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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률조문서 漢字 사라진다

    현행 1000여개 법률조문에서 한자가 사라질 전망이다. 법제처는 현행 법률조문을 전면 한글화하기로 하고 이를 뒷받침할 특별법을 제정해 한글날인 오는 10월9일부터 시행하는 것을 추진중이라고 4일 밝혔다. 앞서 법제처는 최근 42개 중앙부처 법무관 연석회의를 열어 한글과 한자표기를 혼용하고 있는 현행 1029개 법률(4월말 현재)의 조문을 일괄적으로 한글표기로 바꾸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법제처는 ‘법률 한글화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안’을 마련,법률가·국어학자 등 민간위원 8명으로 구성된 법률한글화추진위원회 심의를 거쳐 6월 임시국회에 상정,한글날인 10월9일 공포하는 것을 목표로 입법을 추진키로 했다. 법제처는 그러나 법률 조문 가운데 뜻의 전달에 혼란이 우려되는 용어는 괄호안에 한자 또는 원어를 함께 표기하기로 했으며,일제 잔재언어나 뜻이 어려운 한자말을 순우리말로 고치는 방안은 중장기 과제로 추진키로 했다. 또 민법,형법,상법,형사소송법,어음법,수표법,사회보호법 등 법무부 소관 7개 법은 다른 법률의근간이 되는 점을 고려,중장기적으로 신중하게 한글표기를 추진키로 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Korea 아닌 Corea 찾기’ 학계·시민단체도 가세

    ‘Corea’ 되찾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영문 국호인 ‘Korea’를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Corea’로 바꾸자는 것이다. 지난해 월드컵 때 일부 네티즌과 붉은악마가 표기 변경을 강력 주장했다.최근에는 학계와 시민사회단체까지 가세하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가 25일 서울 중구 을지로 국가인권위 사무실에서 가진 학술연구특별위원회 창립기념 토론회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서굉일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영문국호 Corea-Korea 문제의 현 단계 연구 내용과 과제’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하멜표류기,각종 외교통상조약에 쓰인 국호 등 12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역사적 자료와 주변정황을 볼 때 우리나라 국호는 ‘Corea’였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통감부가 설치된 1906년부터 총독부 관보를 비롯한 모든 문서에 ‘Korea’로 변경됐다.”면서 “이는 일본 국호인 ‘Japan’보다 알파벳 순서를 뒤로 미루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에따른 것으로,영문 국호를 바로잡아 식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밝혔다. 신중론도 제기됐다.홍익대 역사교육과 김태식 교수는 “19세기에는 ‘C’와 ‘K’를 혼용한 흔적이 있는 만큼 일제가 고의적으로 바꿨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최근 영문 국호표기 변경운동은 대일 감정문제에 근거하는 것 같다.”고 피력했다. 구혜영기자 koohy@
  • 검찰 개혁 배경.내용/기소독점=정치검찰 고리끊기

    기소독점주의(起訴獨占主義·Anklagemonopol)란 범죄 혐의에 대해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검사만이 갖는 주의다. 우리 검찰은 기소독점주의와 함께 범죄행위가 드러나도 기소여부는 검찰의임의 권한이라는 기소편의주의(起訴便宜主義)도 채택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일부 법학계에서는 검찰의 기소독점주의와 기소편의주의가 일제 치하에서의 잔재로 이어지면서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됨으로써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이 때문에 정치권은 임면권을 앞세워 검찰권을 틀어쥐려는 무리수를 계속해 왔다고 비판한다.정치적 사건에서 검찰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은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특별검사,부패방지위원회,경찰 등에도 나누도록 하는 한편 재정신청권 확대 등을 주장해 왔다.기소독점권을 분할하려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만 고치면 된다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설명이다. 현행 우리 제도에서도 광의의 기소권 분할은 있다는 것이다.즉 교통범칙금과 같은 경범죄에 대한 사법적 기소권은 지금도 경찰이 행사하고 있다.외국의 경우 프랑스가 기소독점주의를 이미 폐기했고 미국 등 일부 선진국에서도 기소권 일부를 경찰 등이 행사한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노무현 당선자측이 검찰개혁 방안중 하나로 검찰의 기소독점권의 분할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정치권이 아무리 검찰수사 불개입을 선언하고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실시하더라도 검찰의 권한을 일정부분 분산,견제와 균형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진정한 검찰독립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그러나 기소권 문제는 “제2,제3의 검찰을 만들겠다는 것이냐.”는 우려를 낳을 수도 있는 만큼 검찰의 이해와 국민적 합의가 전제조건이 되어 신중하게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성대 권해수(權海秀) 교수는 “특검제를 상설화하는 한편 기소독점·기소편의주의를 폐지하고 기소법정주의를 도입,검찰권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김석연(金石淵) 변호사는 “인적 쇄신보다 시급한것이 기소독점 조항을 개혁하고 다른 기관도 기소에 관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검찰.경찰 반응 검찰과 경찰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논의중인 각종 사법 개혁방안에 대해큰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특히 검찰은 인수위안이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근간을 바꾸는 것인 만큼 충분한 논의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선 검찰은 경찰의 수사권 독립부터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경찰의 수사권이 독립돼 사건을 자체 종결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부패를 낳을 수 있다고보고 있다. 특히 경찰이 수사권 독립을 주장하는 폭력·도로교통법 등 경미한 사건은 전체 사건의 60%를 차지한다는 것이 검찰의 지적이다.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자체 종결한 사건은 누가 감시하고 통제하겠느냐는 것이다. 또 ‘영장청구권’은 헌법이 규정한 검사의 고유 권한인 만큼 경찰에 영장청구권을 주기 위해서는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기소권 분산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경찰도 수사권 독립이나 영장청구 권한만을 요구했을 뿐 기소권에 대해서는 주장한 바 없다는 것이다.부패방지위원회도 조사권만을 요구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검찰은 기소권한을 분산하는 것은 형사소송법의 틀을 뒤흔드는 것일 뿐 아니라 제2,제3의 검찰을 만들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검찰을 개혁하겠다면서 제2,제3의 검찰을 양산하겠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한편 경찰은 현행 수사체계에서 검찰이 수사 주체이고 경찰이 그 보조역할을 하는 상하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현실화해 줄 것을 꾸준히 요청해오고 있다는 평소의 입장을 보이면서 대통령 인수위에서 제기된 기소권 분산문제에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반응이다. 경찰청 고위관계자는 “사법개혁과 맞물려 (검찰이 갖고 있는)독점적 권력때문에 여러 가지 폐단이 있을 수 있다는 취지에서 기소권 분산문제가 나온것 같다.”면서 “우리 경찰은 수사권을 달라는 것이지 기소권을 운운해 본적은 한 번도 없다. 만약 기소권 일부가 경찰로 분산된다는 것은 사법체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실현성에 다소 의문을 제기했다.그는 또 “경찰은 수사에,검찰은 공소유지에 충실하면 될 것”이라면서 “경찰이 기소권을 갖는 나라는 선진국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경찰 수뇌부도 기소권 분산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뜻밖의 제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젊은 간부들은 “경찰이 기소권을 일부 갖는다는 것 자체가 실현성 여부에 관계없이 일단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냐.”면서 “헌법개정이아니더라도 모든 사건에 대해 검사의 지휘를 받는 현재의 모순을 형사소송법 개정만으로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문 강충식기자 km@
  • 노벨문학상/ 케르테스의 작품세계

    ■아우슈비츠의 충격 문화해석 평생 고뇌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케르테스 임레는 나치의 동유럽 침공 때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돼 이때의 처절한 체험을 문학적으로 꽃피워낸 작가로,동유럽 문학계에서 ‘반나치즘의 기수’지위를 구축한 소설가이다. 1975년 발표한 그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이 된 ‘소르슈탈란사그(Sorstalensag·비운)’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작품화한 것. ‘반나치즘’이라는 그의 정신이 가장 깊고 치밀하게 배어 있는 이 작품은 열다섯살 난 소년의 천진난만한 의식에 투영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의 홀로코스트(집단 학살)가 준 충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주인공이 바로 15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된 케르테스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 헝가리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1985년 재출간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해 서유럽 각국에서 번역됐으며 독일어로는 1996년에 출간돼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특히 나치의 폭정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린 케르테스가 겪은 아우슈비츠의 체험을 너무나 충격적인,그러면서도 결코 예외적일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새로운 소설을 구상할 때마다 왜 나는 항상 아우슈비츠를 떠올리게 될까.”라고 술회하는 그는 유대인 집단학살 문제를 문화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를 화두삼아 평생을 고뇌하며 사는 ‘나치즘의 역사이자 증인’이기도 한 인물이다. 이후에도 그는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소르슈탈란사그’시리즈 3부작인‘실패(A Kudrac)’(1988)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Kaddish for a Child Not Born)’(1990)등을 잇따라 내놓았다.이후 ‘길을 발견한 사람’을 비롯,‘문화로서의 홀로코스트’‘영국의 깃발’‘누군가 다른 사람’등을 펴내는 등 지난 90년대 말까지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며 유대인 학살문제와 유럽사회에서 일어났던 반인륜적 집단학살의 문제를 작품화해 동구는 물론 세계의 눈길을 끌어왔다. 케르테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48년부터 부다페스트의는 빌라고샤그 신문사에서 기자로 약 3년동안 일했으며,2년간 군복무를 한 뒤 전업작가 겸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니체·프로이트·비트겐슈타인 등 독일 문인과 철학자들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타협을 거부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스웨덴 한림원도 “그는 낯선 방문자에게 빡빡하고 가시돋친 산사나무 생울타리를 연상케 한다.”고 설명할 정도.그러나 그런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자들을 강요된 감정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헝가리를 비롯한 동구권에서는 케르테스가 올해 노벨상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무성했다.그만큼 그의 문학이 동구권에 미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최문규 연세대 독문과 교수는 “4∼5년전부터 유럽 문학의 주요 이슈가 ‘기억이냐 망각이냐.’였다.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다음 세대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는 의견과,과거를 잊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올해 노벨문학상은 결국후자의 손을 들어준 셈”이라며 “팔레스타인 문제 등에서 보듯 지금도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며,이는 일제 잔재 청산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이번의 수상작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한경민 한국외국어대 헝가리어과 교수는 “케르테스는 아리안족이 유대인에게 반감을 가진 이유와,집단학살에 침묵했던 유럽인의 의식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헝가리내 유태인 모임을 통해 끊임없이 전통문화를 탐구하는 열정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아직 국내에 번역,소개되지 않았다. 심재억기자 jeshim@ ■연 보 ▲1929년 부다페스트에서 유태계로 출생.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이듬해 부첸발트 수용소에서 석방. ▲1948년 부다페스트 신문 ‘빌라고샤그’에 취직했으나 1951년 해고. ▲2년간 군복무 후 생계를 위해 작가와 번역가로 활동. ▲1975년 아우슈비츠 체험을 담은 첫 소설 ‘비운’집필. ▲1977년 ‘길을 발견한 사람’발표. ▲1988년 ‘실패’집필. ▲1990년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발표. ▲1993년 ‘문화로서의 홀로코스트’집필. ▲1995년 브란덴부르크 문학상 수상. ▲1997년 라이프치히 도서상 수상.
  • 평양 학술토론회 다녀온 윤내현 단군학회장 “”고대사 남북 공동연구 물꼬텄다””

    개천절인 지난 3일 평양에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역사학자들이 모여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가져 안팎의 눈길을 끌었다.북한 력사학회와 우리측 단군학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 학술토론회는 단군과 고조선의 실체를 남북이 학문적으로 수용,함께 체계적인 연구의 초석을 놓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행사였다. 단군학회 회장으로 이번 학술대회에 남쪽 학자들을 인솔하고 돌아온 윤내현(63)단국대 대학원장은 “이번 학술토론회는 그동안 일제에 의해 망실돼 온 우리 고대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무척 뜻깊고 고무적인 행사였다.”고 기꺼워했다. 윤 교수는 “그동안 우리 문화의 모태이자 역사의 기원이면서도 실체를 모호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던 많은 사람들이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적 실재성과 의미를 새롭게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윤 교수를 만나 이번 학술행사의 의미와 우리 역사학의 문제들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이번 평양 학술토론회의 의의와 성과는 무엇인가. 남북한 학자들이 제3국이 아닌 우리 땅에서 학술행사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3년 전부터 준비해 원래는 지난해에 갖기로 한 것이 이번에 열린 것이다. 북쪽에서 사회과학원과 김일성대학 등의 권위 있는 교수 11명이 참석했으며,우리 쪽에서도 9명이 나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학문 분야에서 남북 공동연구의 물꼬를 튼 셈이다.또 남북이 역사학자 교류와 공동연구에 합의한 점도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다음번 서울 개최가 실현됐으면 좋겠다. ◆북한의 단군 인식은 어떠한가. 과거 북한 학자들은 단군보다 고조선에 더 집착했다.1970년대까지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거의 없었던 데 비해 북한은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다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실제로 고조선은 만주 일대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최대의 고대국가였으나 삼국·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그 실체를 모두 잃고 말았다.여기에 일제 식민사관이 개입하면서 우리는 타의에 의해 고대사를 잊고 살았다. 생각해 보라.고조선이 없으면 우리는 과정없이 형성된 민족이라는 말이 되는데,이게 가능한 얘긴가.이런 점에서 북한은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했다.강역(彊域)문제만 하더라도 우리보다 훨씬 넓게 잡고 있다. 북한의 고조선 연구는 지난 93년 단군릉 발굴이 전환의 계기가 됐다.주체사상이나 사회주의적 역사관에서 볼 때 우상을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으나,그후 단군에 대한 시각이 크게 바뀌어 지금은 고조선 대신 ‘단군조선’이라고 칭하는 정도다.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북한의 그러한 인식이 우리와는 크게 다르지 않나. 아직은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또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북한 학자들이 대체로 단일한 학설을 편 반면 우리는 시대구분이나 도읍설 등에서 이견이 있었다.연구,정리할 과제다. ◆그 차이를 학문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가. 당연하다.해소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번에 확신했다. ◆주체사상의 북한이 단군릉을 조성한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또 그 단군릉이 어느 정도 실증적 근거를 가졌다고 보나. 북한이 단군릉을 조성한 배경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나,우리가 단군 실체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것은사실이다.북한의 단군 연구는 단군릉 발굴 이후 시작됐다.북한은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골에 대해 무려 60∼70회의 연대 측정을 거쳐 지금부터 약 5020년 전의 것이라고 확인했다.이것이 옳다면 고조선의 역사를 지금보다 훨씬 앞당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군을 허구적 인물 정도로 알고 있는데.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다.중요한 것은 그 실체성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단군의 역사는 바로 우리 역사학의 뿌리다.이는 역사적·상징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역사학이 사료를 근거로 하는 학문이나 그렇다고 상징성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단군학에 대해 우리 사학계의 주류는 어떤 입장인가. 주류·비주류를 떠나 명백한 역사를 제대로 탐구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민족적 불행이다.일본인들은 철저하게 고대사와 단군의 실체를 부인했다.해방후 단군 연구가 되살아나는 듯하다가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이내 잊히고 말았다.당시에 ‘민족’이니 ‘민족 정체성’이니 하는 말은 금기였지 않나. 우리 역사에서 불교·유교처럼 지배계층의이념으로 작용한 외래문화가 유입되기 전의,그 온전한 민족 원형은 고조선에 있다.이런 점에서 고대사는 바로 우리 역사학의 뿌리라고 봐야 한다.그런데도 고대사 연구는 무척 취약하다. ◆우리 고대사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는 실증주의적 학자다.과거 국사교육심의위원회에 잠깐 몸담은 적이 있는데,당시 우리 고대사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지 않으면 심의안에 서명할 수 없다고 버티다 결국 그만뒀다.그게 계기가 돼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 지도가 바뀌긴 했지만…. 문제는,실체가 분명한 고대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일본 학자들은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너무 후대에 기록됐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그래서 나는 주로 중국측 자료를 취해 연구해 왔다.식민사관은 일제의 주장과 방법을 모두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식민사관이 문제라면 해법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다.아무리 식민사관이 문제라고 하나 우리가 합리적으로 우리 역사에 접근했으면 지금처럼 (폐해가)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일제와 독재정권의 탄압과 제약을 인정한다 해도 우선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고대사에 대한 우리 사학계의 학문적 성취도를 평가해 달라.전망은 어떻고,문제는 무엇인가. 최근 들어 연구가 다양해지고 또 성과도 나타나 고무적이다.그러나 문제는 있다.가장 심각한 폐단은 학자들이 학파나 학맥에 너무 집착한다는 점이다.제자가 스승의 오류를 알고도 바로잡지 못한다.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민족문제는 학파나 학맥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른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사이에도 갈등이 크지 않나. 재야사학에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우리 강단사학이 그동안 재야사학을 외면해 온 면이 크다.우리 학회에서는 재야사학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다.일단 한자리에 앉아야 한다.토론과 대화로 이견을 해소하고 의견차를 좁히는 게 바람직하다. ◆단군이나 고조선에 관한 현재의 교과서 기술이나 교육상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의지와 관계되는 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라기보다 그 사건 속에서 정신과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실제로 우리는 ‘홍익인간’을 주창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었다. 역사적으로는 각 시대를 이끈 지식인들이 우리의 원형 문화 대신 외래문화를 우위에 둬 온 점도 반성할 점이다.이렇게 해서 망실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고대사를 통해 되찾아 이를 후대에게 바로 가르치는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심재억기자 jeshim@ ■윤내현 교수는 ▲단국대 사학과 졸 ▲동 대학원 석·박사 ▲하버드대 대학원 동아시아학과 ▲단국대 문과대 교수 ▲하버드대 인류학과 객원교수 ▲단국대 중앙박물관장·문과대학장·인문과학부 학부장·부총장 역임 ▲문교부 국사교육심의위원 ▲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 학술위원 ▲현 단국대학원장 ▲주요 저서-‘한국 고대의 사회와 국가’‘한국고대사 신론’‘중국사 1·2’‘고조선 연구’‘고조선,우리의 미래가 보인다’‘한국 열국사 연구’등 ▲수상-‘오늘의 책’상(한국출판문화협회),일석학술상,금호학술상 등. ■윤내현교수 ‘최씨낙랑국설' - “”대동강변 낙랑 우리 토착국가”” 윤내현 교수의 고대사론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의 하나가,사서에 등장하는 대동강 변의 낙랑이 한(漢)의 군현이 아니라 우리 토착국가라고 주장하는 ‘최씨낙랑국’설이다. 지난 85년 ‘한국학보’(일지사 간)제41집에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 연구 성과는 지금까지 대동강 일원에 자리한 것으로 알려진 낙랑군의 실체를 정면으로 뒤짚는 파격적인 내용이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윤 교수는 당시 “우리가 아는 한사군의 낙랑은 사실 대동강의 낙랑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주장했다. 중국 문헌사료에 따르면 한사군의 낙랑은 대동강 인근이 아니라 베이징 인근에 있었으며,그 근거로 고구려 미천왕과 한나라간에 벌어진 전쟁기록 등을 제시했다.중국 사료에 ‘갈석산을 지나 낙랑·현도군이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갈석산이 바로 지금의 산해관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것. 그는 우리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로 기억하는 낙랑국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대이동을 시작한고조선의 후예들이 최리 왕을 중심으로 대동강변에 세운 나라로, 낙랑군과는 전혀 다른 고대국가라고 주장했다. 대동강 낙랑이 국(國)이 아니고 군(郡)이었다면 당연히 최고 통수권자는 태수가 되며,태수의 딸에게 ‘낙랑공주’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근거를 내세웠다. 윤 교수는 “지금도 일부에서는 명칭에 집착하나,고대에는 낙랑을 비롯해 고구려,옥저 등 ‘같은 명칭의 다른 집단’이 여러 지역에 존재했다.”며 이는 중국 식민국가와 그 식민지배를 거부한 토착민의 나라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학설을 제기하며 한국 고대사의 지형을 바꿔온 윤 교수는 일찍부터 사학계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데 주력해 왔다. 진보적이면서도 합리적 사관을 가진 데다 문헌과 유물에 의거,엄정한 논리틀을 구축함으로써 우리 고대사는 잃어버린 역사적 위상을 상당부분 회복했거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재억기자
  • [사설] 南北·北日의 미래를 위하여

    북한의 과거 일본인 납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열도가 들끓고 있는가 하면,남한에서도 납북자·아웅산 폭파 사건 등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받으라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그런 가운데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인 남북한이 반세기 만에 비무장지대(DMZ)를 뚫어 단절된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첫 삽을 떴고,북·일 관계도 전격적인 양국 정상회담을 전기로 정상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정세는 20세기 유산인 냉전의 마지막 잔재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과 평화의 새 이정표를 향해 빠른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현재 북·일 관계 정상화에 암초로 부상하고 있는 일본인 납치 문제나 여기서 불거져 나온 우리의 납북자 문제는 그것대로 해결은 되어야 한다.다만 이런 문제들로 인해 남북,북·일간 평화의 틀을 구축하는 일이 중단되거나 후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일본 안에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에도 불구하고 납치된 13명의 일본인 가운데 사망자 8명의 납치 및 사망 경위 설명을 요구하며 대북 비난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일각에서는 납치 일본인 총살설이 제기되고 있는가 하면,피랍자 가운데 결혼한 2명은 같은 날 사망한 것을 놓고 ‘타살 의혹’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모리야마 마우미 일 법무상 같은 이는 납치에 가담한 북한 요원들을 일본 법정에 세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또 사망한 피랍여성 4명은 당시 20∼30대로 북한이 사인으로 밝힌 ‘재해와 병’으로는 이들의 죽음을 수긍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젊은 나이들이다.일본 국민들이 당혹해 하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이해가 되는 부분이다.마땅히 일본 정부로서는 북한과 후속 협상 과정에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망자들에 대한 신속한 경위파악과 함께 생존자 4명에 대한 조기귀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또 피랍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끌려와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을 것을 생각하면 절로 가슴이 메어진다.북한은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사망경위를 밝히고 다시 한번 유가족들에게 사죄하고 책임 규명과 함께 보상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로 북·일 수교교섭 협상이 휘청거리거나 지연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북·일 관계 정상화는 납치 문제라는 과거사보다 동북아평화라는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납치문제와 관련,일본측에 고언을 한다면 과거 일제 침략과 36년의 식민지배하에서 수백만,수십만의 무고한 한국 백성을 징용으로,군대 위안부로 끌어 가고,희생시킨 ‘과거사’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기 바란다.시차는 있어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가 북·일간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납북자 가족과 북의 테러와 납치에 희생된 가족 및 단체들은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위원장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에 관해 시인하고 사과하면서 다시 제기된 것이다.이들의 주장은 옳고 마땅하다.북한이 일본측에는 납치에 관해 사과하면서 우리에게는 하지 않는 등 2중 잣대를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수 없다.정부도 북측이 자행한 KAL기 폭파 사건 등 각종 테러와 어부 억류,국군포로 문제 등에 관해 당당하게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에는 선후와 경중이 있다고 본다.지금은 남북이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같음’을 우선해 화해와 평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남북 간에 긴장이 해소되고 신뢰가 어느 정도 형성되면 그때 가서 냉정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닌가 한다.북·일 관계만 하더라도 양측이 수교하고 경제협력이 가속화하면그 여파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으로 선순환된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 납치 문제나 과거 북한이 자행한 일련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사과 문제는 북·일 관계 정상화나 남북화해로 가는 도정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대승적 차원에서 미래를 보고 차분하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 前서울대교수 김민수씨 디자인비평서 발간/“정치꾼 디자이너가 우리 디자인 망쳤죠”

    “나는 고상하게 말해 마틴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비아냥거렸던 ‘성서를 위배한 바보’이자,한국 사회에서 서울대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서울대공화국 교수의 특혜와 기득권’도 얌전히 챙겨먹지 못한 쪼다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6년 서울대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뒤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민수 ‘디자인문화비평’편집주간.표면적인 탈락 이유는 ‘연구실적 미비’였지만 원로교수들의 친일행각을 비판한 ‘괘씸죄’가 작용했다는 반론이 거셌다.그후 4년의 세월.서울 미대 교수 복직투쟁을 벌여온 그는 한층 원숙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문화지평을 넘나들며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김민수의 문화디자인’(다우 펴냄)은 그 치열한 시간의 기록이자 디자인·시각문화 비평집으로 우리 사회에 산재한 디자인의 여러 맥락들을 쉽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혹자는 디자인을 미적 장치,혹은 잔재간으로 치부한다.경제가치를 극대화하는 부가적 수단,즉 문화상품으로 오해하기도 한다.디자인은 또 ‘예술’이라고 불린다.저자는 이같은 ‘박제된’인식을 던져버리라고 말한다.디자인은 단순히 예쁜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상품을 더 잘 팔기 위한 도구적 수단도 아니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언어적 사고’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 행위”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디자인 개념을 단순한 도안산업이나 소비문화 차원으로 좁혀 보지 말 것을 주문한다.디자인을 그저 미술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관행’에도 제동을 건다.그렇게 한정시켜 보면 볼수록 디자인은 저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저자는 중국의 혁명가 루쉰까지 당대로 호출해 디자인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그에 따르면 루쉰은 손색없는 ‘디자인 사상가’다.20세기 초 중국 근대사회에서 루쉰은 민중계몽을 위한 문학적 실천과 더불어 디자인에서도 ‘심미적 정체성’을 찾게 한 정신적 지주였다.루쉰은 1920년대의 서구 취향과 허식적 도시감각에서 파생한 이른바 ‘상하이 스타일’에 맞서 중국 고유문화에 따른 심미적 언어를 강조했다.우리가 여기서 배울 점은 바로그 문화적 연속성과 정체성이다. “한국 현대디자인의 역사에는 유감스럽게도 루쉰과 같은 정신적 지주가 한명도 없다.”고 아쉬워하는 저자는 “일제 식민미학의 잔재를 신주 모시듯 받들고 이것을 해방 후 미국식 라이프스타일에 끼워맞춰온 디자이너들만 있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디자인 정치학의 측면에서 재해석한다.“그동안 한국 디자인은 최소한의 공공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술수를 구사하는 ‘정치꾼 디자이너’들의 사적인 먹이채집에 불과했다.”며 디자인계 내부의 비민주적 관행에 쐐기를 박는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 광복절 특집/ 기고/“일제때 고위관리 존경받는 시대”

    한국의 근대적 법제도는 우리가 자주적 근대국가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제가 주도권을 장악할 당시부터 그들이 침략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근대적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다.그 이후 1905년 한국이 일제의 강압적 지배에 들어갔을 때부터 일제 법령제도를 모방하고 1910년 이후부터는 일본 식민지제로 일본의 주변부로 전락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이 군정을 시행했을 당시,남쪽은 미 군정이 일제법령을 시행하고 1948년 정부수립시에도 제헌헌법 100조에 의해 미 군정 법령과 함께 일제법령의 효력을 지속시켰다.그 이유는 사·소유권제도 유지와 기존질서의 안정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법조계의 일제 잔재 문제가 청산되지 못한 채 민주주의에 반하는 권위주의와 관료주의,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잔재도 온갖 악의 씨로 싹을 키웠다. 이 악의 씨를 싹틔워 충직하게 가꾼 뒤 이 나라의 실세로 군림한 것은 친일 관료이고 그 중에는 사법관료가 있다.일제지배 하에서 법원이나 검찰청의 서기와 통역생으로 있던 무리가 하루 아침에 판사와 검사가 되었다.고등경찰의 보조원과 밀정 및 헌병 보조원이 서장,장관,대장이 된 것이나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일제하의 관료주의 법학이 우리 법조 양성의 자양분이 되어 독을 뿜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사법관료 제도를 운영하면서 생긴 고문과 가혹 행위의 악습,피의자나 참고인에 대한 범죄인 취급,사법 과정에서 관료성과 비밀폐쇄주의,재판을 나랏님이란 절대자의 대변으로 여기는 반민주적 재판의식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법률 운영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의식한 것이기보다는 권력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되었다. 관리가 서민을 앞에 두고 “법대로 하겠다.”는 말은 혼내준다는 협박이 되었다. 그러한 법이란 국민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문제되어온 전관예우의 폐풍이 무엇인가? 관료 특권의 별명이고 그 찌꺼기가 아닌가? 더욱이 이승만 정권의 엘리트는 제국대학 출신과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그들이 다녔던 제국대학 풍토는 1920년대의 치안유지법과 대륙침략에서 1941년 세계전쟁으로 이어지는 파시즘이 극성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속에 자유주의는 이미 대학에서 압살된 분위기였다.1945년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된 30대 이후의 세대가 잔뼈가 굵은 사회적 배경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의 법조계에는 일제잔재의 각종 추악한 모습을 본다.일류라는 착각의 교만성과 반민주적 특권의식,법적정의에 무감각한 출세지향의 속물근성,법의 운영을 관료의 입장에서 하는 것 등 많다. 그 중에도 인적 잔재문제는 친일파와 그 아류의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한가지 예를 들어 J씨는 김구(金九) 선생 암살사건 당시에 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안두희를 비호하였다.그는 일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로서 제국대학 출신의 인텔리다. 그는 그 후 법조계와 법학계에서 각종 명예로운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영화를 누렸다.지금도 미국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아직도 천수를 누리고 있다.한국의 많은법학도는 그를 존경하고 그처럼 되길 동경하는 눈치다. 법적 정의가 없고 출세만능과 강자의 지배라는 정글의 세계이니 그들을 나무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굴까.기막힌 세상이다.법조계 일제잔재의 인적요소인 친일파 부류,그들이 바로 역대 독재자의 법기술자의 원조가 아닌가?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 의문사진상규명 위원장
  • 광복절 특집/ 法체계 속의 日帝 잔재/국민위에 군림…아직 먼 ‘法 광복’

    광복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 사법체제는 아직도 일본식 틀을 깨지 못하고있다.일제의 주도로 심어진 근대 사법제도가 36년간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광복 후에도 그대로 답습해 마치 우리 것처럼 되었다.일제 잔재를 털어내기 위한 사법제도 개혁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광복 57주년을 맞아 사법제도 속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와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 우리 법 체계의 근간은 일본 사람들이 들여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구한말 전근대적인 사법제도를 버리고 새 제도를 도입할 때부터 일본의 지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그런 까닭에 우리의 법 정신과 법 제도에는 일제의 잔재가 깊숙이 뿌리박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 정부 들어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검토했던 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이른바 일본의 ‘명치(明治) 사법제도’가 1910년 급속히 도입됐고 식민지적 억압과 수탈의 목적을 위해 변모되고 왜곡됐다.”면서 “이 과정에서 배태된 식민지 사법제도의 잔재가 광복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사법절차에 남아 있는 경우가 발견되고 있다.”고 지적했다.일제극복은 우리 사법부가 현재까지 안고 있는 과제다. 일제가 남긴 가장 큰 문제로 사법제도 전반과 법조인들에게 배어 있는 권위주의와 관료주의가 꼽힌다.때문에 국민을 위한 사법부가 되지 못하고 국민들은 법과 유리되어 있다.국민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법제도 남아 있다. ◆‘국민’과 먼 사법체제- 우리나라 사법체제의 권위주의는 국민의 참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서 드러난다.사법작용의 핵심 절차인 재판과 기소 과정은 철저하게 법률전문가들이 독점하고 있다. 숭실대 법학과 윤철홍(尹喆洪) 교수는 “우리나라 법제도에 권위주의적 냄새가 짙은 것은 예전부터 계급제도로 인해 관료주의적 사고가 남아 있었고,일제시대 때 더욱 구체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영미법체계냐,대륙법체계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외국에서는 이런 법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재판에 국민이 참여하는 영미식 배심제(陪審制)와 참심제(參審制)가 널리 채택되고 있다.배심제는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이 재판에 참여해 독립적으로 평결을 하고,참심제는 참심원이 법관과 함께 합의체를 구성해 평결하는 제도다.독일이나 프랑스,일본 등 대륙법체계 국가에서도 도입하고 있는 이 제도를 우리는 채택하지 않고 있다. 검찰의 기소와 관련해서는 검찰심사회제도를 참고해 볼 수 있다.일본의 경우 검찰로부터 독립된 기구인 검찰심사회를 설치,일반 유권자 가운데 추첨으로 뽑힌 11명의 검찰심사원이 검찰관의 불기소처분의 적절성을 심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중견 판사는 “이같은 외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실정에 맞도록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법서비스 수준도 뒤떨어진다.변호사 1인당 국민 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약 9430명으로 미국(312명),영국(731명),독일(1030명)은 물론 일본(7861명) 보다도 훨씬 많다.그만큼 변호사로부터 도움을 받기 어렵고 수임료는 높다. 또 소송을 제기할 때 납부해야 하는 인지대에대해서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사무총장 김선수(金善洙) 변호사는 “현재 소송물 가액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인지대를 부과하고 있는데 소액이라도 시간이 더 걸릴수 있기 때문에 특히 경제력이 약한 서민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보다는 국가 위주- 학계에서는 광복 이후에도 권위주의적 군사·관료지배체제가 지속되면서 법을 식민통치의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했던 일제의 잔재가 이어졌다.영남대 박홍규(朴洪圭) 교수는 “일제가 시행한 형법의 특징은 개인의 인권·자유 보장보다는 대단히 국가주의적이라는데 있다.”면서 “지금까지도 법정형량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은 국가 위주 형법 체계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전세계적으로 폐지 추세에 있는 사형제도.우리나라에서는 형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국가보안법 등에서 모두 103개 조항에 사형을 최고형으로 두고 있다.간통죄 등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나 개인의 사상까지 통제하는 법 조항 등도 일제의 영향을 받은 국가본위의 법이다. ◆국민 정서와 맞지 않는 법제- 우리 고유의 정서보다는 일제식의 사고 방식이 담긴 제도의 대표적인 예로 명의신탁(名義信託)이 있다.원래 이 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종중 토지의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이용됐고,최근까지도 취득세,양도소득세 등의 조세부과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 등으로 악용됐다. 일본에서는 이미 1910년 이 제도가 없어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95년에야 ‘부동산 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을 제정,명의신탁을 금지했다.지금도 이 법에서는 종중과 배우자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명의신탁을 인정하고 있다. 호주제(戶主制) 역시 한국 전통의 유교 사상보다는 일본의 ‘가독(家督)제도’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부산대 김용욱(金容旭) 명예교수는 ‘일제에 의한 가족법제의 왜곡과 청산’이라는 논문에서 “해방 뒤 일제식 가족법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호주상속제’를 ‘호주승계제’로 개정한 노력은 평가할 수 있지만 청산과 극복을 위하여는 아직도 철저를 기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밝혔다.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노력- 지난해 말 개정된 민사소송법에서는 일본식용어가 상당 부분 정비됐고 판결문에서도 일본식 문장은 개선되고 있다.또 영장실질심사제 시행으로 인신 구속이 엄격해졌고,헌법재판소는 헌법에 어긋나는 법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제 극복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다.연세대교수를 지낸 신현주(申鉉柱) 변호사는 “법에 있어서는 우리가 아직 광복을 맞지 못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우리의 정서에 맞는 우리의 법을 하나 하나씩이라도 만들어 나가야 하고 법 의식을 바꾸기 위해 법조인의 인성 교육 강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장택동 안동환 홍지민기자 taecks@
  • 실내용 새 국기틀 보급, ‘족자’형등 6종 제작

    50년 넘게 사용돼온 유리액자형 실내 게시용 태극기 대신 새로운 모양의 실내 게시용 국기틀이 보급된다. 행정자치부는 12일 6종의 국기틀을 정부 권장형으로 제작,전국에 보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로 개발된 국기틀은 과거 왕의 교지나 상소문에 쓰였던 형태의 ‘좌우보필’형과 일반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족자’형,봉이 상단에만 있는 ‘상방족자’형 등 세 가지 형태다. 색깔은 태극기 깃면과의 보색관계를 고려해 밤색과 연한 밤색 두 가지를 사용토록 했고 유리를 완전히 제거,빛에 반사돼 국기가 가려지는 것을 방지했다. 행자부는 각급 행정기관에서 게시할 새로운 국기틀을 조달청을 통해 우선구매하기로 했으며,일반 국민들은 이달말부터 ‘우편주문제도’를 이용해 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련부처와 협의중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실내에 게시해온 유리액자형 국기틀이 일장기를 걸던 일제의 잔재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면서 “국기선양회의 제의를 받아 10개월의 연구 끝에 50년이 넘게 사용돼 오던 실내 국기틀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
  • 독자의 소리/ 담배인삼公 개명때 ‘담배’ 빼길

    연말 민영화를 앞두고 한국담배인삼공사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회사명을 바꾼다고 한다.일제 잔재인 전매청을 전매공사로,그리고 89년에 다시 고쳐 지금의 회사명을 유지해 오다가 이번 또 개칭한다는 것인데,경영주체가 바뀌면 옷을 갈아입는 것이 한국적 기업풍토이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회사명칭이 무엇이든간에 양질의 제품만 생산하면 그만이지만,말하고 싶은 것은 공사의 영문 두음문자인 KT&G이다. G는 물론 Ginseng으로서 인삼이란 뜻이다.우리가 늑장을 부리는 사이 일본이 잽싸게 그들의 발음대로 ‘진셍’을 국제용어화시켰는데 우리가 이를 무비판적으로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인삼하면 고려인삼인 것은 일본은 물론,전세계가 인정하고 있으며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러시아산도 우리 작물과는 비교가 안된다.그렇다면 당연히 인삼의 영문표기는 Insam으로 써야 하며 재배왕국인 한국이 일본식 용어를 선호하는 것은 자존심에 누가 된다고 생각한다.한편 전국민이 금연운동을 펼치고있는 이때 선명성 제고를 위해 회사이름에 담배란 용어는 넣지 말았으면좋겠다. 황현성 [경기 수원시 권선구]
  • 인감 잘못발급 거액배상 판결

    인감증명서를 잘못 발급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된 광주동구 이모(34·여·7급)씨가 상급 법원에 항소키로 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씨는 “공무원으로서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나 법원의 판결이 너무 가혹해 항소를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광주 동구 공무원직장협의회는 최근 간담회를 갖고 이번 사건을 ‘전국공무원노조’회의 안건으로 상정하고,인감폐지및 제도개선 운동을 펴기로 했다. 직장협은 또 이씨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정,지난 17일 회원을 대상으로 찬반조사에 들어갔다.직장협 관계자는 “사진을 육안으로 비교해가며 정확히 본인 여부를확인하기는 어렵다.”며 “제대로 된 인감확인 시스템을 마련하든지 일제시대 잔재인 인감증명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동구는 최근 본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인감증명서를 발급해 7억여원의 재산상 손실을 입힌 직원 이씨를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피고는 원고에게 손실액의 60%인 4억 30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법원으로부터 받아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광주 동구 ‘인감폐지’ 주장도

    인감증명을 잘못 발급,구청에 거액의 손해를 끼친 공무원에게 4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최근 내려진 것과 관련,인감증명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공무원들이 반발하고 있다. 대한매일 5월4일자 23면 보도 공무원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7일 ‘광주시 동구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인감을 정확히 발급할 수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아 옛날 사진으로 본인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인감확인 시스템을 제대로 마련해 주든지 아니면 일제 시대의 잔재인 인감증명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인감 담당자에게 업무과실 범위를 넓게 적용해 평생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배상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말했다. 광주시 동구 공무원직장협의회도 이와 관련,조만간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공직협 관계자는 “법규상 ‘원인 행위자인 공무원 또는그 재정 보증인이 변상금을 지급할 재산이 없을 경우 구상권 행사를 포기할 수 있다.’는 조항에 주목하고 있다.”며 “이번 구상권 청구 대상자는 그만한 재산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동구는 본인을 확인하지 않고 인감증명서를 발급해7억여원의 손실을 입힌 직원 이모(34·여)씨를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이씨는 동구청에 손실액의 60%인 4억 30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자치단체 경찰사찰 중단 요구

    대구지역 공무원들이 경찰의 자치단체 출입과 정보수집 활동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달구벌공무원직장협의회(달공협)는 21일 성명을 내고 경찰의 지방자치단체 사찰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달공협은 “과거 일제시대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있었던경찰의 행정기관 출입이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며 “지방분권을 침해하고 행정기관의 존엄성을무시하는 경찰의 행정기관 사찰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달공협은 경찰이 정보형사를 자치단체에 출입시켜 기관장을 비롯한 일반 공무원,나아가 지방자치단체를 사찰하고 있다며 이는 정치사찰의 잔재로 시급히 청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달공협은 ▲경찰이 쓸데없이 행정기관에 출입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 조치할 것 ▲경찰이 행정기관 출입시사전 허가를 받거나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 받을 것 등을 요구했다. 특히 달공협은 앞으로 경찰이 행정기관에 정보수집 등을 목적으로 출입할 경우 이를 실력으로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달공협 박성철(朴成轍·대구시 자치행정과)회장은 “정보형사들이 매일 행정기관을 출입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앞으로 전국의 공무원직장협의회와 연계해 정보형사의 자치단체 사찰을 금지시키겠다.”고 말했다. 한편 대구시청의 경우 대구경찰청 및 대구중부경찰서 소속정보형사 2명이 정기적으로 시청을 출입,자치단체 동향 등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 [친일청산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3)해방후 친일파 득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저서 ‘한국의 해방과 미국정책’을 통해 해방직후 미군정 통치기간 동안 군,관료,정치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전에 일본인이 해놓은 임신을 성공적으로 결말짓는 산파 역할만 했다고 미국을 비판한바 있다.해방된 한국이 직접 자손을 보도록하는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이 말은 1945년 9월12일 출범한 주한미군정(USAMGOK)의 친일 인사의 등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군정청이 당시 선발한 60명의 장교 가운데 40명이 일본군 출신이었고 경찰 조직도 간부의 53%,하위직의 25%가 일본경찰출신이었다. 이처럼 친일파들은 지탄과 단죄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전락하기는커녕 미군정기부터 식민지시대 못지않은 국가 및 사회 파워그룹 참여의 헤택을 부여받았고 근대화와독재시대를 거쳐 파워를 몇배나 증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식민지 시절부터 사회적,경제적으로 우월한 상황에 있던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대전환기였던 해방이후의 한국 역사에서 다른 국민보다 더 빨리 출세하고,더 많이 돈을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에 비해 피식민,피점령의 역사에서 막 벗어난 대부분의 나라들은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한 인적 단죄가 철저하게이뤄졌고 참회와 화해도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2차대전 독일점령 시절에 독일에 협력한 인사들을 ‘비국민’으로 규정,공직사회 진출을 금지시켰다. 부역자들의 재산은 압류됐고 2000여명이 사형,4만여명이징역형에 처해졌다.벨기에 네덜란드도 5만여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 역시 국가정체가 바뀌면서 30년동안 9만명을 기소,5000여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승전한 연합국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 나치전범을 처단당했던 독일은 이후 스스로 나치 부역자에 대한 추적과 재판을 시작해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반민특위에 의한 단죄가 집행유예 5인,실형7인,공민권 정지 17인에 그쳤고 그나마 실형을 받은 7인도 50년 봄 재심청구로 모두 풀려났다. 이처럼 친일 세력들이 해방후 단죄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과 국민을 철저하게 괴롭힌 공산주의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공산주의와 세계패권 다툼을 벌이던 미국은 이런 목적에 금방 써먹을 수 있는 친일파를 등용했고,친일파들은 반공의 절대적 기치 아래 매카시즘의수법으로 친일청산을 거론하는 반대파를 성공적으로 제거해왔다.수십년이 지나면서 이들 후손들은 한국 사회의 기득층과 파워그룹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친일 부역자들은 정통성을 따질 겨를이 없는 과도기를 통해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연스럽게 부상했고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진것이다. 친일세력은 법조계부터 정계 문화예술계 등 모든 분야에서 엘리트 세력으로 위용을 부리고 있으며,‘황국사관’을 지키고 있는 많은 강단사학자들은 교과서에서까지 친일의 흔적을 지우려 애쓴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친일세력들의 득세는 한국 사회 부조리와 비정상의 근본 뿌리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반면 독립 유공자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선대의 자기희생적 활동 결과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해해방후 대격변기에 빈곤층으로 계층하락하고 말았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엄혹한 일제시대의 두려움이 해방후 현실화한 것이다. 광복 5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언어 및 사회생활구석구석엔 일제의 잔재가 엄존하고 있다.이는 자각되지못한 국민 탓도 있지만 친일 부역자들이 줄곧 사회지도층으로 득세하고 있는 데 따른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냉철한 역사적 평가를 통해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이 요청되는이유인 것이다. 김성호기자 kimus@ ■친일청산특별법 연내 제정. 국회의원들의 친일파 명단 발표 후 앞으로 친일 청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국민들의 관심이 크다. 이번 발표를 주도한 김희선 의원측에선 일단 ‘친일 청산의 당위성’을 논의의 장에 올리고 국민적 관심을 끄는 데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자체평가하고 있다.따라서고조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전에 예정된 작업을 서둘러야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친일청산 작업은 앞으로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친일 반민족행위자와 관련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 설치,그리고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다.이를 위해‘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은 이달부터 두차례 정도 공청회를 가질 예정이다. 위원회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친일문제 연구단체의 성과를 토대로 이미 발표한 명단에 대한 검증작업,앞으로 추가로 발표할 친일인사에 대한 친일행위 규명작업 등의 일을 맡게 된다. 또 친일 반민족행위 선정 기준에 대한 보강도 시급하다. 첫 발표 때는 광복회가 반민법을 기준으로 발표한 명단에16명을 추가한 정도지만 추가 발표 때는 보다 강화된 기준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이는 반민법에 애매한 문구가 적지 않아 실제 적용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친일파 명단 발표를 토대로 잘못된 국민적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다.이를 위해 교과서 개정 및 연구단체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지원 등의 작업이 이어질 예정이다. 김 의원은 “친일이 확실히 청산될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야겠지만 우선 올해 안에 특별법 제정 및 특위 구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친일청산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2)친일파 청산운동

    친일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는 정말 불가능한것인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친일파명단 발표를 통해 쏘아올린 ‘친일청산’의 첫 신호탄이우리 사회에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친일파 후손들의 거센반발에 부닥쳐 또다시 불발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자아내고 있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가려내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돈과 권력을 움켜쥔 친일파와 그추종자들의 저항에 밀려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역사적 심판 노력 번번이 좌절. 친일 청산 작업이 처음으로,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48년 9월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면서부터였다. 당시 22조로 구성된 반민법은 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범주를 협소하게 규정한 것으로,이는 최소한의 처벌을 위한것이었다.수십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친일부역자중 죄질이 심한 7000여명 정도를 심판대에 올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949년 1월8일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반민특위는 국민들의 지지 속에 일제의 주구로 활동했던 친일파들을 검거,단죄해나갔다.그러나 특위 출범 초기부터 ‘시기상조’ 운운하며 마뜩지 않게 여겼던 대통령이승만은 특위가 일제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급기야 같은해 6월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조사요원들을 불법체포했다. 민족의 염원을 담아 국회가 구성한 반민특위는 이런 곡절을 거쳐 허약해진 뒤 실로 허무하게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친일청산 작업이 무산된 것이다.반민특위는 1949년 8월31일 해산 때까지 박흥식 노덕술 이광수 최남선 등 682명을조사해 모두 221명을 기소했다.그러나 특위가 해산된 후 1950년 봄까지 실형 선고자 7명을 포함해 모든 친일행위 관련자는 풀려나고 말았다. 친일 연구가들은 “당시 군과 경찰의 요직을 차지한 친일파들과 친일 자본가들이 이승만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민특위 해산으로 친일세력은 아무런 제지없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 뿌리를 내렸다.또 당시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반민특위에 적극 참여하고 지지했던 국회의원들이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돼 대거 구속되면서 국회나 정부 차원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아예 기대할 수 없게 돼버렸다. 이후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친일파 청산노력은 더욱 어려워졌고,전두환·노태우정권 하에서도 친일파 청산을 위한 별다른 시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93년 ‘문민정부’ 등장 이후 김원웅(민주당) 의원이 94년 반민법의 취지를 이어받은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안’ 제정을 추진했으나 이 역시 저항에 밀려 무산됐다. 김원웅 의원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법안 제안 서명을 받으면서 국회·관료·언론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친일적 기반으로 기득권을 형성한 세력이 얼마나 막강하게버티고 있는지를 절감했다.”고 말한다.친일파 청산작업의 실패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발언이다. 민간 차원에선 친일파 청산을 위한 연구와 운동 정도의노력이 간간이이어졌다.60년대 이후 재야 사학자인 임종국씨가 이광수 최남선 모윤숙 김동환 등 문학행위를 통해일제에 적극 부역한 인사들을 집중 조명한 ‘친일문학론’을 제기,주목을 받았다. 95년엔 독립유공자협회가 해방후 첫 공식행사로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학술대회’를 열어 친일파 청산문제를본격적인 논의의 장에 올려놓았으며,97년엔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들의 재산몰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87년 ‘제2의 반민특위’를 내걸고 출범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는 학술·출판 등을 통해 친일청산 작업을 벌여왔으며,지난해 친일파 3000∼4000명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내는 대작업을 시작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반민법·반민특위도 태생적 한계. 일부 언론에선 이번 ‘친일파 명단’발표를 놓고 1948년제정했던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선정 기준에 어긋난다며 크게 반발했다.결국 친일파들을 척결하기 위해 제정한반민법이 오히려 그들의 후손에 의해 악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반민특위는 과연 반민법을 근거로해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심판하기에 충분했었을까?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원은 “사실 그때도 힘의 논리에 의해 반민법과 반민특위가 일정한 한계를 지닌 채 탄생했다.”고 말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선정에서 관료의 경우 칙임관(부이사관상당) 이상으로 한정해 놓아 그 아래 주임관(당시 일선 군수)이하의 관료들은 조사할 근거가 미약했다.군인과 경찰도 영관급,서장급 이상만을 대상으로 했다.그러나 일제하에서 한국인중 이러한 최고위직을 가진 관료는 극소수에불과했다. 물론 주임관 이하라도 죄적이 ‘현저’한 자는 반민족행위자로 구분할 수 있도록 했으나 적용하기가 애매해 실제로 조사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 언론이나 문학행위를 통해 일제미화나 전쟁을 선동한경우도 포함시켰으나 역시 선정기준이 애매해 최남선 이광수 김동환 등 대표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조사조차 벌이지않았다. 그나마도 친일반역행위자로 선정된 사람들은 대부분 1930년대 이전의 부역자들이었다.그 이후의 친일행위자들은 반민특위구성 당시 이미 새 정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된 708명 명단에 1930년대 이전에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이 대거 포함된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임창용기자.
  • 57년만의 명단발표 의미/ 친일청산 ‘역사 바로세우기’

    범국민적인 일제잔재 청산작업의 신호탄이 될 것인가. 28일 일부 여야의원들에 의해 발표된 친일인사 708명 명단은 전체 국회차원은 아니지만,해방후 57년만에 공신력 있는단체에서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그동안 민간차원에서는 친일인사들을 단죄하자는 운동이 간헐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나 지난 50년 반민특위가 활동도중해산된 이후 정부나 국회차원에서는 공식적인 청산노력이 구체화되지 못했다. 광복회 관계자는 “그동안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실력자로 버티고있어 감히 추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면서 “16대 총선에서 젊은 개혁파 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해 ‘총대’를 메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친일인사 면면] 이번에 공개된 명단은 한일합방전인 1890년대부터 광복된 1945년까지의 친일행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이완용처럼 한일합방에 앞장섰거나 일제총독부에서 활동했으며,이광수나 최남선등 사회문화계에서 일본강점을 합리화했던 인물들로 분류된다. 현역의원중에는 한나라당 최돈웅(崔燉雄) 의원의 부친(최준집)이 포함됐는데,1936∼40년 당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여성박사 1호 김활란(金活蘭) 등 17명의 경우 “우리사회에 끼친 공적을 감안해야 한다.”는 내부 이견 때문에진통을 겪은 끝에 1890년대 친일행적으로 시기가 부적절하다고 판단된 ‘김인승’만을 제외한 16명이 모두 명단에 포함됐다. 200여쪽에 달하는 명단 발표자료는 “김활란이 친일의 길을 걸은 여성지도자의 대명사로 이화여전과 이화교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애국자녀단을 조직했고,고황경(高凰京)은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사회학자로 일본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교육하는 데 앞장서 왔다.”고 밝혔다. 또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毛允淑)은 임전대책 강연 등에서 ‘일본여성의 갈길’을 부르짖었고,여성계몽운동가로 알려진 박인덕(朴仁德)은 매일신보 등을 통해친일선동 글들을 발표했으며,덕성여자실업학교장을 지낸 송금선(宋今璇)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강사로 활동했고,경성가정여숙 창립자인 황신덕(黃信德)은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로 평가됐다. 이어 화가 김은호(金殷鎬)는 ‘금채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했고,심형구(沈亨求)는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선봉장’으로,현제명(玄濟明)은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로,‘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洪蘭坡)는 친일가요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음악활동을 했고,이능화(李能和)는‘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로,정만조(鄭萬朝)는 ‘친일유림의 거두’라고 밝혔다. [논란] 명단에 포함된 인사의 직계가족들이 명예훼손 혐의로 법적 대응을 할 소지가 있다. 또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명단 발표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김희선 의원은 그러나“모든 법적 소송에 대응할 것이며,증빙자료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상연기자 carlos@
  • 친일 반민족행위 708명 명단(1)

    일제잔재 청산 등을 위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金希宣)과 광복회가 28일 공동으로 선정, 광복회보에 게재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과 당시 주요 행적 및 직책은 다음과 같다. ◇사회.문화.예술계. ▲고황경(일제 국방비지원단체인 '애국금채회'간사, 일제전쟁지원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김활란('애국금채회'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모윤숙(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 '국민의용대총사령부' 간사) ▲박인덕(일제 전쟁지원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 실천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송금선(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의원) ▲황신덕(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김은호(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채봉납도' 헌납, '반도총후미술전'의 일본화부 심사위원) ▲심형구('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친일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현제명(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이사, 전시선전단체인'경성후생실내악단'이사장) ▲홍난파(친일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친일가요 '정의의 개가' 작곡) ▲이능화('조선총독부 학무국편집과' 편수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정만조(경학원 부제학.대제학,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김성수(일제 전쟁지원 조직인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임전대책협의회의' 위원) ▲방응모(친일잡지 '조광' 창간,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 고사포 구입.기증, 조선항공공업사에 자본출자) ▲장덕수(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 후생부 후생위원, '징병의 감격을 말함' 등 찬일 논설 다수) ▲권상노(친일강연 '선각자로서'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 ◇을사오적.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박재순(외부대신) ▲이근택 (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정미칠적. ▲고영희(탁지부대신) ▲송병준 ▲이병무(시종무과장) ▲이완용(내각총리대신)▲이재곤 ▲임선준 ▲조중응(농상공부대신). ◇일진회. ▲김명준 ▲서상윤 ▲송병준 ▲양재익 ▲염중모 ▲윤갑병 ▲윤길병 ▲윤시병 ▲이용구. ◇한일합방조약체결매국행위자. ▲이완용(내각총리대신) ▲고영희(도지부대신) ▲민병석(궁내부대신) ▲박재순(내부대신) ▲윤덕영(시종원경) ▲이병무(친위부장관) ▲조민희(승녕부총관) ▲조중응(농상공부대신). ◇1910년 합병당시 수작자. ▲고영희(자작) ▲권중현(자작) ▲김병익(남작) ▲김사준(남작) ▲김사철(남작)▲김성근(자작) ▲김영철(남작) ▲김종한(남작)▲김춘희(남작) ▲김학진(남작) ▲남정철(남작) ▲민병석(자작) ▲민상호(남작) ▲민영규(자작) ▲민영기(남작) ▲민영소(자작) ▲민영린(백작) ▲민영휘(자작) ▲민종묵(남작) ▲민형식(남작) ▲박기양(남작) ▲박영효(후작) ▲박용대(남작) ▲박재빈(남작) ▲박재순(자작) ▲성기운(남작) ▲송병준(자작) ▲윤덕영(자작) ▲윤웅렬(남작) ▲윤택영(후작) ▲이건하(남작)▲이근명(자작) ▲이근상(남작) ▲이근택(자작) ▲이근호(남작) ▲이기용(자작) ▲이병무(자작) ▲이봉의(남작) ▲李完用(백작) ▲李完鎔(자작) ▲이용원(남작) ▲이용태(남작) ▲이윤용(남작) ▲이재학(후작) ▲이재곤(자작) ▲이재극(남작) ▲이재완(후작) ▲이정노(남작) ▲이종건(남작) ▲이주영(남작) ▲이지용(백작) ▲이하영(자작)▲이해승(후작) ▲이해창(후작) ▲임선준(자작) ▲장석주(남작) ▲정낙용(남작) ▲정한조(남작) ▲조동윤(남작) ▲조동희(남작) ▲조민희(자작) ▲조중응(자작)▲조휘연(남작) ▲최석민(남작) ▲한창수(남작). ◇합방이후 수작자. ▲고휘경(백작) ▲민건식(남작) ▲민충식(자작) ▲박경원(남작) ▲성주경(남작)▲송병준(백작) ▲송종헌(백작) ▲이달용(후작) ▲이완용(후작) ▲이인용(남작) ▲이항구(남작) ▲임선재(자작) ▲장인원(남작) ▲정영두(자작) ▲조중수(자작) ▲최정원(남작) ▲한상억(남작). ◇일본 귀족원 의원. ▲김명준 ▲박상준 ▲박중양 ▲송종헌 ▲윤치호 ▲이기용 ▲한상용. ◇일본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중의원) ▲이진호(귀족원). ◇애국자 살상자. ▲김극일 ▲김대형 ▲김덕기 ▲김성범 ▲김영호 ▲김우영▲김태석(강우규의사체포한 고등경찰) ▲노기주 ▲노덕술▲도헌(형사) ▲문용호 ▲박종옥 ▲서영출 ▲양병일 ▲이성근(평북 고등과장) ▲이성엽(형사) ▲이원보(경기도 형사과장)▲정성식(북부산경찰서 고등계주임) ▲최 연▲최석현(애국지사 장진홍 체포) ▲하판낙 ▲허 지. ◇작위를 받은 자. ▲고흥겸(백작) ▲권태환(자작) ▲김석기(남작) ▲김세현(남작) ▲김영수(남작)▲김호규(자작) ▲남장희(남작) ▲민영옥(남작) ▲민철훈(남작) ▲민형식(자작) ▲민홍기(자작) ▲박부양(자작) ▲박승원(남작) ▲이규환(남작) ▲이기원(남작) ▲이능세(남작) ▲이덕용(후작) ▲이범팔(남작) ▲이병길(후작) ▲이병옥(남작) ▲이영주(백작) ▲이원호(남작) ▲이장훈(남작) ▲이종승(자작) ▲이창훈(자작) ▲이충세(자작)▲이해국(자작) ▲임낙호(자작) ▲정두화(남작) ▲조대호(자작) ▲조원흥 (자작) ▲조중헌(남작) ▲한상기(남작). ◇1910년 창설당시 중추원. ▲고영희(고문) ▲권중현(고문) ▲박재순(고문) ▲송병준(고문) ▲이근상(고문)▲이근택(고문) ▲이완용(고문) ▲이재곤(고문) ▲이지용(고문) ▲이하영(고문) ▲임선준(고문) ▲조중응(고문) ▲조희연(고문) ▲권봉수(찬의) ▲김만수(찬의) ▲김사묵(찬의) ▲김영한(찬의) ▲남규희(찬의) ▲민상호(찬의) ▲박경양(찬의) ▲박승봉(찬의) ▲염중모(찬의) ▲유맹(찬의) ▲유정수(찬의) ▲이건춘(찬의) ▲이재정(찬의)▲이준상(찬의) ▲정인흥(찬의) ▲조영희(찬의) ▲한창수(찬의)▲홍승목(찬의)▲홍종억(찬의) ▲고원식(부찬의) ▲구희서(부찬의) ▲권태환(부찬의) ▲김교성(부찬의) ▲김명규(부찬의)▲김명수(부찬의) ▲김준용(부찬의) ▲김한규(부찬의)▲나수연(부찬의) ▲민건식(부찬의) ▲박재환(부찬의) ▲박희양(부찬의) ▲서상훈(부찬의) ▲송지헌(부찬의) ▲송헌빈(부찬의) ▲신우선(부찬의) ▲신태유(부찬의) ▲어윤적(부찬의) ▲엄태영(부찬의) ▲오재풍(부찬의) ▲윤치오(부찬의) ▲이도익(부찬의)▲이봉노(부찬의) ▲이원용(부찬의) ▲정동식(부찬의) ▲정진홍(부찬의) ▲조병건(부찬의) ▲조제환(부찬의) ▲최상돈(부찬의) ▲한동이(부찬의) ▲허 진(부찬의) ▲홍우철(부찬의) ▲홍운표(부찬의). ◇도지사. ▲강필성(황해) ▲고안언(평안북.평안남.경기) ▲고원훈(전북) ▲김관현(충남.함경남) ▲김대우(전북.경북) ▲김동훈(충북) ▲김병태(황해.전북) ▲김서규(전남.전북.경북) ▲김시권(함경북.전북.강원) ▲김윤정(충북) ▲남궁영(충북) ▲박상준(강원.함경북.황해) ▲박영철(강원.함경북) ▲박재홍(충북.충남) ▲박중양(충남.황해.충북) ▲석진형(충남.전남) ▲손영목(전북.강원) ▲송문헌(황해.충남) ▲신석린(강원.충남) ▲신응희(함경남.황해) ▲엄창섭(전남.경북)▲원응상(강원.전남) ▲유만겸(충북) ▲유성준(강원.충남) ▲유진순(충남) ▲유혁노(평안북.충북) ▲유홍순(강원) ▲윤갑병(강원) ▲윤태빈(강원.충북) ▲이규완(강원.함경남) ▲이기방(충남)▲이두황(전북) ▲이범익(강원.충남) ▲이성근(충남) ▲이원보(전북) ▲이진호(평안남.경북.전북) ▲이창근(충북.경북) ▲장헌식(충북.전남) ▲정교원(황해.충남.충북)▲정연기(전북) ▲조희문(황해) ▲한규복(충북.황해) ▲홍승균(충북.전북). ◇조선총독부 국장. ▲김시명(전주.전매) ▲노윤적(관립한성고등여교장겸 학부편집) ▲엄창섭(학무)▲유 맹(내무토목) ▲이진호(조선총독부학무) ▲한동석(전주 전매). ◇도(道)참여관. ▲강필성(전남.함경남) ▲계광순(강원) ▲고원훈(전남.경북.평안남.경기.평안북)▲구두경(경북) ▲구자경(경북)▲권중식(평안남) ▲김관현(함경북.전남) ▲김대우(전남.경남) ▲김덕기(평안북.경남) ▲김동훈(경기) ▲김병태(평안남)▲김상연(강원)▲김서규(함경북.평안남) ▲김시권(경북) ▲김시명(황해) ▲김영배(황해) ▲김영상(전북.함경남.황해.평안남) ▲김영진(함경북.함경남.경남.경북.전북) ▲김영한(황해) ▲김완목(충북) ▲김우영(충남) ▲김윤정(전북.경기)▲김창영(전남) ▲김창한(황해)▲김태석(함경남.경남) ▲김한목(충북) ▲김화준(충북) ▲남궁영(충남.경남) ▲유시환(함경북)▲박상준(평안남) ▲박승봉(함경남.평안남) ▲박영철(함경북.전북) ▲박용구(경기.전남.전북) ▲박재홍(평안남) ▲박철희(충북.전남) ▲백흥기(황해) ▲상 호(충북.경남.함경남) ▲서기순(충남)▲서상면(충북) ▲석명선(강원) ▲석진형(전남) ▲손영목(강원.경남) ▲송문헌(강원.함경남) ▲송문화(평안북) ▲송찬도(함경북)▲신석린(경남.경북) ▲심환진(경남.황해) ▲안종철(충북) ▲양재하(충북) ▲노윤적(경기) ▲엄창섭(경남.함경남) ▲원은상(충북) ▲원응상(전남) ▲유기호(강원.황해.경북. 평안남) ▲유만겸(평안북.경북.평안남.충남)▲유성준(충북.경기) ▲유승흠(함경남) ▲유시환(함경북) ▲유진명(황해) ▲유진순(평안북.평안남.강원) ▲유진순(평안북.평안남.강원)▲유혁노(경기) ▲윤갑병(평안북.경북) ▲윤상희(전북) ▲윤태빈(경기) ▲이계한(강원.경기) ▲이기방(황해.함경북) ▲이범래(함경북.평안남)▲이범익(경남) ▲이성근(함경북)▲이원보(평안북.전남) ▲이봉영(함경북) ▲이종국(평안남) ▲이종국(함경남.평안남) ▲이종은(전북) ▲이창근(경북.경기) ▲이택규(충남.충북) ▲이학규(강원) ▲이해용(함경북.경북) ▲임문석(충남) ▲임헌평(경기) ▲장기창(평안북) ▲장석원(황해.함경남) ▲장윤식(황해.충북) ▲장헌근(함경북)▲장헌식(평안남) ▲정교원(전북.전남)▲정난교(충남) ▲정연기(전북)▲정용신(경북)▲조경하(충남) ▲조병교(함경남) ▲조종춘(강원) ▲주영환(충남.경남.평안남)▲최익하(평안북) ▲최정덕(경북.경남) ▲최지환(평안북.충남) ▲최창홍(충북) ▲한규복(충남.경북) ▲한동석(황해) ▲현 헌(강원) ▲홍승균(경북) ▲홍영선(전남.함경남)▲홍종국(강원).
  • 친일행각 708명 공개

    일제하 친일(親日)활동을 저지른 주요인사 708명의 명단이해방후 처음으로 발표됐다. 여야 국회의원 29명이 참여하고 있는 ‘민족정기를 세우는의원모임’(회장 金希宣의원)은 3·1독립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광복회(회장 尹慶彬)와 공동작업 끝에 확정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동안 민족운동가를 포함한 일부 민간단체에서 몇몇 친일행위자들의 명단을 밝힌 적은 있지만,국회의원 차원에서 정식으로 대규모 명단을 발표하기는 처음인데다,사회·문화·종교·언론계에서 지도층으로 활약했던 인사가 다수 포함돼있어 큰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명단에 오른 일부 당사자 가족 등은 “역사적 객관성이 없다.”고 반발하는 등 즉각 논란도 일고 있다. 명단에는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한 이완용 등 ‘을사5적’과 ‘정미7적’을 비롯,일제하 중추원관련자·작위수상자·도지사·친일단체관련자·판사·고등형사 등이 두루 포함돼 있다. 특히 김활란 모윤숙 유치진 홍난파 서정주 김동인 현제명등 해방후 우리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문화예술인과,현재까지 유력신문으로 우리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아일보의 창립자 김성수,조선일보 창립자 방응모 등도 포함돼있다. 김희선 의원은 “이번 친일명단 발표는 해방후 50여년만에 처음으로 이뤄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서1차발표일 뿐”이라고 밝혔다.이어 “곧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가칭)을 국회에 제안해 입법화를 추진,범국가적 차원의 일재잔재 청산작업을 벌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명단 발표에는 민주당에서 김 의원외에 김경천(金敬天) 김성호(金成鎬) 김태홍(金泰弘) 배기선(裵基善) 박상희(朴相熙) 설송웅 설훈(薛勳) 송영길(宋永吉) 신기남(辛基南) 심재권(沈載權) 원유철(元裕哲) 이상수(李相洙) 이재정(李在禎) 이종걸(李鍾杰) 이창복(李昌馥) 이호웅(李浩雄) 임종석(任鍾晳) 전갑길(全甲吉) 정장선(鄭長善) 최용규(崔龍圭)의원이,한나라당에서는 김원웅(金元雄) 김홍신(金洪信) 서상섭(徐相燮) 이부영(李富榮) 의원 등 모두 25명이 참여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김희선 회장 “역사 심판엔 시효 없어 특위 만들어 지속조사”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의 회장인 민주당 김희선(金希宣) 의원은 28일 “이번 일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기바란다.”고 밝혔다.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재야시절부터 민족정기 바로세우기 운동에 앞장서온 김 의원은 제 16대 국회에 등원한 후 친일(親日)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의정활동에매진해 왔다. ◆친일파 선정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국회에서 일제 잔재청산을 위해 일하던 중 언젠가 ‘국립묘지에 친일파가 많이묻혀 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16대 국회에서 반드시 친일 반민족행위자 청산과 진상규명 작업을 해보자.’고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외부의 압력이나 청탁은 없었는가. 간접적으로 관심을 표명한 경우는 있었으나 명단에서 빼달라는등의 직접적인 부탁은 없었다.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명단 선정작업보다는 발표하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대선 등을 앞두고 있어 정치 쟁점화할 가능성도 있어 내부적으로도 발표시점을 놓고일부 이견이 있었다.하지만 민족문제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데 흔쾌히 동의해 준 젊은 의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꼭 전하고 싶다. ◆이번 작업의 의미를 어디에 두는가. 고무적인 것은 의문사 진상규명,민주화운동 등에 대해선 국민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친일파 청산에 대해서는 단 한 명도 이견이 없었다는점이다.그동안 국민들 가슴 속에 쌓인 분노를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정부나 정치권이 반성해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국회내에 친일 잔재 청산 진상규명 특위를 설치,이번 명단에서 빠진 사람 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조사가 이뤄지도록 노력 할 것이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등 특정인들이 빠진 것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한나라당 김원웅·서상섭 의원)이번에는 반민특위 기준으로만 했고,앞으로 계속 경찰서장급,소대장급 이상을 조사할 계획이다.결국 (친일행적을 한 일정 신분이상의 인물들은)다 들어갈 것이다. 홍원상기자 ws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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