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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臨政 수립 80돌/백범전집편찬위 ‘방명록’ 입수

    중국은 상해시절부터 임시정부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특히 임정의광복군 창설 이후 지원을 대폭 늘렸는데 이는 중국측이 임정·광복군을 항일전의 동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최근 백범전집편찬위원회는 1943년 3월1일 중경시내에서 개최된 3·1의거 24주년기념식에 참석한 중국측 인사들의 방명록(芳名錄)을 대만(臺灣)에서 입수,공개하였다. 행사에 참석한 중국측 인사들이 자필서명한 이 방명록에는 당시 소위 ‘친한파’로 불릴만한 인사들이 총망라돼 있다.대표적 인물 몇명을 꼽아보면,첫머리의 유치(劉峙)는 당시 중경시 위수사령관으로 광복군창설에 참여한 인물이며,왕계현(王繼賢·당시 대령)은 중국 군사위원회(위원장 장개석) 조사실(정보담당부서) 소속으로 중국군과 광복군간의 연락장교를하면서 광복군의 인원파악과 물자지원을 담당하였다. 또 당시 입법원 원장손과(孫科)는 손문(孫文)의 아들로 한·중간의 우호단체인 한·중문화협회의회장을 지내면서 임정을 지원한 거물급 인사다.국민당 조직부장을 지낸 주가화는 1939∼44년 말까지 중국측 임정 담당 총책임자로 있었던 인물이며,후성(侯成)은 당시 한국광복군이 속해 있던 군사위원회 군정부 판공청 제1처장으로 광복군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조덕수(趙德樹)는 중국군 출신으로 광복군에 파견돼 李範奭장군 후임으로 참모장을 지냈으며,도행지(陶行知)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으로 구성한 참정회(參政會)의원으로 1940년 9월 ‘임시정부 승인 결의안’ 작성을 주도한 인물이다.이밖에 중국공산당측 인사로는 주은래(周恩來) 동필무 등영초(鄧穎超)등 3명의이름이 보인다.당시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중경 판사처주임이었고,동필무는참정회의원이었으며,등영초는 주은래의 아내이자 동지였다.鄭雲鉉
  • 3·1절 첫돌기념식 사진 찾았다

    3·1절 첫돌 기념행사의 감격과 당시 행사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주는사진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백범 서거50주기를 맞아 본사 주관으로 백범김구선생의 전집을 편찬하고 있는 백범 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尹炳奭)는 지난 1월 대만의 중국국민당 당사위원회에서 임시정부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중 1920년 3월 1일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3·1의거 1주년 기념식 사진사본을 입수,28일 공개했다. 가로16㎝×세로12㎝ 크기의 이 사진은 3·1의거 1주년을 맞아 상하이 민단(民團)에서 개최한 기념식 장면으로 장소는 상하이시내 정안사로(靜安寺路)소재 올림픽대극장이다.79년 전에 촬영한 사진임에도 촬영·보존상태가 모두극히 양호하다.촬영자는 임정 관계자나 상하이거주 교민으로 추측되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李東輝 국무총리를 비롯해임시정부 요인들이 대거 참석한 것으로 나와 있어 사실상 임시정부가 이 행사를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당일 오후 2시 상하이 대한민단장 呂運亨의 사회로 시작된 기념식은 독립선언서 낭독,국기게양에 이어 임정요인들의 축사가이어졌고 행사후에는 자동차로 상하이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대한독립선언 기념’이라는 현수막과 대형 태극기를 교차로 내걸었으며 미국·영국의 국기와 함께 천장에는 만국기를 게양했다.또1·2층의 행사장 중 1층은 민단 관계자와 상하이거류 한국인들로 가득찼고,2층에는 외국인 수 백명과 ‘대륙보(大陸報)’등 영자지의 취재기자들도 참석했던 것으로 나와있다.당시 3·1절 기념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조계(租界)내에 있던 임시정부가 신변안전 등을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최초의 3·1절 행사기록 사진인란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이날 상하이시내에서 한국교민들이 밀집돼 있던 프랑스 조계지역은 동포들이 내건 태극기가 물결을 이뤘고 ‘독립신문’은 이 날의 감격을 “우리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루를 무한히 기쁘게 축하하자”고 적었다. 鄭雲鉉 jwh59@
  • 3·1운동-臨政 수립 80돌/역사적 정신 재조명

    - '3·1의거'는 독립운동의 사상적 모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세력들은 항일운동의 역사적 당위성과 활동의 논거로 ‘3·1의거’를 주목하였다는 분석이 나왔다.또 3·1의거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해방운동이자 중국 등과의 국제연대에서도 고리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이는 3·1의거가 일회성 ‘거사’로 그치지 않고 일제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독립진영의 정신적 구심체로 작용하였음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2월19일 독립기념관부설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개최한 제144회 월례발표회에서 韓相燾씨(경기대 강사)는 ‘독립운동세력의 3·1운동 인식과 계승인식’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독립운동 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3·1의거의 역사적 소산으로 인식하고 임정이 3·1의거의 계승체임을 자부하였다”고 주장했다. 韓씨는 임정이 1942년 제23주년 3·1절을 맞아 “본 정부의 정권은 3·1혁명에서 세워졌다”고 언급한 사실,또 한국광복군이 3·1의거를 “한국민족 5천년 고유문화와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분투한 독립·자존정신”이라고 평가한 사실을 들어 이후의 6·10만세의거·광주학생의거·원산(元山)대파업 등 항일투쟁의 모태를 ‘3·1의거’에서 찾고 있다.1930년 화요파(火曜派)조선공산당 및 조선공산청년동맹도 ‘3·1운동 11주년을 기념하여 전조선 노력대중에게 격(檄)함’이란 문건을 통해 3월1일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주요한계기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좌파 민족진영에서도 ‘3·1의거’를 활동의중심추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결국 독립운동세력들은 3·1의거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을 향한 진군의 ‘이정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韓씨는“임시정부가 상해 조계(租界)의 골목길이나 피난길에서도 3·1절 기념식을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이를 통해 독립운동세력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세력간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용광로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한편 ‘3·1의거’는 근대 민족운동의 결정체이자 동시에 반제(反帝)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모멘트로 작용하였다.임시정부의 金九주석은 3·1의거가 “단순한 반일운동에 그치지 않고민족정기와 민주의식이 3·1의거 과정에서거듭 발양됨으로써 민족부흥과 국가재생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하였다.또 金枓奉은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조선혁명의 대상은 부패한 통치자에서 피압박민족의 독립쟁취로 전환하였다”고 평가하였다.결국 이들은 3·1의거가 형식상으로는 반제·반봉건 투쟁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자유주의·민주주의 정치를 요구한 ‘시대적 소산’이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또 3·1의거는 각 독립세력간의 일체감 조성은 물론 한·중간 공동 항일전선구축의 주요한 매개로도 작용하였다.이는 3·1의거와 중국의 ‘5·4운동’이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형식상으로는 청년운동이자 군중·민중해방운동,내용상으로는 신문화·민주운동이었다는 점에서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임정의 趙素昻외무부장은 “3·1의거는 세계제1차대전의 폐막을 알리는 소리였으며 동시에 제2차대전의 개막사였다.한국은일본의 침략전쟁에 수혈관이자 일본 심장속에서 폭발하지 않은 폭탄이었다”며 국제적 연대의 중심축으로서의 3·1의거의 의미를 들었다. /정운현
  • 「3·1운동-臨政수립 80돌」주요 기념행사

    오는 3월 1일은 일제에 맞서 세계만방에 ‘조선독립’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지 80년이 되는 날.이날을 맞아 정부 및 자치단체,관련 단체·기관들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독립선언을 선포했던 3·1정신을 되살려 제2의 건국운동으로 계승할 것을 다짐한다. 이날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등 전국의 고궁(창덕궁 제외)과 능·원,현충사,칠백의총 등이 무료로 개방된다.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3부 요인,광복회원 및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시민대표 및 청소년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식이 열린다. 상오 11시 서울 남산 국립국장 입구 공원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 및 3. 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 기리기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m(1919년 상징)의 기념탑이 제막된다.이어 33인 유족대표와 광복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1운동 희생선열 합동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서울시는 낮 12시 서울 종로구 종로2가 보신각에서 3·1운동의 주역이었던독립유공자 대표와 후손 등을 초청,타종행사를 갖는다. 만세운동 재현행사는 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를 비롯,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0개 시·도15개 지역별로 3월1일부터 4월까지 80년전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에 맞춰 펼쳐진다.독립운동서 낭독,햇불시위,봉수제,봉화제 등의 행사는 물론 길놀이,마당굿,대동놀이 등 민속행사가 함께 펼쳐져 애국심과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될 전망이다. 특히 80년전 ‘조선독립만세’를 앞장서 외쳤던 종교지도자들은 2월부터 8월까지를 ‘범종교 3·1정신 현창(顯彰)기간’으로 정하고 ‘제2의 3·1운동’을 펼친다. 국내 7대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우선 3월1일 80주년 기념식을 80년전의 모습대로 성대히 꾸민다.각 종단 관계자들은 견지동조계사,저동 영락교회,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원불교 원남교당,천주교 명동성당,명륜동 성균관,사직단 장충단등에서부터 가두행진을 하며 종로3가탑골공원에 집결,오전 11시 팔각정 앞에서 기념식을 갖는다.기념식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제2의 3·1선언서’가 낭독되고 각 종단의 3·1운동 80주년 메시지도 발표된다.‘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염광여상 취주대의 선열 추모공연과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이날 정오 전국의 사찰과 성당,교당,교회,향교 등에서도 일제히 ‘제2의 3·1선언서’를 낭독하는 한편 전국 200여곳에 종단별 가두홍보대를 설치,3월 1일을 전후한 3∼4일 동안 대국민 알림운동을 전개한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또 3·1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을 제작,오는 27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수송동 보성사(普成社) 터에서 제막식을 갖는다. 이밖에 3·1정신 계승을 위한 범종교인 학술발표회를 비롯,청소년 국토순례,연극 ‘우리로 서는 소리’ 공연,3·1정신 계승방안 공모,3·1정신 현창도서 간행,3·1정신 현창미술전시회 등의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이어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을 맞아 4월 13일 서울 및중국 상해,중경에서는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 등이 열린다. 4월11일∼17일 7박8일간의 일정으로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국내로 초청,기념식 및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 3·1 만세운동 전국15곳서 재현/보훈처 80주년 기념행사

    80년 전 만세시위를 하던 종교인 29명이 일제 군경에 의해 참살당한 경기도 화성군 발안장터를 비롯,충남 천안시 아우내장터,강원 횡성군 3·1공원,제주 북제주군 조천만세동산 등 전국 15개 지역에서 오는 3월1일부터 4월까지지역주민,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만세운동이 재현된다. 국가보훈처는 24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80주년에 즈음한 민족정기 선양사업을 확정,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3월1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부요인,광복회원 및 국가유공자 단체장,정당대표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특히 이날 오전 11시 서울 남산 국립극장 입구에서는 광복회(회장 尹慶彬)및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위원장 李壽成) 주관으로 3·1독립정신을기리기 위해 21억2,000만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높이 1,919㎝(1919년 상징)의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된다. 4·13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인 4월13일에는 서울 및 중국 상해,중경에서 제80주년 기념식 및 학술토론회가 열린다. 4월11일에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대만 카자흐스탄 등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및 사료연구위원 등 30명을 7박8일 일정으로 초청,국내의 역사현장및 사적지 등을 돌아보도록 할 계획이다.국내 원로 애국지사 및 사학자 등 20여명은 4월13일을 전후해 중국 상해와 중경 광주 진강 항주 장사 등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임정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 [화제의 책] 백범 김구 연구I

    백범 김구선생의 정치활동을 집중 연구한 ‘백범 김구 연구Ⅰ-정치활동과정치이념’이 최근 신지서원에서 출간됐다.부산 동의대 정경환(鄭京煥)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신지서원의 기획물 ‘한국인물총서’의 첫 권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김구’보다는 ‘정치인 김구’에 초점을 맞춰 구한말부터 해방정국까지의 전과정에 걸쳐 백범의 정치역정(歷程)을 분석하고 있다. 백범은 임시정부수립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광복군 조직·활동을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정부와 외교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백범은 중국측과 한중동맹군을 조직,일제를 타도해야한다는이른바 ‘한중연합론(韓中聯合論)’을 펴기도 했는데 당시 중국측 자료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방공간과 남북분단 과정에서 ‘정치인 김구’의 역할은 시대적 사명이었다. 친일파 처리·토지개혁·신탁통치·좌우합작운동 등 당시의 시국현안에 대한 백범의 인식·대응전략을 당시 자료를 통해 분석한 것이 돋보인다. 백범의 정치이념을 ▒민족주의론 ▒민주주의론 ▒경제평등론 ▒문화국가론등 크게 네 갈래로 나누고 있는 저자는 “백범은 소년기부터 조선조 사회의신분계급구조와 인간불평등에 강한 의문을 가졌던 인물”이라며 “정치활동전 과정에서 그는 독재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정치를 신봉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저자는 6월초 후속작업으로 ‘백범 김구 연구Ⅱ-정치사상의 재조명’을 출간할 계획이다.
  • 공무원이 ‘독립운동사’ 연구서 출간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 관련 자료관리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등의 업무를 맡아온 공무원이 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연구서를 출간해 화제가 되고 있다.주인공은 李善雨 보훈선양국장(59).李국장은 최근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행적을 모은 책 ‘잃어버린 땅 잊혀진 영웅’을 도서출판 고려원에서 출간했다. 한말 의병에서부터 임시정부의 광복군까지 독립운동사 전체를 시기별로 정리한 이 책에서 그는 “독립운동은 지는 것을 알면서도 싸운 민족혼의 발로였다”며 러시아·만주 등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만난 애국선열들의 흔적도곁들이고 있다. 李국장은 “선열들의 빛나는 공훈이 한낱 흘러간 얘기로 망각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힌다.보훈처 홍성보훈지청장,자료관리과장,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 등을 역임한李국장은 ‘독립유공자공훈록’‘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등 독립운동사자료집 간행에도 관여해 왔다.
  • 효창공원‘백범성지’로

    백범 金九선생을 기념하는 ‘백범기념관’이 그의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 세워진다고 백범기념사업회 李壽成회장이 5일 밝혔다. 李회장은 이날 기념사업회 정기총회에서 “그동안 부지선정 문제로 다소 논란이 있었으나 효창공원으로 최종 확정했다”며 “효창운동장 일대를 정비해 ‘민족의 성지’로 가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같은 내용을 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金대통령으로부터 지원약속과 함께 기념관건립 명예위원장직 수락을 받았다”고 공개하고 “빠르면금년 백범 서거 50주기 때 기공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회측이 구상하고 있는 기본계획안은 백범묘소와 삼의사(三義士) 묘소등 선열묘역을 중심으로 1만8,000평 규모의 효창운동장과 철거될 인근 체육시설 부지를 통합해 그위에 백범기념관과 문화체육센터를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총예산은 900억원 규모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재원조달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면서 정부예산도 지원받을 계획이다. 용산구의회는 지난해 12월21일 정기회 2차본회의에서효창공원 자리에 백범기념관과 옥내외 체육시설 및 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백범기념사업관 및 문화체육관건립추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 한편 사업회측은 기념관 건립과 관련,별도 조직으로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를 곧 발족시킬 계획인데 위원장은 李회장이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백범 金九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 李東寧·曺成煥·車利錫선생과 3의사(李奉昌·尹奉吉·白貞基) 등 순국선열 7위의 묘소와安重根의사의 가묘(假墓)가 있다.이번에 마련되는 백범기념관은 안중근의사기념관(70년 준공)·윤봉길의사기념관(88년 준공)에 이어 독립운동가 개인기념관으로는 세번째다. 鄭雲鉉 jwh59@
  • 2·8독립선언 80돌 도쿄서 기념 행사

    ‘2·8독립선언’ 80주년 기념행사가 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서리 閔泳秀)와 도쿄YMCA 공동 주최로 오는 2월8일 도쿄에서 열린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유족들이 처음으로 대거 참가하는 이번 행사는 80년전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선언서’를 낭독했던 도쿄 YMCA에서 오전 11시 열려 ‘2·8독립선언’의 의의를 되새긴다. 기념식에는 金義在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尹慶彬 광복회장,李康勳·金勝坤 전광복회장,安椿生 전독립기념관장,金信 전교통부장관 등 원로 독립운동가들과 유족으로 朴維徹 독립기념관장(임시정부 2대 대통령 朴殷植 선생의 손자), 張致赫 고합회장(‘대한매일신보’ 주필 張道斌 선생의 자제)등 37명이참석할 예정이다. 참석자들은 도쿄의 대표적인 항일의거 현장도 답사한다.답사할 곳은 1932년 1월8일 한인애국단 소속 李奉昌의사(1900∼32·건국훈장 대통령장)가 관병식을 참관하고 황궁으로 돌아가던 히로히토(裕仁)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사쿠라다몬(櫻田門) 지역,金祉燮의사(1885∼1928·건국훈장 대통령장)가 1925년 황궁을 향해폭탄을 던진 니쥬바시(二重橋),李康勳 전 광복회장이 1933년 주중(駐中)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폭살시키려다 체포돼 16년간 옥고를 치른 스가모(巢鴨)형무소지(址) 등이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崔八鏞·徐椿 등 10명의 도쿄 유학생이 주동이 돼 3·1만세의거 1개월 전에 발표한 독립선언으로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린다.
  • 백범 41년 7월 2차대전 미국 참전 예견

    “박신애 누이 보시요.그간에 편지를 하랴고 하였지만 년전에 알튼 각기가발작이 되여서 고생을 하고 둘제(둘째)로는 중경에 공습이 심하여서 방공동(방공호)으로 피란하러 다니고 또는 더위가 백여도까지 더워서 잇때까지 집필을 못하였소…” 백범 金九 선생 서거 50주기를 앞두고 선생이 중경(重慶)임시정부 시절 하와이 거주 재미동포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처음 공개됐다.‘박신애 누이 보시오…’로 시작하여 ‘오라비 金九’로 맺고 있는 이 편지는 백범이 평소 남매간처럼 가깝게 지낸 지인에게 보낸 사신(私信).그러나 이 편지에는 당시 중경의 전황(戰況)과 재미교포사회의 이야기 등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우수하다. 1941년 7월 25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에서 백범은 “지난 유월 오일 중경에서 큰 불행한 사건으로 숨이 막혀죽은 수 천명의 송장뎅이를 친히 봤소”라고 적고는 “이제 미국이 참전하는 날이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날이니 세계낙원 하와이 동포들도 우리와 같이 방공동 생활을 하시리라 생각하오”라며 “공습 피난명령이 내리면 명령대로 꼭 피하시오”라는 ‘오래비’의 당부의 말도 잊지않고 있다.편지에서 백범이 언급한 ‘불행한 사건’은 일본군이 41년 6월초 ‘중원(中原)작전’이란 이름하에 일본해군 항공대가 중경을 8차례나 맹폭한 것
  • 법정기념일 전면 재검토

    법정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부처(部處)기념일,지방자치단체 기념일 등으로세분화될 전망이다. 행정자치부는 20일 “최근들어 각 부처나 직능단체 등에서 기념일을 추가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가 늘고 있어 현행 법정기념일 제도를 전면 재검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재검토 방안으로는 법정 기념일의 의미,성격 등을 재정립해 국가,각 부처,지방자치단체 기념일 등으로 나누는 방안이 유력하다. 현행 법정기념일은 조세의 날 등 모두 39건.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각 부처의 시책을 홍보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법정기념일로 지정되면 전국 규모의 행사를 할 수 있는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다. 정부는 지난 73년 정부행사 간소화차원에서 과거 부령,고시 등으로 정해져있던 각종 기념일을 대통령령으로 단일화,28건만을 법정기념일로 정했다.그뒤 8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4월 3일을 추가하고 97년에 5월 18일을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추가하는 등 11건을 추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기념일로지정해 달라고 행자부에 접수된 건수는 모두 40여건 정도된다. 이 가운데에는 각 부처에서 관련 민간단체 등과 함께 자율적으로 행사를 갖는 것들도 적지않다.건설교통부의 건설의 날,항공의 날,문화관광부의 서울올림픽기념일 등이다.또 10월30일(재외동포재단설립일) 해외동포의 날,3·15의거 기념일 ,6·10항쟁 기념일이 접수돼 있으며 시계공업 협동조합에서는 시(時)의 날을,해양경찰청은 해양경찰의 날을 지정해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이 가운데는 법정기념일로 할 것도 있고 각 부처에서 자율적으로 할 것도 있다”면서 “법정 기념일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은 노동절,현충일 등 10건의 법정공휴일은 전국적으로 기념행사를 하고 있으며 대통령이나 연방의회,시의회등에서 자율적으로 정한 인권의 날 등 200개 이상의 기념일은 따로 있다.朴賢甲 eagleduo@daehanmail.com
  • 광복회 14대 회장 尹慶彬씨

    광복회는 지난 16일 광복회관 대강당에서 전국 대의원 임시 총회를 열고 앞으로 4년간 광복회를 이끌어 갈 제14대 회장에 尹慶彬 애국지사(79)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신임 尹회장은 1919년 평남 중화에서 태어났으며 44년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으로 끌려갔으나 故張俊河선생과 함께 탈출,重慶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입대,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광복군 간부 훈련반을 졸업한 뒤 임시정부 경위대장,광복군 총사령관 부관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金九주석을 보좌했다. 45년 광복 후 金九선생을 수행,환국했으며 이후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비서,흥화공업소 부사장,백범 金九선생기념사업회 이사,독립유공자협회 회장등을 역임했다.80년에 건국포장,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부인 權恩愛여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金仁哲 ickim@
  • 潘炳律 외국어대 교수 ‘誠齋일대기’ 펴내

    ◎독립운동사의 거인 李東輝 ‘제모습 찾기’/신민회 활동·상해臨政 초대총리 활약/사회주의 접목 독립운동 새바람 꾀해/이념의 족쇄벗고 균형잡힌 재평가 시도 한 시대나 인물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제때,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시대가 바뀌면서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영웅이 쿠데타의 주역으로,또 반대로 반역자가 시대의 선각자로 등등.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그런 예는 허다하다. 최근 한국외국어대 潘炳律 교수(한국사)가 출간한 ‘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는 이같은 ‘역사의 평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반 교수는 한·일·중·러·미 등에 산재한 관련자료를 수집,이동휘 선생의 ‘제모습찾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재(誠齋) 李東輝(1873∼1935)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결코 홀대할 수 없는 큰 별이다. 더러 백범 金九,우남 李承晩,도산 安昌浩 반열에 놓기도 한다. 구한국 정부에서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을 지낸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을사오적 처단후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신민회 핵심멤버로 활동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1913년 만주로 망명,북간도와 러시아령(領)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3·1만세의거 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한편 이 무렵 선생은 당시 풍미하던 사회·공산주의 사상을 한국독립운동 선상에 접목시키는 한편,선생 자신이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의 이같은 사회주의 혁명노선은 선생을 해방후 반세기 동안이나 ‘이념의 창고’에 가둬두는 족쇄로 작용하였다. 한동안 학계에서조차 선생의 이름을 거명하는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역대 남한정권은 선생의 사상성향을 이유로 독립운동 공적마저 덮어버렸다. 극도의 왜곡과 폄하 그 자체였다. 정부는 1962년부터 독립운동가에 대해 포상을 실시해왔는데 ‘광복50주년’인 95년에야 겨우 선생에게 훈장을 추서하였다. 친일경력자·가짜독립운동가 목에도 훈장을 걸어준 우리 정부가 진짜 독립운동가인 선생 앞에서는 ‘이념타령’만한 셈이다. 반 교수는 선생을 두고 “독립운동 공적은 물론,조국광복을 향한 사심없는 열정·희생정신·혁명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라며 ‘이동휘 예찬론’을 편다. 전기출판과 때맞춰 지난 21일 학계·종교계 인사 500여명을 주축으로 ‘이동휘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뒤늦었지만 선생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기념사업이 본격 시작될 모양이다. 선생의 자료집 ‘성재 이동휘 전서’(전2권·독립기념관 간행)을 곧 출간예정인 인하대 尹炳奭 명예교수(한국사)는 “민족운동사의 거인 이동휘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이해해야한다”고 밝혔다. 만주·연해주 일대를 제집 앞마당처럼 내달리며 항일운동을 하던 선생.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후 레닌정부가 약소민족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멀리 인도양·지중해·알프스산맥을 넘어 모스크바로 레닌을 찾아가 만나기도 했던 선생. 저자의 서문 가운데한 귀절이 가슴을 친다. “‘2∼3년 내로 광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오겠다’며 압록강을 건넌 후 한시도 쉬지않고 뜨겁고 진실하게 살다간 선생의 삶과 꿈에 조금의 티라도 남기지 않았는지 죄책감마저 든다”. 어디 저자만의 ‘죄책감’일까. 선생 가신 후 60년이 지나도록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우리 후손들인 것을. 범우사 20,000원.
  • 친일의 군상:17/선우순­선우갑 형제(정직한 역사 되찾기)

    ◎직업밀정­고등계 형사/상해 臨政의 ‘처단대상 1호’/‘인텔리밀정’의 전형/구한말 한때 민족진영서 활동/日 유학후 日帝침략 선전 앞장/附日 대가로 중추원참의 지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한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는 한국 관련 자료가 도처에 산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외무성사료관 등 공공기관을 비롯해 학습원대학의 동양문화센터와 도쿄(東京)·와세다대학의 도서관과 기타 역사적 인물들의 개인기념관에 산재한 자료 등. 여기에는 공문서를 비롯해 일제 당시 실력자들간에 주고받은 문건,편지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한국에서는 전혀 구경할 수 없는 자료들도 상당수 있다. 친일파에 관한 자료 역시 상당수 포함돼 있다. 수 년전 기자는 자료수집차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기자는 ‘사이토(齋藤實)문서’(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재임시절에 수집한 문서)를 검색하다가 3·1만세의거 직후 조선인 밀정이 작성한 정세보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朝鮮ノ最近ト對應策(조선의 최근과 대응책)’. 작성자는 ‘조선평양(朝鮮平壤)’출신의 ‘선우순(鮮于순)’이었다. 총 40쪽 규모의 이 정세보고서는 3·1의거 직후 조선내 각 지역·종교세력간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임시·영구대책을 상세히 언급한 것으로 전적으로 총독부 당국을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밀정 중에서도 ‘먹물’을 먹은 고급밀정의 ‘작품’인 셈이다. 선우순(鮮于순,1891∼1933).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하 몇 안되는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시말해 그는 직업이 ‘친일’이고 그걸로 일생을 먹고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동생도 그와 마찬가지로 친일 밀정노릇을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두 형제가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으니 ‘형제는 용감했다’고나 할까. 선우순은 평양 태생이다. 1930년 당시 그가 중추원참의 시절에는 경성(京城,현 서울)에 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해당주소의 호적을 확인한 결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선독립불능론 강연 그의 인생의 말로는 친일파로 막을 내렸지만 초창기에는 그도 한 때 민족진영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서북학회월보’에 그가 쓴 글이 실려있기도 하고 1931년에 출간된 ‘조선신사록(朝鮮紳士錄)’에는 그가 1907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자로 입사해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다른 자료들에서 크로스체크 된 바는 없지만 크게 의심할만한 내용도 아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계기로 친일파가 되었을까? 그가 친일대열로 전향한 것은 ‘대한매일신보’를 퇴사한 직후 일본인이 평양에서 발행하던 ‘평양신문(平壤新聞)’에 입사한 것이 한 계기가 된 듯하다. 1910년 11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12월 교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대학 기독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대학은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전신인 일본기독전도회사의 의장인 니지마죠(新島襄)가 설립한 학교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조선에 진출하여 종교침략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일본당국과 재벌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얻어 조선에서 대대적인 전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11년 7월 평양에 평양기성(箕城)교회를 세웠다. 선우순은 바로 이 교회를 다니면서 일본인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을 통해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한편 1915년 도지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양기성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일본인들과 함께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면서 조선인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이 단체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해 9월 19일 중추원 회의장에서 개최된 지방유력자 모임에 참석해서는 ‘조선독립 불능론’을 강연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그는 평안남도 지사 시노다(條田治策)의 사주·후원으로 1920년 10월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설,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평안도 일대의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단체로써 평양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기관지로 ‘대동신보(대동신보)’를 창간,사장에 취임하였으며 평양에서는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매체들은 일선융화(日鮮融和)·공존공영(共存共榮)을 내걸고 선전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마음속에 품고있던 식민정책을 그가 나서서 대신 나팔을 불어준 셈이다. ○日帝의 대변자 자임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이들(조선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공통(共通)하고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이므로 내선인(內鮮人,일본인과 한국인)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즈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웅비하는 방법…”(‘조선및 조선민족’)이라며 일제의 충실한 대변자역을 자임하였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1920년 11월 평양부 협의회원(현 시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중추원 참의(주임관대우)에 임명되었는데 1933년까지 13년간 5회 연속 중임하였다. 일개 전도사로 출발해 이 정도 대열에 오른 경우로는 그가 유일하다. 당시 그의 친일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가 조선총독을 면담한 횟수를 보면 짐작이 간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1919년 8월부터 1926년 사이에 그가 사이토 총독을 면담한 횟수는 무려 119회나 된다(姜東鎭,‘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평균해서 22일마다 1회꼴인데 이 수치는 같은 기간에 매국노 宋秉畯이 사이토를 면담한 횟수(58회)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다. 당시 그는 고급관료나 친일귀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중추원 참의 70명 가운데서도 66번째 차순이었지만 밤낮을 가리지않고 총독의 집무실과 관저를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의 친일의 정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의 명성(?)은 상해 임시정부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당시 임정에서는 일본인 고위관료·매국적(賊)·고등밀정·친일부호·총독부관리·독립군 사칭 불량배·모반자 등을 ‘칠가살’(七可殺,처단해야할 일곱 부류의 집단)로 규정,처단대상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매국적’의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그와 함께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였던 閔元植이 일본 도쿄에서 민족청년 梁槿煥에게 처단된 것은 임정의 이같은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생도 악질형사의 표본 선우순의 동생은 선우갑(鮮于甲,생몰미상) 역시 그 형에 못지않은 악질적인 친일분자였다. 그는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유학생 감시역을 하였는데 2·8독립선언 당시 현장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중심인물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체포하게 한 자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후에는 기자직함을 가지고 미국에 파견돼 일본을 선전하였으며 재미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형제가 나란히 일제의 충견(忠犬)으로 활동한 셈이다. 같은 선우(鮮于) 성(姓)을 가진 사람중에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을 한 사례도 있다. 선우혁(鮮于赫)­선우훈(鮮于燻) 형제가 그들로 모두 임정에 관여하였다. 이들 두 형제는 모두 평안도 출신으로 동시대를 살다가 갔다. 민족의 수난기에 어느 형제가 올바른 삶을 살았는지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천년이 가도 퇴색되지 않을 민족사의 한 페이지에 흑(黑)과 백(白)으로. ◎사이토 조선총독 누가 몇번 만났나/밀정­왕족­친일관료順 면담 많아/선우순 7년간 119회로 최다/정보제공 대가로 거액 받아 일제시대에 조선인 중에서 총독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료나 군 수뇌부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더러 위무(慰撫)나 회유 차원에서 총독이 조선인 유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조선인과 자주 면회를 가진 사람은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사이토는 3·1만세 의거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총독에 부임한 이래 1919년 8월부터 1926년말까지 총 839명의 조선인을 만난 것으로 나와있다.(姜東鎭,‘일제의 한국 침략정책사’) 이들 가운데 사이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사 10명을 꼽아보면, 鮮于순(119회),李軫鎬(86회),李堈公(85회),李王(순종,75회),韓相龍(73회),閔興植(59회),宋秉畯(58회),申錫麟(53회),方台榮(51회),朴泳孝(47회) 등이다. 왕족인 이강공이나 이왕(순종)의 경우 총독의 문안인사나 공식행사장에서의 접견 등이 감안된 것이다. 그외 나머지 인사들들은 모두 친일관료(이진호,총독부 학무국장)나 조선귀족(송병준·박영효)·친일자본가(한상룡)등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우순·민흥식·방태영은 ‘직업적 친일분자’에 속한다. 이들은 사회적 직위에 관계없이 총독을 수시로 만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댓가로 기밀비조로 금전을 받곤 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下)

    ◎臨政 선열의 애국혼 생생/54년만에 다시 찾은 그 건물 앞에 태극기 게양/金九 주석·李靑天 장군의 격려 눈에 선한데…/광복군 제1지대 거점 공사장 흙더미로 변해 “동해물과 백두산이…”.충칭(重慶)시 중심 치싱깡(七星崗) 린엔화츠(蓮花池)38호.‘대한민국 중경임시정부’청사앞이 애국가로 가득했다. 베이징(北京)을 떠나 쉬저우(西州),푸양(阜陽),시안(西安)을 거쳐 충칭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 9명이 청사앞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뒤 눈물을 글썽이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베이징 출발 9일만인 10월15일이었다. 54년전 대륙을 가로질러 73일만에 도착했던 임시정부.이들을 포함한 25명의 광복군은 44년 11월21일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에 도착했었다.출발지는 광복군 간부훈련(韓光班)을 마친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일본군 점령지역도 지나야 하는 목숨건 장정(長征)이었다. “청사앞에서 아무말없이 한사람씩 손 잡아주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金九 주석,장하다며 호기롭게 격려해 주시던 李靑天 장군 등이 지금이라도 불쑥 나오실것 같은데…” “정문에 들어서 바로 오른쪽 건물인 2호동 2층에 趙素昻 외무부장 집무실,그 위의 3호동에 申翼熙 선생 집무실,그리고 그 위는 내 방…”.44년말부터 해방전까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 이곳서 지냈던 尹慶彬 회장과 金九 주석 비서장출신의 鮮于鎭씨의 눈이 빛났다. 당시 충칭은 일본과 항전하던 중국의 임시수도.미국,영국 등 세계주요국 대사관,영사관이 집결돼 있었다.일본 명문대출신의 청년들이 일본군을 탈출, 대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중국정부와 제3국 외교관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 지식층조차 한국인은 식민통치에 동화돼 일본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 점에서 우리들의 탈출과 광복군 합류는 한반도내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나마 일본에 강력히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연합국에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임시정부와 합류한뒤 고 張俊河 선생과 金柔吉 부회장 등 일부는 시안(西安)으로 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훈련을 준비한다. 시 남쪽에 위치한 파난취(巴南區) 투치아오(土橋).일행들이 신치춘(新柒村) 1­49호 허름한 가옥에 도착하자 집 주인 저우한장(周漢江·72)씨가 환한 얼굴로 노 독립군들을 맞았다.임시정부 요인들과 閔弼鎬 선생(임시정부 외무차장)부인 등 독립군 가족 20여가구가 집단 거주하던 곳이다.임시정부가 환국하면서 조우씨 등에게 집을 물려주고 갔었단다. 시 서북쪽의 라오허커우(老河口).일행들은 ‘광복군 제1지대’ 거점지를 찾았다.창장(長江)부근에 있는 옛터는 다리건설 공사로 파헤쳐인 흙더미만이 쌓여있었다.“1지대는 좌익계열인사들이 주도했지만 金九선생은 이들까지도 하나로 묶어 대일항전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일행들은 10월16일 베이징출발 10일만에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45년 11월 金九 선생이 귀국길에 상하이를 드르셨을때 수천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연설하셨다는 훙커우공원(虹口공원·현 魯迅공원)의 옛 장소는 숲이 돼 있었다. 노 독립군들은 지난4월 공원안에 새로 세워진 尹奉吉 의사 의거 표석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11일간의짧고도 긴 장정을 마쳤다.“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27년동안 항저우(杭州) 등 9곳을 옮겨다니며 선열들의 피와 땀위에서 비바람을 견뎌냈는데…”.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안에서도 선배 독립군들과 지난 50여년전의 기억은 마지막 광복군들의 눈시울과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 대원들 상근/발족 당시 周恩來·孫文 아들 참석 축하 충칭시 중심가에 남아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옛 건물과 터가 도심 재개발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충칭의 명동,민족로(民族路)부근의 쩌우룽로(鄒容路) 37·38번지.웨이원(味苑)이란 국영음식점과 광고회사 등이 들어있는 낡은 3층건물이 42년 9월부터 45년8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대지 270여평.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명의 대원들이 상근했고 중국의 고위 장성들과 미군 OSS(전략사무국)관계자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현재 건물자체가 낡아 철거는 불가피한 상태. 柳在沂 주중대사관 문화관은 “현 위치에 50평정도의 땅을 확보,광복군들의 활동을 기리는 표지석과 건물 모형 설치 방안을 충칭시와 협의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당시 광복군의 활동은 국제적인 주목거리.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충칭서 발족될때 중국의 초대총리 저우은라이(周恩來),중국공산당 창시자중 한사람인 동삐우(董必武),쑨원(孫文)의 아들 순커(孫科) ,대군벌 바이쭝시(白崇禧)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참석,축하하기도 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관리 소홀… 복원 3년만에 곳곳 퇴락/金九 주석 집무실 벽·창문·마루 등 파손/밀랍인물 전시사업 등으로 관람객 끌어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곳곳이 관리소홀로 퇴락해가고 있다. 복원 3년여만에 일부 마루 바닥이 내려앉거나 칠이 떨어지고 창문이 부서져 나가는 등 보수가 아쉽다.5동의 건물가운데 전시실인 1호동과 의정원 건물인 2호동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전반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 金九 주석의 집무실 벽마저 습기로 칠이 떨어져 보기 흉한 상태.5호동의 외빈 접대실은 마루바닥이 부서져 있다.3·4호동 계단 곳곳과 창문도 부서진 채 있다. 청사관리를 맡고있는 펑카이원(彭開文) 부관장은 예산부족으로 보수·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지난 한해동안 중국인 200명을 포함,관람객이 800명에 불과,입장료 수입이 적은 것도 예산부족 이유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올 관람객은 10월중순까지 180명.현장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은 “보수뿐아니라 독립기념관처럼 당시 인물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등 다채롭게 꾸며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고 생동감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日軍 탈출 한국 청년 25명 臨政과 합류/中 언론들 “한국의 미래와 희망 보았다” 평가 50여년전 충칭의 주요 언론에게도 일본군에서 탈출한 韓光班 출신 한국청년 25명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충칭도착 4개월이 지나도록 관련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45년 2월 4일자 충칭의 유력지 따궁바오(大公報).“한국은 망하지 않았다.한일합방이후 성장한,일본 동화(同化)교육을 받고 일본서 유학한 한국청년들의 항일사상과 민족관념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었다.한국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고 보도했다. 이틀뒤인 6일에도 따궁바오는 ‘탈출 한국청년을 환영한다’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중문화협회에서 한국청년들의 환영회를 열어주었다고 보도했다.협회관계자뿐아니라 20여명의 내외기자들이 참석했다는 보도 내용은 당시 관심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중국의 三民主義靑年團,全國慰勞總會 등 사회단체들의 환영회와 중국군의 천청(陳誠)대장 등 주요인사들의 행사 참가소식도 중양르바오(中央日報) 등은 보도했다.언론의 대서특필은 당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환영을 보여주는 한 편린이었다.
  • 순국선열 기념일(金三雄 칼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웅변가 소대(蘇代)의 글에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木偶人)와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土偶人)의 대화가 전한다. 어느날 목우인이 토우인에게 “너는 어찌 얼굴이 두루뭉수리로 생겼나. 더구나 비가 오면 상판이 모두 풀어져 눈도 코도 분간 못하게 될 것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토우인 껄껄 웃으며 말하되 “나는 네 말대로 비가 많이 오면 얼굴과 몸뚱이가 젖어 모습마저 풀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흙으로 뭉쳤다가 흙으로 풀어져서 이 땅에 있는 것이라 언제고 다시 뭉치면 새 모습으로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웃으면서 반문했다. 토우인 다시 “그래 네 생각에는 네가 제법 눈 코가 똑똑하게 생긴 줄로만 알겠지! 그렇지만 너야말로 큰 물이 지면 물결에 둥둥 떠서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북방으로 갈지 남방으로 갈지, 그래 어디가서 네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하자 목우인은 부끄러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다.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궐기한 의병 독립군 항일지사의 대부분은 토우인같은한국사람들이었다. 목우인처럼 잘나고 영악한 자들은 외세에 영합하거나 앞잡이가 되었다. ○임정의 기념일 제정 뜻 오늘(17일)은 순국선열기념일이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까닭이 있다. 그러니까 1905년(을사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사실상 송두리째 빼앗고자 이른바 ‘을사조약’을 날조한 날이다. 이날을 기해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시작되고 일제의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어 순국선열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정하면서 ‘결정문’ 을 채택했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자못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을 유루없이 다 알수 없으므로 1년중 1일을 정하야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하는 바이요, 이제 11월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야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야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야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은 을사년 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인고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측결되던 11월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 의사록) 1895년부텨 1945까지의 50년동안 항일전선에서 순국한 선열은 30만명이 훨씬 넘는다. 의병투쟁 의열투쟁 3·1항쟁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학생운동 지하투쟁과정에서 무명선열 무후선열 및 유후선열과 애국지사를 합친 숫자이다. 이들 중 극소수는 국립묘지의 임정묘역이나 효창동, 수유리 또는 가족묘지 등에 안장되었지만 대부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순국선열 유업 제대로 토우인처럼 조국강산과 이역에서 흙이 되고 넋이 되었다. 정부의 서훈 여부와 관계없이 국권회복전선에서 희생된 모든 순국선열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지난해부터 부활된 이날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19년부터 이날에는 정화수 떠놓고 앞서간 선열을 추념했고 이날만은 찬밥을 먹으면서 국권회복을 다짐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독립한 우리가 각종 기념행사때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정도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순국선열의 유훈이 잊혀지고 유족들이 기한에 떨고 의병기념관, 임정주석기념관 하나 짓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처지가 이날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는가.
  • “臨政 유적 찾아 보수·보존 추진”/金 대통령 임정 청사 방문

    【상하이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오전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봤다.金대통령은 먼저 백범 金九 선생 등이 사용하던 청사 1층 회의실에 들러 베이민디앙(貝民强)청사관리소장으로부터 청사 복원배경 에관해 설명을 듣고 백범 선생이 사용한 탁자에 앉아 방명록에 서명했다. 金대통령은 ‘불석신명 유방만세(不惜身命 遺芳萬世)’라고 쓴 뒤 “애국지사·선열들이 신명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이 향기가 돼 만세에 남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이말 뒤에 ‘한중우의(韓中友宜)’도 추가했다. 회의실엔 장방형 테이블과 의자,대형 태극기 2개,찻잔,주전자 등이 옛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金대통령은 청사관리소로 옮기는 도중 기념품판매대에서 백범선생의 ‘독립정신(獨立精神)’ 친필이 담긴 기념품을 샀다. 金대통령은 “상하이 임시정부는 중국내 여러곳으로 옮겨다녔으므로 앞으로 그 유적도 찾아 보수·보존하는 일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의 보존·개선에 협력해준 중국정부와 상하이시에 감사드린다”고 사의를 표시했다. 한편 관리소측은 김대통령이 지난 94년11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서명한 방명록과 金대통령 가족 사진을 전시해놓는 등 세심한 준비를 했다.
  • 金 대통령 연쇄 정상회담

    ◎오늘 말聯·뉴질랜드·싱가포르 총리와/아시아 금융위기 극복 방안 등 집중 논의 【콸라룸프르 梁承賢 특파원】 제 6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 참석차 15일 오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도착한 金大中 대통령은 16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총리,쉬플리 뉴질랜드총리,고촉동(吳作棟)싱가포르총리 와 연쇄 정상회담을 갖고 각각 양국관계 증진방안과 공동관심사에 관해 논의한다. 金대통령은 특히 이들과의 회담에서 아시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미·일·중 등 경제대국의 적극적인 협력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할 예정이다.또 개발도상국들이 처한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시장경제에 따른 개혁과 개방이 실현되어야 하고 단기자본(헤지펀드)의 급격한 이동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할 예정이다. 아울러 두나라간 교역 및 투자증진 방안 등 현안에 대해서도 협의할 계획이다. 金대통령은 17일에도 하워드 호주총리,크레티앙 캐나다총리,프레이 칠레 대통령과도 개별정상회담을 갖는다. 金대통령은 이어 20개국 정상들과 함께 APEC 공식환영행사에 참석한뒤 주최국인 말레이시아 마하티르총리가 주최하는 리셉션 및 만찬에 참석한다. 이번 APEC 정상회의는 회원국간 무역 투자 자유화 및 경제 기술협력 금융안정 전자상거래와 APEC의 향후 발전방향 등 5개 의제를 논의하게 된다. 이에 앞서 상하이(上海)에서 金대통령은 한·중경제인 초청 연설회에 참석,“중국이 위안(元)화 가치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다른 나라 통화가치의 연쇄 하락을 막아낸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15일 ‘상해 임시정부 청사’시찰을 끝으로 4박5일동안의 중국 국빈방문 일정을 마감했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中)

    ◎삼탑진의 ‘노병’들 숙연한 묵념/“외롭게 죽어간 김학규 장군” 눈시울 붉혀/의연하고 용감했던 그날의 동지들 추모/옛 서안 사령부 터엔 재개발 앞둔 건물만 광복 투쟁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독립유공자협회 일행들의 여정은 장쑤성(江蘇省)쉬저우(徐州)에서 안후이성(安徽省)푸양(阜陽)으로 이어졌다.베이징(北京)출발 4일째인 10월10일이었다.푸양까지는 400리 남짓.당시 푸양은 쉬저우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국군의 최전방 거점.적진 깊숙이 뛰어들어 병력을 교란시키고 갖가지 정보를 모으는 일은 광복군의 몫이었다.산타쩐(三塔鎭) 샤오자오쭈앙(小棗庄)마을.제법 번화한 푸양시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반세기전과 다름없는 중국 농촌 그대로였다.‘마지막 독립군’들의 지하공작 본부가 이곳에 있었다.노 광복군들의 눈시울은 금세 붉게 젖었다.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숙연한 묵념이 이어졌다.“지하공작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살해된 韓聖洙 동지의 명복과 독립운동의 영웅이면서도 쓸쓸한 말로를 맞았던 광복군 제3지대 사령관金學奎 장군을 위해” “금방이라도 ‘이 사람들!’하고 외치며 나타날 것만 같은 옛 동지들…”.일본군에서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일본 專修大 졸업생 韓聖洙씨는 상하이에서 정보를 캐다 희생됐다.“韓동지는 체포된 뒤에도 일본말을 쓰지 않아 통역을 거쳐 심문받았다.난징(南京)형무소에서 목이 잘려 죽을 때까지 일본인들을 꾸짖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곳서 주로 활약했던 광복군은 20여명.일행중엔 광복회 부회장을 지낸 金祐銓 회원,全履鎬 회원 등 학병 출신과 일본 점령지역을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했던 金國柱 부회장,金九 선생 비서로 일했던 鮮于鎭 선생 등이 끼어있었다. 43년부터 해방때까지 지하공작 활동을 벌였던 金國柱 부회장은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 등 일본 점령지역을 오가며 정보를 캐고 거주 한국인들을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일본 헌병에게 불심검문 받고 유창한 중국어로 딴전 피웠던 기억,가까스로 마련한 군자금 등 이들의 기억은 끝없이 이어지는듯 했다. 일행은 당시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의 미국 첩보기구 전략사무국(OSS)을 오가며 광복군과의 군사협력 등 연락업무를 맡았던 金祐銓 회원의 무용담을 들으며 산시성(陝西省)의 시안(西安)으로 향했다. 시안은 광복군이라면 영영 잊을 수없는 대일 항전의 聖地.충칭에 이어 두번째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터 잡았던 곳이다.사령부 건물은 시안시 중심부 난위엔먼(南院門) 부근에 있었다.지금은 ‘시안시 공산당 위원회’ 건물과 번화한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광복군 시안시대의 본거지였던 얼부지에 4호는 간이건물에 음식점들이 빽빽히 들어선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 역시 쉬저우나 푸양,린촨(臨泉)에서 처럼 광복군의 자취가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었다.“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 다음 세대들에게 독립군의 투쟁 정신과 역사를 전할 수 있었으면…” 이 다음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며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린곳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시안을 뒤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직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노 광복군들은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했다. ◎광복군 총사령부/1940년 重慶서 발족 두달만에 西安으로 옮겨 광복군 총사령부는 광복군들에겐 따스한 고향이요 용기의 원천이었다.총사령부의 운명은 조국의 처지만큼 순탄치 않았다.총사령부가 발족된 것은 40년 9월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였다.나라 잃은 군대에게는 편안한 나날이 없었다. 태어난 지 두달여만인 그해 11월말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옮긴다.시안은 중국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던 전략 거점지.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위해서였다.일본군 점령지역이 가까워 정보수집과 한국인 포섭 등이 가능했다. 총사령부라고 해야 시안시 난위엔먼 지역과 얼부지 부근의 허름한 주택이 고작이었다.그나마 42년 9월에는 비워 주어야 했다.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중국이 광복군의 행동을 통제하려했기 때문이었다. 2년여의 시안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광복을 맞았다.충칭시 쩌우룽로(鄒容路)에는 총사령부로 쓰였던 건물이 있다.의혈 남아들의 집결지였던 그 곳은 지금도 허름한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다. ◎白波 金學奎 장군 광복군 제3지대장/일군 맞서 눈부신 전과울린 광복군 대부 광복군 제3지대장 白波 金學奎 장군은 총사령관 李靑天,참모장 李範奭과 함께 광복군의 대부였다. 李範奭 참모장이 지대장으로 지휘한 제2지대가 유격전을 주로 폈다면 金學奎 장군의 제3지대는 정면에서 맞서 싸웠던 광복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장군이 항일전선에 투신한 것은 1919년.19살의 나이로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32살이 되던 32년까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40년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족하자 핵심 참모로 참여한다. 그러나 사령부에만 안주하지 않았다.중국군 인맥을 활용,일본군서 탈출한 젊은이들을 린촨(臨泉)의 중국 중앙군관학교로 모아 주도록 했다.그들을 모아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서 독립의 간성으로 양성했고 제3지대를 창설했다. 광복후 白波는 평생 몸바쳐 싸웠던 조국에 돌아 왔지만 李承晩 정권과 불화를 빚으며 옥고를치렀다.67년 돌보는 이도 없이 67세를 일기로 서울의 모래내 한켠 판자집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군 OSS/미국식 훈련… 한반도 상륙 준비 정예부대 OSS는 한때 전략사무국이란 이름으로 운영됐던 미군의 최정예 첩보기구.적진 깊숙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첩보요원을 침투시켜 군사 정보를 탐지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광복군 OSS’는 미국식 OSS요원 훈련을 받은 40여명의 정예 광복군들.45년 3월부터 광복될 때까지 중국에 파견된 OSS의 지원을 받아 특수훈련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등 연합군은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했고 한반도 사정에 밝은 광복군 OSS요원들을 침투시켜 교두보를 확보하게 할 계획이었다. 훈련장은 광복군 제2지대 사령부를 겸해 시안에서 남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뚜취쩐(杜曲鎭) 쓰포춘(寺坡村)에 있었다.일행들이 현장을 찾았을때 훈련장 터는 농촌마을을 이루고 있었다.이곳서 가까운 終南山 산기슭위에는 반갑게도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원측법사의 사리탑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젊은날 ‘지옥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며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아로새기던 곳.“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金柔吉 부회장과 광복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石根永 회원은 회고했다. 광복군 OSS 요원의 활약은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광복군들은 조국 광복을 감격과 함께 회한을 안고 맞았다.스스로의 힘으로 찾지못한 광복이었기에 자결권 제약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쓰포춘의 OSS 훈련장을 뒤로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들은 “광복군의 한반도 상륙이 성사됐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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