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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해 ‘이달의 독립운동가’ 13명 선정

    저항시인 윤동주,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부회장을 지낸 권동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활동한 이위종 등 13명이 2007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21일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발표했다. 내년이 신민회 창건과 국채보상운동, 헤이그특사 파견 100주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관련 인물들이 대거 뽑혔다.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임시정부 연통제 참사를 지낸 임치정,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서상돈 등이 대표적이다. 순국 100주년을 맞는 의병장 정환직·권득수, 탄생 150주년을 맞는 구춘선 북간도 대한국민회 회장, 좌·우합작 여성운동단체 근우회를 창립한 조신성 등도 함께 뽑혔다. 보훈처는 국민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포털사이트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카페(cafe.naver.com//bohunstar)를 개설,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월별 독립운동가 명단이다. 임치정(1월), 김광제·서상돈(2월), 권동진(3월), 손정도(임시정부 교통총장·4월), 조신성(5월), 이위종(6월), 구춘선(7월·대한독립군단 결성), 정환직(8월), 박시창(9월·한국광복군 상하이지대장), 권득수(10월), 주기철(11월·신사참배 거부 옥사), 윤동주(12월).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기고] 순국선열들이 있었으매/박유철 국가보훈처장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 나라를 찾고자 목숨을 바치고 풍찬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잡아 죽이고 곤죽을 만듦으로써 영달과 편안함을 취하고 있었다면 선열들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찾고자 애썼고 목숨을 바쳤던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쓴 ‘거룩한 응달’의 일부다. 오늘은 예순일곱 돌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소크라테스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일 것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된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고자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 모태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게 되자 조국 광복을 위해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은 오직 하나로 수많은 선열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미얀마 인도 등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었다.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3·1운동 임정활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외교투쟁 등의 항일 독립운동이 광복을 맞기까지 50여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일본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에 맞서 국내외에서 희생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열들의 순국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 발전의 동인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참다운 시대정신이다.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신 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정신,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이기심을 버리는 멸사봉공의 정신, 이런 정의의 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삶의 지표다. 100년 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가 이제 차기 유엔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으니 세계 외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순국선열들의 값진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은 세계 속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극단적인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정의의 정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더불어 세대와 계층, 지역간의 벽을 넘어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선진한국 건설의 기반을 튼튼히 조성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보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보훈은 만년지대계(萬年之大計)라 했다. 정부는 국민이 공감하는 미래지향적 보훈체계 확립과 수준 높은 의료·복지체계 구축, 국민과 함께하는 나라사랑 정신의 확산 등 한 차원 높은 보훈정책을 펼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 수난과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국선열의 날에 우리는 오늘의 사표가 되는 애국선열들의 순국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독립운동가 154명에 훈·포장

    정부는 제67회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15일 국무회의를 통해 일제 강점기 러시아 지역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민환(1899∼1973) 선생 등 15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을 추서키로 결정했다.이 중 생존인사는 없으며, 여성이 3명이다. 조선공산당 만주 비서부 조직부장을 역임한 한봉철(1898∼1936)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인사 24명도 포함됐다. 홍파(洪坡) 선생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민환 선생과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봉철 선생 등 2명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러시아 지역의 대표적 무장투쟁가인 박일리아(1891∼1938) 선생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정의 주요 인물로 1920년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한 홍도(1895∼?)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독립운동가 손정도 선생의 모친이자 대한애국부인회 총재를 지낸 오신도 여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전남 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게 된 이주상(1867∼1902) 선생과 광주 숭일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한편, 독립선언서를 배포해 건국포장을 받게 된 이창호(1902∼1931) 선생은 부자지간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로써 이주상 선생 집안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장남 이윤호 선생을 비롯해 3부자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게 됐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책꽂이]

    ●새로운 한국식물도감(이영노 지음, 교학사 펴냄) 전세계에서 나는 식물은 대략 20여만종. 그 중 한반도에서 나는 관속식물은 4000여종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종자식물과 귀화식물, 양치식물, 원예식물 등 한반도에 야생하는 식물들이 망라됐다. 식물용어는 되도록 쉽게 풀어 썼으며 사진은 식물의 특징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 식물이름이 흉한 느낌을 주는 개불알꽃은 복주머니란으로, 풀솜대와 석산은 각각 지장보살(전남 구례의 지방명), 꽃무릇(전남 백양산 근처의 지방명)등 정다운 지방 특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등 새로운 감각을 살렸다. 전2권. 한 세트 30만원.●현대 고고학의 이해(콜린 렌프류·폴 반 지음, 이희준 옮김, 사회평론 펴냄) ‘삽의 증언’이라 불리는 고고학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다룬 현대고고학 개설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열형광연대측정법,GIS와 DNA연구기법 등 과학적 기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과정주의고고학이라 불리는 ‘신고고학’, 인지고고학, 공공고고학 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고고학에 관한 최신 논의들이 실렸다.4만원.●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한스 할터 지음, 한윤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성인들의 유언은 감동스러운 데가 있다. 공자는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 구나.”라고 끝맺었다. 폭군 네로는 “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칭기즈칸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라고 말한 뒤 저세상으로 갔고, 대영제국의 초석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며 자신을 뒤돌아봤다.“다시 볼게요. 다시 보자구요.”라는 한없이 슬픈 유언은 마릴린 먼로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의 유언 백과사전.1만 8500원.●도산 안창호 평전(이태복 지음, 동녘 펴냄)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삶을 조명. 도산은 1898년 평양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18개 쾌재와 18개 불쾌로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규탄하고 외세의 침탈에 대응할 것을 호소하면서 이름을 알렸다.1907년에 신민회를,1913년에 흥사단을 조직했으며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았다. 일부에선 도산을 단순한 인격수양파, 무장투쟁론에 반대한 준비론자, 조선혁명이 아닌 개량주의자로 규정하지만 도산이야말로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구체화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주장이 담겼다.1만 5000원. ●로맹가리(도미니크 보나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다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자 외교관, 전쟁영웅이었던 로맹가리. 참전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명성을 얻은 그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공쿠르 상을 수상,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로 기록됐다. 이 전기에는 24살 연하 진 시버그와의 운명적 사랑 등 일화도 실렸다.1만 8000원.
  • 김규식 선생 차남등 임정요인 유가족 26명 분단이후 첫 北국립묘지 성묘간다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임시정부 요인 유가족이 추석을 맞아 북한의 국립묘지에 안치된 조상들을 성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다고 통일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28일 밝혔다. 항일 독립운동을 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가족 등 50여명은 자신들의 조상이 안치돼 있는 북한 애국열사릉과 재북인사릉을 방문하기 위해 30일 방북해 다음달 4일 귀국한다. 애국열사릉은 김일성 주석의 가계인물과 ‘항일 빨치산’ 1세대가 묻혀 있는 혁명열사릉과 함께 북한의 ‘국립묘지’로 분류되고 있으며, 재북인사릉은 납북 인사들이 안치돼 있는 곳이다. 재북인사릉은 방문에 별다른 제한이 따르지 않지만 애국열사릉은 남한 당국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혁명열사릉 등과 아울러 ‘참관·참배 금지’ 리스트에 올라 있다. 북한은 장관급 회담 등을 통해 ‘상대측 지역을 방문하는 자기 측 인원에 대해 참관지 자유방문을 허용하라.’고 요구해 왔다. 지난해 8·15 행사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북측 당국. 민간 대표단이 우리측이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기도 했다. 따라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남한 유가족이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안치된 조상을 성묘하면서 이산가족들의 방북 성묘와 남북 간 참관지 논의에 새 전기가 될 전망이다. 임정요인 유가족 성묘단은 이런 점을 감안해 애국열사릉에 모셔진 인사의 가족들은 집단적으로 묘역 제단에 참배를 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해당 조상묘를 찾아 성묘하기로 하고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통일부 관계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독립정신을 추모하고 후손들이 조상의 묘소를 찾는 순수한 의미를 고려해 방북을 승인했다.”면서 “성묘 이외의 단체 참배 등 행위가 이뤄지지 않도록 각별히 강조했다.”고 밝혔다. 성묘 대상은 김규식 부주석, 김상덕 문화부장, 김의한 외교위원, 안재홍 청년외교단 총무, 윤기섭 군사위원장, 장현식 자금조달, 조소앙 외교부장, 조완구 내무부장, 최동오 법무부장 등 임정에서 요직을 맡았던 9명이다. 이들은 모두 정부가 독립장, 애국장, 대통령장 등 훈·포장을 주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공적을 기리고 있는 인물이다. 이번 성묘단에는 김규식 선생의 차남인 진세(78·미국 거주)씨를 비롯해 26명의 유가족들이 참가한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문화마당] 우리나라 공식국명은 대한민국이 아니다/허동현 경희대 한국사 교수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하고 만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 되기를 열망하던 민족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도둑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온 해방의 감격도 잠시뿐 미국과 소련이 펼친 냉전의 덫에 걸려 민족은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냉전이 깨진 지 오랜 오늘, 통일은 해방처럼 어느 날 눈앞에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둘이 하나 되는 그날이 오면, 아니 지금도 왠지 ‘대한민국’이 풀뿌리 시민사회를 이룬 우리의 현재를 대표하는 국명으로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국회에서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던 새 나라의 국호는 아니었다. 당시 ‘고려공화국으로 하자.’, 아니 ‘조선공화국이 좋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국명이 나쁘다고 독립이 잘 안 되는 게 아니니, 차차 국정이 정돈되고 나서 대다수의 결정에 의해 그때 법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이승만 대통령의 설득이 주효해 잠정적으로 대한민국을 국호를 삼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지 두 달 뒤에 터진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 이후 나라를 앗긴 황제의 존재는 기억의 저편 망각의 늪에 빠져버렸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웅변하듯, 그때 이미 우리는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공화국을 꿈꾸지 않았었나? 그렇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단절의식을 함축하는 반어적 국명이다. 역설적이게도 제헌국회에서 국명을 논의할 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며 ‘대한민국’을 최초로 제안했던 신승우 의원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소극(笑劇)을 연출한다. 대한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종속국이 아니라 자주국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국호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를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일으켜 막은 후 이루어진 러·일 두 나라 사이의 세력 균형 위에 세운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모습보다 크게 보이려 소 앞에서 억지로 배를 부풀리다 소에게 밟혀 죽는 이솝우화 속 개구리를 떠올려 보라. 인간이건 나라건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는 자화자찬은 듣는 이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법. 대한제국은 외세에 기대어 명맥을 이으려 한 왕조의 유약함을 상징한다. 개구리 배 부풀리기 식의 자대(自大)나 타력을 빌리려는 책략만으로는 덩치 큰 포식자들이 날뛰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돌아온 열강쟁패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덩치 큰 포식자들에 맞서 배 부풀리기를 하는 자대도 아니고, 강자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굴종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번영과 생존을 지켜줄 현명한 책략과 견실한 자강,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줄 자긍이 더없이 요청되는 오늘이기에, 허장성세의 대한제국을 연상케 하는 대한민국보다는 제헌국회에서도 제기된 바 있던 고려공화국이란 국명이 더 살갑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란의 침공에 맞서 나라를 지킨 강감찬의 신출귀몰하는 전략과 세치 혀만으로 침략군을 물러서게 한 서희의 협상력에 목마르기 때문이요, 세계제국 몽고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60년 항쟁을 벌여 나라를 지킨 고려인의 불굴의 의지가 그립기 때문이요, 밖을 향해 활짝 열린 국제무역항 벽란도와 남녀 간의 자유연애를 노래한 고려가요의 개방성이 한 마을이 된 지구에서 양성평등사회를 꿈꾸는 우리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요, 세계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문명이라고 뽐내는 중화(中華)에 맞서 높고 아름답다며 또 다른 문명의 빛임을 자긍한 고려(高麗)의 함의가 오롯이 다가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외적 공식명칭 Republic of Korea와 합치하는 고려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사 교수
  • 최근 개교 美 LA ‘찰스 H 김 초등교’ 독립운동가 김호선생 이름따

    미국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생겼다. 로스앤젤레스통합교육구(LAUSD)는 12일(현지시간) 교육위원회를 열고 최근 개교한 코리아타운 내 ‘코행가 초등학교#1(임시명)’을 ‘찰스 H 김 초등학교’로 이름 짓는 안을 상정, 통과시켰다. 미국에서 아시아계의 이름을 딴 학교가 문을 여는 것은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 초등학교(교장 샌드라 김)는 그동안 학부모, 교사, 각계 인사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17개 학교명 후보를 놓고 평가 작업을 벌여 왔다.‘찰스 H 김’은 독립운동가 김호(본명 김정진·1884∼1968) 선생의 미국명이다. 경기고 1회 졸업생으로 한국 정부가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LA한인회의 전신인 한인커뮤니티센터를 설립, 상하이 임시정부 후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에는 농장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유학생을 지원하는 등 한인사회의 교육 발전에 앞장섰다. 로스앤젤레스 연합뉴스
  • ‘동북공정 저지’ 범국민연대 결성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족회와 민족진영 총연합 등 30여개 민족·역사단체들은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독립유공자 유족회 사무실에서 ‘동북공정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가칭)’를 결성하고 향후 공동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범국민연대는 “한강 이북이 자신들의 국가였다는 중국 주장은 북한을 지배하기 위한 포석으로 한반도를 영원히 분단시키려는 책략”이라며 “현재의 동북공정 사태는 역사에 무지하고 무개념으로 일관해온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이들은 동북공정에 항의하는 1000만명 서명운동을 인터넷에서 전개하고 대규모 결의대회와 학술대회 개최, 동북아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범국민연대에는 겨레사랑하나되기운동본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광복군 동지회,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발해 1300년 기념사업회, 한국역사문화연구소 등이 동참했다. 13일에는 국학운동시민연합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등 4개 단체가 서울 종묘공원에서 ‘중국 동북공정 저지 범국민대회’를 개최한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中 항저우임정기념관 준비작업위원 내한

    中 항저우임정기념관 준비작업위원 내한

    개관을 눈앞에 둔 항저우임시정부기념관 준비작업위원회가 마무리 작업을 앞두고 6일 방한했다. 왕광룽 항저우시 인민정부 부비서관을 대표로 한 준비위원회는 백범 김구기념사업회장이자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선생을 만나 지금 짓고 있는 기념관의 복원·배치 과정을 설명하고 또 기념관을 채울 전시물에 대해 협조를 요청했다. 항저우시는 이르면 올해 말, 늦으면 내년 초 개관을 목표로 이미 지난 5월 양국이 논의한 기념관 복원·배치 방안을 통해 임정청사와 기념관의 뼈대 공사는 마무리했다. 항저우에 기념관이 들어서면 중국 내 임정기념관은 상하이·충칭과 함께 3개가 된다. 항저우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때문에 쫓겨다니던 임정이 머물렀던 곳이다. 위원회는 7일에는 국가보훈처,8일에는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뒤 10일 귀국길에 오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동호선생 52주기 추모식·학술포럼

    유정 조동호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52기 추모식 및 민족독립운동 학술포럼을 11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내 독립관 강당에서 갖는다. 유정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광복 직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지난해 3·1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 [독자의 소리] “애국지사는 이분들 덕에 행복해요”/ 박현채

    저는 일제 말기인 1943년 광주사범학교 재학중에 비밀결사 무등독서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활동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입니다. 평소에 국가에서 지원하는 혜택을 많이 받고 있기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선행을 알리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지난 8월18일은 저의 82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이날 손자, 손녀들로부터 축하 노래와 선물을 받는 등 가족들과 생일 모임을 갖고 있는데, 뜻밖에 광주보훈청장이 국가보훈처 장관이 보내는 화환과 케이크를 들고 직접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내가 나라에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다니….” 새삼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계기였습니다. 특히 국가보훈처는 작년 여름부터 치매나 중풍 등 노인성 질환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국가유공자 등에게 가사 간병서비스를 지원하는 보훈도우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노령이고 거동이 불편한데다 아내마저 아파서 지원대상자로 선정됐다고 합니다. 광주보훈청에서 도우미교육을 철저히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도우미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청백하다고나 할까, 정이 넘쳐 흐른다고나 할까. 고마운 표시라도 하려고 하면 오히려 이쪽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거절하곤 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고 보수도 넉넉히 받고 있다.’는 도우미의 교양과 식견, 정서는 정말 감동적입니다. 현재 아내는 위암 3기입니다. 얼마전 도우미(허정순·40)에게 열쇠를 맡기고 일주일간 보훈병원에 입원했는데 도우미가 문단속 등 집안 일을 어찌나 잘해주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만 합니다. 대소변 빨래는 물론 약 끓이기, 청소하기, 목욕시키기 등 많은 일들을 주어진 시간 안에 척척 해내고 있습니다. 돈을 주고 부르는 파출부라도 어찌 이런 일을 다 해낼 수 있으며, 자식인들 어찌 눈 한번 찡그리지 않고 이런 일을 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장관에서부터 도우미에 이르기까지 보훈 업무를 처리하는 관련자 모두의 덕분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분들이 있기에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박현채 <광주시 북구 일곡동>
  • [씨줄날줄] 오데르-나이세/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압록강과 두만강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정서의 대상이다. 한민족 발흥의 초창기인 고조선·고구려 시대에는 ‘민족의 젖줄’이었고, 만주에서 일어난 청나라가 중국 땅을 다스리던 근현세에는 외부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했다. 그래서 1938년에 나온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이 여태껏 한국인 애창곡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가 압록강·두만강에서 느끼는 감정을 독일인들은 오데르-나이세강에서 실감할 것이다. 오데르강은 체코의 오데르 산맥에서 발원해 북쪽의 발틱해로 흐르는 길이 850여㎞의 큰 강이고, 나이세강은 수데텐 산맥에서 시작해 북서쪽으로 달리다 오데르강에 합류하는 강이다. 이 오데르-나이세강이 현재 독일과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국경선이다. 독일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오데르-나이세강의 동쪽 10만 3000㎢(남한 면적 9만 9000㎢)는 독일 영토였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게르만의 대이동’전에 그들의 조상이 이 지역에 살았다고 믿었기에, 그곳은 민족 발상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의 통치권은 그러나 1945년 7∼8월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폴란드 임시정부에 넘어갔다. 대전 중에 폴란드 접경지대를 상당 부분 점령한 소련이 그 대체 영토로 이 땅을 폴란드에 넘긴 것이다. 미국·영국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잠정적’이라는 조건 아래 소련측 요구에 동의했다. 독일인들에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폴란드 정부가 그 지역에 사는 독일인들을 본토로 강제 ‘이송’하면서 쓴 방식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어, 최대 200만명에 이르는 독일인이 ‘이송’ 도중 사망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독일인으로서 오데르-나이세 동쪽 땅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은 1990년 7월 정식으로 확정됐다. 통일을 앞둔 서독 정부가 폴란드의 점유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과, 그에 따른 손실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이처럼 영토 상실마저 받아들였다. 그런데 반성은커녕 아직도 독도를 제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국민의식은 언제쯤 깨어날 것인가.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일부 후손들 “고국에 영구 귀국 않겠다”

    광복절을 맞아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프로코피씨 등 17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이 이제서야 이들을 반겼지만, 이들은 고국에 영구귀국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한세기 가까이 일가가 이국생활을 하며 그 곳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70이 넘은 고령에 말과 사람이 낯선 조국에서 새로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입국했을 때 받는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다. 형제가 한명도 없을 때 후손이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정착지원금이 7000만원이다. 형제가 많으면 가구별로 받는 지원금이 줄어든다. 해외에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얼마나 되는지 어림 통계치도 없다. 지난해까지 국가보훈처는 해외에 있는 유공자 후손 381명을 찾아 고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17명의 후손들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찾아왔다. 후손 가운데 에피모바 류드밀라(70)씨는 고종의 밀령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갔던 이위종의 손녀다. 일제의 방해공작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위종은 만국기자협회 회견을 통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알렸다. 황빅토르(58)씨는 192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 500여명의 시위를 주도했던 황경섭의 손자다. 황경섭은 같은 해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던 4월참변 때 최재형·김이직·엄주필 등과 함께 사살됐다. 황경섭과 함께 사살됐던 최재형은 9살이던 1867년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에 귀화해 관리로 성공했다. 그는 연봉을 은행에 예치해 교포 장학금을 만들었고,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근거지로 무장투쟁 준비를 했다. 이번 고국 방문단에는 최재형의 손자인 최 세르게이(29)씨도 포함됐다. 1919년 간도 무관학교에서 신식군대를 양성하고 1922년 고려혁명군 사령관을 지낸 김경천의 손녀 필란스카야 갈리나(43)씨도 이번에 고국에 왔다.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던 독립운동가 김화영의 자녀 신순향(70)씨 부부도 고국을 방문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금강산에 통일 염원 새기고 왔어요”

    대학생들이 동강난 한반도의 허리를 도보로 넘어 광복 61년의 아침, 금강산에 남북통일의 염원을 새기고 돌아왔다. 국민대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국토大장정’에 참여한 140명의 학생들이 12박13일의 장정을 마치고 15일 서울로 귀환했다. 이들은 지난 3일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출발, 임진각∼파주∼가평∼양구∼고성을 통과해 금강산까지 320㎞를 걸어서 다녀왔다. 중간중간 걸을 수 없는 출입제한 구역을 빼고는 모든 일정을 도보로 소화했다. 총학생회와 학교측이 공동으로 연 이번 행사는 학교 설립을 주도한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건학정신을 되새기고 통일의 염원을 확인하자는 뜻에서 마련됐다. 지난해에는 독도까지 국토를 종단하는 행사를 했었다.국민대는 1946년 김구, 이승만, 신익희 선생 등 임정 요인들이 새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자며 서울 종로 창성동에 세운 국민대학관이 모태(母胎)다. 초대 학장은 신익희 선생이었다. 이승구 학생지원팀 과장은 “전체 학생 중 7명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금강산까지 무사히 다녀왔다. 뭔가 해보겠다는 학생들의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많은 주민들이 쉴 자리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줘서 너무나 고마웠다.”고 말했다. 김명연 총학생회장은 “무더위 속에서도 우리의 도전정신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북한 땅을 처음 밟아보고 울컥했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부동산명의신탁 논란 재연

    한 지방법원의 판사가 명의신탁 후 재산복원을 인정할 수 없다고 대법원의 판례와 배치되는 판결을 내리면서 대법원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서울서부지법 이종광 판사는 지난 9일 부동산 강제집행을 피하기 위해 외삼촌 정모씨에게 부동산 소유권을 넘긴 박모씨가 “명의신탁된 부동산을 되돌려 달라.”며 정씨를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에서 “불법적 목적의 소유권 이전에 대해 명의 회복을 요구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명의신탁 물려줄 유산 못돼 이번 판결은 타인 명의의 부동산 거래를 일종의 관습으로 인정해 온 대법원 판례와 배치되는 것으로 법원 안팎에서도 파문이 예상된다.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강제집행을 면할 목적으로 부동산 명의를 신탁하는 경우는 불법원인급여가 아니고, 양도소득세 회피 방법으로 명의신탁한 것이라도 무효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적용하고 있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정부가 명의신탁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도입한 부동산실명제가 시행 10년이 넘어가지만 대법원은 명의신탁의 유효성에만 집착해 신탁자의 재산을 보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이 오히려 부동산실명제의 정착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면이 없는지 살펴볼 시점”이라고 화두를 던졌다. 이 판사는 “법원은 이름을 빌린 사람과 빌려 준 사람 사이에 누가 보호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부동산 소유권을 대내ㆍ대외적으로 나누는 세계에 유례 없는 이론이 나왔지만 명의신탁 제도는 후세에 물려줄 자랑스러운 유산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판결문 말미에서는 “수천억원의 형사추징금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이 재산이 29만원밖에 없어 추징금을 납부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자식들은 수억원대의 부동산을 갖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우리의 사법 현실”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타인의 이름을 빌려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정당한 세금을 타인의 명의를 빌려 포탈하고 그 돈으로 투기를 하다가 빚을 지면 재산을 타인의 명의로 해둠으로써 채권자가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은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의신탁 판례 변경될까 1995년 부동산 실명제가 도입되면서 무효가 된 명의신탁에 대한 논의는 계속돼 왔다.2003년 11월 당시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부장 조희대)는 “명의신탁 약정은 온갖 탈법·위법 행위의 수단으로 악용돼 왔고 부동산실명법에 반하기 때문에 무효이며 사회질서에 반하는 불법원인에 의해 신탁한 소유권은 되돌려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도박 등 불법행위에 사용될 줄 알면서 빌려 준 돈은 받을 수 없다는 논리와 같다. 하지만 같은 시기 대법원 1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또 다른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명의신탁 그 자체로 선량한 사회질서에 위반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명의신탁자에 대해 행정적 제재나 형벌을 부과하고 있으므로 타인 명의로 등기가 완료됐다는 이유만으로 불법원인급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면서 “명의신탁한 부동산은 부당이득에 해당하므로 되돌려 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당시 하급심의 판결은 상고가 되지 않아 대법원에서 논의되지 않았고 이런 취지의 대법원의 판례가 유지돼 왔다. 따라서 이번 판결과 같이 대법원의 판례와 달리하는 하급심의 판결들이 상고가 돼 대법원에서 다시 심리할 경우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례가 변경될지 주목된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이종광 판사는 이종광(38) 판사는 지난해 11월 수원지법에서 재직할 당시 친일파의 후손이 제기한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기각,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 환수에 제동을 걸어 주목을 받았다. 이 판사는 “친일재산은 3·1운동의 정신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었다. 이 판결을 위해 그는 1년간 역사 공부를 하고 석달간 판결문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시 36회로 연세대 법대 87학번인 이 판사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중시해 형사재판부에 있을 때 다른 판사들보다 무죄를 선고한 사건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중) 연합국 ‘한국 독도영유권’ 인정 전말

    [신용하 교수의 ‘독도와 EEZ’] (중) 연합국 ‘한국 독도영유권’ 인정 전말

    1. 연합국의 독도 한국영토 판정과 독도 반환 1943년 11월 미국·중국·영국 등 3대 연합국 수뇌들은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전 후 연합국정책을 담은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 빼앗은 타이완과 팽호도,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빼앗은 모든 영토, 폭력과 탐욕으로 빼앗은 모든 다른 지역에서 일본을 축출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서 연합국은 1945년 7월26일 포츠담에서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의 이행과,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임을 공약했다. 일본은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9월2일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일본정부와 그 승계자가 성실히 수행할 것을 확약했다. 이에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과 일본 항복문서를 통해 일본에 구속력을 갖게 됐다. 연합국은 1945년 9월2일 국제법상의 기관으로서 연합국최고사령부(SCAP)를 설치, 구 일본제국이 1894년 1월1일 이후 빼앗은 모든 영토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연합국은 한반도를 일본에서 제외해 반환시키고,1946년 1월29일에는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제3항에서 제주도·울릉도·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 주한 미군정에 이관시켰다. 한국이 독립하면 즉각 인계인수하도록 한 것이다(지도 (1) 참고).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SCAPIN 제1033호를 발표,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일본 어부들의 접근을 막으며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거듭 명백히 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2월12일 국제연합 총회는 당시의 영토(독도 포함)와 주권을 승인했다. 독도도 다른 영토와 함께 대한민국 주권에 속한 영토로 공인받은 것이다. 2.‘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독도는 한국 영토 연합국은 일본을 1952년 독립시키기로 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키로 했다.1950년에는 강화조약의 ‘준비작업’으로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 합의했다.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본문 해석이 모호하거나, 차이가 발생할 경우 지침(조약법에 대한 빈협정)이 되므로 매우 중요한 합의였다. ‘연합국의…합의서’는 제3조에서 “연합국은 대한민국에 한반도와 그 주변의 한국 섬들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이양하기로 합의했으며, 그 섬에는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를 포함한다.”고 규정했다(지도 (2) 참조). 만일 강화조약 본문에 모호한 점이 생기면 준비작업인 이 합의서가 해석 기준이 되는 것이다. 3. 조약초안 작성 때의 일본의 독도 침탈을 위한 로비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은 처음 미국이 작성했는데,1∼5차 미국 초안까지는 합의서에 따라 독도를 명백하게 한국 영토로 명기했다. 그러나 제5차 미국 초안을 본 일본 임시정부가 미국인 고문 시볼드를 내세워 맹렬한 로비에 들어갔다. 로비의 미끼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넣어주면 독도를 미국 공군의 기상관측소와 레이더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독도는 원래 무주지였고 한국에는 독도에 대한 명칭조차 없으며,1905년 한국정부와 국민의 항의를 전혀 받음이 없이 새로 편입된 일본영토라고 거짓 근거를 붙였다. 이에 미국측은 일본측의 로비를 받아들여 제6차 미국 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내 일본 영토에 포함시켜서 연합국에 회람시켰다. 영국·호주·뉴질랜드 등은 제6차 미국 초안에 반대했다. 한 나라의 국가이익을 위해 연합국의 합의를 위반해서 독도의 소속을 옮기면 동아시아에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이었다. 미국측 내에서도 전문가들은 독도가 한국영토이므로 한국 영토로 명시할 것을 권고했다. 난처해진 미국은 7·8·9차 초안에서는 아예 독도 명칭 자체를 한국과 일본의 영토에서 모두 누락시켜 버렸다. 조약 초안에 ‘독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국측은 이에 반발, 독자적으로 1·2·3차 초안을 작성하고,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당황한 미국측은 영·미 합동 초안을 작성하자고 영국측에 제의하여, 결국 수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영·미 합동 초안이 단일안으로 작성됐다. 여기선 ‘독도’ 명칭 자체를 누락시키고 애매모호하게 처리해 본회의에 상정해 채택시켰다.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본문에서 ‘독도’ 명칭이 누락된 배경이다. 4.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 명칭 누락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은 연합국의 대 일본강화조약 제2조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만 기술했다. 독도는 그 밖의 모든 섬과 함께 기술되지 않았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직후 일본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내 일본영토 조항 안에 명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강화조약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귀속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1952년 5월 ‘대(對)일본평화조약’상의 지도를 발간했는데 독도(죽도)를 일본에서 제외된 조선영토로 표시했다(지도 (3) 참조). 그러다가 1952년 4월28일 일본 재독립을 전후해 일 외무성은 강화조약 2조에 일본이 포기하는 섬에 제주·거문·울릉도만 기술되고 독도가 빠진 것은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묵인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1952년 1월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통치 평화선 선포)을 발표하자, 일 정부는 열흘 후 평화선 안에 있는 독도(이른바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이렇게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은 시작됐다. 5.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 일본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이 포기하는 섬 이름에 독도가 누락돼 있어 독도는 일본이 포기하지 않은 일본영토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 주장은 광범위한 반론과 비판을 받았다. 한국정부의 공식적 비판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기 때문에 독도영유는 모도(母島)인 울릉도 영유국가의 영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주변에 거의 3000개 가까운 섬들이 있는데, 이를 모두 조약문에 쓸 수 없으므로 일본 방향의 대표적 섬으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만 든 것이었다. 제주도의 일본 방향에 우도(牛島)가 있는데 조약문에 제주도만 기술돼 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국제사회는 한국정부의 국제법상 ‘부속도서론’에 입각한 해석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독도를 한국영토로 해석했다. 신어업협정 이전까지 대부분의 세계 지도들에서 ‘Dokdo’로 표시했다. 일본은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섬이 아님을 세계에 내보이려는 노력에 집중하게 되었다. 6.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한국영토 연합국의 독도에 대한 판정과 정책은 1945년 1월29일부터 1952년 4월28일까지 독도는 한국영토라는 하나의 일관된 합의에 의거한 것이었다.1894년 1월1일을 기준으로 그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영토 야욕으로 침탈 또는 편입한 모든 땅은 일본영토에서 제외하여 원주인에게 반환된 것이 연합국의 합의와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거해서 일제가 영토탐욕으로 1905년 1월28일 한국에서 침탈한 독도는 한국에 반환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 수립되어 연합국(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인계인수한 그날부터 독도의 영유국가는 대한민국이고, 이 사실은 그해 12월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공인받았다. 연합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호도한 것으로는 이미 1948년에 확립된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합국이 1951년에 ‘독도는 일본영토’로 강화조약 본문에 기술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경우 독도는 이미 연합국의 판정에 의해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대한민국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영토이며, 대한민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한 국가가 아닌 제3국이기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독도는 이미 국제법상 1948년부터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의 승인과 동의가 없이는 독도는커녕 독도의 돌멩이 하나도 일본은 물론이요 연합국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같이 독도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표현했을 경우에는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해석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억지인 것이다. 그것도 진실을 추구해서가 아니고 거짓 근거로 미끼를 만들어 로비를 해서 명칭을 누락시켜 애매모호하게 한 것으로는 기존의 한국 독도영유권이 부정될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의 ‘부속섬론’에 의거한 반박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독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문에서 명칭 누락과 관계없이 역사적으로, 국제법상으로 명명백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파리7대학 ‘한국정원’ 조성지원

    |파리 장세훈특파원|프랑스를 방문하고 있는 한명숙 국무총리는 7일(현지시간) 파리7대학이 추진하고 있는 ‘한국정원’ 조성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오전 파리7대학의 한국정원 후보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정원 조성은 한국 문화를 프랑스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부는 50만유로(6억원) 규모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총리실은 전했다. 앞서 프랑스 한국학 연구의 본산인 파리7대학은 최근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면서 한국의 전통정원을 캠퍼스에 조성해 한국을 알리는 계획을 세우고 우리 정부의 지원을 요청해 왔다. 한 총리는 이어 파리 시내에 있는 옛 상하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건물을 찾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을 추념했다. 한 총리는 이 자리에서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로부터 프랑스의 독립운동 사료를 모은 ‘한국독립운동 자료집’ 제1권을 전달받았다. 한 총리는 이어 오후에는 툴루즈로 이동, 세계 최대의 민간항공기 제작사인 에어버스를 시찰하고 항공산업 발전을 위해 국내 관련업계와 협력증진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한 총리는 프랑스 방문 사흘째인 8일에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와 회담한 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예방, 두 나라의 동반자 관계 확대방안을 협의하는 한편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 문서의 반환을 공식 요청할 예정이다. 한 총리는 이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다. shjang@seoul.co.kr
  • [인천이 원조] (8) 공원

    [인천이 원조] (8) 공원

    지난해 맥아더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충돌해 유명세(?)를 치른 인천시 중구 북성동 자유공원. 인천을 대표하는 이 공원이 바로 188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1897년 생긴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응봉산 또는 응암산으로 불리는 자그마한 동산 위에 조성된 자유공원은 처음에는 ‘각국공원’으로 불렸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各國租界)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14만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의 각국조계에는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았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일본조계는 관동·중앙동 일대 7000평, 청국조계는 북성동 일대 5000평에 불과했다. 각국조계가 이처럼 광대하자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눠 구획정리사업을 펴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틴의 설계로 각국공원을 만든 것이다. 당시 조계지 내의 외국인 지주들은 명목상 우리 정부에 지세를 냈다. 그러나 영구임대를 보장받은 외국인들은 조계지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해 심지어는 조선인 순검(巡檢·경찰)조차 드나들 수 없게 했다. 말하자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는 ‘나라 속의 나라’였던 셈이다. 따라서 조계지에 인접한 각국공원은 외세에 의해 조성된, 외국인들을 위한 휴게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원은 내국인들에게 이색적인 볼거리로 등장해 서울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공원에서 바다를 보고 지금의 중구청 뒷길을 거쳐 인천항을 구경하는 것이 일종의 관광코스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후 조계는 일본의 압력으로 폐쇄된다.1913년 4월 각국조계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청국조계도 사라졌다. 그 뒤 일제는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워 동(東)공원을 만든 뒤 각국공원은 ‘서(西)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각계의 대표들은 4월2일 이 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했다. 탑골공원이 3·1운동의 발화점이 됐고, 이 공원이 3·1운동의 산물인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의 핍박을 피해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하는 회의를 열 수 있는 장소는 공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서공원은 ‘만국공원’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나라를 회생시킨 맥아더 장군을 기리는 맥아더동상을 세운 뒤 공원의 명칭을 ‘자유공원’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토사학자 조우성(58)씨는 “자유공원은 외세에 의해 휘둘려 시민들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격동의 한국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라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백범 피난처 기념관 개관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백범 김구 선생 피난처 기념관이 지난 27일 중국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에서 문을 열었다. 김구 선생은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이후 중국인 민주인사 추푸청 선생의 도움으로 자싱으로 피신,2년간 머물렀다.자싱시 인민정부는 김구 선생이 머문 자싱 남문 메이완제(梅灣街) 76번지를 2000년 시(市)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2005년에는 이 곳을 전면 수리하고 성(省)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선포했다. 자싱시 정부는 자싱 남문 르후이차오(日暉橋) 17번지의 한국임시정부 요원 숙소도 개방했다.jj@seoul.co.kr
  • 이라크 주권정부 ‘불안한 출범’

    이라크 주권정부 ‘불안한 출범’

    국방·외교·재정 등 모든 정책 분야에 걸쳐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는 통합정부가 이라크에 들어섰다. 후세인 정권 축출을 목표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3년 2개월만이다. 그러나 준(準)내전 상태에 이른 종파 갈등과 악화된 치안 역량이 정부 출범을 계기로 쉽게 안정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누리 알 말리키 총리는 전날에 이어 21일에도 테러와 맞서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임을 천명했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유 이라크 출범이 알카에다에 통렬한 패배가 될 것”이라고 치하했지만 테러 공격은 이틀째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7개 장관직 시아파 연합에 돌아가 이라크 의회는 20일 알 말리키 총리가 제출한 내각 구성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그가 지명한 36명의 장관은 이날 공식 임기를 시작했다. 절반에 가까운 17개의 장관직이 의회 다수파인 시아파 연합에 돌아갔다. 쿠르드와 수니파 연합이 각각 7개 자리를 배정받았고 나머지 5개 자리는 이야드 알라위 전 임시정부 총리가 이끄는 세속주의 연합에 돌아가 일종의 거국내각이 성립됐다. 그러나 국방·내무·국가안보장관 등 핵심 장관직 3개는 공석으로 남았다.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장관직을 요구했던 시아파와 군을 관할하는 국방장관직을 고집했던 수니파 모두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법의 각료 구성 시한에 쫓긴 말리키 총리는 결국 대행 체제로 운영하는 편법을 택했다. ●석유 배분·외국군 철수 일정 갈등 잠복 말리키 총리는 새 정부의 핵심 정책과제로 저항세력 소탕과 치안 회복, 외국군의 철수를 제시했다. 하지만 정파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지금 상황에선 어느 것도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게 지배적 전망이다. 이미 실질적인 내전 상황에 진입했다는 분석도 있다. 말리키 총리의 공약을 비웃기라도 하듯 20일 수차례 테러 공격으로 33명이 희생된 데 이어 21일에도 바그다드 카페에서 폭탄 테러로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헌법 개정 문제는 종파간 갈등을 더욱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지난해 12월 선거 등을 보이콧했던 수니파는 정부 참여를 조건으로 헌법 개정을 약속받았다. 지난해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주축이 돼 마련한 새 헌법은 연방제 도입과 함께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하는 지역정부 구성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니파는 이라크를 분열시키고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석유 자원과 권력을 집중시키게 될 것이라며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석유 대부분이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관할지역인 북부와 남부에 매장돼 있기 때문이다. 외국군의 철수 일정도 핵심 이슈다. 미국은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13만 2000여명 규모의 주둔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이라크의 치안 조직이 저항세력에 맞설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내각 출범에 즈음해 외국군 철수 일정을 구체화시키겠다는 말리키 총리의 약속은 공수표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외국군의 전면 철수를 바라는 이라크 여론은 말리키 내각을 괴롭히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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