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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서울신문 새 연재소설 그래도 江은 흐른다/작가 정현웅씨

    ◎고난의 연대 굴절된 근현대사 바로잡기/일제∼해방후 역사 인물들 이야기/광복군­평양 기생 사랑도 곁들여/임시정부에 대한 새로운 평가/학도병 출신 생존자 인터뷰 통해 작품속 리얼리티 높여 “우리는 대한의 독립군/조국을 찾는 용사로다/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백두산 넘어 가자…삼천리 금수강산 지옥이 되어(되어)/모두 도탄에서 헤메고 있다(있다)…” 일제의 말발굽에 신음하는 조국을 찾겠다는 염원을 노래하던 광복군. 그러나 외세에 의한 해방의 소용돌이에서 그들은 무장해제된 채 조국에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이승만정권의 반민족 정책으로 득세한 친일파에게 오히려 탄압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우리 현대사의 첫 단추는 여기서 잘못 꿴 것이라는 주장은 이제 공론화된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오는 1일부터 새로 연재하는 대하역사소설 ‘그래도 강은 흐른다’는 이 굴절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작업이요,역사의 주인공들에 대한 ‘신원(伸寃)운동’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작가 정현웅씨는 “학도병 출신으로 광복군에 합류한 이들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항일정신이 유신정권하의 민주화투쟁과 맥이 닿는다는 시각으로 그려나가려 합니다”라고 첫 말문을 연다. ‘전쟁과 사랑’‘마루타’등 추리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로서는 뜻밖의 발상이다. 작가는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가 미흡하다고 느껴서 이번 작품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하면서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주제라 실제 있었던 광복군과 평양 기생의 사랑얘기를 부각시키려고 한다”고 덧붙인다. 청춘남녀의 사랑을 얼개로 역사라는 큰 물결의 무거움이 만난다면 어떤 얼굴일까. 잘못하면 주제의 진실됨이 애정이야기 때문에 주름질 수도 있다. “리얼리티를 담보하기 위해 학도병에서 광복군에 합류한 10여명의 생존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김구 선생의 경호대장을 지낸 윤경빈씨의 생생한 기억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이나 광복군의 투쟁 등 ‘고난의 연대’를 되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라며 가벼워질지 모를 우려에 대한 계획을 내비친다. 비록 늦었더라도 잘못된 첫 단추는 바로잡아야 한다. 정치,사회 등의 장에서 다잡는게 이론의 몫이라면 항변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건 예술의 몫이다. 소설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서울신문이 새 연재소설 ‘그래도 강은 흐른다’를 선택한 이유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담으려는 작가는 올 가을엔 서주,중경,상해 등 소설의 주요 무대를 다녀올 계획이라고 들려준다. 치밀한 준비에 역사에서 잘못 흐른 강줄기를 잡으려는 작가의 소명의식이 엿보인다. “‘마루타=정현웅’이라는 공식이 부담스러워요. 사실 제가 쓴 소설의 60%는 역사물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일제시대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번 소설에 많은 애정을 쏟으려고 합니다”. 젊은시절 직장을 밥먹듯 바꾸는 방황을 거쳐 80년 소설에 안착한 작가. 민족 정통성 회복이라는 거대 화두를 추리기법이 가미된 흡인력 있는 문체로 꾸려나갈 의욕으로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집필실은 앞으로 수많은 밤을 밝힐 것이다.
  • 헌법정신과 국회상(金三雄 칼럼)

    절대군주제와 식민통치를 거쳐 우리 손으로 헌법을 만들고 헌정을 시작한지 50년이 되었다.봉건적 신민사회에서 신분과 권리가 바뀌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근대적 시민국가로 발돋움한지 반세기가 된 것이다. 헌정 반세기의 역사는 그러나 독재와 반독재 투쟁의 피어린 역정이기도 했다.그 역정의 작용과 반작용의 역학이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로 새 정부가 들어서고서도 국회가 파행을 면치 못하는 후유증으로 남는다. 우리 헌법은 당초 내각제 시안이 이승만의 권력욕으로 대통령제로 바뀐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독재자들의 장식물이 되어 9차례나 뜯기고 찢기는 누더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헌법이란 용어는 중국의 고전에서 유래한다. 중국 고전〈국어(國語)〉의 「진어(晋語)」편에는 ‘상선벌간 국지헌법야(賞善罰姦 國之憲法也)’라 하여 “선을 상 주고 간을 벌하는 것이 나라의 헌법이다”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여졌다.또 에는 ‘능출호령명헌법의(能出號令明憲法矣)’즉 “능히 호령을 내려 헌법을 밝힌다”는 구절이 있다.그리고 에는 ‘헌자법야(憲者法也)’라 하여 “헌은 법이다”는 말이 있다. 이들 고전에 나타난 헌법이란 말을 명법(明法) 또는 엄법(嚴法)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에서는 성덕태자의 〈17조 헌법〉도쿠가와 시대의 〈헌법부류(憲法部類)〉〈헌법류집(憲法類集)〉,복택유길(福澤揄吉)의 〈율례(律例)〉,가등홍지(加藤弘之)의 〈국헌(國憲)〉,이등박문의 〈명치헌법〉등으로 나타난다. ○부끄러운 국회 모습 우리나라의 경우 1894년 제정된 ‘홍범(洪範)14조’에서는 아직 헌법이란 용어가 쓰여지지 않았지만,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임시헌정’이라 하여 헌법의 의미가 함축된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1907년 유진오 박사의 부친 유치형이 처음으로 〈헌법〉이란 교과서를 내고, 1918년 신익희가 보성전문에서 비교헌법을 강의했다. 해방조국은 1848년 6월1일 제헌국회 본회의에서 헌법기초의원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의 선출로 헌법제정 작업이 시작돼 7월17일 마침내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이렇게 제정된 헌법은 독재자들에 의해 누더기가 되고 헌정은 상처투성이의 고난을 겪었다.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50년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분단과 전쟁과 혁명과 쿠데타,그리고 경제건설의 어지러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민주헌정을 지켜왔다.여야 정권교체도 이루었다.그럼에도 우리 정치는 여전히 한심한 수준이다.몇 달째 원 구성을 못하고 국난극복과 개혁의 앞장은 커녕 발목을 잡고있다.권력형 부정사건에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국회의원이 끼어들고 지역감정 조장발언은 국회의원들의 단골 메뉴처럼 되었다. 국민통합과 화합기능은 커녕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한다.정부기관은 물론 공기업과 사기업이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고 있는 터에 유독 국회만은 이를 외면한 상태에서 정쟁으로 날을 지샌다.동해안에 무장간첩이 출몰하고 노동자들이 강경노선으로 선회하는데도 무대책일 뿐인 국회가 제헌 50주년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구조개혁 앞장서라 지난해 외환위기와 증권시장 붕괴를 예측한 바 있는 증권전문가스티브 마빈이 “제2환란이 오고있다”고 경고하고,미국의 여론 주도층은 한국에 투자를 꺼리는 이유를 분단이나 노사불안보다 ‘여소야대 등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을 첫째 요인으로 열거한다.정치인들이 각성 발분해야 할 경고의 메시지다. 정치개혁이 선행되지 않고는 어떤 개혁도 성공하기 어렵다.특히 지금처럼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구조를 그대로 두는 국정개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150만 실업자와 퇴출당사자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미증유의 국난기에 전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채 정당의 하위기관으로 전락하여 선거지원이나 하는 국회라면 문제는 심각하다.제헌절을 앞두고 “선을 상 주고 간을 벌하는 것이 나라의 헌법”이란 헌법의 의미를 새기면서 국회의 분발을 기대한다.
  • 金 대통령 인촌강좌 특강­강의 전문

    ◎“민족의 저력으로 IMF 극복 자신”/올해 고생하면 내년부터 좋아질것/민주주의·시장경제 투명하게 시행/“정경유착·관치금융 뿌리 뽑겠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인촌(仁村) 金性洙 선생의 기념관에서 강의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한국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저명한 이 대학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강의하는 것이 기쁩니다. 고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좋은 길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명예박사학위를 준 것은 앞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구조개혁이 잘 될 것을 알고 그런 것 같습니다.‘아전인수’라는 말을 저럴 때 쓰는구나 하고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경제를 잘 알고 운용하는 데 앞장 서 반드시 성공해 고대에서 학위를 준 뜻에 보답하겠습니다. ▷민족의 저력 강조◁ 우리민족의 저력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동아시아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동아시아를 보면 티벳 몽고 만주 등 전부 중국인데 조그만한 혹같이 붙어있는 게 한국입니다.다른 곳은 중국화됐지만 우리나라는그렇지 않고 남아있습니다.몽고는 중국을 100여년 지배했고 만주족도 1632년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대륙을 270년 동안 통치했지만 그 뒤에는 씨도 없어졌습니다.우리나라는 2000년 동안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 영향을 받고 속국도 되고 조공도 바쳤는 데 왜 속국이 안됐습니까.그 이유가 있습니다.몽고나 만주가 흔적도 없어진 것은 중국의 고급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동화했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재창조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대표적인 고승인 원효가 해동 불교를 일으키는 등 독특한 불교의 경지를 개척했습니다.석굴암·불국사·불교미술·건축 등 전부 한국적인 특색이 있습니다.유교도 그렇습니다.고려 말부터 우리나라 학문을 지배하게 된 성리학도 우리는 조선화했습니다.조선시대의 대학자인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은 성리학을 우리 여건에 맞게 발전시켰습니다.퇴계선생의 성리학에 대한 학문세계는 세계에 널리 퍼져있습니다.성균관 중심으로 매년 20개국에서 모여서 연구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조상들에 대해 경탄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러한 게 우리에게 큰 저력이 돼서 현재 한반도에 7,000만명이 살고 있습니다.우리는 음식·말·의복 모든 것이 독특한 한국적인 문화 민족입니다. 저력의 두번째는 교육열입니다.우리나라와 같은 교육열을 가진 민족은 유대민족입니다.유대민족은 정말로 지독합니다.공부잘하면 돈을 주고 음악을 잘해도 지원해 주는 게 유대민족입니다.부모님들이 공부 못하는 자녀를 때리는 게 유대민족입니다.하버드대학은 유대인으로 넘칩니다.이 대학에는 수를 제한할 정도로 한국인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습니다.상민들은 과거를 볼수도 없었지만 공부를 했습니다.과거시험은 못치르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사람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자식들은 가르쳐야 한다.내 세상은 못살지만 자식들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지금도 그렇지만 6·25 전쟁중에서도 논밭 팔고 소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험한 일을 한 여성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교육열은 한해 두해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우수한 인적 자원을 만들어낸 토대가 됐던 것입니다.조상들에게 감사합니다.지금은 지식의 시대입니다.이러한 교육열은 엄청난 힘이 됩니다. ○21세기엔 정보가 중요 저항의식도 중요합니다.고려시대 몽고가 침략했을 때에도 삼별초가 망할 때까지 40년간 싸웠습니다.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몽고나 만주족이 중국에서는 직할통치를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실질적인 독립을 줬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일제시대를 보면 우리 민족의 저항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만주 시베리아 대륙으로 가서 40년간 무장투쟁을 했습니다.식민생활 전 기간중 무장투쟁을 한 것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1919년 임시정부를 만든 뒤에도 계속 싸웠습니다.이것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입니다.공산주의와 싸워서 격퇴한 이유도 이런 것입니다. 한(恨)은 한국 사람의 특별한 정서입니다.한은 민중,국민들이 좌절된 소망을 안고 이를 이루려고 몸부림치는 심정입니다.어떻게든 잘 살아보자,나는 못살아도 자식들은 잘 살게 하자는 게 이러한 것입니다.우리의 명당은 현세에서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내세는 없습니다.민족의 대표적인 이야기인 춘향이의 한은 이도령과 사는 것입니다.춘향은 어려움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한국인은 이러한 한의 정서를 갖고 있는 민족입니다.심청이는 옥황상제가 살려서 황후가 됐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아버지 눈을 뜨는 것을 보고서야 한이 풀렸습니다.한의 정신은 국제통화기금(IMF)도 극복하고 분단도 극복해 선진국가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특색입니다. ▷민족의 장래◁ 다음은 우리 민족의 내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21세기에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20세기는 조직적이고 단합된 일사분란한 힘이 필요한 때입니다.우리나라는이러한 능력은 부족합니다.자본 노동력 자원 등을 손에 쥘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하지만 21세기는 정보 두뇌 등이 중요합니다.미국의 빌 게이츠를 최근에 만났는데 그는 미국 사람이지만 키도 크지 않았습니다.얼굴도 대단이 특색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하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와 두뇌로 재산이 500억달러가 넘는 부자가 됐습니다.그는 정보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구는 2억5,000만명입니다.만약 룩셈부르크에 빌 게이츠같은 사람이 10명만 있으면 미국보다 우수할 수가 있습니다.21세기에는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아야 됩니다.이런 점에서 우리는 21세기가 20세기보다 유리합니다.문화민족이고 교육민족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전력을 다해서 소질을 개발해야 합니다.현재 국내에는 대학도 많고 학생도 많지만 대학수준은 세계와 너무 벌어져 있고 또 큰 성과도 없습니다.교육이 입시위주여서 창의력 발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반드시 교육개혁을 해서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는 인력을 키우도록 하겠습니다.그래야 선진대열에 당당히 나갈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 발전시켜야 합니다.제대로 했더라면 IMF도 없었을 것입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하지 않으니까 권력과 경제가 결탁됐던 것입니다. 국민들이 유리창속을 보듯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게 투명하게 이뤄지고 기업들도 경쟁을 통해 돈벌려고 전력을 다했더라면 IMF사태는 없었을 것입니다.정부가 은행의 주식을 한주도 갖지 않고 있으면서 은행장을 임명하고 한보그룹에 억지로 대출해 부실 대출을 늘린 게 과거 정부였습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잘됐다면 국민이 지금처럼 수 십조원의 부담을 지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하는 게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을 없애는 길입니다. 국민정부에서 기업인들의 활동은 자유롭습니다.정부는 어떠한 간섭이나 지배도 하지 않고 위협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정부에 잘못 보이면 지장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30대 재벌 회장들에게도 말했었습니다. 재벌회장들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열심히일해서 이익을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적자를 내면 은행도 망하고 국민의 부담이 늘기 때문입니다.흑자를 내서 세금내는 게 애국자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수출을 많이 하면 애국자고 그렇게 하면 대통령은 재벌회장들을 업고 다니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정치인에게 과거 정부처럼 자금을 줄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주고 싶으면 법대로 하도록 했습니다.야당에게 줘도 아무일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투명하게 할 것입니다. 정치가 경제와 유착하거나 은행을 좌지우지하면 나라가 망합니다.우리 경제를 세계 경제 수준에 올리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결심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남북문제◁ 남북문제도 중요합니다.남북의 평화공존과 협력을 해나가야 합니다.통일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평화를 이루고 협력해서 사는 게 필요합니다.손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 무력도발 불용과 북한 흡수통일 배제,교류와 협력 등 대북(對北) 3대 원칙을 밝혔습니다.미국을 방문해서도 밝혔습니다.대만의 수 천개 기업은 중국에 합작 진출해 서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무력도발은 용납 못해 현대그룹이 소끌고 간 것은 교류와 협력이 바람직하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입니다.鄭周永 명예회장은 세계에서 나보다 더 유명합니다.금강산개발도 잘되기를 바랍니다.무력도발이나 남한을 전복하려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음지 구석구석에 있는 악한 것을 죽이는 것도 햇볕입니다.확고한 자세로 안보태세를 갖추고 한편으로는 동족의 입장에서 화해를 하고 북한도 잘되도록 유도하겠습니다.통일은 좀 늦더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게 필요합니다. 경제를 다시 발전시키는 것은 세계로 가는 중요한 조건입니다.인내심과 성의,확고한 결의를 갖고 남북문제에 대처할 것입니다.완전히 장담하지는 않지만 3대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난 극복과 국민에 대한 당부◁ 경제난 극복에 대해서는 바르게 가고 있습니다.가용 외환 보유고는 대통령에 당선될 때에는 38억7,000만달러였지만 지금은 369억달러입니다.올해 무역수지 흑자는 400억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 됩니다.다시는 외환위기가 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금융개혁·기업개혁·공기업개혁·노동의 유연성을 반드시 해야합니다.정부가 앞장서서 공기업개혁을 할 것입니다.가장 중요한 게 은행입니다.그래서 은행을 개혁하고 있습니다.은행들은 부실한 기업은 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입장에서 은행을 간섭하고 지도할 권한과 의무가 있습니다.정부가 앞장서서 개혁 모범을 보이겠습니다.국민들도 올해는 피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금모으기 운동은 1∼2개월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꾸준히 해야 합니다.맨날 금만 낸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지나면 해이해지는 것은 없어야 국난을 국복할 수 있습니다. ○4대 개혁 반드시 추진 국민들은 최대한 개혁에 협력해 경제와 개혁이 잘되도록 해야합니다.절약도 하고 사회안정을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올해는 고생하겠지만 내년부터는 좋아질 것입니다.내년 후반부터는 이 나라가 좋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IMF관리에서 벗어나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내후년부터는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태평양의 기적을 국민들과 합심해서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내일의 희망된 개혁을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국민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랍니다.고통도 분담하면 성과도 분담한다는 원칙을 지키겠습니다.소신을 갖고 반드시 국민들이 이 나라 장래에 희망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 아이디어 백출

    ◎총리실 “성에 안차” 특별팀 가동/국위선양 1만8,250명 이름새긴 조형물 제안/1,000만명이 1,000원씩 100억원 모금 기념탑도 국무총리실 직원들이 불꽃튀는 ‘아이디어 짜내기’ 경쟁에 돌입했다.정부 수립 50주년 기념사업 아이디어를 내라는 金鍾泌 국무총리 서리의 특별 지시에 따른 것이다.행자부가 지난 24일 발표한 ‘전국 순회 태극기 이어 달리기’ 등 50가지 행사계획이 미흡하다는 金총리서리의 의중을 엿보게 한다. 총리실은 이에 따라 이번주 ‘아이디어 개발 태스크 포스’를 발족할 계획이다. 金총리서리의 주문은 프랑스의 에펠탑이나 미국의 자유여신상처럼 후손에 길이 남겨줄 기념비적인 상징조형물을 만들라는 것이다. 金총리서리는 지난주 초 청와대 주례보고를 마치고 돌아와 ““행정자치부가 낸 기념사업 계획을 갖고는 안된다”고 지적했다.金大中 대통령과 金총리 서리가 ‘행정자치부의 계획안이 탐탁치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金총리서리는 “지난 반세기를 정리하고 앞으로 다가올 반세기를 여는 비전을 제시하는 이벤트나 조형물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 시절의 임시정부 요인 유해봉환에 버금가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라는 지시이다.지역 세대 계층을 통합해 한 덩어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총리실 직원 250여명은 지난주 각각 1건씩 아이디어를 제출했었다.이 아이디어 중 우수작은 이번주중 상을 주고 인사고과에 반영할 방침이다. 당시에도 경쟁은 치열했다.국장이 부하 직원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도 대리 작성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일도 있다.상사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공직사회에서 드문 일이다. 직원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아이디어 가운데는 1,000만명이 1,000원씩 내는 모금운동으로 100억원 기념탑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완공은 2000년 1월1일이나 그 해 8월15일에 하자는 것이다. 1만8,250명의 국위선양 인물의 이름을 새긴 기념탑을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다.1년 365일동안 매일 국위 선양 인물을 50년동안 배출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총리실은 이미 제출된 아이디어와 새로 출범하는 태스크포스가 내놓는 것을 종합,눈에 번쩍 뜨이는 사업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다.
  • 白凡 재조명:4·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위대한 白凡사상 새정부서 법통 계승”/통일염원 안고 넘었던 38선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려/京橋莊 반드시 복원… 문화재로 지정 영구보존 해야 서울신문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 일환으로 백범 金九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면서도 잘못된 평가를 받아온 金九 선생을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통해 일그러진 현대사와 가치관의 혼돈을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金九 선생의 업적·사상·통일론 등과 이들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백범 재조명을 마무리하는 좌담회를 통해 알아본다. 서울신문 金三雄 주필의 사회로 열린 좌담회에는 金九 선생 아들 金信 장군,저명한 백범연구가인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과 李萬烈 숙대교수(한국사 전공)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金信(金九 선생 아들) 金祐銓(전 광복회부회장) 李萬烈(숙명여대 교수) 金三雄(사회·주필) ▲金三雄 주필=金九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은지 50년만에 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정황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명예회장이 다시 간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백범이 서거한지 거의 50년만에 백범노선과 같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정경분리·상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물꼬가 트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중 미국도 대북 제재중 일부를 해제할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국제환경과 남북관계의 이러한 변화로 백범노선을 실천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백범사상과 통일론 등에 대해 우선 논의해 보죠. ○좌·우파 모두 포용… 문화국가 건설 ▲李萬烈 교수=백범은 동학·유학·불교·기독교 등을 섭렵하며 그들을 민족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완전히 용해시켰습니다. 다원적 종교가 있는 사회에서 여러 종교를 민족주의로 수렴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죠. 백범은 또 좌파세력과 민족주의 우파의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한 포용력을 배경으로 독립과 통일,더 나아가 문화국가 건설을 지향했습니다. 통일이 안되면 완전한 자주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차원 더 높은 문화국가는 더욱 어렵다고 인식했죠. 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은 임시정부를 27년간이나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예는 세계사에도 없는 일이죠. 독립운동사에서 백범의 역할과 위치는 어떻습니까. ▲金祐銓 부회장=임시정부에서 백범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화신이었죠. ▲金주필=그러나 백범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李교수=백범 반대세력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죠. 통일지향 세력이 아니라 남북분단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묵살했습니다. 집권세력은 백범의 업적도 평가절하했죠. 백범에 대한 잘못된 평가의 긴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金주필=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후에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죠. 해방공간에서 백범이 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金부회장=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은 잡았으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었죠. 5·10선거 후에도 국회에서 金九 선생 지지가 많았어요. 남북협상 때도 108명의 문화인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金九 선생이 돌아가신 후 반대파가 정권을 잡아 빛을 보지 못한것 뿐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백범을 본 오류의 결과입니다. ▲金信 장군=주도권 문제와 관련,金부회장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어요.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강요로 개인 신분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다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반발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죠. 친일세력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판단아래 똘똘 뭉쳤습니다. 일본에 아부했듯이 그들은 미군정에 아부했고 李承晩에게도 아부했습니다. 李박사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죠.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가족에게 고통을주고 개인과 조상을 희생하면서 싸워온 독립투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때 친일파 형사들에게 잡혀갔던 독립투사들이 해방후에 다시 그들에게 잡혀가는 기막힌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친일세력들은 해방후 당연히 벌을 받고 독립투사들은 보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됐죠. 그때 잘못된 역사 청산작업 때문에 현대사가 일그러진 것입니다. ▲金주필=백범은 분단을 거부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습니다.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남북지도자 공동성명 발표 큰 의미 ▲金부회장=남북협상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대표자 연석회의는 북측의 각본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지만 백범이 관심을 가진 것은 남북지도자 회담이었어요. 金九 선생,金奎植 박사,金枓奉,金日成 등 4명의 지도자들은 4월30일 회담후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죠. 공동성명은 전문과 4개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명시하고 있어요. 남북지도자가 만나 공동성명까지 발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도 적극 반대 ▲金장군=평양에서 아버님이 연설하실 때 남쪽만의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한다고 말씀하시자 열렬한 공산당식 박수가 터져나왔죠. 그러나 북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고 하시자 장내는 조용했습니다. 북쪽만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는 것은 언론에도 일체 보도되지 않았어요. 북측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내용만을 발표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 정신을 오늘의 상황과 어떻게 연계시킬수 있을까요. ▲金장군=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뿐만 아니라 좌파와 무정부 인사도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충칭(重慶)으로 옮겨왔을 때도 연합정부였죠. 연합정부였던 임시정부의 법통과 아버님의 통일론을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립운동 때도 독립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일은 비현실적이라는 비관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립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통일도 지금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金주필=임시정부는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승국으로 대접받고 전후 처리문제에서도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그러나 연합국은 그러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李교수=프랑스는 소극적이나마 임시정부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영국 등은 인정하지 않았죠. 미국은 임시정부가 분열돼 있기 때문에 어느 정부를 인정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사실은 독립운동때 임시정부가 중국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때문이었죠. ▲金주필=시해되던 날은 일요일이었는 데도 金信 장군은 그날 옹진에 가셨죠. 암살음해 세력이 金장군을 떼어놓기 위한 음모는 아니었나요. ▲金장군=유엔대표단과 함께 갔었습니다. 그러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어요.어떤 음모가있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양에서 돌아온 후 암살에 관한 여러가지 풍문이 많았고 그것들을 여러차례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돌아가시기 이틀전에는 박동엽씨 등 2명이 경교장으로 찾아와 보다 안전한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말도 했어요. 그말을 아버님께 전했으나 나는 떳떳하며 겁낼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념관 건립·학술상 제정 등 절실 ▲金주필=새정부의 탄생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법통계승과 백범사상을 이어받을 사업을 추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백범 기념관 건립,전집 출판,학술상 제정,백범과 3열사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 성역화 작업 등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념관 건립과 관련,李교수께서 말씀해 주시죠. ▲李교수=백범 기념관은 꼭 필요합니다. 서거 50주년(1999년)이나 2000년의 새 세기가 시작되기전 기념관이 지어져야 합니다.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기념관을 지을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자리일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곳은 통일로의 출발점입니다. 백범의 독립과 통일정신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죠. 효창공원도 국립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망월동 묘지는 이미 국립묘지 수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효창공원이 국립묘지 수준이 안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金주필=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문제는 어떻습니까. ▲金부회장=영구 보존을 위해 우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金주필=백범을 기념하는 독립상과 통일상 등을 만들면 어떨까요. ▲李교수=좋은 생각입니다.그러나 셋방살이도 꾸려가기 힘든 백범기념협회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죠. 상을 만들려면 백범의 이상인 독립국가·통일국가·문화국가를 상징하는 독립·통일·문화상을 만들고 차차 확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金주필=金九 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 등이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 제2건국이라 할 수 있는 金大中 대통령 정부에 의해 이땅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남북의 화해와통일로 이어지도록 모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 白凡 재조명:3­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일지/진솔한 필법… 自傳문학의 古典/벽촌 출생서 임시정부 주적까지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20여종 출간 상당수가 오류/97년 都珍淳 교수 定本 출간 백범일지는 金九 선생의 자서전이다.그의 생애와 사상을 진솔한 육성으로 기록한 20세기 전기문학의 고전이다.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있던 그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백범일지를 썼다고 밝혔다.황해도 벽촌의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오른 민족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다.백범일지는 여러 단체·기관에서 추천 도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 있다.상권은 1928년 2월과 3월 사이에 집필을 시작,다음해 5월3일에 마쳤다.하권은 1942년에 탈고했다.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는 백범의 독립을 위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백범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원문은 국한문 혼용체다. 백범일지는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발간된 이후 20종 이상이 출판됐다.그중 상당수가 오류와 탈락으로 원본이나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그러한 오류를 수정하고 누락된 부분을 보완한 백범일지가 첫 출간 50주년이던 1997년에 출간됐다.숙명여대 李萬烈 교수,창원대 都珍淳 교수 등의 ‘백범일지’다.都교수는 백범의 친필본(94년 집문당에서 영인),백범 아들인 金信 장군이 갖고 있는 필사본,백범의 측근이던 엄항섭씨가 만든 등사본,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씨의 필사본,국사원본,서문당본 등 중요한 출간본들을 비교·검토하여 백범일지 정본(定本)을 4년간의 작업 끝에 출간했다. 都교수는 변변한 자료나 보조원 없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집필했기 때문에 원전의 서술에서도 시기·인명·지명 등에 착오가 많다고 설명했다.그는 원문에 있는 오류를 각종 사료를 통해 보완했으며 난해한 문장은 읽기 쉽게 풀어썼다. 백범일지는 중국어와 일본어 판으로도 출판됐다.대만에서는 70년에 출판된 이후 20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중국에서도 94년 4,000부가 발행되어 매진됐다.중국은 곧 백범일지를 추가 발행할 예정이다.일본어백범일지는 73년에 발행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다.미국에서도 영어판 백범일지가 올해 발행될 예정이다. ◎어린이 백범교실/청소년 민족캠프/조국 사랑 심는다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은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했다.그는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의 교육을 강조했다.그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식 조국사랑 등을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건전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하는 프로그램이있다.‘어린이·청소년 백범교실’과 ‘청소년 백범 민족캠프’다. ‘청년백범 교사모임(대표 안성균 대광중학 선생님)’은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후원을 받아 1992년 어린이·청소년 백범교실을 열었다.매년 여름·겨울방학에 한차례씩 지금까지 12회 교육을 실시했다.교육기간은 3일이며 한번에 초등학생 40명이 참여했다. 교육은 효창공원 옆에 있는 백범기념협회 강당에서 주로 실시돼 왔다.프로그램은 金九 선생에 관한 슬라이드 상연과 강연,효창공원 선열묘소 참배,독립군가 배우기,전통예절 배우기,심성훈련 등 다양하다. 청년백범 교사모임은 96년 여름방학 때부터 청소년 백범 민족캠프도 마련했다.교실을 떠나 자연속에서 백범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교육 내용은 백범교실과 비슷하지만 보다 다양하다.40명의 초등학생이 참가한다.첫번째는 속리산 보람원에서 두번째는 97년에 포천에 있는 베어스타운에서 열렸다.올 여름방학에도 7월27일부터 29일까지 베어스타운에서 캠프가 열린다.참가자격은 초등학교 4학년∼6학년 학생이며 선착순 마감이다.백범기념협회의 홍소연 총무주임은 “어린이들의 반응이 좋아 공고가 나가면 보통 하루만에 마감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앞으로 중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안성균 교사모임 대표는 “金九 선생의 생애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조국사랑과 통일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그밖에 우리 문화,전통예절,공동체 생활 등 교육은 민족문화에 눈을 뜨고 좋은 인간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석규관 선생·곽태영 의장/‘백범일지’ 30년간 무료 보급/사재 털어 구입… ‘1가정 1권’될때까지 석규관선생(63)에게 백범일지는 ‘바이블’이다.그는 백범일지를 경전이라 부른다.중국어를 가르치는 그의 가방엔 중국어책과 함께 백범일지가 언제나 들어 있다.백범일지를 나누어주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생활의 한 부분이다.그와 함께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다.곽태영(63) 4·19혁명회 공동의장이다.그는 65년 안두희를 비수로 찌른 사람이다.백범기념사업협회 상임이사를 맡기도 했다.그들은 68년 ‘백범독서회’를 만든 후 30년 이상 백범일지 무료보급운동을 하고 있다.백범독서회 회장은 곽태영 선생이 맡고 석규관 선생은 운영위원장이다.김용삼·김삼열씨 등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그들은 사재를 털어 학교 도서관이나 개인들에게 백범일지를 나누어주고 있다. 곽태영 선생은 70년대 백범일지 7,000부를 사재로 구입,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석규관 선생은 오랫동안 자신의 월급에서 반을 떼어내 백범일지를 구입한 후 나누어주었다.그는 80년대 초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등에게 거의매달 2,000여부를 나누어주었다.79년부터 83년까지 대만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학원과 대학 등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백범사상도 함께 가르쳤다.백범독서회 사람들은 6월26일 백범서거 49주년 행사에서 3,000부를 나누어줄 예정이다.지금까지 나누어준 백범일지는 5만부가 넘는다.그들은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에게도 훈련소에서 백범일지를 나누어주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그들의 더 큰 소망은 ‘1 가정 1 백범일지’의 꿈을 하루 빨리 실현하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 李昌淳·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국립묘지·열사릉 교환참배(김삼웅 칼럼)

    ○유족 상호방문 성묘토록 남한이나 북한이나 일제시대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을 모시는 성지가 있다. 우리는 서울 동작동의 국립묘지가 있고 북한에는 평양근교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이 있다.서울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는 상당수의 항일지사가 묻혀있고 1995년에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이 새로 조성되었다.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선생 등 임정요인 44명의 유해가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1986년 9월 완공된 평양의 애국열사능에는 김규식 조소앙 오동진 양세봉 최동오 홍명희 이기영 선생 등이 묻혀있다.이곳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된 조봉암 선생의 가묘도 있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 줄기 43만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동작동국립묘지는 조선조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던 곳으로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듯한 상서로운 기맥이 흐른다는 명당으로 꼽힌다. 평양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애국열사릉은 오목한 분지가운데 돋아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알려진다. 국립묘지와 열사릉의 풍수지리를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다.새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고 각계 인사들의 방북의 발길이 잦아진다.리틀엔젤스의 평양공연에 이어 재벌총수도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다고 한다. 국가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조국해방을 위해 한마음이 되어 항일전선에 섰던 선열들이 분단과 함께 남북으로 갈리고 사후에는 ‘이산가족’이 된 것도 비극인데 자손들이 성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애국선열에 대한 국민의 도리를 생각해서라도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들의 유족이 교환방문을 통해 성묘할 수 있도록 남북한 정부가 길을 터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현재 북한에 생존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의 유족으로 남한에 생존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남북한 정부나 양측 적십자사가 나서서 뒤늦게나마 유족이 선대(先代)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할 수있도록 하는 것이 참다운 보훈의 정신이고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항일지사는 민족동질성의 원형 분단 반세기를 넘기면서 남북한 사이에는 각가지 이질적 요인들이 켜켜히 쌓여가고 있다.이런 속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찾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쟁과 항일지사들의 존재가 아닐까 한다.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도 풍광좋은 터를 골라 애국지사들의 묘역을 만들고 성역화하는 것도 이런 연유때문일 것이다. 남북한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보훈정신에서,그리고 인도주의와 겨레의 동질성 회복차원에서 이 일을 조속히 성사시켰으면 한다.그리하여 오는 광복절이나 늦어도 추석에는 남북의 애국지사 유족들이 판문점을 넘나들며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조상을 찾아 참배하고 성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白凡 재조명:2­2(정직한 역사 되찾기)

    ◎백범 사상/“민족만이 영원할 뿐”/열린 민족주의 바탕 인류의 평화 역설/문화의 힘 드높은 ‘아름다운 나라’ 소망 백범이 바라는 한국의 미래는 아름다운 문화국가였다.그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높은 문화의 힘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의 힘과 가치를 강조했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사랑의 문화평화의 문화로 우리와 인류전체를 잘 살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범사상은 이러한 문화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백범연구가들은 분석한다.그의 사상은 ‘백범일지’ 끝부분에 있는 ‘나의 소원’에 잘 나타나 있다.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을 두루 포용했다.그의 종교·사상은 민족애로 수렴됐다.백범일지에서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민족만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백범은 독립운동과 해방후 민족통일 노력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했다.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민족주의는 저항 민족주의였다.그러나 저항 민족주의는 식민통치라는 시대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민족과 민족관계,국가와 국가관계는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족주의의 최대 과업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다.피압박 국가의 독립이 궁극적으로 세계평화의 기본적인 전제다”라고 말했다.백범의 민족주의는 이 때문에 유럽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다르다.자유의 존중과 독재의 배격을 강력히 내세운 민주적 성격을 담고 있다.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열린 민족주의다.백범의 민족주의를 종족관념 또는 저항 민족주의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백범 민족주의의 원류는 열린 민족주의다. 백범은 보편성을 갖는 민족주의와 함께 자유의 소중함을 강조했다.그는 백범일지에서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자유다”라고 표현했다.백범이 말하는 자유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야 한다’는 주권재민 사상과 연계된다.“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을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렸다.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온다”고 백범일지는 강조하고 있다.자유 아님의 대표적 예는 계급독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로 보았다.소련식 공산당을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는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는 독재를 막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범의 민족주의·자유주의·문화주의는 각각 별개의 사상이 아니다.큰 틀속에 하나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백범 사상의 이상은 열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나라의 자주독립과 문화의 힘을 통한 인류의 평화라 할 수 있다.그 이상을 실현하는 열쇠는 자유의 보장이다. 세계는 그의 이상대로 문화의 힘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미래학자들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백범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中國 피난처·臨政청사 복원 金九 선생이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있던 중국의 자싱(嘉興)은 우리에겐 잊혀진 도시였다.그가 일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듯이 자싱은 우리의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망각의 도시가 아니다.金九 선생이 숨어있던 집이 유적으로 복원되며 우리곁으로 돌아왔다. 백범은 19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이후 일본경찰의 추적이 집요해지자 상하이(上海)에서 서남쪽으로 80㎞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자싱으로 피해왔다.그는 자싱에서 추풍청(저보성)씨가 마련해준 집에서 은신했다.그곳은 추씨의 수양아들 별채였다.백범은 일본 정탐꾼이 자싱까지 오자 하이옌(海鹽)으로 피신했다. 중국정부는 96년 백범이 약 2년간 숨어있던 두 곳을 복원해 유적지로 지정·관리하기 시작했다.자싱에 있는 백범 유적지는 메이완 거리에 있다.2층 건물 현관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한자로 쓴 녹색간판이 붙어 있다.백범이 당시 접견실로 썼던 1층 벽에는 백범과 그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추씨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2층에는 침대와 옷장 등이있다. 하이옌에 있는 피난처는 주쟈루이씨 집안의 별장이었다.주쟈루이씨는 백범을 하이옌으로 피신시킨 추씨의 장남 펑장(鳳章)의 부인이다.펑장씨는 자신의 부인을 백범의 부인으로 위장시켰다.대나무숲 속에 단장돼 있는 유적지에는 백범의 흉상과 함께 ‘김구 피난처’라는 한자 간판이 있다.전시실에는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추풍청,주쟈루이 등의 경력과 활약상을 담은 각종 사진과 자료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金九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해외독립운동 구심점이었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도 93년 복원됐다.청사는 26년부터 7년동안 사용했던 3층 연립주택이다.삼성물산 등의 지원으로 61년만에 복원된 청사는 1층 회의실·접견실·부엌,2층 국무령 집무실과 직원사무실,3층 요인숙소 및 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실과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했던 책상·의자 등 집기와 비품이 갖춰져있다.3층 전시실엔는 尹奉吉 의사의 의거장면 등 독립운동관계 사료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임시정부는 32년 李奉昌·尹奉吉 의사의 의거후 일제의 탄압과 추적공세가 강화되자 상하이를 떠나 유랑하다 40년 충칭(重慶)에 정착했다.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충칭의 청사도 95년 복원됐다.중국은 백범이 경계한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그의 독립운동과 민족사랑을 높이 평가,그의 발자취를 복원했다. ◎국민의 힘으로 기념관을/과거 집권층 왜곡­평가절하 탓/애국혼 깃들일 곳 없이 반세기/26일 종합계획 발표… 내년 기공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다.그러나 사후 반세기나 지났지만 그의 국내 발자취는 여전히 망각의 역사속에 묻혀 있다.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은 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기념관도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鮮于鎭 상무이사는 “기념관 건립과 발자취 복원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그의 위업을 왜곡하고 평가절하했던 집권층과 잘못된 사회풍토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협회는 그러나 기념관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金泳三 전 대통령 집권때인 96년 8월14일에는 발기인대회도 열렸다.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金九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담당 비서관까지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기념사업협회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이후 기념관 건립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金대통령은 金九 선생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어 기념관 건립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鮮于이사는 말했다. 그러나 건립기금과 장소선정 등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鮮于이사는 “국민성금과 정부지원으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러나 IMF시대의 경제난 때문에 성금 모금운동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그는 말했다. 장소도 문제다.金九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을 선정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고 기념사업협회측은 말한다.기념사업협회는 金九 선생 서거 49주년인 6월26일에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발표할 예정이며 서거 50주년인 내년에 기공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기념관은 총건평 1,200평의 지상 3층 건물로 구상되고 있다.1층은 유물 전시실,2층은 자료실·도서실·사무실,3층은 국제회의장·소회의실·영사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념관 건립은 金九 선생의 사상이나 업적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민족교육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실현돼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그들은 범국민운동을 펼치고 정부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金九 선생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 대한민국 정통성 토론회 주제발표

    ◎대한민국은 臨政 법통성 계승 건국 50주년을 기념하여 3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정통성’ 대학술토론회에서 첫번째 주제발표에 나선 성신여대 李炫熙 교수의 발제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요약 소개한다. ○민족사 정당한 계승자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가로서 큰 의미를 갖되 3·1혁명으로 李東寧 등에 의해 1919년 4월13일 상해에서 수립 선포된 임정(臨政)의 정부로서 독립운동정신과 홍익인간적 창조의 전통을 계승하여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한 우리의 자주적인 정부수립운동의 성과였다. 수립 초기부터 광복때까지 27년간 上海시대­이동(移動)시대­重慶시대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국내의 민족독립세력을 수렴,통합하며 구심점과 대표성을 견지한 채 광복투쟁의 방향을 제시 집행하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45) 27년사는 그것이 뒷받침이 되어 1945년 8·15 민족의 광복을 스스로 쟁취할수 있었다.그것은 임정이 내정(內政)교통 군사 외교 문화 재정 사법의 광복정책을계획 실시하여 8·15의 광복을 쟁취했고,그 맥락을 이어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연면히 이어 내려온 우리 민족사의 정당한 계승자로서의 법통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 건국사는 비록 제약성은 있었으나 이전의 군주제를 청산하고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제를 개시한 임정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겠다. ○민주건국사 임정서 비롯 그러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별개의 맥락이 아니다.제헌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을 통해 3·1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그 전문에 극명하게 천명하여 임정의 법통성을 자유민주이념 선상에서 묵시적으로 명시하였고,그뒤 1988년 제9차 개헌 헌법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연결한다’고 문서적으로 명시하여 대한민국이 건국한 사상적 이념적 정통성의 현주소를 재확인,인식하게 조치되었다. 또 대한민국은 임정의 주요 애국인사들이 지도자로서 재등장하여 사상,이념에 이어 인적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우선 대통령 李承晩은임시정부의 대통력직을 역임하였고(1919∼25),미주,하와이 등지에서 임정의 구미위원부위원장으로 열성적인 강·온 양면에서 임정과 연계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또한 선비형의 지사 부통령 李始榮은 임정 27년 동안 시종일관 법무 재무 등 입법부 요직을 역임한 법통성과 함께 임정의 산 역사였다. ○임정인사 요직 재등장 이외 이범석,지청천,허정,임병직,윤보선,김현철,조병옥,윤치영,임영신,유일한,정운수 등도 임정출신으로 대한민국 정부 요직을 받았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이준식,채원개,유해준,안춘생,박영준,김국주,박시창,박기성,장호강,공군의 김신 등 광복군의 지휘관급 인사도 거의 8·15이후 한국군의 지휘자로 맥락지어져 광복군 역시 한국군의 뿌리로 연결되고 있다. ○건국 50돌 민족통일 과제 이처럼 대한민국은 인적인 맥락과 함께 임정의 법통성을 제도와 정신으로 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의정치와 자유시장 경제원리를 채택한 합법적인 국가로 출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우여곡절속에서 경제적 발전과 성숙된 민족의식을바탕으로 사회건설과 문화발전에 매진하면서 1998년 8월15일,건국 50주년에 이르고 있다.그러나 우리에게는 임정 이래 통일달성이라는 민족사적으로 해결해야할 큰 과제가 남아있다.진정한 선진화,세계화를 향해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화적 통일방안의 실천을 통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건국 50주년을 기해 이를 위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여 세계속에서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다시 열어야 할 것이다.
  • 백범 金九의 현재적 의의/李萬烈 淑大 교수·한국사(기고)

    백범 金九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의 한 분이다.그는 최근 어느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복제(複製)하고 싶은 인물중 최다수를 얻었던 데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손수 쓴 ‘백범일지’가 수십종의 판본을 갖고 있으며 광범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범은 존경을 받은 만큼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그에 관한 연구는 미미하고 묘소에는 참배객이 거의 없으며 기념사업회는 셋방살이를 면치 못한채 역대 정권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해방 후 우리사회를 주도해 온 기득권층과 분단세력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제도언론은 철저하게 그를 소외시켰다.다음 사례들은 이를 증명한다. ○제도언론 백범 연구 외면 지난 4월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주최로 ‘남북협상 50주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1948년 4월 하순에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개최되었던 ‘남북협상’이 50년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소개되는 순간이었다.남북협상이 당시 비현실적이었다 할지라도,민족사적으로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역사의식을 말할 수 있는 언론이라면,그 강연회를 적어도 취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그러나 어떤 언론기관이나 정부 관계자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작년 10월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백범 김구선생 탄신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도 마찬가지였다.대회장이 꽉 메워졌지만 언론기관이나 정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때 학술대회 사회를 맡았던 필자는 청중들을 향해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백범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 백범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하던 해 백범의 기일(忌日) 아침 일찍이 효창공원의 백범묘소를 참배했다.전·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다.金 전대통령은 백범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때 담당 비서관까지 지정했으나,그뒤 어떠한 계획이나 진척도 보여주지 않았다.이렇게 된 것이 그의 뜻이었는 지,그를 보필하는 관료들의 반대 때문이었는 지 확인할 길이없다. 백범은 민족독립운동과 통일국가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도자다.그의 사상은 조국의 ‘완전자주통일독립’과 ‘문화국가’의 실현으로 요약된다.완전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이 급선무요 필요조건이다.통일 없이는 완전자주독립은 물론 문화국가를 실현할 수 없다.우리시대의 민족사적 과제는 백범이 실현하려다 중단된 그같은 이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함에 있다.그래서 백범사상은 우리시대가 실천해야 할 민족사적 과제의 정확한 목표다. 백범은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좌우의 독립운동단체 및 정파간의 협력과 일치를 일궈냈다.해방 후 완전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반탁운동에 앞장섰던 그가,조국이 두 동강으로 쪼개질 급박한 상황에서는 과거의 찬탁세력과도 협력하여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분연히 일어섰다.이렇게 완전자주통일독립을 위해 협력과 공존을 구사하던 그의 방략은 이데올로기와 혈연·지연 등에 의한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에 따가운 경종이면서 좋은 귀감이다. ○통일없이 완전 독립 없다 우리세대가 민족사에 기억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일을 이룩하여 완전자주독립과 문화국가의 이상을 실현해 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백범은 남북,동서의 겨레 전체가 우러러보면서 귀감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승이요,민족적 지표를 제시한 지도자다.바로 여기에 그의 현재적 의의가 있고,오늘의 입장에서 그를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5·10 제헌국회총선 의미/徐仲錫 성균관대 교수·사학(특별기고)

    제헌국회총선거가 오는 10일로 50주년을 맞는다.1948년 5월10일 치러진 5·10선거는 분단을 고정화하였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가짐과 동시에 역사상 최초로 보통선거를 통하여 민주공화국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역사상 첫 보통선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치열해짐에 따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 어려워지자 그해 9월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서 다룰 것을 제안하였다.그리하여 국제연합 총회에서는 11월14일 남북 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과 가급적 조속히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미소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다.그러나 예상한대로 소련과 북측은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이 38도선을 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국제연합 소총회에서는 1948년 2월26일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선거 실시를 건의하여,미군정에 의하여 5월10일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5·10선거에는 각 정치세력의 폭넓은 참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한국은 그때까지 분단을 경험한 적이 없어 한반도에는 하나의 단일 민족국가만이 존재하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통일정부의 수립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좌익은 단선단정 반대운동을 격렬히 벌였다.金九 金奎植 등 민족주의자들은 남한만의 선거는 미소가 획정한 38도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시키는 행위이고,따라서 남과 북에 들어서는 정부는 미소의 영향력 아래서 자주성을 갖기가 어렵고,참혹한 동족상잔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여,5·10선거를 반대하고,4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선거에 통일운동세력도 참가해 제헌국회에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하였다. 曺奉岩과 지방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지만 이 선거에 입후보하였다.金九 金奎植같은 지도자들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기 때문에 해방이 분단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또 민족의 대의를 위해서도 통일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국제관계로 분단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이 선거에는 되도록 각 정치세력이 많이 참여하여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폭넓게 할 필요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承晩·한민당 세력은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출마하는 것에 대하여 민중은 그들의 정체와 야욕을 간파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그만큼 그들은 편협성 편파성이 강하여 자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새 정부와 자유민주주의에 짙게 암영을 드리우는 것이었다. ○전체유권자 75% 투표 5·10선거에서는 만 21세 이상의 남녀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고,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친일파를 제외하고 25세 이상이면 피선거권이 있었다.선거는 소선거구제로 치러졌고,제헌국회였기 때문에 임기는 2년으로 제한하였다. 의원후보자는 선거인 명부 등록자 200인 이상의 서명 날인이 있는 추천장을 첨부하여야 했는데,이 제도는 李承晩이 출마한 동대문구에서 악용되었다.5·10선거에는 8백13만여명의 유권자중 7백84만여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그중에 7백48만여명이 투표한 것으로 발표되었다.전체 유권자의 75%가 투표한 것이다.제주도의 두 지역에서는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여 198명이 당선되었다.북측에서 선출할 의원 100명은 공석으로 놔두었다. 이 선거에서는 한민당이 미군정 시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다수 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그러나 개표 결과 한민당 이름으로 나온 후보들은 불과 29명밖에 당선되지 못하였고,李承晩을 영도자로 한 독립촉성국민회의가 55석을 차지하였으며,무소속으로는 85명이 당선되었다.우리나라 선거는 이변이 적지 않은데,바로 첫 번째 선거가 예상을 뒤집은 것이었다. ○우리선거사상 첫 이변 5·10선거에서 시행된 보통선거에 대해서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많은 정치학자들은 이 선거가 미국에 의하여 이식된 것이라고 말한다.선거도 민주주의도 모두다 이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그렇다면 이 선거가 보통선거가 아닌 제한선거로 치러질 수 있었을까.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한국인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는 놀랍게도 일찍부터 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일제침략기에 왕정복고를 생각한 사람은 극소수였다.또 공화국은 보통선거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독립운동세력한테는 일반적이었다.이미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부터 그것은 등장하였고 趙素昻의 삼균주의에서 정치의 평등이란 보통선거를 가리켰다.일제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민주공화국을 상정하였다가 나중에는 인민공화국을 내세웠고,1930년대에는 소비에트 체제까지 구상하였다. 해방후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모든 정치세력은 당연히 보통선거를 실시할것을 주장하였다.이러한 분위기에서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다만 李承晩·한민당세력은 나이 먹은 사람들일수록 보수적이고 봉건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권자의 연령을 높이려고 입법의원때부터 노력하였지만,그것도 성사될 수 없었다.따라서 한국인은 선거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독재자들의 지나친 권력욕때문에 선거가 요식행위나 치장물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 것이다. ○소장파의원 발언 강화5·10선거 이후 제헌국회에서 소장파들의 발언이 강화된 것도 주목하여야할 것이다.정부수립 얼마후부터 ‘소장파 전성시대’라는 말을 듣게 되거니와,소장파의원들은 金九 金奎植과 입장을 같이하여 통일운동을 벌였고 친일파 처단을 올바로 하여 민족정기를 세우고자 하였다.그들은 농민위주의 농지개혁을 위하여 보수세력과 싸웠고,민주주의적인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켰다.그러나 제헌국회내 소장파 의원들은 金九 선생 암살이 있었던 시기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무력해졌다.이로써 의회민주주의는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48년 5월31일 소집된 국회는 제헌국회라는 이름 그대로 헌법제정에 힘을 쏟았다.권력형태는 李承晩의 고집으로 하루밤 사이에 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이 헌법은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경제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도 특색이다.한마디로 헌법자체는 서유럽의 그것에 별반 손색이 없었다. ○민중 우습게 알면 안돼 7월17일 헌법이 공포된후 제헌국회에서는 대통령에李承晩,부통령에 李時榮을 선출하였다.국회의장은 申翼熙,대법원장은 金炳魯가 되었다.8월15일 정부수립이 공포되었다.金九 金奎植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착잡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6월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 5·10선거는 두가지의 교훈을 주고있다.그것은 정치인들이 민중을 우습게 알거나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선거는 결코 말의 유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5·10 제헌국회 총선 50주년­역사적 의의

    ◎봉건사회 종언… 독립정부 토대 구축/사상 첫 민주선거… 王朝국가서 국민국가로/냉전체제속 ‘반쪽선거’ 분단고착화 초래 ‘역사의 등불은 선미(船尾)만을 비추는가’-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된 전철(前轍)을 밟기 마련이다.특히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시대인들에게 제헌국회 총선 50주년의 의미를 교훈으로 되살리는 작업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국민의 정부’를 맞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새김질하는 차원에서도 더욱 그렇다. ‘5·10 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보통선거다.지리적 이념적으로 ‘반쪽선거’에 그쳐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한민국건국을 위한 합법성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정치적으로는 통치엘리트의 교체를 공식화한 의미를 갖는다.국왕을 정점으로 양반계급내에서 통치엘리트가 충원되던 봉건적 신분제 사회가 막을 내리고 시민계급이 통치행위의 전면에 부상한 계기가 된 것이다.‘5·10 선거’를 기초로 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7월17일에는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되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논리도 ‘5·10 선거’의 유효성에 근거한다. ‘5·10 선거’가 남한 단독선거로 치르진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간의 치열한 패권주의적 신경전 때문이다.일제 패망이후 한반도내 민주적 임시정부의 구성 문제를 논의하던 미·소 공동위원회가 정부 구성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47년 9월17일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미국은 유엔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총선거실시안을 추진하지만 소련이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는 남한진영의 승리와 소련에 비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으로 연결된다”며 반대,결국 남한 단독선거로 귀결된다.국내에서도 단독선거 반대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부수립을 더이상 늦출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탄다.이에 따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좌익소탕 작업을 벌이던 미군정은 48년 3월1일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통해 ‘선거실시’를 공식 발표하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당초 선거날짜는 일요일인 5월9일이었지만 기독교계의 변경 요청으로 하루 늦춰진다. 정치권에서는 선거 참여파와 불참파,남북협상파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세다툼이 벌어진다.李承晩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민족청년단,대동청년단,서북청년회,대한노총 등 반탁·반공의 우익세력들은 선거를 적극지지한다.특히 朴憲永계의 좌익세력 ‘조선인민공화국’에 맞서 결성된 한민당은 “선거를 반대하는 것은 소련의 앞잡이인 남로당이나 북로당의 모략에빠져 사회혼란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반면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세력은 파업,시위,방화 등 폭력행사를 통해 선거반대 투쟁을 벌인다. 양쪽의 치열한 대립 속에 金九와 金奎植 등 우익 중간파들은 “남한 단독선거는 민족분단을 영구화한다”며 남북협상을 추진한다.金九 등은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절박한 심정을 토한다.우여곡절끝에 4월20일 평양을 방문한 이들은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단독선거배격운동을 촉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지만 취약한 국내 기반과 국제적 냉전체제의 가속화,협상의 전략적 실패 등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접고 만다.이처럼 ‘5·10선거’는 독립정부 수립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분단의 고착화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민주권국가로 발돋움한 토양을 마련,건국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5·10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퇴색될 수 없다.
  • 梁起鐸 선생 유해 60년만에 환국

    ◎대한매일신보 창간·臨政 참여 독립운동/어제 中서 봉환… 14일 국립묘지에 안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대표적인 애국계몽 언론인이자 무장독립운동가인 우강(雩岡) 梁起鐸 선생의 유해가 8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1938년 중국 상소성 율량 고당암에서 서거해 현지에 안장된 지 꼭 60년만이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3시30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손자 梁俊一씨와 손녀사위 朴維徹(독립기념관장)에 의해 봉환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 이로써 李相龍 선생(90년),朴殷植 선생(93년) 등 국외에 안장돼 있던 8명의 임시정부 수반급 요인이 모두 국내로 봉환됐다.雩岡 선생은 민족독립을 위해 몸소 가시밭길을 걸어온 참 민족주의자였다. 평양 소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때인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섰다.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수난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합작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으며 외국인에게 사장을 맡기면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십분 활용,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며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했다.이와 함께 전국의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이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로 인식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에 맞설 때마다 중심축이 됐던 선생은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대한매일신보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해 직접 총무를 맡으며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후 安昌浩·李東輝 선생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33년 여러 차례에 걸친 추대에 겸양으로 거절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혁명당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는 등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민족화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하다 과로로 1938년 이역만리에서 서거했다.유해는 일반인이 참배할 수 있도록 오는 14일 정오까지 영현봉안관에 안치되며 14일 하오 2시 안장식이 거행된다.
  • 32개 안건 처리 2시간 20분 토론/국무회의 26일

    ◎김 대통령 “예산 8조 확보 실업대책 만전” 26일 열린 국무회의는 파격의 연속이었다.첫째는 대통령이 청와대나 세종로청사가 아닌 과천청사에서 이례적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한 것이고,두번째는 金大中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다 金鍾泌 국무총리서리에게 사회봉을 넘겨준 뒤에도 회의에 계속 참석했다는 것이다.또 상오 9시30분 시작한 회의는 32건의 안건을 처리하느라 2시간 20분이나 걸렸다. ○…회의는 전반부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대책 논의와,후반부의 경제개혁법안 후속법령 처리로 나눠 진행됐다.金대통령은 “예산안 통과로 8조원에 가까운 돈을 실업대책에 쓸 수 있게 돼 어느정도 자신을 갖게 됐다”며 부처별 세부방안 제시를 요구. 金成勳 농림장관은 서울역 등 지하철역에서 노숙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대책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申樂均 문화관광장관은 종교계 등에 노숙자대책의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보고. 尹厚淨 여성특위원장은 여성의 우선해고로 인한 여성들의 어려움을 지적했으며 李起浩 노동장관은 “실직자 가운데 3분의1이 여성들”이라며 철저한 감독을 다짐. ○…金대통령은 상오 10시쯤 실업대책 논의를 마친뒤 金총리서리에게 직접 사회봉을 건네주면서 “공부하는 셈 치고 옆에서 앉아 있겠다”며 회의에 계속 참석. 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은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시행령 개정안’이 상정되자 “결합재무제표 작성에 예외조항을 두면 부실기업들이 대상에서 빠져나갈 우려가 있으므로 투명성 확보를 위해 예외를 두면 안된다”고 이의를 제기.金대통령은 “기업의 투명성을 최대한 확보한다는 목표로 논의해줄 것”을 당부했으며 金총리서리는 이를 다음 국무회의에서 처리하기로 결론. ▷의결안건◁ △한국은행법 시행령 △금융감독기구설치법〃 △정부인사발령안(2건) △99년 예산편성지침안 △98년 일반회계예비비지출안 △97년 재산형성저축장려금기금 결산보고서 △97년 농어촌목돈마련저축 장려기금〃 △97년 국민투자기금〃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행사계획안 △4·19혁명〃 △상호신용금고법 시행령 개정안 △증권투자신탁업법〃 △선물거래법〃 △소득세법〃 △종합금융회사법〃 △외국환관리법〃 △공인회계사법〃 △신용협동조합법〃 △보험업법〃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장기신용은행법〃 △신탁업법〃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법〃 △독점규제·공정거래법〃 △공사채등록법 시행령정비규정안 △담보부사채신탁법 시행령안 △통계위원회규정 개정안 △법무부 직제개정안 △금융감독위 공무원정원 규정안
  • 도산 배우기/최홍운 논설위원(외언내언)

    겨레와 나라 위해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간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정확한 사망시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주요한의 ‘도산 전기’에는 “1938년 3월10일 밤,시계가 12시를 땡땡 치는 것과 동시에 도산의 맥박과 호흡이 끊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938년 3월10일자로 종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각 경찰서장에게 보낸 경종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2468호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 6분으로,그리고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경동고비(경성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1070호 ‘정치 요시찰인 사망에 관한 건’에는 0시 5분으로 돼 있다. 1∼6분의 차이가 있어 당시 시계의 정확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겠는가.민족의 큰 별이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떨어진 사실만은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10일 상오,선생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묘소에서는 신임 김의재 보훈처장과 권쾌복 광복회장,흥사단원 등 200여명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비록 조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추모식이었다. 선생께서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 지 53년,그리고 나라가 세워진지 50년이 되었건만 우리는 지금 6·25이후 최대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IMF관리하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친 민족주의 사상가 도산 선생의 가르침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되새겨야 할 부분은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한다’는 뜨거운 민족애와 ‘폭력보다 정신력이 앞서는 독립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한 평화주의,수감중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는 중에도 ‘조선민족 독립의 대업을 이루려는 것이 흥사단과 동우회의 목표’라고 분명히 밝힌 용기와 정직성일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는 결코 자신이 나서지 않고 이승만을 앞세웠던 점도 정부요직 인사철인 요즘 생각해볼 일이다.‘무실역행’. 정신적인 실력뿐아니라 현실적인 실력도 길러 실천하는 길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 우드로 윌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3)

    ◎‘민족자결주의’ 제창 국제평화 기본틀 다져/독점기업·세제 등 개혁… 노동자보호 앞장/‘이상주의자’ 평가속 20년 노벨평화상 수상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민족자결주의로 한국민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28대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른바 ‘버지니아왕조’,즉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 8명중 마지막 대통령 이다. 프린스톤대 총장을 지낸 학자 출신의 이상주의자로 알려진 윌슨 대통령은 1차대전의 와중에서 미국익의 성실한 수호자역을 맡아 국제정치의 무게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대통령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명실공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는 온화한 외적 분위기와는 달리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의 생가가 있는 스톤튼은 애팔래치아산맥 동부의 빼어난 절경인 셰난도계곡 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윌슨의 도시로 유명하다.이 작은 도시에서는 도시 설립 250주년을 기념,지난해 9월부터 올 1월말까지 5개월 동안 생가에서 ‘스톤튼의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가졌다. ‘윌슨시대의 도시(1855­1912)’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회에는 윌슨이 이곳 장로교회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자라고 대통령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났던 때까지,사진과 각종 유품 등 당시의 생활상을 상세히 진열해 윌슨을 키워낸 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잘 살펴볼수 있게 했다. ○한국독립 운동에 침묵 이곳의 윌슨 사적지에는 그의 생가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새로 지은 박물관과 부친 조셉이 시무하던 교회,설립한 대학 등이 시가지 곳곳에 그대로서 있다.우드로 윌슨 재단에 의해 사적지 내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윌슨의 존스 합킨스대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낸 ‘의회 정부론’를 비롯,‘민주주의 국가론’‘분열과 통합론’‘조지 워싱턴’‘미국 민중사’ 등 그의 명저들을 비롯,1차대전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프린스톤 총장에 이어 뉴저지 주지사를 역임했던 윌슨 대통령은 총장 당시 리승만 대통령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써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그러나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수반으로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리승만의 거듭된 주장에 그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한국민에게는 섭섭한 감정을 남기고 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내 일기 시작한 혁신주의운동은 정당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윌슨에 의해서도 계승됐다.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사회적 침체와 함께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일소하여 미국을 진정한 민주사회로 개혁하자는 이 운동의 가장 큰 목표는 당시 모든 폐해의 근원이 되고 있던 국내의 독점기업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윌슨이 내세운 정강은 바로 이같은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기업의 독점을 와해시켜 시장원리에 따른 자유경쟁을 부활시키자는 이른바 ‘신자유(New freedom)’였다.‘신자유’는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재선을 꾀하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대중을 독점기업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개개인을 모든 형태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 개혁주의자들을 전면에 포진시켰다.대표적인 정책으로는 관세인하,연방소득세 신설 등 세제개혁과 연방지불준비법 등 은행제도의 개혁이 있었다.루즈벨트 시대의 셔먼법보다 훨씬 강화된 독접 규제법인 ‘클레이턴 트러스트 금지법’도 제정했다. ○전쟁중 경제활황 재선 윌슨 대통령이 이같이 국내문제에 심혈을 쏟고 있는 동안 191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인해 발발한 1차대전은 미국에 국제정치의 중심역할을 맡게하는 계기를 가져왔다.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급증하는 군수수요는 미국의 경제활황을 가져다 주었다.이같은 상황에서 16년 그의 재선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러나 독일군 잠수함의 집요한 미국 상선 공격은 1917년 4월 마침내 미군의 참전을 불러오게 했다.미해군과 육군의 참전은 전세를 급속히 반전시켰으며 이듬해 1월 윌슨은 1차대전 이후 국제평화의 기본틀이 된 유명한 ‘14개항 원칙’을 발표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전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공개외교 ▲평화시나 전쟁시 항해의 자유 ▲군비축소 ▲자유무역의 원칙 ▲식민지 요구에 대한 공정한 판결 ▲영토본전을 위한 국제연맹 창설 등으로 돼있다. 이 선언은 파리평화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에서는 국제연맹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이유조약을 도출해 냈다.그러나 집단안전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윌슨에게 뜻하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었다.공화당이 가맹국의 내전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표방했던 먼로주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을 밝혔다. 윌슨은 국민들에의 직접 설득을 통해 이를 돌파하려 애썼지만 국제연맹 가입안은 미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막상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가입을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이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여러차례 윌슨은 겪어야 했고 이때문에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는 평을듣고 있다.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는 1920년 노벨문화상수상으로 보상 받은 셈이 됐다. ◎룰라 브룩스 윌슨박물관 큐레이터/“도덕정치·개혁 실천한 지도자”/“이상주의 추진” 용기와 노력 본받을만/첫부인 앨런과 사별… 재임중 재혼 기록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스톤튼의 이야기들’전시회를 주관했던 우드로 윌슨 박물관의 엘렌 시아 큐레이터는 “5개월간의 전시기간중 많은 관람객들로 붐벼 윌슨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놀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윌슨 대통령의 성품에 대해 설명해달라. ▲윌슨을 흔히 미국의 마지막 지성인 대통령이라고 한다.그는 높은 도덕정치와 과감한 개혁을 동시에 행한 지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이때문에 그는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서 42명중 6위라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오늘날 생각하면 그의 생각들은 모두 옳은 것이었다.한 예로 그의 세계정부론은 선견지명이 있던 것이다.그러나 당시의 수준에서는 너무 앞선 것이어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이상을 실현하려는 그의 용기와 노력은 우리가 본받을만 하다.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가.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 였기 때문에신앙이 좋고 매우 검소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 남부의 여러곳을 다니며 성장했다.그러나 출생지인 스톤튼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성장후에도 틈틈이 찾아왔던 기록이 있다. ­.가족관계는 어떠했는가. ▲첫부인인 앨런과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대통령 취임 2년만에 그녀가 죽고 불과 9개월만에 에디트 갈트와 재혼,재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하는 측근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타일러,클리브랜드와 함께 대통령 재임중 결혼의 기록을 남겼다.
  • “국난 극복 위해 신명 바칠것”/김 대통령 3·1절 기념사

    ◎북에 특사교환 재촉구 김대중 대통령은 1일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이 있은지 79년후인 지난 2월25일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국민에 의해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룩됐다”고 전제하고 “‘국민의 정부’는 3·1 선열들에 의해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드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천명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수한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과 광복회 회원 및 3·1운동 희생선열 유족,시민대표 등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79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국난을 극복하고 내일의 재도약을 실현하기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대통령은 특히 “튼튼한 안보 위에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며 북한당국에 대해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교환을 거듭 제안한 뒤 “평화공존·평화교류,그리고 장차의 평화통일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수준의 대화에도 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남북합의서에서 합의된 화해와 협력,불가침관계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면서 “우선 최소한의 대화,교류를 통해 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봉 내지는 생사확인만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3·1운동은 대화합의 절정을 이룬 국민적 총참여,바로 그것이었다”면서 “이러한 정신이 다시 한번 발현되기 위해 노사,동서,노소,남녀가 화합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으며,노·사·정 대타협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날 기념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김상길 광복회 고문의 3·1운동 경과보고,권쾌복 광복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기념식 노래인 ‘동방의 등불이여’ 독창 및 합창,김대통령의 기념사,3·1절 노래 제창과 김국회의장의 선창에 의한 만세삼창의 순서로 40분동안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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