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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박희태 의장, 명예를 안다면 사퇴하라/김종면 논설위원

    [서울광장] 박희태 의장, 명예를 안다면 사퇴하라/김종면 논설위원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에 지오기사(支吾其詞)라는 말이 나온다. 애매모호한 말로 실제의 정황을 얼버무려 회피한다는 뜻이다.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현재로선 모르는 얘기”라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장 비서실이 압수수색당하고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돼도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방관자적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게 정치지도자로서 온당한 처신인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 일을 혼자서만 세월이 지나 기억이 희미하다고 강변하니 ‘치매의장’이란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개인의 수치를 넘어 나라 망신이다.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건 헌법은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당연한 얘기다. ‘공직DNA 결핍증’이라도 앓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치 초짜도 아니고 일흔이 넘은 노정객이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만도 한데 헛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리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지금 입법부 수장의 자리가 정녕 도덕적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퇴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야권은 물론 여권도 박 의장의 무모한 버티기에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엊그제에는 국민 65.9%가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위해 국회의장직 사퇴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쯤 됐으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당장 의장직에서 물러나는 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그러고 나서 수사를 지켜봐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아니 국회의장이라는 보호막을 거두고 일개 시민의 자격으로 성실하게 검찰 조사에 응해야 한다. 검찰도 칼집만 만지작거리며 속 끓이지 말고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법이 결코 작은 파리만 걸려드는 거미줄이 아님을 진정으로 보여줘야 한다. 정치적 후폭풍 같은 건 계산하지 말고 오로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명운을 걸어야 한다. 이번 사건이 명쾌하게 매듭지어지지 않는 한 정치권이 아무리 쇄신을 부르짖어도 믿어줄 국민은 없다. 박 의장은 ‘돈 봉투 관행’에 대해 왜 나만 당해야 하느냐고 억울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사 다 지은 대로 받는 거다. 끝내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지나간 ‘고문의 시대’를 잠시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러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론인의 사표로 존경받는 청암 송건호는 독재정권 시절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피를 두 사발이나 빼냈다고 한다. 고문의 트라우마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온 민주인사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이 스스로 밀알이 돼 썩고 모퉁이돌이 돼 한편을 지탱했기에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정치가 이만큼이나마 발전한 것이다. 정작 억울해하여야 할 그들이 언제 대의를 그르치면서 구차하게 군 적이 있는가. 박 의장에게 그런 대인의 풍도를 기대해 본다. 다시 말하건대, 이면 체면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해 정치적 잔명을 유지하려 하는 것은 최악의 길이다.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가 의전서열 2위 인사의 무책임한 행태에 국민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하루라도 빨리 벼슬도 정치도 버려야 산다. 물러날 때를 놓치면 낭패를 보고 만다는 사실을 역사는 생생히 증명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정치가 범려는 제때 물러날 줄 알았기에 세 번이나 다른 선택을 하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반면 그의 친구인 대부 문종은 어땠는가.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리다 결국 자살검을 받아들게 되지 않았나. 선택은 박 의장 몫이다. 역사에서 배우기 바란다. 양심의 명령을 따르라. 허무하면 허무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있는 그대로 내려놓아야 한다. 요지경 같은 정치를 떠나 임천(林泉)에 집을 짓고 은인자중하는 삶을 살겠다는 귀거래사라도 한 조각 남기는 것이 그나마 명예를 아는 자가 취할 태도 아닐까. jmkim@seoul.co.kr
  • “판소리처럼 쏟아냈지, 신명 나는 ‘막소설’이야”

    “판소리처럼 쏟아냈지, 신명 나는 ‘막소설’이야”

    기자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하고 정밀한 취재를 담은 소설을 발표했던 안정효(70) 작가가 10년 만에 장편소설 ‘역사소설 솔섬 1~3권’(나남 펴냄)을 냈다.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의 전작이 직접 참여했던 월남전이나 좋아하는 영화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면 이번 소설은 판타지 정치 풍자 소설이란 기묘한 장르다. 안 작가는 지난 29일 기자들과 만나 “환갑을 맞아 인도네시아에서 2주일간 여행을 하며 ‘나는 왜 지금까지 쓴 것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쓰려고 나 자신을 학대할까’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는 평사원, 계장, 과장, 부장으로 승진하고 군대에서는 계급이 올라가지만 문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많은 작가가 처음 발표한 작품이 가장 훌륭한 경우가 많다.”며 ‘솔섬’은 해방된 상태에서 썼다고 밝혔다. ‘코리아 헤럴드’ ‘코리아 타임스’ 등의 영어 신문에서 일한 안 작가는 1975년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0여권의 영문 책을 번역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마르케스의 소설을 국내에서 처음 소개했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을 쓴다면 ‘차용하는 것 아닌가.’란 걱정이 있었지만 일흔이 넘으니 자신감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솔섬’은 한국 현대정치사를 줄기로 2007년부터 시작해 1945년에 끝나는 이야기다. 배경은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솔섬이다. 신천지 솔섬에 투기꾼, 철새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조직폭력배, 종교인 등이 몰려오고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다. 작가는 ‘솔섬’을 ‘막소설’이라고 규정했다. “우선 판타지란 영어 단어를 쓰기 싫다. 막소설이란 소설의 정확한 기초 다음에 작가의 상상력이 막가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예를 들어 철새 정치인은 소설 속에서 날아서 솔섬으로 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침묵만 한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중편, 단편 소설을 계속 썼고 영화와 영어 관련 책도 꾸준히 발표했다. 서강대 영문과를 다니며 7편의 영문 장편소설을 완성한 그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우리말과 영어 소설을 동시에 발표할 수 있는 작가로 꼽힌다. 대학 시절 쓴 영문 소설 가운데 하나가 ‘은마는 오지 않는다’로 아직도 미국에서 인세가 들어온다고 말했다. ‘솔섬’도 대학 때 독도를 배경으로 구상한 소설이 출발점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에 그동안 라디오 방송 출연을 하면서 쓴 원고와 단편 소설 등의 살이 붙었다. 안 작가는 지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 “정치인들은 정치에 대해 우리 시민만큼 모른다. 국민은 지금 정권을 자꾸 바꾸면서 정치권을 뒤흔들고 훈련시키는 중이다. 현재의 정국도 국민이 흔드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치권을 훈련시킨다는 걸 모르고 있고, 이를 더 모르는 것은 정치권”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모든 사람이 정치를 개탄하지만 제1공화국이나 군사독재와 비교하면 지금은 훌륭한 나라이고,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승만 정권이 막 끝난 1960년대에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는 작가는 “그때는 대통령만이 읽는 신문을 따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고 회고했다. 정치를 소설로 그리면서 풍자란 방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드러내면 안 된다. 작가가 화 내지 않고 쓴 글을 읽고 독자들이 화를 내야 한다. 작가가 화를 내면 발전을 못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풍자는 그 대상이 듣고 웃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은 아직 그 경지에 못 갔고, 우리 현실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다고도 고백했다. 소설에서 풍자의 대상이 된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선거를 앞두고 노작가가 3년 넘게 ‘즐겁게’ 쓴 소설은 좋고 싫고가 분명하게 갈릴 듯하다. 판소리 한 마당처럼 신명 나는 문체로 풀어낸 정치 풍자에 염증을 느낄 수도 있고, 솔섬의 역사에 현실을 대입하면서 분노하거나 공감하며 깊이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0)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0)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네덜란드 출신의 그림책 작가 레오 리오니의 작품 중에 ‘잠잠이’(최근 ‘프레데릭’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가 있다. 주인공인 새앙쥐 잠잠이는 봄부터 가을까지 햇살 좋은 양지 녘에 쪼그리고 앉아 낮잠만 즐긴다. 일은 안 하고 졸기만 하는 잠잠이를 모두들 불만스러워하지만 잠잠이는 끈질기게 잠만 잔다. 그리고 새앙쥐 마을에 겨울이 찾아왔다. 대지에 찬란하던 빛깔도 요란하던 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침묵에 들었다. 새앙쥐들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권태를 견디기 힘들었다. 잠잠이가 그때 모두의 앞에 나섰다. 봄부터 가을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모아두었던 빛깔과 소리를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잠잠이는 결국 침묵과 권태의 계절인 겨울에 모두에게 봄의 희망, 생명의 노래를 전해 주는 아름다운 시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 사람의 마을에 매운 바람이 불어오면 세상은 침묵으로 잦아든다. 하얀 눈까지 소복이 쌓이는 날이면 시골 들녘은 적막이 감돌 만큼 고요해진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찾아 눈길을 헤치고 도착한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들녘이 꼭 그랬다. 찬바람 맞는 게 결코 좋을 수 없는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어서 대문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다. 눈 내리는 단전리 마을에는 들녘의 커다란 느티나무만 홀로 겨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키 20m, 줄기 둘레 10.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다. 사람 없는 들녘에서 나무는 하얗게 침묵으로 잦아드는 겨울의 권태와 적막을 덜어 내기 위해 가물가물 잊혀 가는 옛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림책 속의 새앙쥐 ‘잠잠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도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줄기 안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많은 이야기를 서리서리 펼쳤다. 나무 이야기는 이곳 단전리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던 400년 전의 옛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단전리는 임진왜란 직후에 도강김씨(도강은 전남 강진의 옛 이름) 가문이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살아온 오래된 집성촌이다. 마을을 일으키는 중심 역할을 한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는 김충로라는 분이다. 산 좋고 물 좋은 자리에 보금자리를 근사하게 일구긴 했으나 그에겐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었다. 함께 하지 못한 형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충로의 형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산화한 김충남이라는 장군이다. 보금자리를 이루기는 했으나 함께해야 할 가족을 잃은 김충로는 설움을 달래지 못했다. ●단전리 입향조가 처음 심고 키운 나무 그가 마을 들녘에 나무를 심은 건 그래서였다. 물론 마을을 처음 일으킨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크게 자라서 마을에 들고 나는 악한 기운을 막겠다는 뜻도 있고, 마을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김충로라고 그런 뜻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가 나무를 심을 때에는 전사한 형, 김충남 장군의 넋을 기리자는 생각이 더 컸다. 집성촌인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가문의 선조이기도 했으니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무를 심은 김충로도 전쟁터에 나가서 형처럼 목숨을 잃었다. 전사한 형제를 나라에서 선무원종공신으로 제수한 게 그나마 가문의 한을 위로할 뿐이었다. 장군으로 불리던 사람도 그를 기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그의 동생도 장군이 되어 똑같이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들녘의 나무만 주인을 잃은 아픔을 안고 무럭무럭 자랐다. 장군 형제의 넋이 담긴 들녘의 느티나무를 사람들은 그때부터 ‘장군 나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한 해에 한 번은 나무 앞에 모였다. 장군 형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닷샛날 치른 당산제가 그것이었다. 단전리 당산제는 유난히 즐거웠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사람들은 우마제(牛馬祭)를 지냈다. ●애국 충정의 찬란한 기억으로 살아남아 농사의 동반자인 소와 말의 먹이를 나무 뿌리 주위에 가지런히 내려 놓고 소와 말의 건강을 빈 것이다. 우마제 뒤에는 나무가 바라다보이는 공터에 나무를 쌓고 불을 피웠다. 이글거리는 불 가장자리에서는 농악대가 풍물을 쳤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춤을 췄다. 사람의 풍경을 바라보는 나무도 따라서 즐거웠다. 평화롭게 세월이 흐르던 1950년, 장군의 넋과 장군 나무가 지켜 주는 단전리에 다시 전쟁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마을을 떠났다. 참혹한 전쟁의 폭풍이 지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떠난 뒤였다. 그때부터 누가 결정하지도 않았건만 우마제도 풍물놀이도 당산제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단전리에는 전쟁 전에 70가구가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20가구와 일흔 고개를 넘나드는 노인들만 남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입향조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젊은 시절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많은 어른들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세월은 마치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하얀 눈처럼 세상살이의 흔적을 하나둘 덮을 것이다.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을의 기억도 종작없이 사라질 것이다. 마을에는 하릴없는 적막감이 찾아오고, 견디기 힘든 권태감이 휩쌀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어도 나무는 옛 마을의 영화를 온전히 기억하고 우뚝 서서 찬란했던 옛 마을의 평화로운 빛깔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은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마치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에 나오는 새앙쥐 주인공 잠잠이처럼. 글 사진 장성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291. 호남고속국도의 백양사나들목으로 나가서 백양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호남선 백양사역을 조금 지나면 사가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백양로를 타고 5㎞쯤 가면 장성호 관광지에 닿는다. 장성호를 끼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을 3㎞ 가면 북하면 소재지인 약수리에 들어서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계속 3.5㎞쯤 고갯길을 넘어가면 처음으로 나오는 주유소 맞은편에 나무가 있다. 주유소 근처의 빈자리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한다.
  • “K팝 덕에 한국어 수강생 부쩍 늘었죠”

    “K팝 덕에 한국어 수강생 부쩍 늘었죠”

    “제 나이, 만으로 일흔여덟입니다. 은퇴하고는 싶은데 아직 지도하고 있는 학생이 10명이에요. 논문 쓰고 학위 받고 취직하는 걸 보고 싶어요. 개인적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 누구도 은퇴하란 말은 안 하네요. 허허허.” ●교수 40여명 키운 ‘한국어 보급 아버지’ 잔잔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노신사는 ‘한국어보급의 아버지’ 손호민(78) 미국 하와이대 동아시아어문학과 교수다. 15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국제교류재단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입국했다. 그는 1972년 본격적으로 미국 내 한국어 교육에 뛰어들어 국제한국어학회, 미국한국어교육자협회, 한국어교육연수센터 등을 만들었다. 한국어 교수만도 40여명을 키워냈다. 지금 80여개 영어권 국가에서 쓰이는 한국어교육교재도 개발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손 교수는 요즘 신바람이 난단다. 초창기만 해도 한국어 과목이 동아시아언어학과 아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인기 과목이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하려 했지, 한국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 하면, 전쟁과 가난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경제강국 일본, 그리고 막 문호를 열기 시작한 중국에 비해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한국어·한국학 함께 가르쳐야” 그러다 최근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류 덕분이다. 1970년대만 해도 30여명에 불과하던 한 학기 수강생이 482명으로 불어났다.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아졌단다. 왜 한국어를 배우려 하느냐고 물어보면 절반 이상이 K팝을 얘기한단다. 혹시 너무 단편적인 것은 아닐까. 손 교수는 “일시적이라 해도 일단 들어오게 되면 계속 관심을 기울이게 되니까 좋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한국어와 한국학의 연계를 강조했다. 손 교수는 “한국어 하나만 배워서는 높은 수준에 다다르긴 어렵고 한국의 역사, 문화, 철학을 함께 배워야 하고, 한국학 역시 언어에 대한 이해가 기본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연극리뷰]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치인 2인자, 살리에리의 삶

    [연극리뷰]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치인 2인자, 살리에리의 삶

    “철없는 풋내기가 놀면서 쓴 곡이 내가 심혈을 기울여 쓴 곡을 생명력 없는 낙서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읊조리며 내뱉는 대사 일부다. 주위의 뛰어난 천재 때문에 열등감,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부를 만큼 살리에리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저주했다. ‘아마데우스’는 모든 곡을 머릿속에서 구상해 프린터기가 인쇄하는 수준으로 종이에 옮겨 적곤 했던 모차르트의 예술성과 천재성,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2인자로 지내야 했던 살리에리의 콤플렉스와 낮은 자존심이 얽히고설킨 작품이다. 200여년 전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 어느 곳에서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경쟁, 이 과정에서의 승리감, 열등감, 자괴감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래서 관객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보다 스스로의 평범함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는 살리에리의 인간적 고민과 슬픔에 더욱 동감하게 된다. 극은 일흔을 넘긴 늙은 살리에리가 죽기 전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 1823년 11월에서 출발한다. 극을 이끄는 해설자인 살리에리는 1781년 모차르트를 만난 시점부터 그를 떠나 보낸 10년 동안을 미래의 후손, 즉 관객들에게 회상하며 자신의 심정과 잘못을 깨알같이 고백한다. 잘나가는 궁정작곡가로 활동 중인 살리에리는 자신보다 18살이나 어린 모차르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무능을 감지한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쓴 곡일지라도 자유분방하게 음표를 그려내는 모차르트를 당할 수 없었다. 노력보다는 신에게 부여받은 능력 덕분에 모차르트가 인정받는 모습을 살리에리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차르트를 최대한 지능적으로 악랄하게 괴롭힌다.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점점 더 궁핍한 생활에 빠져든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예술혼은 놓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은 레퀴엠(진혼곡)을 완성하기 위한 깃털펜이었다. 살리에리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관객은 쉬는 시간을 포함해 3시간의 공연 동안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애증 관계, 그리고 그들의 예술성에 빠져들게 된다. 배우들의 열연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빚어내는 조화도 묘미다. 공연 내내 모차르트가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등이 피아노 독주 또는 피아노 4중주로 연주된다. 같은 제목의 영화 ‘아마데우스’를 본 관객이라면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 화제의 연극 ‘에쿠우스’를 쓴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의 작품이다. 내년 1월 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1644-2003.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한국 사회정의는 OECD 바닥권 지배층이 공공지원 중요성 간과”

    “한국 사회정의는 OECD 바닥권 지배층이 공공지원 중요성 간과”

    투자자 국가소송 제도(ISD) 등으로 시끄러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의 핵심은 “세계는 평평한가.”라는 질문으로 요약 가능하다. 세계화론자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제목(‘The World is Flat’)에서 나온 이 말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국제사회에서는 모두 일개 국가에 불과하며 동등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우리가 꿀릴 게 뭐 있냐.’ ‘자신감을 갖고 부딪치면 싸워 이길 수 있다.’, ‘ISD는 미국 투자가 많은 한국에 오히려 필요한 제도’라는 주장들이 나온다. 그런데 정말 미국은 한국과 대등한 일개 국가인가.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홍시 펴냄)는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세계를 보는 눈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고 ‘세계화 반대’ 같은 상투적인 반대 구호를 연상하는 것은 섣부르다. 저자 예란 테르보른(70)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세계화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어떤’ 세계화인지 묻는다. 이를 위해 지금의 세계가 어떻게 생성됐는지부터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원제도 ‘세계,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The World ; The Beginner’s Guide)이다. 한국판 제목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는 내용에 비해 다소 자극적인 느낌이다. 책 내용은 일흔의 노()학자가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사회학자답게 4장 ‘지구에서의 우리 시대’에서는 출생,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의 삶이 어떠한지 전 세계적인 비교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그 결론은 이렇다. “북서유럽에서 태어나, 핀란드식 국립학교에서 교육받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북서유럽에서 살다, (영국) 옥스브리지(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를 나와, 아시아에서 멋진 결혼식을 하고, 동아시아에서 흥미진진하게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고, 은퇴해서는 (스위스) 제네바나 (캐나다) 밴쿠버에 갔다가, 요양받을 무렵 스칸디나비아로 간다.” 테르보른 교수는 이를 ‘21세기 최고의 이상적인 생애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그 재치에 절로 웃음이 난다. 저자의 출발점은 가족과 성(性) 역할을 토대로 문명권을 분류한 뒤 이들이 이후 어떻게 세계를 이루게 되었는지 분석한다. 해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근대세계의 출현이다. 서구는 자생적, 비서구는 반응적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반응적 근대화에서 핵심은 앞선 나라들이 어떻게 근대화를 이뤘는지 관찰하는 일이다. 여기서 발견한 것이 바로 ‘대의정부’다. 반응적 근대화를 추진하던 후발 국가들은 “위협적인 제국주의 세력이 입헌적 대의정부를 갖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대의정부가 국력과 사회결집의 관건이라고 해석했다.”고 테르보른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정말 국민의 뜻을 반영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섰다. 그가 보기에 “대의정부의 가치는 정권을 지키고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주류사회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은 관심 밖”이었다. 이것이 반응적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들의 공통점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로 나아간 일본이 거꾸로 천황제를 존속시킨 것이나, 경제발전을 내걸고 독재를 일삼은 한국도 매한가지다. 대의정부 흉내는 냈지만 국민의 뜻을 대신 표시하기보다, 국민을 동원하는 데만 관심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의식은 한국의 기이한 풍경과도 맞물려 있다. 저자는 “노인 존중의 나라에서 노인층 빈곤율은 가장 높다.” “사회정의에 관한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은 거의 바닥권”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되묻는다. “한국의 지배층 엘리트들이 민족적 동질성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선진경제와 사회들에서 사회적 결집을 이루는 데 있어 온 국민에 대한 공공지원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피땀을 흘린 이들이 가난에 떨고 있다면, 그 가난 위에 건강하게 성립된 국가는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반문이다. 세계적 시야에서 이뤄진 서술이다 보니 한국 문제는 드문드문 언급되지만, 그 지적들은 꽤나 뼈아프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가을단풍처럼 화선지에 물든 선인의 삶

    가을단풍처럼 화선지에 물든 선인의 삶

    가을 단풍만큼이나 화선지를 다채롭게 물들인 조상의 숨결전이 잇따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초상화의 비밀’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지난달 27일 전시 시작 이래 9일 현재 1만 706명이 다녀갔다. 간송미술관의 ‘인물풍속대전’, 리움미술관의 ‘조선화원대전’이 그 뒤를 잇는다. 비교하자면 이렇다. 중앙박물관 작품은 선비정신을 중시하다 보니 그림에 서릿발 같은 위엄이 넘친다. 대신 정물화 같아 재미가 덜하다. 반면 간송의 작품들은 일상의 소소한 잔재미를 크로키처럼 잽싸게 잡아챘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 한데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리움의 작품들은 그림 속으로 뛰어들기보다 그림을 뒤에 배경으로 두고 운치 있게 즐기고 싶게 만든다. ●간송미술관 ‘인물풍속대전’ 한량들의 놀이 풍경을 담은 ‘연소답청’(年少踏靑)을 보면 과연 혜원 신윤복(1758~?)이다 싶다. 기어이 기생을 자기 말에 태우고 직접 끌고 다닌다. 세도가 자제 같은데 여자에 ‘미치니’ 종 노릇도 마다 않는다. 그래서 왼쪽 뒤편의 말도, 모자도 뺏긴 채 따라가는 종의 표정이 재밌다. 제 주인이 흥에 겨워 난장 놀음을 하는데 맞장구치기도 그렇고, 말리기도 그렇다. 그 난감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백인산 학예연구위원의 설명이 재미있다. “혜원의 아버지가 화원화가였던 신한평(1735~1809)인데, 이분이 일흔 넘게 사시면서 생계를 모두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신윤복은 왈자패들하고 어울려 속 편히 놀았던 것 같아요. 단원(김홍도)의 풍속화를 왕이 보는 그림이라 단정했다면, 신윤복은 자기가 먹고 놀던 모습을 그대로 그렸으니 퇴폐적이고 흥겨운 거지요.” 미인도를 비롯해 널리 알려진 신윤복의 그림들이 지금까지 화사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고관대작 자제들과 어울렸던 덕분에 좋은 재료를 쓸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단다. 김후신(1735~?)의 ‘통음대쾌’(痛飮大快)도 유쾌하다. 제목 그대로다. 배경을 빌딩으로 바꾸고 등장인물에게 양복만 입혀 두면 2차, 3차를 외치며 도심 뒷골목을 다니는 현대인과 같다. 겸재 정선(1676~1759)에서 시작된 진경산수화의 참맛을 내세우는 간송미술관답게 ‘어초문답’(漁樵問答)을 비교해보는 맛도 쏠쏠하다. 낚시꾼과 나무꾼의 문답이라는 ‘어초문답’은 성리학의 대의를 밝히는 내용 때문에 조선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창작 모티프가 됐다. 해서 이전의 어초문답은 중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데 반해 정선의 어초문답은 인물, 배경, 옷매무새가 모두 조선풍이다. 16~30일. 무료. (02)762-0442. ●리움미술관 ‘조선화원대전’ 1층 전시장에는 왕의 행렬, 궁중 행사, 어진(임금 초상화) 등을 배치했다. 위엄을 갖춘 공식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중앙박물관 전시에 가깝다. 인물화에 있어서는 김홍도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명기(?~?)의 ‘오재순 초상’도 볼 수 있다. 지하 전시장은 간송과 같은 풍속화로 넘어간다. 전시장을 독특하게 분할하는 칸막이들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옥 마을을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관람객에게 주기 위한 설정”이란다. 간송이 민속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리움은 중국적인 냄새가 짙다. 화원화가들이 왕실과 사대부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한 만큼 아무래도 작은 화첩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해지기는 하지만 진경 그 자체보다 ‘그들의 취향’에 맞춘 듯한 분위기가 강하다. 전시의 가장 큰 장점은 요즘 스마트폰에 쓰이는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옛 그림을 자유자재로 확대해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가반차도’(動駕班次圖)는 가로 길이만 10m에 이른다. 김두량(1696~1763)과 김덕하(1722~1772)가 함께 그린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는 길이가 2m에 가깝지만 폭은 8㎝가 채 안 된다. 이런 그림을 상세히 볼 수 있도록 부분 확대 또는 축소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진시황 무덤의 병마용이 똑같은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찬탄을 불러내듯 확대해서 들여다본 사람과 풍경 역시 모두 달라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3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4000~7000원. (02)2014-6900.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대왕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영조대왕전’을 여는 이유는 민국의 이념 때문이다. 최근 연구 성과를 모아 보니 영조가 이미 민국의 이념을 내세웠다는 데서 시작했다. 6000점에 이르는 영조 관련 소장 자료 가운데 민국의 면모를 드러내는 300여점을 추려냈다. 영조 어진을 비롯해 숙종의 병이 나은 것을 기념해 열린 잔치 모습을 그린 ‘숭정전 진연도’ 등이 공개된다. 11월 20일까지. 무료. (031)709-811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특파원 칼럼] 자장면과 불도장/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자장면과 불도장/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중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18일 베이징에서 대표적인 중국음식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동행한 손녀, 게리 로크 주중대사 등과 함께 서민 음식점에서 약간 늦은 점심으로 자장면을 즐겼고, 저녁 때는 인민대회당 환영만찬장에서 ‘스님의 구미를 자극해 스님이 담을 넘어갈 정도’라는 불도장을 맛봤다. 바이든 부통령이 어떤 음식을 더 맛있어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식당 주인은 바이든 부통령 일행 5명이 모두 자장면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고 전했다. 한국식 중국음식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에서 자장면과 불도장은 천양지차의 음식이다. 단숨에 면발을 뽑아 뚝딱하고 내놓는 자장면과는 달리 불도장은 각종 진귀한 고기, 해물, 버섯 등을 오랫동안 푹 고아 내놓는 진미·보양탕이다. 자장면이 5~10위안(약 840~1680원)인 반면 수천 위안을 호가하는 불도장도 있다. 일생 동안 제대로 된 불도장 한번 먹어보지 못하는 중국인이 대부분이다. 조리법과 가격대로만 보면 자장면은 ‘소프트’하고, 불도장은 버거울 정도로 무겁다. 자장면은 쉽게 선택할 수 있지만 불도장은 왠지 부담스럽다. 대중친화력 면에서 불도장은 자장면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바이든 부통령은 자신의 선택으로 자장면을 먹었고,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내주는 불도장을 피할 도리 없이 시식했다. 바이든 부통령, 아니 미국은 혹시 미리 각본을 짜놓고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이 아닐까. 자장면과 불도장을 통해 미국식 자유주의의 상대적 우월성을 중국인들의 뇌리에 심어주려 한 것이 아닐까. 사실 바이든의 자장면이 상징하는 ‘소프트 외교’는 미국 외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지 오래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장병들과 함께 조깅을 하는 모습을 연출, 한국에 조깅 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미국의 직전 주중대사였던 존 헌츠먼은 주말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로 나가 중국 서민들을 만났다. 고위공무원들의 근엄한 모습에 익숙해 있는 중국이나 한국 등 동양인들에게는 이런 면모들이 이례적으로 비쳐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신기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자유분방함을 동경하곤 한다. 최근 부임한 로크 대사 가족이 손수 짐을 어깨에 메거나 손에 들고 공항터미널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모든 중국 언론들이 대서특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들은 저렇게 소박하고, 자유분방한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일흔두살 고령인 일본의 니와 우이치로 주중대사가 24시간에 걸쳐 칭짱(靑藏)철도를 타고 티베트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니와 대사는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면서 중국인 여행객 및 티베트인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고 중국 언론들은 전했다.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우리에 뒤지지 않는 중국에서도 니와 대사의 이런 ‘친민행보’, ‘소프트 외교’에는 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중국의 역량이 커지면서 한국의 고위정치인, 고위공무원들이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지만 그들이 시장 속으로 달려가 중국 서민들을 만났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관심은 온통 지도자들과의 면담이다. 약속을 잡으라고 공관원들을 다그친다. 중국을 알아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중국 서민들의 관심을 얻는 데는 인색하다. ‘바이든의 자장면’이 아쉬운 이유다. 바이든 부통령 일행이 지불한 자장면 값은 우리 돈으로 1만 3000원 안팎에 불과하다. 게다가 중국인이나 우리나 ‘불도장’보다는 ‘자장면’에 익숙하지 않은가. 최근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이규형 주중대사의 경극 열창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대사가 중국 외교부 전현직 간부 모임에 초대받아 제갈량이 ‘읍참마속’(泣斬馬謖)하는 대목을 멋드러지게 부르자 모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도 일선에선 ‘소프트 외교’의 기반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꼭 자장면 집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성의를 보이면 말하지 않아도 현지 민심은 쏠리게 돼 있다. 그게 ‘소프트 외교’의 힘이다. stinger@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정악대금으로 원형 대금산조 처음 풀어낸 이생강 명인

    [김문이 만난사람] 정악대금으로 원형 대금산조 처음 풀어낸 이생강 명인

    조용히 눈을 감는다. 춤의 소리가 들려온다. 잔잔하던 가슴을 후벼 판다. 전신을 휘감아 돈다. 귀신을 일으키고 거친 바다를 잠재운다. 하여 신적(神笛)이다. 신라시대 설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한 대나무가 있었다.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가 됐다. 이때 용이 나타났다.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신기한 대나무는 곧 피리로 만들어졌다. 소리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흩어졌던 민심은 이 소리를 듣고 하나가 되고, 다들 안정이 됐다. 피리는 국보가 됐고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악지에 ‘악기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바람과 파도가 잔다.’는 기록이 남게 된 배경이다. 이후 대금(大笒), 중금(中笒), 소금(小笒), 단소, 퉁소 등의 악기로 무궁하게 이어졌다. 세월을 뛰어넘는다. 조선 후기 진도의 세습무 출신 박종기(1879~1939) 명인이 대금산조를 창시했다. 이때부터 무속음악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우리의 전통춤 무대에서 90% 이상 배경음악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자리잡았다. 원래 대금의 종류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다. 정악대금은 주로 궁중음악이나 양반들의 풍류음악을 연주하려고 만든 악기로 다른 악기와 합주할 때 적합하다. 관이 길게 돼 있는 것도 다른 악기와의 음정을 고려한 이유이다. 그런데 정악대금은 취구(吹口)가 작고, 손가락을 짚는 지공이 넓어서 다루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호흡 또한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산조대금과 같은 꺾기나 깊은 농음(音), 다루치기(순간적인 지공의 개방을 통해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하는 기술)가 어렵다. 반면 산조대금은 대금산조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이다. 다양하고, 화려한 가락이 많아 손동작을 원활하게 하려고 정악대금보다 짧게 만들어져 손 움직임을 편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정악대금으로 산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박종기 명인은 당시 산조를 연주할 때 대금의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악대금으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대금산조 이생강(75·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명인은 박종기 이후 최초로 정악대금으로 산조 한바탕을 최근에 풀어내고 ‘이생강 원형 대금산조’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냈다. 나이도 나이지만 대금인생 70년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을 던지며 만들어냈다고 했다. 우리 국악사에 큰 획을 긋는 일임이 분명하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이 명인을 만났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온 고등학생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고 있어 잠시 기다렸다. “너무 (대금을) 흔들면 안 돼.” “네.” “호흡을 길게” “…” 제주도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연습이 끝나자 이 명인은 괄괄한 목소리에다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가며 거침없이 말을 이어간다. “강원 신철원에서 제주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 다시 물었다. “우리 아들(이광훈)이 제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중·고 학생들이지요.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철원에 있는 초등학생 700여명에게 단소를 가르쳐 주고 있지요. 학교에서 우리 국악을 하면 아름다운 교육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을까. 이 명인은 지난해 강원 정동진에서 열린 전국 초등학교 교장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대나무의 소리 하나로 분위기를 확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더니 감동을 받은 일부 교장 선생의 뜻에 따라 시골 학교에서 조금씩 국악 붐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소로 했지요. 원하는 학교에는 제가 단소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대금으로 교체해 줄 때가 됐지요. 자금조달은 어떻게 하냐고요. 제가 공연을 하잖아요. 그걸로 담양에서 대나무를 사고 아는 사람한테 찾아가 수공비만 받고 싸게 대금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육용으로 만든 180여 가지 CD와 DVD 등도 보내주고 있지요. 아들은 제주에서 가르치고 저는 틈이 나는 대로 강원 지역에 가서 지도를 해줍니다. 요즘에는 유아용 ‘병아리 단소’도 만들어 어릴 적부터 국악과 친해지도록 권장하고 있지요. 어린애들이 단소를 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명인은 신철원과 제주에서 시작된 단소 불기 운동이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 만날 때 멋진 공연을 할 것이라며 웃는다. 잠시 얘기를 멈추는 사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음반을 낸 원형(原形) 대금산조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우리 국악에서 원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살아 있을 때 원형 대금산조를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1937년생입니다. 일흔이 넘었고 대나무 소리를 낸 지도 70년이 됐습니다. 살아 있을 때 남겨둬야 합니다. 원형 대금산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 스승(한주환)의 스승(박종기)이 했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그걸 음반으로 제작했지요. 그래야 후배들이나 국악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나무 소리인생 70년을 맞아 정악대금으로 풀어낸 ‘원형 대금산조’ 음반에는 전체 63분 23초 길이에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시나위’ ‘자진모리’를 순서대로 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정악(正樂)은 ‘인쇄체’요, 산조(散調)는 ‘필기체’라는 것. 손가락을 잘 떼서 매끄럽게만 불면 되는 정악대금에 비해 산조대금은 개성 있는 꼴바꿈이 가능하며 선율이 다채롭고 인간 세계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고 덧붙인다. 국악계의 한 평론가는 이번 음반을 낸 것과 관련해 “박종기의 탁월한 예술성을 한주환이 극복하며 대금산조의 중시조로 등극했듯이 한주환의 천재성을 극복한 유일한 재비가 이생강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라고 평했다. 이 명인은 반주악기로만 사용돼 온 대금으로 첫 독주를 시도했던 일화를 공개했다. “1960년 4·19 직후 에어프랑스 비행기가 서울에 왔습니다. 거기에 한국민속예술단 소속 무용수와 악사 등 33명이 타고 프랑스 파리에 갔지요. 춘향전을 무용극한 내용으로 공연을 하는데 주인공 안나영씨가 급히 맹장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대타로 제가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대금을 들고 무대에 섰지요. 아이러니하게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민속악기 독주회를 처음 갖게 됐습니다. 우리 민속악기는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참가공연을 계기로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아 50여개국 순회공연을 갖게 된다. 그의 대금에 대한 사랑과 의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가 낸 음반의 종류만 해도 500여 가지. ‘동백아가씨’ ‘목포의 눈물’ 등은 물론이고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웬만한 노래는 죄다 대금으로 풀어냈다. 얼마 전에는 한국 전통무용음악을 집대성한 ‘춤의 소리’ 전집음반 50장을 한꺼번에 내놔 국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산조춤, 화관무, 부채춤, 살풀이, 승무, 농악 등이 총망라된 우리 전통 무용음악의 100년사를 담은 ‘백과사전’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단지 대나무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일진대 청아하고 신기에 가까운 뻐꾸기 소리 등을 마구 뱉어내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눈을 감게 만든다. ‘이생강이 아니면 과연 누가 할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앞으로 태교, 명상, 추억, 회상 음악 쪽에 방향을 맞춰 꾸준히 일상으로 파고드는 작업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아리랑’을 현대감각에 맞게 작곡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악의 원형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 명인은 다섯 살 때부터 소금을 배웠다. 이후 11세 되던 1947년, 스승 한주환을 만나면서 대금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6·25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란 온 당대 국악의 대가들과 자주 접한 것도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욕심이 커서 어떤 때는 하루 동안 열심히 뛰어 대가들에게 찾아가 ‘한수, 한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일취월장,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양의 7음계를 우리 5음계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다. ‘대니 보이’(Danny Boy),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등의 팝송과 재즈를 넘나들며 대금의 음역을 계속 넓혀 나갔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는 악보도 없이 ‘눈물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 우리의 전통가요까지 자유자재로 불 수 있게 됐다. 아버지에게 단소와 피리를 배우는 것을 시작해 대금의 한주환, 퉁소의 전추산, 피리의 오진석·임동석, 태평소시나위의 김문일 등 여러 스승에게 배우면서 스스로 ‘이생강류’라는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전통과 현대를 크로스오버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온 명인의 열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이생강 명인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후 부산에 정착해 살았다. 다섯 살때 아버지에게 단소를 배웠고 이후 이덕희, 지영희, 전추산, 오진석, 방태진, 한주환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피리, 단소, 퉁소, 소금, 태평소, 대금 등을 익혔다. 1959년 임춘앵 여성국극단에서 대금반주을 했으며 196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세계민속예술제 참가공연 때 처음으로 대금독주를 했다. 1977년 국내에서 첫 대금산조 개인 발표회를 가졌으며 이때 원형 대금산조를 처음 연주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등 크고 작은 무대에서 20여 차례 개인발표회를 가지며 독특한 ‘이생강류’의 대금음악을 만들어오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폐회식 때 대금독주로 주목을 받았고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2007년 6월 ‘춤의 소리’ 전집음반 50장을 제작한 데 이어 지난달 최초로 정악대금으로 ‘원형 대금산조’를 풀어낸 음반을 냈다. 현재 죽향대금산조원형보존회를 운영하면서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전주 대사습대회 장원(1978), 신라문화재 대통령상(1984년), KBS국악대상(1984년), 서울시 자랑스러운 시민상(1994), 대한민국 국민상(1997), 한국국악대상(2002년) 등이다.
  • “아내와 함께한 30년 그 자체가 감동”

    “아내와 함께한 30년 그 자체가 감동”

    시인 고은(78)은 2002년 이후 매년 가을이면 ‘노벨문학상 홍역’을 앓는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스웨덴 안팎의 전언 속에 경기 안성에 있는 자신의 집 앞으로 몰려든 취재진에 시달려야 했고, 최근 몇 년은 곤혹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발표 즈음 아예 집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떠나 있곤 했다. 앞으로도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까지는, 비슷한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30년 전 냈더라면 도종환 다음쯤…” 이처럼 지역과 민족, 국가,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과 우주의 광대함을 웅혼하게 노래해온 고 시인이 연시(戀詩)들을 모아 시집을 냈다. 그의 문학 생애 첫 사랑시집이다. 118편의 시에 한결같이 사랑의 순정과 희열, 감동을 빼곡히 담아낸 ‘상화 시편’(창비 펴냄)은 오롯이 그의 아내 한 사람만을 위해 쓰였다. 제목부터 사뭇 노골적이다. ‘상화’는 부인(이상화·64, 중앙대 영문과 교수) 이름이다. 6일 서울 중구 무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난 고 시인은 “한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나에게 막 찾아오는 시를 그냥 옮겼다.”면서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시간 동안 일상 속 티끌 같은 시간의 집적 그 자체가 감동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1980년대 후반에 이 시집을 내고 싶었는데 아내가 만류해서 내지 않았다.”면서 “그때 냈더라면 도종환(베스트셀러 시집 ‘접시꽃 당신’의 시인) 다음은 갔을 텐데…”라며 껄껄 웃었다. ●“결혼 후 작품 아내 이상화 교수 합작” 고 시인과 이 교수는 1983년에 결혼했다. 28년이 흘렀으니 데면데면해질 때도 됐다. 더욱이 각각 여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럼에도 고 시인은 “이 만용을 용기라고 부르겠다.”면서 내밀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래 놓고는 막걸리 두 잔을 거푸 들이켜며 싱글거렸다. 그는 “상화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15년 전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면서 “결혼한 뒤 써 나간 내 작품들은 모두 아내와의 합작품”이라고 아내에 대한 찬사를 거듭했다. 또 “우리 부부는 무갈등 이론의 전범과도 같아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면서 “보면 볼수록 좋고, 어쩌다가 싸우려면 한 쪽이 없어져 버리니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점입가경이다. 이쯤 되면 ‘팔불출’도 울고 갈 정도다. 부부는 서로의 생일 때 시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고 시인의 시집 첫 장은 아내 이 교수의 시 ‘어느 별에서 왔을까’가 장식하고 있다. 부창부수다. “아내의 시가 더 좋은 것 같다.”는 말에 고 시인은 “오늘 들은 얘기 중 최고의 찬사다. 집에 가서 꼭 전해줘야겠다.”라며 천진스레 웃었다. 낯간지럽게 드러난 연정이 노골적이라 오히려 자연스럽다. ●“볼수록 좋은데 싸울 틈 없지” 그의 시 한 구절 ‘아내의 둘레를 돌 때마다/ 나의 한쪽이 빛난다’(‘공전’ 중)는 시집의 부제 ‘행성의 사랑’을 설명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다. 30년에 걸쳐 30권으로 완간한 ‘만인보’에도 차마 담지 않은, 가장 소중한 사람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화 시편’과 함께 또 다른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 펴냄)도 내놓았다. 인류와 생명의 역사를 아우르는 고은 특유의 웅장한 발화를 접할 수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중독성 있는 공연… 감정 연기 즐거워”

    “중독성 있는 공연… 감정 연기 즐거워”

    ‘헤드윅’. 남자배우 4명(조정석, 최재웅, 김동완, 김재욱)이 번갈아 주인공을 맡는 뮤지컬이다. ‘미모’도 용호상박이고 연기 색깔도 저마다 개성 있다. 대략 난감. 누구를 인터뷰해야 하나. ‘공연 좀 보러 다닌다.’는 사람들에게 추천을 부탁했더니, 의외로 압도적인 답변이 나왔다. “헤드윅의 정석은 뭐니뭐니 해도 조정석이지.” ●“내가 봐도 예쁠 때 있어… 남성 관객이 엉덩이 만지기도” 인터뷰에 앞서 공연을 봤다. 왜 사람들이 그를 ‘뽀드윅’(뽀얀 피부와 애교 넘치는 발랄함에서 비롯된 애칭)이라고 하는지 단박에 느낌이 왔다. “분장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예쁘다고 느낀 적이 있다.”는 조정석(31). 동반 캐스팅된 김동완(그룹 신화 출신)이 “헤어진 여자친구와 닮아 깜짝깜짝 놀란다.”고 고백했을 만큼 그는 예쁘다. 몸 동작도 요염하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폭발적이다. 그를 지난달 23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헤드윅’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2006년, 2008년, 그리고 올해…. 중독성이 있는 공연이에요. 계속 하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컨트리나 블루스 등 (극 중) 노래들도 참 좋아요.” 그는 뮤지컬 배우 송용진(200회 이상) 다음으로 ‘헤드윅’을 가장 많이 한 배우다. 헤드윅은 성 전환 수술에 실패한 동독 출신의 트랜스젠더 가수 이름이다. 한마디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영혼이다. 감정 표현이 쉽지 않은 캐릭터라는 뜻이기도 하다. “배우는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좀 예민한 편이라 힘든 느낌은 없어요. 작년에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우울한 소년(모리츠)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도 오히려 즐겁고 잘 맞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픔, 슬픔, 이런 감정선을 관객들이 읽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척 즐거워요.” ●“몰입은 힘의 원천… 양면성 있는 영화 캐릭터 해 보고 싶어” 정작 그 자신은 시원시원하게 얘기하지만 작품 속에서 갖는 헤드윅의 비중은 무겁다. 주인공이 공연 진행과 노래를 도맡아 2시간가량 끌고 가는 콘서트형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헤드윅이 웃으면 따라 웃고, 화를 내면 같이 분노한다. 객석을 동화시키는 ‘힘의 원천’을 물었다. “헤드윅이라는 인물에 100% 몰입하는 것?(웃음)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조정석이 아닌, 헤드윅에 철저히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버림받은 헤드윅의 분노, 삶의 슬픔, 이런 느낌이 본능적으로 전해져 와요.”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관객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며 야한 몸동작을 하는 대목이 있는데 언젠가 한번은 남성 관객이 제 엉덩이를 만져 무척 당황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노련해져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습니다(웃음). 아, 브래지어 속에 넣은 토마토를 끄집어내 던지며 절규하는 장면이 있는데 토마토가 없어져 혼난 적도 있어요.” 그는 2004년 데뷔했다. 8년째 뮤지컬 배우로 살면서 눈물 삼킨 날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家長)이라 늘 뭔가에 짓눌리는 느낌이 있고, 단독 주연(원 캐스팅) 공연을 할 때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가장 힘든 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입니다.”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뮤지컬, 연극, 드라마를 종횡무진 오가고 있는 조정석. 일흔 넘은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배우야.”라고 주위에 자랑할 때 무척 행복하단다. 그에게는 목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영화배우다. “원래 꿈이 영화배우였어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제 공연을 본 어떤 기자 분이 트위터에 ‘조정석 심장에는 마그마가 있는 것 같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로 그가 사이코패스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올렸는데 양면성이 있는 캐릭터로 영화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뮤지컬 ‘헤드윅’은 8월 21일까지 서울 삼성동 KT&G 상상아트홀에서 볼 수 있다. 5만~6만 5000원. (02)3404-4311.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22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 2인 인터뷰

    22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 2인 인터뷰

    월하 김달진(1907~1989) 선생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김달진문학상이 어느덧 22회를 맞았다. 올해 수상자로는 시 부문에 오세영, 평론 부문에 최현식이 각각 선정됐다. 상금은 각각 2000만원. 심사위원단은 자신의 문학 세계를 경계 짓지 않은 채 삶과 세계를 유기적으로 관조하고 아우르면서 이뤄낸 두 사람의 성취에 주목했다. 3일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국제관에서 수상 기념 시 낭송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수상자들을 만났다. ◆ 시 부문 오세영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이미지로 메시지 전달” 시(詩)는 시인이 겪어온 삶 자체다. 시가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삶을 언죽번죽 풀어내기란 참 겸연쩍은 일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노()시인 오세영(69)에게 이르면 조금 달라진다. 그의 삶은 사진 한 장만으로도 곧이곧대로 드러난다. 네 살의 오세영(왼쪽)과 예순아홉 살의 오세영(오른쪽)은 놀랍도록 똑같다. 굳이 다른 점을 꼽는다면 네 살에는 오히려 짓지 않은 동심(童心)의 미소를 일흔 목전에 품고 있다는 정도다. 오세영의 시를 읽으면 확신은 더욱 굳어진다. 그의 시는 언뜻 동시를 닮았다. 무람없이 노래되는 시어들은 순수함과 동심 안에서 질펀하게 한바탕을 펼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자리를 ‘순수의 서정시인’ 즈음으로만 못 박아둠은 그의 다양한 면모를 놓치는 일이다. 시인에게 제22회 김달진문학상을 안겨준 열아홉 번째 시집은 최근 나온 ‘밤 하늘의 바둑판’(서정시학 펴냄)이다. 관조 속에 깨달음이, 깨달음 속에 자연과 사람, 사물이 함께임을 보여주는 오세영 시 미학의 결정판이다. 삶과 사회, 자연, 우주의 관계에 대한 관조 너머에 동심이 있음은 드러내지 않아도 번연하다. ‘지구는 우주의 거대한 사파리’(‘마사히 마라’ 중)라거나 ‘구름은/ 하늘 유리창을 닦는 걸레’(‘구름’ 중), ‘하늘은 항상 미끄러운 빙판길’(‘팽이’ 중) 등의 비유는 아이의 눈높이에 머문 듯하면서도 시인의 눈이 일상의 소소함과 우주의 광대무변함이 만나는 지점에 머물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하나 순수의 시선이라고 세상의 참담함을 외면하거나 삶의 진실 바깥에 머문 채 박제화될 일은 없다. ‘비정규직’은 거리에 나뒹구는 일회용 종이컵에서 길거리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을 불러낸다. ‘…커피 한 모금 훌쩍 빨아 마시고 내팽개친/ 그 새하얀 순정’이라는 안타까운 시선과 함께 ‘깨지면 칼날이 되는/ 유리병과는 다르다’라고 노래했다. 시인의 눈에 비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절박한 저항의 몸짓을 외치건만 세상은 위협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무기력한 존재다. 시상식장에서 만난 오세영은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되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메시지를 담아보고자 했다.”면서 “이미지와 메시지가 상충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 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면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오세영 시인이 보여온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경향에 대한 성찰은 물론, 생태적 상상력의 시적 성취도에 주목했다.”면서 “그는 전통적 서정시의 혈통을 고집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사회 속에서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일깨우려는 시적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평론 부문 최현식 “서정주에서 진은영까지 세대 아우른 비평 할 것” “미당 서정주에서 진은영, 김민정 등에 이르기까지 아래위 세대 시인들을 모두 아우르는 비평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새로운 목소리와 실험적 형식에도 주목해야겠죠.” 평론가인 최현식(44) 경상대 국문과 교수는 미당 서정주를 연구하는 대표적 소장학자 중 하나다. 연세대 석·박사 논문을 모두 미당에 대해 썼다.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세 권의 평론집을 내는 동안에도 미당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았다. 공간으로서 만주 땅이 미당에게 미친 의미를 비롯해 미당이 왜 ‘천지유정’, ‘안 잊히는 일’ 등 유독 자서전을 반복해서 펴냈는지 등에 대해 연구했다. 학술적 측면의 접근과 문학비평적 접근을 혼재시킨 셈이다. 수상작은 지난 4월 펴낸 평론집 ‘시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 펴냄)이다. 진은영의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 펴냄)에서 제목을 빌려와 살짝 비틀었다. 진은영은 자신의 시집 표제작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고 남겼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우리는 매일매일’ 다음에 명사형이건 형용사형이건 동사형이건 뭔가 서술어가 와야 하고, 또 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리에 ‘시는’을 넣어보게 됐다.”면서 “다양성을 포괄하고 다양한 음역을 주목한다는 측면에서 젊은 시인이나 중견 시인, 특정 시인이 아니라 폭넓게 보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평론집의 백미는 조금은 느릿한 문체 속에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일괄하는 1부에 있다. ‘추보(醜甫)씨의 비가 혹은 연가’, ‘노동의 시, 시의 노동’ 등은 각각 서정주에서 김혜순, 이민하까지, 또한 임화에서 백무산, 송경동에 이르기까지 시의 현재를 짚고 내일을 전망한다. 아울러 황동규, 마종기 등 원로 시인의 시 세계를 조망하고, 허수경, 정끝별, 채호기, 정호승, 김기택, 박라연, 차창룡, 장석남 등의 개별 시집들이 현실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애정 있게 들여다본다. 심사위원들은 “시가 터져 나오면서 겪는 만큼의 고통스러운 글쓰기가 팽팽한 긴장으로 비평집을 채우고 있다.”(정현기 연세대 명예교수), “시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평문들, 기왕에 보기 힘들었던 낯선 목소리를 가진 비평”(김선학 동국대 교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시를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숭원 서울여대 교수)이라고 평가했다. 최 교수는 “최근 평론도 소설과 시의 영역으로 나뉘어 전문화되는 추세”라면서 “여러 평론상 중 김달진문학상이 시론(詩論)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상인 만큼 시 평론을 하는 사람으로서 수상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방사능 재앙 알고도 원전 묵인하겠습니까

    “후쿠시마 원전에 쓰나미가 일어나 해수가 멀리 빠져나가면 원자로가 모두 멜트다운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말기적인 사태로 몰아넣는 엄청난 재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정확히 짚은 이 경고는 히로세 다카시가 1990년 펴낸 ‘위험한 이야기’에서 한 것이다. 올해 일흔이 넘은 히로세는 ‘체르노빌의 아이들’ ‘원자로 시한폭탄’ 등을 쓴 일본 작가다. 와세다대 응용화학과를 나와 엔지니어로 일하다 평화운동가로 나섰다. 20년 전 나왔던 히로세의 책이 ‘원전을 멈춰라’(김원식 옮김, 이음 펴냄)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책에는 큰 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절망적인 탈출법도 나오는데 역시 20년 전의 예상이 전혀 빗나가지 않는다. “도카이무라(원자력 시설 집적지)에 가서 몇백명이 풍선을 날려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풍선은 바닷바람을 타고 똑바로 도쿄 방향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일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기상이 변하니까 바람은 북상한다고만 여겼는데 도카이무라에서 부는 바닷바람의 특징은 도쿄 방면으로 부는 바람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죽음의 재라면 아마 일본 전국으로 확산하였을 것이고, 방사능 구름은 단 5시간이면 도쿄 도심에 그 모습을 나타내어 수도권만도 3000만명이 전멸합니다. 사람들이 남하해서 도망치면 간사이 지방에서는 급히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국가는 계엄령을 선포해서 도로를 봉쇄할 겁니다.” 치밀한 조사를 통해 원자력의 위험을 전달하는 저자는 원자력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죽음의 얼굴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논리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에너지란 주장이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연료를 정제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가 든다. 더 큰 문제는 반영구적인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원자력 발전소는 계속 짓는 것일까. 저자는 원자력을 통해 이득을 얻는 자본의 전략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라늄 채취에서 발전소 건설에 이르는 원자력 산업은 모건이나 록펠러 같은 국제 금융재벌의 투기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유엔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역시 표면적으로는 중립 기관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자력 이권으로 큰돈을 버는 인간들이 각 기업의 대리인으로 참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혹시 없으면 에너지난을 겪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계속 불어났고 결국 참사를 낳았다. 책은 오싹한 공포만 느낄 게 아니라 당장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경고한다. 1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길섶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박홍기 논설위원

    폐지를 줍는 한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깔끔한 차림의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의 주택가에서 조그만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종이상자를 겹겹이 싣고서. 일흔은 족히 됐을 법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분리수거가 워낙 잘 지켜지는 터라 종이상자나 폐지가 없지만 주택가엔 아직 일거리가 적잖다. 인심도 남아 있는 까닭에 종이상자 등을 차곡차곡 정리해 대문 밖에 내놓는다. 잘 가지고 가라는 듯이. 동네 분인 듯한 다른 할머니가 “뭘 그리 어렵게 해. 쉬기나 하지.”라며 인사를 건네자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 “어때, 집에 있으면 뭐하누. 돌아다니면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한참 움직이면 밥맛도 좋고, 운 좋은 날엔 쏠쏠해.” 웬만한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서울의 한쪽에서는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끼리 다투다 크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날 만큼 삭막해진 세상에서. 그 할머니는 “좋아서 하는 일이야. 행복이 따로 있는감.”이라며 종이상자를 집어들었다. 정말이지, “행복이 뭐 별건감.”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이민정 “여신요? 카리스마 李배우로 불리고파요”

    이민정 “여신요? 카리스마 李배우로 불리고파요”

    봄을 닮은 상큼한 미소가 매력적인 탤런트 이민정(29). 그녀는 요즘 연예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배우 중 한명이다. 드라마와 영화 주연은 물론 각종 CF까지 섭렵하며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는 그녀를 지난 9일 SBS 수목드라마 ‘마이더스’의 촬영장에서 만났다. 이민정의 지난 2년은 누구보다 바빴다.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로 혜성같이 등장한 그녀는 그해 주말극 ‘그대, 웃어요’의 주연을 따내더니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2010)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승승장구’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지난 2년 동안 참 바쁘긴 바빴네요. 그동안 제 작품이 다 잘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중박’은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예전엔 저를 대충 아셨다면, 요즘엔 저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분이 확실이 많아지신 것 같기는 해요.” 동그란 눈매에 오똑한 코.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딱 부러지고 다부진 말투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내 털털한 눈웃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녀의 이런 외모와 매력 때문에 ‘여신’이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도 심심찮게 따라붙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민망해요. 제가 어떻게 보면 특출나게 예쁜 것은 아니잖아요. 정말 여신까지는 아닌 것 같고요. 그냥 매력 있는 정도로 해주세요. 얼마 전에 김희애 선배님이 ‘아침부터 여신이랑 촬영했네.’ 하면서 웃으시는 통에 정말 민망해서 혼났어요.”(웃음)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연기자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 길거리에서 연예기획사 관계자의 명함을 받은 적은 있지만, 성격상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출이나 제작 쪽에 관심이 많아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올린 공연 무대에 서게 되면서 3년간 연극에 푹 빠져 지냈어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오디션에 응시하는 등 준비를 했고, 2006년 MBC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를 통해 데뷔했죠. ” ●상큼발랄 대명사서 비련의 여주인공 ‘정연’으로 연기 변신 그러나 연예계에서 처음부터 그녀의 등장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2~3년 무명의 시간을 거치면서 뜻대로 되지 않아 여러번 좌절도 하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마침내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이민호)의 악혼녀 하재경 역을 맡는 행운이 찾아왔다. “어느 배우나 처음엔 얼굴을 알리는 유예 기간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들기 마련이죠.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꽃남’의 출연 제의를 받았어요. 만일 그때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지금도 다른 작품에서 열심히 뭔가를 보여주려 하고 있겠죠.” 그녀는 ‘꽃보다 남자’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 시기가 꼭 좋지는 않았다고 털어놨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디엔가 갇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 곧바로 ‘그대, 웃어요’를 통해 주연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만만찮은 성장통은 계속됐다.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하기를 요구받을 때 성장한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때 감독님께 ‘텍스트만 준비하지 말고, 자신을 놀라게 할 만한 연기를 하라.’고 크게 혼난 적이 있어요. 나중에 기선 제압용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당시엔 청천벽력과도 같았죠.” ●깍쟁이 외모요? 친구들은 절 ‘남자친구’처럼 의지해요 이런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영화 ‘시라노;연애 조작단’이다. 자신의 첫 주연작으로 28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각종 신인상을 거머쥐며 그녀는 ‘충무로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후 원톱 주연의 드라마와 영화 출연 제의가 쏟아졌지만, 그녀는 의외로 김희애, 장혁 등과 공동 주연작인 ‘마이더스’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 “제가 아직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갈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희애 선배님과 연기를 한다면 좋은 영향을 받아 내실이 다져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김 선배님은 시선이나 대사 처리 등 배울 점이 참 많아요. ” 언젠가 “연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김희애 선배의 말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는 이민정. 상큼 발랄의 대명사였던 그녀는 ‘마이더스’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정연 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이번엔 각 잡힌 정극 스타일의 연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저도 솔직히 정연이 출세를 위해 잘 해보겠다는 도현(장혁)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자가 좋아했던 것은 그 남자의 세속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이기 때문에 외부의 조건에 의해 사람이 변할 때 여자가 충분히 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남 5대 얼짱’이라는 별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깍쟁이 같은 외모와 달리 주변 친구들이 ‘남자 친구’처럼 여기고 의지하는 편이라는 이민정. 동갑내기인 여배우 손예진, 송혜교 등이 한참 앞서 가지만, 조급해하기보다는 차분히 한발 한발 나아가고 싶단다. “전 아직 제 감정에 휘둘리는 편인데, 확실히 경력이 오래되신 분들은 가만히 있어도 예쁘고 어떤 내공이 있는 것 같아요. 어제는 이덕화 선배님을 보고 연예인을 오래 하는 분들은 성인군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직업이 일 대 다수를 상대하기 때문에 오해도 많고, 신경쓰이는 부분이 참 많거든요.” 이민정은 요즘 김희애를 보면서 관리만 잘한다면 20대의 풋풋함보다는 30대의 농익은 아름다움이, 40·50대의 멋진 카리스마가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10년 뒤 모습을 묻자 “혹시 일흔까지 국민 배우로 일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농담이 현실이 되어 오랫동안 사랑받는 배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뛰는 부동산 나는 물가] 71세에 첫 내 집… ‘보금자리’ 없었더라면…

    [뛰는 부동산 나는 물가] 71세에 첫 내 집… ‘보금자리’ 없었더라면…

    20여년 농사를 지었지만 다섯 식구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어 전남 신안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공사장 경비원에서부터 보따리 장사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이 다해 봤지만 그래도 사는 것은 항상 고달팠다. 손에 쥔 돈이 없으니 25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집을 장만해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 수 있으리란 꿈은 놓지 않았다. 지하방에서 7년여 만에 방 두개짜리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날,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벗어났다며 좋아하던 애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그때는 내 집이 바로 손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경비원의 월급으로 애들 키우면서 집 장만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장사에 실패하면서 금세 손에 쥘 것 같았던 내 집 마련의 꿈은 남의 얘기가 돼 버렸다. 김이곤(71·서울 중랑구 중화동)씨는 서울 강남 세곡지구(강남지구) 보금자리주택 생애최초 특별분양에서 전용면적 84㎡ 아파트에 당첨됐다. 당첨자 중에서는 최고령자다. 18일 서울 사당3동 대림플라자 경비실에서 만난 그는 아직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아침 출근 전 집에서 당첨 사실을 알았다. “내 나이 일흔한 살에 서울에 내 집이 생겼다니 믿어지지 않았지요. 집사람과 몸이 불편한 딸아이가 제일 좋아했지. 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고….” 깊게 팬 주름과 거친 손에는 힘들었던 그의 삶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나만 어려웠나. 그 시대에는 모두가 어려웠지.”라고 손사래를 쳤다. “71년이 꼬박 걸렸네. 내 이름으로 된 집문서를 갖는 데 말이야. 이젠 여한이 없어.” 전남 신안군 도초면에서 태어난 김씨는 23살 때 결혼을 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생활고 끝에 1983년 아들 형제, 태어나면서 몸이 불편한 딸 등 다섯 식구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첫 둥지는 서울 공릉동 25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에 틀었다. “고향 선배가 경비원 자리가 있다고 해서 자식들하고 무작정 상경을 했지.”라며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한 3년 동안은 밤에 아무리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어. 자는 애들을 밟지 않고는 나갈 수 없었거든. 그때 꼭 내 집을 마련하겠다고 결심했지.” 김씨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후 기억도 다하지 못할 만큼 수십 차례 전셋집을 옮겨 다니면서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1988년 청약저축에 가입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불입액을 못 넣을 때도 많았고, 기껏해야 2만원만 넣을 때도 있었다. 23년여 동안 모았지만 총액 1100만원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93년에는 장사도 시작했다. 시장 도매상에서 신발, 가방, 옷 등 물건을 사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보따리장수를 했다. “한 3년 동안 장사하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까먹었지. 빌린 장사 밑천 갚느라고 아주 힘들었어….” 김씨의 실패담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공사현장을 찾았고 착실하게 저축을 했다고 한다. 환갑인 2005년부터는 다시 경비원으로 일하며 꿈을 키웠다. 그는 결혼한 큰아들 빼고 네 식구가 중화동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 전세금은 4000만원. “입주금은 마련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라면서 “예·적금과 대출을 받으면 분양대금 3억 2000만원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서울광장] 인사만 잘해도 성공한 대통령이다/김종면 논설위원

    [서울광장] 인사만 잘해도 성공한 대통령이다/김종면 논설위원

    감사원장 자리가 비어 있다. 개각설도 나온다. 또 인사 회오리가 몰아치지는 않을까. 이제부터라도 지난 인사의 잘못을 따져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망각 모드다. ‘처갓집 청문회’니 뭐니 난리를 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태평하다. 투기의혹 등으로 일부 여당의원조차 외면한 최중경 지식경제부장관 후보자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야당의원에게 협조를 구하는 전화까지 했다고 한다. 소통의 진정성이 읽힌다. 한데 그 전화 정치의 알맹이가 고작 ‘공직 부적절’ 인물에 대한 부탁이라니….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에 초당적 협조를 구한다든가 하는 것 같은 내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가 뭐가 되든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의 삶은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럼에도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공직인사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층이 바로 서민이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은 도리어 무관심하다. 진정 서민과 친한 정부라면 마땅히 인사 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거창한 지사형 인물을 바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도덕적 자질만 좀 갖춰 달라는 것이다. 한번 낙마했으면 다음에는 더욱 엄정한 잣대로 후보를 뽑고 청문을 거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다. 앞선 자의 낙마가 오히려 인사 장애를 넘는 지렛대 구실을 하니 ‘당한’ 쪽만 억울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청문회는 한갓 구경꾼이나 불러 모으는 푸닥거리가 아니다. 잘못을 지적받으면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낙마가 또 다른 낙마의 방패막이가 되는 현실은 부당하다. 공정사회가 아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읽는 일은 더 중요하다. ‘그들’만의 인사에 국민은 분노한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독이 올라 있다. 잘못된 인사로 인한 불신의 병이 국가의 건강을 얼마나 좀먹고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 회전문 인사도 할 때는 해야 한다. 국가에 꼭 필요한 인재라면 언제든 불러 다시 쓸 수 있다. 그러나 분리 수거를 할 때도 꺼림칙하지 않은 재활용품(recyclables)만 따로 골라 쓰는 법이다. 그런 물건이 흔한가. 왜 길을 두고 뫼로 가려 하나.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 새로운 인사의 변경을 개척하려 흔쾌히 나서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자폐적’ 인사관부터 극복해야 한다. 고질화된 인사 난맥이 누구 탓인가. 어떤 이는 참모가 쓴소리를 못한다고 질타한다. 누가 있어 한 번이라도 자리를 걸고 죽을 힘을 다해 극간하는지는 알 수 없다. 세종대왕은 간행언청(諫行言聽)했다고 한다. 간하면 행하고 말하면 들어줬다는 얘기다. 지금은 애써 간하는 사람도 없는 듯하니 뭘 기대하겠는가.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려 사과했느니 안 했느니 논쟁을 벌이는 수준이니 딱한 노릇이다. 옛 사대부들은 자신의 능력 부족을 절감할 때는 물론 어쩌다 비판의 도마에 올라 조정을 시끄럽게 하기만 해도 그게 부끄러워 스스로 물러나길 고집했다고 한다. 조선 선비의 전형이라 할 퇴계 이황도 일흔아홉 차례나 임금에게 사직을 청했다지 않는가. 온갖 허물을 부여안고도 창피한 줄 모르고 자리만 탐하는 요즘 세태와 어찌 이리 다른가. 그야말로 사직상소가 그리운 세상이다. 천산지산할 것 없다. 다시 대통령이다. 곡재아(曲在我), 잘못은 내게 있다는 그런 자성의 마음 한 조각만 살아 있어도 인사가 이토록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권 4년차, 시간은 누구 편인가. 이제 인사로 승부해야 한다. 인사로 통합해야 한다. 나의 붓 대롱으로 보는 허공이 하늘의 전부가 아니다. 경청의 리더십을 발휘하라. 낙점의 유혹을 떨쳐 버려라. ‘나쁜’ 인사 하나 때문에 어렵사리 쌓아올린 공적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새 감사원장 인사에서는 정말 일신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제발 그 지긋지긋한 인사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기 바란다. 아직도 국민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jmkim@seoul.co.kr
  • 13년간 143번 사랑의 헌혈

    “혼자 살다 보니 건강 관리 해 줄 사람이 없어 건강 체크를 할 겸 헌혈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13년이 넘었어요.” 10일 광진구 중곡 1동 다세대주택 옥탑방에 사는 권영훈(63)씨가 사랑의 헌혈증 100장을 중곡 1동 주민센터에 기증하며 이같이 말했다. 몇 년 전 딸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30여장을 내놓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로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점을 잘 알기에 옮긴 작은 실천이었다. 그는 “1년간 베트남에 있을 때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돌아보게 됐고,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이 있듯이 헌혈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불어넣는 봉사라는 생각에 헌혈증을 기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헌혈을 143차례 하려면 한달에 한번꼴로 꾸준히 해야 하는 까닭에 이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다. 권씨는 “건강한 사람만 누리는 특권인 헌혈을 일흔살까지 하는 게 꿈”이라고 덧붙였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영구와 땡칠이’ 남기남 감독을 아시남?

    ‘영구와 땡칠이’ 남기남 감독을 아시남?

     “내 나이 이제 일흔이란 말이지. 하지만 앞으로도 1년에 한편씩은 꼭 애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 거야. 그렇게 하기로 아이들과 약속을 했거든.”  올해로 영화 데뷔 50년이 된 노장 감독의 다짐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성인영화 시나리오다. ‘에로 폭풍으로 전국이 술렁인다’는 카피가 인상적이다. 곧 촬영에 들어갈 차기작이다. 일단 제목은 ‘달무리’로 잡았다. 하지만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면 이 영화 끝내고 나서 어린이 영화 제작에 서둘러 착수해야 할 판이다.  영화감독 50년 동안 100편 이상 만든 감독. ‘저질 감독’이라는 비판 속에 변변한 상 하나 타보지 못한 사람. ‘빨리찍기의 달인’이라는 말이 그에 대한 칭찬의 전부. 그러면서 또 새로운 작품을 하겠다는 열정의 사나이. 감독 ‘남기남’이다.  전설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남기남(69) 감독을 만나 ‘50년 인생 필름’을 되감아봤다.  ● “영구와 땡칠이 인기가 대단했지”  1980년대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얻은 영구가 영화로 만들어질 때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 남 감독이다. 방학 시즌을 공략해 ‘영구와 땡칠이’ ‘영구 람보’ 등을 만들어냈다.  “그때 대단했어. 아이들이 아주 난리였지. 통로에도 두 명씩 끼어앉고, 스크린 바로 앞에도 방석을 깔아놔서 스크린을 목을 쭉~ 빼고 봐야했으니까. 관객이 얼마나 들었냐고? 그건 딱잘라 말할 수 없지. 시민회관 같은 데서 틀면 그냥 현찰받고 막 들여보내고 그랬으니까. 망해가던 영화관 주인들이 다 떼부자가 됐대.”  영구 캐릭터의 원조는 최근 영화 ‘라스트 갓파더’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심형래 감독. 남 감독은 대뜸 심 감독 얘기를 꺼냈다. 다행스러운 한편으로 염려스럽기도 하다고 했다.  “감독으로 명성을 쌓고 있으니까 이젠 돈 관리를 잘 해야 하는데 말야…. 영화 흥행에도 경영이 중요한데…. 잘 간수해서 돈을 벌었으면 좋겠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걱정스러워.”  히트작 제조기로 한때 돈방석에 앉았다가 70억원 빚더미에 올랐던 경험 때문일까.  ● 빨리찍기의 달인  남 감독의 실패를 말하기에 앞서 그의 성공을 알아야 한다. 결국 성공이 실패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빨리찍기’다. 초창기부터 그는 비슷한 작품들을 계속 만들면서 흥행을 이어갔다. 한 작품으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빠르게 다음 작품을 만들면서, 즉 다작을 통해 흥행을 노렸다. 영화가 가벼워질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흐름보다 볼거리에 치중하게 됐다. 제작자들도 남 감독에 ‘좋은 작품’을 주기보단 빠르고 싸게 찍을 수 있는 작품을 계속 던졌다.  “왜 그렇게 영화를 빨리 찍게 됐나요?” 그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조감독 생활을 10년이나 했거든. 그러다보니 이 감독은 이렇게, 저 감독은 저렇게 찍는 걸 보고 자연스레 빨리 찍는 법을 연구하고 개발하게 된 거지. 그때만 해도 제작자들이 ‘돈 아끼면서 하라’고 엄청나게 감독들을 압박했거든.”  결국 그는 많은 감독들의 방법을 혼합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찍는 법을 배웠다. 쉽고 빠르고 싸게 찍는 방법이다. 결국 ‘저예산 영화’에 특화된 감독이 됐다.  ● ‘저질 감독’ 꼬리표  그래서 그에게 늘 붙는 꼬리표가 ‘저질감독’이다. 한정된 예산과 짧은 기간에 찍다보니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질이란 말에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그런 건 없어. 관객이 스트레스 풀려고 극장에 왔으니 재미있는 영화로 대접해야지. 뭐 저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면 다 자기 혼자 만족하는 지루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영화가 고질이 어딨고 저질이 어딨어. 만드는 거 자체로 예술인 거지.”  ’저질’이란 비판이 있어도 흥행은 잘 됐다. 1970년대 ‘정무문’ 시리즈 등 홍콩식 무술 영화, 1980년대 ‘평양맨발’ 등 액션 영화에 이어 198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로 흥행가도를 달렸다. 1989년 영구와 땡칠이는 비공식 관객 270만명이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영구 시리즈를 이어가며 또 대박이 났다.  ● 한때 70억 빚더미  1990년대 초반까지는 남 감독의 스타일이 관객에 적당히 통했다. 하지만 그게 마냥 계속될 수는 없었다. 빠르게 높아지는 관객들의 눈높이와 갈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1994년부터 손수 제작도 했다. 성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96년 ‘천년환생’에 30억원을 쏟아부었다. 1998년 ‘월하의 공동묘지’란 이름으로 극장 개봉한 귀신영화다.  하지만 남 감독은 저예산의 유혹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형광봉으로 광선검을 대체했고 셀로판 테이프로 컴퓨터그래픽을 대신했다. ‘타이타닉’ 등 이미 방대한 스케일의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의 수준을 감당하지 못했다. 철저히 외면당했다.  “원래 배우는 감독을 하고 싶고, 감독은 제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꿈만 갖고 하다보니 사업하는 법은 몰랐던 거야. 천년환생 실패하면서 집을 날려먹었지. 그냥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어. 예전에 도움주던 사람들도 다 세상 떠났고…. 근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은 가족과 영화가 남아 있더라고. 그래서 다시 일어섰지.”  남 감독은 실패를 딛고 꾸준히 영화를 만들었다. 2003년 개그맨들을 기용해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큘라’를 만들었고, 2005년엔 ‘바리바리 짱’을 개봉했다. 이후 몇 작품이 ‘엎어지기도’ 했지만 이달 6일부터는 개그맨 박준형·정종철의 ‘동자대소동’도 스크린에 걸었다. 지금 상황이 썩 좋지는 않다. 시사회는 커녕 언론홍보 자료도 만들지 못했다. 서울에서도 피카디리(롯데시네마)와 대한극장 단 두 곳에만 걸렸다. 그나마 하루 1~3회 상영이 고작이다.  하지만 ‘오뚝이 남기남’이다. 또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다. 운영비가 없어 사무실은 접었지만, 충무로 다방 등지에서 일명 ‘남기남 사단’을 다시 모았다. 90세 분장사·60대 원로배우·50대 감독·20대 코디네이터 등 면면도 다양하다. 남 감독은 “마지막 남은 현역”이라며 작품활동을 계속 할 것을 다짐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남기남의 “레디 고!”는 끝나지 않았다. ▲ 남기남 감독은  1942년 전라도 광주 출생  1972년 ‘내딸아 울지마라’로 감독 데뷔  1989년 ‘영구와 땡칠이’ 흥행(200만~270만 추정)  1998년 ‘천년환생(월하의 공동묘지)’ 개봉  2009년 영화의날 공로영화인상 수상  2011년 ‘동자대소동’ 개봉   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 아이는 5개월짜리. 5개월 전에 아저씨의 정액이 아내의 질을 파고들어 거센 산성반응에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수정란을 착상시켰다. 5개월 전이라면 아저씨와 내가 종로 3가 나이스 모텔 205호에서 새벽 내내 서로의 배꼽 속에 손을 넣었던 때다. 나와 만나기 전날이거나 혹은 다음날에 아저씨는 아내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고 기계적인 성교를 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아내는 궁색한 가짜 신음소리 내기에 바쁜 여자니까. 아저씨는 여자의 신음소리에 민감하다. 신음소리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에 편집증 환자처럼 집착한다. 그런 아저씨가 나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 하나. 나는 가짜 신음소리 따윈 내지 않는다. 오로지 진심. 나는 진짜에게만 연다. 그것이 성대든 밑구멍이든 간에. 오늘 만나. 삐리릭. 교실 한구석에서 체육복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곧장 가방을 싼다.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메고 나는 교실 밖으로 향한다. 교문을 빠져나오는 도중에 아저씨에게 한 번 더 문자가 온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적힌, 매우 절약적인 문자. 럭셔리 라운지 모텔 507호. 아홉 시. 아홉 시까지, 아홉 시간이나 남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바람이 불었다. 아저씨와 만나는 날은 어쩐지 모르게 세찬 바람이 분다. 한반도가 원래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나? 아저씨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그러게요. 치마 밑단이 바람에 너풀거렸다. 얘, 허벅지 다 보인다. 아저씨가 말했다. 알아요.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넌 참 미쳤구나. 그래서 이름이 미치인가 보구나. 아저씨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장례를 다 마친 식구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하나 둘씩 꺼내고 있었다. 넌 그새 또 어디 갔다 왔니. 그냥 잠깐. 나는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갈 셈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가 안 보였다. 엄마, 할머니는? 하고 물어보려던 찰나, 내 방 문 틈새로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였다. 굽은 등은 서서히 몸을 웅크리며 일정한 리듬에 맞춰 떨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아저씨를 만났다. 삼성동 명아장 모텔 313호. 시간은 오후 아홉 시. 나는 근처 화장실에서 교복 와이셔츠를 벗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바람이 찼다. 나는 여덟시 오십 오 분에 모텔에 도착했다. 내가 313호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아저씨가 다 벗은 몸으로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 아저씨가 인사했다. 방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쾌적한 향내가 풍겼다. 오히려 첫 번째 갔던 곳이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마음이 편했다. 옷을 못 벗겠어요. 내가 말했다. 아저씨는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벗겨냈다. 그리고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듯이 만져댔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냥 참았다. 나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몸을 열고 젖히고 오므리고 뒹굴었다. 두툼한 손가락처럼 두툼한 아저씨의 뱃살이 출렁거리며 내 피부에 닿았다. 남의 살을 맞대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아저씨의 거죽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았다. 물론 아저씨가 그렇게 뚱뚱하지는 않지만 그냥 남의 살결, 살 틈으로 새어나오는 냄새 같은 것이 어쩐지 두려웠다. 한 차례 사정이 끝나고 난 뒤에 아저씨는 모로 누워 담배를 피웠다. 그때까지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얘,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저씨가 슬쩍 내게 말을 건넸다. 미치. 미치예요. 아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미쳤다고 말을 했었지. 네에. 근데 전 미치진 않았어요. 그냥 미치일 뿐이에요. 음, 그래. 하지만 좀 특별한 이름이구나. 네에. 미카엘 같은 거랑 연관된 건 아니에요. 음, 그렇구나. 그렇다면 미치는 무슨 뜻이니? 미치는 그냥 미치인데요. 별 뜻은 없어요. 음, 그렇구나. 아저씨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대화를 끝내겠단 듯 자세를 고쳤다. 등 돌린 아저씨의 넓은 등짝이 우스워 보였다. 나는 아저씨의 담배를 빌려 등짝에 무어라 쓰고 싶었다. 등신이라고. 그때 아저씨 이름을 물어보면 좋았을 걸. 아직도 나는 아저씨 이름을 모른다. 장씨, 김씨, 윤씨, 최씨. 개중에 하나겠지. 여하튼 내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성씨일 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저씨의 두툼한 손가락과, 출렁이는 뱃살, 수염자국이 난 얼굴피부뿐이다. 정수리 근처가 조금 휑한 거나 금이빨로 된 어금니가 하나 있다는 것, 배꼽부터 무성한 털이 하반신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발이 아담한 것, 그리고 오른쪽 팔뚝에 개에 물린 자국 같은 게 있다는 것까지. 아저씨의 흉터는 곧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아저씨와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만났다. 만나는 장소는 서울 전역. 아저씨는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고심하여 장소를 물색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같은 동네, 같은 모텔을 반복해서 간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서울은 넓었다. 구석구석 늘어선 골목과 로터리가 답답할 정도로 복잡했다. 위로 세우고 벙커를 만들고, 한정된 공간의 쪽수를 넓히거나 한 칸짜리 공간을 좁히거나 하는 식으로 자꾸만 넓어져 가는 서울. 뚝딱뚝딱 완공이 끝나면 어디에선가 증축이 시작되고, 어딘가가 매끈해지면 다시 어딘가가 더럽혀졌다. 더럽혀진 부분을 메우는 동안 또 어딘가가 파괴되고 무너져 갔다. 할아버지는 폭설이 내리던 날,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병원으로 후송된 지 십 칠 분 만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가족들은 오래 살다 가셨으니 여한 없으시리라 판단, 호상이라 여기며 잔칫집처럼 장례를 치렀다. 여기저기서 웃고 떠들고 화투 패를 돌리고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불러대고. 삼일 중 이따금씩 곡소리가 들렸으나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하하호호 웃다가 누군가 곡소릴 내면 얼마간 따라 울어주고, 딸꾹질 멈추듯 뚝 그치면 다시 하하호호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내가 밖으로 빠져나와 교복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순간, 아버지가 홀연히 담배를 물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는 별은 참 폼이 안 나. 아빠는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조심스레 한 모금씩 마셨다. 아빠의 왼손에 달린 담배가 빨간 불씨를 태우며 양복바지를 위협했다. 그거 탈 거 같은데. 내가 말했지만 아빠는 듣지 못했다. 염병할 양반. 보도블록에서 고꾸라지기는. 아빠는 색색의 벽돌이 지그재그로 놓인 보도블록을 얼마간 쳐다보다가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퉤. 아직 녹지 않은 눈에 가닿은 가래침은 희부연 노란빛을 풍겼다. 아빠는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와 함께 종이컵을 집어 던졌다. 소주가 바닥을 치고 튀었다. 아빠는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다시 식장 안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저씨에게 문자를 넣었다. 아저씨 뭐해요. 그러나 답장은 오질 않았다. 실은 한 번도 먼저 연락해 본적이 없었다. 뭐하냐고. 역시 묵묵부답. 차라리 보내지 말 걸, 두 번씩이나 씹혔다. 쪽팔리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도착했다. 미친이구나. 오늘 만날까? 미친이라니, 내가 분명 미치지 않았다고 했을 텐데. 미친 아저씨. 나는 눈에 젖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곧장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성이는 동안 아빠는 병원 건물 귀퉁이 어딘가에서 토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대충 토하는 것을 마치고는 보도블록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얼굴 표면이 토사물 범벅이었다. 아빠의 긴 속눈썹에 연주황색으로 변한 실파가 붙어 있었다. 더럽게시리. 나는 다시 대로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나는 얼마간 더 병원 앞에 서 있어야 했다. 한쪽 손을 기계처럼 흔들면서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 말대로 별 몇 개가 우스운 크기로 떠 있었다. 저게 무슨 별이야. 그러는 사이에 택시가 잡혔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어오는 택시 아저씨에게 별 보러요, 라고 말할 뻔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삼일 내내 나는 아저씨를 만났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곤 섹스가 전부였고, 섹스가 끝나고 치르는 비릿하고 울적한 냄새들을 소멸시키는 일에 신경 쓰느라 내 가방 속에 구겨져 있을 교복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손가락으로 시트자락을 빙글빙글 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어떻게 대꾸를 해야 될까 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저씨에게서 아내 얘기를 그만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다. 왜 애를 가졌어요? 내가 아저씨 배꼽에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아저씨는 간지러웠는지 실실 웃으며 좌우로 몸을 배배 꼬았다. 내가 가진 건 아니고 아내가 가진 거지. 아저씨는 말했다. 그렇지만 아저씨 꺼가 필요하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만 뭐 그거랑 그거랑 같은 일로 봐서는 좀 그렇지. 그거랑 그거랑 원래 같은 거 아니에요? 그걸 해야지 그걸 할 수 있잖아요. 에이, 하지만 언제나 그걸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니잖아. 아아, 하긴. 우리도 그거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닌 것처럼요? 으응, 그래 맞아. 골치가 아픈 일이지, 그거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그거를 사용했고, 나중에 가서는 굳이 그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까지 그거 타령을 했다. 그러다가 대화의 종반부에서는 그거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디에서부터 그거를 그거로 불렀는지, 그거가 그거가 아닌 다른 그거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대화를 마치고 다시 등을 돌려 누웠을 때, 아저씨의 등과 내 등이 맞닿았다. 나는 차갑고 아저씨는 뜨겁다. 섹스를 하고 나면 아저씨가 차가워지고 내가 뜨거워진다. 척추를 나란히 두고 우리는 열과 냉을 반복적으로 옮겼다. 열탕과 냉탕을 번갈아 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도 참 후졌다. 내가 말했다. 아저씨의 등줄기가 움찔했다. 글쎄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아내가 만든 거라니까. 아저씨가 발로 내 종아리를 간질였다. 굳은살이며 티눈이 박인 피부 표면이 까끌까끌했다. 어떻게 하면 애를 낳을 생각을 해요? 너무 구려. 너무 너무 구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어떤 시대기는, 잘 먹고 잘사는 시대지. 너무 구려. 태어나는 일 자체가 구린 시대예요, 지금 이 시대는. 미치. 너는 너무 어린데, 너무 많은 걸 봤어. 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잖아요. 씨발. 나는 울먹였다. 아저씨가 발로 장난치는 것을 멈추었다. 다시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 애 낳으면 나 꼭 보게 해줘요. 음, 그래. 그럴 수 있다면 뭐, 그렇게 해보지. 아저씨는 말을 이으며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디가요? 똥 누러. 아저씬 왜 만날 그렇게 똥을 싸요? 모르겠어. 난 너만 보면 똥이 마려워. 아내 앞에서는요? 집이건 회사건 똥 싸는 일이 고역인데, 난 너만 보면 똥구멍이 빠져버릴 거 같아. 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똥을 싸고 싶어 재빠르게 화장실로 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만 보면 똥이 마렵다는 아저씨. 나는 또 한번 아저씨에 관한 흉터를 진하게 새겼다. 똥냄새를 풍기며 침대로 돌아온 아저씨와 뒹굴다가 말고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여든 여덟의 할아버지와 함께 육십 년을 살아온 할머니. 할머니는 일흔 일곱. 열한 살 연상의 남편을 마주 대하며 겪었을 무수한 고통을 유순한 고집과 무지한 강직함으로 이겨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삼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평생 동안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며 지냈던 고향을 저버린 것은 할머니의 류머티즘 관절염이 심해진 탓이었다. 밭을 안 일구면 되지 않냐, 그냥 일 안 하고 시골에 계속 계시면 안 되냐, 하고 심술을 툴툴 부린 내게 엄마는 꿀밤을 먹였다. 네가 시골에 가서 한 번도 살아보질 못해 이러는구나. 시골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일이다.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야. 등불이 없는 동굴 같은 곳이라고. 그렇지만 친하지도 않은 어른들과 함께 부대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 마. 따로 모실 거니까. 따로 사는 데엔 나보다 엄마 몫이 더 컸다. 아빠는 미적지근하게 그러지 뭐, 하며 우리 집 근처에 값이 싼 아파트를 골라 전세계약을 했다. 십육 평형 아파트는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군데군데 갈라진 틈새며 월마다 꼬박꼬박 작동 점검을 하는 엘리베이터가 기괴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 때문에라도 할머니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가끔 식용유나 세제 같은 걸 사들고 가는 아빠에게 거기 귀신 나올 것처럼 음산해, 라고 말하면 아빠는 내 콧잔등을 쿡 치면서 노인네들 잠자리 뒤숭숭하게 함부로 말 놀리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깟 귀신, 어차피 동년배들 아니겠어?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 집 전세계약이 얼마 안 있어 끝날 참이었다. 재계약 여부에 대해 곰곰이 따지고 있던 엄마는 되레 계약기간 전에 죽어버린 할아버지를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짐들이 가득 들어찬 다용도실을 대충 비워내고 할머니가 덮을 이불을 마련했다. 할머니는 풀지 않은 짐짝처럼 더욱 몸을 웅크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때때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내가 비릿한 정액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들어오면 건넌방에 있던 할머니가 빠끔히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봤다. 내가 왜요? 라는 기색으로 노려보면 이내 주춤거리는가 싶게 눈을 피하다가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다시금 내 쪽을 살폈다. 내가 한 번 더 뭘 봐요? 라는 표정으로 찌릿, 눈빛을 쏴주면 그제야 다 알겠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방문을 닫았다. 기분 나빠. 내가 닫힌 방문 틈새로 들릴 만큼 크게 말했다. 그럼 방문 너머로 할머니가 쪼그라든 풍선처럼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별 몇 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옹졸하게 쪼그라든 것이 언젠가는 점점 작게, 그보다 더 작게, 그래서 결코 보이지 않을 것처럼 아득해질 것만 같았던 별들. 마치 할머니의 쪼그라든 유방처럼. 너네 엄마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안방에서 언성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질구질한 부부싸움이 또 시작됐다. 카악, 퉤. 아빠의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어디서 뱉어 진짜? 엄마가 이전보다 한 톤 높게 소릴 질렀다. 카악, 퉤. 카악, 퉤. 의식적으로 가래를 뱉다가 사래 걸린 아빠가 연신 밭은기침을 토했다. 조금 과장이다 싶게. 나는 방밖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침대에 누웠다. 모텔과는 다른 차원의 이불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말고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엄마 아빠는 아무래도 버려진 짐짝처럼 놓인 할머니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미친 엄마 아빠. 나는 방문을 열고 건넌방에 있는 할머니를 살핀다. 방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다. 아마도 할머니가 직접 살짝 문을 열어 놓았을 터. 문과 문턱이 아귀가 딱 맞게 붙어 있지 않고 약간 틈을 벌리고 있다. 그 미세한 틈처럼 할머니는 숨을 쉬고 있는지 몰랐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끝없이 유입되는 물세례에 허덕이듯이. 할머니 서럽겠다. 짝이 없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어. 네 아저씨는요? 아저씨의 귓불을 빨면서 내가 물었다. 그건 여자에게만 국한된 일이야. 남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아예 머릿속에 그런 게 없어. 이 사람 없으면 죽겠다 싶은 그런 게. 결혼 왜 했어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뜸을 들였다. 글쎄, 돈을 모아야 하니까. 그리고 어쨌든 옆에 사람이 있어야 좋지 않겠어? 남자란 게 그래. 챙겨주고 입혀줄 사람이 꼭 필요하지. 좆나 후졌네, 남자들이란.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가 깔깔 웃었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분이 나빴다. 미친 아저씨. 뭐 이런 게 다 있지? 덜 말린 해초처럼 무성한 아저씨의 풀숲을 헤치다 말고 나는 입을 뗐다. 입술에 빳빳한 음모가 달라붙었다. 에이, 좀더 해주지 그래. 아저씨가 눈을 감은 채 말했지만 나는 그냥 일어났다. 반투명한 유리 칸막이로 된 화장실로 들어가 온몸을 빡빡 문질러대며 샤워를 했다. 아저씨가 따라 들어왔다. 에이, 미치. 섭섭하게 왜 그래. 아저씨가 내 팔뚝에 묻은 거품을 닦으면서 품에 안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샤워기를 아저씨 방향으로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아저씨 살갗에 닿았다. 앗 뜨거워.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안 할래요, 피곤해요. 저리 가요. 이제 만지지 마요. 아저씨는 몸에 묻은 물기를 털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내가 샤워를 마치자 아저씨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미치. 앞으로 삼주 정도 못 봐. 나는 왜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말았다. 아내랑 여행을 갈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애 낳기 전에 좀 돌아다녀야 될 것 같아서. 애가 나오면 피곤해지잖아. 나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매만지며 물기를 닦았다. 외국을 다녀올까 해. 연차랑 휴가 당겨쓰니까 삼주 정도 여유가 생기더군. 나는 대충 로션을 찍어 바르고 옷을 챙겨 입었다. 가방 속에 든 교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아내가 더블린에 가고 싶다네. 난 애초에 더블린이 어디 박혀 있는 덴지도 몰랐다니까. 그냥 동남아 일대나 둘러보고 올 것이지, 무슨. 대충 스타킹까지 신었다. 주머니를 쑤셔 담배를 찾았다. 아저씨가 담배를 건넸지만 무시했다. 삼주 뒤엔 웃으며 보자.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명랑해서야. …… …… 삼주 동안 똥 못 싸서 어떡해요? 그러게. 그걸 생각 못 했네. 아저씨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픽 웃었더니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들어 침대 중앙으로 눕혔다.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내가 말해도 묵묵부답. 아저씨가 좋아하는 보라색 원피스가 내 몸에서 멀어졌다, 부득이하게. 아저씨는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내 몸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그때 처음으로, 진짜 신음소리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엉덩이에 푸른 멍이 흉터처럼 들어 있었다. 언제고 지워질 것이 빤한 흉터가. * 아저씨는 정말 삼주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학교엘 갔다. 책상에 엎드려 잘까 하다가 그냥 수업을 들었다. 의자에 등을 펴고 앉아 있었지만 역시 좀이 쑤셨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종이 쳤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애들이 자리로 가 책상을 정돈했다. 아직 선생이 오질 않았다. 틈을 타 가방을 몰래 들고 빠져 나왔다. 이제 어디든 갈 곳을 찾아야 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쎄미였다. 나도 데려가. 미친년. 귀찮게시리. 우리는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어디 갈 건데? 몰라. 뭐야, 시시하게. 그럼 나 따라와. 그러든지. 우리는 번화가 로터리에서 내렸다. 쎄미는 지하철역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역사 안 물품보관함에서 옷을 꺼냈다. 초록색 미니 원피스였다. 넌 갈아입을 거 없어? 나는 가방 안에 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꺼내 보였다. 우리는 쌍방울자매처럼 원피스를 맞춰 입었다. 쎄미가 아이라이너와 립스틱을 주었다. 나는 어설프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발랐다. 우리는 피시방으로 갔다. 모니터 한 대를 앞에 두고 나는 쎄미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다가 졸았다. 얼마 안 있어 쎄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나가자. 시계를 보니 일곱 시였다. 번화가 로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온갖 조명 세례에 비둘기들은 나뭇가지 위로 종적을 감췄다. 보도블록은 연이어 뱉은 껌들과 담배꽁초로 넘쳐났다. 쎄미는 로터리 변방에 있는 건물로 나를 인도했다. 색이 누런 간판에 조명도 시원찮은 것이 딱 학생들이 숨어 술 마시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짜리몽땅한 할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쎄미가 샐쭉이 웃어 보이며 익숙하게 소주 두 병과 부대찌개를 시켰다. 할머니는 그제야 태연히 일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 안에 있던 담배를 올려놓고 주변을 살폈다. 태반이 고등학생들처럼 보였다. 잘 하지도 못 하는 술을 마시며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쎄미는 재떨이를 제 앞에 가져다 놓고 그새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나도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이려는데 어디선가 쎄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쎄미, 오랜만이다. 쎄미가 남자애 둘에게 알은 체를 하며 나를 쳐다봤다. 옳다구나, 같이 놀자는 소리로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가 큰 자식이 쎄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뒤이어 눈썹이 숯덩이처럼 진한 남자애가 내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새 할머니가 전골냄비가 올라간 부르스타를 들고 와서는 퉁명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쎄미와 그 옆에 앉은 꺽다리가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취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수저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숯덩이 눈썹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자박한 국물에 퐁당퐁당 빠져 있는 햄 조각과 두부, 콩나물과 양파. 찌개는 어쩐지 팔팔 끓여도 맛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앞에 두 사람이 기어이 취한 척을 하며 서로 부둥켜안을 때쯤 나는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맛보았다. 그랬더니 옆의 숯덩이도 냄비에 제 수저를 꽂았다. 나는 맥주에 콜라와 소주를 조금씩 섞어 숯덩이에게 주었다. 숯덩이가 고마워하며 답례로 자신도 타주겠다고 했다. 각자 서로가 타준 폭탄주를 마셨다. 어쩐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쎄미와 꺽다리는 팔짱은 물론 어깨동무며 심지어는 서로에게 입술까지 드밀며 야단이었다. 소주를 일곱 병쯤 마셨던가. 그 와중에도 쎄미가 자리를 뜰까봐 손을 꼭 부여잡으면서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꺽다리가 숯덩이에게 눈질을 보냈다. 무언의 암시 같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거행된 약속이 있었던 듯싶다. 쎄미는 비에 젖은 이불처럼 꺽다리의 팔뚝에 안긴 채 실려 나갔다. 이윽고 숯덩이와 나만 남았다. 숯덩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거렸다. 우리도 일어나지 뭐. 벌써 가게? 그럼 더 있으려고? 시간 별로 없어. 밤은 못 새. 숯덩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유치한 반응. 어디로 갈 건지는 정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숯덩이. 아, 이래서 어린애들은 귀찮다. 다 정한 거 알고 있거든. 모텔로 갈 거 아니야? 일 치르곤 만나 해장할 거 아니었어? …… 그리곤 쎄미랑 나랑 누구 가슴이 더 컸는지 낄낄거리겠지, 뭐. 안 봐도 빤해. …… 빨리 계산하고 나와. 너구리굴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을 헤집고 나와 건물 앞에서 숯덩이를 기다렸다. 숯덩이는 쭈뼛거리며 나왔지만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았다. 앞장 서. 내가 말했다. 그래도 돼? 어, 원래 이러려고 했잖아. 내가 인상을 쓰자 숯덩이가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손은 잡지 마. 숯덩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말자. 숯덩이가 말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영화관에 들어갔다. 심야시간대에 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가 잠시 졸았다. 조는 내내 숯덩이가 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박력 없기는.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숯덩이가 팝콘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쯤에 나는 숯덩이의 팔목을 거세게 붙잡고는 그를 이끌었다. 어디 가려고? 심심한데 그냥 DVD방이나 가든지. 우리는 영화관에서 가장 가까운 DVD방으로 들어섰다. 프런트에서 계산을 하는 숯덩이 몰래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숯덩이와 몸을 섞고 난 뒤에도 아저씨에게선 답문이 없었다. 정말이지 짜증나. 나는 검은 소파에 누워 말했다. 숯덩이가 휴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곤 내 쪽을 쳐다보며 눈을 흘긋거렸다. 화면에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게 비쳤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러닝타임이 긴 시리즈물을 선택한 것이 후회가 됐다. 숯덩이가 슬금슬금 내 옆에 드러누웠다. 너 이만 가봐. 싫은데. 그럼 걍 닥치고 가만히 있든지. 어차피 나도 뺑이 치는 거야. 오전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되거든. 학교는 안 다니니? 너야말로 학교 다니는 년이 이러고 다니냐? 등신. 너만큼 구린 애 아니거든, 나. 웃기고 있네. 됐다. 그만 말해, 입만 아파. 딱 봐도 사이즈 나와. 나는 뭐 누나들이랑 안 놀아본 줄 아냐. 뭐라고? 나는 울컥 화가 났다. 나는 대충 윗옷을 걸쳐 입고 DVD방을 나왔다. 숯덩이는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거리는 아직 깜깜했다. 추위 탓인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드문드문 건물 앞 계단에 누워 토사물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거리는 한적했다. 나는 터벅터벅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은 아직 운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려진 셔터에 기대고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어쩐지 발가벗은 느낌이 들었다. 숯덩이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주던 아저씨의 손길을 느낀 것일까. 내 몸에 남겨진 아저씨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쪽팔리게, 정말 후지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아저씨를 만난 건 레코드 가게에서였다. 아담했지만 역사가 오래된 레코드 가게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다. 섹션별로 잘 나눠진 음반들은 가게 주인의 손을 거쳐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새로운 주인에게로 입양됐다. 주인은 내가 오면 리패키지 앨범이나 베스트 앨범, 내가 모르는 희귀 앨범을 꺼내 들려주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존 레넌의 사망주기 30년을 맞아 아저씨는 비틀스의 앨범을 사러 왔다고 했다. 주인은 LP로 된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을 꺼내주었다. 아저씨는 보물 다루듯 LP를 매만졌다. 그거 복사본 같은데. 내가 다가가 이 말을 전하기 전까지는. 아저씨는 내 쪽을 살피며 무슨 상관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제가 아는데요. 20년 전에 들어온 건 정식판 거의 없어요. 다 해적판이지. 그리고 진퉁이라 쳐도 몇 억 넘을 걸요? 그냥 작년에 나온 리마스터 앨범 사세요. 저 같으면 그거 안 사요.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LP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아저씨는 앨범을 구경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봐, 진퉁. 같이 나가지? 그리고 우리는 곧장 모텔로 향했다. 미치.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니? 비틀스 노래 제목이잖아요. 후추상사의 밴드. 물론 한국에 그 제목을 딴 인디밴드가 있단 건 알아요. 아니.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가 낸 책이 있어. 그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비틀스의 노래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 속에 든 여자주인공 이름도 역시 비틀스의 노래에서 따온 거야. 루시나 리타 같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이 밴드가 남아프리카 출신들이란 거야. 그래서 번역본을 구하긴 힘들어. 그 튼실한 내용의 책은 읽은 사람들마다 모두 엄지를 치켜든다고 해. 더 신기한 건 뭔 줄 아니? 소속된 밴드 팀원이 단 한 명이란 거야. 뭐야. 나머지는 다 세션이에요? 그 밴드는 공연 안 해요? 응. 그 밴드는 단 한 번도 공연을 한 적이 없어. 그 밴드의 업적이라곤 책 낸 게 끝이야. 그게 뭐가 밴드예요. 그냥 작가지. 그러게. 하지만 그 사람이 우기면 밴드겠지. 마치 네 이름이 미치가 아닌데도, 네가 줄곧 미치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야. * 아침 7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몰래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어쩐지 고요했다. 방문을 열고 둘러보니 집엔 아무도 없었다. 꺼놨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미친년. 집에 들어오기만 해.], [네 방에 있는 CD 다 갖다 버리기로 결단 내렸다.], [평생 네 멋대로 하다가 죽어. 여한 없이 그렇게 살아라. 부럽다.], [엄마아빠 오늘 등산 가니까 네가 할머니 밥 좀 챙겨드려. 것까지 안 하면 넌 정말 죽는다.] 나는 할머니 방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미역처럼 장롱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기척도 못 느끼셨는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큰 소리로 두어 차례 할머니를 부르자 그제야 어깨를 움찔하는 할머니. 저 왔어요. 밥 드셔야죠. 할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차. 원피스를 교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걸 깜빡했다. 생각해 보니 허접한 실력으로 그린 아이라인도 엄청 번져 있을 것이었다. 밥 챙겨드릴게요. 좀만 기다리세요, 하고 방문을 닫으려는데 할머니가 허공에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오라는 눈치인가 싶어 나는 대충 눈 밑에 번진 아이라인을 손으로 닦고 할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할머니의 주름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내 어깨보다 한 뼘은 더 작아 보이는 할머니의 어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사람의 피부라기엔 어색할 정도로 꺼끌꺼끌했다. 뭐 해드릴까요? 정적을 깨고자 몇 차례 여쭈어도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몇 달 전 백내장 수술을 한 할머니의 눈동자는 부옇게 흐려 보였다. 나는 질문하는 걸 포기했다. 할머니는 다시 장롱에 머리를 기대었다. 할머니는 조만간 부서질 박제나비 같았다. 할머니의 눈가와 손, 입술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각보다 더 깊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도 이렇게 주름이 많으셨나. 이곳에 와 있는 것이 가뭄처럼 답답하고 숨 가쁠 할머니. 할머니는 아침마다 이렇게 장롱에 머릴 기대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살아 있긴 한 걸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지고 있는 것일까. 희정아.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지내야 된다. 단디 몸 챙기고. 매사 조심하고. 매사 감사하고. 알제. 어쩐 일인지 눈꺼풀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대체 왜 우는 걸까? 이해가 안 됐으나 눈물은 더 솟구쳤다. 접을 수 있다면 잠깐 시간을 접어놓고 싶다. 정말 구리고 후지다. 나는 집전화기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아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한다. 아저씨의 아내가 받는다면 나는 다 폭로할 것이다. 아저씨와 나는 비틀스를 공유한 사이라고요.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세요? 남아프리카에 있는 원맨밴드를 아시냐고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임신은 왜 해요? 그렇게 안정적인 게 좋으면 차라리 소파랑 결혼을 하셨어야지. 아저씨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요. 신호가 계속 가는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받는다면 이제 아저씨와는 정말 끝이라고 말해야지. 아저씨의 똥배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라고. 아저씨도 똑같아. 부인 앞에선 똥도 못 눈다면서 여행은 왜 같이 가요? 왜 나한텐 아저씨 이름도 안 알려줘요? 치사하게 산다. 치사 빤쓰다, 정말…… 그리고 달칵.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네, 한창길입니다. 아저씨 목소리다. 한창길이라는 이름은 어색하지만 이건 분명 아저씨의 목소리다. 내가 수없이 핥았던 목에서 나는 그 소리 맞다. 허나 나는 한창길이란 이름을 모른다. 그런 이름일랑 들어본 적도 없다. 말씀하세요, 누구시죠? 그러니까. 저는. 저는요, 아저씨. 저예요, 미치……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마 얼마 안 있어 아저씨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내게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뿔싸.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잠을 자는 동안 모든 걸 지워야지. 아저씨의 배꼽이 따뜻했다는 것 정도만 남겨두고. 다른 건 다 열여덟이라는 전투의 군사기밀이라 생각하고 블랙박스에 가두어 사장시켜야지. 나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집전화가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짜증나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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