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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뜻밖에도 ‘정감록’에 경도됐던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적지 않았다. 영조 때 남원의 부자 김영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평소 유복해 보였던 김씨 일가가 비결에 쏠리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남원의 벽보 사건을 좀더 밀도 있게 그려보면 그 답이 보일 것 같다. ●남원성에 나붙은 벽보 영조9년 7월 하순. 그믐날이 가까워 달빛조차 희미한 깊은 밤, 김영건의 두 아들은 괴문서를 남원성벽에 붙였다. 장남 원팔이 문서를 내거는 동안 아우 원하가 망을 보았다. 출입이 가장 빈번한 남문 근처에 한 장의 대형 벽보를 붙이는데 실제 소요된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견딜 수 없이 긴 시간이었다. 당시 남원은 호남 굴지의 대도회라서 날마다 성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수백 명이 성안을 드나들었다. 그들의 눈에 띈 벽보 내용은 삽시간에 호남 일대로, 그리고 지리산 너머 영남 지방으로도 퍼져나갈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튿날 오전 남원부중은 괴문서 이야기로 들썩였다. 그날따라 몸이 불편해 좀 늦게 출근한 최정도 이방(吏房)은 이미 사령들이 수거해온 벽보를 훑어본 다음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조정대신을 강도 높게 비난한 구절도 그랬지만 ‘자미진주(紫微眞主)’ 운운한 것이 영락없는 반역자의 소행이었다. 이방이 알기로, 자미성(紫微星)은 자미원(紫微垣)에 속한 큰 별이다. 그것은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데 천제(天帝) 또는 국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벽보에 ‘진주’라고 했으니 한양성안 구중궁궐에 엄숙하게 앉아계신 상감께선 왕도 아니고, 자미성 정기를 받은 진짜 왕이 곧 나온다는 얘기다. 벽보엔 상감이 무도하다는 둥 동궁(사도세자)이 미쳤다는 둥 흉악한 언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핀 이방은 새파랗게 질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이방은 도호부사 조호신에게 긴급사태를 보고하는 한편, 많은 정탐꾼을 풀어 성 안팎에 떠도는 온갖 소문을 즉각 수집토록 했다. 평소 성품이 침착하고 판단력이 있는 이방이었다. 그는 엄하기로 이름난 이 형방, 실무경험이 가장 풍부한 박 호장 등과 함께 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소문들을 비교 종합해 믿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계통별로 분류했다. 범인을 바로 잡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수사는 신속히 진행돼야 했다. 최 이방은 진행중인 수사에 관해 남원부의 우두머리인 조 부사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다. 그러나 서울 명문대가 출신인 부사는 실무에 워낙 어두워 한숨만 내쉴 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정보를 비교분석해 보니 성안에 거주하는 김영건과 세 아들이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이방은 사령들을 급파해 우선 그들을 잡아들이고, 김씨 집안에 소장된 모든 문서(文書)를 철저히 수색했다. 그날 해질 무렵 김씨의 문갑에서 두 장의 수상한 문서가 발견됐다. 큰아들 원팔의 필체가 분명했는데, 놀랍게도 벽보의 초안이었다. 두 장 가운데서도 큰 종이에 적힌 문건은 벽보보다 언사가 훨씬 과격했다. 반역자만이 쓸 수 있는, 대역무도한 ‘불온문서’였다. ●정 노인이 일으킨 해프닝 김영건에 대한 남원 사람들의 평판은 무척 좋았다. 그는 성품이 부드럽고 공손하고 단정한 데다 재산도 많았다. 여느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웃은 물론, 집 앞을 지나는 거지들에게까지 후했다. 최 이방은 소문으로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섣불리 김영건에게 혐의를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문수사 결과를 무시할 수 없어 망설이다가 사령들을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영건의 집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는 바람에 이방은 기가 막혔다. 김영건에게는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 다 글 잘하고 글씨도 잘 쓴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모두 아버지를 닮아 인물도 훤칠했다. 특히 큰아들 원팔은 과거시험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을 정도다. 그는 남원은 물론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를 비롯해 각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고 있었다. 최 이방은 사실 김영건 일가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론 늘 김영건의 유복함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김영건 일가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수사에 동참한 이 형방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김영건의 ‘근본’ 즉, 신분을 둘러싼 의혹이 있다고 했다. 형방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이방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정 노인 사건을 다시금 뇌리에 떠올렸다. 하루는 남원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양반 정 노인이 읍내에 시장구경을 나왔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김영건을 노비의 자손이라고 비방하는 시비가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의 정 노인은 평소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해 세인의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 뒤 정 노인은 다시 그런 ‘망령된’ 말을 꺼내지 않아 사건으로 비화되진 않았다. 기억력이 비상한 최 이방조차 이 사건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정 노인이 입을 다문 것은 김영건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런 것이었다. 영건은 노인과 다투지 않고 도리어 그를 살며시 회유했다. 그는 노인을 정중히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약주를 대접했다. 싫은 노릇이었겠지만 그 뒤에도 길가에서 노인을 마주치면 먼저 반색을 했다. 남원 사람들의 눈엔 마치 도량 있는 김영건이 철없는 주정뱅이 노인을 너그러이 용서한 것으로 보였다. 이 사건은 영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몇 년 뒤에 일어났는데, 적어도 아들인 그만은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건의 비밀 사실 김영건은 노비나 별 다름 없이 천한 사람이었다. 남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상도 함양에 노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았는데, 그 집에 막산이란 사내종이 있었다. 그 아내는 이름을 분금이라 했다. 본래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그리고 김영건으로 말하면 분금의 아들이 분명했다. 분금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영리했고 행실도 조심스러웠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의 미색이 너무 뛰어났다는 점이다. 노씨네 행랑것이었던 그녀를 주인양반은 물론 그 집에 드나든 여러 양반들이 다투어 탐을 냈다. 분금은 물론 영건도 이런 집안내력을 꽁꽁 숨기며 살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건은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야 그 내력을 알게 됐다. 종 막산은 영건이 아직 젖먹이였을 때 돌림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양반들은 아예 마음 놓고 분금에게 집적거렸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체로 취미삼아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 분금은 자신이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것이 너무 원통했다. 엄밀히 말하면, 분금은 본래 노씨 집안의 여종이 아니었으므로 종살이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공연히 노씨네 종으로 간주되는 실정이었다. 한탄으로 나날을 보내던 분금은 남편을 묻은 지 1년 만에 젖먹이 영건을 등에 업고 몰래 주인집을 빠져나와 지리산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틀 동안 산길을 헤매던 분금은 지리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운봉을 지나 대도시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뼈대 있는 양반집에서 수년 동안 종 아닌 종살이를 한 분금은 양반들의 예의범절에 거의 통달한 편이라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는 질병으로 온 가족이 몰살한 어느 한미한 시골선비의 청상과부라고 했다. 영건의 성은 김씨가 됐다. 마침 그 얼마 전 역질이 남원성을 강타했던 탓에 성안엔 주인 없이 텅 빈 집이 여럿이었다. 분금은 그 가운데서도 시장 쪽으로 얌전히 앉은 초가집 하나를 골라 거처로 삼고서 오직 삯바느질에만 매달렸다. 분금은 나이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원체 부지런해 해마다 조금씩 재산이 늘어났다. 과부 허리춤엔 은이 서 말이란 속담 그대로였다. 영건이 스무 살쯤 됐을 때 어머니 분금은 논을 네댓 마지기나 장만했다. 영건은 어려서 서당을 몇 년 다녀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일찌감치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일에 전념했다. 잘 모르는 것은 이웃의 경험 많은 노인에게 물었고, 가끔 시장에 들러 쌀, 콩, 면화, 무명 등의 가격을 조사해 비망록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만일 콩 한 되라도 팔라치면 반드시 시세가 가장 비쌀 때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살림을 하다 보니 영건은 곧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됐다. 그런 아들인데도 늙은 어머니는 영건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누구에게든지 공손해라! 가난한 이웃을 잘 보살펴 주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신 원력 덕택이다. 절간에 시주를 게을리 하지 말라!” 영건은 그 가르침을 묵묵히 따랐고, 이웃사람들이 모두 영건을 존경했다. 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날 밤,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앉혀 놓고 나직이 말했다.“지금까지 네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라 믿어온 것이 실은 함양 양반 노씨네 종 막산의 제삿날이다. 나는 그 아내 분금이다. 네 아버지는 경상도 하동 사는 김 선비인데, 이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더는 모른다. 부디 죄 많은 이 어미를 용서해라. 이제 비밀을 네게 털어놓으니 내 가슴이 후련하구나!” ●김영건과 예언서의 만남 김영건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가 없어 혼자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랬는데 정 노인 사건까지 터져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천도를 핑계 삼아 절간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뭐든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던 것인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진 것도 같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회의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과연 전생에 무슨 큰 죄가 있어 평생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가. 종 아닌 종이 되어 제 근본을 숨기고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되는 내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불쌍한가. 언젠가 이 비밀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자식들의 장래는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놈의 세상이 아주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 나같이 천한 사람도 가슴 펴고 떳떳이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와야 된다. 도무지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김영건이 제기한 질문들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 노인 사건 이후 영건은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왕성했던 식욕은 오간데 없어졌고, 일할 마음도 사실은 거의 사라졌다. 세상이 허무하다는 한 생각만이 온종일 영건의 머리에 가득했다. 영건은 그런 자기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해 더욱 고민이었다. 그나마 큰 다행은 그가 가끔은 절간에 들러 스님들과 문답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건은 태연한 척 여러 가지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영건의 깊은 고민을 눈치 채는 경우도 없지 않아 찻잔을 마주한 승방 문답이 해질 때까지 오래 이어지기도 했다. 절간을 오가는 횟수는 점점 많아졌고 영건은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인연설은 물론 장차 미륵부처가 다스릴 용화세계가 지상에 실현된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밖에 승려 태진이 소지했던 것과 같은 ‘남사고비기’라든지 ‘정감록’에 관해서도 말을 많이 들었다. 정말 그 비결의 내용처럼 세상이 뒤집어져 상놈이 양반도 되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올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당시 조정에선 일체의 ‘위험한’ 비결의 독서, 소장, 유포 및 출판을 엄금했다. 금지가 심할수록 비결은 더욱 유행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영건도 절간에서 객승이 소지한 ‘남사고’를 한두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영건은 비결을 베껴 곁에 놓고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는 점차 비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비결을 직접 소장하지 못했고, 비결대로 세상을 바꾸려는 ‘불온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이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영건의 성격이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그는 이미 늙었다. 하지만 큰아들 원팔은 달랐다. 영리한 아들은 아버지의 불안과 고민을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아들에겐 최봉희란 약빠른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미 ‘남사고’를 소장하고 있었다. 아들은 최의 책을 필사해가지고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들은 위험천만한 ‘비결’ 조직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남원 양반 이유성의 문제제기 김영건 일가에 정체성의 위기가 다시 찾아온 것은 1733년이었다. 이미 칠순에 접어든 정 노인과 다시 문제가 생긴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정 노인의 외손녀사위인 이유성과 다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술 취한 정 노인이 이유성이 듣는 데서 김영건의 비천한 출신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 노인의 친구 가운데는 젊은 시절 분금을 유독 탐낸 양반이 하나 있었다. 그 양반이 참으로 우연히 남원 읍내 길가에서 이미 노인이 다 된 분금을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다.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 노인은 김영건을 노씨네 종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김영건의 비밀을 들은 이유성은 반드시 그것을 폭로하겠다고 별렀다. 스스로 양반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혈기 방장한 양반 이유성에게는 신분이 뒤섞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을 뒤흔드는 범죄행위였다. 그는 가짜 양반 김영건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유성의 적의를 느낀 김영건 일가는 극도로 긴장했다. 양측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져 마침내 상대방을 관가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출된 양측의 문건을 검토한 이 형방은 그들의 주장에 애매한 점이 많은 데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다른 사건들이 많은 관계로 그에 대한 심리를 뒤로 미뤄놓고 있었다. 김영건의 큰아들이 남원성벽에 붙인 벽보에는 게시자가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라고 적혀 있었다. 김씨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유성 집안에 역모 죄를 뒤집어씌울 계산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그런 단순한 계산에서 김원팔 형제는 위험천만한 벽보를 붙였을까. 아니면 혹시 어떤 비밀집단이 그들의 배후에서 벽보사건을 기획했던 것일까. 도승 자명과 변산 승려 태진, 최봉희, 김원팔 등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다음 호에서 따져볼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뒷골목 맛세상] 흑석동 연못시장

    [뒷골목 맛세상] 흑석동 연못시장

    ●20여년전 미당 선생의 추억 아련 1980년대 5월 무렵이었다. 소위 ‘80년의 봄’으로 불리던 그때 나는 복학생 신분이 되어 뒤늦은 나이에 마지막 남은 학기를 채우려고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다니던 중이었다. 오후를 갓 넘긴 시각에 대학교 정문에서 시인인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을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내려오고 선생은 이제 막 학교로 올라가면서 서로 엇갈리는 식이었다. 미당 선생은 내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어어, 하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더니 가방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자네, 잘 만났네.” 내가 무슨 일인가 싶어 작은 눈을 크게 뜨자 미당 선생이 말을 이었다. “자네, 지금 바쁜가?”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면 잘 됐네. 자네 여기서 오분만 기다려 줄 수 있겠나?” “예, 그러지요.” “딱 오분일세. 내 얼른 학교에 올라가서 휴강하고 옴세.” 미당 선생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도대체 선생에게 무슨 황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랴 싶어 얼마간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생은 10분이 채 못 되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아직도 헐떡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나에게 물었다. “자네, 여기 연못시장에 대해 잘 안다면서?” “예, 알기야 압니다만….” 무슨 뜬금없는 연못시장인가 싶어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미당 선생은 다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잘 됐네, 자, 연못시장에 가보세.” “아니, 이런 벌건 대낮에요?” 미당 선생은 얼굴 전체에 주름이 지도록 특유의 너털웃음을 활짝 터뜨렸다. “와하핫, 이 사람아, 자네하고 나 사이에 술 마시며 노는 자리에서 어디 낮밤을 따진 적이 있었던가?” 하기는, 얼마든지 맞는 말이었다. 미당 선생은 일찍이 내가 1960년대 미아리에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에 다닐 무렵부터 시를 배운 스승이기도 하였는데, 돌이켜 보면, 바로 1학년에 갓 입학한 신입생 때부터 우연찮게 선생과 술자리를 어울리기 시작하여 2학년이 되어 군에 입대할 때까지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술자리를 함께 했던 터였다. 주로 길음시장 안에 있는 소위 니나노집이라고 부르는 막걸리집을 드나들었는데,30,40대의 나이든 여인들이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흘러간 유행가도 불러주고, 입에 안주도 넣어주는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어쩌다 내가 술집여자의 가슴에 손이라도 넣거나 아니면 입이라도 맞추고 있노라면 미당 선생은 대번에 쯧쯧, 혀를 찼다. “어허, 쯧쯧, 스승도는 되는데 제자도가 안되구먼 그랴.” 미당 선생은 고작해야 옆에 앉은 술집여자의 손이나 조물거리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귀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미당 선생과 나 사이에 이따금 이시영 시인이 합석을 하고는 했는데, 이시영보다는 일찍부터 되바라진 장돌뱅이 악동 출신으로 니나노집 문화에 호가 난 나를 선생은 더 귀여워해주었다. “자네를 보면 말이야, 꼭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거든.” 미당 선생은 어쩌면 나의 되바라진 장돌뱅이 악동 모습에서 선생의 대표시이기도 한 ‘자화상’의 한 구절을 돌이키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가고/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이마우에 언친 시(詩)의 이슬에는/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병든 숫개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선생은 내가 위악적으로 놀면 놀수록 그런 내 모습에서 젊어서 힘든 시절의 선생의 시의 이마를 적셔내리는 몇 방울의 피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각설하고, 중대부속고등학교 교정에서 새어나오는 라일락 향기가 나른한 봄날 오후의 흑석동 길을 걸어, 이제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된 선생과 서른을 훌쩍 넘긴 제자가 다시 한번 위악적인 악동이 되기 위하여 연못시장을 찾았다. 연못시장이란 흑석동 시장과 배수장 사이에 있는 술집거리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길음시장 안의 니나노집과는 달리 비교적 젊은 여자들이 술도 팔고 노래도 하는 곳이었다. ●외로움과 눈부심을 알게 했던 연못시장 연못시장은 시쳇말로 집창촌처럼 드러내놓고 몸을 파는 식은 아니었지만, 술집 아가씨들과 서로 눈만 잘 마주치면 얼마든지 하룻밤의 연애도 가능한 곳이었다. 대학시절의 한때 나는 퇴폐주의나 탐미주의에 깊이 빠져 아예 그런 연못시장 안에 있는 개선여인숙의 3층에 월세로 방을 빌려 산 적이 있어서, 술집 아가씨들과는 손님의 관계를 떠나서 옆집 오빠처럼 누구와도 친한 사이이기도 했었다. 연못시장 안의 목포집이라는 곳에서 옆에 아가씨들을 끼고 앉자, 미당 선생은 단숨에 술 한 잔을 넘기고 나서 지그시 눈을 감더니 참으로 행복한 표정이 되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내 남은 생애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늘 자네를 나한테 보내주셨네.” 미당 선생의 한 마디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곳이 찌르르, 아파왔다. 모르기는 해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이가 들면 찾아온다는 저 깊은 외로움과 눈부심을 함께 보았을 것이었다. 미당 선생은 그렇듯 외로움과 눈부심이 함께 깃든 표정으로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 드세나. 더군다나 지금은 봄이 아닌가,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봄이란 말일세.” 내가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봄’이란 말에 감탄을 하자, 미당 선생은 와하핫,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사연이 있거든. 동리 있잖은가, 왜, 자네 소설 스승 동리말이야. 그 동리가 아직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원래 시를 썼었거든. 시인이 되겠다고 말일세. 그런 어느 날 동리가 나를 찾아와서 시를 썼다면서 외우지 않겠나. 그래서 들어보니 과연 좋더라고.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운다니 얼마나 좋나. 암, 꽃이 피면 벙어리도 마땅히 울어야지, 내가 탄복을 해서 몇 번이고 그 구절을 암송하자, 자세히 듣던 동리가 손을 휘휘 내젓는 걸세. 그게 아이라, 그게 아이라, 벙어리도 꽃이 피면이 아이라 꼬집히면 인기라. 벙어리도 꼬집히면 운다, 알고 보니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었던 게야. 그래서 동리에게 내 당장에 시를 집어 치우라고 호통을 쳤지. 동리가 마침내 유명한 소설가가 된 데는 내 덕도 있을 걸세.” ●시장대신 푸짐한 먹자골목이 김동리 선생의 ‘꼬집히면’을 흉보던 그때부터 다시 훌쩍 스물 몇 해가 흘러가버린 지금 미당 선생은 물론 김동리 선생마저 세상을 달리 하여 먼 곳으로 떠났고, 연못시장 또한 술집거리의 기능이 아예 폐쇄된 채 빈민가가 되어 재개발을 기다리는 운명이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연못시장 어디에도 이제는 저녁마다 화려한 한복을 떨쳐입고서 목청껏 흘러간 유행가를 불러대던 꽃다운 아가씨들은 자취도 없고, 죽음 같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런 적막 속에서 얼핏 미당 선생의 쯧쯧,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아, 쯧쯧, 더 이상 뭘 찾겠다고 아직도 연못시장을 헤매나?” 연못시장은 사라졌지만, 대신에 연못시장 주변으로는 서민들의 땀내가 물씬 풍겨나는 맛집들이 먹자골목을 이루며 처마를 맞대고 이어져 흑석동시장까지 뻗어 있다. 생고기집, 돼지갈비집, 횟집, 풍천장어집, 떡볶이집, 라면집, 치킨집, 모둠전집, 순대집…. 엉터리생고기(02-814-3376)는 동작대로의 흑석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흑석동 시장으로 가는 골목 안에 있는 생고기전문집이다. 엉터리생고기는 정육점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삼십대 초반의 잘생긴 젊은이가 주인이다. 중고등학교 때 날렸던 씨름선수 출신인 하윤철씨는 역시 씨름선수 출신인 친구 박영준씨와 함께 사이좋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고기의 질이며 양은 대한민국의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런 자부심은 일찍이 독산동 도매시장에서 83호점을 운영하던 하윤철씨의 어머니 김정순씨로부터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고기맛 보려면 족히 1시간은 기다려야 엉터리생고기는 저녁 무렵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일도 예사인데, 그렇듯 손님이 몰리는 데는 무엇보다도 푸짐하면서도 싱싱한 생고기에 이유가 있다. 돼지고기의 경우에는 암퇘지만을 사용하는데, 그이는 고기의 깊은 맛을 알려면 반드시 얼리지 않은 생고기를 먹을 것을 강변한다. 뭔가 고기에 양념을 하거나 와인 따위로 숙성을 하는 식은 고기 자체에 하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엉터리생고기는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소고기 또한 특수 부위가 전문이다. 돼지고기의 경우 생항정살, 생갈매기살, 생오겹살, 생삼겹살, 생목삼겹살, 돼지등심의 끝부분에서만 나오는 가브리살 등이 1인분 300g에 7000원인데 세 명이서 2인분만 시켜도 충분할 만큼 양이 풍성하다. 돼지 한 마리라는 돼지고기 모둠에는 위에 나오는 여러 부위가 다 들어 있는데,1㎏에 2만원으로 4,5인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소고기의 경우 갈비에서 뼈를 추려낸 갈비본살이 1인분 300g에 1만 3000원, 안창살, 토시살, 차돌박이, 등심, 육회 등이 1만 5000원에다가 보리소 한 마리라는 소고기 모둠에는 역시 여러 부위를 모아서 1㎏에 4만원인데, 이 또한 4,5인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생고기를 불판에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낸 다음 참기름에 적셔 파무침을 얹어 마늘을 더해 상추며 깻잎에 싸먹는데, 생고기의 고소함과 부드러움이 그야말로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나는 느낌이다. 불판의 중심에 올려놓게 되어 있는 된장찌개는 손님이 원하는 한 얼마든지 무료로 리필이 가능하다. 동작대로에서 흑석동 중앙대학교 병원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부산오뎅(02-821-1159)이라는 작은 규모의 일본식 선술집이 있다. 중년답지 않게 앳되어 보이는 오경자씨가 주인인데, 언젠가 일본에 갔다가 불과 서너 명이 들어서면 꽉 찰 것 같은 선술집의 작고 아담한 규모에 매력을 느껴 마침내 일본식 선술집을 차린 것으로, 밀창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아, 여기에 미당 선생이 함께 있다면 하는 뜻밖의 아쉬움이 들었던 곳이다. 미당 선생이라면 분명히 신명이 나서 나에게 일본술을 마시는 여러 가지 복고조의 방법들을 일러주었을 터이다. “이 히레소주란 건 말씀이야, 일본말로는 히레사케라고 하지. 소주를 한소끔 가볍게 끓여내어 복어 지느러미를 넣고 이번에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잠깐 알코올의 나쁜 기운을 걷어내는데 말씀이야, 정종대폿잔에 가득 부어 훌훌 마시면, 아랫배에서부터 차츰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간다 이 말씀이야. 추운 겨울에는 언몸을 녹이는 데 최고거든. 어디 몸뿐이겠는가? 허방이라도 짚듯 자꾸 마음이 허전한 이들한테도 최고지.” 부산오뎅이 더 반가운 것은 히레소주가 정종대폿잔으로 한 잔에 2500원이라는 사실이다. 강남이나 명동 같은 여느 번화가 거리의 오뎅집이 똑같은 잔에 8000원인 데 비하면, 이게 무슨 횡재냐 싶게 거의 공짜 같은 기분이 된다. 게다가 탁자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유부, 맛살, 곤약 등 10가지 오뎅들은 한 꼬치에 1000원이어서 히레소주나 히레정종의 안주 삼아 하염없이 먹어도 값이 몇 천원밖에 되지 않는다. 술 종류는 이밖에도 정종대포, 냉정종 등의 일본술 외에도 소주나 청하, 천국, 백세주며 맥주 같은 우리 술도 다양하게 있다. 안주 또한 오뎅 이외에도 오징어데침, 고등어구이, 열빙어구이, 계란찜, 번데기, 은행구이 등이 있는데, 각각 7000원이다. ■ 15일자부터…새 연재 ‘서울이야기’ 지난해 9월부터 연재돼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이 8일자로 막을 내립니다. 맛깔스러운 음식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낸 송기원 선생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15일자부터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진이 전하는 ‘서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서울 이야기는 서울의 숲과 강, 애완동물과 이웃, 시민에게 다가가는 화장실 문화 등 서울에 관한 다양한 토픽을 소개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깔깔깔]

    ●이 여자가 사는 낙 소개팅 자리에 나선 남자와 여자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남자 : 혹시…, 담배 피우나요? 여자 : (호들갑 떨며) 어머∼, 저 그런 거 못 피워요∼! 남자 : 그럼, 술은? 여자 : 어머∼, 저 그런 건 입에도 못 대요! 남자 : 그러면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 : 연애요? 전 아직까지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는걸요∼! 남자 : 정말 순진하시군요! 전 반갑긴 하지만 무슨 낙으로 사시는지? 여자 : 호호호,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아요! ●힘이 넘쳐서 A : 내 나이가 일흔다섯인데 저렇게 멋진 모델들을 보면 스무살만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 B: 스무살만 더 젊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잘못하신 것 아닌가요? A: 아냐, 스무살 더 먹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여자들을 봐도 흥미가 없어질 것 아닌가.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아큐정전’의 저자 루쉰(魯迅)은 생전에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예찬했다.‘영국’이라는 속박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저항정신을 사랑했다. 얼마전 중국은 네티즌 13만명을 상대로 20세기 중국사회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루쉰을 1위로 꼽았다. 한국의 루쉰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다. 누굴까.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파란과 곡절의 삶 그 자체이다. 주위에서는 ‘60% 저널리스트,40% 아카데미션’이라고 한다. 르몽드지는 ‘사상의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1999년 ‘연세대학원신문’이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영향력 있는 학자와 저작’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학자 가운데 리영희(77)씨를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 또 모언론사에서 지난 한 세기동안 가장 영향력있는 100대 인물 중 리씨가 24위로 조사됐다. 리씨는 “나의 글은 루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루쉰을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은 루쉰과 리씨가 해양대학 출신의 지식인이라는 점. 리씨 역시 온몸으로 ‘저항’하며 한 시대를 깨우치려 했다. 또 올곧은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 경기도 군포시 수리동의 한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신분을 밝히자 “문이 열렸으니 그냥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섰다.40평쯤 돼 보였다. 리씨는 식탁에서 혼자 과일을 먹고 있었다.“점심을 지금 막 먹었거든. 조금만 기다려주게.”라고 했다. 잡안에는 조수미의 ‘새야새야’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이윽고 리씨와 마주앉았다. 이런저런 인사말이 오고갔다. 그는 “오늘 날씨도 좋은데 뒷산 구경이나 할까.”라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본의 아니게 전화내용을 듣게 됐다.“요새 글 못써. 책도 안 읽어. 스트레스 받으면 재발하거든. 뭐? 대학에서 두번 쫓겨나는 바람에 연금도 없어. 내가 언제 감투를 써봤나. 요새 책도 안팔려, 전자매체로 다 보잖아.” 문득 벽에 걸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손자손녀들과 밝게 웃는 모습의 사진도 보였다. 전화통화를 끝낸 리씨는 “가족이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해야 기억할 수 있지. 손자들은 서울 신촌에 살고 있어.”라며 노년의 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후 마을 뒷산인 수리산 입구에 들어섰다.“이 산은 말야, 해발 489m의 야트막한 산이지. 그런데 물이 좋아. 약수물 받으러 오는 사람 많아.” 리씨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천천히 걸었다. ●이번 자서전이 마지막 글 최근 발간된 자서전 ‘대화’(한길사刊)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왔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직접 글을 다듬고 쓰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지. 서울대 학생이 우리집에 기거하며 정리해 주었어.2년 걸렸지. 누락됐거나 생략된 것도 많아. 살아온 76년은 한마디로 ‘야만의 시대’였지. 일제와 해방후 50년은 반인간적 생존환경이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들 돕기 위해 많은 글을 썼지. 문장으로는 꽤나 중국의 루쉰 같은 스타일로 써왔어.” 20분 가량 걸었다. 약간 힘들었는지 의자에 앉자고 했다. 푸른 소나무 사이로 새들의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자연이 그에겐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까.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아름다운 경치야. 무심(無心)으로 걸어.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새삼 느끼지. 몸이 불편하니까, 지난날의 정열과 행동양식이 내면화되니까, 정서가 합치돼.”라면서 지나온 세월을 잠시 돌이켜본다. “참으로 우역곡절과 파란만장이었어. 어떤 장면과 국면에 가까이 안가도 될 것을, 지성인의 본질적 책임을 위해 개인의 안락보다는 사회쪽으로 시선을 돌렸지. 가정위주로 산다는 것은 배반이었어. 자식들에겐 굉장히 미안해. 또 지나칠 정도로 논증적으로 빈틈없이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었지. 정서적 내면은 철저히 억압됐어.” 이같은 고통스러운 삶으로 술은 늘 곁에 끼고 있었다고 했다. 모언론사 외신부장 시절이다. 부원들과 팔당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부원들은 정종을 마셨지만 리씨는 들고온 고량주(10홉짜리 큰병)의 뚜껑을 땄다. 안주없이 벌컥벌컥 5홉을 연거푸 마셨다.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위궤양이었다. 성인의 위두께가 보통 11㎜인데 9㎜까지 파고들었단다. 이후 15년 동안 위궤양으로 고생했다. 리씨는 인터뷰에 앞서 스트레스 받는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온국민의 관심사인 독도문제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모든 상황을 1945년 이전으로 롤백하려는 큰 구상 속에 영토문제를 꺼내고 있지. 우리는 고증과 실증을 통해 법률적 역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해. 걱정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 ‘냄비’ 정서야. 항상 반응적이거든. 그러나 독도문제만큼은 영국 국민처럼 뚝심으로 대처해야 해.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은 불독처럼 말야. 여기에 일본인 같은 교묘함도 염두에 두어야 해.” ●한·일 우익들의 밀착이 문제 이어 “이번 사태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친일파 우익과 일본의 우익단체간에 밀착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 뒤에는 항상 미국이 있지. 김대중 정권에서도 그랬지만 노무현 정권에 와서 미국은 남한의 우익을 더욱 부추기고 있어. 기독교 인사, 전직 장관, 군부세력 등 남한의 우익단체가 더 무서워. 자기 몸속의 벌레를 찾아내야 해.”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낀 듯 “그만두자.”고 했다. 화제를 돌렸다. 여생에 뭔가 또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분량이 있어.40년간 범속한 지식인의 머리로 쓴 소리도 많이 했지. 국민들에게 시대의식과 세계관을 바로잡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봐. 또 우리 국가나 사회가 대체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 이만하면 분량을 다했어.”라며 말끝을 흐린다. ●광주 배후자로 몰려 수차례 고초 그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3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구한말 신식교육을 받은 선비형이었다.14세 때 경성의 ‘공립5학년제 갑종 중학교’에 입학한 뒤 1945년 11월 미국식 6년제가 된 고등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 담배말이와 성냥장사를 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그러던 1946년 국비로 입혀주고 먹여준다는 말을 듣고 해양대학 1기생으로 입학해 1950년 3월 졸업했다. 6·25전쟁이 나자 연락장교에 지원해 7년 동안 전방근무를 했다. 전방 근무시절엔 권총을 잘 쏘아 명사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제대 1년전 56년 스물일곱에 하숙집 아줌마의 중매로 결혼했다. 제대후에는 합동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취직했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셋다 합동통신사 다닐 때 태어났다. 이후 72년 신학기부터 한양대 강단에 서면서 무섭게 글을 썼다.77년에 ‘8억인과의 대화’‘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을 한데 묶어 2년 동안 투옥된다. 수감 중에는 ‘D검사와 리교수의 하루’라는 소설을 썼다. 대학에 복직됐으나 ‘광주폭동’ 배후자로 몰려 다시 해직되는 등 수차례 고초를 겪는다. 정년 퇴임후 그는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자위하며 조용히 살았지만 2000년말 일흔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어장애까지 겹쳤다. 다행히 요즘들어 건강이 다소 회복됐다. 그러나 오른손의 떨림과 손가락마비는 여전해 장마철만 되면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거듭 말하는 리씨. 그는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며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쓸쓸히 산을 내려왔다.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평북 운산 출생 ▲50년 해양대학 1기 졸업, 경북 안동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중 6·25전쟁이 나자 연락장교 지원 ▲57년 대위로 군제대 ▲57∼64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64∼71년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 ▲72년 한양대 문리과대 교수 ▲76년 박정희 정권때 해직 ▲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됨. ▲84년 재복직 ▲87년 미국 버클리대 부교수 초빙 ▲95년 한양대에서 정년퇴임 ▲99년 동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역임 ■ 주요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74년), 우상과 이성(77년),8억인과의 대화(77), 분단을 넘어서(84년), 베트남전쟁(85년), 인간만사 새옹지마(91년) 등 km@seoul.co.kr
  • [데스크시각]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포커페이스/박정현 정치부 차장

    짐 캐리가 영화 ‘마스크’에서 보여준 감정 표현은 그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묘미다. 과장된 몸짓으로 화난 얼굴, 웃는 표정 등 그가 나타내지 못하는 감정이 없다. 짐 캐리 같은 배우가 있는가 하면, 일흔다섯살의 늙은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찾기 어렵다. 늙은 경호원 역을 맡은 ‘사선에서’나 로맨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그의 감정은 언제나 알 듯 모를 듯하다. 화가 났거나 슬픈 표정은 물론이고 웃는 모습을 보기도 어렵다. 무표정에 가까운 그의 표정은 주름살과 어울려 노배우의 회한과 통찰, 인생 역정을 느끼게 한다. 포커페이스인 이스트우드의 표정은 외교관과 닮았다. 국가의 이익을 걸고 협상해야 하는 외교관이 흥분과 분노,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게 철칙이다. 하지만 독도문제를 다루면서 보여준 우리 외교관의 모습은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시마네현 의회의 행위에 개탄한다.”고 했고, 이규형 외교부 대변인은 시마네현의 행동을 ‘불순한 의도’,‘무분별한 행위’라고 험한 표현까지 썼다. 정부가 더 이상 조용한 외교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점은 국민의 정서를 감안해서도 그렇고, 돌아가는 동북아 정세를 봐서도 당연한 일이다. 동북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침략전쟁이나 다름없다. 일본 시마네현의 조례 제정을 한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규정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대일 신 독트린에서 독도문제를 ‘제2의 한반도 침탈’로 규정지은 것은 이런 분위기를 한 풀 낮춘 점잖은 표현이다. 21세기의 영토전쟁이 19세기의 제국주의와 다른 점은 총칼 대신 역사를 왜곡하는 말과 글로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사를 왜곡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통일한국 이후의 한국과의 영토분쟁에 대비한 것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있게 들린다. 일본 시마네현의 조례제정이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한 지 꼭 100년 만에 강행했다는 것을 보면, 일본이 오래전부터 아주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 같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본격 행동을 앞둔 서곡이라는 얘기다. 새로운 영토전쟁에 대응하려면 조용한 외교도 안 되지만 냉정함과 치밀함을 잃은 외교는 문제해결과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 외교부 간부들이 나서 격앙된 표현을 쏟아내는 것을 외교관들은 마뜩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발끈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야말로 일본의 노림수일는지 모른다. 그래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을 테니까. 믿었던 일본에 발등 찍혔다고 믿음이 배신감으로 돌변하는 듯한 감성외교는 일본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은 될지언정, 일본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독도문제 대응에는 차분하고 냉정하고 치밀해야 한다. 냄비식의 대응은 더더욱 안 된다.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것 보다 훨씬 정치(精緻)해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전국이 들끓고 한·중관계가 한바탕 몸살을 앓았던 게 불과 9개월전의 일이다. 하지만 연말에 중국 서열 4위인 자칭린 정치협상회의 주석이 방한한 이후 우리나라는 언제 고구려사 왜곡이 문제됐느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중국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있고, 고구려사 왜곡문제에 대한 연구가 진전됐다는 얘기도 없다. 고구려사 왜곡의 불씨는 남았지만 우리의 기억속에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일본은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서 이내 식어버리는 우리의 이런 여론을 계산에 넣었는지도 모른다.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에 힘을 실어주려면, 이제 민간이 나서야 할 때다. 툭하면 장충체육관이나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지던 동원된 관제 집회는 신물이 난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보여준 촛불시위와 붉은 악마의 물결은 전국민에게 감동을 줬고,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일본이 왜곡 교과서를 검정하는 4월5일에 광화문의 촛불시위와 붉은 악마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촛불시위와 붉은 악마의 바다가 독도까지 뻗어나가면 일본은 언감생심 독도를 거론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박정현 정치부 차장 jhpark@seoul.co.kr
  • [김영만칼럼] 고령사회, 歸農과 아버지의 위엄

    [김영만칼럼] 고령사회, 歸農과 아버지의 위엄

    나라가 빨리 늙어 야단이다. 대통령이 주관하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구성이 추진되고, 충남 서천군은 발 빠르게 ‘노인공동농장’계획을 발표했다. 노인 150가구를 농장에 입주시켜 하루 4시간 근로에, 월 20만원을 주겠다 한다. 요양원·찜질방·병원을 둬 노인·농촌 문제를 같이 푸는 구상이다. 실업이나 노인문제를 농촌에서 풀려는 시도는 전에도 더러 있었다. 외환위기 때 일었던 실업자들의 귀농바람이 많은 예중의 하나다. 귀농바람은 그러나, 이들이 얼마뒤 다시 탈농촌해 농업은 여전히 수익모델이 아님을 확인하는데 그쳤다.1990년 삼양식품 대관령목장의 노인목부 실패사례도 동경속의 농촌과 실제 생활이 다름을 보여줬다. 당시 50∼65세 부부 10쌍의 공모에 대기업중역·고위공직자·교사부부 등 500쌍이 응모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주택과 식사, 월 70만원의 임금을 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한두달새 모두 목장을 떠났다 한다. 고령사회로 가는 길목의 이정표들은 우울하다.21년 뒤에는 경제인구 한명에 노인 한명씩이 딸린다. 가장 우울한 일은 ‘30∼40년을 은퇴자로 살아야 한다.’는 예고다. 이러니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60세 이후를 ‘두번째 인생’으로 부른다. 여류 심리학자 게일 쉬히는 남자의 제 1직장 은퇴와 함께 오는 50대를 ‘갱년기’로 분류, 제 2직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세대 이상을 은퇴자로만 산다면,‘인류진화사상 가장 심오한 변화’라는 장수(長壽)도 도시에선 축복 아닌 재앙이다. 도시는 은퇴자가 아닌 현역의 공간이다. 공원과 노인정, 무임승차권에서 늙은 아버지들이 존엄할 방법을 찾기는 난해하다.‘경제가 고도화될수록 일자리는 줄어들 것’(제러미 리프킨)이므로 도시에 살고자 해도 답이 안 나온다. 이런 때 문민정부의 농촌개발계획인 ‘돌아오는 농촌’을 생각한다. 도시의 돈과 사람을 농촌으로 U턴시켜 문제를 풀자는 것이다.10여년 전엔 생뚱맞았지만, 여러 통계는 이 컨셉트가 두번째 인생 문제를 풀 효과적인 대책중의 하나임을 역설한다. 현재 농촌의 농업경영주중 23%는 일흔이 넘었다.60대는 36.2%. 농산물의 절반도 환갑을 넘은 이들이 만들었다. 한세대 앞서 고령화된 농촌의 통계속에 고령사회 해결을 위한 역설(逆說)의 키워드가 있는 셈이다. 이 통계의 묘미는 농촌이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경영주로 활동하는 유일공간이란 점이다. 팔순에도 농사 짓고, 오래 건강하게 사는 보너스도 있다. 한부부가 네댓 마지기로 생활하며, 약간의 노후자금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수백만명을 수용할 휴경지도 농부를 기다리고 있다. 또 있다. 최근 경남의 한 마을에서는 일흔한살 동갑끼리 이장선거에서 경합했다. 낙선자는 후년의 선거를 위해 와신상담하고 있다. 농촌에서 일반화된 이런 현상이 고령화가 낳은 그림자만은 아니다. 노인세대가 생산자로서만 아니라, 공동체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현장이다.65세이상을 노인으로 본 것은 1891년 독일 비스마르크의 ‘노령연금법’이다. 평균수명이 지금의 절반도 안 되던 때다. 인간백세시대의 오늘에 ‘일흔한살 이장’은 인간진화 사례로 축복할 일이다. 1960년대 후반이후 한국은 20년 넘게 대규모 이농의 시대였다. 농촌청년들이 공장으로 가고, 도시로 유학을 간 농촌 아이들도 그곳에 머물렀다. 어느날, 조기퇴출을 말하는 사오정세대가 된 45세어름에서 60 초반까지가 바로 이들이다. 농촌경험을 가진 이들부터 귀향하면 어떤가. 생활인으로, 또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지키고 미래세대의 짐을 더는 방책이 거기 있음이다. 서천군은 대관령의 실패도 눈여겨봐야 한다. 성공하는 귀농 만들기는 사실 서천군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몫이지 않을까 싶다. 논설실장 sangchon@seoul.co.kr
  • 儒林(30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퇴계의 사상은 이처럼 12살 때 깨달은 논어에 나오는 이(理)자 한 자에서 시작되었다. 이란 원래 진리(眞理)를 뜻하지만 원리(原理), 이치(理致) 등으로 말하여지는 일체의 법칙(法則)을 뜻하는 것이다. 퇴계는 12살 때 공자사상의 골수인 이(理)를 타파하여 돈오(頓悟)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성현과 공자의 학문을 그리워하는 모고지심은 퇴계의 평생화두였다. 이러한 마음은 퇴계가 기고봉(奇高峰)에게 준 ‘답기명언(答奇明彦)’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바로 산림 속에서 늙어 죽을 계획을 새겨 조용한 곳에 띠옥이나 얽어 놓고 독서와 양지(養志)의 부족한 점을 더욱 구하여 나가는데, 수십 년의 공을 더 하였으면 병도 틀림없이 나았을 것이고, 학문도 틀림없이 성취되어 천하 만물이 내 즐기는 바가 되었을 것인데, 어찌하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과거를 보고 관직에나 눈을 팔게 됨으로써 육신만을 위하였는지.…” 실제로 퇴계는 19살 되던 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학문의 길을 가려는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홀로 오두막에 앉아/만 권의 책을 읽으며/늘 같은 마음으로/십 년을 지내 오니/이제야 우주 만물의 근본을/깨달은 듯싶어/내 마음을 붙잡으니/진리가 보이더라.” ―그러나 나는 뱃전에 서서 이제는 까마득히 멀어진 두향의 무덤을 보며 생각하였다. ―이처럼 19살에 이미 ‘우주 만물의 근본을 깨달아 진리가 보이는 듯하던’ 이퇴계는 그러나 맞지 않는 벼슬을 평생을 통해 일흔아홉 번이나 치사은퇴(致仕隱退)하다가 마침내 단양군수를 끝으로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단양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러한 퇴계의 치열한 구도정신을 답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여정에서 뜻밖에도 기생 두향의 무덤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이퇴계의 감춰진 사생활이 드러나게 되었음이니, 그렇다면 두향은 퇴계에게 있어 어떤 존재였던가. 문수보살(文殊菩薩). 석가여래의 왼편에 있는 지혜의 상징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지혜의 푸른 연꽃을 들고 있는 화신(化身)인데, 그렇다면 두향은 퇴계에게 지혜의 완성을 인도한 문수보살인 것이다.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공양미 삼백 섬에 몸이 팔려 임당수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죽었다면 두향이도 소복을 입고 남한강 푸른 물 속에 살신공양함으로써 마침내 이퇴계의 눈을 뜨게 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혼자만의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고 그 어떤 업도 삼라만상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법이며, 수승(殊勝)한 다보탑도 크고 작은 탑돌이 쌓여져 이루어진 것이니, 두향이야말로 이퇴계를 이룬 공양탑(供養塔)인 것이다. 어느덧 배는 떠나온 선착장에 이르렀다. 선원은 엔진을 끄고 배를 천천히 부교에 접안하였다. 내리기 편하도록 널빤지를 연결한 후 나는 천천히 배를 내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고마운 사내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마주 잡은 손은 따뜻했다.
  • [여담여담] 앙드레김 바로 세우기/최여경 주말매거진 We팀 기자

    일흔살의 디자이너는 이날도 무대에 섰다. 아침부터 진행된 행사 준비로 약간 지쳐 보였지만 화장은 들뜨지 않고, 화려한 하얀 옷은 여전히 깔끔하다.3일 저녁,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그의 이름을 건 안경브랜드 패션쇼. 그는 행사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정리하고,20여개국 대사·참사관 부부와 같은 명사를 찾아 인사를 하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들은 그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표정이다. 순간 그가 디자인한 한국외국어대 부속외고의 교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의 말투를 흉내내며 ‘너무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하다.’는 것부터 ‘왜 하얀 옷이 아닌 걸까.’‘교복을 입으면 말투가 그처럼 될까.’까지. 안타깝게도 세련됐다, 멋스럽다 등 옷 자체의 평가보다 그를 희화한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의 옷을 입기만 해도 상류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듯하고, 헤어마스카라를 한 머리와 진한 아이라인의 눈매에,“오우∼”로 시작하는 말 속에는 뷰티풀, 엘레강스, 판타스틱, 엑설런트 등 온갖 영어표현이 뒤섞여 있어 우리는 그를 그저 사치의 중심에 선 디자이너나, 말투와 외모가 독특한 인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의 삶의 철학과 직업정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2시간동안 신문을 훑고,50년 가까이 계속해온 일을 하며 늘 쇼를 기획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그들이 갈 때 문까지 직접 배웅한다는 것을. 비록 이름은 외국어지만 장부를 꼼꼼히 정리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 모범성실납세자이며, 자비를 들여 국내외에서 패션쇼를 열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각국의 대사의 동정을 챙기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초대해 대한민국 민간외교관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애국자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은 ‘앙마담’,‘앙샘(앙선생님)’ 정도로 부르는, 장점이 훨씬 많음에도 단점이 더욱 부각된 인물, 너무 세심해서 오해도 받는 인물…. 하지만 외국에서는 ‘놀라운 옷의 예술가’로 인정받는 패션 마에스트로.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문화훈장을 주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시는 1999년과 2003년에 그의 날을 선포하기도 한 그가 바로 패션 대가, 앙드레김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끊임없이 진행돼야 한다. 그 연장선으로 앙드레김의 진가를 바로 알고 우리의 패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시작해야 한다. 최여경 주말매거진 We팀 기자 kid@seoul.co.kr
  •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새달10일 개봉

    챔피언의 영광을 그린 권투영화도, 트레이너와 권투선수 사이의 우정을 그린 휴먼드라마도 아니다.‘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새달 10일 개봉)는 그 둘을 포함하면서도 지금까지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아왔던 전형적인 패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의 거친 결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청회색 화면과 절제된 감정표현으로, 영화는 삶의 빛과 그늘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 가족보다 더 진실한 인간관계의 스토리를 한 올 한 올 새겨놓는다. 숨가쁘게 몰아치는 드라마는 없지만, 여운은 길다. 영화의 전반부는 다소 빠른 호흡으로 전개된다. 한때는 잘나가던 트레이너였지만 딸과 멀어진 뒤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프랭키. 은퇴복서인 친구 스크랩(모건 프리먼)과 허름한 체육관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여전히 실력만큼은 최고다. 어느날 여성 복서 지망생인 매기가 찾아오고, 프랭키는 여성은 키우지 않는다며 냉대한다. 그럼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체육관에 나와 연습에 매진하는 매기를 보면서 프랭키는 마음을 돌린다. 권투영화와 차별점을 찍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영화는 예측할 수 없는 승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권투장면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내레이션이 흘러 관객들은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데다, 거의 대부분의 시합은 매기의 싱거운 승리로 끝을 맺는다. 승승장구하며 순식간에 정상까지 치닫는 모습 속에는, 승리의 희열보다는 삶의 정상을 동시에 일궈낸 두 사람의 깊은 교감이 뜨겁게 박동친다.“아무도 볼 수 없는 자신만의 꿈 때문에 어떤 고통이 와도 참고 견디는 복싱의 신비함”을 함께 느끼면서 가족보다 진한 인간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하지만 거침없이 삶의 정점에 오른 순간, 이들은 믿기 힘든 수준으로 추락한다. 권투영화라면 마땅히 역경을 극복한 뒤의 승리로 매듭을 지어야 하겠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이미 꿈을 이룬 자의 추락을 긴 호흡으로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모든 꿈이 흩어져버린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연민이 아니다. 슬픔은 꿈을 일궈낸 자들의 환희를 뚫지 못한다. 끝까지 진실된 관계를 유지하며 삶의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선택 앞에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숭고한 깨달음이 저절로 가슴 속을 파고든다. 혈연적인 가족관계만을 부각시키는 휴먼드라마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인간과 삶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감동이 빛나는 영화. 올해로 일흔다섯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프랭키 역을 맡았다.‘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힐러리 스웽크는, 결코 굽히지 않는 의지를 지닌 여성 복서를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영화는 올해 전미 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 등을 휩쓸었고, 아카데미상에도 7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12세 관람가.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당수왕’ 천규덕

    [어떻게 지내세요] ‘당수왕’ 천규덕

    “영광을 재현해야지요. 레슬링을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많은 박수와 성원을 보내주십시오.” 왕년의 프로레슬러 천규덕(73)씨.‘박치기 왕’ 김일,‘비호’ 장영철 등과 함께 1960∼70년대를 풍미했다. 당시 서울 장충체육관과 문화체육관에는 이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장사진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특히 검은 타이츠를 입은 천씨가 ‘얍’하는 기합과 함께 당수로 일격을 날리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 잠실 올림픽경기장내에 위치한 (사)신한국프로레슬링협회(회장 김두만) 사무실에서 천씨를 만났다. 입구에는 프로레슬링 전용경기장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또 주위 벽면에는 천씨를 비롯, 김일 장영철 등 추억의 스타들이 대형 걸개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허리에 찬 챔피언 벨트와 함성을 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천씨는 트렌치코트에 헌팅캡(일명 도리우치 모자)을 쓰고 있었다.60대 중반으로 보인다고 하자 그는 “올해 일흔셋이여.4년 전에 술을 끊었지.”라며 웃었다. 프로레슬링 전용경기장은 지난해 11월 개관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원로와 프로레슬링 관계자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지요.1단계 숙원사업이 이뤄진 셈입니다. 오는 3월부터는 이곳에서 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립니다. 많이 홍보해주세요.” 그는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역도산(본명 김신락)과의 일화를 소개했다.63년 가을 역도산이 잠시 귀국한다. 숙소는 조선호텔.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로레슬러들이 호텔 앞으로 달려가 도열, 역도산을 환영했다. 이때 천씨는 공군 상사. 군복을 입었다. 역도산은 천씨와 악수를 나누면서 “손의 크기가 나와 비슷하군. 일본으로 올 생각 있나.”라고 했다.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천씨는 부대에 돌아가자마자 제대신청을 했고, 일본에서 연락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해 12월 역도산이 칼에 맞아 숨졌다는 비보를 접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천씨는 13세 때부터 중국에서 무예를 익히고 귀국한 이철산에게 당수를 배워 5단의 실력을 쌓았다. 이후 29세 때 프로레슬링에 입문했으며, 김일과 함께 일본 레슬러들을 때려눕혀 국민적 영웅이 되기도 했다. 지난 85년 링을 떠난 천씨는 선수시절에 적을 둔 영진약품에서 4년 동안 더 일을 했다. 이후 군 동기생의 회사에서 6년 동안 고문을 맡았다. 그는 레슬링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지난 98년 프로레슬링동호회(서울 신설동)를 결성했다. 현재 인천시 간석동 40평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단둘이 지낸다. 그의 장남은 탤런트 천호진. 이웃동네에 살고 있다. “우리는 민족의식을 갖고 일본 선수들과 싸웠습니다. 더 늙기 전에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야지요.” 김문기자 km@seoul.co.kr
  • [뒷골목 맛세상] 인천의 음식특화거리

    [뒷골목 맛세상] 인천의 음식특화거리

    1980년대 초였다.30대 중반으로 나이가 어슷비슷한 문인들 다섯 명이 소문 없이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번갈아 서로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하루를 지내며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임이었다. 마침 살고 있는 곳이 저마다 달라 찾아다니며 놀기에는 적격이어서, 선인(先人)들이 흔히 즐기던 세족(洗足)의 분위기를 본 뜬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제 와서 구태여 면면을 밝히기가 어딘지 모르게 쑥스럽지만, 문학평론가 최원식이 인천에, 소설가 김성동이 대전에, 시인 이동순이 청주에, 시인 이시영이 서울에 그리고 나는 경기도 팔탄의 월문리라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소문 없는 작은 모임이지만 이름도 없지 않아 명이회(明夷會)였다. 명이는 지혜로운 최원식이 주역의 64괘 중 지화명이(地火明夷)란 괘에서 따온 이름이었는데, 한 마디로 암흑시대를 뜻하는 괘였다. 아니, 암흑시대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암흑시대를 슬기롭게 살아남을까를 가르치는 괘라고 해도 좋았다. 명이괘는 태양이 지하에 잠겨 암흑이 오는 상(象)이며, 성인(聖人)의 밝은 덕이 지하에 묻히는 상이기도 했다. 또한 암군(暗君)이 위에 있어 지혜로운 현인들이 상하고 해를 입는 암군시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어떤 간난노고가 닥치더라도 애오라지 바른 도를 굳게 지켜, 결코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비단 지혜로운 최원식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명에게도,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어 서슬 푸르게 날뛰던 80년대란, 글을 쓰는 일은 물론 제 정신을 지니고 하루하루 살아내기마저 힘든 암군시대가 분명하였다. 그랬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는 광주에서의 참혹한 학살을 나 몰라라 한 채, 눈 감고, 귀 막고, 입에 재갈을 물려, 스스로 자폐증 환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삶 자체가 치욕스러운 암군시대임에 분명하였다. 어쩌면 명이회란 한 달에 한 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자폐증을 치유하고자 한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몰랐다. ●20년 넘게 아구와 다른 생선인줄 알아 당시의 정황을 부연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 ‘꽃 피는 봄날’이라는 자작시 한 편을 인용하고 싶다. ‘어머니, 당신이 손수 물 주어 기르신 앵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는 이 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습니다. 밤이면 더욱 눈부신 저 꽃무더기들은, 어머니, 어찌 당신 혼자 오셔서 꽃 피우셨겠어요. 오늘밤 저렇게 많은 넋들이 함께 몰려와 잠든 자식을 깨워 눈부시게 할 때, 아직까지 미치지도 죽지도 않은 자식을, 어머니, 단 한번만 기뻐해주세요.’ 명이회의 모임이 어언 최원식의 인천에 이르러, 그날도 우리 다섯 명은 인천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신 끝에 대취하였다. 그리고 새벽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최원식, 이시영, 나 이렇게 셋이서 무슨 은행건물의 계단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섯 중에서 김성동과 이동순이 어디에선가 먼저 떨어져 나가고 셋이서 다시 술집을 전전한 끝에 인사불성이 되어 은행건물의 계단을 베개 삼아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마침 추위가 닥친 무렵이라 취중에서도 셋은 서로 몸을 꼭 껴안아 체온을 아끼는 자세였다. 그런 우리를 출근길에 나선 직장인들이며 학생들이 바쁜 걸음의 와중에도 멈추어 서서 힐끔거렸고, 몇몇 여학생들은 유리알 구르듯 명랑한 목소리로 깔깔깔, 드러내놓고 웃음을 터뜨려댔다. 우리로서는 어찌 일말의 자괴가 없을 수 있으랴. 최원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면 안 되는데….”. 이시영이 뒤를 이었다.“갈 데까지 간 모양이여.” 나도 한 마디 덧붙였다.“그래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가슴 한 쪽이 시원하기는 하네.” 짧은 자괴 끝에 최원식이 말머리를 돌렸다.“어디 가서 해장은 해야지?” 최원식이 골목길을 한참 헤매더니 마침내 허름한 음식점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기이한 생선매운탕으로 해장을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끝이어서, 해장을 하자마자 머리 속의 명정(酩酊)은 물론 뱃속의 욕지기도 다시 맹렬하게 살아올라왔다. 그런 명정과 욕지기의 와중에서도 처음 대하는 생선매운탕의 맛이 참으로 시원하고 개운했다. 내가 생선 이름을 물어보자 최원식은 물텀벙이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날 아침의 물텀벙이탕은 나의 기억 속에 무슨 꿈결에서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하게 그 맛이 각인되어 남았다. 그런 내가 물텀벙이가 아구에 대한 인천식 사투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동안 나는 물텀벙이와 아구를 전혀 종류가 다른 생선으로 잘못 알고 지낸 것이었다. 나로서는 20년이 훌쩍 넘도록 둘을 다르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숫제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비록 인천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도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즐겨 찾던 요리가 아구였던 것이다. 인하대학교 어름에 있는 용현동 네거리의 물텀벙이거리는 시쳇말로 음식특화거리의 하나이다. 인천에는 물텀벙이거리 외에도 화평동의 냉면거리, 인현동의 삼치거리, 차이나타운의 밴댕이회거리 등의 음식특화거리가 있는데, 인천시에서 10여 년 전부터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진물텀벙’은 오늘날 용현동 네거리의 물텀벙이거리가 있게 한 원조이다. 구관(032-883-6690)과 신관(032-883-1771)이 한 건물에 나란히 있는데,1970년 1월 전병찬, 우금련 부부가 현재의 구관 자리에 비가 줄줄 새는 움막집을 월세로 얻어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물텀벙이탕을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신포동에서 왕대포집을 하다가 부부가 다 사람이 좋아서 외상만 잔뜩 주는 바람에 밑천까지 들어먹는 식으로 쫄딱 망하고, 우연히 물텀벙이에 생각이 돌아 까짓것하고 막가는 심정에서 시작한 물텀벙이탕이었다. 당시에 인천사람들은 물텀벙이 자체를 흉물스럽게 여겨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 그야말로 연안부두 바닥에 흔하게 굴러다니며 자칫 발에 걸리적거리는 천덕꾸러기가 물텀벙이였다. 물텀벙이라는 이름 자체도 어부들이 아무짝에 쓸모없이 흉물스럽기만 한 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당장 작살로 찍어서 바다에 버렸는데, 텀벙 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를 그대로 이름 삼아 물텀벙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생김새 흉측해 연안부두의 천덕꾸러기 처음에는 물텀벙이탕을 작은 양은냄비 하나에 200원부터 시작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싸고 양이 많은데다가 막걸리에 곁들이는 술안주로는 그만이어서, 주로 연안부두의 부두노동자들로부터 입소문이 퍼졌다. 급기야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너나없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물텀벙이탕을 처음으로 시작한 이 벤처 부부는 3년 만에 움막집을 헐고 이층집을 지을 정도로 떼돈을 벌었다. 그러자 이 부부의 성공에 힘입어 용현동 네거리 일대에 하나 둘 물텀벙이탕 집들이 늘어나게 되고, 마침내 물텀벙이거리까지 이루게 되었다. 물텀벙이탕은 한 마리에 4,5kg 나가는 큰 놈을 굵직굵직하게 잘라 바닥에 안치고, 미더덕이며 새우 같은 해물에 콩나물, 미나리, 쑥갓, 깻잎, 냉이, 목이버섯, 호박 등의 갖은 야채를 넣은 다음에 번줄이라고 부르는 말린 밴댕이를 고와낸 육수를 부어 끓여내는데, 한 입 뜨자마자 그 시원하고 개운한 입맛은 20여 년 전의 어느 날 아침에 무슨 꿈결에서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이 당장에 살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텀벙이는 탕과 찜의 값이 같아 특대 4만원, 대 3만 5000원, 중 3만원, 소 2만 5000원인데, 특대며 대는 너댓 명이, 중은 서너 명이, 소는 두세 명이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또한 탕과 찜은 각각 고기며 야채를 먹은 다음에 고소한 국물에 공깃밥을 볶아먹거나 쫄면을 넣어 쫄깃한 면발을 즐길 수도 있다. 동인천역 부근의 화평동 냉면거리는 철로의 굴다리에서 중앙시장 입구를 마주한 송월동 방면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소위 세숫대야냉면으로 더 알려진 냉면거리는 역시 인천시의 음식특화거리 중의 한 곳이다. 삼미소문난냉면, 웃터골냉면, 냉면천국, 화평냉면, 할머니냉면, 동그라미냉면, 일미냉면, 고향냉면, 옛날우리냉면, 아저씨냉면, 기와집냉면, 왔다냉면 등이 한꺼번에 몰려 있다. ‘삼미소문난냉면’(032-777-4861)은 화평동에 소위 냉면거리가 있게 한 원조 격으로 알려졌다.1980년 김중훈, 김현금 부부가 시작한 냉면집은 처음에는 백반도 함께 팔았는데, 둘 다 300원으로 값이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 인심 변함없어 동인천역 일대는 원래 동일방적, 이천전기, 대성목재, 동아제분, 대우중공업, 인천제철 등 큰 공장이 많아서 퇴근 무렵이면 젊은 남녀 노동자들이 우루루, 식당으로 몰려왔는데, 한창 젊은 나이의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냉면 한 그릇이나 밥 한 그릇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하는 말은 ‘아줌마 냉면사리 하나 더 줘요.’ 아니면 ‘아저씨, 밥 한 그릇 더 줘요.’였다. 마음씨 좋은 부부는 밥그릇이야 그렇다 치고, 냉면그릇은 아예 그릇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보통 냉면집보다 두 배는 커서 2ℓ의 물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는 커다란 양푼이었는데,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손님들 사이에 소문이 돌아 냉면 자체가 숫제 세숫대야냉면이 되어버렸다. 물론 세숫대야냉면으로도 양이 모자라 하면 얼마든지 먹게끔 냉면사리를 시쳇말로 리필을 했다. 이들 부부가 20년이 훨씬 넘게 냉면을 팔면서 가장 많이 리필을 한 이는 일곱 번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부는 이 모든 것이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라면서 껄껄 웃었는데, 요즈음은 대부분이 세숫대야냉면 한 그릇을 비우는데도 벅차 하지만 이따금씩 세 번쯤 리필을 하는 이도 없지 않다고 했다. 세숫대야냉면이 소문이 나면서 주변에 하나 둘씩 냉면집들이 생겨나고,10여 년 전부터는 음식특화거리로 지정되면서 아예 골목 자체가 냉면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삼미소문난냉면도 더 이상 백반은 중단한 채 냉면 하나만으로 메뉴를 고정시켰다. 그동안 냉면 값은 14년 전의 300원에서 3500원으로 껑충 뛰었지만, 냉면의 맛이나 양은 변함이 없다. 그렇듯이 손님들 또한 20년이 넘는 단골손님들이 수두룩하다. ■ 한 접시 5000원 ‘입맛대로’ 인천역 부근의 차이나타운 한 쪽에도 음식특화거리 중의 하나인 밴댕이회거리가 있다. 목포밴댕이, 제1호밴댕이, 수원집, 서산밴댕이, 터줏골밴댕이, 충남식당, 도은식당, 원조밴댕이, 포장마차밴댕이, 연화밴댕이 등이 처마를 나란히 한 채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이중에서 ‘원조밴댕이’(010-0698-5023)가 이곳에 밴댕이회거리가 들어서게 한 원조 격인데,40여 년 전부터 가게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김완순씨가 주인이었는데 나이가 일흔이 넘어 일을 그만 두면서 딸인 한이정씨가 가게를 맡고 있다. 밴댕이회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히면서 제철을 이루지만, 그 외에도 멸치나 전어잡이 등에 잡어로 함께 잡히기 때문에 철이 없이 아무 때나 밴댕이회의 고소한 맛을 즐길 수가 있다. 밴댕이회거리에는 밴댕이회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밴댕이회, 전어회, 오징어회, 병어회, 준치회 등이 한 접시에 5000원씩인데, 저마다 입에 감치는 맛이 달라서 밴댕이회 외에도 두세 가지를 함께 곁들여 술안주로 삼으면 하루저녁이 내내 즐거우리라. 이들은 횟감 이외에도 같은 값에 구이로 내놓아서 회를 싫어하는 사람도 역시 즐거울 수가 있다.
  • 다시 부르는 제망매가/김인육 지음

    시가 시대의 산물, 좀 더 확대해 역사를 이루는 소사(小史)적 기능을 한다고 할 때 젊은 시인 김인육, 그의 시는 확실히 기전적(紀傳的) 소양의 범주에 있다. 주변의 인물군에 대한 진지하고도 따뜻한 성찰에서 그의 시는 맹렬하게 발아하고 생육한다. 2000년 문단에 나서 “내 시에 내가 납득해야 시집을 낼 것”이라고 자신을 다그쳐 온 그가 처녀시집 ‘다시 부르는 제망매가’(시선사 펴냄)를 냈다. 그의 시편에서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 진득하게 묻어난다.“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일자무식 우리 엄마/청상에 과부가 되어/오뉴월/靑裳같은 보리밭만 눈물겹더니/석양도 비껴 서는/일흔 셋 무거운 세월을 이고/한스런 온 몸을 말아/ㄱ자를 만드시다.”(어머니의 肖像·1) 이렇듯 그는 시상의 영역에서 벗과 어머니, 아내, 누이와 제자 등 일상을 에워싼 사람을 끊임없이 줄세워 시화한다. 한국교원대 유성호 교수는 이런 그를 두고 “그의 시에서 가장 근원적인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들을 둘러싼 가족사적 내력과 거기에 배인 갈등과 상실의 시간들”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그의 시에서 눈길을 끄는 정서는 토속적인 정서의 순환이다.‘다시 부르는 제망매가’에서 보듯 ‘사천왕사’‘접동새’‘복사꽃’‘원앙생’ 등 우리 민족의 심원을 흐르는 토속 정서를 가장 토착적으로 시화해 내는 능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 이처럼 그는 생경한 서구적 정서 대신 우리 것을 시화해 냄으로서 평상에서 비범을 찾아내는 사유 세계의 지평을 확대해 가고 있기도 하다. 모두 4부에 42편의 시편을 실은 시집에서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세월의 행적을 물으며 길 위에서 길을 찾고 있네.”라며 그가 자서의 변에서 고백했듯.60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문화마당] 오드리 헵번,성공의 이름/정은숙 도서출판 마음산책 대표·시인

    출판계에 식지 않고 부는 뜨거운 바람 가운데 하나는 성공학 또는 성공론이다. 한마디로 말해 어떻게 하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을 할 것인가 하는 담론이 널리 읽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성공한 사람들의 라이프 스토리나 그 방법론은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를테면 요즘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순신, 서양의 처칠이나 루스벨트, 알렉산더 같은 인물들의 인생과 성공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만나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위인들에게서 구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는 듯하다. 그런데 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누구나 아는 이런 위인들 외에 동시대 혹은 바로 윗시대를 산 사람들의 이야기도 적잖게 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 비단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친근하게 생각하는 연예인 또는 유명 인사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본다. 영국 출신 록그룹 비틀스나 미국의 영화배우인 말론 브랜도, 가수 마돈나 같은 사람들의 성공담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누구나 한번은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접했던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성공 스토리는 더 큰 공감을 얻는다. 또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들이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 만들고, 가꿔나갔는지를 들여다보는 데는 세속적인 관심도 적잖게 내포되어 있다. 최근에 나는 이런 유명인들의 성공담과 관련하여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삶을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그녀의 주옥 같은 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보고 찬탄한 바 있지만, 그녀의 삶과 스타일에 대해서는 근래에 눈뜨게 되었다. 이런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준 한 권의 책이 바로 ‘오드리 헵번-스타일과 인생’이다. 살아 있다면 일흔이 되었을 1999년에 그녀의 인생을 추모하기 위해 편집한 이 책에는 그녀의 아들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의 필자들이 글과 사진 등을 싣고 있다. 이 가운데는 그녀와 영화 작업을 같이 했던 명감독 빌리 와일더나 오드리 헵번을 자신의 스타일로 가꾼 유명한 디자이너 지방시, 살바토레 페라가모 뮤지엄의 관장 스페파니아 리치 같은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녀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오드리 헵번, 그녀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그녀의 열정과 겸손함을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꼽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 빌리 와일더 같은 이는 그녀의 선천적으로 타고난 연기력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오드리 헵번, 그녀가 나타나면 언제나 촬영장은 화기애애해졌고 어떤 순간에도 매력적인 정중함을 잃지 않았노라고 저자들은 술회한다. 어느 비공식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웨이터가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우아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 그녀는 말년에 이르러 유니세프 활동을 통해 지구상의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아이들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미래의 희망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닥치는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몇 년을 살아남을 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신체적 학대에서 확실하게 해방될 때까지는 긴장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국 그녀의 성공은 모두 이같은 따뜻한 마음씨에서 나온 것이다. 나도 감히 그녀를 닮고 싶다. 그 아름다운 내면을 말이다. 정은숙 도서출판 마음산책 대표·시인
  • [이사람] 일흔넘어 식당 연 ‘헤어디자이너계 대모’ 그레이스 리

    [이사람] 일흔넘어 식당 연 ‘헤어디자이너계 대모’ 그레이스 리

    ●‘단발머리’ 바람 일으킨 유학파 1호 한국 헤어디자이너계의 대모(代母) 그레이스 리(73)가 요리사 겸 식당주인으로 변신했다. 더욱이 서울도 아닌 남도의 항구, 통영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했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로서 ‘왕년의 영화’에 묻히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시작하기에 늦은 때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 것일까. 그는 경남 통영에 낚시차 내려왔다가 풍광에 반해 다음날 덜컥 머물 곳을 구했다.“입에 맞는 음식점을 못찾아서 식당을 열었습니다.”종심(從心)의 나이에 맞게 마음가는 대로 한 것이리라. 개업한 지 11개월 남짓한 그의 ‘중화요리 이선생’은 한결같은 맛으로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볼거리 많은 통영에서도 ‘명소’ 반열에 들어섰다. “공기가 좋고요, 물이 좋고요, 놀이터(그의 중식당)가 즐겁습니다.”통영에서의 생활이 너무 즐겁단다. 이런 까닭일까,3년전에 받은 유방암 수술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다. 그의 얼굴은 요란한 화장없이도 화사하고 목소리는 아주 맑았다. 헤어스타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단발머리. 일흔을 넘긴 할머니가 꼬박꼬박 붙이는 존댓말이 부담스러워 말씀을 낮출 것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반말투로 말하는 것이 싫어요.‘늙은이 티’내는 것 같아서요.”라며 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레이스 리는 70∼80년대 멋쟁이들 사이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다. 유학파 1호 헤어디자이너인 그는 단발머리로 선풍을 일으켰고, 개인용 헤어드라이어를 소개한 주인공이다. ●겉치장은 안해도 먹는 덴 아끼지 않아 그는 세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서 서른다섯에 이혼한 후 1967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미용 기술을 배웠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미용실 청소와 머리 감기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폴 미첼 등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들과 교우하며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유명 패션잡지 ‘보그’에 국내 최초로 게재된 미용인이다.79년 미용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그레이스 리 커트대회가 해마다 두차례씩 열린다. 그의 지인들은 커트 솜씨보다 미각을 더 높이 쳐준다. 그래서 그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다. 인터뷰하는 날 마침, 미국 뉴욕에 사는 막내딸 김승화(47)씨가 와 있었다.3년 만의 모녀 재회란다.“어머니는 액세서리와 겉치장은 안하지만 먹는 데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고 거들었다. 그 흔한(?) 보석 하나 밍크 코트 한 벌이 없단다. 그레이스 리는 “이 배 안에 빌딩이 몇 채 들어 앉았어요.”라며 배를 두들겼다.“밥은 밥맛이 나야 밥이다.”고 강조하는 그의 음식론은 일견 평범한듯 보이지만 쉽지 않다. 그의 식도락은 70년 세월을 지나왔다. 어릴 적부터 미식가였던 부친을 따라 ‘맛있는 음식점’을 순례했단다.“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안먹어본 음식이 없어요.”그래도 식도락은 계속됐다. 일흔이 된 2001년 그는 연대 어학당에 등록했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그였지만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중국에 갔을 때 중국 음식을 제대로 주문하기 위해서 공부했죠. 벽마다 중국어를 써붙여 외웠지요.”그런 인연으로 중식당까지 냈다. 그가 통영에 새 둥지를 틀었지만 당일치기 행동반경은 대전까지다. 젊은이 못지않은 보폭이다. 이유는 지방의 숨은 맛집을 찾아내는 것. 맛 있다고 소문이 나면 꼭 찾아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식도락가다. ●눈 나빠져 책 못 읽게 될까 걱정 그에게 빗과 가위를 놓았느냐고 물어 봤다.“영원히 현역이에요, 요즘도 서울에 한 달에 한번꼴로 올라가는데 직접 가위를 듭니다. 내가 안 자르면 ‘머리를 길러 묶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맙지요. 지금도 빗과 가위만 들면 세계 어디서든 밥먹고 살 수 있습니다.”라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그는 근사하고 깨끗하게 늙어 즐겁게 죽는 것을 꿈꾼다. 나이가 들면서 걱정이 하나.“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인데 눈이 나빠질까봐 가장 걱정이에요. 재미난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못 읽는다면 얼마나 약 오르겠어요.” 가족들에게 유언도 남겼다. 일부를 들려줬는데 익살스럽기까지하다. 장례식에 쓸 꽃은 흰색이 아니라 빨간색 꽃이면 좋겠단다.“이왕이면 빨간 장미가 좋고, 음악도 평소에 즐겨 듣던 것을 틀고, 그런데 메뉴는 짜두지 못했어요.”열정적인 그의 에너지 탓에 유언은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은 즐겁게 한다.”는 그레이스 리. 통영 앞바다에서 갓 잡은 활어처럼 퍼득거리는 그에게서 일흔셋은 그저 숫자일 뿐이다. 통영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그레이스 리 프로필 ▲1951년 이화여고 졸업 ▲1967년 도미, 뉴욕의 월프레드 아카데미(미용전문학교) 수료 ▲1968년 뉴욕의 헨리벤델 졸업, 세계적인 미용사 폴 미첼에게서 6년간 사사 ▲1973년 서울 도큐호텔에서 도큐 그레이스리 미용실 창업 ▲1976년 폴 미첼-그레이스리 조인트 헤어쇼를 개최, 패션잡지 보그에 작품 소개 ▲1979년 아일랜드 국제기능올림픽 미용부문 심사위원, 석탑산업훈장 수상 ▲1990년 그레이스리 커팅클럽 발족 ▲1992년 제1회 그레이스리 커트대회 개최
  • [문화마당] 베르테르와 ‘욘사마’ 신드롬/김욱동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세계 문학사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1808년 나폴레옹은 괴테를 만났을 때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흔일곱 살이 되었을 때 괴테는 이 소설과 관련하여 말하였다.“나는 살았고, 사랑하였으며, 아주 많은 고통을 겪었다! 누구든지 만약 자신의 생애에서 한 번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가슴에 와닿으면서 마치 그 책이 오직 자신을 위하여 쓰여진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없었다면 그 삶은 참으로 비참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또 다른 이유로 뭇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실연 당한 뒤 슬픔에 못 이겨 자살한 주인공 베르테르는 독일은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도 자못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랑에 절망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젊은이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늘 괴테의 이 소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소설이 나온 뒤로 자살자의 수가 급격하게 치솟았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라이프치히, 바이에른, 오스트리아에서 금서 목록에 오르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 괴테는 독자들에게 제발 베르테르를 따르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문학사에서 최초로 ‘상품 열풍’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르테르가 소설 속에서 사용한 장신구가 젊은 세대에게 크게 유행하였다. 젊은 남자들은 베르테르처럼 노란 조끼를 즐겨 입었으며, 젊은 여자들은 ‘베르테르 향수’를 뿌렸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놋쇠 단추가 달린 푸른색 프록 코트며, 위를 접어올린 갈색장화, 둥근 펠트모자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가 하면 베르테르 도자기 인형, 소설 속의 삽화를 그려넣은 찻잔, 베르테르 얼굴을 그린 부채들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요즈음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방영한 TV드라마 ‘겨울 연가’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이 드라마를 벌써 몇 번째 방영할 정도라니 그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금년 연말에는 일본어로 더빙하지 않고 한국어로 그대로 방영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한국어로 직접 듣기 위하여 몇 달 전부터 한국어를 공부해 온 극성 주부들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 드라마에 주연 배우로 출연한 배용준의 인기도 각별하다. 이른바 ‘욘사마 신드롬’이라고 하여 일본 열도가 시끌벅적하다. 우리말의 ‘님’보다도 더 높은 존칭어인 ‘사마’를 붙여 존경심을 나타낸다. 일본 총리까지 ‘욘사마’가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 같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정도이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겨울 연가’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콘텐츠 산업과 관광수입도 짭짤한 모양이다. 올해 말까지 이 드라마와 관련한 콘텐츠 상품의 매출은 줄잡아 2000억원으로 예상되고, 드라마의 촬영지였던 용평과 춘천을 찾는 관광객도 엄청나게 늘었다. 연말까지 무려 수십만명의 일본 관광객이 한국을 찾을 전망이다. 그런데 관광수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를 통하여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심어 주었다는 점이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하여 독일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젊은이들을 끌어들인 것처럼,‘겨울 연가’도 한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비록 이 드라마와 주연 배우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주로 30∼40대 가정주부들이라고는 하지만 그 효과는 아마 세대를 뛰어넘어 일본 사람 거의 모두에게 두루 미칠 것이다.“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을 요즈음처럼 실감하는 때도 없다. 김욱동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 전설의 뉴욕필 한국 온다

    전설의 뉴욕필 한국 온다

    애써 군더더기의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는 세계 최정상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거장 로린 마젤의 지휘로 한국 무대에 선다.14일 세종문회회관,15·1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18일 대전 문화 예술의전당 등 모두 4회에 걸친 내한공연.마젤의 취임 이후 첫 아시아 순회연주이자,2004~2005시즌의 시작을 여는 무대다.올해 건강·비용상의 문제로 몇몇 해외 투어를 취소하는 등 불안한 행보를 보였던 로린 마젤이기에 이번 무대는 더 특별하다. 뉴욕필은 1842년 창단한 미국 최초의 교향악단.1999년 1만 3000회의 연주를 기록하면서 오케스트라계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미국 태생인 마젤은 악보를 한번 보면 사진으로 찍은 듯 그대로 기억한다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로 유명한 인물.15세까지 NBC 심포니,시카고 심포니 등 미국의 주요 교향악단을 지휘했고,30세에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통해 정식 데뷔했다.올해 일흔 넷이지만,뉴욕필과는 2009년까지 계약이 돼 있다. 이번 공연은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의 첫 만남,신예 스타와 거장 지휘자의 협연으로도 기대를 모은다.14일은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피아노 협주곡 3번’ ‘교향곡 5번’ 등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이 백건우 협연으로 꾸며진다.3만∼25만원.(02)399-1114. 15일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협연 이유라),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17일에는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협연 손열음),말러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3만 9000∼19만 9000원.(02)6303-1911.이어 18일 대전 공연에서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협연 손열음),드보르자크의 ‘신세계교향곡’을 선사한다.3만∼20만원.(042)610-2222.공연은 오후 7시30분(17일 오후 4시).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삶과 경영 이야기] (28) 유상옥 코리아나사장

    [삶과 경영 이야기] (28) 유상옥 코리아나사장

    주름살 하나라도 더 생길까 정성스레 화장(化粧)하는 ㈜코리아나 화장품 유상옥 회장.일흔이 넘은 나이를 첫눈에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그는 “화장은 나를 사랑하는 표현법”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55세의 늦은 나이에 ㈜코리아나 화장품을 창업한 것도 이런 자신감 때문이었으리라.최근에는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중국 고시(古詩)를 무색케 하는 그의 유별난 삶과 경영방식을 들어봤다. ●신문배달 소년이 받은 CEO수업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여느 집처럼 집안이 가난해 시쳇말로 ‘투잡스(two jobs)족’이 되었다.덕수상고를 다니면서 서울신문 태평보급소 소장으로 일했다.새벽잠을 설치고 학교 종례도 끝마치지 못한 채 신문을 돌려야 했다.여기서 고객(독자)에게 제 시간에 상품(뉴스)을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배웠다. -59년 고려대 상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동아제약 공채로 입사했다.신문 돌렸던 마음으로 열심히 뛰었다.9년 만에 기획관리 이사 자리를 꿰찬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불티나게 팔렸던 드링크제 ‘박카스’ 영업의 야전사령관으로 활약했던 것도 승진에 단단히 한몫했다.그러던 중 77년 느닷없이 동아제약의 빚덩어리 계열사였던 라미화장품 대표로 발령났다.“그래,한번 해보자.적자기업을 우량기업으로 만드는 것도 내 경영 능력이다.”며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이 일이 평생 업(業)이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라미화장품의 적자 규모는 23억원.신용을 잃은 회사라 은행 돈 가져다 쓰기도 쉽지 않았다.직원들 명의로 일일이 돈을 꾸러 다녔다.직원들은 불평없이 내 뜻을 따라줬고,독자개발한 ‘라피네’라는 브랜드와 광고 모델이던 재불(在佛) 여배우 윤정희씨의 이미지가 맞아떨어져 라미화장품은 4년 만에 흑자전환을 이뤘다. ●“일꾼은 편하면 안된다” -순항을 거듭하던 87년 가을 ‘6·29선언’을 계기로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으로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겪었다.노사분규 책임을 지고 이듬해인 88년 동아유리 대표로 밀려난 것이다.동아유리는 박카스 유리 용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회사경영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였다.결재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이 고작이었다.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일도 없이 월급만 받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길이 없으면 길을 내서라도 걸음을 계속하는 수밖에. -라미화장품 때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필립 마셰를 찾았다.“화장품 업체인 ‘이브로셰(Yves Rocher)’가 한국 진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이브로셰와의 만남을 주선해줄 수 있다.”는 그의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이브로셰라면 프랑스 최대의 화장품이자 세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메이커가 아닌가.당장 휴가를 내고 프랑스로 날아갔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가에 자리잡은 이브로셰 사무실.느닷없이 ‘한국에서의 마케팅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생산부터 영업,광고,지방지점 전략까지 두 시간에 걸쳐 답했다.여기서 운좋게도 국내 유명 화장품 업체들을 제치고 이브로셰와의 계약을 따내는 성과를 거뒀다. -때마침 웅진 윤석금 회장이 소식을 듣고 연락해 왔다.라미화장품 대표로 있을 때 ‘이종(異種)업체간 경영자모임’에서 경영 철학을 나눠왔던 터였다.사업자금은 윤 회장과 내가 6대4로 출자하고 경영은 내가 맡는 조건이었다. ●제조업은 천하지대본 -평생을 제조업에 몸바친 때문인지 수입판매업만으로는 성에 안찼다.남의 나라 물건을 들여와 파는 것과 내 손으로 만든 물건을 파는 것은 근본이 다르지 않은가.당시만 해도 화장품 제조업 허가를 받으려면 까다로웠다.궁여지책으로 지방의 한 화장품 회사로부터 제조업 허가권을 ‘거금’ 1억 5000만원을 주고 사들였다.코리아나 자본금이 1억원이었던 점을 비춰보면 모험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코리아나는 98년 경기도의 50평짜리 공장에서 태어났다.말이 공장이지 동네 허름한 창고와 다름없었다.모든 것이 열악했지만,효자상품인 ‘바블바블 샴푸’가 나온 곳이 이 곳이다.제품이 만들어졌으니 팔아야 하는데,영업사원 4명으로 선발주자에게 덤벼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차별화 전략이 필요했다.점포판매보다는 고객을 만나 거래하는 직접판매(Direct Sale)에 비중을 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또한 외상이 아닌 현금거래를,할인판매가 아닌 제값받기 전략을 고수했다.현금이 도니까 자금사정이 좋아졌고,외상이 없으니까 채권회수에 드는 일손이 덜어졌다.할인을 하지 않아 “코리아나는 품질은 좋은데 조금 비싸다.”는 인식이 생겨 고급품이라는 이미지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첫 해 성적표는 매출액 14억원에 당기순이익 5100만원. ●투자는 돈쌓기=머드팩 대박 -그러나 마케팅은 제품의 질(質)에 우선할 수 없는 법.라미화장품에 있을 때 진흙이 이물질을 빨아들이는 특성에서 힌트를 얻어 머드팩을 개발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코리아나에서도 ‘머드팩을 한 뒤 10분쯤 지나면 피부가 조여지면서 모공에 낀 노폐물이 나오고 얼굴이 부드러워질 것’이라는 확신은 버릴 수 없었다.그래서 한 연구원에게 시간과 돈에 신경쓰지 말고 머드팩 개발에만 힘써줄 것을 지시했다.이스라엘의 사해,미국의 캘리포니아 등 세계 각지에서 진흙을 공수해 주기도 여러 번.‘밑 빠진 독에 돈 붓기’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결과는 ‘밑바닥 있는 독에 돈 쌓기’가 됐다.93년 머드팩이 개발돼 300억원어치나 팔렸다.이 일로 코리아나는 창업 5년 만에 태평양-LG에 이어 화장품 업계의 3위로 우뚝 올라섰다. -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사업파트너였던 웅진그룹도 타격을 받았다.윤 회장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코리아나를 매각해 웅진의 구조조정 자금으로 쓰겠다고 했다.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지만,코리아나는 엄연히 웅진그룹의 계열사였던 터라 무턱대로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증권사들의 M&A(인수·합병)팀이 코리아나화장품의 실사(實査)를 진행하면서 매각 작업이 시작됐다. 수개월만에 다른 국내 투자자를 찾아냈고,99년 코리아나는 웅진에서 분리돼 단독경영을 하게 됐다. ●한국의 아름다움 알리기 -이후 코리아나의 영문 표기를 ‘Koreana’에서 ‘Coreana’로 바꿔 재탄생 기회로 삼았다.영국 런던의 헌책방에서 구한 18세기 지도에서 우리나라를 ‘Corea’로 표기한 것에 착안했던 것.‘C’로 시작되는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샤넬(Chanel),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지난달 23일 코리아나는 중국 현지에서 자체생산을 위한 2500평 규모의 공장 계약을 했다.코리아나의 중국이름인 ‘고려아나(高麗雅娜)’의 뜻처럼 ‘고려의 아름다운 아낙네’의 모습을 세계 속에 널리 알리고 싶은 뜻이 담겨 있다.중국에 이미 50곳의 백화점과 250곳의 화장품 전문점에서 코리아나가 팔려나가고 있지만,중국이 수출만 하기에는 너무 큰 시장이기도 하다.코리아나는 대도시 대신 청두·항저우 등 중소 도시 시장에 집중하면서 올해 총 매출의 30%를 수출액에서 달성하고,앞으로 매출의 절반을 중국 시장에서 찾을 계획이다.이제부터 시작이다.나는 여전히 숨고를 시간조차 없는 ‘청년(靑年)’이고 싶다. ■유상옥 회장은 ㈜코리아나 화장품 유상옥(兪相玉·71) 회장은 ‘세일즈맨의 신화’의 전형이다.1988년 30여년간의 월급쟁이 생활(동아제약·라미화장품·동아유리)을 마치고 늦깎이 창업을 했다.첫해 14억원에 그쳤던 매출이 5년 만에 1340억원으로 급성장,화장품 업계 3위로 진입했다.이후 코리아나는 ‘엔시아’,‘녹두’,‘자인’ 등의 브랜드로 중국등 20여국에 진출한 뒤 해외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지난해 250만달러(37억 5000만원)였던 수출액은 올해 300만달러(45억원)로 예상되고 있다.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 지난해 말부터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복합문화공간인 ‘space*c’를 운영하고 있다.‘나는 60에도 화장을 한다’,‘33에 나서 55에 서다.‘,‘화장하는 CEO’라는 책을 펴낸 수필가이기도 하다. 글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 [씨줄날줄] 초고령사회/오승호 논설위원

    언제부터인가 예순살 생일에 베푸는 환갑(還甲)잔치를 보기가 힘들어 졌다.환갑보다 열살 더 많은 일흔 살에 고희연(古稀宴)을 치르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경제 발전과 의료기술 발달 등의 영향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이 70세를 넘어선 것은 10년이 훨씬 지났다.1991년 71.7세였고,10년 뒤인 2001년엔 76.5세로 높아졌다. 이러니 섣불리 ‘노인’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듯싶다.고령자 관련 주택 분양업체가 노인의 날을 맞아 60세 이상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몇 살부터 노인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0세 이상이라는 응답이 25%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60세 이상은 19%에 그쳤다.65세 이상은 24%,75세 이상은 17%였다.경제적인 면에서 자식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도 이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평균수명 연장은 선진사회 진입의 징표다.문제는 노령화 현상이 너무 빨리 진전돼 적지 않은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점이다.전국 30개 군(郡)이 지난해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 비중이 20%를 넘어 초(超)고령 사회에 진입했다는 통계청 발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14% 이상,20% 미만인 곳도 51곳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10년 전인 1993년엔 20% 이상은 단 한 곳도 없었다.당시 노인 비중 14% 이상인 고령 사회도 경북 군위(14.1%)와 경남 남해 및 인천 옹진(각 14.0%) 등 3개 군에 불과했던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65세 이상 노인 비중이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바뀌는 데 프랑스는 115년,스웨덴은 85년,미국은 72년,영국은 47년 걸렸다.반면 우리나라는 불과 19년 만인 오는 2019년 고령 사회로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그 속도가 빠른 것은 평균 수명은 늘어나는데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기 때문이다.경제활동 인구 감소로 인한 성장잠재력 약화와 노인 의료비 부담 증가 등의 경제·사회 문제가 우려되는 이유다.저출산과 고령화 대책에 대한 로드맵을 재점검하고,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임영숙 칼럼] 박생광, 김금화, 김이환…

    [임영숙 칼럼] 박생광, 김금화, 김이환…

    박생광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지난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1주기 회고전에서였다.무속과 불교를 소재로 한 강렬한 단청색 그림들 앞에서 느꼈던 충격을 미술평론가 이경성(전 국립현대미술관장)씨의 고백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이씨는 호암갤러리보다 5년 앞선 백상기념관 전시회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이 전람회에 들어선 나는 커다란 힘에 눌려 질식하고 말았다.”고 썼다.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음에도 그의 작품은 물론 화가를 생전에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부끄러웠다. 지난 주말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의 개막식이 열렸다.서해안 배연신 굿 및 대동굿의 인간문화재 김금화씨의 진혼굿도 함께 펼쳐졌다.인가도 드문,시골 좁은 골짜기에 100여대가 넘는 자동차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화가의 고향 진주에서는 천리길을 멀다 않고 대절한 버스가 올라왔다. 전시작품은 화가 스스로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에 견주었던 ‘명성황후’,동학농민운동의 순결한 넋을 힘있게 형상화한 ‘전봉준’,친구였음에도 부처님처럼 존경했던 청담 스님의 열반기와 고행기를 통해 불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청담 대종사’ 등 박생광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대표작들과 만신 김금화를 소재로 한 여러점의 ‘무속’시리즈,소품 등 100여점이었다.이영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들이다. 이날 이영미술관은 ‘민족혼의 화가’로 꼽히는 박생광의 작품에 행복하게 젖어들게 했지만 예술가의 삶과 정신,그것을 꽃피게 하는 토양에 대해 생각하게 한 자리이기도 했다.박생광이 한국화단에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일흔일곱에 가졌던 백상기념관 전시회 이후다.20년이 넘는 일본생활과 진주 지방에 묻혀 중앙화단에서는 소외됐던 그는 여든 한살에 타계하기까지 몇년 동안의 폭발적인 작품활동으로 ‘한국화의 전설’이 됐다. 여든살 무렵 그는 인도의 정신과 프랑스의 예술을 순례하는 여행을 하고 경주 남산전을 열기 위해 산을 오르고 색채 도자기 공부를 하겠다며 일본을 찾는다.그리고 필생의 대작인 ‘명성황후’와 ‘전봉준’ 등이 발표된 문예진흥원 개인전을 갖고 이듬해 파리 그랑팔레의 르살롱전에 초대 받는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 가난한 화가의 해외여행과 전시회 경비 등을 지원한 사람이 바로 김이환(70) 이영미술관장이다.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고향 후배로서 만년의 화가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운 그는 팔순의 화가를 등에 업고 경주 남산을 오를 만큼 헌신적이었다.미술관을 세워 고인의 작품을 사회에 환원한 그는 미술관을 더욱 잘 운영하기 위해 예순의 나이에 와세다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하며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지난해에는 고인이 염원했던 ‘명성황후’의 스페인 전시회를 열었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시회와 함께 고인과의 인연을 담은수필집 ‘수유리 가는 길’도 발간했다. 이 아름다운 인연을 김금화(72) 만신의 천도굿은 더욱 빛나게 했다.지켜보기만도 힘든 굿을 작두타기까지 하며 주재한 칠순의 인간문화재는 고인과의 인연을 풀어내며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25년째 그의 굿을 보아왔다는 한 퇴직 교사는 김씨가 그토록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했다. 칠순·팔순이 되도록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 가며 감동적인 예술과 인간관계를 이어간 세 사람의 만남-그런 만남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 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김이환 관장 같은 예술후원자들이 또 나타나 제2,제3의 박생광이 빛을 볼 수 있게 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또 다른 예술가가 계속 함께 가는 길을 꿈꾸어 본다. 주필 ysi@seoul.co.kr
  • 儒林(163)-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3)-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갈홍의 노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또 어떤 이는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에 노자는 어머니 집안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또 어떤 이는 노자의 어머니가 마침 오얏나무 밑을 지나다가 노자를 낳았는데,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그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로 나의 성을 삼겠노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또한 노자는 상삼황(上三皇) 시대에는 현중법사(玄中法師)였고,하삼황(下三皇) 시대에는 금궐제군(金闕帝君)이었고,….” 갈홍은 또한 노자의 생김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자는 신장이 9척이었고,누런 얼굴에 새까만 입,높은 코와 긴 눈썹을 갖고 있었다.눈썹길이는 다섯 치였고,귀의 길이는 일곱 치였다.이마에는 세 가지의 무늬가 있었는데,위아래로 연결되어 있었으며,발에는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었고,신귀(神龜)를 걸상으로 삼았다.금과 옥으로 된 집에 백은으로 섬돌을 만들고 살았으며,오색의 구름으로 옷을 삼고,중첩(重疊)의 관을 쓰고,봉연(鋒 )의 칼을 찼었다.황동(黃童) 120명을 거느리고,왼편에는 열두 마리의 청룡,오른쪽에는 스물여섯 마리의 백호,앞에는 스물네 마리의 주작,뒤에는 일흔두 마리의 현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앞에서는 열두 궁기(窮奇)가 길을 인도하였고,뒤에는 서른여섯 피사가 시종하였다.위에서는 우레와 번개가 번쩍번쩍하였다.” 노자의 탄생과 모습을 사마천의 사기와 달리 이처럼 신비롭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전국시대 때부터 유행된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무관하지 않다.진(秦),한(漢)대에는 스스로 불로장생술을 익혔다고 내세우는 방사(方士)들이 수없이 나오는데,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노자에 두었으므로 후세로 갈수록 노자의 생애에는 신비로운 여러 가지 전설들이 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후한의 장릉(張陵)이란 사람에 의해서 도교가 창시되고,노자를 도교의 종주로,‘도덕경’을 그들의 기본경전으로 삼아 신도들에게 이를 외우도록 한 이래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자를 만난 공자는 제자들이 노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사기는 대답하고 있다. “다만 이렇다.내가 만나 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용(龍). 머리에 뿔이 있고,몸통은 뱀과 같으며,비늘이 있고,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네다리를 가진 동물로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고 여겨지는 중국인들이 상상해서 만든 영수(靈獸).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흔히 천자와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신령한 상징으로 현존되어 왔었던 전설상의 동물.공자는 노자를 용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노자를 ‘용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나로서도 그의 행적을 알 길이 없다.’고 고백한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는 공자의 말을 들은 제자 자공(子貢)이 노자를 찾아뵙고,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는데,이 역시 진위를 알 수 없는 허구인지도 모른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노자의 존재 자체를 진위조차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노자는 오직 숨어 살았던 군자이기 때문에 그 진위는 추측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한술 더 떠서 냉정한 사가였던 사마천도 노자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노자는 160세,혹은 200세를 살았다는 설이 있다.노자는 무위의 도를 몸에 지녔기 때문에 장수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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