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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일의 역사의 창] 계속되는 역사전쟁

    [이덕일의 역사의 창] 계속되는 역사전쟁

    일제강점기 때 두 종류의 전쟁을 치렀다. 하나는 빼앗긴 강역을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관을 둘러싼 역사전쟁이었다. 역사전쟁의 최전선은 고대사였다. 지금도 한국 고대사가 역사전쟁의 최전선인 것은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한 업보가 반영된 것이다. 식민사학이라고 통칭돼 왔던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왜곡한 한국사상(像)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한국사의 시간 축소고, 다른 하나는 공간 축소다. 시간 축소의 대표적인 사례가 ‘단군’을 말살하고,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라는 책을 발간해 대종교, 천도교, 동학교, 단군교, 보천교, 증산교 같은 민족종교와 ‘미륵불교, 불법연구회’ 등의 불교 단체들을 ‘유사종교’로 낙인찍어 탄압했다. 한마디로 항일 민족정기를 고취시키는 단체를 ‘유사종교’라고 낙인찍고 탄압한 것이다. 이렇게 단군을 말살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지우는 것으로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전 24세기에서 서기 4~5세기경으로 대폭 끌어내렸다. 지금도 해외 한국사 서적들은 한국사가 서기 4~5세기경에 시작된 것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의 공간 축소를 위해 이용한 것이 낙랑군의 위치다. 일제는 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 편찬 작업에 나섰다. 한국사의 무대에서 대륙과 해양을 잘라 버리고 ‘반도사’의 틀에 구겨 넣은 것이다. ‘조선반도사’의 상고부터 통일신라까지는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집필했는데 ‘낙랑군의 군치(郡治)는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했다. 낙랑군 위치 비정의 기본이 되는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낙랑군은 고대 요동, 즉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거듭 서술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 사례만 들자.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산하에 열구(列口)가 있는데, 열수(列水)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후한서 군국지’는 ‘열수는 요동에 있다’(列水在遼東)고 서술하고 있다. 열수가 요동에 있으니 열구현도 요동에 있고, 낙랑군도 요동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마니시 류는 ‘열수는 대동강’이라고 주장했다. ‘후한서 군국지’에 요동에 있다고 말한 열수를 대동강이라고 주장하려면 다른 사료적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사료가 있을 턱이 없다. ‘반도사’의 틀에 따라 우긴 것뿐인데 이런 논리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정설, 통설’로 행세한다. 또 ‘후한서 광무제본기’ 주석에는 “낙랑군은 옛 (고)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在遼東)”는 구절도 있다. 낙랑군의 위치가 고대 요동이라고 쓴 중국 사료는 차고 넘친다. 반면 지금의 평양이라고 쓴 사료는 없다. 그러자 역사 해석의 기초인 문헌 사료는 팽개치고 고고학으로 도망갔다. 평양 일대에서 한나라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고고학으로 ‘낙랑=평양설’을 확립한 자는 도쿄공대 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다.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고적도보’의 편찬자로도 유명한데, 총독부 사관 추종론자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이 유물들에 대한 일기장을 남겼다. 1918년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가를 돌아다니면서 한(漢)나라, 낙랑 유물들을 사서 총독부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문성재 박사가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라는 저서에서 이 일기들을 공개했는데, 한 대목만 인용하겠다.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 (북경)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세키노 다다시 일기).” 평양 일대에서 출토됐다는 이른바 한나라 유물들과 낙랑 유물이란 것들은 모두 이런 경로로 나온 것이다. 문헌 사료는 물론 고고학 근거도 다 무너졌는데 이른바 전문가들은 ‘낙랑=평양설’을 ‘정설, 통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이 문제에 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은 의아해하면서 전문가 자체를 불신한다.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불신받는 사회는 위태하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초래한 사람들 또한 전문가들이기에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국가 핵심 기능 집결… 2000년 역사 헤쳐온 ‘한국의 얼굴’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국가 핵심 기능 집결… 2000년 역사 헤쳐온 ‘한국의 얼굴’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차 탐사가 지난 17일 광화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세종대로의 동쪽과 서쪽을 오가면서 진행됐다. 답사단은 세종문화회관 돌계단을 출발해 세종대왕·충무공 동상~대한민국역사박물관~종로구청~비전~서울역사박물관~경희궁 방공호까지 두 시간의 일정을 빠듯하게 소화했다. 해설을 맡은 이기훈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차분하고 진지하게 세종문화회관의 전신 시민회관 화재사건부터 요즘 방영되는 사극 ‘칠일의 왕비’의 주인공 단경왕후 신씨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역사의 씨줄과 날줄의 세계로 30여명의 답사단을 끌어들였다.“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라는 말이 맞는다면 도시는 인간이 만든 최대의 걸작이다. 그중 한국인이 세운 최고의 도시는 서울이다. 서울은 의심할 여지 없는 대한민국의 종주(宗主)도시이자 의사(擬似) 이상향이다. 2000년의 생성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도이며,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메갈로폴리스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토크빌이 “파리는 프랑스 그 자체”라고 표현한 것에 빗대 한때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드슨은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다”는 말을 남겼다.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이후 ‘서울’이라는 도시명은 ‘코리아’라는 국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빅 브랜드가 됐다. ●정치·행정·사법·문화예술의 원조 역할 수도 서울이 한국의 얼굴이라면 서울의 얼굴은 어디인가? 한국인 열에 여덞, 아홉은 주저 없이 광화문을 꼽을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포함, 국가의 중추기능이 총집결된 수도 서울의 1번지이다. 한국인과 서울사람의 삶과 꿈이 교차하는 역사무대이다. 역사는 발-글-발의 순서로 쓰여진다. 발로 쓴 글을 본 이가 다시 발로 현장을 밟았을 때 비로소 역사는 살아 움직인다. 답사단은 광화문 구석구석을 발로 밟으면서 ‘도시 중의 도시’라고 쓰여진 광화문의 역사를 재확인했다. 광화문은 정치, 행정, 사법, 교육, 언론출판 그리고 대중문화와 예술의 ‘원조’였다. 이 나라 모든 사회담론과 문화현상의 생산지이자 소비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본거지화하면서 왜곡된 배치와 구역 조정이 이뤄졌고 현재의 광화문이 이를 이어받은 것이 현실이다. 건국 이후 왕조와 식민시대의 잔재 일소 정책 때문에 국적 불명의 현대화가 진행됐다. 최소한 강점기 이전 대한제국기로의 회복을 시도했어야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 비록 행정과 공론이라는 최소한의 핵심 기능만 남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를 존재하도록 떠받치는 광화문 뒤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백악(북악)의 위엄은 여전하다. 광화문 동쪽 전면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대사관, KT빌딩, 교보빌딩이 청진동과 수송동, 종로길로 이어지고 서쪽 전면부 정부청사와 세종문화회관이 도렴동, 당주동, 내수동을 거쳐 새문안과 정동, 서대문까지 펼쳐진다. 이곳을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광화문의 주인이다. 서울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삶과 추억의 많은 부분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장으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외쳤고, 촛불을 높이 들어 암흑을 밝혔는지도 모른다. ●광화문광장, 삶의 새 방향 제시할 수도 광화문이 재조명되고 있다. 부활이 회자되고 있다. 왕조시대 절대왕권의 상징이었고,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시대 체제의 선전장이었던 곳.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2.2㎞ 구간에 횡단보도가 단 하나도 없던 그 시절, 광화문은 국가독점의 공간이었다. 30년 전 6·10항쟁 때도, 15년 전 미선·효순 추모집회 때도, 9년 전 광우병 파동 때도 광화문사거리는 금역이었다. 제2의 ‘명박산성’이 등장할 수 없는 연원이 있다. ‘민의의 분출지’라는 유전자가 내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선비와 유생들의 상소 시위지였고,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재우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면서 사흘 동안 곡을 한 장소였다. 광화문의 조선 개국 당시 지층은 무려 8m 아래에 있다. 1394년 한양천도 이래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과 사고가 8m 깊이로 쌓이고 쌓여 현재의 지표를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종로의 4m보다 갑절 깊다. 그만큼 많은 것들이 들어섰고, 덮거나 뜯고, 또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광화문의 땅켜는 증언한다. 육조거리는 너비 50m의 보기 드문 한마당이었다. 현재의 광화문광장 자리가 조선시대의 육조거리라고 보면 된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광화문 앞 광장을 제후국의 상징인 ‘칠궤(七軌)도로’가 아니라 황제의 수레 9개가 지나갈 수 있도록 ‘구궤(九軌)도로’로 만든 일이다. 박정희 정권이 1962년 50m 너비의 세종로를 현재의 100m로 넓힌 것도 그 이상의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답사단은 8m 깊이의 광화문에 또 하나의 지층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심정으로 서울역사박물관 방공호 앞에서 이날의 그랜드투어를 마무리했다. 어쩌면 면모를 일신한 광화문광장이 한국인과 서울사람의 삶을 바꿀 방향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잘 만든 도시가 다시 인간을 만드는 선순환의 원리 때문이다.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단독] 왜군 순절비가 경북 고령中 교훈비로 둔갑됐다

    [단독] 왜군 순절비가 경북 고령中 교훈비로 둔갑됐다

    경북 고령의 한 공립학교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이 제작한 왜군(倭軍)의 충절을 기린 순절비를 그 학교의 교훈비로 세워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절비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내용을 담은 ‘일본서기’를 출처로 한다. 이에 고령군의 향토사학자들은 “교육 현장에 일제 침략 잔재가 버젓이 자리해서는 안 된다”면서 조속한 철거를 요구하고, 역사교훈의 도구로 쓰자고 제안했다.14일 고령의 원로 향토사학자 등에 따르면 고령군 대가야읍의 고령중학교의 교훈비에는 원래 대가야 멸망 당시 왜군 장수였던 쓰키노기시 이키나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비 앞면의 ‘조이기난순절지(調伊企難殉節址) 남차랑(南次) 서’에서 알 수 있다. 뒷면에는 쓰끼노기시 아내 오오바코의 하이쿠(일본 고유시)가 새겨졌다고 한다. 쓰끼노기시는 일본 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드는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등장하는 왜군 장수로, 562년 대가야가 신라의 침략으로 멸망할 당시 출병했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순절비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미나미 지로(南次) 제7대 조선 총독(1936~41)이 고령 대가야읍 연조리 고령향교 인근 옛 대가야 왕궁터에 ‘임나대가야국성지비’(任那大伽倻國城址碑)와 함께 세웠다. <서울신문 6월 13일자 13면 참조> 이런 기념물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과거에 경영했으니 일제의 침략이 당연하다고 강조한 것이다.그러다 순절비는 광복이 되자 고령초교 내 대가야시대 우물터 인근으로 옮겨져 돌다리로 사용되었다. 고령중학교의 관계자가 1947년 11월 개교하면서 이 순절비의 앞면을 모두 깍아내고 교훈을 새겨 교정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에 ‘굳세고 참되고 부지런하자’라는 교훈을 새겼으나 뒷면의 하이쿠는 대충 지운 탓에 일부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향토사학자들은 “비록 비석의 앞면 글씨는 모두 지워 없어졌지만, 근대기 일제 침략의 흔적을 담고 있는 비석”이라며 “새정 부에서 가야사를 연구한다니, 이 비석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일제 침략과 역사 왜곡의 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강점기에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征韓論)의 역사적 근거로 활용됐지만,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일공동역사연구를 하던 2010년부터 이런 주장을 폐기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왜 이 사람을 기념하나요?…동상 수난 시대

    왜 이 사람을 기념하나요?…동상 수난 시대

    “이화 교정 내 친일파 동상은 무엇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지난 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 앞에 학생 10여명이 모여 이 대학 초대 총장인 김활란 박사의 교내 동상에 친일행적 알림팻말을 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월 발족한 ‘이화여대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 소속 학생들은 “이대 교정에 당당하게 있는 김활란 초대 총장의 동상은 친일 잔재 중 하나”라며 “‘여성 박사 1호’, ‘여성주의 운동 선구자’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편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오는 6월까지 모금을 진행하고, 9월 중순쯤 팻말을 세울 예정이다. 김활란 박사는 YWCA 창설자이자 한국 최초 여성 박사 등으로 통한다. 하지만 1936년 이후 적극적으로 친일 움직임을 보였다. 칼럼을 쓰거나 강연을 했고 1941년 창씨개명 이후 일제 학도병 징용, 위안부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동상은 1970년대 학교에 설치됐다. 친일행적이 2013년 일부 학생들이 철거를 요구하며 동상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시위를 벌였고, 지난해 7월 교육부의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에 반발하던 학생들은 동상에 페인트를 칠하고 달걀을 던지기도 했다. 학교나 공원 등 공공장소에 있는 일부 동상이 친일 행적 논란이나 인물에 대한 달라진 세간의 평가 등으로 철거 논란을 겪는다. 특히 학교 설립자나 기념인물의 동상을 세운 교육기관에서 이들의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경우가 많다. 한국외대 김흥배, 영남대 이도영, 고려대 김성수, 연세대 백낙준, 광신고 박흥식, 상명대 배상명, 부산 경남고 안용백, 서울대 현제명 등이 대표적이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친일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던 시절에 해당 인물의 공만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기념사업이 이뤄졌다”며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인정한 경우에는 최소한 이런 행적에 대한 설명도 함께 알릴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상 설립을 놓고도 논란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동상을 세워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평가가 엇갈린다. 캠퍼스 운동장에 역대 대통령 10명의 동상을 만들어 놓은 한서대(충남 서산)는 박 전 대통령 동상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학교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워낙 큰 데다 학내 구성원의 반대 의견이 대다수”라고 말했다. 옛 대통령 별장 청남대관리사업소도 박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을 두고 고민 중이다. 1983년 조성된 청남대는 2003년 일반에 개방된 뒤 역대 대통령 동상을 설치해 왔다. 하지만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명예 퇴진한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반면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진 점 등을 들어 동상 설립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청남대관리사업소 관계자는 “기념사업회가 구성되지 않아 동상 건립을 논의할 주체가 없고, 주민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최만진의 도시탐구] 히틀러가 판치는 우리 관공서

    [최만진의 도시탐구] 히틀러가 판치는 우리 관공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끔찍한 독재자로는 히틀러를 들 수 있다. 그는 1934년 합법적 선거를 통해 독일 총통에 취임한 후에 전무후무한 독재 통치를 단행했고, 급기야 대전을 일으켜 전 유럽과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 권력의 잔혹함은 600만명의 무고한 유대인을 비참하게 학살한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래 그는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화가나 건축가가 되고자 미술학과와 건축과를 지원했으나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혼자 공부해 지식을 습득했다.이때 쌓은 건축적 식견은 후에 독재 통치 및 권력에 대한 찬양 및 고무의 수단으로 십분 이용된다. 이는 제3제국 건축이라 불렸는데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제국의 대를 잇는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한 의도였다. 원래 로마 고전주의 건축은 피타고라스 등 철학자들이 만든 철학적, 음악적, 수학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가 수로 이루어져 있고, 숫자의 비율을 통해 만물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음악에서 한 옥타브가 1대2의 진동수 비율로, 도와 솔로 대표되는 5도는 2대3의 비율로 구성돼 있는 등의 원리를 발견해 음향학을 창시했다. 이러한 수학적, 음악적 화음 비율은 시대에 따라 점차 발달하게 되고 건축도 이를 따랐다. 처음에는 단지 평면에서만 가로와 세로 크기를 정할 때에 1대2, 3대4, 2대3 등의 다양한 화성 비율을 적용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간의 높이에도 기하학적 평균비 등을 대입해 건축물에서 완전한 우주의 조화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히틀러의 건축은 겉으로는 고전주의 양식을 차용하면서 핵심적 원리인 수학적, 음악적 비율은 심히 왜곡해 사용했다. 이는 주로 당시 나치의 군수 장관이자 건축가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를 통해 시행됐는데 사람을 압도하는 비율로 무력통치의 로마 정신을 히틀러 정치에 반영하고 존속하고자 했다. 1939년에 지어진 총통 관저는 수직적 비례와 공간의 거대함이 얼마나 위압적이었던지 방문했던 폴란드 총리가 심리적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히틀러 건축은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베를린올림픽 경기장이다. 나치 제국의 영광과 영원한 존속을 세계에 선전하고, 힘을 과시하는 전형적인 선동 도구로 이용됐다. 영혼을 말살하는 초대형 독재 건축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더 놀랍고 끔찍한 것은 히틀러 건축이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특히 관공서 건축에 적극적으로 도입됐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정부종합청사, 시청이나 구청, 심지어 주민자치센터까지도 하나같이 수직적 위압감과 폐쇄성을 가진 변질된 고전주의 건축 형태와 언어를 가지게 됐다. 이는 독재 권력의 적폐를 감추고 국민에게 무의식적인 복종과 굴복을 종용하는 도구로 사용돼 왔다. 이러한 건축은 최근까지 이어져 왔으며,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까닭에 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서울시의 신청사 건립이 세간의 논쟁거리가 됐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3제국이 패망한 후 독일은 독재의 어두운 잔재를 몰아내기 위해 투명하면서도 친시민적인 민주주의 형태의 공공건축을 끊임없이 시행해 왔다. 현재 대선 정국에서 최고의 정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적폐 청산은 히틀러가 차지하고 있는 우리 관공서 건물에서부터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4월의 눈’ 흩날리면 군항 고도 진해선 ‘벚꽃 엔딩’

    ‘4월의 눈’ 흩날리면 군항 고도 진해선 ‘벚꽃 엔딩’

    경남 창원시 진해구(옛 진해시)는 군항과 벚꽃의 도시다. 일제가 군사적 목적에서 1910년부터 군항시설과 도로 등을 건설하는 등 군항도시를 계획해 조성했다. 해방이 된 뒤에는 해군사관학교를 비롯해 해군 관련 부대와 시설이 잇따라 들어서 대한민국 해군 기지가 됐다. 도시 곳곳에 일제강점기 때와 1950~60년대 지은 오래된 건축물이 보존돼 있다.일제가 진해군항도시를 조성하면서 도시미관을 좋게 하려고 벚나무를 심은 게 진해 벚나무의 유래로 전해진다. 해방 뒤 벚나무가 일제 잔재라는 인식이 퍼져 대부분 베어 냈다. 그 뒤 왕벚나무는 한국에서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 수종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1960년대부터 진해지역에 다시 왕벚나무를 심기 시작해 36만여 그루에 이르는 벚나무가 도심과 주변 산등성이까지 우거진 지금의 진해 벚꽃 도시가 조성된 것이다. 해마다 3월 말~4월 초, 하얀 벚꽃으로 뒤덮힌 도시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진 해안도시 풍경은 황홀하다.창원시와 진해군항제축제위원회는 벚꽃이 절정인 다음달 1~10일 열흘 동안 진해구 전역에서 세계 최대 벚꽃 축제인 진해군항제를 개최한다. 20일 창원시에 따르면 해마다 군항제 기간에 벚꽃축제와 군항시설 등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300여만명이 진해를 방문한다. 만개한 벚꽃길을 걸으며 축제를 즐기고 도시 곳곳에 널려 있는 근대건축물과 군부대를 탐방하는 봄 나들이 재미가 쏠쏠하다. 진해 군항제는 1953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북원로터리에 세우고 이승만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올린 게 시초다. 북원로터리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다 1963년부터 진해 군항제를 시작해 올해 55회째다. 기상예보 기관은 올해 진해지역 벚꽃은 오는 26일쯤 꽃잎 2~3개가 피면서 개화가 시작돼 전야제가 열리는 31일 전후로 만개할 것으로 예보하고 있다. 벚꽃은 개화 5~6일쯤 뒤 활짝 피므로 올해는 군항제 개막일을 전후해 눈부신 벚꽃 절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군항제는 오는 31일 오후 6시 중원로터리 특설무대에서 식전 공연과 축하 공연, 불꽃쇼 등 개막행사로 시작돼 다음달 10일까지 추모행사, 이 충무공 호국퍼레이드, 공연예술행사, 여좌천 별빛축제, 속천항 멀티미디어 해상 불꽃쇼, 군부대 개방행사, 군악의장페스티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김종문 창원시 문화예술과 축제담당은 “올해 군항제에는 개막식 때 불꽃쇼를 비롯해 새로운 행사를 많이 추가했다”고 말했다. 다음달 7~9일 진해공설운동장 등에서 육해공군과 해병대, 미8군 등의 군악대와 의장대 등이 펼치는 진해군악의장페스티벌은 군항제의 으뜸 볼거리 행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해군사관학교와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해군교육사령부, 미해군 진해함대지원부대가 축제 기간에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고, 부대 안에서 다양한 체험·전시 행사를 한다. 해군 부대 안에도 수십~100여년 된 벚나무가 우거져 있어 축제 때면 눈부신 벚꽃 하늘이 펼쳐져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부대 안 박물관·함정 등도 개방한다. 다음달 1일에는 오후 8시 속천항 해상에서 ‘멀티미디어 불꽃쇼’가 펼쳐져 바닷가 밤하늘에서 오색찬란한 불꽃이 쏟아진다. 진해루 앞 방파제 구간에 6·25 참전 16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국기를 내걸어 ‘세계의 거리’를 조성한다. 군항마을 빛거리 조성, 여좌천 주차장 주변에 세계음식거리 조성, 진해 시가지 중간에 있는 야트막한 제황산 공원에 경관조명을 설치해 별빛거리를 조성하는 등의 행사는 올해 처음으로 하는 행사다. 특히 제황산 정상에 있는 진해탑(28m) 8층 전망대에서 보면 사방으로 시가지와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화역 주변 벚꽃이 우거진 철길을 비롯해 장복산 공원 벚꽃터널, 안민고개 십리 벚꽃길, 여좌천 로망스다리 주변 벚꽃길, 제황산 공원, 진해 내수면 환경생태공원 벚꽃 등은 군항제 기간에 꼭 둘러볼 벚꽃 명소다. 창원시는 축제 기간에 시내 교통 체증을 줄이고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올해 처음으로 중심도로 버스전용차로제를 시행한다. 해군교육사령부 영내를 비롯해 도심과 외곽 곳곳에 모두 1만 62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임시주차장을 확보하고 임시주차장과 주요 행사장 사이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 82대를 운행한다. 셔틀버스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5~10분 간격으로 다닌다.권중호 시 안전건설교통국장은 “군항제 기간에 올해 처음으로 버스전용차로제를 시행함에 따라 교통혼잡이 예상되는 주말에는 승용차는 외곽 주차장에 세워 두고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편하게 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해구 지역은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시가지 형태와 100년이 넘은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세월이 흘러가면서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도시로 조명받고 있다. 진해지역 구도시 시가지 구조는 중원로터리와 북원로터리, 남원로터리 등 3개의 로터리가 이어져 있다.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8개의 도로가 뻗어 있다. 이 같은 시가지 구조는 일제강점기 시절 계획해 만든 것으로 당시 형태가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해군 기지로 군사보호구역에 묶여 개발이 제한되다 보니 도시 조성 당시 시가지 구조와 건축물 등이 보존될 수 있었다.진해우체국, 시민문화공간 흑백, 새수양회관, 일제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 백범 김구 선생 친필 시비, 1930년대 건축된 중평동 일본식 장옥, 진해탑, 진해역,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 중앙동 군항마을 역사관, 적산가옥 등 다양한 근대문화유산 건축물이 있다. 군항마을 역사관은 1920년대 지은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해 역사자료 전시관으로 꾸몄다. 1·2층 전시관에 진해의 역사와 근대문화유산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등이 전시돼 있어 진해 탐방에 앞서 군항마을 역사관을 먼저 둘러보면 현장을 편하게 찾아다닐 수 있다. 진해우체국은 러시아풍으로 1912년 건립된 건물로 2000년까지 우체국으로 사용됐다. 사적 291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공간 흑백도 1912년 지은 건물로 2008년까지 ‘흑백다방’으로 운영되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현재 음식점으로 쓰고 있는 새수양회관은 1938년 건립된 3층 목조 건물로 지붕이 육각형 정자 모양을 하고 있다. 건물이 뾰족해 뾰족집이라고도 부른다. ‘선학곰탕’ 음식점 건물은 일제강점기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으로 1938년 건축된 건물(근대문화유산 193호 등록 문화재)이다. 진해역은 1926년 11월 건립돼 2014년까지 운영되다 진해선 폐선으로 문을 닫았다. 근대문화유산 192호 등록 문화재다. 8층으로 이뤄진 진해탑은 일제가 세운 러·일전쟁 전승 기념탑을 부수고 그 자리에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1967년 건립했다. 2층에 창원시립 진해박물관이 있다. 북원로터리 중앙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52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이순신 동상이다. 벚꽃길로 유명한 여좌천 둑은 일제가 군항도시 조성을 하면서 하천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 주민을 동원해 쌓은 건축물이다. 해군기지사령부 부대 안에 있는 진해요항부 사령부(등록 문화재 194호)와 진해방비대 사령부 본관·별관(등록 문화재 195·196호), 진해요항부 병원(등록 문화재 197호) 등도 지은 지 100년이 넘은 건물들이다. 해군기지사령부 안에는 일제 해군 통신대가 썼던 건물을 개조해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이용했던 건물도 남아 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 뺏지 않고 지킨 일본인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 뺏지 않고 지킨 일본인

    소설 다쿠미-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박봉 지음/솔과학/283쪽/1만 4000원‘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망우리 공동묘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에 새겨진 글귀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가 걷어내지는 과정에서 그의 묘가 소중히 가꿔진 이유는 뭘까. 그는 ‘조선소반’, ‘조선도자명고’라는 두 편의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가 사라지고 잊혀지는 게 안타까운 마음에 남긴 작품이다. 같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예술품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갈 때 그는 자신이 모은 이 땅의 민예품을 모아 우리에게 전해줬다. 얄궂은 운명으로 맺어진 두 나라 사이에서 묘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인물의 삶에 이 소설은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울 옛 국세청 별관 터 내년 광장·박물관 조성

    내년 서울 덕수궁 인근 옛 국세청 별관 부지와 대한성공회 앞마당에 우리나라 근대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시민광장이 조성된다. 시민광장 조성은 서울시가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잔재였던 옛 국세청 별관 건물을 철거하고 역사적 가치를 회복해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세종대로 일대 역사문화 특화 공간 조성 사업’ 하나로 추진된다. 시민광장 아래 지하엔 서울의 도시·건축 발전 과정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서울도시건축박물관’이 생긴다. 시민광장은 지하 보행로로 서울도서관, 시민청, 시청역 등과 이어진다. 시는 시민광장과 서울시의회 앞마당, 인근 보도 바닥재를 통일해 하나의 열린 시민광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시의회 앞 지하보도 출입구는 통합광장 내로 이전해 보행 환경도 개선한다. 서울시와 대한성공회는 시민광장 조성에 공감, 2015년 5월 옛 국세청 별관과 대한성공회 신관을 동시에 철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근상 대한성공회주교는 25일 시민광장 조성과 관련해 서울시청에서 협약을 체결한다. 서울시는 “19세기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근대 한국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정동 일대를 역사문화 명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두 노학자, 식민사관에 ‘폭탄’ 던지다

    두 노학자, 식민사관에 ‘폭탄’ 던지다

    식민사관의 잔재들과 자민족 비하 등을 극복하는 데 노력해 온 두 노학자가 일본 제국주의의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주권 침탈 상황을 실증적으로 복원해 우리 근대사를 재해석한 학술서를 잇따라 출간해 주목받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의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조약 강제와 저항의 역사’(지식산업사)와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청계)이다. 이 명예교수의 신간은 1992년부터 1차 사료에 기반해 연구해 온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의 역사적·국제법적 불법성을 집대성한 노작이다. ‘한일의정서’(1904년 2월), ‘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1905년 11월), ‘한일신협약’(1907년 7월), ‘병합조약’(1910년 8월) 등 침탈 단계마다의 불법성을 파헤쳤다. 대부분의 협약은 국가 원수인 황제의 비준서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병합조약은 황제가 칙유 발부를 거부했다. 일본은 구미 열강에 공개한 ‘영문본’의 경우 원본에도 없는 ‘협약’(Agreement)이라는 단어를 써 정식 조약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이 같은 기만과 엉터리가 협약 원본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명예교수는 18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을사늑약의 경우 문서 제목조차 없고, 병합조약은 한국과 일본 측 문서의 필체가 모두 같은데 통감부 관리인 마에마 교사쿠가 썼기 때문”이라며 “고종과 순종은 두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고, 문서 어디에도 한국 측 의사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가 확증한 성과 중 하나가 바로 일본 군부가 을사늑약 당시 군을 동원해 한성(서울)을 점령했던 사실이다. 그가 지난해 5월 입수한 1911년 일본 육군성의 극비 보고서 ‘육군정사’(陸軍政史·전 10권)는 국내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주차군(주둔군)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늑약 당시 일본군이 한성을 점령 중이었다고 보고한 내용이 발견됐다. 이 명예교수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1995년 출간한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에 쓴 점철된 강제, 기만, 범법이라는 표현을 2017년 현재에도 전혀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며 “연구 작업은 힘들었지만 외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730여 쪽에 달하는 황 교수의 저서는 대한제국의 적극적 대일 저항성을 ‘재해석’하고 교정하는 데 무게를 둔다. 기존 국사학계가 1896년 고종의 러시아공관 이어(移御)를 피란에 방점을 둔 ‘파천’으로 지칭하는 데 반대한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의 ‘아관망명’으로, 국제법상의 정치적 행위로 해석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그는 “파천(국왕이 도성을 떠나 피란)은 일본 측 해석이며, 당시 서양 자료를 보면 망명으로 기술하고 있다”며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고종의 국내 망명정부 수립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 교수는 1894년 군국기무처가 주도한 개혁인 ‘갑오경장’도 친일 세력이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일제의 경제침탈 기반을 조성했던 만큼 ‘갑오왜란’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 침략전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동학농민의 전쟁과 대한제국의 투쟁이 역사 속에서 실종됐다는 지적을 내놓는다. 황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국사를 자신들의 독점물로 여기는 국사학자와 뉴라이트 국사학자들은 친일파 미화, 자민족 비하, 독재 정당화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기존 학계에 불시의 충격을 줄 ‘도시락폭탄’을 던진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다음달 후속작으로 ‘끝나지 않은 역사’(가제)를, 황 교수는 7월 중 후속 연작인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대한제국과 갑진왜란’을 출간할 예정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국민의당 전대 ‘자강론’으로 표심잡기…연대론 선긋기

    국민의당 전대 ‘자강론’으로 표심잡기…연대론 선긋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후보들은 유일한 대권 주자인 안철수 전 대표를 중심으로 대선 승리를 이뤄내자는 ‘자강론’을 일제히 펼쳤다. 전대는 15일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대표당원 6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당권 주자들은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정견 발표를 통해 막판 한 표를 호소했다. 당 대회는 이날 오후 3시 15분쯤 후보들의 정견 발표를 마치고 현장 참여 대표당원들을 상대로 투표에 돌입했다. 후보들은 자신이 정권교체를 이끌 책임자임을 강조했다. 전체적으로 ‘대세론’을 폈던 박지원 후보와 나머지 후보 간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가장 먼저 연단에 오른 박지원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겠냐”며 “우리는 새누리당 잔재세력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다”고 말했다. 황주홍 후보는 “지난해 4·13 총선 승리의 감동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초라한 당 지지율에 우울하다”며 “새 얼굴 새 생각 새 간 판으로 새 출발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강조했다. 손금주 후보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연대를 구걸하지 않겠다. 다른 후보들이 능력은 출중하지만 아쉽게도 과거에 집착한다”며 “저는 우리 안에서 손가락질하며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며 정치 신인임을 부각했다. 문병호 후보는 “처음부터 자강 노선을 주장해 전대에 자강 바람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누구냐”며 “기득권을 혁파하고 구체제를 청산할 유일한 당은 오직 국민의당”이라고 말했다. 김영환 후보는 “오지 않는 손학규와 정운찬, 올 생각도 없는 반기문을 쫓아다니며 남의 집 문을 기웃거린 끝에 지지율이 떨어지고 안철수 전 대표는 왜소화된 것”이라며 “지난해 우리 당을 만든 안철수를 중심으로 나아가 승리하자”고 말했다. 앞서 안철수 전 대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여기저기 연대를 구걸한 정당이 승리한 역사는 없다”며 “이번 대선 정권교체의 최고 적임자는 국민의당”이라고 외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성 변천사 통해 본 한국 도시의 원류

    경성 변천사 통해 본 한국 도시의 원류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염복규 지음/이데아 펴냄/416쪽/2만 2000원 서울 종묘와 창덕궁·창경궁을 가로질러 안국동에서 이화동으로 넘어가는 율곡로. 이 도로 때문에 창덕궁·창경궁과 공간적으로 분리된 궁궐의 뒤뜰을 최근까지 비원이라 불렀다. 약 20년 걸려 1932년 완공된 이 도로는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으며 조선의 궁궐을 유원지 격인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일과 함께 흔히 일제의 패악으로 여겨지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 도로 건설을 놓고 조선 황실과 일반인의 시각이 달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선의 지배 세력은 종묘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로 봤지만, 일반 백성들은 교통의 편리를 늘리는 일로 받아들였다. 1910년대 남대문과 을지로 일대 개발이나 1920년대 종로 일대 도시 개발을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나 친일파들이 반대하며 조선인을 대변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토지 보상 등을 둘러싸고 일반 일본인들의 사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된 결과였다. 도시사 전공자로 서울을 집중 탐구하고 있는 저자는 ‘현대 서울’의 기원을 일본 제국이 설계한 식민지 시기 경성의 청사진에서 찾는다. 일제는 다양한 제도와 질서를 근대와 문명의 이름으로 한반도에 이식했는데 그중 하나가 도시 계획이다. 저자는 1910년 8월 병합에서 1945년 8월 해방까지 일본이 도입한 서구, 또는 일본을 경유한 서구와 대면한 경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찬찬히 살핀다. 우리 근대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일제 잔재의 상당 부분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우리가 품었던 탈중세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식민자가 주도한 다양한 개발이 전개된 경성의 도시 건설과 변용, 그에 대한 도시 사회의 대응과 변화는 이 과정에서 내면화된 한국적 근대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또 “20세기 한국에서 도시의 발달은 전국 도시의 ‘서울화’”라면서 “식민지 시기 경성의 변화는 해방 이후 현대 한국 도시 일반의 변화를 선행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인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이승만·박정희 ‘독재 표현’ 인색… 北 비판 서술은 2배 늘어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이승만·박정희 ‘독재 표현’ 인색… 北 비판 서술은 2배 늘어

    친일 희석·대한민국 정통성 강화 ‘친일파’ 용어 대신 ‘친일세력’ 표현‘박정희 비상사태 선포 불가피’ 묘사 교육부는 28일 국정 ‘올바른 역사교과서’ 검토본을 공개하면서 ‘균형’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학생들이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정부 수립’과 ‘건국절’ 사이의 논란에서 국정 교과서는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1948년 이후 현대사에 있어서는 종전 검인정 교과서에 비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술을 강화했다. 하지만 가장 관심이 집중됐던 현대사 부분에서 우편향 집필진이 다수 포함된 것을 비롯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평가에는 인색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가 이날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은 특히 현대사 부분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현대사는 모두 7개 단원으로 구성된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가장 마지막인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에 들어 있다. 250쪽 ‘대한민국 수립’ 소주제에는 ‘제헌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이승만과 이시영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선출되었고…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1948.8.15.)’라고 기술했다. 검인정 교과서에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묘사된 반면 남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표기된 내용을 ‘대한민국 수립‘과 ‘북한정권 수립’으로 고쳐 잡았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북한에 대한 비판은 검정교과서보다 분량이 배 이상으로 늘었고, 비판 강도도 세졌다. 북한의 3대 세습과 핵개발, 천안함 피격을 비롯한 북한의 실태와 도발 행위 등에 대한 서술이 강화됐다. 반면 친일 관련 서술은 줄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친일파’라는 용어 대신 ‘친일세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교육부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별도 소주제로 편성해 친일 부역자의 명단과 친일 부역 행위를 상세하게 서술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검정교과서에서 “친일파가 광복 후 청산되지 못하고 반공을 내세우면서 다시 등장해 군과 경찰,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고 한 것이 국정교과서에는 빠졌다. 다만 국정교과서는 비무장 독립운동을 다루는 ‘외교 독립·선전 활동의 전개’와 ‘일제에 맞선 여성운동가’를 소주제로 소개하며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인 남자현 열사 등을 싣는 등 다양하게 다뤘다는 평가도 나온다. ‘반공체제와 이승만의 장기집권’에서는 이승만 정부 때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고, 마지막 부분에 ‘이승만 정부의 독재 때문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었다’는 언급을 하는 데에 그쳤다.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 활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결과적으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검정 교과서 내용은 배제됐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기술이 늘었고,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표현들이 감소했다. 유신 체제의 경과와 긴급조치권, 국민투표 부의권, 국회해산권 등 막강한 권력이 부여됐다는 점을 서술했지만,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체제였다’ 정도로 평가에 인색했다. ‘1971년 12월 반공을 강조하며 정권을 유지하던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를 최우선시하며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265쪽)라면서 마치 ‘비상사태 선포가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앞서 검정교과서는 5·16 군사정변에 대해 ‘민주화를 지향한 4·19 혁명 정신이 사실상 부정되었다’(천재교과서)는 평가와 함께 군복을 입은 박정희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에서는 사진 자료로 서울 도심에 나타난 (쿠데타) 주도 세력의 탱크 모습을 실었다. 교육부는 앞서 검정교과서에 관해 “성과보다 부작용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교총 “유치원·교감 명칭, 유아학교·부교장으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일제의 잔재인 ‘유치원’과 ‘교감’ 명칭을 ‘유아학교’와 ‘부교장’으로 바꾸는 일을 ‘교총 10대 청원 과제’에 포함하고 교육부와 국회 등을 상대로 한 활동을 이어 가겠다고 21일 밝혔다. 유치원은 1897년 일본인들이 세운 부산유치원에서 처음 사용됐다. ‘어린이 정원’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일본식으로 만들었다. 교감은 학교 업무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이로, 초중등교육법에서는 교감을 학교의 경영책임자로 규정한다. 이렇게 학교 현장에 일제강점기 용어가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총은 앞서 지난달 4일 이를 포함한 10대 청원 과제를 제시했다. 성과급 차등 지급 철폐, 교장(감) 성과연봉제 도입 추진 철회, 교권 침해 처벌 강화 법제화, 교직·담임·보직교사 수당 현실화, 비교과교사 수당 신설 및 현실화, 교육용 전기료 인하, 농산어촌 학생 교육권 보호를 위한 소규모 학교 및 교육지원청 통폐합 중단 등이다. 하윤수 교총 회장은 “청원운동에 참여한 교사가 모두 20만 1072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은경의 유레카] 이제는 문·이과 구분 없애야

    [이은경의 유레카] 이제는 문·이과 구분 없애야

    추위와 함께 입시의 계절이 됐다. 이틀 뒤면 고3 학생들은 문과, 이과로 나뉘어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를 것이다. 사회계열, 과학계열 교과목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는 문·이과 구분의 폐해를 지적한 의견은 20여년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두 영역의 교과목 특성이 다르고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구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쪽 사람들은 이 제도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이고 좋게 볼 만한 점이 없다고 말한다. 양쪽 다 수긍할 만한 점이 있으나 최근 사회 변화를 찬찬히 살펴보면 득보다 실이 많아 보인다. 현재 사회 변화의 흐름을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다.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이 다른 산업과 결합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정의된다. 일반인들에게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로봇, 드론, 3D프린팅 같은 첨단 기술, 아니면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 관련된 것들 정도로 이해된다. 이런 신기술보다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초등학생의 65%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학자들의 전망이다. 어른들에게는 지금 종사하는 직업의 상당수가 없어진다는 뜻이고 아이들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직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래학자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어린이들에게 일상생활은 물론 복잡한 도전상황, 변화하는 환경에서 필요한 자질을 길러 주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중 지식 학습과 직접 연결되는 일상생활을 위한 핵심 기술은 문학, 수학, 과학, 정보통신기술, 재정, 문화 및 시민 분야의 문해 능력 등 지식을 습득하고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다. 기본 능력이므로 대학의 전공 이전 단계의 교육과 관련된다. 이런 교육은 사실 지금도 중요한데, 문·이과 구분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 고등학생들은 계열 선택을 할 때 고민한다. 사실 지적 능력이 문과, 이과로 딱 나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학생들은 지적 성향보다는 수학을 못한다, 암기를 싫어한다, 나중에 취업이 잘 된다, 입시에 유리하다 등의 이유로 계열을 선택한다. 문제는 계열을 선택하고 나면 이후의 학습에서 편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과 학생들은 서술형으로 답을 길게 쓰는 주관식 시험을 힘들어하고 문과 학생들은 수학을 몰라서 과학기술 문헌을 외계문서처럼 느낀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이미 계열 통합적인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경영학이나 경제학에서는 수학이 중요하다. 사회과학 중에는 통계분석이나 코딩이 필요한 전공이 있다. 공학 전공 학생들이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은 새롭지 않다. 글쓰기, 발표하기 같은 의사소통 기술은 모든 전공에서 필수가 되었다. 중학교까지의 교육도, 대학 이후의 교육도 통합적인 기초 학습 능력을 강조하는데 오직 입시 교육에서만 문과, 이과 구분이 철통같이 존재한다. 문과, 이과 구분을 계속하는 동안 이분법적으로 왜곡된 전공자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인문사회학 전공자는 과학기술 문맹 취급을 받고 과학기술 전공자는 사회문화에 무관심하거나 무비판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외국의 유명한 미래학자들 중에는 과학기술 전공자와 인문사회학 전공자가 고루 섞여 있다. ‘제3의 물결’을 쓴 앨빈 토플러는 영문학 전공의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구글이 최고의 미래학자로 선정한 토머스 프레이는 오랫동안 IBM의 엔지니어로 일했다. 주변의 연구자들을 돌아봐도 전형적인 이과형, 문과형 인간으로 딱 떨어지게 구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과, 이과 전공자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는 통합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예외로 만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줄 뿐이다. 사회와 교육은 창의성과 융합을 강조하면서 그에 방해가 되는 문과, 이과 구분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화가 필요하다.
  • 식민성에 갇힌 역사학, 해방은 언제 오나

    식민성에 갇힌 역사학, 해방은 언제 오나

    한국 역사학의 기원/신주백 지음/휴머니스트/448쪽/2만 3000원 한국 역사학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로 인한 식민성과 분절성, 그리고 분단성에서 자유롭지 않은 ‘구속된 학문’이라는 점에서다. 역사학이 여타 다른 학문보다 해명해야 할 부분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70년이 흘렀지만 극복되지 않는 식민사관 또한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식민주의를 근대의 일부로 여겨 우리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의 산물로 위치 짓는 시각부터 반대로 예외적인 역사 인식으로 간주하며 근대 역사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경향까지 상호 모순적 접근도 공존한다. 이 책은 19세기 말부터 1950년대까지의 ‘한국 역사학의 역사’를 제도와 주체, 역사 인식이라는 세 측면에서 세세히 관찰하며 그동안 축적된 역사학의 지형들을 더듬어 나간다. 저자는 우리 역사학의 식민성이 내재화되는 과정을 좇는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민우사) 등의 민족주의 역사학과 식민주의 역사학의 대립 구도를 짚어 내는 동시에 일제에 포섭되어 간 우리 역사학의 부끄러운 장면들을 되살려 낸다.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영구적 근본적인 사업은 조선인의 심리연구이자 역사적 연구로 저들의 민족정신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라는 발언대로 총독부는 한반도 강점 초기부터 조선 역사에 적극 개입해 왔다. 바로 식민지 지배담론을 장악하려는 ‘관제 사학’의 탄생이다. 조선의 역사 기술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 총독부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이끌 중심축으로 경성제국대학을 활용한다.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시업식.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지나문화와 조선문화가 일본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최적의 땅이 경성”이라며 “여러 방면에 걸쳐 조선연구를 행하여 동양문화연구의 권위가 되어 달라”고 훈시한다. 저자는 경성제국대학이 식민지 조선의 차별적 고등교육체계의 최고 정점에 위치하며 일본 도쿄제국대학이 소화하는 서구 학문체계와 내용을 조선인 사회에 유입시키는 창구 역할을 했다고 규정한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개강 당시 조선사 강좌 교수는 조선사학 최초의 박사였던 이마니시 류와 총독부 학무국 편찬과장을 지낸 오다 쇼고다. 두 사람 모두 조선사편찬위원회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식민주의 역사학 형성에 관여했다. 이마니시 류는 단군이 고려 중기에 이르러 개국시조로 가작됐다고 봤고, 오다 쇼고는 조선사에서 단군과 기자 항목 기술을 배제시켰다. 저자는 “1929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한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가 됐다”고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들여다볼 인물이 총독부의 조선사 집필에 참여하며 일제의 제도권 사학 주축이 된 이병도다. 그는 해방 이후 역사학계 주류로 떠오른 이른바 ‘서울대학파’의 학맥을 대표하는 ‘학문 권력’이 된다. 식민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 대학의 역사학이 ‘국사’(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등 3분과 체제로 고착된 건 명백히 일제에 의해 이식된 잔재다. 동북아시아 국가 중 역사를 3분과 체제로 나눈 건 한국과 일본뿐이다. 저자는 이를 제도로서의 ‘식민성 내재화’로 규정한다. 저자는 한국 역사학의 식민성이 해명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 분단을 꼽는다.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사학은 좌우 대결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사라졌다. 분단은 한국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념 간의 체제 갈등을 압축하는 말이자 ‘역사적 사실’과 인식을 지배하는 강력한 잣대로 작동했다. 저자는 “분단 체제는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학계를 문헌 고증사학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일원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는 역사학계 내부에 고착화된 식민성을 되돌아볼 기회마저 놓치게 했다”고 말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고려대의료원, 다문화가정 돕는 ‘로제타홀 센터’ 개소

    고려대의료원은 5일 안산병원을 시작으로 구로병원, 안암병원 등 3개 산하 병원에 ‘로제타홀 센터’를 연다고 밝혔다. 로제타홀 센터는 다문화가정에 특화된 의료, 통역, 직업체험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고대안산병원 로제타홀센터는 다문화가정을 위한 로제타 클리닉과 통역 전용창구,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한 순회진료 ‘꿈씨버스’ 등을 마련했다. 의료지원 이외에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직업체험프로그램, 다문화가정과 함께하는 바자회 및 행사지원, 성금전달 등을 펼친다. 의료원에 따르면 경기 안산시는 지난 7월 기준으로 인구 74만 명 중 등록된 외국인 거주자가 10%에 가까운 7만 5000여명에 달한다. 로제타홀은 1928년 고려대 의대 모태가 된 국내 최초 여성의학교육기관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한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남성에게 몸을 보일 수 없다는 유교사상의 잔재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진료와 여의사 양성에 힘썼다. 김효명 고려대의료원장은 “고려대의료원은 산업화시대에 의료소외지역이었던 구로공단, 반월공단에 병원을 차례로 건립며 힘없고 소외된 계층에 다가가 인술을 나누며 겨레의 아픔을 치유해 왔다”며 “홀 여사의 뜻을 이어 희망찬 내일을 위한 첫걸음을 안산에서 시작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국정감사 중 철도의 날 개정 제안

    29일 대전 철도사옥에서 진행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코레일과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9월 18일인 철도의 날을 개정하자는 제안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국토교통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조정식의원은 이날 의원들의 주 질문이 끝난 뒤 의시진행 발언을 요청해 철도의 날 개정 필요성을 제안했다. 조 위원장은 “현 철도의 날은 1899년 한반도 침탈과 만주 수탈을 위해 건설한 경인선 개통일”이라며 “고종실록(31권)에는 이보다 5년 앞선 1894년 6월 28일 공무아문(현 국토교통부)에 철도국을 창설하는 등 철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행 철도의 날은 일제 잔재로 우리 스스로 자주적 역사와 노력을 외면하는 것으로 6월 28일을 철도 시작일로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철도의 날 개정을 지지했던 강영일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은 “공사와 공단·철도협회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협력,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박민우 국토교통부 철도국장도 “정부기념일은 행정자치부 소관이다”면서도 “국회에서 결의해주면 행자부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윤용로 시민의 단상] 국치일을 다시 생각한다

    [윤용로 시민의 단상] 국치일을 다시 생각한다

    러시아를 방문해 식당 등에 가게 되면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서비스가 좀 시원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 1917년이니 지금으로부터 채 100년이 되지 않는 시기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이전의 수세기에 걸친 세월도 러시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텐데 왜 유독 최근 100년이 현재의 행태에 그렇게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하는 것이 늘 의문이었다. 최근 몇몇 여자 연예인들이 함께 부른 ‘샷업’이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었는데 여기서 의문의 단초가 조금은 풀렸다. 샷업이라는 영어 제목을 보고 최신 트렌드의 노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빳데리가 다 돼서 전화를 못 받았어”라는 표현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샷업’이라는 영어를 썼다면 ‘배터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텐데 왜 ‘빳데리’라고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제작자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는 어휘를 썼다고 추측해 본다. 이 노래를 부른 분들은 모두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못한 해방 이후 출생들인데도 그런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지배의 잔재는 이처럼 아직도 우리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제 이전까지의 모든 역사를 넘어 20세기 초 35년의 경험이 그 두 배가 넘는 71년이 지나도록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가 해 주신 음식으로부터 길든 입맛이 평생을 가듯이 왕정국가 해체 후 근대화 초기에 받은 영향이기에 오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은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매우 치밀하게 우리의 모든 분야를 바꾸어 놓았다. 그간 일제 청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아직도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잔재 중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작업도 이제는 더 정교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빚을 지고 있는 애국지사들의 후손에 대해 체계적인 보살핌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일제 청산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유사 이래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인 것이다. 최근 미사일 발사와 핵 진전으로 도발로 치닫고 있는 북한과 사드를 계기로 긴장 관계를 보이는 중국, 늘 지정학적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러시아 등 동북아의 엄중한 정세는 많은 전문가가 열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구한말과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힘이 없어 어디에도 기대기 어려웠던 백 년 전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요구할 것은 당당히 요구하되 주변의 지정학적 변화를 고려하면서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이성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과거는 잊지 않되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명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최근까지 엔저 현상에 힘입은 바도 많지만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여행을 가고 일본의 음식, 풍습, 예술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다. 또 많은 일본인도 한류 등으로 우리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특히 미래세대인 양국의 젊은이들이 우호적·협력적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교환 프로그램 등 많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주말 한·일 재무장관회의가 오랜만에 열린 것도 잘된 일이다. 오늘 우리가 106년 전 나라를 잃었던 국치일이 다시 돌아왔다. 요즘은 국치일이 과거처럼 잘 기억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나라를 찾은 광복절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잃은 국치일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 한명기 교수는 조선왕조가 경험했던 모든 전쟁은 조선의 잘못이 아니라 ‘세계질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 선진국을 일구었다고 우리에게 고마워할 수 있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환은행장
  •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서울 명동(明洞)과 금호동(湖洞), 인천 송도(松島) 등 일제의 잔재가 서려 있는 지명을 바꿔야 한다.’ 14일 우리 역사와 문화계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려고 만든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해방 이후 범정부적 차원의 체계적 노력 없이 지방자치단체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지명을 바로잡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우리의 국호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서울 ‘한성’을 ‘경성’으로,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격하시켰다.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바꿔 놓더니 산봉우리와 하천의 이름에서 ‘크다’는 의미가 담긴 ‘대’(大)자, ‘한’(韓)자가 들어가는 명칭은 모조리 없애거나 바꿨다. 여기에 1914년 10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우리 민족이 자자손손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의미 왜곡’ 파주 문산 한자 바로잡아 일제의 지명 변경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해당 지역의 지형이나 물, 산 등 특징이 담긴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아무렇게나 바꾼 사례가 가장 흔하다. 서울 금호동의 경우가 그렇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또는 ’무수막’으로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湖洞)으로 바뀌었다. ‘새마을’로 불리던 경기 파주 금촌(村)은 일본이 경의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쇠마을’로 잘못 알아듣고 일본식 한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 온다. 파주 교하의 ‘새터마을’, ‘괸돌’ 등은 그 일대에 지석묘가 많은 점을 들어 한성과 가까운 쪽은 상지석리(上支石里), 먼 쪽 마을은 하지석리(下支石里)로 불렀다. 높은 산봉우리에 주로 붙던 ‘왕’(王)자에 일본을 뜻하는 ‘일’(日)자를 더해 ‘왕’(旺)으로 바꿨듯, 특정 한자에 부정적 의미의 부수를 더해 완전히 다른 뜻의 지명으로 왜곡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파주 문산이 대표적이다. 본래 지명은 ‘문산’(文山)이었으나 1910년 전후부터 ‘문산’(汶山)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여기서 ‘문’(汶)자는 ‘더럽다’, ‘불결하다’라는 뜻이 있어 1990년대 심각한 홍수를 겪었던 문산 주민들이 삼수변이 없는 ‘문’(文)자로 바꾸자는 운동을 벌였다. 파주시는 2014년 6월 지명위원회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문산읍과 문산리의 한자 표기를 ‘汶山’에서 ‘文山’으로 바로잡았다. 한글학회가 1966년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은 서울 편에서 원남동(苑南洞)을 “창경원 남쪽에 있으므로 원남동이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학설 및 주장도 있지만 ‘본래 순라동이었으나 1911년 순종황제가 머물던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바꾸고서, 창경궁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일제가 개명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지금의 서울 옥인동, 인사동 등 성격이 서로 다른 2개 이상의 마을 이름을 제멋대로 합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은 “청운동은 청풍계(창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차용해 만들었다. 또 옥인동도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 지명”이라면서 “일제가 4개 지명을 2개로 줄이면서 의미가 축소되고 고유 의미가 퇴색했다”고 지적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洞)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토박이 지명이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한 경우가 많다”면서 “원남동처럼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끊고 모욕을 주기 위해 개명했거나, 땅이름 속 우리의 얼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합성 지명화한 곳은 마땅히 본래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자치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역별 특색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부정적 이미지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지명 변경도 그중 하나다. 충남 홍성군은 ‘홍주(洪州) 지명 되찾기 범군민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1000년 가까이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제가 강제 개명한 만큼 주민들의 찬반 의견을 물어 2018년 시 승격을 앞두고 홍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다. 반면 일제 잔재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명동(明洞)과 송도(松島) 등처럼 일부 지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고 그 자체가 상품성을 갖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또 일부 지역 주민들도 지명이 갖고 있는 ‘가치’ 때문에 반대하기도 한다.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인 명동은 조선 시대에 명례동(明禮洞)이나 명례방으로 불렸다. 그런데 일제가 1943년 6월 명치정(明治町·메이지초)으로 바꿨다. 서울의 한복판, 행정구역의 중심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일왕을 기리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후 명치정에서 ‘치’(治) 한 글자만 빠진 채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 지금의 명동이다. 또 인천을 대표하는 국제 신도시인 ‘송도’는 일본 전함 송도호, 일본명 마쓰시마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섬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송도’라는 이름의 섬이 10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원남동 역시 한때 지명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고, 악의적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 “日 문화침탈 계속된다는 방증” 부산 동구 범일동에 ‘조방’(朝紡)이라는 지역이 있다. 1917년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군수공장(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조선방직은 1968년 사라졌으나 줄임말이 새로운 도로명과 각종 상호, 심지어 지자체가 지원하고 지역 경제단체가 추진하는 거리축제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아들 상국(56)씨가 “식민지 노동 약탈의 상징이었던 조선방직의 줄임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호소하며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조방 앞 일원의 화려했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의도로 ‘조방 이끌리네 거리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명은 지역의 특성, 자연의 이치, 역사적 사실 등 다양한 사연 및 유래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광복 70년이 넘었지만 아직 우리 주변엔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왜곡된 수많은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일본의 문화 침탈이 계속되고 있다는 방증이며, 정부 주도의 전국적인 실태조사와 동시에 지명 회복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 원장 역시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 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 전쟁’”이라면서 “하루빨리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저 배우 여기도 나와?

    저 배우 여기도 나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영화 ‘덕혜옹주’에는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의 차남이자 덕혜옹주의 조카인 이우 왕자가 등장한다. 실존 인물이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은데 영화에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첨가된 영친왕 상하이 망명 작전을 추진한다. 그런데 이우 왕자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관객들은 화들짝 놀란다. 고수가 연기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항일 의식이 충만했고, 미남으로 알려진 이우 역에 대한 캐스팅을 고심하던 허진호 감독이 그 시대 의상이 잘 어울리면서 왕자라는 느낌이 묻어나는 배우로 고수를 떠올려 조심스럽게 제안했는데 작품성에 반한 고수가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극장가에 특별 출연 경쟁이 뜨겁다. 특별 출연 보는 재미에 영화 보러 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영화 마케팅이나 흥행에 보탬이 된다는 뜻이다. 과거엔 스크린을 언뜻 스치며 잔재미를 주는 식이었다면 최근 들어선 짧은 분량에도 주연 못지않은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유명 인사-배우가 아니더라도-가 짧게 얼굴을 비치는 카메오, 감독 등과의 친분으로 나오는 우정 출연, 특정 장면이나 캐릭터에 무게를 싣기 위해 유명 배우가 나서는 특별 출연으로 구분 짓던 개념도 모호해졌다. 과거와는 달리 특별 출연도 경우에 따라 ‘노개런티’에 소정의 사례비만 주어지기도 한다. ‘인천상륙작전’도 초호화 특별 출연진을 자랑한다. 박성웅이 북한군 장교로 깜짝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김선아(켈로 부대원), 추성훈(북한군 병사), 김영애(장학수 모친), 이원종(김일성) 등이 바통을 이어 가며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관객들은 처음엔 긴가민가하다가 엔딩 크레디트에서 눈썰미를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올해 첫 1000만 영화로 등록한 ‘부산행’이 그런 경우다. 심은경이 영화의 주무대인 KTX를 아비규환으로 만드는 첫 감염자로 나와 강력한 훅을 날린다.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서울역’에서 가출 소녀의 목소리 연기를 한 인연으로 특별 출연이 성사됐다. 극적 효과를 위해 개봉 때까지 꼭꼭 감춰 두는 경우도 있다. ‘국가대표 2’의 박소담이 그렇다.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출신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 수애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북에 남겨 놓고 온 여동생으로 나온다. 언론 시사회 당시 스포일러를 이유로 박소담의 존재를 알리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있었을 정도. 최종 크레디트에선 특별 출연이 아닌 ‘조연’으로 격상(?) 됐다. 조진웅이 1편 김성주 아나운서에 이어 이번엔 배성재 아나운서와 호흡을 맞춰 해설자로 나오는 점도 깨알 재미다. ‘터널’에는 김해숙이 국민안전처 장관으로,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 깜짝 출연한다. 정점은 다음달 7일 개봉하는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이 찍는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과 일본 경찰의 암투를 그린 작품이다. 송강호, 공유 투톱인데 월드스타 이병헌이 베일에 가려진 의열단장 역을 맡아 깜짝 출연한다는 사실이 최근 공개됐다. ‘덕혜옹주’를 배급한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임성규 홍보팀장은 “과거에는 이름값에 한참 못 미치는 짧은 분량 탓에 손사래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에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기회이면서 주연 못지않은 호응을 얻어 이슈가 되는 사례가 잇따라 특별 출연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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