은 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활약하던중 1924년 9월6일 일경의 습격으로 모아산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된뒤 다음날 42세의 일기로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정마저 남기지 못하고 조국광복의 제단에 목숨을 받친 선생의 일생은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리라.
  • “반카스트로 반란준비”/망명 쿠바인단체

    【마이애미 AP 로이터 연합】 쿠바의 한 망명단체는 26일 휘하 행동대원들이 공산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이애미에 본부를 둔 망명단체 쿠바독립민주화운동(CID)은 이날 집행위원회 특별회의를 열어 본국 쿠바국민들과 미국에 있는 쿠바망명공동체에 대해 카스트로를 축출하기 위해 단결하자고 촉구하는 내용의 일련의 결의안들을 채택했다. CID는 이날 결의안을 통해 이 단체가 쿠바안에 영토를 확보하는 대로 임시정부를 수립,임시대통령을 선출하고 내각을 출범시키는 동시에 입법기관도 설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우베르토 마토스 CID의장은 이 임시정부의 최우선과제가 쿠바국민들에 대한 식량및 보건지원 등의 구호활동을 펴는 것이며 이같은 구호활동을 관장키 위한 「구국위원회」를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마토스의장은 또 쿠바에 있는 요원들이 늦어도 오는 12월부터 쿠바혁명을 주도할 것이고 벌써 설탕생산을 지연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쿠바정부는 이날도 협상이 이민문제에 한정되더라도 보트피플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고 미국에 거듭 제의했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