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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tro] ‘서울역사강좌’ 수강생 모집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서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돕고자 ‘서울역사강좌’를 개설,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11일 밝혔다. 오는 8월29일부터 12월12일까지 대한민국헌정 관련 유적과 인물을 주제로 다양한 내용의 강의를 한다.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과 이승만 전 대통령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수반들의 가옥을 돌아보며 중요 활동과 사건에 대해 살펴 보는 시간도 갖는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신청은 14일까지 서울시 홈페이지 ‘강좌/교육’코너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성, 이메일로 보내면 된다.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독립유공자 361명 광복 63주년 포상

    국가보훈처는 제63주년 광복절을 맞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한 이춘숙(李春塾·1889∼1935)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李惠鍊·1884∼1969), 안중근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1927) 여사 등 361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한다고 11일 밝혔다. 이번에 포상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66명(독립장 2명, 애국장 59명, 애족장 105명), 건국포장 65명, 대통령표창 130명 등이며, 이 가운데 생존자는 4명이고 여성은 10명이다. 이들은 오는 15일 광복절 중앙경축식장과 지방자치단체 주관 경축식장에서 훈장을 받거나 추서되며, 국외 거주자는 재외공관을 통해 본인과 유족에게 훈장이 전달된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이춘숙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 등을 오가며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한 뒤 같은 해 4월 상하이로 망명해 1920년 4월까지 임시의정원 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이후 임시정부 군부차장과 학무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헌법 개정, 공채발행 조례 등의 제정에 참여하고, 상하이 민단장 여운형 선생이 발기한 신한문화동맹 등에 각각 참여해 활동했다.1920년 11월 일경에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출소했으며,1927년부터 1931년 5월까지 신간회 경성지회의 총무간사,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 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같은 독립장이 추서된 유기석(柳基石·1907∼?) 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하이에서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연맹을 결성했고,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다.1932년 이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북의용군 등의 항일단체에 가입해 톈진 일본총영사관 및 일본기선에 수류탄을 투척했다.1938년 김구 선생과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난징에서 한족동맹의장 겸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활약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는 1909년부터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1919년 미국 LA에서 조직된 부인친애회,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1907년 국채보상의연금을 기부하고 1926년에는 상하이 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직접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정막래(丁幕來·1899∼1976)·이소선(李小先·1900∼?) 여사는 기녀 출신으로 1919년 경남 통영군 통영면 기생조합에서 동료와 함께 기생단을 조직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돼 각각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건국훈장 독립장 柳基石(중국방면) 李春塾(임시정부) ●건국훈장 애국장 具錫圭(의병) 權能道(만주방면) 金炳鉉(만주방면) 金士極(만주방면) 金相周(만주방면) 金瑞雲(만주방면) 金錫元(의병) 金錫弘(만주방면) 金演性(의병) 金用三(만주방면) 金龍玉(만주방면) 金龍澤(만주방면) 金允涉(만주방면) 金俊元(만주방면) 金昌鉉(만주방면) 金恒龍(만주방면) 盧秉漢(인니방면) 朴基運(의병) 朴貞鍵(중국방면) 朴定勳(만주방면) 朴琮植(국내항일) 方成柱(만주방면) 裵敬鎭(국내항일) 白圭三(노령방면) 白一龍(만주방면) 徐光道(의병) 徐允峯(만주방면) 孫亮燮(인니방면) 孫正彬(만주방면) 申英七(의병) 申應奎(만주방면) 申 훤(만주방면) 吳民聲(중국방면) 李灌鎔(국내항일) 李光河(만주방면) 李相寬(만주방면) 李錫吉(의병) 李成鎬(중국방면) 李元甫(국내항일) 李泰涉(만주방면) 李赫魯(국내항일) 李鉉稷(국내항일) 李華榮(의병) 任成祐(국내항일) 鄭天和(3·1운동) 鄭泰玉(국내항일) 趙正來(국내항일) 崔敬京(만주방면) 崔文武(만주방면) 崔文鳳(노령방면) 崔聖必(의병) 崔承觀(만주방면) 韓慶錫(학생운동) 韓大弘(만주방면) 許璋煥(국내항일) 玄思桂(만주방면) 黃甲用(의병) 黃稷淵(국내항일) 黃海龍(국내항일) ●건국훈장 애족장 姜極模(만주방면) 姜明秀(3·1운동) 高圭永(국내항일) 高德鳳(만주방면) 權靑松(의병) 金敬俊(3·1운동) 金光壽(3·1운동) 金大支(3·1운동) 金東赫(학생운동) 金伯春(3·1운동) 金尙俊(3·1운동) 金善明(3·1운동) 金聖化(의병) 金守日(의병) 金舜弼(3·1운동) 金億釗(의병) 金淵玉(3·1운동) 金玉男(국내항일) 金元成(3·1운동) 金應吉(의병) 金仁植(국내항일) 金日直(의병) 金點學(국내항일) 金重命(3·1운동) 金璨熙(3·1운동) 金昌道(만주방면) 金致聲(3·1운동) 柳冀宗(만주방면) 明雲行(3·1운동) 박그레고리(노령방면) 朴魯珀(일본방면) 朴 愛(노령방면) 朴永鎭(국내항일) 朴源炅(3·1운동) 朴應奎(3·1운동) 朴在坤(3·1운동) 朴鎭和(3·1운동) 朴瀅珍(국내항일) 白行俊(국내항일) 賓泰紋(국내항일) 石昌乾(국내항일) 孫銀國(3·1운동) 宋岩于(국내항일) 申甫鉉(의병) 申善明(3·1운동) 申昌熙(중국방면) 申鉉式(국내항일) 沈恒基(국내항일) 安承樂(국내항일) 安昌一(국내항일) 安興成(3·1운동) 楊楨(국내항일) 嚴鍾鎬(일본방면) 吳侑煥(일본방면) 禹錫麟(국내항일) 尹貞燮(3·1운동) 李景和(3·1운동) 李光善(3·1운동) 李圭駿(만주방면) 李起德(의병) 李德七(국내항일) 李鳳鎬(만주방면) 李相鎬(국내항일) 李相勛(일본방면) 李聖澤(의병) 李壽浩(3·1운동) 李永薰(국내항일) 李正洙(국내항일) 李廷讚(3·1운동) 李鍾國(국내항일) 李種七(의병) 李佐根(3·1운동) 李鎭浩(국내항일) 李春萬(3·1운동) 李學寧(3·1운동) 李海稙(국내항일) 李惠鍊(미주방면) 李彙環(국내항일) 林萬成(의병) 林民鎬(만주방면) 張命述(3·1운동) 田龍煥(3·1운동) 鄭貴錫(학생운동) 鄭億萬(3·1운동) 鄭龍奎(3·1운동) 鄭灝時(국내항일) 趙乃憲(국내항일) 趙炳直(3·1운동) 조마리아(중국방면) 朱昌燁(국내항일) 車基淑(국내항일) 車漢玉(국내항일) 崔光惠(3·1운동) 崔明根(국내항일) 崔鳳官(의병) 崔奉學(3·1운동) 崔世權(3·1운동) 崔仁根(국내항일) 崔昌達(3·1운동) 崔致煥(3·1운동) 韓明植(국내항일) 韓永乭(국내항일) 咸貞元(3·1운동) 洪性煥(국내항일) 黃宇烈(3·1운동) ●건국포장 姜賢哲(만주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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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琪煥(국내항일) 洪思哲(3·1운동) 洪鎭玉(3.1운동) 黃乭伊(3·1운동) 黃萬模(3·1운동)
  • ‘위대함’에 가려진 고뇌와 방황 부각

    ‘위대함’에 가려진 고뇌와 방황 부각

    ‘미실’‘영영이별 영이별’‘논개’ 등 역사인물 소설을 주로 펴낸 작가 김별아(39)씨. 3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접고 지난달 귀국한 그가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백범’(도서출판 이룸)을 펴냈다. 백범의 개인적인 생애와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복원해낸 이 소설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백범이 귀국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다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형식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백범일지’는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서간도 이야기 등을 참고했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썼지만 백범의 생애를 단순히 추적하기보다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점이 주목된다. “위대한 애국자, 민족 영웅 등 박제화된 이미지를 걷어내고 보면 김구는 정말 ‘문제적 인간’입니다. 소설 속에서 ‘가슴에 짐승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된 것처럼 남다른 욕망과 기질을 품고 있던 그가 이 짐승을 다스리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변화해 나갔던 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작가는 좌우합작을 위해 잠 못 이루며 애면글면하던 백범의 모습을 그대로 불러내 그가 결코 현실 감각이 없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백범일지’를 다시 읽으면서 백범이 겪은 간난신고의 과정을 돌아보게 됐고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며 “백범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끝까지 싸웠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횃불 같은 존재”라고 평가한다. “김구 선생은 어릴 때부터 사상을 떠나 인간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습니다. 바깥에서 주어지는 조건에 매달려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한계를 시험하고 그것에 맞게 자신을 바꿔 나간 것입니다.” ”소설 ‘백범’이 “김구 선생의 위인성을 훼손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다는 작가는 “그것이 바로 이번 소설을 쓰게 된 또 다른 목적”이라고 했다. 위대함의 장막에 가려진, 고민하고 방황하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진솔하게 복원해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일제시대 등 한국 근대사를 다룬 작품을 쓰고 싶다는 작가는 이전처럼 인물 중심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작정이라고 말한다.“너무나 빨리 변화하는 현실세계에서 내가 문학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을 제대로 잡아내기가 어렵다.”는 작가는 당분간은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1만 7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광복절→건국절 추진’ 헌소 제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평화통일시민연대 등 55개 단체는 대한민국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와 이 위원회가 준비하고 있는 건국6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서와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헌법재판소에 냈다고 7일 밝혔다. 이들은 청구서에서 “대한민국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와 오는 15일 열리는 건국60주년 기념행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라면서 “이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을 위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만일 대한민국이 48년에 건국된 것이라면 임시정부의 법통과는 단절된 것으로, 이는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라고 밝혔다. 국무총리 산하 대한민국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는 대통령 훈령으로 제정된 ‘대한민국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에 의해 지난 5월 출범했다.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을 비롯한 13명의 국회의원들은 지난달 3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원희룡 “건국절? 일제시대는 日 역사인가” 비판

    원희룡 “건국절? 일제시대는 日 역사인가” 비판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최근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과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건국절’ 개명 논란에 대해 “광복절이라는 의미를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건국절’로 바꾸겠다고 하면 상해 임시정부나 일제에 저항해 싸운 시기는 무엇이 되겠는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원 의원은 8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건국의 의미를 광복절과 함께 기린다는 여지는 열어둘 수 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단절되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한 뒤 “1948년 이후만 우리 국가이고 그 이전은 실체가 없는 국가로 취급한다면 독립운동은 어느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광복절’이란 명칭은 역사적 관점의 문제”라고 전제한 뒤 “장차 통일에 대비해서라도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전통을 지키고 살려야 한다.”며 “자유대한민국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 때문에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어 ‘건국절 추진세력이 친일·반민족 행위자에 대해 처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에 “역사 앞에서 감히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원 의원은 “(건국절 추진이)오해의 소지를 제공할 수 있다.그들의 주장은 일제의 지배를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건국60주년 기념사업회측에서 ‘영토와 국민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해야 건국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렇다면 일제가 영토와 국민을 실제로 지배했던 36년간의 시간은 일본국의 역사인가.”라고 강력히 반박하며 “이 문제는 독도 주권 문제 및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우리 헌법과 역사 해석을 스스로 부정하는 소모적이고 일체의 정당성이 없는 발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이 이른바 ‘쇠고기 파문’ 후유증에서 벗어나 국정장악력을 회복하기 위해 ‘강공드라이브’를 펼치고 있다는 관측에 대해 “정부가 취임 이후 정국 주도를 하지 못한 것은 민심읽기에 실패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한 원 의원은 “국정주도권 회복이 민심읽기와 인사쇄신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강공에만 의존한다면 민심과 더 멀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정부의 인사 문제와 관련 “현재까지 ‘끼리끼리 인사’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 뒤 “과거식 정실 인사를 한다면 국민의 지지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줄줄이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를 찍어서 내보내는 최악의 인사는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원 의원은 하지만 KBS 정연주 사장의 해임 문제에 대해서 “정 사장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또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를 지키겠다’는 정 사장의 주장에 “(정 사장이)언제부터 그렇게 법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고 비꼬면서 “KBS를 저렇게 ‘절단’내놓고도 스스로 임기와 독립성을 말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고 비난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정부, 건국절 검토한적 없다”

    “정부, 건국절 검토한적 없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방안은 정부 차원에서 전혀 검토한 적 없습니다.” 대한민국 건국60주년 기념사업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총리실 산하 기념사업추진기획단 우기종 단장은 3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건국60주년’이란 용어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역사학자들과 일부 단체의 지적에 대해 우 단장은 “오히려 헌법적 실체로서 건국은 1948년이 맞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그는 “헌법적으로 국가를 이루는 요건인 영토·국민·주권을 충족하는 기점은 1948년이며, 이때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 사법부까지 생겨 법적 실체로서의 국가가 수립됐다.”면서 “이는 다수의 헌법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내용은 법적 실체라기보다는 이념적·정신적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이번 행사가 ‘광복’보다 ‘건국’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우 단장은 “올해는 광복 63돌이자 건국 60돌”이라면서 “60돌에 큰 의미를 두고 행사 초점을 맞추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그는 “올해가 만약 광복 60주년이라면 광복을 부각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럼에도 서울 수유동 독립유공자묘역 정비 및 ‘한국독립운동과 건국’ 학술회의, 대학생들이 임시정부 유적을 답사하는 ‘임정프로젝트’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 또는 광복 관련 사업을 준비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행사 추진 과정에서 광복회 등 광복 관련 단체와 독립유공자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이번 행사는 건국 60년을 조명하고 향후 대한민국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됐고 이를 위해 다방면의 인사가 골고루 참여하고 있다.”면서 “추진단 발족 당시 김국주 광복회장 등 광복 유관단체 관계자와 진보적 인사들도 참여해 함께 일을 해왔다.”고 해명했다. 우 단장은 ‘건국60년’ 용어 논란과 관련,“지난 4월 건국60주년사업추진위 발족 이후 별다른 이의 제기가 없다가 정갑윤 한나라당 의원이 건국절 변경 내용을 담은 입법안을 제출한 뒤 논란이 불거졌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광복회 등의 행사 불참 움직임과 관련,“관계자들을 찾아가 사업 취지 등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면 참여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경주 최부자 400년 富의 비밀은?

    경주 최부자 400년 富의 비밀은?

    경주 교동 최부잣집은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다. 어떻게 해서 이런 영예의 호칭을 얻게 됐을까.2일 오후 8시10분 KBS 1TV ‘한국사 傳’이 내보내는 ‘12대,400년 부자의 비밀-경주 최부자’편에서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독특한 철학이 전해 내려왔다. 흉년이 들면 자신들의 곳간을 헐어 이웃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 다른 부자들은 흉년을 헐값에 농토를 사들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지만, 그 집은 결코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았다. 또 어떤 손님이라도 극진히 대접하고, 노잣돈에다 양식거리까지 챙겨 보내는 인심을 썼다. 이들의 파시조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이다. 병자호란 때 순국한 그는 정무공의 시호를 받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전란 이후 땅이 피폐해지자, 최부잣집은 관개시설을 확보했다. 그 덕분에 새로운 농사법인 이앙법을 도입하고 노동력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소작농 관리법은 특별했다. 다른 지주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소작료를 받고 중간마진을 없애는 등 지주와 소작인이 상생하는 길을 모색했다. 일제 치하, 최씨 문중의 장손인 최준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여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또 일제의 치열한 감시 아래에 자신은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하는 한편, 동생 최완은 대동청년단의 비밀요원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해방 후엔 인재양성에 뜻을 품어 400여년 동안 모아온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계림대와 대구대에 기부했다. 최부잣집은 그로써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한 셈이었다.‘조선 최고 부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영원히 따라다니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 인터뷰

    조세현 광복회 특별위원 인터뷰

    “광복절을 앞두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내 생애 처음입니다.” 광복절인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중앙경축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한 광복회 회원들은 요즘 심사가 복잡하다. 광복회 조세현(70) 민족정기선양 및 통일 특별위원은 30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현 정부가 ‘건국 60년’이란 구호를 내세워 독립운동과 광복절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은 물론 광복절 행사에서마저 광복회를 철저히 따돌리고 있다.”면서 “오직 뉴라이트 계열과만 소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법안을 발의한 것에 대해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과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면서 “이는 헌법에도 명시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이승만 정권 이후의 정부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뉴라이트 계열이 꾸준히 주장해온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역사왜곡 법안”이라고 주장했다. 조 위원은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행사는 애초부터 뉴라이트 계열 단체들이 준비하다가 정부가 이를 인수해 추진하는 사업”이라면서 “기획단계에서부터 광복회를 소외시켜 어쩔 수 없이 긴급연석회의를 열어 기념행사에 불참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예전 광복절 행사에선 광복회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지난 24일 행정안전부가 광복회에 보낸 공문을 보면 올해 행사에선 대통령의 경축사만 예정돼 있었다. 광복회가 울분을 억누르고 항의해 겨우 수정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밝혔다. 조 위원은 이어 “정부와 뉴라이트 계열 단체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수많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나 단 한번도 광복회에 참여의사를 물어보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발표도 거의 없었다.”면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 이런 모멸감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 위원은 “이번 행사에서 예정된 ‘건국 및 독립유공자 포상’도 철저하게 뉴라이트계와 정부의 의견만 반영된 것”이라면서 “이미 1만 1000여명의 독립유공자들이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마당에 해방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해방 이후에 반탁운동만 했던 이들이 대거 훈장을 받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광복회, 8·15 건국60돌 행사 보이콧

    광복회가 오는 8월15일 개최되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중앙 경축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9일 광복회에 따르면 광복회는 28일 주재한 광복회 전임 회장 및 이사, 각 시·도 지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연석회의를 개최하고 광복절 기념행사에 불참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최근 일부 보수단체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움직임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조세현 광복회 민족정기선양 및 통일특별위원은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정부가 건국 60주년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일 뿐 건국 60주년으로 보는 것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은 이어 “뉴라이트가 중심이 돼 건국 60주년 행사를 강행하려고 하지만 광복회는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까지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직지심경 대모’ 在佛 사학자 박병선박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직지심경 대모’ 在佛 사학자 박병선박사

    “박사님, 올해 여든하나이신데 아주 정정해 보이십니다.” “(잠시 창밖을 응시하더니)세월이 그렇게 흘렀네요.” 짧은 생머리, 나이만큼 백발이 묻어났지만 주름살은 별로 없었고, 눈썹과 입술 화장이 잘 어울려 보였다. “여전히 얼굴이 고우십니다. 젊었을 땐 참 예쁘고 미인이었겠습니다.” “어이구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어릴 때 친척들한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잘생긴 언니와 오빠, 동생들과는 비교가 안됐지요. 미인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약간 홍조 띤 얼굴로 변한다. “죄송한 질문이지만 결혼은 왜 안 하셨는지요?” 보통 같으면 증손자까지 봤을 법한 할머니에게 던진 질문 자체가 우스웠나 보다. “뭐 특별한 이유가 없어요.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을 시작하고, 그것에 파고들다 보면 정신없이 시간 가고, 어디 (연애할) 틈이나 생겨야 말이지요. 호호.” 노(老) 박사의 웃음 짓는 모습은 해맑은 소녀의 그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하시는 일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젠 나이도 그렇고 쉬셔도 되는데 젊은이들보다도 정열이 더 뜨겁습니다.” 잠시 한숨을 쉰다.53년 동안 도도히 흐르는 역사와 함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한우물을 팠다. 또한 해야 할 관련 숙제 역시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인 듯하다. “더 늙기 전에, 총기가 사라지기 전에 선명하게, 뚜렷하게 규명해야 일들이 많이 있네요. 개인이 한다는 게 외롭고 어렵긴 하지만….”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노 박사의 말과 표정이 경외스럽도록 다가온다. 문득 노 박사를 모델로 한 역사 추리소설(외규장각도서의 비밀)이 생각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까.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게스트하우스.‘직지심경(直指心經·직지심체요절)’의 대모(代母) 박병선 박사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가 직지심경의 대모로 불리는 까닭은 1967년 파리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을 발견해내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시킨 1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최근 방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의 인터뷰가 쇄도했다. 그래서인지 박 박사는 직지심경이나 외규장각도서 얘기는 하도 많이 해서 가급적 피해달라고 먼저 주문한다. 재불(在佛) 역사·서지학자인 그가 잠시 방한한 이유는 1985년 국내에서 발간했던 ‘조선조(朝鮮朝)의 의궤(儀軌)’ 증보판을 내기 위해서다. 이번 증보판은 300쪽 중 100쪽가량을 프랑스어로 썼다는 점이 눈여볼 대목. 그는 평소 프랑스인들이 병인양요를 거의 모른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증보판 앞 부분에 병인양요에 대한 설명과 ‘왜 한국 사람들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프랑스어로 자세히 언급한다. 또한 의궤의 내용과 그것이 프랑스로 가게 된 사연, 당시 프랑스 해군의 일기와 공문서 등도 새롭게 첨부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의 출간을 염두에 두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이번 증보판에는 당시 프랑스 해군들의 행적을 어렵게 추적, 이른바 ‘작전루트’를 처음 공개할 예정이어서 중요한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병인양요와 의궤 반환문제로 프랑스 국영 3TV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방송사 간부한테 ‘프랑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늦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때마침 한국학중앙연구원측의 도움으로 이번에 작업을 하게 된 것. 증보판은 한달 후쯤이면 국내에 선보일 예정이다. ▶당시 프랑스 해군들의 흔적과 관련된 자료는 많이 있는지요. “프랑스가 1차 원정 왔을 때 일기를 보면 강화도의 문수산성과 적성산성 등을 왔다갔다는 기록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2차 원정때의 군함, 당시 그림과 자료, 관청의 위치도 등을 종합해볼 때 황해도 연안까지 갔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행적을 찾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최초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최대한 자세하게 그려볼 생각입니다. 현재 이 작업만 남아 있습니다.” 그는 방한에 앞서 당시 프랑스 로즈함대장의 후손을 만나 여러 번 설득 끝에 강화도 등에서 프랑스로 압수해간 ‘압수목록표’를 어렵게 얻을 수 있었다(이번 증보판 부록에 실린다). 그는 “로즈함대장의 후손은 할아버지를 영웅으로 알고 있으며 곧 ‘할아버지 전기’를 발간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프랑스인들은 병인양요나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달라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지요. “도대체 그걸 왜 반환해야 하느냐고 묻는 프랑스인들이 많습니다. 이때마다 ‘만약 루이 14세의 왕실 행사를 자세히 기록한 유일한 문서본이 다른 나라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묻지요. 그럼 프랑스인들은 당연히 찾아와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50여년 동안 한국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대부분 스크랩해 놓을 만큼 자료 수집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 특히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등에서 3·1운동 당시 한국에 주재했던 프랑스 영사관이 본국에 보낸 많은 공문서를 찾아냈다. 또 일제때 일본과 중국에 주재했던 프랑스 공관이 본국에 보낸 공문서 중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모은 자료 등을 합하면 무려 2000상자 1만 5000쪽 분량에 이른다. 이 귀중한 것들을 정리하고 책으로 펴내는 일이 그의 마지막 숙원사업. 파리에도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가 그만큼 많다고 강조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혼자서 어렵게 해왔습니다. “개인이 한다는 게 사실 엄두가 안 나지요. 국가에서는 (반응이)냉랭합니다. 아무튼 어렵게 자료들을 모았으니 그냥 놔둘 수도 없겠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다가…. 지금이라도 국가에서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박사의 자취도 추적했다. 파리 시내 서쪽 쇼토 거리에서 이들이 머물던 곳을 찾아냈고 2006년에 겨우 건물 현판 정도만 걸 수 있었다. 기념관이라도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박 박사의 어릴 적 꿈은 유치원을 설립해 서구식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나중에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방향을 틀었다. 대학 때는 손보기(사학자)·이두현(민속학자) 선생 등과 친하게 지냈다.6·25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유학을 택한 것은 평소 가톨릭 신자로 프랑스 출신 수녀들과 가깝게 지낸 덕분. 이후 소르본대학에서 종교사를 전공한 뒤 파리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중 1979년 의궤를 찾아낸 직후 ‘비밀을 누설했다.’는 질책과 함께 파리국립도서관을 그만두었다. 이후 여러 파란곡절을 겪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고문서와 귀중한 자료들 속에 파묻혀 ‘여자의 일생’을 걷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8년 서울에서 5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서울대 사대 사회생활학과(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1955년 6·25 이후 민간 여성으로는 첫 프랑스 유학비자를 받고 떠났다. 소르본대학에서 종교사를 전공(석·박사)한 뒤 1967년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할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발견해 냈다. 이어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 종합전람회’에 출품, 구텐베르크의 성경책보다 무려 73년이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1979년에는 조선 왕조의 의식에 관련된 세세한 기록문인 외규장각 도서 279권을 프랑스국립도서관 창고에서 발견, 한국에 알렸다. 이같은 공로로 대한민국훈장 동백장과 제7회 비추미여성대상특별상 등을 받았다. 특히 1919∼1920년 사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던 청사를 찾아내기도 했다. 현재는 파리 근교에서 살면서 한국 관련 각종 고서연구와 프랑스에서 본 한국의 3·1운동 등에 관한 독립운동사를 정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인쇄사’(프랑스어·스페인어·영어·한국어)가 있고, ‘한국의 무속사’‘한국의 역사’ 등을 프랑스어로 펴냈다.
  • 종로구 “교남동 역사 유적지를 아시나요”

    종로구 “교남동 역사 유적지를 아시나요”

    종로구가 숨겨진 관광자원 발굴과 맞춤형 관광코스 개발을 위한 연구발표회의 첫 결실을 맺었다.‘교남동 역사탐방 코스’를 발굴해 본격적인 홍보에 나선 것이다. 23일 종로구에 따르면 교남동의 역사유적지인 돈의문 터→ 경교장→ 홍난파 가옥→은행나무(권율장군 집)터→딜쿠샤→서울성곽길을 묶는 코스(지도 참조)를 발굴했다. 이 코스는 걸어서 3시간 정도 걸리며 곳곳에 역사적 의미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 많아 학생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첫번째로 ‘돈의문’은 조선 세종 4년인 1422년에 세워진 서울의 ‘문(門)’의 하나로 1915년 일제의 도로확장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앞에 표시만 남아 있다. 강북삼성병원 안에 남아 있는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기 전까지 임시정부의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던 곳. 지금도 안두희가 쏜 총알이 지나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옛 기상청 건물을 돌아보고 내려오면 붉은 벽돌에 뾰족 지붕을 가진 ‘홍난파 선생 가옥’이 있다. 그 밑으로 450년이 된 은행나무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여기가 권율 장군의 생가 터다. 바로 맞은편의 오래된 벽돌 건물이 ‘딜쿠샤’다. 힌두어로 이상향을 뜻하는 말로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UPI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이다. 현재 딜쿠샤는 바닥과 창틀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은행나무 뒤쪽 길로 올라가면 바로 ‘서울성곽길’이다. 인왕산, 사직동, 무악동 등 어느 길로도 갈 수 있는 곳이다. 성곽을 따라 오르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충용 구청장은 “종로구를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구청 직원들이 발굴한 새로운 관광코스여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이 16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85세.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경기공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근무 중이던 1943년 3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무기 공급 책임을 맡았다. 황 선생은 이듬해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무기를 밀반출해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인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황인기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미국 LA 자택. 발인은 20일 오전 9시(현지시간).LA 글렌데일 공동묘지.
  • [데스크시각] 양안의 국·공합작과 한반도/이석우 국제부장

    [데스크시각] 양안의 국·공합작과 한반도/이석우 국제부장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상하이 시내의 골목골목, 거리거리. 자정이 가까워지자 비명과 절규가 메아리쳤고 피비린내가 도시를 흔들었다. 하루 밤새 400여명은 집에서 잠 자거나 가족과 쉬고 있다가, 혹은 술집이나 길 가에서 번개에 맞은 듯 도륙당했고 또다른 5000여명은 경찰 등에 끌려가 처형당한 뒤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역사는 1927년 4월12일 동트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기습적으로 벌어진 참사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3년 4개월 동안 유지돼 오던 1차 국·공합작은 이로써 깨졌다. 장제스(蔣介石) 등 국민당 우파들은 커가던 좌파세력에 불안을 느껴 쑨원(孫文·中山)의 이상과 유지를 저버리고 청방(淸)등 조폭과 군·경을 동원,‘청당(淸黨)’이라며 살육전을 벌였다. 공산당원들은 앞서 국민당 창시자 쑨원의 결정으로 국민당 당적을 얻어 국민당안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4·12사건’은 앙드레 말로의 콩쿠르상 수상작 ‘인간 조건(La Condition Humaine)’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졌고 소설에선 암살범 첸과 공산당 비밀요원 카토프 등을 통해 좌·우 대립과 혁명의 엄혹한 상황 속의 실존적 선택을 그렸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그 해 9월 장제스 감금사건(시안사변)을 계기로 이뤄진 두번째 국·공합작은 45년 8월 일본 패망 때까지 이어진다. 그 뒤 4년 가까운 내전 끝에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줄행랑을 쳤다. 양측은 이런 애증의 역사를 안고 타이완해협 양안에서 60년 가까이 대치해 왔다. 양측은 12일 9년 만에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회담을 열었다. 국민당을 ‘대륙에서 온 점령자’로 여긴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시절 끊겼던 협상을 재개한 것이다. 양측은 ‘하나의 중국’, 한 뿌리에서 나온 존재임을 확인하고 통합을 향한 노력을 다짐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과의 혈연을 부정하고 별개의 정체성(identity)을 강조해 온 물결의 퇴조와 양안관계의 전환을 의미한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지난 9년의 공백을 단숨에 뛰어넘어 다시 얼굴을 맞댈 수 있었던 데에는 일란성 쌍둥이의 경험 같은 ‘협력의 추억’ 탓도 적잖다. 이 쌍둥이에게 ‘존재의 근원’인 쑨원이 양측 모두에게 국부(國父)로 떠받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건국일 등 주요 행사때 톈안먼 광장에 쑨원의 대형 사진이 빼놓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나 중국의 민족주의 색채가 짙어질수록 쑨원의 위치가 더 두드러지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국·공합작의 기억과 쑨원 같은 ‘공통분모’가 양안을 이어주는 끈이라면 남북한을 묶어 줄 구심점은 무엇일까. 여전히 ‘빨치산의 주술’에 묶여 있는 북한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연 확대에 제자리 걸음인 남측 사이에는 수렴되지 못할 평행선만 그어질 뿐일까. 양안은 13일 직항노선 개설과 대륙 관광객의 타이완 방문 합의 등 2개 협정서에 서명할 계획이라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급속한 관계개선과 양안 통합의 가속화를 의미하는 시발점이란 점에서 무게가 있다.4·12사건의 악몽과 참혹한 상쟁의 상흔을 넘어 대중화권의 비전을 향해 동반상승의 실천적 협력을 모색하는 타이완과 대륙. 6·10항쟁 21주년을 맞아 태평로를 가득 메웠던 촛불의 물결과 외침이 닫힌 민족주의를 넘어 민족통합의 구심점으로, 세계화 파고를 뚫고 나갈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을까. 올해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양안 관계의 훈풍은 물론 북·미 관계개선의 급물살 등 급변하는 주변 환경의 도전속에 있다. 양안에 부는 훈풍이, 주변환경의 변화가, 다가오는 60년의 틀을 어떻게 짜고, 대내외적으로 통합과 상생의 여지를 어떻게 찾아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준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석우 국제부장 jun88@seoul.co.kr
  • 임시정부 설립자금 모금 비밀장부 ‘햇빛’

    임시정부 설립자금 모금 비밀장부 ‘햇빛’

    1919년 4월13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 설립자금 모금 내역을 기록한 비밀장부가 발견됐다. 이 비밀장부는 임정 모금 책임자이자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최창식(1892∼1957)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병풍 뒷면에서 나온 것으로, 최 선생이 경기도 양주 방전면 허일도로부터 17원을 모금했다는 내용 등 모금 액수와 기부자 이름 등이 기록돼 있다. 임정 설립 자금 규모와 모금에 참여한 일반 국민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부는 가로 세로 10㎠ 크기의 한지 영수증에 기부자 이름과 금액 등을 붓으로 쓴 뒤 병풍 뒷면을 뜯어내 한 장 한 장 붙이는 형태로 만들어졌다.1957년 부인 김경원(1981년 작고)씨가 마오쩌둥 정권을 피해 상하이에서 탈출하면서 가지고 나온 것을 장녀 최영광씨가 인천 북성동에 개관 예정인 한국이민사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공개됐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교수 지음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교수 지음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지난 50여년간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의 생애를 추적해온 이정식(77)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그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경희대 석좌교수이기도 한 이 교수는 지난해 몽양 서거60주기 추모 학술심포지엄에서 “몽양이 박헌영 계열에 의해 암살됐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연구에 몰두해 온 이 교수는 새 책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서울대학교 출판부)로 몽양의 사상과 삶을 재조명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여운형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없다. 진취적인 민족운동가였다고 극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공산주의에 도취됐던 기회주의자였다고 폄하하는 쪽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모호하고 실속 없는 ‘팔방미인’이라고 말한다. 여운형은 한·중·일 현대사의 어떤 페이지에도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맡았고 해방 이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좌우합작, 미·소관계 등에 관여했다. 그러나 ‘평화와 융합’을 고수하던 그는 좌익과 우익의 공세 속에서 1947년 암살됐다. 이 교수는 우리의 척도에 맞춰 몽양을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몽양은 20세기 초반의 사람이지만 20세기 사람이라기보다도 21세기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대와 사상을 뛰어넘어 평등하고 착취 없는 사회를 꿈꿨던 사람이지요.” 이 교수는 몽양의 이른바 ‘동양평화론’이 시대를 앞서나간 사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이 1970년대에 말한 ‘긍정적인 평화’가 바로 몽양의 평화와 같은 개념이라는 것. 현실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이러한 몽양의 자취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사뭇 의미있게 다가온다.“한국의 정치문화는 대화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양반들도 자기 파가 아니면 대화조차 않으려 했죠. 지금 한국사회 내부도 친북과 반북, 보수와 진보로 갈려 있습니다. 몽양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도 찾아다니며 의논을 한 사람이에요. 그게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그가 염원하던 평화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이상이지요.” 책은 여운형이 소련을 등진 이유에 대해서도 밝힌다. 과거의 소련은 제국주의를 반대한 나라였지만 해방 후 소련은 제국주의국가였기 때문이라는 것. 몽양 자신이 ‘변절자’가 아니라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박헌영 계열에 의한 암살 가능성’에 대해서 이 교수는 “하나의 가설로 제기한 건데 확대해석됐다.”는 견해를 밝혔다.“몽양 자신은 암살의 배후가 누구냐는 질문에 쓸데없는 얘기라고 웃었을 겁니다. 겨레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미움을 살 수도 있고 위험이 수반될 수도 있는데 그걸 따져본들 뭐하냐는 것이죠.”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임시정부 90주년 행사를 국민축제로”

    “임시정부 90주년 행사를 국민축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는 2009년에 전국적으로 대규모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기념행사는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13일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펼쳐진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서울신문사는 30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 대회의실에서 기념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한 협약식을 가졌다. 노진환 서울신문 사장과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나무인 임시정부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도록 힘을 합쳐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노진환 사장은 “민간 차원에서 임시정부의 얼을 기리는 사업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기념사업회에 감사드린다.”면서 “90주년 기념행사를 국민축제 차원으로 승화시켜 국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나가자.”고 말했다. 김자동 회장은 “대한매일신보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서울신문이 임시정부 기념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데 적임이라고 판단했다.”면서 “헌법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했지만, 그동안은 말로만 계승한 것이 사실인 만큼 90주년 기념행사가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기념행사는 기념식을 비롯해 국제학술세미나, 독립군가 합창제, 제3세계독립영화제, 독립운동사 창작판소리 공연, 독립운동 미술전, 임시정부 사진전, 어린이를 위한 독립운동사 만화책 발간 등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Zoom in 서울] 서울 ‘유네스코 역사도시’ 꿈꾼다

    [Zoom in 서울] 서울 ‘유네스코 역사도시’ 꿈꾼다

    ‘문화’를 키워드로 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인 서울시가 유적 복원, 예술인 창작공간 확충, 문화 밀집지역 조성 등을 골자로 한 ‘창의문화도시 서울’ 종합계획을 15일 발표했다. 종로 경교장과 이화장 등 근·현대 유적 6곳을 복원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문화예술작품을 지원하는 500억원 규모의 예술펀드를 조성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역사교육·문화공간으로 활용 서울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환국 후 머물던 경교장과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이화장을 비롯해 박정희·윤보선·최규하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의 가옥 등 유적 6곳을 원형 복원한다. 당시 시대상을 조망할 수 있는 유품을 전시해 역사교육,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한국화가 이상범, 작곡가 홍난파, 서양화가 고희동의 가옥 등 유적 13곳도 기념관이나 공연장 등 문화공간으로 재조성한다. 조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별궁 정원인 성락원과 가구박물관-옛돌박물관-한옥마을-삼청각을 잇는 ‘체험관광벨트’, 한성백제 박물관-풍납토성-몽촌토성 등을 연계한 고대 역사유적 탐방로 등은 문화벨트로 묶는다.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복원이 진행된다.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도시로 등록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500억 규모 예술펀드 조성 우선 내년에 200억원(시 50억원·정부 80억원·민간 70억원) 규모의 ‘예술펀드’를 조성하고,2010년까지 이를 500억원 규모로 늘려 문화예술 지원을 확대한다. 문화예술인과 기업 등 투자자를 연결하는 ‘서울 아트 시드(Seoul Art Seed)’, 서울신용보증재단이 문화콘텐츠 제작자에 대해 대출과 보증을 지원하는 ‘완성보증보험제’ 등도 도입한다. 서울을 상징하는 문화특화지역도 만든다. 광화문, 인사동·명동, 충무로·세운상가, 대학로·흥인지문 등은 각각 역사, 전통, 영상, 패션·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특화거리로 육성한다. 정동길(공연장)과 삼청동·평창동·청담동·삼각지(화랑가), 서초동(악기), 문래동(창작), 답십리(고미술), 신사동(영화) 등 9곳은 지역별 특성에 맞게 정비할 계획이다. 아울러 도시 곳곳의 유휴시설이나 빈 공간을 예술인들에게 제공한다. 금천구 독산동 공장, 은평구 녹번동 은평소방서 등 6곳을 2010년까지 예술창작공간인 ‘아트팩토리(Art Factory)’로 만들고, 종로구 무악동 만남의 장소와 강서노인복지관 주차장 등 5곳에는 순수예술 장르별 ‘창작 스튜디오’를 건립하기로 했다. 창동과 성북동, 능동, 한남동, 고척동 등에는 문화갈증을 해소시키는 문화예술 공연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1조 8500억여원 예산 투입 이 같은 종합계획을 통해 세계 44위인 도시브랜드 가치를 20위권으로 끌어올리고 9위인 문화산업 비중은 5위권,31위인 관광경쟁력은 20위권으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총 예산은 1조 8532억여원으로 잠정집계됐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마오이스트, 네팔 총선 압승

    네팔 첫 총선에서 반군 정당 마오이스트(M)의 돌풍이 거세다. 일간 네팔뉴스 등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13일 개표가 완료된 94개 선거구 가운데 54석이 M에 돌아갔다. 이 추세라면 집권은 떼놓은 당상으로 보인다고 더 히말라이언타임스는 보도했다.플라찬다 총재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2만 3277표를 얻어 1만 2154표에 그친 네팔국민회의(NC) 후보를 2배 가까이 따돌리고 무난히 당선됐다. 제헌의회 진입에 성공한 다른 후보들도 워낙 큰 표차로 앞서 M의 기세를 그대로 드러냈다. 바부람 바타라이 부총재도 3만 5119포로 4894표의 NC 후보를 제쳤다. 반면 M과 각축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던 NC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연대(UML)는 13일 현재 각각 16석을 차지하는 데 머무르며 제2당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240명의 지역구 의원과 335명의 비례대표 의원이 뽑히며, 선거결과 확정 뒤 총리가 26명의 의원을 추가로 지명,601명의 제헌의회가 구성된다. 특히 총선엔 74개 정당 가운데 54개가 뛰어든 난립상태여서 M의 득표는 그 결과가 사실상 뻔하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M은 벌써부터 압승을 장담하며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망치와 낫이 그려진 당기(黨旗)가 나부끼는 가운데 지지자들이 공산혁명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붉은 색 꽃가루로 물들이고 있다. 플라찬다 총재는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뜻이 반영된 당연한 결과”라면서 “다른 정당들과 협조해 이에 부합하는 새 헌법을 만들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총선에 옵서버로 참가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선거는 네팔이 오랜 정치폭력을 털어내고 민주주의의 길을 걷는 계기”라면서 “마오이스트 정당이 승리하더라도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네팔에서는 1990년 복수정당제가 허용된 이래 의회 세력이 꾸준히 민주화를 요구해 왔으나 정부해산권을 가진 갸넨드라 국왕은 총리를 13번이나 교체하면서 의회와 맞섰다. 네팔의 마오이스트 반군은 군주제 타도와 공산국가 건설을 꿈꾸며 1996년 무장봉기를 일으켜 10년간 정부군과 내전을 치렀으며 이 과정에서 1만 3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2006년 11월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마오 반군은 뒤로는 임시정부에 참여해 민주화 이행 과정에 목소리를 냈다. 1만 5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린 마오 반군은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하며 국왕 축출과 군주제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총선에서 M이 승리하면 1769년부터 239년간 영욕을 누려온 샤(Shah) 왕조는 실권을 모두 빼앗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확률이 커진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239년 왕정’ 네팔 민주주의 첫실험

    ‘239년 왕정’ 네팔 민주주의 첫실험

    히말라야의 작은 나라 네팔이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난다. 오는 10일 역사적인 총선을 통해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제헌의회가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면 239년간에 걸친 샤(Shah)왕조에 의한 절대왕정은 완전히 종식되고 공화제로 바뀐다. 지난달 24일 ‘은둔의 왕국’ 부탄이 총선을 통해 100년 동안의 왕정을 완전히 접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데 이은 것이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민주주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다. 네팔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0일 전국 240개 선거구 2만 1000여개 투표소에서 제헌의회 의원 610명을 뽑는 선거를 치른다.6일 현재 선관위에 등록된 지역구 출마후보는 3947명이며 비례대표 후보도 5710명에 달한다. ●마오반군 “선거 압승 자신한다” 현재 네팔에는 74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총리가 이끄는 네팔국민회의당(NC)과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 연대인 네팔공산당(UML), 인도와 중국이 기원으로 알려진 마오 반군이 만든 네팔공산당(M)이 3대 정당으로 손꼽힌다. 왕정 반대에 한목소리를 내는 이들 정당이 이번 총선에서도 다수 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절대왕정 국가였던 네팔은 1990년 비렌드라 전 국왕이 입헌군주제 도입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을 단행하면서부터 정치상황이 급변했다. 하지만 정정 불안으로 2년을 넘긴 정부가 없었고 1996년 마오반군의 무장봉기로 네팔은 내전의 불바다로 빠져들었다.10년 내전 끝에 정부와 마오반군은 2006년 11월 공동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었다. 총선 이후 정국 기상도에 있어서는 맑음보다 흐림에 무게추가 실린다. 부탄은 국왕이 스스로 권력을 국민에게 넘겨줌으로써 소리 없는 정치혁명을 이룬 데 비해 네팔은 ‘피플파워’가 국왕의 권력을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벌어졌으며 희생자가 속출했었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마오반군이 “우리는 총선 압승을 자신하고 있다.”며 “선거 조작 행위가 포착되면 선거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수차례 밝혀 향후 정국은 시계제로 상태다. ●향후 정국 시계제로… 주도권 다툼 예상 이에 따라 네팔 정부는 파국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공정 선거를 위해 28개 국제기구와 단체에서 선거감시단 856명을 초청했으며 부정선거 감시요원도 6만 4000명을 위촉했다. 인도와의 국경을 봉쇄하고 13만 5000여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하는 한편 지난 주말부터 항공기를 동원한 공중정찰도 실시하고 있다. 한국외대 남아시아연구소 김찬완 박사는 “네팔은 의회민주주의 경험이 적고 마오주의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정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당분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계파 갈등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팔의 민주화 실험이 성공할지, 미완으로 끝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운암기념사업회장 이해찬 전 총리

    사단법인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제3대 회장으로 추대했다고 12일 밝혔다. 사업회는 이날 서울 종로구 견지동 기념사업회 회의장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이같이 결정했다. 이 전 총리는 다음달 1일 공식 취임해 3년의 임기를 시작한다. 운암 김성숙(1898∼1969) 선생은 봉선사 스님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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